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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드왈라(Sudwala) 동굴의 전설

africa club 2012. 7. 17. 22:00

 

 

4. 수드왈라(Sudwala) 동굴의 전설

 

‘바위 위에 바위(crag on crag)’라는 뜻을 의미하는 만켈레켈레(Mankelekele)로 잘 알려진 산맥이 뻗어 있는 음푸말랑가(Mpumalanga) 주에 있는 미델버르그(Middelburg)와 넬스프르트(Nelspruit) 사이에 위치한 수드왈라(Sudwala) 동굴은 하우트보스루업(Houtbosloop)가 내려다보인다. 하우트보스루업은 크로커다일 강(Crocodile River)의 한 지류이고 N4 도로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 약 200만년전에 물과 화학 작용으로 인한 침식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고 건기와 우기가 번갈아 나타나는 날씨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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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고대 수드왈라(Sudwala) 동굴이 약 1800 만 년 전에 인간에 의해 점령당했던 증거가 있는데 그 장소에서 석기 연장품이 발견되었고 그것은 아마도 현재 그 동굴 입구에 전시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하빌리스(Australopithecus habilis)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 분쟁의 배경

 

현재 스와질랜드(Swaziland)1)왕국의 최초 거주자는 산(San)족이었지만, 이들은 16세기에 대거 이주하면서 소토(Sotho)족으로 대체되었다. 약 200년 후에 소토(Sotho)족은 스와질랜드(Swaziland) 종족 중에서 가장 우세한 그룹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 이후에 18세기 말에는 응구와네(Ngwane) 3세 왕이 그의 부하-거의 들라미니(Dlamini) 씨족 집단-들을 이끌고 남부 모잠비크로부터 레봄보(Lebombo) 산맥을 넘어 로밤바(Lobamba)라는 수도를 건설하였다. 그 수도는 현재 스와질랜드(Swaziland) 왕국에 있는 퐁골라(Pongola) 강의 북쪽 연안에 있는 것이었다.

 

 


로밤바는 여전히 스와질랜드의 발상지로 여겨졌고 ‘진정한/순수한 스와질랜드’의 원천이었다. 그 종족 사람들이 소그룹의 ‘응구와네(Ngwane)의 부하들에게 가서 그들 스스로를 응구와네의 사람들’인 바카응구와네(bakaNgwane)라고 말하고 그들의 국가는 ‘응구와네의 국가’인 카응구와네(kaNgwane)라고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응구와네는 그의 아들인 은두붕구냐(Ndvungunya)와 그의 손자 소부자(Sobhuza)2)1세 때에도 성공적이었지만, 이들은 매우 위험한 시기에 통치를 하였다. 19세기 초반 줄루(Zulu)족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샤카(Shaka)의 통치 아래 ‘강제 이주’를 의미하는 디파콰네(Difaqane)3)로 불리는 영토팽창정책을 펼쳐 남부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에 그의 통치권을 펼쳐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두붕구냐와 소부자 1세 모두는 그들의 목표를 위해 철인 정치를 하였다. 예를 들어, 은두붕구냐는 대규모의 스와질랜드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에, 소부자는 수많은 주변 종족들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주목할만한 성공을 가져왔다.

 

소부자 1세의 통치기간 동안에 퐁골라 강 이남에서 가장 강력한 그룹은 지위드(Ziwide)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은드완드웨(Ndwandwe) 족이었다. 지위드가 그의 관심을 북부의 소부자 쪽으로 두었을때-저항이 문제 밖으로 표출되었을 때-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그 위험으로부터 북으로 피신을 하였다. 소부자와 그의 추종자들은 서부 산맥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하였으며 결국 스와질랜드의 서쪽 한가운데까지 가게 되었다. 그곳의 수많은 동굴은 위험으로부터 안식처를 제공할 수 있었다. 점령군과 효과적으로 대체하기 위해서, 소부자는 음디짐바(Mdzimba) 산맥에 새로이 강력한 기반을 두어 로밤바(Lobamba)라는 새 수도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옛 레봄바(Lebomba)와 수년 전에 세워진 현재 왕국과는 구별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소부자 1세가 강력한 군사뿐만 아니라 외교적인 수단을 잘 활용하였다는 점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점이다. 예를 들어, 그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그의 아내로 지위드의 딸을 맞이하였고 그의 두 명의 딸들을 샤카의 후처로 보냈다. 국가간 동맹을 체결하고 이러한 방법으로 충돌을 피하면서, 이 현명한 지도자는 쉽지만은 않은 평화로운 국가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후에, 샤카의 동생이며 후계자인 살인마 딩가네(Dingane)가 그 지역을 침략했을 때, 소부자는 약탈을 일삼는 침략자들에게 저항하기보다는 언덕 안쪽으로 피신하는 것이 더 낫다고 결정하였다. 그리고 1838년에 그는 딩가네의 점령군을 압도적으로 무찔렀고, 딩가네는 피의 강 전투(Blood River Battle)에서 보어(Boers)군들에게 패배하였다.

