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남아공, 남부아프리카 이야기

희망봉(Cape of Good Hope)1)반도

africa club 2012. 7. 17. 22:20

 

 

희망봉(Cape of Good Hope)1)반도

 

 

바다 쪽으로 약 75km의 암초가 뻗어있는 희망봉 반도(peninsula)는 마치 아프리카의 본토에 덧붙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지역은 지구상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고 울퉁불퉁한 바위들은 아열대 식물들과 꽃들 그리고 변화하는 빛과 색의 변화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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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는 한때 섬이었다. 약 600만 년 전에 물이 줄어들고 융기가 일어났다. 모래가 많은 낮은 지역은 아프리카 대륙에서부터 이어져있는데 케이프 평지(Cape Flats)로 알려져 있다.

 

봄(8월-10월)에 반도는 아름다운 색들로 치장한다. 키르스텐보쉬 식물원(Kirstenbosch Botanic Garden)2)은 그 화려함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다. 희망봉 자연보호구역(The Cape of Good Hope Nature Reserve)은 더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뮈젠버르그(Muizenberg)와 칼 베이(Kalk Bay) 사이의 산을 통해 걷는 것은 이상한 나라의 꽃, 동굴, 이상한 암석층과 꿈같은 숲 속으로 안내한다.

 

 


여름(11월-3월)에는 깨끗하고 밝고 그리고 건조한 남동풍이 불어오고 아침나절에는 대부분 조용하다. 서쪽해안에서 밀려오는 파도는 강하고 높게 일며 클립튼(Clifton)과 볼더스(The Boulders) 해변은 일광욕하는 사람들과 소풍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낚시꾼들은 펄스 베이(False Bay)으로 몰려들고 다이버들은 수면 아래에서 암초들 사이로 난파선을 탐색하고 청록색으로 물든 깨끗한 바다를 감상 할 수 있다. 

 

3월부터 5월까지 케이프는 가장 매혹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남동쪽은 점점 겨울을 차비하느라고 잎들과 풀들이 말라간다. 바다는 여전히 따뜻하고 과일은 풍성하게 생산된다. 꽃이 비록 적지만 나뭇잎은 가을의 생생한 빛깔을 띠고 공기는 느긋하게 우리를 감싸 안는다.

 

겨울에 반도는 초록빛을 띄고 있으며 신선하다. 여러 종류의 프로티아(protea)3)꽃들은 무더기로 피어난다. 구름이 끼거나 비가 내리고 북서풍이 불지만 날씨가 개는 날은 공기가 스파클링 포도주(sparkling wine)의 향기와 맛처럼 청량하면서 화창하고 아름답다. 땅은 폭포와 빠른 속도로 흘러내리는 개울물들로 반짝인다. 또한 구름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장관을 연출한다. 비록 수영하기에는 너무 차갑지만 동쪽 해안에서는 서핑하기에 좋다. 따뜻한 옷은 특히 밤에 꼭 필요하다. 테이블 산(Table Mountain)에 내리는 눈은 오래 남아있지 않지만 폴스 베이의 반대쪽에 있는 더 높은 산은 종종 하얗게 덮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 경치가 펼쳐진다.

 

 


희망봉 자연보호구역(Cape of Good Hope Nature Reserve)

 

