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로-게르만 조약, 1886

2001. 11. 21. 13:28
1886년 11월 1일 체결된 앵글로-게르만 조약은 처음으로 동아프리카를 분할했다.  그 분할에는 세가지 조치가 있었다.  술탄의 지위는 키스마이유, 브라바, 마르카와 모가디슈, 게다가 잔지바르 섬, 펨바, 마피아와 라무를 합병하면서 해안 지방까지 포함하였다.  그러나 킬리만자로에 인접한 대상의 교역로와 술탄의 요구는 무시되었다.  독일의 행동은 로부마(Rovuma) 강과 움바(오늘날 케냐와 국경을 이루는 영역), 빅토리아 호수에 이르는 모든 영토를 소유했다.  위투의 해안선은 게르만에 의해 정해졌다.
사실상 그들 스스로가 우방임을 증명하기 위한 갈망으로 영국은 데레살람(Dar es Salaam)과 판가니(Pangani)에서 관례적 허용기간을 위한 협약에 관하여 독일 회사를 지원하기 위한 위임을 맡았다; 독일인과 킬리만자로 지역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던 술탄 사이에 우호적인 단정을 도모하기 위해; 베를린 조약을 존중하기 위해 술탄을 자극했다.  영국의 국경은 움바 강을 따라 빅토리아 호수에 이르기까지 이어졌고, 타나 강까지 연결되었다.  북쪽의 그 두 강 사이에서의 분할의 몫은 영국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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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단결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OAU)

2001. 11. 19. 21:37
이 기구는 1963년 5월 25일 30개 아프flak 국가들이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서 아프리카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만들었다. 흑아프리카 국가들은 1957년 가나의 독립을 시작으로 연쇄적인 독립을 이룩하였다.
독립된 국가들의 증가로 아프리카 내에 두개의 반대되는 그룹이 형성되었다. 첫 번째 블록은 1961년 1월 모로코에서 회담이 개최된 이후 만들어진 카사블랑카 그룹이다. 이 그룹은 가나의 은쿠르마 대통령의 주도하에 급진적 자세를 견지하며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통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 블록의 회원국으로는 알제리 임시정부, 이집트, 가나, 기네아, 말리 그리고 모로코 등이다.
두 번째 블록은 1961년 5월 라이베리아 수도에서 열린 회담의 결과로 몬로비아 그룹으로 알려졌다. 회원국은 19개국으로 코뜨디부아르, 카메룬,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차드. 콩고, 다호메이, 가봉, 니제르, 세네갈, 어퍼볼타, 모리타니아, 마다가스카르 공화국, 라이베리아, 나이지리아, 소말리아, 시에라리온, 토고, 튀니지, 에티오피아, 리비아 등의 국가이다. 이 블록은 정치적 통합 보다 경제적 협력을 주장하는 보수적이고 국내문제에 대한 불간섭 그리고 현 국경선의 인정 등이다.
이와같이 대륙 내에 두 반대되는 그룹이 분열되어 있자 1963년 아디스 아바바에서 당시 32개 독립국가 중 모로코와 토고를 제외한 모든 국가가 참여하여 카사블랑카 그룹과 몬로비아 그룹이 통합하였다.
동 회의에서 채택된 OAU헌장은 전문 33조로 되어있다. 동헌장은 OAU
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1) 아프리카제국의 통일과 단결의 증진. (2) 아프리카인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상호협력과 노력의 조정 및 강화. (3)주권, 영토보전 및 독립의 수호. (4) 아프리카로부터 모든 형태의 식민지 불식. (5) 유엔 헌장과 인권선언을 존중한 국제협력의 중진 등이다.
상술한 제 목적들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 협력분야로는 (1) 정치적, 외교적 협력. (2) 운수, 통신을 포함한 경제협력. (3) 교육, 문화협력. (4) 보건, 위생, 식량 면에 있어서의 협력. (5) 과학, 기술협력. (6) 방위 및 안전보장을 위한 제 협력 등으로 열거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OAU는 정치, 경제, 문화, 안보 등의 제 분야의 상호협력을 수행하게끔 고안된 다기능적 지역국제기구라고 볼 수 있다.
OAU의 조직으로는 (1) 국가원수 혹은 기타 대표로 구성되는 국가정부 수뇌회의. (2) 외무장관 혹은 각 정부가 임명하는 각료회의. (3) 수뇌회의에서 임명된 행정사무 국장과 사무차장 그외 사무국 직원들로 구성된 사무국. (4) 수뇌회의에서 선출된 21인의 구성을 가진 중재, 조정, 중재위원회 등 4개의 기관이 설치되며 각료회의 산하에 5개의 특별위원회를 두고 있다.
현재에는 아프리카 모든 독립국가들이 OAU에 가입하고 있으며 남아공도 94년 4월의 다인종 선거에서 흑인이 승리함으로써 OAU에 가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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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의 쿠바(Cubans in Africa)

