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다이아몬드’가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지속시킴
소년병, 사지절단, 강간 등 참혹한 내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줌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의 ECOMOG가 2017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시에라리온의 수도인 프리타운(Freetown)은 1787년 영국의 노예폐지론들에 의해 노예의 송환과 구출을 위한 장소로 마련된 곳이었다. 영국은 1808년 프리타운을 왕령식민지(Crown Colony)로 선포하고 포획된 노예선의 노예들을 정착시켰으며 1896년에는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식민 지배를 시작했다.
196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시에라리온은 다이아몬드, 철광석 등 지하자원이 풍부해 다른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가들과는 달리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국가였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국가발전은 침체되었고 국민들은 정부에 대해 반감을 키워가고 있었다. 시에라리온은 독립이후 허약한 정부와 불안정한 정치상황으로 인해 여러 차례의 군부 쿠데타를 겪었고 이웃한 라이베리아의 내전 역시 시에라리온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1991년 3월 23일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가 이끄는 라이베리아애국전선(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 NPFL)의 지원을 받은 포데이 산코(Foday Sankoh)가 이끄는 혁명연합전선(Revolutionary United Front : RUF)이 부정부패 척결을 주장하며 1985년 쿠데타로 집권한 조셉 모모흐(Joseph Momoh) 정권을 공격하면서 시작 되었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2002년까지 11년 동안 지속되었고, 약 5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450만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시에라리온 정부군이 산코의 공격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데 불만을 품은 벨런타인 스트라세르(Valentine Strasser) 대위가 1992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권을 잡은 스트라세르는 국가임시통치평의회(National Provisional Ruling Council : NPRC)를 만들고 1992년부터 1996년까지 4년간 통치했으나 1996년 1월 또 다른 군 지도자 줄리어스 마다 비오(Julius Maada Bio)에 의해 축출 되었다. 비오는 자유선거를 통해 민정이양을 약속하였고, 3월 계엄령 하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시에라리온인민당(Sierra Leone People's Party : SLPP)의 아메드 테잔 카바(Ahmad Tejan Kabbah)가 승리하여 1996년 3월 29일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카바 대통령은 취임이후 RUF 지도자 산코와 아비장 평화협정(Abidjan Peace Accord)을 11월 말에 체결했지만 성공적으로 이행되지는 않았다.
1997년 5월에 아비장 평화협정이 지켜지지 않은데 불만을 품은 일단의 군 하급 장교가 쿠데타를 일으켜 카바 대통령을 축출하고 군혁명위원회(Armed Forces Revolutionary Council : AFRC)를 통해 조니 폴 코로마(Johnny Paul Koromah)가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코로마 정권은 민간정부를 전복시켰기 때문에 이전에 있었던 쿠데타와는 성격이 달랐으며 국내적으로는 카바 대통령을 따르는 민병대의 공격을 받는 한편, 국제사회의 심각한 비난과 제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 ECOWAS)는 나이지리아가 주축이 된 서아프리카평화유지군`(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Monitoring Group : ECOMOG)을 1997년 시에라리온에 파병하였으나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고 오히려 코로마는 대통령임을 선언했다. 1997년 8월 영연방은 카바 대통령의 무조건 복귀를 선언하고 ECOMOG는 병력을 3배로 증강해 코로마 정권을 압박하였다. 결국 1998년 2월 ECOMOG는 수도인 프리타운을 점령하고 카바는 3월 대통령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1999년 1월 RUF가 수도 프리타운을 점령하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사지절단, 강간 등 잔인한 범죄를 자행했다. ECOMOG가 치열한 공격 끝에 프리타운을 탈환했지만 RUF는 1997년 나이지리아에서 체포된 산코가 풀려날 때까지 계속 싸우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대해 ECOMOG 주도국인 나이지리아는 상황이 악화되어 나이지리아에 부담이 가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산코를 풀어주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시에라리온에 촉구하였다. 유엔과 아프리카통일기구(OAU)의 중재 하에 1999년 7월 토고에서 결국 권력분담을 담은 로메 평화협정(Lomé Peace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즉각 전투를 중단하고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병하여 무장해제를 감시하게 하는 한편, 산코를 석방하여 부통령직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1999년 8월에 권력지분에서 제외된 AFRC가 평화유지군 약 30여명을 인질로 삼아 또 다른 내전으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이 전개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9월 시에라리온 정부는 나이지리아가 주도하는 ECOMOG가 철수를 시작하자, 유엔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1999년 11월 시에라리온 유엔임무단(United Nations Mission in Sierra Leone : UNAMSILL)이 업무를 시작했다.
이후 RUF는 평화협정의 내용을 준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000년 5월 다시 프리타운을 공격하자 영국은 허약한 카바 정부를 지원하고 영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개입을 결정했다. 영국은 약 800명의 낙하산 부대가 참여한 팔리서 작전(Operation Palliser)을 통해 프리타운을 탈환하고 산코를 체포함으로써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고 2002년 1월 18일 카바 대통령은 시에라리온의 내전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2002년 5월 총선에서 카바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으나 정당으로 참여한 RUF는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다.
시에라리온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벌인 ECOMOG는 2017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거론되기도 했다.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유엔 평화유지군을 대체하여 아프리카연합(AU) 또는 역내 지역기구가 주도하는 평화유지군을 파병하여 역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RUF는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에게 다이아몬드를 불법적으로 거래하여 무기를 수입하였다. RUF는 1991년에서 1999년 사이에 불법 다이아몬드 거래를 통해 연간 2억 달러의 수익을 낸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유엔은 다이아몬드 공정거래를 위해 다이아몬드 원산지를 추적할 수 있는 '킴벌리 프로세스' 감시 체제를 구축하고 분쟁지역에서 채굴된 다이아몬드에 대한 국제적인 거래를 금지하는 협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2007년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시에라리온 내전과 분쟁광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시에라리온 분쟁은 서아프리카 정치에 만연한 다양한 외부 요인들과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는 1989년 모모흐 대통령에게 시에라리온을 라이베리아 무장투쟁 기지로 사용하겠다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시에라리온이 라이베리아에 파병된 ECOWAS가 주도하는 평화유지군에 약 300명의 병력을 파병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또한, 시에라리온이 혼란한 상황을 틈타 국경지역에 산재한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도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리비아 역시 RUF를 만든 산코에게 군사훈련을 제공하여 내전을 부추겼다는 비난을 빗겨가기는 어렵다. RUF가 1991년 필요한 외부 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외부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필요한 시에라리온 국민들의 지지나 지원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RUF가 시에라리온 국민들에게 참혹한 인권유린 행위를 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2002년 1월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내전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못한 상태이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소년병 강제 모집과 팔다리, 귀, 입술을 잘라내는 신체 절단, 그리고 강간과 강제 노동 등 참혹한 내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아프리카 내전과 분쟁으로 기록된다.
시에라리온은 선거를 통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고 있으며 평화와 발전을 행해 나아가고 있다. 내전의 상처를 딛고 서서히 회복되고 있던 시에라리온은 2014년 7월 에볼라 바이러스의 발병으로 시련을 겪기도 했다. 2018년 4월 시에라리온에서 치러진 4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비오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시에라리온의 민주주주의가 정착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오 대통령은 준장 출신으로 쿠데타에 2번이나 참여했으며 1996년 민정이양을 진행한 인물로 시에라리온의 민주주의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비오 대통령은 집권당시 약속했던 초·중등 무상 교육과 정부의 차관도입 사업들을 재검토하여 중국의 신공항 건설 사업을 취소하고 광산 채굴권 합의 내역을 재검토하는 등 시에라리온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