프란시스 드라커(Francis Drake)경이 케이프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칭찬했던 곳은 현재 희망봉 자연보호구역이 되었다. 이 지역은 반도의 최 남단의 처녀지로 개발되지 않은 7680 ha를 포함하여 왼쪽의 슈스터 만(Schuster's Bay)에서부터 동쪽의 펄스 만까지 이어져 있다. 해안선은 남아공의 가장 드라마틱한 경치가 이어지고 있으며 거의 40km에 달하며 희망봉을 포함하고 있다. 반도는 끝 부분에서 세 지점으로 나누어진다. 희망봉이 가장 남쪽지점이며, 동쪽은 19세기의 천문학자 토마스 맥클리어 경(Sir Thomas Maclear)경의 이름을 딴 케이프 맥클리어(Cape Maclear)이며 더 동쪽으로는 희망봉(Cape Point)가 있다. 이곳에는 또한 등대와 무선표지가 설치되어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아름다운 드라이브 길은 시몬스타운(Simonstown)에서 자연보호구역을 통과하여 희망봉까지 나있다. 많은 작은 시내들이 흐르고 있으며 그중에서 가장 큰 클라스자거스 강(Klassjagers River)이 자연보호구역을 흐른다. 버펠스 만(Buffels Bay)과 올리판스보스(Olifantsbos)같은 야외 휴식처는 야외 취사장을 가지고 있으며 나무와 물을 이용할 수 있다. 버펠스 만에는 조수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수영장이 있고 보트가 정박할 수 있는 이동경사로가 만들어져 있다. 버펠스 강(Buffels River) 근처에 있던 19세기의 농장 농가는 이제 식당으로 바뀌었고 농가의 벽의 일부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일년 내내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자연보호구역은 야생 꽃이 흩뿌려진 것처럼 만발하는 봄철에 특히 아름답다. 일년 중 희망봉에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거의 없지만 바람의 정도와 영향은 다양하다. 여름에는 강한 남동풍이 불고 겨울에는 더 온화한 북서풍이 우세하다. 가을에는 봄과 같이 비교적 잔잔하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수목과 가축이 잘 번성하지 못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약간의 열대식물이 자라기는 하지만 다 자라면 그들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는 듯이 보이며 그들이 성장하는 이상한 각도는 그들이 그 장소에서 벗어나기를 무엇보다도 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암석이 있는 토양을 만드는 사암은 풍부하게 펼쳐져 있다.

 

거북과 다른 작은 생명체들은 관목 사이에 산다. 그러나 더 큰 동물들은 이 지역에 결코 잘 적응할 수 없다. 영양이나 코끼리도 이곳으로 이동해오지만 결국 날씨가 나빠지면 떠나고 만다. 얼룩말과 본터복(bontebok)과 같은 영양을 재도입하려는 시도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비비 원숭이는 떼를 지어 이 지역을 항상 돌아다닌다. 그들은 해안가에서 껍질을 부숴 열어 그 안의 연체동물을 먹기 위해 해변을 무리지어 다닌다. 

 

관찰되는 150종의 새 중에는 타조, 흰머리 물떼새, 까만등 갈매기, 가마우지, 설탕새(sugarbird), 케이프 자고새, 왕관 댕기 물떼새, 노란부리를 가진 오리와 케이프 산까치가 있다.

 

낚시는 반도의 양쪽에 나와 있는 암석 지점이 특히 좋다. ‘붉은 낭떠러지(red cliff)’란 뜻을 가지고 있는 가파른 루이크란(Rooikrans)의 턱진 곳은 낚시꾼들이 깊은 물에 직접 낚시를 할 수 있는 장소로 인기 있다. 빙어류(yellowtail)와 다랑어가 잘 잡힌다. 

 

이 지역은 해안에 수많은 유흥지가 건설되던 1928년에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기로 계획되었다. 결국 1939년 4월 11일에 케이프 지방정부는 토지수용을 위해 약 127,000랜드의 비용을 책정한 후 보호지로 선언하였다.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flying Dutchman)4)의 영원한 항해

 

 

바람이 휘몰아치며 울부짖고 대서양의 파도가 무섭게 바위를 후려칠 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유령인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이 희망봉에 출몰한다고 여겨진다. 

