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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The Republic of Mali)

2003. 2. 3. 13:15
말리(The Republic of Mali)


국 명 : the Republic of Mali

수 도 : Bamako

면 적 : 1,240,192 Km2 (서부아프리카 중 가장 큰 나라)

위 치 : 아프리카의 서부 내륙국으로서 위도 11°와 25°N, 경도 5°E에서 12°W에 걸쳐 있으며, 서쪽으로는 세네갈과 기니, 북쪽 으로는 알제리와 모리타니,동쪽으로는니제르와 부르키나소, 남쪽으로는 코트디부아르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시 차 : 한국보다 9시간 느리며 말리의 수도인 바마코의정오는 한국의 21시이다.

지 세

: 말리의 지형은 국토의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에속해 일부 지역에만 고원과 평원이 있을뿐 대체로 평평하고 단조로운 편 이다. 남부와 남서부의 고원은 높에 300~600m의작은 언덕들이 연속해 있으며, 동부의아드랄드 데지포라 산괴가 편지에서 약 600m의 높이로 솟아평탄한 지형에 변화를 주고 있다.

북부에 있는 타네즈루프트와타우데니의 광대한 평원은 사하라 사막에 속해 있다. 남서부와중남부는 니제르 강 상류 유역의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니제르 강 전체 길이의 거의1/3이 말리를 관류하면서 내륙 삼각주를 현선한다. 니제르 강유역은 주기적 범람과 삼각주의 비옥한 충적토로 중요한 농경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유역중앙부에는 거대한 내륙 델타 및크고 작은분류ㆍ호소가 형성되어있다. 말리의젖줄이라고할 수 있는 니제르강은 우계에는 델타지대 일부에서 범람하나 하류에는 피해를 미치지않고 건계 또한 갈수상태에 이르지 않는다. 세네갈 강의원류가 말리 서쪽 끝에서 시작된다.

전 국토의 약 20%가 경작지이며 1/4가량은 목초지나 방목지로이용되고 철광석, 보크사이트, 금, 니켈, 구리, 망간 등의 광물이 매장되어 있으나 대부분 개발되지 않은 상태이다.

통 화
: 화폐의 단위는세파프랑(CFA 프랑) 으로 1993년을 기준으로보면 1달러는 293.2 CFA프랑이며 1CFA 프랑은 약4원 정도가 된다.

전 압 : 전압은 220V, 50Hz를 사용한다.

통 신
: 말리의 전신 및 전화망은 질이나 양적으로극히 미약한 형편이며, 보급률 또한 skrw아 1990년에 전화의 보급률이 15,000대에 불과하였다. 또한 시설의 보수 및 개조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며,서비스 내용도 좋지 못하다. 이블 회선은 바마코~크리코로,바마코~세구, 바마코~부구니 간3 회선 밖에 없다.외국과의 통신이나 전화는 제대로 기능을하고 있는 편이지만 말리의 지방에서는 아직도 부족한 현실이다.


인 구 : 1,060만명

- 인구 성장률은 2.78%, 인구 밀도는 7명/km2이다. 인구의 90%가 국토의 1/3에해당하는 남부의 비옥한땅에 살며 10%만이말리의 2/3에 해당하는 북부의 건조지대에 살고 있다. 국민의 20%가도시네 거주하고 있으며, 출생률과 사망률이 높은 편에속하는데, 이는 서아프리카의 전체 비율과 비슷하며 인구의 절반 가량이 15세 이하이다.

말리에는 흑인과 백인 주민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백인 가운데는 무어인으로 알려진앏-베르베르족만이 만이 아니라베르베르족의 유목집단인 투아레그족도 포함되는데,이들은 주로 말리중부의 사헬 지 대에 주로 거주한다.

흑인 주민은 농경생활을 하는 여러 부족으로 구성되며,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밤바라족이전체 인구의 1/3 가량을이루고 있다. 2번째로 많은 페울족은 사헬과 마시나에서 유목생활을하고 있고, 농경민인 소닌케족은 가나제국을 세웠던 부족의 후손으로 사헬 지대 서부에 살고 있다. 마리 제국의 전통을 지켜온말링케족은 남서부에 거주하며 송가이족은 젠네에서 안송고에 이르는니제르강 유역에서 생활한다. 도곤족은반디아가라 주변의 고원지대에상고 있으며 볼타어를  쓰는 보보족, 세누포족, 미니안카족은 동부와 남부에 산다.

주요종족 : Mande(50%), Peul(17%), Voltaic(12%), songhai(6%)등


관습/예절 :다른 아프리카국가들과 특별히 다른관습을 보이지는 않지만 국민의 34.5%가 원시종교를 믿고있기 때문에 지방에 따라서는 그 종교특유의 관습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으며 북부 유목부족인 베르베르계와 농겨우족인 흑인계는 관습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남녀교제에 관한 도덕율은 지역에따라 차이를 보인다. 도시에서는 15,6세부터 교제가시작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지방에서는 부족이나사회 집단에 따라 규칙이다르다. 대개의 경우 결혼상대는 가족이 정하며 본인은 그것을 승낙하는 형식으로이루어 지는데, 결혼에대해서는이슬람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지위는대다수의 아프리카국가에 비해그다지 남성에게 의존적이지 않아서 일정한 조건 하에서는 이혼이 가능하다.

일부다처제가 아직까지 행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도시에서는 제 2, 제3의 부인이라는 지위를 받아들이지않는여성도 많이 있다. 민족적으로 다양한 면을 가진 말리이지만 악수는 모두공통적이다. 왼쪽손으로 오른쪽팔을흔드는데 이는 존경의뜻을 의미한다. 한편, 남성이여성과 악수를 할경우에는 여성쪽에서 먼저 손을내밀었을때에만 가능하다.

실내나 방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신발을 벗어야 하며마을을방문할 경우에는방문처의 주인에게줄 선물을 지참하는 것이 좋다.상대방을 칭찬해주면 대단히좋아하지만겸손해서 드러내지않는 것이보통이고 이야기 중에는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 좋다.

마을의 촌장과 정식으로 이야기를하려면 중간의 소개인이 필요한데, 방문자는 촌장에게 직접 말을 걸지 않고몇사람을 통해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이들이 손님의 말을 자신의 견해와 함께 촌장에게 전달하고 또 촌장의 말을 손님에게 전달한다. 또한 말리를 여행할 경우 주의해야할 점은 현지에서사진촬영을 할 때는 반드시정부당국의 허가를 받고나서 해야 한다.


