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문학/스와힐리 문학

동아프리카: 스와힐리

africa club 2001. 10. 18. 16:13

동아프리카: 스와힐리



1. 초기 작품들

중동과 아프리카 동부해안과의 교역은 역사이래로 지속되었다. 아랍과 페르시아 사람들이 노예와 상아 무역을 하고 있을 때, 남부 아라비아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아프리카 동부해안-잔지바르(Zanji-bar, 흑인들의 해안)로 그들의 자유와 안녕을 위해 이주해 왔다. 그 사람들은 이 지방 거주민들과 자유롭게 혼인을 하게됐으며, 그 결과 혼합문화인 스와힐리 문명(Swahili Civilization)이 탄생된다. 그 문명이 처음으로 꽃피운 시기는 약 1,000년 경 인데, 이 때 잔지왕국(Zenj Empire)이 탄생된다. 그 영역은 모가디슈로부터 킬와, 모잠비크, 소팔라까지 뻗쳤다. 이 도시국가들은 상업적으로 경쟁관계에 있었으나 하나의 신념으로 뭉쳐져 있었다.

잔지왕국은 10세기부터 15세기까지 번영을 구가했다. 이 후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해 온 뒤부터 1699년까지는 포루투갈의 지배가 있었으며, 동부해안은 문화적, 경제걱으로 쇠퇴기였다. 오만의 통치자에 의해 포루투갈을 축출하긴 했으나, 이 또한 또 다른 혼돈의 시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문화의 회복은 아랍문자로 쓰여진 스와힐리 창작품들의 출현을 증진시켰다.

포루투갈 침략 이전의 스와힐리 작품들은 지금까지 문헌으로 알려진 바 없다. 또 라무섬에서 활동했으리가 생각되는 리용고 후모(Liyongo Humo, 1150-1204)라는 전쟁시인에 관해서도 어떤 객관적인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또 그에 관련된 많은 시들이 존재한다. 그에 관해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스티어주교(Bishop Edward Steere)였는데, 그는 Swahili Tales as Told by the Native of Zanzibar(1870)에서 리용고의 전설과 몇 편의 시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 또 다른 단편의 시들이 존재하고 있으나 많이 손상된 상태다. 어쨌든 그의 전설은 후세 시인들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그에 영향받은 대표적 시인으로 리용고의 노래(Utendi wa Liyongo Fumo)(1913)를 지은 무함마드 키줌와(Muhammad Kijumwa)가 있다.

리용고의 전설에 따르면 라무의 지도자 푸모가 죽을 때, 그는 작은 아들 음링그와리(Mringwari)에게 왕위를 계승한다. 큰 아들 리용고는 후궁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형은 동생을 살해하려 했으나, 그의 계획을 동생이 먼저 알게 된다. 동생은 큰 잔치를 벌여 형을 취하게 한 다음 체포한다. 감옥에 갇힌 리용고는 어머니에게 줄이 들어있는 빵을 들여보내 달라는 도움의 노래(Song of Sadaa)를 부른다. 형은 동생에게 마지막 소원으로 궁구(Gungu)축제를 벌여 달라고 요청하고, 이 소란한 잔치틈을 타서 사슬을 풀어 도망간다.

리용고는 그리스 신화의 아킬레스나 독일신화의 지크프리트와 같은 불사조로서 전형적인 영웅으로 등장한다. 또 리용고는 지혜와 기지가 넘치는 인물로 묘사된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그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동생 음링그와리는 연회를 베풀고 참석한 모든 손님들에게 차례로 야자나무에 올라가 야자를 따오게 하는 놀이를 제안한다. 리용고가 올라갔을 때 그를 살해하려던 계책이었다. 그러나 리용고는 화살을 쏘아 야자를 떨어뜨리므로서 동생의 계책을 벗어나는 현명함을 보인다.

리용고의 전사의 노래(The Warrior Song)에서는 전사가 갖는 위용과 자긍심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도시와 왕궁내의 안락한 생활을 오히려 경멸하며, 전투에서 온갖 위험에도 불구하고 명예를 추구하는 리용고의 기질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리용고에 대한 이야기는 이슬람 도래 이전의 영웅담적 성격을 내보이고 있다 하겠다.



