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라리온 내전

2020. 5. 25. 14:10

피의 다이아몬드가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지속시킴

소년병, 사지절단, 강간 등 참혹한 내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줌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ECOMOG2017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시에라리온의 수도인 프리타운(Freetown)1787년 영국의 노예폐지론들에 의해 노예의 송환과 구출을 위한 장소로 마련된 곳이었다. 영국은 1808년 프리타운을 왕령식민지(Crown Colony)로 선포하고 포획된 노예선의 노예들을 정착시켰으며 1896년에는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식민 지배를 시작했다.

196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시에라리온은 다이아몬드, 철광석 등 지하자원이 풍부해 다른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가들과는 달리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국가였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국가발전은 침체되었고 국민들은 정부에 대해 반감을 키워가고 있었다. 시에라리온은 독립이후 허약한 정부와 불안정한 정치상황으로 인해 여러 차례의 군부 쿠데타를 겪었고 이웃한 라이베리아의 내전 역시 시에라리온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1991323일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가 이끄는 라이베리아애국전선(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 NPFL)의 지원을 받은 포데이 산코(Foday Sankoh)가 이끄는 혁명연합전선(Revolutionary United Front : RUF)이 부정부패 척결을 주장하며 1985년 쿠데타로 집권한 조셉 모모흐(Joseph Momoh) 정권을 공격하면서 시작 되었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2002년까지 11년 동안 지속되었고, 5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450만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시에라리온 정부군이 산코의 공격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데 불만을 품은 벨런타인 스트라세르(Valentine Strasser) 대위가 1992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권을 잡은 스트라세르는 국가임시통치평의회(National Provisional Ruling Council : NPRC)를 만들고 1992년부터 1996년까지 4년간 통치했으나 19961월 또 다른 군 지도자 줄리어스 마다 비오(Julius Maada Bio)에 의해 축출 되었다. 비오는 자유선거를 통해 민정이양을 약속하였고, 3월 계엄령 하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시에라리온인민당(Sierra Leone People's Party : SLPP)의 아메드 테잔 카바(Ahmad Tejan Kabbah)가 승리하여 1996329일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카바 대통령은 취임이후 RUF 지도자 산코와 아비장 평화협정(Abidjan Peace Accord)11월 말에 체결했지만 성공적으로 이행되지는 않았다.

19975월에 아비장 평화협정이 지켜지지 않은데 불만을 품은 일단의 군 하급 장교가 쿠데타를 일으켜 카바 대통령을 축출하고 군혁명위원회(Armed Forces Revolutionary Council : AFRC)를 통해 조니 폴 코로마(Johnny Paul Koromah)가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코로마 정권은 민간정부를 전복시켰기 때문에 이전에 있었던 쿠데타와는 성격이 달랐으며 국내적으로는 카바 대통령을 따르는 민병대의 공격을 받는 한편, 국제사회의 심각한 비난과 제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 ECOWAS)나이지리아가 주축이 된 서아프리카평화유지군`(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Monitoring Group : ECOMOG)1997년 시에라리온에 파병하였으나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고 오히려 코로마는 대통령임을 선언했다. 19978월 영연방은 카바 대통령의 무조건 복귀를 선언하고 ECOMOG는 병력을 3배로 증강해 코로마 정권을 압박하였다. 결국 19982ECOMOG는 수도인 프리타운을 점령하고 카바는 3월 대통령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19991RUF가 수도 프리타운을 점령하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사지절단, 강간 등 잔인한 범죄를 자행했다. ECOMOG가 치열한 공격 끝에 프리타운을 탈환했지만 RUF1997년 나이지리아에서 체포된 산코가 풀려날 때까지 계속 싸우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대해 ECOMOG 주도국인 나이지리아는 상황이 악화되어 나이지리아에 부담이 가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산코를 풀어주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시에라리온에 촉구하였다. 유엔과 아프리카통일기구(OAU)의 중재 하에 19997월 토고에서 결국 권력분담을 담은 로메 평화협정(Lomé Peace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즉각 전투를 중단하고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병하여 무장해제를 감시하게 하는 한편, 산코를 석방하여 부통령직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19998월에 권력지분에서 제외된 AFRC가 평화유지군 약 30여명을 인질로 삼아 또 다른 내전으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이 전개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9월 시에라리온 정부는 나이지리아가 주도하는 ECOMOG가 철수를 시작하자, 유엔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199911월 시에라리온 유엔임무단(United Nations Mission in Sierra Leone : UNAMSILL)이 업무를 시작했다.

이후 RUF는 평화협정의 내용을 준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0005월 다시 프리타운을 공격하자 영국은 허약한 카바 정부를 지원하고 영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개입을 결정했다. 영국은 약 800명의 낙하산 부대가 참여한 팔리서 작전(Operation Palliser)을 통해 프리타운을 탈환하고 산코를 체포함으로써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고 2002118일 카바 대통령은 시에라리온의 내전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20025월 총선에서 카바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으나 정당으로 참여한 RUF는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다.

시에라리온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벌인 ECOMOG2017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거론되기도 했다.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유엔 평화유지군을 대체하여 아프리카연합(AU) 또는 역내 지역기구가 주도하는 평화유지군을 파병하여 역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RUF는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에게 다이아몬드를 불법적으로 거래하여 무기를 수입하였다. RUF1991년에서 1999년 사이에 불법 다이아몬드 거래를 통해 연간 2억 달러의 수익을 낸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유엔은 다이아몬드 공정거래를 위해 다이아몬드 원산지를 추적할 수 있는 '킴벌리 프로세스' 감시 체제를 구축하고 분쟁지역에서 채굴된 다이아몬드에 대한 국제적인 거래를 금지하는 협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2007년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시에라리온 내전과 분쟁광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시에라리온 분쟁은 서아프리카 정치에 만연한 다양한 외부 요인들과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는 1989년 모모흐 대통령에게 시에라리온을 라이베리아 무장투쟁 기지로 사용하겠다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시에라리온이 라이베리아에 파병된 ECOWAS가 주도하는 평화유지군에 약 300명의 병력을 파병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또한, 시에라리온이 혼란한 상황을 틈타 국경지역에 산재한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도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리비아 역시 RUF를 만든 산코에게 군사훈련을 제공하여 내전을 부추겼다는 비난을 빗겨가기는 어렵다. RUF1991년 필요한 외부 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외부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필요한 시에라리온 국민들의 지지나 지원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RUF가 시에라리온 국민들에게 참혹한 인권유린 행위를 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20021월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내전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못한 상태이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소년병 강제 모집과 팔다리, , 입술을 잘라내는 신체 절단, 그리고 강간과 강제 노동 등 참혹한 내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아프리카 내전과 분쟁으로 기록된다.

시에라리온은 선거를 통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고 있으며 평화와 발전을 행해 나아가고 있다. 내전의 상처를 딛고 서서히 회복되고 있던 시에라리온은 20147월 에볼라 바이러스의 발병으로 시련을 겪기도 했다. 20184월 시에라리온에서 치러진 4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비오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시에라리온의 민주주주의가 정착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오 대통령은 준장 출신으로 쿠데타에 2번이나 참여했으며 1996년 민정이양을 진행한 인물로 시에라리온의 민주주의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비오 대통령은 집권당시 약속했던 초·중등 무상 교육과 정부의 차관도입 사업들을 재검토하여 중국의 신공항 건설 사업을 취소하고 광산 채굴권 합의 내역을 재검토하는 등 시에라리온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치 > 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에라리온 내전  (0) 2020.05.25
라이베리아 내전  (0) 2020.05.22
차드 분쟁  (0) 2020.05.22
서사하라 분쟁  (0) 2020.05.22
에티오피아 내전  (0) 2020.05.19
리비아 내전  (0) 2020.05.19

Mansa Musa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 ECOWAS), 시에라리온 유엔임무단(United Nations Mission in Sierra Leone : UNAMSILL), 시에라이온, 포데이 산코(Foday Sankoh), 프리타운(Freetown), 피의 다이아몬드, 혁명연합전선(Revolutionary United Front : RUF)

라이베리아 내전

2020. 5. 22. 15:22

라이베리아에 역이주한 해방 노예들이 식민지배자처럼 원주민을 지배

ECOWAS의 개입을 통해 아프리카의 문제는 아프리카인이 해결하는 사례를 보여줌

내전 이후 평화적인 정권교체로 아프리카 민주화의 모범사례로 떠오름

 

노예무역으로 인해 아프리카인들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이 대규모로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강제적인 이주와 정착을 해야만 했다. 노예무역이 폐지된 이후 미국에서는 1817년 미국식민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 ACS)가 조직되어 해방된 노예를 아프리카에 재정착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 결과 1821년 라이베리아를 만들고 수도는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에서 딴 먼로비아(Monrovia)라고 정했다. 이후 미국에서 풀려난 해방 노예와 미해군이 포획한 노예선의 노예들이 라이베리아에 주로 정착하였고 1947년 건국을 하게 된다.

라이베리아에 이주한 미국계 라이베리아인(Americo-Liberian)은 미국 문화를 따르며 자신들은 아프리카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자신들은 문명화된 사람들이며 기독교도로서 원주민과는 차이가 있다고 여겼다. 이들은 미국 남부 양식의 집을 지었고 모자와 연미복의 정장을 즐겨 입었으며 자식들은 주로 미국에서 공부를 시켰다. 미국계 라이베리아인은 권력과 부를 독점하였고 백인 식민주의자들처럼 원주민들을 억압함으로써 내전과 분쟁의 씨앗을 심었다.

이러한 상황은 1822년 해방노예들이 이주를 시작했을 때부터 1980년 원주민 군인출신인 사무엘 도우(Samuel Doe) 상사가 라이베리아국군(Armed Forces of Liberia : AFL)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톨버트(William R. Tolbert) 대통령을 축출할 때까지 약 150년 이상 지속되었다. 도우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지만 최초의 원주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많은 원주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85년 대통령 선거를 부정선거로 이끌어 라이베리아의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저버렸고 반대세력들이 규합되면서 라이베리아는 길고 잔혹한 내전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반군을 이끌었던 대표적 인물인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미국계 라이베리아인으로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라이베리아의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주장하며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테일러는 도우의 정권에서 조달청장을 맡았으나 횡령혐의로 미국에 도피하였고 1984년 미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러나 그는 1985년 탈옥하게 되는데 탈옥의 배후에는 부패하고 폭력적이었던 도우 정권을 전복시키는 역할을 테일러에게 맡기려는 미국 정부가 의도가 있었다는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다.

테일러는 리비아의 가다피, 코트디부아르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부르키나파소의 블레즈 콩파오레 등 독재자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바라던 국내외 자본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이웃국가인 시에라리온에서 반군 혁명연합전선(Revolutionary United Front : RUF)을 이끌던 포다이 산코(Foday Sankoh)와 결탁하여 라이베리아애국전선(National Patriotic Front : NPFL)을 결성하고 1989년 라이베리아에 군사 공격을 개시함으로서 전면적인 내전이 발생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프린스 존슨(Prince Johnson)1990NPFL에서 독립해 라이베리아독립구국전선(Independent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 INPFL)을 결성하였고 도우를 붙잡아 살해함으로서 또 다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내전의 상황은 도우가 이끄는 AFL은 몬로비아의 일부를, 존슨이 이끄는 INPFL은 몬로비아의 나머지 지역과 항구를, 테일러가 이끄는 NPFL은 나머지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1996년 내전이 공식 종료될 때까지 테일러는 라이베리아 대부분 지역을 장악해 나가면서 실질적인 지배자로 떠올랐다.

라이베리아 내전은 소년병이 이용되어 심각한 인권문제를 야기했으며, 주변국가의 개입으로 지역분쟁으로 발전하여 지역안보에 위험을 초래했다. 그러나 유엔을 비롯해 아프리카연합(AU), 미국도 개입할 의사가 없자, 서아프리카경제협력체(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 ECOWAS)19908평화유지군인 경제공동체 감시단(Economic Community Monitoring Group : ECOMOG)을 파견하였고 결국 1996년 평화협정을 이끌어 내 제1차 내전이 막을 내렸다.

1997년 비교적 공정하게 실시된 선거에서 군사지도자인 테일러가 75% 이상을 득표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되자 국제사회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이후 두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엘렌 존슨 설리프(Ellen Johnson Sirleaf)는 당시 테일러와의 대결에서 전체 표의 10%밖에 얻지 못했다. 오랜 내전에 지친 라이베리아 국민들은 테일러를 선택함으로써 민주주의보다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안정적 통치를 선택했다. 그러나 테일러는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지만 라이베리아를 회복시킬만한 훌륭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살인과 실종, 폭력적인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했고 이웃국가인 시에라리온의 반군을 지원하여 국제분쟁을 야기했으며 아프리카의 다른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정부패와 재산을 축적하는데도 능했다.

테일러를 타도하기 위해 도우 대통령이 속했던 크란족을 비롯한 반군세력들이 1999년 시에라리온 프리타운에서 세력을 규합해 '화해와 민주주의를 위한 라이베리아연합'(Liberians United for Reconciliation and Democracy : LURD)을 결성하고 시에라리온과 기니를 거점으로 미국과 영국의 군사·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테일러를 공격함으로써 제2차 내전이 시작되었다.

테일러는 시에라리온 반군단체인 RUF를 지원하여 기니의 LURD를 공격하도록 지원했으며 이에 대한 대가로 시에라리온으로부터 다이아몬드 공급권을 넘겨받기로 했다. RUF는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반인류적 범죄를 저질러 악명이 높았고, 인도적 피해는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국제사회의 노력과 LURD의 공격으로 2003년 테일러는 결국 무너지고 전범재판을 받게 되었다.

테일러는 20125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 ICC) 시에라리온 특별법정(Special Court for Sierra Leone : SCSL)에서 시에라리온 반군에 무기를 공급하여 내전을 사주하고 극악무도한 반인륜 범죄와 전쟁범죄를 방조한 죄로 징역 50년을 선고받았다.

라이베리아는 내전 종식이후 여성인 설리프가 2005년과 2012년 두 번 연이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녀는 내전 이후 라이베리아의 평화건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2011년 라이베리아의 활동가인 레이마 가보위와 예멘의 인권운동가 타워크쿨 카르만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아프리카 힐러리”, “철의 여인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한 설리프의 재임기간 동안 라이베리아는 49억 달러에 달하던 부채를 모두 탕감했고 미국 등 서방의 원조를 이끌어내 연평균 약 8%의 성장을 이끌었다.

또한 1990년대 '흑표범'으로 불리던 세계적인 축구스타 조지 웨아(George Weah)201712월 라이베리아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61.5% 득표율로 승리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어 민주주가 정착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빈민가 출신이 조지 웨아는 여전히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내전의 상처를 씻어내고 라이베리아가 직면한 높은 실업율, 기아와 빈곤, 범죄를 해결해야하는 문제를 안고 있지만 빠른 속도로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라이베리아 내전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ECOWAS는 서아프리카 지역의 경제협력체인데도 불구하고 지역의 역내 안보를 위해 평화유지군을 파병하여 라이베리아 내전을 종식시키고 지역의 분쟁확대를 막아 아프리카 문제는 아프리카인이 해결한다.’는 희망을 주었다. 둘째, 전직 국가 정상이 국제 재판소에서 유죄를 받은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을 처벌하기 위해 열렸던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최초라는 점에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결국 테일러 전 대통령에게 중형을 내림으로써 정의를 구현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다. 셋째, 2003년부터 주둔했던 유엔 라이베리아임무단(UNMIL)20183월 철수하였으며 이후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라이베리아는 내전이후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정권교체와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어 내전을 겪은 아프리카 국가의 발전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정치 > 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에라리온 내전  (0) 2020.05.25
라이베리아 내전  (0) 2020.05.22
차드 분쟁  (0) 2020.05.22
서사하라 분쟁  (0) 2020.05.22
에티오피아 내전  (0) 2020.05.19
리비아 내전  (0) 2020.05.19

Mansa Musa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경제공동체 감시단(Economic Community Monitoring Group : ECOMOG), 라이베리아애국전선(National Patriotic Front : NPFL), 먼로비아(Monrovia), 미국계 라이베리아인(Americo-Liberian), 미국식민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 ACS), 사무엘 도우(Samuel Doe),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포다이 산코(Foday Sankoh)

차드 분쟁

2020. 5. 22. 15:19

차드 분쟁의 원인은 식민지배의 유산이며 전형적인 아프리카 분쟁 사례

국가통치권을 차지하기 위해 종교, 지역 갈등이 충돌

주변국가인 수단과 리비아의 영향이 계속해서 불안요소로 작용

 

아프리카 국가의 내전과 분쟁은 대부분 식민지배의 유산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차드는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는 차드의 정치적 불안정과 역사적 갈등을 제공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식민지배는 민족 집단과 지역간 차별의식을 심어주었고 통합된 국민의식을 갖지 못하게 분열시켰다. 내전이 발생한 이후 식민종주국인 프랑스와 이웃하고 있는 리비아와 수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차드 내전에 개입하면서 국제적인 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립 이후 초대 대통령인 툼발바예(François Tombalbaye)는 식민지배 유산을 청산하고 차드의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족 집단의 갈등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내전이 발생하였다. 독립 이후 차드는 국가의 통치권을 놓고 정권을 잡은 남부와 북부, 남부의 기독교와 북부의 이슬람으로 나누어 대립하였고, 이후 정권을 획득한 북부 역시 다시 파벌간 내분이 발생하여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긴 분쟁 중 하나로 기록된 차드 내전은 1966년 시작되었으며 1990년까지 2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1960년 독립이후 툼발바예 대통령은 새로 임명되는 모든 공무원을 북부지역은 배제하고 남부지역인 사라(Sara)인들로 채용하여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식민지배 시기 이전부터 북부지역이 소외되어 남북간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독립 이후에도 이러한 상황이 지속됨으로써 북부인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긴장은 1965년 대통령이 소와 개인 소득에 대한 세금을 신설함으로써 최고조에 달했는데 북부의 투부(Tubu) 족이 정부에 저항을 하면서 불만이 표출되었다. 결국 1966622, 무슬림 지식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수단에서 차드민족해방전선(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 du Tchad: FROLINAT)을 출범시키고 정부에 대항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발생하게 된다. 게다가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지역의 패권국가임을 자처하며 FROLINAT에 군사지원을 하자, 열세에 몰린 중앙정부는 프랑스에 파병을 요청해 이후 차드 내전은 리비아와 프랑스가 개입한 국제분쟁으로 발전했다.

