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이집트

africa club 2003. 2. 3. 11:30
1] 이집트 개요 - 일반적 현황

  면 적 : 1,102,000 ㎢
  지 형 :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 북위 22  와 32  사이에 위치하며, 총 국토면적은 한반도의 5배 정도인 1,002천㎢로 남북간 최장거리는 1,024 ㎞이고, 동서간 최장 거리는 1,240㎞이다. 북쪽은 지중해, 동쪽은 홍해에 면하고, 북동부는 이스라엘과 접경을 이룬다.
  자연환경 : 나일강이 남북으로 관류, 하구에 넓은 삼각주를 이루고 지중해로 흘러든다. 건조기후로 국토의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이다. 주민은 나일강유역 및 삼각주지대, 수에즈운하 연안지대에 집중해 있으며, 대부분이 고대 이집트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콥트인이다.
  인 구 : 64,824,466 명 (1997.7월 기준)
  연령구조 :  0~14세 - 36% (남자 12,080,281. 여자 11,556,970명)
              15~64세 - 60% (남자 19,616,790. 여자 19,228,163명)
              65세 이상 - 4%  (남자  1,050,540.  여자  1,291,722명)
  주요도시 : 카이로 (수도), 알렉산드리아, 룩소
  종 교 : 이슬람(94% - 수니파), 콥트교, 기독교 (6%)
          실제로는 기독교 숫자가 10% 이상이다.- 콥틱, 카톨릭, 복음주의등. 다른 이슬람제국과  다르게 종교상의 계율 수호 방법은 관대하고 유럽 생활양식의 영향이 강하고, 종교상의 완고성은 특별히 느낄수 없다. 라마단 시기를 포함해 외국인의 알코올, 돼지고기 등의음식은 자유이다.
  언  어 : 아랍어, 영어, 불어
  기 후 : 카이로를 비롯한 내륙이 아열대 기후. 지중해 연안이 지중해서 기후이다. 사막성 기후로 연중 강수량이 가장 많은 지역인 알렉산드리아 지역도 연중 강수량이 800㎜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지역은 80           ㎜ 이하이다. 하절기에는 내륙지방의 기온이 38。C~43。C로 매우 더운편이고, 지중해연안 지방은 최고 기온이 32。이다. 이집트 상형문자에는 '비' 를 뜻하는 말이 아예 없을 정도로 대체로 건조한 편이다.
  시 차 : 우리나라보다 7시간 늦다. 근처의 이스라엘, 그리스, 터키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체제 = 공화제
  의회형태 = 단원제
  국가원수 = 대통령 (무제한 연임이 가능하다.)
  자원 = 석유, 천연가스
  공식 이름 = 이집트 아랍공화국
  산업 = 산업은 농업 중심이었으나 공업, 수송, 통신의 투자액이 증대하고 있고, 석유 산출국으로서 석유화학공업 등의 신장과 풍부한 천연자원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목화, 옥수수, 사탕수수, 곡물 등이 있고, 이들을 산출하는 관개농업이 경제의 기본을 이룬다. 교통은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에즈운하를 비롯하여, 나일강 연안과 삼각주지대에 운하, 철도, 도로가 발달되어 있다. 카이로 주변의 가자와 시카라의 피라미드군, 록소르의 테베유적과 각종 신전 등이 나일강 주변에 산재해 있어 관광 수입이 국외 근로자의 송금과 석유수출 다음으로 중요한 외화 수입원이다.
  우리와의 관계 = 우리나라와는 61년 12월 영사관계를 수립하였고, 북한과는 63년 수교하였다.


