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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봉(Cape of Good Hope)1)반도

2012. 7. 17. 22:20

 

 

희망봉(Cape of Good Hope)1)반도

 

 

바다 쪽으로 약 75km의 암초가 뻗어있는 희망봉 반도(peninsula)는 마치 아프리카의 본토에 덧붙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지역은 지구상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고 울퉁불퉁한 바위들은 아열대 식물들과 꽃들 그리고 변화하는 빛과 색의 변화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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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는 한때 섬이었다. 약 600만 년 전에 물이 줄어들고 융기가 일어났다. 모래가 많은 낮은 지역은 아프리카 대륙에서부터 이어져있는데 케이프 평지(Cape Flats)로 알려져 있다.

 

봄(8월-10월)에 반도는 아름다운 색들로 치장한다. 키르스텐보쉬 식물원(Kirstenbosch Botanic Garden)2)은 그 화려함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다. 희망봉 자연보호구역(The Cape of Good Hope Nature Reserve)은 더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뮈젠버르그(Muizenberg)와 칼 베이(Kalk Bay) 사이의 산을 통해 걷는 것은 이상한 나라의 꽃, 동굴, 이상한 암석층과 꿈같은 숲 속으로 안내한다.

 

 


여름(11월-3월)에는 깨끗하고 밝고 그리고 건조한 남동풍이 불어오고 아침나절에는 대부분 조용하다. 서쪽해안에서 밀려오는 파도는 강하고 높게 일며 클립튼(Clifton)과 볼더스(The Boulders) 해변은 일광욕하는 사람들과 소풍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낚시꾼들은 펄스 베이(False Bay)으로 몰려들고 다이버들은 수면 아래에서 암초들 사이로 난파선을 탐색하고 청록색으로 물든 깨끗한 바다를 감상 할 수 있다. 

 

3월부터 5월까지 케이프는 가장 매혹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남동쪽은 점점 겨울을 차비하느라고 잎들과 풀들이 말라간다. 바다는 여전히 따뜻하고 과일은 풍성하게 생산된다. 꽃이 비록 적지만 나뭇잎은 가을의 생생한 빛깔을 띠고 공기는 느긋하게 우리를 감싸 안는다.

 

겨울에 반도는 초록빛을 띄고 있으며 신선하다. 여러 종류의 프로티아(protea)3)꽃들은 무더기로 피어난다. 구름이 끼거나 비가 내리고 북서풍이 불지만 날씨가 개는 날은 공기가 스파클링 포도주(sparkling wine)의 향기와 맛처럼 청량하면서 화창하고 아름답다. 땅은 폭포와 빠른 속도로 흘러내리는 개울물들로 반짝인다. 또한 구름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장관을 연출한다. 비록 수영하기에는 너무 차갑지만 동쪽 해안에서는 서핑하기에 좋다. 따뜻한 옷은 특히 밤에 꼭 필요하다. 테이블 산(Table Mountain)에 내리는 눈은 오래 남아있지 않지만 폴스 베이의 반대쪽에 있는 더 높은 산은 종종 하얗게 덮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 경치가 펼쳐진다.

 

 


희망봉 자연보호구역(Cape of Good Hope Nature Reserve)

 

프란시스 드라커(Francis Drake)경이 케이프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칭찬했던 곳은 현재 희망봉 자연보호구역이 되었다. 이 지역은 반도의 최 남단의 처녀지로 개발되지 않은 7680 ha를 포함하여 왼쪽의 슈스터 만(Schuster's Bay)에서부터 동쪽의 펄스 만까지 이어져 있다. 해안선은 남아공의 가장 드라마틱한 경치가 이어지고 있으며 거의 40km에 달하며 희망봉을 포함하고 있다. 반도는 끝 부분에서 세 지점으로 나누어진다. 희망봉이 가장 남쪽지점이며, 동쪽은 19세기의 천문학자 토마스 맥클리어 경(Sir Thomas Maclear)경의 이름을 딴 케이프 맥클리어(Cape Maclear)이며 더 동쪽으로는 희망봉(Cape Point)가 있다. 이곳에는 또한 등대와 무선표지가 설치되어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아름다운 드라이브 길은 시몬스타운(Simonstown)에서 자연보호구역을 통과하여 희망봉까지 나있다. 많은 작은 시내들이 흐르고 있으며 그중에서 가장 큰 클라스자거스 강(Klassjagers River)이 자연보호구역을 흐른다. 버펠스 만(Buffels Bay)과 올리판스보스(Olifantsbos)같은 야외 휴식처는 야외 취사장을 가지고 있으며 나무와 물을 이용할 수 있다. 버펠스 만에는 조수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수영장이 있고 보트가 정박할 수 있는 이동경사로가 만들어져 있다. 버펠스 강(Buffels River) 근처에 있던 19세기의 농장 농가는 이제 식당으로 바뀌었고 농가의 벽의 일부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일년 내내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자연보호구역은 야생 꽃이 흩뿌려진 것처럼 만발하는 봄철에 특히 아름답다. 일년 중 희망봉에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거의 없지만 바람의 정도와 영향은 다양하다. 여름에는 강한 남동풍이 불고 겨울에는 더 온화한 북서풍이 우세하다. 가을에는 봄과 같이 비교적 잔잔하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수목과 가축이 잘 번성하지 못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약간의 열대식물이 자라기는 하지만 다 자라면 그들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는 듯이 보이며 그들이 성장하는 이상한 각도는 그들이 그 장소에서 벗어나기를 무엇보다도 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암석이 있는 토양을 만드는 사암은 풍부하게 펼쳐져 있다.

 

거북과 다른 작은 생명체들은 관목 사이에 산다. 그러나 더 큰 동물들은 이 지역에 결코 잘 적응할 수 없다. 영양이나 코끼리도 이곳으로 이동해오지만 결국 날씨가 나빠지면 떠나고 만다. 얼룩말과 본터복(bontebok)과 같은 영양을 재도입하려는 시도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비비 원숭이는 떼를 지어 이 지역을 항상 돌아다닌다. 그들은 해안가에서 껍질을 부숴 열어 그 안의 연체동물을 먹기 위해 해변을 무리지어 다닌다. 

 

관찰되는 150종의 새 중에는 타조, 흰머리 물떼새, 까만등 갈매기, 가마우지, 설탕새(sugarbird), 케이프 자고새, 왕관 댕기 물떼새, 노란부리를 가진 오리와 케이프 산까치가 있다.

 

낚시는 반도의 양쪽에 나와 있는 암석 지점이 특히 좋다. ‘붉은 낭떠러지(red cliff)’란 뜻을 가지고 있는 가파른 루이크란(Rooikrans)의 턱진 곳은 낚시꾼들이 깊은 물에 직접 낚시를 할 수 있는 장소로 인기 있다. 빙어류(yellowtail)와 다랑어가 잘 잡힌다. 

 

이 지역은 해안에 수많은 유흥지가 건설되던 1928년에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기로 계획되었다. 결국 1939년 4월 11일에 케이프 지방정부는 토지수용을 위해 약 127,000랜드의 비용을 책정한 후 보호지로 선언하였다.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flying Dutchman)4)의 영원한 항해

 

 

바람이 휘몰아치며 울부짖고 대서양의 파도가 무섭게 바위를 후려칠 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유령인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이 희망봉에 출몰한다고 여겨진다. 

 

돛대는 부러지고 돛은 찟겨 지고 파손된 배의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유령선5)이 영원히 희망봉 주위를 돌아다니도록 운명지어졌다는 이야기가 몇 세대에 걸쳐 전해내려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전설이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돌로메우 디아스(Barthelomev Dias)6)로 거슬러간다고 알고 있다. 그가 1488년 아프리카의 최 남단에 도착한 유일한 유럽인으로 기록된  2 년 후 그의 배가 희망봉에 침몰하여 익사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전설이 1641년 귀향 중에 폭풍을 만난 네덜란드인 판 더르 데칸(Van der Decken) 선장의 배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 전설은 그의 배가 침몰하는  운명의 날까지도 그가 희망봉을 돌아서 갈 것이라고 맹세했다는 일화에서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뱃사람들은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을 흘끗 본 사람들은 모두가 판 더르 데칸처럼 죽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전설은 단지 귀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던 옛날사람들의 미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희망봉의 등대지기들은 종종 폭풍을 맞은 배들로부터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U-보트가의 승무원들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고 1939년 클렌카인(clencairn)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이 파손된 오래된 배가 갑자기 형체를 드러낸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아마 가장 유명한 기록은 1881년 6월 11일 영국 해군(Royal Navy) 전함인 바칸데(Bacchante)의 젊은 해군 사관학교 생도의 일기에 기록 되어져 있다. ‘새벽 4시,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은 우리 뱃머리를 횡단하여 지나갔다. 뱃머리에서 망보는 사람은 배가 좌현 뱃머리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보고했고 당직 장교 또한 배를 확실히 보았다고 했다...유령선의 이상한 붉은 불빛이 200 야드나 먼 거리에서 매우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망보는 사람은 망루에서 떨어져 죽었지만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의 저주는 해군 사관학교 생도에게 죽음을 가져다주지 않고 온전히 살려두었다. 그는 후에 조지 5세(George V)7)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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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망봉(希望峰 ; Cape of Good Hope) :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 주 남서부의 케이프 반도 남단에 있는 암석 곶(串).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르툴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을 확인한 후 포르투갈로 귀항하는 길에 처음으로 이 곶을 발견했다. 한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디아스가 이 곶을 폭풍봉으로 이름붙였던 것을 포르투갈의 주앙 2세가 희망봉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곶의 발견으로 유럽과 인도를 잇는 항로 개척의 가능성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디아스 자신이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명명했다고 밝히는 사료들도 있다. 험한 날씨와 거친 앞바다로 유명한 이 곶은 인도양에서 흘러온 모잠비크-아굴라스 난류와 남극해에서 오는 벵겔라 한류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풀과 낮은 관목림이 특징적인 식생이며, 이 곶은 반도의 남단을 차지하는 희망봉 자연보호구역(1939)의 일부를 이룬다. 희망봉 동쪽 2㎞ 지점의 포인트 곶에는 등대가 있다.
희망봉 :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서쪽 끝을 이루는 곶(串).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아굴라스곶의 북서쪽 160km 지점에 있다. 케이프타운에 가까운 반도의 맨끝으로서 케이프 포인트라고 불린다.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발견하였으며, 당시에는 ‘폭풍의 곶’으로 불렸다. 그 후 1497년 V.d.가마가 이 곶을 통과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데서 연유하여, 포르투갈 왕 주앙 2세가 카부 다 보아 에스페란사(Cabo da Boa Esperana:희망의 곶)라고 개칭하였다. 현재 희망봉 일대는 관광지로서 곶의 첨단까지 관광용 자동차도로가 통한다. 반도의 남단부는 자연보호지구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비()를 비롯하여 많은 동식물이 보호되고 있

 


2) 남아프리카 국립식물원(National Botanic Gardens of South Africa) : 세계에서 가장 큰 식물원 중의 하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키르스텐보스흐에 있으며 그 면적은 552㏊에 달한다. 6,200종류의 식물이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아프리카 남부산 식물들이다. 프로테아과(―科 Proteaceae)와 칼루나속(―屬 Calluna) 식물들처럼 아름다운 식물들도 있으며, 비늘줄기를 가지는 수많은 식물들과 함께 많은 수의 소철류가 있다. 이 식물원에는 9개의 온실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희귀식물들을 번식시키고 있으나 일반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3곳의 표본실에는 약 22만 5,000점의 식물표본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국립식물원의 가장 주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그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 중 위기에 처해 있는 식물들을 보존하는 것이다. 몇 년에 걸쳐 그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업적을 세웠으며, 멸종의 위기에 있는 많은 식물들의 표본을 모아왔다. 연구 결과 남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6곳을 지방 식물원 또는 자연보존지역으로 지정하였는데, 남아프리카에서 자라는 다육식물(多肉植物)이 5,000종(種) 이상 심어져 있는 우스터의 카루식물원(Karro Garden), 붓꽃과와 백합과 식물 가운데 비늘줄기를 지닌 식물만을 모아둔 이디스 스티븐스 케이프 플랫 식물보호지역(Edith Stephens Cape Flats Flora Reserve) 등이 이에 속한다.

 


3) 프로테아목(Proteales) : 쌍떡잎식물강(雙─植物綱)에 속하는 꽃피는식물의 한 목.
프로테아과(─科 Proteaceae), 62속(屬)의 관목과 교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750종(種), 남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350종 등 거의 대부분이 주로 남반구에서 발견된다. 또한 말레이시아, 아시아 남동부, 태평양 일부 섬, 아메리카의 중부와 남부에서도 자란다. 꽃 하나하나는 대개 작지만 빽빽하게 붙어 화려한 꽃차례를 형성하는 것이 이 식물들의 특징이다. 꽃은 4개의 수술을 가진 4개의 꽃덮이[花被]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술은 꽃덮이조각[花被片]의 끝부분에 달리며, 때때로 노출된 1개의 꽃밥만이 달리기도 한다. 홑잎이거나 여러 갈래로 갈라진 잎들은 규칙적인 나선 모양으로 달리며, 흔히 털로 빽빽하게 덮여 있거나 두꺼운 큐티쿨라층이 있어 수분 손실을 막기 위해 적응된 형태를 취한다. 이 식물들은 일반적으로 매년 건기가 긴 지역에서 자란다.
중요한 속으로는 그레빌레아속(Grevillea : 190종)· 프로테아속(Protea : 130종)·하케아속(Hakea : 100종)·헬리키아속(Helicia : 90종)· 류코덴드론속(Leucodendron : 70종)·페르소오니아속(Persoonia : 60종)이 있다. 온대지역에서는 여러 종들이 관상용으로 재배되고 있는데 미세하고 부드러운 털로 덮인 잎이 달리는 류코덴드론 아르겐튬(L. argenteum), 반크시아속(Banksia)의 오스트레일리아러니서클, 엠보트리움속(Embothrium)의 화이어부시, 하케아속의 하케아 등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자생하는 우의목(Grevillea robusta)은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마카다미아 인테그리폴리아(Macadamia integrifolia)는 식용의 씨를 얻기 위해 재배된다.

 


4) 플라잉 더치맨(Flying Dutchman) 유럽의 해상 전설에서 나타나는 유령선.
영원히 항해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저주받은 배이다. 유령선이 선원에게 보이면 재앙이 임박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가장 널리 알려진 유령선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반데르데켄 선장은 자신이 폭풍우치는 희망봉을 돌아서 항해해 올 수 있으며, 이것이 신이 자신을 구원해준다는 증거라는 자만에 찬 내기를 한다. 선장은 영원히 그 항로를 항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이 이야기는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1843)의 주제가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팔켄베르크 선장은 그의 영혼을 걸고 악마와 주사위 놀이를 하다가, 영원히 북해를 항해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는 것이다. 주사위 놀이 주제는 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노수부의 노래 Rime of the Ancient Mariner〉(1798)에서 다시 나타난다. 노수부는 항해 중에 유령선을 만나는데 그 배에서는 '죽음'과 '죽음속의 삶'이라는 대립되는 힘이 서로 노수부를 차지하려고 주사위 놀이를 한다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이다. 스코틀랜드의 작가 월터 스콧은 이 전설을 그의 이야기체 시 〈Rokeby〉(1813)에 원용해 선상에서 일어난 살인, 선원들에게 흑사병이 퍼져 모든 항구가 그 배의 입항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썼다.

 


5) 유령선(Phantom ship) : 어떤 원인으로 살해당한 사람의 혼백이 구제받지 못한 채 배 안에 남아서 바다 위를 표류한다고 하는 전설상의 배.
이런 전설로는 17세기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대표적이다. 불신앙(不信仰)의 죄로 영원히 저주받은 네덜란드 선장이 바다 위를 헤맨다는 이 전설은 원래 희망봉과 관련된 것으로 그 배를 만나면 위해(危害)를 입는다든가, 또는 여자의 애정으로 구제를 받는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그와 같은 전설에 첨가되었다.
유령선이 보통의 배와 다른 점은 바람에 거슬러 달린다든가, 배의 불빛이 바다 위에 비치지 않는다든가 하는 불가사의가 따르는 일이다. 독일의 동화 작가 W.하우프의 《유령선》에서는 배 안에 있는 피투성이의 시체가 한밤중이 되면 움직이기 시작하여 돛을 펴고 소동을 피우지만, 날이 새면 원래의 시체로 돌아간다. 그리고 유령선과 스친 배는 난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슬람교의 수도승을 죽인 벌로서 자기도 살해당한 알제리의 선장은 이렇게 50년간을 밤마다 유령선을 타고 달렸는데, 신앙이 두터운 이슬람교도의 덕분으로 저주에서 풀려나고 시체는 먼지가 된다. 이것은 전형적인 유령선 전설이다. 또한 항해하는 선박의 승무원을 아름다운 노랫 소리로 홀려서 죽이는 세이렌이나 로렐라이의 마녀 등도 유령선과 같은 해(害)를 끼치는 바다 유령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6) 디아스(Bartolomeu Dias) : Dias는 Diaz라고도 씀. 1450경~1500. 5. 29 희망봉 근처 해상.
포르투갈의 항해가·탐험가. 1488년 유럽의 탐험대를 이끌고 희망봉을 처음으로 발견, 대서양과 인도양을 지나 아시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15세기에 대서양을 탐험한 포르투갈의 모험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생애 초반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항해왕자 엔리케의 도선사(導船士)였던 사람의 자손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입증되지 않고 있다. 그의 신분은 왕실에 속한 종신(從臣)으로서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다. 디아스 데 노바이스라는 이름은 당대에 작성된 문서들에는 눈에 띄지 않고 1571년 그의 손자가 앙골라의 총독으로 임명된 것을 보여주는 증서에 유일하게 그 이름이 등장한다.


1474년 국왕 아폰수 5세는 아들 주앙(나중에 주앙 2세로 즉위)에게 기니와의 무역 감독과 아프리카 서부해안 탐사작업을 위임했다. 주앙은 아프리카 서부해안에 외국선박의 입출항을 봉쇄하고자 했으며 1481년 왕위에 오른 후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 지점 확인을 위한 항해를 명령했다. 항해에 나선 사람들에게는 포르투갈 국왕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한 석주(石柱) 여러 개가 주어졌다. 당시 항해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디오구 캉은 콩고에 도착한 후 앙골라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해 남위 13°26' 지점의 산타마리아 곶에다 주앙 2세로부터 받은 석주 하나를 세웠다. 디오구 캉은 자신이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귀족 작위와 함께 상을 받았다. 캉은 이후 재차 항해길에 올라 이번에는 남위 15°40'이 되는 지점에 석주를 세우고 크로스 곶에 또 하나의 석주를 세웠으며 남위 22°10'까지 항해를 계속했다. 주앙 2세는 캉이 인도양에 도달하기를 기대했으나 이같은 기대는 실현되지 못했으며 캉으로부터 더이상의 소식은 전해오지 않았다. 이에 따라 주앙 2세는 새로운 탐험의 임무를 디아스에게 맡겼다. 1486년 당시에는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오가네라는 곳에 한 위대한 통치자가 있으며 그가 바로 그리스도교 왕국을 건설했다는 전설의 인물인 프레스터 존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주앙 2세는 그때 육로로 인도와 아비시니아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페루 다 쿠비양과 아폰수 파이바를 파견해 놓고 있었으며 또한 디아스에게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을 찾아내도록 지시를 내렸다.


디아스의 선단은 디아스 자신이 승선한 '상크리스토방호'와 그의 동료 주앙 왕자가 지휘하는 '판탈레앙호' 그리고 페루 또는 디오구라는 디아스의 동생이 지휘한 보급선 등 모두 3척의 선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선단에는 당대의 뛰어난 도선사들이 승선하고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일찍이 캉 밑에서 항해에 참가했던 페루 데 알렌케르와 주앙 데 산티아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6세기 역사가 주앙 데 바로스는 디아스의 선단이 1486년 8월에 출항해 16개월 17일 동안 포르투갈을 떠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두아르테 파셰쿠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등 당대의 다른 인물들은 디아스의 귀환 시점을 1488년 12월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디아스의 출항시기는 1487년 8월로 추정된다.


