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역사 100장면

15-5. 남아프리카 공화국 -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africa club 2011. 1. 10. 16:00

1.1.1. 5. “인종의 분리 발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 아프리칸스어로 분리(apartness)'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는 1948년부터 1991년까지 남아공에서 시행된 인종격리, 차별, 그리고 백인의 통치를 일컫는 정책이다. 인종차별이 공식적으로 소개되기까지 인종차별주의적인 정책들은 남아공에서 300년 넘게 시행되었다. 17세기 케이프에 이주한 네덜란드인들은 현지 코이코이인들과 준 노예관계를 성립시켰다. 보어인들은 값싼 농장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와 다른 지역에서 노예들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를 빼앗았다. 1807년 노예를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지만 노예무역을 금지시키고 1820년 약 4000명의 영국인들이 케이프로 이주해왔다. 합법적인 노예구매와 무임노동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됨으로서 아프리카너들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것은 1833년 영국 노예제도 폐지로 이어졌다. 다른 변화와 함께 이러한 상황은 아프리카너의 생활방식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되었고 1836년 그들은 영국으로부터 구속받지 않고 살기위해 아프리카 내륙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대이주(Great Trek) 과정에서 세워진 아프리카너 공화국은 당연히 아프리카너 자결권과 원주민을 통치할 권리를 중요한 요소로 포함하게 되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남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어마어마한 양의 다이아몬드와 금 매장량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인들은 남아공를 무력으로 정복했다. 앙골로-보어전쟁(Anglo-Boer War ; 1899~1902)에서 아프리카너들이 패배했다. 그러나 전쟁 중 영국인들의 잔혹성에 대한 영국에서의 자유주의 반동은 앙골로-보어 우호관계를 만들기를 촉구했다. 1910년 영국 식민지들과 아프리카너 공화국들은 백인이 통치하는 남아연방(Union of South Africa)으로 통합되었다. 아프리카너인 루이스 보타(Louis Botha)가 첫 수상이 되었다.

수년 후 대부분이 농부이거나 도시 노동자의 하층민이었던 아프리카너들은 이익이 많이 나는 채광산업, 숙련된 전문가, 군대 그리고 공무원으로 일하는 영국인들에 대해 분개했다.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는 영국인의 제국주의와 통치의 결과 출현하게 되었고 폭넓게 발전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아프리카너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1912년 국민당(National Party)이 만들어 진 이후 흑인들에 대해 그 화살이 돌려지게 되었고 1924년 힘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영어를 사용하는 남아공인이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하는데 있어 아프리카너와 결탁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1934년 국민당(NP)은 아프리카너와 영어사용 백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다은 당과 합당하여 연합당(United Party)을 만든다. 국민당의 나머지 추종자들은 부르더르본드(Broederbond ; 영향력 있고 비밀스런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자 모임)와 다니엘 프랑소와 말란(Dr Daniel François Malan)이 이끄는 다른 극단주의 아프리카너에 의해 부활되었다. 이 ‘순수한 국민당’은 1948년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정책을 약속하며 정권을 잡았다. 말란은 모든 흑인을 특별 보호지로 보내고 오직 백인주도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며 신이 명령한 ‘흑인들로부터 문명을 지킬 것’을 약속했다. 이 메시지는 직업상 흑인 다수와의 경쟁에 두려워하던 많은 백인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인종차별정책은 또한 광산주와 백인농민에게 그들의 유리한 지위를 지속하게 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환영받았다. 값싼 흑인 노동력을 이주 노동자로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종차별정책은 남아공에서 역사적으로 만들어져 온 인종적 격리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법에 의해 강제되고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주민(후에 반투족(Bantu)) 문제 장관(Ministry of Native Affairs ; 1910년 처음으로 만들어짐)인 헤르초그(J,B,M Hertzog)는 인종차별정책의 뼈대를 형성하는 정책과 법을 기안하기 시작했다. 비록 많은 정책들이 1948년 이전에 만들어졌지만 이후 더 넓은 범위로 확대되고 강제되었다.