 

돛대는 부러지고 돛은 찟겨 지고 파손된 배의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유령선5)이 영원히 희망봉 주위를 돌아다니도록 운명지어졌다는 이야기가 몇 세대에 걸쳐 전해내려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전설이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돌로메우 디아스(Barthelomev Dias)6)로 거슬러간다고 알고 있다. 그가 1488년 아프리카의 최 남단에 도착한 유일한 유럽인으로 기록된  2 년 후 그의 배가 희망봉에 침몰하여 익사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전설이 1641년 귀향 중에 폭풍을 만난 네덜란드인 판 더르 데칸(Van der Decken) 선장의 배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 전설은 그의 배가 침몰하는  운명의 날까지도 그가 희망봉을 돌아서 갈 것이라고 맹세했다는 일화에서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뱃사람들은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을 흘끗 본 사람들은 모두가 판 더르 데칸처럼 죽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전설은 단지 귀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던 옛날사람들의 미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희망봉의 등대지기들은 종종 폭풍을 맞은 배들로부터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U-보트가의 승무원들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고 1939년 클렌카인(clencairn)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이 파손된 오래된 배가 갑자기 형체를 드러낸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아마 가장 유명한 기록은 1881년 6월 11일 영국 해군(Royal Navy) 전함인 바칸데(Bacchante)의 젊은 해군 사관학교 생도의 일기에 기록 되어져 있다. ‘새벽 4시,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은 우리 뱃머리를 횡단하여 지나갔다. 뱃머리에서 망보는 사람은 배가 좌현 뱃머리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보고했고 당직 장교 또한 배를 확실히 보았다고 했다...유령선의 이상한 붉은 불빛이 200 야드나 먼 거리에서 매우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망보는 사람은 망루에서 떨어져 죽었지만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의 저주는 해군 사관학교 생도에게 죽음을 가져다주지 않고 온전히 살려두었다. 그는 후에 조지 5세(George V)7)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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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망봉(希望峰 ; Cape of Good Hope) :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 주 남서부의 케이프 반도 남단에 있는 암석 곶(串).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르툴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을 확인한 후 포르투갈로 귀항하는 길에 처음으로 이 곶을 발견했다. 한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디아스가 이 곶을 폭풍봉으로 이름붙였던 것을 포르투갈의 주앙 2세가 희망봉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곶의 발견으로 유럽과 인도를 잇는 항로 개척의 가능성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디아스 자신이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명명했다고 밝히는 사료들도 있다. 험한 날씨와 거친 앞바다로 유명한 이 곶은 인도양에서 흘러온 모잠비크-아굴라스 난류와 남극해에서 오는 벵겔라 한류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풀과 낮은 관목림이 특징적인 식생이며, 이 곶은 반도의 남단을 차지하는 희망봉 자연보호구역(1939)의 일부를 이룬다. 희망봉 동쪽 2㎞ 지점의 포인트 곶에는 등대가 있다.
희망봉 :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서쪽 끝을 이루는 곶(串).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아굴라스곶의 북서쪽 160km 지점에 있다. 케이프타운에 가까운 반도의 맨끝으로서 케이프 포인트라고 불린다.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발견하였으며, 당시에는 ‘폭풍의 곶’으로 불렸다. 그 후 1497년 V.d.가마가 이 곶을 통과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데서 연유하여, 포르투갈 왕 주앙 2세가 카부 다 보아 에스페란사(Cabo da Boa Esperana:희망의 곶)라고 개칭하였다. 현재 희망봉 일대는 관광지로서 곶의 첨단까지 관광용 자동차도로가 통한다. 반도의 남단부는 자연보호지구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비()를 비롯하여 많은 동식물이 보호되고 있

 


