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소말리아

africa club 2003. 2. 3. 11:00
소말리아 Somali Democratic Republic

소말리아의 정식 명칭은  AlJumhouriya As-Somaliya  Al-Domocradia 라고 한다. 아프리카의 대륙 동쪽 끝의  공화국으로 ,<혼(突角)>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동쪽과 남동쪽은  인도양에 면하고, 북쪽은  아든만을 사이에  두고 남(南)예멘과 마주하며, 북서쪽 끝은 지부티,  서쪽은 에티오피아·케냐와 각각 국경을 접하고  이다.  면적은 637,657㎢   로 한반도의  3배이다. 인구는  약 8,505,000명(95년)이고, 그 중 약 1,500,000명이 수도  모가디슈 살고 이다. 인구밀도는 13명/㎢라고 한다.<최근에는  내전으로 인한  인접국가로의 난민유출, 약 30만  명의 기아(飢餓)로 인한  사망 등을 원인으로  인구가 감소했을 것이라고 추정되어진다.> 중요시되는 하르게이사,베르베라,메르카,키세마이유등이 있다.적도지대에 있으나 연 강우량이 100∼610㎜로  강수량이 적으며, 해안지방은 사막기후이고 내륙은 스텝기후이다. 국교는 이슬람교로서 수니파 이다.  종족은 소말리족이 98.5%이고, 이태리, 아랍계, 인디안 이 1.5%이다. 공용어는 아라비아어이고, 통화는 소말리아 실링이다. ( 1$=2,629.13 SS)  


역 사

고대사에서 쿠슈 와 이디오피아의 역 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10세기경부터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교도가 들어와 토후국(土侯國)을 해안 각지에 건설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아든 만 연안은 오스만 투르크 에게 지배되고, 인도양 연안은 마스카트 오만의 영토가  되었다가 그 뒤에는 잔지바르 왕국의 북단부가 되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는 아든 만  연안에 기지를 확보하였고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뒤에는  이탈리아도 식민지를 얻기  위해 내항하였다. 1886년에 영국은  아든 만 연안을  영국령 소말릴란드로 만들고 내륙은 이디오피아에 편입시켰다. 이탈리아는 89년에 이디오피아 정복계획의 기지로 인도양연안에 보호령을 구축하였다. 1900년경부터 21년까지 영국령·이탈리아령의 두 소말릴란드와 이디오피아에  걸쳐 소말리족의 이슬람적  반민지 저항투쟁이 벌어져다. 23년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소말릴란드 통일과 확대를 꾀하여 영국으로부터 케냐의 북동쪽 끝 일부를 할양(割讓)받았다.

36년에 이탈리아가 이티오피아를 침략한 뒤 소말리아도 광대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편입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영국령 소말리란드도 한때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았으나, 영국군의 반격으로 두 소말릴란드 가 영국군 군정 하에 놓이게 되어다. 전쟁 후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민정에 복귀되고(1948), 50년에 구(舊)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UN의 신탁통치(이탈리아가  통치)하에 놓여다. 60년 6월26일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독립되고, 이어서 같은 해 7월  1일에 10년간의 UN 통치기간이  끝난 구(舊)이탈리아령과 합병, 소말리아  공화국이라는 통일국가가 수립되었다. 독립 후 프랑스령 소말릴란드(현재의 지부티), 이디오피아 동부, 케냐 북동부에 산재한  소말리족의 거주지까지 합병시키려고 하는  <대(大)소말리아주의>가  정부의 외교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이디오피아 동부에 대해서는 특히 국경의  새로운 확정과 그에 따른  영토의 반환을 강경하게 요구하고, 64년 초부터 양국간에 교전이 있었다. 67년말  모하메드 하지 이브라힘 에가르  내각이 성립되면서 이디오피아·케냐  등과의 관계가 한때 개선되어 69년 3월의 총선거에서 에가르 수상의 <소말리청년동맹>이 다수의 국민의회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그해 10월 셰르마르케  대통령이 암살되고 이어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 장군의  군사정권이 수립되어 최고혁명평의회(最高革命評議會)가  실권을 장악,  국명을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으로 개정하였다.        


