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for '역사/아프리카 역사'

  1. 2018.04.13 -- 1980년대 말부터 왜 아프리카에서 민주화가 시작되었을까?
  2. 2018.04.13 -- 독립 후 아프리카국가들이 일당제 체제를 선택한 이유는?
  3. 2018.04.13 -- 독립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왜 발전하지 못하고 1세기 동안 정치적 불안정을 겪어야만 했는가?
  4. 2018.04.13 -- 독립당시 왜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과정이 달랐을까?
  5. 2018.04.06 -- 유럽은 왜 아프리카를 식민지배하였는가?
  6. 2018.04.06 -- 1884년 베를린 회의(Berlin Conference)가 왜 아프리카 역사에서 중요한가?
  7. 2018.04.06 --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에게 끼친 노예무역의 부정적인 영향
  8. 2018.04.06 -- 유럽인의 아프리카 탐험과 침략과 약탈
  9. 2018.04.06 -- 왜 서구인은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거래했을까?
  10. 2018.04.06 --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탐험과 항로의 개척
  11. 2018.04.06 -- 인도양 무역로와 스와힐리 문명
  12. 2018.04.06 -- 사하라 종·횡단 무역로와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교류
  13. 2018.04.06 -- 아프리카의 반투(Bantu)인, 반투문화(Bantu Culture)
  14. 2018.04.06 -- 아프리카는 인류의 요람! 인류의 기원지!
  15. 2018.03.23 -- 아프리카의 ‘새로운 역사(New History)'와 아프리카 중심주의(Afrocentrism) 역사학 방법론은 무엇일까?
  16. 2018.03.23 -- 아프리카 역사학 방법론과 구전전통(oral tradition)의 중요성
  17. 2018.03.23 -- 사하라종·횡단 무역과 함께 성장한 서아프리카 중세 왕국, 가나, 말리, 송가이, 카넴-보르누 왕국
  18. 2018.03.23 -- 서구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역사와 문화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였을까?
  19. 2018.03.16 -- 아프리카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전망에 대한 고찰
  20. 2018.03.16 -- 우리는 왜 아프리카에 대한 진출과 관계 확대를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일까?

1980년대 말부터 왜 아프리카에서 민주화가 시작되었을까?

2018. 4. 13. 15:55


많은 부분에 있어 1990년대 초 아프리카 정치사는 냉전의 소산이었다.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의 대결구도가 없었다면 아프리카에서 독재자들이 계속해서 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독립한 후 30여 년 동안 아프리카의 정치경제 상황은 국제사회의 이데올로기 대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서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의 관심이 아프리카에서 멀어지면서 아프리카인들의 인식도 달라졌다.


강대국이 아프리카에 대한 국제적인 지원을 위해 더 이상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프리카에 결정적인 변화의 동인이 되었다. 1990년 초기, 독립 이후 처음으로 아프리카의 통치자들은 외국 후원이나 지지보다 국내 지지가 더욱 중요해졌다. 또한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권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정권의 정당성과 허약성에 직면해야 했고, 다른 지도자들과 권력을 공유하는 것을 고려해야만 했다. 1990년대 초반은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힘든 시기였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이 심각한 구조적인 경제 위기와 같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민주주의에 열망은 경제위기와 함께 공공 의식의 성장 속에서 터녀 나왔다. 도시 노동자들을 포함한 전문가, 학생 등 정치적으로 의식을 갖고 있던 아프리카인들은 정부의 정책과 비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세계은행, IMF, 그리고 그 밖에 원조기구들은 아프리카에 대한 재정적인 도움에 대해 확실히 못박았다. 아프리카 정부는 그동안 방치했던 인권문제에 대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관심을 가져야 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국민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더 많은 책임을 져야만 했으며, 부패를 타파해야 했다. 아프리카 정부는 구조조정정책(structural adjustment programmes)을 받아들여야 했고, 시장 세력이 그들의 경제에 대해서 내리는 지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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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후 아프리카국가들이 일당제 체제를 선택한 이유는?

2018. 4. 13. 15:54


독립을 얻은 새로운 아프리카 국가는 국민의 정치적 이익의 수준을 지속시키고 국민을 통합시키는데 실패했다.


많은 독립 아프리카 국가들이 일당제를 채택한 것은 국가 건설과 경제 발전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일당제는 정당내부에 심각한 경쟁과 분열을 막을 수 있어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일당제에 대한 반대 주장에 대해 유럽인이 고안한 제도보다 집단 내부의 민주주의를 반영하는 아프리카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불행히도 일당제는 정당의 권력집중을 합리화시키는데 사용되었고 정부는 점점 더 권위주의적이며 관료정치화 되었다. 또한 어떤 때는 일당제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민족적, 지역적 집단을 국가라는 제도 속에서 붙잡아 두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일당제는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사용했다.


정치적 영역에서 합법적 경쟁은 불가능했고 부패한 정부 관료가 경제적으로 착복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적 인물의 출현은 이단자로 여겨지거나 배제되었다. 오래지 않아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은 구테타를 경험해야 했고 역 구테타가 발생하는 악순환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문제로 인해 아프리카의 정치적 문제는 식민정부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취약성과 함께 작용하여 더욱더 상황을 악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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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왜 발전하지 못하고 1세기 동안 정치적 불안정을 겪어야만 했는가?