디아스는 캉이 과거에 세웠던 석주를 지나 12월 4일 '세인트바르바라의 땅'에 도착했으며 8일에는 월비스베이에, 그리고 26일에는 세인트스티븐 만(엘리자베스 만)에 도달했다. 그는 1488년 1월 6일 폭풍을 만나 해안을 따라 항해를 계속할 수가 없어 며칠 동안 육지를 보지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뱃머리를 왼쪽으로 다시 돌렸으나 육지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다시 육지를 목격하게 된 것은 선로를 북으로 돌려 항해하고 난 뒤인 2월 3일이었다. 즉 디아스는 곶을 보지 못하고 돌아 항해했던 것이다. 그는 그곳을 안그라데상브라스(세인트블레이스 만, 그날이 블레이스 축일이었음), 또는 그곳의 주민을 보고 목자만(牧者灣)이라고 명명했다. 디아스 선단에 동승한 흑인들은 원주민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으며 이들 원주민들은 처음에는 포르투갈인들을 보고 달아났으나 나중에는 되돌아와서 공격를 가했다. 탐험대는 안그라다로카(지금의 알고아 만)를 향해 계속 나아갔으나 선원들은 항해를 계속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디아스는 간부 선원들의 견해를 수렴해 보았는데 이들 모두가 포르투갈로의 귀환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항해를 계속하기로 의견일치를 보고 난 후 디아스의 선단은 리우 두 인판테에 도착했다. 이 지명은 '상판탈레앙호'의 도선사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인데, 지금의 그레이트피시(흐로트-비스) 강 부근이 거의 확실하다.


곶을 돌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고 디아스는 귀환길에 올랐으며 그해 5월에는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곶을 눈으로 확인했다. 역사가 바로스는 디아스가 그 곶의 이름을 '폭풍의 곶'이라고 명명했으며 주앙 2세가 다시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두아르테 파셰쿠의 말에 따르면 희망봉이라는 이름은 디아스 자신이 붙였다고 하는데, 파셰쿠가 프린시페 섬에서 디아스와 합류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좀더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귀환 항해에 관해서는 디아스가 리우두레스가테(지금의 라이베리아에 있음)의 프린시페에 기항했으며 미나의 무역기지를 요새화했다는 사실 이외에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디아스가 파드랑데상그레고리우에 남긴 표식 가운데 하나가 그레이트피시 강에서 대략 56㎞ 정도 떨어진 폴스아일랜드에서 1938년 발견되었다. 또다른 표식 하나가 세인트크리스토퍼 만의 서쪽 끝에 세워졌었는데 그때문에 그곳의 지명이 디아스포인트로 명명되었다.


주앙 2세가 주최한 디아스 일행의 접견행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인도로의 항해계획이 마련되었다고 하지만 육로로 인도를 찾아나선 페루 다 쿠비양으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9년 동안 아무도 항해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주앙 2세의 계승자인 마누엘 1세가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유명한 항해를 허가했다. 디아스는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대와 함께 미나까지 동행했다.


다 가마가 인도 서부의 항구에 도달한 후 포르투갈로 귀환하자마자 재차 함대가 편성되었다. 12척으로 구성된 이 함대는 인도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그들과 대규모 통상을 개설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 함대의 지휘는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맡았으며 디아스에게도 소규모 선박 1척이 맡겨졌다. 이 함대는 희망봉으로 향하는 동안 대서양 서부해역까지 항해하면서 브라질의 에스피리투산투를 목격하기도 했다. 이 육지는 섬으로 생각되었으나 '진실한 십자군의 땅'이라 이름붙여졌다. 따라서 디아스는 브라질 발견에 참여한 셈이 되었다. 일행이 희망봉에 도달했을 때 디아스는 해상에서 실종되었는데 아마 처음으로 그가 항해했던 바로 그 해상에서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안토니우라는 아들을 두었다. 손자 파울루 디아스 데 노바이스는 앙골라 총독을 지냈으며 1576년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최초의 유럽인 도시 상파울루데루안다를 건설했다.

 


7)조지 5세(King George V) : 정식 이름은 George Frederick Ernest Albert.
1865. 6. 3 런던~1936. 1. 20 잉글랜드 노퍽 샌드링엄.
그레이트 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왕국의 왕(1910~36 재위). 후에 에드워드 7세가 된 앨버트 에드워드 공의 둘째 아들이다.해군에서 복무하다가 1892년 형 앨버트 빅터가 죽자 왕위를 잇기 위해 더욱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 했다. 1892년 5월 요크 공작이 되었으며 1893년 7월 형의 약혼녀였던 테크의 메리 공주와 결혼했다. 1901년 아버지가 즉위한 뒤 콘월 공작 겸 웨일스 공이 되었고 1910년 5월 6일 아버지를 계승해 1911년 6월 22일 대관식을 올렸다. 통치 초기에 그는 만만치 않은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혔다. 상원의 세력을 꺾으려는 헌법 투쟁이 아직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자유당 정부는 상원이 양보하지 않으려 하자 이 반대를 물리치기에 충분한 수만큼 상원 귀족직을 새로이 창설하겠다는 약속을 왕에게서 받아냈다. 1910년 12월의 선거에서 자유당이 승리하자 상원은 태도를 누그러뜨려 의회법(1911)을 통과시켰고 왕은 자신의 약속을 이행할 필요가 없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그의 위신은 크게 높아졌으며 그는 몇 차례에 걸쳐 프랑스의 전선을 방문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심각한 산업 위기에 직면했다. 한편 1923년에는 총리 앤드루 보너 로가 사임함에 따라 새로운 총리를 찾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커즌 경과 스탠리 볼드윈 두 사람 모두 연로한 정치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볼드윈이 보수당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믿은 그는 하원의원들 중 왕이 선택한 사람이 총리가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1928년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남은 통치 기간 동안 극도로 건강에 신경을 써야 했다. 1931년에 파운드화의 급락과 이에 따른 재정 위기로 노동당 행정부가 분열되었다. 그는 강한 정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램지 맥도널드와 내각의 일부 성원에게 맡은 직책에 남아서 보수당 및 자유당 소속 장관들과 연립내각을 구성해달라고 설득했다. 1935년 5월 즉위 25주년 기념행사 때 그에 대한 대중의 애정과 찬사가 쏟아졌다. 조지 5세는 5명의 아들을 두었다. 국왕이 된 에드워드 8세(윈저 공작), 국왕 조지 6세, 글로스터 공작 헨리, 켄트 공작 조지, 그리고 어려서 죽은 존 공 등이다. 딸 메리 공주는 하우드 백작 6세와 결혼했다. 해럴드 니콜슨이 쓴 국왕 조지의 전기가 1952년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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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와 타협을 통한 과거청산 -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 TRC)

2012. 7. 17. 22:17

 

 

화해와 타협을 통한 과거청산

 -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 TRC)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 TRC)야 말로 남아공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로부터 화해를 타협을 통한 국가건설과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변화의 상징으로서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남아공의 변화는 분명히 ‘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TRC는 이 기적의 전형적인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인식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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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은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한 사회(multi-racial, multi-cultural society)이다. 인종, 언어, 종교, 계급 등에 따른 분열과 차별은 20세기에 들어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시행으로 그 정점에 다다랐다. 특히 인종집단간의 깊은 분열은 올바른 역사의식, 국가의식, 또는 국민의식의 형성을 어렵게 하고 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1995년 국민적 통합과 화해 증진법(Promotion of National Unity and Reconciliation Act)에 의해 설치되었다. 주된 목적은 진실을 밝힘으로서 국민들의 화해와 단결을 증진시키는 것이며 조사기간은 1960년 3월 샤프빌(Sharpeville)사건이 발생한 시기부터 1994년 5월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로 한정하고 있다. 1995년 말에 만델라 대통령에 의해 17명의 위원이 임명되었고 1995년 12월 1일부터 활동이 개시되었다. 의장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대주교가 맡았으며 부의장은 보라이너(Alex Boraine)박사가 임명되었다. 모두 3개의 위원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권폭력 위원회(Committee on Human Rights Violations), 사면 위원회(Committee on Amnesty), 그리고 보상과 복권 위원회(Committee on Reparation and Rehabilitation)로 구성되어있다. 위원회의 기능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인권의 침해와 남용을 조사함은 물론 그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조사하게 하였다. 살인, 납치, 고문, 불법적인 감금 등 과거에 분쟁과 정치적 이유로 발생된 광범위한 인권남용에 대한 조사를 주 대상으로 하고 있다.

 

1996년 4월 본격적으로 조사에 착수한 TRC는 2년여에 걸쳐, 지난 30여 년간에 걸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인권유린에 대해, 1백 60회의 청문회와 희생자 2만 1천 여명으로부터 증언을 듣고 백인들이 저지른 암살, 고문, 실종들의 실상을 조사하였으며 백인들의 인권유린뿐만 아니라 흑인들의 인권유린상황에 대해서도 조사하였다. 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결과는 1998년 10월 29일 인권남용 사례를 담은 2천7백50쪽 짜리 5권의 보고서를 언론에 공개한 뒤 만델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인종간의 갈등, 정치적 분쟁, 말해지지 않은 고통과 불평등으로 대변되는 남아공의 경험은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위로부터의 민주화 이행과 국민화합을 실현함으로서 국가건설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주요한 정치집단들이 정치적 희생을 감수하면서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화에 대한 제도적 정착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둘째는 인권남용에 대한 전반적인 실태를 진실에 대한 조사와 사면 및 복권을 명시한 TRC라는 기구를 통해서 밝힘으로서 역사를 청산하고 국민적 화합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TRC의 근본적인 취지가 보복이나 복수가 아니라 화해와 이해, 그리고 보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TRC는 과거의 권위주의적인 인종주의자의 통치로부터 민주주의를 향한 남아공의 변화의 과정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남아공의 변화는 타협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과거 아파르트헤이트시기에 인권남용에 대해 사면을 하는 것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해 TRC는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남아공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로부터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변화의 상징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TRC는 국가건설과 화해에 기초한 ‘복구적인 모델(restorative model)'을 제시하고 있는데 세계의 다른 예와는 달리 진실을 말하게 하고 사면과 보상을 시행하는 유일한 제도이다.

 

 

과거에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졌던 인권남용의 가해자들에게 행했던 일방적인 사면과는 다르게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가해자들에게 사면을 부여함은 물론 피해자들에게 자신의 피해사실에 대해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나아가 보상과 명예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더구나 인권남용에 대한 사면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이것은 중요한 기준을 다양하게 두고 있는데 특히 관련된 사건의 완전한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전체적인 평가는 TRC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종족간의 화합을 가져옴으로서 짐바브웨나 유고슬라비아 같은 인종․종족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제공되었으며 화합을 이끌어낸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평가를 정리하여보면 첫째로 TRC는 정치적 실용주의 모델로서 가해자나 피해자나 국가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로 인식되고 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아파르트헤이트의 정권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가해자로서의 권력을 포기하고 민주적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전감을 갖게 해 주었다. 둘째로 준법(quasi-legal)적 조정자 역할을 하였다. 인권남용과 폭력에 대해 가해자를 밝히고 책임을 지게 하였으며 도덕적 강제기능까지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심각하게 분열된 국민들에게 과거사를 재정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TRC는 국가건설의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인종적 가해자와 피해자들 사이에 용서와 화해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뉘른베르그식의 보복적인 승리자의 정의와 역사적 망각사이에 또 다른 길 - 즉 용서와 화해, 그리고 협력을 통한 국가건설과 새역사의 창조 - 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넷째, 인권남용에 대한 예방적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효과로 인해 TRC는 인권남용이 다시는 발생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킴으로서 인권문화의 발전을 꽤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TRC가 남아공의 변화와 발전에 중요하면서 상징적인 촉매역할을 했다는 것일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도 지역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상태이며 일제잔재의 청산과 과거 민주화과정에서 저질러진 인권남용에 대해 조사하고 정리해야 할 때이다. 나아가 통일이후에도 남북간의 이념적 문화적 갈등을 풀어나가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만약 이런 문제를 일단락 짖지 못하고 간다면 우리는 이런 문제들로 인해 끊임없이 소모적인 논쟁에 빠져들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단시일 내에 어떤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문제들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도 국민적 공감대 위에 이런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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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를렘(Haerlem)의 난파

2012. 7. 17. 22:16

 

 

5. 하를렘(Haerlem)의 난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인도의 향신료를 가져오기 위한 노력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마침내 그가 즉석에서 희망봉(Cape of Good Hope)1)라 다시 이름 붙인 폭풍의 만(Cape of Storms) 주변을 돌아 인도의 서부 해안에 있는 캘리컷(Calicut) -현재 코지코테(Kozhikode)-에 다다른 때는 비로소 1497년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머나먼 인도에까지 이르는 항로는 개척되었지만 아프리카 주변 항해는 상존하는 위험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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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땅 남아공화국이 백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88년 바돌로뮤 디아즈(Bartholomew Diaz) 휘하의 포르투갈 탐험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나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디아즈는 1488년 희망봉을 크게 돌아 알 수 없는 바람에 이끌려 현재의 모슬베이(Mossel Bay)에 최초로 발을 디뎠으며 식수를 구하는 과정에서 코이코이족과 조우하였다. 1488년 한여름에 그레이트 피쉬(Great Fish)강에 도달했으며 돌아오는 과정에서 최초로 케이프를 보았다. 디아즈는 이 지역을 Tormentoso(The Cape of Storms)라고 이름 지었다. 후에 포루투칼 왕 주앙(João)은 카부 다 보아 에스페란사(Cabo da Boa Esperança ; 희망의 곶(Good Hope))로 이름지었다. 즉 디아즈는 아프리카의 끝을 확인한 것이었다.

 

9년 후인 1497년에 유명한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케이프를 바로 돌아 현재의 나탈(Natal, 그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성탄절이었고 다 가마가 라틴어로 성탄절을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름지었다)까지 이르렀고 동아프리카의 몹바사(Mombasa)와 (Malindi)를  거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 한 후 꼭 1년 만에 포루투칼로 돌아왔다. 1500년 카브렐(Pedro Cabral)은 브라질(Brazil)에 기착한 후 케이프를 돌아 동아프리카를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확고히 열고 포루투갈의 독점시대를 열었다.

 

 


이 지역에 백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The Dutch East India Company)가 인도 항로의 중간 정박 기지(기항지 ; revictualling station) 건설을 목적으로,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k)2)가 이끄는 3척의 배와, 130명의 남녀로 구성된 탐험대가 1652년 6월 4일 테이블만3)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모두 이 회사의 피고용인들이었으나 차츰 회사로부터 독립해 목축과 영농으로 경제력을 키워 나갔다. 이들은 지금의 케이프 타운(Cape Town)근처에 백인 사회를 건설했다.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의 해안 지대에는 주로 두 부족의 흑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코이코이(Khoikhoi) 또는 호텐토트(Hotentot)라 불린 부족4)은 주로 목축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부쉬맨(Bushman)으로 불리는 산(san)족5)은 수렵과 채집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쪽의 내륙지방에는 반투(Bantu)어를 사용하는 줄루(Zulu)족, 코사(Xhosa)족 등이 대규모 집단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초기에 백인들과 흑인들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에서 물물교환을 했으나 차츰 목축지를 놓고 대립하는 관계로 변해 갔다. 특히 보어(Boer)인들로 불린 네덜란드계 백인사회가 점점 더 내륙으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이주민과 원주민사이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 희망봉에 대하여

 

동인도 회사를 위해서 먼 동부로의 무역은 극도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또한 선박과 그것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극도로 위험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바타비아(Batavia)6)까지 가는 항해는 평균적으로 약 6달 정도 걸렸고 이 여행 중에 배에서 마시는 모든 물은 다 바닥났고 신선한 음식은 모두 떨어졌으며 소금에 절인 고기와 건빵, 비스킷 모두는 거의 먹을 수 없었다. 결국, 남부 대서양 연안에 도착한 선원들 대부분은 보충과 수리를 받아야 했고, 그 선원들은 종종 괴혈병7), 이질, 기생충을 포함한 질병에 의해서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중간 정거장이 남부 아프리카 해안 어느 곳에 세워졌고 그 곳에서 아픈 선원들은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며 신선한 음식을 먹고 배를 수리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에 세워졌는지 의문이다. 한 가지 가능한 장소는 테이블 베이(Table Bay)8)인데, 이 곳은 조리스 밴 스필베르겐(Joris Van Spilbergen)이 1601년에 그 곳에서 잠깐 쉬면서 붙여준 이름이다.

 

 


그 당시에 적어 놓은 기록은 위도 34도 4분에 놓여 있고 북부 희망봉의 약 15마일쯤 되는 ‘이 만’은 현 세대에 의해서 테이블 베이(Table Bay)라고 명명되었다. 높은 언덕 때문에 위쪽에는 마치 테이블(Table)처럼 편평한 사각형 모양이고9)바다쪽으로 9-10 마일 정도 거리이다. 또한 재정비하러 그 곳으로 오는 배는 보통 그것 아래쪽 길까지 온다. 이 만은 모든 배들이 정박하는데 매우 편리하였다. 왜냐하면 매우 안 좋은 날씨와 폭풍우 없이 4 패덤(fathom ; 1 패덤은 6피트 약1.83m)정도까지 육지에 가까이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에서 반 마일 정도 떨어진 희망봉의 동쪽으로는 강어귀나 강가가 있는데, 그곳에서 잉어 같은 모양의 아주 맛있는 물고기를 잡았다. 10월, 11월, 12월에 이러한 계절에는 이 해변을 따라서 네덜란드에 북동풍처럼 매섭고 차가운 남풍이 불어온다.

 

 

‘희망봉은 지중해성 기후로 매우 다양한 문화와 집단을 형성하고 농작물을 생산하는 방식에서 유리한 조건이었다. 비록 산지가 많고 언덕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또한 매우 아름다운 계곡이 매력적이다. 사슴과 노루가 풀을 먹고 있고 그 수는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언덕에서 흘러 내려오는 깨끗한 물을 아주 좋아한다. 소와 양 같은 동물들 또한 마찬가지로..... 희망봉의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은 뮬라토(mulattoes) 같은 누런빛의 색을 띄고 있고 얼굴은 매우 못 생겼으며 키는 중간쯤 되고, 몸은 여위었고 날씬했으며 달리기를 매우 잘 하였다. 칠면조와 같이 혀를 차면서 매우 이상한 말을 하였다. 그들은 사슴이나 다른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꽤 격려가 되는 보고서임에도 불구하고 50년 이상동안 희망봉에 그 어떤 이주자들이 재정비 장소를 설립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 장소가 우연이라도 선정되지도 못하였다.

 

 

2. 하를렘(Haerlem)이 좌초하다

 

동인도 선박인 하를렘(Haerlem)은 1646년 12월 22일에 쉬에담(Schiedam)회사가 있는 바타비아(Batavia)로 항해를 하였고 1647년 3월 22일 테이블 베이(Table Bay)에 처음 도착하였다. 그 배의 선원인 린데르트 잔스젠(Leendert janszen)의 일기에서, 3일 후에 재난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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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 타운(Cape Town)과 희망봉 이야기

2012. 7. 17. 22:14

 

 

케이프 타운(Cape Town)과 희망봉 이야기

 

 

 

희망봉(Cape Town)은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땅 남아공화국이 백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88년 바돌로뮤 디아즈(Bartholomew Diaz) 휘하의 포르투갈 탐험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디아즈는 1488년 희망봉을 크게 돌아 알 수 없는 바람에 이끌려 현재의 모슬 베이(Mossel Bay)에 최초로 발을 디뎠으며 식수를 구하는 과정에서 코이코이족과 조우하였다. 1488년 한여름에 그레이트 피쉬(Great Fish)강에 도달했으며 돌아오는 과정에서 최초로 케이프를 보았다. 디아즈는 이 지역을 Tormentoso(The Cape of Storms)라고 이름 지었다. 후에 포루투칼 왕 João는 Boa Esperança(Good Hope)로 이름지었다. 즉 디아즈는 이곳이 아프리카의 끝이라고 확신하고 이곳을 돌면 인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9년 후인 1497년에 유명한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케이프를 바로 돌아 현재의 나탈(Natal, 그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성탄절이었고 다 가마가 이름지었다)까지 이르렀고 동아프리카의 몸바사(Mombasa)와 말린디(Malindi)를  거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 한 후 꼭 1년만에 포루투칼로 돌아왔다. 1500년 Pedro Cabral은 부라질(Brazil)에 기착한 후 케이프를 돌아 동아프리카를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확고히 열고 포루투칼의 독점시대를 열었다.

 

 

1647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The Dutch East India Company)소속의 범선 하를렘(Haarlem)호가 테이블 만에서 난파되어 선원들이 약 6개월 동안 원주민들과 교류하며 생존하다가 1649년 본국에 귀환한 후 이곳이 기항소의 설치 및 유럽인들의 정착에 최적지라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러한 보고에 따라 이 지역에 백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1652년 동인도회사가 인도 항로의 중간 정박 기지(기항지 ; revictualling station) 건설을 목적으로,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k)가 이끄는 3척의 배와, 130명의 남녀로 구성된 탐험대가 1652년 6월 4일 테이블만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모두 이 회사의 피고용인들이었으나 차츰 회사로부터 독립해 목축과 영농으로 경제력을 키워 나갔다. 이들은 지금의 케이프 타운(Cape Town)근처에 백인 사회를 건설했다.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의 해안 지대에는 주로 두 부족의 흑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코이코이(Khoikhoi) 또는 호텐토트(Hotentot)라 불린 부족은 주로 목축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부쉬맨(Bushman)으로 불리는 산(san)족은 수렵과 채집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초기에 백인들과 흑인들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에서 물물교환을 했으나 차츰 목축지를 놓고 대립하는 관계로 변해 갔다. 특히 보어(Boer)인들로 불린 네덜란드계 백인사회가 점점 더 내륙으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이주민과 원주민사이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희망봉이 위치한 케이프 타운은 지중해성 기후로 아주 쾌적한 기후를 가지고 있으나 겨울에는 강우량이 많고 특히 폭풍우가 심하다. 케이프 타운을 끼고 있는 케이프 반도의 해안가의 나무들은 항상 겨울 폭풍우로 아름드리 나무들도 항상 비스듬히 누워있다. 겨울에 폭풍우가 칠 때는 사람도 실려나갈 정도이다. 항상 두얼굴의 모습이고나 할까.