2. 스와힐리 문학작품의 출현

스와힐리 문학사상 가장 오래된 리용고가 12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인물이지만, 실제로 오늘날까지 전수되는 최고의 시인은 아이다루시(Saiyid Aidarusi b. A thumani)이다. 그는 1749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함지야(Hamziya)란 시를 썼다. 파테출신인 아이다루시의 이 시는 그 언어로 보아 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의 내용은 13세기 이집트의 시인이자 예언자인 무함마드 이븐 사이드 알 부시리(Muhammad ibn Said al-Busiri)의 생애를 그린 것으로 465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리용고가 이슬람 이전의 반투적 속성을 반영하고 있는 모험가이자 기사인 반면, 아이다루시는 학자이자 이슬람 전통을 충실히 따르는 시인이다. 또 그는 16세기 경 하드라마우트(Hadramaut)에서 이주해 온 아랍가문의 후손이다. 이 시의 원 제목은 도시의 어머니(Umm al-Qura)였으나, 이 시가 따르고 있는 율격 규범명칭인 '함지야(Hamziya)'를 그대로 불러 그 이름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Basil Davidson 교수는 '17세기는 유럽인과 본토인의 투쟁시기 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해안 스와힐리인들은 오만 아랍의 도움을 받아 1729년 포루투갈인들을 몸바사로부터 격퇴시킬 수 있었다. 오만 지배 및 그 영향은 1810년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였다. 그로인해 스와힐리 해안 및 도서지방은 가히 문예부흥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같은 문예부흥을 주도한 시인들이 아이다루시, 무웽고(Mwengo bin Athumani), 바카리(Abu Bakari)이다.

아이다루시의 함지야보다 이른 1728년에 쓰인 스와힐리시가 전수되어 오고 있는데, 이 시는 무웽고라는 시인이 파테의 왕을 위하여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타북(Tabuk)전투에 대한 기록(Chu cha Tambuka) 혹은 헤라클레이오스 서사시(Utenzi wa Herikali)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시는 이 후 스와힐리 고전 시형태의 대표적 특징을 갖고 있는 우텐디(Utendi 혹은 Utenzi)형식을 띄고 있다.

우텐디는 '확대된 이야기체 시'라 볼 수 있는데, 그 구조적 특징으로 1개의 연은 4개의 행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다시 8개의 음절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4행의 끝음이 서로 일치하며 연과 연 사이에 마지막 행의 끝음의 일치로 인하여 스와힐리어의 다양한 구사와 정교한 표현을 전제로 한다. 이같은 각운은 낭송을 편리하게 하는 실제적 이점을 갖고 있다. 탐부카는 초기 스와힐리 전통 우텐디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이 형식은 아랍문학의 '마가지(maghazi)'라는 유형의 시형태에서 출발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의 내용은 7세기 경 헤라클레이오스 지배기의 비잔틴과 회교군의 싸움중 타북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명예와 복수가 주된 주제를 이루고 있다. 무함마드(Muhammed)는 조카 자파(Jaafa)의 죽음 소식을 듣고 천사 가브리엘(Gabriel)의 명령을 받들어 전투를 개시한다. 기적과 초자연적인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원시 전투상화을 묘사하면서 전투를 찬양하고 있다.

아랍의 마가지 전통을 따르면서 동시에 탐부카를 모방한 흔적이 아부 바카리가 18세기 후반에 쓴 카티리푸의 시(Utendi wa Katirifu)에 나타난다. 어리석은 갑부 카티리푸는 이교도 여왕 하시나(Hasina)와 결혼하고자 한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예언자와 싸우다 죽었음을 이유로 카티리프에게 모하메드와 그의 아들 알리를 신부값으로 요구한다. 이같은 음모는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에게 알려지고, 일련의 싸움이 벌어진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는 가브리엘 천사의 도움을 받은 무슬림군대가 대승을 거둔다는 내용이다.



3. 스와힐리 고전문학의 황금기

18세기 말 스와힐리 고전문학은 그 절정에 이르게 되는데 가장 뛰어난 시인은 아이다루시 가문의 사이드 압달라(Saiyid Abdallah b. Nasir, 1720-1820)이다. 그는 이슬람화된 사회상을 반영하는 두 개의 걸작 타크미스 와 리용고(Thakhmis wa Liyongo)와 우텐디 와 인키샤피(Utendi wa Inkishafi, 혹은 al-Inkishafi)를 남겼다.