2018. 4. 13. 15:53


1960년대 독립 전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민족주의의 흥기와 함께 탈식민화로 인한 해방을 맛보게 되어 아프리카의 낙관주의(Afro-optimism)가 예고되었으나, 국가체계의 구석구석에 묻어있는 과거 식민지 유산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서구에 대한 재의존과 냉전체제 속에서 내전 및 국가간 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식민지 독립 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인위적으로 형성된 식민/제국주의의 조형물이었다. 아프리카국가들은 독립에 대해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독립 후 아프리카국가들은 민족집단의 통합과 국가의식을 함양하는데 최우선적인 목표를 두어야만 했다.


식민 통치로부터 자유를 얻은 초기에는 아프리카 국가들은 흥분과 희망이 가득했다. 곧바로 인종주의, 제국주의의 통치라는 명백한 짐이 사라진 것이었다. 정부 청사에는 새로운 깃발이 펄럭였고, 유럽인이 아니라 아프리카인이 정치 권력을 쥐었으며, 세계가 신생국들을 자치국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독립의 흥분 뒤에는 정치 지도자들이 곧 대면할 수많은 문제들이 가려져 있었다.


시작부터, 독립 후의 지도자 자리를 기대하고 있던 당파들 사이에 내부 갈등이 빚어졌다. 민족주의 운동 단체로 이루어진 반식민주의 기구들은 민족, 지역, 이데올로기적 계통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독립을 이루자, 식민주의 압제에 대한 반대라는 공통적 유대가 약해지거나 사라지면서 당파간 또는 당파내 갈등이 생겨났다. 불화를 일으킨 이슈 중 가장 큰 것은 정부와 여당내 권력에 대한 접근이었다. 중앙 정부건 지역 정부건 간에 정부 내 직위는 영향력 있는 결정과 자원에 대한 지배력, 개인적 이익에 대한 접근을 의미했다.


탈식민화 시기의 선거로 국가 지도자가 된 반식민주의 지도자들은 깨지기 쉬운 국가적 화합에 직면했다. 식민주의자들이 통치한 지역은 다양한 문화와 언어 집단, 정치적 존재, 상업 지역이 해당되었다. 식민 통치기에는 식민지 내에서 사람들을 통합하거나 단결시키려는 시도가 거의 없었다. 그보다는 통제 수단으로 민족 집단들이 서로 대립하게 하는 경우가 잦았다.


독립 이후 취약한 국가체제를 가지고 있던 아프리카 국가들은 민족, 계층, 엘리트 집단과 같은 경쟁 세력 간의 갈등과 부와 고용의 창출, 교육, 및 국가 자원의 배분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아프리카의 정치구조는 정쟁의 장이 되었고 그 뿌리가 허약했기 때문에 외부의 영향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상황이 되었다.


독립초기에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낙관주의가 팽배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정치적 식민주의는 끝났지만 경제적인 간접지배를 통해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의 시대가 도래 하였다. 독립 이후 40여 년간 잘못된 통치와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낙후, 빈곤, 불평등 악화. 정치적 실패로 이어졌는데 이는 과거 식민시대의 정치형태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1970~1980년대에 국가발전을 위한 대안으로, 또한 정치행동을 조작하기 위한 도구로서,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데올로기를 채택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이는 식민지배시기부터 이어온 외국인들의 착취를 없애고 식민지 이전 아프리카의 과거에 있었던 공동체적 평등주의 요소를 부활하자는 전략의 표출이었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80년에 들어와 일당독재체제 또는 군사독재정권이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정치인들의 폐쇄적인 정치행태와 개발독재를 정당화 하려는 욕심은 군사정부가 출현하게 하였다. 아프리카 특징적인 정치 형태는 공직자의 부정부패, 정부의 신뢰성 결핍, 그리고 인권침해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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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당시 왜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과정이 달랐을까?

2018. 4. 13. 15:52


독립의 과정은 식민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진행되었다. 유럽인들이 이주하여 정착하고 있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은 상대적으로 다른 독립의 과정을 겪었다. 즉 백인 이주민들의 이익에 따라 독립의 방식도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지도> 식민지배국가와 아프리카의 독립년도



식민지 해방의 과정을 잘 살펴보면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벨기에가 독립을 내주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민 열강들이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해방시킨 과정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각각의 경우는 서로 달랐다. 어떤 경우, 식민지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그 지배자가 영국이건, 프랑스이건, 벨기에건, 포르투갈이건, 비슷한 모형을 따라야 했다


예를 들어, 알제리,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케냐, 나미비아, 자이레, 짐바브웨 등의 독립운동은 코트디부아르, 어퍼볼타(부르키나파소), 탄자니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의 지역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고 커다란 충격을 동반했다. 전자의 경우 유럽 이주민의 이익이 민족투쟁의 성질에 큰 영향을 미쳤고, 후자의 경우에는 이주민의 이익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성격과 조직 능력 역시 중요한 변수로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식민 열강에 의해 지배를 받았냐는 사실보다는 그 식민지에 유럽인 이주민이 살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식민 해방의 유형과 방법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주민이 없는 곳에서는 식민 열강도 아프리카인에 대한 자치를 허용하는 데 수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주민이 있는 경우에는 식민 해방의 과정에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 간의 폭력적 갈등의 기간이 거의 특징적으로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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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왜 아프리카를 식민지배하였는가?

