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인에게 민간신앙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2004. 6. 29. 15:14
아프리카인에게 민간신앙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장용규

아프리카는 종교적 역사가 깊은 땅이다. 에티오피아에는 기원 후 1세기경부터 아랍지역에서 들어 온 기독교가 정착돼 에티오피아 정교회(Ethiopian Orthodox Church)가 형성되었다. 동부아프리카와 북부아프리카에도 이미 기원을 전후로 해서 아랍지역의 이슬람 문명과 꾸준한 교류가 있었으며, 기원 후 7세기를 시점으로 빠른 속도로 이슬람교가 침투해 들어 왔다. 18세기에는 수많은 유럽의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밀려들어오는데 특히 남부아프리카에서의 파급효과가 커 기독교는 남부아프리카의 최대 종교로 성장해왔다. 이런 역사적 정황으로 볼 때, 북부와 서부아프리카에는 이슬람이, 중부와 남부아프리카에는 기독교가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프리카의 종교를 이야기할 때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 있다. 흔히 아프리카의 종교를 구분하는데 기독교인 몇 %, 무슬림 몇 %, 전통종교 몇 %로 수치화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아프리카인들의 종교적 심성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에서 발생한 것이다. 아프리카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신자의 수를 헤아려 수치화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아프리카인들의 심성에 녹아있는 민간신앙을 수치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편화의 오류를 감수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이건 무슬림이건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이 민간신앙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민간신앙은 아프리카인들이 외세의 종교에 의존할 수 없는 특수한 환경에 부딪칠 때 특히 위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인들은 합리적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부딪쳤을 때 쉽게 민간신앙에 의존함을 볼 수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민간신앙의 틀 안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찾고, 처방을 하고 마지막으로 위안을 얻는다. 민간신앙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의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부터 아프리카인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민간신앙의 구조를 남아공의 줄루 사회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프리카 민간신앙의 삼위

창조신
아프리카 민간신앙에 유일신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논란의 대상이다. 많은 수의 아프리카 사회에서 창조주의 성격을 띤 절대자가 존재했었다는 기록은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남아공에 살고 있는 줄루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창조 신화는 역할의 중요성은 둘째로 치더라도 창조주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줄루 사회에서 찾아 보루 수 있는 절대자의 명칭은 다양하다. “위대한 자”라는 뜻을 가진 응꿀룽꿀루(Unkulunkulu), “처음부터 존재 하던 자”라는 뜻을 가진 움벨리깡기(umbelingqangi), 소만들라(somandla, 증대시키는 자) 등 절대자를 지칭하는 용어는 다양하다.

줄루 사회에는 창조주가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만든 뒤 자신이 살고 있는 하늘과 인간의 땅을 연결하던 줄을 거두어들이고 하늘의 문을 닫아 인간 사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말았다는 신화가 있다. 결과적으로 인간사회와 관계가 없는 초월적인 창조주는 줄루 민간신앙에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줄루인들은 창조주에 대해서 대체로 무관심하다. 창조주는 현실적으로 줄루사회의 길흉화복과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줄루 전통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제례를 지내지 는 일이 없다. 대부분의 줄루인들에게 창조신은 인간 세상의 뒷전에 머물러 있는 잊혀 진 존재로 남아있다.


조상 혼령(Amadlozi) : ‘살아있는 사자’(Living Dead)
줄루인들은 일반적으로 조상혼령을 이들로지(idlozi)라고 부르지만 조상혼령의 특성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판시(iphansi)는 ‘밑에 거주하는 존재’라는 뜻으로 조상혼령이 땅 속 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이름이며, 우모야(umoya)는 그 어원(-moya, 공기)이 말해 주듯 공기 중에 떠다니는 혼령을 말한다. 이통고(ithongo)는 ‘잠(ubuthongo)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는데 왜냐하면 이 조상혼령은 꿈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조상혼령은 꿈을 통하거나 동물의 몸을 빌려 후손에게 나타난다. 특히 줄루인들은 특정 종류의 뱀을 조상의 현신이라고 믿는다. 이냔데줄루(iNyandezulu)라고 하는 밝은 갈색에 검은 점을 가지고 있는 뱀은 그 크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대체로 ‘남자 조상혼령’을 대표한다. 완전히 성장한 이냔데줄루는 한 집안의 가장이거나 한 지역의 추장이 죽어 현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장기에 있는 이냔데줄루는 보통 남성 또는 아이가 죽어 된 혼령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갈색의 우마비비네(uMabibine)는 일반적으로 여성을 나타내는 뱀이며, 움세네네(umSenene)는 나이 든 여성을 대표하는 뱀이다. 줄루인들은 갈대로 지붕을 엮은 전통 가옥(indlu)을 한 두 채 씩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이 전통 가옥은 조상 혼령을 모시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조상혼령은 산 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사실 조상혼령은 줄루인들 사이에 경외의 대상으로 섬김을 받기보다는 현세에 살고 있는 후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들의 하루하루 삶에 관여하고 있는 (초)현실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조상혼령과 후손과의 현재(現在)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죤 음비티가 아주 적절한 표현을 남겼다. 음비티에 따르면 아프리카 믿음 체계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조상혼령에 대한 기억술이며 보통 4-5대까지 그 기억이 계속된다고 밝혔다. 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왜냐하면 “죽은 사람이 이름에 의해서 기억되는 한 그는 죽었지만 정말로 죽은 것은 아니(고)...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죤 음비티는 이러한 조상혼령을 가리켜 “살아 있는-사자”(死者, Living Dead)라고 불렀다.

조상혼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영향력을 상실하는데 일정 기간이 지나고 나면 영향력 있던 조상 혼령들조차 ‘조상혼령’이라는 모호한 범주 안으로 편입되어 사실상 후손들로부터 잊혀지고 만다. 브라이언트라는 민속학자에 따르면 후손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상의 혼령은 부계(父系) 조상, 즉 아버지, 할아버지와 가까운 남계 친척이라고 한다.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사실은 줄루사회에서는 죽음이 조상혼령이 되기 위한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조상혼령의 위치에 올라갈 수 있는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줄루인들은 죽음의 종류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 죽음은 인생을 알맞은 때에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이것은 악한 죽음이 아니며 그 사람의 영적인 존재 자체는 산 자들 사이에 지속된다고 한다.

죽음이란 것은 이 세상과 조상들이 살고 있는 세상간의 ‘전이’과정에 해당하기 때문에 조상의 혼령이 되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있다. 그 기본 조건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자신을 기억해 줄 후손이 있어야 한다. 죽은 자를 기억해 줄 후손이 존재하는 한 죽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고 삶의 연장선상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우구부이사 이들로지(ukubuyisa idlozi)라고 하는 특별한 통과의례(通過儀禮)를 거쳐야 한다. 우구부이사 이들로지는 ‘죽은 혼령을 다시 불러온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보통 이 의례는 사람이 죽은 뒤 일 년이나 이 년이 지난 뒤에 행해진다. 다만 여성이 죽었을 경우에는 이 의례를 행하지 않았다. 우구부이사 이들로지를 위해서 커다란 암소가 희생 제물로 봉헌되는데 때로는 한두 마리의 염소와 함께 적은 현금이 함께 봉헌되기도 한다. 이 의례가 행해지는 동안 죽은 사람의 이름이 조상들의 이름 반열에 들어가 암송되는데 이로써 죽은 사람은 당당하게 조상의 대열에 들어가게 된다.  

다른 하나의 죽음은 악(惡)과 관련이 있는 죽음인데 이것은 사람이 적절한 때에 적당한 장소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이 경우의 죽음은 원혼(冤魂)을 생기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 경우의 가장 대표적인 죽음은 전쟁터에서의 전사를 들 수 있다. 사람이 죽음을 맞는 기본 조건은 죽음을 바라 볼 친인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터에서의 죽음은 돌변적인 죽음이고 그 시신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원혼으로 떠돌게 된다. 식민 경제 체제의 도입과 함께 많은 수의 농촌 흑인들이 대도시로 광산으로 몰려 나간 것도 이러한 원혼을 생겨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낯선 광산에서의 죽음은 그를 기억해 줄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원혼으로 떠돌 가능성이 크며 유랑 원혼은 줄루 사회에 커다란 위협 요소이다. 사실 이러한 원혼 집단의 유랑으로 인한 질병의 확산도 인류학자들에 의해서 확인된 바 있다. 어린아이도 죽어서 혼령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죽음은 절대 직계 조상의 반열에 들지는 못한다.

직계 조상 혼령과 후손은 현실 사회에서 끈끈한 유대 관계를 유지한다. 후손들이 조상 혼령으로부터 바라는 큰 관심은 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보장해 주는 것이며, 이에 대한 대가로 조상 혼령은 후손들로부터 정규적인 제례 의식을 요구한다. 조상 혼령과 후손사이의 기본적인 교환 관계가 깨어지지 않는 한 조상 혼령과 후손은 건강하고 튼튼한 사회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가 항상 완벽하게 유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줄루 사회에는 많은 관습과 전통이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들을 완벽하게 지켜나가는 사람은 없을 뿐더러 어느 정도의 일탈 행위는 정상적인 사회 행위로 인정을 해 주고 있다.  


악마(Abathakathi)와 하수인
움타가티는 악마를 지칭하는 줄루 어로 조상 혼령과 함께 산 자들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이다. 조상 혼령이 한 가문의 후손들을 보호하고 번성케 하는 순 기능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면 악마는 사회 자체를 무차별 공격해 재난과 파괴를 일삼는 반사회적인 존재이다. 악마가 반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악마의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현지 조사를 하는 동안 많은 정보를 제공해줬던 점술가(isangoma) 알디나 Aldina는 악마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움타가티는 늙은 여자가 대부분이며 한밤중에 떠돌아다닌다. 이들은 바분(baboon, 원숭이의 일종으로 보통 원숭이보다 몸집이 훨씬 크고 포악하다.)을 탈것으로 이용하는데, 완전히 나체가 되어 바분을 거꾸로 타고 다닌다.” 알디나의 묘사에서 볼 수 있듯이 움타가티의 행위는 완벽하게 반(反) 사회적이다. 바분을 탈것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반 사회(자연) - 포악함을 상징하며 나체에 비정상적인 방법(거꾸로)으로 비정상적인 시간에(밤) 돌아다니는 것도 움타가티의 반사회적인 성격을 보여 주는 예이다. 움타가티는 인간에게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사회적 흐름을 거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움타가티는 그 성격에 따라 여러 종류의 하수인을 두고 있으며, 시체나 야생 동물에 주술을 걸어 하수인으로 이용한다. 또꼴로쉐(tokoloshe)는 움타가티의 하수인 중 대표적인 존재로 키는 작은 어린아이의 것을 넘지 않는 난쟁이이다. 어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또꼴로쉐는 자기 키 만한 어린아이의 눈에만 보이는데, 주로 한 밤중에 지붕을 타고 들어와 잠자는 사람의 가슴에 올라타 목을 조르거나 무차별한 성 관계를 갖는다고 한다. 줄루사회 주민들 중 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또는 ‘아침부터 피곤하다’라고 하는 사람은 일단 또꼴로쉐의 행위를 의심한다. 움타가티가 주로 이용하는 야생 동물로는 뱀, 야생 고양이, 바분 등이 있는데 이들은 사람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기보다는 움타가티의 탈것이나 심부름을 하는 존재들이다.

