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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하울리 (남, 73세)
                    
"지금 사람들은 옛날같지가 않다. 아주 몇 명만이 괜찮고 대부분 다 변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도시 뿐만 아니라 시골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차라리 도시에 이대로 있는 것이 낫다. 시골 사람들이 다 변해버려서. 왜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이름은 죠셉 힐라리 키하울리다. 나는 1926년 송게아의 키보세라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탄자니아의 남쪽인데 높은 산이 많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들로 한번도 어디 일자리에 채용되어본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농사를 지었고 아버지는 가축을 돌보았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네 살이 되기 전에 돌아갔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반면 나의 어머니가 우리 형제를 돌보고 키웠다. 우리를 도와 줄 다른 사람이 없었는데 다행히 어머니가 밭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서 농사를 지어서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형제는 3형제 2자매이다. 나는 그 중 3번째이다. 첫째가 누님(여자) 둘째 역시 누님(여자) 그리고 내가 세 번째이고 내 아래로 두 남동생이 있다. 그래서 모두 남자 셋에 여자 둘의 형제이다.

우리는 시골마을에 살았는데 바로 근처에 카톨릭 선교회가 있었다. 반면 농사짓는 밭은 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는 일곱 살에 처음으로 학교를 갔다. 가까이 있는 선교회에서 하는 학교였는데 학비는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많이 갔는데 나의 두 누님도 갔다. 그러나 누님들은 결혼을 아주 일찍 했기 때문에 학교를 얼마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남자아이여서 나는 학교도 다니고 가축도 돌보고 했다.

학교는 아침 일찍 가서 열시에 쉬는 시간이 되는데 이때 바나나 두 개씩을 공짜로 나누어주었다. 그 다음 열두시까지 공부를 하고는 집에 가서 가축을 돌보았다. 기숙학교 아이들만 오후에 공부를 더 했다.  

학교가 끝나서 집에 오면 어머니는 늘 밭에가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집에는 먹을 것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가축을 몰고 숲이나 들로 가서 풀을 뜯게 하고는 밭에서 카사바를 캐서 불을 지펴서 구워먹곤 했다. 바나나를 따 먹기도 했다. 점심이라는게 따로 없었다. 또 숲에는 계절에 따라 다른 열매들이 열려서 따먹었다.  

저녁이 되면 가축을 몰고 도로 집으로 갔다. 어머니가 먼저 밭에서 돌아와 있을 때는 저녁을 해놓아 다같이 먹었다. 주로 우갈리와 콩삶은 것, 야채였다. 우리의 주식은 옥수수, 밀, 콩 등이었다. 콩은 종류가 아주 여러 가지 있다. 그리고 금방 밭에서 뜯어온 채소와 카사바 잎 등도 먹었다. 그밖에 감자, 고구마 등이 있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교회를 갔는데 열 한살 열 두살 때 선교회에 3개월 머물면서 교리 공부를 하였다. 그 다음 영세를 받고 완전한 신자가 되었다.

열세살이 되면 선교회 학교를 마치게 되어 돈이 있으면 더 상급학교로 가서 공부를 할 수 있고 아니면 밭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돌볼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는 선교회에서 장학금을 대주어 교사양성과정을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18살이 되자 나는 선교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학교에서는 교리와 함께 산수라든가 스와힐리같은 일반적인 과목을 가르쳤다. 당시에는 초등학교에서는 영어를 안 가르쳤다. 영어는 중등과정부터였다.

20세가 되었을 때 나는 결혼을 하기로 했다. 성장을 한 후 부모한테 먼저 결혼을 할 수 있는가 물어봐야 하는데 내가 우리 어머니한테 물어봤더니 ‘네가 준비가 되었으면 결혼 하렴’ 했다.

우리 마을에서는 내키는 대로 아무 처녀한테나 청혼을 할 수 없었다. 일단 어떤 처녀가 마음에 들어서 이야기가 되었으면 어머니한테 물어봐야한다.
‘어느 어느 처녀가 나에게 맞겠어요?’ 하면 어머니가 ‘내가 그 처녀의 집, 처녀의 부모를 아는데 너 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결혼을 하면 좋지 않겠다. 다른 처녀를 물색해봐라’ 하는 식이다. 처녀를 고르는 것은 총각에게 달려있지만 결혼은 부모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대개 세 번째나 네 번째 처녀를 고른 끝에야 성공한다.

