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물연구 22

응구기 와 시옹고/제임스 응구기(Ngugi Wa Thiong'o/James Ngugi )

응구기 와 시옹고/제임스 응구기(Ngugi Wa Thiong'o/James Ngugi : 1938-?) 케냐의 작가. 나이로비(Nairobi) 근처의 카미리투(Kamiriithu)지방의 일부다처제 기쿠유(Gikuyu)족 농부가족에서 태어난 응구기는 케냐에 있는 최고의 식민 중등학교인 얼라이언스 고등학교(Alliance High School)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우간다(Uganda)의 캄팔라(Kampala)에 있는 마케레레 대학(Makerere University College)에서 입학하였고 1964년 학부과정을 마친다. 이후에는 영국에 있는 리즈 대학(Leeds University)에서 수학하였고 이 때부터 그의 정치적인 견해는 바뀐다. 응구기는 아프리카인으로는 처음으로 1967년에..

정치/인물연구 2004.07.18

아고스티노 네토(Agostinho Neto)

아고스티노 네토(Agostinho Neto ; 1922-1979) 반식민지주의자이며 독립운동가로 독립한 앙골라(Angola)의 첫 번째 대통령이다. 앙골라 서부의 카테테(Catete)의 벵고(Bengo)에서 태어난 안토니오 아고스티노 네토(Antônio Agostinho Neto)는 음분두(Mbundu)족 출신인 사제의 아들이었다. 그는 1947년에 앙골라에 퍼져가고 있는 포르투갈의 인종차별적 문화를 멀리하고 의학공부를 위해 리스본으로 간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포르투갈에서 공부하는 모든 아프리카 학생들이 그렇듯이 앙골라의 독립을 위한 운동을 시작한다. 이러한 행위는 독재정부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파괴분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네토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대열에 빠져들게 되었다...

정치/인물연구 2004.07.18

음질리카지(Mzilikazi)

음질리카지(Mzilikazi ; 1790-1868) 은데벨레(Ndebele)왕국의 창시자이자 군사 지도자. 사카(Shaka) 이후에 가장 두려움을 주었던 아프리카 지도자인 음질리카지는 팔강(Vaal River) 남쪽 음페카네(mfecane)를 일으킨 원동력이었다. 1820년 초반에 음질리카지는 사카의 줄루(Zulu)군에서 잠시 동안 장교로 복무하였다. 전쟁승리 후에 음질리카지는 붙잡은 소떼를 샤카에게 헌납하는 대신 자기 자신의 크랄(kraal)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줄루왕은 사람들을 보내어 조사하게 하였고 음질리카지는 그들의 머리장식에서 깃털을 잘랐는데 이러한 행위는 대단한 모욕이었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일어날 복수를 피하기 위하여 음질리카지는 몇 백명이나 되는 그의 추종자들을 주루랜드(Zululand..

정치/인물연구 2004.07.18

[남아공] 월트 시술루(Walter Sisulu)

현 남아공의 집권당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원로인 월트 시술루(Walter Sisulu)가 5월 5일(월요일) 사망하였다. 그는 ANC가 창당되었던 1912년에 태어나 올해 나이 91세였다. 타보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은 나이지리아 시인 벤 오크리(Ben Okri)가 시술루의 90번째 생인에 바친 ‘한 아프리카인의 만가’라는 시를 인용하여 “당신, 월트는 하나님이 만들어 준 하나의 기적과 같다”라고 조문하였다. 오랫동안 백인 통치에 맞서 함께 싸워왔던 만델라 전 대통령도 조문을 했다. “월트 시술루는 헌신적인고 자기 희생적인 지도자이다”라고 만델라는 말했다. 시술루는 1929년 트란스케이 엔코보(Engcobo)에서 요하네스버거로 왔다. 그는 단지 스탠다드 4(6학년) 까지만 학업을 했고 이후는 혼자..

정치/인물연구 2003.05.06

나이지리아의 오바산조(Olusegun Obasanjo) 대통령

오바산조는 1937년 3월 5일 나이지리아의 옛 수도인 라고스 북부 아베오쿠타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요루바족의 중심지로 그의 가족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의 집은 가난하여 그는 대학을 진학하지 못했으며 침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군에 입대한 뒤에는 영국 사관학교의 군사지도자과정 교육을 받았다. 그는 군대에 있는 동안 인도와 영국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오바산조는 빠른 속도로 진급했으며 나이지리아 내전(비아프라 내전:1967~70) 시기에는 특공대를 이끌고 내전을 종식시키는 데 공헌했다. 1975년 정권을 장악한 무르탈라 라마트 모하메드 준장은 1979년까지 민간정부에 권력을 양도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1976년 모하메드는 암살되었고 통치권은 그의 부관인 오바산조에게 넘어갔다. 오바산조의 통치에 대..