 

 

 


타이타닉호 : 영국 화이트스타사(社)가 건조한 대형 호화여객선.

 

톤수 46,328t. 길이 259.08m. 너비 28.19m. 깊이 19.66m. 1911년에 제작되었다. 주기(主機)는 터빈의 삼연성기기(三連成汽機)의 조립으로 된 기관이다. 삼축선(三軸船)으로 속력은 22kn이며, 당시에는 4만t급 이상의 객선의 개척선이었다. 영국 사우샘프턴항(港)에서 뉴욕항으로 향하는 처녀항해 중,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부류빙산(浮流氷山)과 충돌하여 2시간 40분 만에 침몰하였다. 이 사고로 승선자 2,208명 중 1,513명의 희생자를 내어 세계를 놀라게 한 사상 최대의 해난사고였다. 이 사고를 계기로 배의 구조 ․구명설비 ․무선설비 ․유빙감시(流氷監視)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해상의 인명안전에 관한 국제회의가 소집되어, 해난사고방지를 위한 국제적인 결정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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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 타운(Cape Town)

2012. 7. 17. 22:13

 


케이프 타운(Cape Town)

 

 

 

인도양의 감미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2월 어느날 케이프 타운은 제일먼저 신비로운 자태를 보여주며 나에게 다가왔다. 푸른 하늘과 바다를 사이로 테이블 마운틴(Table Mountain)에 하얀 구름이 신비롭다 못해 성스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이 구름을 케이프 타운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악마(Devil)와 성 피터(St Peter)가 카드를 하면서 피우는 파이프 연기에서 온 것이라는 전설을 전해주었다. 정말 그냥 산에 구름이 덮이는 것이 아니라 테이블 마운틴을 타고 올라와서 평평한 정상을 바닥을 기어가 덮더니 그 끝에서는 다시 타고 뚝 떨어져서 마치 테이블 보를 얹어놓은 것은 모습을 연출한다. 분명히 신이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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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름을 가져오는 바람은 ‘케이프 닥터(Cape Doctor)’로 이곳 사람들에게 불리어진다. 이 바람은 해충은 물론 먼지나 공중에 날려 다니는 오염물질들을 날려버리기 때문에 건강을 가져다 주는 바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1월부터 3월까지 부는 바람은 대체로 아침에는 잔잔하다가 오후에 격렬하게 불어오는데 어떤 날은 시속 120km정도가 될 때도 있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테이블 마운틴에 오르는 길에 서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비스듬이 누워있었던 것이다.

 

봄에 해당하는 8월부터 10월 사이에는 케이프 반도는 온갖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난다. 유명한 크리스텐보쉬(Kirstenbosch) 식물원과 희망봉 자연보호구는 그야말로 꽃속에 파 묻힌다. 이 시기는 청명하고 밝고 건조한 날씨가 이어진다. 3월부터 5월에 속하는 가을은 가장 유혹적인 계절이다. 남동풍은 잠잠하고 바다는 여전히 따뜻하며 과일은 달고 맛있게 익어간다. 꽃은 져서 아쉽지만 낙엽들은 온갖 색으로 단풍이 든다. 겨울은 녹색과 신선함으로 대비된다. 프르티아(Protea) 꽃들은 꽃을 피우고 비와 북서풍이 분다. 마치 스파클링 와인처럼 청명하고 쌀쌀한 날씨는 케이프 타운의 또 다른 모습이다. 테이블 마운틴을 비롯한 드라켄스버그 산맥에 하얗게 쌓인 눈은 녹색의 땅과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밤에 사자의 엉덩이라 불리는 시그널 힐(Signal Hill)에서 달콤한 와인 한잔을 음미하며 바라보는 케이프 타운의 모습은 그 아름다움과 편안함으로 숨이 막히고 모든 것이 망각되는 도시였다. 하늘의 별빛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불빛이 청정한 공기덕분에 별처럼 반짝였다. 왜 백인들이 그토록 인종차별정책을 가혹하게 펼치면서까지 흑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였는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라도 절대로 내주고싶지 않은 곳이었다!

 

 


케이프 타운은 1652년 4월 6일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ck)에 의해 세워졌다. 이곳은 폭퐁우를 피해 인도로 가는 항로에 필수적인 전략적 거점으로 물을 비롯한 고기, 신선한 야채, 과일 그리고 포도주를 보급 받을 수 있었으며 파손된 배를 수리하고 병든 선원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 그는 남아프리카역사에서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역사책을 펼치면 판 리비어크와 그의 부인 마리아(Maria)의 사진을 책이 시작하는 처음 쪽에서 만나 볼 수 있으며 남아공의 거의 모든 도시에 교회거리(Church street)와 함께 판 리비어크 거리를 만날 수 있다.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땅 남아공화국이 백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88년 바돌로뮤 디아즈(Bartholomew Diaz) 휘하의 포르투갈 탐험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케이프 타운이 쉽게 포루투칼인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은 유명한 유령선 전설(Flying Dutchman)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바람이 세고 폭풍이 심했기 때문이다. 이 전설은 바람이 심하게 몰아쳐서 대서양의 파도가 높게 해안의 바위를 들이칠 때 희망봉의 유령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배는 마스트가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서 바람에 휘날리며 케이프 주위를 영원히 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포루투칼 왕 주앙(João)이 그 이름이 나쁘다 하여 희망봉(Boa Esperança ; Good Hope)으로 이름지었다. 즉 디아즈는 이곳이 아프리카의 끝이라고 확신하고 이곳을 돌면 인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이름에서부터 케이프 타운은 아이러니 하다. 고통과 절망대신 희망이라니.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의 해안 지대에는 주로 코이산어족에 속하는 산(San)족과 코이코이(Khoikhoi)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노란색 피부와 작은 키 그리고 단음절의 흡기음(吸氣音, staccato click sound)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산족은 수렵채집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코이코이족은 주로 양과 소를 기르는 유목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친구로 친하게 지냈던 산족의 후예인 올리버(Oliver)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하에서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해야 했으며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나 정체성은 사라졌다고 그리고 그 누구도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단지 내 어깨를 조금 넘는 작은 키와 노란색 피부, 그리고 ‘딸깍딸깍’하는 흡기음의 소리와 항상 웃는 모습이 그나마 특징적일 뿐. 흑인정부로 바뀐 이후 이들이 사는 지역을 보호구로 지정하고 관광자원화 시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백인들이 명명해준 ‘흡기음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호텐토트’라는 이름대신 ‘사람중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코이코이’라는 그들 고유의 이름을 찾는데 무려 몇 백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말이다.

 

케이프 타운 대학교 교정에서 우연히 만나 남아공의 정치, 역사, 문화등 열띤 격론을 벌였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안드리스(Andries)와 존(John)은 굳이 따지자면 각각 아프리카너와 영국계에 가깝지만 비교적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모든 상황은 백인 이주자들의 욕심과 영국계와 아프리카너계의 분열속에서 ‘인종차별’이라는 악마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795년 나폴레옹이 해군을 강화함에 따라 케이프 타운은 무역루트로서 아주 중요하다는 전략적 인식하에 영국은 케이프 타운을 잠시동안 지배하였으나 1806년 다시 악화된 프랑스의 세력을 막고 케이프 식민지를 통한 인도와의 귀중한 해상 무역 루트의 장애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케이프 타운을 침략하여 이주사회를 건설해나가면서 이미 이주하여 정착하고 있던 네덜란드 후예들과 경쟁하기 시작한다. 

 

이후 케이프 영국총독은 케이프 아프리카너(Cape Afrikaner)로 불리는 이들을 영국의 통치하에 두고 싶어하였다. 이때까지 부유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던 이들은 영국의 통치를 받아들이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가난한 많은 아프리카너들은 영국의 통치와 압제를 벗어나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우마차를 타고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내륙으로 대이주(Great Treck)을 시작하게 되었고 영국은 자동적으로 반투계 선주민들과 일련의 전쟁에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반면 케이프 타운 항구는 이 시기부터 유럽과 인도로부터 들어오는 화물과 병력과 전쟁물자가 많아지게 됨에 따라 '바다의 선술집(Tavern of the Seas)'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다.

 

영국의 침략과정은 먼저 이주하였던 아프리카너 백인들의 분노를 살 수 밖에 없었고 대이주의 과정속에서 민족주의에 근거한 인종차별이라는 방어정신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기는 내가 유학하면서 만난 판 스칼베이크(Van Schalkwyk) 할머니는 지금도 영국의 파이프 잭 소리를 들으면 얼굴을 붉히시면서 앙골로-보어전쟁동안 영국이 어떻게 집단수용소에서 비인간적으로 아프리카너 백인들을 다루었는지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조부와 가족들도 그곳에서 돌아가셨다며 영원히 잊지 못한다고 설명하셨다. 영국인들은 케이프 타운을 침략했고 아프리카너 백인들을 미지의 내륙지방으로 내몰았으며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종국에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가져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남아공의 국가건설과정에서도 영국계 백인들은 기회주의적으로 ‘더러운 일’에는 관여하려하지 않으면서 편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결국 백인들의 적대적 감정이 지금의 남아공을 만든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백인 아프리카너들의 고통 못지 않게 선주민이었던 흑인들은 박탈감과 상실감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아왔다. 케이프 타운 외곽에 있는 흑인 슬럼가에 가서 본 그들의 세상은 ‘흑인들의 신’은 없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흑인정권이 들어온 이후 전기와 공동수도가 들어왔고 일부에서는 공동주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집들은 집이라기 보다는 세상에 구할 수 있는 모든 재료로 만들어진 오두막이었다. 심지어 어떤 집은 도로에 세워져 있던 도로표지판을 잘라다 지붕의 한쪽 끝을 막고 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케이프 타운에 천국과 지옥이 같이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다른 지역보다는 상황이 나은 편이지만 케이프 타운도 치안문제가 항상 이슈다. 내가 묵었던 크루거(Kruger)할아버지 내외의 집 앞뒤 정문의 초인종들이 도난 당했는데 흑인들이 떼어갔다고 추정하셨다. 할말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매일의 일과란다. 집집마다 이중문과 쇠창살로 막혀서 마치 집이 알 카트라즈의 감옥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가구는 물론이고 전화기, 냉동고, 냉장고에도 열쇠가 달려있고 자동차는 핸들, 기어, 전자잠금장치등 2중 3중으로 열쇠를 잠근다. 내가 그곳 크루거 할아버지에게 한마디로 남아공은 ‘열쇠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씁씁히 웃기만 하셨다.

 

도둑을 방지하기 위해 백인가정들은 개를 키우고 있는데 물론 흑인들을 절대 접근하지 못하도록 개에게 교육을 시키기도 하겠지만 습성이지 흑인들만 지나가면 사납게 짖는다. 신기한 것은 길거리 지나가는 흑인과 백인에 대한 구분을 정확하게 하기 때문에 백인이 지나가면 절대 짖지 않다가도 흑인이 지나가면 문에 달려들면서 까지 짖는다는 것이다. 개도 인종차별을 하는 것인가?

 

 

롱 스트리트(Long street)에서 만난 피나르(Pienaar)라는 백인거지는 정말 묘한 감정을 일으켰다. 어떻게 백인이 거지노릇을 한단 말인가! 인종차별이 법으로 존재하던 시대에는 ‘거지 백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케이프 타운 시내 곳곳에서 백인거지들을 만날 수 있다. 그래도 아직은 과거의 품위를 지키면서 부부 동반으로 개를 데리고 ‘오손도손’ 구걸을 하기도 한다. 흑인정부에서는 공직에서 인종비율에 따른 채용을 법으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백인들이 점차 직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해 백인들은 동병상련으로 비교적 호의적으로 도와준다. 그러나 흑인 어린아이들이 구걸을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돈을 주지 말라고 하고 자신들도 인색하다. 흑인들은 마약이나 술을 먹는다고. 그런데 왜 그런지 구걸하는 흑인들은 별로 불쌍해보이지 않는데 백인들은 불쌍해 보이는 것을 숨길 수 없다. 아프리카에서 백인 거지를 만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백인은 우월하다는 의식이 머릿속에 잠재되어 그러는 것인지. 이것은 정말 아이러니다. 이제 백인들도 과거의 인종차별을 통해서 얻었던 특권과 혜택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으며 변화의 물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과거보다 더 열심히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며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데 되었다.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메릴 영(Meril Young)은 케이프 타운은 불쾌하고 암울했던 역사의 짐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설명하며 그 중심에 칼라드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99년 총선에서도 보여준 것처럼 더 이상 케이프 타운에 살고 있는 칼러드들은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지만 인종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최근에 생겨난 하나의 ‘새로운 인종’으로서 칼라드들은 그들의 민족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인종적 특징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개방적이며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케이프 타운에 피는 다양한 프르티아 꽃 색처럼 이제 케이프 타운의 사람들은 다양한 인종의 색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들의 모습을 칼러드들속에서 만나고 있다.

 

케이프 타운의 아름다움과 어우러진 다양한 인종들의 문화적 모습, 그리고 지리적인 특수성은 케이프 타운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케이프타운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경제적 수준을 떠나서 그들이 살고 있는 케이프 타운을 사랑하며 남아프리카공화국과는 다른 곳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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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 -로벤섬(Robben Island) -

2012. 7. 17. 22:11

 

 

천국과 지옥 -로벤섬(Robben  Island) -

 

 

 

정말 저게 로벤섬일까? 가장 아름답다는 케이프 타운 앞에 있는 이 섬이 넬슨 만델라가 27년 동안 감금되어 있던 곳이었을까? 가장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은 함께하고 천국과 지옥도 함께 있다는 말이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다.

 

로벤 섬(Robben Island)은 테이블 만(Table Bay)의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만 섬으로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물개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서 ‘물개 섬'이라는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해발고도가 30미터밖에 되지 않는 1마름모꼴의 낮은 섬으로 주로 바위와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케이프 타운에서 불과 11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수영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곳이다. 로벤섬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정책에 저항한 민주투사들을 수용하였던 지역으로 아공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하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지역이다.

 

테이블 만의 ‘지옥의 입구’ 또는 남아공의 알카트라즈로 불리는 이곳은 민주주의 투사들에게는 식민주의, 불평등, 그리고 압제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프레토리아 정부는 저항을 하던 민주투사들에게 ‘완전한 추방’이라는 카드를 휘두를 수 있는 안전한 곳이었다. 반아파르트헤이트자들에게  정부는 언제나

바톨레메우 디아즈가 케이프 타운을 돌았던 1488년 이후 약 2년간은 로벤섬은 항해하는 배와 선원들을 위한 식료품 저장소로 이용되었고 편지를 보내는 우체국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며 규율을 어긴 선원들을 감금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네덜란드 통치기(1652-1806)에 들어와 위의 용도로 계속 사용되고 있었지만 케이프의 죄수들과 인도, 말레이시아, 그리고 인도네시아로부터 끌려온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교도소로 더 중요하게 이용되게 되었다. 이 기간에 석회석과 건축을 위한 석판을 채굴함으로서 섬에서 상업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1806년 이후 영국의 지배 하에서 섬은 다시 감옥을 사용되었고 추방자들, 위험한 범죄자들, 그리고 국경전쟁에서 잡힌 정치범을 수용하였다. 또한 정신병자나 격리되어야 할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수용되었다.

 

그러나 1846년 로벤섬 교도소는 폐쇠되었고 수감되었던 죄수들은 모두 육지로 보내져 강제노역에 종사하게 하였다. 식민정부는 이곳에 병원(General Infirmary)을 개설하고 만성병 환자, 정신이상자, 그리고 나병환자를 수용하였으나 1891년, 1921년, 그리고 1931년 각각 폐쇠하였다. 19세기에 병원으로 주로 로벤섬이 활용되었지만 동부와 북부 식민지의 국경전쟁에서 잡힌 소규모의 정치범이 수용되었다. 1866년 이후 강제노역에 처해진 사람들이 병원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1931년 마지막 나병환자가 로벤섬을 떠난 후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군인들이 테이블 만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될 때까지 비어있었다. 전쟁후에는 남아공 해군이 로벤섬을 관할 했으나 1959년에 법무부(Prisons Department)로 이관되었고 1961년부터 1991년까지 로벤섬은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에 따르지 않는 정치범과 민주화 인물을 수용하는 악명높은 곳이 되었다.

 

 


현재 로벤섬은 평화롭다. 남아공 정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곳을 관광자원화 시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고 있다. 넬슨 만델라가 수감되었던 감옥에는 그의 수감동료 - 만델라와 함께 수감되었던 사람들 중에 가장 출세하지 못한 사람 - 가 만델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항상 친구를 위해 희생할 줄 알았다고, 겸손하고 친절하였다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넬슨 만델라, 제파니아 모토펭(Zephania Mothopeng), 고반 음베키(Govan Mbeki), 코이(Khoi)족의 지도자였던 오츠마토(Autshumato), 코사족의 지도자였던 은셀레(Nxele)와 마코마(Maqoma) 같은 정치범 뿐만 아니라 병원에 수감되었던 환자와 일반죄수들도 원하지 않던 이곳의 ‘주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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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아노스(Oceanos) :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2012. 7. 17. 22:10

 

 

오세아노스(Oceanos) :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많은 사람들은 과실, 악천후, 무능력 또는 이 모든 요인의 결합으로 인해 바다에서 목숨을 잃곤 한다. 하지만 역사책은 배가 가라앉는 동안 선장과 선원들이 행동한 영웅적 행위와 용감성을 기록하고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런 대부분의 경우에 침몰선의 선원은 위험한 순간에 위대한 용기와 희생을 보여준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1991년 8월에 남아공의 이스트 런던(East London)근처에서 침몰한 그리스의 여객선 오세아노스(Oceanos)는 이런 훌륭한 전통에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침목의 순간에서, 죽음 앞에서 용기를 보여준 것은 선장과 선원이 아니라 승객들 자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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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오세아노스는 1952년에 건조되었고 진 라보르도(Jean Laborde), 마이키나이(Mykinai), 아스코나(Ascona) 그리고 이스턴 프린세스(Eastern Princess)라는 이름으로 항해를 하였다. 오세아노스라는 이름을 1978년에 명명되어졌고 그리스의 Epirotiki Steamship & Navigation Company of Piraeus라는 회사에 소속되었다.

 

1991년에 남아공의 여행사인 TFC가 이 배를 전세 내어 사용하게 됨에 따라 이 배는 남아공 근해를 항해하고 있었다. 1991년 8월 3일 토요일 저녁 7시쯤 오세아노스는 선장 야니스 아바란스(Yannis Avranas)의 지휘아래 374명의 승객과 180명의 선원 그리고 26명의 TFC 승무원 등 총 580명을 싣고 이스트 런던을 떠나 더반(Durban)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오세아노스는 밤을 새워 항해하여 다음날 아침 7시에 더반에 도착할 예정이었고 배안에서는 “독한 술 항해(booze cruise)"라고 불리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아주 좋지 않아 바다는 거친 폭풍우가 치고 강한 바람이 시속 140킬로미터로 불고 있었으며 파도는 8미터 높이나 되었다.

 

항구를 떠난지 4시간 30분 만에, 오세아노스는 첫 SOS 요청을 보냈다. 배는 근해에 좌초되어 우현이 기울어져 있었고 엔진실은 물에 잠기고 있었다. 육지에서 조난 요청을 받은 후에 즉시, 그 지역을 지나고 있던 세척의 상선에 조난신호를 보내서 오세아노스를 구조하러 가도록 하였고 더반에서는 예인선을 포함한 세 척의 배를 출항시켰다. 또한 남아공 공군에게 경계경보가 발령되었고 헬리콥터 부대가 구조임무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라운지에서 카바레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cabaret  플로어 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저녁 9시 3분경에 처음으로 문제가 발생했다. 갑자기 불이 꺼지고 엔진의 시동이 꺼졌다. 오래지 않아, 배는 천천히 우현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승객들은 선체에 큰 구멍이 난 것이 알려졌고 곧 비상조치를 하여 구멍을 막았다. 그렇지만 곧 구명조끼가 건네졌다. 여객선의 매니저이며 행사 책임자인 로빈 보틀만(Robin Boltman)이 막 무대로 나가려 할 때 전원이 나갔다고 말했다.