2) 남아프리카 국립식물원(National Botanic Gardens of South Africa) : 세계에서 가장 큰 식물원 중의 하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키르스텐보스흐에 있으며 그 면적은 552㏊에 달한다. 6,200종류의 식물이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아프리카 남부산 식물들이다. 프로테아과(―科 Proteaceae)와 칼루나속(―屬 Calluna) 식물들처럼 아름다운 식물들도 있으며, 비늘줄기를 가지는 수많은 식물들과 함께 많은 수의 소철류가 있다. 이 식물원에는 9개의 온실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희귀식물들을 번식시키고 있으나 일반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3곳의 표본실에는 약 22만 5,000점의 식물표본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국립식물원의 가장 주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그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 중 위기에 처해 있는 식물들을 보존하는 것이다. 몇 년에 걸쳐 그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업적을 세웠으며, 멸종의 위기에 있는 많은 식물들의 표본을 모아왔다. 연구 결과 남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6곳을 지방 식물원 또는 자연보존지역으로 지정하였는데, 남아프리카에서 자라는 다육식물(多肉植物)이 5,000종(種) 이상 심어져 있는 우스터의 카루식물원(Karro Garden), 붓꽃과와 백합과 식물 가운데 비늘줄기를 지닌 식물만을 모아둔 이디스 스티븐스 케이프 플랫 식물보호지역(Edith Stephens Cape Flats Flora Reserve) 등이 이에 속한다.

 


3) 프로테아목(Proteales) : 쌍떡잎식물강(雙─植物綱)에 속하는 꽃피는식물의 한 목.
프로테아과(─科 Proteaceae), 62속(屬)의 관목과 교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750종(種), 남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350종 등 거의 대부분이 주로 남반구에서 발견된다. 또한 말레이시아, 아시아 남동부, 태평양 일부 섬, 아메리카의 중부와 남부에서도 자란다. 꽃 하나하나는 대개 작지만 빽빽하게 붙어 화려한 꽃차례를 형성하는 것이 이 식물들의 특징이다. 꽃은 4개의 수술을 가진 4개의 꽃덮이[花被]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술은 꽃덮이조각[花被片]의 끝부분에 달리며, 때때로 노출된 1개의 꽃밥만이 달리기도 한다. 홑잎이거나 여러 갈래로 갈라진 잎들은 규칙적인 나선 모양으로 달리며, 흔히 털로 빽빽하게 덮여 있거나 두꺼운 큐티쿨라층이 있어 수분 손실을 막기 위해 적응된 형태를 취한다. 이 식물들은 일반적으로 매년 건기가 긴 지역에서 자란다.
중요한 속으로는 그레빌레아속(Grevillea : 190종)· 프로테아속(Protea : 130종)·하케아속(Hakea : 100종)·헬리키아속(Helicia : 90종)· 류코덴드론속(Leucodendron : 70종)·페르소오니아속(Persoonia : 60종)이 있다. 온대지역에서는 여러 종들이 관상용으로 재배되고 있는데 미세하고 부드러운 털로 덮인 잎이 달리는 류코덴드론 아르겐튬(L. argenteum), 반크시아속(Banksia)의 오스트레일리아러니서클, 엠보트리움속(Embothrium)의 화이어부시, 하케아속의 하케아 등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자생하는 우의목(Grevillea robusta)은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마카다미아 인테그리폴리아(Macadamia integrifolia)는 식용의 씨를 얻기 위해 재배된다.

 


4) 플라잉 더치맨(Flying Dutchman) 유럽의 해상 전설에서 나타나는 유령선.
영원히 항해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저주받은 배이다. 유령선이 선원에게 보이면 재앙이 임박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가장 널리 알려진 유령선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반데르데켄 선장은 자신이 폭풍우치는 희망봉을 돌아서 항해해 올 수 있으며, 이것이 신이 자신을 구원해준다는 증거라는 자만에 찬 내기를 한다. 선장은 영원히 그 항로를 항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이 이야기는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1843)의 주제가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팔켄베르크 선장은 그의 영혼을 걸고 악마와 주사위 놀이를 하다가, 영원히 북해를 항해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는 것이다. 주사위 놀이 주제는 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노수부의 노래 Rime of the Ancient Mariner〉(1798)에서 다시 나타난다. 노수부는 항해 중에 유령선을 만나는데 그 배에서는 '죽음'과 '죽음속의 삶'이라는 대립되는 힘이 서로 노수부를 차지하려고 주사위 놀이를 한다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이다. 스코틀랜드의 작가 월터 스콧은 이 전설을 그의 이야기체 시 〈Rokeby〉(1813)에 원용해 선상에서 일어난 살인, 선원들에게 흑사병이 퍼져 모든 항구가 그 배의 입항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썼다.