2001. 11. 19. 21:34
아프리카에서의 쿠바(Cubans in Africa)
아프리카에서의 쿠바는 군사적 혹은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 초 쿠바는 소말리아와 기네아와 같은 '혁명' 국가들에 대한 약간의 기술들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본격적인 관계는 1975년 독립이 진행되고 있던 앙골라에서였다. MPLA가 독립 정부의 통제권을 얻는 것 처럼 보였으나 1975년 여름 동안 미국, 중국 그리고 남아공이 FNLA와 UNITA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MPLA를 지원했으나 마지못해 하였다. 쿠바의 피텔 카스트로(Fidel Castro)는 MPLA의 지도자인 네또(Agosti Neto)의 군사지원 요구를 받아들였다. 또한 소련도 그들의 전위세력으로 쿠바군을 앙골라에 끌어들였다.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하였으나 내전은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쿠바군이 MPLA의 존재를 지켜주었다.
1977년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간에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쿠바는 그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1977년 이전에는 소말리아를 원조했으나 이후 에티오피아로 변경하였다. 이는 1974년 에티오피아의 셀라시 황제정권이 무너지고 에티오피아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소련이 에티오피아로 정책을 선회한 것이다. 쿠바군은 한때 앙골라에 1만 9천명, 에티오피아에 1만 6천 5백명, 기타 적도기니, 기네아, 기내비소, 모잠비크 등지에 약 1천 7백명의 쿠바인들이 있었다. 쿠바는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소련은 하루에 2백만달러를 원조하였다. 소련은 아프리카에 있는 쿠바인 때문에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었다. 비록 쿠바의 개입은 주로 군사분야였지만 9개 국가 이상에 많은 기술 전문가들을 파견하였다.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은 앙골라에서의 쿠바군 주둔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남아공이 반 MPLA 세력인 FNLA와 UNITA를 지원하기 위해 동부 앙골라로 군대를 파견한 것을 알았을 때 보다 더 쿠바군에 대해 관대했다. 그들은 쿠바군이 에티오피아에 파견되었을 때 보다 관대하였다. 비록 OAU가 외부의 개입으로써 모든 비 아프리카 세력들과 군사기지 제공을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쿠바군을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받아들였다.
첫째, 쿠바군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인정한 정부 자격으로써 초대되었고, 둘째, 적어도 앙골라의 경우 쿠바군은 OAU에 의해 인정된 정부, 즉 MPLA를 지원했으며 그리고 인종주의와 식민주의 대항하여 싸웠다는 점이 그 이유다. 또한 쿠바는 개발도상국이며 쿠바군의 인종도 그들과 같은 흑인이었기 때문에 쿠바는 강대국의 꼭두각시 보다 동지 같았다. 더구나 쿠바는 아프리카에 영구적인 군사기지를 설립한다 든지 혹은 경제적인 혜택을 노린다 든지 등의 이해관계가 없었다. 그들의 보상은 엄격히 이데올로기 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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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 아프리카 정책(Chinese Policy in Africa)

2001. 11. 19. 21:34
중국의 대 아프리카 정책(Chinese Policy in Africa)
아프리카에 대한 중국의 정책은 처음에는 아프리카 문제들 때문이 아니라 중국 자신의 소련과의 투쟁 때문에 이루어 졌다. 즉 1960년대 중국과 소련과의 사회주의 패권 투쟁은 제3세계에서 치열했는데 중국의 지지는 소련의 지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앙골라에서 소련이 MPLA를 지지했을 때 중국은 FNLA와 UNITA를 지원했으며 이것은 결국 미국과 남아공과 연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소련이 짐바브웨에서 은코모(Nkomo)를 지지했을 때 중국은 부◎베(Mugabe)를지원했는데 이 경우 중국이 지원한 무가베가 승리하였다. 소말리아가 소련과 관계를 단절하였을 때 중국은 소말리아를 포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정책은 소련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 기술자들을 파견했던 나라들 중에는 소련과 중국이 중복된 나라가 아주 많이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중국의 정책은 몇몇 문제들 중 소련과 상당히 정책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아프리카대륙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소련의 '헤게모니'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아프리카 국가들의 평화를 위협하는 나라가 남아공의 백인소수 통치자들이라는 사실에는 소련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은 아프리카에서 제한된 분쟁들에 있어서 어느 한편을 지지하기를 거부하였다. 남아공에서의 무장투쟁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믿었다.
사실 학자들은 중국의 아프리카 정책을 전통적 관계를 향상시키고, 소련의 야심을 경고하며 또한 남아공의 소수지배를 비난하고 지역간 그리고 국가간의 안정을 지지하며 그리고 새로운 국제경제질서와 세계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새로운 기반을 조성할 것을 지지하였다.
아프리카에 대한 중국의 정책은 신중하고 화려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호의적이었다. 보수적인 지도자부터 급진적인 지도자들까지 중국방문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1980년까지 중국을 방문한 국가로는 토고, 베넹, 세네갈, 튀니지아, 모로코, 모리타니아, 알제리, 짐바브웨, 모잠비크, 탄자니아, 케냐, 부룬디, 마다가스카르, 시설군도, 모리셔스, 그리고 지부터 등의 국가들이다. 또한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다른 국가들이 거절한 다르살렘에서 잠비아에 이르는 탄자니아-잠비아 철로건설을 중국이 도왔주었다는 점을 상기하고 있었다. 잠비아의 철로건설로 내륙국인 잠비아가 남아공이나 모잠비크 등의 국가를 통하지 않고도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출구를 확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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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대 아프리카 정책(Soviet Union Policy in Africa)

