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역사 100장면

34.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africa club 2011. 1. 31. 13:41

현재의 마다가스카르에 살았던 최초의 사람들은 10세기 전에 정착했던 말레이-폴리네시아인(Malayo-Polynesian)이었다. 이들은 후에 들어온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에서 사람들과 혼혈이 일어났다. 이슬람교는 동아프리카의 무역업자에 의해 14 세기부터 북쪽에 소개되었다. 몇몇의 강력한 왕국이 15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중 3개의 주요한 왕국은 16세기 후반에 서해안에서 처음 발달한 샤카라바(Sakalava) 왕국, 17세기에 동해안에서 생겼던 추장들의 동맹체인 치탐발라(Tsitambala) 왕국, 15세기부터 중부 고지대에서 발달했던 메리나(Merina) 왕국이었다. 19세기 초까지, 메리나 왕국은 마다가스카르 섬의 거의 모든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1500년에 섬에 도착하는 첫 번째 유럽인은 포르투갈의 항해자 디아고 디아스(Diogo Dias)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슬람교의 정착지를 습격하였다. 영국인과 프랑스인을 포함하여 다른 유럽인들은 나중에 도착했고, 17세기 후반과 18세기의 초에, 마다가스카르는 해적선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가 되었다. 19세기 초기에, 메리나의 왕인 라다마 1세(Radama I)는 영국과 프랑스 선교사를 환영했고, 1861년에, 라다마 2세(Radama Ⅱ)는 프랑스 무역 회사에 특권을 주어 큰 힘을 주었다. 영국은 1890년에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프랑스 지배를 인정했다. 그러나 1895년 1월에 메리나는 복종하기를 거절했고, 프랑스 군대는 북서의 해안가에 상륙하여 그해 9월에 안타나나리보(Antananarivo)를 점령했다. 메리나의 여왕은 왕위는 유지하였지만 프랑스 보호령을 인정할 것을 강요당했다. 프랑스 통치에 대한 반대는 제 1차 세계 대전의 끝 후에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1946년에, 프랑스 연합(French Union)에서 자치 상태가 되었다.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는 1960년 6월 26일, 말라가시공화국(Malagasy Republic) 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사회 민주당의 총수였던 필리베르트 치라나나(Philibert Tsiranana)로서, 친 서양정권 특히 친 프랑스 정권을 따랐으며 그의 국가와 북 아프리카와의 깊은 관계는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는 1965년과 1972년에 또 다시 재선되었다. 그러나 부정선거의 주장으로 사회적 불안과 치라나나의 사임을 야기 시켰다. 그 뒤 군총사령관 가브리엘 라마난초아(Gabriel Ramanantsoa) 장군이 정부를 통치하였다. 1972년 10월 국민의 투표로 신임을 얻은 라마난초아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새 정권을 프랑스로부터 격리시켰다. 정부는 1972년~1975년 사이에 전 프랑스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프랑스인 공무원을 과 말라가시(Malagasy) 시민들로 대체하였다. 라마난초아는 또한 남아공과의 관계를 깨고 공산주의 국가들과 관계를 확립하였다.

1975년 사회 불안과 쿠데타 미수사건은 라마난초아가 육군 장교 리차드 라치만드라바(Richard Ratsimandrava)에게 대통령직과 수상직을 양도하였다. 그러나 6일후, 라치만드라는 암살당하고 해군 장교인 디디에르 라치라카 (Didier Ratsiraka)가 대통령이 되었고 혁명 위원회(Revolutionary Council)의 의장이 되었다. 새로운 헌법이 국민투표로 승인되었고, 라치라카가 대통령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국가 명을 마다가스카르 민주주의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Madagascar)으로 개칭하였다. 라치라카의 통치권 아래, 비록 공산주의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을 유지해 나갔지만 프랑스와의 관계는 향상되었다. 마다가스카르 정부는 사회주의 정책에 따라 천연자원, 은행, 그리고 보험 등을 국유화했다. 1977년에 열린 의회선거에서 라치라카가 결성한 혁명 방어 국민전선(National Front for the Defence of the Revolution)이 승리했다. 이 정당은 이후 유일한 합법정당이 되었다.