툼발바예 대통령은 북부의 이슬람을 소외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회를 유명무실하게 만들며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고 일당독재를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일련의 쿠데타와 정치적 불안으로 이어졌다. 결국 1975년에 펠릭스 말룸(Félix Malloum)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나 파업과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1979년 인접 5개국이 중재에 나선 끝에, 남북은 휴전 협정을 체결해 북부가 주도하는 국가통합임시정부(Transitional Government of National Unity : GUNT)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19803FROLINAT 내부에 분열이 발생해 후세인 하브레(Hissène Habré)가 이끄는 북부군(Armed Forces of the North : FAN)과 구쿠니 우에데이(Goukouni Oueddei)가 있는 인민군(People's armed Forces : FAP)으로 나누어져 권력쟁탈을 위한 내전이 벌어졌다. 하브레는 미국 CIA로부터 1천만 달러를 지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군사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하브레는 먼저 수도를 점령한 후 1982년 남쪽으로 진격하여 사르(Sarh)와 몬도우(Moundou)를 점령한 후 실질적인 통치자로 떠올랐다. 우에데이를 지원하던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는 1980년 군대를 파병하였고 1981년 차드의 합병을 선언했으나 아프리카통일기구(OAU)의 제지로 철수하였다. 1983년 리비아의 지원을 받은 우에데이는 남쪽으로 진격했지만 하브레의 효과적인 게릴라 전술과 남의 나라에서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한 리비아군의 사기저하로 인해 패배하였다. 리비아는 1990년까지 분쟁 중인 북부 아우주 지역(Aouzou Strip)만 겨우 통제하는 상황이었으며 결국 하브레는 차드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하브레가 차드의 통치권을 갖게 된 이후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 더딘 행보를 보였으며 통치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살해하였다. 1989년에 하브레가 차드의 통치권을 확보한 이후에도 반군의 활동이 빈번했는데, 하브레의 승리를 위해 노력했던 이드리스 데비(Idriss Deby)는 하브레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들을 모아 애국적구국운동(Patriotic Salvation Movement, Mouvement patriotique du salut : MPS)이라는 반군을 조직했다. 하브레의 폭정에 대해 차드의 정부군이 정권에 등을 돌리고 프랑스군이 중립을 선언하자 하브레는 카메룬으로 망명하였고, 데비는 피를 흘리지 않고 수도에 입성하여 통치권을 확보했다. 이후 하브레는 20054만 명이 넘는 사람을 고문하고 살해한 반인륜적 범죄로 2015년 기소되었고, 아프리카의 피노체트로 불리던 하브레는 결국 세네갈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차드의 사례는 수단의 사례와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왜 차드는 분리 독립으로 발전하지 않았고 남수단은 분리 독립을 했을까? 그 이유는 차드는 뚜렷한 자원도 없고 경제적 가치도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변국인 리비아와 수단의 불안정한 상황으로 분쟁이 확대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정부군이나 반군 모두 우세한 세력을 갖고 있지도 못했고 어떤 이념이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계속해서 파벌간 내분으로 이어진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차드는 데비 대통령 집권이후 민주화 정책을 시행하여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2012년 이후 반군 활동도 과거에 비해 잦아들어 전반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지속적인 반군의 활동과 차드의 만성적인 가난으로 인해 데비 대통령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2003남부 도바(Doba) 지역에서 석유가 생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재정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며 여전히 차드 인구의 40퍼센트가 빈곤선 이하로 살고 있다.

차드 분쟁은 공식적으로는 끝났지만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북부의 중앙정부가 남부지역을 국가경영에서 홀대하거나 반군을 제압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작전을 실시할 경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발전할 수도 있다. 또한 이웃하고 있는 수단과 리비아에 반군 세력이 잔존하고 있어 언제든지 다시 분쟁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차드와 수단은 국경분쟁을 겪으면서 수단 정부는 차드의 반군을 지원하고, 차드 정부는 이에 맞서 수단의 반군을 지원함으로써 분쟁이 격화되었던 경험을 갖고 있다. 2010년 차드와 수단이 평화 협정에 서명하면서 상황은 바뀌었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상황이 나빠질 수 있고 다시 내전과 분쟁으로 빠져 들 수도 있다.

앞으로 난민문제는 차드의 안정과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차드는 동부 지역에서만 약 6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201710월 현재, 차드 분쟁을 피해 수단에 32만 명,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75천 명 이상의 난민이 살고 있으며 이는 차드를 압박하는 불안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수단의 다르푸르 사태를 피해 수천 명의 난민들이 차드로 유입되었는데 이들은 다르푸르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있어 이 역시 차드에 부담이 되고 있다.

데비 대통령은 1996년 이후 5선을 연임하며 장기집권을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차드 국민들의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마하마트 누리(Mahamat Nouri) 전 국방장관은 데비 대통령의 장기 독재와 부정부패에 불만을 품고 북부의 무슬림을 규합하여 민주주의와 발전을 위한 연합(Union of Forces for Democracy and Development : UFDD)이라는 반군을 이끌고 있다. 과거에 비해 반군의 공격이 현저히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2006년과 2008년에는 수도가 반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차드는 2015년 말에 테러 단체인 보코하람의 공격을 받았으며 수도인 은자메나까지 폭탄공격을 받아 차드 호수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기도 했다. 만약 차드의 통치력이 약화될 경우 보코하람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을 수 있으며 이는 차드의 불안정을 가속화시켜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야기할 수 있다. 차드는 현재 프랑스가 주도하는 부르키나파소, 말리, 모리타니, 니제르 등이 참여하는 사헬(Sahel) G5에 참여하여 집단 안보와 경제 발전, 그리고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차드가 분쟁에서 벗어나 국가의 발전으로 향하게 할 수 있을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정치 > 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에라리온 내전  (0) 2020.05.25
라이베리아 내전  (0) 2020.05.22
차드 분쟁  (0) 2020.05.22
서사하라 분쟁  (0) 2020.05.22
에티오피아 내전  (0) 2020.05.19
리비아 내전  (0) 2020.05.19

Mansa Musa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구쿠니 우에데이(Goukouni Oueddei), 민주주의와 발전을 위한 연합(Union of Forces for Democracy and Development : UFDD), 사라(Sara), 사헬(Sahel) G5, 차드민족해방전선(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 du Tchad: FROLINAT), 투부(Tubu), 툼발바예(François Tombalbaye), 후세인 하브레(Hissène Habré)

서사하라 분쟁

2020. 5. 22. 15:16

모로코의 역사의식은 이지역의 분쟁해결을 어렵게 하는 요인

서사하라 문제는 모로코와 알제리의 갈등으로 비화할 수도 있는 상황

당사자의 합의와 타협보다는 유엔의 의지가 중요한 분수령

 

학자이건 일반인이건 필자가 만난 모로코인들은 서사하라를 이야기의 주제로 꺼내기만 하면 서사하라는 자신들의 영토라며 화를 내거나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서사하라 문제를 꺼내서 단 한 번도 부드럽게 이야기를 끝낸 기억이 없다.

왜 그들은 서사하라 문제만 나오면 그렇게 분개하는 것일까? 아프리카 국가들은 물론 유엔에서 서사하라를 55번째 아프리카 국가로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모로코인들은 서사하라에 집착하는 것일까?

무어제국을 건설했던 모로코는 이곳에 살고 있는 주요 종족인 사라위 족과 역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는 아니었으나 서사하라는 역사적으로 모로코의 영토였다. 1976년 스페인 식민통치가 끝나면서 모로코와 모리타니아는 서사하라를 2:1로 분할 점령하는데 합의했으나, 사라위 족은 1973년부터 폴리사리오 전선(Polisario Front)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976년에는 사라위아랍민주공화국(Sahrawi Arab Democratic Republic : SADR)을 수립하면서 무력투쟁을 조직화하였다. 이에 대해 모로코는 1975년 당시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던 서사하라에 약 35만 명이 참여하는 녹색행진을 주도하며 서사하라가 모로코의 영토임을 주장했다. 또한 모로코는 사라위 족의 독립운동에 대해 즉각적으로 군사적 행동을 벌여 서사하라 내전이 시작되었다.

폴리사리오 전선의 활동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던 모리타니아는 1979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서사하라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모로코는 모리타니아가 관리하던 영토까지 합해 서사하라 전 지역을 모로코에 병합시키며 모로코의 영토임를 선언했다. 모로코는 1980년부터 1987년까지 3/4에 이르는 1600km에 걸쳐 요새화된 방어용 모래 언덕을 쌓고 지뢰를 매설하여 폴리사리오 전선에 대한 군사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알제리는 사라위족의 민족자결권을 지지하며 지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서사하라 분쟁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알제리는 서사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틴도프(Tindouf) 지역에 서사하라 난민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약 30년 이상 폴리사리오 전선에 군사원조를 해오고 있다. 이로 인해 모로코와 알제리가 대립하는 새로운 대결 국면이 형성되었고 모로코와 직접적인 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다.

서사하라 문제를 통해 우리는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의 국제정치가 모로코와 알제리의 패권경쟁으로 보아야 하는 측면도 있다. 모로코는 알제리가 서사하라 분쟁을 조장하고 있으며 서사하라 문제를 지정학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198010월에 유엔이 폴리사리오 전선을 서사하라의 대표로 인정하였고 198411월에는 아프리카통일기구(OAU)가 폴리사리오 전선을 만장일치로 승인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모로코는 1984년 아프리카국가로는 유일하게 OAU에서 탈퇴한 국가가 되었다. 2016년 아프리카연합(AU)은 틴도프에서 열린 SADR 출범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대표단을 파견함으로서 서사하라를 다시하번 분명하게 지지하였다. 최근 들어 국제사회는 유엔의 입장을 지지하여 서사하라를 아프리카 국가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다. EU의 법원은 모로코와 EU간의 무역 협정이 서사하라에서 생산된 제품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고 이로 인해 모로코는 EU와 소원한 관계에 있다. 모로코는 올해 5월에 이란의 지원을 받은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지난 2016년 이후 폴리사리오전선 반군에 재정 지원과 군사훈련을 제공한 것을 이유로 이란과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모로코와 폴리사리오 전선은 1988년 유엔이 중재하는 평화안을 수용하였고, 1991년 유엔 서사하라국민투표임무단(MINURSD : United Nations Mission for the Referendum in Western Sahara)이 파견되었다. 우리나라는 19948월부터 20065월까지 12년간이나MINURSO을 지원하기 위해 매년 약 20명에서 40명 규모로 의료지원단을 파병한 바 있다.

MINURSO는 휴전상황을 감시하고 서사하라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준비할 임무를 부여받고 창설되었으나, 19921월 유권자의 자격문제로 사실상 무기한 연기되었다. 유엔의 결정에 따라 국민투표를 공정하게 실시하여 서사하라의 미래를 결정하여야 하지만 모로코가 국민투표 결과가 독립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동의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유엔은 2003년 서사하라 분쟁 해결을 위해 베이커 계획(Baker Plan)’을 발표하여 서사하라 주민들에게 민족자결권(self-determination)’을 인정하고 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대해 폴리사리오 전선과 알제리는 찬성하였으나 모로코는 유엔의 결정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서사하라의 면적은 한반도보다 약간 큰 편이지만 인구는 약 57만 명으로 소수이며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슬람을 믿고 있다. 모로코는 그동안 서사하라에 모로코인들이 정착하도록 강력한 이민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이곳에 근무하는 공무원에게는 보너스를 지급하고 임금을 인상해서 지급해주고 있으며 이주민들에게는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주고 있다. 모로코의 국왕인 무하마드 6세는 연례행사로 세계 각국의 유명 인사를 초청하여 서사하라가 자국의 영토라는 것을 알리고 국제사회의 여론을 유리하도록 조성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올해 3월에도 서사하라의 영토인 다클라(Dakhla)에서 유람선을 띄우고 서사하라가 모로코의 영토라는 것을 홍보하였다.

서사하라 분쟁은 식민지배로 인해 나누어졌던 지역이 독립을 지향하는 전형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모로코가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서사하라 분쟁은 당사자끼리의 해결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오랫동안 SADR를 이끌었던 모하메드 압델라지 에제딘(Mohamed Abdelaziz Ezzedine)20167월 사망한 후 지도자로 선출된 브라힘 갈리(Brahim Ghali) 역시 강경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1973년 폴리사리오 전선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고 스페인에 대한 최초의 군사적 공격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서사하라는 적은 인구에 비해 풍부한 어업자원, 세계적인 인산염과 철광석 매장량은 물론 해양지역에 파악되지 않은 대규모의 석유자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최적의 풍력발전을 할 수 있는 지역이어서 경제적 가치가 큰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모로코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가장 가능한 방법이 서사하라에 자치를 먼저 부여하거나 연방제를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독립으로 이어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선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모로코가 극단적인 방법으로 군사작전을 생각할 수 있으나 이는 휴전협정의 위반으로 국제사회의 비난과 제제를 피하기 어려워 선택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171월 모로코는 국제사회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 제55AU 정상회의에서 회원국으로 재가입을 하였으나 폴리사리오 전선이 모로코가 서사하라의 독립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모로코의 AU 퇴출운동을 벌이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최근 유엔은 서사하라 분쟁을 종식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810월 말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MINURSO의 임무를 2019430일까지로 연장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또한 2018124일과 5일 양일간 제네바에서 분쟁종식을 위한 회의를 열기로 결정하고 모로코와 폴리사리오 전선, 알제리, 모리타니 등 모든 분쟁 당사자들을 초청했다.

가장 최선의 방법은 서로가 수용가능한 정치적 해법을 찾는 것이지만 당사자의 노력으로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유엔의 노력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유엔이 서사하라에서 국민투표가 진행될 수 있도록 유엔이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넣는 방법이 최선으로 보인다.

'정치 > 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이베리아 내전  (0) 2020.05.22
차드 분쟁  (0) 2020.05.22
서사하라 분쟁  (0) 2020.05.22
에티오피아 내전  (0) 2020.05.19
리비아 내전  (0) 2020.05.19
알제리 내전  (0) 2020.05.19

Mansa Musa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녹색행진, 모로코, 베이커 계획(Baker Plan), 사라위아랍민주공화국(Sahrawi Arab Democratic Republic : SADR), 서사하라(Western Sahara), 알제리, 유엔 서사하라국민투표임무단(United Nations Mission for the Referendum in Western Sahara : MINURSD), 틴도프(Tindouf), 폴리사리오 전선(Polisario Front)

에티오피아 내전

2020. 5. 19. 17:36

에티오피아는 19세기 통일당시 여러 종족과 지역이 통합됨

소수인 암하라인과 티그레이인이 다수 종족을 지배 탄압하여 내전이 발생

에티오피아의 미래는 모든 종족의 평화로운 공존에 달려 있어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아들로 시작된 솔로몬 왕조는 19세기 이전까지 에티오피아를 통일시키지 못했으며 여러 종족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6세기에는 유명한 커피 산지인 하라르(Harar)에 있었던 이슬람 국가인 아달(Adal) 왕국이 솔로몬 왕조를 침략했고, 18세기에는 오로모족이 침략하여 현재의 오로미아 지역에 독립 국가를 세웠다.

