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구기 와 시옹고/제임스 응구기(Ngugi Wa Thiong'o/James Ngugi )

2004. 7. 18. 20:03
응구기 와 시옹고/제임스 응구기(Ngugi Wa Thiong'o/James Ngugi : 1938-?)

케냐의 작가. 나이로비(Nairobi) 근처의 카미리투(Kamiriithu)지방의 일부다처제 기쿠유(Gikuyu)족 농부가족에서 태어난 응구기는 케냐에 있는 최고의 식민 중등학교인 얼라이언스 고등학교(Alliance High School)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우간다(Uganda)의 캄팔라(Kampala)에 있는 마케레레 대학(Makerere University College)에서 입학하였고 1964년 학부과정을 마친다. 이후에는 영국에 있는 리즈 대학(Leeds University)에서 수학하였고 이 때부터 그의 정치적인 견해는 바뀐다.  

응구기는 아프리카인으로는 처음으로 1967년에 영국 나이로비 대학의 영어학부의 교원으로 임명된다. 그는 이때 케냐의 이중적인 문화적 삶에 대하여 경험한다. 영어 로 된 문학작품을 처음으로 발행한 케냐인으로서 그리고 다른 아프리카 대학들에게 영향을 끼친 아프리카 중심중의적(Aforcentric) 교과과정의 제안자로서 그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1978년 억압적인 정부정책에 항의하다가 1년 동안 구금을 당하기도 한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오직 기쿠유어로만 쓸 것을 결심한다.  

출감 후 나이로비 대학의 복직을 거절한 응구기는 오직 정부의 새로워진 억압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극장에서 그는 활동을 계속한다. 1982년에 체포의 위협을 받은 그는 영국과 미국으로 갔고 예일 대학(Yale University)과 뉴욕 대학(New York University)대학에서 가르쳤다. 응구기는 신식민주의에 대한 단호한 비판과 식민지의 언어보다는 아프리카어로 집필하는 것을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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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스티노 네토(Agostinho Neto)

2004. 7. 18. 20:03
아고스티노 네토(Agostinho Neto ; 1922-1979)

반식민지주의자이며 독립운동가로 독립한 앙골라(Angola)의 첫 번째 대통령이다. 앙골라 서부의 카테테(Catete)의 벵고(Bengo)에서 태어난 안토니오 아고스티노 네토(Antônio Agostinho Neto)는 음분두(Mbundu)족 출신인 사제의 아들이었다. 그는 1947년에 앙골라에 퍼져가고 있는 포르투갈의 인종차별적 문화를 멀리하고 의학공부를 위해 리스본으로 간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포르투갈에서 공부하는 모든 아프리카 학생들이 그렇듯이 앙골라의 독립을 위한 운동을 시작한다. 이러한 행위는 독재정부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파괴분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네토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대열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1958년에 앙골라로 돌아와 의료학원을 설립한다. 1960년에는 포루투갈 정치경찰(Polícia International de Defesa ; PIDE)에 의해 체포되고 처음에는 케이프 베르데의 산토 타오(Santo Antꐀo)로, 그 후에 포르투갈로 추방되었다.

네토는 1962년에 포르투갈에서 탈출하여 1961년에 앙골라에 급격하게 진행되었던 반식민지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다. 앙골라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지도력은 앙골라인민해방운동(Movimento Popular de Libertaçꐀo de Angola : MPLA)을 통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1975년 드디어 독립을 맞이하게 되고 네토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초기의 앙골라는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인해 위태로운 상황을 맞게 되지만 결국 쿠바의 군사개입으로 남아공의 침략을 물리치고 승리한다.  

1976년 말에 이루어진 남아공의 철수와 동시에 앙골라인들 에게는 스스로의 문제뿐만 아니라 동서냉전과 미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었다. 냉전이 끝나는 1980년대 말에서야 앙골라는 궁극적인 재건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비록 소련에서 그는 자신의 신념을 갖게 되었지만, 네토는 정치적으로 포로로 머물러야했고 1979년 그는 모스코바의 병원에서 숨졌다. 포르투갈에서 뛰어난 시인이었던 네토는 1974년에 최초로 탄자니아(Tanzania)에서 시집을 창작발행 하였으며, 그 해에 Sacred Hope 라는 제목의 영어 번역본으로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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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질리카지(Mzilikazi)

2004. 7. 18. 20:02
음질리카지(Mzilikazi ; 1790-1868)

은데벨레(Ndebele)왕국의 창시자이자 군사 지도자. 사카(Shaka) 이후에 가장 두려움을 주었던 아프리카 지도자인 음질리카지는 팔강(Vaal River) 남쪽 음페카네(mfecane)를 일으킨 원동력이었다. 1820년 초반에 음질리카지는 사카의 줄루(Zulu)군에서 잠시 동안 장교로 복무하였다. 전쟁승리 후에 음질리카지는 붙잡은 소떼를 샤카에게 헌납하는 대신 자기 자신의 크랄(kraal)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줄루왕은 사람들을 보내어 조사하게 하였고 음질리카지는 그들의 머리장식에서 깃털을 잘랐는데 이러한 행위는 대단한 모욕이었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일어날 복수를 피하기 위하여 음질리카지는 몇 백명이나 되는 그의 추종자들을 주루랜드(Zululand)로부터 북서부의 트란스발(Transvaal)로 이동 시킨다. 이곳에서부터 그는 자기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 줄루 난민과 망명자들을 편입시키고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소토(Sotho)의 씨족들을 정복한다. 음질리카지의 군사적 공격은 파괴적이었다. 그의 군대는 밤에 마을을 포위하고 새벽에 신속하게 공격하여 방어벽을 무너뜨렸으며 어린 소년들과 여자를 제외하고 모두 살해하였으며 마을을 불태워버렸다. 남자들은 강제로 연령집단으로 구성된 연대( age-set regiments)인 아마부토(amabutho)로 가입시켜 군대를 만들었고 여자들은 은데벨레족의 아내로 만들었다.

음질리카지는 농업, 전쟁, 결혼 그리고 세금 등 모든 것을 통제하는 광범위한 법적 규범을 바탕으로 강한 중앙집권적 왕국을 건설하였다. 은데벨레 사회로 귀속한 난민들은 보호를 받는 대신 노동을 해야 했고 어린 남자들은 연령집단으로 구성된 아마부토에 복무하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음질리카지는 군사공격을 피하고 기반을 확대시키기 위해 은데벨레족을 자주 이동시켰다(1827년, 1832년, 그리고 1837년). 1830년대에 은데벨레족은 매우 강력한 전투부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약 6천명에서 8천명에 달했다. 1832년에 음질리카지를 추격하기 위하여 사카의 후임자인 딩가네(Dingane)가 줄루의 전군을 파견하지만 줄루군은 단지 몇 마리의 소를 가지고 돌아왔고 전투에서  3개 연대를 잃는다. 은데벨레는 1836년에 베그콥(Vegkop)의 아프리카너(Afrikaners)들을 공격하게 되는데, 6천명병력 중 약 430명을 잃었으며 수천 마리의 아프리카너들의 양, 소 그리고 소달구지를 약탈하거나 죽인다. 음질리카지는 이후 아프리카너, 그리쿠아(Griqua), 그리고 로롱(Rolong)의 동맹군의 공격과 줄루의 침공을 피해 이동한다.

음질리카지와 은데벨레는 1840년대에 약 1만 5천에서 2만 명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하여 지금의 짐바브웨의 남서쪽에 위치한 불라와요Bulawayo)에 영구적인 수도를 설립한다. 이곳에서 음질리카지는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선주민인 쇼나(Shona)족을 지배 정복하고 남아공에서부터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보어인(trek-Boers)의 공격을 방어함으로써 자신의 왕국을 확장하고 보호하였다(1847-1851). 그는 1852년에 아프리카너들에게 강제로 평화조약에 서명을 하게하여 그 지역에 안전을 가져오는 듯 하였으나, 1860년대에 금이 발견됨으로서 유럽 이민자들이 엄청나게 밀려들어오자 이러한 안정은 오래가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토지에 대한 권리문제로 계속해서 일어난 분쟁은 음질리카지의 아들이 로벵굴라(Lobengula)에 와서 끝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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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월트 시술루(Walter Sisulu)

2003. 5. 6. 10:23
현 남아공의 집권당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원로인 월트 시술루(Walter Sisulu)가 5월 5일(월요일) 사망하였다. 그는 ANC가 창당되었던 1912년에 태어나 올해 나이 91세였다.
타보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은 나이지리아 시인 벤 오크리(Ben Okri)가 시술루의 90번째 생인에 바친 ‘한 아프리카인의 만가’라는 시를 인용하여 “당신, 월트는 하나님이 만들어 준 하나의 기적과 같다”라고 조문하였다.

오랫동안 백인 통치에 맞서 함께 싸워왔던 만델라 전 대통령도 조문을 했다. “월트 시술루는 헌신적인고 자기 희생적인 지도자이다”라고 만델라는 말했다.
시술루는 1929년 트란스케이 엔코보(Engcobo)에서 요하네스버거로 왔다.

그는 단지 스탠다드 4(6학년) 까지만 학업을 했고 이후는 혼자서 배웠다. 시술루는 요하네스버거에서 광산노동자가 되었으며 위험스럽고 열악한 환경에서 1마일 이상의 땅속에서 일을 했으며 침낭에서 잠을 잤다. 그의 다음 직업은 이스트 런던에서 주방 보조원이었다. 그후 그는 일주일에 18실링을 받고 요하네스버그의 제과점에서 일했다.

그는 그곳에서 노동조합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임금인상을 위해 그의 동료들과 파업을 했다. 그 파업은 실패하였고 그는 해고 당했다. 시술루는 1940년 ANC에 가입했고 ANC 단체 중에서도 보다 과격한 ANC 청년연맹을 1943년에서 1944년사이에 형성하였다.

1920년대 말에 ANC 조직의 지도력은 남아공 공산당과 협력을 할 것인가를 두고 심각하게 분열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ANC 지도력에서 보수파들의 승리로 인해 회원들의 탈퇴와 조직의 구성이 느슨해졌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이 법제화되고 본격화되자 보다 젊은 지도자들 하에 ANC는 보다 호전적인 자세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ANC 청년연맹은 시술루와 올리버 탐보(Oliver Tambo) 그리고 넬슨 만델라의 합류로 급성장하였으며 이들은 이전의 온건파 지도자들을 대신하여 ANC의 조직을 강화시키고 백인정권에 체계적으로 대항하게 되었다.

시술루, 탐보 그리고 만델라의 지도력하에 ANC는 비폭력 저항, 파업, 보이코트 그리고 행진 등의 캠페인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경찰들에게 체포되기도 하였다.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ANC는 통행권을 소지한 사람에 한해 자유롭게 이동하게 한 ‘패스법’(pass law)법에 격렬히 저항하였으며 이 시기 ANC 회원도 급속히 증가하여 1952년에는 10만명에 육박하였다.

1944년 시술루는 알버티나(Nontsikelelo Albertina)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시술루는 1949년 ANC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54년까지 그 직을 유지하였다.

그는 인종차별정책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 운동을 위한 ANC 운영위에 합류하고 1953년 불복종 운동이 시작되자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 불복종 운동은 모든 아프리카인들이 항시 휴대하고 다녀야 하는 인종차별의 상징인 통행권을 불사르는 운동으로 이 사건이후 수백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체포되었다. 시술루도 체포되어 1956년에 시작된 트리선 재판(Treason Trial)에 기소되었다.

1960년 국가 긴급조치 기간 동안 그는 재판도 없이 구금되었다. 그는 1962년 6번째 체포되었고 1963년에 4월 3일에도 24시간 억류되었다.
1963년 4월 19일 그는 재판에서 6년형을 언도받았으며 또한 6천란드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1964년 리보니아 재판에서 그는 사보타지와 다른 혐의로 기소되었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악명 높은 로빈(Robben) 섬의 정치범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1989년 10월 26년간의 감옥 살이를 끝내고 석방되었다.

그는 1991년 6월 ANC 회의에서 ANC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94년 남아공의 최초 다인종 선거에서 ANC의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1992년 그는 자유를 위해 헌신적인 투쟁을 한 공로로 ANC에서 최고의 명예를 여기는 Isitwalandwe Seaparankoe 상을 수상했다.
시술루는 1994년 그의 ANC 부의장 직을 그만두고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ANC 사무실에서 그가 사망할 때까지 국가를 위해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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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의 오바산조(Olusegun Obasanjo) 대통령

2001. 11. 21. 20:54
오바산조는 1937년 3월 5일 나이지리아의 옛 수도인 라고스 북부 아베오쿠타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요루바족의 중심지로 그의 가족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의 집은 가난하여 그는 대학을 진학하지 못했으며 침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군에 입대한 뒤에는 영국 사관학교의 군사지도자과정 교육을 받았다.  그는 군대에 있는 동안 인도와 영국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오바산조는 빠른 속도로 진급했으며 나이지리아 내전(비아프라 내전:1967~70) 시기에는 특공대를 이끌고 내전을 종식시키는 데 공헌했다.