☆주요도시 카이로
  - 도시 개요 : 이집트 북부, 나일 델타의 남단부터 10 수㎞ 남쪽에 위치한 이집트 아랍 공화국의 수도이다. 카이로는 주변에 고대도시 멤피스, 헬리오 폴리스를 포함한다고 해도 이집트에서는 비교적 신도시이다. 마을의 발생은 7세기에 아랍의 장군이 모스크(회교사원)를 세워 마을을 만든 이래, 차츰 큰 마을로 발전해 갔다. 몇 차례의 이슬람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면서, 도시는 북쪽으로 확대해 갔다. 10세기에 파티마조가 신도시를 건립, 카이로(아라비아어로 멜카헤라: 승리의 도시라는 의미) 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 12~13세기에 아이유브조 시대에는 상공업 도시로 번영, 13~16세기의 마믈루크조 시대에는 최고 성수기를 맞았다. 현재 시내에 남은 역사적 건조물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것이다. 18세기말부터 프.영 점령시대에 따라 확장, 정비되었다. 카이로 시가는 구시가, 19세기 중엽 이후의 신시가, 제 2차대전 이후의 교외 주택지로 나뉘어져 있다. 구시가에는 후스타트의 서쪽에 수많은 모스크가 서있고, 신시가는 타아리루 광장으로부터 방사상으로 도로가 되어있고, 루쿠문의 근처에는 정부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2] 역사와 문화, 종교 그리고 경제..

@역사와 문화

♧ 그리스 & 로마 치하의 이집트

# 마케도니아의 이집트 점령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기원전 332~30년경)
  기원전 332년 가을 알렉산더 대제의 마케도니아 - 그리스 군이 이집트로 진군하자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그는 그리스까지 이름이 나있던 리비아 사막에 있는 시와 오아시스 아문 신전을 방문하여 그가 아문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아냈는데, 이를 계기로 이집트인들은 그를 새로운 파라오로 인정했다. 알렉산더는 나일 삼각주 서편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고, 지중해에 면한 이 항구도시는 이집트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이집트 통치를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집트인 행정관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떠난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이집트는 우여곡절을 거쳐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집트 왕실의 전통을 따라 친누이와 결혼을 했으며, 이러한 관행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전통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초기 160년 동안이었다.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 권력 투쟁이 빈발하였고, 전성기 때 영토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되어, 마지막 100년은 로마의 보호 없이는 독립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연대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려 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하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 당하여 자살할 때까지 300년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이었고, 학문과 예술의 수준이 세계 최고인 도시였다.

# 로마(기원전30년 - 기원후 395년경)와  비잔틴 제국의 지배(395~641년)
  야심차고 보기 드물게 유능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살로 고대 이집트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제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이집트의 전통을 존중하였고, 이스스 숭배를 비롯한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로마까지 파급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이집트로 전파된다. 기독교는 발생 초기 박해를 받았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보호 속에서 급격히 발전한다. 특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집트의 모든 우상 신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바 있다. 이집트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비잔틴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자 이집트에서의 토착종교는 거점을 점점 잃어갔다. 기독교 수도자와 은둔자들이 급격히 늘어나 세게 최초로 이집트에 수도원이 등장하였다.

  성서, 성자들과 순교자들의 삶에 대한 번역물들이 주를 이루는 풍부한 콥트 문학이 이집트에서 발전한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는 616년 페르시아에 합병된다. 1517년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정복된 후, 1805년 모하메드 알리가 새 왕조를 세운다. 1869년 수에즈운하가 개통되고, 영국에 무력 점령당하였으며, 191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922년 형식적인 독립을 얻었으며, 1836년 영구-이집트 동맹의 체결로 영국군은 수에즈운하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철수하였다. 1952년 나세르 중령을 중심으로 한 군부 쿠데타가 성공, 1953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나세르는 아랍 사회주의 및 아랍 통일을 두 기둥으로 삼아 농지개혁에 따라 소유지를 제한하고, 1956년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였으며,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과 2차 중동전쟁을 벌이는 등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967년 이스라엘과 3차 중동전쟁에서 패배, 시나이 반도의 가자지구를 상실하였다. 1970년 나세르의 사망 직후, 부통령 사다트가 대통령을 승계하였고, 1973년 4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하였다. 1979년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으나, 1981년 이슬람교 과격파와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국민투표에 의해 무바라크 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사다트의 평화노선을 계승한 무바라크 정권은 1982년 이스라엘로부터 시나이반도를 돌려받았고, 1987년 무바라크는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에 재선되어 독자적인 외교를 전개, 1989년 아랍석유수출기구에 복귀하고, 레바논과의 재수교와 리비아와의 국경봉쇄 해제를 실시하였다. 1989년 시리아와도 국교를 재개하고, 이라크. 북예멘. 요르단 등과 새로운 경제공동체인 아랍 협력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페르시아만 전쟁 때는 반(反)이라크 아랍군을 주도하였으며,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 및 시리아와 집단 안보체제 형성을 추진하였다. 1991년 GCC 이집트 경제부흥을 위해 100~150억 달러 규모의 원조기금 창설을 결정하였다.