2001. 11. 19. 21:33
소련의 대 아프리카 정책(Soviet Union Policy in Africa)
소련은 아프리카에 대해 초기에는 사회주의 노선에 의한 경제개발이야 말로 아프리카 국가건설의 장기적 목표라고 주장하고 그 단기적 목표로서 아프리카 국가통합에의 해결책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외교정책을 수행해 왔다. 70년대에 들어와서 보다 실질적으로 국가이익에 기반을 둔 팽창주의 전제하에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소련은 역사적으로 아프리카와 전혀 무관하였다. 소련 자체의 격렬한 혁명과 레닌-스탈린으로 이어진 맑스주의 혁명은 1950년대와 60년대 때 독립운동의 폭발에 아무런 역할을 수행치 못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아프리카에 대한 자세는 관심만 거의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의 내전시 루뭄바(Patrice Lumumba) 측에게, 나이지리아의 비아프라(Biafra) 내전시에는 나이지리아 연방측을 지원하였다. 또한 이집트의 낫세르(Abdul Nasser)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1960년대 초에는 기네아와 가나에 약간의 고문단을 파견하였다. 또한 70년대 초에는 소말리아와 관계를 설립하였는데 소말리아는 인도양에 있는 해군, 공군 기지를 소련에 제공하였다.
초기 소련의 팽창정책은 이집트에 있는 거대한 아스완 댐 프로젝트를 제외하고는 저자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와 관련된 정책으로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소련은 아프리카에서 서구영향과 반대되는 정책을 시도했으며 또한 중국의 영향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70년대에 있은 두 곳의 투쟁( 혼 지역과 포르투갈에 대항한 해방투쟁)은 보다 적극적인 정책과 보다 깊은 연루를 시켰다. 1975년에 소련은 앙골라에서 MPLA를 지원하였으며 쿠바군대의 파견과 군 사고문단을 파견하였다. 1978년에 소련은 소말리아로 부퍼 에티오피아로 그들의 정책지원을 변경하였는데 이곳에도 군사고문 단의 파견과 쿠바군의 사용을 제공하였다. 80년대 중반까지 적어도 7개 국가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했으며 또한 적어도 20여개국에 경제 기술요원들을 파견하였다.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는 종종 소련의 개입으로 곤경에 처해지는 나라들이 있었다. OAU의 기본원칙은 '국내문제들에 있어 불갈섭'이며 일상정책으로 '아프리카 문제는 아프리카가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과 그 동맹국들은 1970년대 말경에는 약 3만 6천여명의 군사를 파견하였다. 그같은 군사적 지원은 주로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에 이루어 졌다. (1) 소련의 개입은 항상 아프리카 일부 정부가 초대하는 형식이며 (2) 관련된 아프리카 정부들은 그들 분쟁에 OAU의 지지를 받고있으며 (3) 소련은 항상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와 관련된 문제들에서 아프리카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반면, 많은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외국군대는 곧 아프리카에서 떠날 것이라고 보았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앙골라에 대한 소련개입에 지지하는 것은 반MPLA 세력들에게 서구국가와 남아공이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에티오피아에서도 마찬가지이며 맑스주의를 주창하는 수많은 국가들의 출현은 소련에 대한 잠재적인 동지애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1990년 초 소련의 몰락으로 아프리카대륙에서는 이념보다는 실리적이고 경제적인 관점으로 그들의 정책 노선을 변경하고 있다. 즉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 체제하에 피폐된 국가경제를 살려서 정책안정을 꾀하려 하고 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아프리카에서의 민주주의 도미노 현상도 이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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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 아프리카 정책(USA Policy in Africa)

2001. 11. 19. 21:32
미국의 대 아프리카 정책(USA Policy in Africa)
미국의 대 아프리정책은 소련의 세력팽챙을 변수로 해서 시기적으로 변모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볼 때 미국의 아프리카 관계는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 1시기는 아프리카 식민제국이 대거 독립하기 시작한 60년대부터 포드 행정부 시대인 1975년까지이며 제 2기는 카터행정부(1977-1980년), 제 3기는 레이건 행정부 시대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1기인 60년대는 미국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소련우위를 유지해 왔다. 닉슨, 포드 행정부 시대 남부아프리카에서 현상유지정책은 미국이 소련 우위의 세력균형을 지속시키려는 전략에서 비롯된다.
제 2기인 카터행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은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주장하고 있었던 현상유지론 및 세력 불균형론을 초월하여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였다. 또한 지역 내지 국제문제에 있어서 다수에 의한 정치영향력 이 신장되고 있는 제 3세계 국가와의 관계강화를 외교정책의 기본방향으로 정하였다. 따라서 카터행정부의 새로운 아프리카 정책은 도덕정치를 강조한 인본사상인 인권정책과 제 3세계와의 관계강화를 기본노선으로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의 내전 등 국지적 사태가 국제적 성격으로 전환되어 동·서 분쟁의 장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개입을 피하고 아프리카대륙 스스로가 아프리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지도록 하는데 그 정책방향을 두고 있다. 이와같이 카타행정부의 아프리카정책은 '경제협력'과 '자결권'을 기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 3기는 레이건 행정부의 적극적 개입정책을 들 수 있다. 레이건 행정부는 앙골라내전에 소련과 쿠바가 개입한 이래 소련의 남부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 증대는 물론 쿠바군이 앙골라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의 국익을 위협하고 소련세력 팽창의 전위대 역할을 해 옴에 따라 남부아프리카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정책을 추구하였다. 이같은 적극적인 개입정책은 남부아프리카에서 남아공을 보호하고 현재의 현상유지를 원하고 있었다. 이는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강화도 표방한 것이다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됨으로써 미국이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나 이는 또한 아프리카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 대신 소극적인 정책으로 변경됨으로써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실익은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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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반 원칙(Svllivan Principles)

2001. 11. 19. 21:32
설리반 원칙(Svllivan Principles)
남아공에서의 미국기업은 종업원을 고용할 때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말한다. 이 원칙은 1977년 제너랄 모타사(GM)의 감독위원회 중 최초의 흑인이자 침례교 목사인 설리반(R.Leon Sullivan)이 만들었다. 그는 미국인 회사에 고용된 남아공흑인 노동자들은 회사가 제시한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설정하는데 동의할 것을 제의하였다. (1) 임금, 노동조건, 그리고 흑인들의 부가급부 개선. (2) 관리직원으로 흑인진급 가능. (3) 흑인 노동조합의 대표인정 등이다.
1980년대까지 130개 미국회사들은 남아공에 있는 미국회사의 모든 고용원의 75%가 설리반 원칙에 적용되었다. 그 원칙의 목적은 아파르테이트의 영향력을 좌절시키려는 의도 뿐만 아니라 아파르테이크 통치를 완화하기 위해 남아공 정부에 압력을 넣기 위한 것이다.  또한 남아공으로부터의 철수 위험과 회사를 방어하려는 훈련을 목적으로 하였다.
카터정부 하의 미국정부는 남아공의 평화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한 방법으로서 공공연히 설리반 원칙을 지지하였다.
남아공의 흑인, 아프리카 정부의 지도자들 그리고 많은 미국인들은 설리반 원칙을 반대하였다. 1980년 그 반대는 보다 강력해 졌다. 남아공 흑인들은 설리반 원칙이 아파르테이트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설리반의 회사가 공격당하는 괴롭힘도 당했다.  설리반은 그 원칙들을 준수하기 위해 미 의회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아프리카의 일반적 반응은 1980년 OAU각료회의에서 그에 대한 비난들이 표현되었는데 OAU는 "설리반 원칙은 남아공에 있는 외국인 투자를 위한 건설적 역할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그같은 조치들로 인해 남아공으로의 외국인 투자가 증가하며 해방투쟁에 해악이 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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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떼베 구출작전(Rescue at Entebbe)

