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카빌라와 제2차 콩고민주공화국 내전
[세계의 분쟁지역]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은 아프리카 지역분쟁이며 자원이 있는 한 계속될 수 있다.
롤랑 카빌라는 모부투와 내전을 치르는 와중에 후투족 난민들을 대량학살 하였다는 의혹을 받게 되었다. 또한 롤랑 카빌라는 모부투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르완다의 투치족 출신인 카바리(James Kabari)를 국방장관에 임명하여 르완다 투치족 군인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갔다. 이에 따라 롤랑 카빌라 정권이 르완다 투치족의 괴뢰정권이라는 비난도 받게 되었다.
롤랑 카빌라는 모부투 정권을 무너뜨린 후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고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 투치족 세력을 제거하면서, 우간다, 르완다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였다. 롤랑 카빌라는 투치족의 정당 활동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으며 1998년 7월 국방장관을 교체하고, 투치계 군사고문들을 추방하는 등 투치족의 전면 철수를 요구하였다. 자신의 집권을 도운 투치계 바냐물렝게족의 국외 추방을 선언하자, 결국 바냐물렝게족과 르완다 투치계 군인들이 무장 봉기를 시작하여 제2차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이 시작되었다.
롤랑 카빌라 정권의 느린 민주화 이행과 내전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우간다와 르완다의 지원으로 반군이 수도에 접근하게 되자 이웃하고 있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에 개입하게 되었다. 롤랑 카빌라는 짐바브웨, 앙골라로부터 병력을, 나미비아, 차드, 잠비아, 수단으로부터 병참 지원을 받으며 반군 진압에 나섰고, 반군은 콩고민주연합(Rally for Congolese Democracy : RCD)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반군은 우간다의 지원을 받는 콩고해방운동(Movement for the Liberation of Congo : MLC)으로 다시 분열되어 내전의 양상은 더욱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반군을 지원했던 우간다는 국경과 연결된 오리엔탈 주(Orientale Province)의 이투리(Ituri) 지역을 점령하고 이 지역의 금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 지역의 토착민인 농경민인 헤마(Hema)족과 목축민인 렌두(Lendu)족의 갈등을 이용하였고 결국 1999-2007년 사이에 또 다른 내전이 발생해 약 5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우간다가 헤마족을 우대하는 경향을 보이자, 헤마족은 스스로를 투치계, 렌두족은 후투계라고 주장하여 르완다 내전과 연결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로써 콩고민주공화국은 정부군과 정부군을 지원하는 연합군, 친카빌라 경향을 띠는 후투족 민병대인 마이마이(Mai-Mai) 1, 인터함웨와 RCD, MLC가 대립하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콩고민주공화국 내전 사태를 우려한 주변국들이 중재에 나서, 1999년 5월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르완다 간에 정전협정이 체결되기는 하였으나, 반군들이 정전협정에 동의하지 않아 난항을 거듭하였다. 특히 콩고민주공화국 남부의 카탕카 지역은 다이아몬드 광산지역으로 이 지역을 둘러싼 격전이 계속 되어, 다이아몬드 전쟁으로 불렸다.
2000년 2월 유엔안보리가 콩고에 평화유지군 파병을 결정함으로써 평화의 실마리가 잡히는 듯하였으나, 교전 당사자들이 정전에 동의하지 않아 평화유지군의 파병이 연기되었다. 특히 카빌라는 2000년 8월 루사카 평화협정에 참여하는 것을 유보하겠다고 발표하고, 반군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함으로써 평화정착의 희망은 사라져 버리는 듯 하였다.
그러나 2001년 1월 카빌라가 암살되고, 그의 아들 조셉 카빌라가 집권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그는 1월31일 유엔 평화유지군의 파병을 요청하는 등 평화협상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다. 이어 2월에는 잠비아에서, 콩고내전 관련 6개국(짐바브웨, 앙골라, 나미비아, 우간다, 르완다) 회담이 개최되어, 관련국의 군대 철수 및 유엔 군사감시단의 전개에 동의하였다. 이로써 유엔은 교전당사자들이 현재의 전선에서 9마일을 후퇴하면, 이 지역에 유엔 군사감시단을 파견하기로 약속하였다.
-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지역 반군단체는 스와힐리어로 ‘물’을 뜻하는 마이(mai)라는 단어를 반군 단체 이름에 사용한다.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이투리(Ituri) 지역의 맘바사(Mambassa)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마이마이 심바(mai mai simba)”라는 반군 단체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 조직의 단원을 “마이마이”라고 부르는데 반군들은 신비한 물을 마셨기 때문에 ‘무적’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투리 사람들은 ‘마이마이’라고 외치면 이들의 몸이 물로 변해 총알이 몸을 통과하여 지나간다거나 돌에 주문을 외우면 폭탄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마이’라는 단어는 사실 탄자니아의 마지마지(Maji Maji) 반란에서 비롯되었다. 스와힐리어(Kiswahili)로 ‘마지(maji)'는 ’물’을 뜻한다. 이 반란은 1905-1907년까지 탕가니카(Tanganyika, 현재의 탄자니아)인이 독일 식민정책에 저항하여 일으킨 반란이었다. 독일은 베를린회의(Berlin Conference, 1884-1885) 이후 탕가니카를 식민지배 하였는데 1890년대 중반부터 가혹한 직접통치하는 과정에서 고유의 전통과 관습을 무시하여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