♤ 피라미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건축물인 피라미드는 고왕국의 전성기인 기원전 2700년경에 만들어졌다. 기자의 3대 피라미드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은 기원전 2690년 제 4왕조의 2대왕인 키오프스(cheops)의 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일명 쿠푸(Khufu)왕의 피라미드라고 불리운다. 높이 147m, 밑변 230m, 경사각 51도50분으로 정확하게 쌓아져 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각 모서리가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있고, 거의 완전한 직각을 이르고 있다. 이 피라미드는 입구와 조그만 내실을 제외하면 모두 석회석으로 이루어졌는데, 돌의 크기는 높이 1m, 폭 2m, 길이는 각각 다르다. 평균 2.5톤의 이 돌을 밑변에서 꼭대기까지는 210단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230만개(또는 250만개)의 돌이 필요하였다. 가령 이런 돌로 돌집을 쌓으면 12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전문가는 이런 돌을 30센티미터로 잘라 연결하면 지구의 2/3을 에워 쌀 수 있다고 하며, 높이 3m, 두께 30㎝로 자른다면 프랑스 전체를 둘러쌀 수 있다고 한다. 이 돌들의 무게를 합치면 684만 8,000 톤으로 만약 적재량 7톤 짜리 화물로 운반하면 97만 8,286대 가량의 화물차가 필요한데, 이 화물차들을 연결해보면 그 길이는 6,200㎞에 이른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건설사업은 돌을 케내어 뗏목으로 운반하고 공사를 하기 위한 도로를 만들고 피라미드의 지하공사를 하는데만 적어도 10만명의 노예가 석달씩 교대로 해서 10년이 걸렸고, 돌을 높이 쌓아 올리는데도 20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이 돌은 채석장에서 현장까지 나일강을 이용해 운반하였다. 그런데 나일강은 수량이 풍부한 봄 한 철 석달 밖에 이용할 수 없다. 그러면 필요한 석재 전부를 운반하는데는 20년에 걸쳐 무려 50만번을 왕복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쌓을 때는 물론 사람의 힘으로 거대한 돌을 위로 위로 밀어올렸다. 이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 겉부분의 돌은 아주 매끄럽게 다듬었으나, 내부의 돌은 거친 그대로 사용했다.
지구 표면에 있어서의 위치는 놀라운 점을 시사한다. 조셉 시즈와 그의 동료의 연구에 의하면 피라미드의 위치는 대륙의 질량 중심에 위치해 있고 지구 전체의 면적을 거의 정확히 4등분하는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즉, 북남방향으로는 그리니치 동방 31도선인 가장 긴 경선과 동서방향으로는 북위 30도선으로 대륙의 가장 긴축을 이루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토록 오래 전에 세워졌는데도 동서남북방향으로 정확히 곧게 서 있으며, 단지 진북방향으로 3분 빗나가 있는데, 현대에 잘 지어졌다고 하는 파리 천문대도 진북방향에서 6분정도 빗나가 있는걸 보면, 그 정확성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피라미드의 건축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된 바 있었다. 그 이론 중의 하나는 고용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농업, 광업, 상업의 자원들이 더 이상 전체 이민의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다. 이 이론은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피라미드 건설자에게 피라미드가 일차적으로 종교, 정치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피라미드는 의심의 여지없이 신성한 파라오들의 무덤을 의미했다. 파라오의 권력이 강할수록 그의 무덤 또한 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파라오가 국가를 대표하는 존재였으므로, 피라미드에는 분명히 정치적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피라미드는 지배자들의 영광을 드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이집트 국가의 힘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이념을 고양시켜 주기도 했던 것이다.