기 후 : 열대성 기후(건기 11~5월, 우기 6~10월)

- 말리는 수단 후대, 사헬 시후대, 사하라 기후대의 세 기후대에 jfcu있으며1년은 우기와건기로 나뉘어진다.우기는 6~10월,건기는 11~5월까지로, 건기 중네서도 12~2월은비교적 시원한 편이며, 9~11월 사이가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기후를 보인다.

남부는 열대성 기후인 수단기후대에 속하며, 5~7월사이에 우기가있고, 연간 강우량이 500~1400mm정도에이르며 수림이 무성하다. 온도 및 습도는 지역이나 낮과 밤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는데, 평균기온은 24~30℃ 정도이며, 특히 건기에는 사진을 수반한 열풍하르마탄이불어 건조와 더위가 한층 심하다.

북쪽은 사하라 사막과 접해 있는 반건조지역으로 사헬 기후대에 속하며,연평균 강우량은200~500mm 정도이며udrbsrldhs은 23~36℃이다. 북부의 광대한사막지대는 사하라 기후대로사실상 비가 내리지 않아 몹시 건조하며, 낮 기온이 47℃를 넘는 반면밤에는 4℃까지 내려가는 등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다.


종 교 : 회교(90%), 토속종교(9%), 기독교(1%)

- 적어도 말리인의 90% 정도가이슬람 교도이고 9% 정도가부족의 전통적인 신앙을 지키고 있으며약 1% 정도가 기독교를믿고 있다. 프르족,소닝케족, 모루족,송가이족 등은예로부터 이슬람교를믿고있지만 비교적 늦게 이슬람교로 개종한 부족중에서는 부족의 전통적인 신앙을 동시에행하며 가면 등을사용하기도 하고 토템의 동물을 신봉하기도 한다. 그러나대부분 발생되는 일에대해서는 전례를 따르는 것이지배적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별로없다.

언 어 : French(공용어), Bambara, numerous African languages


* 문맹률 :69%

- 말리는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국가 공무원가 도시주민사이에 사용)이며 가장 널리사용되고 있는 현지어는밤바라어이고, 교육의 대부 분이 프랑스어로 행해지고 있다.

교 육 : 말리 어린이의단 15%만이 초등학교를 다닌다. 1990년대 초반에는연간초등학교 입학생수가375,000이었다.약, 88,600명의 학생이 중등학교나 직업학교에입학했다. 수도에는 밤바코에는 행정관리, 의학그리고 공학을 가르키는 학교가 있으며 1990년대 초반에 약 6,700면의학생이 고등교육을 받았다.


정 치

* 정 체 :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
* 정 당 : ADEMA, CNID, US-RDA, MPR 등
* 정 부 : 1991년까지 말리는1974년에 제정되고 1979년에 수정사항을 포함하여 효력이 발생한 헌법아래 놓여있다. 야당의 반대없이 두 번 당선된 무싸 대통령은 1979년에 결성된 말리의 유일한 정당인말리인의 민주연합당의 당수로서 독재정치를폈다. 1991년 쿠테타로 인해 이 정당은해체되었으며 1992년 1월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은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헌법에 의해말리는 복수정당의민주공화국이 되었으며5년임기의 대통령이 당선되는 제도가 생겨났다. 대통령은 수상을임명하며, 수상은 내각의원을 임명한다.단원 국회는 각각 5년 임기로 당선되는 129명의 의원들로 구성된다.


대외관계 : 비동맹을기축으로 한 전방위 외교 전개


군 대

* 총병력 : 7,350명(육군 6,900, 햐군 50, 공군 400)
* 치안경찰 : 7,800명

영 해 : 내륙국

예 산 : (1996년)

* 세입 2,500억 FCFA/세출 3,199억 FCFA

경 제 : 말리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이다. 경제는 주로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작물은 대부분 니제르강과 그 지류의 관수와범람에 의존하고 있다 조면이나 식품 가공과같은 소규모 산업도 존재한다.니제르강 주변에 살고 있는 말리인들에게 니제르강의 어획은 매우 중요하다.말리의 어업은 잉여물 생산하고 있으며잉여생산물은 건조, 훈제되어수출되고 있다. 천연광물에 대한 조사도 활발히 이루어져 금, 소금, 대리석, 인회암과 대리암에 대한 채취가일어나고 있으며,철광서과 우라늄은가까운 미래에 채취될 전망이다. 발견된 다른 광물들로는 석유, 보크사이트, 망간, 아연, 구리 그리고 리튬등이있다. 1990년대 초반에 말리는 약1억 5천만 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했으며이의 대부분은 수력발전에의한것이었다.

* 국민총생산 : 2,800만불 미불(1996년)
* 1인당 GNP : 273불(1996년,최빈 개도국중 하나)
* 화폐 단의 : 프랑 세파프랑(FCFA/0.01프랑스 프랑)
* 주요 산업 및 산품

-농업 : 면화, 땅콩, 밤, 옥수수 등
-축산업 : 소, 양, 산양, 낙타 등
-공업 : 식품가공, 시멘트 등
-광업 : 인광석, 금, 암염 등

* 경제개발계획 : 일련의 정부주도 경제 구조 조정 노력 전개중.특히,

'96년 2월 IMF와 3개년 경제 구조 조정 계획을 합 의하고 재정 수지 개선, 수출 산업 육성, 사회 간접시설 확충 및 민영화 추진중

* 외국 무역(1995녕/단위: 백만미불)
- 수출총액 : 470, 수입총액 : 738
- 주요수출입 대상국

수출 : 태국 18.1%, 중국 13.6%, 벨기에,룩셈부르크 10.7%, 세네갈 4.2%등
수입 : 코트디브와르 26.6%, 프랑스 17.4%, 포루트칼 8.2% 등

- 주요수출입 품목 : 면, 가죽, 금 자본재, 식량, 연료 및 에너지


* 경제원조 수혜 현황(1995년/단위:백만미불):544.9
- 양자간 : 270.9(프랑스 81.7, 일본 47.8, 독일 46.2, 화란 47.8등)
- 다자간 : 274.1(EU 82.5 등)


우리나라와의 관계

* 관계수립일 : 1990년 9월 27일
* 공관 설치현황
- 아국공관 : 세네갈 상주
- 상대국 공관 : 인니 상주

* 주요인사 교류
- 방한 : 85.10 Diakite재무상공장관 및 Diarra 기획장관,IMF,IBRD서울 총회 참석
         90.03 Keita 주벨기에 대사

* 양국교역(말리기준/1998년/단위:천미불)
- 수출 총액 1,148, 수입총액 17,032
- 주요품목 : 철도외 차량, 면류, 고무, 전기기기, 인조 필라멘트, 기계류등