2018. 4. 6. 10:07


아프리카 식민지화의 핵심적 원인은 정치적, 경제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럽 각국은 민족주의적 경쟁과 힘의 균형, 그리고 국가주의적 시각에 따라 더욱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고자 경쟁하였다. 또한 제국주의적 시각에 따라 새로운 시장과 자원의 공급지로서 식민지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팽창욕구 때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것이 이익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경제적으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선교사들이나 해안가에 거점을 두고 이루어지는 소규모 무역상들에게 방치된 상태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이익을 얻기 위한 유럽 국가들의 경쟁은 1870년대에 들어와 점점 치열해졌다.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과 그리고 독일에서는 개인과 집단들이 경쟁하고 있었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조직한 국제아프리카회의(International African Association)같은 단체에 의해서도 경쟁이 유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비공식적인 무역 제국이 공식적인 식민제국으로 전환하는 것을 옹호하게 만들었다. ‘분할또는 쟁탈(scramble)’이라는 유럽인들의 표현에 맞는 거의 공황에 가까운 경쟁상태가 일어나게 되었고 1880년대에 들어와서는 유럽 국가들의 아프리카 쟁탈은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식민지배는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문화는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전통을 만들어 냈다. 일부 경우에 있어, 이러한 전통은 아프리카인들의 후진성과 미개함, 그리고 야만성을 비판하는 데 사용되었다.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지배 방법이 다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체제, 즉 기술적으로 진보한 소수의 외국인이 다수의 원주민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강제로 지배한 체제였다. 식민주의자는 식민 지배를 하는 자신들은 우등한 쪽이고 식민 지배를 받는 아프리카인들은 열등하다는 이론을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아프리카의 점령과 식민화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배경의 대부분은 다윈(Darwin), 스펜서(Spencer), 모건(Morgan),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역사발전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유럽인들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더 높은 수준의 문명이 낮은 수준의 문명을 점령하여 세계의 곳곳에 번영과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 옳은 일이고 심지어 자신들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백인의 십자가라는 문구로 표현되거나 프랑스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명의 의무라고 표현되는 이러한 주장들은 백인종의 생물학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인종차별적 이론을 더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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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베를린 회의(Berlin Conference)가 왜 아프리카 역사에서 중요한가?

2018. 4. 6. 10:06


1884년에서 1885년 사이에 독일 재무장관 비스마르크(Bismarck)에 의해 개최된 베를린 회의(Berlin Conference)는 이렇게 고조되고 있는 아프리카 쟁탈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유럽국가들 사이에 전쟁을 피하고 각국의 이해관계와 충돌을 조정하려는 목적에서 개최되었다. 협상을 위한 회의의 주제는 표면적으로는 자유무역이었다. 가장 주목할만한 내용은 아프리카가 국제법상 그 어느 누구의 땅도 아닌 자유롭게 점령할 수 있는 땅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베를린 회의는 아프리카 쟁탈을 합법화했고, 유럽의 열강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분할하자고 공식적으로 비준하였기 때문에 아프리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조약에서는 유럽의 열강들이 식민지의 주권을 주장하기 전에 그 영토를 효과적으로 점령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여기서 효과적인 점령이란 무역거점의 확보, 탐험가의 발견또는 용병을 통한 지배와 점령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효과적인 점령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였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을 해방자라고 칭했지만, 점령의 과정은 거의 폭력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점령은 주로 용병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들과 고용주들이 부유해지는 것뿐이었다. 주로 군사적 점령을 통해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탐험가나 모험가 그리고 제국주의 앞잡이를 통해 식민지를 건설하였는데 영국인으로는 세실 로즈(Cecil Rhodes), 조지 골디(George Goldie). 그리고 해리 존스톤 경(Sir Harry Johnston), 독일인으로는 칼 페터스(Carl Peters), 프랑스인으로는 사보르냥 드 브라자(Savorgnan de Brazza) 등이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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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에게 끼친 노예무역의 부정적인 영향

2018. 4. 6. 10:05


역사학자들은 노예무역으로 인해 아프리카 사회가 후진성을 띠게 되었고 세계 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약점과 의존성은 식민 시대에도 계속되었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분명히 지속되고 있다. 다른 역사학자들은 노예무역에 크게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환경이나 기술, 사회 조직, 종교적 신념, 개인적 시도와 같은 식민지 이전 시대의 아프리카 사회를 형성한 요인들을 강조한다.


노예무역의 가장 심각한 후유증은 인위적인 인구손실로 아프리카가 발전의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노예무역의 성장은 아프리카 사회의 불안정을 야기하였다. 17세기-19세기에 이루어진 노예무역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붕괴시켰다


신세계로 이송된 사람들의 숫자를 추정하는 데에는 기록이 부정확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최근의 계산에 의하면, 15세기와 16세기에 잡혀간 사람들까지 합쳐 모두 1,000만 명에서 1,300만 명의 사람들이 노예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 절반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나머지 절반은 중앙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사람들이다. 노예를 수송하는 과정에서 약 5배에 달하는 아프리카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아프리카인들의 인구손실은 약 1억명을 상회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세기에는 약 1,000만 명 이상이 노예무역으로 인해 죽거나 유출되어 가장 심각했으며, 19세기에는 약 400만 명 이상이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예무역이 아프리카에 미친 광범위한 부정적 이미지와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지금까지 고착화되어 재생산되고 있다. 급격한 인구 감소로 아프리카 사회가 저발전의 단계에 머물게 하였으며 생산적이지 못한 무역체계로 인해 세계 시장에서의 불리한 위치 놓이게 되었다.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인해 서구사회는 아프리카의 희생을 발판으로 부유해졌고, 그러므로 아프리카가 현재 처해 있는 경제적 후진성에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중심주의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의 영광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아프리카의 문명은 오히려 대서양 노예무역의 영향으로 변형되고 야만화 되었다고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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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의 아프리카 탐험과 침략과 약탈

