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야 키오비야 5

2004. 3. 12. 19:02
나는 절반 정도 무슬림이다. 아버지가 무슬림이고 어머니는 크리스쳔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나를 무슬림 학교에 데려가서 코란과 아랍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진짜 무슬림이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오랫동안 모스크에 가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는 금요일 날 기도를 한다.

나의 아내는 매우 진실한 무슬림이다. 나의 아이들은 그들이 선택하는 대로 맡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로 인한 차별이나 갈등은 없다. 다만 무슬림 자신들이 정부나 사회에서 그다지 좋은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을 하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니예레레가 한 것 중에 가장 잘한 것은 탄자니아를 종족과 종교의 다양성에 불구하고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이다.  
식민지 시절 대부분의 학교들이 선교학교(미셔너리)였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학교에 갈 기회가 더 많았다. 무슬림에 비하면 교육 수준이 아주 높았다. 그래서 그들이 좋은 직위를 누릴 기회도 더 많은 것이었다.

주말이나 시간이 있을 때면 나의 샴바에 간다. 매주 토요일. 가서 일도 하고 샴바를 돌본다.  거기에는 샴바를 돌볼 사람을 고용해 두었다.  

텔레비젼은 주로 뉴스를 많이 본다. 시엔엔 비비씨 로칼 뉴스등. 96년에 텔레비젼을 구입했다. 라디오로는 주로 음악을 듣는데 아프리카 음악 레게 카리비안 블루스 등을 좋아한다.

나의 교통 수단은 현재는 버스를 이용하고 있으나 우리 집으로 이사를 한 다음 내년에 차를 사려고 한다. 우리 직업에 차가 매우 필요하기 때문이다. 버스는 오는 시간이 정확하지 않아서 불편하다. 택시는 너무 비싸게 든다.

나는 아침 일찍 5시경에 일어나서 체조를 하고 씻고 아침을 먹고 7시 반에 집을 나서서 오피스로 간다. 더 늦으면 교통 체증이 심해서 늦기 때문이다. 오피스로 출근하여 아침 강의가 있으면 8시부터 시작한다. 방문 학습일 경우는 그 장소로 간다. 지금은 학원에 오는 학생이 엔지오에서 일하는 미국여자, 여기에서 연구를 하는 미국인 대학원생, 아일랜드인 등이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오피스로 와서 점심을 먹고 2시부터 다시 오후 강의를 시작한다. 그리고는 7시경 집에 가서 씻고 다음 레슨을 준비하고 아들과 같이 놀아주고 텔레비젼도 보고 집안 식구들과 이야기도 하고 저녁은 대개 8시 30분에 먹는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독서를 한다. 대개 소설이나 정치 역사 지리 여러 가지 책을 읽는다. 그리고 나서는 샤워를 하고 10시경 잠자리에 든다.

우리 학원이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점차 형편이 좋아지고 있는데 그것이 아주 즐겁다. 또 결혼했을 때 아주 좋았다. 또 아들이 태어났을 때 우리 집으로 이사할 때 등등.

처음 학원을 열었을 때 허가받고 하는 세금을 내고 하는 절차에서 담당 직원이 뇌물을 요구할 때 아주 불쾌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의료는 무료였다. 교육도 무상이었다. 그때의 정책은 모든 어린이는 적어도 7학년까지 마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문맹률이 매우 낮았다. 나이 많은 사람들까지도 성인반이 있었다. 거의 90%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가 학비를 못내서 많은 어린이들이 학교를 못가고 있다.

전에는 또 1당제였고 정부의 시책에 반대하면 억류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당제가 되어 비교적 언론의 자유가 있고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면 반대당에 가입할 수 있다.

지금은 부패가 너무나 심하다. 전에도 부패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고위직 공무원들이 공금을 유용내지 횡령한다. 아주 제도화 되어있다. 전에는 정도가 이처럼 심하지 않았다.  
전에는 텔레비젼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간직한 우리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청소년들이 영화나 텔레비젼에서 본 것을 본뜨려 하고 있다. 음악에 대한 선호도도 서양음악을 더 좋아한다. 아랍음악 힙합 음악 등. 청소년은 우리 전통음악이나 전통춤은 싫어한다. 그들은 미국사람처럼 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가난인데 점점 악화가 되고 있다. 사람들이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다. 정부의 시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 니예레레 대통령은 좋은 비젼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사회주의라는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니에레레 이후 대통령시절 극심한 부패가 시작되고 세금을 제대로 안내고 경제가 엉망이 되었다. 두 번째 대통령은 잘못 선출이 된 것이다. 음카파 대통령은 시도는 했지만 성공한 것 같지 않다. 그의 내각 선출은 너무 구태의연하고 부패한 인물이어서 도무지 우리가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 하나의 큰 문제점은 여당과 야당의 관계이다. 정치적 견해가 반대된다고 해서 서로 적이 될 필요가 없는데 그렇다. 전번의 잔지바르 사태도 그렇다.
에이즈 역시 큰 문제이다. 모든 가정이 직간접으로 해당되지 않은 집이 없다. 나만 해도 나의 여동생이 에이즈로 죽었다. 이는 사회경제적인 큰 문제이다. 에이즈로 희생되는 층이 주로 젊은 층이라 노동력 손실이 크다.
지금은 경각심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좋은 점은 탄자니아로 잘 통합되어있고 평화로운 나라라는 점이다. 우리 주위의 나라들은 다 분란에 휩쓸려있다. 그러나 여기는 평화롭다.
나의 현재 가장 큰 관심은 나의 학원이 번창하는 것이다. 번창해서 고용을 창출하고 싶고 내 자신 더 공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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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아하야 키오비야 4

2004. 3. 12. 18:50
나는 현재 부구루니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 관습에 의하면 반드시 이웃과 알고 지내야 한다. 이웃이란 형제와 같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처음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이웃이기 때문이다.

나의 바로 이웃은 인도인이고 다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인데 아마 아이가 열다섯인가 가족이 아주 많다. 두 집다 잘산다. 인도인은 좋은 회사를 다니고 그의 아내도 일을 하고 또 한 집은 차 고치는 큰 정비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친밀하게 모이는 기회는 별로 없고 그저 만나면 인사를 한다.

한번 우리 집에서 파티를 열 때 이웃들도 왔었다. 우리의 친한 친구가 미대사관에서 일했는데 미국으로 떠나게 되어서 파티를 연 것이었다. 인도인은 매우 사람이 좋다. 보통 인도인은 자기들끼리 모여 살고 우리들 틈에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이 사람은 아주 예외적이다.

나의 집에는 현재 아홉식구가 살고 있다. 나와 아내, 아들, 처제 아이들 둘, 처남 아이들 셋 그리고 일하는 여자아이가 둘이다. 아내의 오빠는 공부하러 어디를 갔는데 그동안 우리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돌봐주고 있다. 큰애가 열 세 살이다.

이런 식의 대가족 형태는 보통이다. 우리는 가족들간에 서로 돕기 때문에 내가 나은 형편에 있으면 다른 형제들의 자녀를 돕는다. 그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학교에 보내기도 하는 등. 이렇게 해서 우리 풍습은 계속 이어진다. 아마 내가 학교 다닐 당시는 우리 친척 누군가가 도왔을 것이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점차 이런 서로 돕는 풍습이 사라지고 있다.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돈이다. 음식 집 교통 전기 수도 모든 것이. 그래서 서로 돕고 싶어도 감당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아직도 그렇다. 시골에서는 먹는 것은 밭에서 나고 아직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으니까 식구가 늘어난다고 해서 돈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내 역시 수입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우리는 서로 어느 편에서 친척을 데려오건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나의 아내는 아버지 쪽에서는 남자형제가 하나이다. 그런데 아내의 어머니가 남편이 둘이었기 때문에 형제가 더 있다. 또 그녀의 아버지도 아내가 셋이었기 때문에 역시 그쪽 형제가 더 있다.

현재 나는 버스를 타고 다닌다. 부구루니는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나와 나의 아내는 수입을 서로 합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집을 지을 때도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에도.

집을 짓는 것은 우리가 아루샤에서 수입을 많이 올려 가지고 왔을 때 짓고 돈이 없어지면 두었다가 또 아루샤를 갔다와서 짓고 하는 식이었다. 우리는 아루샤에 3개월 가 있을 동안 아들과 아들 돌보는 애를 데리고 간다.
집에는 현재 텔레비젼, 비디오, 스테레오, 가구,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잘 사는 편이다.

나는 하루는 밥 콩 야채 다음날은 우갈리 콩 생선 야채 그 다음날은 칸데 등등 매일 바꾸어 먹는다. 어렸을 때는 늘 바나나를 먹었다. 우리는 부코바 출신이기 때문에 우리 부모는 바나나야말로 가장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다레살람에도 부코바 바나나가 있지만 비싸다. 나의 집에서도 가끔 바나나 음식을 먹는다. 나의 샴바에 부코바 바나나를 기른다. 진짜 부코바 바나나는 아니고 비슷한 종류이다. 진짜 부코바 바나나는 물을 아주 많이 주어야 한다.

아침에는 만다지나 빵 그리고 우리 밭에서 캐온 카사바 고구마 등을 먹는다. 점심에는 이 학원이 있는 장소에 식당 시설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사먹는다. 저녁에는 집에서 먹는다.

우갈리 자체는 맛이 없다. 반찬과 같이 먹어야 한다. 사람들이 우갈리를 먹는 이유는 배가 부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밥과 튀긴 생선과 코코넛 밀크로 만든 콩이다.

담배는 거의 피우지 않고 어쩌다 맥주를 마실 때 피운다. 맥주는 킬리만자로를 좋아한다. 주말이나 웨딩같은 때.

나는 건강한 편이어서 말라리아를 제외하고는 거의 아픈 일이 없다. 아플때는 병원에 간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안아픈 사람이 한번 아프면 죽는다는 말이 있어서 내 경우가 거기에 해당되는지 모르겠다.

나의 아내는 위궤양이 있다. 작년에야 알았다. 그래서 지금 특별한 음식을 먹고 있다. 양념이 센 음식은 못 먹는다.
우리는 아프면 병원으로 간다. 우리 전통약초는 파는 데가 없다. 마사이 족한테 가면 모를까. 아니면 전통 힐러가 있는데 이는 즉 위치독터 즉 엉터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어릴 때는 부코바에서 나는 전통 약초를 썼었다. 아주 잘들었다. 말라리아에 잘듣는 풀이 있었다. 아주 썼다. 그러나 지금은 구하기도 어렵고 해서 쓰지 않는다. 그래서 전통 약초에 대한 지식도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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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아하야 키오비야 3

2004. 3. 12. 18:46
내 친구들은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다. 우리는 전 학원에서 같이 일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학원에서 매일 만나고 주말 같은 때는 펍 같은데서 만나 한잔하기도 한다.

우리는 학원 강습, 방문 학습, 그룹 혹은 개인 교수 등 매우 융통성 있게 스와힐리어를 가르친다. 나는 나의 직업에 만족하고 있다. 나의 교육 배경으로 보아 지금과 같은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직장을 구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직장을 다닌다면 월급이 아주 작을 것이다. 그러나 이 스와힐리 강습을 통해 나는 농토도 사고 집도 짓고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풍족한 생활이란 가령 나의 아이가 아프면 좋은 병원에 갈 수 있고 좋은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공무원이 되었거나 다른 직장에 다닌다면 지금 내 형편은 지금보다 훨씬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와 나의 아내를 포함한 네 명의 동료가 학원을 서로 공동 소유로 하여 그 중에서 원장을 뽑고 내가 부원장이고 내 아내가 총무를 맡고 있고 또 한 교사는 강의 일정을 담당하고 있다. 이 학원을 만든 것은 4년전이다. 처음에는 아주 힘들었다. 허가를 내야하고 등록도 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뇌물을 주어야 했다.

우리가 속해 있던 전 학원에서는 물론 우리가 독립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 학원은 수입을 많이 올리는 반면 우리에게 주는 월급이 너무 적어서 우리를 착취하는 셈이었다.
우리는 학원을 늘리려고 생각하고 있다. 광고도 많이 하고 가르치는 수준도 더 높이고 교사 양성도 하여 다른 지방까지 확충하려고 한다.

나의 아내를 만난 것은 전 학원에서 같이 일할 때였다. 그래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나의 아내는 72년 생이니 나보다 열 살 어리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결혼한지 4년 된다.  

나는 아내를 하나 이상 둘 생각은 없다. 나의 아버지는 아내가 셋이었는데 그것은 큰 실수였다. 다른 아내를 얻기 위해서 이혼을 하면 아이들에게 큰 지장이 있다. 우리는 대가족(먼 친척까지 돌보는 제도)제여서 가족들이 다같이 아이들을 돌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장이 큰 것은 사실이다. 여러 아내를 거느린다는 것은 반대다.

나의 아내는 키고마 지역 족속에 속한다. 그러나 다레살람에서 낳고 자라서 키고마에 가본 일이 없다. 그녀의 아버지는 타누(독립 직전의 정당)의 설립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나이가 아주 많다. 아내의 어머니는 2년 전에 돌아가고 장인은 다른 아내와 살고 있다. 그도 역시 아내가 셋이다.  

나는 아직 아이가 하나 뿐이다. 두 살 반 된 아들이다. 우리는 아이를 셋 두려고 한다.

결혼식은 다레살람에서 했는데 여러 가지 섞인 의식이었다. 첫 번 식은 아내의 집에서 있었다. 세르(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와서 결혼식을 공인했다. 이는 낮에 행해지는데 일종의 종교적인 의식이다. 많은 질문을 한다. 가령 아내와 결혼을 원하는가 등등.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모여있고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모여 있으면 쉐르가 먼저 나에게 묻고 그 다음 아내가 있는 장소로 가서 묻는다. 이러한 의식이 끝나고 나서 잔치와 춤을 출 때는 같이 있는다.

이 공식 결혼식 다음에 아내 집안 친척들이 시내에서 장소를 빌려 샌드오프 (신부 집안 주최 잔치)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나서 나의 집안에서 장소를 빌려 결혼 잔치를 또 했다.

나는 절반 무슬림인데 아버지가 이슬람이고 나의 어머니는 기독교인이다. 아내의 집안은 이슬람 집안이다. 종교의식 때는 칸수(흰 긴 아랍식 옷)를 입었다. 그러나 나는 칸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옷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이제리아나 가나는 그들의 고유 옷이 있는데 우리는 없다. 우리도 그런 옷이 있으면 좋겠다. 샌드오프 파티와 웨딩에서는 양복을 입었다. 아내는 서양식 드레스를 입었다.