피라미드에는 그 지명도와는 반대로 많은 수수께끼가 남아있다. 히에로글리프가 해독되어 만자 자료가 고대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지만, 피라미드에 대해서는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건조되었는가에 관한 기록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 수에즈운하
최초의 운하는 기원전 2100년에 계획되어 네코가 지중해와 연결 공사를 시작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중단하였고, 그 후 기원전 500년경 다리우스 1세가 홍해와 대염 호수(Great Bitter Lake)를 거쳐 부바스티스(Bubatsis)의 나일강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이 수로는 7세기 아랍의 상인들이 이집트의 농산물을 실어 가는데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100여년 동안 사용되다가 회교 내분으로 수로를 이용한 곡물 운반이 중단 되자 운하는 폐기 되었다.
1798년 나폴레옹이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수석 기사의 계산 착오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주 카이로 불란서 영사였던 페르디난드에 의해  1859년 공사가 재개되었으며, 그로부터 10년 후인 1869년 11월에 프랑스인 레셉스의 이해 다시 건설, 총 연장 161㎞의 운하가 개통되었다.
프랑스에 이서 영국이 경영하고 있었으나, 1952년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대통령 압델 나세르에 의해 1956년 7월 수에즈운하 회사를 국유화하였고, 기득권을 상실한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강점하는 등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 후 1967년 3차 중동전쟁으로 운하가 폐쇄되었다가, 1973년 사다트 대통령의 시나이 반도 탈환과 더불어, 이 운하는 이집트 정부의 관리하여 폐쇄 8년 만인 1975년 재개통 되었다.
운하는 얕은 대형의 단면형태로 되어 있으며, 1869년 개통 당시 깊이 약 8m, 흘수 약 5m 이었으나, 1956년 깊이 13~15m, 흘수 11m 가 되었다. 80년 평균 수면나비 약 200m , 깊이 15m 가 되어 만적시에는 6만 t, 공선시에는 15만 t급 유조선의 통행이 가능하다. 하루 평균 100여 척의 선박이 이용하고 있으며, 전세계 물동량의 14%가 이 운하를 통과하고 있으며, 통과 소요간은 약 15시간이 걸린다. 현재 운하의 폭은 200미터, 평균 수심은 20미터인데, 교통량이 늘어남에 따라 꾸준한 주설 확장을 계속하고 있고, 현재 운하의 길이는 173㎞에 달한다.
수에즈운하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최단의 해로이다. 그러나 선박 통과율은 수용능력의 53%에 머무르고 전세계 해상무역량의 6%밖에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한해동안 하루 평균 통과 선박수는 40.2척을 기록, 전년의 41.2척보다 감소했다. 한해에 1만5천척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같은 수치는 수에즈운하가 한창 호경기였던 80년대와 비교하면 감소세가 더욱 두드러진다. 82년에는 하루 평균 61.8척, 연간 2만3천척이 통과했다. 또 최근 통계를 보면 금년 6월 한달동안 운하를 통과한 선박수는 1188척으로 작년 같은 기간의 1226척보다 감소했다. 통과료수입도 95/96 회계년도의 18억 9200만달러에서 96/97 회계연도에는 18억2400만달러로 줄어들었다.
수에즈운하의 매력이 줄어든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속속 건설된 송유관과 가스파이프라인이 유조선을 대체하고, 초대형 유조선들은 희망봉을 돌아가는 먼 길을 선택하고, 운하를 대체할 육상수송루트가 개척되었다. 수에즈운하청장 하르카드 파딜은 수에즈운하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높아지는 가운데 유조선의 유치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유조선은 현재 운하청 수입의 1/3정도이나, 67년 전쟁으로 폐쇄되기 직전에는 65%까지 도달한 바 있다. 석유를 만재한 듀조선은 제대로 운항하려면 68~70피트의 수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에즈운하는 현재 수심이 58피트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91년부터 95년 사이에 홍해에서 지중해 쪽으로 가는 만재 유조선은 한해 3500척에서 2400척으로 30%가량이나 감소했다.
수에즈 운하청은 초대형 유조선을 유치하기 위해 운하의 수심을 72피트로 늘이기로 했다. 오는 2010년까지 계속될 이 공사를 위해 3만마력에 가격이 1억달러가 넘는 세계 최대 최신의 준설선을 투입했다. 그러나 운하수심을 깊게 하더라도 유조선들이 수에즈로 돌아오리라는 전망은 불투명하다.


