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 위치
   ·적도 바로 이남 아프리카 대륙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륙국가(중동부 아프리카)
   ·동쪽으로 탄자니아, 서쪽으로 콩고민주공화국,  남쪽으로 부룬디, 북쪽으로  우
     간다와 인접(지도 참조)

  □ 면적 : 2만 6,338㎢(한반도의 1/10 정도)

  □ 수도 : 키갈리(kigali: 인구 30만명)

  □ 지형
   ·해발 1,000m 안팎의 고지대(나일-콩고 분수계의 일부)
   ·활화산, 강, 계곡, 호수, 평야 등으로 구성

  □ 기후
   ·적도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고도(高度)에  위치해 있어  
     서늘하고 온화한 기후(연평균 기온 23℃) 유지
   ·강우량에 따라 소건기(1월∼ 2월), 대우기(3월∼5월), 대건기(6월∼9월), 소우기
     (10월∼12월)로 구분

  □ 식생
   ·국토의 2/5가 경작지, 1/5은 목초지, 1/10은 삼림·초원지역
   ·사자, 고릴라, 침팬지, 물소, 영양, 사마귀,  멧돼지, 얼룩말 등 야생동물의 천국
   ·무분별한 삼림채벌로 인한 서식지 감소로 마운틴고릴라를 비롯한 희귀 야생동
     물 멸종위기
   ·카게라 국립공원과 무투라 금렵지에서 여러 종의 야생동물 보호

  □ 인구
   ·약 8,582,000명
   ·높은 인구성장률(약 3.1%)
   ·인구밀도 326명/㎢

  □ 종족
   ·반투계의 후투족(87.3%), 나일계의 투치족(10%), 피그미(1%)

  □ 주요언어
   ·공용어로 영어, 프랑스어, 키냐르완다(Kinyarwanda)어 사용
   ·의회가1996년 1월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

  □ 주요자원
   ·주석, 텅스텐, 코탄, 콜롬보-탄탈석, 녹주석, 금

  
  □ 산업
   ·소규모의 공업, 대부분이 농업에 의존하나 자급자족도 힘든 상태
   ·커피, 차등이 주요 수출품.

  □ 1인당 GNP
   ·310$(전쟁 전)
   ·1인당 외채는 122$

  □ 종교
   ·카톨릭(50%) 개신교(30%) 이슬람(10%) 전통종교(10%)

  □ 교육
   ·카톨릭과 개신교 교회들이 거의 대부분의 초·중·고등학교 운영
   ·유일한 국립대학이 부타레(Butare)에 위치
   ·7세부터 15세까지의 의무교육, 공립학교는 모두 무상
   ·성인 문맹률 : 52.7%(남성 51.6%, 여성 44.8%)
   ·교사, 교실 및 기타 교육여건 낙후  

  □ 기타 특징  
   ·도시화 수준이 매우 낮음
   ·전체 인구의 9%만이 도시에 거주한다.
   ·성비의 심각한 불균형(학살과 내전으로 인해 남성 인구 급감)


르완다의 역사

·원시상황

원주민은 피르미계 트와족이며 현재  약 9000명이 수렵,  채집생활을 하고 있다. 1000년경부터 반투계 농경민인 후투족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15세기에 나일로트계 투치족이  북방에서 소를  몰고 침입하였다.  장신인 목축민  투치족(인구의 9%)이 다수파 후투족(약 90%)을 봉건적 주종관계로 지배하며 왕국을 형성하였다.

·근대상황

1890년대 독일세력이 미쳐 부룬디와 함께 독일령으로 1899부터 1916년까지 17년간 부룬디와 함께 식민지배를 받았다.  식민지 지배는 계속되어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 위임통치령,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제연합 신탁통치령으로 콩고(지금의 자이르 포함)와 함께 벨기에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벨기에의  간접 통치정책하에서 투치족의 전통적 왕국은 도리어 견고하게 이어지고 왕과 여러 추장의 권력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투치족은 식민지하에서  권력을 누리고, 카톨릭  교회가 경영하는 교육도 독점하였다. 후투족은 이에 반발하였으며 불만도 가중되었다.