1975년 정권을 장악한 무르탈라 라마트 모하메드 준장은 1979년까지 민간정부에 권력을 양도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1976년 모하메드는 암살되었고 통치권은 그의 부관인 오바산조에게 넘어갔다. 오바산조의 통치에 대해 논란이 없지 않았으나 그는 모하메드의 일정대로 민간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기 위한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1979년 선거에서 오바산조는 자신은 출마하지 않기로 하면서, 주로 이슬람 지역인 북부의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동포인 요루바족의 분노를 샀으나 북부의 하우사족·풀라니족 지도자들에게서는 신망을 얻었다. 이로써 오바산조는 나이지리아 군부 지도자로서 민간정부에 권력을 이양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 후 몇 년에 걸쳐 나이지리아의 정정이 극히 불안해지는 동안 오바산조는 외교 역할을 맡아 국제연합(UN)이나 기타 기구에서 여러 직책을 담당했다. 1995년 그는 아바차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었다. 그러나 아바차가 심장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감옥에서 석방된 오바산조는 다수당인 인민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에 가입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대통령선거에서 63%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주적이고 투명하고 부패 없는 나이지리아를 건설하겠다는 오바산조의 목표는 서구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으로 그의 민주화의 실험은 선진국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나이지리아의 민주화 상황은 점차 개선되어 미국은 나이지리아에 대한 적극적인 경제원조를 지원하고 있다.
남아공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정치, 경제적 헤게모니를 선점하기 위한 노력도 치열해 선진국들과 관계개선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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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의 무세베니(Museveni) 대통령

2001. 11. 21. 20:39
군인이자 정치가인 무세베니는 1986년부터 우간다의 대통령을 지내고 있다.
새로운 유형의 아프리카 지도자로서 이미 많은 관측자들의 관심의 대상이던 우간다의 대통령 요웨리 무세베니는 1997년의 정치 발전으로 다시금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무세베니로서는 정치 안정과 경제 성장, 사회적 생산기반의 개선 등 우간다가 활력을 되찾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만했다. 또 우간다는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후천성면역결핍증(AIDS)과의 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유일한 나라이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비스마르크'라고도 불리는 무세베니 대통령은 1당 통치와 민간기업의 혼합 기조를 무난히 이루어냈으며, 특히 우간다의 안보환경 개선과 지역 통합이라는 자신의 목표 추진에 도움이 되는 경우 인접 국가간 갈등의 중재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무세베니는 1944년 우간다 남부 음바라라에서 목축업에 종사하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를 거쳐 1966년 은타라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탄자니아 다레살렘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오보테 우간다 전 대통령 밑에서 이디아민에 의한 쿠테타(1971)가 발생하기 전까지 일을 했다. 재학 중 아프리카해방운동과 동맹관계에 있던 좌익 학생단체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71년 이디 아민이 집권하자 무세베니는 탄자니아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망명길이었다. 이디아민에 의해 쿠테타가 발생하자 그는 탄자니아로 망명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민족해방전선을 형성하여 1979년 이디아민을 축출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그는 1979년부터 80년까지 국방부장관을 지냈으며 오보테와의 불화로 1980년에 물러난 후 과도정부에서 일하다가 1980년 우간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부정선거를 통해 밀턴 오보테가 승리하자 무세베니는 민족저항운동(National Resistance Movement)을 결성했다. 결국 저항세력이 승리해 1986년 1월 26일 무세베니는 우간다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96년 5월 9일 재선되었고, 1개월 뒤에 치른 총선에서는 그의 지지자들이 의회를 장악했다.

청년시절에는 마르크스주의 신봉자였지만 경제발전에는 자유기업 체제가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에서 다당제 민주주의는 부족간의 정략정치로 타락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거부했다. 동시에 그는 언론이 종종 자신의 정책을 비판했음에도 언론의 자유을 허용했다. 무세베니는 또, 이제 싸워야 할 상대는 식민지 이주자들이 아니라 부패한 통치자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아프리카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방이 아니라 스스로를 의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마도 그의 정책 중 가장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반란 세력들에 대한 지지인데, 그중에는 1997년 인접 국가인 자이르(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모부투 세세 세코를 축출한 로랑 카빌라도 있다. 무세베니는 르완다 정부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투치족과 수단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통치자들과 투쟁하는 집단도 지원했는데, 그 집단의 지도자는 그의 옛 학교 동창이다. 무세베니는 자신의 목표가 정치 및 경제 분야의 지역 통합을 달성하는 데 있다고 선언하면서, 부패한 정권의 반대 세력들에 대한 지지는 그러한 통합체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무세베니하의 우간다는 성공적인 경제수행으로 최근 몇 년간 7~8%의 경제성장을 달성하여 아프리카의 신흥 공업국가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만연하고 있는 에이즈퇴치 문제에도 적극 개입하여 에이즈 발병률을 크게 낮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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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누조마(Sam Nujoma) 나미비아의 대통령

2001. 11. 21. 20:22
샘 누조마는 나미비아 민족주의적 지도자이자 나미비아의 초대 대통령이다.  오밤보의 외진 옹간디에라 지역에서 1929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축을 돌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야간학교에 진학했으나 16세가 되던 해에 식당차의 급사가 되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철도노동조합의 결성을 기도한 이유로 쫓겨난 뒤에는 사무원과 가게점원 등을 전전했다.
윈혹(Windho다)에서 선교사 학교를 졸업한 후 1958년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하게 된다.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의 전신인 '오밤보 인민기구'를 설립했으나 1960년과 1966년에 그는 추방된 경험이 있고, 1960년 4월 19일 SWAPO가 창설되자 의장으로 지명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위임통치에 항의하는 유엔 청원서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1966년 SWAPO를 이끌고 앙골라 남부를 거점으로 무장투쟁에 돌입했다. 영토의 회복에까지는 미치지 못했지만 누조마의 게릴라 활동은 나미비아 문제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73년의 유엔 총회는 SWAPO를 나미비아 유일의 합법적인 대표기관으로 인정했고, 1978년 안전 보장이사회에서는 나미비아의 독립조건들을 예시한 '435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198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받아들였다. 1989년 9월, 30여 년 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온 샘 누조마는 유엔의 감시하에 치러진 11월의 선거를 SWAPO의 승리로 이끌었고, 1990년 3월 21일 독립이 이루어지던 날 신생국 나미비아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사기도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민주사회주의의 실용주의 노선에 더 이끌리고 있다고 토로한다. 공약으로 '국민화합'을 내세운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최근 다시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고 이는 독재자로의 길을 걷고 있다는 주의의 비판을 듣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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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골라의 사빔비 Savimbi(1934년 - )

2001. 11. 21. 20:12
앙골라 반군 지도자로 독립 이후 앙골라 정부에 대항하여 오랫동안 게릴라 활동을 주도해 오고 있다. 철도 역장의 아들로 태어난 사빔비는 선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해외유학을 위해 장학금을 얻었다. 그는 포르투갈 리스본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으며 스위스 로산느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 사빔비는 앙골라 독립지도자인 홀덴 로베르토가 주도하는 앙골라 인민연합(UPA)에 참가했는데 이 단체는 당시 앙골라 인민해방운동(MPLA)과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6년 그는 UPA의 지도부와 결별하고 앙골라 완전독립국민연합(UNITA)을 결성하여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에 대항해 싸웠다.  1974년에는 네토와 로베르토와 함께 과도 독립정부를 구성하기도 하였으나 네토가 마르크스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자 곧 무장투쟁을 벌였다.
사빔비는 앙골라가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앙골라에 남아 투쟁을 계속했던 유일한 게릴라 지도자였다. 이 당시 그는 자신의 소규모의 지원자들을 무장한 수천의 게릴라 조직으로 확대했다. UNITA는 남부 앙골라에 기반을 두고 앙골라 최대 규모의 종족인 오빔분두 종족의 후원에 의지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사빔비는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미국 등으로부터 지원을 얻었는데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으며 중앙정부를 통치하고 있는 MPLA에 대항하는 조직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MPLA는 무장투쟁에 의해 UNITA가 연합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MPLA에 대항하여 파행적인 게릴라 전투를 계속 전개했다.  특히 그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소유하고 있어 이를 반군자금으로 용하고 있다.  1992년에는 앙골라 총선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총선에서 패배하자 다시 정부군에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하고 있다.  1994년 UNITA는 사빔비가 부통령으로 입각하는 조건으로 잠시 평화합의를 이끌기도 했으나 곧 평화안이 결렬되었다. 탈냉전과 남아공의 흑인정권 등자응로 UNITA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일반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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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의 이디 아민 대통령

2001. 11. 13. 19:59
우간다는 동부 아프리카에서 탄자니아. 케냐에 다음가는 작은 나라이다. 인구 1,760만명으로 지형상 적도가 지나가지만 대부분은 고지인 탓에 사람살기 적합한 기후를 갖고 있다. 한국의 2배나 되는 넓이의 빅토리아 호수에 임하고 있으며 인근 다른 나라에 비하여 강우량이 많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의 적지이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우간다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감탄한다. 특히 주변의 사막과 초원만을 보다가 이 나라에 들어오면 높고 낮은 기복이 교차되는 산세와 우거진 삼림 사이를 흐르는 시내들이 아름답다.
수도 캄팔라는 인구 85만의 도시인데 오랜 내전으로 지금은 황폐되었지만 도시의 위치 와 거리의 구조가 동양적이 인상을 주어 내란 전 평화시의 번영을 넉넉히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일찍이 처칠이 우간다를 아프리카의 진주라고 표현했다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다.
1862년 영국의 스페케가 나일강의 근원을 찾을 셈으로 이곳에 처음 왔었는데 그때 벌써 이 지역에는 부간다 왕국이 있었고 또 그 주변에 붕요로, 앙콜레, 토로 등 6개의 소왕국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유럽인이 오기 전 이미 왕국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인근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개화되었음을 말해준다. 1877년 영국의 프로테스탄트가 와서 기독교를 선교하기 시작했고 1879년에는 카톨릭 교회가 들어왔다. 그후 1897년에 이르러 우간다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영국은 각 왕국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형식의 간접지배 정치를 해왔다. 이때에 이들 왕국에 속하지 않은 지역은 영국 지배하의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했다.
1962년 3월 영국은 이들 왕국을 우간다 연합왕국으로 구성, 자치권을 부여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 우간다의 완전 독립을 선언했다. 이 연합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는 전 우간다 왕국의 카바가 왕 무테사2세가, 부통령에는 붕요로 전 왕국의 나다오프, 총리에는 밀튼 오보테가 임명되었다.
후에 오보테는 무테사 대통령을 추방하고 정권을 잡았다. 대통령은 군대가 왕궁에 침입하였을 때 간신히 몸을 피하여 영국에 망명, 가난과 시름 속에서 1969년 사망하였다.  훗날 아민이 정권을 잡고 1971년 이 왕의 유해를 모국에 실어다 안장함으로써 국민의 환심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신생 독립국 우간다의 정권은 오보테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디 아민으로 이어지면서 폭력과 00학정이 난무했고 오늘의 비참한 정세에 이르게 되었다.
오보테가 정권을 잡는데는 1966년 당시 육군 사령관이었던 아민의 공이 컸다. 1967년에서 71년까지 오보테 정권은 여러 형태로 권력을 남용했다. 자기 출신 부족인 랑고인만을 군 및 기타 정부의 고위직에 기용하여 불평을 샀다. 그가 싱가포르를 방문으로 국내에 없을 때에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오보테를 추방하고 우간다의 정권을 잡았다. 오보테는 귀국 도중 기내에서 이 뉴스를 듣고 탄자니아로 망명했다.
아민은 1925년 우간다 북부 나일강 유역에 있는 소수민족 가구와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21세에 영국군에 입대하였고 1951년에서 60년까지 헤비급 권투선수로 이름을 날렸었다. 우간다의 국민들이 6년간의 오보테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을 무렵 등장한 아민은 국민들에게 큰 기대감을 주었다.
1971년 아민은 당시의 나이 46세로 우간다의 제 2대 대통령이 되었다. 초기의 국민 환호나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권하자마자 정당활동을 금지시켰고 입법, 행정, 사법과 군대를 한 손에 잡고 국군과 비밀경찰을 공포 정치의 무기로 삼았다. 아민의 사병은 그 4할이 외국인인 누비아족으로 부르는 수단인 이고 나머지 반은 자신의 고향인 서 나일지역 출신의 이슬람교도로 채웠다. 전 오보테 대통령의 출신부족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학대했다. "신이 꿈속에서 자기로 0하여금 그렇게 하라고 했다. "고 하면서 경제의 우간다화를 내걸고 1972년 8월 우간다 경제의 주권을 잡고 있던 영국적 아시아인 약 8만 명을 맨손으로 내쫓았다. 이들은 대부분 인도인이었다. 아민은 이들이 우간다의 경제발전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을 과소 평가한 것 같았다. 그는 또 영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을 간첩으로 몰아 국외로 추방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예 종주국인 영국과 구미의 거센 반발을 초래하였으나 아민 대통령은 오히려 1973년 3월에 "영연방 수뇌회의에 참석하니 영 왕실의 특별기와 경비용 친위대를 보내라"고 호통을 치면서 엘리자베스 여왕을 우롱하기도 하였다.
아민은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부농, 상인, 관료 등 유력 집단을 서로 대립시키는 분리통치의 수법을 사용했다. 자기에게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게는 가차없는 고문, 비밀살해 또는 집단살해를 단행했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입회 하에 살해하였다.  당시 유명인이 갑작스레 교통사고로 죽음을 당하거나 행방이 절연해지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모두 이렇게 살해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최고 권력 기관인 "방위 평의회"회원 7명은 모두 아민의 친척이 거나 동족인데도 1977년 말에 이르러 그중 6명이 사라졌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잔인한 정치를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런 공포정치 하에서 농업, 상업은 정체되고 행정은 마비되었으며 일상 필수품이 모자라고 물가고와 극심한 인플레가 일어났다.
농민은 공영시장에 농산물을 내놓으면 이윤이 남지 않으므로 코피등의 주요산물을 밀수출한다. 우간다의 공업도 역시 주로 농산물 가공업으로 농업의 부진이 곧 공업의 정체와 연결된다. 이에 외화 수입의 9할을 정하는 코피가격의 하락과 인권문제에 따르는 미국의 제재 등으로 구미제국에 대한 수출(전 수출의 약 80%)이 떨어지자 경제는 격심한 위기 에 처했다.
군은 처음에 주거와 식품 등 물질적으로 우대를 받았다. 일반 시민들은 식빵, 소금, 설탕, 등을 얻기 위하여 장사진을 치고 있는데 군 상층에서는 케냐나 영국으로 출장가서 사치스러운 물건을 사며 즐겼다. 그러나 아민은 1973년 이후 이들 군인들로부터 무기를 압수하고 대우나 승진도 대통령 지신의 기호에 따라 좌우하였다. 대통령 출신지역의 군인이 아니면 신용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군인들은 또 다른 형태로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아민의 첩보망은 국민 속에 파고 들어가 있었으며 반란 응모가 발각되는 즉시 처형되었다.
반 아민의 기세가 전 군대에 파급되자 아민은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옆 나라 탄자니아가 우간다를 침략하려한다. "는 허위보도를 흘려 우간다 군을 탄자니아 영내로 침입시켰다. 2∼3일 내에 우간다 군은 카재라 강에 접한 탄자니아 지역의 약710평방 마일을 점령하였다. 빗발 같은 세계의 여론에 따라 수일 내에 군을 철수시키기는 하였으나 탄자니아는 그 사이 약탈과 인명의 손실을 많이 보았으며 당시 탄자니아의 대통령 니에레레는 뱀들이 우글거리는 우간다의 정글을 없앤다하여 즉각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사태는 아민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1979년 탄자니아 정규군과 "아민 타도"로 단결한 망명 우간다인 조직인 우간다 민족해방전선에 속하는 군인 약4,000명이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를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관계로 수도를 방위하고 있던 리비아군 2,000명도 반 아민 세력을 막기에는 부족하여 같은 해 4월 6일 캄팔라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아민 대통령은 수도 캄팔라에서 80km지점에 있는 우간다 제2의 도시 진자에서 전용기를 이용, 리비아로 탈출했다. 이것으로써 악명 높은 검은 히틀러 아민은 정치권에서 사라졌다.
1981년 2월 그는 망명중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서 미국의 AP통신사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나는 지금 보통 사람이다. 요리도 하고 다림질도 하고 또 청소도 한다.  열두 명의 아들과 열 명의 딸이 있는데 한달 식비가 100달러이다. 나는 가난하다. 다른 나라의 국가원수와 같이 스위스 은행에 예금해 놓은 돈도 없다. 내 아이들의 교육비를 미국 정부가 좀 마련해 줄 수는 없을까. 나의 조국 우간다에서는 13,000명의 지지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우호국의 지원만 있으면 일주일 내에 우간다를 탈환할 수 있을 텐데..." 한때 종신 대통령, 육군 원수, 외무, 내무, 국방, 정보, 방송, 보건, 관광상들을 정무하며 세상 무서운 줄 몰랐던 아민 장군이 모국에서 추방되어 사우디 등 이슬람교 나라들을 방황하고 있다. 현 대통령 무세베니는 1989년 말 대통령 임기가 끝나지만 한번 더 대통령을 해야겠다는 말 한마디로 총선 없이 제 2기 대통령이 되었고 모든 각료들이 유임되었다. 그러나 유스후 후레 대통령의 잠정 정부, 고드퇘리 정부 등의 혼란기 이후 1986년 정권을 잡은 무세베니 대통령은 집권 이후 도로, 보건시설, 산업기관 등 많은 것을 개선하였고 특히 치안 상태 개선에 많은 힘을 기울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세베니 현 우간다 대통령은 1990년도에 OAU 의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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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도카사 대통령