19세기 중반부터 솔로몬 왕조는 여러 종족을 통합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며 에티오피아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정복전쟁을 통해 다른 종족들을 굴복시켰고 서구의 식민지배와 같은 방식으로 가혹하게 통치를 하였기 때문에 다른 종족들은 반감을 갖게 되었다. 1974년 공산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황제들은 중앙집권적 통치 구조를 강화하고 다른 종족을 배제하였으며 암하라족의 문화, 종교, 언어를 강요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영국의 통치를 받게 된 에리트리아와 오가덴 지역이 에티오피아에 통합되었으나 국경분쟁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의 침략과정에서 또 다른 정체성을 갖게 된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와 전쟁을 통해 1991년 결국 독립한다. 소말리아는 소말리 족이 주로 살고 있는 오가덴 지역에 대한 영토회복을 주장하며 1977년 침략하였다. 결국 에티오피아는 이웃국가인 에리트리아와 소말리아에 대해 적대적 관계를 이어가야 했고 두 국가는 반정부활동 조직의 근거지가 되어 내전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데 기여했다.

에티오피아는 햄, , 쿠시 어족이 모두 함께 살고 있으며 종족수도 80개에 이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에티오피아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다양한 어족 및 종족 집단이 모두 함께 살고 있는 다종족 국가다. 주요 종족은 오로모(Oromo)족이 34.4%, 암하라(Amhara) 족이 27%, 소말리(Somali)족이 6.2%, 티그레이(Tigray) 족이 6.1% 등으로 오로모족이 최대 종족이지만 역사적으로 북부의 암하라와 티그레이 족이 지배종족으로 다수종족인 오로모 족을 비롯하여 다른 종족을 지배하여 왔다.

에티오피아 내전은 결정적으로 셀라시에 황제와 멩기스투 공산정권이 오로모족과 소말리족 등 다른 종족을 탄압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1974년의 민중 봉기로 인해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종족 자결권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정권은 종족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고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폭력을 통해 해결하였다. 이에 대해 여러 종족이 공산정권을 암하라의 압제자로 인식하게 되었고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투쟁했다.

특히 에티오피아 정부는 다수종족인 오로모족을 식민지화전략이나 다름없는 암하라화정책을 통해 가혹하게 탄압했다. 무엇보다 오로모인을 에티오피아인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의 피지배민으로서 취급하였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정부 정책에 저항하고 오로모 정치조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부에 의해 강제 수용소나 형무소에 수감되거나 살해되었다. 2016년 리우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은메달을 딴 오로모족 출신인 페이사 릴레사는 시상 당시 에티오피아 정부의 오로모족 탄압을 폭로하는 ‘X자 세리머니인 반정부 퍼포먼스를 벌이며 오모족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정부 탄압에 대해 오로모 족은 정치·군사적 조직을 결성하여 반정부활동을 벌였다. 오로모 족은 1973년 오로모해방전선(OLF)과 군사조직인 오로모해방군(OLA)을 조직하여 강력한 저항을 하였다.

19915월 멜레스 제나위가 이끄는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이 공산정권을 무너뜨렸고 대통령에 된 후 종족 연방제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종족 연방제는 언어·문화적 다양성을 보장하고 종족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종족에 기반을 둔 지방자치를 인정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2005년 선거는 종족에 기반을 둔 연방주의가 필연적으로 종족집단간 경쟁을 발생시킬 수 있으며 정치적으로 이용될 경우 위험한 상황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선거에서 다른 종족들이 집권당인 EPRD에 도전하려 하자 제나위는 이를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515일에 있었던 집권 여당의 총선 부정의혹에 대해 반정부 시위가 6월과 11월에 걸쳐 발생했고, 이를 보안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총 193명의 시위자가 사망하고 763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만 명이 구금을 당했다. 제나위는 오히려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했다.

EPRDF는 티그레이, 암하라, 오로모 등 3개 민족집단이 이끄는 티그레이인인민해방전선(TPLF), 에티오피아인민민주운동(EPDM), 오로모인민민주조직(OPDO) 등이 연합하여 조직되었으나 티그레이인이 1991년 민주화 이후 30년간 권력을 장악해왔다. 6%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티그레이인이 정부를 주도하며 다수인 오로모족과 암하라족을 배제시켜 반정부 시위와 게릴라 공격이 발생했고 결국 2018215하일레마리암 데살렘 총리를 퇴진시켰다.

1991년 이전에는 암하라족과 티그레이 족에 대해 오로모족과 소말리족이 저항을 했지만 1991년 이후에는 티그레이 족에 대해 암하라 족과 오로모 족이 저항을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한마디로 에티오피아의 종족간 갈등은 상황이 맞아떨어진다면 언제든지 합종연횡을 통해 재편되며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는 무엇일까? 황제의 통치 시기, 공산정권, 제나위가 이끌었던 EPRDF 정권 모두 종족갈등을 풀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과거 역사에서 발생했던 부당한 종족 관계를 청산하고 모든 종족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정치적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20184242세의 젊은 아비 아흐메드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반년도 안 되었지만 에티오피아는 역사상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무슬림인 오로모족 아버지와 정교회 신자였다가 개종한 암하라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비 총리는 오로모, 암하라, 티그레이 등 3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어 종족과 종교를 뛰어넘어 국민을 통합할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까지 이어진 그의 개혁 정책은 내전과 국경분쟁을 종식하고 국민과 국가를 통합하여 진정한 발전으로 나아가는 행보로 평가받고 있다. 20187월에는 에리트리아와 종전을 선언하고 9월에는 평화협정 체결하여 20년간 이어진 무력 분쟁이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또한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소말리아 3국 정상이 에리트레아의 아스마라(Asmara)에서 회담을 개최하여 아프리카 뿔 지역의 협력을 논의함으로써 이 지역의 발전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01810월에는 1977년 소말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이후 운항을 중지했던 에티오피아항공이 41년 만에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 운항을 재개하였다. 아울러 에티오피아를 방문하는 모든 아프리카인에 대해 도착비자를 발급하도록 문호를 개방하였다.

에티오피아의 경제는 현재 고속 성장으로 주목을 받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에티오피아를 아프리카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4마리 사자로 넣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경제발전은 아비 총리가 추진하는 개혁정치를 성공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뿌리 깊은 민족갈등이 가장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려와 정책적 배려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20189월에 발생한 2건의 민족간 유혈사태는 에티오피아가 추진하는 개혁정책 과정에서 국민을 통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치 > 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드 분쟁  (0) 2020.05.22
서사하라 분쟁  (0) 2020.05.22
에티오피아 내전  (0) 2020.05.19
리비아 내전  (0) 2020.05.19
알제리 내전  (0) 2020.05.19
남수단(South Sudan) 내전  (0) 2020.05.15

Mansa Musa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소말리(Somali), 아비 아머드 알리 (Abiy Ahmed Ali), 암하라(Amhara), 에티오피아, 오로모(Oromo), 티그레이(Tigray)

리비아 내전

2020. 5. 19. 17:33

카다피의 몰락 이후 중앙 정부가 없는 내전상태로 빠져들어

유럽의 난민정책은 리비아의 정치적 불안정에 영향

IS 또는 무장집단의 세력 확대를 경계해야

내전 이후 우리의 기득권을 바탕으로 리비아에 대한 진출 준비 필요

 

20101217일 튀니지에서 발생한 자스민 혁명의 불길은 리비아에도 영향을 주었고 결국 42년간 지속된 카다피 정권이 붕괴되었다. 1차 내전으로 불리는 카다피 축출과정에서 201111월 출범한 국가과도위원회(National Transitional Council : NTC)효과적으로 정국을 장악하지 못했고 오히려 시민군과 민병대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치안이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2012년 제헌의회(General National Congress : GNC) 선거를 통해 200명의 의원이 선출된 후 알리 제이단(Ali Zeidan) 총리를 주축으로 과도정부가 구성되었으나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와 정부군과 민병대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정부고위인사에 대한 납치와 암살 그리고 외국공관에 대한 공격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2013년 결국 총선 및 대선이 연기되기에 이르렀고 중앙 정부의 통치력 부족으로 인해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는 동부와 남부 주민들의 무력시위가 발생하였다. 201310월에는 리비아 동부 주요 8개 종족이 연합해 독립을 선포하고 벵가지를 수도로 하는 키레나이카(Cyrenaica)' 자치정부를 선포한 후 주요 석유시설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0146월 제헌의회의 임기가 종료되면서 총선이 실시되었고 8월 하원에 해당하는 대표의회(House of Representatives : HoR)가 출범했다. 그러나 당시 투표율은 18%로 매우 낮았으며 새로운 정부는 동부의 토브룩 지역에만 통치력이 미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20147월 이슬람 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트리폴리를 공격하여 제2차 리비아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슬람 반군은 리비아 새벽(Libya Dawn)” 작전(이후 무장단체의 이름으로 사용됨)을 벌여 트리폴리를 장악한 후 제헌의회(GNC)를 구성하고 총리를 따로 선출하였다.

201512월 유엔의 중재로 리비아 내전 해결을 위해 주요 정치세력이 모여 리비아평화협정(Libya Political Agreement : LPA)이 체결되었고 2016년 알-사라지(Fayez al-Sarraj) 총리가 이끄는 통합정부(Government of National Accord : GNA)가 공식적인 리비아의 정부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고 트리폴리에서 출범했다.

리비아는 현재 알-사라지가 이끄는 통합정부를 비롯해 동부의 토브룩과 서부의 트리폴리를 기반으로 하는 2개의 세력이 실질적으로 리비아를 분할하여 통치하고 있다. 토브룩은 리비아 국군(Libyan National Army)을 이끌고 있는 칼리파 하프타르(Khalifa Haftar)와 토부룩(Tobuk)에 기반을 둔 대표의회(House of Representatives : HoR) 의장 아구일라 쌀리흐(Aguila Saleh Issa)가 활동하고 있다. 트리폴리는 국가최고회의(High State Council) 의장인 칼리드 미쉬리(Khaled Mishri)가 활동하고 있다.

2018529일 프랑스의 중재로 내전 당사자들이 파리에서 회담을 갖고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1210일 총선과 대선을 치르고 모든 정당과 파벌이 선거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며 군대와 보안 기구를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이런 정치적 합의가 일정대로 진행될지는 아직까지 미지수다.

유엔은 사무총장 권한으로 군사적 임무가 아니라 정치적, 법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리비아유엔지원임무단(United Nations Support Mission in Libya : UNSMIL)2011년부터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2019915일까지 활동기간을 연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은 힘이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어 보인다. 현재 무장세력들이 세력 확대를 위해 서로 충돌하고 있는데, 이들이 무력을 바탕으로 이합집산을 하여 지역 혹은 이념 등을 기반으로 리비아를 위협할 정치세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리비아는 이슬람을 믿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강하지 않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세력을 규합하기 전에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지원은 리비아가 실질적인 정부를 구성하여 무장 세력을 와해시키고 정치적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정부를 구성하도록 하고, 다른 한편으로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군과 경찰력을 확보하는데 지원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리비아의 정치적 불안정은 이슬람국가(IS)의 세력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하루빨리 해결되어야 할 시급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016년 리비아 정부군과 국제동맹이 제압했지만 IS는 리비아의 불안정한 상황을 틈타 시르테를 포함한 몇몇 해안 도시를 장악한 적이 있었고 이후에도 규모는 작지만 IS가 주도하는 테러가 발생하고 있다. IS2018910일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국영석유공사(NOC) 본부를 공격하였는데 이로 인해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IS는 리비아의 유전은 '합법적인 타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리비아의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 다시 리비아에서 세력을 넓힐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한 가지의 문제는 아프리카 난민문제가 리비아의 정치적 불안정과 유럽국가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아프리카 난민이 유럽으로 불법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던 리비아가 2011년 붕괴된 이후 아프리카 난민들은 리비아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리비아를 유럽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으로 여기고 몰려들고 있다. 카다피 정부가 전복되기 전 2년 동안 리비아 튀니지 이탈리아 등에서 건너온 난민 수는 수천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201417만 명, 201515만 명, 201618만 명으로 급증하여 이제는 리비아의 난민문제가 유럽국가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유럽국가는 난민유입에 대해 범죄조직이나 갱단이 사악한 거래를 하고 있다고 끊임없이 지적해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리비아에 자금을 지원하여 난민들이 유럽으로 오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리비아와 가장 가까운 이탈리아는 리비아의 해안 경비대가 무력을 사용하여 아프리카 난민을 막도록 지원을 하고 있다. 해안경비대는 난민들이 해상 무장조직이라고 부를 만큼 악명을 떨치고 있다. 올해 7월 이탈리아에 도착한 난민은 11,500명인데 이는 작년 7월에의 23,500명에 배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을 보아도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되고 있다.

2011년 이후 여러 무장조직들이 난민을 대상으로 인신매매 등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난민 수용소 역시 지역 무장조직에 의해 관리되고 있어 고문, 강제노동, 성폭력 등 인권유린이 심각한 상황으로 파악되고 있다. 직접적으로 의도하지 않았지만 중앙정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은 리비아에 대한 유럽국가의 지원이 무장조직의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하고 효과적인 중앙정부의 출현을 막고 있는 상황이 되고 있다.

201876일 리비아 서부 지역에서 무장민병대가 우리국민 1명과 필리핀인 3명을 납치했으나 915일 현재까지 어떤 요구도 접촉도 없는 상황이다. 우리 정부는 석방을 위해 리비아 정부와 긴밀하게 협의하며 부족사회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있으나 어떤 집단이 어떤 목적으로 납치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리비아에서 잇따르는 납치 사건은 납치 산업이라 불릴 정도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납치 피해자는 정치인에서 사회운동가,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리비아 중앙정부가 통치력이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IS를 비롯한 테러조직과 소규모 민병대나 무장조직이 언제든지 우리 국민을 납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리비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납치사건 중 상당수가 어떤 특별한 정치적 목적이 없는 경우가 있어 해결방법도 뾰족한 수가 없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정부는 917일 사업차 리비아에 체류중인 우리국민 36명의 여권을 무효화하고 강제소개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리비아가 정치적 안정을 확보한다면 막대한 석유(매장량 아프리카 1, 세계 9)와 천연가스(매장량 아프리카 5, 세계 22)를 바탕으로 거대한 건설시장이 열릴 것은 자명하다. 우리는 카다피 정부 당시 우리 기업이 구축한 기득권을 지키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끊임없이 리비아 사태를 예의주시하면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20189월에 문재인 대통령과 알-사라지 리비아 통합정부 총리와 열기로 한 정상회담을 다시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향후 리비아 재건사업 참여 등 실질적 경제협력 증진 방안을 논의하고 우리 국민의 석방을 위한 조치를 논의해야 한다.

'정치 > 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사하라 분쟁  (0) 2020.05.22
에티오피아 내전  (0) 2020.05.19
리비아 내전  (0) 2020.05.19
알제리 내전  (0) 2020.05.19
남수단(South Sudan) 내전  (0) 2020.05.15
수단내전, 남부 수단과 다르푸르(Darfur) 사태  (0) 2020.05.15

Mansa Musa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가다피, 국가과도위원회(National Transitional Council : NTC), 리비아평화협정(Libya Political Agreement : LPA), 아구일라 쌀리흐(Aguila Saleh Issa), 자스민 혁명, 제헌의회(General National Congress : GNC), 칼리파 하프타르(Khalifa Haftar), 키레나이카(Cyrenaica)' 자치정부

알제리 내전

2020. 5. 19. 17:31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은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키워줌

내전의 경험은 평화와 안정을 선택하게 하여 아랍의 봄이 발생하지 않음

강력한 반테러 정책으로 마그레브 국가 중 테러가 심각하지 않은 나라

 

오랜 기간 동안 오스만제국의 통치를 받았던 알제리는 1830년부터 프랑스의 침략을 받았으며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프랑스는 알제리를 프랑스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식민통치를 강화하였다. 이에 알제리인들은 1954년 민족해방전선(FLN)을 결성하여 1954년부터 1962년까지 8년간 '알제리 독립전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여 19623월 결국 독립을 획득했다.