우리는 신랑 신부가 예물을 교환하는 풍습은 없고 하객들이 우리에게 결혼선물을 준다. 물론 나는 신부값을 냈다. 신부값을 치르지 않고는 결혼식을 할 수 없다. 나는 150000(약 25만원)쉴링을 냈다. 그러나 이 신부값 제도는 다음 세대에는 사라질 것 같다. 여자를 값을 치르고 사 오는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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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하야 키오비야 2

2004. 3. 12. 18:43
나도 부코바에 자그마한 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 경우 은퇴해서 부코바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다레살람에서 살고 싶다. 그래서 다레살람 근교 음베지에 농지를 샀다.  코코넛, 오렌지 바나나 등을 기르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작은 집을 지었다. 방이 두 개고 거실과 식당과 부엌이 있는 집이다. 은퇴를 하면 그리로 갈 것이다.    

다른 어머니에게서 난 형제까지 다 합치면 남자형제가 다섯 여자형제가 셋 있다. 다레살람, 모로고로, 부코바, 무완자, 아루샤 등지에 흩어져서 산다. 다들 결혼을 했다. 가까이 사는 남자형제들과는 자주 만난다. 그제도 모로고로에 사는 형이 왔다. 타자라에 근무하는 형은 오늘 만날 예정이다. 우리는 서로 자주 만나고 서로 돕는다.

나의 아버지는 다레살람에서 살기는 했지만 부코바에 돌아갈 생각으로 집을 짓지 않고 셋집에서 살았다. 대부분의 부코바 사람들이 다 그렇다.

나는 현재 나의 샴바의 길 가까운 쪽에 다시 큰 집을 짓고 있다. 지금은 셋집에서 살고 있는데 올해 말이면 집을 다 지어서 그 집으로 이사갈 것이다.

나는 다레살람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왔다. 그리고는 부코바에 있는 웅고 고등학교에 뽑혀서 그리로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나의 성적은 디비젼 씨 였다. 디비젼 씨는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매우 좋은 성적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학입학 경쟁이 너무 치열했기 때문에 대학교에는 뽑히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는 1년간 아루샤에서 내셔널 서비스 (일종의 군복무)를 했다. 퍼레이드, 무기 훈련, 정신 단련 등의 훈련을 한다. 나의 캠프에는 1200명 가량이 있었다. 남자 여자 다 같이 훈련을 받는다. 젊은이들에게 매우 좋은 훈련이다. 그런데 정부에 돈이 없어서 몇 년간 폐지되었다가 아마 다음달부터 재개할 것이라고 한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작은 개인 회사에 들어갔다。건설 회사였는데 나는 견습 회계(어카운트 트레이니)로 일했다. 그러나 그 회사 주인인 인도사람이 일하는 사람을 혹심하게 다루어서 싫었다. 게다가 월급이 너무 작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신문에서 외국인에게 스와힐리를 가르치는 교사 양성을 위한 모집 공고를 보고는 응시해서 면접을 하고는 채용이 되었다. 그때가 1988년이었다. 그래서 나를 나이로비로 보내어 교사 훈련을 시켰다.

나이로비에는 미국 평화봉사단에게 스와힐리어를 가르치는 기관이 있었는데 거기서 단기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다레살람에 돌아와서 스와힐리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 그 자리에 응시자는 무척 많았지만 6명이 뽑혀서 그중 4명은 탈락하고 결국 2명만 훈련을 받아 스와힐리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키우라고 하는 사립 스와힐리 교육 기관이다.

나는 거기서 6년 정도 일하다가 독립을 해서 프리랜서로 스와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회사는 무척 돈을 많이 버는데 우리한테 주는 월급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년 간 나 혼자서 일하다가 다른 교사들이 나에게 동조하여 루사라는 새로운 학원을 만들었다. 현재 우리 학원에는 나를 포함하여 교사가 4명이다. 나의 아내도 역시 교사이다.

우리에게는 비수기와 성수기가 있는데 비수기에는 하루에 4시간 정도 가르친다. 성수기에는 미국 평화봉사단과 계약을 맺어서 아루샤에서 가르친다. 그들은 한번에 60명 정도 자원 봉사자가 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는 아루샤로 가서 3개월 동안 가르친다. 단기 집중 코스이기 때문에 하루에 6시간 가르친다.      

이 직업으로 나는 많은 외국인을 만나게 되고 많은 다른 문화에 접할 수가 있다. 현재까지는 대부분이 스칸디나비아 나라들 즉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의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내가 학원을 냈을 당시 시다(스웨덴 원조기관)와 계약을 맺어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 연고로 나는 스웨덴을 다녀올 수 있었다. 1993년이었다. 나는 거기에 2개월 있었다. 내가 간 목적은 언어 교육장 견학이었다. 개발도상 국가들과 문화교류를 담당하고 있는 스웨덴 인스티튜트에서 후원을 하여 갈 수 있었다. 나는 외국어를 가르치는 여러 기관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카나다인, 그리고 미국인, 일본인 서부 아프리카 그밖에 유럽인 등 순으로 학생 수가 많다.일본인들은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숙제를 내주면 반드시 해 오는데 미국인은 피곤하면 숙제를 안 해 온다. 북구인들은 매우 친절하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니에레레 대통령 시절로 무상 교육정책이었기 때문에 나의 아버지가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에 정책이 달라져서 부모가 학비를 일정분 부담하도록 되어 아버지가 학비를 냈다. 좋은 고등학교에 좋은 성적이었는데도 대학교에 뽑히지 못해서 실망이 컸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학원이 자리가 잡히고 내 두 번째 집을 다 짓고 나면 대학 공부를 계속할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법률을 공부하고 싶다. 만일 다레살람 대학에서 받아 주지 않으면 개방대학에 등록해서 다니겠다.

법을 공부하고 싶은 이유는 장차 정치가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정치가가 되려면 물론 법을 알아야 할 뿐더러 학력도 있어야 하고 정신을 연마해야 한다. 내가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까닭은 우리나라에 기여를 하고 싶어서이다. 지금도 정치적인 지도자들이 있지만 모두 부패하고 나라를 망치고 있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내가 정치가가 되어 기여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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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나의 현재 가장 큰 관심은 나의 학원이 번창하는 것이다.’ - 야하야 키오비야 1 (남, 39세)

2004. 3. 12. 18:36
‘나의 현재 가장 큰 관심은 나의 학원이 번창하는 것이다. 번창해서 고용을 창출하고 싶고 내 자신 더 공부하고 싶다.’

  
내 이름은 “야하야 키오비아”이고 카게라 지역에서 1962년에 태어났다. 하지만 내 부모님이 다레살람에서 일하고 있어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레살람에서 자랐다. 있었다. 여기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secondary)를 다녔고, ordinary level(중등학교)을 마쳤을 때 내가 태어난 부코바 지역에 있는 이흥고 고등학교에 다니도록 뽑혔다. 이것의 나에 대한 간략한 역사다. 지금은 외국인들한테 키스와힐리어를 가르친다.

아버지가 아내를 셋 두어서 가족이 매우 크다. 어머니는 나와 누나, 여동생(sisters), 이렇게 셋을 두셨지만  누이들이 다 죽어서 나 혼자만 남았다. 한명은 1979년에 죽었다 - 어렸을 때 죽었다. 내 누나는 아직도 공부 하고 있는 동안에 임신하였다. 부모님이 아실까봐 유산을 하려고 했는데 잘못 되어 감염이 되었다. 부모님이 아셨을 때는 너무 늦어서 죽었다. 여동생은 1988년에 죽었다. 에이즈 때문에 죽었다.  

나의 아버지의 연세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70대쯤 되신 것 같고 지금도 살아계신다. 나의 아버지는 테크니션으로 탄자니아 부두조합(하버 오소리티) 에서 일했는데 지금은 은퇴해서  고향인 부코바로 돌아갔다. 그는 부코바에서 미셔너리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자리를 찾아서 다레살람으로 왔다. 퇴직할 때까지 하버 오소리티에서 일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경제적 형편이 좋았다. 적어도 그의 모든 자녀를 학교에 보낼만큼 넉넉하게 지냈다. 우리 형제들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단 하나 험이라면 여러 아내를 둔 것이다. 그는 무슬림이기 때문에 아내를 셋 둔 것은 전연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의 어머니는 둘째 아내이다. 그는 나처럼 키가 크고 건강하다. 그는 지금은 부코바에서 농사를 짓는다. 그는 다레살람에서 일했지만 할아버지로부터 큰 농토를 물려받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갈 때 땅을 아버지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부코바에 넓은 농지가 있는데 커피와 바나나 옥수수 등을 기르고 있다. 그는 또 시멘트 블록에 함석(양철) 지붕으로 된 크고 좋은 집을 갖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잘사는 편이다. 오래전 돌아가신 친할아버지는 족장이어서 아내가 아주 많았다. 아마 열이나 열다섯 정도 될 것이다. 그래서 아이도 많았다. 나의 아버지 형제는 아주 많다.

나의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어머니는 부코바에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무완자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는 나의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다레살람으로 왔다. 다레살람으로 와서는 국립 제분회사에 속한 병원에서 퇴직할 때까지 일했다. 은퇴하기 전에 아버지와 이혼했다. 아마 나의 아버지가 셋째 아내를 얻고 싶어했는데 어머니가 반대했기 때문에 이혼을 한 것 같다.

어머니 역시 은퇴한 후 부코바로 돌아가셨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아들 넷 딸 셋이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현재 부코바에서 외할머니와 삼촌과 함께 살고 있다. 할머니 연세가 아마 100세쯤 되실거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어머니는 내가 있는 다레살람으로 도로 올 것이다. 내가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

나이 많으신 분들이 태어났을 당시에는 정확히 숫자 세는 개념이 없어서 그들의 나이를 정확히 알기 힘들다. 그러나 세 세대는 그렇지 않다.  “새 새대”는 50년대 이후부터를 가리킨다. 우리 전통에 상대의 나이를 묻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적어도 일년에 한번은 부코바에 가서 친척들과 아버지를 만난다. 내가 너무 바빠서 못갈 때는 안부편지를 쓰지만 일년에 한번은 꼭 시골에 가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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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오스타 킬로사 4

2004. 3. 12. 18:23
나의 건강은 고혈압이 문제다. 남편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최근 자동차에 받쳤는데 다리를 약간 다쳤지만 괜찮다.
말라리아, 에이즈가 흔한 병인데 이웃에도 에이즈 환자가 꽤 있다. 위험한 병이다. 항상 아이들에게 이른다. 학교에서도 교육을 시킨다.

고향친구, 학교친구가 있지만 멀리 떨어져 살아서 멀어서 자주 만날 수는 없고 주고 이웃과 잘 지낸다. 이웃에서는 마마 살로메와 제일 친하다. 그녀는 간호원이다. 남편은 회계사이다. 그들은 수입이 많아서 잘산다. 그들은 집이 있고 차도 있다. 마마 뇽게자는 (하진)시내 관청에서 일한다. 거기도 역시 월급이 적다.
우리 이웃은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하고 그러는 일은 있지만 말다툼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 바쁘지만 늘 서로 인사하고 조금 뜸하다 싶으면 가본다. 주로 일요일날 교회에서 만나고 집으로 찾아 오간다.  

나의 종교는 카톨릭이다. 어려서 선교회가 집 근처에 있었다. 그들은 약을 주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카톨릭에 대해서 가르쳤다. 나의 아버지도 아플 때 영세를 받았다. 어머니도 나이가 많아지자 영세를 받았다. 남편은 성공회이다. 그러나 별로 열심히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두 카톨릭이다. 일요일마다 다 데리고 성당에 나간다. 미사가 3번 있다. 한번은 8시 한번은 10시 한번은 12시이다. 오늘은 성당에 못나갔다. 그러나 큰 딸은 무슬림과 결혼했다. 결혼하는 데 제한은 없다.  

내 월급은 아주 적다. 92000(약 15만원) 쉴링이다.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다른 교사들보다는 조금 많지만 생활하는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남편은 은퇴 후 내내 놀다가 한달 전부터 겨우 밤 경비원으로 나가는데 수입은 형편없다.
우리 식구의 한달 식비로 80000쉴링이 필요하다. 그러니 나의 월급을 가지고 애들 학비내고 먹고 살고 하려면 정말 힘이드는 것이다. 게다가 내 월급에서 세금도 내고 연금부금도 내야한다. 편의 퇴직금은 그 당시 6000쉴링이었는데 없어진지 오래다. 지금 시대는 아이들이 학교를 가야만 하는데 학비를 대기가 힘든다. 첫째, 둘째는 학비들어가는 것이 끝났지만 그 아래로는 여전히 학비가 들어간다. 때로는 학교에서 가불을 해야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돈이 아주 가치가 있었다. 전에는 월급을 받으면 한달이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월급을 받아도 그 다음주면 끝난다. 물가가 정말 올랐다. 뭐든지 너무나 비싸다. 설탕이 250쉴링에서 500쉴링으로 올랐다.
이렇게 살기가 힘드니 자연 병도 많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직업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다. 할 일이 없이 빈둥거리니 돈이 없어서 남의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종일 술을 마시기도 하고 소년도

아이들에게 먹이고 학교 보낼 돈이 있을 때 아무와도 다툼없이 잘 지낼때 나는 즐겁다. 아이들이 시험에 통과하면 더 기쁘다.
남편은 술마시기를 좋아하는 데 그가 너무 술에 취하면 슬프다. 그가 술을 안마시면 매우 기쁘다.  
그는 돈이 생기면 술을 많이 마신다. 나는 마케레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들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고혈압이어서 더 그렇다.

나는 은퇴한 후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 투쿠유에 집을 지을 생각이다. 커피샴바가 벌써 있다. 나는 은퇴후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다레살람에서 살 것 같지가 않다. 돈이 없이 다레살람에서 산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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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오스타 킬로사 3

2004. 3. 12. 18:21
남편은 군인이어서 이리저리 멀리 가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 가면 6개월 씩 집에 안오기가 일쑤였다. 지금은 은퇴해서 집에 있다. 그동안 아무 하는 일이 없다가 얼마전부터 밤 경비원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아들 둘에 딸 다섯 아이들이 모두 일곱이다.  큰딸이 1971년에 태어나서 스물아홉이고 그 밑으로는 대강 세살 터울이다. 큰 애는 비서양성소를 나왔는데 결혼해서 지금은 남편의 직장을 따라 부코바에 살고 있다. 결혼할 때 우리에게 신부값을 4만쉴링 냈다.  
둘째는 스물 여섯된 딸로 이 근처 유치원에서 가르친다. 중학교를 마치고 교사양성 컬리지를 다 끝냈지만  교원시험에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수를 하고 있다. 요즘은 옛날에 비해 일자리 구하기가 정말 어렵다.
셋째는 스물 넷 아들이다. 이녀석은 도무지 공부를 안한다. 이 애가 원하면 무슨 교육이든지 교육을 다 시킬텐데.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에서 놀면서 이것을 해보라고 해도 말을 안듣다가 지금 오후에 하는 어덜트 스쿨에서 기술을 배운다.
넷째는 딸인데 가장 공부를 잘해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지금은 다레살람 대학을 다닌다. 중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공립이기 때문에 돈은 거의 들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오히려 용돈을 타서 집에 가져온다.
다섯째는 부코바에서 증학교를 다니고 있고 여섯째도 중학교에 다닌다. 이 애는 천식으로 고생을 한다. 막내가 아들로 지금 열두살이다. 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 다닌다.