움타가티를 돕는 하수인 중 재미있는 존재는 잉꼬부(inkovu)라고 부르는 좀비이다. 잉꼬부는 움타가티가 죽은 시신을 다시 살려 하수인으로 쓰는 경우인데, 이들에게는 감정과 신경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힘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들은 한밤중에 움타가티의 부름을 받고 악마를 위해 여러 가지 힘든 일을 하는데, 특히 움타가티의 밭을 경작하는데 이용된다. 죽은 자의 초자연적인 힘을 빌림으로써 악마는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서 좋고 죽은 자는 산 자와는 달리 밭을 가는 동안 휴식을 취하거나 불평을 할 염려가 없어 노동력에 대한 이중 착취인 셈이다. 악마의 밭작물이 유난히 풍성하고 수확이 좋은 것은 잉꼬부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줄루 사회의 선(善)과 악(惡)

줄루 종교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선악 개념은 독특하다. 줄루사회를 비롯한 아프리카 전통 사회에서는 사회 질서와 평화 유지를 사회 구성원들이 지켜 나가야 할 신성한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여러 제도적 장치들 - 도덕, 관습, 규례 등 -은 일종의 권위와 더 나아가서는 신성함을 부여받았다. 이 ‘신성한’ 제도에 순응하는 한 사회 구성원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 제도적 장치의 신성함을 깨뜨리는 행위는 어떠한 것이든지 사회에 대한 일탈행위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회 질서와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었다.

사회 단위가 거대하고 사회 구성원간에 상호 익명성이 보장되는 현대사회는 개인주의를 특성으로 한다. 사회 기능 면에서 현대사회는 사회 분업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개개인은 자신과 네트웍을 형성하고 있는 활동영역 안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뿐 사회라는 추상적 전체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여기에 빈번한 타 문화권과의 교류로 인한 사회-문화적 다양성은 개인 관심의 다변화를 조장하는데 이러한 개인주의, 익명성, 그리고 관심의 다변화는 종교와 개인과의 관계에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 혼령과 개인은 개인적, 개별적 관계를 맺는다. 줄루사회는 다양한 친족 관계를 중심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개인의 행위는 다른 구성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줄루사회에서 마을 구성원간의 상부상조는 마을 질서 유지를 위해서 필수적인 행위이다. 줄루사회에서는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구성원을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관계를 중심으로 줄루사회 사회에서 선악의 개념이 형성된다. 구성원의 행위가 사회적인가 아니면 반사회적인가 하는 것이 선악을 결정하는 잣대로 작용한다.

줄루 사회에서의 선악개념은 우리의 선악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줄루의 인식론에서 악(-bi)은 나쁜 의도를 갖고 있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가 미치는 사회관계에 무게를 둔다. 다시 말해 악의 본질은 나쁜 의도를 가진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조화로운 사회관계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는 어떤 요소를 의미한다. 악이란 사회 구성원이 가지고 있는 반사회적 능력이다. 아프리카사회에서 구성원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어떤 관습이나 법률, 규칙 등을 깨뜨리는 행동은 반사회적인 ‘악’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는 관계가 없고 다만 자기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관습과 규례를 준수하면 ‘선’하게 행동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못되게’(악하게)행동한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인 본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인 규제이며 이러한 규제들은 신과 인간 간의 도덕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과 인간 간의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사회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였다.

줄루사회 사람들은 조상 혼령은 현재를 살고 있는 후손들을 보호하는 ‘선(善)’한 혼령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존재는 악의 화신인 악마(umthakathi)에 비교를 한다. 그 원인으로 줄루사회 사람들에게 조상 혼령은 항상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영적 존재인 반면 악마는 언제나 사회 질서를 파괴하려는 위험한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줄루사회 사람들은 조상 혼령은 항상 후손에게 번영과 질서 그리고 복지를 가져다준다고 믿는 반면 악마는 언제나 틈을 노려 사람들에게 재난과 질병을 던진다고 믿고 있다.  

일견 줄루 사회의 선악 개념은 ‘조상 혼령은 선하고 악마는 악한’ 이원론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줄루사회 사람들이 불행이나 질병을 겪어 그 원인을 찾아보려고 점술가를 찾아가 점술 행위를 하는 과정을 관찰해 보면 질병이나 재앙의 원인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줄루사회 사람들에게 질병과 재난을 가져다주는 존재는 악마가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조상의 혼령도 이에 못지 않은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조상 혼령이 다 후손들에게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부계 사회인 줄루 사회에서 후손들에게 우호적인 혼령은 남계친을 중심으로 한 직계 조상 혼령이며 결혼으로 맺어진 외촌혼령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직계 혼령은 한 가족의 안녕과 단합을 도모하는 혼령으로 줄루 선악 개념에 있어서 선한 조상 혼령의 범주에 들지만 외촌 혼령은 언제나 한 가족의 질서를 깨뜨릴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에 ‘악’한 범주의 조상 혼령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상 혼령은 선하다’라는 일반론적인 개념은 줄루 사회에 있어서는 적당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악의 대표인 악마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줄루 사회에서 악마는 사회 질서를 유린하는 악의 대변인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악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혼령이 악한 것은 아니다. 악한 혼령도 상황에 따라서 친 사회적이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선한 혼령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줄루사회 종교현상의 사회학적 해석  

줄루인들에게 세속적인 삶과 종교적인 삶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로 얽혀 있다. 이들에게 매일 매일의 삶은 종교의 영역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집안의 길흉화복이 있을 때에 줄루사회 사람들은 항상 특정 조상에 의례를 올린다. 이러한 의례가 반드시 형식적이고 거창할 필요는 없다. 조상의 이름을 읊으며 집에서 빚은 전통 주를 마당에 한 잔 뿌리는 것으로도 충분하고 좀 여유가 있을 경우에는 닭과 같은 작은 희생물을 바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있든지 조상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줄루사회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이러한 종교 현상의 내용은 변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사회의 변화는 종교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따라서 줄루사회 종교 현상은 줄루사회의 지정학적 특성, 친족 구조의 변화, 종족 문제 등과 사회적인 요소를 통하여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사회의 인식론은 그 사회가 처한 사회적 환경과 필연적 연관성을 맺고 있다. 아프리카 사회에서 발달된 인식론은 아프리카 사회가 처한 환경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인식론적 특성인 내향성과 신비주의적 경향은 인식론적 오류라기보다는 아프리카 인식론의 고유한 성격이라고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사회문화/사회인류학

아프리카 민족에 대한 단상

2004. 6. 29. 15:13
아프리카 민족에 대한 단상                                                               장용규


민족은 이해집단이다. 민족은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움직인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이 유지해 오던 정체성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이해를 추구한다. 프레드릭 바쓰(Barth, F.)가 주장한 민족의 영역(boundary)과 개인 사이의 상호작용은 아프리카라는 맥락 안에서 의미가 있다. 바쓰는 한 민족이 타 집단과의 경계를 설정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문화적 상징들, 예를 들어, 종교, 정치, 언어, 역사 등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관심을 보인다. 민족 정체성은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온 고정된 문화적 산물이라기보다는 융통성 있는 사회조직의 특성이라는 것이 바쓰의 입장이다. 특히 바쓰는 민족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로 ‘주어진 환경’에 주목한다. 결국 상황주의는 민족 정체성과 개인과의 관계에서 ‘합리적 선택’에 무게를 두는 이론이다. 물론 ‘합리적 선택’이란 현실적인 실리를 바탕으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은 이해집단인 셈이다.
  
통가냐 줄루냐
바쓰의 상황주의적 관점이 정확하게 적용되는 사회가 남아공 줄루민족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에구투구제니 마을이다. 에구투구제니는 남아공 끄와줄루-나탈주의 동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현재 스스로 줄루민족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마통가라고 불리던 전혀 다른 민족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이(정확히 말해서 남자들이) 통가민족을 버리고 줄루민족을 자처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흥미롭다.  

아마통가(amaThonga)는 “동쪽의(longa)” 사는 “사람들”(ama-)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아마통가에는 이런 지리적 특성과 함께 “열등한 사람들”이라는 경멸적인 의미도 담겨있다. 그래서 에구투구제니 사람들은 자신들을 통가라고 부르면 무척 화를 낸다. 지금은 외부사람들이 이 지역 사람들을 통가라고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불과 20여 년 전 만해도 이 지역은 ‘아마통가랜드’(amaThongaland), 즉 통가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알려져 있었다.

19세기 통가랜드는 줄루왕국에 조공을 바치고 자치권을 행사하던 관계에 놓여있었다. 19세기 말, 남아공에 눈독을 들인 영국이 줄루왕국과의 몇 차례 전쟁을 치른 뒤 줄루왕국을 해체하면서 통가랜드는 잠시 완전한 자치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영국과 포르투갈이 현재의 모잠비크에 있는 마푸토 항(港)을 두고 갈등을 벌이면서 통가랜드는 둘로 나누게 된다. 그 중 하나는 포르투갈령(領) ‘마푸토랜드’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령(領) ‘아마통가랜드’이다.

1948년에 정권을 잡은 국민당은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분리정책)의 일환으로 흑인사회를 13개의 자치구역으로 나눠 분할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끄와줄루(KwaZulu)이다. 이즈음 아마통가랜드는 끄와줄루에 편입되어 서서히 줄루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아마통가랜드와 끄와줄루 사이에는 레봄보(Lebombo)라고 부르는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아마통가랜드는 이후에도 상당 기간 문화적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 줄루민족주의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잉카타 자유당(Inkatha Freedom Party)과 지도자인 부텔레지(Buthelezi)는 줄루왕국의 부활을 내걸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줄루인들의 민족정체성(identity)은 이때부터 형성되었다고 한다. 아마통가랜드는 여전히 ‘열외’의 땅이었다. 잉카타 자유당의 입장에서는 끄와줄루-나탈에 산적해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놔두고 아마통가랜드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역사적으로 무관심의 땅이자 변방이었던 아마통가랜드는 잉카타 자유당에게도 별로 달갑지 않은 곳이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1980년대 초 아파르트헤이트 정권과 스와질랜드의 은밀한 거래가 발각되면서부터였다. 남아공과 모잠비크에 둘러싸인 내륙국 스와질랜드는 남아공 영토에 있는 항구를 영구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도 여러 가지 속셈이 있었다. 스와질랜드가 눈여겨본 곳이 아마통가랜드에 있는 코지 베이(Kosi Bay)라는 해안이었다. 스와질랜드는 아마통가랜드의 일부를 스와질랜드에 건네 달라고 요구했다. 그 대가로 남아공에 스와질랜드의 땅 일부와 코지 베이에서 스와질랜드에 이르는 철도부설권을 건네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잉카타 자유당은 실질적인 자치권을 갖고 있는 자기들을 무시하고 남아공 정부와 스와질랜드가 아마통가랜드를 두고 협상을 벌였다는 사실에 반발했다. 잉카타는 아마통가랜드에 대해 강경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잉카타는 아마통가랜드 지역주민들에게 신분증에 줄루임을 명기하라고 압박을 가해왔다. 그러면서 크와줄루에서는 줄루 사람이라는 신분증을 가진 사람만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아마통가랜드 사람들에게 통가 정체성을 고집할 경우 사회적인 불이익을 감당하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당시 아마통가랜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이주 노동자의 신분으로 도회지로 몰려 나가고 있었다. 잉카타는 행정적으로 이들 계약노동자들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감시했기 때문에 아마통가랜드 사람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좋던 싫던 ‘줄루’ 신분증을 가져야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주 노동자들은 대부분 건장한 남성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줄루화된 사람들은 15-50대에 이르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에구투구제니, 통가와 줄루 이중 정체성
아마통가랜드의 작은 마을인 에구투구제니는 이런 변화를 한 눈에 보여주는 현미경이다. 에구투구제니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주 노동의 경험이 있고 그래서 자신들은 줄루라고 주장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줄루 신분증을 갖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성씨를 바꾸는 등 적극적으로 줄루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협화음은 곳곳에 남아있다. 한 집안에 두 성씨가 함께 쓰이는 것이 대표적인 불협화음이었다.

