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소말리아 내전과 알샤바브

Mansa Musa 2020. 5. 15. 15:27

소말리아는 씨족 전통이 강하며 식민지배로 분열됨

케냐는 지역 패권을 위해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조직 알샤바브는 동아프리카의 안전을 위협

 

아프리카의 뿔지역인 소말리아는 강력한 씨족 중심의 사회구조와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분열되었으며 중앙정부가 효과적으로 전 국토를 통치 하지 못하는 실패국가.

소말리아는 이슬람을 믿고 있는 소말리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단일 민족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요 종족은 하위야(Hawiya, 25%), 이샥(Ishaak, 22%) 다로드(Darod, 20%), 그리고 라한웨인(Rahanwein, 17%) 등으로 압도적인 다수 종족이 없는 상황이며 무엇보다도 강력한 씨족 중심 사회여서 소말리아의 국가통합과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

또한 소말리아는 하나의 국가지만 통치권이 완전하게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있다. 아덴만에 위치한 소말리랜드(Somaliland)1991년 독재자인 바레(Mohammed Said Barre)에 맞서 독립을 선언하고 자치를 이어가고 있다. 북동부의 푼트랜드(Puntland)1998년 자치를 선언했으나 2012년 연방정부에 소속되어 행정구역으로 재편되었다.

소말리아는 고대부터 무역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집트의 하셉수트 신전에 소말리아 푼트랜드(Puntland)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부조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의 무역이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졌는지 짐작하게 한다. 이븐 바투타는 1331년 모가디슈를 방문하여 아주 큰 도시로 역동적인 도시라고 설명하였다. 씨족이 중심이 되어 지역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소말리아는 19세기에 들어와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의 침략으로 분할되었다. 1960년 영국령 소말리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리아가 합쳐져 소말리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고 프랑스령 소말리아는 1977년 지부티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소말리아는 독립 당시 식민지배 유산과 씨족 전통으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하나의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했다.

1969년 샤르마르케(Abdirashid Ali Shermarke) 대통령이 경호원의 암살로 사망하자 바레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1991년까지 22년간 소말리아를 통치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종족을 우대하였고 이에 대해 다른 종족들이 반발하여 통일소말리아회의(Union of Somali Congress : USC)를 결성하여 바레 장군을 권좌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USC는 종족간 반목과 질시로 통합되지 못했고 1991년 모하메드(Ali Mahdi Mohammed)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를 구성했으나 인정하지 않아 1993년까지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다.

2004년 케냐 정부의 지원으로 아흐메드(Abdullahi Yusuf Ahmed)를 대통령으로 하는 연방과도정부(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 : TFG)가 나이로비에서 수립되었다. 아흐메드 정부는 국제 사회의 승인을 받은 유일한 정부였으나 본토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를 하지 못하는 망명정부였다. 2005년 과도정부가 귀국했으나 2006년에 이슬람 무장세력인 이슬람법정연맹(Islamic Courts Union : ICU)이 소말리아 남부 지역과 모가디슈를 장악하여 TFG는 정부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알샤바브는 2011년까지 소말리아 중남부 지역의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었던 알 이슬라미(Al-ltihaad al-Islamiya : AIAI)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알 이슬라미는 시아드 바레의 독재정권을 타파하고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는 목적을 가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지하드 조직이었다. 2000AIAI 세력 중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급진적인 무장세력인 알샤바브가 결성되었고 곧바로 ICU에 합류했다. 소말리아는 1977년 소말리아는 에티오피아 오가덴(Ogaden) 지역을 침략하였고 이후 바레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저항을 했던 소말리국민운동(Somali National Movement : SNM)을 지원하였다. ICU가 소말리아에 대한 공격 및 반에티오피아 투쟁을 선언하자 200612월 에티오피아는 소말리아를 침공했다. 에티오피아는 2009년 소말리아에서 철수 했으나 2001년 평화유지군으로 다시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하였다. 알샤바브는 에티오피아의 침략에 맞서 소말리아인들의 민족주의 정서를 이용해 소말리아의 수호자로 자처하며 주요 세력으로 등장했다.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알샤바브는 에티오피아의 침략으로 소말리아에서 가장 강력하고 급진적인 무장 세력이 되었으며 이슬람 국가건설을 목표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1년 이후 소말리아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케냐군이 주축이 된 AU 주도의 평화유지군이 알샤바브의 거점을 공격하면서 그 세력이 급속하게 와해되었다. 20118월 약 22000명의 아프리카연합평화유지군(African Union Mission in Somalia : AMISOM)이 알샤바브가 장악한 모가디슈를 공격하여 장악하였고 20129월에는 소말리아의 남부에 있는 제2도시인 키스마요(Kismayo) 항을 공격하여 알샤바브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알샤바브는 키스마요를 잃어버리면서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었고 주요 활동지역을 국경지역이나 난민캠프로 옮겼다.

인접국가에 대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군사개입은 특히 탈냉전시대에 눈에 띄게 증가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역문제에 개입하고 있다. 냉전시대에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쟁터가 되었던 아프리카가, 이제는 떠오르는 아프리카 강대국들이 지역의 패권을 잡기 위해 전쟁에 개입하고 있다. 소말리아의 알샤바브를 퇴치하기 위해 케냐와 에티오피아의 군사개입은 대표적인 아프리카 국가의 군사개입으로 볼 수 있다.

케냐는 동아프리카의 강대국으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소말리아의 국가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케냐는 소말리아의 내전과 자국에서의 테러발생이 향후 케냐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 상황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안정을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긴급한 현안에 직면하고 있다.