벤 벨라(Ben Bella)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19656월 후에리 부메디엔(Houari Boumedienne) 육군참모총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실각했다. 부메디엔은 사회주의 및 비동맹 노선을 지향하며 탈프랑스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민족해방전선(FLN)을 통한 일당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일당독재와 악화된 경제상황에 대해 국민들이 강력한 저항을 하였고 결국 1989년 헌법 개정을 통해 복수정당제를 채택하였다.

이러한 정치변동 속에서 19889월 대학교수 출신인 압바시 마다니(Abbasi Madani)35명의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의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이슬람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이슬람구국전선(FIS)이라는 정치조직을 결성하였다. 19906월 지방선거에서 신생정당인 이슬람구국전선(FIS)이 압도적 지지를 받아 지방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199112월부터 19921월까지 실시한 총선거와 지방선거에서도 FIS가 승리하자 알제리가 이슬람 국가로 바뀌고 자신들의 영향력이 상실되는 것을 우려한 군부가 선거 무효화를 선언하고 FIS를 불법화시키는 친정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FLN은 국가 정책의 도구였고 실질적인 권력은 군부가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쿠테타가 가능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FIS는 혁명이 아니라 합법적 정치활동을 통해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FIS는 종교가 아닌 정치를 통해, 즉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으려고 했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주장했던 다른 몇몇 이슬람 국가들과 달리 종교지도자가 아닌 일반 무슬림 대중이 중심이 되어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FIS의 정치활동과 무혈혁명을 통한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은 군부의 친정부 쿠데타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FIS는 무장투쟁을 벌이게 되었고 알제리는 약 10년간 15-2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내전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을 고찰해보면 FIS 내부의 갈등과 민간인을 향한 테러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결국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이 쇄락을 길을 걷게 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FIS'무장이슬람운동(MIA)‘, ‘이슬람구국군(AIS)’, '이슬람국가운동(MEI),‘ ‘이슬람무장그룹(GIA)’ 등으로 분열되어 일치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FIS1997년 정부와 휴전협정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GIA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났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데 반발하여1998년에 포교와 성전을 위한 조직(GSPC)’이 결성되었다. GSPC2003년 알카에다 지지를 선언하고, 2007년에는 알카에다에 공식적으로 가입한 뒤 아예 알카에다 이슬람 마그레브(AQIM)로 개칭하여 알카에다 북부 아프리카의 지부로 활동하고 있다.

알제리 내전 종식에 1999년 선거에서 군부와 FLN의 지지를 받아 70%의 득표율로 당선된 부테플리카(Abdelaziz Bouteflika) 대통령의 역할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국가 안보와 안정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199910월 이슬람 반군 모두에 특별 사면령을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반군의 활동은 세력이 꺾여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이슬람 반군은 알제리에서 활동하기 보다는 마그레브와 사헬지역으로 흩어져 테러활동을 벌임으로서 오히려 테러조직을 수출하는 국가가 되었다.

군부와 반정부 조직의 무력충돌이 심화되면서 양측은 무고한 민간인을 공격하여 살해하였다. 두 세력의 투쟁은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또는 서구화와 이슬람화 사이의 지하드와 투쟁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급진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내국인들은 물론이고 알제리 거주 외국인, 심지어는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의 외국인들까지 암살 및 테러 대상으로 삼았다. 프랑스 여객기를 납치하여 프랑스 외교관을 포함한 4명의 무고한 승객을 사살한 사건은 알제리 내전의 심각함과 위험을 온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FIS의 활동은 국내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어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게 되었고 결국 안정과 평화를 향해 노선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전 당시 알제리 정부군에 의해 자행된 인권유린 역시 심각한 것이었으며 현재까지 문제가 되고 있다.

알제리는 내전의 경험을 반복하기 않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테러리스트에 대해 강력한 대처로 다른 주변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안전한 국가로 자리메김하고 있다. 알제리 국방부는 2018년 상반기에만 117명의 테러리스트를 무력화시켰고 이중 23명을 사살했다. 알제리는 또한 이웃 국가인 말리의 내전에 대해 적극적으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알제리와 말리가 긴밀한 관계였던 것도 중요한 하나의 요인이지만 테러집단의 활동이 지역의 안정과 알제리의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하나는 말리의 투아레그 족처럼 알제리의 소수자 민족집단이 자치나 독립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이후 알제리 정부는 프랑스의 식민지배로 인해 알제리인의 정체성이 훼손되었다고 생각하고 아랍·이슬람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의 핵심은 프랑스 식민유산을 일소하기 위한 탈식민화정책으로 사회주의 국가와 아랍 이슬람국가 건설로 표출되었다.

아랍어 정책으로 인해 토착어인 베르베르어는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했고 특히 교육에서 배척과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언어·문화적 정체성이 강한 베르베르인은 알제리 정부의 정책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마그레브 지역에서 베르베르라는 용어는 억압과 동시에 자유의 표상이다. 알제리 카빌리(Kabyle) 베르베르인은 역사적으로 로마, 아랍,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으나 언어·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며 반식민지, 반정부 성향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정부의 아랍·이슬람화 정책에 저항하여 1980베르베르 봄(Berber Spring)’을 일으켰고 베르베르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인 저항가수 마투브 루네스(Matoub Lounes)1998년 암살당하자 정부에 대한 저항이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마투브의 암살이 알제리 사회 전체에 미친 파장은 엄청났고, 그의 암살은 이후 알제리에서 베르베르 관련 정책의 대 전환을 이루는 계기를 만들었다.

알제리 정부는 2016년 베르베르어를 아랍어와 더불어 알제리의 공식어로 지정하였고, 2018년에는 베르베르인들의 정체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신년’, 또는 새해를 의미하는 옌나예르(yennayer)’를 다른 국경일과 마찬가지로 공식 축제일로 공포하였다. 알제리 정부는 독립이후부터 지속된 소수자인 베르베르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함으로서 대립과 갈등관계를 청산하고 국가통합을 제시했다. 이는 알제리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변화로 평가받고 있다.

알제리는 북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아랍의 봄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지 않은 나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가 독재국가로 억압적인 통치로 일시적인 안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사실은 알제리 내전과 같은 상황을 피하고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국민들의 선택이 중요한 요인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알제리의 행보는 북아프리카 국가들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 > 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티오피아 내전  (0) 2020.05.19
리비아 내전  (0) 2020.05.19
알제리 내전  (0) 2020.05.19
남수단(South Sudan) 내전  (0) 2020.05.15
수단내전, 남부 수단과 다르푸르(Darfur) 사태  (0) 2020.05.15
소말리아 내전과 알샤바브  (0) 2020.05.15

Mansa Musa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민족해방전선(FLN), 벤 벨라(Ben Bella), 부테플리카(Abdelaziz Bouteflika), 알제리, 이슬람구국전선(FIS)

남수단(South Sudan) 내전

2020. 5. 15. 15:33

아프리카의 54번째 신생 독립국가 남수단은 자원이 풍부하고 지정학적 중요성이 큰 국가

아프리카의 병폐인 독재와 부족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내전이 발발

내전 이후 남수단은 발전 될 것이며 이에 대한 진출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

 

 

역사적으로 영국은 수단을 식민지배하면서 북부와 남부를 인종, 언어 및 종교 등에 따라 분리하여 통치함으로써 한 국가로 통합되지 못했다. 독립이후 수단은 북부와 남부로 나누어져 약 50년간 내전을 겪었고, 2005년 포괄적평화협정에 따라 이루어진 주민투표에서 98%의 지지율을 보여 201179일 남수단 공화국(Republic of South Sudan)으로 분리하여 독립을 맞게 된다.

아프리카의 54번째 신생 독립국인 남수단은 독립 당시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과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은 국가로 아프리카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취약한 경제구조와 2012년 수단과의 석유분쟁은 이제 막 출범한 남수단 정부를 위기로 몰아넣었고 이로 인해 악화된 경제상황이 남수단을 내전으로 빠져들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더구나 설상가상으로 201312, 권력투쟁과정에서 살바 키르(Salva Kiir Mayadiit) 대통령과 마차르(Riek Machar) 부통령 사이의 불화가 남수단의 양대 민족인 딩카 족과 누에르 족 사이에 내전으로 번지면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전락하게 되었다.

남수단의 사례는 탈식민지화와 독립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이 국가발전 과정에서 겪어왔던 문제점을 한꺼번에 다시한번 보여줌으로써 아프리카의 국가건설과 발전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웃하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과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 국제사회는 남수단의 석유자원과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하여 개별적인 지원전략을 통해 경쟁적으로 남수단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이면에는 지역의 패권과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필자가 20111월 케냐를 방문할 당시 이미 케냐는 남수단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이윤이 나지 않는 남수단의 수도인 주바에 케냐항공을 취항시킨바 있다.

남수단은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으로 임기는 4년이며 연임이 가능하다. 초대 대통령이자 현 대통령인 살바 키르는 2010년 대선 당시 93%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남수단 의회는 20153월에 내전으로 인한 무정부 상태를 피해야 한다는 이유로 키르 대통령의 임기를 2년 연장하였는데 올해 712일 다시 현 대통령의 임기를 20217월까지 3년 연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137월 키르 대통령이 마차르 부통령이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주장하며 부통령과 내각을 해임함으로서 두 세력의 갈등은 결국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20158월 미국의 압박 속에서 키르 대통령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케냐, 우간다, 에티오피아 정상들이 주도하는 평화 협정에 서명하였다. 이에 따라 20164월 마차르는 외국에서 귀국하여 남수단 통합과도정부(Transitional Government of National Unity)의 제1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러한 배경은 권력투쟁과 종족주의가 원인이다. 키르 대통령은 남수단 최대 종족인 딩카족(전체 인구의 약 35.8%) 출신이며, 마차르 전 부통령은 두 번째로 큰 누에르 족(전체 인구의 15.6%) 출신이다. 이 두 사람은 독립 이전에는 서로 협력했으나 독립 이후 국가권력을 놓고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키르와 마차르는 독립운동을 벌인 수단인민해방군(SPLA)을 이끈 지도자들이었지만 둘 사이에는 뿌리 깊은 갈등이 내제하고 있었다. 마차르는 남수단이 독립하기 이전부터 2인자였으며 독립 이후에도 부통령이 되어 2인자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2015년 선거에서 마차르는 대통령이 되려고 했고 키르 대통령은 당연히 마차르의 도전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저지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평화협정 이후에도 2016년에 대통령 세력과 부통령 세력 간 무력 충돌이 지속되었다. 마차르 부통령은 내전 상태로 돌입했다고 주장했으며 키르 대통령은 내전은 아니며 안정적인 상태라고 주장하며 사태를 봉합하려고 했다. 그러나 계속된 무력충돌로 인해 미국 대사관 및 IMF 등 긴급 구호 인력들을 제외한 각 국가 및 국제기구, 구호 단체 관계자들이 남수단에서 철수하였고 케냐 항공을 포함하여 주바로 취항하는 항공사들이 운행을 취소하였다. 키르 대통령은 20167월 평화협정을 파기하고 마차르 부통령 및 관련 내각을 해임하였다. 이에 대해 마차르 전 부통령과 야당은 강력히 반발하였고 남수단은 불안한 정정이 계속되고 있다.

2013년 말부터 발생한 남수단 내전으로 지금까지 수만 명이 숨지고 약 300만 명이 피난민이 발생했다. 개발을위한정부간기구(IGAD)1990년대부터 수단-남수단 지역 내전에 대한 중재 역할과 함께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남수단 평화프로세스를 출범시킨 바 있다. UNAU는 남수단의 독립과 국가건설 그리고 내전 발생 이후 평화정착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유엔은 유엔남수단임무단(UNMISS)을 파병하여 평화 유지 활동에 기여하고 있다. AU20167월 아프리카연합 정상 회의에서 남수단 대통령 및 부통령 세력 간 충돌에 대한 대응책으로 아프리카연합 차원의 병력 지원을 결정하였다.

2018627일 키르 대통령과 마차르는 5년째 진행 중인 내전을 종식하는 평화안에 또 다시 합의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양 당사자들이 평화정착과 내전 종식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현재 상황으로는 남수단의 내전은 획기적인 전기가 없을 경우 쉽게 종식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만약 내전이 종식된다면 남수단은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동아프리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가가 될 수 있으며 석유자원 개발 및 인프라 건설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기회가 창출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남수단 진출에 대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남수단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의외로 우리나라에도 여러 차례 알려졌다. 에번스 프리처드(Edward E. Evans-Pritchard)1940년 출판한 누에르(Neur) 족 인류학 저서가 1988년과 2008년 두 번이나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2001년에는 남수단 톤즈(Tonj)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사망한 이태석 신부 이야기가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에게 알려진 바 있다. 그리고 약 280여명 규모의 한국군 한빛부대가 현재 남수단임무단(United Nations Mission in South Sudan : UNMISS) 활동에 참여하여 남수단의 안정화와 재건임무를 수행중이다.

 

'정치 > 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비아 내전  (0) 2020.05.19
알제리 내전  (0) 2020.05.19
남수단(South Sudan) 내전  (0) 2020.05.15
수단내전, 남부 수단과 다르푸르(Darfur) 사태  (0) 2020.05.15
소말리아 내전과 알샤바브  (0) 2020.05.15
르완다 내전과 국가통합  (0) 2020.05.12

Mansa Musa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남수단 공화국(Republic of South Sudan), 남수단(South Sudan), 남수단임무단(United Nations Mission in South Sudan : UNMISS), 누에르(Neur), 딩카(Dinka), 마차르(Riek Machar), 살바 키르(Salva Kiir Mayadiit), 이태석 신부

수단내전, 남부 수단과 다르푸르(Darfur) 사태

2020. 5. 15. 15:30

식민지배 시기부터 인종적, 종교적, 경제적 차이가 발생

남부 수단은 협정을 통해 독립했지만 다르푸르는 여전히 내전이 진행 중

알 바시르 대통령의 독재가 문제를 악화

 

수단의 수도 카르툼은 백나일과 청나일이 합쳐지는 곳으로 고대부터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이집트와 활발히 교류하며 문명을 꽃을 피웠다. 수단의 누비아(Nubia) 왕국은 기원전 3200년경 쿠쉬 왕국이 출현한 이후 기원후 1500년경까지 이어졌다. 줄곧 이집트의 지배를 받던 누비아 왕국은 기원전 약 920년경 이집트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하였고 피앙키(Piankhy: 기원전 751~712) 왕은 이집트를 정복하여 제25왕조를 열어 검은 파라오가 되었다. 누비아 왕국은 기원전 300년경 수도를 나파타에서 메로에(Meroe)로 옮긴 이후에 화려한 메로에 문명을 꽃 피웠다. 우리가 알고 있는 뮤지컬 아이다의 줄거리는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와 포로로 잡혀 온 누비아 왕국의 공주 아이다의 이야기이다.

수단 내전은 북부의 중앙집권적인 아랍계 이슬람 정부와 남부의 자치를 주장하는 아프리카계 기독교도 사이에 발생하였다. 중앙집권적 정부와 자치 또는 연방정부를 둘러싼 정치권력의 주도권,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적 분쟁, 아랍계와 아프리카계의 대립, 북부와 남부의 지역간 갈등, 석유자원에 대한 경제적 이익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수단 내전 발생 이전부터 수단은 북부와 남부로 나누어 이질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다. 1820년 이집트는 금과 노예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수단을 침략했고 북부 수단을 이용해 남부 수단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강화하면서 남북 사이가 이질화되기 시작했다. 1881년 마흐디가 이끄는 무슬림이 봉기해 이집트의 지배를 몰아냈으나 1882년 이집트가 영국의 보호령이 되면서 다시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영국의 선교사들은 수단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히 선교활동을 벌여 남부 지역은 1956년 약 80%가 기독교도 또는 전통적인 토착종교를 믿게 되어 북부와 더욱 큰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수단 내전은 1955년 독립 이전부터 북부와 남부 사이에 불평등과 정치적 주도권을 놓고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남부 수단은 남부수단해방운동(Southern Sudan Liberation Movement : SSLM)을 조직하고 정부에 대해 자치를 주장하며 저항을 하였다. 결국 당사자들은 1972년 아디스아바바 협정(Addis Ababa accords)을 통해 휴전에 합의하고 상당한 정도의 자치를 보장받아 내전은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1983엘 니메이리(Gaafar Muhammad el-Nimeiry) 대통령은 수단 남북 경계지역에서 발견된 석유자원에 대한 통제권과 샤리아 이슬람 법을 제정하여 이슬람 국가를 만들려는 의도로 아디스아바바 협정을 파기하였다. 이로 인해 1983년부터 2005년까지 약 21년간 내전이 발생했으며 약 200만 명이 사망하고 약 4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극도의 분노와 배신감을 느낀 남부 기독교계 흑인들은 수단인민해방운동군(People’s Liberation Army : SPLM)을 조직하여 수단 남부의 자치를 위하여 정부와 전쟁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1985년 쿠데타가 발생하여 니메이리 대통령이 실각하였고 19864월 선거를 통하여 알 마흐디(Sadiq al-Mahdi)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알 마흐디 정부는 SPLA와의 평화협상을 통해 샤리아 법 적용을 폐지하고 헌정회의를 소집하는 내용을 담은 코카담 선언(Koka Dam declaration)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평화정착 노력은 악화된 경제로 인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결국 1989년 알 바시르(Omar Hassan al-Bashir)가 이끄는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고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섰다.

