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마다가스카르(Madagascar)의 인종

2011. 1. 31. 13:42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섬은 모잠비크 운하에 의해 아프리카로부터 분리되었다. 마다가스카르는 남부 아프리카에서 온 반투족인 와짐바(Wazimba)족, 서기 4세기에 이주한 인도네시아인, 그리고 8세기에 이주한 아랍인등 3가지 종족이 살고 있다. 말라가시(Malagasy) 인구의 대다수는 말레이-폴리네시아(Malay-Polynesian)인이고 주요언어인 말라가시어는 여러 언어의 혼합으로 인해 생겼다. 이 섬의 사람들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거는 10세기로 아랍어로 쓰여진 것으로 보워크 이븐 차미리야(Bowork ibn Chamriya)가 쓴 경이로운 인도인(Book of Indian Marvels)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는 원형 말라가시(proto Malagasy)와 흑인(negroid)의 혼혈인 와크와크(Waqwaq)족이 동아프리카 해안지역에 정착한 것을 묘사하고 있다. 6명이 탈 수 있는 와카(waka)라는 카누를 이용하여 서부 인도에서부터 와크와크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들은 인도양을 건너 무려 3,500마일 이상을 여행했고 최초로 동부아프리카 연안에 정착하였으나 그곳에서 밀려 결국에는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했다. 와크와크족을 따라온 인도네시아 인들은 좀 더 크고 빠른 쿨룬 보(kunlun bo)라는 배를 이용했다. 중세에는 몇몇 다른 민족들, 아랍인, 아다톨리아인(Anatolians), 이란인 그리고 코모로스(Comoros) 섬으로부터 온 선원들이 마다가스카르로 이주했다. 와짐바족과 별개로 다른 아프리카인들이 프랑스에 의해 노예로 수입되었다.

마다가스카르와 유럽인들의 초기 접촉은 16세기와 18세기 사이에 포르투갈인, 프랑스인, 그리고 네덜란드인들이 주로 북부 해안에 상륙함으로서 이루어졌다. 페드랄브스 카브렐(Pedralves Cabral)은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한 최초의 포르투갈인이며 1613에서 1619사이에 무역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정복했다. 18세기에 아랍인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영국인들이 마다가스카르에서 일레 데 프랑스(Île de Frace), 케이프 콜로니(Cape Colony), 카리브해, 그리고 북미 지역으로 노예를 수출했다. 가끔 노예들이 섬의 다른 지역으로 매매되기도 했고 여자들은 첩으로 구매되어 지기도 했다.

마다가스카르는 모두 5개의 기후지역으로 나누어진다. 하투스(Hauts) 고원의 메리나(Merinas)는 인도네시아와 비슷하고, 반면 서부해안의 사칼라바(Sakalava) 소를 기르는 농부들이 사는 지역은 흑인들이 사는 지역과 비슷하며, 동부의 안타이프세이(Antaifsay)와 아마이모로(Amaimoro)는 말레이-폴리네시아 지역 또는 아랍 지역과 비슷하다. 안드리안다히포치(Andriandahifotsy)왕의 통치시기에 사칼라바족은 메나베(Menabe)와 보이나(Boina) 왕국을 설립했는데 가장 강력한 초기 왕국이 되었다. 메리나(Merina) 왕조는 안드리아마넬로(Andriamanelo)의 후계자, 랄람보(Ralambo ; 1575-1610)가 설립하였고 안드리아남포이니메리나(Andrianampoinimerina ; 1787-1810)의 통치기간에 가장 강력한 왕국이 되었다. 그는 외교적 수완과 정복을 통해 암보히망가(Ambohimanga), 암보히드라트리모(Ambohidratrimo), 그리고 안타나나리보(Antananarivo)를 통합하는 거대한 메리나 왕국을 건설했다. 그의 사후에 라다마 1세(Radama I)가 1828까지 통치했고 1861까지 독재적인 라나발로나 1세(Ranavalona I)가 그 후계를 이었다. 영국의 총기로 무장한 라다마 1세는 타마타브(Tamatave), 폴포인테(Foulpointe), 그리고 마로안체트라(Maroantsetra) 같은 많은 소규모의 부족을 메리나 왕조에 복속시키는 한편 1817년과 1823년에는 베시미사라카(Betsimisaraka)를, 1822년에는 사칼라바를, 그리고 1824년에는 보이나를 공격했다. 시켰다. 18세기에 들어와 유럽의 종교와 기술이 폭넓게 전파되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침략은 19세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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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2011. 1. 31. 13:41

현재의 마다가스카르에 살았던 최초의 사람들은 10세기 전에 정착했던 말레이-폴리네시아인(Malayo-Polynesian)이었다. 이들은 후에 들어온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에서 사람들과 혼혈이 일어났다. 이슬람교는 동아프리카의 무역업자에 의해 14 세기부터 북쪽에 소개되었다. 몇몇의 강력한 왕국이 15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중 3개의 주요한 왕국은 16세기 후반에 서해안에서 처음 발달한 샤카라바(Sakalava) 왕국, 17세기에 동해안에서 생겼던 추장들의 동맹체인 치탐발라(Tsitambala) 왕국, 15세기부터 중부 고지대에서 발달했던 메리나(Merina) 왕국이었다. 19세기 초까지, 메리나 왕국은 마다가스카르 섬의 거의 모든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1500년에 섬에 도착하는 첫 번째 유럽인은 포르투갈의 항해자 디아고 디아스(Diogo Dias)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슬람교의 정착지를 습격하였다. 영국인과 프랑스인을 포함하여 다른 유럽인들은 나중에 도착했고, 17세기 후반과 18세기의 초에, 마다가스카르는 해적선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가 되었다. 19세기 초기에, 메리나의 왕인 라다마 1세(Radama I)는 영국과 프랑스 선교사를 환영했고, 1861년에, 라다마 2세(Radama Ⅱ)는 프랑스 무역 회사에 특권을 주어 큰 힘을 주었다. 영국은 1890년에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프랑스 지배를 인정했다. 그러나 1895년 1월에 메리나는 복종하기를 거절했고, 프랑스 군대는 북서의 해안가에 상륙하여 그해 9월에 안타나나리보(Antananarivo)를 점령했다. 메리나의 여왕은 왕위는 유지하였지만 프랑스 보호령을 인정할 것을 강요당했다. 프랑스 통치에 대한 반대는 제 1차 세계 대전의 끝 후에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1946년에, 프랑스 연합(French Union)에서 자치 상태가 되었다.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는 1960년 6월 26일, 말라가시공화국(Malagasy Republic) 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사회 민주당의 총수였던 필리베르트 치라나나(Philibert Tsiranana)로서, 친 서양정권 특히 친 프랑스 정권을 따랐으며 그의 국가와 북 아프리카와의 깊은 관계는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는 1965년과 1972년에 또 다시 재선되었다. 그러나 부정선거의 주장으로 사회적 불안과 치라나나의 사임을 야기 시켰다. 그 뒤 군총사령관 가브리엘 라마난초아(Gabriel Ramanantsoa) 장군이 정부를 통치하였다. 1972년 10월 국민의 투표로 신임을 얻은 라마난초아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새 정권을 프랑스로부터 격리시켰다. 정부는 1972년~1975년 사이에 전 프랑스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프랑스인 공무원을 과 말라가시(Malagasy) 시민들로 대체하였다. 라마난초아는 또한 남아공과의 관계를 깨고 공산주의 국가들과 관계를 확립하였다.

1975년 사회 불안과 쿠데타 미수사건은 라마난초아가 육군 장교 리차드 라치만드라바(Richard Ratsimandrava)에게 대통령직과 수상직을 양도하였다. 그러나 6일후, 라치만드라는 암살당하고 해군 장교인 디디에르 라치라카 (Didier Ratsiraka)가 대통령이 되었고 혁명 위원회(Revolutionary Council)의 의장이 되었다. 새로운 헌법이 국민투표로 승인되었고, 라치라카가 대통령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국가 명을 마다가스카르 민주주의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Madagascar)으로 개칭하였다. 라치라카의 통치권 아래, 비록 공산주의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을 유지해 나갔지만 프랑스와의 관계는 향상되었다. 마다가스카르 정부는 사회주의 정책에 따라 천연자원, 은행, 그리고 보험 등을 국유화했다. 1977년에 열린 의회선거에서 라치라카가 결성한 혁명 방어 국민전선(National Front for the Defence of the Revolution)이 승리했다. 이 정당은 이후 유일한 합법정당이 되었다.

라치라카가 1982부터 1983년 재선되었는데 이 당시 정부는 자유시장 경제 정책의 채택과 정부의 역할 감소로 인한 많은 경제적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라치라카는 1989년과 1990년 또 다시 재선되었고 정부는 정당의 자유로운 설립을 허가하였다. 1991년에는 야당이 라치라카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비록 라치라카는 대통령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알버트 자피(Albert Zafy)가 주도하는 과도 정부를 설립한다. 1992년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고 여러 개의 정당이 재건된다.

1993년, 라치라카는 패배하고 자피가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1996년, 자피가 헌법을 위배했다는 주장으로 탄핵소송에 직면하였다. 비록 그가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였지만 자피는 사임한다. 그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던 라치라카는 선거에 의해 복직하게 된다.

1998년, 국민들은 새로운 헌법을 승인했는데 정부 체제를 통일된 중앙집권체제(unitary)에서 연방정부체제로 전환하여 6개주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권한은 국회의 권한을 감소시킨 반면 대통령의 권한은 강화되었다.

 
1. 마다가스카르 인들

마다가스카르의 국민들은 크게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주로 중부와 남부-중부의 고지대에 모여사는 인도네시아계 혈통과 ‘해안 사람들(Côtiers)’로 불리는 주로 해안에 사는 흑인 아프리카계 인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이들은 고지대에서 생활하며 국가 총인구의 거의 27%를 구성하는 메리나(Merina)족과 15%를 구성하는 베실레오(Betsileo)족이다. 섬에 정착했던 초기의 사람들은 말레이 폴리네시아계인들이었다. 그들은 1500년-2000년 전 사이 이 섬에서 살았고, 그들은 후에 아프리카, 아시아를 포함한 아랍인들과 유럽인의 이주민들과 혼혈이 일어났다.

마다가스카르의 역사는 강대한 3개의 왕국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 왕국들은 작은 영역이 통합되어 형성된 것이다. 그 왕국들 중 첫 번째로 사칼라바(Sakalava) 왕국은 16세기 후반에 서쪽 해안지역에서 건국되었다. 18세기 중반부터는 거의 섬 전체의 반을 통치하게 되었지만 1808년 여왕 라바히니(Ravahiny)가 죽은 뒤 분열되었다. 두 번째 왕국은 17세기에 동쪽 해안지역에서 추장들이 동맹을 맺어 만들어졌던 치탐발라(Tstambala) 동맹체다. 이 왕국은 베치미사라카(Betsimisaraka) 왕국을 세운 영국 해적의 아들로서 영국식 교육을 받은 라치미라호(Ratsimilaho)에 의해 정권이 이양되었고 또 왕국이 확대되었다. 세 번째 왕국은 중앙 고원지대로부터 15세기에 유래 되었고 바짐바(Vazimba) 원주민들을 정복한 메리나(Merina)족에 의해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메리나 왕국은 점점 커져갔고, 1791년에 베치미사라카 왕국이, 1822년에는 사칼라바 왕국이 멸망하여 메리나 왕국은 섬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유럽과의 접촉은 1500년 포르투갈 함대가 섬에 도착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작되었다. 300년 후 포르투갈, 영국, 독일, 그리고 프랑스는 섬을 파괴하며 그들의 식민지를 세우기 위해서 노력했다. 17세기 말에는 미국과 유럽의 식민지에 기반을 둔 소규모의 해적들이 인도양을 항해하는 배들을 약탈했다.