나는 아침에 7시에 출근을 한다. 걸어서 10분 걸린다.
아침에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씻고 아이들한테 티를 만들어 주고 내자신은 집에서 티를 마실때도 있고 너무 피곤할 때는 그냥 학교에 가서 티를 마신다. 학교에서 티가 제공된다. 막내는 아침에 무언가를 먹어야 하는데 어떨때는 그냥 학교로 달아난다.
나는 학교에 도착하면 수업을 하고 10시에 티 브레이크가 있다. 티 브레이크에는 티와 챠파티나 삼부사나 빵등을 곁들여 먹는다. 티는 학교에서 제공되고 다른 것은 각자 사야한다.
인노센트는 돈을 주면 무엇을 사먹고 아니면 집으로 뛰어와서 티를 마시고 간다.
학교는 2시에 끝난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는다. 그때는 아들이 학교에 갈 시간이다.  
오후에는 약간 쉬고 나서 세시부터 집에서 과외를 해준다. 지금은 과외학생이 5명이다. 한명당 한달에 2000쉴링씩 낸다. 일주일에 세 번 한시간씩 가르친다. 키스와힐리와 산수를 가르친다.
그 다음은 빨래를 하고 저녁을 짓는다. 저녁은 8시나 그 후에 먹는다. 늦은 식구들은 나중에 따로 먹는다.
아침은 티와 빵으로, 점심은 거의 항상 우갈리를 먹는다. 준비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밥을 지으려면 돌도 골라야 하고 시간이 걸린다. 우갈리와 콩, 시금치, 가끔 고기, 생선 등을 곁들여 먹는다. 가끔 도마토도 같이 먹고. 아이들이 밥하는 것을 도운다.
우리는 게나 새우같은 것은 싫어한다. 음베야 전통요리는 바나나를 벗겨서 쌀어서 햇볕에 말린다. 그런후 찧어서 가루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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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오스타 킬로사 2

2004. 3. 12. 18:20
나는 초등학교 8학년을 마쳤다. 키사 미션스쿨이었다. 학교까지 12킬로 정도 되었다. 아침 일찍 5시경 일어나서 가야했다. 매우 멀어서 항상 뛰어가야 했다. 그때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다니고 시험에 통과하면 5학년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학비는 거의 무료였고 학교에서 급식을 했다.
8학년을 마치고는 나는 이링가에 있는 교사양성학교(teacher's training college)에 갔다. 역시 미션스쿨이다. 학교 기숙사에서 다녔다.그때는 집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겁이 나서 가기가 싫었는데 나의 아버지가 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65년에 코스를 마치고 66년부터 교사가 되어 일을 했다. 18세 때부터 교사가 된것이다. 도도마의 음파우파우 초등학교로 가게되었다. 도도마는 이링가보다도 더 집에서 멀기 때문에 나는 매우 겁이 났다. 거기서 4년을 가르쳤다. 나는 결혼도 거기서 했다.
사실  아버지는 학교를 마친 후에는 바로 결혼을 하라고 했다. 나의 큰 언니는 아버지가 신랑감을 골라주었다. 아버지의 말을 안들으면 쫓겨나고 어머니가 곤욕을 치른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신랑감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때 미스터 마가울라(남편)은 다레살람의 무굴라니 제이케이티에서 군인이었다. 그는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곳에 부모를 방문하러 왔다가 나를 만났다. 내가 다른 학교로 전근이 되자 그리로도 찾아오고 열심히 쫓아다녔다. 그래서 나는 그를 고향집으로 데려가서 나의 부모님께 소개하자 승낙을 했다. 남편은 다우리를 치르고 결혼했다. 결혼식은 내 근무지의 성당에서 했다. 작은 어머니와 브라더가 왔다. 나의 부모는 결혼식에는 참석을 안하는 것이 관습이다. 1970년 이었다. 나는 그때 22살이었고 남편은 25살이었다.
성당에서 결혼식을 한 후 시집으로 가서 잔치를 하고 일 주일을 머물고 다레살람으로 왔다.
결혼하고 남편의 부모 집에 일 주일 머물때면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시어머니가 다 일을 했다. 나는 2주 휴가를 받아서 1주일은 나의 친구의 어머니 집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교육을 받고 결혼식 한 후 1주일 동안은 시댁에 머물렀다. 시부모님은 아직도 살아계신다.
결혼식은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남편은 양복을 입었다.    
결혼 후 다레살람으로 와서 남편이 있는 제이케이티의 캠프에 머물면서 처음에는 캠프 가까이에 있는 재활교육원에서 가르쳤다. 거기서 2년 가르친후 음토니 초등학교에서 내내 가르쳤다.
그리고 나서 나는 캠프에서 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터를 사서 집을 지었다. 나는 여기서 거의 30년을 살아왔다. 남편이 87년부터 94년까지 8년간 숨바왕가(탄자니아 남쪽 국경근처)로 전출이 되어 거기가서 산 해를 빼놓고는 내내 여기서 살았다. 우리가 숨바왕가에 갔을 때는 나의 큰언니의 딸이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 애가 계속살고 나머지는 세를 놓았다.  
남편이 숨바왕가로 전근을 했을 때 나도 그곳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남편은 그곳에서 은퇴를 했다. 그후 다시 다레살람으로 와서 나는 지금의 소코이네 학교에서 내내 근무하고 있다. 나는 아마 이 학교에서 은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원래 55살에 은퇴하게 되어있는데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60살까지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내년이면 55세여서 은퇴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60살까지는 일을 할 수 있지만 굉장히 피곤하다.
우리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나는 가르치는 직업을 좋아한다. 다른 교사들과도 잘 지낸다. 경조사가 있을 때 참석하고 서로 돕는다. 한반에 125명이 되기도 하다. 너무 학생수가 많다. 교과서도 모자라고 책걸상도 모자란다.  
학교에서의 문제는 주로 학부형에게 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교육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다. 학생들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어떤 학생들은 결석을 많이 하고 남학생들은 아주 거칠다. 교실 밖에서 허락을 받지 않고 나가고 담배를 피우고 훔치고. 고학년들.
벌을 주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다. 오늘 벌을 주어도 내일 또 그런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학부형들이 학비를 못내서 학생들이 결석하는 일이 많고 학생들이 안나오기도 해서 애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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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아이들에게 먹이고 학교 보낼 돈이 있을 때 아무와도 다툼없이 잘 지낼때 나는 즐겁다.’ - 오스타 킬로사 1 (여, 53세)

2004. 3. 12. 18:17
‘아이들에게 먹이고 학교 보낼 돈이 있을 때 아무와도 다툼없이 잘 지낼때 나는 즐겁다. 아이들이 시험에 통과하면 더 기쁘다.’

내 이름은 오스타이고 아버지는 아브라함 킬라사이다. 나는 음베야 지역에서 왔다. 냐큐사가 나의 부족이다. 1948년 생이다.
나는 소코이네 국민학교 교사이다.
나의 아버지는 1976년에 돌아갔다. 아마 70세 정도였을 것이다. 아주 나이가 많았다. 나의 어머니는 이름이 레지나이고 ( 나의 딸 이름이 레지나이다. 어머니를기억하기 위해서) 농사를 짓는다.
나의 아버지는 chief 였다. 큰 치프와 작은 취프가 있는데 나의 아버지는 작은 취프였다. 그래서 돌보는 지역이 작다. 타누 시절에는 그는 지역의 책임자로 일했다.
아버지는 수많은 커피 밭이 있었다. 나큐사는 소나 다른 짐승은 기르지 않고 농사만 짓는데 주로 커피와 바나나이다.
아버지는 아내가 여섯명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둘째 부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어머니와 맨 마지막 아내만 살아있고 나머지는 다 죽었다. 아버지로부터 아이들이 모두 25명 태어났다. 지금은 그중 몇은 죽고 나머지는 살아있다.
각 아내들의 집이 따로 있고 아버지의 집 역시 따로 있었다. 아버지의 집은 커서 무슨 일이 있으면 거기서 모였다.
우리 어머니한테서 난 형제는 언니 둘뿐이고 남자형제가 없다. 큰 언니는 죽고 나와 둘째언니 만 남았다. 어머니는 고향인 음베야의 투쿠유에서 지금 언니와 살고 있다. 둘째언니는 아이들이 8명이다. 남편은 죽었다. 농사를 짓는다.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장례식에는 물론 갔었다. 매장은 낮에는 하지않고 저녁에만 한다. 수많은 사람이 왔었다. 이웃들, 다른 칩들. 장례기간동안 가족들은 배 부분을 천으로 묶고 신발은 신지 않는다. 딸들은 걸으면 안되고 무릎 걸음을 걸어야 한다. 여자들은 장례 절차는 볼 수 없다. 칩의 장례식 기간은 길다. 2주일 정도 걸렸다. 응고마(전통 음악과 춤)가 있고. 소를 여러마리 잡았다. 또 다른 칩들이 소를 가져오고 아들들이나 사위가 소를 가져와야 한다. 그밖에 밥, 바나나 등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한다. 장례가 끝나면 가족들은 머리를 깍는다. 머리가 남아 있으면 액운이 온다고 믿는다. 장례 때는 아무도 씻으면 안되고 매장 후 우리는 몸을 씻는다.
딸들과 아내들을 마을 여자들이 업어서 강으로 데려간다. 아직 걸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여자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강물에 가서 몸을 씻었다.
아버지의 밭은 그대로 거기 있고 우리 어머니를 위시해서 가족들이 살고 있다. 맨 큰 아들이 전체적으로 돌본다.
큰 언니는 학교에 안다녔고 둘째언니는 초등학교 3년까지 다니고 결혼했다.
나의 한 남자형제는 나이로비 대학을 마치고 한 여자형제는 중등학교 6학년을 마치고 4 남자형제가 폼4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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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헤미드 음넴와 3

2004. 1. 3. 21:06
나는 나의 교사직을 1978년부터 키고마에서 시작했다. 키고마는 아주 멀어서 기차를 타면 2박3일이 걸린다. 키고마에서는 잘 지냈는데 나는 아직 젊었고 그 지역은 여기보다 모든 물가가 쌌기 때문이다. 키고마 지역에는 와하 부족이 산다. 그들은 타지방에서 온 사람들에게 잘 대하기 때문에 나는 아무 불편이 없었다. 거기서는 키와 말을 한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가르쳤는데 그 애들은 아직 스와힐리를 모르기 때문에 애를 먹었다. 나는 산수와 스와힐리와 지리를 가르쳤다.

내가 거기있을 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다레살람에 왔더니 아버지는 무힘빌리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얼마 후 돌아갔다.

지금 내가 있는 학교는 굉장히 크다. 학생수가 2천 5백명이다. 교사의 수는 54명인데 7명만 남자선생이고 나머지는 다 여교사이다. 나는 이 학교에 벌써 18년이나 근무를 해서 이제 다른데로 옮기고 싶다.
지금 내가 있는 초등학교에는 한 학급이 100명이다. 교실은 17개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이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뉜다.

초임교사의 월급은 40000쉴링 정도(약 6만원)이고 정년은 60세이다. 은퇴 후에는 연금이 나온다.

내가 어려서 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와 학용품을 주고 급식을 했으나 지금은 그러는 아무데도 없다.
요즈음은 교과서가 너무나 부족하다. 가령 책방에 가서 교과서를 사려해도 6학년 산수교과서가 겨우 열권 밖에 안된다. 세 학급이면 한 반에 겨우 3권이 돌아가는데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책에 있는 문제를 몽땅 칠판에 베껴놓고 풀라고 한다. 전에는 둘이 앉는 책상 하나에 책 한권이 돌아왔는데 지금은 책상하나에 네명 여섯명이 앉고 그나마 어떤 교실은 책 걸상이 없어서 바닥에 앉아서 공부를 한다.

나의 월급은 70000쉴링이다.(약 12만원) 생활비가 비싸기 때문에 월급은 충분하지가 않다. 한가족의 하루 생활비가 최소 2000쉴링 드는데 한달이면 그것만도 60000쉴링에 집세를 생각하면 월급이 모자란다.

더구나 큰 딸이 있어서 돈이 훨씬 많이 들어간다. 그 애는 작년 중학교를 마쳤는데 시험성적이 별로 안좋아서 공립 고등학교에 뽑히지 못했다. 그러나 어떻든 그 애를 사립고등학교라도 보내려고 두 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1년 학비가 매우 비싸다. (약 50만원) 아이 교육 시키는데에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나는 지금 큰 딸이 하나니까 고등학교를 보내려고 하지만 아이가 여럿이면 보낼 수가 없다.

우리는 음췌조라는 것이 있다. 가령 6사람이서 한달에 25000 쉴링씩 돈을 내서 한 사람이 가져가는 제도이다. 나와 내 동생과 다른 교사 4명이 이 음췌조이다.      

월급이 너무 작기 때문에 과외를 안 할 수가 없다. 과외학생이 25명인데 교사 3명이 교대로 가르친다. 나는 이 수입으로 음췌조를 낸다.

다레살람에는 여교사가 훨씬 많은데 대개 여교사들은 그 남편들이 충분한 수입이 있기 때문에 과외를 잘 안한다. 남교사들이 많이 한다. 학생들은 그 부모과 과외비를 낼 수 있는 학생만 과외를 한다.

나는 매일 7시에 일어나서 세수를 한 다음 아침(티)을 먹는다. 그 다음 학교에 간다.  7시 반부터 수업을 시작해서 1시까지 끝내고

다음 집에 가서 우갈리를 먹고  3시부터 과외를 한다. 그 다음에는 친구들을 만나서 바에 가기도 한다. 저녁에는 다음날 수업을 약간 준비한 다음 잔다. 금요일에만 기도를 한다. 그러나 라마단 기간에는 금식을 한다.