2018. 4. 6. 10:04


유럽인들에게 암흑의 대륙으로 여겨지던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지리적 발견과 탐험이 이루어졌다. 17세기 이후부터 이루어진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탐험은 경제적 목적과 아프리카 내륙에 대한 지리적 관심으로 시작되어 노예무역 폐지 등으로 이어졌으나 결론적으로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침략과 약탈의 역사였다.




<지도유럽인의 아프리카 내륙탐험



서부 아프리카에서는 니제르 강에 대한 탐험이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니제르강의 탐험은 팀북투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팀북투는 황금의 도시로 유럽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며 이슬람문명이 번영하고 있었다. 1828년에는 프랑스인 르네 까이예(René-Auguste Caillié)가 팀북투를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팀북투에 도달했으며 1952년에는 독일인 하인리히 바르트(Heinrich Barth)가 팀북투를 방문하여 자세히 기록을 남기고 있다. 주로 감비아 강과 세네갈 강의 탐험을 통해서 이곳에 도달하려 하였고 사하라사막을 횡단하여 시도되었다. 1975년 뭉고 파크(Mungo Park)가 세구에서 실라까지 니제르 강을 거슬러 올라감으로서 니제르 강을 성공적으로 탐험하고 아프리카 내지 탐험(Travels in the Interior Districts of Africa)을 출판했다


1823년에는 데남 (D. Denham), 클레퍼튼(H. Clapperton), 우드니(W. Oudney)등 세 사람이 처음으로 차드 호수를 발견하고 차드 호수와 니제르 강이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1830년 리차드 란더(Richard Lander)가 동생과 함께 대서양에 이르기까지 카누탐험을 성공시킴으로서 서부아프리카의 베일이 벗겨지게 되었다. 기니에서 북상하여 부사에 이르렀으며, 강을 타고 내려가 대서양으로 나가 처음으로 니제르강의 하구를 완전하게 밝혀냈다. 이 결과를 1832나이저 강의 수로와 하구를 탐험한 탐사일지(Journal of an Expedition to Explore the Course and Termination of the Niger)로 출판하게 되었다.


1769년 청나일과 백나일로 이루어진 나일 강(6690km)은 수단의 수도 카르툼에서 합쳐지는데 영국인 제임스 부르스(James Bruce)가 이디오피아의 기이슈(Geesh) 마을에 있는 한 우물이 청나일강의 근원지라는 것을 밝혔으며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Travels to Discover the Source of the Nile)이란 여행기를 출판하였다.


남부 및 중부아프리카는 약 30년 동안 약 4차에 걸친 탐험과 탐사가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 선교사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마무리를 스텐리가 하였다. 리빙스톤은 진정으로 아프리카를 사랑한 사람이었으며 인도양에서 대서양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 합법적인 무역을 하게 함으로서 노예무역을 근절시키고자 탐사를 하였다. 1차 탐험에서는 1849년 칼라하리 사막을 건너 엔가미 호수를 발견하였고 2차탐험 때는 1853년부터 1864년까지 잠베지강을 탐험하였고 1855년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하였다


1857년에는 남아프리카에서의 선교여행과 조사(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 1865년에는 잠베지 강과 그 지류 탐험에 대한 이야기(Narrative of an Expedition to the Zambezi and Its Tributaries)를 출간하였다. 30년간 남부·중앙·동부 아프리카에서 펼친 그의 여행과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은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의 태도에 전례 없이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탐험한 지역은 유럽인의 발길이 한번도 닿지 않은 곳도 있었다. 그의 지리적·기술적·의학적·사회적 발견은 다양한 지식을 제공해 아직도 그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진정으로 아프리카가 근대사회로 발전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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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구인은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거래했을까?

2018. 4. 6. 09:59


아프리카가 인도로 가는 무역로의 중간에 있어 거추장스러운 곳으로 생각했으나 16세기 말 남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지역에 설탕 플랜테이션이 시작되자 극적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설탕, 담배, 커피, 면화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노동력은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의 질병에 노출되자 사망률이 높아졌고, 식민지 노동력으로 편입되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저항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노동자들 역시 열대병 때문에 높은 사망률을 보였고, 플랜테이션에 필요한 노동력을 채우기에 유럽 노동자들의 숫자는 태부족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은 열대병에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고, 고대부터 사하라 사막과 인도양을 통해 유럽인들과 접촉을 해왔기 때문에 유럽의 질병에도 저항력을 갖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유럽인 무역상들과 내륙 지역에서 포획한 노예를 수송하는 아프리카인 중개인들 사이에는 사업적 협력 관계가 구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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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탐험과 항로의 개척