2005년 합의된 포괄적 평화협정이 이행되어 2011년 남수단이 국민투표를 통해 분리 독립을 하게 되어 수단 내전은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수단 정부가 남수단의 독립을 용인한 것은 합의와 협정을 통해 해결된 아프리카 분쟁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수단 내전은 일반적으로 북부와 남부의 갈등으로 설명하지만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다르푸르(Darfur) 지역의 분쟁도 포함시켜 설명해야 한다. 차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 지역은 17세기부터 퍼르 술탄국이 출현하였고 이슬람이 국교로 채택되었다. 영국은 식민지배 당시에 다르푸르의 경제적 이익이 크지 않고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지배체제를 이용하여 간접통치를 하였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은 종족과 씨족 전통의 전통적인 통치체제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인구는 2017년 현재 약 930만으로 주로 농업을 하는 아프리카계와 유목을 하는 아랍계가 섞여 있다. 아프리카계 종족인 중부의 퍼르(Fur)족과 서부의 마살리트(Masalit)족은 기장을 재배하고 있으며 북부의 자그하와(Zaghawa) 족은 낙타와 염소를 방목한다. 그리고 아랍계인 남동부의 바가라(Baggara) 족은 소를 방목하고 있다. 2003년 초부터 수단정부군이 지원하는 아랍계 민병대인 잔자위드(Janjaweed)와 아프리카계 반군들 사이에서 종족 분규가 발생하였고 무차별적인 인종청소와 인권남용이 발생하였다.

이 지방의 주민들은 인종적 차이를 떠나서 같은 수니파 무슬림이다. 또한 인종적으로는 아랍계와 아프리카계 인종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오랜 기간 혼종이 발생하여 일반적인 분류인 피부색깔과 외형으로 구분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이 지역의 분쟁은 환경문제의 영향을 받았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다르푸르 북부지역의 사막화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아랍계 유목민들이 초지와 물을 찾아 남진하면서 경제적인 갈등이 시작되었다. 또한 독립당시 약 133만 명이던 인구가 2004년 약 600만 명으로, 그리고 2017년에는 약 930만 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여 환경이 악화되었고 1984-1985년 발생한 대기근이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2003년 아프리카계 종족이 중심이 된 두 개의 반군집단 - 수단 인민해방군(Sudan Liberation Army/Movement : SLA/SLM), 정의평등운동(Justice and Equality Movement : JEM) - 이 다르푸르 지역의 경제적 소외를 종식시키고 아랍인들에게 치우쳐 있는 국가권력을 공평하게 분배할 것을 주장하며 반군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또한 다르푸르 지역은 그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북쪽의 아랍계 유목민이 가뭄과 사막화로 인해 아프리카계 주민이 살고 있는 다르푸르 중심지역을 자주 침범하는데 대해 정부에 대책을 호소했으나 정부의 무대응으로 일관한데 대한 반발이 크게 작용하였다.

가장 큰 원인은 수단 정부의 무능과 편파적인 정책이 이 지역 주민들을 분열시키면서 서로가 대립하는 상황을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은 1989년에 등장한 알 바쉬르의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촉발되었다. 1989년 바시르 장군이 누메이리 정권에 대한 구데타 이후 군사독재를 강화하고 이슬람원리주의의 민족이슬람전선(National Islamic Front : NIF)과 손을 잡고 샤리아 이슬람 법의 적용을 강화하였다. 그는 비서구노선을 채택하여 이란, 이라크, 리비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오사마 빈 라덴의 입국을 환영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상황을 악화시킨 계기는 1994년 수단 정부가 이 지역을 3개의 주로 분리하면서 아프리카계 부족의 경작지를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수단 분쟁은 강대국의 직접적 이익이 걸려있지 않고 그 영향이 국내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국제사회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다. 국제사회는 2007년에 평화유지군을 파병하였지만 그 사이 약 30만 명이 사망했고 약 2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수단의 남수단 독립과 다르푸르 사태는 아프리카 역사와 정치의 새로운 방향을 제공하고 있다. AU는 남부 수단이 협정을 통해 독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 식민지 시기에 결정된 국경문제를 유연하게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다르푸르에 대한 AU 주도의 평화유지군 파병은 소말리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자적인 평화해결을 지향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르푸르의 평화유지활동은 답답하게 진행되고 있다. AUUN의 주도로 다르푸르 평화협정(Darfur Peace Agreement : DPA)200655일에 체결되었다. 모든 당사자들이 DPA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타르 도하에서 20106월부터 20116월까지 추가 협상이 재개돼 평화협정 문서를 다시 만들었다. 여전히 평화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당사자들을 도하 협약에 합류하도록 외교적, 정치적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다른 반군조직은 수단 정부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평화협정 체결을 거부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177SLMJEM에서 분리되어 결성된 세 번째 파벌인 수단자유동맹군(Sudan Liberation Force Alliance : SLFA)은 다르푸르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차드의 평화노력에 참여하고 있어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는 상황을 맞고 있다.

다르푸르 사태는 빠른 시일 안에 효과적으로 종식되기에는 풀어야 할 문제가 여러 가지 있다. 20186월 현재 다르푸르의 분쟁지역에 파병된 평화유지군의 일부가 분쟁 해결여부에 관계없이 예산 삭감으로 인해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보도가 되고 있다. 정치적, 경제적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한 다르푸르 지역이 국제사회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것이 자명하다.

무엇보다도 수단 정부와 알 바쉬르 대통령의 잘못된 정책과 30년이 넘는 독재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2009년 국제형사재판소는 반인도범죄와 전쟁범죄 혐의로 현직 대통령인 알 바쉬르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초 수단을 '무슬림 금지' 대상 6개국 중 하나로 지정했고 이란, 시리아와 함께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였다. 국제사회의 제제와 수단의 정치적 민주화는 내전 종식을 이끌어내는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Mansa Musa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남부수단해방운동(Southern Sudan Liberation Movement : SSLM), 다르푸르 평화협정(Darfur Peace Agreement : DPA), 다르푸르(Darfur), 수단, 수단 인민해방군(Sudan Liberation Army/Movement : SLA/SLM), 정의평등운동(Justice and Equality Movement : JEM)

소말리아 내전과 알샤바브

2020. 5. 15. 15:27

소말리아는 씨족 전통이 강하며 식민지배로 분열됨

케냐는 지역 패권을 위해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조직 알샤바브는 동아프리카의 안전을 위협

 

아프리카의 뿔지역인 소말리아는 강력한 씨족 중심의 사회구조와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분열되었으며 중앙정부가 효과적으로 전 국토를 통치 하지 못하는 실패국가.

소말리아는 이슬람을 믿고 있는 소말리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단일 민족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요 종족은 하위야(Hawiya, 25%), 이샥(Ishaak, 22%) 다로드(Darod, 20%), 그리고 라한웨인(Rahanwein, 17%) 등으로 압도적인 다수 종족이 없는 상황이며 무엇보다도 강력한 씨족 중심 사회여서 소말리아의 국가통합과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

또한 소말리아는 하나의 국가지만 통치권이 완전하게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있다. 아덴만에 위치한 소말리랜드(Somaliland)1991년 독재자인 바레(Mohammed Said Barre)에 맞서 독립을 선언하고 자치를 이어가고 있다. 북동부의 푼트랜드(Puntland)1998년 자치를 선언했으나 2012년 연방정부에 소속되어 행정구역으로 재편되었다.

소말리아는 고대부터 무역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집트의 하셉수트 신전에 소말리아 푼트랜드(Puntland)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부조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의 무역이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졌는지 짐작하게 한다. 이븐 바투타는 1331년 모가디슈를 방문하여 아주 큰 도시로 역동적인 도시라고 설명하였다. 씨족이 중심이 되어 지역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소말리아는 19세기에 들어와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의 침략으로 분할되었다. 1960년 영국령 소말리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리아가 합쳐져 소말리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고 프랑스령 소말리아는 1977년 지부티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소말리아는 독립 당시 식민지배 유산과 씨족 전통으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하나의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했다.

1969년 샤르마르케(Abdirashid Ali Shermarke) 대통령이 경호원의 암살로 사망하자 바레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1991년까지 22년간 소말리아를 통치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종족을 우대하였고 이에 대해 다른 종족들이 반발하여 통일소말리아회의(Union of Somali Congress : USC)를 결성하여 바레 장군을 권좌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USC는 종족간 반목과 질시로 통합되지 못했고 1991년 모하메드(Ali Mahdi Mohammed)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를 구성했으나 인정하지 않아 1993년까지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다.

2004년 케냐 정부의 지원으로 아흐메드(Abdullahi Yusuf Ahmed)를 대통령으로 하는 연방과도정부(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 : TFG)가 나이로비에서 수립되었다. 아흐메드 정부는 국제 사회의 승인을 받은 유일한 정부였으나 본토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를 하지 못하는 망명정부였다. 2005년 과도정부가 귀국했으나 2006년에 이슬람 무장세력인 이슬람법정연맹(Islamic Courts Union : ICU)이 소말리아 남부 지역과 모가디슈를 장악하여 TFG는 정부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알샤바브는 2011년까지 소말리아 중남부 지역의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었던 알 이슬라미(Al-ltihaad al-Islamiya : AIAI)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알 이슬라미는 시아드 바레의 독재정권을 타파하고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는 목적을 가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지하드 조직이었다. 2000AIAI 세력 중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급진적인 무장세력인 알샤바브가 결성되었고 곧바로 ICU에 합류했다. 소말리아는 1977년 소말리아는 에티오피아 오가덴(Ogaden) 지역을 침략하였고 이후 바레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저항을 했던 소말리국민운동(Somali National Movement : SNM)을 지원하였다. ICU가 소말리아에 대한 공격 및 반에티오피아 투쟁을 선언하자 200612월 에티오피아는 소말리아를 침공했다. 에티오피아는 2009년 소말리아에서 철수 했으나 2001년 평화유지군으로 다시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하였다. 알샤바브는 에티오피아의 침략에 맞서 소말리아인들의 민족주의 정서를 이용해 소말리아의 수호자로 자처하며 주요 세력으로 등장했다.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알샤바브는 에티오피아의 침략으로 소말리아에서 가장 강력하고 급진적인 무장 세력이 되었으며 이슬람 국가건설을 목표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1년 이후 소말리아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케냐군이 주축이 된 AU 주도의 평화유지군이 알샤바브의 거점을 공격하면서 그 세력이 급속하게 와해되었다. 20118월 약 22000명의 아프리카연합평화유지군(African Union Mission in Somalia : AMISOM)이 알샤바브가 장악한 모가디슈를 공격하여 장악하였고 20129월에는 소말리아의 남부에 있는 제2도시인 키스마요(Kismayo) 항을 공격하여 알샤바브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알샤바브는 키스마요를 잃어버리면서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었고 주요 활동지역을 국경지역이나 난민캠프로 옮겼다.

인접국가에 대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군사개입은 특히 탈냉전시대에 눈에 띄게 증가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역문제에 개입하고 있다. 냉전시대에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쟁터가 되었던 아프리카가, 이제는 떠오르는 아프리카 강대국들이 지역의 패권을 잡기 위해 전쟁에 개입하고 있다. 소말리아의 알샤바브를 퇴치하기 위해 케냐와 에티오피아의 군사개입은 대표적인 아프리카 국가의 군사개입으로 볼 수 있다.

케냐는 동아프리카의 강대국으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소말리아의 국가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케냐는 소말리아의 내전과 자국에서의 테러발생이 향후 케냐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 상황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안정을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긴급한 현안에 직면하고 있다.

케냐는 201110월 소말리아의 알샤바브와 전쟁을 선포하고 린다 니치(Linda Nichi) 작전을 전개하여 남부 소말리아를 침략했다. 당시 케냐 정부는 북쪽 국경을 따라 증가하는 난민 위기와 지역의 불안정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케냐는 과거 소말리아 사태해결에 비교적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1992년 이후 주도적으로 개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19943월 나이로비에서 소말리아 파벌간 평화선언합의, 200210월 엘도렛(Eldoret)에서 소말리아 평화회담 개최, 200410월 나이로비에서 소말리아 과도 의회 및 연방정부 출범, 2005년 소말리아 과도 의회 및 연방정부 이전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알샤바브는 케냐의 개입을 소말리아에 대한 침략행위로 규정하여 소프트 타겟(soft target)을 대상으로 케냐에 대한 보복성 테러를 감행하고 있다. 알샤바브의 세이크 알리(Sheikh Ali)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케냐에서 성전을 감행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으며 2013년 웨스트게이트 쇼핑몰(Westgate Mall) 테러(한국인 1명 포함 67명 사망), 20146월 라무 카운티 해안의 음페케토니(Mpeketoni)(60명 이상 사망) 및 마젬베니(Majembeni)(15명 이상 사망) 테러, 201412월 소말리아 인근 만데라(Mandera) 지역에서 버스 테러(28명 사망), 20154월 모이 대학교 가리사 대학(Garissa University College) 테러(148명 사망), 20157월 만데라 채석장 폭탄테러(14명 사망) 등을 일으켰다.

알샤바브의 테러에 대한 케냐 정부의 대책은 어떤 면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는 측면도 있다. 특히 케냐 정부는 웨스트 게이트 습격 사건 이후 알샤바브와 테러분자의 침투를 저지한다는 이유로 소말리아 난민과 주로 동부 해안 지역에 거주하는 이슬람교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있다. 케냐타 대통령은 20146월 음페케토니와 마젬베니에서 발생한 테러가 루오족이 키쿠유 족을 공격한 것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는 2007년 선거 이후 잠잠해지고 있는 키쿠유족과 루오족의 대립을 격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케냐 정부가 알샤바브가 벌이고 있는 테러를 국내정치에 이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알샤바브에 대한 적극적인 퇴치보다는 정권에 반대하는 이슬람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을 받고 있다.

20171015일 소말리아 수도인 모가디슈의 가장 번화가에서 사상 최악의 폭탄테러가 발생해 300명이 사망하고 276명이 부상했다. 이번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밝히지 않았지만 소말리아 정부는 알샤바브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이 테러는 소말리아 최악의 폭탄 테러이며 동시에 사하라이남 지역에서 가장 큰 테러공격으로 남게 되었으며 알샤바브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번 갖게 만들었다.

