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스와질랜드

africa club 2003. 1. 30. 18:23
스와질랜드

공식국명은 스와질랜드 왕국(Kingdom of Swaziland/  Umbuso weSwatini)이다.  국명은 '스와지 족이 사는 땅'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나 줄루족도 많이 살고 있는 편으로 행정수도는 음바바네이며 입법수도이자 왕실의 수도는 로밤바이고, 1993년 기준 전체 인구는 93만 6,000명이며 유아사망률은 1,000명당 93.2명이다. 스와질랜드의 민족은 국민을 인종언어학적으로 구분했을 때 약 70개 이상의 씨족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국민의 약 84%는 반투계의 Swazi족(부 응구니족)이고 유럽인 2%, 이밖에Zulu, Tonga, Shangaan 등이 있고, 언어는 공용어로 영어와 Siswati어가 쓰이고 있으며 관공서의 업무(government business)는 영어로 수행되어지고 있다. 종교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리스도교도이며 나머지는 애니미스트이다.  스와질랜드는 아프리카의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3방향을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접하고있고 동쪽을 모잠비크와 접경하고 있는 내륙의 작은 독립국으로 면적은 17,363㎢로 한반도의 1/13의 크기이고 내륙국이기 때문에 해안선과 영해는 없다.


1. 역사

① 독립 이전
스와지족의 전통적인 영토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근거는 없지만 반투어를 사용하는 스와지족은 16세기에 현재의 모잠비크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는 도중 한 부류가 떨어져 나와 팡골라와 그레이트우수투 강 사이에  정착하게 되었으나 이 지역을 침범해  온 줄루족의 압박을 받아 북쪽의 리틀우수투  강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현재의  영토가 정해진 것은 19세기 전반의 네델란드계 백인의 침략에 따른 것이다. 1836년 소부자 1세가 죽은 후 후계자였던 음스와지 2세는 자신의 이름을 따 부족의 이름을 지었다. 그후 스와지족은 북쪽의 많은  부족을 정복했으나, 1846년에 크로커다일 강  북쪽의 영토권을 레이덴뷔르흐 공화국에 양보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음스와지는 줄루족에 맞서기 위해 영국의  원조를 청하였다. 1886년  유럽의 정착민에게 자치법이  허용되었고 2년  후 스와지족은 영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와지족 대표로 구성된 임시정부 설립에 동의하였다. 스와지족은 189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통치제안을 거절했으나, 이듬해 합병 없이 사실상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통치한다는 조약에 서명하였다. 보어 전쟁과 1903년 영국이 트란스발을 통치하기 시작한 뒤 트란스발의 총독이 스와질랜드에 대한 통치권과 포고에 의한 입법권을 갖게 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영국에 대해 그 영유(領有)를  요구하였으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대하던 영국은 이를 거부하였다. 1906년 트란스발 총독이 가지고 있던 권한이 바수톨랜·베추아날랜드·스와질랜드 등을  통치하는 고등판무관에게 넘어갔으며 63년 10월에 고등 판무관제를 폐지하고 전임 판무관 하에입법심의회와 행정심의회를 설치하였다.
    
