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남아공, 남부아프리카 이야기

케이프 타운(Cape Town)과 희망봉 이야기

africa club 2012. 7. 17. 22:14

 

 

케이프 타운(Cape Town)과 희망봉 이야기

 

 

 

희망봉(Cape Town)은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땅 남아공화국이 백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88년 바돌로뮤 디아즈(Bartholomew Diaz) 휘하의 포르투갈 탐험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디아즈는 1488년 희망봉을 크게 돌아 알 수 없는 바람에 이끌려 현재의 모슬 베이(Mossel Bay)에 최초로 발을 디뎠으며 식수를 구하는 과정에서 코이코이족과 조우하였다. 1488년 한여름에 그레이트 피쉬(Great Fish)강에 도달했으며 돌아오는 과정에서 최초로 케이프를 보았다. 디아즈는 이 지역을 Tormentoso(The Cape of Storms)라고 이름 지었다. 후에 포루투칼 왕 João는 Boa Esperança(Good Hope)로 이름지었다. 즉 디아즈는 이곳이 아프리카의 끝이라고 확신하고 이곳을 돌면 인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9년 후인 1497년에 유명한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케이프를 바로 돌아 현재의 나탈(Natal, 그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성탄절이었고 다 가마가 이름지었다)까지 이르렀고 동아프리카의 몸바사(Mombasa)와 말린디(Malindi)를  거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 한 후 꼭 1년만에 포루투칼로 돌아왔다. 1500년 Pedro Cabral은 부라질(Brazil)에 기착한 후 케이프를 돌아 동아프리카를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확고히 열고 포루투칼의 독점시대를 열었다.

 

 

1647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The Dutch East India Company)소속의 범선 하를렘(Haarlem)호가 테이블 만에서 난파되어 선원들이 약 6개월 동안 원주민들과 교류하며 생존하다가 1649년 본국에 귀환한 후 이곳이 기항소의 설치 및 유럽인들의 정착에 최적지라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러한 보고에 따라 이 지역에 백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1652년 동인도회사가 인도 항로의 중간 정박 기지(기항지 ; revictualling station) 건설을 목적으로,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k)가 이끄는 3척의 배와, 130명의 남녀로 구성된 탐험대가 1652년 6월 4일 테이블만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모두 이 회사의 피고용인들이었으나 차츰 회사로부터 독립해 목축과 영농으로 경제력을 키워 나갔다. 이들은 지금의 케이프 타운(Cape Town)근처에 백인 사회를 건설했다.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의 해안 지대에는 주로 두 부족의 흑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코이코이(Khoikhoi) 또는 호텐토트(Hotentot)라 불린 부족은 주로 목축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부쉬맨(Bushman)으로 불리는 산(san)족은 수렵과 채집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초기에 백인들과 흑인들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에서 물물교환을 했으나 차츰 목축지를 놓고 대립하는 관계로 변해 갔다. 특히 보어(Boer)인들로 불린 네덜란드계 백인사회가 점점 더 내륙으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이주민과 원주민사이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희망봉이 위치한 케이프 타운은 지중해성 기후로 아주 쾌적한 기후를 가지고 있으나 겨울에는 강우량이 많고 특히 폭풍우가 심하다. 케이프 타운을 끼고 있는 케이프 반도의 해안가의 나무들은 항상 겨울 폭풍우로 아름드리 나무들도 항상 비스듬히 누워있다. 겨울에 폭풍우가 칠 때는 사람도 실려나갈 정도이다. 항상 두얼굴의 모습이고나 할까.

 

 

 


타이타닉호 : 영국 화이트스타사(社)가 건조한 대형 호화여객선.

 

톤수 46,328t. 길이 259.08m. 너비 28.19m. 깊이 19.66m. 1911년에 제작되었다. 주기(主機)는 터빈의 삼연성기기(三連成汽機)의 조립으로 된 기관이다. 삼축선(三軸船)으로 속력은 22kn이며, 당시에는 4만t급 이상의 객선의 개척선이었다. 영국 사우샘프턴항(港)에서 뉴욕항으로 향하는 처녀항해 중,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부류빙산(浮流氷山)과 충돌하여 2시간 40분 만에 침몰하였다. 이 사고로 승선자 2,208명 중 1,513명의 희생자를 내어 세계를 놀라게 한 사상 최대의 해난사고였다. 이 사고를 계기로 배의 구조 ․구명설비 ․무선설비 ․유빙감시(流氷監視)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해상의 인명안전에 관한 국제회의가 소집되어, 해난사고방지를 위한 국제적인 결정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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