19세기 중반 무렵 메리나(Merina) 왕국의 통치자 라다마 1세(Radama I)는 특히 프랑스와 독일의 외부세력에게 마다가스카르를 개방하였다. 1817년 영국은 그를 마다가스카르의 왕으로 인정하였고 영국과 다른 유럽의 자문위원회에게 그들의 학교와 공업 그리고 군대와 기독교의 설립을 도와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한 정책은 1828년 라다마 1세가 죽은 뒤 바로 뒤바뀌게 되었고 그의 부인인 라나발로자 1세(Ranavalona I)가 나라를 상속하였다. 그녀는 거의 모든 유럽인들을 쫓아내고, 학교와 교회를 폐쇄하였다. 그러나 1861년 그녀가 죽고난후 프랑스와 영국은 다시 돌아왔다. 30년이 지난 후 프랑스와 영국은 메리나 왕조가 지배하는 마다가스카르의 섬의 통치권을 주장하였고 1883~1885년, 프랑스와 메리나 왕국 사이에 잇따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890년 영국은 영국이 이집트와 잔지바르(Zanzibar)의 통치권을 갖는 대신 프랑스가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통치권을 갖는데 동의하였다. 그리고 1895년에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 통치권으로 선언하였다. 여왕 라나발로나 1세와 국민들은 이러한 조치에 반대하였고 프랑스는 무력으로 이를 제압하였다.

   

2. 마다가스카르의 역사

1~5세기 :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함.
10~13세기 : 동아프리카의 이슬람들이 섬의 북쪽지방에 정착.

1500년 : 포루투갈의 해양탐험가인 디아고 디아스(Diogo Dias)가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한 첫 외국인이 되다.

1506~1506년 : 포르투갈이 마다가스카르 안에 있던 이슬람의 촌락을 파괴하고 무역시작.

17세기 : 메리나 왕국이 설립됨.
1643년 : 프랑스가 남부 마다가스카르에 포트 두핀(Fort Dauphin)을 건설.
1671년 : 프랑스가 포트 두핀을 포기하고 떠남.
1680~1720년 : 1680~1720년 마다가스카르가 해적들에게 중요한 거점이 됨.
18세기 : 마다가스카르에 사칼라바(Sakalava) 왕국이 만들어짐.

1787~1810년 : 메리나가 남포이나(Nampoina) 왕의 통치아래 마다가스카르 전역을 통치하게 됨.

1810년 : 라마다 1세(Ramada I)는 노예무역을 금지.
1817년 : 영국은 라마다를 마다가스카르의 왕으로 인정.

1845년 라나발로나 1세(Ranavalona I) 여왕은 영국과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치고 유럽 선교사들과 상인들을 추방.

1861년 라나발로나 여왕이 죽은 뒤 라다마 2세(Ramada II)는 프랑스 무역회사에게 이권을 넘긴다.

1869년 : 라이니라이아리보니(Rainilaiarivony) 수상은 마다가스카르에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를 승인.

1883~1885년 제 1 차 프랑코-메리나 전쟁(Franco-Merina War) : 메리나는 프랑스에 디에고 수아레즈(Diego Suarez)를 양보.

1890년 :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를 보호국으로 선언.

1895년 : 제 2 차 프랑코-메리나 전쟁 : 메리나가 프랑스의 지배를 거절한 이후 프랑스는 수도인 안타나나리보(Antananarivo)를 점령.

1896년 :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의 식민지로 선언된다.

1897년 :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의 마지막 군주인 라나발로나 3세(Ranavalona III)를 퇴위시킴.

1900~ 45년
1915년 : 민족주의 비밀 협회인 Vy Vato Sakelika(VVS)가 금지됨.

1920년 : 마다가스카르의 시민권 운동을 주도한 온건한 민족주의 운동이 프랑스에 의해 억압됨.

1940년 :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의 비시정부를 지원.
1942년 : 영국과 남아공이 마다가스카르를 정복.
1943년 : 영국은 마다가스카르를 프랑스 자유정부에 넘겨줌.

1945년 :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에게 국회를 조직할 수 있도록 선거를 치룰 수 있는 궈리를 부여.

1947년 : 독립운동이 일어남.
1948년 : 프랑스는 독립 운동에 참여한 80,000명을 진압.
1950~59년
1958년 : 마다가스카르는 정부를 갖게됨.

1960년 6월 26일 : 마다가스카르는 말라가시 공화국(Malagsy Republic)으로부터 독립. : 필베르트 치라나나(Philibert Tsiranana)가 초대 대통령이 됨.

1965년 : 치라나나가 대통령에 재선됨.
1970~79년
1971년 : 남부 마다가스카르에서 야당이 폭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됨.

1972년 : 폭동이 일어나게 되어 치라나나는 사임. : 가브리엘 라마난초아(Gabriel Ramanantsoa)의 지휘 아래 있는 군정부가 통치권을 장악.

1975년 : 디디에르 라차라카(Didier Ratsiraka) 대통령은 외국인 소유의 기업을 국영화하고 국명을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로 변경.

1982 라차라카가 대통령에 재선.
1983 라차라카 대통령이 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도입.
1991년 : 라카라차 대통령은 알버트 자피(Albert Zafy)에게 과도정부를 일임.
1992년 : 다당제가 국민투표에 의해 헌법에 명시됨.
1993년 : 자피(Zafy)가 대통령에 당선됨.
1996년 : 자피는 국회(National Assembly)에 의해 탄핵된 후, 대통령 직을 사임.
1997년 : 대통령선거 후 라차라카는 정권에 다시 복귀함.
1998년 : 새로운 헌법은 연방제를 도입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킴.
2000년 : 열대 폭풍과 홍수로 큰 피해가 발생.

   
3. 마다가스카르의 주요 정치적 인물들

.진-자퀴스 라베마난자라(Jean-Jackques Rabemandanjara ; 1913-)

마다가스카르의 정치가이며 시인. 라베마난자라는 프랑스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운동을 주장한 중요한 인물이다. Mouvement pour la Ranovation Malagache(MDRM)의 대의원으로서, 그는 프랑스에 의해 1947부터 1950년까지 투옥된 뒤 추방당하였고 그 뒤 극적으로 MDRM회원들이 조직되었고 반혁명운동에 가담한 약 80,000명의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 1960년부터, 그는 외교장관에 임명되어 치라나나 정부를 보조하였다.

 
.라마난초아(Gabriel Ramanantsoa ; 1906~1976)

마다가스카르의 장군이었던 그는 1972년에 치라나나가 폭동과 민중의 힘에 밀려났을 때 대통령이 되었다. 처음에는 부정부패에 관한 그의 행동이 인기가 있었지만 몇 번의 구테타 시도 후에 군정부에게 권력을 넘겨주었고 후에 라차라카가 권력을 승계하였다.

 
.라나발로나 1세(Ranavalona ∣; 1788~1861)

라나발로나는 그의 남편으로 첫 번째 통일된 마다가스카르의 왕이었던 라다마 1세가 죽은 후 1828년 말라가시 왕좌를 되찾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라다마의 근대유럽 정책을 파기하고 많은 교회들을 폐쇄하였다. 그녀가 죽은 뒤, 마다가스카르는 유럽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디디에르 라치라카(Didier Ratsiraka ; 1936~)

전의 해군 장교였던 라치라카는 1975년에 라마난초아의 몰락이후 마다가스카르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학생들과 중산계급으로부터 인기가 있었으며 농촌지방에서부터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는 1976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몇 개의 쿠데타를 진압하였다. 1993년 알버트 자피(Albert Zafy)가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대통령으로 있었다.

 
.필리베르트 치라나나(Philibert Tsiranana ; 1912~)

치라나나는 1959년에 초대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72년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했고, 그의 통치하에 폭동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그는 그의 지위 아래 가브리엘 라마난초아를 지명하였고 그는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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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룬다 제국(Lunda Empire)

2011. 1. 31. 13:36


중앙 아프리카의 룬다(Lunda)족은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의 남쪽, 앙골라 북주, 그리고 잠비아를 지배했던 강력한 룬다 제국을 건설했다. 룬다족은 중앙 아프리카에 정착했던 반투족의 후예다. 16세기까지 룬다족은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의 남부 지역에 작은 분리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17세기에 키빈다 일룽가(Kibinda Ilunga ; 아마 16 세기 루바 왕국과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는 루에지(Lueji)라고 불리는 여자 대추장과 결혼하여 최고의 추장이 된다. 다른 아내와의 사이에 캐어난 키빈다의 아들루셍기(Lusengi)는 루바 왕국의 정부 형태를 소개했다. 루셍기의 아들 나웨지(Naweji)는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룬다 제국의 토대를 쌓았다. 1700년까지, 룬다 제국은 무숨바(Mussumba)에 수도를 정하고 무와타 얌보(Mwata Yambo)라는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또한 지방의 행정관으로 하여금 세금을 징수하도록 했다. 이런 변화는 지방에서 무역의 성장과 함께 진행되었다. 구리, 꿀, 상아와 노예 같은 중앙 아프리카 상품은 서부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동해안을 근거로 하는 유럽인과 아랍의 무역업자들에 의해 점점 더 발전하게 되었다. 전략적 위치에 있었던 룬다 제국은 자국을 통과하는 상품에 세금을 부과하고 식량과 총과 다른 제작된 상품을 거래했다.