사킬레 템부(Sakile Thembu)는 나이가 서른 둘 이었지만 정식으로 결혼은 하지 못했지만 부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마을의 큰 길 가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사킬레는 10대에 학교를 그만두고 죠하네스버그 근처의 광산에서 광부로 일했다. 몇 년간 악착같이 돈을 모아 에구투구제니로 돌아 온 사킬레는 중고 바키(bakkie, 사륜구동 화물차)를 한 대 살 수 있었다. 에구투구제니에서 사킬레의 부인은 구멍가게를 하고 자신은 바키로 화물과 승객을 실어 나르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킬레의 가게가 길가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러 들르기 때문에 나도 자연스럽게 가끔씩 그곳에 들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하게 되었고 직업의식을 살려 사킬레의 족보를 캐게 되었다. 그런데 사킬레는 자기 아버지와 자기의 성씨를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뗌베’(Tembe)인 반면 자기는 ‘템베’(Thembe)라고 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냐고 물었다. 하지만 사킬레는 친아버지가 맞지만 아버지는 ‘뗌베’이고 자기는 ‘템베’라는 것을 또 강조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한 집안에 ‘뗌베’와 ‘템베’ 성씨가 같이 사용되는 것은 에구투구제니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는 현상이었다. 뗌베는 이 지역의 원조격인 통가(Thonga) 성씨인 반면 템베는 줄루 사회의 대표적인 성씨 중 하나였다. 사킬레는 이렇듯 통가와 줄루 사이의 유사한 성씨를 이용해 자신의 정체성을 바꿔버린 것이다.

에구투구제니에서의 ‘줄루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통가 사람들이 줄루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한 사회의 정체성이 바뀐다는 것은 갑자기 ‘우리 줄루가 됩시다’라고 말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통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줄루가 되기보다는 그냥 통가로 남아 있기를 희망하는 사람들, 양쪽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편리를 도모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미묘한 갈등관계는 에구투구제니의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지만 에구투구제니에서 줄루와 통가를 가르는 기준은 성별과 연령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엄마와 누나는 통가, 아버지와 나는 줄루”
“할아버지, 할머니는 통가, 나와 내 형제는 줄루”

에구투구제니에서는 보통 남자, 특히 젊은 남자일수록 줄루임을 강조하고 여자, 특히 나이든 노파는 통가로 불린다. 더욱이 재미있는 것은 이런 식의 분류가 심지어 가족 사이에서도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에구투구제니 남자들은 자신들이 줄루 임을 내세우고 여자들을 통가라고 비하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에구투구제니에는 성에 따른 노동의 분화가 확실하다. 농사는 여자의 몫, 목축은 남자의 일이라는 등식이 확실하게 적용된다. 남자들은 아무리 바쁜 농번기라고 해도 손가락하나 까딱하는 일이 없다. 여자들이 새벽부터 밭에 나가 땅을 갈고 씨를 뿌려도 남자들은 먼 산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줄루 남자니까. 줄루 남자니까 농사를 하면 체면이 손상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여자들의 반응은 아주 냉소적이다.

“자기들이 무슨 줄루라고? 농사일 하기 싫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이 목축을 하는 것도 아니다. 에구투구제니는 목축을 하기에 아주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에 전문가에게 가축을 몽땅 맡겨 버린다. 그러니 남자들이 할 일이란 아침에는 술 마시고, 점심에는 낮잠 자고, 늦은 오후에는 축구를 하는 걸로 시간을 때운다. 물론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있고 외지에 나가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뚜렷한 직업이 없는 젊은 남자들이 이런 게으른 생활태도를 보이는 단 하나의 이유는 “나는 줄루”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에 따른 노동 분화는 에구투구제니 고유의 관습이 아니고 줄루 사회에서 수입된 것이다. 인류학자들의 보고서를 보면 줄루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 통가사회는 남자도 밭을 갈고 작물을 재배했다는 증거이다. 사실 에구투구제니에는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들을 간혹 볼 수 있다. 예전에 농사짓던 습관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에구투구제니에서 줄루와 통가를 가르는 또 다른 기준은 음식타부이다. 줄루 사람들이 회피하는 음식은 의외로 많다. 여기 세 개의 사례는 에구투구제니 사람들이 음식을 가지고 줄루와 통가를 가르는 기준을 보여준다.  

여느 날처럼 상고마 친구 쟈불라니 집에 들렀다. 쟈불라니 집에는 모처럼 쟈불라니의 어머니를 비롯해 온 식구가 모여있었다.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나무아래 앉아 온 식구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합석을 하고 보니 수박과 비슷한 것을 먹고 있었다.  
푸른 껍질에 검푸른 줄무늬는 꼭 수박인데 속이 노란 것을 보니 수박이 아닌 것도 같았다. 여기에는 워낙에 이상한 과일들이 많아서...
“이게 뭐야?”
“우카베(Ukabe, 수박)”
쟈불라니의 어머니가 과즙이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대답했다.
그런데 온 식구가 모여 있는데 수박을 먹는 것은 쟈불라니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딸이었다. 쟈불라니와 아들은 멀뚱멀뚱 수박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쟈불라니, 너는 왜 수박을 안 먹어?”라고 물었다.
순간 쟈불라니의 얼굴에는 야릇한 미소가 흐르며 뜻밖의 대답을 했다.
“수박은 노인네하고 여자들이나 먹는 거야. 나 같은 줄루 사람은 수박을 안 먹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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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한 중턱이라 이미 해가 떨어졌음에도 한 낮에 해가 달궈놓은 지열이 후끈하게 올라왔다. 집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해졌지만 사람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모두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었다. 저녁식사를 한 뒤 나도 돗자리에 앉아 친구 어머니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갑자기 어둑어둑한 마당 한 가운데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왠 연기지?’
놀란 눈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부엌에서 설겆이를 하고 있던 동네 아이가 뛰어나왔다. 한 손에는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동네 아이는 부엌문간에 있던 물통에서 양동이에 물을 대충 따라 들고 연기가 나는 곳으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것이었다.

‘저기에 불이 날 이유가 없는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불이 난 곳에 도착한 동네 아이는 물을 뿌려 불을 끌 생각은 하지도 않고 연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는 물에 담그는 것 아닌가...

‘불끄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하얗고 큼지막한 날개를 단 곤충들이 끊임없이 땅속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아하-, 저기는 개미집이 있던 자리지.’
그제서야 나는 하얀 연기처럼 보인 것은 연기가 아니라 날개미들이 떼를 지어 날아오르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산란기를 막 지난 날 개미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개미집을 나와 허공에 떠오르고 있는 것이 내 눈에는 마치 흰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가 두 손을 휘저으며 날 개미들을 잡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십 여분이 지난 후 동네 아이는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양동이를 들고 돌아왔다. 양동이는 하얀 날개와 검은 개미의 몸뚱아리로 가득 차 있었다.
“왜 그걸 잡았어? 그걸로 뭘 할건데?”
“예, 우리 할머니에게 드리려고요.”
“할머니?”
“예. 우리 할머니는 이걸 볶아드리면 참 좋아하셔요.”
순간 개미는 단백질 섭취가 부족한 이곳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단백질 보충 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겠다.”
인사치레로 ‘맛있겠다’라고 말하는 순간 옆에 있던 친구 어머니가 끼어 들었다.
“나는 백인 부인이라 그런 것은 안 먹어”.
“???”
친구 어머니는 흑인이었지만 남편은 백인 아버지과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었다. 그래서 친구 어머니는 간혹 자기는 백인의 아내라고 말하곤 했다. 그것은 자신이 적어도 통가는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친구 어머니의 말은, 비록 농담이었겠지만, 에구투구제니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정 음식에 대한 기피 현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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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정부에서 노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날이다. 친구가 연금을 나눠주는 곳에 가서 빌려 준 돈을 받아야 한다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한다. 좋은 구경이 될 것 같아서 친구 뒤를 따라 나섰다.
남아공 정부는 60세가 넘은 노인들에게는 매달 600랜드(약 12만원)에 해당하는 연금을 지급한다. 이 돈은 에구투구제니에서의 평균 소득을 감안해 볼 때 적지 않은 돈이다. 60세 이상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부양하는 집은 한 달에 1200랜드라는 수입이 들어와 가계 운영에 적지 않은 도움을 얻게 된다. 이렇다보니 과부가 된 여자들, 심지어는 미혼녀들이 연금을 바라보고 60세가 넘은 할아버지와 동거를 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어쨌든 이 적지 않은 돈을 받기 위해 마을 노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마을 공터에 길게 늘어선다. 내가 공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6인 승 승합차를 개조한 연금 차량이 연금을 나눠주고 있었다. 연금 차량 옆에는 중무장을 한 경찰 몇 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범죄가 빈번한 남아공에서는 무장강도들이 연금 차량을 털어 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삼엄한 분위기와는 달리 연금 차량 주변에는 이른 새벽부터 장이 열려 있었다. 대부분이 노인네라는 것을 제외하곤 여느 장과 마찬가지로 축제 분위기였다. 연금을 탄 노인네들은 든든한 목돈을 손에 쥔 탓인지 오늘만큼은 돈을 쓰는데 인색해 보이지 않았다.
손녀딸을 위해 앙증맞은 드레스를 사는 할아버지...
손자를 위해 운동화를 사는 할머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할아버지...
그 동안 벼르고 별렀던 양산을 사는 할머니...

모두들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고 있었다. 어떤 노인네들은 밀린 빚을 받기 위해 몰려 온 사람들과 실갱이를 하고 있었다. 구멍 가게를 하는 친구도 밀린 술값을 받아야 할 할아버지를 찾아냈다.
“이번 달에는 모두 갚아 준다고 했잖아요.”
“아니, 돈이 없으니까 이번 달엔 10랜드만 주고 다음 달에 다 갚을게.”
“안돼요. 지금 연금을 받았잖아요.”
“다른 데에 꼭 쓸 곳이 있어서 그래.”

결국 10랜드 밖에 돌려받 지 못한 친구는 입이 한 자는 나와 있었다. 가게 단골에게 너무 매몰차게 돈을 받아 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장에는 많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옷과 플라스틱 제품, 장난감, 약방의 감초인 간이술집과 고기 집... 하지만 연금을 받는 곳에 선 장에는 다른 장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물건들이 적지 않게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중 마치 해산물을 말려 꼬챙이에 꿰어 놓은 것 같은 것이 있었다.
“이게 뭐야?”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아마세네네(amasenene)라고 해.”
“아마세네네? 아마세네네가 뭐지?”

친구가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바다에서 자라는 것이라는 뜻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치 멍게를 말려 놓은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사전을 찾아보니 아마세네네는 멍게였다).
“이거, 먹는 거야?”
“응, 이걸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아 먹으면 맛이 좋아.”
“먹어 봤어?”
“아니! 이건 노인네들이나 먹는 거야.”
“맛이 좋다고 했잖아?”
“...”
“왜... 너는 이걸 좋아하지 않아?”
“이건 노인네들만 먹는 거야. 그래서 오늘 장에 이런 물건이 나오는 거지.”
“왜 노인네들만 드시는데?”
“왜냐하면 노인네들은 통가 사람이거든. 나는 줄루라서 이런 거 먹지 않아...”