2001. 11. 13. 19:56
1979년 8뭘 1일 프랑스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탕의 지시에 의하여 당시 보카사 황제에게 전달된 대통령의 친서는 아주 간단 명료했다.
"죄 없는 초 중고생 100여명을 살해했고 이 살해에 보카사 대통령이 깊숙이 관계되어있는 것을 알고 있다. 프랑스는 더 이상 보카사를 지지할 수 없다. 왕위를 내 놓는 것이 유일의 길이다. 그렇게 하면 파리에서 편안히 살 수도 있고 또 연금도 받을 것이다. "  보카사 황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대통령의 고문 르테 쥬르니아크의 말을 듣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그 사절을 지팡이로 후려갈겼다. 사절은 맞지 않기 위하여 뒤로 물러서며 팔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이때 프랑스는 가봉의 봉고 대통령을 입석 시켰었는데 가를 대통령은 보카사를 뒤로 밀었다. 사절은 프랑스 대사관으로 가 지스카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프랑스의 지도자는 "나의 친애하는 친척"이라고 하면서 보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카자는 단 하나밖에 없는 자기 후원자로부터 전화를 받지 않고 끊었다.
중앙아프리카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황제는 대통령의 사자를 때림으로써 프랑스의 명예를 손상시켰다. 보카사는 리비아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카톨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을 고쳤다. 50일 후 보카사가 리비아를 방문한 9월 20일, 21일 이틀동안에 1,000명의 프랑스군이 수도 방기에 내려 간단하게 보카사를 추방하고 1967년 보카사에 의해 쫒겨났던 데이비드 다고를 대통령에 복직시켰다.
트리폴리에서 카다피로부터 돈을 받은 황제는 쿠데타의 성공을 알고 프랑스에 입국하기 위해 파리 비행장에 들어왔다. 황제는 나폴레옹을 숭배했고 "스다르(고참병이라는 뜻)"라고 불러주는 드골을 아버지로 존경했다. 지스카르가 재무상을 지낼 때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기증하고 또 그가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는 "몽시에르 파랑(친한 친척)"이라고 부르며 국내에서 같이 수렵을 즐기기도 했다. 이처럼 프랑스에게는 절대적인 자신을 가졌던 황제는 기내에서 50여 시간 걸쳐 프랑스정부와 입국을 교섭하였으나 끝내 거절을 당하고 코트디브와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중앙아프리카 제국은 1년 9개월 17일만에 끝났다.
보카사는 우방기 샤리(중앙아프리카의 구 이름)의 현 인구 280만의 5%에 지나지 않는 소수민족인 무바까인의 전통적 추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이 민족은 일찍이 프랑스 교육을 받았고 프랑스인 식민지 지배자 아래에서 일했기 때문에 이 나라의 정치 행정에 깊숙이 참여했다. 초대 대통령 다코는 보카사의 4촌 동생이고 수상이 숙부였다. 보카사 황제는 18세에 프랑스군에 입대하였으며 그후 22년간 아프리카, 유럽, 인도지나 등에 파병되어 15개의 훈장을 받고 대위로 승진했다. 1958년 모국이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으로 프랑스 공동체내의 한 자치국이 되자 귀국하여 군대를 조직하였다.
1960년 8월 정식으로 독립을 하고 1966년에 군사령관이 되면서 쿠데타를 일으켜 다코를 추방하고 실권을 잡았으며 1972년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1976년 중앙아프리카제국으로 헌법을 개정하였으며 1977년 12월 4일 보카사 황제는 여섯 마리의 흰말이 이Rm는 묵직한 마차에 실려 르네상스 궁전(전 대통령 관저)을 나왔다. 황제가 되는 대관식에 가기 위한 길이었으며, 2m나 되는 금지팡이를 받아 들고 6m 길이의 빨간 비로도 흰 모피의 외투를 입었 다.
"국민 앞에서 전 인류의 역사 앞에서 헌법의 준수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호를 선서한다. "고 선포하고 2,000개의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왕관을 스스로 머리 위에 얹었다. 보카사는 이 대관식을 1804년 나폴레옹 대관식과 같이 화려하게 하고 싶었다. 이 대관식의 비용은 77년 국가 예산의 2배였다. 당시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경제 원조를 중단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황제는 수도 방기에서 80km 떨어진 베렝고 궁에서 백인 여성을 포함한 몇 사람의 부인과 20여명의 자식들과 함께 화려한 가구와 3대의 전용기, 35도의 말을 가지는 등 호화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 20여명의 자식 중에는 월남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도 있는데 동양적인 미모를 지닌 이 딸은 현재 의사와 결혼하여 이 나라에서 살고 있다.   나라는 쇠퇴할 대로 쇠퇴하고 빈번한 숙청으로 인재가 없어졌다. 관료들은 황제에게 아부만 할 뿐 나라의 행정은 마비되고 생산은 독립 전으로 돌아가고 국민의 원성이 높아졌다. 보카사 황제 퇴진의 주요 원인인 아동학살은 황제가 수도의 초, 중학생에게 제복을 강제 착용시키는데 반발이 일어나자 이들을 형무소에 잡아 쓸어놓고 친위대로 하여금 학살케 한 것이다. 이 잔학한 행위에 황제가 직접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복 한 벌은 100프랑으로 주민의 월 평균 수입이200프랑인 것과 비교해 볼 때 고가의 의복이다. 이 제복이 봉제공장은 황제의 소유이며 소매점은 황제의 부인이 경영하는 것으로 황제의 일족으로 사욕을 채우기 위한 정책이었다.
보카사는 지금 처음의 망명 지인 코트디브와르에서 환국하여 현 콜린그바 정권에서 재판을 받고 복역중이다.
"나는 어디든지 있고 어디에도 없다. 나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나 모든 것을 보고 듣는다. "라고 하면서 지신을 신격화하고 국민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강요했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반동으로 보이면 여지없이 그를 숙청했다. 그는 아민과 같이 흉악무도한 권력을 휘두르며 나라와 민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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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잘 봤습니다. 덧붙여, 도카사가 아니라 보카사가 맞는 걸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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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습니다! 보카사입니다! ^^^^

잠비아의 카운다 대통령

2001. 11. 6. 15:51
1990년 7월 초 폭도들이 정부가 식량가격을 올린 데에 반대하여 수도에 몰려들었다. 그들의 제일 목표지는 오힐렌제로 알려진 시 일각 에 있는 자그마한 돌집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10여명의 폭도들은 철책을 떼었다.  이곳은 대통령이 지금까지도 집권을 하고 있는 당시 당년 66세의 카운다의 옛집이다. 루가사이에는 그런 집이 두 곳에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가 정부재정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식량과 기타 생활 필수품 가격을 근 2배로 올린 것이 결국 23명의 희생자를 낸 폭동의 원인이 된 것이다.
잠비아인은 한 가족이 2주간 먹을 수 있는 식량 25kg들이 한 부대에 3.5달러에서 7달러를 지불하게 되었다. 잠비아인의 평균 연 수입은 300달러이다. 여기에 흥분한 육군 중위가 잠비아 라디오 방송국을 몇 시간 점령하고 "카운다가 물러났다"고 방송을 했다. 비록 이 사건은 곧 진압이 되었지만 이는 시민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으며 "육군이 카운다 정부를 무너뜨렸다. "는 소식을 듣자 수백 명의 시민들이 시 중심으로 뛰쳐나와 환호를 올렸다. 국민들의 이러한 반응은 국민들이 정부에 어떤 변화가 있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이번 가격 인상은 경제를 회복하기 위하여 예산을 긴축하고 세계 은행이나 IMF로부터 원조를 받기 위하여 책정된 몇 가지 변화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 소동은 장기간의 일인 독재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었으며"KK는 물러가라, 일당제도 사라져라"고 절규했다.
잠비아의 독립 후 지난 30년간 카운다는 남부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을 지도해온 이 지역의 역사를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독재와 일당주의가 한나라의 안정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시기에서부터 정권을 유지해온 사랑이다. 중앙집권이 필요하다고 오랫동안 믿어온 카운다는 최근까지도 국민경제의 90%정도는 정부에서 관할해야 한다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 나라의 부채는 1인당 1,000달러이며 이는 사하라 이남지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760만 인구의 50%가 도시 지역011 살고 있다.
카운다는 1972년 일당제를 선포하고 당 독재의 정치를 실시해왔으며 고위직들의 부패가 심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즉 다이아몬드와 기타 광물의 연간 생산의 80%가 딴 나라에 밀수출되었다고 한다. 동의 국제시세가 급격히 하락되면서 국가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한 외채의 도입이 늘어났다.
카운다는 기독교인인 신사이며 대중 앞에서의 연설에서 눈물을 잘 흘리는 사람으로 국민에게 인기 있는 정치가였다. 1986년 이 나라가 IMF의 권고에 의하여 긴축재정을 택하였을 때에도 폭동이 일어났다. 이 당시 카운다는 외채지불을 연기하고 아프리카의 나라들이 신 식민주의의 앞잡이라고 생각하는 IMF의 요구를 일축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카운다는 지금 당시의 IMF권고와 같은 중대한 변화를 감행해야 하는 시기에 놓여 있다.
1990년 7월 25일 카운다 대통령은 모든 정치법을 석방한다고 발표하면서 다당제 채택을 위한 국민 투표는 90년 10뭘 17일 예정에서 91년 8월 13일로 연기했다. 그 이유로는 잠비아의 수백만 국민에 대한 선고인 명단이 불분명하다는 것으로써 국민들을 사법부에 빠른 시일 내로 새 선거인 명단을 작성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90년 8월 한달 동안 실시되었던 수도 지역의 야간 통행금지는 해제하였으나 25년이나 계속되었던 전국의 비상조치 해제 요구는 외부 세력의 침입위협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국민들은 새로운 인물의 출현이 필요하다고 절감0하고 있기는 하지만 장비아가 앞으로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잠비아는 아프리카의 4대강 중 하나인 잠베지강이 있는데 독립 후 나라이름을 잠베지강의 이름을 따서 잠비아라고 했다. 독립 후 이 나라의 주요 당으로는 두 개의 당이 있었는데 1968년 카운다는 국가통합이라는 명목으로 야당을 말살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의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은 심지어 어린 시절의 친구까지도 가차없이 탄압하고 형무소로 보낸다. 카운다는 1988년 임기 5년의 제 6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83년 제 5대 선거에 비하여 득표 율이 적은 것은 현정부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잠비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전망이 밝은 성공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동(銅)의 세계 생산량의 4분의 1일 잠비아에서 생산되고 1970년대에는 연 10억 달러의 수출을 했다. 그러나 동의 국제 시세가 하락하였고 KK가 주장하는 휴머니즘에 입각한 아프리카의 사회주의는 이 나라에선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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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