무역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계속 유지하고 무와타 얌보에게 바치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17세기와 18세기에 다른 룬다 집단들이 서쪽, 남쪽, 그리고 동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 룬다족 이주자들은 지금의 앙골라와 잠비아에 왕국을 세웠고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왕국은 현재의 잠비아에 세운 카젬베(Kazembe) 왕국이었다. 이 왕국의 건축은 17세기 후반에 시작되었고 무와타 얌보인 무테바(Muteba)가 남자의 아들 응곤다 빌론다(Ngonda Bilonda)에게 무와타 카젬베(Mwata Kazembe)라는 칭호를 주면서 시작되었다. 빌론다의 후계자인 카넴보(Kanyembo ; Kazember Ⅱ)는 루알라바 강 동쪽의 통치자가 되었고, 그와 그의 후계자는 현재의 잠비아까지 그 영토를 확장했다. 카젬베 왕국은 무역과 공물을 받아 1800년대에 번영을 누렸고 수도는 아프리카 대륙을 통과하는 무역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내부적인 불협화음은 룬다제국의 통치를 약화시켰고 1880년대에 제국은 초크웨(Chokwe)족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해체되었다. 벨기에, 영국, 그리고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는 룬다제 국의 영토를 식민지화했다. 포르투갈은 앙골라를, 영국은 1899년 카젬베 왕국을 합병한 북부 로데시아를, 그리고 콩고는 벨기에의 식민지가 되었다. 벨기에 식민지가 되기 전에, 현재의 콩고민주공화국은 콩고 자유국(Congo Free State ; 1885-1908년)으로서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Leopold Ⅱ)의 개인 식민지가 되었다. 콩고는 1960년에 독립되었고, 1964년에 잠비아가, 앙골라는 1975년에 독립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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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루바 왕국(Luba Kingdom)

2011. 1. 31. 13:35


루바(Luba)족은 남동부의 콩고(Congo ; 이전의 자이르로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 관련된 몇 개의 인종집단을 포함하고 있다. 루바 왕국은 중앙 아프리카의 가장 강력한 국가들 중 하나였다. 고고학적 발굴은 8세기 이후 카탕가(Katanga)지역에 계속해서 문화가 발전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정부형태가 8세기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잘 발달된 통치체계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점점 증가하는 인구와 부족한 땅은 이 지역에서 부족간에 경쟁을 유발했고 그 결과 더 크고 강력한 집단이 출현하게 되었고 강력한 군사력에 바탕을 둔 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집단이 키살레 호수(Lake Kisale) 지역 주변에 나타난 루바족이었다.

구전전통에 따르면, 루바(이후에는 칼룬두웨(Kalundwe)라고 불렸음)족의 원래 통치자는 북쪽에서 온 송그예(Songye)였다. 송그예 콩골로(kongolo ; 통치자를 의미하며 왕의 뜻)는 칼룬두웨 여왕과 결혼했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는데, 이것이 바로 루바 왕국이 되었고 그 영토는 루알라바(Lualaba) 강과 루빌라시(Lubilash) 강 사이가 되었다.

15세기에, 송가예 통치자는 북쪽에서 온 쿤다(Kunda)족에 의해 추방되었다. 음빌리 킬루헤(Mbili Kiluhe)가 이끄는 쿤다족은 무와나(Mwana) 콩골로에 의해 처음에는 환영을 받았다. 킬루헤는 무와나의 여동생 2명과 결혼했고, 그 중 한명에게서 칼라 일룽가(Kala Ilunga)라는 아들이 태어났다. 칼라 일룽가는 자라서 위대한 군인이 되었고, 루바족의 왕좌를 위협하고 콩골로에 도전했다. 그는 모계상속을 들어 그가 합법적인 통치자라고 주장했다. 콩골로는 결국 패배했고, 칼라 일룽가는 루바족에 대한 통치를 확고히 하고 쿤다 왕조를 열고 물로프웨(mulopwe)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1550년에, 루바 왕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정부를 가진 국가로 성장했다. 물로프웨는 정부를 대표하고 종교 지도자로 역할을 하였으며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는 그를 도와줄 각료인 발로프웨(balopwe)를 두고 각각 특별한 임무를 주었다. 숭구(sungu) 수상으로서 국민과 물로프웨 사이에 중재를 담당했다. 은시칼라(nsikala)는 왕이 죽거나, 편찮을 때 일시적으로 왕의 지위를 대신했다. 이나반자(inabanza)는 물로프웨의 왕권을 강화하는 신성한 의식을 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지막으로, 트위테(twite)는 군과 경찰의 지휘관이었다. 위에서 설명한 루바왕국의 장관과 모든 관직, 그리고 추장들은 칼라 일룽가의 자손들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루바족은 귀족정치 형태로 국가를 유지하였다.

1880년대에, 쿤다 왕조는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Leopold Ⅱ)에 의해 콩고 자유국(Congo Free State)으로 통합되었다. 레오폴드 2세의 통치는 이익이 많이 남는 고무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야만적이고 가혹한 통치를 하였다. 1907-1917년에 계속되었던 식민지의 통치에 반대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벨기에 정부는 1908년 벨기에 콩고(Belgian Congo)로 콩고자유주를 통치하였고 1960년에 독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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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로지 왕국(Lozi Kingdom)

2011. 1. 31. 13:34


서부 잠비아(Zambia)의 로지(Lozi) 사람들은 몇 세기 전에 번영했던 왕국을 설립하였다. 로지족은 17세기 또는 그 전에 범람원인 잠베지(Zambezi)강 북쪽으로부터 이주한 사람인 루이(Luyi)족의 후손이다. 루이 이주자들은 무왐바(Mwambwa)라는 여자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는데 그녀의 딸인, 음부와무와브와(Mbuywamwambwa)가 계승하였고 그의 아들인 음보(Mboo)가 로지의 첫 리퉁가(litunga ; 왕을 의미)가 되었다. 음보 왕의 통치 기간 동안, 로지 왕국은 주변 지역들을 정복하고 흡수 통합하여 왕국이 확장되었다. 그 당시 왕국은 음보와 그의 친척들에 의해 반독립적 상태로 통치되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아니었다. 이러한 지배형태가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되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 초에 4번째의 리퉁가인 응가말라(Ngamala) 왕에 이르러서다. 1780-1830년까지 통치한 물람브와(Mulambwa) 왕에 의해 중앙집권화된 통일된 국가가 완성되었다. 물람브와는 로지족에 의해 정복된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였고 북부와 서부 지역에서 로지 왕국으로 이주한 수많은 무리 또한 통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주자 집단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앙골라에서 살다가 쫓겨 온 음분다(Mbunda)족이다. 물람브와는 루발레(Luvale)족과 은코야(Nkoya)족 등이 국경지역에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왕국의 국경 지역에 그들을 정착할 수 있게 허락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로지 왕국을 돕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음분다족은 왕국의 경제발전과 군사력에 큰 부분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활과 화살과 같은 군사장비의 혁명과 카사바, 기장, 얌을 포함한 새로운 작물 뿐만 아니라 의료기술과 예술적인 기량에도 혁명을 불러왔다.

로지족은 물람브와의 지배 아래에서 번영을 누렸으나,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장남인 실루멜루메(Silumelume)와 차남인 음부쿠와누(Mubukwanu) 사이의 권력경쟁으로 내전이 발생하여 분열되었다. 이 전쟁은 음반다족이 지지하는 음부쿠와누가 승리하였지만 그가 왕국을 재통합하기 전에 남아프리카로부터의 소토(Sotho)족의 일파인 콜로로(Kololo)족의 공격을 받아 정복당했다. 콜로로족은 1840-1864년에 로지왕국을 지배했고 그들의 언어를 소개했다. 이후 이들은 콜로로족에 의해 추방되었던 로지족의 지도자 시포파(Sipopa)에 의해 쫓겨가게 된다. 이후 40년동안 연이은 권력경쟁에도 불구하고 로지 왕국은 계속 번영하였다. 그러나 1890-1900년에 영국과 맺은 조약에 의해 그동안 세실 로즈(Cecil Rhodes)의 남아프리카 회사(British South Africa Company)의 통치에서 벗어나 영국의 지배에 들어가게 된다.

영국은 1960년대까지 로지왕국을 지배했고, 1924년에 북부 로데시아(Northern Rhodesia) 식민지중 하나인 바로체랜드(Barotseland)로 왕국을 합병 시겼다. 1958년에, 북부 로데시아는 니야사랜드(Nyasaland)와 남부 로데시아(지금의 짐바브웨)와 함께 백인 소수가 지배하는 중앙 아프리카 연방(Central African Federation ; CAF)의 일부가 되었다. CAF는 1963년에 해체되었고, 잠비아는 1964년에 독립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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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로마와 아프리카

2011. 1. 31. 13:32


제 3 차 카르타고 전쟁(Third Punic War)에서 일어난 자마(Zama)의 전쟁이후 카르타고를 정복한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고 해외까지 제국을 확대하게 된다. 이 지역에 대한 전체적인 통제권을 얻기 위해 기원전 146년 로마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튀니지와 이집트 로마 주로 편입시키는 한편 누미디아(Numidia)를 정복한다. 지난 세기 동안 로마는 이집트에 관심을 가지고 일련의 조약을 체결함으로서 완전히 통합되었다. 이집트는 로마제국에게 농산물, 특히 곡물과 파피루스 생산품 그리고 중동, 아시아, 그리고 인도양 무역로의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제공한다.

트리폴리타니아(Tripolitania)와 키레나이카(Cyrenaica)에서 온 베르베르(Berber) 유목민들은 종종 사하라의 외곽지역을 따라 로마 정착지를 습격하였으며 어떤 땐느 멀리 떨어져 있는 리비아 해안지방과 이집트의 오아시스까지 진출했다. 이러한 습격으로부터 방어를 위해 로마는 사하라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농사가 가능한 마그립(Maghrib)지역을 정복하였다. 수비대는 국경 지역을 감시하고 요새와 도로망을 구축했다. 북아프리카의 팀가드(Timgad)는 전형적인 로마의 계획도시중 하나이다.

여러번에 걸쳐 로마와 베르베르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에 의해 북아프리카 전 지역에서 약 8 년간에 걸쳐 일어난 탁파리나스(Tacfarinas) 전투였다. 누미디아의 베르베르 왕은 로마 지배가 미치는 영토를 줄이려고 노력했으나 로마 통치 말기가 되어서야 희망을 이룰 수 있었다. 로마와 베르베르 사이의 경쟁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줄리오-클라우디안(Julio-Claudian)황제는 서쪽의 씨르타(Cirta)에서부터 남쪽의 타카페(Tacape)까지 로마의 힘을 확장시켰고 플라비안(Flavian) 황제는 시티피스(Sitifis)까지 확장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베르베르 유목민들은 국경을 넘어 낙타 대상이나 정착지를 계속 공격하였다.

로마인이 지배하는 북아프리카는 상원에서 임명한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총독은 로마에 지속적으로 옥수수를 공급해야 하는 임무가 있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은 매우 문명화되어 있었고 로마가 멸망하기 전까지 약 500여개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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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동부 아프리카의 주요 종족

2011. 1. 20. 11:36


1. 동부 아프리카의 주요 종족

팔라샤(Falasha)족 : 팔라샤인들은 비록 많은 수가 최근 이스라엘로 이주했지만 북부 에티오피아의 고지에 살고 있다. 대부분의 팔라샤인들은 에티오피아에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티그리냐(Tigrinya)어나 암하라(Amharic)어를 말하며 더 최근엔 히브리(Hebrew)어를 말한다. 팔라샤인들은 유대인이지만 최근 수백 년 동안만 세계 유대사회에 접촉을 했을 뿐이다.