·최근상황

1957년 후투족은 투치족에게 전제정치의  종결과 식민지 체제 타파를  선언하고, 1957년 궐기하여 공화제를 도입하여 후투족 출신의  카이반다가 북부지방의 아비야리마나를 압도하여 1961년 국제연합 감시하에 르완다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1962년 르완다 공화국이 되었다. 1963∼1964년 투치족 게릴라가 침입을 기도, 수천 명이 희생되었고, 1만 명은 우간다와 부룬디로 추방되었다. 투치족과 후투족의 반목과 긴장은 계속되었으며 결국 1994년 르완다 내전을 촉발시켜 수십만의 사상자와 난민이 발생하였다.

1) 정체
   공화제(대통령 중심제)

2) 국가원수
   르완다는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한다. 대통령은 헌법상 직접선거로 35세 이상 피선거권을 가진 국민 중에서 선출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임기는 5년이며 중임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독재정치가   가능한 체제이다. 현재는   파스퇴르 비지뭉구(Rasteur Bizimungu)가 대통령으로 1994년 7월 취임하였고 임기는 5년이다.

3) 정당제도
   르완다는   원래   일당제  국가였다.   지금은   NRMDD(National   Republican Movement   for  Democracy   and  Development)라고   불리는  NRMD(National Revolutionary Movement for Development)당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1991년에 최초로 헌법으로 다당제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중소정당의 난립으로 효과적인 견제활동을 수행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4) 행정부
   17부(대령 겸직의 국방부 포함)의 장관으로  구성된 국무회의와 10개 道로 구분되며 州는 143 郡으로 구성된 지방조직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94년 투치족 반군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이 모든 직분을 자신들이 지명하였다.

5) 입법부
   국가발전심의회(Conseil National de Developement)가 의회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단원제로 70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5년이다. 선출방법은  각 주(州)별로 중선거구제를 실시하며 국회의원 후보자는  당중앙위원회의 추천으로 당총재가  확정한다. 의회는 대통령이 그 직을 상실하면 자동적으로 해산되며 대통령이 해산할 경우에는 90일 이내에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
  
6) 사법부
   사법권은 독립되며 대통령이 이를 보장하도록 헌법에 규정하고 있다. 법관은 대통령이 법무장관 및 대법관회의 추천에 따라 임명한다. 재판은 3심제 이다.

7) 정치흐름과 정세
   1961년 9월 국민투표를 통해 공화국으로 전환한 후 총선거를  실시해 후투족 주도의 자치정부를 수립함에 따라 역사상 다수족인 후투족이 소수지배 계급인 투치족을 몰아냈다. 이후 후투족과 투치족의 분쟁은 지속되다가  1983년, 1988년 대선에서 거듭 당선된 Habyarimana 대통령이 80년대 이후 북부지역 출신 인사들을 편파적으로 중용함에 따라 지역간  갈등이 더욱 고조되었으며 국제수지와  재정적자에 따른 경제난이  가중되어 정국은 불안이 지속되었다.
   1994년 4월 6일 Habyarimana 대통령 비행기 추락 사건으로 정부군과 투치족 반군단체(르완다 애국전선 : RPF) 반군간의 전투가 재개되어  RPF 반군은 후투 정부군을 르완다에서 쫓아내고 르완다의 새 정부수립을 발표했다(94년  7월 18일). 1994년 11월 RPF를 포함한 잠정의회가 발족,  임기가  만료되는 5년 후에 대통령과 의회선거를 실시키로 결정하였고 비지뭉구 대통령은 정부의 학살행위를  비판한 트와기 라뭉구 총리를 경질하고 후임에  후투족 온건파인 뤼기에마를 기용하였다.  1996년 10월 자이르 동부지역 수용소에 있던 후투족난민  과격파들이 자이르 군과 함께 이곳에 거주하는 투치족들을 공격하자 이에 투치족이  정부군의 지원아래 난민수용소를 공격하고 100만 후투족 난민이 탈출을 개시하였다.
   1994년 11월 르완다 학살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한 국제전범재판소를 95년에 설치하여 12월 8명을 기소하고 정부는 94년 내전 당시의 학살사건과 관련, 후투족 다수  포함해 9만 명을 검거했고 1996년  말부터 중범 2,000명에 대한 사법처리를  개시하였다.

