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테리아 페르디낭드 (여, 78세)

“나의 즐거움은 내 노동의 댓가를 보는 것이다. 가령 내가 농사를 지어 수확을 해서 식량이 되면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하다.
보통은 아플 때나 또는 내가 무엇을 했는데 잘 안되었을 때, 즉 수확이 나쁠 때 빼고는 아무것도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없다.“
              


내 이름은 아스테리아이고 카토마 마을의 일로게로에서 태어났다. 현재 78세이다. 부모님은 자식을 일곱 두었는데 나는 그중의 세 번째이다.

우리 아버지는 바나나 농장과 소가 여러 마리 있었다. 소가 열 마리도 넘었지만 어떤 소는 그의 친구가 돌보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마리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소를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었는데 그들은 소에서 나오는 똥으로 거름을 만들어 밭을 기름지게 했다.

아버지는 가축을 돌보는 외에는 다른 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족장 궁전의 시종이기도 했다. 시종은 족장 궁전에 가서 잡일을 하고 가끔 족장으로부터 선물이나 보답을 받을 뿐 보수를 받는 일은 없다. 나의 어머니가 바나나 농장을 돌보았다. 그녀는 김을 매주곤 했다. 그 외에 콩이나 옥수수 고구마 등 당시의 흔한 작물을 재배하기도 했다.

우리는 전통적인 집(무숑게)에서 살았다. 우리의 주식은 바나나였다. 그 외 고구마나 다른 것도 먹었다. 고기와 생선을 함께 먹는다. 우리는 하루에 두 번 정오와 저녁에 먹었다. 그때는 아침은 안 먹었다. 지금처럼 차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때는 차라는 것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밥이나 우갈리 같은 다른 족속의 음식은 경멸되었고 기근 때나 먹었다.

그때도 병원이 있기는 했지만 병이 나면 주로 민간요법을 썼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까지 다녔다. 영성체 (Holy Communion)를 받은 다음에는 종교교육을 위해 수녀원에 보내졌다. 초등학교에는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갔고 어머니는 학비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어머니와 두 오빠의 도움 밑에서 자랐다. 두 오빠는 나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했다.

수녀원에서 교리 공부를 한 다음에는 집에 있었다. 아무 장사같은 것도 배우지 않고 그저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다.

나는 열네살 때 결혼했다. 내가 남편을 고른 것이 아니고 당시의 관습에 따라 우리 친척이 중매를 섰다. 나의 남편 될 사람의 친척이 와서 나의 친척을 만나 양쪽이 합의를 하자 결혼이 성사된 것이다.  

약혼을 했어도 상대방하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때는 약혼자끼리 서로 말이나 접촉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나는 나의 신랑될 사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오직 친척이 중매를 했기 때문에 결혼을 한 것이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종교적인 절차에 따라 올렸다. 교회에서 올렸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매우 특별한 결혼식이었다.

결혼 후 우리는 남편의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시아버지는 아내가 셋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세 아내들이 번갈아가면서 시아버지 집에 가서 시중을 들었다. 남편의 친척들과도 잘 지냈다.

남편이 그의 삼촌에게서 바나나 농장을 물려받아서 이리로 이사한 것이 1953년이다. 그 전에는 여기서 몇 킬로 떨어진 곳에서 남편의 친척들과 함께 살았는데 그러니까 1953년 우리가 독립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부모밑에서 살 때보다 결혼하고 나서가 더 좋았다. 어른이 되었고 남편이 있고 가정이 있는데 이는 계집애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운이 없어서 아이들을 생산하지 못했다. 남편과 나는 자녀를 갖지를 못했지만 남편이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우리는 서로 돕고 무엇이든 상의를 하고 터놓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처럼 오래 같이 살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아이가 없었으니. 이는 우리가 기독교를 엄격히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는 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만족해서 살았다. 남편은 흙집을 지었다. 이는 전에 살던 전통집 (무숑게) 보다는 나은 것이었다.    