 

“그 배는 비상등이 작동하기 전까지 완벽한 어둠 속에 있었다. 우리는 휴게실에 모든 승객들을 모았고 연예인들이 그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우리는 노래를 불렀고 농담을 했으며 악기를 연주했다. 우리는 승객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했다. 바닷물은 아래 갑판에 발목까지 차 올랐다. 우리는 휴게실에 승객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했고 TFC 여행사 대표 로라이네 벳츠(Lorraine Betts)와 나는 승객들을 위한 약품과 같은 필요한 물품을 가지러 아래로 내려갔다.

 

“배는 우현으로 더 가파르게 기울어졌고 새벽 2시에 우리는 구명보트를 내리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배가 심하게 기울어서 단지 2 척의 구명보트만 내릴 수 있었다.”고 그가 말했다.

 

이 보트는 어린이들과 노약자들이 타고 있었고, 한 승객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어떤 선원은 “구명보트로 인한 소란 속에 여자와 어린이들을 옆으로 밀쳤다” 보트가 출발하고 오래지 않아, 로빈 보틀만은 선교에 올라갔지만 선교는 텅 빈채로 버려져 있었고 이미 시작된 해군과 공군의 구조작업팀에 겨우 연락을 취했다.

 

 

배가 점점 바다 속으로 깊이 가라앉으면서 이것은 끔찍한 밤이었다. “그날 밤 내내 우리는 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잡고 매달려 있었다.” 승객 중 한 사람인  코체(Kotze)씨가 말했다. “배가 갑자기 기울기 시작하자, 우리는 서로 넘어졌고 물건들은 서로 부딫히며 충돌했다. 완전한 공포로 가득한 오랜 밤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놀랍게도 침착했다. 아무도 울거나 소리치거나 이성을 잃지 않았다.”고 그가 말했다.

 

코체씨는 “끔찍했다. 완전히 지옥이었다. 영화 포세이돈의 한 장면처럼. 갑판은 그런 무서운 장면으로 가득했고 나는 목숨을 구하고자 난간에 매달렸다.

 

처음으로 도착한 비행기는 새벽 5시에 워터클루어프(Waterkloof) 공군기지에서 나온 C160 수송기였으며 배를 선회하였다. 여전히 어둠뿐이었고, 배가 놀랍게도 전복되어 있었지만 오세아노스의 갑판의 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좌초된 배 주위를 순회하는 것은 수많은 상선들이었고 그 배들이 비춘 탐조등이 거친 파도 위의 좌초된 배를 비추고 있었다.

 

 


아침 7시 30분, C160은 여전히 침몰한 배 주위를 순회하였고 11대의 퓨마(puma) 헬리콥터와 두 대의 알호우터(Alhouette) 헬리콥터 그리고 두 대의 다코타스(Dakotas)는 더반의 아이스터플랏(Ysterplaat)과 스와르트콥스(Swartkops) 공군기지에서 도착하였다. 이때까지 오세아노스는 뱃머리가 침수되고 있었고 여전히 배에 승선한 남은 사람들은 갑판 뒤쪽에 기어 올라가 있었다. 또 다른 승객들은 구명보트에 간신히 올라탔고, 배 전복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어떤 사람은 물에 뛰어 들기도 했다. 헬리콥터가 도착하기 전 배를 단념했던 사람들은 그 지역을 항해하는 다섯 척의 상선에 의해 구조되었고, 풍속 35노트의 강풍이 부는 어려운 상황에서 헬리콥터는 침몰선에서 좀 떨어져 승객들을 한 사람씩 구조하기 시작했다. 선장 아바라나스는 첫 번째 구조 헬리콥터에 앉기를 요청했다. 그는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육지에서 좀 더 효과적인 구조작업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말할 필요도 없어, 그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승객 중 한 명인 존 힉클린은 나중에 선장이 대다수의 선원들보다 더 오래 배에 머물렀지만 그는 아주 재빨리 사라졌다고 회상했다. 승객들이 선교로 가도록 요청했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구명보트가 떠나려 할때 선장은 그 배에 타서 감독하겠다고 했었는데 나중에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며 선원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라고 말했다.

 

실질적으로 선장과 선원에 의해 버려진 것은 오세아노스호 승객들은 지금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들에게는 승선한 TFC 직원들이 있었다.

 

 

“헬리콥터가 처음 도착했을 때, 벳츠(Betts)양이 수영장이 있는 갑판에서 승객들을 돌보는 동안 나는 선교에 머물러 있었다.” 보틀만은 설명했다. “크로스토크(Crosstalk)밴드 출신인 크리스토퍼 모스 힐스(Christopher Moss Hills)는 헬리콥터에 오르는 사람들을 도왔다. 반면에 배의 마술사인 쥴리안(Julian)과 몇몇 친구들은 배의 고무보트를 내렸고 오세아노스호를 순회하면서 구명보트에 다가가기 위해 바다 속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을 구조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하였다.

 

배에 더 이상 승객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 보틀만은 그 날 아침 11시 30분쯤에 배를 마지막으로 떠났다. 이때까지, 배는 바다 속에 더 깊이 가라앉았고, 파도로 인해 가구들은 물 속으로 쓸려갔다. 해군은 실종되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찾기 위해 다이버들을 보냈다. 배는 2시간 후에 완전히 가라앉았다.

 

 

오세아노스호로부터 구조된  219명은 이스턴 케이프의 트란스케이 해안으로 알려진 커피만(Coffe Bay)의 헤븐 호텔(Heven Hotel)에 처음 머물렀다. 그곳에서 이스트 런던으로 옮겨진 그들은 걱정하는 친구들과 가족들을 만났다. TFC 관계자들은 또한 숙박시설과 옷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비행기를 준비하려고 요하네스버그에서 이스트 런던으로 급파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비판하든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선장 아바라나스는 후에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나는 다른 배에 의해 구조되었던 내 가족과 헤어졌고 내 배를 잃어버렸다. 나에게 더 이상 무엇을 원하는가?”

 

오세아노스호 침몰에 관한 조사가 1년 후에 아테네에서 열렸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한 않은 선장을 비롯한 4명의 고위직 선원들에 대해 책임을 물었다. 특히 그들은 전력실에 물이 차는 것을 막는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 문책하였다.

 

이미 삼백만 랜드를 지불했고 여전히 백만 랜드 정도의 부채가 남아 있는 TFC 여행사는 조사 위원회가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부채청산작업하에 들어가 있었다. TFC는 담당 변호사를 통해 조사된 보고서에 따라 그리스의 선박회사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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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위대한 지도자,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2012. 7. 17. 22:08

 

 

아프리카의 위대한 지도자,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트란스케이(Transkei) 인근 템부(Thembu)지역에서 마디바(Madiba)족으로 태어났다. 지금의 이름은 학교 선생님이 그에게 영어식 이름을 지어 주어 갖게 된 것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는 고문회의 의장이었으며 만델라가 아홉살이 나던 해에 사망했다.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된 일종의 로열티가 나중에는 만델라가 정치적 행동을 하는 데에 중요한 후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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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 이후 만델라는 국회의장 혹은 군주의 후견아래 만델라는 현직으로 출마하기도 했던 만델라는 그 이후 조국의 안위를 위해 투쟁하며 그의 종족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하기 시작했다.

 

기본교육을 마친 만델라는 힐타운(Healdtown)에 있는 감리교 대학에 입학하고 그 다음에는 포트하레(Fort Hare) 대학에 입학하여 문학사 과정을 밟았다. 학생대표 등을 맡고 있던 만델라는 결국 학교로부터 저항모임 등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의심을 받게 되었고, 요하네스버그로 교환학생으로 보내졌다. 결국 남아프리카 대학에서 첫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결국 그의 이러한 경험은 1943년에 이르러 아프리카회의 청년연맹(Youth League of the african National Congress)에 창립자로 활동하면서, 비트바터르스란트(Witwatersrand)대학에서 법률공부를 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즈음에 나중에는 정치적 동지이자 최고의 친구가 되는 올리버 탐보(Oliver Tambo)와 월터 시술루(Walter Sisulu)를 만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시기에 만델라는 의지가 굳은 동지들과 힘을 모아 Anton Lembede의 지휘아래 뭉치게 되었다. 물론 그 속에는 그의 소중한 친구들이었던 William Nkomo나 시술루, 탐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60명으로 시작한 이들 모임은 아프리카 회의를 전 지역적인 운동으로 전환하는 임무와 그 운동의 힘을 추출해 내고 대규모의 사람들을 선동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했었다.

 

이 활동을 기반으로 만델라는 1943년에 아프리카회의 청년연맹을 창립하고 이듬해 1944년 Evelyn Mase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1957년이 되어서는 이혼하게 된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두었다.

 

아프리카회의 청년연맹으로 통해 본격적으로 정치적 행보를 시작한 만델라는 아프리카회의 청년연맹의 서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고, 그 덕분에 아프리카회의로부터 전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에는 탐보와 함께 흑백차별의 논리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대항하며 본격적인 항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아파르트하이트의 초기였던 1948년 선거에서 국가당(National party)이 압승을 하게 되자 만델라는 이듬해 청년회의에서 행동노선을 채택하여 보이콧, 파업 불복종과 비협력을 무기로 채택하여 적극적으로 대항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아프리카회의에 의해서도 이 노선이 전격적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1950년의 청년회의 노선으로 전시민권의 부여와 직접선거로 이루어지는 국회 대표제를 정한 만델라는 토지의 재부분배와 노동쟁의의 권리, 교육, 문화 부문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교육에 있어서 만델라는 모든 아이들의 교육뿐만 아니라 성인교육에 이르기까지 보장되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1952년 아프리카 연맹이 정당하지 못한 법률을 무시하자는 캠페인이 준비되었고, 이는 전시민적인 불복종 캠페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만델라는 이 과정에서 자원하여 앞장서 이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그는 일반인을 이끌어야 할 자원자로서 책임 다해야 함을 각성하고, 차별법안에 대한 저항운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 전 국토를 누볐다. 만델라는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감옥행을 선고받았고, 집회에 참가가 금지됨은 물론 요하네스버그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거주제한까지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만델라는 탐보와 함께 법률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가 법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파르트하이트, 차별적인 법률에 대한 저항을 위한 중요한 밑거름을 쌓는 기회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였다. 탐보와 함께 성공적으로 1952년 법률가로서의 인증을 받은 만델라의 정치적 행보는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법률가로서의 그들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법률가 자격증은 아파르트하이트로부터의 면죄부는 되지 못했다. 차별법의 부당함에 대해 뼈저리게 느낀 이들에게 당국은 그들의 변호사 사무소를 사람들이 일과 시간에 찾아 올 수 있는 거리보다 훨씬 먼 곳에 열 것을 명령한 것이다. 마치 변호사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라는 말과도 다름없는 이 말을 이 두 사람은 무시해 버렸다. 결국 만델라는 변호사직을 박탈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물러날 만델라는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꾸준히 흑인 인종격리 정책에 대한 저항운동을 꾸준히 진행하였고, 공식적인 집회 없이도 저항운동의 리더쉽을 긴밀하여 유지할 수 있는 조직적 계획을 맡아 진행해 나가기도 했다. 지방과 지역적인 힘까지 모아 저항운동을 하나의 큰 물결로 이끌어 내고자 했던 이 계획은 만델라 이후에는 M-plan이라 명명되었다.

 

 

1956년에 국가 중요 반역죄로 기소되고 4년 뒤에 다시 이 소송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있었고, 그러는 와중에도 1958년에 통과된 흑인들이 일하고 거주하는 지역을 구체적으로 명령으로 정하는 Pass Law에 대항하여 꾸준히 저항운동을 계속하는 등 그의 자유에 대한 열망에서 우러러 나오는 행동은 중년에 접어든 나이에도 식을 줄을 몰랐다. 그가 만 40세가 되던 그해 만델라는 또 한 명의 반려자를 만나게 되는데, 후에 영부인이 되었다가 이제는 이혼한 Winnie Madikizela이다. 나중에 위니는 만델라 석방운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가장 절정이었던 만델라의 50년대 투쟁활동의 전반은 서구인 거주지연 이전과 반투 교육의 도입에 대한 저항을 이끌고, 1955년에 민중의회에 의해서 채택된 자유헌장의 보급하는 등의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50년대 후반에는 노동착취, 거주지분리 법안, 초기 흑인자치구역 정책에 대항한 저항운동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 중 흑인자치구역 정책에 관해서 만델라는 후일 이 법안에 의해 치밀한 계획에 의한 대규모 축출은 물론 정치적 박해와 공포정치가 실현될 것이라고 정확히 예견하기도 하였고 이에 대한 투쟁과 저항에 힘을 쏟았다.

 

 


결국 그는 50년대를 통찰해 볼 때, 억압적 정치제도와 법안에 의한 처저한 희생물이었다. 결국 그는 수배가 내려지고 체포되었고 수감되었다. 1952년과 1956년 두 차례에 걸쳐 체포된 바 있었던 그는 1960년 3월 샤프빌흑인학살사건을 계기로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지도하기에 이르고, 1962년 다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63~1964년 범죄혐의 추가로 다시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는 길고 긴 수감생활에 들어가야만 했다.

 

체포되기 전 그는 강제적으로 가족들로부터 격리된 생활을 하거나, 수사를 피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면서 까지도 끝까지 자유를 향한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범위를 좁혀 오는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가장복과 변장을 시도했고, 일반 노동자의 옷이나 운전기사로 변장하는 것은 다반사에 가까웠다.

 

그 때 즈음은 남아프리카 자유운동이 새로운 전환을 꾀하던 시기였고, 아프리카회의(ANC)는 좀더 차별화된 자유운동 기구를 구성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전환과 새로운 기구가 바로 평화시위운동에서 무장투쟁으로 가는 단계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즈음이 다른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이 더 이상 평화적인 방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깨달을 언저리였고, 만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결국 그는 체포된 것이다.

 

 

리보니아에서 열린 공판에서 만델라는 서슴없이 이를 밝히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Umkhonto we Siewe라 불리는 폭력 투쟁은 바로 평화적 저항 수단에 철저한 박해로써 대응했던 정부에 대한 최후의, 그리고 정당한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백인에 의해 조직된 사법부에 의해 전적으로 주관되는 재판에서 만델라는 스스로 자신의 변호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재판의 진행이 공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몇 번의 재판을 거듭한 뒤에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만델라는 경계가 삼엄하기로 악명높은 로벤섬 감옥으로 보내졌고, 그 곳에서 긴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감옥에서 도덕적 권위와 지도력을 바탕으로 수감자들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 노력하는 등의 살아 움직이는 실천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수감생활이 길어지고 감옥 밖의 탐보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의 석방운동으로 인해 만델라는 점점 인권운동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979년 옥중에서 자와할랄네루상(賞),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 국제상을 받기도 하여, 세계인권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1980년 망명해 있던 만델라의 친구 탐보가 만델라를 석방시키기 위한 국제적인 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하여, 국제사회는 결국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인종격리 정책에 대하여 혹독한 비판과 제재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국제적 압력은 결국 1990년에 이르러 드 클레르크 대통령으로 하여금 아프리카 회의에 대한 해금조치와 함께 만델라를 석방하게 만들고 만다. 마침내 아프리카회의는 그들이 그렇게 꿈꾸던 새로운 다인종 민주주의를 형성해 나가기 위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고, 만델라는 세상에 다시 자신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아프리카회의는 곧 만델라를 부의장으로 선출하고, 병든 탐보 대신 국회의장으로 다시 추대하게 된다. 만델라는 새로운 다인종 국가의 민주헌법의 제정을 위해 데 클레르크 총리와 긴밀한 협조와 관계를 유지해 가면서 평온한 사회로의 이행을 부단히 추구하였고, 그 결과  1993년에는 이 두 사람의 평화를 위한 노력이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1994년 4월에 실시되었던 대통령선거에서는 국민의 65%에 달하는 지지율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는 경이로운 득표율일 뿐만 아니라, 최초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역사적인 결과였다. 반세기에 이르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시대가 종식되고 남아프리카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총선에 의해 구성된 정부 역이 5년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통치하였고, 총선에서 5%이상의 지지율을 얻은 정당은 내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일궈낸 업적은 일일이 다 헤아리기는 어려울 듯 하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 공포에 질린 백인 세력에 대하여 포용정책을 먼저 실시했다. 화해와 용서, 민주화를 향한 ‘큰 정치’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다름 아닌 그의 포용정책에 그 근거를 둔다.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설치하고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저지른 범죄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으면 사면을 통해 용서하는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흑백간의 화합을 통한 국가적 통합을 이루려 노력했고, 심지어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입안자와도 만나 손을 잡는 등 화해와 용서의 맨 앞에 서서 뜻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면모는 한 나라의 경영인이 아니라, 아프리카 전체를 대변하는 정치가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하였다는 점이다. 「21세기 아프리카의 르네상스」를 부르짖고 나선 만델라의 정치적 위상은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어 갔다. 만델라는 국제무대에서 아프리카의 이익을 대변함은 물론 아프리카 내전을 중재하고 국가들간 경제협력을 주도하는 데에서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했다.

 

먼저 아프리카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도자로서 만델라는 97년 로커비 비행기 폭파사건과 관련하여 유엔의 봉쇄조치 하에 있던 리비아를 방문하여 서방세계에 향하여 봉쇄조치를 해제할 것을 촉구하고, 서방과 국제사회의 이익이 아프리카의 이익에 선행될 수 없음을 천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을 시발점으로 하여 로커비 비행기 폭파사건의 재판을 재 3국에서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공정한 재판을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희생자 가족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비행기 폭파사건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고 제 3국인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라도 재판이 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서방에 의한 기준 없는 국경분할과 종족간의 갈등으로 인한 아프리카내 국가들의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지역분쟁 문제를 서방에 의존하지 않고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해결함으로써 좀더 실질적인 해결책을 얻어 낼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종전의 해결방식과는 다른 평화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나이지리아 군사정부의 독재에 대한 국제적 비판여론을 조성하는가 하면 자이르 내전을 적극적으로 중재하여 모부투와 카빌라 두 명의 분쟁 지도자들을 30년만에 만날 수 있게 하였다. 비록 그의 이러한 노력은 표면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모부투가 군사적 충돌을 포기하고 망명을 택하는 등 평화적으로 결론이 지어져 기존의 목표는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프리카의 경제적 발전을 위한 노력은 기존 백인 세력이 이루어 놓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제력이 크게 힘이 되었다. 전 아프리카의 30%에 달하는 국민 총생산력을 지닌 남아아프리카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만델라는 각종 지역경제공동체 기구 창설에 앞장서게 된다. 특히 1979년에 창설된 남부아프리카 개발 공동체(SADC)에 의장에 부임하여 실질적인 활동을 주도하면서 유럽연합과 같은 자유무역지대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노력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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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꿈틀거림 - 아프리카 발전의 견인차 남아공 -

2012. 7. 17. 22:06

 

 

아프리카의 꿈틀거림 - 아프리카 발전의 견인차 남아공 -

 

 

 

필자는 지난 겨울방학 때 2 개월간 연구차 동남부 아프리카지역인 케냐, 탄자니아, 남아공, 짐바브웨, 그리고 나미비아를 돌아보았다. 개인적으로도 오지에 들어가서 연구를 수행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말라리아도 걸리는 등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만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방학 때마다 아프리카를 방문하지만 이번처럼 놀라움과 흥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제 더 이상 많은 사람들에게 아프리카는 여전히 반쯤 벌거벗은 이상한 복장을 하고 알 수 없는 주술을 행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아프리카(Primitive Africa)로 인식되거나 열대우림의 정글과 야생의 동물들이 살고 있는 야생의 아프리카(Wild Africa), 또는 발전되지 못하고 변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기아, 가난, 질병, 내전, 구데타, 부정부패 등 아프리카는 희망이 없는 비관주의(Afro-Pessimism)를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분명히 들었다.

 

동남부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지역이 정말로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케냐에서는 심야에도 버스가 밤을 새워 달리며 많은 사람들을 나이로비와 지방도시는 물론이고 국경을 넘어 이웃 탄자니와와 우간다까지 사람들과 물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탄자니아의 도시들은 하루가 다르게 정돈되고 질서가 잡혀가고 있으며 달라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짐바브웨는 지금 무가베 정권의 불안정으로 일시적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예외지만 남아공은 아프리카의 선진국으로 안정된 정치체제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나미비아의 카프리비(Caprivi) 지역은 과거에는 앙골라와의 국경지역으로 테러로 인해 접근도 불가능하였으나 이제는 누구나 다닐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보츠와나와 짐바브웨를 연결하는 루트가 열려있었다.