나는 일주일에 맥주 한병 정도 마신다. 일주일에 하루정도 바에가서. 죵고와 술마시는데 어떨때는 그가 어떨때는 내가 돈이 있는대로 번갈아가며 낸다. 절대로 따로 계산하지 않는다.  맥주는 킬리만자로보다 필스나 아이스를 좋아한다. 찬 맥주가 좋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따뜻한 맥주를 좋아한다. 나는 폼배(전통술)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키고마에 있을 때 품베를 마셨다. 저녁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클럽에 가서 로컬 비어를 마신다.  

나는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 집을 짓고 싶다. 나는 키마라에 땅을 가지고 있다. 2년 전에 샀다. 그러나 저축을 할 수가 없다. 딸을 위해서 돈을 모으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딸은 교육을 잘 시키고 싶다.

( 2000. 5. 24, 25  다레살람 민속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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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헤매드 음넴와 2

2004. 1. 3. 20:49
나는 1979년스물세살 때 결혼을 했다. 부모가 나의 아내를 골라주었다. 그녀는 킬와 출신이다. 해안 지역에서는 아버지가 상대자를 골라주는 것이 관습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가 골라주지 않는다.

그러나 결혼 4년째 되던 해 이혼을 했다. 아침 열시 딸이 아파서 보러 학교에서 집으로 갔는데 아내가 집에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학교에 가는데 가는 길에 아내가 다른 남자랑 같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그 뒤를 따라갔다. 그랬더니 그들이 여관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타라카(이혼을 공표하는 서류)를 썼다. 아내는 나의 월급이 너무 적어서 다른 남자를 찾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이 타라카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서 몸을 팔든지 맘대로 하라고 했다. 그 후 소식을 듣고 장인이 왔는데 이야기를 듣더니 더 이상 함께 살라고 말하지를 못했다. 내가 이혼할 당시 나의 아내는 한 스무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때 스물 여섯이었다.

해안지방에서 타라카를 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 절차란 가령 예를 들어 내가 타라카를 써서 내 아내에게 주면 아내는 그 편지를 가지고 원래 자기 집으로 간다. 그러면 그녀의 아버지가 나의 집으로 와서 왜 타라카를 썼냐고 물어서 이유가 타당하면 이혼이 된다.

두 번째 결혼은 1997년 마흔 한 살에 했다. 어느날 친척집에 갔는데 어떤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래서 인사를 하고 결혼했냐고 물었더니 안했다고 해서 데이트를 했다. 맘에 들어서 결혼하자고 했더니 응락을 했다. 그래서 내가 그녀의 부모에게 결혼을 승낙해달라고 편지를 써서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지금 스물 일곱이다. 나는 장인에게 100000쉴링을 다우리로 지불했다.

아내는 젊고 공손하고 예뻐서 정말 사랑스럽다.  그녀는 자라모족 출신이다.
아내는 챠파티 툼부아(빵) 등을 만들어서 판다. 매일 1500 - 2000 쉴링 정도를 번다. 그래서 우체국에 30000 - 40000 쉴링 정도 저금을 한다. 아내는 자기가 번 돈으로 자기 가족들을 돕는다. 아내의 어머니는 혼자 작년 6월 장인이 돌아갔기 때문이다.

나의 첫 번째 결혼 때는 식을 하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가 식을 해줄만큼 돈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결혼때는 식을 했는데 나의 친척들이며 내 학교 동료 교사들이 많이 부조를 했고 또 나도 돈을 얼마간 보탤 수 있었다. 식은 무와냐마라(면담자가 사는 곳)에 있는 릴라 모텔에서 했다. 가족은 물론 친척들, 학교 동료교사들, 이웃들이 많이 왔다.

결혼식을 하려면 우선 친척들이 결혼위원회를 만들어서 소요경비를 책정하고 모든 아는 사람들에게 카드를 보내서 얼마내겠나 써넣게 하여 경비를 충당한다. 또 차를 빌려서 집에서 결혼식장인 빌라 모텔까지 타고 가고 타고 왔다. 빌라모텔은 모텔이자 바이자 여러 가지 식을 하는데로도 쓰인다. 결혼식 잔치에는 콜라니 판타 같은 음료수들과 밥 닭고기 소고기 등 음식이 풍성했다. 지금 결혼한 지 3년 되었다.  

첫 번 결혼에서 얻은 딸이 지금 19세이고 두 번째 결혼식에서는 아직 아이가 없다.  

나는 작은 아버지 셋에 숙모는 한사람이 있다. 우리는 서로 가까이 살기 때문에 어머니나 친척을 아주 자주 만나는 셈이다. 가령 어머니경우는 어머니가 날마다 우리집에 오든가 아니면 내가 어머니를 보러 간다. 동생이나 누나 등 형제들도 자주 만난다. 마치 아직 시골에서 사는 것 같다.

결혼식이나 누가 상을 당하면 친척들이 다 기부금을 내고 모인다. 가령 지난 일요일에는 콩고웨에 먼 형제뻘되는 이의 장례식이 있어서 갔다왔다. 그는 금요일날 말라리아에 걸려 토요일에 죽어서 일요일날 장례식이 있었다. 그 장례식에 나는 3천쉴링(사천 오백원 상당)을 기부했다. 다른 친척도 돈을 내고 이웃도 돈을 내고 해서 다 모아서 산다를 산다. 산다란 죽은이에게 입히는 옷이다.  
결혼식에는 대개 5000 쉴링에서 10000 쉴링 정도의 기부금을 낸다. 3개월 전에 나의 작은아버지의 딸 결혼식이 있었다.

나의 친구로는 죵고, 챨리스, 압둘 등 많은 친구가 있다. 다들 나와 나이가 같다. 이들은 다 나의 이웃들이다. 파올로라는 친구는 키감보니에 산다. 파올로는 학교(중학교)친구로 나와 같은 반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목수, 배관공, 장사하는 친구, 서기(clerk) 등이 있다.    
내 친구들의 교육정도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몇은 중학교를 졸업한 친구도 있다.

이웃친구들은 대부분 돈을 잘 버는 것 같지않다. 그저 나와 같은 정도일 것이다.
이웃 중 죵고와 압둘 두 친구는 날마다 만난다. 죵고는 배관공이고 압둘은 장사를 한다. 다 무슬림이다. 그들이 우리집으로 오기도 하고 내가 가기도 한다. 죵고는 날마다 맥주를 두병씩 마시고 압둘은 소다만 마신다. 파올로도 맥주를 마시고 나는 어쩌다 한번씩 맥주를 마신다. 우리를 늘 서로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웃과는 서로 돕고 잘 지낸다. 한번도 다툰적이 없다. 죵고는 루피지출신이고 압둘은 모로고로 출신이다. 탄자니아에는 이제 종족간의 차별이 없다. 누구나 다 스와힐리어로 통하고 다만 같은 부족을 만났을 때만 부족어를 쓴다.
죵고는 축구를 좋아한다. 영스 아프리칸 스포츠 클럽을 후원한다. 전에는 작은 팀에서 경기를 하기도 했다. 가끔 돈이 없으면 나한테 5천 쉴링이고 오백쉴링이고 꾸러온다. 내가 꾸어주면 나중에 갚는다. 나도 그에게 돈을 꿀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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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는 집을 짓고 싶다. 그러나 저축을 할 수가 없다 - 헤매드 음넴와 1

2004. 1. 3. 20:45


헤매드 음넴와 (남, 44세)  
          
" 나는 집을 짓고 싶다. 그러나 저축을 할 수가 없다. 딸의 교육을 위해서 돈을 모으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헤매드 음넴와이고 44년전에 태어났다.(1956년생)  나의 직업은 교사로무와냐 말라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나의 부모는 원래 해안지역의 루피지 출신인데 1952년 다레살람으로 이주했다. 루피지는 농촌이어서 농사를 지어야 하나 아버지는 땅이 없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찾아서 다레살람으로 온 것이다. 다레살람에 와서 아버지는 탄자니아 부두용역 회사에 취직을 하여 1956년부터 1981년 까지 일했다. 아버지의 월급은 아주 적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퇴직한 이듬해에 작고했는데 60세 였다. 척추결핵으로 원인이라고 사망 진단서에 씌여 있었다.

루피지에는 물론 지금도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다. 루피지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완데응게레코 족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완데응게레코 말을 아주 조금밖에 모른다. 집에서 스와힐리어를 주로 썼기 때문이다. 나의 아주머니 한분(아버지의 형제)은 완데응게레코 말을 주로 하고 스와힐리어는 못해서 의사소통이 잘 안된다.

나의 아버지는 아랍어를 좀 공부를 했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 당시는 학교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학교가 있어도 굉장히 멀었기 때문에 학교에를 갈 수가 없었다.
나의 어머니는 지금 한 60세쯤 되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얼굴이 검고 키가 크고 뚱뚱한 반면 어머니는 피부가 덜 검고 키가 작고 몸집이 가늘었다.

나는 원래 5형제였으나 둘은 죽었다. 형이 어려서 죽었고 누나가 1971년에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린디에서였다. 누나는 매형이 린디 사람이기 때문에 거기서 살다가 다레살람에 오려고 버스를 탔는데 변을 당했다. 지금은 두 살 아래 남동생과 다섯 살 아래 여동생 3형제뿐이다.

현재 어머니가 사는 집은 우리 집 바로 부근이다. 그 집은 외삼촌 집인데 외삼촌은 다른데서 살고 대신 어머니가 사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집에서 여동생과 여동생의 아이들 둘 즉 손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나의 여동생은 직업이 없다. 남편도 없다. 몇 년 전 까지 남편이 있었는데 매제가 타라카를 썼기 때문에 (여동생을 내쫓았기 때문에) 지금 혼자 산다. 그는 직업도 없고 돈도 없기 때문에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어서 타라카를 쓴 것이다. 지금 여동생은 집근처 노점에서 땅콩과 달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큰 가게에서 물건들을 사와서 노점에서 파는 것이다. 아이가 둘 있다.
나의 동생도 바로 나의 집 근처에 산다. 아이가 넷이다.  
나의 외삼촌은 자신의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나의 어머니를 많이 도와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와 남동생이 나의 어머니를 도와드린다.
매달 쌀, 밀가루, 식용유 등을 어머니한테 사드린다. 필요할 때는 돈도 드린다.

나는 다레살람에서 태어났다. 줄곧 무와냐말라에서 살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지금처럼 집이 많지 않았다. 차도 적었다.
그때의 집은 진흙으로 짓고 지붕을 코코넛잎으로 엮었다. 물은 근처의 샘에서 길러왔고 전기대신 파라핀 기름과 키바타리를 썼다.
아침은 전날 저녁에 남은 것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티만 마셨다.

나는 11살부터 15살 까지 키논도니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시험성적이 좋지않아 공립중학교에는 떨어지고 집에서 놀았다. 그러다 1976년 20세 때 킬리만자로 지방의 우상게에 있는 교원 양성소에 2년간 다녔다. 졸업 후 첫 번 부임지가 키고마였고 그곳에 5년 있은 다음 줄곧 다레살람 무와냐 말라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다레살람으로 온 후 나는 91년에 성인학교에 등록하여 94년에 중학교 과정(form 4)을 마쳤다.    

교사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초등학교만 마치고 교원 양성소를 나온 사람, 중학과정을 마친 사람, 고등학교 과정과 초급대학과정을 마친 사람 들이 있다. 교사 양성소과정은 당시는 정부의 지원으로 숙식과 교육 모든 것이 무료였다. 지금은 학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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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샤 살롬 압달라 2

2003. 12. 31. 21:30
아이들은 두 번째 남편에게서 지금 나와 같이 일하고 있는 큰아들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그중 하나는 죽었다. 세 번째 남편에게서는 아이를 넷 낳았다.

큰아들은 1962년 막내아이는 1983년 생으로 지금 열여덟이다. 딸은 호텔에서 일하고 알리도 호텔에서 일하고 하나는 택시운전사이고 하나는 아직 학교에 다니고 딸 하나는 결혼해서 집에 있고 다른 딸 하나는 나와 같이 일하고 있고 셋은 오만에 있다. 그애들은 일자리를 찾아 거기에 간 것이다.

딸 하나는 중학교 1학년까지만 마쳤다. 그리고는 결혼해버렸다. 정말 실망스럽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아이들을 교육을 시키려고 했는데. 여기 지금 나를 돕고 있는 애는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시험에는 떨어졌다. 그래서 막내아들만큼은 제대로 교육을 시키고 싶다. 그는 전기만지는 것을 좋아한다. 전기제품을 잘 고친다. 다리미 텔레비 비디오 같은 것을 다 고친다. 그 애는 지금 중학교 3학년인데 올해 시험에서 학교 전체 6 등을 했다. 여기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최선을 다해 장학금을 얻어 외국으로 보내려고 한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으면 그 애가 유일하게 제대로 가르친 애가 될 것이다.

나의 전남편들은 나나 아이들을 눈꼽만치도 도와준 일이 없다. 나 혼자 아이들을 길러냈다. 나의 부모나 형제들도 나를 도울 형편이 못되었고 나 혼자 다 감당을 해야했다.

이제 나는 아들과 딸을 도와준다. 나의 한 아들이 택시 운전사인데 벌이가 전연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내가 도와준다. 내 집이 있는데 아들에게 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 애 가족과 같이 살고 싶지는 않다. 막내아들도 거기에 있다.

지금 나는 나와 같이 일하던 딸 집에서 산다. 그 딸은 현재 영국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는데 아마 5년 후에 돌아올 것이다. 그때쯤은 나의 두 번째 집도 다 짓게 될 것이다.  

나의 아들이 같이 일하고 있을 때였다.  한 남자가 쿠션을 만들고 싶어했다.  아들이 하루는 내가 결혼하면 내 가정을 돌봐야 하니까 아무것도 어머니를 도와줄수 없다 그러니 이 쿠션카바를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만들고 또 만들어서 관광철에는 아주 많이 팔았다. 오늘날까지 주문을 받아서 쿠션 만드는 일을 하는데 나와 큰 아들과 딸과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요새는 올해 내내 경기가 좋지 않다. 잔지바르 사태 때문에 관광객이 발이 끊긴 탓이다.

나는 현재 30명을 고용하고 있다. 우리 그룹은 다 이웃여인들이거나 아니면 아이가 딸린 이혼모이다. 잔지바르에서 이혼 즉 남편이 아내를 쫓아내는 일은 아주 흔하다. 우리 그룹에서도 30명중 20명이 남편에게 쫓겨난 여자들이다. 여자들에게는 아이까지 딸린다. 남편이 아이들을 맡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모여서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침대보도 만들고 벽걸이 쿠션 등을 만드는데 주문을 받기도 하고  또 해외에 팔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잔지바르 시내에 세낸 가게가 있다.  