암하라(Amhara)족 : 암하라인들은 대부분 북부 에티오피아의 고지에 산다. 비록 암하라인들은 에티오피아 인구의 3분의 1정도 밖에 안 되지만, 그들은 에디오피아 역사에서 과거와 현재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지배민족으로 역할을 해왔다. 암하라어는 암하라족의 언어이다. 암하라인의 대부분은 기독교도들이며 수세기동안 기독교는 암하라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파르(Afar)족 : 아파르인(또는 다나킬(Danakil))들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그리고 지부티의 사막지역에서 산다. 아파르인의 대부분은 유목민족이다. 역사적으로 아파르인들은 다양한 술탄의 지위를 형성했지만 지금은 거의 반자치적이다. 아파르인들은 무슬림이고, 또한 아파르라 불리우는 언어를 쓴다.

오로모(Oromo)족 : 오로모인(또는 갈라(Galla))들은 동남부 에티오피아와 북부 케냐에서 산다. 과거에는 그들은 많은 무슬림 왕국들을 건설하기도 했다. 오로모어는 또한 오로모라고도 불리운다. 대부분의 오로모인들은 이슬람교나 기독교를 따르고 소수는 여전히 오로모 종교를 믿는다.

소말리(Somalis)족 : 소말리족 대부분은 소말리아에 산다. 일부는 에티오피아와 북부 케냐에서 소수 종족으로 살고 있으며 아주 적은 수가 지부티에 산다. 소말리인들은 씨족에 의해 구성되는 독특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또한 소말리(Somali)라고도 불리는 언어를 쓴다. 대부분의 소말리족들은 무슬림이다.

카라모종(Karamojong)족 : 카라모종인들은 북동부 우간다에 산다. 그들은 소를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여기는 반유목, 목축인들이다. 다른 카라모종인들은 카라모종어의 다양한 방언들을 쓴다. 아주 적은 수가 기독교나 이슬람교로 개종하였고 대부분이 전통종교를 믿고 있다.

뇨로(Nyoro)족 : 뇨로인(또는 바뇨로(Banyoro))들은 우간다의 북서부 호수지역에서 산다. 그들은 이전에 부뇨로-키타라 제국(Bunyoro-Kitara Empire), 후에 부뇨로 왕국(Bunyoro Kingdom)을 형성했고 지금은 우간다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뇨로인들은 또한 뇨로라고 불리우는 언어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뇨로인들은 기독교도들이거나 무슬림이지만 뇨로의 전통종교도 여전히 믿고 있다.

간다(Ganda)족 : 간다인(또는 바간다(Baganda))들은 대부분 우간다의 북서부 호수지역에 산다. 그들은 부간다 왕국을 건설했을 때 중앙집권화된 군주국을 형성했고 지금은 우간다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간다어는 또한 간다라고도 불린다. 상대적으로 최근에 많은 간다인들이 기독교도나 무슬림이 되었지만, 간다의 전통종교도 여전히 폭넓게 믿어진다.

키쿠유(Kikuyu)족 : 키쿠유(또는 기쿠유(Gikuyu))인들은 케냐의 최대 인종 집단이다. 키쿠유인들은 식민지시대에 종종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는데 선두에 섰다. 키쿠유어는 또한 키쿠유라고도 불린다. 많은 키쿠유인들은 기독교도이고 그들만의 독립적인 교회를 세웠다. 적은 숫자가 키쿠유의 전통 종교를 따르고 있다.

동아프리카계 아시아인(East African Asians) : 거의 인도에서 온 많은 아시아인들은 식민지시대부터 동 아프리카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케냐, 탄자니아 그리고 우간다에서 작지만 영향력 있는 소수인종집단을 형성했다. 동 아프리카계 아시아인들은 여러 인도의 언어, 특히 구자라티(Gujarati)어나 펀자브어(Punjabi)를 사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스와힐리어 같은 아프리카 언어나 영어도 사용한다. 대부분의 동아프리카 아시아인들은 비록 소수는 조로아스터교(Zoroaster)를 따르지만 힌두교도거나 무슬림이다.

마사이(Maasai)족 : 마사이인들은 케냐와 탄자니아의 국경 지역에 살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소를 키우는 목축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일부는 농업에 종사하기도 한다. 마사이인들은 마아(Maa)라고 불리는 언어를 쓴다. 마사이인들은 이슬람교나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고 대부분은 그들 자신의 종교를 따른다.

후투(Hutu)와 투치(Tutsi)족 : 후투인들과 투치인들은 르완다와 부룬디의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의 문화와 역사는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혼합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투치인들은 후투인들을 지배하였지만 최근에는 힘의 균형의 깨는 많은 폭력과 전쟁이 발발하였다. 두 종족 모두 부룬디에서는 룬디(Rundi), 르완다에서는 르완다(Rwanda)라 불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후투인들과 투치인들의 대부분은 기독교도들이나, 토착 종교는 여전히 많은 신자들을 가지고 있다.

니암웨지(Nyamwezi)족 : 니암웨지인들은 중서부 탄자니아에 산다. 그들은 니암웨지어의 방언들을 말한다. 과거에 니암웨지인들은 동부 그리고 중앙 아프리카에서 장거리 무역의 선구자였다. 적은 수의 니암웨지인들이 무슬림이나 기독교도들이고 대부분은 니암웨지의 전통 종교를 따른다.

스와힐리(Swahili)족 : 스와힐리인들은 케냐와 탄자니아의 해안을 따라서 그리고 펨바와 잔지바르 같은 해안의 섬들에서 살고 있다. 스와힐리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과 아랍인, 그리고 페르시아인들의 혼혈로 생겨난 인종이다. 스와힐리인들은 인도양 무역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 결과로 스와힐리어는 동 아프라카 각지에서 공용어나 무역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스와힐리인들은 무슬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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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동부 아프리카의 역사

2011. 1. 20. 11:34

1. 동부 아프리카의 역사

 
19세기에 무역을 장려하라는 목적으로 선물로 주어진 니암웨지(Nyamwezi) 조각은 니암웨지인들이 동부와 중부 아프리카 무역의 선구자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대 에티오피아어인 게즈(Geez)어는 과거에 기도서(성경)로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1896년 아도와 전투(Battle of Adowa)에서 에디오피아가 이탈리아를 패배시킴으로서 에디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르완다와 부룬디의 후투(Hutu)와 투치(Tutsi) 사이의 인종 갈등은 동부아프리카의 최대 문제였다.

많은 왕국들이 빅토리아 호수(Lake Victoria)와 알버트 호수(Lake Albert) 사이에서 번성하였다. 이중 가장 중요한 왕국 중 하나는 부뇨로(Bunyoro) 왕국으로 16세기에 건설되었다. 부뇨로 왕은 비록 그의 역할이 거의 의식적이긴 해도, 현대 우간다 사회에서 여전히 중요한 상징이다.

빅토리아 호수와 알버트 호수사이에서 번성한 또 다른 왕국은 부간다(Buganda) 왕국으로 500년 전에 출현하여 우간다의 일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부간다인들은 탐험가 스페커(Speke)와 그랜트(Grant)의 방문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이곳에서 그림에 나오는 왕의 궁전을 보았다.

식민지 시대 이후로, 환금 작물은 동 아프리카에서 극적으로 증가하였다. 대부분의 보통 환금 작물들은 차나 커피이다.

동 아프리카는 초기 인류의 근원지이다.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300만년 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 유골은 인류의 진화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에디오피아의 랄리벨라(Lalibela)교회는 여러 세기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교회로 거대한 하나의 돌을 다듬어서 만들어진 교회다. 에티오피아는 500년이 넘는 긴 기독교 역사를 갖고 있다.

30미터가 넘는 악숨(Axum) 왕국의 기둥은 왕의 무덤을 나타낸다. 악숨 왕국은 2,000년 전에 에티오피아에서 번성하였다.

소금은 이전에 동 아프리카 사막 지역에서 중요한 무역상품이었다. 이것을 여전히 오늘날 몇몇의 암하라(Amharic) 인들의 여전히 통화로써 사용하고 있다. 벽돌 모양으로 사막에서 잘라서 운반한다.

1950년대, 거대한 규모의 수용소가 케냐의 마우 마우(Mau Mau) 폭동의 협력자라고 주장되는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 설치되었다. 마우 마우는 반식민주의 저항 운동이었다.

19세기에 은과 금으로 만들어진 빗은 잔지바르(Zanzibar) 술탄을 위해 디자인되었다. 1800년대에 부유한 잔지바르 술탄왕국은 노예무역으로 매우 많은 이익을 얻었다.

동물을 사냥하는 사파리(Safari)는 동 아프리카의 풍부한 야생동물의 수를 급격히 감소시켰다. 20세기 초에 유럽과 미국의 사냥꾼들이 코끼리의 엄니, 아프리카 들소의 뿔, 그리고 사자가죽 같은 기념물을 찾기 위해 이 지역에 몰려들었고 절정을 맞이했다.

세계의 많은 곳에서 사람들이 동아프리카에 무역을 하기위해 방문하였다. 말린디(Malindi)의 술탄은15세기에 중국황제에게 기린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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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동부 아프리카의 아시아인

2011. 1. 20. 11:33

1. 동부 아프리카의 아시아인

동아프리카의 소수민족으로서 아시아인의 규모는 작지만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케냐의 나이로비(Nairobi)와 몸바사(Mombasa)는 가장 큰 동 아프리카 아시아인 사회를 가지고 있지만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과 잔지바르(Zanzibar)도 중요한 지역이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20여년 만에 우간다로 다시 모이고 있다.

아시아인들은 수백 년 동안 동아프리카에서 살아왔다. 이 지역은 무역업자들을 매료시켰고 다우(Dhow ; 짐을 옮기는 배)선은 상아, 금, 노예, 향신료를 인도산 직물, 철제품과 교환하기 위해 인도, 아라비안 반도, 그리고 동아프리카를 왕래했다. 그러나 오늘날 아시아인 공동체의 대부분은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몸바사와 우간다를 연결하는 동 아프리카 철도 건설(1896-1902)을 위해 이곳으로 온 사람들이다. 동아프리카의 아프리카인 노동력은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해 노동력으로서 이용할 수 없었으며 또한 적대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겨졌고 이런 이유로 약 32,000명의 인도인 노동자들이 인도에서 동아프리카로 유입되었다. 계약 노동자로 동아프리카에 온 인도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풍토병에 걸려 죽기도 했고 계약이 만료된 후 다시 인도로 돌아갔다. 하지만 약 7,000명의 인도인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아프리카에 정착했는데 이들은 그들의 고향인 인도와 긴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몇몇 인도인들은 철도 노동자로 계속 일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상인, 인도인 노동자들을 위한 요식업을 시작했고 얼마 안가 아프리카인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확장시켜갔다. 동아프리카의 사업기회는 1920년대에 인도인들의 이주를 더욱 촉진시켰으며 그들의 무역활동은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이르게 되었다.

