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김영희) 킬리만자로를 마시는 사람들

2. 나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살아왔다. 내 인생이 아버지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 음야카 1

africa club 2003. 12. 20. 01:57


소스 피터 음야카 (남, 67세)

‘나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살아왔다. 내 인생이 아버지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적이 없는 한 애들은 내가 살아온 것보다 더 못하게 살 것 같다.’  


내 이름은 소스피터 음야카이다. 나는 1933년 8월 24일 카토마 마을의 루킨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음야카이고 어머니는 에네스티나라고 부른다. 나는 장남이다. 내 밑으로 누이동생 둘, 남자 동생이 하나 있다. 다 해서 네 형제이다.
나는 무숑게라고 불리우는 전통적인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나나 밭과 소가 두 마리 있었다. 어머니는 따로 재산이 없었고 전적으로 아버지한테 의존했다.

나는 나의 친할머니한테서 자랐다. 나는 아버지가 학교에 보내려고 나를 데려갈 때까지 할머니와 함께 있었다.  
내가 열 살 때 학교에 들어가서 4학년까지 있는 초등학교를 마쳤다. 이때가 1941년부터 1946년까지이다. 카토마 초등학교였는데 카톨릭 계였다. 나는 쓰기, 셈하기, 읽기 그리고 교리를 배웠다.  
나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다시 할머니네 가서 살았다. 거기서 소치고 물긷고 땔나무 해오는 등의 일을 했다.

1950년에 아버지가 나를 우리와 같은 마을에 사는 목수에게 데려가서 목수일을 배우게 했다. 그 목수는 이름이 조셉 마샤과였다. 나는 그 이듬해 1951년까지 목수 일을 다 배워서 그 후는 독립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나는 1953년에 결혼했다. 그때가 19세였다. 아내는 이름이 클레멘티나이다.
내 아내감은 아버지가 친구를 통해서 골라주었다. 그들은 내 아내의 집에 가서 결혼을 시키기로 서로 합의를 봤다.  
혼약을 하고 결혼하기 까지는 1년이 걸렸다. 아버지가 그동안 신부값을  다 치르어 주었다. 나는 아직 독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부값을 다 치르고 나서 아내를 데려올 수 있었다.

아내 클레멘티나와는 1957년까지 살았다. 그리고는 서로 맞지 않아서 헤어졌다. 그러나 헤어진 주된 이유는 아내가 아이를 못낳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결혼하고 몇 년간 아이를 못낳으면 남자 측의 부모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하여 헤어지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관습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관습대로 혼인을 했기 때문에 이혼에 어려움은 없었다. 아내가 아이를 못낳는 것이 이혼의 사유로 충분했다.

첫 아내와 헤어질 무렵에는 나는 장성해서 독립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도 나처럼 한번 결혼했다가 그만 둔 여자였다. 우리는 얼마동안 사귀다가 결혼하기로 했다. 그래서 부모님한테 다른 여자가 있다고 알렸다. 그들은 그 여자가 처녀인가 결혼한 일이 있는 여자인가 물었다. 나는 결혼했던 여자지만 아직 젊다고 했다.
부모님은 승낙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 절차를 밟았다. 나는 이미 독립을 했기 때문에 내가 신부값을 치루었는데 6개월이 걸렸다.

우리는 1958년에 결혼했다. 나의 두 번째 아내도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전통 관습대로 결혼을 했다. 1959년 아내가 교리공부를 시작하여 영세를 받을 수 있었다. 아내는 1960년에 영세를 받고 혼인 미사를 올렸다.
1959년 첫아이가 태어났다. 혼인미사를 올리기 전이었다. 딸이었지만 기뻤다. 부모님도 기뻐했다. 아이 이름은 이멜다이다.
1963년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이 스티븐 소습터이다. 1966년에는 또 딸이 태어났는데 스테파니아이다. 1969년 아들이 태어나서 엘리지우스라고 이름 지었다. 1971년에는 셋째딸이 태어났다. 걔가 막내이다. 그래서 나는 아들 둘에 딸이 셋이다.  

첫 번 결혼 때는 6개월간 부모님과 한 집에서 살았다. 그 다음 아버지가 밭 한 쪽 땅을 주어 나는 거기에 집을 지었다. 집을 다 지어 우리는 그리고 들어가서 살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두 번 째 결혼을 하고서도 계속 그 집에 살았다.

큰 딸 이멜다는 초등학교만 나와서 지금은 결혼했다. 스티븐과 스테파니아도 초등학교만 나왔다. 스티븐을 더 공부시키려면 사립 중학교에 보내야 했는데 그럴만한 돈이 없었다. 엘리제우스는 중학교를 나왔다. 그러나 성적이 좋지않다. 에네스티나도 초등학교만 나왔다. .
지금은 딸들은 다 결혼해서 살고 있다. 스티븐도 결혼했고 집을 따로 지었다. 그 애는 직장이 없다. 엘리제우스는 조그마한 장사를 하고 있고 역시 결혼했다. 스티븐은 아이가 다섯이고 엘리제우스는 넷이다.

나는 아버지 밑에서는 편하게 살았다. 1949년 그는 우리 카토마 마을에서 약 70킬로 떨어진 카라궤란 곳으로 이사갔다. 아버지는 거기서 자리잡고 살다가 1999년 돌아갔다. 돌아가실 때 나이가 90세였다.

아버지가 돌아간 후 나는 가서 어머니를 모셔왔다.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산다. 나는 장남이기 때문에 돌볼 의무가 있다. 내 여동생과 우리 아이들이 능력껏 나를 도와준다. 나의 남동생은 1979년 이디 아민 전쟁때 죽었다.

나는 자랄 때 그리고 아내를 얻기까지는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존했다. 아버지가 카라궤에 이사하자 아버지의 바나나 밭을 물려받아서 거기에 옛집을 헐고 신식집을 지었다. 나는 지금 나의 현재 아내와 그리고 큰 아들인 스티븐(따로 집이 있지만) 과 편안히 살고 있다.  

나는 아직도 일 할 수 있다. 나는 벽돌로 된 신식 집을 짓는 일을 해서 가용에 쓸 돈을 번다. 스티븐은 직업이 없다. 그 애는 바나나 밭과 우리가 기르는 커피를 돌본다. 우리는 또 엘리제우스를 도와주러 카라궤를 자주 가는데 그 애는 아버지가 남긴 밭에서 살고 있다. 아내는 집안일을 하고 바나나 밭의 김을 매준다.  

1979년 우간다- 탄자니아 전쟁 때 동생이 죽고 나자 나의 가족들은 전적으로 다 나한테 의존을 하고 있다. 즉 내 아이들과 죽은 동생의 아이들까지 부양해야 한다. 엘리제우스만이 독립해서 남을 도와줄 능력이 있다. 그애는 장사를 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집에서는 나와 엘리제우스가 집안의 기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