현재는 다른 탄자니아 가정처럼 손자 손녀를 데려다가 기를 여유가 없다. 사업 때문에 너무나 바쁘기 때문이다.
3개월전 나의 딸이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풍습은 점심에 남자들이 마당에서 음식을 먹고 다 나가면 여자들이 기다렸다가 치우고 거기에서 먹고 쥬스와 소다를 마시고 음악을 틀고 춤추고 논다. 오후에는 결혼할 신랑이 남자들과 모스크에 가서 결혼식 서약을 한다. 그리고 집으로 오면 저녁에는 신부를 데리고 간다.

신부 부모는 신랑집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가지 않는다 친척이나 자매들은 갈 수 있다. 대신 신부 집에서는 요리를 많이 해서 신랑 집에 보낸다.  7일 동안 먹을 음식을. 하루는 신랑친구. 하루는 신부 친구. 하루는 이쪽 친척 하는 식으로 7일 간 잔치를 한다.
신부는 긴 드레스를 입고 얼굴을 가리고 남편이 들어오면 그는 다리를 여기에 올리고 신부는 땅에 앉고 신랑은 서서 기도를 올리고 저녁에는 신랑이 사람들과 함께 신부를 데리러 와서 신부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신랑의 집으로 가면 끝난다.
모스크는 특별한 의식 때 간다. 날마다 기도를 한다. 하루에 5번 씩.

나는 나의 아이들이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행복하다. 또 명절 때 나의 아이들과 나의 자매들과 이웃들과 함께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즐겁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작은 선물을 준다.
나의 아이들하고 부딪칠때 아주 슬프다. 요즘 아이들은 아주 제멋대로다. 영국에 간 나의 딸이 나한테 건방지게 군다. 그래서 내가 화가 난다.

나는 내 사업에서 돈을 벌어 사업을 늘리고 쿠션카바를 외국에 수출하고 싶고 내가 고용한 모든 사람들에게 월급을 지불하고 싶다. 나는 현재 3개월째 월급을 못주고 있다. 30명 고용한 중. 7명이 돈을 달라고 하는데 못주고 있다. 지금은 시즌이 아주 안 좋다. 월급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사업을 하는데 어려운 점은 우선 재료 조달이 쉽지 않고 고객이 좋아하는 색을 알아야하고 그들의 기호를 알아야 한다. 나는 침대보가 잘 팔릴 줄 알았는데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시즌이 돌아오면 아마 팔릴 것이다.
나는 매일 약 5시경 일어나서 기도를 하고 일과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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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는 나의 아이들이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행복하다 - 아샤 샬롬 압달라 1

2003. 12. 31. 21:25


아샤 살롬 압달라  (여, 58세)

            
‘나는 나의 아이들이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행복하다. 나는 내 사업에서 돈을 벌어 사업을 늘리고 쿠션카바를 외국에 수출하고 싶고 내가 고용한 모든 사람들에게 월급을 지불하고 싶다.’


나의 이름은 아샤 살룸 압달라이다. 나는 1943년 9월 5일에 태어났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오만에서 왔는데 잔지바르 여인과 결혼해서 그곳에 자리잡았다. 나의 할아버지는 잔지바르에 낳아서 흑인 여인과 결혼해서 아들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그 아들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다. 이름은 마수드 비날리이다.

나의 아버지는 아랍여인(나의 어머니)과 결혼해서 아이를 여덟을 낳았다. 아버지는 돌아가고 어머니는 지금도 살아있는데 나이는 잘 모르겠다. 어머니는 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샴바와 집이 있다. 그 집은 세주어 수입을 얻는다.  

나의 아버지는 농업 지도요원이었다. 나의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집을 세 채 남겼다. 하나는 내가 어머니와 살고 있는 집이고 두 채는 나의 여자 형제들한테 돌아갔다.

나의 언니 둘과 남동생 하나가 오만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거기 간지 이제 10년 째이다. 언니는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고 남동생은 공항에서 일한다.나의 오빠는 집에서 놀면서 펜션으로 살고 있고 그의 자녀들이 도와준다.

나의 아버지는 그때로서는 깨어있는 사람이어서 우리들을 학교에 보냈다. 그것을 보고 나의 어머니 쪽 형제들도 그들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나의 언니는 중3까지 다니다가 시험에 떨어졌다.  나의 남동생 하나는 고등학교(12학년), 다른 동생은 초등학교(스텐다드 8)을 마쳤는데 지금은 어디있는지 모르겠다. 본토 어디에 있다.

나는 초등학교 8학년까지 다녔다. 나는 중학교 시험에 통과가 되었지만 그때는 수줍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서는 결혼을 했다. 16살때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기숙학교여서 교원양성학교생들이 우리들을 돌봐주는 식이었는데 나를 돌봐주던 한 큰 여학생이 나를 좋게 여겨서 그의 큰오빠더러 나와 혼인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나의 아버지한테 오게 된 것이다.  그는 그때 스물여섯 살이었다. 그는 다우리로 나의 부모에게 천 쉴링을 냈는데 그때는 매우 큰 돈이었다. 우리 관습으로는 신랑감이 처녀의 집으로 가서 아버지한테 딸을 달라고 하여 그 아버지가 승낙을 하면 결혼이 성립된다.

남편은 교사였는데 1962년 잔지바르 혁명이 났을 때 살해당했다. 결혼한 지 꼭 3년만이었고 나는 겨우 열아홉 살 이었다. 아이가 하나 있었다. 남편은 보지 못했다. 그냥 그가 죽었다고만 들었다. 그래서 나는 도로 친정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남편 측에서 데려가 버렸다.

첫 번째 남편이 죽은 후 나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두 번째 남편은 경찰이었다. 내가 살고 있던 곳이 키콰주니인데 그 남자도 키콰주니 분소에서 일을 하여 나를 알게 되었다. 두 번째 결혼 역시 나의 아버지한테 와서 결혼 승낙을 얻고 다우리를 내면 된다.

나는 그때 이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가 혁명 직후여서 유스리그라는 것이 있었다. 한조에 50명정도가 속하였는데 단체로 여기 저기 일하도록 보내어졌다. 우리는 처음에는 병원에서 6개월간 일하다가 그다음은 농사짓는데로 보내졌다.  그후 교육부 직원으로 채용이 되었는데 월급이 너무 적어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작은 담배회사에서 일했다. 그러나 역시 월급이 적어서 그만두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슬람들은 여자가 남편에게 화를 내거나 여자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면 남자가 다른 여자를 얻는다. 나는 그를 위해 열심히 집안일을 하는데 그가 다른 여자를 데리고 오니 내가 어떻게 그 집에 있겠는가. 그래서 도로 친정으로 갔다.두 번째 남편은 전 처와 이혼하고 나를 얻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나와 이혼하고 또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보통 이슬람 남자는 아내를 넷을 거느릴 수 있지만 나의 전 남편은 그럴만한 처지가 못되었다. 그는 한꺼번에 여러 아내를 거느릴 경제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이혼하고 또 결혼하고 한 것이다. 아내 한명도 먹여 살리지 못해서 오히려 내가 그를 도와야 했다. 나의 두 번째 남편은 세 여자하고 결혼했다. 그리고는 죽었다.

그래서 두 번째 남편과도 이혼했다. 이혼하고 나서 일년 반 있다가 다시 결혼을 했다. 친정에 있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외롭고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교육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차라리 결혼을 해서 내 가정을 갖고 아이를 낳는게 나았다.

나의 세 번째 남편은 펨바 출신이었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 있다. 두 번째 남편과 이혼을 하고나서 친정에서도 구박을 하고 혼자 외롭기 때문에 누가 아버지한테 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나는 그 당시 장사를 하기 시작하여 시장에서 도매로 물건을 가져와 동네에서 소매로 팔았다. 그렇게 해서 돈을 모아서 잔지바르와 몸바사와 다레살람을 오가며 장사를 하게 되었다.

몸바사에는 나를 도와서 물건을 팔아주고 돈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나오는 돈으로 나의 집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나의 세 번째 남편이 질투가 나서 몸바사에 가서 그 사람에게 나를 더 이상 도와주지 말라고 했다. 나의 남편은 내가 건방지고 못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남편은 내 모든 사업물건을 빼앗기게 만들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빈털털이로 잔지바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조금 조금 장사를 시작했다.

나의 세 번째 남편은 나를 때리기 일쑤였고 몹시 괴롭혔다. 그러다 끝내 나를 쫓아냈다. 10년 정도 된다. 세 번째 남편은 지금도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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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키하울리 4

2003. 12. 29. 22:22
제 어머니 즉 아내와 나는 97년에 결혼 50주년되는 금혼식을 했었다. 이제 결혼한지 52년이 된다. 나의 아내는 이제 좀 약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하다.

우리 소유의 집을 지니고 산다. 집은 은행에서 융자를 얻어 내가 직접 조금씩 조금씩 지었다. 은행융자는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 내주고 짓는 현장을 검사하고 또 내주고 하는 식이었다. 집을 다 짓고 나면 즉시 내 월급에서 융자를 강제로 갚아나가게 되어있다. 다 갚아야 집의 명의가 내 앞으로 이전되었다.

같은 대지에 집을 두 채 지었는데 큰집은 방이 세 개짜리로 세를 주고 나는 방이 두 개인 작은 집에 살고 있다. 뭐 우리가 잘사는 것은 아니다. 집세에 의지해서 사니까 어떨 때는 세든 사람이 돈이 없다고 집세를 못 낸다고 하면 기다려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 모두 다 다레살람에서 산다. 같이 사는 것은 아니고 다 따로 산다.

옛날에는 시골에서 살면 누구나 밭과 농기구가 있어야 하고 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가끔 사냥을 하기도 했다. 나이 든 사람들과 함께 짐승들이 많이 있는 강가로 가서 그 중 한 놈을 쫓아다니다가 잡는다. 주로 작은 짐승이었다. 큰 짐승은 총이 있어야 한다.
짐승을 잡으면 숲 속에서 다 처리를 해서 집으로 가져온다. 항상 저녁에 사냥을 하러 갔다. 큰놈을 잡으면 동네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고 작은 놈을 잡으면 가족끼리 나누어 먹는다.

또 어떨때는 짐승이 와서 농작물을 짓밟아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정부에 보고를 하면 정부에서 사람을 보내 짐승을 잡거나 쫓아버렸다. 코끼리나 그런 큰 짐승이다. 우리 고향에는 코끼리가 많이 있었다. 그놈들은 근처의 산과 숲에 살고 있다. 숲이 얼마나 넓은지 6시간을 걸어가도 아무도 없고 졍글 뿐이다. 나무가 한없이 많고 물도 흔하다. 그쪽은 물이 귀한 일은 없었다. 큰 산이 있어서 물이 항상 흐르기 때문이다. 또 20분만 가면 강이 있었다. 송게아쪽에는 강도 많다. 그러나 싱쉐아는 그렇지가 않아서 타를 타고 4시간을 가도 강을 볼 수가 없다.

내가 어렸을 때는 곧잘 아팠다. 선교회에 수녀가 운영하는 진료소가 있어서 거기에 가면 진찰을 하고 약을 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일터에 따로 변소가 없이 사람들은 그냥 숲에서 일을 봤는데 이런 비 위생적인 일이 질병의 한 요인이 되었다. 또 우리는 신발이라는 것이 없어서 보통 신을 안신고 일을 했는데 이것 역시 질병의 원인이었다. 근래에 들어서 사람들이 신발을 신었지만 전에는 신을 안신었다.

선교회는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가 아침에 아무것도 안먹고 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침에는 티와 빵 한조각을 주었다. 또 오후에는 오렌지 쥬스를 주어서 나는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그리고 심하게 앓으면 그 클리닉에 무료로 입원하게 해주었다.

그 시절에는 병원에서 치료받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 왜그러냐면 우리는 우리 나름의 좋은 민속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속약은 상처에 바르는 것도 있고 잎을 끊여서 마시는 것도 있다. 고향 사람들은 아주 여러 가지 종류의 민속약을 알고 있었다. 지금도 마을에서 다른 치료를 받지 못할 때는 민속약을 쓴다.

우리 관습으로 사람이 죽으면 우선 이웃에게 알린다. 그러면 아침에 이웃이 와서 장례준비를 한다. 널리 알려진 사람은 물론 문상오는 사람도 많다. 문상객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는데 이 음식은 모두 이웃이나 친척이 가져온 것이다. 상을 당한 가족은 음식을 안한다. 그리고 모든 친척들은 사흘동안 상을 당한 집에서 지낸다. 그때 누구나 머리를 완전히 깎는데 이것은 조의를 표하기 위해서이다. 젊은 여자들은 머리 한쪽을 조금만 깎는 수도 있다. 사흘 후 죽은 사람을 묻는다. 요새는 약간 변해서 40일 후나 석달, 넉달 후 죽은 사람을 위해서 음식을 장만해서 사람들을 다 불러 추도식을 지내기도 한다. 기독교인이면 교회로 가서 기도를 드리고 묻고 이슬람이면 모스크로 가서 기도하고 묻고 어떨때는 그냥 집에서 기도를 드리고 묻는다. 무슬림은 관이 없이 장사지낸다.

명절은 대부분이 기독교나 이슬람 명절이고 최근에 정부에서 주도하는 사바사바 농민의 날이 있다.

탄자니아가 독립될 때 나는 몸바사에 있었다. 나는 1959년부터 65년까지 몸바사에 있었다.
독립은 물론 좋은일이다. 많은 사람이 원했고 우리자신이 우리일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대 대통령인 니예레레는 탄자니아가 하나의 국가가 되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그 전에는 종족 단위로 생각이 되었는데 지금은 한 나라가 된 것이다. 또 전에는 이슬람이 기독교인과 결혼하는 것이 아주 어려웠는데 독립 후 쉬워졌다. 나와 아내와 내 아이들은 모두 기독교인이다. 탄자니아의 강점을 들라면 무엇보다 평화스러운 나라라는 점이다. 다른 사람을 간섭하고 싸우기를 싫어한다.

나는 퇴직 후 새 회사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다른사람과 합작해가지고 허가도 내고 사람도 다 구했는데 경기가 좋지않아서 그만두었다. 그래서 요새는 그저 이런저런 일로 소일하고 지낸다. 또 가게도 열려고 했는데 경쟁이 심해서 그만두었다. 다른사람이 파는 같은 종목을 팔면 안된다.

