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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바트만(Sarah Bartmann) -호텐토트의 비너스

africa club 2012. 7. 17. 21:56

 

 

사라 바트만(Sarah Bartmann) -호텐토트의 비너스

 

 

 

거의 이백여년 동안 싸르끼 바르트만(Saartjie Baartmann)으로 불려 온 사라 바트만(Sarah Bartmann)은 1789년 지금의 이스턴 케이프에 위치한 감투스 계곡(Gamtoos Valley)의 코이(Khoi)족 여성이다. 그녀는 나중에 케이프로 이주를 하게 되고 이 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전형적인 '호텐토트(Hottentot)'족의 외모를 이용해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부를 벌게 해주겠다며 설득하는 외국 선박의 의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1810년 21살의 나이로 사라 바트만은 잉글랜드로 떠나는 배에 오르게 된다. 그녀는 잉글랜드에서 '호텐토트족의 비너스(Hottentot Venus)'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며 전시회와 쇼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이 곳에서 그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일으키는 하나의 '인간 변종'으로 여겨졌다. 커다란 엉덩이와 과학자들 사이에서 '호텐토트의 앞치마', 또는 '수치심을 가리는 커튼' 등으로 불리 울 정도로 축 늘어진 가슴 등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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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나 쇼가 없을 때조차도 그녀는 우리 안에서 난폭한 짐승처럼 행동하는 모습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관람되었다. 런던 시내인 피카디리(Piccadilly)에서 열린 한 전시회 기간 동안 아프리카 학회(African Institution)의 노예 폐지론자들은 그녀의 자유를 요구하는 기사를 신문에 실었다. 이 결과로 그녀의 행위와 더불어 이러한 전시의 기획담당자 역시 정식으로 조사가 이뤄졌고, 대질 심문과 함께 그녀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국으로 옮겨졌는지 여부와 강제적으로 전시행위가 이뤄졌는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아프리카를 떠났고 지금이 이전의 생활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 사라 바트만이 지적했듯이 그녀는 자신을 이용한 쇼의 수익금 중 절반을 받았고 이로써 그녀는 자신의 하인 두 명도 고용하게 된다. 그녀가 난폭한 짐승과 같은 역할을 매번 맡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그것 역시 그녀가 행했던 쇼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1815년에 프랑스의 기업인은 그녀를 파리로 데려간다. 그 곳에서 그녀는 진실로 행복하다는 그녀 자신의 확언에도 불구하고 알코올 중독과 매춘의 희생양으로서 전락한다. 그녀는 이 곳에서 쇼가 없을 때 의사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실험대상으로 너무나 많은 이용을 당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선도적인 상당수의 전문가들에 의해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시킨다는 명목으로 그 해 3월 실험대에 서게 되었으며, 그녀의 누드 초상도 그려졌다. 1815년 12월 29일, 그녀는 염증과 발진을 동반한 질병으로 인해 26살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코이족의 기원에 대해 병적인 호기심을 드러내었던 '유식한' 유럽인들에게는 '과학적 호기심의 충족을 위해' 그녀의 시신을 해부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이 작업은 당대 프랑스 최고의 해부학자이자 파리 대학의 총장이었던 바론 조지 커비어(Baron Georges Cuvier : 1769~1832)에게 맡겨졌다. 일반적으로 화석학과 비교 해부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커비어는 먼저 그녀의 몸을 밀랍에다 집어 넣어둔 다음 절개하였다. 먼저 뇌를 투명한 병에 옮겨 보관한 다음, 그녀의 생식기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의 연구가 완성된 후 바트만의 뼈대는 다시 짜 맞추어 졌다.

 

1824년 커비어는 유형별 삽화인 컬러 사진이 포함된 그의 연구 성과들을 실은 과학 저서를 출판했다. 이로 인해 그녀의 생식기와 뇌는 파리의 ‘인류 박물관’(Musée d'Orsay)로 옮겨져 전시된다.

 

 

1995년 12월 14일 쎄실 리 플레워(Cecil le Fleur)는 그리쿠아(Griqua)인을 대신하여 프랑스 정부로부터 사라 바트만의 박제 모형과 뼈대, 그 외의 유물들을 되돌려 달라고 주장할 것을 남아공 의회에 요구했다. 공식적인 반환식은 2002년 4월 29일 파리의 남아공 대사관에서 열렸다. 프랑스 학술 연구 원장인 로저-제라드 슈와트젠버그(Roger-Gérard Schwartzenberg)는 말했다. "프랑스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 굴욕을 당하고 또, 아프리카 인으로서 부당하게 착취당한 싸르끼 바르트만의 존엄성이 복원되길 바랍니다."