 

물론 이러한 이유를 21세기에 들어와 국제정세의 변화로 인해 아프리카도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발전,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개방경제로의 전환을 채택하고 있어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편입이 가속화됨으로서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만 제가 몸으로 느끼는 아프리카의 역동적 모습은 21세기에는 또 다른 위상을 갖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올해 4월 27일은 남아공이 민주화를 겪은 지 10년이 되는 해다. 이제 더 이상 남아공이 흑-흑-또는 흑-백간 인종갈등, 또는 경제적 격차를 해결하지 못하고 내전으로 발전되어 기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소리는 틀린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한 남아공 정부는 1999년 6월 2일 두 번째로 출범한 타보 음베키(Thabo Mbeki)의 지도아래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사회-경제적, 문화적 민주화 과정을 시도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이미 안정을 찾아 아프리카국가들 중 모범적인 발전국으로 비쳐지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남부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역에서 아프리카 경제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아주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cultural identity)을 가지고 있는 다인종․다문화사회의 특징을 살려 서로 화합하여 발전을 가속화 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의 10년간의 노력의 결과를 들어 10년 뒤의 미래를 보아달라고 하고 있다. 2010년 월드컵을 개최하는 남아공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남아공은 비즈니스 환경이 아주 좋은 나라다. 남아공에 대한  ‘아프리카의 성장과 기회를 위한 행동지침(AGOA)’을 활용해 무관세 수출을 할 수 있고, 이중과세를 금지해 기업 이윤의 회수가 자유로워 자본이동이 용이하다. 시장 개방에 적극적인데다 경제정책이 안정돼 있어 내국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사업을 할 수 있다.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가 100% 허용된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남아공에 대한 자원개발 산업진출 보다는 남아공을 기반으로 하여 주변 아프리카국가들 나아가 미국으로의 우회침투를 하는 것도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제는 남아공은 단지 하나의 시장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남부아프리카 나아가 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중요한 진출거점으로 인식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주변국들에 대한 자원개발산업 및 유통 제조업등을 컨소시엄형식으로 남아공과 함께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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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민족회의 (African National Congress : ANC)

2012. 7. 17. 22:05

 

 

아프리카민족회의 (African National Congress : ANC)

 

 

 

남아공 원주민 회의(South Africa Native Congress : SANNC)라는 이름으로 불룸폰테인(Bloemfontein)에서 1912년 1월에 설립된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 1923년에 명칭을 ANC로 변경함)는 오늘날 남아공에서 가장 오래된 정치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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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50년 동안 이 단체는 인종차별법에 반대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여 왔으며 1960년에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이로 인해 ANC는 약 30년 동안 망명하여 활동하거나 지하로 잠적하게 된다. 망명활동 중에서도 주로 자유를 위한 무장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기간 중 ANC의 회원자격이 백인과 비아프리카인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1990년에 ANC는 백인정부의 정식협상대상이 되었고 과거에 정치적 노선으로 채택했던 사회주의적 정책은 점차적으로 포기하게 되었다. 백인정부와의 협상결과 결국 ANC가 1994년 4월 선거로써 권력을 잡게 되었다. 

 

남아프리카 전쟁(South African War ; 1899-1902) 직후에 아프리카인들에 의해 많은 수의 주 아프리카인 회의(Provincial African Congress)가 잇달아 형성되었고, SANNC는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 (Union of South Africa)의 설립에 대응하여 나타났다. 이러한 작업의 시작은 젊은 해외 유학파 변호사들에 의해 가능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픽슬리 세메(Pixley Seme)였다. 초기에 ANC는 정부로의 청원을 가 치있게 여기고 아프리카인의 이익증진을 위한 압력집단으로써 ‘책임 있게’ 행동하는 아주 온건적인 조직이었다. 이들의 첫 번째 주요 관심사는 원주민 토지 법안(Native Land Bill)이었고 항의 대표단을 케이프 타운과 런던으로 보냈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또 다른 대표단이 1차 세계대전 직후에 페르사일레스(Versailles)와 런던으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짧은 기간 동안 트랜스발(Transvaal) 지부는 호전적인 정책을 채택했고, 1920년대 말에 새로운 의장인 조시아 구메데(Josiah Gumede)는 통행제도(Pass system)에 대해 더욱 저항적인 정책으로 전환하고자 노력하기도 했으나, 그는 1930년에 투표에 의해 의장자리에서 물러났다. 웨스턴 케이프(Western Cape)에서 ANC는 분열되었는데 ‘독립 ANC(Independent ANC)는 더욱 호전적인 노선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까지 운명은 ANC의 편에 서주지 않았다. 

 

 


슈마(A.B. Xuma)가 의장으로 있던 1940년대에 ANC는 민중 운동조직으로 변화․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전은 1944년에 포트 하레(Fort Hare) 졸업생들에 의해 결성된 ANC 청년연맹(ANC Youth League)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1948년 국민당(National Party)의 승리와 그리고 인종차별법인 아파르트헤이트(Aapartheid) 정책 채택 직후, 청년연맹(Youth League)은 1949년 투쟁의 새로운 방법이라 불리는 불매운동(boycotts)과 파업(strikes)과 시민 불복종을 포함하는 ‘행동 프로그램’(Programme of Acting)을 ANC가 채택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1952년 ANC는 그 회원이 2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증대시킨 저항 운동(Defiance Campaign)에 착수하였다. 그 후 이 운동은 동맹회의(Congress Alliance)와 자유헌장(Freedom Charter)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1955년부터 시작되어 다음 해에 ANC가 채택한 자유헌장은 다인종적이고 사회 민주주의적 남아공을 지향하고 있다. ANC내의 아프리카주의자들은 이를 거절함에 따라 1958년에 ANC는 분열하게 된다. 1950년대 말까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행, 소피스타운(Sophiatown)의 파괴와 여성들의 통행권, 그리고 반투 교육(Bantu Education)에 대항하는 저항 운동에 ANC는 거의 성취한 것이 없었다. 

 

대신에 아파르트헤이트정책은 더욱 강력해졌다. ANC의 중요한 반환점이 1960년 4월에 있게 되는데, 이것은 샤프빌(Sharpeville) 대학살 직후에 정치활동이 금지되면서부터이다. 10월에 알버트 루슬리(Albert Luthuli) 의장은 비폭력 투쟁을 이끈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으러 오슬로(Oslo)로 간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와 다른 사람들은 남아프리카 공산당(South African Communist Party : SACP)과의 긴밀한 협의 속에 무장 투쟁 전략을 채택하고 민족의 창(Umkhonto weSizwe : MK)를 결성했다. 이것은 1961년 12월 16일에 여론에서 발표되고 파괴활동(sabotage)은 시작된다. ANC는 내부지도자가 체포되고 1964년 리보니아(Rivonia)재판에서 종신형을 선도 받음으로써 큰 타격을 받는다. 지도자들이 망명하여 잠비아(Zambia)의 루사카(Lusaka)에 본부를 설립하고, 국제적 지지를 얻는데 성공한 올리버 탐보(Oliver Tambo)에 의해 조직이 이끌어진다. 협의위원회(Consultative Conference)가 1969년 탄자니아(Tanzania)의 모로고로(Morogoro)에서 열리고 ‘ANC의 전략과 전술(Strategy and Tactics of the ANC)'이라는 새 정책을 채택한다. 이에 따라 처음으로 비아프리카인들도 ANC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고, 망명생활 속에서 SACP의 역량을 강화하는 ’혁명위원회‘ (Revolutionary Council)가 만들어졌다. 반면에 ANC의 무장한 집단인 MK는 1967년과 1968년에 남아공의 길목이라고 할 수 있는 로데지아(Rhodesia)에 파견대를 보냈지만 그들은 곧 패주하게 되었다. 비록 ANC는 소웨토(Soweto) 봉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했지만 외국으로 탈출한 망명자들은 ANC에 합류하여 대부분이 MK의 구성원으로써 다시 돌아왔다. 1970년대 후반 MK는 남아공에서 사솔(Sasol) 석유공장, 쿠버르그(Koeberg) 핵발전소, 푸어르트랙커르후어흐터(Voortrekkerhoogte) 방어기지를 포함한 중요시설을 목표로 한 습격에서 점점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1983년 프레토리아(Pretoria)의 남아공 공군 기지 본부에서의 자동차 폭탄테러로 19명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 활동이 금지된 ANC에 대한 지원은 도시로 확대되었다. 넬슨 만델라들 비롯한 ANC의 지도자들이 로빈(Robben) 섬에 수감되었을 때 흑인의식(Black Consciousness)운동의 지지자들은  만델라와 섬에 있는 그의 동료들의 주목할 만한 도덕적 영향력 때문에 ANC와 합류했다. 남아공 국내에서 ANC가 효과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1983년부터 연합민주전선(United Democratic Front)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또한 1985년 말 부터 그 정당성이 남아공내의 백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국제 사회 속에서 극적으로 주목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것은 가능한 대안적인 정부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1985년 6월 잠비아의 카부웨(Kabwe) 회의에서 ANC는 그 상위조직을 비아프리카인들에게 개방할 것과, 무장투쟁을 강화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시민들이 집중 공격에 빠질 수 있다는 위험이 더 이상 이러한 강화 정책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구속 중에 있는 투쟁의 상징인 만델라는 이러한 상황의 해결 실마리로 폭넓게 인식되었다. 1985년부터 만델라는 정부와 ‘대화에 관한 대화(talks about talks)’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망명 지도부는 남아공은 물론이고 세네갈(Senegal)의 다카르(Dakar)와 영국, 그리고 그 밖의 지역까지 대표단을 파견하여 남아공의 미래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비록 남아프리카 노동조합(Congress of South African Trade Unions : COSATU)을 끌어들임으로서 ANC와 SACP 연합이 폭넓게 진행되었지만 ANC의 사회주의 노선은 수정되기 시작했으며, 1990년 이후 힘의 이동에 따라 국유화 논쟁은 점차 사그러 들었고 실용주의적 노선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 드 클레르크(F.W de Klerk)가 ANC와 SACP에 대한 정치활동 금지를 풀었을 때, 그는 아마도 ANC와 다른 연합이 분열할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석방된 만델라는 곧 병든 탐보(Tambo)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1990년 5월에 ANC는 정부와의 정상적 회담을 시작했고, 이 해 8월에 무장 투쟁의 중지에 동의하였으며, 1991년 12월에 민주적 질서를 위한 새로운 헌법을 위해 정부와 여러 정당간에 다수당 협상을 시작했다. 실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를 협상 대표로 한 ANC는 협상 과정에서 대부분 동의를 얻어내었고, 특히 국민당의 허를 찌르고 새로운 민주적 질서의 설립을 위한 타협을 가져왔다.

 

만델라의 탁월한 지도력 아래 ANC는 망명자들과, 로빈섬에 갇혀있던 사람들과, 연합민주전선(United Democratic Front)과 대중민주운동(Mass Democratic Movement)에서 일했던 사람들과 같이 다른 기구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성공적으로 단결하였다. COSATU와 SACP의 연합은 확고히 되었고, 1994년 4월에 실행된 첫 번째 민주주의 선거에서 ANC는 그들 자신의 마지막 헌법이 인정하는 삼분의 이의 숫자인 62.6%의 지지를 얻었고 5월부터 국민연정정부(Government of National Unity)의 다수당으로 집권하였다. 1996년 정부에서 국민당의 철수 후에 대해 일부 정치 평론가들은 정치무대에서 ANC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방안이 없기 때문에 일당 지배 체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ANC가 권력을 잡은 후, 재건과 발전계획(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Programme) 실행하지만, 1997년에 이것은 재정문제의 해결, 경제성장 촉진을 위한 외국투자 활성화 방안을 강조한 성장, 고용 그리고  분배(GEAR ; Growth, Employment and Redistribution) 전략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정책은 사회지출의 삭감을 의미하였다. COSATU는 GEAR전략과 ANC와 정부의 다른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저항적이지는 않았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반투 홀로미사(Bantu Holomisa)는 당의 규약을 무시한 이유로 조직으로부터 쫓겨났고, 위니 만델라(Winnie Madikizela-Mandela)는 통제의 어려움이 드러났다. 그러나 1997년 12월 마피켕(Mafikeng)에서 새로운 의장 타보 음베키(Thabo Mbeki)의 지도하에 개최된 ANC 50주년 기념행사에서 표면적으로 조직의 강건함을 보여주었고, 여기에서 주택, 용수, 전기, 그리고 직업등 필요한 것들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유권자들에게 약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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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백인과 언어 - 아프리카너(Afrikaner)와 아프리칸스(Afrikaans)어 -

2012. 7. 17. 22:03

 

 

남아공의 백인과 언어 - 아프리카너(Afrikaner)와 아프리칸스(Afrikaans)어 -

 

 

 

"아프리카너(Afrikaner)"또는 "아프리칸더(Afrikander)"라는 말은 혼용하여 사용되지만 아프리카너라는 표현이 좀더 현대적이며 상용되고 있다. 20세기 전에 ‘아프리카너(Afrikaner)'라는 말은 남아공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 “아프리카의 원주민(native of Africa)"이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이 말의 의미는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지칭하였다. 20세기초까지 아프리카너들은 주로 농부들로 도시화되지 못하였으나 1990년대 중반에는 전체 인구의 약 80%가 넘는 인구가 도시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 사람들은 자주 농부라는 뜻을 가진 네덜란드어 “보어(Boer)", ”케이프 인(The Cape)", 또는 “케이프 네덜란드인(Cape Dutch)"로 불리어졌다. 이들은 주로 네덜란드의 후예들이며 독일과 프랑스의 자손들이 포함된다.

 

1830년대에 영국의 통치를 벗어나 대이주(Great Trek)를 하게 되는데 네덜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와 아프리칸스어의 발전이 이들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약 3년간(1899-1902)에 걸친 남아프리카 전쟁(The South African War)은 아프리카너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으며(예를 들어 Concentration Camp)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8년 국민당의 정치적 집권을 계기로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는 60년대와 7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1990년 드 클레르크(F.W. de Klerk)는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하는 장기적 전략을 채택하여 아프리카너 정체성과 생존을 보존하고 모색하게 된다.

 

아프리칸스어는 계통상 게르만어에 속하며 약 200여년 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들어진 젊은 언어다. 이 언어는 네덜란드어와 아주 유사하여 단어, 구 그리고 문법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아프리칸스어가 19세기 후반까지 네덜란드어의 “크레올(creole)"로 간주되었으나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네덜란드어와는 다른 언어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언어인 것이 밝혀졌다. 잘 알려진 농담으로 네덜란드인들은 아프리칸스어를 ”어린아이 네덜란드어(a child's Dutch)"라고 불리어지며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네덜란드어를 “시대에 뒤진 오래된 아프리칸스어(an old Fogey's Afrikaans)"라고 한다.

 

 


아프리칸스어는 케이프(Cape)의 첫 번째 백인 정착자들의 언어인 네덜란드어로부터 발전되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케이프에서 쓰여진 네덜란드어의 형태는 네덜란드어의 발음과 어형변화, 작은 범위와 구문과 어휘에서 차이점이 발전되었다. 독일과 프랑스로부터 이주한 정착자들도 얼마안가 곧 네덜란드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칸스어는 프랑스 독일 그리고 영국계 유럽인들의 언어의 혼합은 물론이고 노예들, 코이코이(KhoiKhoi)족, 반투 아프리카인 및 혼혈인 후예들뿐만 아니라 말레이(Malay)인종들과 포르투갈((Portuguese)인들의 언어가 복합적으로 혼합되어 만들어지게 되었다. 네덜란드어가 관료사회 언어로 남게된 반면 새로운 혼합어의 형태는 종종 ‘케이프 네덜란드(Cape Dutch)어, ’네덜란드 속어(slang Dutch)' 또는 ’부엌에서 사용되는 언어(kitchen Dutch)'로서 알려졌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별개의 분리된 언어로 발전되어 갔다. 그러나 이 때까지 아프리칸스어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의 언어이며 문학이나 문화적인 표현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아프리칸스어가 19세기 후반까지 네덜란드어의 “크레올(creole)"로 간주되었으나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네덜란드어와는 다른 언어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언어인 것이 밝혀졌다.

 

 

아프리칸스어로 출판된 첫 번째 책은 1856년에 나왔으나, 187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국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문화적 표현을 위한 도구로써 사용되었다. 케이프 타운 근교의 팔(Paarl)에 살고있었던 네덜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의 성직자인 두 또잇(S.J du Toit ; 1847-1911)은 Die Afrikaanse Patriot(1876)와 간결한 문법(1876), 역사(1877)를 출판하였는데 이 모든 것들은 말하여지는 언어로써 뿐 아니라  쓰여진 언어로써 아프리칸스어의 성장을 도와주는 공헌을 하였다

 

이 언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나미비아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남아공에서만 약 580만명(전체 인구의 약 14.3% ; 인종적 분류로 보면 백인은 10.9%로 약 450만, 칼라드는 8.9%로 약 360만이다.)이 제 1 언어인 모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주로 백인 아프리카너, 칼라드가 속한다. 현재 아프리칸스어는 문학, 과학기술, 그리고 상업분야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으나 과거의 문화적 전성기와는 달리 아프리칸스어의 지위는 하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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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백인과 언어 - 아프리카너(Afrikaner)와 아프리칸스(Afrikaans)어 -

2012. 7. 17. 22:02

 

 

남아공의 백인과 언어 - 아프리카너(Afrikaner)와 아프리칸스(Afrikaans)어 -

 

 

 

"아프리카너(Afrikaner)"또는 "아프리칸더(Afrikander)"라는 말은 혼용하여 사용되지만 아프리카너라는 표현이 좀더 현대적이며 상용되고 있다. 20세기 전에 ‘아프리카너(Afrikaner)'라는 말은 남아공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 “아프리카의 원주민(native of Africa)"이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이 말의 의미는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지칭하였다. 20세기초까지 아프리카너들은 주로 농부들로 도시화되지 못하였으나 1990년대 중반에는 전체 인구의 약 80%가 넘는 인구가 도시에 거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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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은 자주 농부라는 뜻을 가진 네덜란드어 “보어(Boer)", ”케이프 인(The Cape)", 또는 “케이프 네덜란드인(Cape Dutch)"로 불리어졌다. 이들은 주로 네덜란드의 후예들이며 독일과 프랑스의 자손들이 포함된다.

 

1830년대에 영국의 통치를 벗어나 대이주(Great Trek)를 하게 되는데 네덜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와 아프리칸스어의 발전이 이들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약 3년간(1899-1902)에 걸친 남아프리카 전쟁(The South African War)은 아프리카너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으며(예를 들어 Concentration Camp)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8년 국민당의 정치적 집권을 계기로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는 60년대와 7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1990년 드 클레르크(F.W. de Klerk)는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하는 장기적 전략을 채택하여 아프리카너 정체성과 생존을 보존하고 모색하게 된다.

 

 

아프리칸스어는 계통상 게르만어에 속하며 약 200여년 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들어진 젊은 언어다. 이 언어는 네덜란드어와 아주 유사하여 단어, 구 그리고 문법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아프리칸스어가 19세기 후반까지 네덜란드어의 “크레올(creole)"로 간주되었으나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네덜란드어와는 다른 언어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언어인 것이 밝혀졌다. 잘 알려진 농담으로 네덜란드인들은 아프리칸스어를 ”어린아이 네덜란드어(a child's Dutch)"라고 불리어지며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네덜란드어를 “시대에 뒤진 오래된 아프리칸스어(an old Fogey's Afrikaans)"라고 한다.

 

 


아프리칸스어는 케이프(Cape)의 첫 번째 백인 정착자들의 언어인 네덜란드어로부터 발전되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케이프에서 쓰여진 네덜란드어의 형태는 네덜란드어의 발음과 어형변화, 작은 범위와 구문과 어휘에서 차이점이 발전되었다. 독일과 프랑스로부터 이주한 정착자들도 얼마안가 곧 네덜란드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칸스어는 프랑스 독일 그리고 영국계 유럽인들의 언어의 혼합은 물론이고 노예들, 코이코이(KhoiKhoi)족, 반투 아프리카인 및 혼혈인 후예들뿐만 아니라 말레이(Malay)인종들과 포르투갈((Portuguese)인들의 언어가 복합적으로 혼합되어 만들어지게 되었다. 네덜란드어가 관료사회 언어로 남게된 반면 새로운 혼합어의 형태는 종종 ‘케이프 네덜란드(Cape Dutch)어, ’네덜란드 속어(slang Dutch)' 또는 ’부엌에서 사용되는 언어(kitchen Dutch)'로서 알려졌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별개의 분리된 언어로 발전되어 갔다. 그러나 이 때까지 아프리칸스어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의 언어이며 문학이나 문화적인 표현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아프리칸스어가 19세기 후반까지 네덜란드어의 “크레올(creole)"로 간주되었으나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네덜란드어와는 다른 언어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언어인 것이 밝혀졌다.