정치 및 외교

군사정권이 수립된 후 바레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976년 7월 최고혁명평의회를 해산시킨 다음, 새로이 최고회의와 소말리 사회주의 혁명당을 창립하였다. 바레 정권은 소련에 대한 의존도를 강화하는 외교정책을 채택,  74년 7월에는 소련과 우호협력조약을  맺고 경제·기술·군사 분야 등에  원조를 받기로 하였다. 그러나 77년 7월 바레  대통령의 지부티 방문을 전후하여 이디오피아 동부 오가덴 지방의 서 소말리아 해방전선에 소말리아인이  참가하게 되었다. 한편, 74년 9월  하이레 셀라시에 황제를 폐위시킨  이디오피아는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고 소련의 원조에  의존하기에 이르렀다. 77년 10월 이디오피아로부터  국교단절을 통고받았으며  서 소말리아  해방전선과 이디오피아 군의 전쟁이 격화되었다.

그해 11월 소련의 무기원조가 중단되면서  우호협력조약도 폐기되어 이디오피아 령내에 주둔해 있던 소말리아군은 78년 3월을 기하여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대에 들어와  친미(親美)·친중공으로 선회하였으며, 67년  북한과 수교하였고, 87년에는  우리나라와도 수교하였다.



현재의 상황

1984년부터 1990년까지 독재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바레 '를  1991년에 축출하면서 독재정권이 무너지게 되었다. 하지만, 독재정권 시절에  축적되어있던 부정부패나 경제적 침체등으로 각  지역에서 반란군이 일어나면서  내전상태에 빠지게 되어다. 세계 각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내전이 극으로 치닫자 민간인 들의 비참(悲慘)한 생활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따라서 UN은 파벌간의 무장해제, 휴전이행감시, 인도적 구호활동  및 난민송환협조, 파벌간의 정치화합과 국가재건활동 지원 등을 목적으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였다. 우리 나라도 소말리아에 '상록수'부대라는 군사를 지원한 적이 있다.



경제·산업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의  하나이며, 목축과 농경을 주산업으로 하는  자급경제(自給經濟)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1973∼75년에는 한발에 의한 큰 피해를 받았다.  84년의 수출 총액은 12억  7,380만 소말리아 실링인데, 그중 가축이 59%, 바나나가 8%,  피혁 8%의 비율이다. 수출 대상 국으로는 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수입국으로는 이탈리아가 그 수위를 차지한다. 광물자원은 UN의  협력으로 탐사되어 68년에 우라늄 광(鑛)이  발견되었다. 국토의  남북을 연결하는 새로운  간선도로 건설은 중공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밖의 주요한 원조는 소련을  대신 하여 아랍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89년도의 대한국(對韓國) 수입액은 157만 달러이다.



사회·문화

이탈리아령과 영국령이 통합된 나라이므로 사회적·문화적인 통합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으나, 소말리족의 전통적인 사회구조와 이슬람 문화가 통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탈리아·미국·이집트 등의 나라에서  각종 교육원조를 받고 있으나 아직 국민 대다수가  문맹자이고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보급도  늦어지고 있다. 그러나 몇 년 전 문맹률이  60% 였지만 최근에는 24%로 문맹률이 줄고 있다. 도시의 발달도 잘  되지 않고, 특히 소말리아 령  내에는 철도가 없으며 수도 에서 남북으로 통하는 600여㎞의 도로가 있을 뿐이다.



자연

아든만 안의 해안선과 병행하여 산맥 이 뻗어 있으며(최고점  2,407m) 그 북쪽은 사막에 가까운  건조지대이고, 남쪽은  이디오피아의 고원지대(평균  약 1,000m)에서 완만한 경사로 인도양 연안의 평야까지 사바나성 의 사면이  연속된다. 하천은 웨베시벨리강·주바강 등이 인  이디오피아의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흐르면서  인도양으로 흘러들어 농경에  적합한 지역은 인도양 연안의 하천유역뿐이다.