나는 고향인 송게아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나의 자식들이 모두 다레살람에 살기 때문에 내가 송게아로 가면 그 애들한테 곤란하다. 애들이 모두 송게아까지 우리를 보러 와야하기 때문이다. 다레살람에서는 주말에 쉽게 우리 집을 올 수 있다. 어떨때는 주말마다 어떨때는 2주에 한번 집에 온다. 아이들 중 둘은 집 가까이 산다. 셋은 좀 멀리 살아서 자주 못온다.

물론 송게아에 가서 살고 싶기는 하지만 추운 기후가 문제이다. 다레살람에 오래살아 여기 기후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송게아로 가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해마다 송게아에 가서 얼마동안 지낸다. 작년에도 갔다.

내가 살아온 동안 이 나라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것은 경제적인 변화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위한 변화가 아니고 반대로인 것 같다. 월급은 많아졌지만 돈가치는 떨어졌다. 옛날에는 월급은 얼마 안 되었으나 많은 것을 살 수 있었다.
또 사람들도 많이 달라졌다. 지금 사람들은 옛날같지가 않다. 아주 몇 명만이 괜찮고 대부분 다 변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도시 뿐만 아니라 시골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차라리 도시에 이대로 있는 것이 낫다. 시골 사람들이 다 변해버려서. 왜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변화는 있어야겠지만 좋은 쪽 보다는 나쁜쪽이 더 많다. 아마 시골같은데도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섞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나름의 규율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이것은 좋지 않다’ 하면 좋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는 규범이 있었다. 또 마을에 장이 있어서 그곳에 엄격히 규율을 세웠다. 지금은 사람들이 학교를 가기는 하는데 대부분은 초등학교만 나오기 때문에 행동 규범이 없다. 또 장래의 계획을 할 줄 모른다.

요새 심각한 문제로는 시골에 가면 젊은이가 없는 점이다. 시골에는 나이든 사람밖에 없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가고 없다. 젊은이들은 편한 삶과 텔레비젼이니 댄싱이니 하는 향락을 찾아 도시로 몰려든다. 그래서 낮에는 행상을 하면서 밤에는 술을 마시고 돈을 쓰는 것이다. 그래가지고는 전연 발전이 없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한 희망이 없다. 독일사람도 전쟁후에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에 지금 발전을 한 것이다.

세상이 변하는 만큼 즉 경제적인 사정이 변해감에 따라 사람들도 변해야 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만큼 빨리 변하지 않는 데에 있다. 어떤 부족은 재빨리 적응을 했지만 대부분의 부족은 낙후되어 있다. 우리도 세계의 다른 발전된 나라 사람들처럼 변해야 한다. 우리가 이대로 계속 있다면 사정은 아주 나빠질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해야하고 가령 행상은 거기서 그칠 것이 아니라 더 큰 가게로 키워나갈 생각을 해야한다.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열심히 일하는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 나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장래성이 없고 특히 남을 속이는 사람을 싫어한다.

나는 집에 텔레비젼이 없지만 나의 딸집에 있다. 우리 집에는 라디오가 있다. 나는 주로 독일방송, BBC, voice of America 등의 뉴스를 듣는다.

건강은 대체로 좋은 편이나 신장에 한번 이상이 있었다. 내가 젊었을 때 특히 몸바사에 있었을 때 독한 술을 마셨는데 그때 신장에 이상이 생겨서 병원에 입원했었다. 그 때 이후 맥주 이외의 독한 술은 안마신다. 지금 단 한가지 문제라면 눈이 잘 안보이는 것이다. 글씨를 읽을 수가 없다. 안경을 하려고 했지만 의사가 도움이 안된다고 해서 그만두었다. 아내도 역시 눈에 문제가 있다. 하지만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다가 더 나빠졌다.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이다.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속기가 쉽다. 요새 세상은 속을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신앙으로 인해, 기독교인이 된 것에 행복을 느낀다. 기독교로 인해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다.    

또 나의 아이들이 다 올바른 사람이 되고 각자 다 자립한 된 것에 대해 몹시 행복을 느낀다. 아이들은 늘 부모의 말을 들었고 물론 작은 일에 의견이 다른 수는 있지만 지금도 거의 우리의 말을 따른다. 가령 나의 큰 딸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올 때 차를 가져왔다. 그래서 내가 차는 돈만 쓰는 것이지만 집을 지으면 남한테 세를 줄 수도 있으니까 차를 팔고 집을 지으라고 했더니 내 말을 들었다. 그리고 공부를 시킬 때는 쓸모있는 것을 즉 나와서 취직이 잘 될 수 있는 것을 시켜야 한다. 나의 딸도 그랬다. 무엇을 할까 하길래 이 다음 결혼하고 나서도 일할 수 있는 것을 공부하라고 했다. 그래서 은행 일을 택했다. 은행은 어디나 있으니까.

그 애들은 또 부모의 습관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가령 나와 나의 아내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아이들도 모두 흡연을 하지 않는다. 나는 몸바사에 있을 때 공짜로 담배가 생겨 한가치 피워봤는데 이상해서 그 뒤로 전연 손을 안댔다. 나의 막내도 지금 호텔의 매니져로 있는데 담배를 안피운다.

또 나의 아내도 결혼한 이래 변치않고 같이 있어온 것도 행복한 일이다. 나의 아내는 내가 틀렸을 때는 늘 나에게 충고를 한다. 아이들도 늘 제 엄마한테 상의를 하곤했다.    

내가 제일 힘들었던 것은 몸바사에 있었을 때 거의 24시간을 일해야 했던 것이다. 유럽인들은 그저 말린다 호텔에서 놀다가 전화해서 물어보기만 했다.  

나의 누이는 킬로사에서 살다 그의 남편이 죽은 후 송게아로 돌아와서 지낸다. 지금 거의 팔십이 다 됐는데 건강해서 혼자 일을 다한다. 또 한 누이도 그의 남편이 죽었는데 송게아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나의 남동생은 송게아에서 결혼해 농사짓고 살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만 나오고 말았다.

나는 나의 구역에서 반장이다. 열 집을 묶어서 그중에서 반장을 뽑는데 내가 벌써 세 텀째 하고 있다. 한 텀이 5년이다. 사람들이  어떤 분쟁이나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을때 법원으로 가기 전에 나에게로 와서 상의를 한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씩 각자의 집에서 돌아가면서 송게아 출신들이 모인다.

(99년 7월 2일 다레살람 민속박물관)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김영희) 킬리만자로를 마시는 사람들

7. 키하울리 3

2003. 12. 29. 22:16
나는 아이들을 다섯 두었다. 딸이 둘, 아들이 셋이다. 나의 부모님 경우와 똑같다. 애들 중 어떤 놈은 아주 머리가 좋고 어떤 놈은 좀 쳐지고 그렇다.

나의 큰 애는 1948년에 태어났고 그 후 3년 터울로 아이들이 태어났다. 송게아에서는 관습이 그렇게 하도록 되어있다. 연년생은 좋지 않고 적당한 간격을 두고 태어나도록 했다. 그런데 요새 젊은이들은 성급해서 그런 간격을 지키지 않는다.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는데 우리 때는 그런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노인들이 아이가 세 살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다음 아이를 낳으라고 가르쳤다. 윗 아이가 좀 커야 갓난아기가 태어나도 수월하니까. 그러나 아이들 수에는 제한이 없었다. 한없이 많이 둘 수가 있었다. 딸이건 아들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큰애는 이제 50이 넘었는데 그 애는 결혼을 잘 못해서 이혼을 했다. 탕가 출신 여자애와 결혼했는데 우리와는 다른 족이라 다우리를 현금으로 지불했었다. 그 애 역시 아이를 다섯 두었다. 어쨌건 제 집이 있고 터밭도 있고 잘 꾸려간다.  

둘째가 큰 딸인데 큰 딸이 아주 공부를 많이 했다. 송게아 고향에서 중등학교를 마친 후 다레살람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까지 갔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바로 탄자니아 은행에 취직이 되었다. 그러더니 좀 후 석사를 하겠다고 본인이 결정을 내렸다. 유럽으로 석사과정을 하러 가기 전에 결혼을 했다. 대학에서부터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 남자아이도 역시 우리 고향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만족스럽다. 딸애가 직접 사귀고 나서 나에게 소개를 시켰다. 좋은 사람이라고 결혼하겠다고 하길래 내가 직접 송게아에 가서 그 남자아이의 집을 찾아가 확인을 해봤다. 그리고 나서 결혼을 허락했다. 결혼 후 아이를 하나 낳고 딸은 석사를 하러 미국으로 가서 2년을 지냈다.  지금은 CRBD라는 은행은 director 이다.  아이를 사내만 둘 두었다. 큰 애는 대학에 다닌다. 둘째애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      

둘째딸은 다레살람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비서 학원를 다녔다. 그러고는 곧 정부기관에 취직이 되었다. 지금은 결혼을 해서 벌써 제 집을 지었다.

그런데 그 아래는 중학교를 마치고 나서 (finacial studies in home economy)경영을 공부하더니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다 어떤 남자애를 만나서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미장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 아래 아들은 중학교를 마치고 유럽으로 가더니 5년동안 아무 소식도 없이 있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호텔(작은 여관정도) 지배인으로 여기저기서 일한다.  

아이들에게 돈이 많이 든 편이어서 때로는 직장에서 가불을 해야했다.  몸바사에 있었을 때 큰아이를 송게아로 보내니까 크리스마스에 왔다갔다 하는 비용 등이 비쌌다. 교육비 자체는 그리 많지 않은데 교통비가 많이 들었다. 공립학교여서 학비는 내지않았지만 교복, 학용품, 학교에 가지고 가는 호미니 농기구들, 용돈등에 돈이 들었다. 중학교에 입학이 허가되면 학교에서 입학식 때  가지고 올 지참물 리스트를 내준다. 도서구입비로 1000쉴링을 내야하는 등 소소히 들어가는 돈이 많은데 학교에 세명이 동시에 다니면 상당히 부담이 되는 액수이다. 또 학교에서 하는 급식이 형편없기 때문에 용돈을 주어서 더 사먹도록 해야 한다.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애들의 책을 들여다보고 공부를 잘하나 점검해보곤 했다. 성적이 모자라면 과외를 시켰다. 위로 셋, 그중에 특히 둘을 아주 공부를 잘했고 학교 교사들도 지금 같지 않고 잘 가르쳐서 과외가 필요 없었는데 다만 끝의 두 아이는 과외를 시켜야 했다. 위의 세명은 미션스쿨을 다녀서 학교에서 아주 잘 가르쳤다. 숙제도 많이 내주어 아이들이 늘 저녁 늦게까지 숙제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요새는 누구나 다 과외를 시켜야 한다. 내 손자들을 보면, 둘째딸에게서 난 아이가 지금 중학교에 다니는데 늘 과외를 시킨다. 교사들이 제시간에 교실에 안 나타나고 잡무가 많아서 제대로 수업을 안 하기때문에 공부를 시키려면 과외를 해야 한다.

나의 첫째 사위는 맘에 든다. 그 애는 송게아에서 학교를 나오고 다레살람 대학을 다니면서 나의 딸을 만났는데 나도 그의 부모를 잘 안다.

그러나 둘째 사위는 영 아니었다. 물론 둘째 딸에게 충고를 했지만 그때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버지는 너무 구식이라느니 요새는 다르다느니 하고 말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너무나 문제가 많았다. 현재 그 애들은 법정에서 이혼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다. 도시에서 남자를 고를 때는 신중해야 한다. 어디서 출신인지도 모르고 그 사람의 배경을 모르니까. ‘너희들은 그저 사무실에서 만나게 되지 않았니. 남자가 학위를 딴 덕에 사무실에 근무하는 모양이지만 학위가 배경이나 집안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니까 신중해야 한다.’ 하고 말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 애는 자신도 그렇지만 학력이 높은 배우자를 원했다. 그래서 사위는 학력이 높기는 한데 전연 사람이 되어먹질 않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집에 오면 싸우기 일쑤였다. 월급째 다 술을 마셔버렸다.  

첫째 사위한테서는 다와리를 받았지만 둘째 사위는 속으로 올바른 사윗감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와리를 받지 않았다. 다와리를 받으면 이혼할 때는 도로 돌려주어야 한다.

다레살람에서는 다와리를 대개 현금으로 지불한다. 가축으로 지불해도 기를 데가 없기 때문이다. 요새는 상대방이 어느 집안이냐에 따라서 다와리의 액수가 달라진다. 가령 킬리만자로 출신(챠가 족)을 택하면 아주 많은 돈을 지불해야한다. 역시 무소마 집안(수쿠마 족)도 돈을 많이 지불해야 한다. 또 어떨때는 전연 지불안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아버지에 달려있다.

어쨌건 도시에서 결혼을 하는데는 비용이 많이 든다. 결혼식이며 샌드 오프 파티 (신부 보내는 식)에 돈이 많이 든다. 신부 보내는 식이란 신부측의 부모와 모든 친지가 다 참석해서 선물을 하는 식이다. 송게아에서는 재배한 작물을 준다. 즉 새출발에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다.

아들에게는 다만 선물만 한다. 신부측에서도 아들에게 선물을 주어야 한다.

결혼식을 하는 날은 접시를 두 개 준비하는데 하나는 신부 측, 하나는 신랑 측을 위한 접시로 거기에 모든 선물이나 돈을 놓는다. 이 돈은 신혼부부의 새출발을 위해 쓰인다.

나의 첫딸은 다레살람에서 결혼식을 하는 것이 너무 돈이 많이 드는 것을 보고 고향에서 결혼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여 우리는 다 송게아에 가서 결혼식을 치르었다. 거기서도 역시 큰 결혼식이었지만 돈은 덜 든다.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큰 잔치를 벌인다.

둘째는 다레살람에서  역시 아주 큰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는 나도 돈이 있었고 딸도 일을 하고 아들들도 일을 했기 때문에 돈을 걷어서 아주 큰 잔치를 했다. 잔치에 친구들도 미리 돈을 낸다. 이틀간 파티를 했다. 하루는 집에서 하고 다음날은 빌린 홀에 가서 했다.
잔치에는 친구 친척들이 다오고 잔치를 위해 미리 돈을 낸다. 그래서 맥주며 소프트 드링크를 마음껏 마신다.

