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38

수단 내전 - 다르푸르의 참상(6)

수단 남부 다르푸르(Darfur) 지역의 내전은 아주 심각한 상태로 유엔에서 내전을 즉각 중단할 것을 결의하였다. 약 350만의 인구를 지닌 이 지역은 수단의 서부 지역으로 주요종족은 다수의 아프리카인인 퍼르(Fur), 마살리트(Masalit) 그리고 자가와(Zaghawa)등 주로 농경민족이 살고 있었고 아랍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습니다. 1989년 구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슬람인 아랍인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보장하고 다수의 아프리카인들을 소외시키는 과정에서 분쟁의 소지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분쟁은 아닙니다. 이 지역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무슬림인데 정부군과 아랍 민병대들이 모스크를 훼손하고 아랍의 지도자인 이맘(imams)를 살해하고 코란을 모독하는 고의적인 행동으로 인해 상황..

수단 내전 - 평화협정체결(5)

2004년 5월, 21년 동안 지속된 내전을 끝내기 위해 수단정부와 남부 반군인 수단인민해방군이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 평화협정은 지난 21년간의 수단 내전을 평화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개입으로 수단 정부와 최대의 반군조직인 인민해방운동(SPLM) 사이에 맺어진 평화협정이라는 데 더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수단의 평화정착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상당한 난관이 많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의 평화협상은 최종적인 것도 아니며 다르푸르 지역 같은 경우는 별개의 협상이 진행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차후의 협상에서도 권력분배의 문제와 수도 카르툼에 대한 종교적 영향력 행사에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수단은 국가의 경제발전..

수단 내전 - 내전의 특징(4)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파간 이념간 벌어지는 내전상황과는 달리 수단의 내전상황은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영토를 빼앗기고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토착민들이 자신들의 거주지역을 분리 독립시켜줄 것을 요구하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수단 분쟁은 강대국의 직접적 이익이 걸려있지 않고 그 영향범위가 내부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국제사회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다. 수단의 내전상황은 수단정부가 분리독립에 대한 요구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해결이 어려운 상황이며 최선의 방책은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무장대결을 완화시키는 것이다.

수단 내전 - 내전발발 요인(3)

수단 정부는 587개의 부족 중 단지 19개 부족이 중심이 되어 이슬람원리주의에 입각한 하나의 수단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반면 남부 3개주의 소수종족은 기독교와 원시종교 믿으며 자치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수단 내전은 본질적으로는 반정부 분리운동의 성격을 띄고 있으나 종교 부족간의 갈등과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자원전쟁의 양상을 띄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수단의 내전은 종교적인 부분보다는 자원의 공유와 문화적인 충돌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 북부의 수단인들은 남부의 문화를 경멸하고 있으며 토착민들을 지배아래 두는 것을 신성한 의무처럼 보고 남부의 석유자원개발에 대해서도 자기들이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수단 내전 - 내전발발 일지(2)

1956년 영국-이집트 령에서 독립할 때부터 내전에 발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다. 1969년 구데타로 집권한 누메이리 정권이 1983년 자치를 유지하고 있던 남부 3개주에까지 이슬람법(Sharia)을 도입함에 따라 음주, 간통 도둑질에 대해 공개적인 태형이나 수족을 절단하고 남부의 자원을 확보하려고 하자 흑인 기독교도들이 수단인민해방군(SPLA)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 1989년 바시르 장군이 누메이리 정권에 대한 구데타 이후 군사독재를 강화하고 이슬람원리주의의 민족이슬람전선(NIF : National Islamic Front)과 손을 잡고 이슬람법의 적용을 강화함. 비서구노선을 강화하여 이란, 이라크, 리비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오사마 ..