---소말리아 공화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중요한 강인 웨베시벨리강은 길이가 약 1,900㎞이다. Webi Shibeli 라고도 하는데, 유역에서는 곡물류·참깨·면화·바나나·사탕수수·대추야자 등이 재배된다. 모가디슈부근에서 남서쪽 해안선과 나란히 흐르다가 모래땅에서 사라지며,  인도양까지는 흘러들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북동쪽을 거쳐 인도양으로  흘러드는 주바강은 길이가  1,660㎞이다. 웨비주바라고도 한다. 이디오피아 남부의 고원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흐르며, 소말리아의 남서부를 종단(縱斷)한 다음 키스마유 부근에서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하구에서 바르데라까지  약 300㎞는  항행이 가능하며, 소말리아 영내의 유역은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농경지대로  바나나·쌀·사탕수수·면화·옥수수 등이 재배된다. 이탈리아인이  플랜테이션을 경영하여 바나나를 수출농산물로 만든것도 이 강 유역에서이다.   주바강은 1925년 까지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와 케냐의 국경이었으나, 그 해에 영국은 이탈리아와의 협정에 따라 이를 소말릴란드에 할양하였다. 새 국경과 이 강 사이에 있는 재대는 주발란드 라고 불린다.
---기후는 열대 및 아열대 지대로서 하루  최고 기온이 30∼42도 이고 최저기온은 18∼29도 이다.소말리아에서 살고 이는 동물은 사자, 코끼리, 하이에나, 여우, 표범, 기린, 영양, 얼룩말 등이 있다고 한다.


  
주민  

전국적으로 거주하는 소말리족은  디르·하비야·다로드·이샤크 등의  종족으로 나뉘며 열광적인 이슬람교도인  동시에 인종적으로는 이디오피아  인종형이다. 남부의 농경지대에는 반투계와 갈라계  사이의 혼혈인 디길족·라한빈족과 함께 반투족도 살고 있다. 언어는  소말리아어가 국어로 되어 있으나 아랍어·영어·이탈리아어가 공통어로서 비교적 많이 사용 되고 이다.소말리족은 아프리카의 동쪽 끝의 소말리아 공화국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민족이다. 이들은 디르, 다로드, 하비야, 라한빈, 디길의 5군으로 구분되며 처음의 3족이 순수한  소말리인이다. 언어적으로는  동(東)햄어족, 즉 그린버그의 용어로는 쿠슈어에 속하며 코카소이드에 속하는  이디오피아 인종형이다. 형질적으로는 키가 크고 홀쭉하며 골반(骨盤)이 적고 얼굴은 가늘면서 길며 코는 높다. 두발은 짧고 곱슬거리며 피부는 밝은 갈색에서 흑갈색까지 이고 입술은 일반적으로 엷다. 따라서 아프리카 본래의  네그로 와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그들은 원래 소·낙타 등의 목축민으로서 동북 아프리카에서 침입하여 이 인종형이 선주민인  네그로 와  혼교되면서 동아프리카를 경유하여  멀리 남로데시아에 나아가 나미비아에 까지 도달하여 헤레로족이나  호텐토트족에 영향을 끼쳐다는 설도 있다.

소말리족이 사는  지역은 사하라 사막이나 칼라하리 사막등과 마찬가지로 열사막형의 기후이지만 나미비아 등과 같이  연안성 사막의 풍토로 내륙성 사막에 비하여  최고·최저의 기온차가 적다. 북부 소말리아에서는 유목을, 남부에서는  목축과 수수  따위의 곡물재배를  한다. 사회적으로는 부권적 가장이나 족장의 권위가 크지만 여성의 지위도  낮지는 않다. 부계 장자상속이며 족장도 같다. 엄격한 연령계단제가 있어 한  계단이 8년으로 되어있다. 종족의 정치적 지도는  일정한 연령단계의 사람들이 행하며 8년을 1기로 하여 교체되고 추장도 8년마다 바뀐다. 소말리족의 이슬람교화는 동햄족 중에서는 가장 빨랐으나 동 햄족 고유의 천신신앙도 있다.