② 독립 이후
1963년 제한적 자치권을 인정하는  헌법이 선포되었으며,  1967년에는 스와질랜드  왕국이 영국보호령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68년 9월 6일에  입헌군주국으로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스와질랜드의  외교관계가 원만한 편이었으며  이시기에 남아프리카 관세동맹(SACU)에 가입하여 무역균형을 이루는 데 커다란 효과를 보게 되었다.  1973년과 1977년에 소부자 2세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헌법을 폐지하였지만 이 조치는 모두 2년 뒤에 새로운 의회와 헌법이 수립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1982년 8월 소부자 2세가 사망한 후 100명이나 되는 왕자들에 의한 왕위를 둘러싼 경쟁이 시작되었으며 1983년에 보수파를 지지하는 누돔비 왕비가 섭정을 하게되었다. 결국 86년 4월 친자식인 마호세테베 왕자가 무스와테 3세로 즉위하였다. 1990년 10월 "왕은 반역자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재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는데 이 일로 인하여 왕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1990년 12월에서부터 1991년 1월에 걸쳐서 노동자 폭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1990년 초에 반정부조직인 인민통일민주운동(PUDM)이 現왕정을 비판하고 헌법개정요구의 팜플렛을 배포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PUDM지지 대학생이 수업을 거부하면서 경찰과 충돌하여 약 90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민주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92년 2월  25일 인민민주통일운동(PUD-EMO) 정당금지령을  무시하고 PUD -EMO을 합법적 기관으로 선언하였다. 이러한 민주주의로의  갈망에 호응하여 국왕은 동년 3월에 PUD-EMO의 회원 중 한사람을 선거제도 개혁위원회의 위원으로 기용하여 국민들을 놀라게 하였다.   정부는 직접선거제 도입 등의 개혁을 실행하여 93년 9월,  10월에 20년만의 의회선거가 실시되었고, 선거에서는 국왕이 지명한 현직각료 13명 가운데 10명이 낙선하여 체제변화를 갈망하는 민의를 충분히 반영하였다. 국왕은 11월 왕자 5명을 포함한 새로운 각들을 임명하였으나 신헌법의 공포는 연기되었다.


☆ 약  사
    
1800년 이전 남부반투계의 Swazi족 이주 시작
1800년 Nkosi Dlamini 남동부 스와질랜드에 정착
1840년 백인들이 스와지 왕으로부터 영토 획득
1846년 Mswati 2세, 줄루족과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영국의 보호요청
1877년 영국이 Transvaal 합병
1884년 런던 협정에 의해 스와질랜드 독립 보장
1890년 영국정부와 트란스발 정부, 스와질랜드 공동관리에 합의
1894년 영국과 남아공 의회에서 남아공의 스와질랜드 관리협정
1903년 영국이 Boer 전쟁후 정식으로 스와질랜드 병합
1921년 Sobuhuza 2세 즉위, 백인들에게 양도한 이권을 회수하고자 투쟁 전개, 백인들은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유럽 자문협의회 결성
1963년 3월 5일 최초의 헌법이 공포되고 행정협의회 및 입법협의회가 창설됨
1964년 6월 총선실시, Sobhuza 2세가 창당한 Imbokodvo National Movement가 압승
1965년 영국으로부터 자치권 획득
1967년 영연방 내의 자치정부 수립(Imbokodvo National Movement가 24석 차지)
1968년 스와질랜드 왕국으로 독립
1972년 독립후 첫 선거에서 Imbokodvo당 21석 차지
1973년 4월 헌법폐지, 정치활동금지, 입법, 사법, 행정의 전권을 국왕이 독점
1976년 3월 군사령관인 Mapheru Dlamini 왕자가 수상에 취임
1977년 3월 의회제도의 기능을 Tinkhundla (전통부족회의)
1978년 10월 새로 제정된 헌법에 의거, 상원  및 하원의원을 선출하는 권한을 가진 80명의 선거인단 선거실시
1979년 1월 Libandla라고 하는 새의회 개원
1982년8월 21일 Sobuhuza II세 사망, Dzeliwe 제 1왕비가 섭정 Sozisa왕자가 국가원수 권한 수임(受任)
1983년8월 30일 Liqoqo에 의해  Dzeliwe 제 1왕비 축출, Makhosetive 왕자가 황태자로 임명되고 Ntombi왕비가 섭정왕후에 임명됨
1983년9월 26일 총선실시후 신내각 구성
1986년4월 25일 Mswati 3세 왕으로 즉위
1990년 8월 젊은 세대들의 민주화 요구에 호응하여 다당제 허용키로 함
1992년 11월 다당제 체제하에서의 총선