8) 정치적 과제
   1994년 르완다 사태의 발발은 전세계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지금도 유엔의 주도로 난민관리, 전범처벌 등의 전후처리가  진행 중이다. 르완다와 부룬디의 정치적 과제는 궁극적으로 후투족과 투치족의 내분으로 귀결될 수 있다. 양국(兩國)에서의 민주주의는 바로 이들 부족간의 분쟁해결로부터  시작되어야만 가능할 것으로 본다.


르완다와 부룬디의 경제

1) 주요산업
   르완다와 부룬디의 거의 대부분의 인구는  농업에 종사한다. 그러나 가공 및  보관시설의 낙후 및 미비로 대부분의 농업 인구들은 겨우 자급자족할 수 있는 정도의 식량만을 생산해 낸다. 주요 농산물은 바나나, 콩, 카사바(Cassava), 사탕수수, 고구마 등이다. 일부에서는 소를 키우기도 한다.

2) 주요 수출품목
   주요 수출품목은 커피,  차, 제충국(pyrethrum:살충제의  원료로 쓰이는  국화)이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주석과 텅스텐의 원석이 있으며 수출의 25%를 차지한다.

3) 국제무역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루안다(현재의 르완다)와 우룬디(현재의 부룬디) 지역은 오랫동안 서로 긴밀한 협조 하에 있었다. 르완다의  모든 수출품들은 부룬디를 통해 선적되어 탄자니아의 다레살렘이나 앙골라의 로비토 혹은 모잠비크의 베이라 등으로 수출되었다. 그러나  후투와 투치족의 내전이후에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현재는 르완다의  수출품들은 우간다의 캄팔라를 경유  케냐 몸바사를 거쳐 선적되고 있다. 이 경로는 보다 비용이 많이 들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마찬가지로, 르완다의 모든 수입품도 이 경로를 통해 들어온다.

4) 경제지표
   1994년 학살이후 GDP(국내총생산)은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여러 가지 노력으로 GDP는 회복추세이지만 아직도 실질 GDP는  90년대 초반의 80%정도 수준이다. 농업 생산은 이전의 86%, 공업 생산은 78%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1998년 GDP 성장률은 약 7%로 예측된다. 농업은 GDP의 37%를 차지하고 전체 노동인구의 91%가 이에 종사하고 있다.  공업은 GDP의 25%를  차지하고 노동인구의 2%정도가  공업 인구이다. 서비스, 교통, 통신 산업은 GDP의 38%, 노동인구의 7%를 차지한다.
  
5) 경제적 빈곤
   르완다와 부룬디는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한 국가중의 하나이다. 월드뱅크의  자료에 의하면   르완다의 빈곤인구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1985:40%,   1993:53%, 1997:70%) 게다가 빈곤의 정도도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 지고 있으며 고아나 과부들의 경우는  더욱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르완다의 빈곤인구 비율 70%는 아프리카의 평균 비율 40∼50%보다 훨씬 높다.

6) 경제적 과제
   오늘날 르완다 경제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의 하나가 부채이다. 르완다의 국가부채는 1985년4억 달러에서 1997년 현재 GDP의 65%에 이르는 11억 달러까지 빠르게 늘어났다. 부채 증가의 원인은 르완다의 주요  수출 품목인 커피 값의 하락과  국내 경기 침체이다.
   한편, 부룬디의 경우에는 외화수입의 90%가 커피와 외국원조에 의존하는 상황인 데다 최근 커피 값의 하락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인구과인과 천연자원 부족이 경제발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5. 르완다 내전

1) 르완다 내전의 배경
   르완다 내전의 원인은 소수인 투치족이 정치요직을 독점하고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다수민족인 후투족을 다스리려 한 데서 출발한다.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로 인한 양 부족간의 오랜 분쟁은 결국 1994년 4월 후투족의 쥐브날 하비아라마나(Juvenal Habyarimana)  르완다 대통령과 시프리엥은  타리아미라 부룬디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가 반군인 투치족의  포격을 받아 양국 대통령이 사망함으로써 촉발되었다.