수단 내전 - 수단은 어떤 나라(1)

수단은 아프리카 53개국 중 가장 면적이 넓은 국가로 영토의 절반이 나일강의 중류 및 상류의 분지이며 북동쪽 끝이 홍해에 면한 짧은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BC 3000년경에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수단의 북부지역인 누비아를 침략한 후 이집트와 교류가 본격화되었고 BC 7세기경에는 누비아이들이 세운 쿠쉬왕국이 이집트를 정복하여 지배함. 6세기에는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나 7세기부터 아랍인들이 수단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920-30년대 이래로 남부지역에 대한 차별과 소외가 있어왔고 1956년 독립이후에도 아랍인들과 무슬림들에 의해 중앙정부가 운영되는 과정에서 남부세력은 차별철폐, 민주화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결국 자치/독립을 요구하면서 수단인민해방군(SPLA)를 조직하여 정부군과 대립하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

아프리카 종족 분쟁의 원인

아프리카의 종족분쟁은 식민주의의 유산 - 식민통치를 위해 자의적인 국경선 확정, 부족주의를 부각시키는 간접통치방식. 냉전시대에 이데올로기를 등에업고 정권유지를 위한 독재와 부정부패 만연. 국가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부족주의가 심화되어 종족간 종교간 갈등이 심화됨. 독립이후 서구화된 일부 흑인 엘리트들이 자신의 집권에 종족주의를 이용함. 이러한 현상은 부족의 정체성과 배타성 즉 타자화를 각인시킴. 그 결과 집권층의 전략에 따른 종족감정에 현혹된 무수한 아프리카인들이 내전으로 내몰리는 상황.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14만명의 후투족 전범에 대한 재판도 중요한 변수. 1997년에는 르완다 법정이 300여명의 후투족을 재판에 회부하여 100여명을 사형에 처함. 1998년에는 22명을 공개처형함. 2003년 르완다 법정은 1994년 투치족을 살해한 학살 관련자 105명에 대한 선고공판을 열고 11명에게 사형을, 73명에게는 종신형을, 21명에 대해서는 1-25년형을, 나머지 37명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 르완다에서 자행된 심각한 인권위반에 대응하기 위하여 1994년 11월 8일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955호에 의하여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 :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Prosecution of Persons Responsible for Genocide an..

르완다 내전 - 피해규모와 향후 전망

1994.4.6 대통령비행기가격추된다음날후투극단파는사전계획에따라투치와후투온건파를대량학살하기시작함.동시에 FPR도군사공격을재개, 7월까지정부군을소탕함. 이 4개월간의내전에서 50만명이사망하고후투족 250만이인근국으로피난함. 국내피난인구는 3백만에달함. 전체인구가 약 600만중 약 100만이 사망하고 절반이 가까운 인구가 난민화. 1996년에는 이 난민들이 르완다로 돌아왔고 이들의 정착역시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음. 카가메 정부는 국민화합을 내세워 대통령과 수상을 후투족 출신으로 임명하는 등 유화정책을 펴고 있으나 전반적인 상황은 인종차별정책에 가까운 것이 현실. 콩고민주공화국의 동부지역에는 후투족의 반란군이 끊임없이 침략을 시도하고 있고 카가메 정부의 억압체제는 새로운 불안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정치권력을 ..

르완다 내전 - 콩고민주공화국 내전(4)

☞ 향후 전망 지난 3월부터 유엔 평화유지군이 동부지역에 전개되기 시작하여 5월중에 평화유지군 전개가 완료될 전망이다. 당초에는 관련 국가들의 군대 철수 및 반군들의 후퇴 작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듯 하였으나, 르완다 및 우간다가 정부군 및 연합군들이 합의된 절차에 따라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어, 향후 현재의 정전상태가 얼마나 유지될지는 판단하기 힘든 실정이다. 특히 최근 우간다가 평화협정을 파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우간다가 지원하는 반군들이 공격을 재개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내전 재발의 위험성도 상존하고 있다. 콩고 민주공화국 내전은 이웃한 르완다, 부룬디의 후투족 대 투치족의 대결 구도와 연계되어 있고, 특히 식민지시대의 자의적인 국경획정으로 동부지역에 투치족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