수도 - 모가디슈  

동아프리카에 있는 소말리아의  수도이다. 인도양 연안의  적도 바로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정치·문화·상공업의 중심지이며, 시가는 이슬람 교도 답게 아라비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이탈리아에 의하여 서구화해 있다. 바나나· 가죽을 수출하며 농산물가공업이 성하다.  10세기에 아랍인들이 건설하여 항구로서 번성하였으나, 1871년  잔지바르의 술탄이 통치하였는데, 이곳을 보호령으로 만든 영국의 압력으로 92년 이탈리아의 조차지(租借地) 가되었다가,  1905년 이탈리아가  잔지바르의 추장으로부터  이를 사들여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의 수도로 만들었다. 그  뒤 소말리아 신탁통치령의 수도였다가(제 2차 세계대전 중인 41년 2월부터 50년까지  영국 군에의하여 점령됨.), 60년 독립국 소말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철도는 없지만 도로망으로서도 중요하며, 오래된 건물과 사원이 현대식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슬람율법학교를 비롯한 각종 대학과 국립박물관이 있다.


☆인터넷에서 빌려온(?) 자료들...

여행
소말리아 국내를 여행하는 경우는 정부기관의 허가증이 필요하다. 특히 난민 캠프에 가는 경우에는 NRC(National Refugee Commission)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현재 북부지역에서는 내분이 계속되어  그곳은 여행할 수 없다고 한다. 남부에 있는 메칼, 브라바는 소말리아에서는 역사가 깊은 마을로, 한번 여행 할 만한 가치가 있다.  교통수단으로는 4륜 구동차가 필수이다.  지방을 여행할 때는 반드시 현지인(소속기관직원, 친구 등)과 동반하는 것이 좋다.    

베르베라(Berbera)
베르베라는 사람들이 친절하고 호의적인  것 말고는 흥미를 가질만한  것이 없다. 여기서 사진을 찍는 것은  허가를 받았더라도 매우 신중해야  한다. 가장 값이  싼 호텔  중  호텔 와베라(Hotel  Wabera)는 깨끗하고,  호텔  사씰(Hotel Saaxil)은 선풍기와 에어콘 중 선택할 수  있다. 조금 더 비싼곳은 호텔 사헬(Hotel Sahel)로 이곳은 모든 방이 에어콘이다. 베르베라에는 작은 식당이 많이 있어서 생선, 밥, 샐러드 등의 좋은  음식을 선택할 수 있다. 반면에 해변에 있는 조금 더 싼 식당에서는 아주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을 수 있다. 물을 마시는 것은 피하고, 콜라나 환타를 마시도록 한다.

브라바(Brava)
이곳은 키시마이오 도로에서 5㎞ 떨어진 오래된 아랍 마을로 매우  아름답다. 가죽 전문점에 면 가죽 샌들을  아주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다. 값이 싸고 좋은 호텔로는  콜롬보   호텔(Kolombo Hotel)로  마을의 입구에 위치해 있고 적당한 값에 크고 통풍이 잘되는 방을 구할 수 있다.

하르게이사(Hargeisa)
하르게이사는 영국령 소말리랜드의 옛 수도이다. 그러나 지금은 매우 퇴색했고, 공군이  정기적으로 많은 양의 폭탄을 투척해서 고통 받고 있다. 택시는 빨간색과 흰색으로 프린트 되어 있고 모가디슈보다 훨씬 비싸다. 지부티까지의 항공은 정기적으로 운행되고 있다. 호텔로는 깨끗한 호텔 달리(Hotel Daali)가 있다. 호텔 마윌(Hotel Maaweel)과 비슷하다. 하르게이스  클럽에서도 방을  구할 수  있다. 호텔오리엔탈(Hotel Oriental)은 싸지만 방이 나쁘고 침대가 불편하고 화장실도 사용할수가 없다. 그러나 음식은 놀라울 정도로  싸고 훌륭하다. 또마을에서  2㎞ 떨어진 곳에 위치한 스테이트 하우스도 추천할 만하다. 그 식당의 직원들은 친절하고  그 공원에서 야영을  할  수 있다.  레이크 빅토리아(Lake Victoria)식당은 쉬시 커밥(Shish Kebab:양고기·쇠고기 등을 포도주·기름·조미료로 양념하고 이를 꼬챙이에  끼워 구운 것)이 맛있으며 싸고 시원한 음료수를 마실 수 있다. 마을 외각에는  글레드(Gouled's)라는 아름다운 문의 식당이 있다. 이곳의 주인은 미국에서 일류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음식은 질이 좋고 맛있으나 값이 비싸다.