2. 외교

스와질랜드는 UN, OAU, 비동맹에 가입한 이래 친 서방 중립노선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외교면에서 최우선 과제는 남아공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인종 차별국인 남아공과 사회주의 국가인 모잠비크와 접경하고 있는 내륙국인 관계로  상기양국을 통한 해외 운송로 확보 등 국가이익을  위해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다. 남아공에 대한 태도는 흑인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강화를 위해 남아공의 인종차별 책을 비난하는 동시에 경제적인 이유에서 남아공과의 선린,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순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스와질랜드는 한국·미국·영국·프랑스·서독·캐나다·덴마크 및 전선국가 등 42개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으며, 영연방에  가맹하였으며 이밖에  남부아프리카 개발공동체(SADC)와 남아공 주도의 남부아프리카 관세동맹(SACU) 공통통화권에 남아공과 함께 가맹하였다. 93년 2월 10일 관세무역일반협정에 가맹하였다. 특히, 스와질랜드는 내륙국인 관계로 주변을 둘러싼   남아공과는 정치·경제·군사분야의 직접적 영향을 받기 때문에 남아공과의 관계는 외교정책의 주요목표가 되고 있다.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및 인종분리 개발정책을 반대하기 때문에 남아공과의 직접적인 외교관계는 없다. 그러나 남아공에 대해 경제 의존도가 크고 스와질랜드의 정치, 경제적 안정은 전통 왕정과 남아공과의 원만한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對남아공 무력사용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통상대표부를 상호설치하고 긴밀한 스포츠 교류를 실시하는  등 남아공과의 선린,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남아공은 스와질랜드의  중립적인 외교태도를 인식(認識)하고 있으며 이러한  남아공의 인식은 두 나라  관계를 강화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남아공과 관련된 주요 외교문제는 영지  이전 문제와  ANC문제이다. 토지 문제에 있어서 Kangwane지역에 대한 스와질랜드의 오랜 소유권 주장은 70년대 말에 와서야 남아공이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주된 이유는 ANC의  활동축소 희망과 흑인국적 박탈정책 등에 남아공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3. 정치
  
스와질랜드의 정체(政體)는 전통적인 부족법에  의하여 통치되는 입헌군주제(내각책임제)로서 명목상 의회정치이나 왕당파인 킴보고트보 민족운동이 상하 양원을 독점하고 있고  왕과 족장에 의한 부족정치가 행해지고 있다. 헌법은 1968년 9월  6일 제정된 후 1979년 개정헌법이 채택되었으나 국민들에게 소개되지는 않았다.  스와질랜드의 국가성립은 68년 9월 6일 영국보호령으로부터 독립한 이후부터이며 9월 6일은 독립기념일로 지정되어 있다. 전통과 국왕의 권위가 정치, 사회, 종교, 윤리 등 모든 국가체계의 근간을 이루어 왔으나 영국 식민 통치에 따른 법적통치 개념의  도입으로 전통과 현대의 이원적 정치사상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분야의 이중구조는 현상유지에 일단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촌의  전통사회를 보존할 수 있게 해주는 대가로 부족장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으며 도시에 거주하는 현대적 교육을 받은 계층의 개혁요구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하나의 국가에 이중의 법제, 행정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안의 요인이 되며 외적자극에 의해 갑작스런 개혁이 이루어지게 될  혼란의 가능성이 상존(常存)하게 된다는 것이다.    


4. 국내정세

① 독립전
1960년 최초의 정당인 SPP(Swaziland  Progressive Party)가  J. J. Nquku 지도하에 창당되어 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동년도 흑·백인의 이익을  각기 대변하는 SNC와 EAC 대표를 주축으로 하는 헌법위원회가 설치되어 독립준비를 개시하였다. 1962년  Zwane는 SPP에서 탈퇴하여 NNLC(Ngwane National Liberatory Congress)당을 창당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1964 NNLC가  스와질랜드를 합병하려는 남아공에  반대입장을 밝히고 독립투쟁을 적극화하자 Sobhuza 2세는 남아공, 영국 및 스와질랜드 거주 백인들의 도움으로 INM을 창당하여 첫 번째 총선에서 압승을 하였다. 1967년의 두 번째 총선에서도 INM당이 압승을 하였다.