* 경제, 기술 협력
- 무상 기자재 공여
95년 : $7만 (엑셀 6대 및 부품)
96년 : $7만 (엑셀 5대)
97년 : $7만 (소나타 3대 및 부품)
- 기술협력 : 99년도 2명 (행정발전과정 및 광물자원탐사과정 각 1명)
- 기업진출 : (주)영풍산업 말리지점 및 AFKO.lnc

* 교민현황(99년) : 17명



북한과의 관계

* 관계수립일 : 1972.9.11
* 공관 설치 상황
- 북한측 : 상주공관(61.8.29), 운영후 폐쇄(98.2), 현재 주기네 대사관이 겸임
- 상대측: 북경상주

약사

* 9 ~ 19세기 말리제국
* 1898 프랑스 식민지
* 1960.9 말리공화국 선포 (Modibo keita 초대 대통령)
* 1968.11Moussa Traore대령쿠테타 주도Keita 대통령축출후

군사 정권 수립
* 1976.9 말리 인민 민주 동맹(UDPM) 창당
* 1991.3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 발생직후, Troure 공수 부대장 주도의 쿠테타 발생으로 Tarore 대통령 축출, 구금 및 과도구국위(CTSP) 결성
* 1992.3 최초의 민주 총선 실시
* 1992.4 Konare 대통령 선출(1992.6 취임)
* 1994.1 현지화 세파 프랑 50% 평가 절하
* 1997.6.8 Konare 대통령 취임(재선)
* 2002년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 예정


역 사

말리는 서부수단의대제국들의 중심지로가나, 말리그리고 송하이의 툼복투나 가오같은 도시들은 교역, 교육 그리고 문화의 중심지였다.

가나는 기독교가 탄생할 즈음네기원을 두고 있으며 절정기는950년부터 1050년 사이에 맞았다. 말리 제국은 11세기에 근원을 두고 있지만 전성기는 말리를 1253년부터255년까지 지배한순디아타의 지도 아래 처음 맞았다. 최고 전성기는 14세기 만사무사의지도 아래 KW이하였다. 만사무사는 말리 제국의 영토를 가오의 동쪽 끝 대서양까지 넓혔다.

1645년까지 왕들의 지배가 계속 되긴하였지만 말리 제국의 몰락은급속하게 찾아왔다. 구 뒤를이어 가오의 송하이 제국이설립되었으며 이 제국이 위대한 지도자들로는 순니 알리(1464~1492),아스키아 무하메드(1493~1528)등이 있었다. 최고 전성기에 송하이는 대서양 연안부터 카노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녔으며 현재 말리 북부의대부분과 기니의 일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제국의 대부분은 1591년 모로코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니제르강 중심으로 많은 소국가들이 설립되었은데 이중 세구가 특기할만하다. 이 국가들은19PRL 중엽 이슬람의 지도자인 알 하지 우마가 벌인 전쟁에의해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그의이슬람 제국은 니제르 강부터 퉁복투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아마두는 1893년에 프랑TM군에 패배하였다.

1904년에 말리는 프랑스으 식민지가되었으며 1902년에는 프랑스렬 수단의 일부로 편입되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식민지중 하나가 되었다.말리인들의 정치 활동은 프랑스에 의해 금지되었으며 이는 2차대전이후에나 풀렸다. 다양한 정당들이 설립되었으며 이 정당들은 마침내범아프리키 민주주의 동맹의 말리 지부에편입 되었다. 1957년의 정치개혁때에는 이 동맹이 최대의 정당이 돼있었다.

1958년에 프랑스 수단은 새로이 결성된 프랑스 공동체의 가입을 결정하였으며 1958년 11월 24일에는 수단 공화국으로 공식 출범하였다. 1959년 1월 17일에 수단은 세네갈과 연합하여 말리 연방국을 결성하였으며 1960년 6월 30일에는 모디보 케이따를 대통령으로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 연방은 같은 해9월에 해채되었으며 전 프랑스 수단은1960년 9월 22일 말리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새출발하였고, 케이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같은달 말리 공화국은유엔의 일원이되었다. 독립 이후 말리는 사회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경제 발전의 정책을 고수해왔다.

1968년 11월에는 케이따 대통령의 일인독재가 육군 소속 장교들의 쿠테타에 의해 무너졌다. 이 쿠테타로 인해 무싸 중위가 이끄는군사평의 회부가 들어섰으며 이후 무싸는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정부는 자본의 부족과 1970년대 중반의가뭄으로 인해 경제를 발전시키는데실패하였으며 내부 권력 싸움이 벌어져 1978년에 또다시 쿠테타가 일어났다. 이 쿠테타는 결국 실패했지만 정치적 혼란과 억압속에 평의회몇몇 전직 의원들이 체포되어 형을 언도 받았다.

트라오르 대통령은 유일한 후보로나서 1979년과 1985년에 당선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에 말리는 가뭄이극심한 피해를 보았다. 부르키나 파소와의 국경전쟁은 1985년 말에휴전이 선포되었다. 채권국들의 압력 아래 말리는 1980년대 말에 수익을 보지 못하던 많은 공기업들이 민영화 하였다. 트라오르 대통령은 1991년 3월육군 소속의 장교들의 쿠테타에 의해 전복되었으며 1992년 1얼 다수정당을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이제정되어 알파 오무마르 코나르가 4월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코나르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1993년 4월밤바코에서 일어나 많은 정부기관들이 피해를 입었으며 트라오르의 지지자들의 쿠테타가 일어났지만실패하고 말았다.

1990년과 1994년 사이 북부 말리에서 일어난 무장 폭동과 폭력으로인해 15만이 넘는 말리인이 말리를 떠나야했다. 1995년 중반에는 말리 정부의 대국민 화합에 대한노력과 평화/휴전 체결서로 인해북부 말리에는 다시 정치적 안정이 찾아왔다.

휴전 체결과 무장해제 노력은더욱 강화괴었으며 1997년 3월대통령의 인권 보호 선언문의 발표는 수년가느이 폭력을 종지부 짖는산징으로 보이고 있다. 이런 긍정적인요소들은 투아렉과 무어 계통말리인들의 복귀를 부추기고 있다. 1999년 6월 말까지약 131,780명의 말리인 피난민들이 자발적 또는유엔의 비호 아래알제리아, 부르키나파소, 모리셔스, 니제르와 세네갈로부터 돌아오고 있다.

말리의 케잊 지역에는 약6천명의 모리셔스 피난민들과 17개의아프리카국가(대부분 시에라 리온과 리베리아출신)와 동부 유럽 국가들의피난민 1,924명이 살고 있다. 애초 16,800여명의모리셔스 피난민 증약 10,8000명의 피난민이 유엔의 도움을 받아 복귀되었다.