2001. 11. 6. 15:47
리비아는 지중해 연안에 1,100마일의 해안선을 갖고 있다. 리비아가 지중해에 접해 있다는 것은 곧 그들이 풍요로운 자연을 갖고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게 하지만 사실 이곳은 국토의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으로 둘러 싸여 있는 황량한 대륙이다. 나라의 90%이상이 사막이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2%에 지나지 않는다.
가느다란 해안선은 하나의 오아시스 격으로 이곳에 주민의 대부분이 살며 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리비아는 석유가 나기 이전까지 영, 미에 군사 기지를 제공하는 정도의 가난 한 나라였다. 석유 개발이 시작되면서부터 국민 소득이 갑자기 늘고 막대한 , 석유자원을 물 쓰듯 하면서 세계 각처에 테러단을 보낸 카다피 정권 때문에 리비아가 더욱 세계에 알려지게 되 었다.
리비아는 특히 우리 한국인에게 더욱 인상이 깊다. 그들의 거창한 국토 개발 사업으로 우리의 노무자들이 많이 왕래하였고 이 과정에서 1989년 7월 27일 대한 항공기가 트리폴리 공항에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착륙을 시도하다가 사고를 일으켜 무수한 인명이 희생된 곳이기도 하다.
리비아는 과거 역사 가운데 독립 국가였던 시기가 거의 없었다 .카르타고, 로마제국, 스페인, 터어키, 이탈리아 등의 식민 통치를 거쳐 제 2차 대전 이후 다시 영, 불의 지배를 받다가 1951년에 드디어 독립을 하였다. 이 독립은 미, 영, 불, 소의 4대 강국이 UN에서 많은 토의 끝에 결의된 것이며 "이디리스"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디리스" 정부는 워낙 약체인데다가 리비아 내의 서방 군사기지가 이스라엘 군의 승리에 도움을 주었고 석유가 개발되는 과정에서 외국 자본과 리비아내의 특권층 사이에 야합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국민감정이 악화되어"이드리스" 왕정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되자 카다피는 1969년 9월 1일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리비아 왕정을 축출하였다. 당시 카다피의 나이는 27세로 계급은 대위였다. 왕은 카이로로 망명하여 1983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집권한 가다피는 영, 미의 군사기지를 폐쇄하고 2만 5천명의 이태리인 등 외국인을 추방하였다.  또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2,500만 달러의 예금도 동결시켰다.
카다피의 정치체계는 애매한 것이어서 그는 경전 코란에 의하여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제 3의 보편이론"에 근거한 쟈마히리야(인민공동체) 사회를 건설한다고 주장한다. 카다피 정부에는 정당도 없고 의회도 없다. 카다피는 인민의 직접 민주주의 이외는 민주주의가 없다고 한다.
의회는 인민을 기만하는 대표기관이며 민주주의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정당에 대한 카다피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정당은 현대의 독재제도이며 독재적인 통치기구이다. 정당은 인민을 분리하고 어느 한 부분만 대표한다. 정당은 인민을 대표한다고 하면서 인민을 통치한다. 또한 인민의 대표란 실존하지 않는다. 정당은 근대의 부족제도이며 하나의 종파이다. " 그러므로 인민 직접민주주의의 제도에서 존재하는 것은 의사 결정기관으로서 인민 회의와 집행기관으로서의 인민 위원회가 있으면 족하다고 주장한다. 다수지배 체제란 51:49의 비율을 통해 51의 집단이 49의 집단을 지배하는 편법의 독재이며 국민의 투표는 어떤 안건에 있어서의 찬부를 묻는 것인데 그 찬과 부의 이유를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독재자의 이용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카다피는 집권 이후 국토개발과 교육 사업의 일을 많이 추진했다. 강력한 의무교육의 실시로 국민의 문맹률은 90%에서 50%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카다피의 성격이 과격하고 아무리 혁명가라고 하더라도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한도를 넘는 일이 많았다. 어떤 때는 그의 정신상태까지 의심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상 그는 정신감정을 받기 위해 자주 유럽의 정신병원을 찾았다는 정보가 나돌고 있다.
카다피는 막대한 석유자원으로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원조를 주는 사업을 하지 않았다. 고유가 시대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제국들은 리비아의 석유 값을 잡기 위하여 외채를 끌어들였다. 식량을 살수 없어 1억 5천만 명이 굶고 있는데도 이들에 대한 원조 같은 것은 염두에 없었다. 그는 오직 세계 각처의 혁명운동을 도왔으며 특히 아프리카의 중동에 있어서 많은 나라의 반 정부조직을 돕는데 돈을 많이 嶺다. 카다피는 일찍이 이집트의 낫셀이 아랍연맹공화국(UAR)을 추진했던 것과 같이 리비아를 중심한 또 다른 UAR을 구상하고 모든 아랍 국가들에 강요함으로써 물의를 일으켰다.
카다피는 가끔 소련을 비난하는 태도를 가졌지만 친소파이며 과거 10여 년간에 소련으로부터 10억불의 무기를 사들였다. 그리하여 인구가 작은 리비아는 군인보다 군장비가 더 많은 군사 대국이 된 것이다.
3,000대의 탱크를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은 수의 소련의 군사 고문단이 있으며 이에 소요되는 예산은 120억 달러에 이른다. 그러나 리비아와 미국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리비아는 미국으로부터 식량과 기술을 필요로 하고 또 미국은 리비아에서 많은 석유를 수입했다. 그러나 1979년 리비아의 폭도들이 미국 대사관에 진입한 사건으로 미국은 결국 1982년 5월에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리비아의 석유를 수입하지 않았다. 리비아 국민의 대다수는 카다피가 말하는 혁명에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포악한 카다피에게 끌려가고 있는 형편이다.
카다피는 여러 번의 저격 위기를 운 좋게 넘겼다. 1984년 여름, 주 런던 리비아 대사관앞에서 반 카다피 데모가 일어났는데 대사관 안에 있던 군인이 발사하여 영국 여자 경찰관 한 명과11명의 리비아 학생이 사망했다.
이일로 영국과 리비아도 외교가 단절되었다. 1981년 8월 리비아가 자국의 해역이라고 주장하는 시드라 항만 해상에서 미국과 리비아 공군이 일전을 겨루어 리비아의 전투기 2대가 추락되었다. 리비아는 미국을 비난하였으나 곧 자기의 공군이 선제 공격을 했다고 자인했다. 그후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으며 카다피는 미국에 암살단을 보낸다고 했고 레이건 대통령은 이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웠다. 카다피는 테러를 무서워하는 레이건을 겁쟁이라고까지 농락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1986년 4월 레이건 대통령은 리비아를 공격하였다. 멀리 영국 기지에서 발진한 폭격기들은 카다피의 집을 폭격하였다. 카다피는 그때 그곳에 있었으나 위기를 모면했고 아들 한 명이 죽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카다피는 5주후에 다시 TV에 나타났는데 시청자들에 의하면 그의 말은 조리가 없었고 아랍어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카다피는 친 리비아 국가 지도자로부터 종래의 자세를 고치고 미국과도 가까워질 길을 택하라고 권유를 받았지만 그는 아직 까지 미국과의 관계는 냉전상태에 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독일에서부터 화학무기를 사들인다는 소식이 있어 미국과 독일을 긴장시킨 일이 있다.
1986년부터 기름 값이 내리면서 리비아의 수입은 줄어들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리비아는 50억 달러의 외채를 지고 있다.   한때 리비아의 국민소득은 1만 달러 였는데 지금은 6,800달러로 되어 있다. 이 금액은 아직도 큰 것이지만 국민이 어느 만큼의 혜택을 받고 있는 지는 의문이다.   카다피는 실리적이지 않은 공사들을 많이 하는데 그 하나가 대 인공 강 공사이다. 깊은 내륙 면 곳에 있는 오아시스에서 콘크리트관을 통하여 해안 도시와 농촌에 물을 끌어들여 오는 대작업 이다. 공사비만해도 250억 달러인데 이 공사에는 우리 나라 기업에서도 참가하고 있다. 공사비와 유지비의 일부를 가지고 식량을 사들일 수 있다고 비난하는 측도 있으나 아마도 카구피는 석유 자원이 고갈되었을 때를 대비한 사업인지도 모른다.
카다피는 리비아 북부 사르테 사막의 한 천막 안에서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대 이태리 독립항전에서 사망하였고 아버지는 항상 이탈리아인들의 죄상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고 한다. 국민의 대부분이 몽매한 가운데서도 카다피는 부모의 덕택으로 출생지에서 초등 학교를 나오고 이곳저곳에서 고교를 거쳐 1963년 벤가지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후 카다피는 영국의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등 비교적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그는 학생시절에도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즐겨 했고 육사시대에는 "자유 통일주의 장교단"물 만드는 등 유달리 정치와 혁명에 관심이 刻다.
카다피는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는다. 코란을 즐겨 읽으며 국가 원수의 봉급만으로 생활하고 평복을 입으며 사치를 좋아하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한다. 사실상 아프리카 제국의 지도자들의 부정축재의 스캔들을 카다피에게서는 들은 바 없다. 그는 지금도 이따금씩 유년시절을 보낸 사르테 사막에 흘로 가 명상과 기도로 시간을 보낸다.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은 출세하여 도시생활을 하면서도 가끔 자기가 태어난 시골에 가서 어릴 적에 정들었던 흙 담집에 다녀온다고 한다. 그 흙 냄새가 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옛날의 추억이라고 한다. 카다피도 이런 뜻에서 자기를 길러낸 시골 사막의 모래냄새가 그를 순화시켜 준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카다피는 모든 상인을 비생산적인 존재로 보아"인민의 적"으로 취급하고 자유 무역과 자유 경제를 기피했다. 그는 생산하는 자기 소비자이며 노동자로 구성된 기업 경을 이루었다. 그러나 석유 가의 하락으로 국가 수입이 줄고 소비 물자가 품귀해지면서 정부는 시장경제, 자본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인물연구

  1. Blog Icon
    S.BULLET.

    카다피는 대통령이 아니고 혁명 지도자 아닌가요?

  2. Blog Icon
    afrikaans

    혁명지도자이며 대통령이지요. 무려 40여년이나 리비아를 통치했으니까 말입니다.
    분명히 나쁜 지도자이지만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는 장면은 매우 안타깝고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케냐의 다니엘 아랍 모이(Daniel Arap Moi) 대통령

2001. 11. 6. 15:34
모이 대통령은 1924년 생이다. 케냐타 초대 대통령 밑에서 10년간 부통령을 지내다가 케냐타 대통령이 사망한 1978년 이후부터 대통령직을 맡고 있다.  초대 대통령인 죠모 케냐타는 케냐의 47개의 부족 중 그 수가 가장 많은 키쿠유족의 사람이었으나 모이 대통령은 서수 부족인 카렌진족 출신이다. 부족간, 지역간의 대립과 마찰은 아프리카의 공통적 문제로서 케냐도 예외는 아니다. 공용어로서 영어와 스와힐리어를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많은 부족들이 제각기 저마다의 언어를 쓰고 있다. 하나의 국민이라는 의식보다는 부족간의 소속의식이 더 크기 때문에 다른 부족에 대한 불신과 경쟁심이 국민의 단결의식, 나아가 통일된 한 나라의 문화를 갖는데 저해요소가 된다.
과거 케냐타 대통령 시대에는 "하람베"(다함께')라는 표어로 국민의 결속을 다짐했고 현 대통령은 "니야요"라는 구호로 국민의 단결을 호소하고 있다. 이것은 잠비아의 "원 네이션,원 잠비아"와 같은 의도의 슬로건이다. "니야요"는 평화사랑 단결을 뜻하며 스와힐리어로 "발자국" 이라는 뜻인데 당신의 발자국을 따른다는 즉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뜻이 된다.
대통령이 나타나는 곳에는 관중들이 일제히"니야요"를 제창한다. TV, 라디오의 뉴스 시간에는 다니엘 아랍 모이 대통령 각하로 시작되며 전신주 곳곳에 모이 대통령의 사진이 붙어 있고 이 나라 화폐에는 액수 여하를 막론하고 모이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이 광경은 남아공을 제외한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모이 대통령은 양떼를 모는 가난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교원생활에서 정계에 들어온 실무형 대통령으로 교원출신답게 국민들에게 "과음하지 말라"눈 등의 설교를 많이 한다. 케냐타와 같은 카리스마적 이미지는 없으나 대부족인 키쿠유와 루어족의 싸움에서 어부지리를 얻어 부0족 파벌간의 알력을 잘 조성하는 노련한 정치가로 장기 집권에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점차 독재의 욕심이 생겨나면서 여당 아프리카 민족동맹(KANU)에서 정적 오깅가 오데인가 원 부통령을 추방하고 KANU의 일당제를 입법화하고 모이 정치에 비판적인 유력인물, 간부, 대학교수, 학생들을 탄압했다. 최근에는 그도 축재를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이러한 관계로 1982년 8월1일에 모이를 축출하자는 쿠데타가 공군에서 발생했고 최근 1990년에도 불발 쿠데타가 생겨 모이의 권위는 여지없이 땅에 떨어졌다. 이 두 사건의 배경에는 부통령으로 있다가 쫓겨난 "오깅가 오데인가"의 측근이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1982년 쿠데타에 반군은 라디오를 통해서 쿠데타의 성공을 발표했다.  "악당 모의는 추방되고 독재정치를 대신하는'국가 구제 평의회'가 구성되었다.  우리들은 탐관오리, 부족주의, 친족주의를 없애고 자유의 확립을 목표로 한다. 헌법은 정지되었다." 등의 발표를 해 국민과 세계를 놀라게 했다.
같은 날 상오 11시에 이 라디오 방송국은 육군부대에 의하여 재탈환되고 쿠데타는 불발로 끝났다. 이 사건으로 129명이 사망하였다고 발표되었는데 대부분은 육군부대에 의한 공군병사들이며 부상자 수는 시민을 포함 약 5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만일 이 쿠데타가 성공하였더라면 이 나라에는 소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동부 아프리카의 정치판도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이 사건이 불발로 끝났을 때에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맨 먼저 모이 대통령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사건 후에도 모이는 여전히 민주화에 관심이 없고 총선을 통하여 다시 모이의 위세는 더 당당해졌다. 모이는 서방국가에 대한 차관 외교에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한다. 최근에는 독일로부터 4억불의 빛을 탕감했다는 소식도 있다. 또한 모이는 인도양의 항구 "몸바사"항의 기지를 미국에 빌려주고 있는데 이 미해군 기지는 소위 야당의 비판을 받고 있고 또 케냐의 인도인 존재가 늘 화근이 되어 왔다. 82년 쿠데타 사건의 한 원인도 인도인 문제가 들어 있다고 한다.
케냐의 흑인은 가난한데 인도인은 잘 살고 있다. 이들은 경제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으며 케냐라는 나라보다 사리사욕의 폭리만을 쫓는다는 것이 현지인의 인식이다. 1990년 1월 내가 나이로비에 있을 때 들은 일인데 인도인 상인이 300만 달러를 밀반출하려다가 당국에게 발각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로 인해 인도인들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감은 크다.
1990년 7월 7일 발생한 케냐의 소요사건은 모이가 OAU참가자 에티오피아에 있는 동안에 발생하였는데 아프리카의 정치 지도자들은 과거에도 외국에 갔을 때 추방되는 일이 많았다. 이 사건은 수도 나이로비 뿐 아니라 지방 도시에까지 비화했으나 주모자 중 2명이 현지 미 대사관에 도피했고 2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불발로 끝났다. 이 소요는 자신의 출신 부족인 칼렌진과 그 측근에게만 혜택을 주는 모이 정권의 독재에 맞서 날로 저하되는 국민생활의 향상을 바랜 젊은이들의 거사였다. 민주주의 바람이 아프리카에도 불고 강경 보수주의자들인 코트디브와르, 가를, 자이르, 장비아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당제를 채택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케냐의 국민이 질시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최루탄을 쏘고 일부 지역에서는 총격까지 梨다. 케냐 정부는 성명을 통해 이 같은 폭력사태는 불량배들의 소행이라고 비난하고 폭동진압을 위해 필요한 모든 무력을 사용하도록 경찰에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모이 대통령은 케냐가 다당제를 도입할 경우 케냐의 40여개 부족이 각각 정당을 설립, 민족분열을 조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감금된 사랑들을 석방하라는 요구에 대하여 그 불량배들에게는 동정을 하고 그들 때문에 희생된 사랑 또는 재산의 손해를 본 사람에게는 왜 동정을 하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어쨌든, "아프리카의 우등생"은 하나의 허상으로 기대에 어긋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적으로 열등생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는 없다. 물론 케냐의 현상이 민주주의의 이상에서 볼 때 거리가 있지만 모이 대통령을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다. 아프리카에는 모이 정도의 독재적 지도자가 많은데 사실상 케냐의 현 정권을 강권정치라고 하기에는 경미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는 언론 정치활동의 자유와 인권이 확립되지 않은 나라가 아직 많다. 부족주의가 강한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가에서 건실한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것은 아주 비현실적인 일이며 오히려 내전의 도화선이 될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다. 이는 탄자니아의 초대 대통령 줄리우스 니에레레의 60년대의 이론인데 세계가 다당제를 채택해가는 경향이 있고 독립 후 벌써 40년이 가까운 이들 아프리카 나라에서 아직도 부족의 갈등이 무서워 다당제를 도입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명분을 읽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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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타보 음베키