2001. 11. 19. 21:31
엔떼베 구출작전(Rescue at Entebbe)
항공기를 납치하여 이스라엘 인질을 억류한 우간다 엔떼베 공항을 이스라엘 군인들이 습격하여 인질들을 구출한 사건을 말한다. 여객기 납치범들은 비행기를 납치하여 비이스라엘인들은 석방하고 1976년 6월 7일 엔떼베 공항에 착륙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있는 죄수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인질들 중 블로치(Dora Bloch)라는 나이 많은 여성은 병으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우간다의 이디 아민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치밀한 계획하에 엔테베 공항을 점거하고 납치범들을 사살하여 승객들을 구했다. 이 과정에서 1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사망하였고 블로치 여성은 병원으로부터 이송되는 동안 살해당했는데 이는 아민의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도되었다.
대다수 세계 각국은 이스라엘의 이같은 끔찍한 행위에 분노하였으며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그 일에 당황하였다. OAU는 1976년 7월 2일부터 4일까지 모리셔스의 루이스(Louis) 섬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우간다에서의 '이스라엘 행위'를 극렬히 비난하였다. 그 회담에서는 또한 그같은 납치범 해결방안이 이스라엘과 남아공의 합작품이라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우간다의 이디 아민 대통령이 인도적인 노력으로 인질들을 석방하려 했었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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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어권 아프리카(Lusophone)

2001. 11. 19. 21:30
포어권 아프리카(Lusophone)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국가들이다. 그 국가들은 모두 포르투갈의 전식민지 국이었으며 앙골라, 케이프베르데, 기네비소, 모잠비크 그리고 샹톰 프린시페 등의 국가들이 포함된다.
이 다섯 포어권 국가들은 약 2천만명의 인구를 보유하며 넓게 홑어겨 있다. 모든 포어권 국가들은 1974년 혹은 1975년에 독립하였으나 공통의 언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기구의 형성에 그들이 함께 협조하는 매개체로 작용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공통의 언어는 포르투갈과 그들이 유대관계를 맺게하며 이들 국가들이 독립운동 시에는 분열되었지만 현재는 포르투갈과 前식띤지들 사이에는 선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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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권 아프리카(Hispanophone)

2001. 11. 19. 21:30
스페인어권 아프리카(Hispanophone)
이들 국가들에서는 스페인어가 폭넓게 구사되는 지역을 말한다. 이들 국가로는 적도기니와 서사하라 국가가 해당된다.
아프리카에 있는 스페인어 권 국가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사용되는 유럽언어 중 가장 작은 부분을 차지하며 약 40만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그 두 국가들은 불어권이나 영어권 국가와 같은 동질적인 면이 드물며 다른 언어도 함께 구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 언어도 스페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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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권 아프리카(Francophone Africa)

2001. 11. 19. 21:28
불어권 아프리카(Francophone Africa)
프랑스어가 폭넓게 사용되는 지역을 말한다. 대부분의 불어권 국가는 대부분 프랑스의 전식민지 국가로서 부룬디, 르완다, 그리고 콩고민주공화국(이상은 벨기에 통치)는 에외이다. 공식적으로 불어가 사용되는 국가는 베넹, 부룬디, 카메룬,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차드, 콩고, 가봉, 기네아, 코뜨디부아르, 말리, 모리타니아, 니제르. 르완다, 세네갈, 토고, 어퍼볼타, 그리고 콩고민주공화국, 마다가수카르 등 22개국에 이른다.
전식민지의 중심지로서 프랑스와 프랑스어는 프랑스와 불어권 국가들 사이의 공동체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시발점으로 간주되었다. 첫 번째, 이것은 전식민지 국들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포함하고 있다(기네아는 1958년 프랑스의 공동체 제의를 거부함으로서 제외되었다). 사실 프랑스의 원조는 몇몇 국가들(예를들면, 차드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 붕괴되는 막아 주었다. 또한 프랑스는 그들 문화와 언어를 증진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프랑스와 13개 불어권 식민지 국가들이 포함된 프랑크 존(Franc Zone)이 출범하였다. 프랑스, 캐나다. 그리고 불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을 포함하는 문화와 기술협력국을 만들었다. 프랑스 언어와 문화를 증진시키는 노력으로 모로코와 가봉에 강력한 출력을 지닌 새로운 라디오 방송국을 설치하였다. 현재 비불어권 국가도 포함하는 프랑스-아프리카 정상회담의 연례화를 후원하였다. 그러나 불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은 프랑스가 참여하지 않는 단체기구도 만들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와 협상운영회(베넹, 코뜨디부아르, 니제르, 토고 그리고 어퍼볼타) 등의 기구가 대표적 예이다.
아프리카의 불어권 국가는 프랑스와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그들 국가 사이에도 유대관계를 설립하기 위해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다. 프랑스와의 유대는 너무나 밀접해서 다른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은 그들이 프랑스의 신식민주의에 빠졌다고 비난하였다. 프랑스 군대들이 1979턴까지 차드에 머물렀으며 군사 기지가 세네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불어권 국가들은 다른 강대국들 보다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불어를 사용한다. 전벨기에 식민지였던 불어권 국가인 콩고민주공화국 조차도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와 관계를 맺고있는 불어권 국가들에 대한 확실한 보상은 프랑tm의 원조제고의 의지이다. 사실, 프랑스의 외국원조는 대부분이 불어권 국가들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프랑스 문화와 언어를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보이는 다른 국가들에게도 원조를 확대하고 있다. 예를들면, 1980년 니스(Nic매에서 열린 프랑스-아프리카 정상회담에는 불어권 국가들을 포함한 케이프베르데, 기네비소, 모리셔스. 샹톰 프린시페, 시에라리온, 그리고 소말리아 등이 초대되었다. 이것은 불어권 아프리카 국가들 뿐만 아니라 영어권 국가에 속하지 않은 다른 국가들에게 확대되는 불어운동인 것이다. 아프리카에는 24개국의 불어권 국가들이 있으며 아프리카 인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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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 아프리카(Anglophone Africa)