동아프리카 인도 국민의회(East African Indian National Congress)는 아시아인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1914년에 만들어졌다. 이들의 요구는 입법의회(Legislative Council)에서 동등한 대표권과 특히 케냐 고지대(Highland)의 토지 소유권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주장했고 유럽인과 아시아인을 분리하는데 대해 반대했다. 그들의 불만은 주로 그들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는 유럽 이주민 정착자 사회를 겨냥하였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아프리카인보다 더 우월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독립 당시 아시아 사람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아시아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시민권을 갖던지 아니면 영국의 영주권을 가질 수는 없지만 영국국민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새로운 독립국가의 시민권을 갖는다는 것은 새로운 국가에 충성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많은 아시아인들은 아프리카에서 그들의 안전이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의 보호가 반아시아인 정서를 막아주었다고 믿고 있었다. 새로 독립한 국가들의 아프리카화(Africanization) 정책은 시골지역에서 아시아인들의 상업 활동을 못하게 막았지만 도시지역에서는 이들의 상업적 능력과 기술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가게들이 국유화되고 직장에서 쫒겨났다. 케냐에서는 변화가 천천히 발생하여 따라 분열은 피했다. 하지만 우간다에서의 변화는 갑작스럽고, 혹독했다. 1972년,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Idi Amin Dada Oumee)은 약 8만 명에 이르는 아시아인 공동체에 추방령을 그들의 사업체를 인수했다. 비록 이러한 추방정책이 처음에는 넓게 지지를 받았지만 우간다의 경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요웨리 무세베니(Yoweri Museveni) 대통령은 우간다에 아시아인이 복귀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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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동부 아프리카

2011. 1. 20. 11:31

1. 동부 아프리카

 
탄자니아(Tanzania)와 케냐(Kenya), 그리고 에티오피아(Ethiopia)를 포함한 그레이트 아프리카 리프트 밸리(the Great African Rift Valley)는 고대 인류의 화석이 풍부하게 발견되는 지역으로 인류학자들이 동아프리카가 인류의 기원지라고 주장하고 있는 지역이다. 역사시대에 고대 이집트(Ancient Egypt)는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며 그 당시 가장 가치 있는 상품이었던 유향(乳香)(frankincense : 동아프리카․아라비아산 감람의 일종. 이스라엘 민족이 제례에 쓰던 고급 향료)과 몰약(沒藥 ; myrrh ; 미르라)을 생산하였다. 현재의 소말리아(Somalia)지역은 “푼트의 나라(Land of Punt)”로 알려진 지역이었다. 케냐와 탄자니아의 해안지역은 아라비아(Arabia), 페르시아(Persia), 인디아(India) 심지어 중국까지도 교역하던 초기 동부 아프리카의 상업 도시국가들이 성장하였다. 하지만 동부 아프리카는 현재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가난하다. 그 이유는 다른 지역과 달리 그들의 경제를 부흥시켜줄 수 있는 천연자원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동부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의 삶을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가 적은 생존형 농부로 살고 있다. 농부들은 기근과 같은 큰 어려움을 가져오는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에 지배를 받는다. 개인당 GNP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브룬디(Burundi) 그리고 말라위(Malawi)가 가장 빈곤한 국가로 분류된다. 1990년대 말에 셋으로 분리된 소말리아(Somalia)의 통계숫자는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효과적인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소말리아의 경제는 붕괴되었다. 하지만 2000년에 소말리아 남부 지역에 과도 의회(transitional assembly)가 설립됨으로서 다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푼트랜드(Puntland)라 불리는 지역인 북동지역은 소말리아의 재구성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머지 분리주의자들은 소말리아 랜드(과거 브리티시 소말리아 랜드(British Somalialand))가 분리된 채로 남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전 그리고 다른 분쟁은 몇몇의 국가들에게 경제적 발전의 실패를 가져다주었다. 1952년에 에티오피아와 합병된 에리트리아(Eritrea)는 1993년에 오랫동안 끔찍하게 지속되었던 내전이 끝나면서 독립하게 되었다.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의 불편한 관계는 국경 분쟁이 발생한 1998년까지 지속되었고 평화계획이 채결된 2000년에 가서야 종식되었다. 브룬디와 르완다(Rwanda)는 후투(Hutu)와 투치(Tutsi) 두 인종간의 소름끼치는 분쟁에 의해 크게 흔들렸다. 많은 난민들이 무자비한 도살로부터 달아났지만 많은 수의 난민들이 자이르(Zaire ; 현재의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불안정을한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

과거 영국령 동부 아프리카(British East Africa)에 속했던 우간다(Uganda) 또한 비교적 이웃 국가들에 비해 안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쟁들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1990년대에 보다 자유로운 경제체제를 받아들인 탄자니아는 지금 현재 발전을 거듭하여 케냐의 상황에 근접하고 있다. 케냐는 독재적인 일당제 체제를 유지하였지만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채택하여 동아프리카의 관문 국가가 되었다. 1960년대에 이 3개의 영국령 동아프리카국가들은 동부아프리카 연합(East African Community)의 창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깊은 정치적, 경제적 차이는 범아프리카 협력(pan-Afriacn cooperation)의 기회를 어렵게 했다. 하지만 1999년에 새로운 협약이 케냐, 탄자니아, 그리고 우간다에 의해 서명되었고 이 계약의 목표는 관세 연합, 공동시장, 화폐 통합 그리고 궁극적으로 정치적 통합을 위한 것이다.

말라위(Malawi) 또한 하스팅즈 카무트 반다(Hastings Kamuzu Banda)의 독재아래 고통 받았다. 하지만 1993년에 다당제가 복구되고 1994년에 선거가 실시되어 반다가 물러났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 100장면 대량학살, 동부아프리카, 분쟁, 소말리아, 아프리카, 케냐, 학살

25. 독일의 아프리카 지배

2011. 1. 20. 11:30

1. 독일의 아프리카 지배

 1895년에 아프리카에 영향을 주었던 독일의 식민지배는 4군데의 주요 지역에 집중되었다: 토고랜드(Togoland), 카메룬, 독일령 동 아프리카(German East Africa), 그리고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German South West Africa).

 
1.1.1. 1. 독일령 카메룬(German Cameroons)

노예무역을 근절시키고자 노력했던 영국 선교사들은 19세기 초반에 현재의 서부 카메룬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1858년에 영국인들은 유럽인들의 최초의 영구적인 정착지인 빅토리아(Victoria)를 이 지역에 건설했다. “아프리카에 대한 분할(scramble for Africa)”시기에 영국이 아닌 독일이 이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갖게 되었다. 독일은 1884년 7월 12일에 이 지역에 대한 보호령을 선포했고 내륙지역으로 통치지역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때 얻게 된 새로운 영토를 카메룬(Kamerun), 혹은 독일령 카메룬(German Cameroons)이라 불렸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함께 그 영토는 영국과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두개의 나라로 분리되었다.


1.1.2. 2. 독일의 동부아프리카(German East Africa)

1890년대와 제 1차 세계대전 사이에 현재 르완다(Rwanda)와 부룬디(Burundi), 탄자니아(Tanzania)의 대륙지방과 모잠비크의 일부분이 독일의 동부아프리카에 포함되었다. 르완다와 부룬디는 르안다(Ruanda)와 우룬디(Urundi)를 형성하고 있었고 탄자니아는 탕가니카(Tanganika)로 알려져 있었다. 1891년에 독일 정부는 상업적인 독일 동아프리카 회사(German East Africa Company)로부터 그 지방의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식민지는 1907년까지 독일의 완전한 지배를 받고 있지 못했다. 전쟁기간 동안에 독일령 동부 아프리카는 영국이 점령하게 되었다. 베르사유 협정(Versailles Treaty ; 1919년)은 벨기에로 넘어간 르완다-우룬디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독일 식민지를 영국의 통치아래 두게 했다.

독일령 동부 아프리카에서 독일의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취해진 경제변화는 1905년 독일의 통치에 반대하는 마지 마지 반란(Maji Maji rebellion)으로 나타났고 결과적으로 탄자니아 부족들의 단결을 초래했다. 마지 마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독일군은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고 교수형을 집행하여 아프리카인들을 살해했다.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령 동부 아프리카에서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아스카리(Askari)라는 군인들로 차출되어 식민지 군대에 끌려가 싸웠다.

 
1.1.3. 3.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German Southwest Africa)

1884년에 독일은 남서 아프리카(Southwest Africa ; 오늘날의 나미비아(Namibia))를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남서 아프리카에서의 독일 통치는 아프리카 전체에서 가장 잔혹한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 후 몇 십 년간 반란은 아주 철저하게 진압되어서 헤레로(Herero)족은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고 집단 수용소가 세워졌는데 식민지 정착 자들은 아프리카인 노동자들을 매우 잔혹하게 다루었다. 서기 1915년에 남아프리카(South Africa)가 남서 아프리카를 점령하여 1990년까지 그 곳에 불법적으로 통치했다.

핸드릭 비트부이(Hendrik Witbooi)는 헤레로족에 저항하여 독일에 협력하였던 그는 그 후 독일 통치에 저항하여 나마(Nama)족을 이끌었다. 오랫동안 지속된 투쟁 끝에 그는 1905년에 전사했다.

1904년의 반란 후에 독일 당국은 헤레로(Herero)족의 대부분을 학살했다. 4분의 3 이상이 대학살의 결과로 사망했는데 학살당하거나 굶주려 죽었다.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의 아프리카인 포로들은 목에 사슬로 묶여진 상태로 농장으로 끌려갔다.

 
1.1.4. 4. 토고(Togo) 공화국

역사가들은 현재 토고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조상이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자 아니면 아산테(Asante)와 다호메이(Dahomey) 사이에 일어난 전쟁의 피난민으로 믿고 있다.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찾고 있던 포루투갈 선원들은 15세기 후반에 이 지역에 도착했다. 노예무역이 시작되자마자 남쪽 토고는 노예해안(Slave Coast)으로 불리었다. 노예해안은 남서쪽 나이지리아(Nigeria)부터 현재 가나의 볼타(Valta)강 입구 주변까지 뻗어 있었다.

19세기 중반부터 독일 무역가와 선교사들이 토고에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1884년 독일은 해안지역에 보호령을 만들었고, 1899년 그들은 독일령 토고랜드(German Togoland)라 불리는 식민지를 설립하였다. 세계 1차 대전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령 토고랜드를 점령하였고, 1922년 국제연맹은 서쪽 1/3지역은 영국이 다스리고 동쪽 2/3는 프랑스가 다스리게 하였다. 1946년 UN은 영국과 프랑스령 토고랜드에 신탁통치를 하였다.

1956년 영국령 토고랜드 사람들은 황금해안(Gold Coast)으로 포함되는 것에 대해 국민투표를 하였고, 1957년 황금해안지역이 가나로 독립하였을 때 합병되어졌다. 하지만 1956년 프랑스령 토고랜드는 프랑스연합(French Union) 내에서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프랑스는 토고의 진보당(Progressive Party)의 당수인 니콜라스 그루니츠키(Nicolas Grunitzky)를 수상으로 임명하였고 그는 토고가 프랑스 연합 내에 남기를 원했다. 하지만 1958년 토고의 통일당(Unity Party)의 수장, 실바누스 올림피오(Sylvanus Olympio)가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올림피오는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였고 1960년 4월 27일에 독립을 성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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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 100장면 남서아프리카, 독일, 동부아프리카, 식민지배, 아프리카, 지배, 카메룬, 토고, 토고공화국

24. 독립을 위한 투쟁

2011. 1. 20. 11:28


1830년대 초에 알제리는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 식민당국은 대부분의 비옥한 토지를 점령하고 원래의 주인들을 쫒아냈다. 알제리 사람들은 억압받고, 시민권을 유린당했다.