② 독립후
1968년 9월 6일 영국 보호령으로부터 의회 민주주의에 입각한 입헌군주국으로 독립하여 영국식 헌법을 채택한 이래 INM(Imbokodvo National Movement)당이 계속 집권하고 있어 주변 국가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안정된 정국을 유지해 왔다. 1972년 선거에서는 Pan Africanist Swaxiland Progressive Party가 24석중 3석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치에 있어서 커다란 위험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에 1973년 4월에 Sobuhuza II세가  헌법을 폐지하고  정당을 해산하여  행정·사법·입법권을 장악한 후 내각회의의 법령으로 통치를 하게 되었다. 1975년 11월 NNLC의 활동이 정식으로 금지되었으며 노동쟁의가 계속 발생하자 Sobhuza 2세는 노동조합운동을 불법화하였다. 1977년 3월 남아공의 무기 및 군사훈련 제공을 기반으로 650명의  군을 창설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하였다.   1978년 8월 Zwane은 모잠비크로  망명하여 NNLC를 승계한 SWALIMO를 창설하여  혁명적 방법에 의한 민주투쟁을 선언하고 정치투쟁을 재개하였다. 78년  10월에 새 헌법이 공포되고 새 의회가 성립되었으나 국왕의 독재체재는 변동이 없었다. 1979년 10월에 Mabandla Dlamini를 수상에 임명하고 정부 이미지 쇄신을 위해 부정부패일소를 위한 사정위원회를 구성하였으나 군과 왕실재산의 수색을 금지하는 왕령 때문에  이러한 조치들은 선전에 그치게 되었다. 신임수상이 국왕의 신임 하에 적극적으로 국내·외 문제를 처리하고 있어 대체로 정치적인 안정을 유지하고 있으나 모잠비크에 기지를 둔 망명게릴라 침투, 동국 내 남아프리카의 난민 처리문제 및 공무원 처리개선 문제 등이 불안 요소로써 상존하고 있다.

1982년 8월 23일 Sobhuza 2세 서거 후 Dzeliwe 제 1왕비가 섭정 왕후가  됨으로써 권력투쟁이 치열해지게 되었다. 1983년 8월 10일 섭정  왕후가 축출된 이후 Ntombi 후임 섭정 왕후는 섭정 왕후 권한 우위성을 나타내는 문서에 서명을 하였다. 1984년 6월  군사령관, 경찰총감, R. V.  Dlamini 외상, Sishayi Nxumalo 재무상 등이 기자회견을 통하여 Ntombi 섭정왕후, Liqoqo 내 강력한 실력자인 Mfanasibili 왕자, Dr. George Msibi의  해임을 발표하는등 내부권력 투쟁이 심화되었다. 1986년 4월 25일 Mswati 3세의 즉위는 Sobhuza 2세 서거후 왕실 내부에서 계속된 권력 암투를  종식시키고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Mswati 3세는 즉위후 최고권력기관인 Liqoqo 해체 및 반대파 세력 완전 제거로 친정 체제를 확고히 하였다. 최근에는 동구의  개방으로 인한 아프리카 민주화  열기에 부응하여 스와질랜드에서도 정당체제를 인정하는 헌법개정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1990년에  들어와서는 학생중심의 민주화 운동이 표면화되었다. 1992년  10월에 Mswati 3세가 선거제도의 개선안을 발표하는 등 다양한 민주제도를 도입하였으나 주요 쟁점이던 다당제의  수용은 거부되어 민주세력의 불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1993년 9월 26∼27일에 20년만에 민주적인 국회의원선거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28만3,693명의 유권자가 2,094명의 후보자 중 55명의 의원을 선출하였다. 국왕의 지배로 인하여  정당은 금지되어있지만 국제적인 압력으로 인하여 선거는 민주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이 선거에 있어서  투표함, 투표용지, 금속탐지기, 약품, 천막의 구입을 위한 자금인 3만 달러의  외국원조도 있었다. 1993년 9월과 10월의  2회로 나누어 실시된 의회 선거에서  現 내각 각료 13명중 수상을 비롯한 10명이 낙선하여 현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누스말로 부수상은 94년 2월 미국무성의  발표 중 "스와질랜드의 93년 선거는 비민주적이었다"라는 내용의 인권보고를 지적하면서 "정당은  쿠데타나 재자를 형성하는 것이며 나라를 분열시키기 때문에 국민 대부분은 복수정당제를 바라지  않는다"라고 반론하였다.  부수상은 신헌법 기초를 위해 정부, 의회 외에 비정부조직인 여성단체의 대표도 포함하는 헌법위원회가 구성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PUDM 등의  정당과 인권단체로 만들어진 완전민주제를 위한 동맹은 9월 27일 성명을 발표하고 자유선거를 하지 않으면 내전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10월 2일 2번째 직접선거가 55개구에서 행하여졌다. 앞으로의 정치상황, 국민 정치의식의 미성숙, 반정부세력이  빈약, 그리고 농촌 지역에서의 현정권을 지지로 인하여 당분간 정치체제에 급격한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5. 사회
  