친구는 멍게라는 것은 통가 사람들이나 먹는 음식으로 줄루인 자신은 그따위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멍게뿐이 아니었다. 에구투구제니 사람들은 갑각류 해산물 - 특히 새우나 멸치 그리고 가재 등 -은 철저하게 피한다. 이런 음식은 통가 사람들이나 먹는 저급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에구투구제니에서 줄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표적인 통가음식으로 알려져 있는 돼지고기와 생선은 손도 대지 않는다. 음식을 먹는 것은 사람의 생리욕구를 충족시키는 본능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음식에 대한 타부는 사회-문화적으로 결정된다. 에구투구제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에 대한 타부는 줄루화가 진전되면서 형성된 문화적 산물인 것이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사회문화/사회인류학

아프리카의 성과 결혼 : 신화와 현실

2004. 6. 29. 15:12
아프리카의 성과 결혼 : 신화와 현실

장용규

솔로몬의 지혜

남아공 유학시절, 학교 앞에서 같이 자취를 했던 분투(Buntu)라는 학생으로부터 들은 재미난 이야기 한 토막.

코사 ‘전통’에서 사춘기가 지난 사람들이 이성교제를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지. 오히려 사춘기가 지났는데도 이성친구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지. 뭔가 부족한 바보가 아니고서야... 우리 또래에 여자친구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거든. 남녀 간의 교제에는 일편단심이 통하지 않아. 뭐,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만날 수도 있고, 반대로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사귈 수도 있는 거지. 그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야. 단 우리 ‘전통’은 남자와 여자의 이성교제는 허락하되 성관계는 엄격하게 금하고 있어. 그런데 말이야. 남자와 여자가 사귀다 보면 관습적으로 허락하는 선을 넘어서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되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럴 경우에 관습에 따라 엄격한 제재를 받아. 특히 남자에 대한 처벌이 엄격하지.

내 친구에게 여자친구가 있었어.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해. 어느 날, 그 여자친구가 임신을 해 버렸어. 당연히 그 집안은 발칵 뒤집혔겠지. 집안의 큰 수치이거든. 임신을 한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책임규명을 하기로 했지. 그런데 문제는 딸에게 남자친구가 여럿이었다는 거야. 과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물론 모두들 발뺌을 했겠지. 결국 여자친구는 아이를 낳았다는 거야.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자기 딸의 남자친구들을 모두 불러 모았대.

“누구냐, 누가 이 아이의 아버지냐?”
당연히 침묵이 흘렀겠지? 아버지는 결국 일대일 대면을 했다는 거야. 어린아이를 일일이 남자친구들과 비교해 보고 얼굴 형태나 신체구조가 가장 비슷한 친구를 ‘친아버지’로 규정 한 거지. 그게 바로 내 친구였어.

분투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그 날 나는 분투의 이야기를 듣고 박장대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솔로몬을 뺨치는 지혜가 아닌가?

분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남부에 있는 트란스케이(Transkei) 주에서 북동쪽으로 인접해 있는 끄와줄루-나탈(KwaZulu-Natal) 주로 유학 온 코사(Xhosa) 학생이었다. 분투는 어린 나이였지만 코사 속담을 섞어가면서 이끌어가는 화법이 능숙해 상당한 매력을 던져주는 친구였다. 그 친구에게 코사 사회의 많은 관습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지만 위에 소개한 이야기는 ‘성인식’과 함께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재미난 이야기였다. 분투는 자기 마을에서 혼전관계를 통해 아이가 태어날 경우 관습에 따른 보상절차가 있다고 말했다. 먼저 아이를 낳게 한 책임이 있는 남자는 여자 집안에 소 한 마리를 보상하고, 여자의 또래 친구들에게는 염소 한 마리를 보상하는 것이 관례라고 했다. 분투가 설명해 준 코사 사회의 사생아에 대한 보상관습은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많은 민족지에 그대로 드러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사회에서 사람은 횡적/종적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한다. 횡적관계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집단을 뜻하며, 종적관계란 연령별로 맺어진 또래집단을 의미한다. 이 두 집단은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이 일상생활을 해 나가면서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두 축이다. 이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은 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한 개인의 오명은 집단의 명예실추로 이어진다. 더욱이 오명을 쓴 개인의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지 않을 경우 개인과 개인이 속한 집단은 초자연적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강하게 갖고 있다. 초자연적 처벌이란 조상혼령으로부터 오는 처벌이다. 실제로 이들 사회에서는 사생아는 조상혼령의 이름을 물려받을 수도 없으며,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온갖 사회적 불행과 질병에 시달린다고 믿고 있다. 아이의 생부가 누구인지 반드시 확인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아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부를 통해 보상으로 받은 가축은 조상혼령에게 바치는 제물로 이용된다. 남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이성간의 교제에 대해 관대한 반면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성을 문화로 재창조 한다 : 레소토의 본야찌(bonyatsi)

아프리카의 성과 결혼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항상 회자되는 것 중의 하나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왕성한 성욕과 원초적 본능에 관한 것이다. 일전에 국내에서 출간된 아프리카 성문화와 관련된 책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저자는 책에서 온통 아프리카의 기묘한 결혼제도를 동물적 성욕과 연결시켜 풀어내고 있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야생적인 성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야생동물들의 사진을 함께 싣는 친절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인간의 성욕 = 야생동물’과 연결시키려는 흔적이 역력했다. 씁쓸했다.

인간은 성을 문화로 창조하는 유일한 동물일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은 본능적인 것이며 동시에 ‘유희’의 성격을 띤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의 성에 대한 인식은 동물의 세계와 확연히 구분된다. 동물의 세계는 철저하게 개체증식이라는 차원에서 암컷과 수컷이 교미를 한다. 자기증식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은 자본이고, 유희이며, 권력이다. 돈을 위해 성을 팔고, 성적 쾌락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성을 권력화 한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성은 사회-문화적 현상인 셈이다.
한 문화권의 성문화가 오해를 받기 쉬운 이유는 다른 문화권에 낯설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성문화가 대표적으로 오해를 받는 사례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성적 표현은 우리에게 낯설다. 성에 도덕적 엄숙함을 적용하는 우리 사회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성적 표현은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여기 한 사례를 소개하겠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둘러싸여 있는 산악국가 레소토(Leshoto)에는 본야찌(bonyatsi)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다. 본야찌는 혼외정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레소토의 일반적인 관습이다. 레소토에 사생아가 많은 것은 본야찌 풍습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부도덕할 뿐 아니라 법적인 처벌까지 감수해야 할 이 풍습이 레소토에서는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비정상적이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일정하게 유지되어 온 관습. 뒤르케임의 말을 빌리면, 본야찌는 지극히 ‘사회적인 것’이다. 실제로 레소토 사람들은 본야찌 풍습이 도덕적으로는 완벽하지 않지만 사회적으로는 인정받을 수 있는 행위라고 받아들인다. 현대식 교육을 받은 사람일수록 본야찌 풍습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도 개인적으로는 본야찌를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본야찌는 레소토 사람들, 더 나아가서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무분별한 성관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일까? 성에 대한 무분별함, 후세에 대한 무관심이 레소토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일까? 그렇지 많은 않을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식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학자들 사이에는 본야찌가 ‘전통’이냐 아니면 산업사회의 산물이냐에 대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먼저 본야찌를 소토(Sotho) 사회의 전통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소토사회는 ‘전통’적으로 일부다처제를 유지해 왔다. 일부다처제는 소토 사회의 성에 대한 엄격한 금기와 관련이 있다. 소토 사회에서는 아내가 아이를 낳은 뒤 2년 동안 성 관계를 갖는 것을 엄격히 금지해 왔다. 따라서 두 번째 부인이나 세 번째 부인은 소토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레소토 사회에서 부인을 한 명 이상 둘 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은 드문 것이 사실이다. 부인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금액의 신부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아이를 낳은 아내에 대한 2년간의 성적 접촉 금지라는 전통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다른 여자와 불법적인 관계가 묵인된다는 주장이다.

본야찌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사회제도와 관련이 있다. 레소토 남자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다. 신부대(bride-price)라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소작농이거나 이주 노동자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는 레소토 사람들에게 신부대는 버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난한 레소토 서민들은 지역의 재력가나 명망가와 일종의 계약을 맺게 된다. 추장이나 세력가는 서민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묶어두기 위해 이들을 바흘랑가(bahlanga, 고객)로 맞이한다. 이들은 바흘랑가를 위해 ‘신부대’를 대신 치뤄 주고 바흘랑가의 결혼을 성사시킨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바흘랑가는 추장이나 세력가에게 충성을 바치기도 한다. ‘보호자-고객’(patron-client)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바흘랑가가 결혼을 통해서 낳은 아이는 신부대를 대신 지불해 준 추장이나 세력가에게 귀속된다. 이를 소의 아이(bana ke ba likhomo)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아내를 얻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은 추장이나 명망가의 아내에게 접근을 해서 혼외정사를 가질 수 있다. 혼외정사를 통해 태어난 아이에 대한 양육권은 물론 명망가에게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명망가의 아이로 인정받는다. 이처럼 레소토의 가난한 청년들은 추장이나 세력가에게 신부대를 대납해 달라고 부탁하거나, 추장이나 세력가의 아내 중 한 명과 혼외정사를 통해 성적욕구를 충족시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양자의 경우 모두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명망가들은 본야찌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일부러 행사하기도 한다. 왕의 아내가 왕이 동맹을 맺고자하는 지역 세력가에게 가서 동침을 함으로써 왕국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도 있다.

본야찌는 레소토가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변화된 모습으로 다가온다. 레소토에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많은 시골 남성들이 대도시로 나가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규모 산업단지와 플랜테이션으로의 이주가 선호되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 정부는 남자 이외에는 이주 노동자의 신분증을 발급하지 않았다. 호스텔(Hostel)문화는 이런 남성 중심의 이주 노동자가 만들어낸 문화이다. 호스텔은 남성 이주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한 숙소였다. 이곳에 장기간 체류하는 남성들은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매매춘이나 동성애에 쉽게 빠지곤 했다. 반면에 남성이 부재 하는 시골은 여성 인구가 편중된 현상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혼외정사와 사생아 문제는 사회문제로 부각되기도 했다. 결국 레소토의 본야찌는 레소토 사람들의 성관념이 사회-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 형태로 발전된 풍습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다처제에 대한 오해 : 신화와 현실

성 행위가 문화 행위로 규정되는 최종점에는 결혼이 있다.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조직은 가족이다. 사회의 구성단위로서 가족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남녀 간의 사회적 결합이 필요하다. 이것을 결혼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결혼제도와 결혼에 따른 제약이 너무 다양하다는데 있다. 지금은 서양에서 보편적인 결혼형태인 일부일처제가 이상적인 결혼형태로 강요되고 있지만 과거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이질적인 결혼형태와 제도가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대표적인 것이 지금의 수단 북부에 살고 있는 누어(Nuer) 사회이다. 누어 사회에는 유령 결혼(ghost marriage)이라는 결혼제도가 있다. 이것은 실제로 유령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과부가 낳은 아이는 죽은 남편의 아이로 취급되는 관습이다. 이와 함께 여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는 동성결혼이 있다. 이는 주로 나이가 많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여자가 젊은 여성의 결혼 비용을 충당하는 것으로 이 경우에 젊은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는 ‘아버지’(나이 많은 여성)의 아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레소토의 본야찌 풍습과 유사한 면을 엿 볼 수 있다.