1945년 이후 아메드 벤 벨라(Ahmed Ben bella)를 비롯한 젊은 민족주의자들은 은 민족자유전선(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 ; National Liberation Front ; NLF)을 결성하고 자유를 위한 무장투쟁에 돌입한다. 적은 수의 인원과 형편없는 무기들이었지만, 그들은 프랑스 군대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을 했다. 군사적 행동과 더불어 정치적으로는 정치적 단체를 조직하고 시위를 통하여 독립에 대한 의지를 고취시켰다. 프랑스는 이러한 반대세력을 없애기 위해 폭력적 방법으로 탄압하였고 약 7만 명의 군대를 투입시켰다. 프랑스 정착민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고 경제적 손실이 심각해지자 정부와 드 가울레(De Gaulle)대통령에게 전쟁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드 가울레는 FLN과 협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알제리는 1962년 6월 독립하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길고, 피로 물든 해방전쟁중 하나는 케냐의 마우 마우(Mau Mau) 운동이었다. 케냐가 식민지가 되었을 때 백인 정착자들은 케냐의 가장 큰 종족집단인 키쿠유(Kikuyu)족이 살고 있던 비옥한 고지대(Highlands)를 차지했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키쿠유족들은 보호지로 내몰렸고 부과된 세금을 내기 위해 백인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키쿠유족은 자신의 땅과 자유를 찾기 위해 무장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1952년 키쿠유족 게릴라들은 아버데어(Aberdare) 산과 케냐 산의 깊은 숲 속에 본거지를 만들고 무장 저항을 시작했다. 데다니 키마티(Dedani Kimathi)가 이끌었던 마우 마우 투쟁은 영국이 반란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서 더욱 더 강력한 저항을 벌이게 되었다. 증가하는 폭력과 사상자로 인해 영국의 여론은 식민지의 정부에 반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정치적 협상을 벌이도록 움직였고 최초의 자유투사였던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를 석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조모 케냐타는 1947년 이래로 토지와 직업이 없는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케냐 아프리카 연합(Kenya African Union)의 지도자가 되었고 1952년에 감옥에 수감되었다. 1961년 조모 케냐타는 감옥에서 석방되고 케냐는 1963년 독립을 이루어 낸다.

중부 아프리카에서는 남부 로데지아의 백인 정착자들이 마치 남아공의 보어인들처럼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아프리카인들은 이들에 대해 백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토지를 포기하도록 저항하고 있었다. 1965년 이안 스미스(Ian Smith)가 주도하는 과격한 백인 정부 하에 로데지아는 영국에 반란을 일으켜 그들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로데지아 정부는 아프리카인들의 어떠한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 경찰국가를 수립 한다. 아프리카 인들 역시 남부 로데지아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of Southern Rhodesia ; ANC),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동맹(Zimbabwe African People's Union ; ZAPU), ZAPU에서 떨어져 나온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동맹(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ZANU)같은 정당을 수립한다. 1966년 무장투쟁은 짐바브웨와 모잠비크에서 훈련을 받은 게릴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전쟁은 백인정부가 총선을 받아들인 1980년까지 지속되었다.

포루투갈은 프랑스처럼 동화정책을 실시했지만 아프리카인들이 어떤 권리나 자유를 갖는 것을 거부했다. 기니-비소(Guinea-Bissau), 앙골라 그리고 모잠비크 등에서 아주적은 아프리카인들이 동화되었을 뿐이고 대부분은 소위 원주민(undigenas)로 남아있었다. 3곳의 식민지에서 1956년과 1962년 사이에 저항단체가 조직되었는데 기니-비소에서 기니와 케이프 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African Party for the Independence of Guinea and Cape Verde ; PAIGC)가 앙골라에서 MPLA가, 그리고 모잠비크에서 FRELIMO가 조직되었다. 이 세 조직은 무장투쟁조직으로 변화해 1961년 앙골라에서, 1963년 기니에서, 그리고 1964년 모잠비크에서 각각 해방전쟁을 일으켰다. 이 조직의 활동은 극도로 폭력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결국 기니는 1974년에, 앙골라와 모잠비크는 케이프 베르데(Cape Verde)와 상 토메(São Tomé)와 함께 1975년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나미비아는 1945년이후 남아공의 통치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1959년 조직된 남서 아프리카 연합(South West African Union ; SWANU)과 1960년에 조직된 남서 아프리카 인민조직(South West African People's Organization ; SWAPO)이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아프리카 단결기구(Organization for African Unity ; OAU)와 UN이 남아공이 나미비아의 통치권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나미비아는 결국 1990년에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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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대이주(Great Trek, 1836-1846)

2011. 1. 20. 11:27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에서 흑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정책의 시행과 함께 이루어진 영국화 정책은 보어인들이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북쪽으로의 이주를 촉진시켰다. 영국 통치자들의 정책은 흑인들 혹은 “햄의 후손들”의 노예화를 합법화 시켰던 캘빈교도의 기독교적 가치관과 갈등상태에 놓이게 했다. 1809년의 호텐토트 법(Hottentot Code)은 코이산족과 다른 흑인들에게 고용과 거주의 증거로써 통행증을 가지고 다니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예무역의 종말은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강화됨으로서 50번 조례(Ordinance Fifty)의 신설과 호텐토트 법의 폐지로 나타났다.

북쪽으로 이루어진 대이주(Great Trek)는 보어인 공동체가 현재 아프리칸스(Afrikaans)로 알려진 네덜란드어의 방언을 사용하기 시작한 1836년 무렵에 시작됐다. 대이주는 계속해서 이루어졌으며 내륙지방에서 그들의 경쟁자들인 영국과 원주민 아프리카인들로부터 벗어나 빈 땅을 갖는 것이었다. 이들은 오랜지 강을 건너 바소토를 피해 타바 은추(Taba 'Nchu) 근처에 집결했다. 일부는 펠트(Veld)를 가로질러 나아갔고 은데벨레(Ndebele)족의 왕인 음질리카지(Mzilkazi)에 의해 공격받았다. 1836년 베그콥(Vegkop) 전쟁 이후 피터 레티프(Piet Retief)가 이끄는 사람들은 나탈로 이동했다.

림포포 강을 건너 북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음질리카지와 경쟁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1837년 보어인들은 은데벨레를 다시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레티프는 나탈에서 줄루족의 왕인 딩가네(Dingane)와 협상을 벌여 땅을 받기로 하였으나 딩가네의 약속위반과 공격으로 죽음을 당했다. 1838년 음군군들로브(Mgungundluvu) 근처의 피의 강(Blood River) 전투에서 보어군은 딩가네를 패배시켰다. 평화조약의 조건은 나탈과 줄루랜드의 투겔라강을 가로지르는 길고 좁은 땅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았다. 또 다른 이주자들은 나중에 벤다(Venda)족에 의해 쫒겨나지만 북쪽으로 이주하여 라이덴베르그(Lydenberg), 오링스타트(Ohrigstad), 그리고 사우판스베르그(Soutpansberg)에 정착했다. 그러한 저항에 대해 보어인들은 투겔라(Tugela)의 남쪽지방에 정착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나탈리아(Natalia) 공화국, 오렌지 자유국(Orange Free State), 그리고 트란스발(Transvaal) 공화국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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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다호메이(Dahomey)

2011. 1. 17. 14:37

1. 다호메이(Dahomey)

다호메이는 서아프리카의 왕국으로 같은 이름으로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다. 1625년 폰(Fon)족은 지금의 베닌 중부 지역에 있는 아보메이(Abomey)라는 곳에 왕국을 설립했다. 이 국가를 폰 다호메이(Fon Dahomey)라고도 부른다. 아가자(Agaja) 왕의 통치시기(1708-1732)에 번영을 누렸다. 잠시 동안 다호메이 왕국은 요루바(Yoruba)족의 오요(Oyo)왕국에 지배를 받았지만 1850년 중반에 독립하였다. 다호메이는 야자 기름과 노예무역으로 이익을 얻었지만 프랑스는 1889년에 다호메이의 연안지역을 빼앗았다. 1982년에 왕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다호메이는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다.

1.1.1. 1. 폰(Fon)족

다호메이(Dahomey) 왕국의 폰(Fon)족의 세력이 최고조일 때 약 25만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에 의해 왕과 관료들이 정치를 지배한 상황에서 다호메이는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며 19세기말까지 유럽인들의 침투와 정복야욕에 대해 성공적으로 저항했다. 폰 왕국은 알라다(Allada) 전사집단이 점차적으로 현재의 아보메에(Abomey)와 같은 내륙 깊숙한 곳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졌을 때인 17세기에 세워졌다. 아보메이에서 폰 왕국의 첫 번째 통치자가 그가 정복한 지방의 추장이나 통치자의 무덤 위에 왕궁을 건설하였고 후에 이 전통은 계속되었다. 가장 훌륭한 통치자였던 카리스마적인 인물 아가자(Agaja) 왕은 1708년부터 1732년까지 그의 왕국을 가장 강력하게 통치했다. 다호메이왕국은 아프리카 왕국들 중 훌륭한 상비군을 갖추고 있었는데 18세기 초에 약 3,000명을 19세기 중반에는 약 12,000명의 군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약 2,500명의 용맹한 여자 전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여자 전사들은 왕을 개인적으로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유럽인 무역업자들로부터 무기를 획득하게 된 폰 왕국은 그들의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해안에 대한 통제는 폰족에게 막대한 노예무역의 이익을 보장했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국민을 보호할 수 있게 했다. 소위 ‘노예 해안(Slave Coast)' 지역에 위치한 폰족의 항구들은 유럽, 미국, 그리고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삼각무역의 중요한 기지였다. 예를 들어 18세기 후반에 우이다(Ouidah)항구는 매년 40-50척의 독일,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배들이 무기와 기타 상품을 수입하고 노예를 선적하기 위해 드나들었다.

야자 기름은 노예무역이 금지된 이후 중요한 수출품목이 되었다. 그러나 야자 기름 가격 하락은 다호메이의 경제를 약화시켰고 1889년 프랑스가 막강한 군사력으로 해안지방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따라 그렐레(Glele)왕은 자살하고 그의 아들인 베한진(Behanzin)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베한진 왕과 그의 군대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1892년 다호메이는 프랑스에 점령당했다. 이후 프랑스는 지역의 추장을 이용해 통치와 행정을 했다.


1.1.2. 2. 다호메이/베닌의 역사

1625년 : 아보메이(Abomey)의 다코(Dako) 왕은 현재의 베닌에 다호메이(Dahomey) 왕국을 건설

1807년 : 영국은 다호메이의 경제적 위기 때문에 노예무역을 금지.

1851년 : 프랑스는 다호메이와의 무역조약을 체결.

1904년 : 프랑스는 다호메이 왕국과 합병하고, 프랑스령 서아프리카(French West Africa)로 만듬.

1946년 : 다호메이는 프랑스의 해외영토로 편입됨.