2018. 4. 6. 09:58


아프리카와 유럽의 상호작용의 역사는 1400년대 초반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 헨리(Henry)의 후원을 받은 항해부터 시작되었다. 헨리 왕자는 북부 아프리카를 지배하던 아랍 지역을 우회하여 서부 아프리카의 주요 문명 지역들과 황금을 직접 교역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계획은 기술이 발달하여 포르투갈인들이 기니 남쪽을 탐험할 수 있게 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1460, 무역선이 케이프 베르데(Cape Verde)에 당도하였고, 곧 이어 1471년에는 황금해안(Gold Coast), 1483년에는 콩고, 1488년에는 희망봉(Cape of Good Hope)에 도착했다


1497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양과 동부 아프리카에 있는 스와힐리 해안도시에 도착했고, 그 이후 인도에 도착하게 된다. 드디어 1500년 카브랄(Pedro Cabral)은 포르투갈을 출발하여 브라질에 기착한 후 케이프 타운을 돌아 동아프리카를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확고히 열고 포르투갈의 독점시대를 열었다. 이 지역에 백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The Dutch East India Company)가 인도 항로의 중간 정박 기지인 기항지를 건설을 목적으로,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k)가 이끄는 3척의 배와, 130명의 남녀로 구성된 탐험대가 165264일 테이블 만에 도착하게 됨으로서 드디어 유럽인이 최초로 아프리카에 이주 정착하게 되었다.


매우 이익이 컸던 인도양 무역으로 인해 원래의 목적이었던 아프리카의 황금은 뒷전이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황금해안의 엘미나(Elmina), 콩고, 앙골라, 모잠비크, 몸바사에 거주지를 만들고 제한된 무역을 했지만, 선박들은 대부분 아프리카를 우회하여 동방으로 향했다. 1500년 중반 네덜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인들이 포르투갈 무역상을 대신하기 시작했지만, 아프리카는 유럽의 최종목적지인 극동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우회해야 하는 장애물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더 우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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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양 무역로와 스와힐리 문명

2018. 4. 6. 09:56


인도양에 접한 동부 아프리카 해안은 계절풍을 이용한 무역을 통해 아라비아, 인도, 그리고 멀리 중국과 왕래했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내륙지방과의 무역은 일찍 시작되었고 인도양은 남부 아프리카에서 채굴된 금, 구리, 철 등의 주요 목적지였다. 특히 14-15세기에 스와힐리 해안과 짐바브웨와의 긴밀한 유대관계는 이러한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스와힐리 무역망은 해안가와 내륙지방을 따라 확대되어 갔으며 내륙지방과의 장거리 무역은 18-19세기에 급격히 확대되었다. 최근에 들어와서 일부 학자들은 스와힐리 문명이 서구 학자들에 의해 정체성을 분명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스와힐리 문명을 인도양의 대양문명(大洋文明)으로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스와힐리어 문명은 인도양 무역로를 중심으로 성장한 동아프리카 해안의 도시국가였다. 스와힐리인들은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에서 온 이슬람 선원들과 교류하였고, 다우(dhow)선으로 알려진 배를 이용하여 인도양 무역에 참여하였다. 서기 1천년 무렵에는 아프리카의 스와힐리 도시국가들은 모가디슈(Mogadishu : 현재의 소말리아)부터 소팔라(Sofala : 현재의 모잠비크)에 이르기까지 약 120여개가 있었으며 국제해상무역에 깊이 관여했다. 13세기 무렵에는 킬와(Kilwa)를 중심으로 스와힐리 상인들이 해안을 따라 내려가서 남부 아프리카에 있는 짐바브웨 지역의 고대왕국과 황금무역을 하였다


탄자니아 남부에 위치한 킬와는 쇼나(Shona)족이 지배한 짐바브웨의 금광을 기반으로 중국, 인도 그리고 다른 이슬람 세계와 광범위하게 무역을 했다. 이러한 도시국가를 기반으로 한 해상무역 사회는 아랍과 페르시아의 이민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의 문화를 모두 근본으로 삼은 독특한 스와힐리 문화를 발달시켰다. 많은 이슬람 도시를 여행한 이븐 바투타는 킬와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이고, 건물들이 매우 고상하며, 그 곳에 사는 주민들 역시 고결하고 덕망 있는 이슬람 교도라고 서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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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종·횡단 무역로와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교류

2018. 4. 6. 09:55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는 오래전부터 서로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익을 위해 더 많은 아랍인 상인들이 중서부 수단의 서아프리카 시장들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북아프리카에 아랍인 거주지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북아프리카의 토착민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유대인, 시리아인, 페르시아인들이 무역을 위해 몰려들었기 때문에 더욱 확대되었다. 초기의 상인들과는 달리 이들은 주로 무역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서아프리카의 상업 중심지를 방문하고 정착했다.