나의 경우는 세 번이나 처녀를 골라야 했다. 먼저 둘은 우리어머니가 반대했다. 다행이었다. 우리어머니는 내가 만일 그 처녀들과 결혼하면 틀림없이 문제가 생길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의 예측은 사실로 나타났는데 첫 번째 골랐던 처녀는 나중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자마자 죽었다. 두 번째 처녀는 역시 다른 사람과 결혼한 후 제멋대로 행동해서 속을 썩였다. 그러니 나의 어머니가 맞은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이러이러한 처녀와는 결혼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마을에서 또 다른 처녀를 구해서 어머니에게 선보였더니 어머니가 ‘응 됐다. 그 집안을 나도 아는데 좋은 사람들이다. 이 처녀와는 오래도록 잘 살겠다’ 했다.
나는 아무 여자애나 좋아한 것이 아니었고 특별히 좋아하는 타입이 있었다. 나는 피부가 아주 검지만 나의 아내는 갈색이고 생김새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고 말하는 것도 그랬다.

그 처녀는 그때 열  여덟 살이었고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 후 그 처녀는 자기 부모한테 말을 하고 나의 어머니는 나의 다와리(신부값)를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염소와 함께 현금을 냈다. 내가 선교회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돈을 받아 현금이 있었다. 별로 많지 않아서 약 40 쉴링을 주었다. 그리고 염소는 열 다섯 마리, 소 두 마리, 양 두마리를 주었다.  

우리고장에서는 결혼을 할 때 신랑이 신부집에 다와리를 내야하는데 이 다와리는 현금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염소, 소 등으로 냈다. 거기에는 일정한 양이 대강 정해져있어서 가령 소 두 마리, 양 세 마리, 염소 열 다섯 마리 하는 식이었다.  

그런 후 선교회에 가서 결혼하겠다고 하자 선교회에서 공고를 하고 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우리와 같은 날 일곱쌍이 한꺼번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아주 큰 잔치가 벌어졌다. 신랑신부는 좋은 옷을 입고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도와서 술을 준비하고 음식을 준비해서 그날은 누구나 마음껏 마셨다.

결혼하기 전 사람들은 총각에게 밭이 있느냐 집이 있느냐 아내를 먹여살릴 수 있느냐 등을 물어본다. 밭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남자가 돌보는 밭, 카사바 밭, 다른 밭 등을 모두 갖고 있어야 한다. 물론 그 때는 나에게 딸린 밭이 있었다. 그 후 나는 직업 때문에 고향을 떠났는데 그러나 나의 밭은 그대로 있다. 나의 동생도 거기에서 살고 있다. 나는 일년에 한번씩은 꼭 고향에 간다.

시골에서는 남자가 성장을 하면 집 근처에 자신의 집을 새로 짓는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밭을 갖게 되고 독립을 하게 된다. 물론 일이 생기면 또 누가 아프거나 하면 가족이나 이웃과 서로 돕는다.    

나도 물론 내가 집을 지었다. 물론 흙과 잎(짚)을 엮어서 지은 시골집이다. 집뿐만 아니라 곡식 저장할 데, 즉 옥수수를 저장하고 콩을 저장할 데  등의 광도 지었다. 콩은 숲에서 끊은 잎으로 만든 푸대에 담는다. 우기를 대비해서 그리고 다음 추수까지 항상 어느 정도 곡식을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 카사바만은 예외다. 카사바는 늘 밭에 있으니까 아무때나 가면 캘 수 있다.  

결혼을 하고 나서 곧 첫 아이가 태어났는데 사내아이였다. 시골 생활은 도시와 달라 모든 것을 다 만들어 써야 한다. 나의 아내는 진흙을 빚어서 그릇도 만들고 아이들을 씻기고 빨래를 할 함지박을 만들었다. 갓난아기를 위한 특별한 함지박도 만들었다.

대체로 보아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전쟁(이차 대전) 때는 옷을 구하기 힘들었다. 오로지 한 가지 모양밖에 볼 수 없었고 혹시나 한 벌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비축 해놓아야 했다. 선교회에서는 늘 유럽으로부터 옷을 들여오는데 그들은(선교회 사람들 즉 유럽 신부) 전쟁이 오래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옷을 많이 쌓아두었다가 싼 값에 나누어 주었다. 특히 양복은 아주 구하기 어려웠다.              
Posted by 올아프리카 africa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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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ooms 2006.06.03 12:0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글의 제목이 뭔가 전율을 느끼게 해 주는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