스와질랜드는 노인·장애자·유가족 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사회보장제도가 마련되어 있지만 보건상태는 좋지 못한 편이며 1994년 기준 스와질랜드의 출생률은 천명당 43.14명이었고 사망률은 천 명당 11.07 명이었으며, 유아 사망률은 천명당 93.2명이었다. 평균기대수명은 56.39세였으며 남자가 52.4세, 여자가 60.5세였다. 정부 및 선교원, 산업체에서 의료활동을 하고 있으며, 개인병원의 의료수준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훌룡한 편이다.
    
① 문제
스와질랜드의 사회불안 요소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국왕전제정권,  현대화된 부문과 전통부분간의 소득·교육정도·생활양식 등의 현격한 차이, 짐바브웨, 모잠비크의 사회주의 정권수립에 자극받은 국왕제 폐지세력 성장 등이다. 이에 반하는  사회적 위험 요인으로는 부족장들의 왕제(王制) 지지성향, 비교적 안정된 경제, 국내의 강력한 반정부세력의 부재(不在), 언론, 통신 등의 엄격한 규제 등이다. 아직까지 국내문제로 폭동이나 소요가 일어났다는  보고는 없으며 외국과의 전쟁경험도 없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모잠비크, 말라위 등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도피해 온 피난민 처리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으며 특히 남아공 피난민은 ANC, PAC등 반 남아공 게릴라 단체와 연결되어 있어 게릴라 활동을 저지하려는 남아공과 종종 분쟁을 일으켰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사회문제는 인구급증으로 인한 토지부족이며 이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가족계획이 도입되었다. 범죄발생률은  낮지만 범죄건수는 증가중이며  난민이 들여오는 불법적인 무기에 의한 무장범죄가 증가하고 있다. 수인수(囚人數)는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 없으며 1988∼90년에 걸쳐서 범죄발생률 증가는 6% 정도였다.


참고: 검색엔진 empas
        http://www.centerworld.net/univ/country/africa/swaziland.htm


