제 어머니 즉 아내와 나는 97년에 결혼 50주년되는 금혼식을 했었다. 이제 결혼한지 52년이 된다. 나의 아내는 이제 좀 약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하다.

우리 소유의 집을 지니고 산다. 집은 은행에서 융자를 얻어 내가 직접 조금씩 조금씩 지었다. 은행융자는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 내주고 짓는 현장을 검사하고 또 내주고 하는 식이었다. 집을 다 짓고 나면 즉시 내 월급에서 융자를 강제로 갚아나가게 되어있다. 다 갚아야 집의 명의가 내 앞으로 이전되었다.

같은 대지에 집을 두 채 지었는데 큰집은 방이 세 개짜리로 세를 주고 나는 방이 두 개인 작은 집에 살고 있다. 뭐 우리가 잘사는 것은 아니다. 집세에 의지해서 사니까 어떨 때는 세든 사람이 돈이 없다고 집세를 못 낸다고 하면 기다려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 모두 다 다레살람에서 산다. 같이 사는 것은 아니고 다 따로 산다.

옛날에는 시골에서 살면 누구나 밭과 농기구가 있어야 하고 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가끔 사냥을 하기도 했다. 나이 든 사람들과 함께 짐승들이 많이 있는 강가로 가서 그 중 한 놈을 쫓아다니다가 잡는다. 주로 작은 짐승이었다. 큰 짐승은 총이 있어야 한다.
짐승을 잡으면 숲 속에서 다 처리를 해서 집으로 가져온다. 항상 저녁에 사냥을 하러 갔다. 큰놈을 잡으면 동네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고 작은 놈을 잡으면 가족끼리 나누어 먹는다.

또 어떨때는 짐승이 와서 농작물을 짓밟아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정부에 보고를 하면 정부에서 사람을 보내 짐승을 잡거나 쫓아버렸다. 코끼리나 그런 큰 짐승이다. 우리 고향에는 코끼리가 많이 있었다. 그놈들은 근처의 산과 숲에 살고 있다. 숲이 얼마나 넓은지 6시간을 걸어가도 아무도 없고 졍글 뿐이다. 나무가 한없이 많고 물도 흔하다. 그쪽은 물이 귀한 일은 없었다. 큰 산이 있어서 물이 항상 흐르기 때문이다. 또 20분만 가면 강이 있었다. 송게아쪽에는 강도 많다. 그러나 싱쉐아는 그렇지가 않아서 타를 타고 4시간을 가도 강을 볼 수가 없다.

내가 어렸을 때는 곧잘 아팠다. 선교회에 수녀가 운영하는 진료소가 있어서 거기에 가면 진찰을 하고 약을 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일터에 따로 변소가 없이 사람들은 그냥 숲에서 일을 봤는데 이런 비 위생적인 일이 질병의 한 요인이 되었다. 또 우리는 신발이라는 것이 없어서 보통 신을 안신고 일을 했는데 이것 역시 질병의 원인이었다. 근래에 들어서 사람들이 신발을 신었지만 전에는 신을 안신었다.

선교회는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가 아침에 아무것도 안먹고 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침에는 티와 빵 한조각을 주었다. 또 오후에는 오렌지 쥬스를 주어서 나는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그리고 심하게 앓으면 그 클리닉에 무료로 입원하게 해주었다.

그 시절에는 병원에서 치료받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 왜그러냐면 우리는 우리 나름의 좋은 민속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속약은 상처에 바르는 것도 있고 잎을 끊여서 마시는 것도 있다. 고향 사람들은 아주 여러 가지 종류의 민속약을 알고 있었다. 지금도 마을에서 다른 치료를 받지 못할 때는 민속약을 쓴다.