정치/인물연구 2001.11.21

우간다의 무세베니(Museveni) 대통령

군인이자 정치가인 무세베니는 1986년부터 우간다의 대통령을 지내고 있다. 새로운 유형의 아프리카 지도자로서 이미 많은 관측자들의 관심의 대상이던 우간다의 대통령 요웨리 무세베니는 1997년의 정치 발전으로 다시금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무세베니로서는 정치 안정과 경제 성장, 사회적 생산기반의 개선 등 우간다가 활력을 되찾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만했다. 또 우간다는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후천성면역결핍증(AIDS)과의 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유일한 나라이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비스마르크'라고도 불리는 무세베니 대통령은 1당 통치와 민간기업의 혼합 기조를 무난히 이루어냈으며, 특히 우간다의 안보환경 개선과 지역 통합이라는 자신의 목표 추진에 도움이 되는 경우 인접 국가간 갈등의 중재에도..

정치/인물연구 2001.11.21

샘 누조마(Sam Nujoma) 나미비아의 대통령

샘 누조마는 나미비아 민족주의적 지도자이자 나미비아의 초대 대통령이다. 오밤보의 외진 옹간디에라 지역에서 1929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축을 돌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야간학교에 진학했으나 16세가 되던 해에 식당차의 급사가 되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철도노동조합의 결성을 기도한 이유로 쫓겨난 뒤에는 사무원과 가게점원 등을 전전했다. 윈혹(Windho다)에서 선교사 학교를 졸업한 후 1958년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하게 된다.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의 전신인 '오밤보 인민기구'를 설립했으나 1960년과 1966년에 그는 추방된 경험이 있고, 1960년 4월 19일 SWAPO가 창설되자 의장으로 지명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위임통치에 항의하는 유엔 청원서가 별다른..

정치/인물연구 2001.11.21

앙골라의 사빔비 Savimbi(1934년 - )

앙골라 반군 지도자로 독립 이후 앙골라 정부에 대항하여 오랫동안 게릴라 활동을 주도해 오고 있다. 철도 역장의 아들로 태어난 사빔비는 선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해외유학을 위해 장학금을 얻었다. 그는 포르투갈 리스본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으며 스위스 로산느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 사빔비는 앙골라 독립지도자인 홀덴 로베르토가 주도하는 앙골라 인민연합(UPA)에 참가했는데 이 단체는 당시 앙골라 인민해방운동(MPLA)과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6년 그는 UPA의 지도부와 결별하고 앙골라 완전독립국민연합(UNITA)을 결성하여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에 대항해 싸웠다. 1974년에는 네토와 로베르토와 함께 과도 독립정부를 구성하기도 하였으나 네토가 마르크스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자..

정치/인물연구 2001.11.21

우간다의 이디 아민 대통령

우간다는 동부 아프리카에서 탄자니아. 케냐에 다음가는 작은 나라이다. 인구 1,760만명으로 지형상 적도가 지나가지만 대부분은 고지인 탓에 사람살기 적합한 기후를 갖고 있다. 한국의 2배나 되는 넓이의 빅토리아 호수에 임하고 있으며 인근 다른 나라에 비하여 강우량이 많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의 적지이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우간다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감탄한다. 특히 주변의 사막과 초원만을 보다가 이 나라에 들어오면 높고 낮은 기복이 교차되는 산세와 우거진 삼림 사이를 흐르는 시내들이 아름답다. 수도 캄팔라는 인구 85만의 도시인데 오랜 내전으로 지금은 황폐되었지만 도시의 위치 와 거리의 구조가 동양적이 인상을 주어 내란 전 평화시의 번영을 넉넉히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일찍이 처칠이 우..

정치/인물연구 2001.11.13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도카사 대통령

1979년 8뭘 1일 프랑스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탕의 지시에 의하여 당시 보카사 황제에게 전달된 대통령의 친서는 아주 간단 명료했다. "죄 없는 초 중고생 100여명을 살해했고 이 살해에 보카사 대통령이 깊숙이 관계되어있는 것을 알고 있다. 프랑스는 더 이상 보카사를 지지할 수 없다. 왕위를 내 놓는 것이 유일의 길이다. 그렇게 하면 파리에서 편안히 살 수도 있고 또 연금도 받을 것이다. " 보카사 황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대통령의 고문 르테 쥬르니아크의 말을 듣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그 사절을 지팡이로 후려갈겼다. 사절은 맞지 않기 위하여 뒤로 물러서며 팔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이때 프랑스는 가봉의 봉고 대통령을 입석 시켰었는데 가를 대통령은 보카사를 뒤로 밀었다. 사절은 프랑스 대사관으로 가 지스..

정치/인물연구 2001.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