2001. 10. 29. 17:05
타보 음베키는 가 은퇴하면 후계자가 될 인물이다. 만델라는 지난해 12월부터 국정의 대부분을 그에게 넘겼다.
음베키는 42년 6월18일 남아공의 흑인 거주 지역인 트랜스케이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모두 교사이자 흑인 인권운동가였다. 특히 그의 아버지 고반 음베키는 아프리카민족회의에서 두드러지는 활동가였다.
  20세부터 망명 생활…외교 활동 두각
이런 양친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음베키는 열네 살 때 민족회의의 청소년 조직에 가입했다. 열일곱 살 때 그는 남아공 수도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학교로 옮겼다. 거기서 음베키는 ‘아프리카 학생회의’ 간부로 뽑혀 활동했다. 음베키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뒤 런던 대학의 통신 교육 과정에 들어가 경제학을 공부했다.
60년대 초반부터 음베키는 민족회의의 지하 활동을 시작했고, 스무살이 되던 해인 62년 그의 아버지가 투옥되자 짐바브웨로 망명했다.  그와 함께 활동한 동료들은 대부분 투옥되거나 남아공 백인 정부를 상대로 험난한 지하 활동을 벌여야 했다. 그들에 비한다면 음베키는 민족회의에서 선택받은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영국에 유학해 66년 서섹스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공부를 마친 음베키는 옛 소련으로 가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 군사 훈련은 민족회의 활동가라면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음베키는 본디 게릴라 전사보다는 우아하고 점잖은 외교관에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70년대부터 음베키는 해외에서 민족회의 활동을 펼쳤다. 그는 영국·보츠와나·스와질랜드·나이지리아·잠비아에서 민족회의 대표로 일했다. 80년 이후 민족회의 국제국 책임자로 있으면서 음베키는 인종 분리 반대 운동에 대한 국제적인 지원을 얻는 외교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이 운동에 남아공의 백인까지 끌어들이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음베키가 해외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의 아버지 고반은 만델라와 함께 철창 속에 갇혀 있었다. 고반은 투옥된 지 25년 만인 87년에야 석방되었다.
90년 음베키는 28년 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그는 백인 정부와 협상해 만델라를 석방시켰고, 91년 말에는 헌법을 제정하는 협상에 민족회의 대표로 참석했다. 94년 선거로 민족회의가 남아공 집권당이 되자 음베키는 부통령이 되었고, 민족회의 부의장에 올랐다. 지난해 12월17일 민족회의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3천명의 만장 일치로 의장에 선출되었다.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확실하게 제목소리를 내는 국가이다. 국내총생산(GDP) 규모도 아프리카 대륙 전체 GDP의 3분의1을 차지한다. 이는 ‘블랙 아프리카’로 불리는 사하라 사막 남쪽 아프리카 국가들의 절반 규모이다.
남아공은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도 크다. 99년부터 2001년까지 3년 동안 유엔 비동맹회의 의장국으로 내정되어 있다. 또 현재 아프리카단결기구(OAU) 부의장국이다. 남아공을 방문한 클린턴 대통령에게 만델라가 정치적 훈수를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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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만델라 3

2001. 10. 29. 17:05
1994년 4월 27일 이후 넬슨 만델라 정부의 업적

남아공 민주주의는 협상과 합의의 정치, 국가 건설, 화합, 신애국주의 정책이 뒷받침하고 있다.
국민통합정부의 정치제도는 남아공에서의 정치적 포용 및 다당주의 민주 문화를 강화시켜 왔다.
남아공은 권리 장전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적 수준의 민주 헌법을 제정하였다.
경제부흥개발프로그램(RDP)은 모든 정당이 지지하고 있으며 그 목표는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에 의해 야기된 사회 경제적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다. RDP 사업의 초점은 주택, 고용 창출, 보건, 교육, 소외 계층에 대한 훈련 및 경제권 부여 등에 맞추어져 있다.
남아공 경제는 다음과 같이 탄력적이다: 인플레율 10% 이내, 경제 성장률 2%, 수출 증대, 고정 투자 증대, 시장 및 투자 우호적인 경제 정책, 투명한 민영화 계획, 관세 인하, 거시경제적 계획입안, 점차적인 외환규제 자율화.
남부아프리카 지역경제 통합이 남아공의 진입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남아공은 아프리카 지역 평화유지를 위한 중심적 역할 수행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레이트 레이크 지역 (Great Lakes: 우간다, 브룬디, 르완다), 앙골라, 수단 등지에서의 분쟁 예방 외교와 분쟁 해결 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국제 무대에서 新남아공은 세계평화를 유지하고 군비를 축소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으며 국제 정치 및 경제 발전면에서의 아프리카 르네상스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남아공의 외교 공관이 주재하고 있는 나라는 54개국에서 150개국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남아공은 유엔무역개발회의 (UNCTAD), 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 (SADC), 비동맹운동 (NAM) 등의 의장국이다.
마푸토 지대 (Maputo Corridor) 건설 사업은 규모 35억 랜드로서 남아공과 모잠비크 국경지역에 사회간접 시설을 건설하는 사업이다.

만델라 약력
그의 수감 생활은 10,000일 이었다.
그는 16세의 나이에 포트헤어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46세의 나이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로벤 아일랜드 수감 당시 넬슨 만델라의 수형번호는 466/64였습니다. 1964년에 로벤 아일랜드에 수감된 466번째 죄수란 뜻이다.
그의 모친은 그의 수감 당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당국은 그에게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첫째 아들도 그의 수감 당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으나 당국은 역시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그의 두 가지 취미 생활은 화원 가꾸기와 테니스였다.
그는 감옥에서 13년 동안 채석장에서 곡괭이질을 해야만 했고, 이로 인해 시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
1982년에 그는 로벤 아일랜드에서 폴스모어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수감생활 20년만인 1984년에 그에게 최초의 자유 면회가 허용되었다. 자유 면회란 유리창을 사이에 둔 면회가 아니라 아내나 자녀들과 신체적 접촉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면회를 말한다.
그는 전세계 50여개국의 명예 시민이다.
그는 전세계의 각 대학 및 교육기관으로부터 30개 이상의 명예 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는 1993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여 받았다.
수많은 학교, 거리, 도로, 공원, 광장, 도서관 등이 만델라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짐바브웨는 1990년 3월 5일을 '만델라의 날'로 정하고 매년 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1988년 6월 11일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렸던 넬슨 만델라 고희 축하 콘서트에는 72,000명의 관중이 참석하였고 전세계 60개국의 10억 인구가 시청하였다.
그는 1990년 당시 드클레르크 대통령에 의해 석방되었고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남아공공산당, 범아프리카회의 등을 비롯한 각종 급진 단체가 해금조치를 받았다.
1992년에 그는 위니 만델라 여사와 별거에 들어갔고 후에 이혼하였다.
1994년 5월 10일,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1998년 12월 16일,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아프리카민족회의 총재직에서 사임하고 타보 음베키가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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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인물연구

남아공의 만델라 2

2001. 10. 29. 17:04
94년 5월 만델라가 남아공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같은 틀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르네상스를 위해서 이제 아프리카의 문제는 아프리카인들 스스로 해결하고 아프리카의 미래도 아프리카인들 자신이 개척해야 한다는 만델라의 주장은 검은 대륙에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정통성 있는 권력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과 더불어 아프리카의 신세대 지도자로 통하는 만델라는 스스로의 주장을 뒷받침하듯 아프리카의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만델라가 취한 문제의 해결방법 또한 기존의 아프리카 지도자들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었다. 만델라 이전의 대다수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국내 또는 지역분쟁 해결을 위해 걸핏하면 과거의 종주국인 프랑스나 영국으로 달려가 자문을 구하고 원조를 청했던 것과는 달리 만델라는 분쟁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고 견해를 교환했다. 나이지리아 군사정부의 독재에 대한 국제적 비판여론을 조성한 것을 비롯해 앙골라 평화협상, 수단·레소토·스와질랜드 등 여러 국가들의 내전과 국내 갈등을 조정하는 일에 앞장섰다.
50만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20년간 지속돼 온 앙골라내전의 중재를 위해서는 지난 1월 초 호세 에두아르도 도세 산토스 앙골라 대통령과 반군지도자 요나스 사빔비를 자신의 고향인 트란스케이로 초대해 회담을 주선하기도 했다. 또한 지난 5월의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중에는 아프리카대륙에서 중재자로서 만델라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과시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만델라가 내전중재에 나설 무렵 자이르 상황은 로랑 카빌라가 이끄는 반군의 수도 킨샤사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반면 수도 킨샤사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 그리고 외국인 용병을 포함해 모부투에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짐한 친위대 성격의 정부군이 수도 사수를 결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빌라반군이 수도를 향해 총공격에 나설 경우 킨샤사 장악은 시간문제였다. 모부투정부군의 사기는 이미 땅에 떨어졌고 킨샤사 시민들은 물론 대다수 자이르 국민들은 독재자 모부투에 등을 돌린지 오래였다.
설상가상으로 모부투 대통령은 그 당시 이미 지병인 전립선암이 심화돼 반군의 공세를 막기 위한 군사작전을 지휘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반군의 승리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킨샤사에서 반군과 정부군의 물리적 충돌이 현실화될 경우 엄청난 인명피해가 우려된다는 점이었다. 유엔 등 국제사회가 염려한 것도 바로 민간인들에 대한 피해였다.
모부투의 명예로운 퇴진과 반군측에 대한 평화적 권력이양문제를 놓고 협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평생을 독재자로 살아온 모부투와 승리를 눈앞에 둔 카빌라간의 상호 양보를 전제로 한 타협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 협상중재역할을 직접 떠맡았다. 그는 공해상에 정박하고 있는 남아공선박을 회담장소로 제공했다. 자이르의 대통령과 반군지도자로 30년 넘게 반목을 거듭해 온 모부투와 카빌라의 만남도 비로소 실현됐다.
표면상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반군지도자 카빌라는 모부투가 자신에게 즉각 모든 권한을 이양하고 사임할 것을 요구했다. 반면 모부투는 카빌라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것을 거부하면서 임시과도정부를 구성, 과도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겠으며 과도정부 주도하의 선거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만델라가 중재한 회담 그 자체는 실패였다. 하지만 만델라와 국제사회가 의도했던 최소한의 목표는 실현됐다. 모부투 진영은 킨샤사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포기, 망명을 택했다. 만델라의 자이르내전 중재는 결과적으로 킨샤사에서의 군사적 대결을 피하게 하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해 준 셈이었다. 아프리카대륙에서 만델라의 위상이 짧은 시간 내 급속히 제고될 수 있었던 데는 경제외교 분야에서의 활동도 큰몫을 한 것으로 지적된다. 그는 아프리카국가들의 경제적 자립능력 결여가 정치적으로 서방에 대한 예속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서방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 셈이다. 따라서 만델라는 아프리카국가들의 빈곤퇴치 뿐 아니라 진정한 정치적 자립을 위해서도 경제발전이 시급하다는 판단 하에 아프리카가 더이상 선진국을 위한 자원공급지나 소비재시장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주변 국가들에 설득했다.
만델라는 또 아프리카의 경제발전을 위해 아프리카국가들간 협력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지역경제공동체 창설에 눈을 돌렸다.
만델라의 이같은 구상을 실천하는데 남아공의 경제력은 큰힘이 되었다. 남아공의 국민총생산(GNP)은 96년도의 경우 1천3백억달러로 전체 아프리카대륙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아프리카에서는 절대적 비중을 점하고 있다. 그는 아프리카국가들간 경제협력을 활성화할 본격적 지지를 결성을 주도하기 위해 96년 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 의장에 취임했다.
남아공 등 남부아프리카의 12개 국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SADC는 지난 79년 결성됐지만 만델라의 집권 이전까지는 눈에 띄는 활동을 벌이지 못해 왔다. 공동체의 중심역할을 맡아야 할 남아공이 흑백차별정책을 시행하는 탓에 주변의 흑인정권들과 진정한 협력분위기를 조성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델라가 SADC의장에 취임하면서 남부아프리카지역 국가들간의 경제협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남아공과 주변 국가들을 연결하는 도로·철도망의 확장하거나 새로 건설하는 작업이 시작됐고 인근 국가들에 대한 남아공의 투자도 확대됐다.
이같은 변화에 힘입어 지난해 SADC국가들은 동남아국가들에 버금가는 평균 6. 4%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SADC 12개 회원국을 가리켜 「아시아의 호랑이」에 비유한 「아프리카의 사자」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오는 2004년까지는 SADC를 유럽연합(EU)과 같은 자유무역지대로 탈바꿈시킨다는 청사진도 마련됐다.
SADC를 발판으로 아프리카대륙의 경제를 한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만델라의 구상은 시간이 갈수록 현실성을 높여가며 공감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만델라의 위상은 경제협력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만델라 대통령이 이처럼 외교·내전중재·경제협력 분야에서 단시일 내 아프리카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부상한 원동력은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아프리카인들은 만델라의 개인적 능력과 비전, 그리고 도덕성이 질문의 해답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는 남아공에서 3백년 넘게 지속된 흑인에 대한 차별정책을 피흘리는 혁명 대신 백인정권 지도자들과의 끈질긴 대화와 인내심이 뒷받침된 협상을 통해 성취해 낸 탁월한 정치력의 소유자다. 그의 조리있는 설득과 불굴의 신념, 국내외 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진단하는 판단력은 협상테이블에서 만델라로 하여금 상대방을 압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델라의 도덕성 또한 그를 아프리카의 다른 지도자들과 차별화시키는 주요요인으로 지적된다.
재임 중 60억~80억달러의 국가재산을 빼돌리며 정권연장에 연연했던 모부투 전 자이르 대통령 등 상당수 아프리카지도자들과 달리 만델라는 정권연장기도나 축재와는 거리가 먼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 불법적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집권연장을 기도할 필요가 없는 만큼 미국프랑스 등 외세에 비굴해질 이유도 없다. 그는 지난 60년대 유럽국가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서도 수십년간 무능력하고 부패한 독재자들 때문에 실망해 온 아프리카인들에게 아프리카에서도 도덕성과 능력을 겸비한 지도자가 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한편 만델라가 아프리카의 정치적 대부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국제사회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의 경우 지난 93년 소말리아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했다. 인명손실을 경험한 이후 아프리카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극도의 거부감을 보여왔다. 아프리카 종주국으로 자처해 온 프랑스 역시 경제적 이유 등으로 아프리카 주둔병력의 점진적 축소계획을 발표하는 등 아프리카에서의 군사활동을 점차 기피하려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미국 등 서방진영은 아프리카인들의 존경을 받는 만델라라는 흑인지도자의 등장을 내심 환영하고 있다. 그가 골치아픈 아프리카 문제해결의 중재자 역할을 맡아 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를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대접해 준다는 입장이다.
만델라는 이처럼 아프리카의 정치적 대부로 떠오르고 있는 자신의 위상에 대해 표면상 달갑지만은 않다는 입장이다. 그는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정치가이기 보다는 21명에 이르는 손자·손녀들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델라는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맡겨진 아프리카의 정치적 대부라는 역할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 한 남아공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국내외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다. 만일 나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 온다면… 나는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답변했다. 자신이 아프리카의 대부라는 정치적 짐을 떠맡을 의사가 있음을 시사한 셈이다. 만델라의 정치적 능력을 아는 사람들은 만약 그가 아프리카의 정치적 맹주가 되려고 하는 야심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아프리카의 르네상스라는 원래의 목표뿐 아니라 남아공의 국가적 이익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 일부 관측통들은 만델라의 궁극적 목표는 남아공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라고 분석한다.
현재 유엔에서 논의되고 있는 안보리 상임이사국 확대개편안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현재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등 세계 5대 강국만으로 구성된 안보리상임이사국을 확대 개편하는 작업이 지역안배를 고려하는 방향으로 전향할 경우 아프리카에도 자리가 하나 배정될 가능성은 크다는 것이 중론이다. 정치적 선견지명이 있는 만델라가 그같은 상황에 대비하고 있으리라는 점 또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경제적으로 아프리카대륙의 최강국이라는 남아공의 지위와 만델라 개인의 국제적 영향력을 합해 아프리카대륙에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티켓이 할당될 경우 거머쥐려 한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만델라에게 아프리카의 대부라는 지위는 이미 개인의 선택사항이 아닌 정해진 운명으로 다가서고 있다는 게 국제사회의 대체적 평가다. 종족분쟁과 자원쟁탈욕에서 비롯된 끊임없는 내전과 국경 갈등, 요원한 경제자립이라는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는 아프리카의 실상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타개하려는 의지를 지닌 인물이 바로 만델라이기 때문이다. 남아공의 인권지도자에서 일약 아프리카대륙 전체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정치적 대부로 강력히 떠오르고 있는 만델라의 향후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세계인들의 관심도 갈수록 커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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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만델라