1958년 : 다호메이는 프랑스에 의해 자치 정부의 지위를 받음.

1960 8. 1 : 다호메이가 독립함.

1960-1972년 : 군사 구데타로 인해 정부가 자주 바뀜.

1972년 : 마티에우 케레코우 장군(Gen, Mathieu Kérékou)은 군사 구데타로 대통령이 됨.

1975년 : 다호메이는 베닌으로 개명. 막스 레닌주의(Marxist-Leninism)가 소개됨.

1989년 : 막스 레닌주의 이념이 공식적으로 폐기됨.

1990년 : 케레코우의 정부가 세력을 읽고 정치 정당이 합법화됨.

1991년 : 니체폴레 소글로(Nicephore Soglo)가 베닌의 첫 선거에 대통령으로 선출됨.

1996년 : 케레로우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함.

1997년 : 노동조합이 정부의 경제자유화조치를 지지

2000년 : 케레코우가 대통령으로 재당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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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 100장면 dahomey, 다호메이, 베닌, 서아프리카, 아프리카, 폰족

21. 다르푸르(Darfur)

2011. 1. 17. 14:36

1. 다르푸르(Darfur)

 다르푸르(Darfur)는 수단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과거에는 술탄이 지배하는 독립된 국가였다. 최초의 다르푸르 통치자 다주(Daju) 또는 다가(Daga)는 기원전 4,000년 전에 고대 이집트가 태동할 무렵에 통치를 시작했다. 툰주르(Tunjur) 또는 툰구루(Tungur)의 뒤를 이어 다자(Daja)가 통치권을 물려받았다. 서기 900~1200년에 기독교가 전해지지만 서쪽에서 이슬람교를 믿던 카넴-보르누 제국이 동쪽으로 진출함에 따라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13세기에 다르푸르는 카넴-보르누 제국의 한 주가 되었다. 1640년경부터 1916년까지는 케이라(Keira)족이 다르푸르를 지배하였고 다르푸르는 이슬람을 전적으로 받다들였고 또 독립을 회복하게 되었다.

1870년에 이집트에 의해 정복되고 이후 잠시 동안 알-마디(al-Mahdi)에게 정복당한다. 알-마디의 지배가 끝난 뒤에 다르푸르는 영국-이집트 수단(Anglo-Egyptian Sudan)으로 합병되었다. 처음에는 술탄이 그의 통치권을 갖게 되지만 1915년 반란을 일어난 1년 만에 살해당한다. 오늘날 다르푸르는 가브 다르푸르(Gharb Darfur), 야눕 다르푸르(Janub Darfur), 그리고 사말 다르푸르(Shamal Darfur) 등 3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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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 100장면 Darfur, 다르푸르, 수단, 술탄, 아프리카

20. 누비아(Nubia)

2011. 1. 17. 14:33

1.  누비아(Nubia)

누비아는 현재의 남부 이집트와 나일 강 제1폭포에서부터 수단의 수도인 카르툼(Khartoum)까지 남쪽으로 그 세력이 뻗어 있었다. 누비아 왕국은 기원전 3200년경부터 기원후 1500년경까지 나일강 연안을 따라 발전했다.


1.1.1. 1. 누비아 문명

누비아에서는 여러 문명이 발생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sub-Saharan Africa)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3200년쯤 출현한 쿠쉬(Kush)왕국이다. 기원전 약 2400년쯤, 쿠쉬 왕국은 그 세력을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900년 후에, 쿠쉬왕국은 고대 이집트에 의해 정복당한다. 누비아인들의 그림과 조상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무덤에서 발견되고 있다.

기원전 약 920년쯤, 나파타(Napata ; 고대 왕국 쿠쉬의 수도-나일 강 제4폭포에서 하류 쪽인 지금의 수단 북부지방 쿠라이마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음.)에서 누비아 왕들의 왕조가 누비아 왕국처럼 이집트로부터 독립적으로 통치를 하기 시작했다. 피앙키(Piankhy ; 기원전 751-712년) 왕의 통치 아래, 이집트를 정복하고 누비아는 그 영토가 최고조에 다다랐다. 이러한 발전은 타하르카(Taharqa ; 기원전 683-663년) 왕의 통치시기에 아시리아 인(Assyrians)들에 의해 침략 당하게 된다. 기원전 671년, 누비아인들은 수도인 멤피스(Memphis)를 포함해 대부분의 이집트 지배권을 잃고, 기원전 657년에는 모든 지배권을 아시리아 인들에게 빼앗기게 된다.

누비아의 수도는 기원전 300년경에 나파타에서 메로에(Meroe ; 나일 강 연안에 있는 수단의 도시로 메로에 왕국의 수도. 기원 후 4세기경 에티오피아 악숨 왕국의 침략으로 사라진 도시로 고고학적 매우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음.)로 옮겨졌고, 강력한 메로에 왕국(Meroitic Kingdom)이 출현한다. 메로에는 철 제작에 있어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후 324년에 메로에 왕국은 에티오피아의 악숨(Ethiopian Axumite Kingdom)왕국에 의해 무너진다.

메로에 왕국이 멸망한 이후 누비아는 노바티아(Nobatia), 마쿠리아 또는 마쿠라(Makuria 또는 Makurra) 그리고 알로디아 또는 알와(Alodia 또는 Alwa)라는 세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575년과 599년 사이에 마쿠리아는 노바티아를 병합하고 더 큰 동골라(Dongola 또는 Dunqulah)왕국을 일으킨다. 이 왕국은 15세기에 아랍인들에 의해 멸망했다. 알로디아는 1500년 경에 오늘 날의 수단에 있었던 더 먼 남쪽의 푼지(Funj)왕국으로부터 침략당하고 무너졌다.

메로에 문자는 고유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문자와 그림 상징이 함께 사용되었다.


1.1.2. 2. 고고학적 유물

고고학자들은 백 여 개가 넘는 누비아인 고분들을 발견했다. 가장 최초의 무덤은 300년-40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는데 큐스톨(Qostol ; Ballana-Qustul, Ancient Egypt. 발라나-쿠스툴, 구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 가장 최근의 것은 500년-55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발라나(Ballana)에서 발견되었다. 금과 은으로 만든 누비아 왕관은 발라나에 있는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이 왕관은 수단의 고대 믿음을 그려 넣었다. 이런 현장들은 바로 나일 강의 두 번째 폭포의 북쪽지역으로 오늘 날의 이집트에 위치하고 있다. 그들은 메로에, 특히 노바티아 왕국이 멸망한 이후 누비아 지역의 문명화에 기여했다. 이 지역들은 아스완하이댐(Aswan High Dam ; 이집트 아스완주에 있는 댐으로 나일 강의 홍수조절과 관개용수 확보를 위해 1960년에 착공을 하여 1971년에 완공된 높이 111m, 3.6km 길이의 댐.)의 건설로 인해 침수되었다.

무덤들은 2m에서 12m 정도의 흙무더기로 만들어진다. 이런 흙무더기 언덕들 아래는 진흙 벽돌무덤의 잔해들이 있다. 대다수가 분명히 왕족들의 무덤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대규모의 사람들, 말, 낙타, 그리고 개들은 그들의 주인들과 마님들을 따라 죽음을 맞았다. 무덤들은 금과 은으로 만든 보석, 은 가공품과 철기 가공품, 그리고 접는 탁자와 의자를 포함한 많은 청동 물품들과 같은 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스, 로마 그리고 이집트에서 수입된 물품들이 발견되고 있는 사실은 누비아인들이 다른 세계와 교역에 종사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비아는 6세기에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이후 만들어진 무덤에서는 기독교 비문을 담고 있었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많은 성의 잔해와 기독교 교회의 옛터도 발견하였다. 누비아인들은 대부분 그들의 교회를 벽돌로 만들었지만 어떤 것들은 돌로 만들기도 했다.

나콰(Naqa)에 있는 사자 신전(Lion Temple)의 북쪽 문은 적을 괴롭히고 있는 아마니토레(Amanitore) 여왕을 그려 넣고 있다. 이 메로에 시대의 신전은 아페데마크(Apedemak)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현대적인 누비아의 집들은 누비아 시대의 역사적인 상징물을 이용하여 장식되거나 칠해지고 있다. 아스완 하이 댐이 건설된 1960년대 이후 많은 누비아의 유물이 물에 잠겼고 누비아의 후손들은 이집트와 수단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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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 100장면 Nubia, 누비아, 아프리카

19. 농업의 발전

2011. 1. 17. 14:30


아프리카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서 식량을 획득해 왔다. 초기에는 수렴과 채집을 하였지만 중기 석기 시대 말에는 경작을 하기 시작했다. 농경기술이 지금의 이란, 이라크, 시리아에서 시작되었고, 아프리카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에 나일 계곡을 따라서 전해지기 시작했는데 수수, 기장, 그리고 얌같은 작물들이 재배되었다.

기원전 5,000년경까지 본격적인 농경사회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유추 해볼 때 나일 강유역의 농경산업은 수렵채취 생활과 병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에티오피아의 고지에서 시작된 가축사육도 이 시기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염소, 양, 그리고 소의 사육은 아마도 북동지역에서 체체(tsetse) 파리가 없는 사하라 이남지역으로 전파되어졌다고 유추되어진다. 후기 석기 시대부터 서부와 북동지역에서 여러 종의 소가 등장했고 제부(Zebu)나 상가(Sanga)같은 종은 인구증가가 일어났던 초기 철기 시대에 동아프리카나 중부 아프리카에 소개됐다. 카트웨(Katwe)와 빅토리아(Victoria)호수에서 “미늘이 있는 뼈(barbed bone points)”가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낚시는 아주 중요한 활동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탄자니아의 콘도아(Kondoa) 지역의 암벽화는 인간이 원시농경사회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는 얌, 기름야자나무, 감자, 그리고 세아(shea) 버터나무 등으로 식량생산이 증가하였다. 이들은, 신세계에서 수입된 옥수수와 카사바(cassava)처럼 특정한 지역에 안정된 정착지의 출현을 이끌었다.

또한 아프리카는 바나나, 사탕수수, 감귤류의 과일 같은 농작물이 도입되어 제 2의 농업혁명을 맞이했다. 남동아시아가 원산지인 바나나는 아마 기원후 300년 경에 인도네시아 항해자들로부터 소개된 것으로 보이는데 우간다와 동부와 중부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식량자원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대략 700년경 아시아의 쌀이 아랍 선원들에 의해 소개되었으며 사하라의 북부 지역에서는 보리와 밀이 재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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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노예(Slavery)

2011. 1. 11. 11:42

 
16세기 초기에 카리브 해의 유럽인 이주자들과 중앙아메리카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과 유럽인 죄수들에게 광산과 플랜테이션 농업 지역에서 강제노동을 시켰다. 이런 식으로 원하지 않는 일을 강제로 하게 된 노동자들의 대다수가 질병 또는 가혹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죽었으므로, 다른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정착민들은 그들의 노동력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악한 노동 조건과 열대성 기후에 잘 견딘다고 여겨지던 아프리카인들을 이용하기 위해 아프리카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이 대서양 노예무역에 첫 번째로 뛰어들었으나,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에 다른 많은 유럽의 국가들이 지금의 세네갈에서 앙골라 지역에 이르는 서아프리카 해안 지대에 그들의 주둔지와 교역소를 만들었다. 노예무역은 약 천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인들이 대서양을 건너 팔려갔다. 노예무역은 1807년 영국에 의해, 그리고 1808년 미국에 의해 금지되었지만 이로부터 약 50년 이상이 지난 후에야 실질적으로 금지되었다.