 

또한 프랑스 주재 남아공 대사인 투트킬레 스카웨이야(Thuthukile Skweyiya)는 말했다. "싸르끼 바르트만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품에 안고서, 인종차별이 없는 그녀의 고향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행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트만의 유물들은 화려한 팡파르와 함께 2002년 5월 3일, 금요일 아침 남아공의 수도 케이프 타운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예술과 문화부 차관인 브리지트 마반들라(Bridgitte Mabandla)와 이 당시 웨스턴 케이프의 수상인 피터 마라이스(Peter Marais)를 포함한 사람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떠난 지 거의 2 세기만에 돌아온 사라 바트만을 환영하는 의식을 열었다.

 

‘사르끼 바르트만의 귀국은 코이산(Khosan)족 사람들의 자존심을 크게 회복시킬 것이다.' 마라이스(Marais)가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아프리카 국기로 꾸며지고 측면에 여섯 명의 코이산족 아이들로 둘러싸여서 바트만을 담고 있는 관이 공항으로 들어갔고, 이후 그녀가 매장될 베인베르그(Wynberg)에 있는 2 군인 병원(2 Military Hospital)의 영안실에 안치되었다.

 

사라 바트만의 유골은 마침에 2002년 8월 9일 금요일 여성의 날(Women's Day)에 이스턴 케이프 근처의 한케이(Hankey)의 감투스 강(Gamtoos River)의 언덕에 매장되었다. 사라 바트만의 이야기는 작가 게일 스미스(Gail smith)가 쓴 스타(Star)지의 기사인 ‘왜 우리는 싸르끼의 일에 그토록 흥분하는가?’ 의해 널리 알려졌다.

 

‘바트만의 이야기는 남아공역사의 숨겨진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프랑스 역사상 첫 번째로 그녀의 역사적인 송환은 남아공의 많은 유색인종 여성과 몇 년 동안의 조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과 바트만의 유산의 명예에 관해 시를 쓰고 연극을 한 분 과 민족적 우월감의 회복으로부터의 개간에 경의를 표한다.’

 

 

 


과학의 관심 안에서..

 

18세기와 19세기동안, 유전학, 생화학과 생리학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었고, 해부학이 인류학자들이 지식의 발전에 ‘목적에 도달하게 하는’ 가장 주된 방법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이 실험은 백인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고, 이 ‘도달’은 ‘순수한’ 종류의 예를 찾는 것이 효력이 있었다. 바트만이 이러한 맥락에서 믿어졌으므로 유럽과학자들에게 그녀에 관해 연구하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만 바트만에 관한 실험은 당시에 팽배하던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인의 성은 괴이하다’는 관념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라 바트만 만이 흑인 중 과학적 호기심에서 기인한 이 말도 안 되는 희생양이 된 것은 아니었다.

 

1860년 두 명의 어린 산(San)족 아이들- 남자아이 한 명과 여자아이 한 명-이 영국에서 그들의 고향인 오렌지강(Orange River)의 근처로 돌아왔다. 모리스(Alan G Morris)가 쓴 박물관과 산 족의 트로피 스쿨(Trophy Skull)에 의하면 ‘그 아이는 영국에 도착한지 몇 년이 안 되어 죽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1864년 6월에 22살이 될 때까지 살아있었다. 그녀의 몸은 외과 왕립대학(Royal College of Surgeon)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영국의 비교 해부학자인 플라워(W.H. Flower)와 머리(J. Murie)에 의해 해부되었다. 세계 2차 대전 중 대학이 폭파되었을 때 많은 뼈들이 유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뼈는 영국 자연사 박물관(British Museum of Natural History)에 보관되어 있다.

 

모리스는 또한 그 책에서 비슷한 운명의 세 번째 케리 케리(Keri Keri)로 알려진 부시우먼(bushwoman)이 얼마나 우롱당했는지 케이프 프라빈스의 오웃슈런(Outshoorn)에서 패혈성 급성폐렴에 걸려서 죽은 후 1939년 비트바터르스란트의 해부학부로 이송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소위 호텐토트라고 불리는 종족은 유럽의 과학자들에게 오랫동안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코이코이(Khoikhoi) 남자들은 고환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monorchids)이며 여자들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화신(tablier)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유럽의 과학자들은 바트만의 생식기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는데 호텐토트 여성은 정상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모양과 크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텐토트족들은 동물보다 조금 나은 사람들로 인식되었는데 스웨덴의 한 학자는 호텐토트족을 Homo Monstrosus Monorchides라는 학명을 따로 붙여 인류의 진화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하나의 인종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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