2001. 10. 29. 17:03
미국의 고(故)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흑인지도자로 꼽히는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게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표현은 뭐니뭐니해도 「아프리카 흑인민권운동의 상징」. 아파르트하이트(흑백분리정책)란 이름 하에 전세계적으로 악명높았던 남아공 백인정권의 흑백차별정책을 종식시키기 위해 젊음을 바쳤고 결국 흑인 다수사회인 남아공에서 백인통치를 끝내는데 결정적 업적을 남긴 그의 업적에 대한 찬사다.
그를 가리키는 또다른 수식어라면 「화해와 관용의 정치가」다. 그는 백인정권의 억압에 저항하다 27년이란 긴 세월을 감옥에서 살았다. 그러나 94년 5월 대통령에 당선된 뒤 백인들에 대한 일체의 정치보복을 가하지 않았다. 남아공의 과거청산은 새로운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정치보복이 아닌 흑백화합을 위한 관용과 화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통치철학이기 때문이다.
만델라를 가리키는 말 가운데는 「무욕(無慾)의 정치가」라는 표현도 빼놓을 수 없다. 오는 99년 대통령임기가 끝나는 만델라는 이미 오래 전 대통령직에 재도전할 의사가 없음을 공식 천명했다. 후계자로는 타보 음베키 부통령(55)을 지명했다. 12월 중 자신의 소속정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의장직도 그에게 이양할 계획이다. 올해 나이가 79세. 99년이면 81세가 된다는 자신의 고령을 의식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권좌에 앉은 채 생을 마감하겠다는 아프리카의 다른 지도자들과는 분명 다른 유형의 정치가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국제사회와 아프리카인들은 만델라 대통령에게 또하나의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했다. 바로 「아프리카의 정치적 대부」. 아프리카를 대표할 만한 존경받는 정치가이자 아프리카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지도자란 의미가 함축된 표현이다.
그에게 아프리카의 대부란 칭호는 결코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다. 냉전이 끝나고 아프리카대륙에서 미국·프랑스·러시아 등 외세의 영향력이 퇴조되면서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아프리카 민족자결기류 속에서 「21세기 아프리카의 르네상스」를 부르짖고 나선 만델라의 정치적 위상은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 아프리카대륙에서 전개되고 있는 일련의 정치·경제·군사적 변화 속에서 만델라가 보여준 활약상은 그가 아프리카의 대부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다.
지난 94년 남아공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국제외교 무대에 본격 등장한 만델라의 활약상은 △국제무대에서 아프리카의 이익 대변 △아프리카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내전의 중재 △아프리카 국가들간 경제협력 주도라는 크게 3가지 방면에서 전개되고 있다.
만델라는 미국·프랑스 등 서방 강대국은 물론 유엔 등 국제사회의 논리와 입장이 아프리카의 이익과 주권에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가까운 예로 지난 10월 말 그의 북아프리카 순방과 영 연방정상회의 참석은 만델라의 그같은 입장을 국제사회에 분명히 전달한 사건이었다. 당시 그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리는 영 연방정상회담 참석에 앞서 북아프리카 순방계획을 발표했다. 그의 방문일정에는 이집트·튀니지 그리고 리비아가 포함돼 있었다. 문제는 리비아였다.  
리비아는 지난 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폭발돼 2백70명의 희생자를 낸 미국 팬암기에 폭탄을 장착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2명의 리비아 출신 테러리스트를 보호하고 있다는 이유로 유엔에 의해 봉쇄조치를 당하고 있는 나라다. 따라서 만델라가 유엔에 의해 봉쇄조치를 당하고 있는 리비아를 방문한다는 것은 곧 유엔에 대한, 특히 미국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리비아에 대한 봉쇄조치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실제로 만델라에 대해 테러국 리비아에 대한 방문계획을 취소할 것을 거듭 요청했다. 제임스 폴리 미 국무부대변인은 『리비아를 방문하는 나라의 지도자에 대해서는 미국이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라며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대통령으로부터 리비아 방문을 초대받은 만델라의 입장은 한마디로 단호한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미국이 우리에게 어디로 가고 누구를 만나라고 할 정도로 거만해졌는지 모르겠다』며 미국의 간섭에 쐐기를 박았다. 자신과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남아공 백인정권 하에서 흑인차별에 대항해 싸울 때 ANC를 도왔던 리비아를 미국의 압력 때문에 저버리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리비아에 대한 유엔의 비행금지조치를 피하기 위해 튀니지를 거쳐 육로로 리비아로 들어간 만델라의 행동은 갈수록 미국 등 서방을 당혹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서 개최된 군중대회에서 유엔을 향해 『우리 아프리카 형제·자매를 고통스럽게 하는 봉쇄조치를 해제할 것』을 당당히 요구했다. 아프리카인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국제사회에 맞설 용기가 있음을 분명히 과시했다. 에든버러 영 연방정상회담에서도 리비아에 대한 봉쇄조치를 풀기 위한 만델라의 외교노력은 계속됐다.
그는 세계 각국 언론인들을 모아 놓은 기자회견장에서 로커비사건의 용의자에 대한 재판은 미국이나 영국이 아닌 제3국에서 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이 미국 또는 영국에서 열릴 경우 이들 서방국가가 고소인·검사·재판관을 모두 맡게 돼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논리였다.
만델라의 이같은 주장은 공정한 재판을 위해 제3국에서 재판이 진행돼야 하며 그럴 경우에 한해 테러용의자들을 재판정에 내보내겠다는 리비아의 기존 입장을 전면 지지하고 나선 것이었다.
영국정부는 그의 요구를 거부했지만 만델라의 주장은 희생자 가족들로부터는 즉각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영국과 미국의 희생자 가족들은 사건발생 후 9년이 지나도록 사건진상과 보상을 위한 재판이 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미국과 영국정부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라며 비판했다. 그들은 만델라의 주장대로 중립지대인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라도 재판이 열려야 한다는 입장을 영국정부에 전달, 미국과 영국정부에 상당한 당혹감을 안겨 주었다. 미국과 영국정부는 지금까지 로커비사건의 피해당사자라는 점에서 리비아정부는 비행기폭파 용의자들을 자신들에 넘겨 미국 또는 영국법정에서 재판받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왔기 때문이다.
영 연방정상회담이 끝난 뒤에도 리비아를 지원하기 위한 만델라의 외교적 노력은 계속됐다. 그는 귀국길에 다시금 리비아를 방문, 카다피에게 유엔의 봉쇄조치 해제를 위해 남아공과 아프리카국가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재다짐했다. 카다피 개인에게는 과거 ANC에 대해 지원에 보답한다는 의미에서 남아공 최고영예훈장인 「희망훈장」을 수여했다.
서방 강대국들에 맞서 아프리카의 이익을 대변하고 나선 만델라의 용기는 오랜 기간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살아온 리비아국민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중동과 아프리카 언론들은 만델라의 중재외교로 장기간 끌어온 로커비 위기가 해결될 수 있는 전환점을 찾았다고 평가했다.
이번 북아프리카 순방을 통해 아프리카인들의 가슴속에 만델라는 아프리카의 이익과 주권을 대변하기 위해 서방 강대국들과 맞설 수 있는 용기있는 정치가라는 분명한 인식을 심어줬다. 만델라의 리비아 방문이 이처럼 국제무대에서 그의 위상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었다면 아프리카대륙 내에서 만델라의 영향력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내전의 중재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아프리카는 과거 냉전시대부터 숱한 내전과 국경분쟁으로 시달려 왔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종족 갈등, 독재에 대한 항거, 자원쟁탈전 등 아프리카의 분쟁은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과거 아프리카인들은 숱한 분규에 시달리면서도 문제 해결에 있어서 주체적 역할을 맡지 못했다. 분쟁 해결은 미국·프랑스·러시아·영국 등 강대국들의 중재에 맡긴다는 식의 방관자로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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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인물연구