  ♨ 나일강(The Nile)
나일강은 근원이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빅토리아 호수에서 시작하여 열대 초원을 흐르는 백나일과 에티오피아의 산악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들이 모여 이루는 청나일이 수단의 카루틈 남방에서 합류하여 이집트의 젖줄이 된다. 여기부터는 전혀 유입되는 물 없이 곧장 지중해까지 북으로 흘러간다.
아프리카 중부 고원의 봄비는 몇 달 후 이집트를 범람하는 큰 송수로 변하는데 대개의 홍수는 수해를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나일강 홍수는 7월에서 10월에 걸쳐 이집트의 완만한 사막을 서서히 흘러가면서 온갖 수목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뭇 짐승들이 서식 할 수 있도록 한다.
수백 ㎞를 흘러온 나일강은 카이로 북방에서 둘로 나누어져 나일 델타란 넓은 대평원을 만든다. 이렇게 형성된 땅이 한때는 세계의 곡창이라고 알려진 비옥한 땅인데, 이것은 홍수가 싣고 오는 아프리카 내륙 지방의 부엽토가 서서히 침전 되면서 자연의 퇴비를 깔아주는 결과이다. 이와같이 해마다 부엽토를 더해 가면서 이 비옥한 땅은 검은 색을 띠게 되었고, 그래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검은 땅이란 뜻에서 케미(Kemi)라고 불렀다. 이처럼 나일강은 자연의 선물을 남겨 주면서 서서히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것으로 약 6500㎞의 장구한 여행을 마친다.
연중 행사처럼 매년 어김없이 범람하여 수해가 아닌 수해를 안겨주는 나일강을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모든 것의 근원으로 보았고 또한 숭배하였다. 고대 이집트의 계절은 3계절로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나일강의 범람과 연관된 것으로 홍수가 나서 델타 지역이 물에 잠겨 있는 7~10월은 농한기, 물이 빠져나간 11~2월은 농번기, 그리고 3~7월은 추수기이다.
이렇게 수 천년을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강을 사람의 힘으로 조종해보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계속 되어서 19세기 초 케네디 모하멧 알리((Khedive Mohammed Ali)는 이집트 현대화 작업을 시작하여 나일강을 알렉산드리아의 식수원이 되게 하였고, 카이로 북쪽에 갑문장치를 설치하여 많은 농토를 확보하기도 하였으며, 1972년에는 아스완 하이 댐을 만들어 매년 범람하던 나일강은 인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강변의 많은 땅들은 전천후의 농토가 되었다. 그러나 나일강의 선물인 천연퇴비는 영영 잃어버리게 되었다.