타크미스란 아랍문학에서 5개의 연으로 구성된 시형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는 최초로 스와힐리어를 사용하여 이 형태를 형상화 시켰다. 그 내용으로는 스와힐리 문학의 전설적인 영웅 리용고를 등장시켜 상반되는 두 개의 가치, 즉 전쟁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점잖은 가치를 모색하는 행위규범을 창조해 내고 있다.

타크미스 와 리용고에는 용감함과 유순함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싸움을 두려워 하지 않는 용맹스러움에 대한 작가의 숭배가 작품속에 잘 나타나 있다. 또 명예와 정의 그리고 용맹스러움을 숭상하는 리용고가 두려워 하는 것은 알라의 심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회의 구성원에 의해 비겁자로 판정받는 일임을 표현하여, 작가는 이같은 수치를 경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에서는 리용고의 영웅적, 귀족적 행위에 관하여 묘사하고 있다.

인키샤피에는 '영혼의 각성', '자아성찰' 혹은 '계시록'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파테의 부와 영화를 배경으로 영화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노래한 시이다. 이전에도 도덕적인 것을 이념적으로 읊은 시들이 적지않다. 그러나 구체성이 결여된 약점이 있었다. 압달라는 장중함과 긴박감을 가지고 이 주제를 처리하고 있다. 지상의 권력과 영광이 일회적이고 무가치한 것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세속의 욕망을 극복하려는 마음이 주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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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키샤피에서 우리는 18세기 스와힐리문학의 중심이었던 파테와 주변 라무의 몰락을 보았다. 화이틀리(Whiteley, 1969:18)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19세기를 맞은 스와힐리 시문학 전통은 이제 보다 남쪽에 자리잡은 몸바사로 옮겨진다. 당시 무스캇의 왕인 사이드(Sayyid Said ibn Sultan)는 그의 형을 죽이고 1806년 오만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는데 그는 잔지바르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해안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의 권한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그는 영국과 1822년 모스비조약(Moresby Treaty)을 체결하여 노예무역을 자제한다는 조건으로 동아프리카 해안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그는 곧바로 1727년 이래로 몸바사를 지배해 온 오만 가문의 하나인 마즈루이가에 대한 공략을 개시했다. 오만 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보전하려던 마즈루이가는 1837년 함락되고 말았다. 그리고 사이드는 1840년 그의 도읍을 아예 잔지바르로 옮겼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배출된 시인이 무야카(Muyaka bin Hajji al-Ghassaniy,1776-1840)이다.

스와힐리 문학사상 무야카는 대강 세가지 면에서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첫째, 그의 시는 무슬림 전통을 탈피했다는 것이다. 그는 시를 회교사원으로부터 시장으로 가져감으로서 소재 및 주제에서 종교적인 생활을 탈피, 속세의 인간적인 삶과 감정을 문학화하였다. 둘째, 그는 시의 형식면에 있어서 이제까지 짜여진 우텐디 형식을 벗어나 '샤이리(Shairi)'라는 또 다른 형태의 스와힐리 시를 완성시켰다. 끝으로 그는 최초의 정치시인으로 꼽힐 만큼 당시 몸바사가 겪었던 정치적, 역사적 사실들을 문학화하였다. 시리아가문 출신으로 보이는 그는 몸바사 마즈루이 가문의 정치자문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슬람의 경견하고 숙명론적 운명론을 내보이는 시, 전통적인 도덕시, 교훈시적 성격을 띈 작품들을 썼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정치시인으로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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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무힐딘(Sheikh Muhyi 'l-Din b. Sheikh Kathan al-Waiti, 1789-1869)이라는 시인이 있다. 그는 스와힐리문학의 요람인 라무에서 무야카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시 비의 기도문(Dua ya kuombea mvua)에서 밝혔듯이 아랍계 혈통인 듯이 보인다. 그는 잔지바르의 판사(Kadhi)로 임명되자 북부의 스와힐리 시전통을 이곳으로 옮기는데 기여한 듯 하다.