나의 아이들은 집에 못올 때는 전화를 해서 항상 안부를 묻고 무슨 일이 있으면 얼른 온다. 어쩌다 돈을 주는 수도 있지만 쌀도 가져오고 설탕도 가져오고 하는 식이다. 어쨌든 딸 둘은 공부를 많이 했고 다 자기 집을 지어서 살고 있다. 미국 가서 공부하고 온 큰 딸은 송게아에도 집이 하나 있고 여기에도 집이 있다. 우리 집에 오면 제 어머니를 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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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키하울리 2

2003. 12. 29. 22:07
나의 어머니는 술을 아주 좋아하셨다. 이웃에 가서 술마시기를 좋아하셔서 곧잘 집에 늦게 오셨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우리가 저녁을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내가 결혼하자 어머니는 아예 저녁 지을 부담이 없이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수 있었는데 우리 형제들은 한편 걱정이 되었다.

나의 두 누님은 물론 나보다 더 먼저 결혼을 했다. 그들은 아주 먼데로 시집을 갔다. 한 누님은 킬로사라는 곳으로 갔다. 다우리로 염소를 많이 받았는데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다 팔아야 했다.

나는 그 후 oversea coporation 이라는 개인회사에 취직이 되어 어머니의 허락을 맡고 그 회사에 들어갔다. oversea coporation 은 땅콩을 가공하는 회사이다. 그 회사는 린디라는 곳에 있어서 나의 아내에게 고향 일을 맡겨놓고 나만 우선 그리로 갔다. 얼마 후 대강 자리를 잡고 나서 나는 아내에게 차비를 보내어 나 있는 곳으로 오도록 했다. 그 당시 차편은 오로지 버스밖에 없었다. 송게아에서 린디까지는 아주 멀다. 아마 500킬로는 될 것이다.

그때는 유럽사람들이 차를 타고 직접 송게아에 와서 (영어를 할 수 있는)사람을 구했다. 그 당시만해도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영어로 말할줄 아는 것이 참 행운이었다. 아주 많은 유럽사람들이 들어왔는데 다들 영어 할수 있는 보이를 구하려 했다. 그래서 우리가 채용된 것이다.

일단 채용되면 살기가 좋았다. 집도 주고 식품도 주고 차도 공짜로 태워주기 때문이다. 월급은 40쉴링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당시 1947년 다른 모든것이 제공되기 때문에 40쉴링이면 많은 것이다. 식품도 주었지, 물도 공짜지 전기도 공짜지. 월급으로는 그저 용돈정도만 쓰면 되었다.

그 후 그 회사가 문을 닫게되자 나는 쉘로 가게 되었다. 더 좋은 자리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몸바사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가족도 함께 몸바사에 데려 갔는데 아이들이 조금 크자 아이들을 송게아 고향으로 보냈다. 물론 몸바사는 좋은 곳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이 타운에서 자라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고 우리 고향말을 알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을 송게아로 보내서 고향사람들 속에서 살도록 하고 크리스마스 같은 때 오게 했다.

린디에 있을 때 나는 해마다 송게아에 갔다. 나의 어머니가 고향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나의 어머니는 1967년에 돌아갔다. 사고로 돌아간 것이었다. 약 50세 가량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간 후 고향에는 이제 동생 둘 밖에 남지 않았었다. 나는 역시 그 애들도 도와주어야 했다. 나는 그 애들에 비하면 도시에서 월급을 많이 받는 편인데 그 애들은 나와는 처지가 달리 고향에서 고작 농사나 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돈을 보내주기도 하고 고향에 갔을 때는 밭을 둘러보고 농사를 의논도 하고 많이 도와주었다.  

몸바사에 있을 때 내가 근무한 곳은 BP 쉘이었다. 그런데 케냐가 독립을 한 후 케냐에서는 케냐 사람을 써야한다고 외국인은 안된다고 했다. 우리를 고용한 유럽사람들은 우리가 거기서 오랫동안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를 그대로 있게 해달라고 케냐 정부에 요청을 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그래서 우리는 탄자니아로 돌아와야 했는데 회사측에서는 후하게 급료를 지불하고 될 수 있으면 탄자니아에서 다른 회사에 고용이 되도록 애써주었다.  

어쨌든 나는 national shipping line에 채용이 되었다. 나의 전 회사에서 추천을 해주었다. 나는 퇴직할 때까지 거기에서 일했다. 배를 타고 온 여러나라 선원들을 보게 되었다. 북한 선원도 보았다.

내가 natioal shipping line에서 일할 때는 배가 들어오면 새벽부터 부두에 나가 야 했다.  선주로부터 텔렉스가 오는데 몇시에 입항예정이고 필요한 물자가 무엇이고 등을 알리고 배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는 병원에 갈 수 있도록 요청을 하기도 하는데 그에 따라 모든 것을 주선을 하는 것이다. 배가 들어오지 않을 때는 보통 8시에 사무실로 출근을 해서 우선 무슨 배가 언제 들어올 것인지 부터 체크를 하고 어떤 종류의 카고가 필요한지 또 하역을 하게 되면 얼마만한 물량인지 등을 체크해서 모든 것을 준비한다. 그런 후 항구로 나가서 배가 들어올 것을 보고하고 배에 맞추어 하역작업을 지휘 보고한다. 사무실에서는 선주와 연락을 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감독한다. 세계각국의 다양한 종류의 배가 들어온다. 또 다레살람에서 화물을 배로 부치는 주문도 받는다.  

그 회사에서 20년을 일 한 후 55세가 되던 해에 퇴직했다. 55세가 정년이다. 1986년 이었다. 퇴직을 하고도 회사에서 내 후임을 구하지 못해 1년간 계약직으로 일을 하고 나서는 내 스스로 그만 두었다. 아이들이 다 컸기 때문에 더 일을 안해도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커서 무엇보다 얼른 자립하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가 없어서 주위의 사람들이 도움을 준 셈이었는데 사실 그들은 자기 아이들에게는 관심을 기울이면서 나한테는 그러지 않아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얼른 어른이 되어 독립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늘 노력했다. 그런 결과 쉽핑 라인의 매니저의 직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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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금 사람들은 옛날같지가 않다. 몇 명만 괜찮고 대부분 다 변했다 - 키 하울리 1

2003. 12. 29.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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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하울리 (남, 73세)
                    
"지금 사람들은 옛날같지가 않다. 아주 몇 명만이 괜찮고 대부분 다 변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도시 뿐만 아니라 시골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차라리 도시에 이대로 있는 것이 낫다. 시골 사람들이 다 변해버려서. 왜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이름은 죠셉 힐라리 키하울리다. 나는 1926년 송게아의 키보세라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탄자니아의 남쪽인데 높은 산이 많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들로 한번도 어디 일자리에 채용되어본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농사를 지었고 아버지는 가축을 돌보았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네 살이 되기 전에 돌아갔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반면 나의 어머니가 우리 형제를 돌보고 키웠다. 우리를 도와 줄 다른 사람이 없었는데 다행히 어머니가 밭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서 농사를 지어서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형제는 3형제 2자매이다. 나는 그 중 3번째이다. 첫째가 누님(여자) 둘째 역시 누님(여자) 그리고 내가 세 번째이고 내 아래로 두 남동생이 있다. 그래서 모두 남자 셋에 여자 둘의 형제이다.

우리는 시골마을에 살았는데 바로 근처에 카톨릭 선교회가 있었다. 반면 농사짓는 밭은 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는 일곱 살에 처음으로 학교를 갔다. 가까이 있는 선교회에서 하는 학교였는데 학비는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많이 갔는데 나의 두 누님도 갔다. 그러나 누님들은 결혼을 아주 일찍 했기 때문에 학교를 얼마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남자아이여서 나는 학교도 다니고 가축도 돌보고 했다.

학교는 아침 일찍 가서 열시에 쉬는 시간이 되는데 이때 바나나 두 개씩을 공짜로 나누어주었다. 그 다음 열두시까지 공부를 하고는 집에 가서 가축을 돌보았다. 기숙학교 아이들만 오후에 공부를 더 했다.  

학교가 끝나서 집에 오면 어머니는 늘 밭에가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집에는 먹을 것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가축을 몰고 숲이나 들로 가서 풀을 뜯게 하고는 밭에서 카사바를 캐서 불을 지펴서 구워먹곤 했다. 바나나를 따 먹기도 했다. 점심이라는게 따로 없었다. 또 숲에는 계절에 따라 다른 열매들이 열려서 따먹었다.  

저녁이 되면 가축을 몰고 도로 집으로 갔다. 어머니가 먼저 밭에서 돌아와 있을 때는 저녁을 해놓아 다같이 먹었다. 주로 우갈리와 콩삶은 것, 야채였다. 우리의 주식은 옥수수, 밀, 콩 등이었다. 콩은 종류가 아주 여러 가지 있다. 그리고 금방 밭에서 뜯어온 채소와 카사바 잎 등도 먹었다. 그밖에 감자, 고구마 등이 있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교회를 갔는데 열 한살 열 두살 때 선교회에 3개월 머물면서 교리 공부를 하였다. 그 다음 영세를 받고 완전한 신자가 되었다.

열세살이 되면 선교회 학교를 마치게 되어 돈이 있으면 더 상급학교로 가서 공부를 할 수 있고 아니면 밭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돌볼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는 선교회에서 장학금을 대주어 교사양성과정을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18살이 되자 나는 선교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학교에서는 교리와 함께 산수라든가 스와힐리같은 일반적인 과목을 가르쳤다. 당시에는 초등학교에서는 영어를 안 가르쳤다. 영어는 중등과정부터였다.

20세가 되었을 때 나는 결혼을 하기로 했다. 성장을 한 후 부모한테 먼저 결혼을 할 수 있는가 물어봐야 하는데 내가 우리 어머니한테 물어봤더니 ‘네가 준비가 되었으면 결혼 하렴’ 했다.

우리 마을에서는 내키는 대로 아무 처녀한테나 청혼을 할 수 없었다. 일단 어떤 처녀가 마음에 들어서 이야기가 되었으면 어머니한테 물어봐야한다.
‘어느 어느 처녀가 나에게 맞겠어요?’ 하면 어머니가 ‘내가 그 처녀의 집, 처녀의 부모를 아는데 너 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결혼을 하면 좋지 않겠다. 다른 처녀를 물색해봐라’ 하는 식이다. 처녀를 고르는 것은 총각에게 달려있지만 결혼은 부모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대개 세 번째나 네 번째 처녀를 고른 끝에야 성공한다.

나의 경우는 세 번이나 처녀를 골라야 했다. 먼저 둘은 우리어머니가 반대했다. 다행이었다. 우리어머니는 내가 만일 그 처녀들과 결혼하면 틀림없이 문제가 생길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의 예측은 사실로 나타났는데 첫 번째 골랐던 처녀는 나중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자마자 죽었다. 두 번째 처녀는 역시 다른 사람과 결혼한 후 제멋대로 행동해서 속을 썩였다. 그러니 나의 어머니가 맞은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이러이러한 처녀와는 결혼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마을에서 또 다른 처녀를 구해서 어머니에게 선보였더니 어머니가 ‘응 됐다. 그 집안을 나도 아는데 좋은 사람들이다. 이 처녀와는 오래도록 잘 살겠다’ 했다.
나는 아무 여자애나 좋아한 것이 아니었고 특별히 좋아하는 타입이 있었다. 나는 피부가 아주 검지만 나의 아내는 갈색이고 생김새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고 말하는 것도 그랬다.

그 처녀는 그때 열  여덟 살이었고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 후 그 처녀는 자기 부모한테 말을 하고 나의 어머니는 나의 다와리(신부값)를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염소와 함께 현금을 냈다. 내가 선교회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돈을 받아 현금이 있었다. 별로 많지 않아서 약 40 쉴링을 주었다. 그리고 염소는 열 다섯 마리, 소 두 마리, 양 두마리를 주었다.  

우리고장에서는 결혼을 할 때 신랑이 신부집에 다와리를 내야하는데 이 다와리는 현금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염소, 소 등으로 냈다. 거기에는 일정한 양이 대강 정해져있어서 가령 소 두 마리, 양 세 마리, 염소 열 다섯 마리 하는 식이었다.  

그런 후 선교회에 가서 결혼하겠다고 하자 선교회에서 공고를 하고 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우리와 같은 날 일곱쌍이 한꺼번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아주 큰 잔치가 벌어졌다. 신랑신부는 좋은 옷을 입고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도와서 술을 준비하고 음식을 준비해서 그날은 누구나 마음껏 마셨다.

결혼하기 전 사람들은 총각에게 밭이 있느냐 집이 있느냐 아내를 먹여살릴 수 있느냐 등을 물어본다. 밭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남자가 돌보는 밭, 카사바 밭, 다른 밭 등을 모두 갖고 있어야 한다. 물론 그 때는 나에게 딸린 밭이 있었다. 그 후 나는 직업 때문에 고향을 떠났는데 그러나 나의 밭은 그대로 있다. 나의 동생도 거기에서 살고 있다. 나는 일년에 한번씩은 꼭 고향에 간다.

시골에서는 남자가 성장을 하면 집 근처에 자신의 집을 새로 짓는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밭을 갖게 되고 독립을 하게 된다. 물론 일이 생기면 또 누가 아프거나 하면 가족이나 이웃과 서로 돕는다.    

나도 물론 내가 집을 지었다. 물론 흙과 잎(짚)을 엮어서 지은 시골집이다. 집뿐만 아니라 곡식 저장할 데, 즉 옥수수를 저장하고 콩을 저장할 데  등의 광도 지었다. 콩은 숲에서 끊은 잎으로 만든 푸대에 담는다. 우기를 대비해서 그리고 다음 추수까지 항상 어느 정도 곡식을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 카사바만은 예외다. 카사바는 늘 밭에 있으니까 아무때나 가면 캘 수 있다.  

결혼을 하고 나서 곧 첫 아이가 태어났는데 사내아이였다. 시골 생활은 도시와 달라 모든 것을 다 만들어 써야 한다. 나의 아내는 진흙을 빚어서 그릇도 만들고 아이들을 씻기고 빨래를 할 함지박을 만들었다. 갓난아기를 위한 특별한 함지박도 만들었다.

대체로 보아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전쟁(이차 대전) 때는 옷을 구하기 힘들었다. 오로지 한 가지 모양밖에 볼 수 없었고 혹시나 한 벌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비축 해놓아야 했다. 선교회에서는 늘 유럽으로부터 옷을 들여오는데 그들은(선교회 사람들 즉 유럽 신부) 전쟁이 오래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옷을 많이 쌓아두었다가 싼 값에 나누어 주었다. 특히 양복은 아주 구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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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oms

    글의 제목이 뭔가 전율을 느끼게 해 주는 문장..