 


5) 유령선(Phantom ship) : 어떤 원인으로 살해당한 사람의 혼백이 구제받지 못한 채 배 안에 남아서 바다 위를 표류한다고 하는 전설상의 배.
이런 전설로는 17세기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대표적이다. 불신앙(不信仰)의 죄로 영원히 저주받은 네덜란드 선장이 바다 위를 헤맨다는 이 전설은 원래 희망봉과 관련된 것으로 그 배를 만나면 위해(危害)를 입는다든가, 또는 여자의 애정으로 구제를 받는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그와 같은 전설에 첨가되었다.
유령선이 보통의 배와 다른 점은 바람에 거슬러 달린다든가, 배의 불빛이 바다 위에 비치지 않는다든가 하는 불가사의가 따르는 일이다. 독일의 동화 작가 W.하우프의 《유령선》에서는 배 안에 있는 피투성이의 시체가 한밤중이 되면 움직이기 시작하여 돛을 펴고 소동을 피우지만, 날이 새면 원래의 시체로 돌아간다. 그리고 유령선과 스친 배는 난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슬람교의 수도승을 죽인 벌로서 자기도 살해당한 알제리의 선장은 이렇게 50년간을 밤마다 유령선을 타고 달렸는데, 신앙이 두터운 이슬람교도의 덕분으로 저주에서 풀려나고 시체는 먼지가 된다. 이것은 전형적인 유령선 전설이다. 또한 항해하는 선박의 승무원을 아름다운 노랫 소리로 홀려서 죽이는 세이렌이나 로렐라이의 마녀 등도 유령선과 같은 해(害)를 끼치는 바다 유령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6) 디아스(Bartolomeu Dias) : Dias는 Diaz라고도 씀. 1450경~1500. 5. 29 희망봉 근처 해상.
포르투갈의 항해가·탐험가. 1488년 유럽의 탐험대를 이끌고 희망봉을 처음으로 발견, 대서양과 인도양을 지나 아시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15세기에 대서양을 탐험한 포르투갈의 모험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생애 초반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항해왕자 엔리케의 도선사(導船士)였던 사람의 자손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입증되지 않고 있다. 그의 신분은 왕실에 속한 종신(從臣)으로서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다. 디아스 데 노바이스라는 이름은 당대에 작성된 문서들에는 눈에 띄지 않고 1571년 그의 손자가 앙골라의 총독으로 임명된 것을 보여주는 증서에 유일하게 그 이름이 등장한다.


1474년 국왕 아폰수 5세는 아들 주앙(나중에 주앙 2세로 즉위)에게 기니와의 무역 감독과 아프리카 서부해안 탐사작업을 위임했다. 주앙은 아프리카 서부해안에 외국선박의 입출항을 봉쇄하고자 했으며 1481년 왕위에 오른 후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 지점 확인을 위한 항해를 명령했다. 항해에 나선 사람들에게는 포르투갈 국왕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한 석주(石柱) 여러 개가 주어졌다. 당시 항해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디오구 캉은 콩고에 도착한 후 앙골라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해 남위 13°26' 지점의 산타마리아 곶에다 주앙 2세로부터 받은 석주 하나를 세웠다. 디오구 캉은 자신이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귀족 작위와 함께 상을 받았다. 캉은 이후 재차 항해길에 올라 이번에는 남위 15°40'이 되는 지점에 석주를 세우고 크로스 곶에 또 하나의 석주를 세웠으며 남위 22°10'까지 항해를 계속했다. 주앙 2세는 캉이 인도양에 도달하기를 기대했으나 이같은 기대는 실현되지 못했으며 캉으로부터 더이상의 소식은 전해오지 않았다. 이에 따라 주앙 2세는 새로운 탐험의 임무를 디아스에게 맡겼다. 1486년 당시에는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오가네라는 곳에 한 위대한 통치자가 있으며 그가 바로 그리스도교 왕국을 건설했다는 전설의 인물인 프레스터 존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주앙 2세는 그때 육로로 인도와 아비시니아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페루 다 쿠비양과 아폰수 파이바를 파견해 놓고 있었으며 또한 디아스에게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을 찾아내도록 지시를 내렸다.


