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매드 음넴와 (남, 44세)  
          
" 나는 집을 짓고 싶다. 그러나 저축을 할 수가 없다. 딸의 교육을 위해서 돈을 모으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헤매드 음넴와이고 44년전에 태어났다.(1956년생)  나의 직업은 교사로무와냐 말라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나의 부모는 원래 해안지역의 루피지 출신인데 1952년 다레살람으로 이주했다. 루피지는 농촌이어서 농사를 지어야 하나 아버지는 땅이 없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찾아서 다레살람으로 온 것이다. 다레살람에 와서 아버지는 탄자니아 부두용역 회사에 취직을 하여 1956년부터 1981년 까지 일했다. 아버지의 월급은 아주 적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퇴직한 이듬해에 작고했는데 60세 였다. 척추결핵으로 원인이라고 사망 진단서에 씌여 있었다.

루피지에는 물론 지금도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다. 루피지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완데응게레코 족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완데응게레코 말을 아주 조금밖에 모른다. 집에서 스와힐리어를 주로 썼기 때문이다. 나의 아주머니 한분(아버지의 형제)은 완데응게레코 말을 주로 하고 스와힐리어는 못해서 의사소통이 잘 안된다.

나의 아버지는 아랍어를 좀 공부를 했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 당시는 학교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학교가 있어도 굉장히 멀었기 때문에 학교에를 갈 수가 없었다.
나의 어머니는 지금 한 60세쯤 되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얼굴이 검고 키가 크고 뚱뚱한 반면 어머니는 피부가 덜 검고 키가 작고 몸집이 가늘었다.

나는 원래 5형제였으나 둘은 죽었다. 형이 어려서 죽었고 누나가 1971년에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린디에서였다. 누나는 매형이 린디 사람이기 때문에 거기서 살다가 다레살람에 오려고 버스를 탔는데 변을 당했다. 지금은 두 살 아래 남동생과 다섯 살 아래 여동생 3형제뿐이다.

현재 어머니가 사는 집은 우리 집 바로 부근이다. 그 집은 외삼촌 집인데 외삼촌은 다른데서 살고 대신 어머니가 사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집에서 여동생과 여동생의 아이들 둘 즉 손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나의 여동생은 직업이 없다. 남편도 없다. 몇 년 전 까지 남편이 있었는데 매제가 타라카를 썼기 때문에 (여동생을 내쫓았기 때문에) 지금 혼자 산다. 그는 직업도 없고 돈도 없기 때문에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어서 타라카를 쓴 것이다. 지금 여동생은 집근처 노점에서 땅콩과 달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큰 가게에서 물건들을 사와서 노점에서 파는 것이다. 아이가 둘 있다.
나의 동생도 바로 나의 집 근처에 산다. 아이가 넷이다.  
나의 외삼촌은 자신의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나의 어머니를 많이 도와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와 남동생이 나의 어머니를 도와드린다.
매달 쌀, 밀가루, 식용유 등을 어머니한테 사드린다. 필요할 때는 돈도 드린다.

나는 다레살람에서 태어났다. 줄곧 무와냐말라에서 살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지금처럼 집이 많지 않았다. 차도 적었다.
그때의 집은 진흙으로 짓고 지붕을 코코넛잎으로 엮었다. 물은 근처의 샘에서 길러왔고 전기대신 파라핀 기름과 키바타리를 썼다.
아침은 전날 저녁에 남은 것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티만 마셨다.

나는 11살부터 15살 까지 키논도니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시험성적이 좋지않아 공립중학교에는 떨어지고 집에서 놀았다. 그러다 1976년 20세 때 킬리만자로 지방의 우상게에 있는 교원 양성소에 2년간 다녔다. 졸업 후 첫 번 부임지가 키고마였고 그곳에 5년 있은 다음 줄곧 다레살람 무와냐 말라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다레살람으로 온 후 나는 91년에 성인학교에 등록하여 94년에 중학교 과정(form 4)을 마쳤다.    

교사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초등학교만 마치고 교원 양성소를 나온 사람, 중학과정을 마친 사람, 고등학교 과정과 초급대학과정을 마친 사람 들이 있다. 교사 양성소과정은 당시는 정부의 지원으로 숙식과 교육 모든 것이 무료였다. 지금은 학비가 있다.
Posted by 올아프리카 africa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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