서부 수단의 지역의 통치자들은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축적하였고 무슬림 학자들을 고문, 대사, 행정전문가로 고용했다. 또한 서부 수단 지역의 통지차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지만 국민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전통종교를 여전히 신봉하고 있었다. 통치자들은 이슬람은 전통종교를 믿고 있는 국민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은 왕국과 국가를 통치하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슬람과 전통종교는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사회적 조화를 담아냈다.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는 서아프리카의 다양한 민족 집단과 상업적 이해관계 속에서 공동체 의식과 하나의 연대감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슬람의 도입과 함께 무역과 교육의 발달은 더 빠른 발전과 진보를 가능하게 했다. 기독교처럼 전 세계적인 종교였던 이슬람은 서아프리카를 더 넓은 세계와 접촉하게 했다. 특히 이집트와 중동부 아프리카에서 더욱 그러했다. 무역은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농업이 생계수단이었던 사람들보다 더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했다. 특히 무역을 통한 이익은 통치자들에게 수출과 수입을 통한 세금을 통해 잉여소득을 얻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중요한 사업이었다. 교육에 눈을 뜨게 됨으로서 효율적인 정부와 행정기관이 필요했고 발달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서아프리카에서 중요한 종교로 자리메김한 이슬람 세계에서 교통어의 성격을 가진 아랍어는 학문, 문학에서 중요한 언어였다.


사하라 종횡단 무역로의 발전은 서아프리카의 가나, 말리, 송가이, 카넴-보르누, 하우사 왕국들의 문명화를 촉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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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반투(Bantu)인, 반투문화(Bantu Culture)

2018. 4. 6. 09:52

20세기 초, 학자들은 현재 카메룬에서 케냐까지 광활하고 넓은 동부 지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남쪽까지 걸쳐 살고 있던 부족들의 언어와 문화에 주목할 만한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아공의 블레이크(W. H. I. Bleek)1862년 동남부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부족들의 언어와 문화에 주목할만한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들을 반투(Bantu), 반투 문화(Bantu culture)로 정의하였다. 동남부 아프리카의 언어에는 모두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은투(-ntu)’라는 어근, 또는 이와 비슷한 단어가 들어 있었다. 이곳의 대부분의 언어에서 (ba)’라는 접두어는 복수를 지칭했으므로 반투라는 단어는 사람들을 뜻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농사법, 그리고 가축재배법의 근원과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아프리카의 넓은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는지가 20세기 중반의 중요한 의문이었다.




<지도> 반투인의 이주 정착과 철기문화의 전파



반투어 사용자들은 철기문화와 가축이라는 혁명적인 생산방식을 가지고 아프리카의 선주민이었던 피그미족과 코이코이족들을 몰아내고 원주민이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반투 확장은 일반적으로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언어는 물론 흡수와 통합이 일어났으며 접촉과정에서 다양한 사회 경제적 제도의 전파와 동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반투 이민의 주요한 두 가지 특징은 첫째,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이동은 매우 느리고 매우 짧은 거리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큰 무리의 이동보다는 일반적으로는 소규모 친족 집단이나 무리들이 이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강조해야 할 두 번째 특징은 반투어 사용자와 아프리카 대륙에 거주하는 다른 아프리카 민족들 사이에 상당한 상호작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충돌과 갈등보다는 동화라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반투어 사용자들이 새로운 정치 경제 및 기술을 전해주었지만 반투이들도 코이코이족의 클릭 소리를 받아들이고 부계혈족제도와 연령등급제도에 기반을 둔 정치제도를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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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인류의 요람! 인류의 기원지!

2018. 4. 6. 09:47

지금까지 학자들은 현대 인류가 세계 여러 지역에 살았던 고대 인류로부터 각각 독자적으로 진화했다는 다지역(多地域)기원설과 아프리카에서 기원해 세계로 퍼졌다는 단일지역(單一地域)기원설로 나뉘어져 논란이 있어왔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는 인류의 화석은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에서부터 출현했다는 단일지역 기원설을 뒷받침 해주고 있으며 또 아프리카가 인류의 기원지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지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진화경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 ; ‘남쪽의 민꼬리 원숭이라는 뜻)는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믿어지는 화석 가운데 최초로 발견된 여러 화석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화석은 오직 아프리카에서만 발견되고 있으며 다른 대륙에서는 발견되고 있지 않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마이오세 말기(530 년 전)와 홍적세 초기(16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류의 화석을 가리킨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는 아파랜시스(Afarensis), 아프리카누스(Africanus), 보이세이(Boisei), 에티오피쿠스(Aethiopicus), 로부스투스(Robustus)5종으로 현재 분류하고 있다. 이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아파렌시스로서 약 3백만 년에 아프리카누스로 진화한 다음에 호모로 진화되었고 한편으로는 약 2백만 년 이전에서 약 2백만 년 전 사이에 아파렌시스가 에티오피쿠스로 진화하고 이들이 다시 로부스투스와 보이세이로 갈라져서 이들은 모두 절멸하게 된다


직립보행에 관한 증거는 1978년 메리 리키(Mary Leakey)에 의해 발견된 탄자니아의 라에톨리(Laetoli) 발자국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이는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화석인 루시유적보다도 50만년정도 더 된 것으로 밝혀졌다. 다시 말해서 아프리카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현생인류의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인류진화의 가장 큰 특징인 직립보행을 했다는 점을 밝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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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새로운 역사(New History)'와 아프리카 중심주의(Afrocentrism) 역사학 방법론은 무엇일까?