남편은 다른 여자들 사이에서는 아이들이 있다. 남편이 아이를 본 다른 여자들 중에서 한 여자만이 전통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그 외 여자들은 그저 아이를 얻기 위해 같이 잠을 잔 것뿐이다. 그래서 아들 둘 딸 둘을 얻었다. 그 딸 중 하나는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아직 결혼을 안했다. 아들 하나는 다레살람에서 사는데 결혼해서 아이가 둘 있다.

남편의 자식들은 가끔 나를 돕는다. 그러나 나의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불평할 수는 없고 그들이 주는대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남편이 죽을 때 나에게 바나나 밭 일부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과 그리고 라디오 한 대를 남겼다. 내가 죽으면 이것들은 다레살람에 있는 아들에게 갈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농장 땅을 조금 물려받았는데 거기에 내가 먹을 곡식을 기르고 또 거기서 난 커피를 팔아서 약간의 돈을 얻기도 한다. 내가 죽으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땅은 나의 조카(오빠의 아들)에게 갈 것이다. 그가 필요한 도움을 주는 등 나를 돌보고 있다.

나는 하야 말만 하고 다른 말은 할 줄 모른다.
전에는 우리의 성씨 제도가 강했다. 그 제도는 우리를 단결시켰다. 그러나 이제 그 제도가 무너지고 있다.
전에는 한 집안끼리의 결혼이 금지되었는데 지금의 젊은이들은 타부를 지키지 않는다.
전에는 같은 집안이거나 어머니 쪽 집안의 남자와는 결혼할 수 없었다. 또 아버지와 같은 집안이 아니라도 아버지가 가깝거나 친한 친구의 집안과는 결혼이 금지되었다.
전에는 다른 집안의 두 남자가 피를 섞어 형제의 의를 맺으면 한 집안으로 간주되었다. 그 의식은 다름과 같다 : 각자 배꼽에서 피를 약간 뽑아서 이를 커피 콩에 칠해서 서로 교환해서 삼키면 이것이 피를 나눈 관계라는 표시가 된다. 이 의식 후 두 남자는 형제로 간주되어 형제의 의무와 금기 (특히 결혼 시)제약을 적용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식민지 정부의 지배보다 우리 전통적인 족장의 통치가 더 좋았다. 말했다시피 우리 아버지는 궁정의 시종이어서 그의 소유물- 소와 때로는 음식 같은 것들 -은 족장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즉 어렸을 적 우리집에 필요한 것이나 부의 대부분은 아버지가 시종으로 일하여 그 보답으로 얻은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시종이 아버지의 직업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독립과 자치이래 현 정부 하의 생활은 매우 힘들고 어렵다. 심지어 설탕 살 돈도 없다.

나의 즐거움은 내 노동의 댓가를 보는 것이다. 가령 내가 농사를 지어 수확을 해서 식량이 되면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하다.
보통은 아플 때나 또는 내가 무엇을 했는데 잘 안되었을 때, 즉 수확이 나쁠때 빼고는 아무것도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없다.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하지만 정기적으로 듣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멀리 사는 친척들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다. 눈이 나빠서 이제는 신문은 읽지 않는다.  

나는 우리 전통 술 외에는 다른 것은 안마신다. 위장병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나의 수입이라고는 바나나, 카사바 등 농작물을 팔아서 얻는 것 뿐이다. 바나나를 팔아서 버는 돈은 월 평균 2000 쉴링 정도이다. 형편없은 돈이다. 어떨 때는 그도 못팔 때가 있다. 돈이 생기면 설탕 소금 비누  때로는 고기나 생선 등을 산다. 그러나 충분하지가 않다. 어쩌다가 누가 캉가(옷) 같은 것을 선물할 때도 있다.  

( 2001년 1월 4일 부코바 )
Posted by 올아프리카 africa club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allafrica 2003.12.29 13:16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무언가 가슴 찡한 감동이랄까..
    가족과 삶 그리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사색해보게 합니다.
    소박함과 단아함..

    읽는 분들을 위해 전통가옥인 무송게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 김영희 2003.12.29 22:3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무송게란 부코바 지방의 전통 집으로 첫번째 글에 들어있는 사진에서 음야카씨가 서있는 집이 바로 무송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