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역사

1475년(AD 1475)

africa club 2001. 12. 30. 16:24
1475년(AD 1475)
말리(Mali) 이후 중부 니제르(Niger)의 황제의 권력은 송하이(Songhay)의 변화였다. 그 새로운 제국은 1464년에 송하이(Songhay) 왕위에 올랐던 알리왕의 출현과 맥을 같이했다. 그는 4년 후에 팀부크투(Timbuctoo)를 정복했고 그 이후 4년만에 젠네(Jenne)를 정복했다. 이와 같은 사실이 그에게 아칸(Akan)의 생산에 대한 완전한 통제와 블랙볼타(Black Volta)의 채금지를 가져다 주었어만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왜냐하면 포르투갈이 아칸(Akan) 해안으로 향하는 길을 현재 알고 있었고 남부 들판에서 생산되는 금들이 그들에게 가고있었기 때문이었다. 포르투갈은 약간의 혼란스러운 지리적 사실을 얻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서부 아프리카의 "금의 땅"의 기원지인 가나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기니아(Guinea)라고 썼을 때 기니아(Guinea)와 가나(Ghana)를 구별하는 것은 너무 어려워서 구분할 수가 없었다. 혹은 적어도 최근까지는 아니었다.
기니아(Guinea)의 발견은 사적인 모험심의 일부분이였다. 1469년에 포르투갈 정부는 리스본의 상인 '페나오 고메스(Fenao Gomes)'에게 아르구인을 넘어선 아프리카 무역의 5년간 독점을 인정했다. 이에 대해 고메스는 매년 500 크루사도스를 왕의 국고에 지불하고 또 다른 아프리카 해안의 100개의 단체들을 답사하기로 약속했다. -아르구인을 넘어선 그런 무역이 전체적으로 역설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꽤 어려운 기간- 그러나 고메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매우 오랫동안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의 수반들이 1471년 아칸(Akan) 해안에 도착했고 그는 글자그대로 그 이후 돈을 벌었음에 틀림없었다.
기니아(Guinea)는 고메스를 행운아로 만들어주었다: 결국 탐험이 그가 귀국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흥미로운 모험이었다. 모든 초기의 보도들은 기니아 걸프의 해안선이 안정적으로 동쪽으로 흘러감을 가리켰다. :이것은 100개 단체와의 몇 년 기간중 한 해는 포르투갈을 인도양과 동양 향료 무역의 부유한 것들로 인도했다. 불행하게도 고메스의 계약 아래 마지막 여행은 그것이 쉽지는 않을거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페르난도 포(Fernando Po)(고메스의 수반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을 따른)섬 저쪽에 해안이 날카롭게 남쪽으로 향했고 탐험대가 다시 돌았던 그 지점에선(카페 산타 카테리나) 아직도 동부보다는 남부로 보다 많이 달리고 있었다.
모로코(Morocco)에서는 포르투갈에게 몇 개의 해안 도시를 가질 기회를 주었던 내전이후 마리니드가 그들의 고관에 의해서 와타시드로 대치되었다(1471). 그것은 보다 좋은 변화가 아니었다. 마그레브(Maghreb)의 다른 힘처럼 모로코(Morocco)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과 비교됨으로써 인근의 무력한 국가로 표류되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