 

 

3. 음스와티(Mswati)와 솜쿰바(Somcumba)

 


1839년 소부자가 죽기 직전에, 그는 그의 아들 음스와티(Mswati)와 솜쿰바(Somcumba)를 로우벨드-스와질랜드(Lowveld-Swaziland) 지역으로 보내서 새로운  스와질랜드 왕국을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이 재건노력이 진행 된지 한달도 못 되어서  소부자는 죽었고 왕좌는 비어 있었다. 비록  소부자가 이미 그의 후계자로서 어린 아들 음스와티를 간택하였으나, 그는 아직 취임이 확정된 것이 아니어서 그의 이복형인 솜쿰바가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솜쿰바는 적절한 시기에 음스와티에게 정권을 넘겨주려는 의도였지만, 솜쿰바는 음스와티가 적절한 나이가 되었을 때 왕정을 물려준다는 이 결정을 거의 완벽하게 깨뜨렸다. 그래서 이 결정은  스와질랜드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심한 분열을 일으켰다. 일파는 소부자의 후계자로 선택된 음스와티를 지지하였다. 그 스스로는 신이 내려준 권리라고 믿으면서 그 자신을 왕이라고 칭하였다. 다른 일파는 그의 이복형인 솜쿰바를 지지하였는데 그 사람들은 그의 어린 동생보다는 솜쿰바가 더 나은 왕이라고 믿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솜쿰바와 그의 수하들은 스와질랜드 외부로 나와서 리덴부르그(Lydenburg) 지역으로 갔다. 그 곳은 그들이 음실레지(Msilezi)강 - 스타트(Stat)강 -의 연안에 존드와고(Zondwago)라는 마을을 세운 곳이며 수드왈라(Sudwala) 가까이에 있고 방어하기도 쉬우며 신선한 물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이다.

 

얼마되지 않아 바로, 솜쿰바는 음스와티와 그의 병사들이 존드와고(Zondwago)로 전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즉시 동굴안으로 피하기로 결정하고 솜쿰바와 그의 부하들은 긴 기간동안에 대비하여 음식물, 무기들, 소떼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음스와티와 그의 부하들은 처음에 동굴 입구에 불을 피워서 그 연기로 솜쿰바를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자연 바람이 동굴 입구의 연기를 날려버려서 실패하였다. 또한 음스와티는 반역자들이 굶어죽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솜쿰바의 부하 중 한 명이 탈출하여 보어(Boer)인으로 구성된 특별 기습부대에게 원조를 구하여 리덴버그(Lydenburg)로 피난 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보어인들은 음스와티 보다는 오히려 솜쿰바를 더 좋아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솜쿰바가 줄루족인 딩가네의 죽음에 부분적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보어인들에게 도움을 받게 된 것이고, 음스와티는 크로커다일(Crocodile)강 동쪽연안까지 추격을 받았다. 여기에서 양측 군사들은 상당히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면서, 솜쿰바와 음스와티는 보어인의 지지를 받기 위해 서로 경쟁하여 양측에서는 상대편의 가축을 훔치는 것에 대해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 상황은 결국 음스와티와 그의 부하들이 크로커다일 강을 건너 다시 존드와고(Zondwago)를 공격할 때인 어느 이른 아침에 종결되었다. 솜쿰바는 이 전쟁에서 매우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고 그의 추종자들은 대규모 학살을 당하였다. 그 때, 그의 아버지를 위한 사명감에 도망을 쳐서 달아난 솜쿰바의 아들 중 단 한 명만이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 전쟁이 끝난 이후에, 음스와티가 그의 이복형을 해치지 말라는 강력한 지시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의 명령에 불복종하였기 때문에, 솜쿰바의 머리가 음스와티에게 배달되었다. 음스와티는 그의 인두나(Induna)4)들을 소환하여,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즉석에서 사형시켰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 이유는 병사들이 스와질랜드 왕을 죽인다면 그는 분명 다른 왕들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솜쿰바가 패배하자, 젊은 음스와티는 확고하게 왕으로 추대되었고 몇 년이 지나고 난 후에 그는 가장 강력한 왕이라는 평판을 듣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스와질랜드에서 가장 전쟁을 훌륭하게 이끄는 왕이라고 말하였다. 1865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우리가 현재 스와질랜드라고 부르는 왕국은 안전하고 부강한 왕국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스와질랜드 국민에 대한 음스와티의 단호하고 매우 막강한 지도력의 직접적인 결과일 것이다.

 

 

4. 자연 그대로의 경이로움을 지닌 수드왈라(Sudwala)

 

험한 산비탈로 둘러싸인 음푸말랑가(Mpumalanga) - 언제나 푸르른 초목으로 우거진 - 의 동굴은 수드왈라(Sudwala)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할 점이다. 그 동굴은 나라 전체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도로와 공간으로서 세세한 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 중턱까지 약 30km에 다다르는 그 고딕(Gothic)양식의 내부에는, 동굴을 연결하는 크림색, 금색, 붉은색, 갈색의 종유석과 석순 모양의 가고일(Gargoyle ; 괴물꼴 홈통 주둥이)로 가득 차 있다. 이 석회암 종유석들은 칼슘이 퇴적된 결과로서 생성된 것인데, 수드왈라를 유명하게 만든 장대한 기둥을 만들어내기 위해 결국 동굴 바닥에 광천수가 똑똑 떨어지면서 석순과 만나서 된 것이다. 이것들 중에 가장 주목할만한 점 하나는 폐쇄된 복잡한 동굴 사이로 울려퍼지는 메아리 형상을 한 원통형의 공(Gong) -스와질랜드의 왕권을 노리던 전설적인 이의 이름을 딴- 이라는 솜쿰바의 종유석이다. 이 동굴의 다른 놀라운 특징은 거대한 크기의 P R 오웬 홀(Owen Hall)의 내부인데, 그 동굴 자체 내에서 훌륭한 음악콘서트를 해도 될 정도로 놀라운 음향효과를 가졌다.

 

그 동굴 내부에는 땅을 파서 낸 구멍의 흔적이 거의 없었고 최초 거주자나 방랑자들이라고까지 알려져 있는 스와질랜드 인들의 실제적인 흔적조차 없었다. 방문객들은 동굴의 약 600m 정도를 답사해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고, 수드왈라 동굴은 남아프리카에서 문화적, 역사적, 자연적인 중요성에 최소한의 방해를 받은 장소 중에 한 곳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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