우리 관습으로 사람이 죽으면 우선 이웃에게 알린다. 그러면 아침에 이웃이 와서 장례준비를 한다. 널리 알려진 사람은 물론 문상오는 사람도 많다. 문상객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는데 이 음식은 모두 이웃이나 친척이 가져온 것이다. 상을 당한 가족은 음식을 안한다. 그리고 모든 친척들은 사흘동안 상을 당한 집에서 지낸다. 그때 누구나 머리를 완전히 깎는데 이것은 조의를 표하기 위해서이다. 젊은 여자들은 머리 한쪽을 조금만 깎는 수도 있다. 사흘 후 죽은 사람을 묻는다. 요새는 약간 변해서 40일 후나 석달, 넉달 후 죽은 사람을 위해서 음식을 장만해서 사람들을 다 불러 추도식을 지내기도 한다. 기독교인이면 교회로 가서 기도를 드리고 묻고 이슬람이면 모스크로 가서 기도하고 묻고 어떨때는 그냥 집에서 기도를 드리고 묻는다. 무슬림은 관이 없이 장사지낸다.

명절은 대부분이 기독교나 이슬람 명절이고 최근에 정부에서 주도하는 사바사바 농민의 날이 있다.

탄자니아가 독립될 때 나는 몸바사에 있었다. 나는 1959년부터 65년까지 몸바사에 있었다.
독립은 물론 좋은일이다. 많은 사람이 원했고 우리자신이 우리일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대 대통령인 니예레레는 탄자니아가 하나의 국가가 되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그 전에는 종족 단위로 생각이 되었는데 지금은 한 나라가 된 것이다. 또 전에는 이슬람이 기독교인과 결혼하는 것이 아주 어려웠는데 독립 후 쉬워졌다. 나와 아내와 내 아이들은 모두 기독교인이다. 탄자니아의 강점을 들라면 무엇보다 평화스러운 나라라는 점이다. 다른 사람을 간섭하고 싸우기를 싫어한다.

나는 퇴직 후 새 회사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다른사람과 합작해가지고 허가도 내고 사람도 다 구했는데 경기가 좋지않아서 그만두었다. 그래서 요새는 그저 이런저런 일로 소일하고 지낸다. 또 가게도 열려고 했는데 경쟁이 심해서 그만두었다. 다른사람이 파는 같은 종목을 팔면 안된다.

나는 고향인 송게아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나의 자식들이 모두 다레살람에 살기 때문에 내가 송게아로 가면 그 애들한테 곤란하다. 애들이 모두 송게아까지 우리를 보러 와야하기 때문이다. 다레살람에서는 주말에 쉽게 우리 집을 올 수 있다. 어떨때는 주말마다 어떨때는 2주에 한번 집에 온다. 아이들 중 둘은 집 가까이 산다. 셋은 좀 멀리 살아서 자주 못온다.

물론 송게아에 가서 살고 싶기는 하지만 추운 기후가 문제이다. 다레살람에 오래살아 여기 기후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송게아로 가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해마다 송게아에 가서 얼마동안 지낸다. 작년에도 갔다.

내가 살아온 동안 이 나라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것은 경제적인 변화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위한 변화가 아니고 반대로인 것 같다. 월급은 많아졌지만 돈가치는 떨어졌다. 옛날에는 월급은 얼마 안 되었으나 많은 것을 살 수 있었다.
또 사람들도 많이 달라졌다. 지금 사람들은 옛날같지가 않다. 아주 몇 명만이 괜찮고 대부분 다 변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도시 뿐만 아니라 시골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차라리 도시에 이대로 있는 것이 낫다. 시골 사람들이 다 변해버려서. 왜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변화는 있어야겠지만 좋은 쪽 보다는 나쁜쪽이 더 많다. 아마 시골같은데도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섞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나름의 규율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이것은 좋지 않다’ 하면 좋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는 규범이 있었다. 또 마을에 장이 있어서 그곳에 엄격히 규율을 세웠다. 지금은 사람들이 학교를 가기는 하는데 대부분은 초등학교만 나오기 때문에 행동 규범이 없다. 또 장래의 계획을 할 줄 모른다.

요새 심각한 문제로는 시골에 가면 젊은이가 없는 점이다. 시골에는 나이든 사람밖에 없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가고 없다. 젊은이들은 편한 삶과 텔레비젼이니 댄싱이니 하는 향락을 찾아 도시로 몰려든다. 그래서 낮에는 행상을 하면서 밤에는 술을 마시고 돈을 쓰는 것이다. 그래가지고는 전연 발전이 없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한 희망이 없다. 독일사람도 전쟁후에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에 지금 발전을 한 것이다.