■ 이집트, 출애굽기, 그리고 이집트 왕자 (Egypt, exodus and Prince of Egypt)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출발한 연대에 관한 견해로는 두 가지의 학설이 유력하다. 보다 빠른 견해는 이 사건을 기원전 1445~1440년 무렵 아멘호텝 2세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또 다른 견해는 람세스2세 치하에서 기원전 1290년경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성경의 기록은 초기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열왕기상 6:1에는 성전 건축이 출애굽(애굽 - 이집트) 사건 후 480년이 지난 솔로몬 재위 4년에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솔로몬 재위 4년이면 기원전 960년경이다. 따라서 출애굽의 시기는 1440년이 되는 셈이다. 또 1100년경에 활동했던 선지자 입다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을 정복한 지 300년이 흘렀다(사사기11:26)고 말한 것으로 보아 출애굽의 연대는 기원전 1440년경이 되는 셈이다.
고고학적 자료를 종합해 볼 때, 더욱 성경이 초기설을 주장하고 있으므로 실제적으론 출애굽의 연대를 기원전 1445~140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 이집트 상형문자 (Egyptian Hieroglypshs)
최초의 이집트 상형문자 :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서기전 300년을 전후하여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기록되었는데, 최근의 발견으로 이집트에서 먼저 상형문자가 발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98년 12월15일 AP통신은 독일 고고학 연구소의 군터 드라이어(Gunter Dreyer) 박사가 중부 이집트에 위치한 아비도스(Abydos)의 "전갈(scorpion)" 왕의 무덤에서 발견한 조그만 진흙판에 갈대 펜으로 새겨진 초기 단계의 상형문자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내용은 다름 아닌 세금에 관계된 것이어서 최초의 문자는 역시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전갈 왕은 서기전 3300년경 통치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인들보다 200~300년 가량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옥스포드 대학의 베인스 교수의 말처럼 단순히 이 증거만으로 이집트가 수메르보다 앞섰다고 볼 수는 없으며 두 지역 모두 비슷한 시기에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우표 크기의 매우 작은 이 진흙판들에는 동물, 식물, 산 등이 새겨져 있으며 삼베와 올리브 기름 등의 세금 목록으로 밝혀졌다. 또한 같은 시대에 관리들의 이름은 각각 생쥐, 송골매, 쌍 송골매 등의 동물 이름이 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드라이어 박사는 1985년부터 아비도스 지역의 묘지를 발굴했으며, 지금까지 모두 300여점에 달하는 토판문서와 토기에 잉크로 그려진 상형문자들을 발견했다.
카이로 남쪽 약 500㎞ 지점 나일강 서안에 위치한 아비도스는 이집트 최초의 수도로서, 초기 파라오들의 묘지와 특히 오시리스 종교의 중심지로 유명한 곳이다. 서기 1세기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크에 의해 최종적으로 편집된 오시리스 신화에 의하면 동생 셋트에 의해 살해되어 산산조각이 난 오시리스의 신체 중 머리가 묻힌 곳이 바로 아비도스미여 이곳에는 서기전 1300년경 세티 1세가 건설한 대규모의 신전과 오시레이온(Osireion), 그리고 람세스 2세 신전 등의 유적이 있다. 특히 세티 1세 신전 내부의 벽화는 33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마치 방금 칠한 것처럼 아주 선명하게 잘 보존되어있다.


