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사회인류학

아프리카 민족에 대한 단상

africa club 2004. 6. 29. 15:13
아프리카 민족에 대한 단상                                                               장용규


민족은 이해집단이다. 민족은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움직인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이 유지해 오던 정체성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이해를 추구한다. 프레드릭 바쓰(Barth, F.)가 주장한 민족의 영역(boundary)과 개인 사이의 상호작용은 아프리카라는 맥락 안에서 의미가 있다. 바쓰는 한 민족이 타 집단과의 경계를 설정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문화적 상징들, 예를 들어, 종교, 정치, 언어, 역사 등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관심을 보인다. 민족 정체성은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온 고정된 문화적 산물이라기보다는 융통성 있는 사회조직의 특성이라는 것이 바쓰의 입장이다. 특히 바쓰는 민족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로 ‘주어진 환경’에 주목한다. 결국 상황주의는 민족 정체성과 개인과의 관계에서 ‘합리적 선택’에 무게를 두는 이론이다. 물론 ‘합리적 선택’이란 현실적인 실리를 바탕으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은 이해집단인 셈이다.
  
통가냐 줄루냐
바쓰의 상황주의적 관점이 정확하게 적용되는 사회가 남아공 줄루민족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에구투구제니 마을이다. 에구투구제니는 남아공 끄와줄루-나탈주의 동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현재 스스로 줄루민족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마통가라고 불리던 전혀 다른 민족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이(정확히 말해서 남자들이) 통가민족을 버리고 줄루민족을 자처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흥미롭다.  

아마통가(amaThonga)는 “동쪽의(longa)” 사는 “사람들”(ama-)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아마통가에는 이런 지리적 특성과 함께 “열등한 사람들”이라는 경멸적인 의미도 담겨있다. 그래서 에구투구제니 사람들은 자신들을 통가라고 부르면 무척 화를 낸다. 지금은 외부사람들이 이 지역 사람들을 통가라고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불과 20여 년 전 만해도 이 지역은 ‘아마통가랜드’(amaThongaland), 즉 통가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알려져 있었다.

19세기 통가랜드는 줄루왕국에 조공을 바치고 자치권을 행사하던 관계에 놓여있었다. 19세기 말, 남아공에 눈독을 들인 영국이 줄루왕국과의 몇 차례 전쟁을 치른 뒤 줄루왕국을 해체하면서 통가랜드는 잠시 완전한 자치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영국과 포르투갈이 현재의 모잠비크에 있는 마푸토 항(港)을 두고 갈등을 벌이면서 통가랜드는 둘로 나누게 된다. 그 중 하나는 포르투갈령(領) ‘마푸토랜드’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령(領) ‘아마통가랜드’이다.

1948년에 정권을 잡은 국민당은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분리정책)의 일환으로 흑인사회를 13개의 자치구역으로 나눠 분할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끄와줄루(KwaZulu)이다. 이즈음 아마통가랜드는 끄와줄루에 편입되어 서서히 줄루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아마통가랜드와 끄와줄루 사이에는 레봄보(Lebombo)라고 부르는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아마통가랜드는 이후에도 상당 기간 문화적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 줄루민족주의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잉카타 자유당(Inkatha Freedom Party)과 지도자인 부텔레지(Buthelezi)는 줄루왕국의 부활을 내걸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줄루인들의 민족정체성(identity)은 이때부터 형성되었다고 한다. 아마통가랜드는 여전히 ‘열외’의 땅이었다. 잉카타 자유당의 입장에서는 끄와줄루-나탈에 산적해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놔두고 아마통가랜드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역사적으로 무관심의 땅이자 변방이었던 아마통가랜드는 잉카타 자유당에게도 별로 달갑지 않은 곳이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1980년대 초 아파르트헤이트 정권과 스와질랜드의 은밀한 거래가 발각되면서부터였다. 남아공과 모잠비크에 둘러싸인 내륙국 스와질랜드는 남아공 영토에 있는 항구를 영구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도 여러 가지 속셈이 있었다. 스와질랜드가 눈여겨본 곳이 아마통가랜드에 있는 코지 베이(Kosi Bay)라는 해안이었다. 스와질랜드는 아마통가랜드의 일부를 스와질랜드에 건네 달라고 요구했다. 그 대가로 남아공에 스와질랜드의 땅 일부와 코지 베이에서 스와질랜드에 이르는 철도부설권을 건네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잉카타 자유당은 실질적인 자치권을 갖고 있는 자기들을 무시하고 남아공 정부와 스와질랜드가 아마통가랜드를 두고 협상을 벌였다는 사실에 반발했다. 잉카타는 아마통가랜드에 대해 강경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잉카타는 아마통가랜드 지역주민들에게 신분증에 줄루임을 명기하라고 압박을 가해왔다. 그러면서 크와줄루에서는 줄루 사람이라는 신분증을 가진 사람만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아마통가랜드 사람들에게 통가 정체성을 고집할 경우 사회적인 불이익을 감당하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당시 아마통가랜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이주 노동자의 신분으로 도회지로 몰려 나가고 있었다. 잉카타는 행정적으로 이들 계약노동자들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감시했기 때문에 아마통가랜드 사람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좋던 싫던 ‘줄루’ 신분증을 가져야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주 노동자들은 대부분 건장한 남성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줄루화된 사람들은 15-50대에 이르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에구투구제니, 통가와 줄루 이중 정체성
아마통가랜드의 작은 마을인 에구투구제니는 이런 변화를 한 눈에 보여주는 현미경이다. 에구투구제니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주 노동의 경험이 있고 그래서 자신들은 줄루라고 주장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줄루 신분증을 갖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성씨를 바꾸는 등 적극적으로 줄루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협화음은 곳곳에 남아있다. 한 집안에 두 성씨가 함께 쓰이는 것이 대표적인 불협화음이었다.