1996년 이래 시행되고 있는 말리피난민들의 복귀 정책은 식수의제공과 같은 서비스의 복원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이 정책은제한된 자원과 지급이 연기되고 있는 자본의 어려움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이 복귀 정책은 우여곡절 끝에 1999년 6월 30일 마무리지어 뎠다.

말리에 남아 있기러한 모리셔스피난민들은 케이즈지역에 상주하고 있다. 그들은 국가피난민 위원회의기본틀하에 피난민적합성 심의를 거칠 예정이다. 피난민으로남아 있지않기를 원하는사람들은 말리의 이민과 귀화 절차의 결정을 받게 될것이다.



여행에 관하여.....


* 여행하기 좋은 곳

- 바마코 :바마코는 말리의수도로서 상업의 중심지로얼마쯤 번영을 이루기는 하였지만 대도시 냄새를 풍기지 않는 거대한 아프리카의 전원도시에 지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붉은 모래 먼지가 난무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거리에서 파는 꼬치구이와 석쇠구이 고기를 느긋하게 먹고 있다. 저녁 무렵이면 길가에 의자를 들고 나와 시원한저녁 바람을 쐬면서 차를 마시거,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도시답지 않은 편안함이 바마 코의 매력이다. 바마코에서는랜드 모스크와 천과물 시장인 그랜드 마르셰를 둘러보면좋다. 바마코의 교통편으로는 공항과 시내를 연결하는 버스가적기 때문에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으며, 시내 중심까지는 약 20분 정도 소요된다. 말리의 택시는 합승제이기 때문에 손님이 이미 타고 있어도 자신 의 목적지와같은 방향이라면함께 동승해도 좋다.요금은 시내는 300~400CFA 정도이며 야간에는2배의 요금을 지불 해야 한다.

- 몹티 : 바니강과 니제르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여동서로 웅대한 니제르 강이 건너다 보이는활기에 넘친 도시가 바로 몹티이다. 바마코에서 가오로 가는 주요 간선도로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동서남북의 수상 및 육상교통의 요충지이다. 특히 돈벌 이를 하러 온 사람들이 많은 이곳은 서아프리카 각지의 사람들이 집합하는 국제색이 풍부한 도시이다. 민가 옥상의 테라스에 올라가면 니제르 강이 한눈에 보여 아침해와 저녁 노을의 아름다운 광경을 구경 할 수 있다. 몹티의 교통 사정은 바마코로부터 약 630km 거리이며 포장도로가 구비되어 있다. 니제르 강의 배가 운행중인 기간에는 쿨리로부터 약 3일 정도 걸리며, 통북투와 가오에도 배로 갈 수있다. 한편, 몹티에 도착하면 반드 시 외국인 등록을 해야하며경찰서에 가서 패스포드에 도장을 받아야 한다.

- 통북투: 통북투는 12세기에 투아레그에 의해 세워졌다. 사하라 사막의 남쪽변두리 니제르 강에가까운 이 지역은금을 찾아서사막을 넘어온 아프리카의아랍의 캐러밴과 소금을 구하려고피로그에 타고서 남쪽으로부터찾아온 흑인의 해후장소였다.통북투에 도착하게 되면 곧바로 경찰서로 가서 외국인 등록을해야한다.통북투의교통은다음과같다.가오에서 424km(2~3일) 거리이며, 요금은 트럭 7,500CFA이며, 4륜구동차는 10,000CFA 정도이다. 또한 몹티에서 약 430km에 위치하고 있는데, 요금은 8,000CFA(2일) 정도이다. 그러나 강의증수기에는 통행이 불가능하다. 피로그를 이용할 경우의 요금은8,000CFA(약 일주일)이다. 바마코에서는 약 850km 정도의 거리이며 요금은트럭 12,000CFA 정도이지만트럭을 구하기가힘들기 때문에 담배 수송차를이용하는 것이 좋다. 항공로는반줄에서 감비 항공이 주1편(월요일) 운항하고 있다. 한편,택시 파크에서는 군담이나 딜레행트럭, 4륜구동 합승택시가떠나고 있으며, 바마코, 몹티,가오로도 편수는 적지만 직접갈 수가 있다.

- 젠네 : 젠네는니제르강과 그지인바니강의 사이에모래톱에 세워진도시로서, 니제르강의 수로 운반에 의해서 교역도시로 번영해왔다. 통북투가 사하라 횡단교역도시였던 반면 젠네는 남부의 사바나,열대우림으로부터 농경민의잉여 농산물따위의교역으로 번영했다. 젠네에 가면 월요 시장에 가볼만 하다.

젠네는 말리의중앙부에위치하고 있으며,몹티로부터약 130km 거리에 있고요금은 택시로 1,300CFA정도이다. 상으로부터는 약 150km이며 토요일밤과 일요일 아침에만 택시가떠나고 있고 요금은 2,000CFA 정도이다. 젠네로들어갈 때는경찰서에서 점검을 받은 후에SMERT(관광안내소)에 관광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요금은 인원수에 상관없이 1,250CFA 이다.

- 가오 : 가오는 말리의 남동부에 위치해 있는 시로서,니제르와의 국경까지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미 7세기에는 오늘날의주민과 똑같은 송가이족의 사람들이 이 일대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가오의 영광은 도시 북쪽에 있는 아스키아 왕조의 무덤과 모스크에서 가까스로 찾아볼 수 있다. 무덤은 거대한 사다리꼴의 피라미드 형으로지주가 멧돼지의 뿔처럼 사방으로삐죽이 나와있다. 모소크가 그 무덤을 두러싸고 있는 벽의 한쪽 면을 차지하고 있다.현재의 도시 중심은 항구 근처이다.

가오는 모든방향으로도로가 뚫린자로이다. 북쪽으로향하는도로인가오~아드라드는1,451km이며, 가오~키달은  342km,가오~타만라세트까지는1,000km거리이다.안송고를 경유해서동쪽으로 향하면메나카로부터 니제르의타우아로이어지는 유목민의 이동 루트가 있다.(가오~안송고95km, 가오~메나카 305km) 안송고에서 남동쪽으로내려가면 니제르의수도인 니아메로 가는 버스노선이있다.(가오~니아메 381km)남쪽으로 곧장 내려가면 부르키나파소의 수도인 와가두구로향하는 도로가 있다. 남서쪽에는몹티에서 수도인 바마코로 통하는 포장도로가 있고, 강을 따라서 배로 서부서 방향으로 향하면 통북투에 다다른다. 몹티와바마코로 향하려면 강을 건너지 않으면안되는데, 도시중심에서부터 나루터까지는약7km, 나루터에서는 프랑스어로 바크라고불리는 뗏목같은 페리가 양안을 왕복하고 있다. 트럭을실을 수 도 있는 튼튼한 배이다.


