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남아공, 남부아프리카 이야기

아프리카민족회의 (African National Congress : ANC)

africa club 2012. 7. 17. 22:05

 

 

아프리카민족회의 (African National Congress : ANC)

 

 

 

남아공 원주민 회의(South Africa Native Congress : SANNC)라는 이름으로 불룸폰테인(Bloemfontein)에서 1912년 1월에 설립된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 1923년에 명칭을 ANC로 변경함)는 오늘날 남아공에서 가장 오래된 정치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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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50년 동안 이 단체는 인종차별법에 반대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여 왔으며 1960년에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이로 인해 ANC는 약 30년 동안 망명하여 활동하거나 지하로 잠적하게 된다. 망명활동 중에서도 주로 자유를 위한 무장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기간 중 ANC의 회원자격이 백인과 비아프리카인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1990년에 ANC는 백인정부의 정식협상대상이 되었고 과거에 정치적 노선으로 채택했던 사회주의적 정책은 점차적으로 포기하게 되었다. 백인정부와의 협상결과 결국 ANC가 1994년 4월 선거로써 권력을 잡게 되었다. 

 

남아프리카 전쟁(South African War ; 1899-1902) 직후에 아프리카인들에 의해 많은 수의 주 아프리카인 회의(Provincial African Congress)가 잇달아 형성되었고, SANNC는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 (Union of South Africa)의 설립에 대응하여 나타났다. 이러한 작업의 시작은 젊은 해외 유학파 변호사들에 의해 가능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픽슬리 세메(Pixley Seme)였다. 초기에 ANC는 정부로의 청원을 가 치있게 여기고 아프리카인의 이익증진을 위한 압력집단으로써 ‘책임 있게’ 행동하는 아주 온건적인 조직이었다. 이들의 첫 번째 주요 관심사는 원주민 토지 법안(Native Land Bill)이었고 항의 대표단을 케이프 타운과 런던으로 보냈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또 다른 대표단이 1차 세계대전 직후에 페르사일레스(Versailles)와 런던으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짧은 기간 동안 트랜스발(Transvaal) 지부는 호전적인 정책을 채택했고, 1920년대 말에 새로운 의장인 조시아 구메데(Josiah Gumede)는 통행제도(Pass system)에 대해 더욱 저항적인 정책으로 전환하고자 노력하기도 했으나, 그는 1930년에 투표에 의해 의장자리에서 물러났다. 웨스턴 케이프(Western Cape)에서 ANC는 분열되었는데 ‘독립 ANC(Independent ANC)는 더욱 호전적인 노선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까지 운명은 ANC의 편에 서주지 않았다. 

 

 


슈마(A.B. Xuma)가 의장으로 있던 1940년대에 ANC는 민중 운동조직으로 변화․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전은 1944년에 포트 하레(Fort Hare) 졸업생들에 의해 결성된 ANC 청년연맹(ANC Youth League)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1948년 국민당(National Party)의 승리와 그리고 인종차별법인 아파르트헤이트(Aapartheid) 정책 채택 직후, 청년연맹(Youth League)은 1949년 투쟁의 새로운 방법이라 불리는 불매운동(boycotts)과 파업(strikes)과 시민 불복종을 포함하는 ‘행동 프로그램’(Programme of Acting)을 ANC가 채택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1952년 ANC는 그 회원이 2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증대시킨 저항 운동(Defiance Campaign)에 착수하였다. 그 후 이 운동은 동맹회의(Congress Alliance)와 자유헌장(Freedom Charter)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1955년부터 시작되어 다음 해에 ANC가 채택한 자유헌장은 다인종적이고 사회 민주주의적 남아공을 지향하고 있다. ANC내의 아프리카주의자들은 이를 거절함에 따라 1958년에 ANC는 분열하게 된다. 1950년대 말까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행, 소피스타운(Sophiatown)의 파괴와 여성들의 통행권, 그리고 반투 교육(Bantu Education)에 대항하는 저항 운동에 ANC는 거의 성취한 것이 없었다. 

 