4. 나의 즐거움은 내 노동의 댓가를 보는 것이다 - 아스테리아

2003. 12. 24. 09:52


아스테리아 페르디낭드 (여, 78세)

“나의 즐거움은 내 노동의 댓가를 보는 것이다. 가령 내가 농사를 지어 수확을 해서 식량이 되면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하다.
보통은 아플 때나 또는 내가 무엇을 했는데 잘 안되었을 때, 즉 수확이 나쁠 때 빼고는 아무것도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없다.“
              


내 이름은 아스테리아이고 카토마 마을의 일로게로에서 태어났다. 현재 78세이다. 부모님은 자식을 일곱 두었는데 나는 그중의 세 번째이다.

우리 아버지는 바나나 농장과 소가 여러 마리 있었다. 소가 열 마리도 넘었지만 어떤 소는 그의 친구가 돌보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마리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소를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었는데 그들은 소에서 나오는 똥으로 거름을 만들어 밭을 기름지게 했다.

아버지는 가축을 돌보는 외에는 다른 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족장 궁전의 시종이기도 했다. 시종은 족장 궁전에 가서 잡일을 하고 가끔 족장으로부터 선물이나 보답을 받을 뿐 보수를 받는 일은 없다. 나의 어머니가 바나나 농장을 돌보았다. 그녀는 김을 매주곤 했다. 그 외에 콩이나 옥수수 고구마 등 당시의 흔한 작물을 재배하기도 했다.

우리는 전통적인 집(무숑게)에서 살았다. 우리의 주식은 바나나였다. 그 외 고구마나 다른 것도 먹었다. 고기와 생선을 함께 먹는다. 우리는 하루에 두 번 정오와 저녁에 먹었다. 그때는 아침은 안 먹었다. 지금처럼 차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때는 차라는 것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밥이나 우갈리 같은 다른 족속의 음식은 경멸되었고 기근 때나 먹었다.

그때도 병원이 있기는 했지만 병이 나면 주로 민간요법을 썼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까지 다녔다. 영성체 (Holy Communion)를 받은 다음에는 종교교육을 위해 수녀원에 보내졌다. 초등학교에는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갔고 어머니는 학비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어머니와 두 오빠의 도움 밑에서 자랐다. 두 오빠는 나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했다.

수녀원에서 교리 공부를 한 다음에는 집에 있었다. 아무 장사같은 것도 배우지 않고 그저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다.

나는 열네살 때 결혼했다. 내가 남편을 고른 것이 아니고 당시의 관습에 따라 우리 친척이 중매를 섰다. 나의 남편 될 사람의 친척이 와서 나의 친척을 만나 양쪽이 합의를 하자 결혼이 성사된 것이다.  

약혼을 했어도 상대방하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때는 약혼자끼리 서로 말이나 접촉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나는 나의 신랑될 사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오직 친척이 중매를 했기 때문에 결혼을 한 것이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종교적인 절차에 따라 올렸다. 교회에서 올렸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매우 특별한 결혼식이었다.

결혼 후 우리는 남편의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시아버지는 아내가 셋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세 아내들이 번갈아가면서 시아버지 집에 가서 시중을 들었다. 남편의 친척들과도 잘 지냈다.

남편이 그의 삼촌에게서 바나나 농장을 물려받아서 이리로 이사한 것이 1953년이다. 그 전에는 여기서 몇 킬로 떨어진 곳에서 남편의 친척들과 함께 살았는데 그러니까 1953년 우리가 독립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부모밑에서 살 때보다 결혼하고 나서가 더 좋았다. 어른이 되었고 남편이 있고 가정이 있는데 이는 계집애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운이 없어서 아이들을 생산하지 못했다. 남편과 나는 자녀를 갖지를 못했지만 남편이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우리는 서로 돕고 무엇이든 상의를 하고 터놓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처럼 오래 같이 살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아이가 없었으니. 이는 우리가 기독교를 엄격히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는 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만족해서 살았다. 남편은 흙집을 지었다. 이는 전에 살던 전통집 (무숑게) 보다는 나은 것이었다.    

남편은 다른 여자들 사이에서는 아이들이 있다. 남편이 아이를 본 다른 여자들 중에서 한 여자만이 전통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그 외 여자들은 그저 아이를 얻기 위해 같이 잠을 잔 것뿐이다. 그래서 아들 둘 딸 둘을 얻었다. 그 딸 중 하나는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아직 결혼을 안했다. 아들 하나는 다레살람에서 사는데 결혼해서 아이가 둘 있다.

남편의 자식들은 가끔 나를 돕는다. 그러나 나의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불평할 수는 없고 그들이 주는대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남편이 죽을 때 나에게 바나나 밭 일부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과 그리고 라디오 한 대를 남겼다. 내가 죽으면 이것들은 다레살람에 있는 아들에게 갈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농장 땅을 조금 물려받았는데 거기에 내가 먹을 곡식을 기르고 또 거기서 난 커피를 팔아서 약간의 돈을 얻기도 한다. 내가 죽으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땅은 나의 조카(오빠의 아들)에게 갈 것이다. 그가 필요한 도움을 주는 등 나를 돌보고 있다.

나는 하야 말만 하고 다른 말은 할 줄 모른다.
전에는 우리의 성씨 제도가 강했다. 그 제도는 우리를 단결시켰다. 그러나 이제 그 제도가 무너지고 있다.
전에는 한 집안끼리의 결혼이 금지되었는데 지금의 젊은이들은 타부를 지키지 않는다.
전에는 같은 집안이거나 어머니 쪽 집안의 남자와는 결혼할 수 없었다. 또 아버지와 같은 집안이 아니라도 아버지가 가깝거나 친한 친구의 집안과는 결혼이 금지되었다.
전에는 다른 집안의 두 남자가 피를 섞어 형제의 의를 맺으면 한 집안으로 간주되었다. 그 의식은 다름과 같다 : 각자 배꼽에서 피를 약간 뽑아서 이를 커피 콩에 칠해서 서로 교환해서 삼키면 이것이 피를 나눈 관계라는 표시가 된다. 이 의식 후 두 남자는 형제로 간주되어 형제의 의무와 금기 (특히 결혼 시)제약을 적용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식민지 정부의 지배보다 우리 전통적인 족장의 통치가 더 좋았다. 말했다시피 우리 아버지는 궁정의 시종이어서 그의 소유물- 소와 때로는 음식 같은 것들 -은 족장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즉 어렸을 적 우리집에 필요한 것이나 부의 대부분은 아버지가 시종으로 일하여 그 보답으로 얻은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시종이 아버지의 직업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독립과 자치이래 현 정부 하의 생활은 매우 힘들고 어렵다. 심지어 설탕 살 돈도 없다.

나의 즐거움은 내 노동의 댓가를 보는 것이다. 가령 내가 농사를 지어 수확을 해서 식량이 되면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하다.
보통은 아플 때나 또는 내가 무엇을 했는데 잘 안되었을 때, 즉 수확이 나쁠때 빼고는 아무것도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없다.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하지만 정기적으로 듣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멀리 사는 친척들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다. 눈이 나빠서 이제는 신문은 읽지 않는다.  

나는 우리 전통 술 외에는 다른 것은 안마신다. 위장병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나의 수입이라고는 바나나, 카사바 등 농작물을 팔아서 얻는 것 뿐이다. 바나나를 팔아서 버는 돈은 월 평균 2000 쉴링 정도이다. 형편없은 돈이다. 어떨 때는 그도 못팔 때가 있다. 돈이 생기면 설탕 소금 비누  때로는 고기나 생선 등을 산다. 그러나 충분하지가 않다. 어쩌다가 누가 캉가(옷) 같은 것을 선물할 때도 있다.  

( 2001년 1월 4일 부코바 )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김영희) 킬리만자로를 마시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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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lafrica

    무언가 가슴 찡한 감동이랄까..
    가족과 삶 그리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사색해보게 합니다.
    소박함과 단아함..

    읽는 분들을 위해 전통가옥인 무송게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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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희

    무송게란 부코바 지방의 전통 집으로 첫번째 글에 들어있는 사진에서 음야카씨가 서있는 집이 바로 무송게 입니다.

3. 음야카 2

2003. 12. 20. 02:07


나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목수로서 집 짓는 일을 배워서 내 직업에 따라 오랫동안 일을 해왔다. 지금도 가끔 집 짓는 일을 한다.

우리집은 시멘트 블록집에 양철 지붕이다. 전기도 들어온다. 의자도 있고 라디오, 재봉틀, 자전거, 찬장, 석유곤로가 있다.  
또 소가 세 마리있다. 나는 이런 것들을 다 살 수 있었다. 아버지가 별 볼일 없이 살던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안히 살고 있다. 내 인생이 아버지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산 것보다 더 못살고 있는데 그 애들은 나처럼 돈벌이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들 집은 흙집에 양철지붕인데 전기는 없다. 자전거는 있다. 다른 아들은 벽돌집이지만 역시 전기가 없다. 그래도 큰애보다는 낫다.

나의 현재 수입원은 커피나 바나나같은 농작물을 팔아서 얻는 수입과 내가 목수 일을 해서 번 수입 이 두가지이다. 바나나 판 돈이 한달에 2만 쉴링 커피 판 돈이 3만 쉴링 이다. 그러나 농작물 수익은 해마다 다르다. 목수 일에서 번 돈이 월평균 5만 - 9만 쉴링이다. 년간 우리의 지출은 이십만 쉴링이다.

어렸을 때 특히 초등학교 다닐 때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때는 선생님이 굉장히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학비를 댈 수가 없어서 나의 꿈을 이룰 수는 없었다.  

교사는 되지 못했지만 대신 나는 다른 직업을 찾았다. 그래서 목수 일을 열심히 했다. 목수도 존경받는 직업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보수가 그리 많지 않은 점이다.

1953년 시작할때는 월급이 한달에 150 쉴링정도 되었다. 보수가 약간 나아진 것은 1970년쯤이다. 그때는 한달에 600 쉴링으로 올랐다..

한달에 900 쉴링 받게 되었을 때 나는 정규 고용직에서 은퇴를 했다. 그때가 1975년이다. 정부기관이나 개인 회사에서 더 이상 일할 수가 없었다. 수입이 더 좋았다면 나는 읍내에 집을 짓고 오토바이도 샀을 것이다. 그랬으면 일 하러다니기도 쉽고 카라궤에 사는 부모님을 뵈러 가기도 쉬웠을 텐데 그러지는 못했다.  

나는 우리 전통적인 족장제도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나에게는 그리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에 비하면 차라리 식민지 시대가 더 살기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월급은 150쉴링 정도로 적었지만 돈이 가치가 있었다. 그 월급으로 살수 있었고 다른 것까지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돈 가치는 없어지고 생필품 값은 올라간 한편 커피같은 농작물 값은 매우 낮다. 내가 정부와 회사에서 일하다가 퇴직하던  1975년 월급이 900 쉴링이었는데 그 월급으로는 살 도리가 없었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저 참고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애들이 앞으로 더 잘 살아질 것 같지 않다. 생활비가 너무나 많이 들기 때문이다. 교육비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그애들이 버는 돈을 생각하면 불쌍해진다. 기적이라도 일어나면 그애들의 앞날이 밝아질까. 그들은 아직 젊고 건강하니 무슨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적이 없는 한 그애들은 내가 살아온 것보다 더 못하게 살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전통 신앙을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현대적인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어머니가 세례 받는 것은 허락했다. 그후 역시 우리들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그 다음 몹시 노력을 한 끝에 그마저 영세를 받게 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전통신앙에서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고 설득해서 우리가 이제 기독교인이니 그도 우리에게 합세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가 동의를 하여 돌아갈 때는 기독교인으로 돌아갔다.  

기독교는 우리 사회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갈등, 미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미신에서 을 믿지 않게 해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서로 친근하고 평화스럽게 산다.

나의 행복의 근원은 아이들이다. 그애들이 내가 바라는 대로 성공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서로 이야기하고 의논한다. 그들이 마약같은 나쁜 습관에 물들지 않았다. 아내는 우리가 얻은 것을 무엇이든 서로 나누는 것에 행복해한다. 그래서 내 가족들과 함께 서로 돕고 이해하고 사는 것이 나에게는 행복한 일이다.  

내가 유일하게 화를 내는 것은 나의 가족들이 나에게 순종을 안할 때이다. 그런 것은 가장으로서 당연히 참을 수 없다. 다행히 그런일은 아주 드물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래도 내 인생이 대부분의 이웃들보다는 나은 것 같다. 몇은  교육을 많이 받아서 나보다 더 잘 사는 이도 있다. 그들은 차도 있고 밭도 더 늘리고 더 좋은 집을 짓고 산다. 그러나 이 지역에 사는 대부분 사람들 중에서는 내가 더 잘사는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이 지역 행정기구의 장으로 뽑은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소득 활동을 해서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일 때문에 다른 고장에 가보았다. 무소마 무완자 키고마 등지를 갔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산 것은 그런 여행을 할 때였다. 알다시피 누가 다른 먼 고장에 일을 하러가면 집에 올때는 무언가를 사오기를 기대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가구니 옷 같은 것을 그 때 샀었다.

우리 말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전통 관습도 지금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형편이다. 하야 말은 지금 없어져 버리느냐 아니냐의 위험에 처해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여행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때 우리 말만으로는 소용이 없기 때문에  스와힐리어로 말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기숙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집에 돌아올 때는 하야 말을 많이 잊어버리고 만다. 또 다른 고장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아예 하나도 모르기 일쑤이다.

두 번째, 종족간의 혼인이 우리 문화가 사라지는 것에 한 몫을 하고 있다. 하야족이 이제는 다른 종족 사람과 결혼을 많이 한다. 이런 섞인 결혼은 우리 전통 문화를 유지 보존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또 하야 사람들끼리 결혼한다 하더라도 전통 금기나 관습이 사라질 수가 있다. 즉 하야 남자는 같은 집안이나 특히 어머니 집안의 여자와는 결혼을 못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큰 도시에서 만나면 그들은 서로의 집안을 물어보지 않고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 (전통적으로 같은 집안의 사람들은 형제로 간주하고 어머니 집안 여자는 어머니로 간주된다. 그래서 이들간의 결혼은 금지 되어있는 것이다. )

셋째, 우리 전통 문화는 바나나 재배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는데 요새는 우리 지역의 밖에 사는 젊은이들은 바나나 재배 기술을 모르기 일쑤이다. 내가 이 바나나 문화라고 부르는 것, 혹은 우리 문화의 기둥이 되는 바나나의 가치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 전통 가치나 관습도 사라질 것이다.  

이 모든 요인들이 점차 하야 사회와 그 풍부한 문화를 사라지게 하고 있다. 참 안된 일이다.

(2000년 12월 28일 부코바 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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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lafrica

    일종의 가족사 또는 개인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왠지 오늘은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더 여려지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깊이있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아버지', '가장'이라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