* 여행 수단 : 말리에는 각종 장거리 버스 및 합승택시가각 도시를 연결하고 있어서 북부의 사하라 사막을 제외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이도알 수 있다. 그러나 니제르강 만곡부(특히 몹티~통북투)는 우기동안에는이동이 불가능하거나불가능 하게 된다.

버스는 회사에 따라서 발착장소가 다른 불편함이 있지만 합승택시에 비해 가격이 싸고 안전하게 이동 할 수 있다. 말리 내에서 장거리 이동을할 경우 수차례 검문소를 통과하게 되는데, 최근에는 승차시에 리스트를 만들어 검문소마다 차에서 내리는 일이없이 순조롭게 통과할 수 있도록 개선되었다.

합승택시는 바마코의 경우만이장거리와 근거리의 승차 장이 분리되어 있고 대다수의 도시 및 시골은 한 곳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각방면으로 가는 차를 탈 수있다.통북투를 비롯한 사하라사막으로의 교통 수단은 4륜구동차와 트럭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매일 출발하지 않기 때문에 여유를 갖고 행동해야만 한다.

철도는 바마코~다카르 간 열차가주 2회(화,금요일) 운행되고 있으며 국내선인 바마코~카이 간은 매일 운행되고 있다.세네갈 강을통해 카이에서세네갈의 포도루까지 운항할 수 있으며 니제르강의 배는 바마코에서 상류지역인 기니아의 쿠루사까지 운항이 가능하며 8월 무렵부터1월 말 까지는 크리코로에서 가오까지의 약 1,300km를 항해할 수 있다.

말리에는 수도바마코에 있는국제공항을 비롯하여세구, 몹티, 통북투 등 10개의 공항이 있다. 말리의 항공회사로는 국영 말리 항공(AIRMALI)이 있으며 말리 국내를비롯하여 바마코, 주변국가의도시, 카사블랑카 및프랑스와의 국제선을 운행하고 있다. 그러나 1989년 말리항공이 재정난으로 인해 영업을 중지했을 당시에는 정기편 없이 감비아 항공기가 반줄~통북투간을주 1회 운항 할뿐이었다. 그러나 1990년부터국내항공이 운항을 재개하였다.


* 치안 : 범죄에 관한 말리 정부의 공식 발표는 없지만,아프리카 지역의 다른 나라에 비해 범죄는적은 편이다. 이는 갖2hr에 대한강한 결속력과 늦은 도시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범죄가 점차 증가하고있는 추세로 도시에서는강도, 소년비행, 밀수등이 문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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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Mali, 말리, 아프리카

세네갈

2003. 2. 3. 13:07
수도는 다카르이다. 서쪽으로 대서양에 면한 세네갈은 북쪽과 북동쪽으로 세네갈 강을 국경선으로 하여 모리타니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팔레메 강을 사이에  두고 말리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기니비사우·기니와 국경을 접한다. 감비아가 이 나라의 남서부에서 감비아 강을 연하여 고립지역을 이룬다. 면적 196,712㎢, 인구 9,404,000(1997).


자연환경

국토는 대체로 평탄하며 구조적으로는 3대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이 나라의 서단을 차지하며 단단한 화산암의 작은 고원들로 이루어진 베르데 곶 지역이다. 2번째는 기니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푸타잘론 대산괴의 하부에 해당하는 고대 산괴의 주변부로 이루어진 남동부와 동부 지역으로, 최고봉은 해발 500m에 이른다. 3번째는 서쪽의  베르데 곶과 동쪽의 산괴 가장자리 사이에 있는 광대하고  얕은 분지지역이다. 세네갈의 대서양  연안은 모래가 많고 파도가 거세다. 살룸 강 하구 남쪽의 해안은 골짜기가 침수되어 이루어진 리아스식 해안이며,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홍수림 소택지가 많아진다. 대하천 유역인 세네갈 분지(세네갈 내에서 약 6만 4,000㎢의 면적을 차지하며, 말리·모리타니·기니까지  이어지는 분지)가 이 나라의 하천들을 대체로 서쪽의 대서양으로 흐르게 한다.

세네갈의 토양은 겉으로는 어디서나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충적토, 다공성의 점토, 디오르(연한  황토), 사질토 등 매우 다양한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기후는 세네갈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건조한 사막과 습윤한 열대지방 사이의 천이성  기후인 수단 기후가 나타나며, 티에와 팔레메 강 하류 골짜기를 잇는 선의 이북에서는 사헬 기후대가 나타난다. 우기는 사헬 기후대에서는 7∼10월이고 수단 기후대에서는 6∼10월이며,  연강우량은 북부에서 약 355㎜, 남부에서는 약 1,525㎜를  기록한다. 기온은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24∼38℃이며, 북부에서 가장 높다. 사헬 지대의 식생은 산재하는 관목과  아카시아가 특징적이며, 베르데 곶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사바나가 울창해진다. 여러 종류의 원숭이와 영양이 혹돼지·사자·표범·하이에나·들개 들과 함께 서식한다. 하천에서는 악어·하마와 함께 여러 종류의 거북이 발견된다. 삼림이 전체면적의 약 31%를 차지하고 국토의 약 27%가 가경지이며, 약 30%는 목초지  또는 가축방목지로 이용된다. 인산염과  철광도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세네갈은 포르투갈에 의해 유럽에 최초로 알려진 서아프리카의 관문에 위치한 나라. 일반적으로 대가족주의이며 혈연과 우인관계를 중시한다. 국립공원 7곳을 비롯  파리 - 다카르 랠리로 유명한 수도인 다카르 노예를 실어가던 고레섬 등이 볼만한 곳이다.



국민

세네갈에는  7대  인종집단인  월로프족·세레르족·풀라니족(페울족)·투쿨로르족·디올라족·말링케족·소닌케족과 그밖의 많은 소수집단이 있다. 7대 인종집단은 각각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며, 가나·말리·송가이 등의 과거 서부 수단의 제국들이  있던 사헬과 사바나 지역들에 자리잡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도가 90% 이상으로 가장 많다.