2001. 11. 19. 21:27
영어권 아프리카(Anglophone Africa)  
아프리카 국가에서 영어가 폭넓게 구사되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라이베리아, 카메룬 그리고 소말리아의 일부분을 제외한 모든 영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은 영국의 전식민지였다. 영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국가로는 보츠와나, 카메룬, 감비아, 가나. 레소토, 라이베리아, 말라위, 모리셔스, 나이지리아, 세실군도, 시에라리온, 소말리아, 남아공, 스와질랜드, 우간다. 잠비아 그리고 짐바브웨 등이며 이집트, 케냐, 수단 그리고 탄자니아 등지에서도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다른 식민국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독립을 했을 때 그들의 관심중의 하나는 前식민종주국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영어권 국가들의 결속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前식민지 국가들로 구성된 영 연방이라는 국제기구를 형성하였다. 영 연방회원국들은 무역에 있어서 특별관세 이점들을 제공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연방 국가들의 국민들이 여행할 때 비자와 여권의 특전을 제공받았다. 또한 회원국들은 비영연방 국가들 보다 영국으로부터의 원조를 보다 많이 받았다.
이밖에 중요한 것으로 영연방 회담이 제공하는 대규모 국제포럼이 그것이다. 이 연례모임에서 회원국들은 어떠한 문제점들에 대해 그들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그 회담에서 도출된 합의점들은 구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포럼은 의견의 이행을 위한 압박수단으로 종종 사용되었다.
영연방은 영국을 포함하여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보츠와나, 감비아, 가나. 케냐, 레소토, 말라위, 모리셔스, 나이지리아, 시설군도, 시에라리온, 스와질랜드, 탄자니아, 우간다, 잠비아, 짐바브웨, 남아공 등이 포함된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영어권 국가들의 개념은 영연방 개념 보다 폭넓은 회원국을 포함하고 있는 데, 이는 비영연방 국가들인 카메룬, 이집트, 라이베리아, 소말리아,  그리고 수단 등지에서도 영어가 광범위하게 구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21개 영어권 국가들은 아프리카 인구의 58.7%를 차지하고 있다. 영연방의 15개 국가들은 아프리카 전면적의 1/3을 차지하며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 영연방은 회원국들의 의견공유 뿐만 아니라 인도가 이끌고 있는 제3세계 국가들의 의사전달 매개체를 제공하였다. 또한 1980년대의 짐바브웨, 나미비아 그리고 남아공과 같은 아프리카 문제점 해결을 위한 필요로써 영국이 압력을 넣도록 계속적으로 주장하였다. 영연방 국가들과 영국은 문제점들에 대한 의견일치를 보는 반면, 많은 다른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일치를 나타내기도 한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영국이 남아공과의 밀접한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대단히 분개하였으며 영국은 나미비아 독립에 관해서도 충분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영국은 자국의 경제적 침체로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원조가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주 대상은 영어권 국가였다. 오늘날 영어권 아프리카 국가는 영연방에 독점적으로 소속된 것이 아니라 영연방은 일차적으로 영국과 연계된 관심사이다. 또한 남아공도 1992년 영연방으로 복귀하였는데 흑인정권 탄생으로 예전의 밀접한 관계가 다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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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에서의 투자철회(Divestiture in South Africa)

2001. 11. 19. 21:26
남아공에서의 투자철회(Divestiture in South Africa)
남아공의 인종차별에 항의하여 남아공에 있는 모든 외국인 제조업 흑은 재정적 요소와 이해관계가 있는 사업에서의 투자철회를 말한다. 이 요구의 시작은 OAU, 미국의 각종 단체들(교회, 대학생, 노동조합, 흑인 미국인 단체등) 그리고 남아공에 있는 흑인단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1980년 6월 OAU 각료위원회는 남아공에 대한 서구 국가들의 투자철회를 계속 요구하였다. 미국의 개인 단체들은 남아공에 있는 미국의 투자를 금지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펼치면서 '부랑자' 나라로부터 미국의 제조업과 금융기관들이 자발적으로 투자를 철회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비록 특별한 미국 회사들이 주식을 소유한 단체들은 철수문제에 대해 주주총회에서 투표를 하였다.
남아공 내에서는 외국인 철수의 문제가 흑인단체들의 분열을 가져왔는데 이는 외국인 회사의 철수로 회사가 없어지면 혹인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많은 흑인틀은 노벨평화상을 수상받은 루툴리 ANC의장의 지도에 따랐는데 그는 1959년 '보이코트 우리들'이라는 간단한 항의를 문제화했던 사람이다.
철수를 요구하는 많은 단체들은 그 충격으로 백인통치 집단의 붕괴를 가져올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같은 바램은 쉽게 오지 않았다. 1950년대와 60년대 대규모 철수에 직면한 중국과 쿠바는 그같은 행위로 인해 무너지지 않았었다. 철수의 다른 지지자들도 남아공에 약간의 고통을 줌으로써 그리고 아파르테이트에 반대하는 도덕적 형태로서 아프리카의 이해를 위한 상징적인 우정의 행동으로써 보여지는 것이었다. 많은 미흑인들은 현대사에서 인종차별의 최악의 상태로 고통받고 있는 흑인종들의 고통을 극적인 것으로 부각시키려 하였다. OAU는 기업의 철수가 서구의 지지형태로 보았다. 그러나 엄격히 실제적인 의미에서 철수의 요구는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이는 매년 남아공에 많은 외국 자본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유럽국가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세계경제의 침체 영향 그리고 석유 금수조치 등으로 인해 남아공 경제는 80년대 중반이후 큰 타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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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르크 법안(Clark Amendment)

