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침략과 저항사

남부로데지아에서의 반발

africa club 2001. 11. 21. 15:28
남부로데지아에서의 반발
     (i)로벵굴라(Lobengula)와 마타벨레(Matabele)족
    외세의 점령이전의 시기에 마타벨레국은 잠베지(Zambezi)강 이남의 주요아프리카 열강들중의 하나로서 존중되었고 남아프리카 식민정부가 마타벨레국에 대해 두드러진 경의로움을 갖고 대접했는데, 마타베랜드를 방문하는 백인 사냥꾼들과 상인들은 마타벨레왕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주권하에 복종해야만 된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1880년대까지 족장들이 유럽열강과 힘이나 위신에 있어서 똑같은 국가원수라는 정중한 가정하에 족장들과 교류함으로써 유럽열강들이 내정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것이 더 이상 여의치 않게 되었다.  유럽 열강들은 이제 비공식지배에서 공식적 지배로 이행하고 있었다.
    영국과 보어인들이 중부아프리카에 대한 가장 커다란 압력을 넣었는데 그러한 압력들은 다이아몬드와 금의 발견이 엄청난 자본주의적 발달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남아프리카경제의 연속선상이었다.  그러한 압력은 영국인과 보어인 사이의 적대관계에 의해 더욱 뚜렷해지게 되었다.  남아프리카의 영국인들은 중부아프리카가 광물도 풍부하고 양질의 목초지를 제공하고 보어인들의 허를 찌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중부아프리카로 밀고 들어갈것을 원했다.  은데벨레(Ndebele)족 사람들은 보어인과 영국인들의 압력의 핵심을 스스로 간파했다.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체제에서는 백인침략군과의 협력을 위한 강한 동기들이 존재했었다.  때때로 새로운 통치자는 외부의 적들로부터의 보호를 원했고 왕은 내부의 반대파들에 맞설 만한 지원을 원했으며 교역증대나 농업개발에 대한 예상들이 기꺼히 받아들여졌고 교육과 기술발전에 대한 기대는 강한 동기부여를 제공했다.  로벵굴라의 적수였던 레와니카(Lewanika)가 영국의 보호를 모색했던 바로체랜드(Barotseland)에서는 이러한 제요인들이 효력을 나타냈다.
    로벵굴라의 위치는 세가지 면에서 달랐다.  첫째, 은데벨레부족국가는 백인들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으나 은데벨레의 주변 아프리카 부족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는 강력했었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에 의한 보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내부의 적수들에 관해서는 로벵굴라가 1870년 그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제압할 수 있었고 그후에도 계속하여 최고의 수완으로 그의 왕국내에서의 투쟁의 정치를 처리해나갔다.  따라서 그는 내부의 적들에 맞서기위해서 백인들의 도움을 요청하길 원치 않았다.  그리고 세째로는 로벵굴라가 교역기회를 향상시키는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벵굴라와 은데벨레 부족민들은 외국인들과의 어떠한 형태의 협력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외국인들로 하여금 시도해 보려는 것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남아공화국의 보어인들은 역내에서의 패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 있어서 최초의 조처를 취했다.  크루거대통령(Kruger)을 대표하여 피터 그로블러(Pieter Grobler)는 1887년 7월 로벵굴라에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설득했다.  그 조약은 은데벨레부족과 남아공화국간의 원대한 불가침 조약이었다.  그러나 구두로 말해진것과 그 결과로서 문서화된 것 사이의 차이점이 불안하게도 컸다.  나중에 로벵굴라는 이 조약은 1852년 그의 부친이자 전임자인 음질리카지(Mzilikazi)와 보어인들 사이에 체결된 애매한 舊우호조약의 단순한 재판이라고 주장했다.
    1887년의 조약은 영국인들이 행동을 취하도록 움직여 놓았다.  만약 로벵굴라가 보어인들과 동맹을 맺을 경우 소문난 광물자원과 함께 북쪽으로 도로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영국인들은 로벵굴라가 영국인들의 사전승낙없이는 영토의 양도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로벵굴라의 보증을 신속히 확실하게 해야만 했다. 1887년 모파트(Moffat)조약에서 그러한 보증이 되었다.  이렇게하여 로벵굴라는 1887년 피터 그로블러와 맺은 그로블러조약을 부인하고 마타베랜드를 영국의 영향권내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로벵굴라는 주권을 내어놓지 않는다는 조항을 조약에 특별히 명문화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문서는 마타벨레랜드의 쟁탈전에 있어서 핵심적 사건인 논쟁의 여지가 많은 루드이권안(Rudd Concession)이 모파트조약 이후에 뒤따라 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