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물연구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도카사 대통령

africa club 2001. 11. 13. 19:56
1979년 8뭘 1일 프랑스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탕의 지시에 의하여 당시 보카사 황제에게 전달된 대통령의 친서는 아주 간단 명료했다.
"죄 없는 초 중고생 100여명을 살해했고 이 살해에 보카사 대통령이 깊숙이 관계되어있는 것을 알고 있다. 프랑스는 더 이상 보카사를 지지할 수 없다. 왕위를 내 놓는 것이 유일의 길이다. 그렇게 하면 파리에서 편안히 살 수도 있고 또 연금도 받을 것이다. "  보카사 황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대통령의 고문 르테 쥬르니아크의 말을 듣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그 사절을 지팡이로 후려갈겼다. 사절은 맞지 않기 위하여 뒤로 물러서며 팔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이때 프랑스는 가봉의 봉고 대통령을 입석 시켰었는데 가를 대통령은 보카사를 뒤로 밀었다. 사절은 프랑스 대사관으로 가 지스카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프랑스의 지도자는 "나의 친애하는 친척"이라고 하면서 보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카자는 단 하나밖에 없는 자기 후원자로부터 전화를 받지 않고 끊었다.
중앙아프리카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황제는 대통령의 사자를 때림으로써 프랑스의 명예를 손상시켰다. 보카사는 리비아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카톨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을 고쳤다. 50일 후 보카사가 리비아를 방문한 9월 20일, 21일 이틀동안에 1,000명의 프랑스군이 수도 방기에 내려 간단하게 보카사를 추방하고 1967년 보카사에 의해 쫒겨났던 데이비드 다고를 대통령에 복직시켰다.
트리폴리에서 카다피로부터 돈을 받은 황제는 쿠데타의 성공을 알고 프랑스에 입국하기 위해 파리 비행장에 들어왔다. 황제는 나폴레옹을 숭배했고 "스다르(고참병이라는 뜻)"라고 불러주는 드골을 아버지로 존경했다. 지스카르가 재무상을 지낼 때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기증하고 또 그가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는 "몽시에르 파랑(친한 친척)"이라고 부르며 국내에서 같이 수렵을 즐기기도 했다. 이처럼 프랑스에게는 절대적인 자신을 가졌던 황제는 기내에서 50여 시간 걸쳐 프랑스정부와 입국을 교섭하였으나 끝내 거절을 당하고 코트디브와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중앙아프리카 제국은 1년 9개월 17일만에 끝났다.
보카사는 우방기 샤리(중앙아프리카의 구 이름)의 현 인구 280만의 5%에 지나지 않는 소수민족인 무바까인의 전통적 추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이 민족은 일찍이 프랑스 교육을 받았고 프랑스인 식민지 지배자 아래에서 일했기 때문에 이 나라의 정치 행정에 깊숙이 참여했다. 초대 대통령 다코는 보카사의 4촌 동생이고 수상이 숙부였다. 보카사 황제는 18세에 프랑스군에 입대하였으며 그후 22년간 아프리카, 유럽, 인도지나 등에 파병되어 15개의 훈장을 받고 대위로 승진했다. 1958년 모국이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으로 프랑스 공동체내의 한 자치국이 되자 귀국하여 군대를 조직하였다.
1960년 8월 정식으로 독립을 하고 1966년에 군사령관이 되면서 쿠데타를 일으켜 다코를 추방하고 실권을 잡았으며 1972년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1976년 중앙아프리카제국으로 헌법을 개정하였으며 1977년 12월 4일 보카사 황제는 여섯 마리의 흰말이 이Rm는 묵직한 마차에 실려 르네상스 궁전(전 대통령 관저)을 나왔다. 황제가 되는 대관식에 가기 위한 길이었으며, 2m나 되는 금지팡이를 받아 들고 6m 길이의 빨간 비로도 흰 모피의 외투를 입었 다.
"국민 앞에서 전 인류의 역사 앞에서 헌법의 준수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호를 선서한다. "고 선포하고 2,000개의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왕관을 스스로 머리 위에 얹었다. 보카사는 이 대관식을 1804년 나폴레옹 대관식과 같이 화려하게 하고 싶었다. 이 대관식의 비용은 77년 국가 예산의 2배였다. 당시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경제 원조를 중단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황제는 수도 방기에서 80km 떨어진 베렝고 궁에서 백인 여성을 포함한 몇 사람의 부인과 20여명의 자식들과 함께 화려한 가구와 3대의 전용기, 35도의 말을 가지는 등 호화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 20여명의 자식 중에는 월남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도 있는데 동양적인 미모를 지닌 이 딸은 현재 의사와 결혼하여 이 나라에서 살고 있다.   나라는 쇠퇴할 대로 쇠퇴하고 빈번한 숙청으로 인재가 없어졌다. 관료들은 황제에게 아부만 할 뿐 나라의 행정은 마비되고 생산은 독립 전으로 돌아가고 국민의 원성이 높아졌다. 보카사 황제 퇴진의 주요 원인인 아동학살은 황제가 수도의 초, 중학생에게 제복을 강제 착용시키는데 반발이 일어나자 이들을 형무소에 잡아 쓸어놓고 친위대로 하여금 학살케 한 것이다. 이 잔학한 행위에 황제가 직접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복 한 벌은 100프랑으로 주민의 월 평균 수입이200프랑인 것과 비교해 볼 때 고가의 의복이다. 이 제복이 봉제공장은 황제의 소유이며 소매점은 황제의 부인이 경영하는 것으로 황제의 일족으로 사욕을 채우기 위한 정책이었다.
보카사는 지금 처음의 망명 지인 코트디브와르에서 환국하여 현 콜린그바 정권에서 재판을 받고 복역중이다.
"나는 어디든지 있고 어디에도 없다. 나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나 모든 것을 보고 듣는다. "라고 하면서 지신을 신격화하고 국민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강요했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반동으로 보이면 여지없이 그를 숙청했다. 그는 아민과 같이 흉악무도한 권력을 휘두르며 나라와 민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