◎ 최근 정치˙사회 동향
- 1981년 10월 사다트 암살로 당시 副統領이던 무바라크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1987년 10월 大選에서의 재선, 1990년 11월 總選에서 여당인 國民民義黨(NDP)의 압도적 승리 등을 거치면서 정치적 안정기반을 바탕으로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하였으며, 1993년 10월에 대통령에 재차 당선되어 집권 3기를 맞고 있다. 또한 1995년 11월 29일에 실시한 총선에서 집권당인 國民民主黨은 전체 454석 중에서 417석을 차지하여 정치적 안정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 1990년 걸프事態 이후 IMF 등 서방측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국가정책의 최우선 목표를 經濟改革에 두고 경제전반에 걸쳐 經濟民主化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나, 국내 이슬람 보수세력의 반발을 감안,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중이다.
그러나, 경제개혁 수행상 耐乏生活 강요에 따른 국민의 불만이 표출되고 있으며, 최근 북부지역에서의 回敎原理主義 세력의 빈번한 테러사건 발생, 최대 在野勢力인 무슬림 血盟(Muslim Brotherhood)에 대한 대중적지지 확산과 주로 고학력 노동의 높은 실업률(20%) 등 각종 不安要素가 산재해 있다.
- 外交的으로는 非同盟中立主義 및 均衡外交路線에 입각, 아랍권내 온건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특히 걸프전쟁시 미국 주도의 多國籍軍에 참여함으로써 아랍권내 최대의 리더쉽을 인정받는 한편, 이후 國內經濟 안정과 中東平和 유지를 위해 미국과의 경제, 군사적 밀월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왔다.
- 한편, 최근 核擴散禁止協定 문제와 대이란 제재 동참문제로 미국과 다소 불편한 관계가 표출되고 있으나, 매년 군사원조를 포함한 20억 달러의 미국원조 자금 지원 등을 감안할 때 양국의 밀월관계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 인접국인 이스라엘과는 1979년 평화조약체결 이후 1992년 양국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관계강화에 주력하고 있으나, 수단과는 수단정부가 자국내 회교과격단체를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관계개선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 고대 신화
▩ 오시리스와 이시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시에 로제타석을 입수함으로 프랑스의 학자 상포리옹에 의해 이집트 문자가 해석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신화나 정신 문화 등을 잘 알게 되었다. 그들의 신앙 중에 중요한 것은 사후의 세계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지상에서 죽어도 혼은 죽지 않는다고 믿었고, 미이라를 만들어 불멸의 신앙을 신봉했다. 그들의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은 '사자의 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신화는 창세 신화로 시작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창세 신화보다는 체계적이지 않다. 기록의 손실 때문일까? 태초의 Nun이라는 바다가 있어 거기서 아툼이 태어났다. 이 아툼은 태양신 라와 동일시 되기도 한다. 라는 스스로 게브, 슈, 테프누트, 누트를 낳아 이들 4명은 다툰 후에 게브는 대지가 되고, 테프누트는 공기가 되고, 슈는 증기가 되고, 누트는 하늘이 되었다. 게브와 누트는 오시리스와 이시스를 낳았다. 오시리스에 관한 신화는 이집트인들이 좋아하는 신화였다. 오시리스는 전 세계의 미개 문화에 문명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이복동생인 세트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어느날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는 오시리스를 시기한 세트가 음모를 꾸민 파티에 오시리스를 초대한다. 거기서 세트는 상자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들어가 몸이 맞는 사람에게 금화를 준다고 말했다. 여러명이 상자에 들어가 보았으나 오시리스 몸에 맞춰 만든 상자가 그들에게 맞을리가 없었다. 마침내 오시리스가 그 상자에 들어가자 세트의 부하 72명은 달려들어 상자를 닫아 나일강에 버렸다. 그것을 안 오시리스의 부인이자 혈육동생인 이시스가 그의 시체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것을 안 세트가 오시리스의 시체를 산산조각 내어 이집트 각지에 버렸다. 스는 다시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시체를 모아 원래의 모습으로 만들어 생을 살리는 의식을 행했지만, 오시리스는 이 세상에 살수가 없어 사자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는 세트를 무찌르고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 종교
Ψ 이집트 종교의 변천
5000년에 걸친 이집트 역사에는 시대에 따라 종교의 주류가 바뀐다. 고대 이집트 시댕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가 꽃을 피우고, 그레코 로만 시대 말기에는 원시 기독교인 콥트교가 번영한다. 다음으로는 이슬람교가 아랍군과 함께 전파되면서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가 된다. 그리고 이슬람교는 결국 이집트의 국교로 정해져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고대 이집트 종교는 다신교로 수많은 신을 섬기고 있었다. 신왕국 시대의 이크나톤 왕(기원전 1379~1362년) 시기에는 종교 개혁에 의해 일시적으로 일신교가 된 적도 있으나, 그 후 다시 다신교로 되돌아가 시대의 기본적인 경향은 변하지 않았다. 국가의 최고신은 고왕국 시대부터 변함없이 태양신 라신이었다. 신왕국 시대에는 테베의 수호신이었던 아몬라신이라 하여 국가의 최고신으로 군림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 후 그레코 로만 시대에도 한동안은 세라피스 신과 이시스 신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 이집트 종교와 그리스도 로마의 종교가 혼합이 된 듯한 종교가 퍼져 있었다. 그러다가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교화에 따라 콥트교가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


