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목수로서 집 짓는 일을 배워서 내 직업에 따라 오랫동안 일을 해왔다. 지금도 가끔 집 짓는 일을 한다.

우리집은 시멘트 블록집에 양철 지붕이다. 전기도 들어온다. 의자도 있고 라디오, 재봉틀, 자전거, 찬장, 석유곤로가 있다.  
또 소가 세 마리있다. 나는 이런 것들을 다 살 수 있었다. 아버지가 별 볼일 없이 살던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안히 살고 있다. 내 인생이 아버지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산 것보다 더 못살고 있는데 그 애들은 나처럼 돈벌이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들 집은 흙집에 양철지붕인데 전기는 없다. 자전거는 있다. 다른 아들은 벽돌집이지만 역시 전기가 없다. 그래도 큰애보다는 낫다.

나의 현재 수입원은 커피나 바나나같은 농작물을 팔아서 얻는 수입과 내가 목수 일을 해서 번 수입 이 두가지이다. 바나나 판 돈이 한달에 2만 쉴링 커피 판 돈이 3만 쉴링 이다. 그러나 농작물 수익은 해마다 다르다. 목수 일에서 번 돈이 월평균 5만 - 9만 쉴링이다. 년간 우리의 지출은 이십만 쉴링이다.

어렸을 때 특히 초등학교 다닐 때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때는 선생님이 굉장히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학비를 댈 수가 없어서 나의 꿈을 이룰 수는 없었다.  

교사는 되지 못했지만 대신 나는 다른 직업을 찾았다. 그래서 목수 일을 열심히 했다. 목수도 존경받는 직업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보수가 그리 많지 않은 점이다.

1953년 시작할때는 월급이 한달에 150 쉴링정도 되었다. 보수가 약간 나아진 것은 1970년쯤이다. 그때는 한달에 600 쉴링으로 올랐다..

한달에 900 쉴링 받게 되었을 때 나는 정규 고용직에서 은퇴를 했다. 그때가 1975년이다. 정부기관이나 개인 회사에서 더 이상 일할 수가 없었다. 수입이 더 좋았다면 나는 읍내에 집을 짓고 오토바이도 샀을 것이다. 그랬으면 일 하러다니기도 쉽고 카라궤에 사는 부모님을 뵈러 가기도 쉬웠을 텐데 그러지는 못했다.  

나는 우리 전통적인 족장제도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나에게는 그리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에 비하면 차라리 식민지 시대가 더 살기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월급은 150쉴링 정도로 적었지만 돈이 가치가 있었다. 그 월급으로 살수 있었고 다른 것까지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돈 가치는 없어지고 생필품 값은 올라간 한편 커피같은 농작물 값은 매우 낮다. 내가 정부와 회사에서 일하다가 퇴직하던  1975년 월급이 900 쉴링이었는데 그 월급으로는 살 도리가 없었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저 참고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애들이 앞으로 더 잘 살아질 것 같지 않다. 생활비가 너무나 많이 들기 때문이다. 교육비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그애들이 버는 돈을 생각하면 불쌍해진다. 기적이라도 일어나면 그애들의 앞날이 밝아질까. 그들은 아직 젊고 건강하니 무슨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적이 없는 한 그애들은 내가 살아온 것보다 더 못하게 살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전통 신앙을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현대적인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어머니가 세례 받는 것은 허락했다. 그후 역시 우리들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그 다음 몹시 노력을 한 끝에 그마저 영세를 받게 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전통신앙에서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고 설득해서 우리가 이제 기독교인이니 그도 우리에게 합세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가 동의를 하여 돌아갈 때는 기독교인으로 돌아갔다.  

기독교는 우리 사회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갈등, 미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미신에서 을 믿지 않게 해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서로 친근하고 평화스럽게 산다.

나의 행복의 근원은 아이들이다. 그애들이 내가 바라는 대로 성공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서로 이야기하고 의논한다. 그들이 마약같은 나쁜 습관에 물들지 않았다. 아내는 우리가 얻은 것을 무엇이든 서로 나누는 것에 행복해한다. 그래서 내 가족들과 함께 서로 돕고 이해하고 사는 것이 나에게는 행복한 일이다.  

내가 유일하게 화를 내는 것은 나의 가족들이 나에게 순종을 안할 때이다. 그런 것은 가장으로서 당연히 참을 수 없다. 다행히 그런일은 아주 드물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래도 내 인생이 대부분의 이웃들보다는 나은 것 같다. 몇은  교육을 많이 받아서 나보다 더 잘 사는 이도 있다. 그들은 차도 있고 밭도 더 늘리고 더 좋은 집을 짓고 산다. 그러나 이 지역에 사는 대부분 사람들 중에서는 내가 더 잘사는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이 지역 행정기구의 장으로 뽑은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소득 활동을 해서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일 때문에 다른 고장에 가보았다. 무소마 무완자 키고마 등지를 갔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산 것은 그런 여행을 할 때였다. 알다시피 누가 다른 먼 고장에 일을 하러가면 집에 올때는 무언가를 사오기를 기대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가구니 옷 같은 것을 그 때 샀었다.

우리 말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전통 관습도 지금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형편이다. 하야 말은 지금 없어져 버리느냐 아니냐의 위험에 처해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여행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때 우리 말만으로는 소용이 없기 때문에  스와힐리어로 말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기숙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집에 돌아올 때는 하야 말을 많이 잊어버리고 만다. 또 다른 고장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아예 하나도 모르기 일쑤이다.

두 번째, 종족간의 혼인이 우리 문화가 사라지는 것에 한 몫을 하고 있다. 하야족이 이제는 다른 종족 사람과 결혼을 많이 한다. 이런 섞인 결혼은 우리 전통 문화를 유지 보존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또 하야 사람들끼리 결혼한다 하더라도 전통 금기나 관습이 사라질 수가 있다. 즉 하야 남자는 같은 집안이나 특히 어머니 집안의 여자와는 결혼을 못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큰 도시에서 만나면 그들은 서로의 집안을 물어보지 않고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 (전통적으로 같은 집안의 사람들은 형제로 간주하고 어머니 집안 여자는 어머니로 간주된다. 그래서 이들간의 결혼은 금지 되어있는 것이다. )

셋째, 우리 전통 문화는 바나나 재배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는데 요새는 우리 지역의 밖에 사는 젊은이들은 바나나 재배 기술을 모르기 일쑤이다. 내가 이 바나나 문화라고 부르는 것, 혹은 우리 문화의 기둥이 되는 바나나의 가치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 전통 가치나 관습도 사라질 것이다.  

이 모든 요인들이 점차 하야 사회와 그 풍부한 문화를 사라지게 하고 있다. 참 안된 일이다.

(2000년 12월 28일 부코바 자택)
Posted by 올아프리카 africa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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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llafrica 2003.12.22 08:0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일종의 가족사 또는 개인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왠지 오늘은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더 여려지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깊이있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아버지', '가장'이라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