아프리카의 결혼풍습 중 가장 많은 오해를 받는 부분은 일부다처제에 관한 것이다. ‘아프리카 사회는 일부다처제’라는 신화는 아프리카 남성들이 아내를 여럿 두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일부다처제는 어디까지가 신화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남아공의 최대민족인 줄루(Zulu)는 ‘전통’적으로 일부다처제를 유지해 왔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줄루 남성들은 아내를 여럿 두기를 희망한다. 아내를 여럿 두어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먼저 혈연에 대한 집착이다. 이들에게 자식을 낳아 자신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우리 못지않다. 특히 아들에 대한 선호도는 무척 높은 편이어서 아들만큼은 ‘다다익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줄루 사회의 뿌리 깊은 조상숭배와도 관련이 있다. 줄루 사회에서 조상혼령은 ‘살아있는 죽은 자’이다. 죽은 자가 후손들, 특히 아들에 의해 기억되는 한 죽은 자의 육신은 소멸되었어도 혼령은 살아있다는 믿음 때문에 줄루 사회에서는 조상혼령에 대한 절대적인 섬김을 중요하게 여긴다. 아들을 많이 낳은 사람일수록 자신을 기억해주는 시간이 연장될 터이고 이는 당연히 남의 부러움을 사게 된다. 아들을 많이 낳기 위해서, 아들을 많이 낳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 아내를 여럿 두는 풍습이 생겼다는 말이다.

줄루 사회는 농경과 목축을 병행하지만 기본적인 생계는 농경활동을 통해 얻은 곡물로 유지된다. 줄루 사회는 노동이 철저하게 분화되어 있어 농경활동은 여성의 경제영역으로 남아있다. 남자는 ‘절대로’ 농사일에 간여하지 않는 것이 자신들의 ‘전통’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여자는 노동력의 원천이다. 당연히 여자가 많은 집안은 풍부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다른 사람보다 밭 개간이나 작물 파종 등 농사일에 유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내를 여럿 두는 것은 이런 경제적인 측면을 살펴볼 때 중요하다. 줄루 사회에서 아들을 선호하지만 딸을 낳는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는다. 아들이 종교적, 사회적 신분 유지에 중요하다면 딸은 경제적 효용가치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딸은 시집을 가기 전까지는 어머니를 도와 농경활동을 하는 보조 인력으로 활용될뿐더러 결혼을 할 때에는 신부대로 소 열한마리와 교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줄루 사람들은 아들, 딸 구별 없이 많은 자식을 낳은 것을 선호한다. 당연히 일부다처제는 줄루 남성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결혼형태이다.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다.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 줄루 사회에서 남자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신부 측에 소 열한마리를 지불해야 한다. 신부가 귀족일 경우에는 그 수가 스물 네 마리까지 올라간다. 소 한 마리 가격이 보통 3백만 원 정도라고 볼 때, 금액으로 환산해서 3천 3백만 원이라는 돈이 필요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줄루 노동자의 봉급이 약 10만 원 안팎임을 감안할 때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서민이 강남에 아파트를 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현실적으로 결혼을 하는 것도 힘든 상황에서 아내를 여럿 둔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다. 물론 일부 사회의 재력가들은 아내를 여럿 두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기술적인 문제가 남아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법적으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지 않는다. 기독교 국가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양식 결혼제도인 일부다처제를 법에 명시해 왔다. 아직 시골지역에서는 관습법을 따르고 있지만 성문법은 항상 불문법에 상위하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아내를 여럿 둔 명망가의 경우 첫 번째 부인 이외에는 법적인 아내가 될 수 없다. 첫 번째 부인 이외의 여자에게서 낳은 자식은 입양 등의 과정을 통해서 자식으로 받아들이는 번거로움을 거쳐야 한다. 이렇듯 관습에 기반을 둔 ‘전통’사회의 결혼제도와 현대사회에서 제도화한 결혼제도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다.

일부다처제는 줄루사회의 남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결혼형태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일부다처제는 기술적으로,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결혼제도임에도 분명하다. 줄루사회, 더 나아가서 아프리카 사회를 일부다처제 사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프리카의 다양성을 박제하는 신화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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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적 제국주의"(Patriarchial Emperialism)-1

2001. 12. 5. 23:41
서양이 아프리카를 분할통치하면서 가장 먼저 도입해야 했던 것은 '통치이념'이었습니다. 특히 영국은 아프리카를 통치하기 위해 적지 않은 규모의 백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여기에 영국정부에서 파견된 식민관료, 선교사 등을 이주시켜 해당지역의 통치를 위임했습니다.

식민지배 초기의 영국인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출세의 길을 보장받지 못한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본국에서 교육(주로 선교사로서의 소양교육)을 받은 후 식민지에 투입되었지요. 그 대표적인 인물이 데이빗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입니다.

리빙스턴은 스콧랜드(Scotland)의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방직 공장에서 힘겨운 노동일을 해왔습니다. 신분상승에 야심이 차 있었던 어린소년은 미션학교에 들어가 선교사가 된 후 아프리카로 건너와 탐험가로, 선교사로, 그리고 행정관료로 일생을 마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계층의 사람들은 영국에서 누릴 수 없었던 특권을 아프리카 땅에서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이 아프리카를 본격적으로 관리하면서 지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군인, 지식인, 전문 행정관료 등을 파견했습니다. 이들은 유럽 사회에서도 존경받는 '신사계층'이었으며 당시 빅토리아 왕조에 절대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아프리카에 정착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작업은 자신들이 아프리카 흑인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차별화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었지요. 문화 진화론적인 관점에 사로잡인 이들은 '차별'을 강조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적 상징을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아프리카 땅에 영국적 문화전통을 이식(또는 창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도입한 영국적 문화전통은 다름아닌 "가부장제적 제국주의"였습니다. 당시 유럽, 특히 영국과 독일 그리고 벨기에,을 지배하고 있던 정치 이념은 "제국주의적 왕권"(Imperial Monarchy)였습니다. 영국(그리고 다른 유럽 식민지배세력)에서 파견된 식민관료들은 아프리카 땅에 자신들과 아프리카 흑인들의 관계를 군대식 주종관계로 질서지었습니다. 그 결과 "가부장제적 주종관계"가 형성되었지요.

가부장제적 주종관계는 군대식 위계질서와 절대 복종을 바탕으로 하는 군주와 식민의 관계를 상정하고 있는데, 아프리카에 건너 온 영국 식민관료들은 바로 빅토리아 왕조를 대변하는 '상징'세력이었습니다. 아버지 격인 '영국'과 자식 격인 '아프리카'라는 관계가 성립된 것이지요. 물론 이 위계질서를 부정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가혹한 탄압)이 따랐지요.

이처럼 주종관계를 형성한 영국은 지속적으로 영국의 우월성을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주입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백인의 우월함, 흑인의 열등함"이라는 프로젝트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지속적으로 주입되었습니다. 아프리카의 대자연에 대한 예찬은 그 중 하나였습니다.

"광활한 대자연", "끝없는 초원", "인류의 요람", "원시림", "동물의 왕국" 등과같은 수사어는 모두 아프리카가 갖고 있는 원형질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여성성과 유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인간이 궁극적으로 안겨야 할 대자연에 대한 예찬은 마치 어머니의 품, 여성의 품이라는 이미지와 연결되었습니다(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는 오늘날에까지 그 효력이 미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와 관련된 사진자료나 홈페이지는 예외없이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초원과 동물, 그리고 거의 자연에 가까운 상태의 아프리카 흑인들 모습을 담고 있지요.)

아프리카의 여성성/유아성은 곧바로 이를 보호해야 할 가부장적인 존재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이어지게 됩니다. 서양의 남성상이 강조되는 것은 이 시점이었습니다. 서양은 여성적이고 유아적인 아프리카에 비교해 볼 때 모험과 진취성 그리고 합리성을 두루 갖춘 남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양은 아프리카를 보호할 자격이 있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념적 도구로써 적절하게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호 논리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분야는 문학과 종교였는데 영국에서 대인기를 끌었던 '타잔'과 서양의 유일신 '야훼'는 서양의 남성상을 대표하는 두 아이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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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만들기

2001. 11. 19. 20:07
오리엔트는 서양의 눈에 비친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타자(他者)"라는 정의를 내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오리엔트에 대한 이 정의를 아프리카에 적용시켜 보려 합니다. 하나의 대상이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침묵과 복종을 필요로 합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의 말을 빌리면 존재란 "자기를 본질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타자를 비본질적인 객체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을 확립시켜 나가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서양이 스스로를 확립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서양에 대비시킬 수 있는 타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오리엔트와 아프리카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었습니다. 저명한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아프리카는 서양의 어두운 심성을 표현하는 것이라 했고 프란츠 파농은 흑인은 "외부세계에 의해 화석화된 인종"이라고 단언한 것도 아프리카의 타자성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프리카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명칭이 아닙니다. 물론 일부 아프리카 정치 지도자들은 '아프리카'의 위대함을 주장하면서 '아프리카인'임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특히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벌인 아프리카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된 범 아프리카주의, 블랙시오니즘, 네그리튜드 운동, 흑인의식주의 등은 아프리카인 스스로 아프리카인 임에 자부심을 갖자는 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아프리카는 외부 세계에서 형성되어서 아프리카에 수입된 개념입니다.  
'아프리카(Africa)'라는 명칭은 "해가 잘 드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와 처음 접촉한 사람들은 푀니키아와 아랍상인들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에 의해서 알려진 아프리카는 그 후 외부의 여행자들에 의해 단편적으로 소개되었고 이러한 지식 쪼가리들이 하나 둘씩 모여 아프리카라는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아프리카는 이들과 교역을 했던 북동부 아프리카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도 간접적이고 극히 제한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여행자와 상인들의 부풀리기식 정보로 인해 아프리카에 대한 신비적인 모습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대 로마에 알려져 있던 "블레미에스"(Blemyes)라는 존재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고 믿어졌던 블레미에스는 "머리가 없고 눈과 입과 코와 귀가 가슴에 달려 있는" 괴물로 아프리카의 오지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여행자들과 상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원숭이 인간과 개미 인간 등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고 묘사되는 등 아프리카에 대한 첫 모습은 신비주의에 쌓여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라는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배를 즈음해서 서양사람들에 의해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 시작된 '대항해'는 서양 각국이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박차를 가하게 되고 그 결과 서양 밖에 존재하는 이국 문화에 대한 지식이 쌓여가게 됩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이 타 문화를 이해하는데는 두 가지 기본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문화의 단선적 진보를 주장하는 19세기 이론인 '문화적 진화주의'(cultural evolutionism)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 식민제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인 "가부장제적이고 제국"(patriarchial empire)였습니다. 이 두 개념은 상호의존적으로 서양사람들이 타 문화, 특히 아프리카 문화를 평가할 때 사용하던 도구로 서양 문화의 우월함을 주장하기 위해 이용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먼저 아프리카 문화를 단선론 적 도식 위에 올려놓은 문화적 진화주의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문화적 진화주의(cultural evolutionism)는 아프리카의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 낸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사용하고 있는 표현들, '미개', '빈곤', '원시', '열등' 등의 용어들은 바로 아프리카 문화를 열등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는데요, 서양에서 주장된 문화적 제국주의를 우리도 무의식적으로 일상화하고 있다고 봅니다. 진화론자들은 사회의 진화 과정을 설정해 놓고 진화의 정도는 사회 구성원의 합리적인 이성이 전통이나 의식, 종교 등 과학에 대치되는 모든 불합리한 요소를 제거해 나가면서 그 완성의 형태를 띈다고 보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어거스트 꽁뜨(1798-1857)였는데, 그는 사회와 인간의 의식은 1) 신학적(theological 또는 초자연적 supernatural)인 단계, 2) 형이상학적(metaphysical)인 과정, 3) 실증적인 과학(scientific 또는 positive)의 3단계를 거쳐 진행된다고 보았습니다. 서양 과학의 우월성을 내세운 것이었지요.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도 이와 비슷하게 인간 사회란 1) 단순 구조(uniformity of structre)에서 복합 구조(heterogeneity)로, 2) 비 유기적(inorgrnic world)에서 초 유기체(superorganic) 사회로, 3) 강제적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군사형 사회로부터 자발적 동의를 기초로 하는 산업형 사회로 진화되어 간다고 설정한 후 영국의 빅토리아 왕조는 진화의 가장 최고 단계에 있다고 설정했습니다. 하지만 문화진화론을 구체적으로 이론화 한 것은 루이스 헨리 모건이었습니다. 모건은 그의 저서 『고대사회』에서 인간 사회를 혼인/가족 형태, 사회구조, 정치조직, 경제/기술 수준을 기초로 야만/미개/문명의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일부다처제/부계제/수장회의/수렵.채집, 농경, 목축의 사회적 특성은 서양에서 발견되는 시민사회/개인주의/민족국가/자본주의 등에 진화론적으로 열등한 단계에 놓여있다는 것이 그의 가설이었습니다.
이처럼 진화론에 따라 인간사회는 야만, 미개의 열등한 단계에서부터 고등단계의 현대사회에 까지 단계별로 진화하게 되어 있고, 아프리카 사회는 미개의 단계에 속한 대표적인 사회였다는 것이 서양 학자들의 입장이었습니다. 이것이 서양학자들의 탁상공론으로 끝이 났다면 문제는 덜 심각했을지 모르지만 문화적 진화주의는 식민지배라는 서양의 무력 침탈을 타고 아프리카의 속성을 결정짓는 도구로 작용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서양은 미개한 흑인들로 가득 찬 아프리카를 개화시킬 의무가 있다고 믿었고, 그 이념적 슬로건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인의 의무(Whiteman's burden)'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문화전화주의의 정략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차용된 백인의 의무는 백인이 흑인을 도와(통치하면서) 흑인을 개화시켜야 한다는 당위론을 펴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러한 백인의 의무를 추진하기 위해 서양이 아프리카 땅에 가지고 들어 온 또 하나의 무기는 다름 아닌 "가부장제적 제국주의"(Patriarchial Imperialis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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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과 상상의 공간 그리고 아프리카