 

 

아프리칸스어로 출판된 첫 번째 책은 1856년에 나왔으나, 187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국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문화적 표현을 위한 도구로써 사용되었다. 케이프 타운 근교의 팔(Paarl)에 살고있었던 네덜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의 성직자인 두 또잇(S.J du Toit ; 1847-1911)은 Die Afrikaanse Patriot(1876)와 간결한 문법(1876), 역사(1877)를 출판하였는데 이 모든 것들은 말하여지는 언어로써 뿐 아니라  쓰여진 언어로써 아프리칸스어의 성장을 도와주는 공헌을 하였다

 

이 언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나미비아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남아공에서만 약 580만명(전체 인구의 약 14.3% ; 인종적 분류로 보면 백인은 10.9%로 약 450만, 칼라드는 8.9%로 약 360만이다.)이 제 1 언어인 모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주로 백인 아프리카너, 칼라드가 속한다. 현재 아프리칸스어는 문학, 과학기술, 그리고 상업분야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으나 과거의 문화적 전성기와는 달리 아프리칸스어의 지위는 하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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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드왈라(Sudwala) 동굴의 전설

2012. 7. 17. 22:00

 

 

4. 수드왈라(Sudwala) 동굴의 전설

 

‘바위 위에 바위(crag on crag)’라는 뜻을 의미하는 만켈레켈레(Mankelekele)로 잘 알려진 산맥이 뻗어 있는 음푸말랑가(Mpumalanga) 주에 있는 미델버르그(Middelburg)와 넬스프르트(Nelspruit) 사이에 위치한 수드왈라(Sudwala) 동굴은 하우트보스루업(Houtbosloop)가 내려다보인다. 하우트보스루업은 크로커다일 강(Crocodile River)의 한 지류이고 N4 도로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 약 200만년전에 물과 화학 작용으로 인한 침식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고 건기와 우기가 번갈아 나타나는 날씨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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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고대 수드왈라(Sudwala) 동굴이 약 1800 만 년 전에 인간에 의해 점령당했던 증거가 있는데 그 장소에서 석기 연장품이 발견되었고 그것은 아마도 현재 그 동굴 입구에 전시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하빌리스(Australopithecus habilis)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 분쟁의 배경

 

현재 스와질랜드(Swaziland)1)왕국의 최초 거주자는 산(San)족이었지만, 이들은 16세기에 대거 이주하면서 소토(Sotho)족으로 대체되었다. 약 200년 후에 소토(Sotho)족은 스와질랜드(Swaziland) 종족 중에서 가장 우세한 그룹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 이후에 18세기 말에는 응구와네(Ngwane) 3세 왕이 그의 부하-거의 들라미니(Dlamini) 씨족 집단-들을 이끌고 남부 모잠비크로부터 레봄보(Lebombo) 산맥을 넘어 로밤바(Lobamba)라는 수도를 건설하였다. 그 수도는 현재 스와질랜드(Swaziland) 왕국에 있는 퐁골라(Pongola) 강의 북쪽 연안에 있는 것이었다.

 

 


로밤바는 여전히 스와질랜드의 발상지로 여겨졌고 ‘진정한/순수한 스와질랜드’의 원천이었다. 그 종족 사람들이 소그룹의 ‘응구와네(Ngwane)의 부하들에게 가서 그들 스스로를 응구와네의 사람들’인 바카응구와네(bakaNgwane)라고 말하고 그들의 국가는 ‘응구와네의 국가’인 카응구와네(kaNgwane)라고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응구와네는 그의 아들인 은두붕구냐(Ndvungunya)와 그의 손자 소부자(Sobhuza)2)1세 때에도 성공적이었지만, 이들은 매우 위험한 시기에 통치를 하였다. 19세기 초반 줄루(Zulu)족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샤카(Shaka)의 통치 아래 ‘강제 이주’를 의미하는 디파콰네(Difaqane)3)로 불리는 영토팽창정책을 펼쳐 남부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에 그의 통치권을 펼쳐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두붕구냐와 소부자 1세 모두는 그들의 목표를 위해 철인 정치를 하였다. 예를 들어, 은두붕구냐는 대규모의 스와질랜드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에, 소부자는 수많은 주변 종족들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주목할만한 성공을 가져왔다.

 

소부자 1세의 통치기간 동안에 퐁골라 강 이남에서 가장 강력한 그룹은 지위드(Ziwide)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은드완드웨(Ndwandwe) 족이었다. 지위드가 그의 관심을 북부의 소부자 쪽으로 두었을때-저항이 문제 밖으로 표출되었을 때-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그 위험으로부터 북으로 피신을 하였다. 소부자와 그의 추종자들은 서부 산맥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하였으며 결국 스와질랜드의 서쪽 한가운데까지 가게 되었다. 그곳의 수많은 동굴은 위험으로부터 안식처를 제공할 수 있었다. 점령군과 효과적으로 대체하기 위해서, 소부자는 음디짐바(Mdzimba) 산맥에 새로이 강력한 기반을 두어 로밤바(Lobamba)라는 새 수도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옛 레봄바(Lebomba)와 수년 전에 세워진 현재 왕국과는 구별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소부자 1세가 강력한 군사뿐만 아니라 외교적인 수단을 잘 활용하였다는 점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점이다. 예를 들어, 그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그의 아내로 지위드의 딸을 맞이하였고 그의 두 명의 딸들을 샤카의 후처로 보냈다. 국가간 동맹을 체결하고 이러한 방법으로 충돌을 피하면서, 이 현명한 지도자는 쉽지만은 않은 평화로운 국가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후에, 샤카의 동생이며 후계자인 살인마 딩가네(Dingane)가 그 지역을 침략했을 때, 소부자는 약탈을 일삼는 침략자들에게 저항하기보다는 언덕 안쪽으로 피신하는 것이 더 낫다고 결정하였다. 그리고 1838년에 그는 딩가네의 점령군을 압도적으로 무찔렀고, 딩가네는 피의 강 전투(Blood River Battle)에서 보어(Boers)군들에게 패배하였다.

 

 

3. 음스와티(Mswati)와 솜쿰바(Somcumba)

 


1839년 소부자가 죽기 직전에, 그는 그의 아들 음스와티(Mswati)와 솜쿰바(Somcumba)를 로우벨드-스와질랜드(Lowveld-Swaziland) 지역으로 보내서 새로운  스와질랜드 왕국을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이 재건노력이 진행 된지 한달도 못 되어서  소부자는 죽었고 왕좌는 비어 있었다. 비록  소부자가 이미 그의 후계자로서 어린 아들 음스와티를 간택하였으나, 그는 아직 취임이 확정된 것이 아니어서 그의 이복형인 솜쿰바가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솜쿰바는 적절한 시기에 음스와티에게 정권을 넘겨주려는 의도였지만, 솜쿰바는 음스와티가 적절한 나이가 되었을 때 왕정을 물려준다는 이 결정을 거의 완벽하게 깨뜨렸다. 그래서 이 결정은  스와질랜드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심한 분열을 일으켰다. 일파는 소부자의 후계자로 선택된 음스와티를 지지하였다. 그 스스로는 신이 내려준 권리라고 믿으면서 그 자신을 왕이라고 칭하였다. 다른 일파는 그의 이복형인 솜쿰바를 지지하였는데 그 사람들은 그의 어린 동생보다는 솜쿰바가 더 나은 왕이라고 믿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솜쿰바와 그의 수하들은 스와질랜드 외부로 나와서 리덴부르그(Lydenburg) 지역으로 갔다. 그 곳은 그들이 음실레지(Msilezi)강 - 스타트(Stat)강 -의 연안에 존드와고(Zondwago)라는 마을을 세운 곳이며 수드왈라(Sudwala) 가까이에 있고 방어하기도 쉬우며 신선한 물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이다.

 

얼마되지 않아 바로, 솜쿰바는 음스와티와 그의 병사들이 존드와고(Zondwago)로 전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즉시 동굴안으로 피하기로 결정하고 솜쿰바와 그의 부하들은 긴 기간동안에 대비하여 음식물, 무기들, 소떼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음스와티와 그의 부하들은 처음에 동굴 입구에 불을 피워서 그 연기로 솜쿰바를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자연 바람이 동굴 입구의 연기를 날려버려서 실패하였다. 또한 음스와티는 반역자들이 굶어죽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솜쿰바의 부하 중 한 명이 탈출하여 보어(Boer)인으로 구성된 특별 기습부대에게 원조를 구하여 리덴버그(Lydenburg)로 피난 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보어인들은 음스와티 보다는 오히려 솜쿰바를 더 좋아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솜쿰바가 줄루족인 딩가네의 죽음에 부분적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보어인들에게 도움을 받게 된 것이고, 음스와티는 크로커다일(Crocodile)강 동쪽연안까지 추격을 받았다. 여기에서 양측 군사들은 상당히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면서, 솜쿰바와 음스와티는 보어인의 지지를 받기 위해 서로 경쟁하여 양측에서는 상대편의 가축을 훔치는 것에 대해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 상황은 결국 음스와티와 그의 부하들이 크로커다일 강을 건너 다시 존드와고(Zondwago)를 공격할 때인 어느 이른 아침에 종결되었다. 솜쿰바는 이 전쟁에서 매우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고 그의 추종자들은 대규모 학살을 당하였다. 그 때, 그의 아버지를 위한 사명감에 도망을 쳐서 달아난 솜쿰바의 아들 중 단 한 명만이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 전쟁이 끝난 이후에, 음스와티가 그의 이복형을 해치지 말라는 강력한 지시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의 명령에 불복종하였기 때문에, 솜쿰바의 머리가 음스와티에게 배달되었다. 음스와티는 그의 인두나(Induna)4)들을 소환하여,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즉석에서 사형시켰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 이유는 병사들이 스와질랜드 왕을 죽인다면 그는 분명 다른 왕들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솜쿰바가 패배하자, 젊은 음스와티는 확고하게 왕으로 추대되었고 몇 년이 지나고 난 후에 그는 가장 강력한 왕이라는 평판을 듣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스와질랜드에서 가장 전쟁을 훌륭하게 이끄는 왕이라고 말하였다. 1865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우리가 현재 스와질랜드라고 부르는 왕국은 안전하고 부강한 왕국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스와질랜드 국민에 대한 음스와티의 단호하고 매우 막강한 지도력의 직접적인 결과일 것이다.

 

 

4. 자연 그대로의 경이로움을 지닌 수드왈라(Sudwala)

 

험한 산비탈로 둘러싸인 음푸말랑가(Mpumalanga) - 언제나 푸르른 초목으로 우거진 - 의 동굴은 수드왈라(Sudwala)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할 점이다. 그 동굴은 나라 전체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도로와 공간으로서 세세한 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 중턱까지 약 30km에 다다르는 그 고딕(Gothic)양식의 내부에는, 동굴을 연결하는 크림색, 금색, 붉은색, 갈색의 종유석과 석순 모양의 가고일(Gargoyle ; 괴물꼴 홈통 주둥이)로 가득 차 있다. 이 석회암 종유석들은 칼슘이 퇴적된 결과로서 생성된 것인데, 수드왈라를 유명하게 만든 장대한 기둥을 만들어내기 위해 결국 동굴 바닥에 광천수가 똑똑 떨어지면서 석순과 만나서 된 것이다. 이것들 중에 가장 주목할만한 점 하나는 폐쇄된 복잡한 동굴 사이로 울려퍼지는 메아리 형상을 한 원통형의 공(Gong) -스와질랜드의 왕권을 노리던 전설적인 이의 이름을 딴- 이라는 솜쿰바의 종유석이다. 이 동굴의 다른 놀라운 특징은 거대한 크기의 P R 오웬 홀(Owen Hall)의 내부인데, 그 동굴 자체 내에서 훌륭한 음악콘서트를 해도 될 정도로 놀라운 음향효과를 가졌다.

 

그 동굴 내부에는 땅을 파서 낸 구멍의 흔적이 거의 없었고 최초 거주자나 방랑자들이라고까지 알려져 있는 스와질랜드 인들의 실제적인 흔적조차 없었다. 방문객들은 동굴의 약 600m 정도를 답사해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고, 수드왈라 동굴은 남아프리카에서 문화적, 역사적, 자연적인 중요성에 최소한의 방해를 받은 장소 중에 한 곳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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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의 황금(King Solomon's gold)

2012. 7. 17. 21:58

 

 

솔로몬 왕의 황금(King Solomon's gold)

 

 

성서 (열왕기Ⅰ 5장 3절 ; 1 Kings 5:3)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이자 밧세바(Bathsheba)1)에게서 태어난 다윗(David) 왕의 아들인 솔로몬 왕(974-934 BC)2)은 야훼께 경배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지어 바치고자 성전 건축에 착수하였다. 성전 건축 공사가 끝날 때까지, 그는 신하들을 레바논(Lebanon)으로 보내서 목재를 베어오도록 하였고, 근처에 있는 채석장에서 돌을 캐어오도록 한 다음에 타이레(Tyre)와 바이블로스(Bybbs)도시의 석공들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하게 하였다. 마침내 7년 후에 그 성전은 완성되었다. 솔로몬은 성전 벽면과 대들보, 문지방에 순금을 입혔고,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바닥에까지도 순금을 입혔다고 한다. 열왕기Ⅰ 6장 21절에서 22절에 의하면, ‘황금 사슬은 밀실의 입구에 늘어놓은 것인데 그것 또한 순금을 입힌 것이다. 성전 전체 인테리어가 순금을 입힌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신성한 신앙의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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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이 지난 이후에, 그 성전은 바빌로니아(Babylonia)인들의 침입에 의해서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헤롯(Herod) 왕이 결국 같은 장소에 두 번째 성전을 건축했지만 이 건축물 또한 후에 파괴되었다. 그렇지만 성서에서처럼 성전의 묘사가 정확하다면 솔로몬 왕은 어디에서 황금을 얻었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역대기(3장 3절에서 13절까지 ; 2 Chronicles 3:3-13)에 의하면 금은 ‘파르바임(Parvaim)의 땅’에서 들여온 것이라고 하였다. 불행히도 파르바임이라는 지역은 세워진 적이 없었던 곳이다. 어떤 학자들은 단지 이곳이 아라비아 ’동방 지역(Oriental regions)‘ 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그것이 전설로 유명한 오빌(Ophir)항구와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오빌(Ophir)3)은 항구도시였거나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솔로몬의 배가 거대한 양의 순금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목재, 값비싼 돈, 상아, 원숭이, 공작새들까지도 실어온 지역으로 생각되고 있다. 비록 아라비아 반도, 인도 등의 여러 지역이라고 주장되기는 하였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오빌이 남동 아라비아(Arabia)에 있는 예멘(Yemen)이거나 아마도 아프리카(Africa) 해안 근처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이집트 파라오(pharaoh)들이 원숭이, 상아, 유향, 노예들을 얻기 위해 원정 탐사선을 소말리아(Somalia)로 보냈다는 사실은 오빌이 실제로 동부 아프리카의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흥미롭게도, 솔로몬 왕의 제물에 대한 전설과 아프리카 대륙과의 연관은 1885년에 리더 해가드(Rider Haggard)에 의해 ‘솔로몬 왕의 광산(King Solomon's Mines)'이라는 소설이 출판되면서 19세기에 광범위하게 다시 부활하였다.

 

이 책에서, 세 명의 유럽인 영웅 -헨리 커티스 경(Sir Henry Curtis), 존 굳 대위(Captain John Good), 그리고 해설자 앨런 쿼터메인(Allan Quartermain)- 은 커티스의 동생인 조지(George)를 찾기 위해 어둠의 대륙 내부(Dark Continent)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조지(George)는 솔로몬(Solomon)왕의 광산에서 잃어버린 보물을 찾기 위해 떠났고 불행히도 그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해가드의 책은 유럽 인들과 페니키아(Phoenicians)인들이 중부 아프리카 어느 곳에 웅장한 왕국을 건설했다는 허구성을 제시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아주 진귀한 보물로 가득 한 전설적인 왕국이 발견되지 않은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 놓여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4)

 

 


아마도 동방에 살았던 놀랄 만큼 부유한 마기(Magi)의 후예인 프리스터 존(Prester John)5)의 이야기는 처음으로 십자군 운동(11세기 후반-13세기) 기간에 생겨났다. 근원적으로는, 아주 먼 대륙에서 옛날 옛적에, 한 왕이 살았는데 그는 훌륭한 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크리스트교의 성직자였다. 그 왕의 이름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고 그는 막대한 양의 은과 금 등의 재물을 가지고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였다.

 

 


그 이야기는 게벨(Gebal ; 현재 레바논의 자발라(Jabala))의 주교인 허그(Hugh)가 이탈리아의 비터보(Viterbo)에 위치한 로마 교황청의 유게니우스(Eugenius) 교황을 방문했을 때인 약 1145년에 시작하였다. 허그는 신성한 땅(Holy Land)을 침략하려고 위협하고 있는 터키에 대항하여 도움을 요청하려고 교황을 방문하였다. 독일 프레이슬링(Freisling)의 오토 주교(Bishop Otto)가 이 만남에 대해 쓰고 있는 바에 따르면 아기 예수를 방문한 ‘성직자이자 왕’이며 전쟁에서 페르시아의 무슬림 왕을 패배시킨 그는 예루살렘에 진격하려고 하였으나 티그리스(Tigris) 강둑에서 중단했다고 언급했다. 1165년에 이 이야기가 다시 발전하여 프레스터 존으로부터 위조된 편지가 비잔틴의 매뉴얼 코메누스(Manuel Comnenus)황제에게 보내어 졌고 그 편지는 다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레드릭 바바루스(Frederic Babarous)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그 위조범은 아주 영리하여 비숍 오토(Bishop otto)의 보고서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에 관련된 이야기와 신앙심 없는 터키(Turk)인들과 비교하여 크리스트교인들의 두려움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도 물론 언급하였다. 그는 또한 프레스터 존 왕국이 금, 은, 보석 등이 많이 있다는 것도 언급하였다.

 

13세기 중반에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아시아가 유럽에 다시 접근할 수 있었을 당시 프레스터 존을 발견하기 위해 이루어진 조사는 주로 그의 개입을 통해서 중국과 다시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비록 프레스터 존의 존재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에 관한 전설과 소문은 중세 내내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14세기에, 아시아에서 실시된 모든 조사에서 프레스터 존에 대한 존재가 밝혀지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서 찾으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아프리카 특히, 에티오피아(Ethiopia)쪽으로 그 관심을 바꾸었다면 결과가 다를 수도 있었다. 15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이 프레스터 존을 아프리카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은 이 전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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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ethsabee라고도 씀. 〈구약성서〉(Ⅱ 사무 11~12, Ⅰ열왕 1~2)에 나오는 인물. 히타이트인 우리야의 아내였다가 나중에 다윗 왕의 아내가 되어 솔로몬 왕을 낳았다. 엘리암의 딸로 귀족 태생이었던 듯하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던 그녀가 다윗의 유혹을 받아 임신을 하게 되자 다윗은 우리야를 죽이고 그녀와 결혼했다. 처음 태어난 아이는 죽었으나, 후에 솔로몬을 낳았다. 다윗이 숨을 거둘 때 그녀는 예언자 나단과 계략을 꾸며 아도니야 대신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의지가 강하고 담력이 컸던 그녀는 왕의 어머니로서 막강한 지위를 누렸다.

 


2) (히)Shlomo. ?~? BC 10세기 중반에 활동한 다윗의 아들이자 계승자.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간주된다. 군사력으로 통치했고, 군사․행정․상업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스라엘 식민지들을 건설했다. 그가 벌인 대규모 토목사업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수도 예루살렘에 세운 유명한 성전이다. 그는 현인과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전통적으로 〈아가〉의 저자로 간주되며, 〈잠언〉에는 그가 쓴 것으로 간주되는 격언과 교훈이 있다.솔로몬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는 〈구약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특히 Ⅰ열왕 1~11, Ⅱ역대 1~9). 〈역대기 하〉에는 전설 자료가 일부 담겨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사실적이고 신빙성 있는 역사적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 솔로몬의 배경은 유명할 뿐만 아니라 화려하다. 아버지 다윗은 자수성가하여 왕이 된 인물로, 강한 적들을 물리치고 유다 왕조를 세웠으며, 이집트 국경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다윗이 만난 가장 강했던 최초의 적은 필리스티아(불레셋) 사람들로서, 이들은 팔레스타인을 지배했고 띠로(두로)와 시돈이 해상무역으로 번성하는 것을 방해했다. 다윗은 이스라엘 보병, 그중에서도 궁수(弓手)들을 훈련하여 말과 전차를 사용한 필리스티아 군대와 그밖의 적들을 능가했다. 그밖에도 띠로 왕 히람과 제휴하여 육상 및 해상 동맹을 맺었는데, 이 동맹은 솔로몬 때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솔로몬은 상당히 큰 제국과 해상 통제 및 무역에 대단히 중요한 페니키아 동맹을 유산으로 받았다. 솔로몬의 어머니 바쎄바는 다윗과 혼인하기 전에는 히타이트족 출신 장군 우리야의 아내였다. 바쎄바는 궁정에서 벌어진 음모에서 노련한 수완을 발휘했는데, 그녀는 왕비가 되기 전에 장군의 아내에서 왕비가 되려는 목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한 다윗 앞에 의도적으로 자신을 노출시켰을 수도 있다. 다윗은 재위 말년에 노망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런 가운데 아내들 중 하낏(학깃)이 자기 아들 아도니야를 다윗의 후계자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선임 장군 요압, 제사장 에비아달, 그외 여러 대신을 자기편에 가담시켰다. 다윗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솔로몬이 형들을 제치고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오직 바쎄바가 예언자 나단의 협조를 받아 이루어낸 일이었다.