인종차별의 핵심은 모두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는 것을 부정하고 오직 백인들만 가진다는 것이다. 다른 인종차별정책들과 마찬가지로 투표권 역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세기 처음으로 세워진 아프리카너 공화국은 오직 아프리카너 남자만 투표하도록 허가했다. 또한 영국인은 케이프 이외 지역에서의 흑인 투표권을 부정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케이프 안에서도 교유과 재정적 조건을 만족시키는 소수만이 투표권을 갖을 수 있었다. 인도인과 칼라드 투표자는 1983년에 3원제 의회제도에 의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의미가 없는 숫자였으므로 백인 통치와 지배는 계속 될 수 있었다. 백인을 제외한 그 어떤 인종도 자신들의 권리인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재배치 정책은 흑인들이 백인 도시에 밤새 머무르는 것을 제한하고 사람들을 도시지역에서 격리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1913년 원주민 토지법(Native Land Act)이 제정된 이후 남아공 흑인들은 원주민 보호지(native reserves)에서만 땅을 사거나 빌려주는 것이 허락되었다. 인구의 60%가 넘는 인원이 고작 전 국토의 7.3%(후에 13%로 증가)에 살도록 제한되었다.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 됨으로서 흑인들은 농장이나 광산에서 일손을 필요로 하는 백인들을 위해 일해야만 했다. 1948년 집단 지역법(Group Areas Act)에 따라 공식적으로 지정된 각각의 인종들이 각각의 주거지역과 업무지역에 살게 되었고 이를 위해 강제적으로 이주시겼다.

1960년대까지 보호지는 많은 인구에 자원은 부족했으며 기아가 만연함으로서 살아가가 어렵다는 것이 명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9년 260개의 보호지가 몇 개의 홈랜드(Homeland) 또는 반투스탄(Bantustan)으로 지정되었다. 분리주의정책에도 불구하고 1948년에 흑인의 60%가 백인지역에서 살았다. 그러나 1960년에서 1983년 사이 약 3백만 명이 반투족의 자치구로 퇴거당했다.

인종장벽(color bar)은 숙련된 기술자로 일하는 것과 같은 많은 행위에 있어서 대다수 흑인들의 진출을 방해했다. 예를 들어 비공식적인 인종장벽은 광산업에 오랫동안 존재했었다. 흑인들이 저임금 수공작업에 머물렀던 반면 백인은 감독직과 숙련직을 차지했다. 1922년 흑인들을 관리직으로 승진시키려했을 때, 백인 광산업자들에 의해 거의 내전에 가까운 파업과 데모가 발생했다. 2년 후 국민당은 백인노동조합의 지지로 힘을 얻게 되었고 즉시 인종장벽을 합법화 하였다.

1955년 반투 교육법(Bantu Education)이 통과하였다. 이후 많은 학생들이 높은 수준의 학문교육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했다. 대신 낮은 수준의 교육이 원주민(반투족)부(Department of Native (Bantu) Affairs)에 의해 승인되어 제공되었다. 이에 따르지 않은 학교는 폐교되었고 저항하는 교사는 해고되었다.

이 법령 하에 남아공인들은 그들의 신분증은 ‘인종’에 의해 분류되고 기재되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어느 지역에서 살 수 있고, 어떤 일을 할 수 있으며 누구와 결혼할 수 있는지 따위를 결정하는데 사용되었다.