노예 제도는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오기 전부터 전쟁포로, 채무자, 죄수들을 노예로 삼는 형태로 아프리카에 존재했다. 그러나 노예제와 노예무역 또는 노예거래가 그렇게 대규모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받는 고통의 정도를 무시할 정도의 형태로 이루어진 적은 결코 없었다. 노예를 상품들과 교환하는 것으로 물질적인 혜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법에 의해 만들어졌고 합법적인 납치를 위해서 전쟁을 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다수의 노예들은 해안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부터 공급되었고, 노예무역으로부터 안전한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지역 경제는 왜곡되었고, 그들이 맺고 있던 사회적 관계는 그 기반이 위태롭게 되었다.

중개인이나 원주민 거래자들은 유럽과 아프리카 무역상들의 거래망을 통해 지역의 통치자들과 타협하였다. 노예 상인들은 아프리카 내에서도 특정 지역을 선호했고, 각 부족에 대한 미숙하고 단순한 편견들이 생겼다. 몇 가지 예로, 가나의 아칸(Akan)족은 반항적인 성질이 아주 강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나이지리아의 이보(Igbo)족은 변덕스럽고 심지어 자살하는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루기 쉽다고 여겨졌다. 세네갈의 만딩고(Mandingo)족은 훌륭한 하인으로 인식되었다. 철봉, 총, 구슬, 옷감, 그리고 술 등의 물품이 노예의 대가로서 거래되었다. 1756년 당시 남자 노예 한 명이 약 435 리터의 럼주(rum)와, 그리고 여자 노예 한 명은 약 360 리터의 럼주와 거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1.1. 1. 삼각 무역(triangle trade)

대다수의 노예선들은 아프리카 노예로 교환하기 위한 물품들을 싣고 유럽의 항구로부터 항해를 시작했다. 노예들은 교역소로 옮겨져서 바로 배의 화물칸에 빽빽이 채워졌는데, 선원들은 서아프리카 유럽인들의 수명을 단 2년으로 단축시켜 버렸던 고열 또는 이질의 피해를 입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배 안은 있으나 마나한 통풍시설, 빈약한 음식, 그리고 의료 시설의 부재로 그 환경이 매우 형편없었다. 3주에서 6주 정도 되는 항해 기간 동안 일반적으로 노예선에 탄 아프리카인들의 4분의 1 가량이 질병과 자살로 죽었고 그 중의 일부는 저항 또는 병으로 인해 바다로 던져지기도 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면 아프리카인들은 팔려지고 배는 금, 은, 설탕, 담배, 면화, 그리고 다른 물품들로 채워졌다. 이 배들은 유럽으로 되돌아가 그 짐들을 내려놓고 다시 그들의 삼각 무역을 재개하였다. 이 무역은 럼주를 싣고 대서양을 건너 카리브 해를 경유해 아메리카로 가는 적은 수의 아메리카 노예상인들에 의해서도 또한 행해졌다.

오늘날 아프리카인의 영향력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다. 어느 특정 아프리카인 에게도 개인이 친족의 흔적을 더듬어 나가 그들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한 경우는 매우 어렵지만, 최근의 식습관, 종교, 음악, 전설들은 풍부한 아프리카의 전통과 유산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브라질에서 아프리카인의 영향은 매우 뚜렷하다. 신들이 요루바족(Yoruba)에서 파생된 사실이 뚜렷한 칸돔블레(Candomblé)의 종교 의식들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노예무역의 역사

1517년 : 스페인이 카리브 해로 흑인 노예들을 데려오는 것을 교황의 반대를 무시하고 공식적으로 승인하다.

1593년 : 네덜란드가 서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교역소를 설치하기 시작하다.

1600년대 : 영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스웨덴이 대서양 노예무역에 참여하다.

1750년대 : 노예제와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유럽과 미국에서 확대되다.

1804년까지 : 메릴랜드(Maryland)주에서 노예제를 폐지하다.

1787년 : 해방된 아프리카인 노예들의 정착을 위해 시에라 레온에 프리타운(Freetown)이 영국 자선가들에 의해 설립되다.

1791년 : 1804년에 아이티(Haiti)에서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위해 노예들의 반란을 일으키다.

1807년 : 영국이 노예무역을 영국령 식민지에서 금지하다.

1808년 : 미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하다.

1833년 : 영국이 모든 영국제국 내에서 노예 제도를 금지하다.

1847년 : 해방된 노예들의 정착지로서 라이베리아가 아메리카 식민지 협회(the American Colonization Society)에 의해 설립되다.

1865년 : 미국 남북 전쟁에서 남부 연방을 이김으로써 노예제가 미국 전 지역에서 폐지되다.

1888년 : 브라질에서 노예제가 폐지되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 100장면 slavery, 노예, 아프리카

17.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근 역사

2011. 1. 11. 11:40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재의 모습은 2개의 아프리카너 공화국이었던 트랜스발(Transvaal)과 오랜지 자유주(Orange Free State)가 영국의 식민지로 된 앙골로-보어전쟁(Anglo-Boer War ; 1988-1902) 이후 191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1912년에 아프리카인 행동주의자들은 아프리카 원주민 민족회의(African Native National Congress ; ANNC)를 결성했으나 이후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 ANC)로 바꾸었다.

1920년에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은 이전에 독일이 지배하던 남서 아프리카(Southwest Africa)를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위임통치하였다. 그리고 그리고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던 바소토랜드(Basutoland), 베추아나랜드(Bechuanaland), 그리고 스와질랜드(Swaziland)와 로데지아를 소위 남아연방(South African Union)으로 편입시켰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격적인 확대정책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스와질랜드를 남아연방으로 통합시키는데 반대했다. 비록 영국이 모든 보호령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다른 나라에 둘러싸인 위의 나라들에 대해 경제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적 팽창은 엄청난 광물자원, 특히 19세기 다이아몬드와 금의 발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 2차대전의 발생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업화를 강요하였고, 도시화된 흑인노동자와 그 취약성에 대한 의존을 늘리는 것이었다. 이 기간동안 발전된 흑인에 대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는 국가의 흑백정책을 옹호하였고, 다양한 사람 사이에는 특징적 차이가 있으므로 각각의 집단들은 자신의 “고국(homeland)”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타 인종간의 결혼(백인과 흑인간의 결혼)은 불법이었고, 아프리카인은 태어난 곳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1948년 이후 부도덕 법(Immorality Act)을 포함하여 집단지역법(Group Areas Act), 제시설분리법(Separate Amenities Act), 그리고 반투 교육법(Bantu Education Act)은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정책을 강화시켰다. 1959년에 나온 반투 자치촉진법(Promotion of Bantu Self-Government Bill)은 반투스탄(Bantustans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반 자치 흑인구역)에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준다고 법으로 명시하고 있다. 1960년 3월 21일 샤퍼빌(sharpeville)에서 패스법(pass laws)에 반대하는 평화로운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하여 67명의 아프리카인이 살해되었다. 수상인 페르부어르트(Verwoerd)의 대응은 백인들의 표를 잡는 것이었고, 1961년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n Republic)을 선포하였다. 페르부어르트는 백인이 아닌 모든 사람은 정치적인 삶으로부터 제외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ANC의 지도자인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1964년 구속되었다.

포르투갈에서의 구데타는 1974년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독립을 선언하게 만들었고 미국의 후원을 받고 있던 남아공은 MPLA대신 구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고 있던 UNITA를 무너뜨리기 위해 앙골라를 침략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나미비아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SWAPO가 나미비아에 배치된 남아공 군대를 공격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동안에 사모라 마첼(Samora Machel)이 이끄는 FRELIMO가 권력을 잡고 로데지아와의 국경을 개방하여 이안 스미스 정권에 게릴라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모잠비크에 기지를 제공하였다.

1976년 남아공은 소웨토(Soweto)반란을 겪게 되는데, 점차적으로 흑인들의 저항이 심각하게 거세어져 갔으며 백인들은 나라가 재앙에 빠지고 있다고 깨달았다. 1989년 UN의 지지를 받은 자유선거가 나미비아에서 치러졌으며, 1990년 독립을 쟁취하였다. 1990년에 남아공은 나미비아와 앙골라로부터 물러났다.

드 클레르크(De Klerk) 정부는 ANC를 공인하고, 1990년 2월에 넬슨 만델라를 석방했다. 범 아프리카회의(Pan African Congress ; PAC)와 ANC, 줄루족이 중심이 된 잉카타 자유당(Inkatha Freedom Party) 사이의 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 인종차별주의정책은 철폐되었고, 총선이 1994년 4월에 치러졌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 100장면 South Africa, 남아공,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프리카, 역사

16. 남아프리카 공화국(Republic of South Africa)

2011. 1. 11. 11:39

 
남아공 최초의 거주민은 코이산(Khoisan)족으로 그들은 채집과 사냥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약 1700년 전 반투(Bantu)족이 북으로부터 남아프리카로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반투족은 철제 도구를 사용하고 있었고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주민인 코이산 족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1488년 현재의 남아프리카 연안에 포르투갈의 선원이 도착했지만 첫 번째 정착은 1657년에 현재의 케이프타운(Cape Town)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에 의해 이루어졌다. 케이프타운 정착지는 네덜란드의 배가 인도를 항해하는 도중 정박하여 보급을 받을 수 있는 기항지로 건설되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보어(Boer ; 농민을 의미)인으로 불렸고 후에는 아프리카너(Afrikaner ;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백인 또는 네덜란드계를 의미)로 불리기 시작했고 땅을 소유하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1795년과 1814년 2회에 걸쳐 케이프를 점령했고 영국은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로 만들었다.

많은 보어인들이 1836년부터 영국의 통치에 분개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를 떠나 내륙으로 대이주(Great Trek ; 1830-1840)를 시작했다. 도중에 그들은 반투족들의 저항에도 부딪혔으나, 그들은 나탈(Natal), 오렌지 자유주(Orange Free State), 트란스발(Transvaal)에 새로운 국가를 설립했다. 영국은 1843년 나탈을 합병했으나 1852년 트란스발, 1854년 오렌지자유주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아프리카너와 영국인들은 내륙지역에서 다이아몬드, 금 그리고 다른 값비싼 광물들이 발견됨으로서 경쟁이 가열되고 있었다. 보어전쟁(Anglo-Boer War)이 1880-1881년과 1899-1902년에 벌어졌다. 1910년 영국은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케이프 식민지, 나탈, 오렌지 자유주, 트란스발 등 4개 국가를 통합하여 특수 자치를 하는 남아프리카 연방(Union of South Africa)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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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 100장면 South Africa, 남아공,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프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