대신에 아파르트헤이트정책은 더욱 강력해졌다. ANC의 중요한 반환점이 1960년 4월에 있게 되는데, 이것은 샤프빌(Sharpeville) 대학살 직후에 정치활동이 금지되면서부터이다. 10월에 알버트 루슬리(Albert Luthuli) 의장은 비폭력 투쟁을 이끈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으러 오슬로(Oslo)로 간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와 다른 사람들은 남아프리카 공산당(South African Communist Party : SACP)과의 긴밀한 협의 속에 무장 투쟁 전략을 채택하고 민족의 창(Umkhonto weSizwe : MK)를 결성했다. 이것은 1961년 12월 16일에 여론에서 발표되고 파괴활동(sabotage)은 시작된다. ANC는 내부지도자가 체포되고 1964년 리보니아(Rivonia)재판에서 종신형을 선도 받음으로써 큰 타격을 받는다. 지도자들이 망명하여 잠비아(Zambia)의 루사카(Lusaka)에 본부를 설립하고, 국제적 지지를 얻는데 성공한 올리버 탐보(Oliver Tambo)에 의해 조직이 이끌어진다. 협의위원회(Consultative Conference)가 1969년 탄자니아(Tanzania)의 모로고로(Morogoro)에서 열리고 ‘ANC의 전략과 전술(Strategy and Tactics of the ANC)'이라는 새 정책을 채택한다. 이에 따라 처음으로 비아프리카인들도 ANC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고, 망명생활 속에서 SACP의 역량을 강화하는 ’혁명위원회‘ (Revolutionary Council)가 만들어졌다. 반면에 ANC의 무장한 집단인 MK는 1967년과 1968년에 남아공의 길목이라고 할 수 있는 로데지아(Rhodesia)에 파견대를 보냈지만 그들은 곧 패주하게 되었다. 비록 ANC는 소웨토(Soweto) 봉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했지만 외국으로 탈출한 망명자들은 ANC에 합류하여 대부분이 MK의 구성원으로써 다시 돌아왔다. 1970년대 후반 MK는 남아공에서 사솔(Sasol) 석유공장, 쿠버르그(Koeberg) 핵발전소, 푸어르트랙커르후어흐터(Voortrekkerhoogte) 방어기지를 포함한 중요시설을 목표로 한 습격에서 점점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1983년 프레토리아(Pretoria)의 남아공 공군 기지 본부에서의 자동차 폭탄테러로 19명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 활동이 금지된 ANC에 대한 지원은 도시로 확대되었다. 넬슨 만델라들 비롯한 ANC의 지도자들이 로빈(Robben) 섬에 수감되었을 때 흑인의식(Black Consciousness)운동의 지지자들은  만델라와 섬에 있는 그의 동료들의 주목할 만한 도덕적 영향력 때문에 ANC와 합류했다. 남아공 국내에서 ANC가 효과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1983년부터 연합민주전선(United Democratic Front)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또한 1985년 말 부터 그 정당성이 남아공내의 백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국제 사회 속에서 극적으로 주목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것은 가능한 대안적인 정부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1985년 6월 잠비아의 카부웨(Kabwe) 회의에서 ANC는 그 상위조직을 비아프리카인들에게 개방할 것과, 무장투쟁을 강화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시민들이 집중 공격에 빠질 수 있다는 위험이 더 이상 이러한 강화 정책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구속 중에 있는 투쟁의 상징인 만델라는 이러한 상황의 해결 실마리로 폭넓게 인식되었다. 1985년부터 만델라는 정부와 ‘대화에 관한 대화(talks about talks)’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망명 지도부는 남아공은 물론이고 세네갈(Senegal)의 다카르(Dakar)와 영국, 그리고 그 밖의 지역까지 대표단을 파견하여 남아공의 미래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비록 남아프리카 노동조합(Congress of South African Trade Unions : COSATU)을 끌어들임으로서 ANC와 SACP 연합이 폭넓게 진행되었지만 ANC의 사회주의 노선은 수정되기 시작했으며, 1990년 이후 힘의 이동에 따라 국유화 논쟁은 점차 사그러 들었고 실용주의적 노선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 드 클레르크(F.W de Klerk)가 ANC와 SACP에 대한 정치활동 금지를 풀었을 때, 그는 아마도 ANC와 다른 연합이 분열할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석방된 만델라는 곧 병든 탐보(Tambo)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1990년 5월에 ANC는 정부와의 정상적 회담을 시작했고, 이 해 8월에 무장 투쟁의 중지에 동의하였으며, 1991년 12월에 민주적 질서를 위한 새로운 헌법을 위해 정부와 여러 정당간에 다수당 협상을 시작했다. 실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를 협상 대표로 한 ANC는 협상 과정에서 대부분 동의를 얻어내었고, 특히 국민당의 허를 찌르고 새로운 민주적 질서의 설립을 위한 타협을 가져왔다.

 

만델라의 탁월한 지도력 아래 ANC는 망명자들과, 로빈섬에 갇혀있던 사람들과, 연합민주전선(United Democratic Front)과 대중민주운동(Mass Democratic Movement)에서 일했던 사람들과 같이 다른 기구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성공적으로 단결하였다. COSATU와 SACP의 연합은 확고히 되었고, 1994년 4월에 실행된 첫 번째 민주주의 선거에서 ANC는 그들 자신의 마지막 헌법이 인정하는 삼분의 이의 숫자인 62.6%의 지지를 얻었고 5월부터 국민연정정부(Government of National Unity)의 다수당으로 집권하였다. 1996년 정부에서 국민당의 철수 후에 대해 일부 정치 평론가들은 정치무대에서 ANC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방안이 없기 때문에 일당 지배 체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ANC가 권력을 잡은 후, 재건과 발전계획(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Programme) 실행하지만, 1997년에 이것은 재정문제의 해결, 경제성장 촉진을 위한 외국투자 활성화 방안을 강조한 성장, 고용 그리고  분배(GEAR ; Growth, Employment and Redistribution) 전략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정책은 사회지출의 삭감을 의미하였다. COSATU는 GEAR전략과 ANC와 정부의 다른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저항적이지는 않았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반투 홀로미사(Bantu Holomisa)는 당의 규약을 무시한 이유로 조직으로부터 쫓겨났고, 위니 만델라(Winnie Madikizela-Mandela)는 통제의 어려움이 드러났다. 그러나 1997년 12월 마피켕(Mafikeng)에서 새로운 의장 타보 음베키(Thabo Mbeki)의 지도하에 개최된 ANC 50주년 기념행사에서 표면적으로 조직의 강건함을 보여주었고, 여기에서 주택, 용수, 전기, 그리고 직업등 필요한 것들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유권자들에게 약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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