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김영희) 킬리만자로를 마시는 사람들 22

아하야 키오비야 5

나는 절반 정도 무슬림이다. 아버지가 무슬림이고 어머니는 크리스쳔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나를 무슬림 학교에 데려가서 코란과 아랍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진짜 무슬림이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오랫동안 모스크에 가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는 금요일 날 기도를 한다. 나의 아내는 매우 진실한 무슬림이다. 나의 아이들은 그들이 선택하는 대로 맡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로 인한 차별이나 갈등은 없다. 다만 무슬림 자신들이 정부나 사회에서 그다지 좋은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을 하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니예레레가 한 것 중에 가장 잘한 것은 탄자니아를 종족과 종교의 다양성에 불구하고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이다. 식민지 시절 대부분의 학교들이 선교학교(미셔너리)였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학교에 갈 기회..

21. 아하야 키오비야 4

나는 현재 부구루니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 관습에 의하면 반드시 이웃과 알고 지내야 한다. 이웃이란 형제와 같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처음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이웃이기 때문이다. 나의 바로 이웃은 인도인이고 다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인데 아마 아이가 열다섯인가 가족이 아주 많다. 두 집다 잘산다. 인도인은 좋은 회사를 다니고 그의 아내도 일을 하고 또 한 집은 차 고치는 큰 정비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친밀하게 모이는 기회는 별로 없고 그저 만나면 인사를 한다. 한번 우리 집에서 파티를 열 때 이웃들도 왔었다. 우리의 친한 친구가 미대사관에서 일했는데 미국으로 떠나게 되어서 파티를 연 것이었다. 인도인은 매우 사람이 좋다. 보통 인도인은 자기들끼리 모여 살고 우리들 틈에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이 ..

20. 아하야 키오비야 3

내 친구들은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다. 우리는 전 학원에서 같이 일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학원에서 매일 만나고 주말 같은 때는 펍 같은데서 만나 한잔하기도 한다. 우리는 학원 강습, 방문 학습, 그룹 혹은 개인 교수 등 매우 융통성 있게 스와힐리어를 가르친다. 나는 나의 직업에 만족하고 있다. 나의 교육 배경으로 보아 지금과 같은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직장을 구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직장을 다닌다면 월급이 아주 작을 것이다. 그러나 이 스와힐리 강습을 통해 나는 농토도 사고 집도 짓고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풍족한 생활이란 가령 나의 아이가 아프면 좋은 병원에 갈 수 있고 좋은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공무원이 되었거나 다른 직장..

19. 아하야 키오비야 2

나도 부코바에 자그마한 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 경우 은퇴해서 부코바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다레살람에서 살고 싶다. 그래서 다레살람 근교 음베지에 농지를 샀다. 코코넛, 오렌지 바나나 등을 기르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작은 집을 지었다. 방이 두 개고 거실과 식당과 부엌이 있는 집이다. 은퇴를 하면 그리로 갈 것이다. 다른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까지 다 합치면 남자형제가 다섯 여자형제가 셋 있다. 다레살람, 모로고로, 부코바, 무완자, 아루샤 등지에 흩어져서 산다. 다들 결혼을 했다. 가까이 사는 남자형제들과는 자주 만난다. 그제도 모로고로에 사는 형이 왔다. 타자라에 근무하는 형은 오늘 만날 예정이다. 우리는 서로 자주 만나고 서로 돕는다. 나의 아버지는 다레살람에서 살기는 했지만 부코바..

18.‘나의 현재 가장 큰 관심은 나의 학원이 번창하는 것이다.’ - 야하야 키오비야 1 (남, 39세)

‘나의 현재 가장 큰 관심은 나의 학원이 번창하는 것이다. 번창해서 고용을 창출하고 싶고 내 자신 더 공부하고 싶다.’ 내 이름은 “야하야 키오비아”이고 카게라 지역에서 1962년에 태어났다. 하지만 내 부모님이 다레살람에서 일하고 있어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레살람에서 자랐다. 있었다. 여기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secondary)를 다녔고, ordinary level(중등학교)을 마쳤을 때 내가 태어난 부코바 지역에 있는 이흥고 고등학교에 다니도록 뽑혔다. 이것의 나에 대한 간략한 역사다. 지금은 외국인들한테 키스와힐리어를 가르친다. 아버지가 아내를 셋 두어서 가족이 매우 크다. 어머니는 나와 누나, 여동생(sisters), 이렇게 셋을 두셨지만 누이들이 다 죽어서 나 혼자만 남았다. 한명은 1979..