사킬레 템부(Sakile Thembu)는 나이가 서른 둘 이었지만 정식으로 결혼은 하지 못했지만 부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마을의 큰 길 가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사킬레는 10대에 학교를 그만두고 죠하네스버그 근처의 광산에서 광부로 일했다. 몇 년간 악착같이 돈을 모아 에구투구제니로 돌아 온 사킬레는 중고 바키(bakkie, 사륜구동 화물차)를 한 대 살 수 있었다. 에구투구제니에서 사킬레의 부인은 구멍가게를 하고 자신은 바키로 화물과 승객을 실어 나르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킬레의 가게가 길가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러 들르기 때문에 나도 자연스럽게 가끔씩 그곳에 들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하게 되었고 직업의식을 살려 사킬레의 족보를 캐게 되었다. 그런데 사킬레는 자기 아버지와 자기의 성씨를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뗌베’(Tembe)인 반면 자기는 ‘템베’(Thembe)라고 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냐고 물었다. 하지만 사킬레는 친아버지가 맞지만 아버지는 ‘뗌베’이고 자기는 ‘템베’라는 것을 또 강조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한 집안에 ‘뗌베’와 ‘템베’ 성씨가 같이 사용되는 것은 에구투구제니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는 현상이었다. 뗌베는 이 지역의 원조격인 통가(Thonga) 성씨인 반면 템베는 줄루 사회의 대표적인 성씨 중 하나였다. 사킬레는 이렇듯 통가와 줄루 사이의 유사한 성씨를 이용해 자신의 정체성을 바꿔버린 것이다.

에구투구제니에서의 ‘줄루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통가 사람들이 줄루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한 사회의 정체성이 바뀐다는 것은 갑자기 ‘우리 줄루가 됩시다’라고 말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통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줄루가 되기보다는 그냥 통가로 남아 있기를 희망하는 사람들, 양쪽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편리를 도모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미묘한 갈등관계는 에구투구제니의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지만 에구투구제니에서 줄루와 통가를 가르는 기준은 성별과 연령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엄마와 누나는 통가, 아버지와 나는 줄루”
“할아버지, 할머니는 통가, 나와 내 형제는 줄루”

에구투구제니에서는 보통 남자, 특히 젊은 남자일수록 줄루임을 강조하고 여자, 특히 나이든 노파는 통가로 불린다. 더욱이 재미있는 것은 이런 식의 분류가 심지어 가족 사이에서도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에구투구제니 남자들은 자신들이 줄루 임을 내세우고 여자들을 통가라고 비하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에구투구제니에는 성에 따른 노동의 분화가 확실하다. 농사는 여자의 몫, 목축은 남자의 일이라는 등식이 확실하게 적용된다. 남자들은 아무리 바쁜 농번기라고 해도 손가락하나 까딱하는 일이 없다. 여자들이 새벽부터 밭에 나가 땅을 갈고 씨를 뿌려도 남자들은 먼 산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줄루 남자니까. 줄루 남자니까 농사를 하면 체면이 손상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여자들의 반응은 아주 냉소적이다.