♧  text 번역
변덕스러운 관찰자들은 스와질랜드를 대륙의 현대  싸움들에서 전통 아프리카의 평화로운 섬으로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사하라 사막의 아프리카의 유일한  식민지 시대 이전의 군주 정치가 현대로 이어짐에 따라 이  이미지는 나라의 상태의 제품이다.  스와질랜드의 조직은 예전의 구조들, 표준과 일치하여 표면상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이 아래서 시간을  초월하는 것의 박판은 내부 상태인 것이고, 외부의 압력들에 종속했던  동적인 사회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1993년에 제한되는 무소속의 선거를 개최하는 것은 현상의 방어자들과 다당의 정치의 복원을 요구하고 있는 그것들 사이의 , 나라에 대한  정치적인 미래에 관한 논쟁을 진정시키지 않았다. 스와질랜드의 이웃 사람들에 의한 조용한 외교를  가진 해에 처음에 개혁을 위한 stay-away운동은 이슈 위에 대화의 쪽으로 스와질랜드의 정부를 미는 것을 도왔다.1996년에, 므스와티왕은 연합한 민주당의 움직임에 뒤로 뺐던 사람들의 1973의 볍률의 즉각적인 취소를 요구하고, 새로운 헌법을 끌어올리기 위해 30의 위원회의 지정을 알렸다.  1903에서 1968년의 독립의 복원까지는 남아프리카에의  편입을 위한 받쳐졌던 압력에도  불구하고, 영국 식민지의 보호령으로 남아있었다. 식민지의 기간  동안 내내, 자기주장이 멀리하게 되었던 땅의 통제를 회복하고, 남아프리카로 결합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오는 것에 따라 지배하는 들라미니왕조는 성공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양쪽  싸움들의 소부자의 개인의 통솔력은 1964, 1967, 1972 선거에 그의 왕정주의자 Imbokodvo Party 의 압도적인  인기에 공헌했다.1973년에는 의회를 명료한 야당으로 연마하고, 그것을 'nu Swazi'로  묘사하였다. 1979년에 당파에 속하지 않은 의회는 선택되었고 권위는 왕의 손에 돌아왔다. 1982년 소부자의 죽음은 스와질랜드의 유일한 군주제 주의자 학회들이 살아남을 것인지에 관해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길어지는 권력투쟁은 지배하는 주문한 물건내에서 긴장을 고조시켰다. 리코코의  회원들은 과적인 힘을 붙잡고, 새로운 여왕을 지정했다. 그러나,  18세의 여왕(Ntombi)의 아들인 왕자가 1986년에 므스와티 3대 왕으로서 인스톨 될 때까지 궁전음모는 계속 되었다.새로운 왕은 그 조언하는 상태에 되돌아가는 리코코를 인정하고 그의 정해지는 수상과 장식장을 통하여 통치했다. 어떤 스와질랜드 정부라도 직면하고 있는  주요한 도전 중의 하나는 남아프리카와의 그 관계이다. 소부자의 아래에서 그 강력한 이웃  사람들에 대한  경제의존을 받는 동안 스와질랜드는 정치적인 자치를 유지하는 것을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왕도 인종 격리 정책 상태의 섬세한 균형과 그것에 반대하고 있는 힘을 유지했다. 1980년대에 의심받았던 아프리카의 국민 회의파 활동가들을 억제하는 것으로서의 두 나라의 국제 연합군들 사이의 협력의 더 큰  정도로 이 균형은 기울어 졌다.  행운들의 돌연한 반전안에서 스와질랜드의 활동가들은 지금 지지에 대해 남아프리카에서  이끌렸던 정부를 바라본다. 그 정치처럼 스와질랜등의 경제는 내부이고, 외부의 솔선들의 제품이다. 독립이후 국가는  경제성장율을 높였다. 농업에 있어서의 성공은 제 2차 산업들의 발전을 촉진했다. 석탄과 석면의 개발은 늘리게되었고, 수익의 중요한 소식통은 남아프리카에서  주말 교통에 의존하는 관광여행이다. 스와질랜드의 발전은 노동집약적이고, 자본 집약적인 프로잭트들의 결과로서 남아프리카의 투자에 대한 의존은 증가했다. 남아프리카에서  이주자 직원들을 포함하고 스와질랜드의 인구의 16%만이 1989년까지  형식적인 부문 고용안에 있었다.   최근까지의 경제는 남아프리카의 시장에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창문을 찾고있는 국제적인 투자가들에 의해 부양되었다. 예는 그 지역의 본부를 움직이고 남아프리카에서 스와질랜드 식물까지 식물에 집중한다고 하는  결단이 100명의  직원들만 사용하는  코카콜라의 것이지만,  모든 외환수익의 20%를 설명한다. 그러나 현재의 것은 남아프리카에서 과정을 개량하였고, 더 훌륭한 민주주의를 위해 압력을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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