2001. 11. 19. 21:25
클라르크 법안(Clark Amendment)
미 의외의 승인 없이는 앙골라의 어떠한 반군단체들에게 무기공급을 금지한다는 법안을 말한다. 후에 이 법안의 지지자였던 딕 클라르크(Dic Clark)의 이름을 딴 클라르크 법안으로 명명되었다. 무기제공 금지안은 집권 MPLA와 FNLA 두 단체들 사이의 앙골라 내전이 고조되던 1975년에 통과되었다. 미 국무부 헨리 키신즈(Henry Kissinger)는 MPLA가 소련과 쿠바로부터 군사원조를 계속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반 MPLA 세력에게 무기를 계속 제공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미 의회는 부분적으로 베트남 개입의 비참한 결과들에 대한 반발과 OAU의 존중 등의 이유로 클라르크안은 승인되었으며 반 MPLA 세력에 대한 공개적인 어떠한 원조도 금지하였다. 1981년 레이건 대통형은 외교관계에 있어 행정부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클라르크안의 폐기를 요구하였다. 그는 일부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과 같은 UNITA에 대한 군사원조계획은 부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1981턴 클라르크안의 폐기를 부결시켰고 레이건 대통령은 그 문제에 관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흑 아프리카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아프리카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자유로워야 한다는 의견을 미국이 실현시킨 상징으로써 클라르크법안을 환영하였다. 아프리카는 1075년 8월 MPLA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원조하였던 쿠바군의 앙골라로의 이동과 남아공의 FNLA와 UNITA를 지지하기 위한 개입도 기꺼이 용인하였다. 다른 세력들이 앙골라로부터 철수하였을 때 아프리카 국가들은 쿠바군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클라르크는 외부 개입의 위협으로부터 앙골라가 자유로와 지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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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경제발전을 위한 아랍은행(BADEA)

2001. 11. 19. 21:25
아프리카 경제발전을 위한 아랍은행(BADEA)
이 은행은 OAU 회원국들을 돕기 위해 1973년 아랍연맹에 의해 만들어진 은행으로 아랍연맹의 회원국들은 제외된다. 수단의 카르톰(Khartoum)에 본부가 있다.
BADEA는 아프리카의 비오일 생산국들이 오일가격의 급격한 상승으로 경제적 압박에 직면할 시기에 탄생되었다. 1980년대까지 18개 아랍국들은 7억3천8백만 달러(이중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쿠웨이트 그리고 이라크가 5억달러 이상 출자)를 제공하였다. 주요 아프리카 관심사는 기간산업, 농업, 산업 그리고 에너지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몇몇 BADEA 기금들은 아프리카 개발 은헹을 통해 조성되었으며 약 9백만달러는 남부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위해 제공되었다.
원조금들이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제공되는 동안에도 흑아프리카 국가들은 BADEA를 비난하였다. 그들은 (1) 대부금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비해 금액이 너무나 적으며 (2) 아랍국가들은 AfDB를 통한 그들의 원조 통로로 되어야 하며 이는 AfDB의 사무총장이 흑인이기 때문이다 (3) 아랍국가들은 BADEA와 같은 다국적 제도들을 통하는 것 보다는 선별된 국가들과 국가제도들을 통해 원조를 전달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러므로 BADEA는 흑아프리카 국가들과 아랍 아프리카 국가들간의 차이를 줄이는 데는 기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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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단체(African Group)

2001. 11. 19. 21:24
아프리카 단체(African Group)
유엔의 아프리카 회원국들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문제점들을 전면에 내세우는데 단일안을 제시하기 설립되었다.  아프리카 단체 간부회의들은 규칙적으로 아프리카의 중요한 문제점들을 다루었다. 더 나아가 대화의 창구로서 다른 국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예를들면, 나미비아문제 해결을 위한 계획안을 만들어 내는 작업에서 아프리카 단체는 종종 미국, 프랑스, 영국, 캐나다 그리고 서독 등의 다섯 서구 세력들과 '계약' 단체관계를 맺어 그들과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 단체는 유엔이 나미비아 문제를 어떻게 심의하고 있는지에 대해 OAU가 문제점들을 지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예를들면, 나미비아의 1980년 문제해결에 있어 OAU는 만약 남아공이 여전히 부정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어떠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가에 대한 방침을 아프리카 단체에 지시하였다).
또한 아프리카 단체는 다른 지역단체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려 했으며 그것은 유엔에서의 의사결정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하였다. 아랍, 아시아 국가들과 연합하여 안보리, 경제사회 운영회, 국제 재판소, 그리고 유엔 사무국내에 아프리카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임명되는 것으로 유엔 헌장을 수정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현재 유엔 사무총장에 아프리카 이집트인인 부르투스 부르투스 갈리가 재임하고 있다.
유엔에서의 50여개국이 투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고 이 회원국들이 같은 동의를 할 때 다른 몇몇 지역 단체들이 연합하는 것 이상의 견고한 블록을 형성할 수 있다.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 내에 아프리카 단체 사무실의 설립은 새 문제점들에 대해 공동전선을 펴기를 갈망했던 아프리카의 희망을 실한 것이다. 또한 그같은 일치단결의 시도를 통해 아프리카 국가들의 확고한 지위를 얻고 협력하기 위한 기구의 중심으로 되었다. 사실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문제에 있어 아프리카 단체는 아마 유엔에 있는 어떤 단체들과 마찬 가지로 많은 집착을 가졌다. 그러나 아프리카 국가들은 많은 문제들(이데올로기, 정치적 형태들, 경제체제, 강대국들과의 유대, 국경선 문제점)로 분열되어 있으며 모든 국제 문제들에 공동전선을 펴기도 힘들어져 갔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동·서의 탈냉전으로 그 동안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에 치열한 외교의 장이었던 아프리카의 가치가 하락하였다. 이는 냉전시 동·서의 이데올로기로 이익을 보았던 많은 이점들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에서의 아프리카 단체는 어떤 문제점들에 있어 일치된 공동전선을 펼칠 세력으로 되었으며 무시할 수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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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카리브-태평양 공동체(ACP)