첫 번째 통행법(pass law)인 호텐토트 조약(Hottentot Code)은 1809년 영국인에 의해 케이프 식민지에 소개되었다. 이 법령은 모든 코이코이족들은 지정된 거주 지역을 가지며 여행할 때에는 고용주의 확인을 요구했다. 이 법은 코이코이인들이 통행권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너들의 농장에서 강제로 일을 해야하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영국 이주자들을 위한 이동 가능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이 법은 몇 년 후 폐지되었지만 이 법은 이후 제정되는 많은 법의 시초가 되었다. 통행법은 흑인들을 백인들의 도시에 접근할 수 없도록 했으며 다른 흑인들을 홈랜드로 강제로 돌려 보낼 수 있었으며 백인들에게 계속적인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부강하고 잘 무장된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보호하기 위해 이웃하고 있는 국가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협박, 파괴, 군사행위 그리고 전복 같은 방법이 정권을 흔들기 위해 사용되었다. 남아공은 이에 대해 위협을 느꼈고 이에 따라 불법적인 로데시아(Rhodesia ; 현재의 짐바브웨(Zimbabwe) 백인정부를 지원하게 되었다. 적들의 게릴라 토대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핑계로 남아공은 많은 이웃 국가들을 침략했다. 앙골라(Angola)는 침략당하고 파괴되었으며 모잠비크(Mozambique)의 반란군을 남아공이 지원함으로서 오랫동안 내전이 지속되었다. 동부와 중부 아프리카 국가들은 전쟁지역으로부터 발생한 피난민의 유입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나미비아는 1990년대까지 불법적으로 남아공에 의해 점령당했고 인종차별정책이 실시되었다. 남아공은 경제적으로 남아공의 온정에 의지할 수 밖에 없던 레소토와 스와질란드에게 지지자의 역할을 강요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경봉쇄 정책을 사용했다.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반대는 모든 인종에게 그리고 많은 형태로 널리 퍼졌다. 첫 번째 조직된 저항운동은 1893년에 나탈에 와서 1914년까지 머물렀던 인도인 변호사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에 의해 이루어졌다. 간디는 비폭력적인 방법과 법에 대한 호소로 훗날의 운동에 귀감이 되었다. 1923년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된 남아프리카 원주민 회의는 1912년 형성되었다. 첫 번째 지도자 존 듀베(John L. Dube)는 영국인에게 항의하고 법정에서 부당한 법에 대항함으로써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개혁에 대한 정부의 완강한 거부는 좀 더 폭력적이고 전투적인 방법을 야기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1944년 안톤 렘베데(Anton Lembede)가 청년 연맹(Youth League)을 창립함과 함께 대규모의 대중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넬슨 만델라, 월터 시술루 그리고 올리버 탐보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성공적인 대중 정치 동원의 첫 번째 예 중 하나는 1952년의 불복종 운동(Defiance Compain)이다. 인도인과 다른 집단들 그리고 훈련된 지원자들과 함께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전국에서 부당한 법들에 대해 불복종 운동을 주도했다. 이 운동은 폭력의 발발 후에 중지되었다. 정부에 의한 보복은 종종 가혹했다. 인종차별로 인해 야기된 사회불안을 통제하기 위해 경찰병력을 증가시켰다. 고문과 스파이들이 널리 이용되었고 경찰의 감금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들의 활동을 중지시키기위한 정치적 활동의 제한과 금지같은 보다 인도적인 통제 방법들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1961년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의장이었던 올리버 탐보는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해외지국 설립을 위해 남아공을 떠났다. 그는 잠비아(Zambia)의 루사카(Lusaka)에서 게릴라전을 계획하고 재정을 확보했다. 같은 해, 만델라는 남아공 정부에 대화를 촉구하는 압력을 가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중요한 시설들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움콘토 웨 시즈웨(Umkonto we Sizwe ; 민족의 창)운동을 발족시켰다. 이 결과 만델라와 시술루는 1964년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1976년 아프리칸스어로 반투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정부 발표로 인해 소웨토(Soweto ; 요하네스버그 남서 지구(The southwestern township of Johannesburg)의 약자)의 학생들은 봉기하였다. 항의는 확대되었고 파업은 요하네스버그를 마비시켰다. 경찰의 발포로 1976년 말까지 어린이를 포함해 500명이 넘게 살해되었다.

대부분의 저항세력 지도자들은 비폭력 방식을 수용했지만(데스몬드 투투는 그의 비폭력 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운동방식은 때때로 다른 이들에게 부정되었다. 많은 사건이 정부 비밀요원에 의해 선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뿐 아니라 민족 집단에 의해 실시된 인종차별정책은 불가피하게 흑인과 흑인(black-on-black)의 폭력을 야기했다. 부텔레지(Buthelezi)의 줄루 인카타(Zulu Inkatha)운동(1928년 조직되고 1975년 다시 소집되었다)과 만델라의 움콘토는 인종차별정책을 폐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일원들은 종종 많은 문제에서 충돌하였다.

도덕성에 대한 무관심, 정부의 경제적 위기는 많은 위기상황을 불러왔다. 1948년 선거 이전에도 격리주의 정책이 가져오는 문제는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정부는 보호지에 추방된 흑인 노동력이 경제발전에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흑인 노동력은 잘 교육받고 효과적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했지만 인종차별정책하에서는 불가능 했다. 특히 건설 분야 고용주들은 자주 발생하는 결원을 채우기 위해 인종장벽을 무시했다. 1960년 샤퍼빌 학살과 1976년 소웨토 봉기 이후 해외투자는 중단되었고 자금은 해외로 유출되었으며 집값과 주식시장은 폭락했다. 그리고 사업들은 무너졌다. 많은 방면에서 인종차별은 경제적으로 타당치 않았다. 또한 국내와 국외로부터의 압력은 인종차별정책을 더욱 쓸모없게 만들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UN으로 결합하면서 남아공의 발전에 대해 국제사회의 제재를 요구했다. 1985년 국제은행들은 남아공에 대한 제제를 가하게 되었고 대출은 연장되지 않았고 약속대금은 인출되었다. 1990년 만델라가 풀려났고 1991년부터 모든 인종차별 법률이 폐지되었다. 마침내 1994년에 첫 비 인종 선거가 남아공에서 실시되었고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수년에 걸쳐 인종차별이 창출한 불평등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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