2001. 11. 9. 22:50
오늘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아프리카"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워밍업에 들어가겠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문학 비평가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쓴 책으로, 1978년에 출판한 이후 인문학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명저이지요. 국내에도 번역이 되어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의 문화를 이야기하는데 『오리엔탈리즘』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아프리카의 문화의 다른 모습을 읽어 볼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이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오리엔트'라는 개념이 사실은 얼마나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을 통해  "만들어져" 왔는지를 방대한 자료를 통해 추적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이드는 '오리엔트'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 온" 이데올리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리엔트라는 개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첫번째는 말 그대로  "예루살렘의 동쪽을 가리키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공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이드에게 이 물리적 공간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이드가 정작 관심을 가진 것은 두번째 차원의 오리엔트(Orient), 즉, 오리엔트(Orient)를 이념적 공간(-ism)으로 추상화시킨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입니다.
사이드는  이념적 공간으로서의 오리엔트를 설명하기 위해 "상상의 공간"(Imaginative geography)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요, 이 상상의 공간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서구 유럽적 경험이... 동양과 접촉하는 길"로 "관념의 한 형태"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앞서 언급했듯이, 오리엔트는 단순히 지리적인 공간 이상의 것으로 "서양 사람들의 경험 속에 형성되어 있는 특별한 공간"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사이드는 오리엔트에 대한 "서양사람들의 경험"이란 오토만 제국의 유럽 정복에 따른 패배의식과 관련있다고 보았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사람들의 오리엔트에 대한 역사적 피해의식과 나쁜 이미지를 보상받으려는 일환으로 서양이 오리엔트를 극복한 후 일기 시작한 지적-군사적 정복 운동이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모하메드"를 연옥의 최 밑바닥에 자리매김 시킨 것은 바로 오리엔트에 대한 서양의 지적 분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며,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은 오토만 제국아래 통치를 받았던 서양 사람들의 물리적 자존심을 회복시켜주는 촉매제였던 것입니다. 서양은 오리엔트를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꾸준히 체계젹으로 "오리엔트"만들기를 추진해 나갔고 그 결과 만들어 진 것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신화입니다.
상상의 공간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크게 세 가지 특성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이 개념은 공간을 초월한 '추상적이고 이미지적인 객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2) 이 개념은 시간을 초월한 대상이라는 것. 예컨데, 15세기에 발견된 동양적 특성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서양 사람들에게 동양을 규정짓는 잣대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오리엔트라 하면 알라딘의 마술램프나 날으는 양탄자를 생각하게 하는 이미지. 서양 사람들에게 동양이란 시간이 멈추어진, 다시 말해서 변화를 찾아 볼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3) 동양은 서양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수동적인 대상 이었습니다.  특히 물질적 풍요를 배경으로 한 서양 문화의 우월성은 타자인 동양으로 하여금 서양의 문화적 권력행사에 자발적인 복종을 하도록 유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오리엔트의 주인은 동양인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서양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리엔트를 우리가 알고 있는 오리엔트로 만든 주체는 서양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사람들(특히 무슬림)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지리적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이 "동양에 대한 지배와... 권위를 소유하려는 서양의 저적형태", 다시 말해, "관념적 공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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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류학" 코너를 개설하며...

2001. 11. 7. 23:10
'사회 인류학' 코너를 담당하고 있는 장용규입니다. 가입도 늦었고 글도 늦게 올린 점에 대해 사과를 드립니다. 이후로는 적은 분량이나마 정기적으로 글을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에 대한 약력은 홈피의 연구진 profile에 나와있습니다만 여기에서 간단히 제 소개를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스와힐리어과를 졸업(87)하고 인도와 남아공에서 사회학과 사회인류학을 전공했습니다. 관심분야는 아프리카 종교와 종교인류학, 종족문제 등과 상징/인지 인류학 분야입니다. 이 분야에 관심있는 분들과 좋은 토론을 벌였으면 좋겠습니다. 대화라는 것은 쌍방향 의사소통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저 혼자 떠드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 코너의 방향은 제가 논문을 위해 수행했던 현지조사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의 문화(특히 종교)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시도하는 것이지만, 이에 앞서 당분간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아프리카", "아프리카 문화"라는 개념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앞으로 제가 펴 나갈 글의 방향에 대해 뜻을 같이 하는 분도 있겠고, 다른 생각을 하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이견이 많을수록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첫번째 내용은 내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사회문화/사회인류학

제4기 신생대의 아프리카

2001. 10. 29. 20:15
제4기는 플라이스토세(1만~160만 년 전)와 홀로세(또는 현세:1만 년 전~현재)로 나뉜다. 제4기에는 화산활동이 계속 일어나 사하라 중부의 아하가르 산맥과 티베스티 산맥의 기저부 암반이 솟아올랐다. 화산활동 결과 사하라 협곡은 깊이가 최고 200m에 달할 정도로 융기·함몰되었으며, 심해로부터 현무암이 솟아올랐다.

다우기(多雨紀)라 불리는 춥고 습한 시기에, 동아프리카 고산지대를 덮고 있던 빙하는 오늘날 그곳 정상에 남아 있는 빙하보다 두께가 900~1,500m 정도 더 두꺼웠다. 그외의 지역들로는 사하라 및 칼라하리 사막지대가 건조한 시기와 습한 시기를 번갈아 맞이했으며, 건조한 시기에는 사막지대가 인근 삼림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유인원(인간에 가까운 영장류 동물)이 발견되는 가장 오랜 지층으로 에티오피아 및 케냐에서 발견되는 일명 빌라프란치-카게라 지층은 약 400만 년 전에 형성된 지층으로, 몇몇 특정한 고대 유인원을 포함한 여러 고대 동물들의 화석이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 색인 : 빌라프란카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로 불리는 이들 유인원은 크게 2종류, 즉 '호리호리한' 유인원과 '건장한' 유인원으로 나눌 수 있다. 2종류의 유인원 모두 돌과 뼈로 만든 도구를 남겼다.

약 50만 년 전 카게라-카마시아 간(間)다우기에 형성된 지층에는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은 올두바이 협곡(탄자니아)과 테르니핀(알제리)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플라이스토세 중기(13만~90만 년 전)의 카마시아 다우기(북반구의 빙하기에 해당) 지층에는 디노테리움(Dinotherium:아래턱에 송곳니가 달린 거대한 포유동물로 묘사되어온 동물) 화석이 묻혀 있다. 올두바이 협곡의 카마시아-칸제라 간다우기 지층을 살펴보면, 그 시기에 이 지역의 기후는 건조하지만 사막기후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플라이스토세 중기 칸제라 다우기 지층에는 코끼리·기린·하마 등의 동물 화석이 묻혀 있다.

약 5만 5,000~6만 년 전에 형성된 칸제라-감블리아 간다우기 지층은 당시의 기후가 건조하여, 삼림지역 상당부분이 사막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에는 중요한 지각변동이 일어나 북아프리카 지형을 파도치듯 기복 있게 만들었으며, 모든 단층지대 중 특히 동아프리카 단층지대에 영향을 주었다. 동아프리카의 지형이 현재의 모습을 띠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약 1만 5,000~3만 년 전에 형성된 감블리아 다우기의 지층을 살펴보면, 당시에 3차례의 뚜렷한 습기와 보다 건조한 휴지기가 번갈아가며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또 차드 호의 면적과 케냐 및 킬리만자로 산의 빙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시기 이후의 후(後)다우기(북반구의 후빙기에 해당)에는 건기와 습기가 번갈아가며 계속 나타났으며, 중석기시대(석기시대의 과도기) 및 신석기시대의 문명이 나타났다. 사하라 및 칼라하리 지역이 사막화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이며, 이들 2개 지역의 사막화 현상은 대략 BC 3000년경에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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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 신생대(6,640만년전 ~ 현재)

2001. 10. 29. 20:15
제3기는 몇 개의 큰 지각변동으로 특징지어진다. 그결과 알프스 산맥이 형성되었고, 북아프리카 산맥이 솟아올랐다. 신생대 제3기에는 또 홍해 지구대가 형성되었으며, 제3기 말기에는 화산활동 및 지각 단층활동이 활발했다.

팔레오세(5,780만~6,640만 년 전)에 형성된 지층은 동물의 화석이 묻혀 있어 그 중요성이 높다. 이 시대의 해양지층에는 화폐석(육안으로 보이는 크기의 단세포 동물로 일종의 커다란 유공충)·노틸로이드(촉각이 머리에 달린 연체동물로 껍질이 있는 두족류)·섬게 등의 화석이 묻혀 있는데, 이들 화석은 북아프리카·서아프리카·사하라에서 발견된다. 북아프리카·서아프리카·인도양에 접한 아프리카 해안지역 일대에서는 에오세(3,660만~5,780만 년 전)의 화폐석과 올리고세(2,370만~3,660만 년 전) 및 마이오세(530만~2,370만 년 전) 유공충들이 발견된다.

대륙지층은 크게 복족류(腹足類)인 프슈도케라토데스(Pseudoceratodes) 및 디로사우루스(일종의 파충류) 화석이 묻힌 에오세 하부지층과, 규산이 화합된 삼림 및 물고기·거북·악어·뱀과 포유동물 화석이 묻힌 에오세 말기 및 올리고세 지층으로 나뉜다. 이집트에서는 올리고세의 퇴적물이 알파이윰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퇴적물에는 포유동물과 새·거북·악어 등의 화석이 포함되어 있다. 동아프리카의 빅토리아·루돌프(투르카나) 호 연안에서 발견되는 마이오세 초기 지층에서는 마스토돈(코끼리를 닮은 거대한 포유동물)과 프로콘술 아프리카누스(Proconsul africanus:사람상과의 유인원에 속하는 커다란 원숭이로 멸종되었음) 화석이 나오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또 마이오세 말기에 아프리카와 유럽으로 동시에 들어간 중앙 아시아의 히파리온(발가락이 3개인 말의 조상) 화석이 발견되며, 또한 마이오세 말기에 살았던 케냐의 케냐피테쿠스(Kenyapithecus:유인원의 일종) 화석도 발견된다.