2001. 11. 19. 21:24
아프리카-카리브-태평양 공동체(ACP)  
아프리카, 카리브연안, 태평양 지역 국가들이 유럽경제공동체(현유럽 연합:EU)와 경제관계를 통해 경제발전을 증진시키며 63개 회원국들로 구성되었다. 63개 회원국들 중 아프리카 국가들은 북아프리카 국가와 앙골라, 모잠비크, 그리고 남아공을 제외한 43개국이 가입했었다. ACP와 EEC 사이의 관계는 1975년, 1979년의 1, 2차 로메협정을 포함하여 4차 로메협상까지 체결되었다. ACP의 근본적인 목적은 무역관계에 있어 ACP에 대한 EEC의 무역특혜를 받기 위한 것이다. 특히 ACP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수출안정화, 산업협력 그리고 재정과 기술협력에 대한 합의점들이다. 그 조약은 ACP 상품들에 대한 수출시장을 보장하는 것을 공식화 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ACP회원국들에게 원조자격을 주었다. 예를들면. 짐바브웨는 2차협정 5년동안 2억달러가 넘는 원조를 받았다.
영국이 EEC에 가입하기 이전에는 전불형 아프리카 국가들만이 EC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실 많은 영령 국가들과 급진 국가들은 EEC와의 관계를 신식민주의 라고 비난하였다. 영국이 EEC에 가입한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불편한 관계를 풀어버리고 ACP를 형성하였으며 그리고 로메협정의 협상에 참여하였다.
1차 로메협상은 신국제경제질서(NIEO)의 서막을 알리는 것으로 감동적인 희망으로 로약을 체결하였다. 2차 로메협상은 보다 실질적인 기대속에 체결되었다. 2차 로메협정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유럽으로의 수출은 50%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무관세였다. 또한 모든 아프리카 국가로의 수입은 유럽으로부터가 55%를 차지하였다. 더구나 2차 로메협정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은 EEC와 무역면에 있어서 바람직한 균형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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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와 중동(Africa and the Middle East)

2001. 11. 19. 21:23
아프리카와 중동(Africa and the Middle East)
이것은 아프리카국가들과 중동국가들(일반적으로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흥해와 아덴만에 이르는 모든 남부 국가들)과의 관계를 말한다. 지리적으로 아프리카 국가와 중동 국가들은 인접해 있다. 종교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중동 국가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북아프리카의 절반 이상도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다. 아랍어는 터키, 이란,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중동 국가들의 주요 언어이며 모리타니아, 모로코, 서부사하라, 알제리, 튀니지아. 리비아, 이집트 그리고 북부 수단의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다.
1945년 아랍의 단결을 중진시키기 위해 형성된 아랍연맹에는 처음부터 가입한 이집트를 포함해서 아프리카 국가들이 점차 독립을 획득함으로써 가입하였다. 이집트는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는 이유로 아랍연맹에서 축출되었다. 아프리카의 아랍연맹 국가로는 모리타니아,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아, 리비아, 수단, 지부티 그리고 소말리아 등의 국가이다. 이중 소말리아와 지부티는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종교적인 면에서 이슬람 문화권이다.
흑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함에 따라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은 중동과 관계를 설립하였다. 흑아프리카 지도자들을 당황하게 했던 첫 번째 문제는 폭넓은 범아프리카주의의 개념정립이었다. 가나의 은쿠르마, 기네아의 세꾸뚜레, 탄자니아의 니에레레 같은 급진적인 지도자들은 범아프리카주의의 의미 적용에 있어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는 모든 국가들도 포함하고 있다. 보수주의적 지도자로써 간주되는, 다른 흑인 지도자들은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는 국가 즉 사하라이북 국가들을 신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1950년대 중반 북부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추구하였을 때 그들이 아프리카 국가로서가 아니라 중동 국가로서 취급하였다. 예를들면. 모로코가 독립을 추구하였을 때 그 나라 지도자들은 "모로코의 독립은 전체 아랍 마그레브가 독립을 하지않는 이상 완전한 독립은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들이 더 이상 흑아프리카가 아니다라는 것을 내포하였다.
그러나 OAU가 1963년에 형성되었을 때 남아공을 제외한 모든 아프리카 국가들(북아프리카 포함)이 참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아프리카는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유대관계를 맺으면 단교를 하는 등 내분이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고 있었으며 도로건설, 건축, 기술훈련 그리고 차관 등 많은 유용한 프로젝트들을 위한 기술을 원조 받았다.
가장 많은 이슬람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나이지리아조차 이스라엘의 원조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1973년초 부룬디, 차드, 콩고, 에티오피아, 기네아, 코뜨디부아르, 케냐, 말리, 니제르, 탄자니아, 우간다 그리고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등 12개국이 이스라엘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한 학자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단절한 급진적이고 보수적인 국가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 들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1) 이스라엘은 시오니즘을 병행하며 진출. (2)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와 이주를 원하는 미국의 블랙유태인들의 귀국을 허용치 않고 있다.  (3) 이스라엘이 우간다의 오보해 정권을 전복시킨 아민을 도왔다는 것.  (4) 북부아프리카 국가들이 흑아프리카 국가들과 '형제애'로써 협력하였기 때문이다.    
주요 전환점은 1973년 10월 OAPEC(아랍석유 수출국 기구:OPEC)이 설립되어 이스라엘과 대항하기 위해 석유를 무기화 하였을 때부터이다. 석유를 공급받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아랍국가를 모든 국가들이 지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석유가를 올림으로써 아프리카 국가들은 고통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소토, 말라위, 남아공 그리고 스와질랜드 등 일부 국가들은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OAPEC는 1974년 4배로 오른 오일가격을 차감해 주기 위해 7억달러를 아프리카에 제공하였다. OAU는 OAPEC의 지원이 너무 적다고 비난하고 아프리카 개발은행으로 간접적인 지원을 바랬다. 한편, 흑아프리카 국가들은 유엔에서의 인종주의 형태인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의결권에서 아랍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1977년 3월 7일 부터 9일까지 카이로에서 아프리카-아랍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을 때 그 지역에는 고도의 긴장감이 있었다. 가나대표는 아랍국들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우리는 공군과 육군의 군사훈련을 도와주고 있던 수백명의 이스라엘인들을 우리나라에서 추방하였다. 우리는 아랍국이 우리를 원조해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OAU도 또한 약속을 받았다. 우리는 기다렸으나 원조는 거의 오지 않았거나 전혀 오지 않았다". 탄자니아는 아랍국들이 수백만달러의 원조로 생색을 낸다고 비난하고 최근의 원조로 22억달러를 요구하였다. 마침내 아랍국들은 14억 5천만달러(이는 파키스탄 한 나라에 차관해 준 액수 보다도 적다)를 5년에 거쳐 원조하는 것으로 설득하였다 이 정상회담은 인종주의와 식민주의 그리고 시오니즘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공동 행동을 위해 밀접한 노력을 추구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폐막되었다.
OAU는 아랍의 원조가 너무 적고 AfDB 보다는 오히려 아랍국가들에 의해 원조가 통제되며 원조의 우선권이 아랍어를 사용하는 국가나 무슬림 국가부터 지급되는데 비난하였다. 이집트가 아랍연맹에서 축출되었을 때 관계가 악화되었다. 또한 아랍연맹이 이집트를 OAU로부터 축출하라고 요구하였을 때 OAU는 거절하였으며 아랍분쟁들은 아프리카와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두 번째 아프리카-아랍 정상회담이 연기되었으며 아프리
카-중동간의 장래가 불명확해 졌다.
아프리카 국가 중에는 OAU와 아랍연맹에 동시에 가입된 국가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랍연맹 아프리카 국가들과 흑아프리카 국가들은 똑같은 입장에서 중동문제를 인식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랍연맹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소멸을 원했으며 대신 팔레스타인의 대체를 원했다. 흑아프리카 국가들은 이스라엘이 그곳에 남아있는 것에 동의를 하는 것 같았고 반면, 팔레스타인의 고향으로의 귀향도 동의하였다. 더 나아가 아프리카 국가로서 뿐만 아니라 아랍국가로서의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 많은 흑아프리카 국가들과 이스라엘과의 외교 관계 복원을 희망하였다. 사실 나이지리아는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 정상 지연에 대해 아랑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남아공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탄자니아는 만일 팔레스타인에게 홈랜드가 주어진다면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맺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나, 코뜨디부아르 그리고 라이베리아는 외교관계 복원을 위해 노력했으며 콩고민주공화국은 1982년 외교관계를 복원하였다. 1980턴의 OAU 정상 회담에서는 이집트의 축출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을 이끌었던 캠퍼 데이비드(Camp Davies)를 비난하는 것도 거부하였다.
아프리카와 중동간의 관계는 불안정하며 한편으로는 이스라엘과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반면, 오일달러와 아파르테이트에 반대하는 것은 중동과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즉 아파르테이트와 식민주의에 대해서는 아프리카 국가와 중동국가들이 완전히 의견일치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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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일방선언(Unilateral Declaration of Independent : UBI)