라치라카가 1982부터 1983년 재선되었는데 이 당시 정부는 자유시장 경제 정책의 채택과 정부의 역할 감소로 인한 많은 경제적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라치라카는 1989년과 1990년 또 다시 재선되었고 정부는 정당의 자유로운 설립을 허가하였다. 1991년에는 야당이 라치라카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비록 라치라카는 대통령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알버트 자피(Albert Zafy)가 주도하는 과도 정부를 설립한다. 1992년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고 여러 개의 정당이 재건된다.

1993년, 라치라카는 패배하고 자피가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1996년, 자피가 헌법을 위배했다는 주장으로 탄핵소송에 직면하였다. 비록 그가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였지만 자피는 사임한다. 그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던 라치라카는 선거에 의해 복직하게 된다.

1998년, 국민들은 새로운 헌법을 승인했는데 정부 체제를 통일된 중앙집권체제(unitary)에서 연방정부체제로 전환하여 6개주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권한은 국회의 권한을 감소시킨 반면 대통령의 권한은 강화되었다.

 
1. 마다가스카르 인들

마다가스카르의 국민들은 크게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주로 중부와 남부-중부의 고지대에 모여사는 인도네시아계 혈통과 ‘해안 사람들(Côtiers)’로 불리는 주로 해안에 사는 흑인 아프리카계 인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이들은 고지대에서 생활하며 국가 총인구의 거의 27%를 구성하는 메리나(Merina)족과 15%를 구성하는 베실레오(Betsileo)족이다. 섬에 정착했던 초기의 사람들은 말레이 폴리네시아계인들이었다. 그들은 1500년-2000년 전 사이 이 섬에서 살았고, 그들은 후에 아프리카, 아시아를 포함한 아랍인들과 유럽인의 이주민들과 혼혈이 일어났다.

마다가스카르의 역사는 강대한 3개의 왕국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 왕국들은 작은 영역이 통합되어 형성된 것이다. 그 왕국들 중 첫 번째로 사칼라바(Sakalava) 왕국은 16세기 후반에 서쪽 해안지역에서 건국되었다. 18세기 중반부터는 거의 섬 전체의 반을 통치하게 되었지만 1808년 여왕 라바히니(Ravahiny)가 죽은 뒤 분열되었다. 두 번째 왕국은 17세기에 동쪽 해안지역에서 추장들이 동맹을 맺어 만들어졌던 치탐발라(Tstambala) 동맹체다. 이 왕국은 베치미사라카(Betsimisaraka) 왕국을 세운 영국 해적의 아들로서 영국식 교육을 받은 라치미라호(Ratsimilaho)에 의해 정권이 이양되었고 또 왕국이 확대되었다. 세 번째 왕국은 중앙 고원지대로부터 15세기에 유래 되었고 바짐바(Vazimba) 원주민들을 정복한 메리나(Merina)족에 의해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메리나 왕국은 점점 커져갔고, 1791년에 베치미사라카 왕국이, 1822년에는 사칼라바 왕국이 멸망하여 메리나 왕국은 섬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유럽과의 접촉은 1500년 포르투갈 함대가 섬에 도착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작되었다. 300년 후 포르투갈, 영국, 독일, 그리고 프랑스는 섬을 파괴하며 그들의 식민지를 세우기 위해서 노력했다. 17세기 말에는 미국과 유럽의 식민지에 기반을 둔 소규모의 해적들이 인도양을 항해하는 배들을 약탈했다.