인구의 47%가 15세 미만으로 평균연령이 낮다. 출생률과 사망률은 여전히 높으며, 전체인구의 3/5이 농촌지역에 거주한다


경제

세네갈은 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이다. 독립 이후 이룩한 경제성장은 경제를 심각하게 후퇴시킬 수 있는 가뭄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중단된다. 국민총생산(GNP)의 증가율은 인구증가율과 비슷하며, 1인당 GNP는 비교적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1/4을 차지하지만, 이에 종사하는 인구는 전체노동인구의 3/4이나 된다. 그중에서도 땅콩은 가장 중요한 환금·수출 작물로 전체경작면적의 약 2/5를 차지하고 있어 본질적으로 단일재배농업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식량작물은 기장과 수수이며, 다량의 쌀이 수입된다. 정부는 땅콩에 대한 국가경제의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작물의 다양화와 목화·쌀·사탕수수 및 시장용 원예작물의 생산 확대에 힘쓰고 있다.

상업적 어업이 급성장하여 수산물  수출이 총수출고의 약 1/10을  차지한다. 인산염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광업도 확대되고 있다. 카자망스 지방의 근해에는 상당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 제조업 부문은 GDP의 거의 1/4을 차지하고 노동인구의 약 1/10을 고용하며, 프랑스어권의 서아프리카에서 코트디부아르 다음으로 가장 발달해 있다. 땅콩기름 추출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며, 섬유공업이 그 뒤를 잇는다. 그밖의 국내기업들이 청량음료·정당(精糖)·유제품·궐련·생선통조림(주로 참치) 등을  생산한다. 서비스업·상업·운송업은  GDP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수도인 다카르는  철도망의 종착역이자 서아프리카의  중요한 항구이기도 하다. 세네갈의 도로사정은 대체로 양호한 편이며 계속 확충되고 있다. 관광업은 중요한  외화소득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경제발전은 주로 외국 원조에 의존하는데, 처음부터  프랑스가 원조의 대부분을 맡고 있다. 가뭄으로 인한 농산물 수출파동은  광물과 수산물의 수출로 벌어들이는 보다 높은 소득으로 어느 정도 상쇄되지만, 무역적자폭은 여전히 크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프랑스·나이지리아·코트디부아르·미국·일본 등이다.


정치·사회

세네갈은 사회주의를 기본원칙으로 하여 의회민주제도 위에 건설된 공화국이다. 1983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헌법은 1963년 처음 제정된 헌법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행정부의 수반은 5년을 임기로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대통령이 맡는다. 대통령은 장관들을 임명하여 각료회의를 구성하고 그 의장직을 맡으며, 국군 총사령관직을 겸한다. 이 나라의 입법기관은 120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는 국회이며, 의원들은 5년 임기로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가장 중요한 정당은 세네갈 사회당으로 1958년 창당되었는데,  창당 당시에는 세네갈 진보연합으로 알려졌다. 이 당은 독립 당시부터 1980년말까지 세네갈의  대통령을 역임한 레오폴드 상고르의 지휘하에 결성되었다. 그후 헌법개정으로 정당결성에  관한 일체의 제약이 철폐되어 1980년대 중반에는 정당이 10여 개에 달했다.

1982년 세네감비아 연방이 탄생했으며, 두 가맹국인 세네갈과 감비아는 각각 주권을 유지하면서 국방·외교·통화에서 공동정책을  채택했다. 교육은 6∼12세 에  의무제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학교에 다니는 아동은  전체의 약 40%에 불과하다. 중등학교에서는 국가발전에 필요한 직업교육을 실시한다. 다카르에는 종합대학교가 있다. 국민 보건 상태는 일반적으로 농촌지역이 도시지역보다 훨씬 낙후되어 있으며, 이 나라 전체 의사 가운데 약 70%가 다카르에  있다. 평균 기대수명은 남자 44세, 여자 47세이다.


문화

문화유산은 주로 구전되고 있으며, 일종의  음유시인인 '그리오트'가 전사의 무용담을  담은 시를 낭송한다. 시인이자 전직 대통령인 레오폴드 상고르는 네그리튀드(Negritude)로 알려진 20세기의 문학운동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역사

세네갈의 주민들과 북아프리카 주민들 사이의 유대는  10세기에 확립되었고, 이어서 11세기에는 투쿨로르족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투쿨로르족은 18세기까지 계속 애니미스트 집단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애니미즘은 19세기말까지도 세네갈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포르투갈인은 1444년 카보베르데를 일주하고 이듬해에는 세네갈의 해안지방을 탐험했다. 1638년 프랑스인이 세네갈 강의 하구에 교역소를  설치하고, 1659년 생루이를 건설했다. 고레  섬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잇따라 점령했고, 1677년 프랑스가 자국령으로 선포했다. 노예, 아라비아 고무, 상아, 황금이 세네갈로부터 유럽인들에 의해 17, 18세기에 계속 반출되었다.

세네갈의 해안지방에 대한 지배권은 1693∼1814년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자주 바뀌었다. 1814년의 파리 조약에 의해 프랑스에 양도된 생루이와 고레 섬은 1817년 프랑스가 재점령했다. 1848년에는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프랑스는 내륙으로 세력을 넓혀갔으며, 프랑스군 사령관 루이 레옹 패데르브(1818∼89)는 투쿨로르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고 세네갈 식민지 제도의 기초를 수립했다. 세네갈의 도시민들 가운데 일부는 19세기에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다. 1895년 세네갈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일부가 되었고, 1902년 다카르 시는 그  수도가 되면서부터 급성장했다. 1946년 세네갈의 모든 주민은 프랑스 시민이 되었으며, 이 식민지는 프랑스의 해외 준주(準州)가 되었다. 1958년 프랑스 공동체  내의 자치공화국이 되었고, 1959∼60년 말리와 연방을 결성했다. 1960년 독립공화국으로 승인되었으며, 독립운동을  지도한 상고르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상고르는 1981년  1월 대통령직을 전 국무총리 아브두 디우프에게 인계했으며, 1963년 실시된 정당활동 제한조치는 해제되었다.  디우프는 1983, 1988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 세네갈은 1962년 10월에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고,  1973년 5월에 상주공관을 개설했다.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의 세네갈  방문과 1984년 세네갈의 디우프  대통령의 방한으로 양국관계는 더욱 긴밀해졌으며 각 분야에서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한국은 세네갈의 농업연수생을 초청해 훈련시키고 여러  차례 무상원조를 제공하는 등  기술교류와 경제협력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앞으로 선린우호 관계는 더욱 다져질 것이며, 민간차원에서의 경제협력도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두 나라의 교역상황은  1991년 11월 기준 대한수입이 776만 달러이고 대한수출이 157만 달러이다.  수입품은 섬유·시멘트이며 수출품은 인산염이 주종을 이룬다. 1991년 현재 이곳에는 소수의 교민을 포함해 305명에 이르는 한국인 체류자가 있다. 한편 세네갈은 1972년 9월 북한과 수교하고  같은 해 11월 상주공관을 개설한 이래 한때 친북한 경향을 띠기도 했으나, 친서방적인  외교노선을 추구하는 정부가 들어선 이후 그리 활발한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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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코뜨디부아르

2003. 2. 3. 13:01
<위 치>

서부아프리카 대륙의 대서양에 연안에 위도  북위 5도 -10도 위치하여 남쪽으로는 기니만에 접하고 있고(해안선 길이 500km)  서쪽으로는 라이베리아(580km), 기니(610km)와 동쪽으로는   가나(670km)와 북쪽으로는   말리(370km), 부르키나파소(400km)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면 적> 전체 면적은322,000 KM 로 한반도의 크기의 약1.4배에 달하고 있다.