그의 시는 무슬림전통에 입각하여 알라를 거역한 우리 인간들을 용서하고 복수를 하지 말 것을 기원하는 등 지극히 경건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무힐딘은 아랍의 이야기체 형식인 '미라지(miraj)'를 최초로 스와릴리어권에 도입하여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그 이야기 안에 기적적인 에피소드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게하며,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흥미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야기의 내용이 예언자 무함마드를 찬양하는 것이 주종이므로 무슬림교도들에게는 각별한 감명을 주기 때문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무힐딘은 우텐디라는 서사시 형태대신에 15음절이 한 행을 이루는 '우카와피(ukawafi)'라는 새로운 시형식을 개발하였는데 이전의 함지야와 유사한 형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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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무힐딘과 동시대의 작가인 우마르 아민(Umar b. Amin b. Umar b. Amin b. Nasir al-Ahdal, 1798-1870)이 있다. 그는 잔지바르의 술탄 사이드 마지드가 1861년 파테섬의 도시 시유를 정복할 당시 회교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동시에 시인으로서도 대단한 평을 누리고 있었다. 그의 시는 대체적으로 경건한 스와힐리 시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이슬람 철학을 그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는 단어의 머리 첫글자를 모아 시를 짓는 답관체시(Acrostic poetry)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이는 이제까지 이슬람에 관해 알려진 내용을 너무 규격화된 시 형식으로 되풀이해 온 것에서부터 탈피해 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예컨대, 그의 시 진주 목걸이(Dura mandhura)는 각 연의 첫 번째 세 행 첫 음절이 Ba-, Bi-, Bu-로 시작되거나, 연에 따라서 Ta-, Ti-, Tu-로 시작되곤 한다.

그의 또다른 작품은 1835년, 욥에 대한 서사시(Utendi wa Ayubu)가 있다. 이 시는 아유부의 부와 경건성 내지는 신앙심이 묘사되고 있다.

이블리스(Iblis 혹은 사탄)는 하나님에게 찾아가 욥이 빈곤해지면 하나님을 망각하게 될 거라고 주장하면서 욥을 시험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 결국 허가를 얻어낸다. 이블리스는 아유부의 가축을 모두 죽게 하고, 또 그의 자손들을 해치면서 아유부에게 시련을 준다. 또 아유부의 아내를 유혹하여 이들의 신앙심을 시험하나 모두들 사탄의 시련을 극복하고 구원된다는 내용이다

무힐딘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아민의 시도 압달라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종교적, 도덕적인 주제가 계속되고 있으며 신과 예언자를 찬양하며 지옥의 공포 및 천국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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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또 다른 시인으로 압달라 마수드(Abdallah b. Masud b. Salim al-Mazrui, 1797-1894)가 있다. 그는 무힐딘이나 아민과는 달리 보다 세속적인 사건들을 작품의 소재로 다루고 있다. 그의 초기 작품 Utendi wa Mwana Hasina na Rashida Walii는 종교적 도덕성과 세속적 사랑사이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수도생활을 하는 하는 한 성자를 사랑하는 공주가 대담하게 그를 유혹하지만 그는 결연히 거절한다. 공주는 아버지 왕에게 요청하여 성자의 거처 인근에 기거하면서 그에게 수업을 받게 된다. 그녀의 매력과 유혹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수도사는 스스로를 거세시킨다. 공주가 임신하여 문제가 되지만 거세한 선생은 스스로의 무고함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여기서 여성은 이슬람문학에서 흔히 그러하듯 사악의 원천중의 하나로 묘사되고 있다.

이보다 더 세속적이며 현실적인 사건을 다룬 작품이 Utendi wa al-Akida이다. 이 작품은 1870년 중반에 발생했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수드는 이 시에서 수우드와 몸바사의 원로들을 사악한 그룹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몸바사의 분열이 패망을 초래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같은 분열은 시인 수우드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몸바사 원로들의 시샘에 기인된다고 설명하며, 무엇보다도 마수드가 그리려 했던 것은 점점 커갈수록 질투와 불화로 파괴를 향해 질주해 가는 권력의 속성과 이에 따른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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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스와힐리 문학사에 있어서 소위 운문식 대화(verse dialogue)와 서간체 운문(epistolary verse)가 유행하였다. 예컨대 Utenzi wa Katirifu의 저자인 아부바카리와 알리 압둘라(Ali b. Sheikh Abdullah)는 어린 소녀의 후견이라는 대화시를 지었고, 아부바카리와 라무출신의 알리 사아드는 남편에게 버림받아 아이들과 함께 홀로 사는 어떤 여인에게 법적 충고를 고하는 대화시를 쓰고 있다.