19세기 중반 무렵 메리나(Merina) 왕국의 통치자 라다마 1세(Radama I)는 특히 프랑스와 독일의 외부세력에게 마다가스카르를 개방하였다. 1817년 영국은 그를 마다가스카르의 왕으로 인정하였고 영국과 다른 유럽의 자문위원회에게 그들의 학교와 공업 그리고 군대와 기독교의 설립을 도와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한 정책은 1828년 라다마 1세가 죽은 뒤 바로 뒤바뀌게 되었고 그의 부인인 라나발로자 1세(Ranavalona I)가 나라를 상속하였다. 그녀는 거의 모든 유럽인들을 쫓아내고, 학교와 교회를 폐쇄하였다. 그러나 1861년 그녀가 죽고난후 프랑스와 영국은 다시 돌아왔다. 30년이 지난 후 프랑스와 영국은 메리나 왕조가 지배하는 마다가스카르의 섬의 통치권을 주장하였고 1883~1885년, 프랑스와 메리나 왕국 사이에 잇따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890년 영국은 영국이 이집트와 잔지바르(Zanzibar)의 통치권을 갖는 대신 프랑스가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통치권을 갖는데 동의하였다. 그리고 1895년에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 통치권으로 선언하였다. 여왕 라나발로나 1세와 국민들은 이러한 조치에 반대하였고 프랑스는 무력으로 이를 제압하였다.

   

2. 마다가스카르의 역사

1~5세기 :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함.
10~13세기 : 동아프리카의 이슬람들이 섬의 북쪽지방에 정착.

1500년 : 포루투갈의 해양탐험가인 디아고 디아스(Diogo Dias)가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한 첫 외국인이 되다.

1506~1506년 : 포르투갈이 마다가스카르 안에 있던 이슬람의 촌락을 파괴하고 무역시작.

17세기 : 메리나 왕국이 설립됨.
1643년 : 프랑스가 남부 마다가스카르에 포트 두핀(Fort Dauphin)을 건설.
1671년 : 프랑스가 포트 두핀을 포기하고 떠남.
1680~1720년 : 1680~1720년 마다가스카르가 해적들에게 중요한 거점이 됨.
18세기 : 마다가스카르에 사칼라바(Sakalava) 왕국이 만들어짐.

1787~1810년 : 메리나가 남포이나(Nampoina) 왕의 통치아래 마다가스카르 전역을 통치하게 됨.

1810년 : 라마다 1세(Ramada I)는 노예무역을 금지.
1817년 : 영국은 라마다를 마다가스카르의 왕으로 인정.

1845년 라나발로나 1세(Ranavalona I) 여왕은 영국과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치고 유럽 선교사들과 상인들을 추방.

1861년 라나발로나 여왕이 죽은 뒤 라다마 2세(Ramada II)는 프랑스 무역회사에게 이권을 넘긴다.

1869년 : 라이니라이아리보니(Rainilaiarivony) 수상은 마다가스카르에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를 승인.

1883~1885년 제 1 차 프랑코-메리나 전쟁(Franco-Merina War) : 메리나는 프랑스에 디에고 수아레즈(Diego Suarez)를 양보.

1890년 :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를 보호국으로 선언.

1895년 : 제 2 차 프랑코-메리나 전쟁 : 메리나가 프랑스의 지배를 거절한 이후 프랑스는 수도인 안타나나리보(Antananarivo)를 점령.

1896년 :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의 식민지로 선언된다.

1897년 :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의 마지막 군주인 라나발로나 3세(Ranavalona III)를 퇴위시킴.

1900~ 45년
1915년 : 민족주의 비밀 협회인 Vy Vato Sakelika(VVS)가 금지됨.

1920년 : 마다가스카르의 시민권 운동을 주도한 온건한 민족주의 운동이 프랑스에 의해 억압됨.

1940년 :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의 비시정부를 지원.
1942년 : 영국과 남아공이 마다가스카르를 정복.
1943년 : 영국은 마다가스카르를 프랑스 자유정부에 넘겨줌.