@ 경제
- 석유수출 收入, 海外勞動者 送金, 수에즈 운하 通行料, 그리고 外國援助 등을 재원으로 경제개발에 주력한 걸과, 1970년대~ 80년대 중반까지 연 7~9%의 비교적 높은 성장을 기록.
-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世界經濟 침체, 油價下落 등 대외여건이 악화된데다가 과거 統制經濟體制下에서의 누적된 非效率性 등 경제의 內在的 문제가 연쇄적으로 표출되면서 1987~92년 (2차 5개년 계획기간) 중에는 연 4.7%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 1991년 들어 걸프전쟁시 다국적군 참여에 따른 IMF, IBRD 및 서방측의 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市場經濟 도입 확대 같은 광범위한 經濟改革을 추진하여 왔다.
- 1993년도 실질 GDP 성장률은 긴축정책에 따른 국내수요 감소와 관광수입의 급감으로 2.9%에 그쳤으나, 1994년도에는 건설, 제조업분야 등 경제전반에 걸친 회복세에 힘입어 4.0%의 성장률을 실현하였으며, 1995년도에는 4.6%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3] 기독교에서 본 이집트

- 근처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스라엘의 북동쪽에서, 나일강을 중심으로 한 이집트 문명은 이스라엘의 남서쪽에서 시작된 문명이다. 이스라엘은 양대 문명 사이에서 두 문명을 연결해 주는 교두보의 역할을 해 왔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을 연결해 주는 이스라엘의 지리적 조건은 때로는 무역의 통로로, 때로는 전쟁의 길목으로 사용되면서 강대국들의 침략대상이 되었다.
고대의 앗시리아(지금의 이라크), 바벨론 제국이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거쳐야만 했으며, 마찬가지로 이집트가 북진정책으로 진군을 하면 무장한 군대는 이스라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스라엘은 역사상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으며, 전쟁이 지나간 지역은 폐허로 남겨졌다.
바벨론 제국 이후에도 페르시아 제국, 헬라, 로마가 차례로 이스라엘을 정복했다. 주후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함락함으로써 유대인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이스라엘 땅에 소수의 유대인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유대인은 전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주후 7세기에 등장한 이슬람 제국은 로마에 이어 이스라엘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그후 이스라엘의 통치권은 십자군, 이집트 맘룩, 오스만 터키가 차례로 이어받았다.
그럼 이렇게 침략을 받기만 한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집트(고대 명칭 애굽)와 이스라엘의 관계..- 과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400여년이 넘는 시간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집트에서 도망 나올 수 있었다. 출애굽 후에 그들은 40여년간의 광야생활을 거친 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지금의 이스라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위에 말한대로 여러나라의 침략으로 그들은 땅을 잃어버렸고, 그들은 전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다. 잃어버린 그 땅에는 팔레스타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고, 후에 이스라엘 인들이 돌아와 팔레스타인들을 쫓아내고 다시 차지를 한 것이다.(중동전쟁) 그러나 이로 인하여 중동 평화문제가 제기되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평화공존 등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게 되었고, 이에 따라 79년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조약 등이 성립, 이집트는 아랍세계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세계의 추세는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으나, 이스라엘은 본래부터 팔레스타인국가 설립에 반대하였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의 교섭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수교는 하였으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야에 걸친 본격적인 교류와 협력은 중동평화협상이 장착될 때까지 활성화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여기까지는 정치적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바라보면 달라진다. 성경을 중심으로 살펴보자면...
"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 임이니라" (이사야 19장 24~25절)
지금 여기에는 세 나라가 나온다. 다시 읽어보면 애굽은 내 백성이라 했고, 앗수르는 내가 지었다고 했으며, 또 이스라엘은 나의 산업이라 하시며 세계 중에 복이 된다 하셨다. 지금 현재의 지명을 보면, 애굽은 이집트임을 알 수 있고, 앗수르는 이라크임도 알 수 있다. 분명히 나라를 달리하고 종교도 달리 하는데도 이 세나라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애굽에서 430여년간을 식민지 생활을 했고, 앗수르 즉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정복했으며,  유대땅은 예수님께서 박해 받으신 후 1900여년간을 나라를 잃어버렸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세나라를 나의 백성, 나의 지음, 나의 산업이라 하셨음은  무엇일까..?
여기서 앗수르(이라크)는 살펴보지 않겠다. 이집트를 살펴보자.

이집트는 저주받은 함의 자손 미스라임이 시조로 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애굽을 내 백성이라 했으니 어떻게 된 것일까?
" 너의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뜻을 알 것이요 곧 네게 고할 것이니라'" (이사야 19장 12절)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말하였다.
"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일시라 하리라" (호세아 2장 23절)
이것은 애굽을 이방인의 대표적 나라로 택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내 백성이라 한 것은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을 예표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나라는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에베소서 2장 11~12절)
언젠가 이집트는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다.
"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날에 애굽인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 주시리라" (이사야 19장 21~22절)
하나님이 택하신 나라인 이집트를 먼저 믿은 백성인 이스라엘이 품어야 할 것이고, 또한 기독교 국가들도 이집트를 품고,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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