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침략과 저항사

독일통치와 반발 - 냠웨지(Nyamwezi)족 이시케(Isike)의 반발,1892-3

africa club 2001. 11. 21. 15:23
냠웨지(Nyamwezi)족 이시케(Isike)의 반발,1892-3
    타보라(Tabora)는 음완자(Mwanza), 우지지와 그 이상의 지역에 대한 주요 교역의 중심지로서 전략적 위치에 놓여있었다.  냠웨지족의 추장인 이시케는 그의 부족 영역을 통과하는 사람들로부터 '홍고(hongo:통행관세)'를 거두어 들였다.  1886년 기젝(Gieseck)이라는 독일상인이 거래하다가 사기를 쳤다는 죄로 냠웨지족 영토내에서 살해됐다.  이시케는 그의 재산을 압류했고 키팔라팔라(Kipalapala)에서 쫓아냈던 화이트파더스 선교사들에게 반항했다.  그 이후로 그의 유럽인들에 대한 증오감이 커졌다.
    얼마후 노련한 독일인 용병 에민 파샤(Emin Pasha)가 1,000명 이상의 군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타보라로 진입했다.  그는 타보라 아랍인들의 지원을 간청함으로써 이시케의 지위를 뿌리를 흔들어 놓으려고 시도했다.  1892년 이전보다도 더 거세어지는 독일의 음모들에 진저리가 난 이시케가 독일인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냠웨지부족 영토를 통하는 모든 대상로들을 폐쇄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대한 독일의 반응은 신속했다.  1893년 폰 프린스(Von Prince)중위가 이끄는 독일군이 공격하여 요새들을 파괴했다.  이시케는 저항했으나 패배했다.  포로신세가 될것을 기다리기보다는 그는 자살했다.

     (iv)야오(Yao)족 마쳄바(Machemba)의 저항,1890-9
    이 저항이 일어난 지역은 남부탄자니아 마콘데(Makonde)고원이었다. 마쳄바는 주택세 납부를 거부함으로써 독일인들에게 반항했고 일부의 독일 토벌대들을 쳐부수었다.  식민정부에 복종한다는 표시로써 해안지방으로 가라는 최후통첩을 받았을때, 마쳄바는 대담하게도 비스만에게 다음과 같이 답신했다.:
    '본인은 그대의 언질을 들었소만 본인이 그대에게 복종해야만 될 이유를 알수가 없소이다.  본인은 먼저 죽는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바요... 본인은 이곳 내땅의 술탄이요. 당신 역시 당신땅의 술탄이요.  본인은 그대에게 가지 않겠소만 그대가 족할만큼 강하시다면 와서 날 데려가시오.'
이 서신을 받고 독일인들은 그에 대한 토벌군을 파병했다. 토벌대는 1899년 그의 요새를 점령했고, 그의 추종자들을 투옥했으며, 마쳄바 자신은 모잠비크로 탈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