케냐는 201110월 소말리아의 알샤바브와 전쟁을 선포하고 린다 니치(Linda Nichi) 작전을 전개하여 남부 소말리아를 침략했다. 당시 케냐 정부는 북쪽 국경을 따라 증가하는 난민 위기와 지역의 불안정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케냐는 과거 소말리아 사태해결에 비교적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1992년 이후 주도적으로 개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19943월 나이로비에서 소말리아 파벌간 평화선언합의, 200210월 엘도렛(Eldoret)에서 소말리아 평화회담 개최, 200410월 나이로비에서 소말리아 과도 의회 및 연방정부 출범, 2005년 소말리아 과도 의회 및 연방정부 이전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알샤바브는 케냐의 개입을 소말리아에 대한 침략행위로 규정하여 소프트 타겟(soft target)을 대상으로 케냐에 대한 보복성 테러를 감행하고 있다. 알샤바브의 세이크 알리(Sheikh Ali)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케냐에서 성전을 감행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으며 2013년 웨스트게이트 쇼핑몰(Westgate Mall) 테러(한국인 1명 포함 67명 사망), 20146월 라무 카운티 해안의 음페케토니(Mpeketoni)(60명 이상 사망) 및 마젬베니(Majembeni)(15명 이상 사망) 테러, 201412월 소말리아 인근 만데라(Mandera) 지역에서 버스 테러(28명 사망), 20154월 모이 대학교 가리사 대학(Garissa University College) 테러(148명 사망), 20157월 만데라 채석장 폭탄테러(14명 사망) 등을 일으켰다.

알샤바브의 테러에 대한 케냐 정부의 대책은 어떤 면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는 측면도 있다. 특히 케냐 정부는 웨스트 게이트 습격 사건 이후 알샤바브와 테러분자의 침투를 저지한다는 이유로 소말리아 난민과 주로 동부 해안 지역에 거주하는 이슬람교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있다. 케냐타 대통령은 20146월 음페케토니와 마젬베니에서 발생한 테러가 루오족이 키쿠유 족을 공격한 것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는 2007년 선거 이후 잠잠해지고 있는 키쿠유족과 루오족의 대립을 격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케냐 정부가 알샤바브가 벌이고 있는 테러를 국내정치에 이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알샤바브에 대한 적극적인 퇴치보다는 정권에 반대하는 이슬람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을 받고 있다.

20171015일 소말리아 수도인 모가디슈의 가장 번화가에서 사상 최악의 폭탄테러가 발생해 300명이 사망하고 276명이 부상했다. 이번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밝히지 않았지만 소말리아 정부는 알샤바브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이 테러는 소말리아 최악의 폭탄 테러이며 동시에 사하라이남 지역에서 가장 큰 테러공격으로 남게 되었으며 알샤바브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번 갖게 만들었다.

소말리아에서 밀려난 알샤바브는 케냐를 비롯하여 우간다 등 인접국에 대한 보복성 테러를 감행하고 있어 동아프리카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20107월 스페인과 네덜란드 월드컵 결승전을 시청하고 있던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 나이트클럽에서 3번의 폭탄테러를 가해 74명이 사망한 바 있다. 이 공격은 AIMSOM에 평화유지군을 파병한 우간다에 대한 보복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알샤바브가 다시 강력한 테러조직으로 재건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2009년 이후 알샤바브는 예멘에 거점을 둔 아라비아 반도의 알카에다(Al-Qaeda in the Arabian Peninsula : AQAP)와 연계와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알샤바브의 테러 공격과 적극적인 언론 보도는 소말리아 인들 사이에서 이 조직이 유명해지도록 만들었고 추종자들의 수를 늘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케냐의 난민수용소에 대한 탄압과 강제송환, 소말리아 정부의 통치 체제 문제, 케냐 주도의 평화유지군의 탈선행동은 알샤바브에 대한 지지와 함께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다. 만약 알샤바브가 알카에다 동아프리카 지부로 발전할 경우 이들의 활동은 아프리카 뿔 지역뿐만 아니라 동아프리카 전역에 세력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현재 AU 주도의 평화유지군의 활동으로 알샤바브의 활동은 줄어들고 있으나 케냐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테러공격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막느냐가 큰 관건이 되고 있다. 물론 소말리아 정부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통치력을 확보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알샤바브를 없애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문제가 상존하고 있으며 악화되지 않도록 동아프리카 국가들의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소말리아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케냐가 소말리아인을 대상으로 가혹한 군사작전을 펼치거나 비인도적인 난민정책으로 대응할 경우, 알샤바브에 대한 지지로 이어질 수 있다. 케냐는 2015년 현재 50만 명에 이르는 소말리아 난민을 수용하고 있다. 이들은 규모도 크며 결속력이 강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이 뚜렷하다. 케냐 정부는 알샤바브에 대한 군사적 대응과 함께 2013년에 체결된 소말리아 난민 본국 송환협정을 통해 난민촌을 폐쇄하고 난민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정책을 취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현재 소말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AU 주도의 평화유지군은 EU의 재정삭감과 부정부패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알샤바브가 주로 케냐에서 납치한 여성들을 성노예로 이용하고 있는 문제 역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알샤바브의 입지가 약화되고 있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잘못된 대처는 알샤바브가 동아프리카의 중요한 무장테러조직으로 살아 남아 지역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소말리아는 아직 체계적인 자원 탐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로 마지막 자원의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석유를 비롯한 소말리아의 자원개발은 향후 소말리아의 국가 재건과 국제사회의 지원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필자는 미군이 아프리카 국가 중 소말리아에 적극적으로 파병한 이유가 소말리아에 있는 석유자원 때문이었다고 전해들은 바 있다. 우리나라는 국민의 보호뿐만 아니라 내전종식 이후 평화유지활동을 통한 국제사회의 기여와 자원 확보라는 측면에서 소말리아에 대한 면밀한 진출 전략을 수립하여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