디아스의 선단은 디아스 자신이 승선한 '상크리스토방호'와 그의 동료 주앙 왕자가 지휘하는 '판탈레앙호' 그리고 페루 또는 디오구라는 디아스의 동생이 지휘한 보급선 등 모두 3척의 선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선단에는 당대의 뛰어난 도선사들이 승선하고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일찍이 캉 밑에서 항해에 참가했던 페루 데 알렌케르와 주앙 데 산티아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6세기 역사가 주앙 데 바로스는 디아스의 선단이 1486년 8월에 출항해 16개월 17일 동안 포르투갈을 떠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두아르테 파셰쿠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등 당대의 다른 인물들은 디아스의 귀환 시점을 1488년 12월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디아스의 출항시기는 1487년 8월로 추정된다.


디아스는 캉이 과거에 세웠던 석주를 지나 12월 4일 '세인트바르바라의 땅'에 도착했으며 8일에는 월비스베이에, 그리고 26일에는 세인트스티븐 만(엘리자베스 만)에 도달했다. 그는 1488년 1월 6일 폭풍을 만나 해안을 따라 항해를 계속할 수가 없어 며칠 동안 육지를 보지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뱃머리를 왼쪽으로 다시 돌렸으나 육지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다시 육지를 목격하게 된 것은 선로를 북으로 돌려 항해하고 난 뒤인 2월 3일이었다. 즉 디아스는 곶을 보지 못하고 돌아 항해했던 것이다. 그는 그곳을 안그라데상브라스(세인트블레이스 만, 그날이 블레이스 축일이었음), 또는 그곳의 주민을 보고 목자만(牧者灣)이라고 명명했다. 디아스 선단에 동승한 흑인들은 원주민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으며 이들 원주민들은 처음에는 포르투갈인들을 보고 달아났으나 나중에는 되돌아와서 공격를 가했다. 탐험대는 안그라다로카(지금의 알고아 만)를 향해 계속 나아갔으나 선원들은 항해를 계속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디아스는 간부 선원들의 견해를 수렴해 보았는데 이들 모두가 포르투갈로의 귀환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항해를 계속하기로 의견일치를 보고 난 후 디아스의 선단은 리우 두 인판테에 도착했다. 이 지명은 '상판탈레앙호'의 도선사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인데, 지금의 그레이트피시(흐로트-비스) 강 부근이 거의 확실하다.


곶을 돌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고 디아스는 귀환길에 올랐으며 그해 5월에는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곶을 눈으로 확인했다. 역사가 바로스는 디아스가 그 곶의 이름을 '폭풍의 곶'이라고 명명했으며 주앙 2세가 다시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두아르테 파셰쿠의 말에 따르면 희망봉이라는 이름은 디아스 자신이 붙였다고 하는데, 파셰쿠가 프린시페 섬에서 디아스와 합류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좀더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귀환 항해에 관해서는 디아스가 리우두레스가테(지금의 라이베리아에 있음)의 프린시페에 기항했으며 미나의 무역기지를 요새화했다는 사실 이외에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디아스가 파드랑데상그레고리우에 남긴 표식 가운데 하나가 그레이트피시 강에서 대략 56㎞ 정도 떨어진 폴스아일랜드에서 1938년 발견되었다. 또다른 표식 하나가 세인트크리스토퍼 만의 서쪽 끝에 세워졌었는데 그때문에 그곳의 지명이 디아스포인트로 명명되었다.