17. 오스타 킬로사 4

나의 건강은 고혈압이 문제다. 남편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최근 자동차에 받쳤는데 다리를 약간 다쳤지만 괜찮다. 말라리아, 에이즈가 흔한 병인데 이웃에도 에이즈 환자가 꽤 있다. 위험한 병이다. 항상 아이들에게 이른다. 학교에서도 교육을 시킨다. 고향친구, 학교친구가 있지만 멀리 떨어져 살아서 멀어서 자주 만날 수는 없고 주고 이웃과 잘 지낸다. 이웃에서는 마마 살로메와 제일 친하다. 그녀는 간호원이다. 남편은 회계사이다. 그들은 수입이 많아서 잘산다. 그들은 집이 있고 차도 있다. 마마 뇽게자는 (하진)시내 관청에서 일한다. 거기도 역시 월급이 적다. 우리 이웃은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하고 그러는 일은 있지만 말다툼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 바쁘지만 늘 서로 인사하고 조금 뜸하다 싶으면 가본다..

16. 오스타 킬로사 3

남편은 군인이어서 이리저리 멀리 가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 가면 6개월 씩 집에 안오기가 일쑤였다. 지금은 은퇴해서 집에 있다. 그동안 아무 하는 일이 없다가 얼마전부터 밤 경비원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아들 둘에 딸 다섯 아이들이 모두 일곱이다. 큰딸이 1971년에 태어나서 스물아홉이고 그 밑으로는 대강 세살 터울이다. 큰 애는 비서양성소를 나왔는데 결혼해서 지금은 남편의 직장을 따라 부코바에 살고 있다. 결혼할 때 우리에게 신부값을 4만쉴링 냈다. 둘째는 스물 여섯된 딸로 이 근처 유치원에서 가르친다. 중학교를 마치고 교사양성 컬리지를 다 끝냈지만 교원시험에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수를 하고 있다. 요즘은 옛날에 비해 일자리 구하기가 정말 어렵다. 셋째는 ..

15. 오스타 킬로사 2

나는 초등학교 8학년을 마쳤다. 키사 미션스쿨이었다. 학교까지 12킬로 정도 되었다. 아침 일찍 5시경 일어나서 가야했다. 매우 멀어서 항상 뛰어가야 했다. 그때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다니고 시험에 통과하면 5학년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학비는 거의 무료였고 학교에서 급식을 했다. 8학년을 마치고는 나는 이링가에 있는 교사양성학교(teacher's training college)에 갔다. 역시 미션스쿨이다. 학교 기숙사에서 다녔다.그때는 집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겁이 나서 가기가 싫었는데 나의 아버지가 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65년에 코스를 마치고 66년부터 교사가 되어 일을 했다. 18세 때부터 교사가 된것이다. 도도마의 음파우파우 초등학교로 가게되었다. 도도마는 이링가보다도 ..

14.‘아이들에게 먹이고 학교 보낼 돈이 있을 때 아무와도 다툼없이 잘 지낼때 나는 즐겁다.’ - 오스타 킬로사 1 (여, 53세)

‘아이들에게 먹이고 학교 보낼 돈이 있을 때 아무와도 다툼없이 잘 지낼때 나는 즐겁다. 아이들이 시험에 통과하면 더 기쁘다.’ 내 이름은 오스타이고 아버지는 아브라함 킬라사이다. 나는 음베야 지역에서 왔다. 냐큐사가 나의 부족이다. 1948년 생이다. 나는 소코이네 국민학교 교사이다. 나의 아버지는 1976년에 돌아갔다. 아마 70세 정도였을 것이다. 아주 나이가 많았다. 나의 어머니는 이름이 레지나이고 ( 나의 딸 이름이 레지나이다. 어머니를기억하기 위해서) 농사를 짓는다. 나의 아버지는 chief 였다. 큰 치프와 작은 취프가 있는데 나의 아버지는 작은 취프였다. 그래서 돌보는 지역이 작다. 타누 시절에는 그는 지역의 책임자로 일했다. 아버지는 수많은 커피 밭이 있었다. 나큐사는 소나 다른 짐승은 기..

13. 헤미드 음넴와 3

나는 나의 교사직을 1978년부터 키고마에서 시작했다. 키고마는 아주 멀어서 기차를 타면 2박3일이 걸린다. 키고마에서는 잘 지냈는데 나는 아직 젊었고 그 지역은 여기보다 모든 물가가 쌌기 때문이다. 키고마 지역에는 와하 부족이 산다. 그들은 타지방에서 온 사람들에게 잘 대하기 때문에 나는 아무 불편이 없었다. 거기서는 키와 말을 한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가르쳤는데 그 애들은 아직 스와힐리를 모르기 때문에 애를 먹었다. 나는 산수와 스와힐리와 지리를 가르쳤다. 내가 거기있을 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다레살람에 왔더니 아버지는 무힘빌리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얼마 후 돌아갔다. 지금 내가 있는 학교는 굉장히 크다. 학생수가 2천 5백명이다. 교사의 수는 54명인데 7명만 남자선생이고 나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