몸바사의 시인 무야카도 법과 윤리에 관한 대화시를 남겼다. 이 외에도 이슬람의 세세한 종교의례에 관한 논쟁을 알리 코티(Ali Koti, 1820-1895)와 무사(Musa al-Faman)선생이 벌이고 있다. 무사는 음지고(하물)의 노래(Mzigo Song)의 저자로 1848년까지 파테를 지배한 가문출신 아흐멛의 친구였다. 아흐맫(Ahmad b. Fumoluti)은 지방 유지들과 잔지바르의 마지드 사이드에 저항한 인물로서 사자(Simba)로 알려져 있었으며 위투(Witu)에 요새를 건조하기도 했다. 바로 이곳에서 알리와 무사는 하물의 노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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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여성시인도 있었는데, 무와나 쿠포나(Mwana Kupona binti Msham, 1810-1860)가 그 사람이다. 1858년 쿠포나는 Utendi wa Mwana Kupona를 지었다. 이 시는 17살 먹은 자신의 딸을 염두에 두고 성장해가는 여식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하는 문제를 다루로 있다. 이 시를 바탕으로 우리는 당시 스와힐리 여인들이 상당한 교육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시를 읊고, 또한 창작에도 참여함으로서 일반적으로 이슬람 사회에서의 낙후된 여성지위에 대한 편견과는 대조적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쿠포나 이외의 시인들은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무슬림 전통의 헌시가 주종을 이루었다. 예컨대 쉐이칸(Sheikhan b. Ahmad b. Abu Bakr al-Husein)이나 사이드 만삽(Sayyid Mansab, 1828-1922)이 그러하다.



4. 유럽의 침략과 그 결과

19세기 중반이래로 동아프리카 지역에 서구의 문물이 쇄도해 오면서 스와힐리 전통문학의 소재 및 형식에도 급격한 변화를 초래케 하였다. 독일의 탐험가이자 선교사, 학자였던 크라프(Ludwig Krapf)는 1884년 몸바사에 도착하여 서구인으로는 맨 처음으로 스와힐리 문학작품을 발굴해냈다. 런던의 CMS소속 선교사이기도 했던 그는 1854년 스와힐리 문학원고를 독일로 가지고 가 1887년 출간함으로써 유럽인들이 최초로 스와힐리 문학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UMCA소속 선교사 스티어(Edward Steere)는 1886년 잔지바르에서 스와힐리 이야기를 모아 출간하기도 했다. 1885년 베를린 회의를 기점으로 아프리카가 분할되고, 1890년 헬리골란드 조약을 계기로 잔지바르 및 케냐가 영국령으로, 탄자니아가 독일령화 되었다. 이후 영국, 독일출신의 많은 스와힐리 문학연구가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한편 스와힐리 문학의 중심은 몸바사에서 점차 남진하여 펨바, 탕가등 탄자니아 해안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 즈음의 대표적인 작가로 헤메디(Hemedi b. Abdallah b. Said al-Buhriy)가 있다.

그의 첫 작품 Utendi wa Seyyidna Huseni bin Ali는 7세기 경 다마스커스의 우마이야드조의 칼리프인 야지드에 대항한 예언자 무함마드의 손자 후세인의 항거를 노래한 것이다. 이제까지 이슬람에 관한 스와힐리시가 신의 군사적 정복에 그 역점이 주어졌으나 헤메디는 보다 정신적인 측면에 역점을 두고 마흐디 전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켰다.

그의 두 번째 작품 Utenzi wa Abdirrahmani na Sufiyani는 예언자의 처남 압둘 라만의 종교적 전향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악의 화신인 수피아니 편에 서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전사를 강탈했던 압둘 라만이 여러 곡절을 겪은 후 마침내 이슬람으로 귀의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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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들의 침략을 다룬 Utenzi wa Vita vya Maji-Maji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은 압둘 카림(Abdul Karim b. Jamaliddini)이 쓴 것으로 1912년 A. Lorenz에 의하여 Lindi에서 발굴되었다. 이 시는 마지마지 저항의 실패를 어떤 개인의 우연한 실수 탓으로 돌려 설명키 어려운 운명의 향방을 우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카림 이후 스와힐리 고전문학은 서구 문학의 영향과 함께 현대문학으로의 변모를 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