소말리아에서 밀려난 알샤바브는 케냐를 비롯하여 우간다 등 인접국에 대한 보복성 테러를 감행하고 있어 동아프리카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20107월 스페인과 네덜란드 월드컵 결승전을 시청하고 있던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 나이트클럽에서 3번의 폭탄테러를 가해 74명이 사망한 바 있다. 이 공격은 AIMSOM에 평화유지군을 파병한 우간다에 대한 보복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알샤바브가 다시 강력한 테러조직으로 재건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2009년 이후 알샤바브는 예멘에 거점을 둔 아라비아 반도의 알카에다(Al-Qaeda in the Arabian Peninsula : AQAP)와 연계와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알샤바브의 테러 공격과 적극적인 언론 보도는 소말리아 인들 사이에서 이 조직이 유명해지도록 만들었고 추종자들의 수를 늘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케냐의 난민수용소에 대한 탄압과 강제송환, 소말리아 정부의 통치 체제 문제, 케냐 주도의 평화유지군의 탈선행동은 알샤바브에 대한 지지와 함께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다. 만약 알샤바브가 알카에다 동아프리카 지부로 발전할 경우 이들의 활동은 아프리카 뿔 지역뿐만 아니라 동아프리카 전역에 세력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현재 AU 주도의 평화유지군의 활동으로 알샤바브의 활동은 줄어들고 있으나 케냐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테러공격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막느냐가 큰 관건이 되고 있다. 물론 소말리아 정부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통치력을 확보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알샤바브를 없애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문제가 상존하고 있으며 악화되지 않도록 동아프리카 국가들의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소말리아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케냐가 소말리아인을 대상으로 가혹한 군사작전을 펼치거나 비인도적인 난민정책으로 대응할 경우, 알샤바브에 대한 지지로 이어질 수 있다. 케냐는 2015년 현재 50만 명에 이르는 소말리아 난민을 수용하고 있다. 이들은 규모도 크며 결속력이 강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이 뚜렷하다. 케냐 정부는 알샤바브에 대한 군사적 대응과 함께 2013년에 체결된 소말리아 난민 본국 송환협정을 통해 난민촌을 폐쇄하고 난민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정책을 취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현재 소말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AU 주도의 평화유지군은 EU의 재정삭감과 부정부패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알샤바브가 주로 케냐에서 납치한 여성들을 성노예로 이용하고 있는 문제 역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알샤바브의 입지가 약화되고 있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잘못된 대처는 알샤바브가 동아프리카의 중요한 무장테러조직으로 살아 남아 지역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소말리아는 아직 체계적인 자원 탐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로 마지막 자원의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석유를 비롯한 소말리아의 자원개발은 향후 소말리아의 국가 재건과 국제사회의 지원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필자는 미군이 아프리카 국가 중 소말리아에 적극적으로 파병한 이유가 소말리아에 있는 석유자원 때문이었다고 전해들은 바 있다. 우리나라는 국민의 보호뿐만 아니라 내전종식 이후 평화유지활동을 통한 국제사회의 기여와 자원 확보라는 측면에서 소말리아에 대한 면밀한 진출 전략을 수립하여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Mansa Musa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소말리국민운동(Somali National Movement : SNM), 소말리아, 알 이슬라미(Al-ltihaad al-Islamiya : AIAI), 알샤바브, 알카에다(Al-Qaeda in the Arabian Peninsula : AQAP), 이슬람 무장조직, 통일소말리아회의(Union of Somali Congress : USC)

르완다 내전과 국가통합

2020. 5. 12. 17:18

벨기에가 만든 민족 정체성이 제노사이드의 원인

후투와 투치족 정치지도자들이 민족 정체성을 악용

1994년 이후 화해와 통합을 통한 국가발전을 도모

국민들은 카가메 대통령의 개발 독재를 환영

 

르완다는 ‘1000개의 언덕이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또는 유인원인 마운틴 고릴라가 유일하게 살고 있는 곳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1994년 이후에는 제노사이드와 폭력의 땅으로 더 우리에게 알려졌다. 1994년 후투족과 투치족의 분쟁으로 약 3개월간 전체 인구 700만 명 중 80만 명이 살해되었고 약 200만 명이 이웃국가로 피난하는 제노사이드가 발생했다.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사건을 아프리카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필자는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에서 르완다가 최초라고 주장하고 싶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남·북 또는 동·서간, 또는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의 대립으로 내전이나 분쟁을 겪은 국가들이 선진국으로 발전한 경우가 많다. 아니 거꾸로 대부분의 선진국은 내전이나 분쟁을 겪고 현재의 발전을 이룩했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르완다도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내부의 갈등이 표출된 것일까? 르완다의 내부 갈등은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표출된 것일까? 국제사회는 왜 르완다에서 제노사이드가 발생했을 당시 그것을 막기 위해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을까?’ 종교, 민족, 지역 간 분쟁을 겪고 있는 나이지리아나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정책이 실시되었던 남아공에서 제노사이드가 발생했다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갈 수 있다. 그러나 하필 한반도의 1/10의 면적밖에 안되며 인구도 700만 명으로 아프리카 본토 국가들 중 가장 소국인 르완다에서 제노사이드가 발생한 원인은 무엇일까?

20005월 국가통합과화해위원회(National Unity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NURC)는 식민지시대부터 1994년 제노사이드 사이의 시기에 대해 평가하면서 백인들이 민족 정체성을 이용하여 분리하여 통치함으로써 르완다는 분열되고 고통을 받았으며 이러한 갈등이 1994년 제노사이드로 폭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할 것은 르완다는 식민지배세력이 민족 집단의 정체성을 고착화시켰고 독립이후 정치지도자들이 민족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여 제노사이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르완다의 제노사이드는 후투(Hutu : 84%), 투치(Tutsi: 15%), 트와(Twa:1%) 족 등 민족 정체성의 극단적인 양극화를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르완다 내전을 1994년 제노사이드로 설명하지만 사실은 1959년에서 1994년까지 벌어진 후투족과 투치족의 갈등과 대립이 꾸준히 축적되어 발생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소수인 투치족이 다수인 후투족을 지배했으나 양 민족 집단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았고 이웃하여 함께 살고 있었다. 벨기에는 1916년 식민지배를 시작하면서 투치족은 북쪽인 에티오피아에서 남하에 내려온 함족으로 후투족과 트와족을 지배하는 정복민이 되었다는 함 이론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 키가 크고 피부색이 진하지 않은, 유목을 하는 소수의 우등한 투치족이 키가 작고 피부색이 진한,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원주민인 열등한 다수의 후투족과 트와족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을 폈다. 벨기에는 이러한 민족정체성과 지배 및 피지배논리를 식민지배정책에 이용하기 위해 민족 집단의 이름을 명기한 신분증을 발행하였고 투치족을 우대하여 식민통치를 하였다.

제노사이드 이후 지금 새로운 르완다는 어떻게 르완다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통의 정체성을 만들어갈 수 있는가?”가 최대의 과제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통일된 국가·민족 정체성의 형성은 과거의 분쟁과 내전을 되풀이할 수 있는 씨앗을 미리 제거할 뿐만 아니라, 향후 국가발전을 위해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르완다는 제노사이드 이후 국가통합을 위해 전통적인 가차차(Gacaca : ‘풀밭을 의미) 제도를 도입하여 평화와 화해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2002년부터 피해자와 가해자, 목격자를 한자리에 모아 지역사회가 지명한 판사가 제노사이드와 관련하여 발생한 사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결정하는 것이다. 가차차 제도는 진실, 평화, 정의, 회복, 용서, 화해를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남아공의 진실과화해위원회(TRC)와 유사하다.

새로운 르완다 정부는 하나의 국가의식 형성과 국가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카가메와 투치족의 독재와 비민주적인 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그러나 르완다는 최근 6-8%의 경제성장을 보여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르완다는 현재 에티오피아, 가나, 케냐, 모잠비크, 나이지리아, 남아공, 탄자니아 등과 함께 아프리카의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사자로 또는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라고 불리고 있다.

르완다에서 민족’, ‘종족이라는 용어는 언론을 포함한 공식적인 논의에서 금지되고 있다. 2013년 제한적 의사소통(Interception of communications) 법은 공공의 안전을 위해할 가능성이 있는 의사소통에 대해 정부 당국이 도청 및 감청을 하도록 규정하였다. 2014년 제노사이드 20주년 관련 독립 언론인들이 정부에 반대하거나 폭력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압력을 받거나 체포된 바 있다. 부분적으로는 르완다 정부가 민족 정체성에 대한 합법적 억압 또는 독재가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카가메 대통령은 현재 18년째 집권하고 있다. 2000년 집권 후 2003년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에 당선 되었고 2013년 재선되었다. 99%의 투표율을 보였으며 2015년에는 르완다 하원이 카가메 대통령의 3선을 가능하게 하도록 헌법개정안을 승인했다. 헌법은 복수 정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나 국가통합이라는 측면에서 정치적 다원성을 억압하고 있으며 현실은 야당의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르완다의 상황은 어떤 의미에서 독재라고 할 수 있으며 분열된 민족 정체성을 통합하고 카가메의 효과를 넘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기까지는 수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르완다 내전은 이웃으로 함께 살고 있던 민족 집단 간에 제노사이드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최근 남북한 화해무드는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한반도가 통일된 이후 남북간 화해와 협력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할 경우 르완다와 같은 제노사이드가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통일 이후 역사를 정리하고 등을 해소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마련하고 새로운 국가 및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은 합을 위한 주요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며 르완다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Mansa Musa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르완다 #내전 #국가통합 #카가메대통령 #아프리카 #올아프리카 #africa #allafrica

나이지리아 보코하람과 니제르델타 분쟁은 소외와 차별을 가져온 잘못된 정치의 결과이다

2020. 5. 12. 17:17

보코하람과 니제르델타는 나이지리아는 문제의 축소판!

소외와 차별, 가난을 지속시킨 잘못된 정치의 결과

가나 해역의 우리국민 납치는 나이지리아 무장단체의 소행

 

나이지리아는 북부의 이슬람인 하우사와 플라니족, 남부의 기독교도인 요르바족과 이보족으로 나누어져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다. 이는 영국이 1914년 전혀 다른 두 지역을 하나로 합쳐 나이지리아를 만들고 프레더릭 루가드가 간접통치를 실시하여 분쟁의 씨앗을 남긴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60년 독립을 맞은 나이지리아는 비민주적인 정치로 인해 하나의 국가 및 국민 정체성을 만들지 못했고 4개의 주요 민족집단을 중심으로 지역·종족·종교 갈등이 끊임 없이 분출했다.

나이지리아는 지난 10년간 평균 경제성장률 6%대로 2015년 명목 GDP4765억 달러로 남아공을 제치고 아프리카 대륙에서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석유와 천연가스 등 풍부한 천연자원과 발전가능성, 그리고 19천만 명이라는 아프리카 제1의 인적 자원과 탄탄한 내수 시장으로 인해 해외 투자자에게 잠재적 시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남부의 이보족이 북부의 박해에 반발하여 일으킨 비아프라 내전(1967-1970)은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1971국경없는 의사회가 설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 내전은 나이지리아가 지역·종족·종교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갈등을 조율하고 국가를 통합하지 못하는 한 분쟁은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2015년 대통령에 당선된 부하리 대통령은 현재 나이지리아의 가장 큰 문제인 보코하람에 대한 강력한 대응과 부정부패 척결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안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나이지리아가 안고 있는 문제로 인해 쉽게 성과를 내거나 달성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보코하람은 서구식 교육은 죄악이라고 주장하며 선거와 투표, 셔츠와 바지의 착용, 세속교육 등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2002년 출범한 보코하람은 2009년 이슬람 근본주의와 샤리아법의 제정을 통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표로 내걸고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2013년 미국에 의해 테러집단으로 규정되었다. 2014년에는 칼리프(19세기 나이지리아 북부에 출현한 소코토 칼리파테를 계승) 국가를 선언하였으나 2018년 나이지리아 정부의 퇴치작전으로 현재 그 세력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보코하람은 최근 10여 년간 나이지리아 북동부를 거점으로 차드, 카메룬, 니제르 등을 넘나들며 공격을 일삼아 나이지리아를 넘어 지역적 불안정을 야기하고 있다.보코하람이 알카에다와 같은 국제적인 테러 단체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보코하람은 이미 2015IS에 충성을 맹세한 바 있으며 2016년에는 자신들이 나이지리아 IS의 진정한 지도자라고 선언했다. 특히 요베 주에서 비옥한 토지에 대한 접근, 강에 대한 통제권, 고기잡이에 대한 세금 부과 등을 통해 IS의 세력이 확대되고 있다는 정보도 있다.

보코하람은 20144월 보르누 주 치복에서 여학생 276명을 한꺼번에 납치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악명을 떨쳤다. 이들 중 100명 정도는 아직까지 행방불명이다. 20182월에도 요베 주의 다프치에 있는 여자과학기술대학을 급습해 학생 110여명을 납치했다. 정부와 협상 끝에 2018221101명이 석방되었으나 414일 협상이 결렬되어 더 이상의 석방이 중지된 상태이다.

현재까지 보코하람이 일으킨 테러로 약 2만 명이 숨졌고, 200만 명 이상이 살던 곳을 떠나 난민 신세가 됐다. 학교가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는데 2009년 이후 살해된 교사의 수가 최소 2295명에 달하고 1400개 이상의 학교가 파괴됐다.

이 지역에서 보코하람이 활동하게 된 배경은 단지 종교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이지리아가 안고 있는 전체적인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는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영국의 식민지배 당시부터 이 지역은 열악한 경제상황과 저발전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독립이후에도 남부 지역 주민들에 비해 가난하고 소외되었다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고 있다. 북부의 인구는 남부에 비해 더 많지만 탈산업화, 농업 및 인프라에 대한 투자 부족, 저조한 교육 접근성으로 인해 경제가 쇠퇴하여 최악의 보건 및 경제지표를 나타내고 있으며 심각한 빈곤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인간개발보고서(HDR)2013년 나이지리아의 다차원빈곤지수(MPI)를 발표하였는데 가장 낮은 13개 주 중 12개는 북부에, 1개는 동부에 위치하여 남북 간 큰 빈곤격차가 극심한 것을 보여주었다.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최악의 주는 요베 주로 현재 보코하람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다.

결국 가장 큰 문제는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북부의 상대적인 저발전에 대해 정치지도자들의 책임감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현재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민병대(CJTP)는 보코하람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무자비한 진압과 함께 무고한 마을 주민을 살해, 구금함으로써 원성을 사고 있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보코하람을 근절하기 위해 효과적인 군사작전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지역 주민에 대한 인권남용을 중지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니제르델타 지역 역시 나이지리아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지역이다. 석유자원을 놓고 나이지리아 정부와 원주민이 충돌하여 검은 자원의 저주가 발생하고 있다. 특히 니제르뎉타의 오고니 족은 1990년대에 켄 사로-위와가 이끄는 오고니족 생존운동(MOSOP)을 중심으로 석유자원의 이익 분배와 환경오염에 대한 배상, 더 나아가 민족집단의 자결권을 요구하며 강력히 저항을 하였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정부는 199511월 사로-위와와 8명을 사형시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2000년대 초반 석유자원 확보를 위해 외국의 석유회사들이 진출하였으나 채굴 과정에서 석유가 유출되어 환경이 파괴되어 현지 주민의 생활조건이 악화되었고 다시 갈등이 유발되었다. 2015년 엠네스티 인터네셔널은 더치 셀과 이탈리아 다국적 기업 ENI2014년 한해만 공식적으로 550건의 석유가 유출되어 환경을 파괴하고 원주민의 생존권을 위협했다고 밝혔다. 주로 이 지역의 어업과 농업에 피해를 입혀 원주민이 피해를 보고 있으며 빈곤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여러 무장단체들이 결성되었고 석유시설 파괴, 외국인 납치 등을 자행하고 파이프라인의 석유를 훔치면서 지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2004년 당시 니제르델타인민지원군(NDPVF), 니제르델타자경단(NDV), 니제르델타해방운동(MEND), 니제르델타해방전선(NDLF)이 활동하였으며 최근에는 니제르델타어벤져스(NDA)가 출현했다.

나이지리아 야라드아 대통령은 2008년 니제르 델타부를 신설하고 사면프로그램을 시행하여 니제르델타해방운동(MEND)을 비롯해 많은 무장투쟁 반군들이 무기를 반납하고 사면을 받게 하여 니제르델타 지역의 무장단체 활동과 공격이 감소하였다. 그러나 부하리 정부는 2018년까지 사면 프로그램을 점진적으로 종료하고 중앙정부 예산을 70% 삭감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으며 최근 니제르델타어벤져스(NDA)가 미국 셰브론의 석유시설을 공격하여 이 지역의 폭력사태가 증가할 우려를 낳고 있다.

2018326일 아프리카 가나 해역에서 조업중인 어선 마린 711호에서 한국인 3명의 납치사건이 발생하였다. 가나 해역의 우리국민 납치는 나이지리아 니제르델타의 무장단체가 직접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들 중 일부가 개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이지리아 무장조직이 우리 국민을 납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66, 대우건설 직원 5명 납치, 20071월 대우건설 근로자 10명 납치, 20075월 대우건설 직원 3명 납치사건을 겪은 바 있으며 이는 모두 니제르델타해방운동(MEND)과 다른 무장조직이 연관된 사건이었다. 20147월 가나 인근 해역에서 유류공급선을 공격하여 2명을, 20162월에는 코트디브아르 공해상에서 급유선을 공격하여 1명을 납치하였다.

가나, 코트디부아르, 토고, 나이지리아, 콩고 등 기니만 인근 해역에서는 석방금을 노리고 선원을 납치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 해역의 지난해 해적공격 건수는 45건으로 전년(56) 대비 19% 줄었지만 2015(31), 2016(31) 보다 다시 많아졌다.