 

 


3) <구약성서〉시대에 질 좋은 금으로 유명했던 확인되지 않은 지역.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지명들에서 오빌은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솔로몬 시대(BC 920경)에는 해외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금․백단(白檀)나무․상아․원숭이․ 공작 등이 그곳에서 조달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많은 지명이 오빌이라는 지역으로 제시되어왔고, 해외에 있다고 가정할 때의 주요위치는 동부 아프리카와 인도이다. 이집트의 많은 파라오들이 원숭이․상아․유향․노예를 얻기 위해 원정대를 푼트(소말리아)로 보낸 기록을 보아도 동부 아프리카 지역이 신빙성이 있다. 반대로 유대교 역사가인 요세푸스와 성 히에로니무스(제롬)는 분명히 인도를 오빌 지역으로 이해했다. 오빌의 특산물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들이 인도 언어에서 유래한 것일 수도 있고, 더욱이 백단나무와 공작은 인도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반면, 적어도 현대 동부 아프리카에서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4) ‘콩고’라는 영화를 참고할 것

 


5) <두산백과> 프레스터 존 전설(Legend of Prester John).
  중세에 아시아 ․아프리카 등 동방에 그리스도교 왕국을 건설하였다는 중세 유럽의 전설. 12세기에 남독일 프라이징의 주교였던 오토가 지은 《연대기(年代記)》 <1145년>조에는 시리아의 한 주교의 보고를 바탕으로 하여 "네스토리우스파(派)의 그리스도교도로,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동쪽에 대영토를 가진 왕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고 서진(西進)하여 에크바타나(하마단의 구칭)를 점령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귀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이 전설의 시초이다. 그런 다음 이 왕이 쓴 편지의 필사본이라고 하는 글이 유럽에 유포되었고, 또 왕의 사절이 도래하였다는 소문도 퍼졌다. 이것은 때마침 십자군 원정의 성과가 오르지 아니하여 유럽인들은 대항할 새로운 세력의 출현을 열망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또한 케레이트부(部), 즉 옛 몽골의 한 부족국가 키타이와 몽골 제국의 황실 내에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도가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 등이 유럽에 이 전설을 유포시킨 요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리하여 동방 여행을 한 가톨릭 수사(修士)와 상인들은 프레스터 존의 실체를 탐색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프란체스코회 수사 카르피니는 그는 곧 인도의 왕이라 하였고, 프란체스코회 선교사 W.von 로이즈브루크는 나이만부(部)의 족장(族長) 쿠칠루크[屈出律], 그리고 M.폴로는 케레이트부의 족장 온한(溫汗)이라고 각각 말하였으며, 또 이 전설의 왕은 칭기즈 칸이라는 설도 나왔다. 그 후 가톨릭 수도사를 중심으로 이 전설의 왕과 왕국의 실재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되었는데, 15~16세기에 이르자 그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움직임이 같은 그리스도교도가 있는 에티오피아에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이같은 일련의 탐색작업은 유럽인의 아프리카 탐험의 원동력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에티오피아는  프레스터 존의 나라 라고 불리기도 한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프레스터 요한(Prester John). 
   Presbyter John, John the Elder라고도 함. 전설적인 동방정교회의 지도자. 중세 연대기와 전승들에서 이슬람교도에 대항하는 데 희망을 준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네스토리우스파(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동방정교회의 분파)였으며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를 넘어 극동지역에서' 다스린 사제 겸 왕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장로 요한'의 저작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많은 전설에 등장한다. 


   이 전설은 유럽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팔레스타인)를 이슬람교도들에게서 되찾기를 바라던 십자군원정 기간(11세기말~13세기)에 생겼다. 1071년 예루살렘이 셀주크 투르크에게 정복당했다. 1145년 시리아 게발(지금의 레바논 유바일)의 휴 주교가 이탈리아 비테르보에 있는 교황청에 프레스터 요한에 관하여 보낸 보고에 근거를 둔 이 이야기는 독일 프라이징의 오토 주교에 의해 그의 〈연대기 Chronicon〉(1145)에 최초로 기록되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부유하고 권세 있던 '사제왕' 요한은 아기 예수를 방문했던 동방박사의 직계 자손이라고 한다. 그는 전쟁에서 페르시아 왕들을 물리쳤으며, 엑바타나에 있는 그들의 수도를 습격했고 예루살렘까지 진격하려고 했으나 티그리스 강을 건너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어 마지막 목적지에서 제지당할 수밖에 없었다. 휴 주교가 전하는 그 전쟁은 1141년 페르시아 콰트완에서 벌어졌으며, 중앙 아시아에 있던 카라키타이 제국의 건국자인 몽골왕 예루 타시가 셀주크족의 이슬람교 군주인 산자르를 물리쳤던 그 전쟁이었다. 카라키타이 제국 군주의 칭호는 구르칸 또는 코르칸이었는데, 그것이 히브리어 발음으로는 요하난, 시리아어로는 유하난으로 바뀌게 되었고 라틴어로 요한네스 또는 요한이 된 것으로 보인다. 구르칸들은 몽골의 불교도들이었지만, 그들의 많은 고위직 신하들이 네스토리우스파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선교사 빌렘 반 뢰이즈브루크가 1235년에 쓴 보고서에 따르면, 중앙 아시아인으로 마지막 구르칸의 딸인 나이만의 왕 퀴클뤽의 아내도 그리스도교도였다. 아버지의 이름이 타양 칸(중국어로 '요한 대왕'이라는 뜻)인 퀴클뤽은 1218년 대(大) 몽골의 지도자 칭기즈 칸에게 패배했다. 1221년 팔레스타인에 있는 아크레의 주교 자크 드 비트리와 이집트의 다미에타에서 십자군과 동행했던 추기경 펠라기우스는, 프레스터 요한의 아들이거나 손자인 인도의 데이비드 왕에게 이슬람교도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로마에 보고했는데, 이 왕이 바로 칭기즈 칸이었던 것 같다. 믿을 만한 정보의 부족과 유럽 그리스도교도들의 염원 때문에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 인물, 지리적 장소들이 한데 섞여서 프레스터 요한에 대한 전설이 만들어졌다.


   13세기 연대기 작가인 알베리크 드 트루아퐁텐은 1165년에 프레스터 요한이 쓴 편지 1장이 여러 명의 유럽 지도자들, 특히 비잔틴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전달되었다고 기록했다. 허구적인 성격을 띤 이 편지는 라틴어로 씌어졌으며, 히브리어와 고대 슬라브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 편지가 비잔틴 황제 앞으로 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편지의 그리스어 본문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편지 안에 담긴 반(反)비잔틴적인 경향은 비잔틴 황제를 '황제'라고 부르기보다 '로마인의 통치자'라고 부른 것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 편지에서 프레스터 요한의 영토인 '인도의 3개국'은 대주교들과 소수도원장들과 왕들이 다스리는 풍요로운 자연, 경이로움, 평화의 땅으로 묘사되고 있다. 장로라는 간단한 칭호를 가진 요한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슬람교도와 싸워 예수의 거룩한 무덤을 되찾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가려 한다고 선언했다. 그 편지에는 요한이 인도 미라포레에서 인도 최초의 그리스도교 전도자가 된 성 토마스의 후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프레스터 요한이 보낸 사절에 대한 응답으로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1177년 '인도의 탁월하고 위대한 왕이며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아들'인 요한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 편지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의도는 알렉산데르가 바르바로사와의 논쟁에서 지원을 받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13, 14세기에 프레스터 요한의 왕국을 찾아나선 조반니 다 피안델 카르피니,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 마르코 폴로와 같은 여러 부류의 선교사와 평신도 여행가들은 서양과 몽골 사람들 사이에 직접적인 교섭을 가능하게 했다. 14세기 중반 이후 에티오피아는 프레스터 요한의 왕국을 탐색하는 중심지가 되었으며, 프레스터 요한은 이 아프리카 그리스도교 국가의 네구스(황제)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프레스터 요한은 아시아 지역, 특히 네스토리우스파 지역에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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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바트만(Sarah Bartmann) -호텐토트의 비너스

2012. 7. 17. 21:56

 

 

사라 바트만(Sarah Bartmann) -호텐토트의 비너스

 

 

 

거의 이백여년 동안 싸르끼 바르트만(Saartjie Baartmann)으로 불려 온 사라 바트만(Sarah Bartmann)은 1789년 지금의 이스턴 케이프에 위치한 감투스 계곡(Gamtoos Valley)의 코이(Khoi)족 여성이다. 그녀는 나중에 케이프로 이주를 하게 되고 이 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전형적인 '호텐토트(Hottentot)'족의 외모를 이용해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부를 벌게 해주겠다며 설득하는 외국 선박의 의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1810년 21살의 나이로 사라 바트만은 잉글랜드로 떠나는 배에 오르게 된다. 그녀는 잉글랜드에서 '호텐토트족의 비너스(Hottentot Venus)'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며 전시회와 쇼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이 곳에서 그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일으키는 하나의 '인간 변종'으로 여겨졌다. 커다란 엉덩이와 과학자들 사이에서 '호텐토트의 앞치마', 또는 '수치심을 가리는 커튼' 등으로 불리 울 정도로 축 늘어진 가슴 등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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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나 쇼가 없을 때조차도 그녀는 우리 안에서 난폭한 짐승처럼 행동하는 모습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관람되었다. 런던 시내인 피카디리(Piccadilly)에서 열린 한 전시회 기간 동안 아프리카 학회(African Institution)의 노예 폐지론자들은 그녀의 자유를 요구하는 기사를 신문에 실었다. 이 결과로 그녀의 행위와 더불어 이러한 전시의 기획담당자 역시 정식으로 조사가 이뤄졌고, 대질 심문과 함께 그녀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국으로 옮겨졌는지 여부와 강제적으로 전시행위가 이뤄졌는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아프리카를 떠났고 지금이 이전의 생활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 사라 바트만이 지적했듯이 그녀는 자신을 이용한 쇼의 수익금 중 절반을 받았고 이로써 그녀는 자신의 하인 두 명도 고용하게 된다. 그녀가 난폭한 짐승과 같은 역할을 매번 맡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그것 역시 그녀가 행했던 쇼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1815년에 프랑스의 기업인은 그녀를 파리로 데려간다. 그 곳에서 그녀는 진실로 행복하다는 그녀 자신의 확언에도 불구하고 알코올 중독과 매춘의 희생양으로서 전락한다. 그녀는 이 곳에서 쇼가 없을 때 의사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실험대상으로 너무나 많은 이용을 당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선도적인 상당수의 전문가들에 의해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시킨다는 명목으로 그 해 3월 실험대에 서게 되었으며, 그녀의 누드 초상도 그려졌다. 1815년 12월 29일, 그녀는 염증과 발진을 동반한 질병으로 인해 26살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코이족의 기원에 대해 병적인 호기심을 드러내었던 '유식한' 유럽인들에게는 '과학적 호기심의 충족을 위해' 그녀의 시신을 해부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이 작업은 당대 프랑스 최고의 해부학자이자 파리 대학의 총장이었던 바론 조지 커비어(Baron Georges Cuvier : 1769~1832)에게 맡겨졌다. 일반적으로 화석학과 비교 해부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커비어는 먼저 그녀의 몸을 밀랍에다 집어 넣어둔 다음 절개하였다. 먼저 뇌를 투명한 병에 옮겨 보관한 다음, 그녀의 생식기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의 연구가 완성된 후 바트만의 뼈대는 다시 짜 맞추어 졌다.

 

1824년 커비어는 유형별 삽화인 컬러 사진이 포함된 그의 연구 성과들을 실은 과학 저서를 출판했다. 이로 인해 그녀의 생식기와 뇌는 파리의 ‘인류 박물관’(Musée d'Orsay)로 옮겨져 전시된다.

 

 

1995년 12월 14일 쎄실 리 플레워(Cecil le Fleur)는 그리쿠아(Griqua)인을 대신하여 프랑스 정부로부터 사라 바트만의 박제 모형과 뼈대, 그 외의 유물들을 되돌려 달라고 주장할 것을 남아공 의회에 요구했다. 공식적인 반환식은 2002년 4월 29일 파리의 남아공 대사관에서 열렸다. 프랑스 학술 연구 원장인 로저-제라드 슈와트젠버그(Roger-Gérard Schwartzenberg)는 말했다. "프랑스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 굴욕을 당하고 또, 아프리카 인으로서 부당하게 착취당한 싸르끼 바르트만의 존엄성이 복원되길 바랍니다."

 

또한 프랑스 주재 남아공 대사인 투트킬레 스카웨이야(Thuthukile Skweyiya)는 말했다. "싸르끼 바르트만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품에 안고서, 인종차별이 없는 그녀의 고향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행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트만의 유물들은 화려한 팡파르와 함께 2002년 5월 3일, 금요일 아침 남아공의 수도 케이프 타운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예술과 문화부 차관인 브리지트 마반들라(Bridgitte Mabandla)와 이 당시 웨스턴 케이프의 수상인 피터 마라이스(Peter Marais)를 포함한 사람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떠난 지 거의 2 세기만에 돌아온 사라 바트만을 환영하는 의식을 열었다.

 

‘사르끼 바르트만의 귀국은 코이산(Khosan)족 사람들의 자존심을 크게 회복시킬 것이다.' 마라이스(Marais)가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아프리카 국기로 꾸며지고 측면에 여섯 명의 코이산족 아이들로 둘러싸여서 바트만을 담고 있는 관이 공항으로 들어갔고, 이후 그녀가 매장될 베인베르그(Wynberg)에 있는 2 군인 병원(2 Military Hospital)의 영안실에 안치되었다.

 

사라 바트만의 유골은 마침에 2002년 8월 9일 금요일 여성의 날(Women's Day)에 이스턴 케이프 근처의 한케이(Hankey)의 감투스 강(Gamtoos River)의 언덕에 매장되었다. 사라 바트만의 이야기는 작가 게일 스미스(Gail smith)가 쓴 스타(Star)지의 기사인 ‘왜 우리는 싸르끼의 일에 그토록 흥분하는가?’ 의해 널리 알려졌다.

 

‘바트만의 이야기는 남아공역사의 숨겨진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프랑스 역사상 첫 번째로 그녀의 역사적인 송환은 남아공의 많은 유색인종 여성과 몇 년 동안의 조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과 바트만의 유산의 명예에 관해 시를 쓰고 연극을 한 분 과 민족적 우월감의 회복으로부터의 개간에 경의를 표한다.’

 

 

 


과학의 관심 안에서..

 

18세기와 19세기동안, 유전학, 생화학과 생리학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었고, 해부학이 인류학자들이 지식의 발전에 ‘목적에 도달하게 하는’ 가장 주된 방법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이 실험은 백인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고, 이 ‘도달’은 ‘순수한’ 종류의 예를 찾는 것이 효력이 있었다. 바트만이 이러한 맥락에서 믿어졌으므로 유럽과학자들에게 그녀에 관해 연구하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만 바트만에 관한 실험은 당시에 팽배하던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인의 성은 괴이하다’는 관념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라 바트만 만이 흑인 중 과학적 호기심에서 기인한 이 말도 안 되는 희생양이 된 것은 아니었다.

 

1860년 두 명의 어린 산(San)족 아이들- 남자아이 한 명과 여자아이 한 명-이 영국에서 그들의 고향인 오렌지강(Orange River)의 근처로 돌아왔다. 모리스(Alan G Morris)가 쓴 박물관과 산 족의 트로피 스쿨(Trophy Skull)에 의하면 ‘그 아이는 영국에 도착한지 몇 년이 안 되어 죽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1864년 6월에 22살이 될 때까지 살아있었다. 그녀의 몸은 외과 왕립대학(Royal College of Surgeon)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영국의 비교 해부학자인 플라워(W.H. Flower)와 머리(J. Murie)에 의해 해부되었다. 세계 2차 대전 중 대학이 폭파되었을 때 많은 뼈들이 유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뼈는 영국 자연사 박물관(British Museum of Natural History)에 보관되어 있다.

 

모리스는 또한 그 책에서 비슷한 운명의 세 번째 케리 케리(Keri Keri)로 알려진 부시우먼(bushwoman)이 얼마나 우롱당했는지 케이프 프라빈스의 오웃슈런(Outshoorn)에서 패혈성 급성폐렴에 걸려서 죽은 후 1939년 비트바터르스란트의 해부학부로 이송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소위 호텐토트라고 불리는 종족은 유럽의 과학자들에게 오랫동안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코이코이(Khoikhoi) 남자들은 고환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monorchids)이며 여자들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화신(tablier)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유럽의 과학자들은 바트만의 생식기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는데 호텐토트 여성은 정상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모양과 크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텐토트족들은 동물보다 조금 나은 사람들로 인식되었는데 스웨덴의 한 학자는 호텐토트족을 Homo Monstrosus Monorchides라는 학명을 따로 붙여 인류의 진화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하나의 인종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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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폭포 - 천둥의 안개(Mosi oa tunya)

2012. 7. 17. 21:54

 

 

빅토리아 폭포 - 천둥의 안개(Mosi oa tunya)

 

 

 

모시 오아 툰야(Mosi oa tunya : The smoke that thunders)는 빅토리아 폭포를 말한다. 강의 상류에서 살았던 콜로로(Kololo)족은 모시 오아 툰야라고 불렀으며 마테벨레(Matabele)족은 ‘안개처럼 일어나는 물’이라는 뜻을 가진 만자 툰냐요(Manza Thunyayo : Water that rises like smoke)라고 불렀다. 그러나 1855년 이 폭포를 발견한(?) 리빙스톤이 영국여왕의 이름을 붙이면서 빅토리아 폭포라고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프리카인들을 마음속 깊이 사랑했고 노예무역을 막고 직접 유럽과 거래를 하기 위해서 내류탐험을 시도한 리빙스톤 마저 이 폭포는 너무나 위대해서 영국여왕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고집한 것을 보면 유럽인들의 얼마나 탐욕스럽고 차별적이었는지 엿볼 수 있어 씁쓸하다. 이후 1866년 리빙스톤을 따라온 토마스 바이네스(Thomas Baines)가 폭포를 그림으로 그려서 세상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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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4 대강중 하나인 잠베지(Zambezi)강은 ‘큰 수로’, ‘위대한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나미비아, 보츠와나, 잠비아, 그리고 짐바브웨를 거쳐 모잠비크와 말라위 지나서 인도양으로 흐른다. 빅토리아 폭포는 이 잠베지 강의 중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1/5은 잠비아에 나머지는 짐바브웨에 있다. 즉 빅토리아 폭포(Victoria Falls)는 빅토리아 호수(Lake Victoria)에 있지 않고 남부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에 있다.

 

깊이가 나이아가라 폭포의 2배 이상인 이 폭포는 강이 최대 너비(1700m)인 곳에서 강과 같은 너비로 펼쳐져 있으며,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최대 108m의 낙차를 이루며 떨어진다. 연평균 유수량(流水量)은 935㎥/sec이고 9월부터 물이 줄기 시작해서 4월에는 최고에 달해 폭포가 1장의 커튼으로 만들어진다. 폭포에 가까워져도 강의 흐름이 빨라지지 않으나, 우렁찬 폭포소리와 물안개로 폭포에 다가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폭포 가장자리에서 45m 떨어진 곳에서도 폭포소리가 천둥소리같이 크게 들리며, 물보라 벽이 공중으로 305m 이상 튀어올라 500m의 물보라 기둥이 만들어지며 70㎞ 떨어진 곳에서도 이 광경을 볼 수 있다. 폭포의 수량이 60% 이상 있을 때는 적어도 무지개를 10-12개를 볼 수 있으며 매일 달이 뜰 때면 안개에 달 무지개가 비치기도 한다.

 

빅토리아 폭포는 하나의 폭포가 아니고 5개의 폭포가 모여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영어 이름도 단수(fall)가 아니라 복수(falls)로 표시한다.

 

 


폭포의 입구는 가장자리를 따라 자리잡고 있는 섬·저지대·갑 등에 의해 몇 부분으로 나뉜다. 폭포의 동쪽 끝에는 이스턴 캐터랙트(Eastern Cataract : 14번)가 절벽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은 썰물 때 대부분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 절벽은 서쪽에서 암체어(Armchair)라고 불리는 저지대와 경계를 이루며 이 저지대가 건기에는 깊은 물웅덩이가 된다. 암체어에서 서쪽으로 레인보우(Rainbow) 폭포(13번)가 뻗어 있고, 그 옆에는 또다른 절벽이 있어 말 편자 모양의 호스슈(Horseshoe) 폭포(12번)를 이루고 있다. 호스슈 폭포를 지나 나마카브와(옛 이름은 리빙스턴) 섬이 있으며 나마카브와 섬과 캐터랙트(옛 이름은 보아루카) 섬 사이가 균열되어 형성된 메인(Main) 폭포(9-12번)가 있다. 캐터랙트(Cataract) 섬 다음에는 데빌스 캐터랙트(Devil's Cataract : 2-8번)라는 좁은 절벽이 있는데, 건기가 한창일 때도 꽤 많은 물이 떨어진다.