세상이 변하는 만큼 즉 경제적인 사정이 변해감에 따라 사람들도 변해야 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만큼 빨리 변하지 않는 데에 있다. 어떤 부족은 재빨리 적응을 했지만 대부분의 부족은 낙후되어 있다. 우리도 세계의 다른 발전된 나라 사람들처럼 변해야 한다. 우리가 이대로 계속 있다면 사정은 아주 나빠질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해야하고 가령 행상은 거기서 그칠 것이 아니라 더 큰 가게로 키워나갈 생각을 해야한다.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열심히 일하는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 나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장래성이 없고 특히 남을 속이는 사람을 싫어한다.

나는 집에 텔레비젼이 없지만 나의 딸집에 있다. 우리 집에는 라디오가 있다. 나는 주로 독일방송, BBC, voice of America 등의 뉴스를 듣는다.

건강은 대체로 좋은 편이나 신장에 한번 이상이 있었다. 내가 젊었을 때 특히 몸바사에 있었을 때 독한 술을 마셨는데 그때 신장에 이상이 생겨서 병원에 입원했었다. 그 때 이후 맥주 이외의 독한 술은 안마신다. 지금 단 한가지 문제라면 눈이 잘 안보이는 것이다. 글씨를 읽을 수가 없다. 안경을 하려고 했지만 의사가 도움이 안된다고 해서 그만두었다. 아내도 역시 눈에 문제가 있다. 하지만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다가 더 나빠졌다.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이다.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속기가 쉽다. 요새 세상은 속을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신앙으로 인해, 기독교인이 된 것에 행복을 느낀다. 기독교로 인해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다.    

또 나의 아이들이 다 올바른 사람이 되고 각자 다 자립한 된 것에 대해 몹시 행복을 느낀다. 아이들은 늘 부모의 말을 들었고 물론 작은 일에 의견이 다른 수는 있지만 지금도 거의 우리의 말을 따른다. 가령 나의 큰 딸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올 때 차를 가져왔다. 그래서 내가 차는 돈만 쓰는 것이지만 집을 지으면 남한테 세를 줄 수도 있으니까 차를 팔고 집을 지으라고 했더니 내 말을 들었다. 그리고 공부를 시킬 때는 쓸모있는 것을 즉 나와서 취직이 잘 될 수 있는 것을 시켜야 한다. 나의 딸도 그랬다. 무엇을 할까 하길래 이 다음 결혼하고 나서도 일할 수 있는 것을 공부하라고 했다. 그래서 은행 일을 택했다. 은행은 어디나 있으니까.

그 애들은 또 부모의 습관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가령 나와 나의 아내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아이들도 모두 흡연을 하지 않는다. 나는 몸바사에 있을 때 공짜로 담배가 생겨 한가치 피워봤는데 이상해서 그 뒤로 전연 손을 안댔다. 나의 막내도 지금 호텔의 매니져로 있는데 담배를 안피운다.

또 나의 아내도 결혼한 이래 변치않고 같이 있어온 것도 행복한 일이다. 나의 아내는 내가 틀렸을 때는 늘 나에게 충고를 한다. 아이들도 늘 제 엄마한테 상의를 하곤했다.    

내가 제일 힘들었던 것은 몸바사에 있었을 때 거의 24시간을 일해야 했던 것이다. 유럽인들은 그저 말린다 호텔에서 놀다가 전화해서 물어보기만 했다.  

나의 누이는 킬로사에서 살다 그의 남편이 죽은 후 송게아로 돌아와서 지낸다. 지금 거의 팔십이 다 됐는데 건강해서 혼자 일을 다한다. 또 한 누이도 그의 남편이 죽었는데 송게아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나의 남동생은 송게아에서 결혼해 농사짓고 살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만 나오고 말았다.

나는 나의 구역에서 반장이다. 열 집을 묶어서 그중에서 반장을 뽑는데 내가 벌써 세 텀째 하고 있다. 한 텀이 5년이다. 사람들이  어떤 분쟁이나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을때 법원으로 가기 전에 나에게로 와서 상의를 한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씩 각자의 집에서 돌아가면서 송게아 출신들이 모인다.

(99년 7월 2일 다레살람 민속박물관)
Posted by 올아프리카 africa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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