<지 형>

국토는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갈수록 지세가 높아지는 남저북고형  지형으로 북서부  기니와의  국경  산악지역에 코트디브와르  가장 높은 1,752M의 NIMA산이 있다.CAVALLY, SASSANDRA, BANDAMA,  KOMOE 등 4개의 강이 국토를 4등분하면서 모두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남쪽 해안 지역의 경우 바닷물이 육지에 막혀 형성된 거대한 LAGUNE이 곳곳에 발달해 있다.남부지역은 고온 다습한 기후로 다양한 삼림으로 덮혀 있으나 북부지역은 사바나지역 특성을  나타낸다.


<토지이용실태>

코트디브와르는 전통적인 농업국으로 토지를 주로 코코아, 커피, 팜오일, 파인애플 등 농산물 생산에  이용하고 있다. 주요 농작물별  재배면적을 보면 코코아의경우 160만 헥타, 커피 130만헥타, 고무 6만 헥타, 팜오일 17만 헥타, 면화 21만헥타, 바나나 및 파인애플  2만 헥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농작물 경작지로 활용하는  면적은 전채 국토면적의  약 9%  수준이다. 이외 주요 이용실태를 보면 목축 13%, 산림 26%, 기타 52%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부존자원>광물 등 부존자원은 주로 산악지역인 중서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최근까지알려진 주요 부존자원 매장량을 보면 금  15톤, 니켈 250백만톤, 보크사이트 650백만톤, 철 50-700백만톤, 망간 270만톤 등이다.석유의 경우 53,000평방킬로미터의  해저 유전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생산규모는일일 2만 배럴이며  가스도 일부 생산되고 있다.


<자연경관>

코트디브와르의 국토는 북서부 지역의 산악지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 평지로되어  있다. 남부 지역의 경우 열대 우림기후로  인한 두터운 숲이 발달하고 있으나 북으로 올라 갈수록 기후가 건조해져 북부지역의 경우 사바나  기후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파인애플, 팜오일  등 열대 농산물 재배를  위한 대규모 농장(플란테이션)이 도처에 발달하여 있다.


<인구>

전체 인구는 15,300천명(97)으로 이중 인근국에서 유입된 인구는약 400만명(브르키나 100만명, 말리 100만명, 기네  100만명, 니제르 50만명,기타50만명)으로 보고 있다. 주요  도시별 인구를  보면 수도  아비쟌 3,200천명,  BOUAKE  590천명,MAN-DANANE 390천명, DALOA 470천명, YAMOUSSOUKRO 370천명 등이다.인구성장율은 3.8%(97)이고 인구밀도는 47명/KM2이다.  남녀비율은 51:49로 남자가 많고 연령별 인구구성은 15세 이하  48.2%, 15-49세 41.1%등으나 나타나고 있다. 평균수명은 남자 50세, 여자 52세이다.인구분포는 도시 44%, 농촌 56%로 나타나고 있다.


<종족>

BAOULE(23%), BETE(20%), SENOUFOS(14.7%), AGNI(10.7%), MALINKE(6.5%), EBRIE,GOURO, KOULANGO 등 60여  종족이 있으며 각 종족간 특별한 대립관계 없으며 대부분 유순한 편이다.


<언어>

공용어 및 상용어로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종족내 사용되는 60여개의 지방 방언이 있다. 인근 영어권인 가나, 라이베리아인들이 아비쟌에 많이 거주하고있어 잡일 등 필요시 영어구사 인력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종교>

종교 분포를 보면 회교 38%, 기독교 27%, 토속신앙 30% 등으로 회교  및 기독교간특별한 대립관계 없으며 비교적 융합 및 협력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국민성>

흑인 특유의 다혈질 기질이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순박하고  친절하다.가족관 또는 자녀와의 관계는 동양적 사고방식과  유사한 점이 많으며 노인을 존경하고 친척간 상호 도와주는 것이 거의  의무화되어 있어 집안에 출세한 사람이있으면 친척들을 많이 등용 또는 재정적 지원을  해주고 있다. 반면 힘이 들거나어려운 일을 기피하는 성향이 있어 일을 수행함에 있어 추진능력 및 창의성 발휘가 부족하고 기술  또는  상술이 인근 가나, 세네갈인에  비하여  현저히 떨어지고있다. 현지인의 대부분은 사무직 또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문화수준>

국가  전체적인 문화수준을 매우 낮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전기 보급율을 보면 주요  도시의 경우 약 60% 정도이고 시골의 경우 극히 일부 지역에만 전기가  공급되고 있다.TV 방송의 경우 국영방송(RTI) 1개사에서 2개 채널을 방송하고 있으나 수신 가능지역은 대부분이  도시 지역에   국한되고 있다. 라디오  방송의  경우 국영방송(RADIO COTE D'IVOIRE)외 50여개의 사설 지역 방송이 있어 아직 라디오 의존도가높은  수준이다.


<보건수준>

각종 세균 및 기생충 관련 질환발생이 많은 지리적 위치 및 기후여건, 낮은 교육수준 및 보건관련 인식  부족, 낮은 소득 수준에 따른 의료시설 미비 등으로 그동안 높은 사망률(1,000명당 15.7명, 유아사망율: 1,000명당 82.4명), 50세 전후의낮은 평균수명 등 낮은  의료수준을 나타내었으나 점차 개선되고 있다. 지난 1957년에  전국적으로 150개소에 불과하였던 의료시설의   경우1980년 700개소, 1994년1,500개소 등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에이즈 예방을 위한 일회용 주사기 사용 홍보 효과 등으로 최근 들어서는 대부분의 병원에서1회용 주사기를 사용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나  도시의 일부 대학병원  또는 사설병원을 제외하 아직까지 전반적인 의료설비 및  진료서비스 수준이 낮은 상태이다. 현재  국가 및 사설 의료보험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국가의료보험은 공무원에 한해 수혜를 주고 있으며 사설 의료보험제도는 비용문제로 일부 사람들만이활용하고 있다.