기니의 세코우 토우레

2001. 10. 29. 17:02
프랑스 식민지통치를 받은 아프리카국가와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에게는 기니아 공화국처럼 저항없이 편안하게 독립을 획득한 국가도 없거니와 세코우 토우레 정치지도자와 같이 평탄에 권력을 장악한 자도 없었다. 그들은 드골의 권력체체하에서 불편없이 자유와 독립을 형유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후 수년간 기니아 공화국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은 적도 없이 지도자와 국민들 스스로가 열심히 노력해 왔고 민주적 정당을 운용하였다. 정당운용은 신생국가 답지않게 당원상호간에 투쟁이 간섭없이 토론으로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갖기 시작함으로써 현대국가의 정치형태와 유사하게 관리했었다. 즉 기니아 민주당을 통하여 국가의 모든 정책을 생산하는 곳으로 훈련시켰다. 더욱이 당원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함으로써 정당과 국가에 참여하는 충성심을 강조하였다. 정당을 이념적인 교육과 권위를 조화있게 성공시 켰다.
   기니아 민주당은 정당의 정강정책에서 가장 비중을 높힌점은 경제개발이였다고 모든 정당원이 그들의 의견을 당수에게 바로 직접보고 할 수 있게했다. 물론 아직도 그들 스스로가 아프리카의 신생국가로서 젊은 지도자들의 그룹이 형성되지는 못했다. 세코우 토우레는 1982년 중반기에 이르러서도 지난 24년간 통치자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그의 장기집권의 가능성은 그가 국민들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고 정당정치를 정부와 연계하여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에 우선 순위를 두었다. 기니아 민주당 관리는 유럽 어느 정당 못지 않게 국민들을 바탕으로 한 정당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심지어 프랑스 식민주의자들 마저도 의심케 했고 미국과 소련은 더욱 기적적으로 인정했다. 더욱이 모든 아프리카 신생국가들은 사회주의 만이 그들의 생존주의로 생각했을 때 토우레는 사회주의 정책보다도 모든 면에서 개혁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특히 중, 고등교 교육에 정책의 비중을 두었다. 왜냐하면 그가 30살때인 1952년에 기니아민주당의 사무총장을 역임하는 동안 젊음의 세대에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즉 젊은이들은 길거리에 버려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청년들의 무지는 기니아를 후퇴시킨다고 생각했고 그들에게 교육을 시켜서 정 당원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기니아의 경제정책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에서 보편적으로 전파하고 있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자들을 축출해야 한다는 선전과 이념이 점차 젊은이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토우레는 그동안 이같은 이념적 갈등을 잘 운용해 왔으나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고 주변국가들의 혁명이 홍역처럼 밀려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우레는 국민의 입장에서 국가운영을 관리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정부나 정당의 체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어떻든 토우레 정부는 결과적으로 독립후부터 그는 계속해서 경제건설에 정열을 경주했다. 이로 인하여 기니아는 1960년부터 1976년까지 매년 국민소득이 평균 0.4%가 증가했고 인접 6개국보다도 높았고 더욱이 세네갈보다도 평균 1.78%가 증가했고 이는 세계은행의 통계에 의하면 당시 아프리카 37개국중 가장 높았다.
   물론 전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니아는 세네갈이나 코뜨디부아르보다는 낮다. 그러나 위의 2개국에 비하면 기초교육은 더욱 안전성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토우레는 위의 2개국보다 1975년에 여성들에게도 교육을 개방시키는 동시에 의무교육에 대해서 강제성을 요구했다. 즉 기니아의 교육은 기니아 국민 스스로가 받아야 한다고 유도했다.
이래서 기니마는 초등교육을 필한자가 이 백만여명에 육박했고 이들은 공장이나 농장에서의 생산력이 훨씬 높아졌다. 또한 지식인들을 육성하여 교육, 무역등의 부분에서도 많이 활약하게 하였다. 기니아가 제2차세계대전 종전후에 많은 신생국가들중에 가장 정치적으로 발전된 국가였다. 그 이유는 첫째 세코우토우레가 기니아 민주당을 조직하여 정당으로서 역할을 잘했었고 둘째는 19駱년에 프랑스의 영향력배제와 독자적인 민주주의 실천의지가 있었고 셋째는 독립후에 혁명적 개혁적 이념을 실천하면서 1977년까지 개혁정치를 위해서 모든 정치의 체제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1945년 프랑스에 대해서 처음으로 기니아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다. 기니아에서 당시에 야시네디알로 그는 중산계급에서 중등학교 교사였고 아프리카에서 정치적 그룹을 처음으로 조직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노동자망을 중심으로 조직했는데 그 당시의 노동자는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디알라는 아아보리코스트의 정치인들을 가장 싫어했고 또한 자국내의 정치형태로는 연립내각제를 부정했다 따라서 그는 강력한 정치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는 1946년에 폰티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산 연구집단에 가입했고 이로 인하여 기니아 진보당을 창당하여서 총재에 취임했다. 그후에 기니아진보당은 정치적역할이 약해지자 세코우토우레의 기니아 민주당과 합당하였다. 통합된 정당은 명칭이 아프리카 의회 민주당이 였다 이는 파리에 있는 프랑스공산당과 연계했었다. 19,B7년에 프랑스정부는 아프리카 의회민주당이 공산당과의 연계관계를 가진점을 불안하게 생각하고 기니아민주당계열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니아 민주당 계열 당원들은 군사조직이상으로 철두철미했다 뿐만아니라 저변층의 사람들마저도 세코우토우레를 지지하였다. 마데라케이타는 처음 1950년에 다호메이에서 처음으로 기니아 민주당의 사무총장이었으나 1952년에 소이 단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토우레는 자연히 기니아 민주당의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기니아민주당은 레이 아우트라가 1950년에 창설하였다가 1953년까지 소이 단에서 당수로 있었으며 1957년까지 유지했다. 그러나 기니아민주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체제가 행정부의 정책비판으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프랑스정부에 대하여 정치적공세를 취했다. 이는 1952년 토우레가 당권을 장악할 때 까지 지속되었다. 이라하여 기니아 민주당은 다시 거대 여당이 되었다.
    세코우토우레 역시 프랑스 정부에 대하여 저항할수 있는 인물로 변했고 더욱이 정적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도전할 수 있는 자가 되었고 그의 정치적위치에 도전하는 자 에게는 여지없는 숙청을 가할수있는자가 되었다. 기니아민주당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그의 정치적권위는 상존할수 있었고 그 정당으로 하여금 집권하게 되었다. 한편 아프리카의회민주당은 1951년에 프랑스공산당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그들은 계속 기니아가 공산정권속에서 통치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몇몇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1955년에서 1956년사이에 토우레도 대정당의 당수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고 아프리카무역협회를 주도하게 이르렀다. 이러는 동안 토우레는 서부아프리카 지역에서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정부와는 저항할줄 아는 정치지도자인 동시에 프랑스정부와 협상도 할줄 아는 지도자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956년에 토우레가 이끄는 기니아 민주당이 프랑스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3석을 차지함으로써 프랑스인들에게 기니아의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또한 1957년에 기니아의 지방선거에서는 60석중 56석을 차지함으로써 선거에서 완전승리를 했다. 그럼에도 기니아에서는 어떤 정당지도자도 독립문제에 대해서는 주장하지 않았다.  1958년 드골 프랑스 4공화국에 와서 비로서 독립을 위한 헌법개정의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제4공화국의 드골대통령은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자 토우레는 정식으로 반프랑스 정책을 수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기니아는 독립을 위한 4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 토우레의 정치권력이 존재해야 하며, efWo, 기이나인들이 기니아민주당 아래에서 토우레의 정당 관리권을 가져야 하며, 셋째, 기니아인들이 경제적, 문화적 표현을 가질 수 있어야 하며, 넷째, 현정부 체제 내에서 경제발전을 할 있어야 한다는 것 등으로 되어 있다.
토우레는 과거 프랑스 통치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억압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정치적 자유도 향유할 수 있게 별다른 통제나 제한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토우레는 경제정책에 있어서 다소 급진적인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같은 경제정책은 예상외로 외국의 투자가 저조함으로써 실패했다. 따라서 국내의 자본을 동원코자 한 것이  세금에 의존했고 수출에 대한 각출에 의지 했다. 국내의 자본에 의하여 경제 건설을  추지코자 항에 따라 모든 국민 경제의 부담이 되었다. 국민들이 다시 궁핍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토우레는 정부의 건설을 국제적 수준으로 건설하기에 주저하지 않고 심지어 고급관리들의 생활할 호화로운 저택을 건립하였다. 이러한 건설은 국민들
의 반정부적 의식이 점차 팽배하게 되기 시작했다.
    기니아 민주당 내에서도 국민들의 불만이 점차 높아지자 강경파와 온건파가 서로 대립하듯 양분되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인 세내갈이나 코뜨디부아르는 기니아의 정치적 불안이 오히려 그들의 경제 발전에 악영향이 미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만일 기니아가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되면 기니아 인들은 인접한 세네갈이나 코뜨디부아르로 수십만명이 대이동할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니아 에서는 정치적으로 자유를 충분히 형유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기니아 내에서 만일 경제적 불안이 나타날 경우에는 바로 폭동으로 변할수 있다.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토우레는 불란서에 의존했던 경제적 정치적 영향을 소련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니아 국내에서 반정부 운동을 주도할 그룹은 바로 공산당과의 연합한 일부 근로자와 농부들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970년 11월부터 기니아의 군부들이 조금식 반정부적인 영향에 관심을 가졌고 이들의 대부분이 소련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군부중에 도 일부는 반정부 게 리라들과도 내통하고 있었다.
   1971년 7월에는 고급장교 8명이 피살당했고 1976년에는 기니아 민주당의 고위 간부  들도 반정부 운도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기니아 정치에서 토우레는 경제적 파탄에 따라 정치적 능력을 발휘할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당시에 아프리카 단결 기구의 전직 사무총장이 였던 디알로 텔 리가 의문의 피살체로 발견되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정치적으로 더욱 불안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997년에는 세코우 토우레는 정치적 영향력이 상실되어 가고 있었고 장관과 비서관을 합해서 71명중에 7명밖에 임명할수 밖애 없었고 그중에 8명은 게릴라들에 의하여 피살되었으며 18명은 중노동에 처해졌고 20명은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5명은 망명했으며 11명은 잠적했었다. 토우레는 자기의 권력이 야화되면서 경제는 국민들이 기아 상태로 전략되었고 그의 참모 들과 가족들은 폭력과 테러 분자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시위자들은 부녀자들까지 참가하여 반 토우레 시위를 했다.
처음에는 반 토우레 , 반 경제 정책의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그 후에 동유럽 권의 영향을 받은 인상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동구에서 생산된 상품을 판매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같은 시위는 토우레를 더욱 나폭한 지도자로 유도했다. 그러나 그는 우간다의 아민이나 제자 보카사스와는 같지 않았다 실은 크왕 엥크루마나 줄리우스 니에레에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특히 국가 건설 기간중에 국민에 대한 지도력으로 보아 국민들로부터 많은 기대와 희망을 준적도 많았다. 그래서 토우레에 대해서는 성공과 실패가 함께 했던 지도자로 평가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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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의 니에레레

2001. 10. 22. 10:11

탄자니아의 대표적인 정치지도자인 니에레레는 폭력이나 힘에 의존하는 대신 이성이나 설득의 힘에 의존하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  시행했다. 탄자니아의 계속적인 변화는 유지시키지 못했지만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그는 기존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정치스타일에서 가감히 탈피하여 새로운 스타일의 정치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역사상 아프리카 정치지도자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독립후 20년후에 1960년대 소수의 낙천주의자들은 탄자니아를 새로운 아프리카세계에 있어서 가장 용감한 아프리카의원형으로 간주했다. 또한 평등주의자들은 개인주의 되고자하는 욕망을 배제하고자 한다. 물질주의자들은 서로 나누고 도와주는 사회를 건설 하고자 한다. 이와같이 급진적이거나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정반대의 전제를 전개한다.

이러한 수많은 주장을 고려하기 전에 니에레레가 추구했던 목적, 그리고 탄자니아에 대한 홍보와 기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니에레레는 탄자니아 발전을 위한 3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탄자니아에서 개인적인 종족의 가치 실현을 배제하는 반급진적인 사회건설이다.

둘째는 니에레레 자신의 정치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결정에 대중의 참여를 대중의 참여를 유도한 홍보전략이다.

셋째는 개인적인 부보다는 집단적인 기본욕구만족에 더 뜻이 있는 평등주의와 협동 경제질서를 창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목표는 성취하기 어려울뿐 아니라 서로 상충하는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었다.


니에레레의 정치적 발의는 2가지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첫째는, 사회주의개념이고 둘째는 바급진적인태도이다. 반급진적 사회건설목표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인들의 감정에 크게 위배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존 정치제도하에서 이익을 얻는 아시아인들은 니에레레의 사회주의적 이념 반대에 앞장섰다. 결국 니에레레가 전식민지사회에 기초를 둔 평등, 협조적인 사회를 열렬히 선언한다 할지라도 기존 정치질서하에서 소득을 얻는자들은 탄자니아의 대외적인 경제적 고리를 꾸준히 강화한다.

니에레레는 탄자니아의 정치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러한 상호 반대적인 각각의 목적을 조화시키고 발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이러한 그의 고민과 불확신은 탄자니아를 가장 약하고도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의 아시안문제에 대한 마지막결정,  즉 기존정치제도하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에 대한 배려 혹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을 가져다 주는 사회주의 성취가 바로 그것이다 니에레레는 명백하게 그의 목적을 성취했으며 그의 지지자들은 반급진적 사회를 건설하였다. 명백하게 아시안들은 그들 자신의 약점을 잘알고 있고 특히 국가를 지배하는 행동양식에 있어서 그들의 위치를 의심하였다.

유럽인들 또한 그들의 정치적 위치에 대한 약간의 의심은 있었다. 그러나 모든 아시안, 유럽의 후보자들은 탄유가 1965년 경쟁 선거구를 장악한 이래로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탄유는 정치에 있어서 민족적, 종교적인 것을 거부하는데 있어서 커다 란 고통을 받고 있다 니에레레는 급진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시킬 수 잇는 정치적 지도자라 할 수 있다. 니에레레가 참여와 협조적 사회주의 건설에 성공한 것은 큰 논쟁거리이다.

급진주의적 비평가들은 일반적으로 민중에 뿌리를 둔 협조적 사회건설이 가능하나고 한다. 적어도 만약 지역사회에서 특권이 거의없는 사람들에게 의지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그들의 권력만을 유지하기 위한 니에레레의 프로그램에만 집중하는 관료주의적 부르조아계급에게는 명백한 태업이다. 그러므로, 급진주의적 비평가들은 산업화에 있어서 민족주의는 그들에게 수지맞는 직업을 제공하고 지역사회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관료행정부를 발전시키기 위해 농부들로부터 더 많은 부를 뽑아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반대로 협조적인 사회주의에 대한 개념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민중적인 수준에서 개인적인 성향은 성공한 농부가 집단농장에서 일하기 보다는 자신의 땅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관리계급은 지역적 협조체계든 민족주의적 산업화든 간에 그들 일의 효흘성을 무시한채 "부수입 또는 이익"을 얻는데만 관심이 있는 똑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개인 이기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器임없는 정부의 압력은 좀 더 유능한 농부들이 더 이상 국가가 필요로 하는 양식을 생산하지 않는 결과를 낳았고 민족주의적 산업화에 있어 커다란 비능률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비평들을 모두 분석, 정의 내리기란 어렵다 그 중 두가지 중대한 결정인자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두가지 분석인자는 첫째, 정부와 관료행정부이며 둘째는 지역농부들을 말한다.

첫째, 정부와 당엘리트 사이에는 평등주의가 명백한 이념으로써 수용된다. 고액의 월급을 받는 관료들과 중간급의 차이가 명백하게 감소된다.

둘째, 농촌지역에서는 결제적으로 부유한 개인은 탄유와 협조적인 자들을 통제하려는 경향있다. 니에레레는 평등주의 목표에 있어서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여 만족시킴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문제점은 너무나도 인간본성에 뿌리를 둔 것이라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1960년대 우자마공동체는 집단적 이익을 균등하게 나누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좀더 효율적인 정부가 그들의 기술이 불러오는 더 많은 이익을 가지려하고 집단적으로 일하기 보다는 그들 자체의 노동력을 고용함으로써 더많은 수입을 얻는데 있다.  

각각의 농부들은 너무나도 그들 자신의 농장안에서 형제 또는 이웃을 돕는데 바빠서 그리고 좀 더 기술있는 자들은 좀 더 많은 부인들과 노동자들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과 기술없는 자들간에 경제적인 차이를 넓혔다.

니에레레의 정치참여는 생고르의 민주주의와 같이 "제한적 참여" 였다 니에레레에게는 그의 정치적 신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위협적인 두가지 큰 원인이 있다. 지방자치에서 탄유의 한가지 약점은 이러한 평등주의적 사회주의 건설을 이룩하는데 공동체적 의식결여가 결과적으로 경제적인 관계가 변화되었고 더 나아가 대중의 참여는 극히 최소한 것이었다. 탄유의 통치가 좀 더 많은 영향을 끼칠수록 당은 탄자니아 사회에서 권력과 특권을 원하는 사라들에게 많은 매력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공통이익" 목적보다는 물질 또는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개개인이 더 많다. 이러한 위협은 3가지 결과를 초래하였다.

첫째,이러한 변화를 증진시키는데 당의 능력이 감소하였다. 이것은 가나에서 CPP가 사라진 것과 같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둘째,보다 덜 이상적이고 자신을 위한 개인적인 이익추구가 외세세력의 힘을 더욱 강력 하게 하였다.

셋째는 당으로부터 독립하여 자기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다.

두 번째 위협은 정부가 대중적인 인기를 잃어버림으로써 점차적으로 생존을 위한 권력유지에 더욱 의지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군인관료들은 탄유의 가치를 버림으로써 정치인들이 그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처럼 군대 또한 그러하다.  그리하여 1978년에는 탄자니아의 법으로 군대가 군림하였다. 이러한 위협적인 여러 요소들과 더불어 그의 이상적인 공동체 실현이 불확실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어려운 정치상황들은 그의 정치적 신념의 포기를 초래하였다.