 

<지도 1> 빅토리아 폭포 지도

 

 

 

빅토리아 폭포의 물은 넓은 웅덩이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폭이 25~75m인 깊은 틈으로 모이는데, 이 틈은 폭포의 절벽과 같은 높이의 반대편 절벽으로 형성된 것이다. 폭포 반대편의 벼랑을 따라 레인 포리스트(Rain Forest)라는 나무가 우거진 지역이 나타나며 폭포에서 물이 튀어 1년 내내 푸른빛을 띤다. 이 폭포벽의 선반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폭포의 서쪽 끝에서 레인보 폭포 반대편, 좁은 협곡을 내려다보는 데인저 포인트(Danger Point)까지 뻗어 있다. 사나운 폭포수의 유일한 배수구인 이 협곡은 폭이 65m 미만이고 길이가 120m인데 잠베지 강물 전체가 모이는 곳이며 이 협곡의 끝은 보일링 포트(Boiling Port)라는 깊은 웅덩이로, 밀물 때에는 이곳에서 물이 거세게 소용돌이친다. 보일링 포트 바로 아래, 폭포에 거의 직각방향으로 빅토리아 폭포 다리(Victoria Falls Bridge)가 놓여져 있는데, 이 다리는 카이로에서 케이프 타운까지 영국의 종단정책을 추진했던 세실 로즈(Cecil Rhodes)에 의해 1905년에 1905년에 완성되었다. 영국에서 다리를 제작하여 이곳으로 운반하여 조립하였으며 잠비아와 짐바브웨 사이를 오가는 기차·자동차·보행인이 이 다리를 이용한다.

 

이 다리에서 번지점프를 할 수 있는데 아름다운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은 모든고민을 떨쳐버린 자유 그 자체이다. 또한 다리 바로 아래에서 래프팅을 할 수 있다. 급격한 물살에 몸을 내 맡기고 떠가는 보트는 바로 ‘탐험’과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폭포의 상류에는 아주 오래되고 거대한 바오밥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수령만 해도 1500년 정도이며 둘레가 16m로 정부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1800년대 후반에는 백인들이 이 나무를 약속장소로 이용할 정도로 주변에서 가장 크다.

 

바오밥 나무는 아프리카 전설에 따르면 신이 노해서 나무를 거꾸로 쳐 박았다고 한다. 정말로 낙엽이 다 떨어진 건기에는 멀리서 보면 뿌리가 지상에 나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주민들은 이 나무에서 바오밥 열매와 섬유질, 커누용 목재, 그리고 소금을 얻는다.

 

 


 

<지도 2> 빅토리아 폭포 래프팅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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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

2012. 7. 17. 13:35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란 용어는 분리(segregation)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이념에 의하면 모든 종족은 그들 나름의 독특한 운명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에 기여할 문화적 공헌을 갖고 있으므로 이에 따라, 각각 다른 인종들은 종족별로 분리되어져야 하며, 그들 노선에 따라 발전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그들의 부족간, 인종간 분리에 따른 발전을 구체화시킨 것이 남아공의 홈랜드 정책(Homeland project)이다. 이 정책에 의하여 흑인들은 그들이 살던 원래의 지역을 떠나 국가에서 정한 새로운 거주지로 이동하여야 했고, 여러 사회, 경제적 제약과 차별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법규들이 남아공의 백인들에게 정당화되어 법제화될 수 있었던 이념적 근거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첫째, 백인의 타인종에 대한 우월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백인우월인종론에 기초한 것으로 바스캅(Baaskap)이란 용어로 대표될 수 있다. 그들은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며 정치, 경제 등의 여러 측면에서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둘째, 성경에 근거한 종족간 분리를 들 수 있다. 이는 남아공 백인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아프카너들이 신봉하는 화란 개혁교회의 캘비니즘(Calvinism)에 의하여 지지되고 있다. 그들은 인종의 다양화․영토분할이라는 신의 계율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구약성서와 신양성서의 몇구절을 사용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신명기 32장 8절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대로 민족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또, 신약의 사도행전 17장 26절에서는 “인류의 모든 족속들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등을 인용,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적 배경에 때라 1959년 화란 개혁교회는 모든 민족과 인종이 분리되는 것은 “신의 뜻(Will of God)"이라고 천명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정책에 대한 공식적 입장을 지지 표명하였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상에는 지역에 따라 그 정치문화적 특수성에서 인종차별정책이 완전히 불식되고 있지 않으며, 아직도 인도주의적인 면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곳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인종차별정책을 실정법으로 하여 운용한 나라는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정책이 유일무이한 경우라 하겠다.

 

  특히 1949년에 제정된 혼합결혼금지법(The Prohibition of Mixed Marriage Act)은 백인과 유색인종간의 혼인을 불법화시킨 것이며 1950년에 제정된 부도덕법(Immorality Act)은 더 나아가 백인과 유색인종간의 결혼은 물론, 교제나 성행위까지를 포함한 모든 행위를 금지시킨 것이다. 또한 1953년 제시설분리법 (Reservation of Separate Amenities Act)은 사용하는 모든 시설물을 인종에 따라 구분하였다. 이러한 인종차별법들은 결국 1959년에 제정된 반투자치촉진법(Promotion of Bantu Self-Government Act)으로 결론지어진다. 흑인의 종족별 단위에 기초한 개별국가의 건설은 백인사회와 흑인사회의 완전 분리를 전제로 하여 그 분리발전(separate development)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그 궁극적인 목적은 남아공화국의 흑인을 그 종족에 따라 개별적인 홈랜드에 귀속케 함으로써 자동적으로 남아공의 국적을 잃게 만들어 흑인으로 하여금 자기 조국에서 외국인의 신분이 되게 하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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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

2012. 7. 17. 13:33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

 

 

이주와 식민지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문화적 다양성에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세기 동안에 걸쳐서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이주의 결과 아프리카 대륙의 주요한 언어집단들이 서로 교류하였고 문화이입(文化移入)이 일어났다. 불행하게도 인종적 다양성은 인종의 우열과 열등이라는 악마적인 개념을 갖게 함으로서 남아공의 정치역사에서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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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은 500년사라고 이야기하며 백인들이 이주하기 이전에는 비어있는 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미 남부 아프리카에는 산족과 코이코이족을 비롯한 코이산족과 쿨루, 코사등 반투인들이 살고 있었다.

 

백인들의 최초의 이주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The Dutch East India Company)가 인도 항로의 중간 정박 기지(기항지 ; revictualling station) 건설을 목적으로,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k)가 이끄는 3척의 배와, 130명의 남녀로 구성된 탐험대가 1652년 6월 4일 테이블만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남아프리카의 백인사회는 네덜란드 본토에서 보내는 식민 이주자들과 종교적, 경제적 목적으로 이주해 온 프랑스계, 독일계 등의 이주민들로 꾸준히 확대되었으며, 18세기말에는 영국계 선교사들도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케이프 타운을 비롯한 남아공의 주요 지명을 보면 유럽의 다양한 지명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부족한 노동력을 조달하기 위해 인근 서부 아프리카와 동인도 등지에서 노예들을 수입하는 한편 자신들이 정복한 흑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러한 이유로 케이프 타운은 새로운 인종집단이 칼러드(Coloured)가 생겨난다.

 

또한 유럽 본토에서 발생한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남아프리카의 백인사회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혁명에 잇따른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 네덜란드의 왕정이 무너지자 영국은 두 차례에 걸쳐 남아프리카 식민지를 강제로 점령하였다.

 

 

영국의 케이프 타운 지배와 영국화 정책에 항의하여 이루어진 보어인 들의 대이주(Great Trek)는 수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들은 이주자(Voortrekkers)로 불리어졌고 우마차를 타고 소위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이주를 시작했다. 이들은 철저한 켈빈교도였으며 영국의 압제를 벗어나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얻고자 하였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 이주해 각각 줄루족, 은데벨레족, 코사족 등 흑인 원주민들과 치열한 싸움을 거친 끝에 트랜스바알 공화국, 오렌지 자유공화국을 건설하였다.

 

남아공에서 금광이 발견됨에 따라 케이프 총독 세실 로즈(Cecil Rhodes)의 케이프 타운에서 카이로까지의 종단정책을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두 세력간의 적대감정은 3년간에 걸친 앙골로 보어 전쟁(Anglo-Boer War)으로 나타났다. 결국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1910년에는 케이프, 나탈, 오렌지, 트랜스바알 등 4지역이 합쳐져 대영제국내의 특수 자치령인 남아프리카 연방(The Union of South Africa)으로 새로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후 1948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정책을 내건 국민당(National Party)이 승리하기까지 남아연방의 정권은 줄곧 보어계 정당들이 장악해 왔으나 1991년 2월 1일 드 클레르크(F.W. de Klerk)는 연설에서 아파르트정책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드디어 1994년 4월 26일부터 29일까지 최초의 흑백 다인종 선거를 실시하여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0년 6월 민주당과 국민당이 합당을 통해 민주동맹당(Democratic Alliance)이 됨으로서 아프리카너 백인과 영국계 백인이 서로 화합하게 되었고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실시했던 국민당은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흑인정권 출범이후 남아공은 흑백간의 갈등 또는 흑흑간의 정권투쟁으로 인해 내전이나 종족분규로 갈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이런 예상을 깨고 넬슨 만델라가 이끄는 남아공 호는 인종간의 갈등을 화해와 타협으로 이끌어 무사히 안착했으며 염려했던 경제도 예측가능한 상황으로 회복되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한 남아공 정부는 두 번째로 출범한 타보 음베키(Thabo Mbeki)의 지도아래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사회-경제적, 문화적 민주화 과정을 시도하고 있다. 명실공히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헤게모니를 가진 지도국의 위치를 갖게 되었으며 모든 아프리카국가들의 발전모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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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은 다인종 다문화 사회다.

2012. 7. 17. 13:31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은 다인종 다문화 사회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주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cultural identity)을 가지고 있는 다인종․다문화사회다. 전체인구는 2000년 현재 약 4천 4백만 정도이며 크게 흑인(76.4%), 백인(10.9%), 칼라드(Coloured ; 8.6%), 그리고 인도인 및 아시아인(2.4%) 등 4개의 인종집단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지만 이들 각 문화집단들도 서로 완전히 통일된 하나의 문화집단으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정치적, 역사적,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이해관계를 달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은 아프리카 전 국가중 남아공에 가장 많은 백인들이 이주하였고 또 가장 최근까지 지배집단으로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인종차별정책을 실시하며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인종집단을 지배․통치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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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백인들은 아프리칸스를 모어로 사용하는 화자들과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화자들로 나누어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는 기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서로 뚜렷한 구분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너무나 다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계 백인들의 지배를 거부하고 아프리칸스를 사용하는 아프리카너(Afrikaner)들은 1830년대 케이프타운에서 내륙지방으로 대이주(Great Trek)를 하여 트랜스발 공화국(Transvaal)과 오랜지 자유 공화국(Orange Free State)을 건설하였고 결국 그들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남아프리카 전쟁(Anglo-Boer War ; 1899-1902)을 치루었다. 1948년 아프리카너가 중심이 된 국민당(National Party)이 집권한 후 제도화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아프리카너 백인들을 비롯한 각 인종집단의 정체성을 더욱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인종집단으로 인해 공식어도 1994년 이전에 공식어였던 아프리칸스어와 영어를 비롯하여 줄루어, 코사, 츠와나어, 벤다어, 쏭가어, 페디어, 소토어, 은데벨레어, 스와지어등 11개의 공식어를 가지고 있다. 수도는 3개로 분리되어 있는데 행정수도인 프레토리아(Pretoria), 입법수도인 케이프 타운(Cape Town), 그리고 사법수도인 불름폰테인(Blemfontein)으로 지역적으로 안배되어 있다. 주요도시로는 상업의 중심지로서 마치 수도처럼 인식되고 있는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 약 500만), 희망봉이 위치한 케이프 타운(약 220만), 그리고 우리의 부산과 같은 더반(Durban ; 약 110만)를 들 수 있다. 주요 산업 및 상업지역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데 특히 PWV(프레토리아, 비트바터르스란트(Witwatersrand), 페르니어너헝(Vereeniging))지역에 약 1천만 정도가 집중되고 있다. 그 외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나고 있는 케이프 반도지역, 더반, 파인타운(Pinetown), 피터마리츠버그(Pietermaritzburg)지역, 포트 엘리자베스(Port Elizabeth)지역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동부지역에서 페르니어너헝에 이르는 지역에 남아공의 인구의 2/3가 모여 살고 있으며 금세기 말에는 남아공 면적의 총 4%에 이르는 위의 4개지역에 전체인구의 약 50%가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인종적 특징을 살펴보면 케이프 타운 도시지역에서는 칼라드가 더반 도시지역에서는 인도인이 많이 살고 있다. 흑인중 최대 종족은 줄루족으로 전체 흑인의 약 36%정도이며 정치적으로는 IFP가 정치정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전체 흑인의 약 16%를 점하고 있는 코사족으로 현 집권당 ANC를 대표하고 있다. 백인들은 크게 아프리카스어화자와 영어화자로 구분할 수 있는데 역사적 문화적 차이로 상호대립적이다. 인도인은 1860년경부터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Natal지방에 들어왔으며 아시아인으로는 최대민족이다.     

 

1999년 총선에서 보인 남아공의 정당들은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 African National Congress), 신국민당(New National Party), 잉카타 자유당(IFP ; Inkatha Freedom Party), 자유전선(FF ; Freedom Front), 민주당(DP ; Democratic Party), 범아프리카회의(PAC; Pan Africanist Congress), 아프리카 기독민주당(ACDP; African Christian Democratic Party) 연합민주운동(United Democratic Movement), 아자니안민족기구(AZAPO ; Azanian People's Organisation)로 나타났으나 2000년 6월 남아공의 민주당과 국민당이 합당을 통해 민주동맹당(Democratic Alliance)이 됨으로서 정당의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양당은 케이프 타운에서 각 당별 집행위원회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합당을 결정하였다. 이로서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실시했던 국민당이 사라지게 되었다. 민주당 당수 레온(Tony Leon)이 신당의 당수가 되고 국민당의 당수 판 스칼베이크(Marthinus van Schalkwyk)가 부당수가 되었다. 총재 자리는 민주당의 현 총재인 조 세레마네가 맡는다. 양당이 합당을 통해 국회에서 차지하게 되는 의석은 민주당 38석 국민당 28석을 합쳐 총 66석이 된다. 양당 지도부는 이번의 합당을 야권 강화를 위한 중대한 발전이라며 남아공의 다당제 민주주의를 한층 더 공고히 하며 여당과의 경쟁력을 강화시켜 줄 것이라고 환영하였다.

 

 

1994년 백인정부에서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이끄는 흑인정부로의 정권교체는 황제와 종이 그 신분을 뒤바뀐 역사적 사건으로 위로부터의 민주화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한 남아공 정부는 1999년 6월 2일 두 번째로 출범한 타보 음베키(Thabo Mbeki)의 지도아래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사회-경제적, 문화적 민주화 과정을 시도하고 있으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는 남아공이 경제적 발전을 이루고 또 지속시키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정권교체이후 아시아의 경제위기를 제외하고 점진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향우 남부아프리카에서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지도국으로 그 위상을 강화시켜나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아프리카 GDP의 1/3을 점하고 있는 남아공은 그간 인종차별정책 때문에 우리나라와 수교하지 못하다가 드 클레르크(De Klerk)백인정부의 정치적 민주화 조치와 함께 1992년 12월에 수교가 이루어 졌다. 지금 현재 주남아공 한국대사관은 인접한 6개국(나미비아, 보츠와나, 레소토, 스와질랜드, 마다가스카르, 콩고민주공화국)의 대사업무를 겸임하고 있을 정도로 남아공은 남부 아프리카 진출의 교두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남아공은 남부 아프리카의 관문으로서 풍부한 지하자원과 거대한 영토(한반도의 약 5.5배), 놀랄 만한 사회간접시설과 좋은 기후조건등으로 인해 아프리카속의 유럽국가로 인식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교민의 숫자도 짧은 기간동안 1,100여명으로 급증하였고 양국간 관계도 더욱 긴밀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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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혼혈인종, 칼라드(Coloured)

2012. 7. 17. 13:28

 

 

남아공의 혼혈인종, 칼라드(Coloured)

 

 

칼라드(Coloured)라는 의미는 ‘혼혈인’이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하지만 다른 국가와 구분이 모호하고 이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하나의 인종 집단으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칼라드’라고 기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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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드는 케이프 반도 주변과 내륙에 집중되어 있으면서 주로 서부 케이프와 북부 케이프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들은 전통적으로 남아프리카 사회의 ‘의붓자식(stepchildren)'이었다. 그들의 조상은 말레이(Malays)계 노예들과 코이코이(Khoikhoi) 노동자들, 산(San)족 또는 반투족 아프리카인들과 백인들 사이에서 불법적인 결합으로 태어난 후손들로 구성된다.

 

19세기 후반에 ‘칼라드(coloured)'라는 용어는 주로 모든 비유럽인들을 의미했다. 칼라드라는 의미의 재구성과 다른 비유럽인들과 구별된 인종집단으로서의 칼러드라는 말은 20세기로 전환되는 시기에 나타났다.

 

1950년에 만들어진 인구등록법(Population Registration Act)은 아프리카인도 백인도 아닌 모든 사람들을 칼라드로 정의했다. 칼라드로 불리어진 혼혈 종족그룹은 중국인, 일본인, 인도인, 나머지 아시아인들, 말레이인, 그라쿠아(Griquas)인, 산(San)족과 코이코이족들, 다른 종족들과 혼혈이 일어난 남아프리카인과 다른 인종과 결혼한 유럽인들로 구성되었다. 칼라드는 다민족, 다문화적 집단이었다. 인도인과 나머지 아시아인들은 후에 그들 자신의 인구집단으로 분류되었다. 일본인은 명목상 백인으로 취급되었고, 중국인은 백인으로 재분류되어졌다.

 

칼라드는 역사적으로 정치적, 경제적인 힘을 갖지 못했다. 대다수는 경제적으로 도시 혹은 시골의 노동자 계급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 하에서의 법령은 그들을 백인들의 권력중심에서 유리시켰다. 또한 많은 칼러드들이 케이프 부대(Cape Corps)로 편성되어 개척자 전쟁, 보어전쟁, 그리고 제 1, 2 차 세계대전등에서 전투에 참가하였지만 1950년 국민당은 칼러드들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결국 1966년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케이프 타운의 컬러드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제 6 지구(District Six)를 백인 지역으로 선언하고 강제이주를 시키게 된다. 이 지역은 종종 ‘케이프 타운의 정신(the soul of Cape Town)'으로 불리어지는데 약 55,000명의 칼러드들이 케이프 플랫에 있는 미첼스 플레인(Mitchell's Plain)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위와 같은 일련의 상황들은 칼라드들의 적개심을 야기시켰다. 그리고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아프리카너 정부로부터 칼러드는 격리되었다. 칼라드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억압된 흑인 다수들과 같이 투쟁노선을 취하였다.

 

칼라드 사회에서는 사회계층사이에서 역동적인 계급투쟁이 존재한다. 칼라드 공동체는 3가지의 계급체제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상위계층의 가족들은 아이를 거의 갖지 않으며 하위계층의 가족들은 많은 자녀들을 가지고 있다. 젊은 칼라드 여성들 사이에는 아이를 가능한 한 적게 낳으려고 한다. 상위부류와 하위부류에서 남녀의 교육수준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높은 교육 수준에 있는 상위부류 전문인은 영어를 사용한다. 많은 칼라드 여성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은 백인 중간계급 사회의 여성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엘리트의 부류로 들어가는 방법은 아름다운 자태와 유럽인의 외모를 소유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흑인의 외모를 닮은 칼라드들은 낮은 부류로 취급되는 반면에, 유럽인의 피부와 더 많이 닮았다면 더 상위의 사회적, 경제적 부류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는 백인 아프리카너 계급에 속하지 못하였고 흑인정권이후에는 과거의 특권으로 인해 흑인들에게도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였으나 1999년 선거에서 보여주었다시피 칼러드들은 이제 정치적으로 캐스팅 보드를 쥐고 있다. 오늘날 칼러드들은 과거 케이프 역사에서 맞이했던 그 어떤 시대보다 희망적인 변화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인종이라는 울타리에서 좀더 자유로운 이들은 양극단에 치우쳐있는 백인들과 흑인들보다 객관적인 중간자적 입장에서 남아공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정책과 의견을 제시하고 있으며 화해와 협력을 주도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이끄는 새로운 집단으로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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