2) 르완다 내전의 경과
   르완다 내전의 경과를 시간의 흐름을 기준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 1959 : 정치적 불안의 잉태
  ·1959년 루완다의 왕 Mwami Mutara III가 사망하면서 시작


□ 1959 : 최초의 내전 발발
  ·약 15만 명의 사상자 발생
  ·약 15만 명의 투치족이 인근국가로 탈출하는 등 투치족들의 대규모 희생

□ 1961 : 르완다 공화정 성립
  ·선거를 통하여 후투족들이 정권 장악, 1961년 루완다 공화국 수립

□ 1962 : 르완다와 부룬디의 분할
  ·루완다와 우룬디는 각각 두개의 나라  즉, 르완다와 부룬디로 벨기에의  신탁통치를 벗어나 분리독립(1962년 7월 1일)

□ 1963∼1964 : 투치족 반란
  ·1963년 투치족 게릴라가 침입을 기도
  ·수천 명이 희생되고 1만 명은 우간다와 부룬디로 추방

□ 1963 : 대통령 선출
  ·르완다 국민들은 후투 지도자인 Gregoire Kayibanda를 첫 대통령으로 선출

□ 1973 : Habyarimana의 쿠데타
  ·1973년 Juvenal Habyarimana 장군이 이끄는 후투족 군부 쿠데타 발생
  ·군부지도자들이 정권을 전복하고 의회 해산, 정부 장악
  ·Habyarimana는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군부 실세들을 내각에 임명

□ 1978 : 일당독재국가 성립
  ·Habyarimana는 지방주의와 부족대립주의를 해소하고 국구통일을 도모
  ·국제적으로 이전의 고립정책을 버리고 다원화 개방정책 추진
  ·국가 주도의 강력한 경제정책으로 1980년대 경제성장 경험
  ·Habyarimana는 1978, 1983, 1988년 각각 재선 성공

□ 1990 : 우간다로부터의 투치족 침공
  ·수많은 사상자, 피난민 발생

□ 1991 : 다당제 성립
  ·후투족이 중심의 군사정부가  헌법에 다당제의 보장을  명시함으로써 다당제가 합법적으로 인정
  ·민주주의의 기틀 마련

□ 1993 : 르완다 정부와 RTF간  평화협정 체결

□ 1994 : Habyarimana 암살
  ·1994년 4월 Habyarimana가 항공기 사고로 살해

□ 1994 : 내전의 발발
  ·후투족 과격파가 평화협정을 깨기 시작
  ·약 100만 명의 투치족 학살

□ 1994 : 후투족 새 정부 구성
  ·내전의 결과 새로운 후투족 정부의 구성
  ·RPF의 새 정부 불인정

□ 1994 : RPF의 무력 쿠데타
  ·RPF의 쿠데타 성공
  ·RPF정권은 후투족 관리를 포함한 연립정권 수립
  ·약 200만 명의 후투족 난민 발생


3) 르완다 內戰의 結果

    1994년 4월 대통령의 암살로 후투와 투치의 휴전은 깨어지고 결국, 투치족의 반군(RTF)이 후투족이 중심인 정부군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게 되었다. 추정컨대, 이 전쟁에서 약 100만이 사망하고 200만 명이 피난길에 오른 것으로 나타난다.    정권을 장악한 투치족의 르완다 정부는 유엔의 감독과 국제 여론에 밀려 후투족과의 평화적 연대를 주장하고 있으나, 약 200만 명에 이르는 후투족 난민들은 보복을 우려하여 귀국을 주저하고 있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콩고(당시의 자이르)의 고마 인근으로 피신하였고, 수만 명이  콜레라 등의 질병과 기아로 사망하였다.  현재 대부분의 난민들은 르완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유엔은 아직도 정부 수용소에  있는 민간인이 60만 명을 넘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르완다의 서북부 지역과 콩고 지역에는 이를 거점으로 한 후투족 반군 게릴라들이 아직도 남아 있어 내전의 불씨를 내포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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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올아프리카 africa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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