지각변동으로 최초의 텔아틀라스 산맥 대습곡운동은 올리고세에 일어났다. 마이오세에는 북아프리카의 플리시(flysch:주로 사암으로 이루어진 두껍고 넓은 지층)가 엘리프에서 튀니지 북부에 이르기까지 북쪽에서 남쪽으로 밀려났다. 텔아틀라스 지층의 이동은 마이오세 말기와 플라이오세(160만~530만 년 전)까지 계속되었다. 훨씬 남쪽에 있는 고지 평원지대는 대체로 거의 지각변동을 겪지 않았으며, 남쪽으로 아틀라스 산맥 북쪽과 접해 있는데, 그 너머에는 사하라아틀라스 산맥이 있다. 마이오세 중기에는 대륙의 지각운동으로 오레스 대산괴가 약 990m나 치솟아올랐다. 오레스는 남쪽으로 사하라 북부 구조대와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 모로코의 아가디르로부터 동쪽으로 튀니지의 가베스 만까지 뻗어 있는 사하라 구조대는 습곡이 발달된 지중해 및 알프스 고원지대로부터 아프리카 순상지를 분리시키고 있다.

올리고세 말기에서 마이오세 초기에 걸쳐 아랍-누비아 순상지에서 발생한 지각운동으로 아라비아 반도를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분리, 홍해가 형성되었다. 길고 거대한 땅덩어리가 가라앉자 그 단층협곡으로 지중해의 물이 쏟아져 들어가 예멘까지 뻗친 만이 형성되었다. 이 만은 지부티와 아덴 사이에 있던 지협만 지나면 그대로 인도양과 합류할 수 있었다. 마이오세 말기에는 수에즈 지협이 형성되었고, 앞서 형성된 만은 해저에 증발 잔류암(증발 결과 형성된 퇴적암)이 두텁게 쌓인 염호가 되었다 (→ 색인 : 수에즈 만). 플라이오세 일부 시기에는 아시아에 살던 동물들이 수에즈 지협을 건너 아프리카로 들어왔다. 플라이오세에는 또 지부티-아덴 지협이 함몰되어, 인도양의 바닷물이 홍해로 쏟아져 들어와 수에즈 지협에까지 흘러들었다.

마이오세 및 플라이오세에 있었던 지각변동으로 아프리카 대륙에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그리고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발달된 단층들이 형성되었다. 알제리 남부의 아하가르 산맥과 리비아 및 차드의 티베스티 지역, 에티오피아, 동아프리카 전역, 카메룬, 기니 만의 비오코 섬(옛 이름은 페르난도포 섬), 상투메 섬, 프린시페 섬은 화산폭발과 현무암 분출로 지각에 균열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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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대의 아프리카

2001. 10. 29. 20:14
트라이아스기· 쥐라기·백악기로 구분되는 중생대에는 태고적 바다들이 범람했고, 연구가치가 있는 화석들이 많이 함유된 거대한 지층들이 나타났다. 트라이아스기에 태고적 바다의 침전물은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남부, 이집트, 아라비아, 마다가스카르 섬 북부 및 탄자니아 일부에 남아 해양지층을 이루고 있다. 쥐라기의 침전물은 오늘날 리오데오로 강의 대서양 유역 및 세네갈에서 발견된다. 쥐라기 중기에는 인도양의 대범람으로 바닷물이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를 넘어 에리트레아까지 뒤덮었다. 이어 백악기에도 인도양의 범람이 몇 차례 있었다. 한번은 지금의 대서양과 인도양 해안이 형성되던 시기에 아프리카 적도 해안 일대가 범람했고, 다음에는 사하라·이집트·수단까지 인도양이 범람했으며, 그후 같은 지역에 또 1차례, 그리고 아라비아 서부와 마다가스카르 섬 동부 해안 일대에 인도양이 범람했다.

아라비아 및 아프리카 적도 북부에서는 대륙이 서로 맞물린 형태로 지층이 형성되었다. 트라이아스기에는 공룡 및 파충류의 화석이 들어 있는 사하라 자르자이틴 지층이 형성되었다. 쥐라기에는 사하라 타우라틴 지층이 형성되었는데, 이 지층에는 식물 및 거대한 파충류의 화석들이 묻혀 있다. 트라이아스기 초기에 형성된 아프리카 아적도대의 어퍼카루계의 보퍼트 지층에는 어류·양서류·파충류의 화석들이 묻혀 있다. 트라이아스기 말기와 쥐라기 초기에는 케이프 산맥의 습곡활동이 있었으며, 카루 구조분지가 융기했다. 또한 지각이 균열되면서 그 틈새로 현무암 용암이 대규모로 분출하여 두께가 900~1,800m에 이르는 지층을 만들어내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드라켄즈버그 산맥 등을 형성했다. 쥐라기와 백악기에는 서로 맞물려 있는 북아프리카 지층과 유사한 지층이 형성되었는데, 그 지층에는 식물·공룡·파충류의 화석들이 묻혀 있다. 백악기에는 용암이 특수한 형태로 분출하여 킴벌리 다이아몬드 관상광맥(보통 거의 수직으로 형성되어 있는 원통형의 다이아몬드 광맥)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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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대의 아프리카

2001. 10. 29. 20:11
캄브리아기·오르도비스기·실루리아기·데본기·석탄기·페름기로 세분되는 고생대에는 2차례의 큰 조산활동, 즉 칼레도니아 및 헤르시니아 조산활동이 있었다. 또한 아프리카 대륙은 바로 이 시기에 여러 개의 대륙괴들이 하나로 결합되어 거대한 대륙을 형성하면서 현재의 형태를 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있었던 빙하기에 표력암(빙력토가 암석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퇴적암)이 형성되었는데, 그 흔적은 오늘날 모로코 남부와 서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 아(亞)적도대를 지나 나미비아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된다. 캄브리아기의 해양화석들은 모로코 남부 및 사하라 서부와 모리타니, 나미비아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집트와 아라비아 반도에서도 착암기로 지층을 뚫는 과정에서 해양화석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밖에 해양화석이 묻혀 있는 지역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르도비스기(4억 3,800만~5억 500만 년 전)에는 화석이 함유된 해양사암이 북아프리카·서아프리카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탁상형 사암은 그 지역에만 있는 독특한 광물이다. 이 시기에 있었던 조산활동은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서와 같은 대습곡을 형성하지는 않았으나, 최소한 2차례의 대륙 형성을 위한 지각변동을 일으켜, 사하라 중앙 및 서부 지역의 대륙층을 약 1,500m나 융기시켰다. 이러한 융기작용 결과 많은 계곡들이 형성되었는데 그 계곡들은 대륙이 함몰되면서 물 속에 잠기게 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 오르도비스기 말기에 사하라는 빙하에 덮이게 되었으며, 계곡들은 빙력점토 및 사암으로 메워지게 되었다.

제한적인 습곡작용을 제외한 대규모의 습곡작용은 없었으나, 화강암화 작용이 다시 활발해졌다. 선캄브리아기에 속하는 많은 화강암은 4,500만~5억 5,000만 년 전에 생성된 것이다. 이 화강암들은 캄브리아기나 오르도비스기에 생성된 퇴적암을 뚫고 나온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새로 형성된 것은 아니다. 이 화강암들은 사하라 중부에서 남아프리카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실루리아기(4억 800만~4억 3,800만 년 전)는 침전물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특징은 그라프톨라이트(graptolite:오르도비스기·실루리아기에 살았던 동물로 멸종되었음) 화석들이 들어 있는 아라비아 반도 및 북서아프리카의 필석층에 잘 나타나 있다. 데본기(3억 6,000만~4억 800만 년 전)의 해양화석들은 북아프리카 및 사하라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보케벨트 지층 및 가봉과 기니, 가나, 아라비아의 일부 지역에서도 데본기 해양화석들이 발견되고 있다. 석탄기는 2억 8,600만~3억 6,000만 년 전으로 이 시기 초반에 해양생물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중부·서부 및 이집트에서 발견된 여러 화석에 잘 드러나 있다. 석탄기 중기 및 말기에는 헤르시니아 조산활동이 있었다. 북서아프리카 가장자리를 따라 남북 방향으로 모로코에서 기니에 이르는 모리타니 산맥이 출현한 것은 바로 이때이다. 태고 때부터 쌓여온 침전물층에 변성작용이 일어나 서쪽에서 동쪽으로 밀려나면서 엷은 고생대 지층을 뒤덮게 된 것이다. 그밖의 지역에서는 대규모의 융기와 침강이 트라이아스기 말기(2억 800만~2억 3,000만 년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지각 구조상의 변동은 오늘날 알제리 서부 틴두프 지역의 향사구조와 서사하라 동부 레귀바트의 산줄기, 말리 타우데니의 분지, 콩고 민주공화국 킨샤사의 산줄기, 가나의 향사구조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석탄기 말기(2억 8,600만~3억 2,000만 년 전)에는 사하라 전역에 걸쳐 식물 화석이 층층이 쌓였고, 때로는 모로코와 알제리에서처럼 엷은 석탄층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아(亞)적도 지역에서는 이와는 또다른 현상이 나타나는데,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마다가스카르 섬, 광대한 콩고 강 유역, 가봉을 덮고 있는 드위카 표력암이 그 중 하나이다. 페름기의 해양화석은 튀니지 남부(앗타바카 산맥 일대)와 이집트(아부다라지 암초), 아라비아 반도(리야드 남서부), 탄자니아 해안, 모잠비크 해협에서 발견되고 있다. 기타 지역에서 발견되는 페름기의 화석들은 해양화석보다는 대륙화석에 더 가까우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카루 고원 일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페름기 말기에는 보퍼트 지층(트라이아스기 초기에도 형성되었음)의 기저층이 형성되었는데, 양서류·파충류 화석이 묻혀 있는 것으로 유명한 이 기저층은 그 두께가 거의 3,000m에 달하며, 소련 남부에서도 이와 유사한 지층이 발견되고 있다. 보퍼트계 지층과 유사하지만 석탄이 많이 매장되지 않은 기타 페름기 지층은 콩고 민주공화국, 탄자니아, 케냐, 우간다, 잠비아, 짐바브웨, 모잠비크를 비롯해 마다가스카르 섬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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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캄브리아기의 아프리카

2001. 10. 29. 20:10
선캄브리아기의 아프리카 대륙은 서로 연결된 4개의 대륙괴 집단(지각의 안정된 부분이며 대체로 규모가 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첫번째 집단은 서아프리카 대륙괴로서 이 대륙괴는 약 20억 년 전에 안정되었으며, 오늘날의 모리타니·말리·기니·라이베리아·코트디부아르(아이버리코스트)·가나 등과 알제리 남부의 아하가르 산맥 서부지역이 이에 속한다. 2번째 대륙괴는 아랍-누비아 순상지로서 알제리의 아하가르 산맥 동부지역과 티베스티 산맥(차드·니제르·리비아까지 뻗어 있음), 이집트, 아라비아 반도 등이 이 순상지에 포함된다. 3번째 대륙괴는 콩고 및 칼라하리 대륙괴이며, 4번째 대륙괴는 마다가스카르 섬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마다가스카르 섬 동쪽 연장부분은 후기 백악기 때 인도양 속으로 함몰되어버렸다.