니에레레든 그의 후임자든 간에 탄유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보유하거나 확장하는 것은 불확실하다. 대중참여에 있어서 행정부와 기회주의자들은 국가전체의 이익보다는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한다. 이와같이 탄자니아의 경제적인 문제는 서로 돕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하려는 의지 가있다. 그에로 니에레레는 고문을 일삼는 경찰들을 벌주고 무능력과 부패에 CChf관료들을 내좋았다. 분명히 니에레레는 인간의 개인적 욕망을 억제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또한 생활과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또 한번 그의 업적을 평가받는다.

그의 가장 른 업적은 강한 국가건설보다는 국가애에 이상적 가치를 부여해 개인의 이기주의를 극복한 것이다. 그는 평등주의적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그의 이상적인 공동체적인 정치신념은 탄자니아 사회에서 극복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점차적으로 그의 정치적 신념을 포기하고 현실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결국 그는 경제적인 부를 선택함으로써 탄자니아를 발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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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갈의 레오폴드 세다르 생고르

2001. 10. 19. 15:23

1980년 하반기에 세네갈 대통령이었던 레오폴드 세다르 생고르는 20년간의 대통령을 퇴임했다 그는 1946년에 처음으로 정치에 입문하였을 때 아프리카의 정치는 세형태로 분류되었었다. 그는 40세에 대학교 교수가 되면서 프랑스에서 근 20여년간을 생활하였으며 그의 처는 프랑스인이었다 한편 그는 항상 젊음을 구가하는 시인이었다.

그는 일부 아프리카의 정치인 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생고르는 다카르에서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엘리트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 그룹에서 모든 아프리카 국가에서 독립운동과 세네갈의 정치제도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때, 레오폴드 생고르는 국민들에게 식민지 시대의 정치지도자라는 인상이 없었으며 오직 지식인으로서 아프리카 정치적 영도자라는 인식이 깊었다 그는 아주 조용하고 신뢰성이 있으며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지도자로 부상되었다. 특히 국가경영에는 기술개발과 개인적인적인 사상에 투철했으며 소설과 극본등에 관한 예술성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문화적 가치를 알고 있는 정치지도자인 동시에 경제적 사회적 힘윽 가치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의 국가와 국민에게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국가를 이끌어갈 행정제도를 개혁하였다. 그의 국가 경영방법중의 하나는 평화속에서 관리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통치 목적이 무엇이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네갈의 지도자는 봉사와 희생으로서 다음과 같은 5가지의 목표를 설정해 놓았다. 첫째, 황무지의 땅을 개간하고 둘째, 도시와 농촌의 생활 격차를 해소하며 셋째, 수출확대를 추진하며 넷째, 농촌에서 회교도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다섯째 프랑스로 부터의 정부의 사회적 행정적 영향을 줄인다고 했다.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지도자로서 정치적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즉 18세기부터 프랑스의 정치적 영향을 받는 동안 프랑스혁명을 겪었고 세네갈도 이의 영향을 받았으나 세네갈인들에게도 프랑스 시민권을 주었었다.

따라서 세네갈은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의 대가로 프랑스는 1923년에 항구와 그외 중소도시를 연결하는 철도 부설을 위해 720마일의 다카르와바마관을 건설했다. 이런 철도 부설은 세네갈의 직업고용을 충족했고 1978년까지 세네갈인들의 실업율을 50%까지 내렸다. 1978년에는 모든 의사들을 하루 8시간 근무제를 실시하였다. 한편 세네갈의 주 생산 농업품목은 땅콩이 였다. 세네갈의 변두리 지역은 농토로서의 가치가 없을 정도로 황폐해 있었다. 즉 1960년에 독립되는 해에 10,000여명의 농부들이 경작하는 땅콩이 주 생산 품목이었으며 1973년에는 61,000여병이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땅콩재배였다 이것도 생고르의 5대 목표중에 첫째인 전 국토의 황무지 개간 정책에 따라 땅콩재배정책을 수행하였다.

이때부터 땅콩의 국제시세가 세네갈의 영향이 커지기 시작했다 1960년도에 175불이었고 1970년도에는 189불이었으며 197?년에는 275불이었고 1974년에는 502불이었다. 한편 회교도 성직자들에게 생활을 지원하면서 각지역에 파견케하여 기도할 수 있는 시간과 건물을 건설해 주었다. 이때 프랑스는 세네갈의 정치 및 정책운용에 회의를 가졌었다 왜냐하면 프랑스 정부가 판단할 때 정책이 실패될 것으로 예견했음에도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생고르 대통령의 개인적인 판단이 적중했다. 땅콩의 재배가 풍년이 되었는데 세계곡물시장에서 10%가격이 급등했고 타국에서는 땅콩재배가 흉년이었다. 따라서 국제곡물상들은 현금을 먼저 세네갈 은행에 예치해 놓고 물건을 가져왔다. 정당에 속해있는 정치인들의불만은 정권재위에 더욱 강하게 도전하고 있었다 1945년 총선거에서 정당들은 연정을 요구하였고 아프리카당은 유럽과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기구 공동체 역할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선거형태는 프랑스 헌법의회에서 코뜨디부아르를 승리케 하기 위한 선거운동이 지배적이었다.

이 선거의 결과로 프랑스 국회는 1960년까지 의회와 정부를 보호하기로 했다. 당시 코뜨디부아르는 1947-1951년 까지 서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의 민족주의와 프랑스통치정책간에 마찰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호우포우트는 1946년에 아프리카 민주의회를 창설하였고 민주정당적인 운영을 시도했다. 상기 아프리카 민주의회는 프랑스공산당으로부터 제도와 정책면에서 지원을 받았다. 1947년에 프랑스 공산당과 정부의 연합과 협력을 구상했다. 그러나 프랑스정부에 의하여 공산당은 해산되었다. 코뜨디부아르에서 부아니는 다시 새로운 반 민주당 세력으로 등장하였으나 체포되고 1950년에 자일지역에서 민주당을 재건하여 그의 세력을 규합하였다. 1951년에 프랑스 정부의 동의에 의하여 다시 공산당과 연합하였다.

생고르의 가장 큰 정치적 부담은 세네갈이 오랜동안 프랑스와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있었고 다음으로는 기술인력과 군대의 질을 향상하는데 있었다. 이를 의하여 외국인 기술자 1,500여명을 초청하여 세네갈의 기술개발을 육성했다. 1964년에 산업 부분에서는 고급인력을 양성하기에 이르렀고 한해에 273명의 산업전문인력을 육성했다. 한편 1960년도부터는 일부 정치적 저항세력의 쇠퇴에 따라 생고르의 신변안전문제에 대해선 많이 완화되었다. 1960년에는 27,000여명의 경비대를 유지했으나 1965년에는 6,600여명으로 감소되었고 1976년에는 700여명만이 근무하게 되었다.  이처럼 세네갈은 생고르 대통령이후의 지도자들은 일반적인 다른 아프리카 지도자들과는 달리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성심과 봉사심을 유산으로 남겼다고 볼 수 있다.

1792년부터 세네갈은 프랑스의 하나의 작은 한 통치지역에 불과했고 1914년까지만 해도 프랑스의회의 한석을 차지할 정도로 작은 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러던 세네갈이 점차 젊은 지식층과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은자들 이 정치적 내전에 개입하려 했다. 이의 정치적 움직임에 대해서는 많은 세네갈 사람들이 지지를 했다. 그러나 내전상태가 발발되자 라미네 구에예는 내전종식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치적 기술로 전쟁의 확대를 막았으나 반대로 구에예는 1946년에 세네갈의 정치적 변화로 축출되었다.

1946년에 실시된 선거에서 프랑스 국회에서는 생고르를 차기 세네갈의 정치지도자로서 육성하였고 그를 보호했다. 한편 프랑스에 있는 많은 세네갈 유학생들과 프랑스 군대에서 복무하는 세네갈 병사들은 생고르를 대단히 존경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당시 아프리카에서의 정치적 상황은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정치적 불균형이 다소 있었다. 그는 1906년 작은 시골에서 생고르가 출생했기 때문에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을 그를 부시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한 생고르의 아버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생고르를 세네갈에서 교육을 받게 한 후에 그에게 자유의사를 주었다. 생고르는 1928년에 프랑스로 교육을 받기 위해서 갔다. 프랑스에서 그는 프랑스의 드골과 친구가 되었다.

그 후부터 생고르는 드골의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 또한 1930년대에는 조지 봉피두 대통령과도 아주 친한 친구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프리카인의 정서를 프랑스 문화에 접목을 시키고자 시로써 표현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 시와 현실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철의 장막이 있었다.

1928년과 1946년에는 생고르는 아프리카 문화를 계승시키고자 했고 이로 인하여 그는 프랑스내에서 최고급의 지식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생고르는 프랑스 문화를 승화시키는 동시에 그가 지니고 있는 아프리카인의 혼을 배합하여 문화와 시의 영역을 확대시켰다 특히 아프리카의 문화가 어떤 것인가를 프랑스인들에게 잘 이해시키는 동안 세네갈에서 생고르의 위대함을 인정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에게 정치권력이 점차 그의 손으로 흡인되기 시작했다. 또한 세네갈의 농부들은 땅콩농사가 유일한 생계의 주요품목이었다. 이때 그들은 땅콩을 무제한 프랑스가 구매해 갔다.

따라서 세네갈과 프랑스는 과거 통치국과 식민지국가로서의 상호충돌 성 관계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1946년부터 생고르는 양국가간에도 지식인으로서 인정을 받았고 심지어 세네갈내의 농부들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으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을 대신하여 독립이 필요하다는 사싱을 농부들에게 주입시켰고 그로 인하여 그는 농부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아프리카문화에 심취되었는데 묘하게도 코뜨디부아르의 보이그니에 대하여 마치 체제에 대한 비판의 오해도 받았었다. 그래서 1948년에 생고르는 라미네 게이예와 관계를 끊었으면서도 프랑스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과도 관계를 단정함으로써 오히려 아프리카에 잠재해있던 모든 정치적 문제가 해소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지의 사나이"로 불리웠던 그가 세네갈에 집권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생고르 자신은 천주교신자인반면에 세네갈의 모든 사람들은 이슬람신자였다.

이렇듯 상반된 종교관으로서 천주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마찰없이 조화된 정치제도와 운영이 더욱 높이 평가될 수 있겠다. 그가 이슬람교도들에게 조국의 번영을 위한 정신적 통합에 대해서 약간의 반 프랑스적인 입장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프랑스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서 프랑스도 세네갈에 대하여 동등한 권리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생고르는 1956년에는 정당 당원들이 노화되어 감에 따라 새로운 젊은 당원으로 확보하였는데 이는 1976년까지 계속되었다. 이같은 정당정치에 대한 교체방법의 필요성을 터어키에서 "젊은 터어키"를 제시했던 그대로의 표본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이때 각부 족으로 산재해있는 여러 종족들에게 구별없이 정당에 가압할 수 이게 함으로써 종족간의 마찰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에 다소 불편했던 소이단종족들에게도 만족감을 주었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는 세네갈을 평온한 가운데 독립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구상했다. 생고르는 때때로 그의 정치적 영도력에 관해서 행복하게 생각하는 때도 있었다.

만일 생고르가 마마도우 디아를 정치적으로 지원했다면 생고르는 어려운 곤경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고르의 정치전문가로서 대두된 근본요인은 그가 정당을 잘 관리해서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문화로서의 가치와 세네갈을 사랑하는 인간으로서 국제사회에서 평화를 사랑했던 정치인이었다. 그의 모든 사고나 행동은 세네갈 국민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독립후부터 현실정치에 관심을 두었다. 이 현실정치는 정신적 개혁부터 실천했다. 그리고 1962년부터는 마마도우디아가 몰락한후부터 1970년까지 그는 현실적인 정치를 위해서 사회주의 정책을 목표로 했다. 이것이 197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동안 정당은 사회주의를 정당화 시켰으며 특히 교육을 위한 제반제도의 발전을 시도했고 또한 문화를 계승발전하는데 중점을 두는 동시에 경제개발에 역점을 두었다. 1968년 5월에 그는 세네갈의 중립정책의 반대를 천명하자 정치가에는 큰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하여 파리에 있는 세네갈 대학생들이 대거 반대시위를 함에 따라 프랑스정부는 세네갈에 있는 다칼대학교까지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방치했다. 이같은 시위는 바로 반식민지정책으로 시위목표가 변질했고 시위는 과격해졌으며 폭동으로 연결되었다. 1963년 5월에 정부는 각급 초,중,고, 대학까지 휴교령을 내리고 군부대로 하여금 각학교에 주둔케 했다. 각급학생들의 시위가 진정 구면에 들어서면서부터 모든 공장의 노동자들이 합세하여 시위는 더욱 커졌고 시위주동자들과 무역상사간부들을 포함하여 약40여명을 체포하였다. 원래 豈동자들은 단순한 반정부투쟁의 하나로서 시위를 한것이아니라 정권을 탈취하려는 목적의 시위였다. 이 폭동은 정부의 건물에 방화하였고 외국인 기술자들의 자동차에까지 방화하였다. 정부는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기관총사격을 가했다. 일주일간 폭동시위가 계속되자 생고르는 세네갈주의를 외쳤고 대학을 1년동안 폐쇄하겠다고 공포했다. 그러나 그해 9월에 개교를 했다. 사실은 1960년에서 1965년사이의 경제성장률은 0%였고 이는 세네갈의 경제를 어려운 상황으로 유도하고 있었고 노동자들에게희망이 없는 것으로 보여졌다.

왜냐하면 노동자가 필요한 곳도 없었고 기존 노동자들의 임금마져 동결되거나 지급되지 않고 있었다. 이처럼 불안한 정세는 세네갈과 프랑스간의 협력에 균열이 왔고 이에 대하여 프랑스 대학생들도 반세네갈 시위를 했다. 세네갈은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시련을 만났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조치로 정부는 땅콩농사에 종사하는 농부들에게 정부의 영농자금을 지원해 주고 그들에게 영농방법을 지도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1970년에는 많은 농민들이 영농하기에 이르렀고 수출을 위한 대대적인 협동정신을 앙양했다. 이결과 1974년에는 땅콩수출에 대한 모든값은 현금으로 현지에서 지불되었고 농민들의 반정부의식은 친정부성향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네갈의 경제개발은 프랑스만의 협력이나 지원으로 성공되지않는다. 레오폴드 생고르는 그의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애정이 그의 정치적목적으로 변했고 경제적, 사회적 모든 방면에서 비록 적지않은 시련은 있었지만 세네갈이 국제사회에서 발전되는 국가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인물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