키시마이오(Kisimayo)
도착할 때 국제 안전보장이사회에 보고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만일 케냐로 가려면 출발하기 전에 여권에 도장을  받아야 한다. 소말리아에서의 첫번째 밤을 기대한다면 이곳을 꼭 가봐야 한다. 키시마이오의 강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가장 좋은 호텔로는 깨끗하고 친절한 호텔 퀼마와이(Hotel Quilmawaaye)를 꼽을 수  있다. 이곳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으며 지방 유지들은 곳을 이용한다. 중심부는 아니지만 호텔 아프리카(Hotel Africa)에 좋은 방이 있고 단점이라면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것이다. 조금더 비싼 호텔로는 와모 호텔(Wamo  Hotel)이 있다. 이곳은  특별히 모가디슈나 다른 곳으로 가길 원한다면 그것을  내할 이민자들이나 지방 사람들을  만나기에 좋다. 금요일  밤에는 디스코 파티가  있다. 약간의  양담배와 위스키를 갖고가면 친절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호텔 퀼마와이에  있는 식당 에서는 스파게티, 생선, 치킨을 싼값에 먹을 수 있다. 쇼어라인(Shoreline)식당에서는 적당한 가격에 좋은 음식을 맛볼수 있다.

리보이(Liboi)
이 변두리 마을은  작지만 매혹적이다. 지방  사람들은 그들의  낙타, 염소와 소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 배수구를 찾아  데려온다. 숙박시설은 진흙 벽돌로 지은 작은 원주민  숙소를 이용할 수 있다.  음식으로는 챠이(Chal), 챠파티(Chpati), 끓인 염소젖, 약간의 토마토 등이 있다.

메르카(Merca)
이곳은 모가디슈 남쪽으로 100㎞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 아름답고 오래된 아랍마을이다. 메르카에서 5㎞ 떨어진 곳에는  깨끗하고 조용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신부시 비치(Sinbusi Beach)의 오두막 집에서 머무를 수 있다. 오두막 집은 기본적인 화장실을 갖고 있다.  이곳의 바다는 조용하고 깨끗하며 따뜻하고 고래 때문에 상어가 살지 않는다. 이곳에는 구운 생선을 파는 식당이 있다.

                            
치안
시내에서는 강력 범죄사건은  없다. 그러나  정정(政情)불안, 경제악화,  물가 급등으로 일반 시민의 생활도 불안정해서 치안의 악화요소는 충분하다.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야간외출을 삼가는 등  기본적 방범대책이 필요하다. 한집 전체를 빌린 경우는 24시간 근무하는 수위가 필요하다. 물이나 식료품 등 생활 필수품은  긴급 시에 대비해서 어느 정도  비축해 두는 것이 좋다. 풍수해나 지진 가능성은 없다.



아프리카에 관한 다섯 가지 오해

내리쬐는 적도의 태양과 푹푹 찌는 밀림의 무더위.
며칠동안 비행기를 갈아타고 가야 겨우 닿을 것 같은 아득한 대륙.
빈곤과 질병의 땅 아프리카.

천만의 말씀이다. 실제 아프리카의 현실과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프리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알려지지 않은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관한 몇 가지 잘못된  고정관념들을 바로 잡아본다.


△ 아프리카는 무척 덥다 ?

흑인들이 사는 아프리카 기후는 흔히 후덥지근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나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의 기후는 평균 20도 안팎의 선선한 날씨. 대낮의 더위만 생각하고 얇은 옷만 걸치면 밤에 감기 들기가 십상이다. 특히 나이로비는 1천7백미 터의 고원지대에 있어 「한여름의 피서지」로 안성맞춤일 만큼 날씨가 좋다. 따라서 주로 아침, 저녁때를 이용하는 사파리 투어에는 담요가 필수적이다.