초기 시생대(약 25억 년 전에 끝남) 마지막 시기에는 주목할 만한 조산활동이 있었는데, 수단 및 콩고 민주공화국 국경지대의 서(西)나일 강 지층과 남아프리카의 스와질란드 지층에는 지금도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이보다 더 늦은 시생대의 거의 말기에 있었던 조산활동의 흔적은 오늘날 서아프리카(라이베리아)와 동아프리카(탄자니아의 불라와야 지층, 케냐의 도도미아 지층, 우간다의 세바퀴아 지층), 그리고 마다가스카르 섬(안드로야 지층)에 그대로 남아 있다. 생명체의 흔적이 처음 발견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며, 그 흔적은 스와질란드 및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오렌지 자유주에서 발견된 무화과나무속(屬) 단세포 녹조류 화석에 나타나 있다. 초기 원생대(16억~25억 년 전)에도 조산활동이 두드러졌는데, 오늘날 그 흔적은 모리타니의 암사가 및 갈라만 지층과 시에라리온의 캄부이 지층, 콩고 유역의 자디니아 지층, 나미비아의 디바야 지층, 동아프리카의 카비론디아 지층, 짐바브웨의 대암맥 지층,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트란스발 지층, 마다가스카르 섬의 보히보리 지층에 그대로 남아 있다. 원생대 말기에도 또다른 조산활동이 일어나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그 영향을 끼쳤는데, 그 흔적이 오늘날 북아프리카 안티아틀라스 산맥의 베르베리드 지층 및 서아프리카의 비리미아 지층, 동아프리카의 부간다 - 키발리 - 토로 지층, 남아프리카의 비트바테르스란트 지층, 부시벨트 지층, 림포포 지층에 남아 있다.

약 9억~16억 년 전의 원생대 중기에는 크게 2차례의 조산활동이 있었다. 첫번째 조산활동 결과 모로코의 안티아틀라스 산맥과 타르크와이아(가나)·프란케빌리아(가봉)·마이움비아(콩고) 지층이 융기되었다. 2번째 조산활동은 서(西)키바리아 산맥(콩고 민주공화국)과 중앙 아프리카의 이루미아 산맥,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와테르베르흐 및 마트삽 산맥을 융기시켰다.

약 5억 70,000만~9억 년 전 동안 계속된 후기 원생대는 아프리카 전대륙에 걸쳐 수백m 두께의 사암과 편암, 그리고 스트로톨라이트(화석화된 석회질 녹조류)를 함유한 백운석 석회암층을 형성시켜 놓았다. 모로코의 아둔두니아 지층과 모리타니 및 말리의 아드라르 지층, 서(西)콩고 지층, 콩고 민주공화국 및 잠비아의 카탕가 지층, 남아프리카의 다마라-오타비 지층 등이 바로 그때 형성된 대표적인 지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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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고향은 아프리카?

2001. 10. 29. 20:03
얼마 전 60억 번째의 인류가 태어났다는 뉴스가 전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태양계 중의 한 혹성인 자그만한 지구에서 60억명의 인류가 거주한다는 자체가 신비롭기도 하지만 과연 인류는 어디에서, 어떻게 탄생했는가라는 의문 역시 우리들의 큰 관심사일 것이다.
그 답을 얻기 위해 수많은 인류학자들이 탐구하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인류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아프리카가 인류의 최초 탄생지였다는데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가 이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인류는 인류 진화라는 커다란 줄기의 어디쯤에서 갈라져 나왔는가? 아프리카 기원설 처럼 아프리카의 한 여인으로부터 비롯되어 전세계로 퍼져 나갔는가? 아니면 다지역 기원설처럼 전지역에서 개별 진화했는가? 최근 인류학 연구에 있어 가장 뜨거운 이슈는 현대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700만-500만년 전 원숭이류(유인원)에서 갈라져 나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시작으로, 18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 40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 13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를 거쳐 현생인류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같은 진화론은 새로운 화석이 발굴될 때마다 새로 쓰여지고 논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인류진화에 대한 주요쟁점을 살펴보며 다음과 같다.
인류 조상은 여러 종이다. 인류 진화의 계보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호모 하빌리스-호모 에렉투스-호모 사피엔스-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이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이 계보는 진화상 무수히 많은 종이 출현하고 절멸한 복잡한 과정을 단순 도식화한 것에 불과하다.
새로운 화석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인류진화가 결코 단선적 과정을 거쳐 이뤄지지 않았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만 하더라도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 등 다양한 종이 있고 최근 미·일 연구팀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르히라는 새 종을 추가했다. 이밖에 네안데르탈인으로 대표되는 호모 사피엔스와 크로마뇽인으로 대표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10만-20만년쯤 함께 존재했다.
아프리카에서 유럽, 아시아 등으로 퍼져 살기 시작한 호모 에렉투스부터는 현재 인종의 차이처럼 한 종이라도 지역환경에 따라 다양한 특징을 보여준다. 결국 인류의 진화는 가장 적응력이 뛰어난 종이 현생인류로 자리를 잡은 지난한 과정이었다.
아프리카 기원설과 다지역 기원설 등 현생인류가 언제 어디에서 발원했는지 하는 점은 학계의 큰 쟁점 중 하나다.
중국학자들은 아시아 등 다른 대륙에서도 나름대로의 진화과정을 거쳐 현재의 인류가 진화했다는 다지역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다. 서유럽에서 발원한 네안데르탈인은 근동과 아시아로 이주해 폭넓은 지역에서 살았는데 이들이 현생인류로 진화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인류는 다른 동물 종에 비해 한 종 안에서조차 변이가 적어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같은 진화과정을 겪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가능성이 낮다고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다.
반면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현생인류의 조상이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 각 지역의 종을 모두 대체했다는 주장이 아프리카 기원설이다. 현재로는 가장 정설로 인정받고 있는 이론이다. 이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오늘날 세계각국 인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 조상의 계보를 추적한 결과 아프리카로 집약됐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기원설에 따르면 현대 인류는 약 20만 년 전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에서 진화했고 신속하게 확산되어 호모 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인을 대체시켰다는 것이다. 최근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사라 티 슈코프 박사는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 60여 개 지역의 DNA 분석을 통해 다시 한 번 아프리카 기원설을 입증한 바 있으며 그 동안 다지역 기원설을 주장하던 중국 과학자들도 아프리카 기원설을 인정하고 있다.
아프리카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그 동안의 탐구 결과물들이 많은 학자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올두바이(Olduvai)계곡에서 30년 이상 발굴작업에 몰두하던 리키박사부부(Louis &Mary Leakey)는 1959년 7월 17일 175만년전의 확실한 두발 동물의 두개골을 발견했고 그것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보이세이(Boisei)라고 명명했으며 일명 '진잔트로푸스'라고도 불렀다. 또한 이들은 다음해 열두살 쯤으로 추정되는 아이의 뼈를 발견했는데 원인이 아니라 인류 직계 조상의 뼈라고 확인하고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라 이름 붙였으며 이들이 전 세계대륙으로 확산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최근 5백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고인류 화석이 발견되어 고인류학계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캘리포니아대 팀 화이트는 지난 1월 에티오피아에서 이 고인류 화석을 발굴했다(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화석은 4백20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나멘시스이고, 4백40만 년 전 화석이 있으나 일부분에 불과하다). 13개국 고생물 연구팀을 이끌고 있는 화이트 팀장은 앞으로 세밀한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아프리카가 현대 인류의 진정한 기원지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 동안 2백만 년을 중심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화석이 급격히 빈약해지고 4백20만 년 이전의 화석 기록은 거의 비어 있는 실정이었다. 분자생물학적 연구에 의해 고인류와 유인원이 그 공통조상으로부터 각기 분리된 시점이 5백만 년에서 7백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해 주는 화석이 없어 진화론의 가장 취약한 미싱링크로 지적되어 왔다. 이 화석은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리라 기대되고 있다.
또한 비트바트랜드 대학교의 론 클라크 박사는 지난해 12월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스터크폰테인 동굴에서 3백60만 년 전의 가장 완전한 고인류 화석을 발굴하였다. 지금까지 발굴된 가장 완전한 화석은 1974년에 발견된 3백20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일명 루시)였다. 루시는 전체 골격의 약 40% 정도가 발굴됐다.
이 고인류 화석은 인간과 유인원의 특징을 함께 갖고 있어, 직립보행 뿐만 아니라 나무에서 어느 정도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좀 더 연구가 진행되면 지금까지 고인류 조상이 유인원과의 공통조상으로부터 분리되면서 과연 나무에 살았는가의 논쟁에 대한 해답을 얻으리라 예상된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대륙, 특히 동아프리카지역과 남아프리카지역에서 인류화석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으며 따라서 인류 조상이 최초로 삶의 터전을 삼았던 인류의 발상지이며 고향이 아프리카 대륙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사회문화/사회인류학

아프리카기원-다지역기원설 등 최대논란

2001. 10. 29. 20:02
오늘날 인간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최근 인간의 조상뻘로 추정되는 250만년 전 유골이 아프리카에서 발견되면서 인류의 진화과정이 새롭게 관심을 끌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700만~500만년 전 원숭이류(유인원)에서 갈라져 나와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를 시작으로, 18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 40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 13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를 거쳐 현생인류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같은 진화론은 새로운 화석이 발굴될 때마다 새로 쓰여지고 논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인류진화에 대한 주요쟁점을 살펴본다.
인류 조상은 여러 종이다 인류 진화의 계보는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호모 하빌리스-호모 에렉투스-호모 사피엔스-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이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이 계보는 진화상 무수히 많은 종이 출현하고 절멸한 복잡한 과정을 단순 도식화한 것에 불과하다.
새로운 화석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인류진화가 결코 단선적 과정을 거쳐 이뤄지지 않았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만 하더라도 A.아프리카누스, A.아파렌시스, A.로부스투스등 다양한 종이 있고 최근 미·일 연구팀이 A.가르히라는 새 종을 추가했다.
네안데르탈인으로 대표되는 호모 사피엔스와 크로마뇽인으로 대표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10만~20만년쯤 함께 존재했다.
아프리카에서 유럽 아시아등으로 퍼져살기 시작한 호모 에렉투스부터는 현재 인종의 차이처럼 한 종이라도 지역환경에 따라 다양한 특징을 보여준다. 결국 인류의 진화는 가장 적응력이 뛰어난 종이 현생인류로 자리를 잡은 지난한 과정이었다.
아프리카기원설과 다지역기원설 현생인류가 언제 어디에서 발원했는지 하는 점은 학계의 큰 쟁점 중 하나다. 아프리카기원설, 다지역기원설, 두 설의 절충인 부분적 대체설등이 다툰다.
중국 학자들은 아시아등 다른 대륙에서도 나름대로의 진화과정을 거쳐 현재의 인류가 진화했다는 다지역기원설을 주장하고 있다. 서유럽에서 발원한 네안데르탈인은 근동과 아시아로 이주해 폭넓은 지역에서 살았는데 이들이 현생인류로 진화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서울대 인류학과 강사 박순영박사는 『인류는 다른 동물종에 비해 한 종 안에서조차 변이가 적어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같은 진화과정을 겪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가능성이 낮다』고 지적하고 있다.
반면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현생인류의 조상이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 각 지역의 종을 모두 대체했다는 주장이 아프리카기원설이다. 현재로는 가장 정설로 인정받고 있는 이론이다.
이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오늘날 세계각국 인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 조상의 계보를 추적한 결과 아프리카로 집약됐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뒤 현지의 사피엔스 집단들과 이종교배를 통해 현생인류로 대체됐다는 주장도 절충안으로 나오고 있다.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의 혼혈종의 특징을 보이는 화석을 발굴했다는 미 학자의 최근 연구는 여기에 근거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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