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사회인류학

아프리카 만들기

africa club 2001. 11. 19. 20:07
오리엔트는 서양의 눈에 비친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타자(他者)"라는 정의를 내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오리엔트에 대한 이 정의를 아프리카에 적용시켜 보려 합니다. 하나의 대상이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침묵과 복종을 필요로 합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의 말을 빌리면 존재란 "자기를 본질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타자를 비본질적인 객체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을 확립시켜 나가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서양이 스스로를 확립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서양에 대비시킬 수 있는 타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오리엔트와 아프리카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었습니다. 저명한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아프리카는 서양의 어두운 심성을 표현하는 것이라 했고 프란츠 파농은 흑인은 "외부세계에 의해 화석화된 인종"이라고 단언한 것도 아프리카의 타자성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프리카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명칭이 아닙니다. 물론 일부 아프리카 정치 지도자들은 '아프리카'의 위대함을 주장하면서 '아프리카인'임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특히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벌인 아프리카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된 범 아프리카주의, 블랙시오니즘, 네그리튜드 운동, 흑인의식주의 등은 아프리카인 스스로 아프리카인 임에 자부심을 갖자는 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아프리카는 외부 세계에서 형성되어서 아프리카에 수입된 개념입니다.  
'아프리카(Africa)'라는 명칭은 "해가 잘 드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와 처음 접촉한 사람들은 푀니키아와 아랍상인들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에 의해서 알려진 아프리카는 그 후 외부의 여행자들에 의해 단편적으로 소개되었고 이러한 지식 쪼가리들이 하나 둘씩 모여 아프리카라는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아프리카는 이들과 교역을 했던 북동부 아프리카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도 간접적이고 극히 제한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여행자와 상인들의 부풀리기식 정보로 인해 아프리카에 대한 신비적인 모습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대 로마에 알려져 있던 "블레미에스"(Blemyes)라는 존재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고 믿어졌던 블레미에스는 "머리가 없고 눈과 입과 코와 귀가 가슴에 달려 있는" 괴물로 아프리카의 오지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여행자들과 상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원숭이 인간과 개미 인간 등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고 묘사되는 등 아프리카에 대한 첫 모습은 신비주의에 쌓여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라는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배를 즈음해서 서양사람들에 의해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 시작된 '대항해'는 서양 각국이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박차를 가하게 되고 그 결과 서양 밖에 존재하는 이국 문화에 대한 지식이 쌓여가게 됩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이 타 문화를 이해하는데는 두 가지 기본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문화의 단선적 진보를 주장하는 19세기 이론인 '문화적 진화주의'(cultural evolutionism)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 식민제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인 "가부장제적이고 제국"(patriarchial empire)였습니다. 이 두 개념은 상호의존적으로 서양사람들이 타 문화, 특히 아프리카 문화를 평가할 때 사용하던 도구로 서양 문화의 우월함을 주장하기 위해 이용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먼저 아프리카 문화를 단선론 적 도식 위에 올려놓은 문화적 진화주의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문화적 진화주의(cultural evolutionism)는 아프리카의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 낸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사용하고 있는 표현들, '미개', '빈곤', '원시', '열등' 등의 용어들은 바로 아프리카 문화를 열등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는데요, 서양에서 주장된 문화적 제국주의를 우리도 무의식적으로 일상화하고 있다고 봅니다. 진화론자들은 사회의 진화 과정을 설정해 놓고 진화의 정도는 사회 구성원의 합리적인 이성이 전통이나 의식, 종교 등 과학에 대치되는 모든 불합리한 요소를 제거해 나가면서 그 완성의 형태를 띈다고 보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어거스트 꽁뜨(1798-1857)였는데, 그는 사회와 인간의 의식은 1) 신학적(theological 또는 초자연적 supernatural)인 단계, 2) 형이상학적(metaphysical)인 과정, 3) 실증적인 과학(scientific 또는 positive)의 3단계를 거쳐 진행된다고 보았습니다. 서양 과학의 우월성을 내세운 것이었지요.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도 이와 비슷하게 인간 사회란 1) 단순 구조(uniformity of structre)에서 복합 구조(heterogeneity)로, 2) 비 유기적(inorgrnic world)에서 초 유기체(superorganic) 사회로, 3) 강제적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군사형 사회로부터 자발적 동의를 기초로 하는 산업형 사회로 진화되어 간다고 설정한 후 영국의 빅토리아 왕조는 진화의 가장 최고 단계에 있다고 설정했습니다. 하지만 문화진화론을 구체적으로 이론화 한 것은 루이스 헨리 모건이었습니다. 모건은 그의 저서 『고대사회』에서 인간 사회를 혼인/가족 형태, 사회구조, 정치조직, 경제/기술 수준을 기초로 야만/미개/문명의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일부다처제/부계제/수장회의/수렵.채집, 농경, 목축의 사회적 특성은 서양에서 발견되는 시민사회/개인주의/민족국가/자본주의 등에 진화론적으로 열등한 단계에 놓여있다는 것이 그의 가설이었습니다.
이처럼 진화론에 따라 인간사회는 야만, 미개의 열등한 단계에서부터 고등단계의 현대사회에 까지 단계별로 진화하게 되어 있고, 아프리카 사회는 미개의 단계에 속한 대표적인 사회였다는 것이 서양 학자들의 입장이었습니다. 이것이 서양학자들의 탁상공론으로 끝이 났다면 문제는 덜 심각했을지 모르지만 문화적 진화주의는 식민지배라는 서양의 무력 침탈을 타고 아프리카의 속성을 결정짓는 도구로 작용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서양은 미개한 흑인들로 가득 찬 아프리카를 개화시킬 의무가 있다고 믿었고, 그 이념적 슬로건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인의 의무(Whiteman's burden)'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문화전화주의의 정략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차용된 백인의 의무는 백인이 흑인을 도와(통치하면서) 흑인을 개화시켜야 한다는 당위론을 펴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러한 백인의 의무를 추진하기 위해 서양이 아프리카 땅에 가지고 들어 온 또 하나의 무기는 다름 아닌 "가부장제적 제국주의"(Patriarchial Imperialism)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