최근에 발생한 사건은 해적활동으로 선원을 납치하여 석방금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나이지리아 니제르델타 지역 분쟁이 사그라지지 않는 한 계속해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책이 필요하다.

나이지리아의 정치상황과 보코하람, 니제르델타 문제는 우리의 진출전략 수립과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적극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전담인력을 배치하여 외국의 진출 사례를 파악하고 지속적으로 현지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하다.

 

 

 

 

Mansa Musa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나이지리아 #보코하람 #니제르델타 #아프리카 #올아프리카 #africa #allafrica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은 자원 차지 위한 지역분쟁이다

2020. 5. 12. 17:14

서구국 자원 약탈 욕심도 한 몫

자원 있는 한 내전 종식 어려워

정치적 안정ㆍ민주주의 정착이 관건

 

 

왜 콩고민주공화국은 내전으로 고통을 받고, 저발전 상태에 머물고 있을까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해 수단,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앙골라 등은 풍부한 자원을 가졌지만 오히려 자원의 저주를 받으며 오랫동안 내전을 겪어 왔다. 이들 국가에서 다이아몬드와 금, 주석, 콜탄, 목재 등 다양한 광물은 정부와 반군이 무기를 사는데 사용되거나 개인의 축재로 이용됐다.

르완다는 2013년 콜탄으로 알려진 탄탈륨 수출이 전세계 생산량의 28%를 차지, 2014년 단일국가로는 최대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20151월 폴 카가메 대통령이 르완다는 콩고민주공화국의 콜탄을 훔치지 않았으며, 언제든지 국제사회의 조사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콜탄이 전혀 생산되지 않았던 르완다가 최대의 수출국으로 부상한 것은 콩고민주공화국 키부 지역의 콜탄이 밀반입 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구상의 70~80%의 콜탄이 콩고민주공화국의 동부지역인 키부 지역에 주로 매장돼 있는데, 이 지역은 내전으로 콩고민주공화국의 통치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2004년부터 키부 지역에서 콩고민주공화국 정부군, 투치족이 중심이 된 국민방위민족회의(CNDP)와 후투족이 중심이 된 르완다해방민주세력(FDLR) 간 분쟁이 발생했는데, 이는 키부의 자원 때문이었다. 2009년 이후에 CNDP2014FDLR이 해체되고 콩고민주공화국 정규군으로 통합됐다. 하지만 2012CNDP 잔당 중 일부가 정규군에 통합된 2009323일을 기해 M23이라는 무장조직을 만들어 동부 지역은 다시 불안정한 상황이 됐다. M232009년 콩고민주공화국 정부가 약속한 평화조약을 이행하지 않고 투치족을 차별하고 있다고 반발했고, 콩고민주공화국은 르완다가 M23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콩고민주공화국은 르완다가 동부지역의 지하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M23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3년 적극적인 유엔의 중재와 유엔평화유지군 콩고민주공화국 감시단(MONUSCO2010MONUC에서 명칭변경)의 개입, 그리고 M23의 내부 갈등으로 2013년 말 M23은 해체됐다.

현재 동부 지역은 공식적으로 우간다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동맹민주군(ADF)만이 무장단체로 활동하고 있으며, 과거에 비해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역사적으로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은 국내 문제와 함께 이웃한 르완다와 우간다의 정치 상황에 따라 발생한 대표적인 지역분쟁인 까닭이다.

특히 1959년부터 1963년 사이 르완다의 독립 이후 정치적 불안정, 그리고 1994년 발생한 인종학살은 투치족과 후투족의 난민을 발생시켰고, 이들이 콩고민주공화국의 동부 지역에 정착하면서 동부는 내전의 중심 지역으로 부상했다. 르완다와 우간다는 자원을 확보하고 자국의 이익을 강화하기 위해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지역의 후투 및 투치 반군 세력과 연결해 콩고민주공화국의 내전을 확대시켜왔다.

서구 국가들이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콩고민주공화국의 민주주의와 정치적 안정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도 내전이 종식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필자가 만난 킨샤사 국립대의 한 교수는 서구 국가들이 결코 콩고민주공화국의 안정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프리카의 자원을 가장 필요로 하는 나라는 선진국가로 이는 새로운 아프리카 쟁탈전’, 또는 자원 식민주의로 회자되고 있다. 한 예로 중국이 아프리카에서 수입하는 것 중 60%는 자원이다.

콩고민주공화국의 내전 종식은 정치적 안정과 민주주의 정착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동부 지역에 대한 통치권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반군이 모두 진압되었다곤 하지만, 자원 확보와 지역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이웃 국가의 영향력이 언제든지 콩고민주공화국을 내전으로 몰고 갈 수 있다.

하지만 콩고민주공화국의 정치상황은 급격한 정치변동으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었다. 두 차례 연임을 한 조셉 카빌라 현 대통령은 헌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 3선을 할 수 없지만, 201611월 예정돼 있던 선거를 치르지 않고 계속해서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2001년 집권을 시작해 17년째 장기 집권 중인 것이다. 올 초 카빌라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지만, 카빌라 대통령은 정치적 불안정과 동부 지역의 내전을 이용해 집권 연장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콩고민주공화국의 내전이 자원과 이웃하고 있는 국가의 주도권 확보와 긴밀하게 연관돼 복잡하게 전개될 수 있는 요인이 되고 있다.

 

Mansa Musa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콩고 #콩고민주공화국 #내전 #아프리카 #올아프리카 #africa #allafrica

케냐의 비전 2030 프로젝트

2006. 10. 31. 11:38

우리나라에서 지난 8월 정부가 “한국이 2010년대에 선진국에 진입하고 2020년대에 세계 일류국가로 도약해 2030년에는 ‘삶의 질’ 세계 10위에 오른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정치적으로도 논란을 일으켰는데 케냐도 최근 비전 2030(Vision 2030)을 발표하면서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있다. 물론 이 발표가 현 집권당이나 무와이 키바키(Mwai Kibaki) 대통령이 자신들의 장밋빛 청사진을 단순히 제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는 그 결과가 말해주겠지만 그래도 이와 같은 청사진을 통해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러 넣고 또한 이 플랜을 통해 일관된 정책을 세울 수 있다면 그 목표달성은 크게 중요치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는 케냐의 개관과 비전 2030의 주요 내용이다.

케냐는 동부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로 영국의 식민지를 받아오다 1963년 독립하였다. 케냐는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과 동시에 반시장주의 사회주의를 채택한 것과는 달리 일찍부터 시장경제를 선택하여 동부아프리카에서 가장 선진화된 경제시스템을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이후 정치적 부패 등으로 IMF나 세계은행 등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지 못해 경제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2002년 수평적인 정권교체이후 부정부패 감소와 안정적인 정책으로 다시 경제가 호전되고 있다.


케냐는 동아시아의 싱가포르, 태국 그리고 말레이시아와 같은 잘사는 국가를 만들기 위한 국가적 플랜을 지난 10월 12일 발표하였다.

케냐 정부가 발표한 전략적 목표는 다음 25년간 연평균 10%의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것으로 1인당 소득은 현재의 33,120케냐실링에서 25년이 지난 시점에는 6배가 향상된 220,680케냐실링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또한 부의 지표인 국내총생산(GDP)는 현재 1조1천2백3억 케냐실링에서 25년 후에는 12조1천6백80억 케냐실링으로 증가시킨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케냐의 국가 경제사회운영위가 이끄는 국가발전변화인 케냐 비전 2030으로 불리는 이번 플랜은 10월 26일 대통령 키바키에 의해 선포되었다.

이번 계획은 아시아 호랑이라 불리는 싱가포르, 태국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경제개발의 전철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들 국가들은 30년전 케냐와 같은 발전의 단계를 걷고 있었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은 한세대가 지나자 산업화되고 현대화된 경제구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대통령이 의장으로서 국가 운영위원회를 이끌 것이며 또한 국가 경제 사회운영위원회의 구성원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이다. 이들은 비전 2030 프로젝트의 주요 의사결정 팀으로 구성되며 6주까지 매주 4차례 미팅을 할 예정이다.



비전 2030(Vision 2030)

이것의 수행은 행정부의 수장이 의장이 되는 위원회에 의해 움직이며 주요 장관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구성된다. 또한 매주 3내지 4회씩 회의를 개최한다. 필요시에는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공공분야의 주요 운영자들로 구성된 핵심 전문가 팀의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들도 계속적으로 회의를 개최할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위한 지원은 5-7개 각료장관들의 부서장 비전 2030에 의해 제공될 것이며 프로젝트 담당장에 의애 매일 관리될 것이다. 이미 운영위위원회는 여러 후보자들에 대한 인터뷰를 하였으며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운영한 프로그램에 경험을 지닌 일부 국제적인 컨설팅 팀들에게 평가를 의뢰하기도 하였다.

이 계획은 나이로비 그랜드 레젠시(Nairobi's Grand Regency) 호텔에서 언론 미디어 사장들과 편집담당자들에게 발표되었다.

케냐는 과거에도 경제발전과 투자유치를 위해 두 번의 장기 정책들을 기획한 적이 있으며 여러 차례 5개년 경제개발 계획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첫 번째는 아프리카 사회주의와 케냐에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적용을 위한 1965년의 Sessional Paper No 10이 있으며 두 번째는 새로운 성장을 위한 경제계획 관리(Economic Planning Management for Renewed Growth)를 위한 1986년의 Sessional Paper No 1 등이 있다.

이와 같은 계획들은 대부분 케냐의 가장 큰 문제인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의 의제들에서부터 발목을 잡혔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획들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케냐의 경제는 1964-1980 사이에 평균 6%가 넘게 성장하였으며 그리고 1980-1990년 사이에는 연평균 4.1%의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1990-2002년 사이 1인당 소득은 단지 1.9%의 성장을 보인 반면 같은 시기 인구 증가율은 2.9%에 달해 실질적 성장을 이루지 못했지만 2003년부터 케냐는 높은 경제성장을 다시 보이기 시작했는데 2005년에는 5.8의 GDP성장을 보였다.


케냐가 최근 비전 2030 계획을 발표한 것은 이와 같이 최근의 경제성장세를 공고화하기 위함이며 장기적으로는 게냐를 삶의 질에 있어 중위권 소득을 보이는 국가들과 같은 수준으로 높이기 위함이다.

케냐가 다른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서는 경제상황이 다소 나은 것은 분명하지만 35년전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을 보이든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그리고 태국 등과 비교해서는 비천한 경제결과물을 보이고 있다.

케냐는 이들 국가들이 성공한 것은 수많은 전략적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성실히 수행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 국가들의 전략적 비전에는 장기적, 단기적 아젠다들이 있었으며 이것들은 대부분 성실히 수행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케냐는 야심찬 비전 2030을 제시하였지만 많은 문제점들로 인해 제대로 수행될지도 의문이다. 우선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문제이다. 이번에 발표한 계획이 단순히 집권당이나 대통령이 차기 정권을 노리고 설정한 선거용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미 이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데 만약 비전 2030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걸림돌을 먼저 제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크리스 키루비(Chris Kirubi)와 같은 학자는 “이 계획이 정당들을 위한 비전이 아닌 케냐 국민들을 위한 비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언론들의 역할도 아주 중요한데 언론들이 정부의 시책에 대해 비판할 것은 적절히 비판함으로써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나이로비 주식시장의 의장인 짐나 음바루(Jimnah Mbaru)는 비전 2030을 바라보는 미디어들은 정부의 개입에 전혀 개의치 않는 보르스(Bourse)와 같은 기관이 되어야 하며 세계의 많은 국가들 중에 청렴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 국가는 성공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결국 케냐도 비전 2030의 성공이 정치적 논리로 해결한다면 결국 성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을 많은 분석가들은 제시하고 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정치일반