2001. 11. 13. 19:54
독립의 일방선언(Unilateral Declaration of Independent : UBI)
지배세력의 승인없이 식민지 국가가 독립을 선언하는 행위이다.  UDI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립을 획득함에 있어 쌍무 동의를 하는 것에 배치되는 것이다.  예를들면, 1959년 영국과 나이지리아 지도자들은 1959년 12월 국민선거가 치루어지는 것에 동의하였으며 새로운 입법은 독립을 요구하였고 1960년 10뭘 1일 영국은 나이지리아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일방선언은 쌍무협상이 식민세력에 의해 거부될 때 발생한다.
UDI는 아프리카에서 세 번 사용되었다. 첫 번째는 남로데지아의 스미스(Ian Smeth)의 백인 소수정권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영국과 다른 어떤 나라도 UDI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아프리카 국가들은 독립이후에 백인들과의 쌍무협정에 의해 독립이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에 통치를 다시 확보하기 위해 영국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5년 후인 1980년 쌍무협정이 체결되었다.
기내비소의 게릴라 지도자들은 1973년 9월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는데 포르투갈은 1974년 9월 10일 독립을 허용하였다. 또한 코모로스의 정치지도자들이 1975련 7월 6일 UDI를 선포하였는데 결국 투표에 의해 99%의 다수가 프랑스에 남기로 한 마요테(Mayotte) 등 네 개의 섬을 제외한 세 개의 섬이 독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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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아프리카 개발조정회의(SADCC)

2001. 11. 13. 19:51
남부아프리카 개발조정회의(SADCC)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에 걸쳐 남부아프리카에는 소수 백인 지배로부터 다수 아프리카인 지배로 이행되는 격변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미 흑인 국가가 되어있던 탄자니아, 잠비아, 보츠와나, 모잠비크, 앙골라 등의 5개국이 1974년 전선국가(Front Line State)라는 협의체를 결성해 짐바브웨 해방투쟁을 정치 군사 양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와 병행하여 경제적인 면에서도 남아공의 남부아프리카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1980년 전선국가외에 짐바브웨, 말라위, 스와질랜드, 레소토 등 9개의 흑인국가가 협력하여 SADCC를 창설하였다. 이는 79년 3월에 발표되었던 남아공 보타수상의 「연합국가」(Constellation of States) 개념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반연합국가」이다.
이들 구성국의 특징은 첫째, 대부분이 내륙국으로 항구까지의 수송로 확보가 중요한 문제였고 둘째, 대부분이 광산자원이 풍부하나 남아공과 구미계 기업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셋째는, 탄자니아와 앙골라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투자, 무역, 노동, 수송, 등 각 부문에서 남아공에 의존이 심화되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오래 지속된 짐바브웨 해방투쟁에 많은 피해를 받고 있었다.
SADCC는 남아공에의 의존 감소라는 설립의도와는 달리 각종 의존관계 때문에 오히려 남아공과의 협력관계를 증진시키고 있다. 88년 11칠 보츠와나는 소다회, 제염공장 건설에 필요한 약 4억 8천만달러를 남아공으로부터 제공받기로 협정을 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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