1945년 :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에게 국회를 조직할 수 있도록 선거를 치룰 수 있는 궈리를 부여.

1947년 : 독립운동이 일어남.
1948년 : 프랑스는 독립 운동에 참여한 80,000명을 진압.
1950~59년
1958년 : 마다가스카르는 정부를 갖게됨.

1960년 6월 26일 : 마다가스카르는 말라가시 공화국(Malagsy Republic)으로부터 독립. : 필베르트 치라나나(Philibert Tsiranana)가 초대 대통령이 됨.

1965년 : 치라나나가 대통령에 재선됨.
1970~79년
1971년 : 남부 마다가스카르에서 야당이 폭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됨.

1972년 : 폭동이 일어나게 되어 치라나나는 사임. : 가브리엘 라마난초아(Gabriel Ramanantsoa)의 지휘 아래 있는 군정부가 통치권을 장악.

1975년 : 디디에르 라차라카(Didier Ratsiraka) 대통령은 외국인 소유의 기업을 국영화하고 국명을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로 변경.

1982 라차라카가 대통령에 재선.
1983 라차라카 대통령이 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도입.
1991년 : 라카라차 대통령은 알버트 자피(Albert Zafy)에게 과도정부를 일임.
1992년 : 다당제가 국민투표에 의해 헌법에 명시됨.
1993년 : 자피(Zafy)가 대통령에 당선됨.
1996년 : 자피는 국회(National Assembly)에 의해 탄핵된 후, 대통령 직을 사임.
1997년 : 대통령선거 후 라차라카는 정권에 다시 복귀함.
1998년 : 새로운 헌법은 연방제를 도입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킴.
2000년 : 열대 폭풍과 홍수로 큰 피해가 발생.

   
3. 마다가스카르의 주요 정치적 인물들

.진-자퀴스 라베마난자라(Jean-Jackques Rabemandanjara ; 1913-)

마다가스카르의 정치가이며 시인. 라베마난자라는 프랑스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운동을 주장한 중요한 인물이다. Mouvement pour la Ranovation Malagache(MDRM)의 대의원으로서, 그는 프랑스에 의해 1947부터 1950년까지 투옥된 뒤 추방당하였고 그 뒤 극적으로 MDRM회원들이 조직되었고 반혁명운동에 가담한 약 80,000명의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 1960년부터, 그는 외교장관에 임명되어 치라나나 정부를 보조하였다.

 
.라마난초아(Gabriel Ramanantsoa ; 1906~1976)

마다가스카르의 장군이었던 그는 1972년에 치라나나가 폭동과 민중의 힘에 밀려났을 때 대통령이 되었다. 처음에는 부정부패에 관한 그의 행동이 인기가 있었지만 몇 번의 구테타 시도 후에 군정부에게 권력을 넘겨주었고 후에 라차라카가 권력을 승계하였다.

 
.라나발로나 1세(Ranavalona ∣; 1788~1861)

라나발로나는 그의 남편으로 첫 번째 통일된 마다가스카르의 왕이었던 라다마 1세가 죽은 후 1828년 말라가시 왕좌를 되찾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라다마의 근대유럽 정책을 파기하고 많은 교회들을 폐쇄하였다. 그녀가 죽은 뒤, 마다가스카르는 유럽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디디에르 라치라카(Didier Ratsiraka ; 1936~)

전의 해군 장교였던 라치라카는 1975년에 라마난초아의 몰락이후 마다가스카르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학생들과 중산계급으로부터 인기가 있었으며 농촌지방에서부터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는 1976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몇 개의 쿠데타를 진압하였다. 1993년 알버트 자피(Albert Zafy)가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대통령으로 있었다.

 
.필리베르트 치라나나(Philibert Tsiranana ; 1912~)

치라나나는 1959년에 초대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72년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했고, 그의 통치하에 폭동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그는 그의 지위 아래 가브리엘 라마난초아를 지명하였고 그는 사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