2018. 3. 23. 16:24

아프리카 중심주의의 주요한 지지자로 여겨지는 아산테(Molefi Kete Asnate)는 아프리카 중심주의를 하나의 이념적인 운동으로서 정의하고 "아프리카 문화와 그들의 행동에 대한 분석의 중심이 되는 아프리카의 개념"이라고 정의했다


아산테에 따르면 아프리카 중심주의는 "누비아, 에티오피아, 이집트의 아프리카 문명으로부터 획득한 아프리카의 문화유산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라고 정의된다. 그는 검은아프리카의 역사적 성취가 고대와 현대 학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국외이주로 인해 서구의 지적인 사고, 문화, 과학적 진보에 중요한 공헌자로서의 아프리카인들의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풍부한 유산을 빼앗겨 역사서술에서 타자화(Others)되고 주변부화(marginalization)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프리카 중심주의 연구방법론의 필요성은 그동안 아프리카학에 대한 유럽 중심주의 연구방법론(Eurocentric paradigm)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면에서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아프리카 중심주의라는 시각이 보편적인 연구방법론으로서 유럽 중심주의 연구방법론을 대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유럽이 모든 가치 판단의 근거로서 인식되어왔고 문명에 대한 정의도 유럽 중심주의 연구방법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프리카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방법론으로서 아프리카 중심주의라는 시각은 분명히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해줄 것이 틀림없다.


아프리카 중심주의적 패러다임은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y)와 인종주의(racism)를 극복하고 아프리카인들 스스로를 객체가 아닌 주체로 바라보려는 자세라고 평가할 수 있다.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주의는 백인들의 독재와 주도로 인해 아프리카인들과 아프리카 역사와 문화를 주변부에 머무르게 만들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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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역사학 방법론과 구전전통(oral tradition)의 중요성

2018. 3. 23. 16:23


특히 문자사회라는 아프리카의 특성상 구전전통구비전승(oral tradition)은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아프리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구전은 풍부한 기억력과 상상력을 기초로 에서 을 통해 사실을 전승하는 방법론으로 문자체계가 없었던 사하라이남 반투 사회의 대표적인 역사전승 방식이었다. 함파테(Hampâtâ Bé)아프리카에서 나이 많은 이가 죽으면 하나의 도서관이 사라진다고 말한 내용은 역사적 자료로서 구전전통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잘 말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구전전통은 세대를 거쳐 전해 내려온 그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을 지니고 있는 보물단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부족의 역사와 전통을 기억하고 암송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유산을 관리하는 사람들(the custodians of heritage)’로 불렀다. 이러한 사람들을 서부아프리카에서는 그리오(griots), 남부 아프리카의 줄루족과 코사족에서는 임봉기(imbongi)라고 불렀고 서부 아프리카보다는 자유로운 형태로 동남부 아프리카에서는 주로 연장자나 주술사 등 사회의 전문가집단에 의해 전승되었다.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들이 이와 같은 구전역사가들의 발화를 통해 나타난 신화, 전설, 찬양시, 속담, 이야기, 그리고 음악 속에서 그들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아프리카인들은 말을 대상화하지 않고 지시체의 실재에 속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들은 언어를 개인의 능력과 사회적 존재의 통합적 특성이 발화의 힘 속에 체현된 것으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말은 단지 학습된 형식의 효과적인 정교화가 아니라 개인이 가진 발성되는 힘이었다. 그리하여 발화는 개인의 지위에 따라 상대적 무게를 가진다. 말의 힘은 세상에 적극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간주되어 저주, 주문, 기도와 같은 위대한 말들은 무기로 사용되었다. 이들의 문화에서 말하고 명명하는 것은 경험을 창조하는 것,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체계는 구체에서 추상의, 사물에서 말의 명쾌한 분리에 실증적 지식이 있다고 보았던 19세기 유럽인의 경험주의적 인식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은 과거에 대해 거의 본능적으로 애착을 느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구비전승의 역사전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역사가 책, 기록문, 기록보관소의 문제와 관련된 나라들에서는 과거에 대해 일종의 거리감, 격리감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친숙한 이름들을 지닌 구비전승에 너무도 가까이 있어 역사가 공동의 자산으로 변모되어 대대손손 읊어지고 또 읊어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구비전승된 것들은 주의 깊게 추려질 것과 비판적 분석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적확히 직시한다면 아프리카를 이해하기 위한 구전전통의 연구를 통한 아프리카인들의 정체성 연구는 매우 의의있는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프리카의 구전전통이야말로 아프리카 역사문화의 보고로서 아프리카인들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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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종·횡단 무역과 함께 성장한 서아프리카 중세 왕국, 가나, 말리, 송가이, 카넴-보르누 왕국

2018. 3. 23. 16:20



서아프리카의 가나왕국(700-1200), 말리왕국(1200-1500), 송가이 왕국(1350-1600), 그리고 카넴-보르노 왕국은 사헬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사하라 사막 북부와 현재의 기니 만 연안의 남부지역의 중계무역으로 인해 번영하였다(Smith & Nöthling, 1993: 13-18, Jackson 2001: 196-223).