△ 며칠동안 비행기를 타야 갈 수 있다?

아프리카에 가려면 비행시간이 며칠은 족히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여행사들이 제공하는 서울-홍콩-요하네스버그 코스를 이용하면 17시간정도 소요될 뿐이다. 브라질이나 남미 국가들이  24시간 남짓 걸리는데 비하면 훨씬 짧은 편이다. 직항로로 서울-카이로 노선이 있으나 카이로에서 타 아프리카 지역으로의 연결 항공편이 원활하지 않아 홍콩서  외국비행기를 경유하는 편이 애용되고 있다. 인도의 봄베이나 방콕, 유럽 주요도시를 통하는 방법도 있다. SA항공은 홍콩에서 요하네스버그까지 주 4회 운항한다.


△ 아프리카에 가면 별미가 없다 ?

아프리카의 주식은 옥수수와 소맥  등의 가루를 뜨거운 물로  반죽해 찐 「우갈리」라는 음식으로 우리 나라의 밥에 해당한다. 가장  특징적인 음식은 아프리카식 불고기. 각종 야생고기를 불판 위에서 구워먹는데 악어, 기린, 물소,  영양 등 다양한  메뉴가 준비돼있다. 보통 고기보다 조금 질기다는 것 빼고는 맛이 일품이다.


△ 제대로 된 문화시설이 없다?

아프리카 관광을 하다보면 사자와 기린, 코뿔소 등의 야생동물에서 번화한 시내의 호화로운 호텔 빌딩 등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현대 문명이 공존하는 풍경을 종종 볼  수 있다. 과거 유럽 제국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관광객들을  위한 시설이  잘 발달돼있다. 특히 케냐나 남아공에는 스위스나 프랑스 못지 않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톱 클래스의 호텔들이 등급별로  모두 터를 잡고 있어 여유만 있으면 얼마든지 호화판 관광을 할 수 있다.


△ 식인종이 있어 위험하다?

아프리카에 식인종이 살고 있어 위험하다는  것은 기우이다. 또 풍토병에 대해서도 안전수칙만 지키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각광받는  관광지는 대개 고지대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세균 감염 가능성이 적다. 아프리카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출발하기 일주일 전쯤 말라리아와 황열병 예방주사만 맞으면 된다. 물론 호수나 수돗물을 그냥 먹어선 안 된다.



관습

레스토랑 등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남성뿐이다. 이것도 습관의 하나인 듯 하다. 그러므로 파티 등의  초대도 부인을 반할  필요성은 없다. 소말리아인을 포함한 파티는 점심 시간에 열리는 경우가 많다. 이슬람교도와 파티를 해도 알콜류를 마시는 사람이 꽤 많다.
그러므로 파티석상(席上)에 주류를 내어도 문제되지 않으나 될 수 있는 한 삼가는 편이 좋다. 손님이 오거나 방문시의 유의점은 특별히 없다. 그러나 예배시의 방문은 되돌려 보내는 편이 좋다. 예배시간은 일 출몰  시간에 따라 변화하나 대개 다음과 같다. 예배는 하루에 5회이다.                                                                      

시차
그리니치 기준시보다 약 3시간 정도 빠르다.

전압
220V, 50HZ

전화
1986년 일본의 유상원조에 따라 시내의 일부 지역의  전화망이 정비, 확충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보급률은 아직 매우 낮다. 외국인이 살고 있는 곳이라도 아직 전화가 설치되지 않은 곳이 많다. 공중전화는 전혀 없다. 국내 28개소의 시내 곳곳에 전화망이 있다. 그러나 전력공급이  불안정해서  발전기를 준비하고  있으나 이것으로 가동되지 않는 곳이 많다. 실제로는 시내에서의 전화도 좀처럼 하기 힘든 상황이다.