아시아·아프리카정상회담과 아프리카의 현실

2005. 5. 30. 11:41
아시아·아프리카정상회담과 아프리카의 현실

아시아·아프리카의 연대를 표명한「반둥 회의」(1955년)가 올해로 50년을 맞이하였다. 반둥회의는 1955년 4월 18일 구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독립을 실현하고 있던 아시아·아프리카의 정상들이 인도네시아의 반둥에 모여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회의」를 개최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아시아·아프리카국가들이 연대하여 자립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근 아시아와 아프리카 정상들이 제3세계의 단결과 비동맹운동을 촉구했던 인도네시아 반둥회의 이후 50년 만에 다시 모여 반세기 전의 정신을 확인했다. 양 대륙 89개국 대표들은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4월 22, 23일 이틀 동안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를 열고 상호 정치, 경제 및 문화적 협력을 늘린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아시아·아프리카의 전략적 협력’ 선언문을 채택했다. 또한 2년마다 외무장관 회의를, 4년마다 정상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이 처럼 양 대륙이 50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미래를 위한 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50년 이전에 공유한 정신을 다시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 아프리카는 고뇌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빈곤, 분쟁,HIV/AIDS 등 이대로는 아프리카가 2015년까지, 아프리카 국가들이 제시한 UN 밀레니엄 개발 목표(MDGs, Millennium Development Goals)를 달성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UN 밀레니엄 개발 목표는 2015년까지 세계의 빈곤 인구를 반감하고, 보건·교육에의 접근 확대를 제시하였지만 현재의 상황으로는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들은 밀레니엄 개발 목표가 달성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 개발을 막는 부정적 요인들
아프리카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인들이 산재하여 국가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그 부정적인 요인들을 살펴보면 먼저 에이즈 문제로, 에이즈에 의한 사망의 70% 이상이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 집중하며 남부아프리카 국가들의 평균 수명은 에이즈에 의하여 10세 이상이나 하락하고 있다.
UNAIDS의 추계에 의하면 2004년말 현재 세계의 HIV 감염자는 3,940만명(3,590 ∼ 4,430만명)으로 증가하였고 같은 해 신규 감염자는 490만명(430 ∼ 640만명), 그리고 에이즈에 의한 사망자수는 310만명(280 ∼ 350만명) 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에이즈 문제의 최근 특징으로는 경제 성장과 소득 격차가 현저한 중국이나 인도에서 에이즈 감염자의 급증하고 있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상황에 있는 것은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이다.
2004년 말 현재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 있어서 HIV 감염자수는 2,54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세계 인구의 13%를 차지하는데 지나지 않는 이 지역에 에이즈 감염자 수는 세계 감염자의 약 2/3가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여성의 경우 3/4). 특히 아프리카지역의 성인 에이즈 감염률(7.4%)은 보합을 보이고 있지만 이것은 사태의 개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신규 감염자와 에이즈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비슷한 결과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중에서도 심각한 지역은 남부아프리카이며, 세계 인구의 약 2%가 생활하고 있는 아프리카 남부 9개국의 HIV 감염자 수는 전 세계 에이즈 환자 수의 약 30%가 집중하고 있다. 이들 국가 중 보츠와나는 2003년 성인이 감염률이 37.3%에 이르고 있고, 30 년전에 56.1세이던 평균수명이 현재는 39.7세 까지 하락하였다.
다른 남부아프리카 국가들의 상황을 보면, 스와질랜드의 에이즈 성인 감염률이 38.3%, 평균수명은 34.4세이며 레소토에서는 각각 28.9%와 35.1세, 나미비아는 24.6%, 33.1 세 등이다. 이밖에 말라위, 모잠비크, 잠비아와 위의 3개국을 포함한 아프리카 남부 6개국에서는 성인 2,600만명 중 500만명 이상이 HIV 감염자로 추측되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한 노동력의 상실은 새로운 경제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은행은 2003 년9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아프리카 에이즈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말라위의 경우 2005 년까지 숙련 노동 인구의 약 절반이 에이즈로 사망할 우려가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2002년 전 세계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약2,000 억 달러가 소비되었던 반면 아프리카의 에이즈 대책 예산은 불과 10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얼마나 아프리카 에이즈 대책이 무관심한 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지역분쟁으로 이 역시 아프리카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에 걸쳐 콩고 민주공화국에서 일어났던 내전으로 인해 약3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아프리카 경제의 후진상황과 빈부 격차의 확대에 의해 많은 빈곤층이 충분한 음식이나 물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다음은 현재 아프리카의 곤경을 알려주는 주요 지표들이다.
․ 아프리카 평균 수명은 58세이며 18개국은 평균 수명이 50세 이하 그리고 시에라리온의 경우 평균수명이 37세이다.
․ 아프리카 전체 인구 중 절반이 하루 1달러 이하로 생활을 하고 있다.
․ 전세계 34개 최빈국 중 아프리카 29개국이 최빈곤 국으로 지정되어 있다.
․ 18개국의 여성 중 절반이상이 문맹이다.
․ 아프리카 28개국에서 5세이하 어린이들 중 1천명당 140명이 사망하고 있다.
․ 아프리카 전체인구의 58%는 깨끗한 식수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왜 아프리카는 세계의 불행한 대륙으로 남아 있는 것인가. 가장 우선시되는 문제는 지난 50년간 아프리카의 대부분 국가에서는 선정(good Governance)결여 등 정치적 불안정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특히 냉전시기를 중심으로 구미 선진국은 아프리카의 광물·농산 자원이나 이권의 확보, 지정학적인 전략적 관점에만 우선시하고, 부패나 인권 침해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독재자 등에 대한 군사 원조를 포함한 정치적 원조를 계속했다. 그 결과 아프리카에는 막대한 금액의 원조가 투하됐음에도 불구하고 민생의 향상이나 경제 성장에는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프리카의 위기 극복 노력들
현재 아프리카 사람들은 「생존」자체가 과제로 안고 살아 나가고 있다. 그러나 생존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의지가 점점 강화되고 있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에이즈에 관해서도 21세기 들어 아프리카인들 스스로 예방이나 교육 그리고 각국 정부들의 보건시설 강화 등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경제면에서도 아프리카인들은 생존을 위해 중소·영세 기업 등의 경제 활동이 현저하게 성장하고 있다. 한편,21 세기에 들어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에 있어 분쟁이 점차 감소하여 정치적 불안정도 개선되고 있다. 아프리카 연합(AU)의 결성이나 아프리카 자신의 상호감시 체계의 실시 등 아프리카 스스로의 이니셔티브에 의한 분쟁해결이나 관리 강화의 프로세스가 진전되고 있다.AU는 2002년 7월 출범하였다. AU는 아프리카의 숙원인 '분쟁 종식'과 '빈곤 추방'이라는 두 마리 토끼 사냥을 목표로 하고 있다. AU의 조직으로는 각국 수반으로 구성되는 아프리카 의회를 비롯해 15개 회원국으로 구성되는 평화안보위원회, 사법재판소 등이 있고 재정 관련조직으로 아프리카 은행(The African Bank), 아프리카 통화기금(The African Monetary Fund)과 아프리카 투자은행(African Investment Bank) 등이 있다. 특히 유엔 안보리를 본떠 15개국으로 만든 평화 안보리는 대륙의 분쟁을 해결하고 조정하는 임무를 맡게 된 AU의 핵심부분이다.
또한 21세기에 들어 아프리카는 분쟁, 교육, 보건 등에 관하여 새로운 시도를 시작하고, 의욕적인 출발을 하려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아프리카의 노력은 단순히 아프리카만의 노력에 의해서 만으로는 이룩할 수 없으며 지금 이야 말로, G8 등 선진국들이 본격적인 아프리카 지원에 나서야 할 때 이다.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선진국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개발원조자금(ODA)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으로 아프리카의 주요 ODA 공여국인 일본의 경우에도 전체 총 ODA의 삭감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는 원조가 국가에 너무 의존하고 있어 원조의 방법에 대해서도 정부만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나 기업 등 민간 부문에서 주체적으로 참가여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 당연하다. 일본의 경우 ‘반둥 회의’ 50주년에 즈음하여, 일본 정부의 아프리카 원조에 관하여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였다. 일본의 아프리카 원조는 일본 ODA 전체의 불과 8.8%에 지나지 않으며 G7 국가들 중에서 6위를 차지하고 있다.
첫째, 국제 공약을 지키고,ODA를 GNI(국민총소득)의 0.7%로 증액하는 것.
둘째,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 ODA 배분을 전체 35%까지 끌어올리는 것.
셋째, 대아프리카 원조의 목적을 밀레니엄 개발 목표의 달성과 빈곤 삭감과 격차 시정에 두고,「아프리카 일본 연대 기금」을 설립하여 대 아프리카 원조를 동 기금으로 일원화되는 것.
넷째, 동 기금의 운영에는 시민사회가 참가하며 또한 기금의 40%는 시민사회의 집행에 맡기는 것으로 한다.
다섯째, 위의 내용들을 2010년까지 실현한 것 등이다.
이 처럼 일본을 비롯하여 선진국들은 GNI의 0.7% ODA 제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은 일부 국가들에 한정되어 있어 선진국들의 자발적인 원조확대가 필수적이다.
또한 원조와 더불어 아프리카의 빈곤을 감소시키기 위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아프리카 경제의 회생을 막고 있는 외채의 경감이다. 세계은행과 IMF 정책결정자들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빈곤과의 전쟁을 위해서는 보다 나은 정부의 구성과 무역을 보다 용이하게 접근하기 위해서 외채를 줄이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외채 유지는 만약 외채문제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이 제기된다면 단지 그것을 유지만 시킬 뿐이며 개선은 할 수 없다"라고 이 두 국제기구의 한 관계자가 말했다.
2년 전 IMF와 세계은행에 의해 발표된 부채과도 빈곤국가(HIPC) 22개국들은 현재 총 340억달러의 외채경감의 혜택을 보았다. 다른 쌍무협정을 통한 외채 경감까지를 포함하면 그 액수는 530억달러에 달한다.
13개 국가들은 현재 외채 경감에 대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 그 부채과도 빈곤 국가들에 대한 부채경감 프로그램은 비정부기구들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받고 있는데 이는 그 경감규모가 너무나 적고 또한 너무나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외채경감 비정부기구는 4월 초 IMF와 세계은행이 세계의 가장 빈곤한 국가들의 모든 부채를 경감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IMF와 세계은행 정책결정자들은 지난 4월 말 외채경감은 신중한 차입과 개인기업 부문, 교육 그리고 보건을 지원하는 정책들 펼치는 경제 관리에 개선을 보이고 있는 국가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아프리카 장래는 밝다
최근 아프리카의 차드, 적도기니, 나이지리아, 가봉 등 일부 산유국들의 경우 고유가로 인해 고성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최근 들어 「잊혀진 세계」, 아프리카의 석유가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001년 9 월11일 미국 동시 다발 테러와 이에 맞춰 미국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은 세계 최대의 석유 수급지인 중동 불안을 초래하였고,EU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에너지 전략의 재평가를 강요한 에너지 안전보장이 매우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확인 석유 매장량 800억 배럴로 아프리카는 향후 5년내에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할 예정이다.
미국의 경우 파월 전 국무장관이 이라크전쟁 시작 전 2002년 9월에 앙골라, 가봉을 방문하였고,2003 년 7월에는 부시 대통령이 아프리카5개국(세네갈, 남아프리카공화국, 보츠와나, 우간다, 나이지리아)을 방문하여 석유와 관련하여 아프리카 국가들의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현재 세계에서 차지하는 아프리카의 원유 생산의 비율은 10% 이상에 이르고 있다.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인 나이지리아의 원유 생산은 약 240 만 배럴/ 일(2004 년)을 기록하고 있으며 확인 매장량도 343억 배럴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유 메이저 회사들은 나이지리아의 개발되지 않은 지하 천연 자원의 이권 획득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중에서 세계 최대 석유 회사인 엑슨 모빌(ExxonMobil)은 아프리카 원유 증산 계획을 내세우고 있고,2004년 발표된 연차 보고에서는 아프리카에서의 생산량이 1위를(23.5%) 차지하였다. 또한 엑슨 모빌 그룹은 2005년 1월 18일 나이지리아 국영 석유 회사(NNPC : Nigeria National Petroleum Company)와 제휴하여 LNG 플랜트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2010년부터 조업 시작을 기대하고 있다. 다음으로 주목받고 있는 메이저 석유 회사로는 엑슨 모빌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셰브론 텍사코(Chevron Texaco)를 들 수 있다. 이 회사는 향후 5년간 총액 200억 달러의 아프리카 투자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지난 1월 13일에는 영국 가스 회사(BG)와 제휴하여 나이지리아 LNG 플랜트 건설(2009년 조업 시작 예정)을 발표하였다. 이 밖에 영국의 BP 등이 나이지리아에서의 탄화수소 부문의 개발에 참가하고 있다.
이 처럼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우 일부 산유국들을 포함하여 대륙전체의 경제성장률이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 보다 훨씬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04에 이어 2005년에도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제적 성장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으며 특히 2005년의 경제성장 전망을 보다 좋게 보고 있다.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에 배포된 전망에서 IMF는 아프리카의 국내총생산이 2003년 3.7%의 성장에서 2004년에는 4.6%의 성장을 그리고 2005년에는 5.8%의 성장을 예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망은 그 어느 때보다 좋은 것으로 거시 경제적인 안정면에서도 현재 가장 좋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고가 상품에 대한 강한 수요와 외채 부담에 대한 완화 그리고 산업시장에 대한 접근의 개선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원유수출 국가들은 지금까지 가장 큰 순 이익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반면 국제 원유가격의 고가로 인해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IMF는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아프리카 정책입안자들은 상품가격들에 대해 유연성을 두어 원유가격이 고가일 때 ‘예방적 저축’을 권고하고 있다.
또한 IMF는 아프리카 정부들의 경제에 대한 간여를 줄이고 기간산업과 민간투자를 활성화해야 하며 뿌리 깊게 남아있는 제도적 개선도 이루어져 향후 보다 나은 성장을 이룰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반둥회의 50주년을 맞아 아시아․아프리카 정상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다시 만나 초기의 협력관계를 모색하고 있지만 50년이 지난 현재 두 대륙의 경제적, 정치적 위상면에서는 많은 격차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일본, 중국 같은 국가들은 매년 아프리카국가들과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있으며 동등한 위치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수혜를 베푸는 입장에서 대하고 있다. 이것은 원조 공여를 받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며 두 대륙이 동등한 위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이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정치일반

  1. Blog Icon
    진준표

    정말 짠한 이야기네요.

수단의 다르푸르(7) - 다르푸르 분쟁을 해결하기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2004. 7. 21. 22:25
7. 파월 미 국무장관과 유엔 사무총장이 다르푸를 방문했지만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상태입니다. 국제 사회는 지금 다르푸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국제사회는 무엇보다도 수단정부에 대해 잔자위드를 무장해제시키고 인종청소 등 인권남용에 대한 범죄행위를 조사할 것을 요구해야한다. 특히 전쟁의 수단으로서 강간과 살인등을 일삼은 전쟁범죄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 수단정부가 약속한 위와 같은 일련의 조치들이 정확하게 이루어지게 하려면 국제사회의 감시가 필수적이다.

지금 현재 약 100만명이 넘는 다르푸 사람들이 보건과 위생, 영양, 주거지등은 물론 계속되는 공격으로부터 보호되기 위해 긴급하고 충분한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다.  

수단정부는 한해 약 10억 달러에 이르는 남부에서 나는 원유수입으로 인해 중국, 러시아, 벨로루시등으로부터 군사장비를 공급받을 수 있고 내부적으로는 2002년 10월 남부지역의 휴전으로 인해 다르푸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 또한 국제사회의 공조로 무기금수조치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미국이 다르푸 지역의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유엔 안보리에 수단에 대한 제제조치를 추진중인데 수단은 제 2 의 이라크 사태를 언급하며 반발하고 있다. 현재는 수단정부의 노력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다.

UN은 남부 지역의 휴전과 함께 휴전감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안보리는 이러한 감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6500명의 군대를 파병하려고 계획하고 있지만 이 병력은 다르푸 지역에만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수단 전 지역에 배치되고 기간도 짧기 때문에 그 효과가 의심되고 있다.

4월 8일 휴전협정에 따라 수단 정부와 두개의 반군집단은 아프리카 연합(Africa Union)이 휴전을 위해 휴전 위원회를 설치하는데 동의했다. 이에 따라 AU는 약 120명의 휴전감시요원과 270명의 무장 보호병력을 구성하고 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수단의 다르푸르(6) -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은?

2004. 7. 21. 22:25
6. 다르푸지역에서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정부와 두 반군집단은 2004년 4월 8일에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수단 공군에 의한 폭격과 진자위드의 계속된 공격은 계속되고 있다. 더구나 진자위드는 정부가 통제하는 지역으로 피난한 시민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단정부는 제일먼저 진자위드를 무장해제시키고 인권남용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삶의 주거지를 빼앗기거나 떠나온 사람들에게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

장기적 안목에서 본다면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처럼 인종적 화해, 보상, 그리고 정의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수단의 다르푸르(5) - 다르푸르 분쟁의 성격과 국제사회의 무관심

2004. 7. 21. 22:23
5. 다르푸르 분쟁의 성격과 국제사회의 무관심의 원인은?

다르푸 지역의 분쟁은 정확히 종교적 분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거의 모든 다르푸 인들이 무슬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군과 진자위드는 모스크와 코란을 신성모독하며 모스크 안에 피난해 있는 사람과 지도자들을 살해하고 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정부군이 공격하기 전까지 수단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기껏해야 서부지역사람들 또는 다르푸 사람들 정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현재 발생하고 있는 분쟁으로 인해 민족적, 인종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즉 국가의식은 더욱 희박해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분명히 종족적, 인종적 분쟁으로 정의할 수 있다.

다르푸 지역에 대한 기자들의 접근을 수단정부에서 막고 있으며 차드지역으로 난민이 들어가는 것도 차단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제사회가 원조를 위해 이 지역에 들어가는데 약 4개월이 걸리고 있다. 도로상황도 엉망이고 철도도 다르푸 남부의 냘라(Nyala)지역으로만 진입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수송로가 좋지 않은 것도 문제이지만 무장세력이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단정부는 21년간의 남부의 내전에서도 국제사회의 구호노력을 방해하고 좌절시켰다. 수단정부의 이 같은 방해와 함께 남부지방에 첫 번째 기근이 들었던 1988년에는 약 250,000명이 생명을 잃었으며 두 번째 기근이 들었을때는 약 100,000명이 사망하였다. 수단정부는 다르푸지역에서 비슷하게 방해공작을 펼치고 있다.

수단정부는 다르푸 사태가 정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협상보다는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를 위해 다르푸 출신 국회의원들에게 실제적인 권한을 주지 않고 일당제 국가처럼 국가의회당(National Congress Party)의 주도하에 비둘기파인 고위공무원을 매파인 군 인사로 대체하고 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수단의 다르푸르(4) - 왜 인권남용이 일어나고 있는가?

2004. 7. 21. 22:22
4. 이들은 왜 이렇게 집단 강간과 살해를 자행 하는지요?

문제는 수단정부군과 잔자위드가 반군에 대한 공격보다는 시민들에 대하여 무차별적인 공격과 파괴를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 증거에 따르면 수단군과 진자위드 민병대의 공격은 민간인이 거주하는 마을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를 위해 수단공군의 공군력이 동원되고 있는데 이는 삶의 주거지를 완벽하게 파괴함으로서 거주지를 포기하고 떠나게 하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잔자위드는 아프리카계 주민들에 대한 공격시 모든 것을 초토화시킴으로서 그들을 난민화시켜 쫒아내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살해, 강간, 약탈은 물론 구호품에 대한 약탈도 서슴지 않고 있다.

정부군은 언제나 먼저 도착하고 제일 나중에 철수함으로서 수단정부군과 잔자위드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집단임을 알 수 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수단의 다르푸르(3) - 아랍 민병대 잔자위드는 어떤 조직인가?

2004. 7. 21. 22:21
3. 다르푸 지역에서 이렇게 조직적인 강간과 살해를 하는 아랍계 민병대는 어떤 단체입니까?

수단정부군중 많은 사람들이 다르푸지역 출신으로 수단정부군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보다는 일종의 대리전을 치루게 함으로서 인권문제에 대한 국내외적 비난을 피하고 다르푸의 아프리카계 민족을 제압하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수단정부는 다르푸와 차드의 가난한 아랍계 유목민들을 대상으로 잔자위드라는 무장단체를 만들게 하고 무장, 훈련, 장비등 모든 지원을 하고 있으며 이들이 또한 이들이 저지르는 모든 범죄행위에 대해 죄를 묻지 않는 일종의 면책특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 단체의 지도자들은 과거에 농경마을을 공격했던 범죄경력을 가지고 있다. 잔자위드라는 뜻은 다르푸인들 사이에 ‘산적(bandits)' 또는 '노상강도(highwaymen)'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모두 약 20,000명의 병력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은 공격시 수단 공군의 도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복장도 수단정부군과 비슷한 녹색의 카키색 복장이고 수단정부에서 허가한 위성전화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수단군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