“자기들이 무슨 줄루라고? 농사일 하기 싫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이 목축을 하는 것도 아니다. 에구투구제니는 목축을 하기에 아주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에 전문가에게 가축을 몽땅 맡겨 버린다. 그러니 남자들이 할 일이란 아침에는 술 마시고, 점심에는 낮잠 자고, 늦은 오후에는 축구를 하는 걸로 시간을 때운다. 물론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있고 외지에 나가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뚜렷한 직업이 없는 젊은 남자들이 이런 게으른 생활태도를 보이는 단 하나의 이유는 “나는 줄루”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에 따른 노동 분화는 에구투구제니 고유의 관습이 아니고 줄루 사회에서 수입된 것이다. 인류학자들의 보고서를 보면 줄루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 통가사회는 남자도 밭을 갈고 작물을 재배했다는 증거이다. 사실 에구투구제니에는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들을 간혹 볼 수 있다. 예전에 농사짓던 습관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에구투구제니에서 줄루와 통가를 가르는 또 다른 기준은 음식타부이다. 줄루 사람들이 회피하는 음식은 의외로 많다. 여기 세 개의 사례는 에구투구제니 사람들이 음식을 가지고 줄루와 통가를 가르는 기준을 보여준다.  

여느 날처럼 상고마 친구 쟈불라니 집에 들렀다. 쟈불라니 집에는 모처럼 쟈불라니의 어머니를 비롯해 온 식구가 모여있었다.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나무아래 앉아 온 식구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합석을 하고 보니 수박과 비슷한 것을 먹고 있었다.  
푸른 껍질에 검푸른 줄무늬는 꼭 수박인데 속이 노란 것을 보니 수박이 아닌 것도 같았다. 여기에는 워낙에 이상한 과일들이 많아서...
“이게 뭐야?”
“우카베(Ukabe, 수박)”
쟈불라니의 어머니가 과즙이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대답했다.
그런데 온 식구가 모여 있는데 수박을 먹는 것은 쟈불라니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딸이었다. 쟈불라니와 아들은 멀뚱멀뚱 수박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쟈불라니, 너는 왜 수박을 안 먹어?”라고 물었다.
순간 쟈불라니의 얼굴에는 야릇한 미소가 흐르며 뜻밖의 대답을 했다.
“수박은 노인네하고 여자들이나 먹는 거야. 나 같은 줄루 사람은 수박을 안 먹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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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한 중턱이라 이미 해가 떨어졌음에도 한 낮에 해가 달궈놓은 지열이 후끈하게 올라왔다. 집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해졌지만 사람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모두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었다. 저녁식사를 한 뒤 나도 돗자리에 앉아 친구 어머니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갑자기 어둑어둑한 마당 한 가운데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왠 연기지?’
놀란 눈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부엌에서 설겆이를 하고 있던 동네 아이가 뛰어나왔다. 한 손에는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동네 아이는 부엌문간에 있던 물통에서 양동이에 물을 대충 따라 들고 연기가 나는 곳으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것이었다.

‘저기에 불이 날 이유가 없는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불이 난 곳에 도착한 동네 아이는 물을 뿌려 불을 끌 생각은 하지도 않고 연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는 물에 담그는 것 아닌가...