소말리아와 한국과의 국제전화는  로마를 통해서 한다. 교신방법은 우체국에서 신청서에 한국의 전화번호와 희망통화소용시간(3,  5, 7,  10분) 을 기입하고 요금을 지불하여 신청한다. 우체국 안에는 전화신청자로 항상 혼잡하고 많이  기다려야 한다. 길게는 2∼3시간, 짧게는 30분은 기다려야 한다. 일단  연결되어도 3분이 되면 자동적으로 끊겨 버린다. 교환수의 '그대로 기다리십시오'라는 지시에 따라 수화기를 들고 있으면 다시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
집을 임대한 경우  국제전화사용으로 등록되어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제한된 숫자만큼만 허용되지는 않는 듯 하다. 한국에서 소말리아에 전화하는 것은 그이상으로 어려운 듯하다.

                      
우편

텔렉스
최근 텔렉스회선이 보급되어서 일부 정부기관,  호텔, 우편국 등에 설치되어 있다. 일반인은 우편국에서 발신하고 있다. 또 우편국에서 수신된 것은 개인 우편함에 넣어둔다. 우편국은 텔렉스 이용자가 많아서  항상 혼잡하다.  또 요금의 지불도 시간이 걸려서 다소 불편하다. 호텔의 텔렉스는 수수료  등으로 3할 정도  비싸지만 편리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숙박객 이외의 경우는 수신할 수 없다.

전보(電報)
우편국에서 취급하고 있지만 신뢰도가  떨어진다. 텔렉스를 이용하는 편이 좋다. 모가디슈 시내에는  4개소의  우편국이 있고  여기에 개인 우편함이 준비되어 있다. 소말리아에서는 우편물 배달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편사정은 그다지 좋지 않다. 우편물이 찾아가지 않아서 쌓이는 일이 빈번하다. 또 편물이 개봉되어 검사를 하는 것도 있다. 우편물은 전부  엽서라도 일단  세관을 통해서 우편국에 접수되는 제도가 자리잡아가고   .식료품, 책 등은 과세가 없다. 소포의 경우에만 취급수수료로 1상자에 160실링이 징수될 뿐이다.


공휴일
5월 1일  6월 1일 10월 21일, 22일



☆나의 생각들

---소말리아의 위기 극복 방안들.
현재 소말리아는 기아와 질병, 내전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중에서  기아는 세계각국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해결이 안되고  있다. 또한  내전도 UN에서 도움을 주고 있지만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처지이다.
내 생각으론 소말리아에 대한 세계  각국의 도움과 관심도 필요하지만  그들 스스로 힘든 상황을 극복해 내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평화적인 방법이 동원된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세부적인 사항으로는 농업이 어려운 지역이  많으므로, 농업보단 컴퓨터등을 이용한 고부가가치 산업의  개발을 통한  경제발전을 꾀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선 우선 그들의  교육수준을 높이는 기초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그들을 교육시킬 때 언어,수학,역사,등뿐만 아니라 보건과  위생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해서 질병을 예방할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아프리카의 이해를 듣고 나서...
아프리카의 이해란 과목을 듣게 된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조금더 솔직해 진다면 수업시간엔 그저 동물의 왕국(?)이나 원시부족의 다큐멘터리 같은 비디오 몇 편을  보면 되지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게  왠걸?... 그저 시간때우기로 들어본 강의는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 이름은 조금 알려져 있지만 세부적인 자료가  없는 아프리카를 우리들이 직접  조사하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예상하지 못했던  수업방식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겁업이 첫 발표를 하기도 했지만...
우리들은 아프리카에 대해 많은  편견과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무조건 아프리카하면, 사막, 식인종, 말라리아(물론 얼마 전에는 한 탤런트가 풍토병에 걸려서 죽기도  했지만...), 열대기후...이런 것들만  떠올린다. 게다가 조금 관심을 가져본 사람들은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역사가 없는 곳이라고도  여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아프리카가 관광지로 훌륭한 곳이다'라는 얘기를 하셨을땐  의아해 했었으니까. 이건  우리들이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과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아프리카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매력적인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마도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미개하거나  위험한 곳이 아니라,   희망이 가득찬 곳이다.  왜냐구? 넓은 땅, 적지않은 인구, 아름다운 자연,  채 개발되지 않은 자원이 가득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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