가나왕국은 소닌케(Soninke)족이 일으킨 왕국으로 모든 방향으로 봉신 국가(封臣國家, vassal state)들을 지배하는 강력한 왕국을 형성하였다. 사하라 횡단 무역을 통해 소금, , 상아, 구리, 노예 등을 거래하였다. 가나왕국의 주요 도시인 쿰비 살레(Kumbi Saleh)와 왈라타(Walata)는 북쪽으로 출하되는 금을 실은 대상행렬이 구성되고 준비를 하는 활동무대였기 때문에 북부아프리카와 남부아프리카의 자원 교역이 부흥함에 따라 번성하였다. 11c에 들어와 베르베르족의 약탈이 심화되고 사막화가 진행됨에 따라 사하라 횡단 무역의 거점을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어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구비(口碑)로 전승된 바에 따르면, 말리 왕국은 1230~1235년 사이 순디아타 케이타(Sundiata Keita)가 세운 나라로, 정규군을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을 농부들로부터 거둬들였을 뿐만 아니라 금과 다른 물품들을 이용하여 사막에서 생산되는 생필품인 소금과 다른 무슬림 세계의 일용품들을 교환하였다. 말리의 지배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만사 무사(Mansa Musa)는 많은 부를 축적해 1324년 메카로 아주 화려한 성지순례를 다녀왔다고 칭송받기도 했다.


1468년까지 지속된 말리의 세력은 나이저 강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손니(Sonni)왕 휘하의 송가이(Songhai) 왕국으로 넘어갔다. 송가이 왕국의 지도자들은 커누 군대를 이용하여 강을 지배했는데, 15914월 톤디비(Tondibi) 전투에서 모로코 침략자들에 의해 이미 쇠락하던 왕조가 완전히 망할 때까지 팀북투(Timbuktu), 제네(Djenne), 가오(Gao)와 같은 지역의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위의 3개 지역은 현재 말리의 주요도시로서 과거 서아프리카 고대문명이 꽃을 피웠던 지역이다.


카넴-보르노 왕국은 카누리(Kanuri)인들이 만든 국가로 약 9세기경에 출현하여 1000년간이나 지속된 왕국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사하라 종횡단 무역로와 군사적 정복을 통해 유지되었다. 왕을 마이(Mai)라고 불렀으며 신성한 존재로 신이 보낸 사람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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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역사와 문화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였을까?

2018. 3. 23. 16:17


서구 학자들은 이러한 아프리카의 문명화에 대해 아프리카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언제나 아프리카 대륙 외부로부터 영향과 기여를 더 중요한 요인으로 인식하여 설명하여왔다


이러한 인식과 평가는 아프리카는 세계사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다.’거나 아프리카는 역사가 없다.’라는 아프리카 타자화(Others)’ 또는 주변부화(marginalization)’의 과정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가치판단의 근거에는 서구인들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주의적인 사고와 쓰인 문헌 자료(written materials)’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역사적 자료로 여기지 않는 역사학적 대한 접근방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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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전망에 대한 고찰

2018. 3. 16. 11:17


세계은행은 2007년 아프리카 발전지표에서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고비를 넘기고 보다 빠르고보다 꾸준한 경제 성장의 단계에 들어선 것 같다.”라고 밝혔다많은 인구넓은 영토풍부한 지하자원이라는 산업 발전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정치·사회적 혼란과 500년간의 식민지배는 아프리카를 빈곤으로 내몰았다하지만최근 들어 정치·사회적으로 안정을 찾고많은 식민지배 유산을 청산하면서 아프리카의 경제는 보다 빠르고 보다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다.


21세기에는 아프리카의 위상과 역할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이며 우리는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이에 따라 아프리카에 대한 진출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대아프리카 진출전략을 수립하고 시행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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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아프리카에 대한 진출과 관계 확대를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일까?

2018. 3. 16. 11:17


아프리카는 그동안 우리나라가 적극적으로 진출하지 못한 미지의 대륙으로 향후 투자와 전략적 진출을 통해 자원을 개발하고 소비 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선 중국과 미국 등 선진국들이 왜 아프리카에 대해 진출을 확대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최근 아프리카 국가들이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프리카는 총 면적 30,221,532로 지구 육지 면적의 을 차지하는 세계에서 2번째로 큰 대륙으로 총 54개국이 존재하고 있다인구는 약 103300만 명으로 세계 인류의 15% 정도를 차지하고인구성장률은 2005년 이후 약 2.3%로 세계 인구성장률 1.2%의 2배 정도이다.


아프리카의 경제에서 가장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 지하자원이다아프리카의 화석 에너지는 전 세계 산출량의 10%, 광물 자원은 80%정도를 차지하고 있다아프리카의 석유는 세계 총 생산량의 12.3%, 세게 총 추정 매장량의 9.3%에 해당한다천연가스는 세계 총 생산량의 6.6%, 세계 총 추정 매장량의 7.4%에 달한다주요 광물의 경우전 세계 매장량의 80% 정도가 아프리카에서 나오고 있다전 세계의 크롬 99%, 코발트 75%, 탄탈 79%, 다이아몬드 47%, 백금 72%가 아프리카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더군다나 많은 미지의 지역들이 개발됨에 따라 아프리카의 지하자원은 매년 새롭게 측정되고 있다.


아프리카 경제의 큰 특징으로 다양성을 들 수 있다아프리카 국가의 경제규모는 상위 5개국이 아프리카 전체 GDP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35개 최빈국이 전체 GDP의 1.5%를 차지하고 있다인구의 규모도 상위 10개국이 아프리카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이처럼 아프리카의 시장은 규모 및 특성이 다양하다인구 1억 5천만, GDP 2천억 달러인 자원부국 나이지리아 시장과 인구 10, GDP 1억 달러인 휴양국가 세이셸 시장이 다를 것이다따라서 아프리카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개별 시장을 분류하고그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아직도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정치·사회적 불안과 내전부정부패종교분쟁 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진출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이에 대한 연구와 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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