‘불끄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하얗고 큼지막한 날개를 단 곤충들이 끊임없이 땅속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아하-, 저기는 개미집이 있던 자리지.’
그제서야 나는 하얀 연기처럼 보인 것은 연기가 아니라 날개미들이 떼를 지어 날아오르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산란기를 막 지난 날 개미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개미집을 나와 허공에 떠오르고 있는 것이 내 눈에는 마치 흰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가 두 손을 휘저으며 날 개미들을 잡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십 여분이 지난 후 동네 아이는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양동이를 들고 돌아왔다. 양동이는 하얀 날개와 검은 개미의 몸뚱아리로 가득 차 있었다.
“왜 그걸 잡았어? 그걸로 뭘 할건데?”
“예, 우리 할머니에게 드리려고요.”
“할머니?”
“예. 우리 할머니는 이걸 볶아드리면 참 좋아하셔요.”
순간 개미는 단백질 섭취가 부족한 이곳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단백질 보충 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겠다.”
인사치레로 ‘맛있겠다’라고 말하는 순간 옆에 있던 친구 어머니가 끼어 들었다.
“나는 백인 부인이라 그런 것은 안 먹어”.
“???”
친구 어머니는 흑인이었지만 남편은 백인 아버지과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었다. 그래서 친구 어머니는 간혹 자기는 백인의 아내라고 말하곤 했다. 그것은 자신이 적어도 통가는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친구 어머니의 말은, 비록 농담이었겠지만, 에구투구제니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정 음식에 대한 기피 현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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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정부에서 노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날이다. 친구가 연금을 나눠주는 곳에 가서 빌려 준 돈을 받아야 한다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한다. 좋은 구경이 될 것 같아서 친구 뒤를 따라 나섰다.
남아공 정부는 60세가 넘은 노인들에게는 매달 600랜드(약 12만원)에 해당하는 연금을 지급한다. 이 돈은 에구투구제니에서의 평균 소득을 감안해 볼 때 적지 않은 돈이다. 60세 이상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부양하는 집은 한 달에 1200랜드라는 수입이 들어와 가계 운영에 적지 않은 도움을 얻게 된다. 이렇다보니 과부가 된 여자들, 심지어는 미혼녀들이 연금을 바라보고 60세가 넘은 할아버지와 동거를 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어쨌든 이 적지 않은 돈을 받기 위해 마을 노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마을 공터에 길게 늘어선다. 내가 공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6인 승 승합차를 개조한 연금 차량이 연금을 나눠주고 있었다. 연금 차량 옆에는 중무장을 한 경찰 몇 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범죄가 빈번한 남아공에서는 무장강도들이 연금 차량을 털어 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삼엄한 분위기와는 달리 연금 차량 주변에는 이른 새벽부터 장이 열려 있었다. 대부분이 노인네라는 것을 제외하곤 여느 장과 마찬가지로 축제 분위기였다. 연금을 탄 노인네들은 든든한 목돈을 손에 쥔 탓인지 오늘만큼은 돈을 쓰는데 인색해 보이지 않았다.
손녀딸을 위해 앙증맞은 드레스를 사는 할아버지...
손자를 위해 운동화를 사는 할머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할아버지...
그 동안 벼르고 별렀던 양산을 사는 할머니...

모두들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고 있었다. 어떤 노인네들은 밀린 빚을 받기 위해 몰려 온 사람들과 실갱이를 하고 있었다. 구멍 가게를 하는 친구도 밀린 술값을 받아야 할 할아버지를 찾아냈다.
“이번 달에는 모두 갚아 준다고 했잖아요.”
“아니, 돈이 없으니까 이번 달엔 10랜드만 주고 다음 달에 다 갚을게.”
“안돼요. 지금 연금을 받았잖아요.”
“다른 데에 꼭 쓸 곳이 있어서 그래.”

결국 10랜드 밖에 돌려받 지 못한 친구는 입이 한 자는 나와 있었다. 가게 단골에게 너무 매몰차게 돈을 받아 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장에는 많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옷과 플라스틱 제품, 장난감, 약방의 감초인 간이술집과 고기 집... 하지만 연금을 받는 곳에 선 장에는 다른 장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물건들이 적지 않게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중 마치 해산물을 말려 꼬챙이에 꿰어 놓은 것 같은 것이 있었다.
“이게 뭐야?”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아마세네네(amasenene)라고 해.”
“아마세네네? 아마세네네가 뭐지?”

친구가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바다에서 자라는 것이라는 뜻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치 멍게를 말려 놓은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사전을 찾아보니 아마세네네는 멍게였다).
“이거, 먹는 거야?”
“응, 이걸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아 먹으면 맛이 좋아.”
“먹어 봤어?”
“아니! 이건 노인네들이나 먹는 거야.”
“맛이 좋다고 했잖아?”
“...”
“왜... 너는 이걸 좋아하지 않아?”
“이건 노인네들만 먹는 거야. 그래서 오늘 장에 이런 물건이 나오는 거지.”
“왜 노인네들만 드시는데?”
“왜냐하면 노인네들은 통가 사람이거든. 나는 줄루라서 이런 거 먹지 않아...”


친구는 멍게라는 것은 통가 사람들이나 먹는 음식으로 줄루인 자신은 그따위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멍게뿐이 아니었다. 에구투구제니 사람들은 갑각류 해산물 - 특히 새우나 멸치 그리고 가재 등 -은 철저하게 피한다. 이런 음식은 통가 사람들이나 먹는 저급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에구투구제니에서 줄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표적인 통가음식으로 알려져 있는 돼지고기와 생선은 손도 대지 않는다. 음식을 먹는 것은 사람의 생리욕구를 충족시키는 본능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음식에 대한 타부는 사회-문화적으로 결정된다. 에구투구제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에 대한 타부는 줄루화가 진전되면서 형성된 문화적 산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