주앙 2세가 주최한 디아스 일행의 접견행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인도로의 항해계획이 마련되었다고 하지만 육로로 인도를 찾아나선 페루 다 쿠비양으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9년 동안 아무도 항해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주앙 2세의 계승자인 마누엘 1세가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유명한 항해를 허가했다. 디아스는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대와 함께 미나까지 동행했다.


다 가마가 인도 서부의 항구에 도달한 후 포르투갈로 귀환하자마자 재차 함대가 편성되었다. 12척으로 구성된 이 함대는 인도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그들과 대규모 통상을 개설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 함대의 지휘는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맡았으며 디아스에게도 소규모 선박 1척이 맡겨졌다. 이 함대는 희망봉으로 향하는 동안 대서양 서부해역까지 항해하면서 브라질의 에스피리투산투를 목격하기도 했다. 이 육지는 섬으로 생각되었으나 '진실한 십자군의 땅'이라 이름붙여졌다. 따라서 디아스는 브라질 발견에 참여한 셈이 되었다. 일행이 희망봉에 도달했을 때 디아스는 해상에서 실종되었는데 아마 처음으로 그가 항해했던 바로 그 해상에서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안토니우라는 아들을 두었다. 손자 파울루 디아스 데 노바이스는 앙골라 총독을 지냈으며 1576년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최초의 유럽인 도시 상파울루데루안다를 건설했다.

 


7)조지 5세(King George V) : 정식 이름은 George Frederick Ernest Albert.
1865. 6. 3 런던~1936. 1. 20 잉글랜드 노퍽 샌드링엄.
그레이트 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왕국의 왕(1910~36 재위). 후에 에드워드 7세가 된 앨버트 에드워드 공의 둘째 아들이다.해군에서 복무하다가 1892년 형 앨버트 빅터가 죽자 왕위를 잇기 위해 더욱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 했다. 1892년 5월 요크 공작이 되었으며 1893년 7월 형의 약혼녀였던 테크의 메리 공주와 결혼했다. 1901년 아버지가 즉위한 뒤 콘월 공작 겸 웨일스 공이 되었고 1910년 5월 6일 아버지를 계승해 1911년 6월 22일 대관식을 올렸다. 통치 초기에 그는 만만치 않은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혔다. 상원의 세력을 꺾으려는 헌법 투쟁이 아직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자유당 정부는 상원이 양보하지 않으려 하자 이 반대를 물리치기에 충분한 수만큼 상원 귀족직을 새로이 창설하겠다는 약속을 왕에게서 받아냈다. 1910년 12월의 선거에서 자유당이 승리하자 상원은 태도를 누그러뜨려 의회법(1911)을 통과시켰고 왕은 자신의 약속을 이행할 필요가 없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그의 위신은 크게 높아졌으며 그는 몇 차례에 걸쳐 프랑스의 전선을 방문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심각한 산업 위기에 직면했다. 한편 1923년에는 총리 앤드루 보너 로가 사임함에 따라 새로운 총리를 찾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커즌 경과 스탠리 볼드윈 두 사람 모두 연로한 정치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볼드윈이 보수당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믿은 그는 하원의원들 중 왕이 선택한 사람이 총리가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1928년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남은 통치 기간 동안 극도로 건강에 신경을 써야 했다. 1931년에 파운드화의 급락과 이에 따른 재정 위기로 노동당 행정부가 분열되었다. 그는 강한 정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램지 맥도널드와 내각의 일부 성원에게 맡은 직책에 남아서 보수당 및 자유당 소속 장관들과 연립내각을 구성해달라고 설득했다. 1935년 5월 즉위 25주년 기념행사 때 그에 대한 대중의 애정과 찬사가 쏟아졌다. 조지 5세는 5명의 아들을 두었다. 국왕이 된 에드워드 8세(윈저 공작), 국왕 조지 6세, 글로스터 공작 헨리, 켄트 공작 조지, 그리고 어려서 죽은 존 공 등이다. 딸 메리 공주는 하우드 백작 6세와 결혼했다. 해럴드 니콜슨이 쓴 국왕 조지의 전기가 1952년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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