역사

<고대>

코트디브와르의 고대 역사는 현재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부 발견된 유물들로 미루어 구석기 시대부터 현 지역에 사람이  살았을 것 추정하고 있다. 고대에 이 지역 거주한 사람들은 여러 종족이었으나 대부분이 북아프리카로부터 내려와서 남쪽으로  이주해 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세>

현 주요 종족 역사는   11세기에부터 이다. 이 시기에 BONDOUKOU 지역에 LORHO족거주하고  있었으나 이후 HAUT  VOLTA(현 부르키나파소)로부터 이 지역에 KOULANGO족이 유입하여 12세기에  BOUNA왕국을 건설하였고  동 시기에 말리로부터 SENOUFO족이 내려와 북서부지역에 KONG도시를 건설하였다. 이후 16세기에 가나 지역으로부터 AKAN, ABRON 족이 내려와 BONDOUKOU 지역에 정착하였으며 이어 비슷한 시기에 BAOULE, AGNI 등 주요 종족들이 들어와 중부, 남서부 등  지역에 정착하였다.

<근대>

17세기부터 프랑스인들이   유럽인들로는 처음으로   진출을 시작되었고 1893년 프랑스 식민지가 된 이후 1904년 모리타니아, 세네갈, 기니, 말리, 니제르, 베넹, 부르키나파소 등 함께 프랑스령 서부 아프리카 연방을 형성하였고 1934년 아비잔을경제  수도로 건설하였다.

<현대>

1960년 프랑스로   부터 독립하였다.   독립후 FELIX    HOUPHOUET BOIGNY가 현 코트디브와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989년 7선까지 당선되었으나 1993년 갑작스런 서거로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HENRY  KONAN BEDIE 가 대통령직을 승계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치동향>

2000년 10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력 야당 후보자 출마 자격여부가 현재 중요정치 이슈가 되고 있다.차기 대통령 후부 자격여부가 문제가  되고 있는 인물은 현  유력 야당의 하나인공화당(RDR) 당수인 MR  ALASSANE DRAMANE  OUATTARA 로서 동인은  전 HOUPHOUETBOIGNY 대통령 시절부터 현대통령(KONAN BEDIE)과  정치적으로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1993년 전 HOUPHOUET BOIGNY 대통령  서거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코난 베디에가 대통령을 승계하였고 국무총리였던 와따라는  IMF 부총재로  코트디브와르를떠났었다. 현정부는 지난해 대통령선거 관련법을 개정, 대통령 후부는 양친이  코트디브와르인이고 10년 이상 국내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을 명문화하였다.  이와 관련  금년IMF 총재를 사임하고 공화당 당수로 취임한 와따라에 대해 현정부 및 여당에서는동인의 양친중 아버지의 국적을 코트디브와르인이 아닌 인근 부르키나파소인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공화당측은 이러한 여당 입장을 수긍하지 않고 항의 시위를 벌이는 등 양측의 입장이 맞서고 있다.  따라서 와따라의 대통령 후보 출마자격 취득 여부가 현재 가장 큰 정치 이슈로 되고 있다.<사회동향>최근 부각되고 있는  주요 사회문제로서는 교육과 국민보건문제라 할 수 있다.

교육문제의 경우 정부에서는 높은 40%가 넘는 문맹율  퇴치 등을 위해 국립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무료로 하고 있으나 학교시설 부족, 부모들의  교육 필요성에 대한 인식부족  등으로 초등학교  취학율이 70%에  그치고 있다.  이에  정부에서는2010년까지 초등학교 취학율을 80%까지 끌어 올리기  위해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과 아프리카개발은행 등 국제 금융기관 등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국민 보건문제의 경우 그동안  정부의 시속적인  노력으로 지난 1957년에 150개소에 불과하였던 의료시설이  1994년 1,500개소 등으로  증가하고 정부와의 계약을통한 프랑스 및 스페인의 일부 제약회사들의 저렴한 약품 공급 등 의료 서비스가크게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의료시설 등  증가율은 현지의 높은 인구증가율(출생, 유입)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상당수의 일반 서민들은  비용 등 문제로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국가 전체적으로는 의료  시설 등  서비스는크게 부족한 수준이다.


<외교노선>

비동맹중립을 표방하며,외국과는 대화를 통한 협력강화 모색 친서방적이다. 프랑스와는 절대적인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미국, 일본, 중국등과도 밀접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웃 인접국과는 특별한 선린정책을추구하고 있다.주요 외교정책 추이를 보면 지난 85년 10월 HOUPHOUET-BOIGNY  대통령은 코트디부아르의 주권을 존중하는 모든 국가와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이에따라86년에 소련과 국교관계를 수립하였고 (중국과는 83년에 이미 국교관계를 수립하였음) 이후 체코, 헝가리, 북한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특히 이스라엘과도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인근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를 보면 서부아프리카제국의 정치적 지도국으로서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남아공화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국제기구가입>

UN,  OAU, AFDB, CEAO, UEMOA, ENTENTE,  ECOWAS, LOME협정, OCAM 등에 가입하고있다.


<지역 협력체 참여 정도>

(서부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1975년 영어권에서는 나이지리아, 불어권에서는 코트디브와르를 주축으로 16개국으로 구성 창설하였다. 역내 단일관세제도 추진,상호  교역상품 관세 철폐,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 상호 산업경쟁력 강화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역내 국가들의 제조업 기반  취약, 수출상품의 유사성, 정치사회 불안등으로  큰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본부는 나이지리아 라고스에 두었으나 '95. 7월  나이지리아 행정수도 아부자로 이전하였다.96.7.25-7.27 제19회 ECOWAS 정상회담을  나이지리아 아부자에서 개최하여 ECOWAS제2회 TRADE FAIR 개최(99.2.26-3.2 가나 수도 아크라), 역내국간 각종 경제통계집계 기능 강화등을 협의하였고 97. 3월 회원국에 대한 농업부문 차관 공여를 개시하여 운하, 호수 강등의 내륙운송수단 향상, 지역 기상청  설치, 농업개발 프로그램개발 및 교환시스템 구축 등을 추진하였다.(서부아프리카  경제통화 연합:UEMOA)코트디브와르, 베넹, 니제르, 세네갈, 브르키나파소,  모리타니아, 말리, 기니비소  등 서부아프리카 세파프랑권 8개국간 경제 협력  강화를 위한 경제 통화 연합체로서 1995.1.30일 브르키나파소 수도 와가두구에서 정식으로 운영위원 활동 개시하여  공동통화 정책 시행, 역내국간 관세부과  철폐, 단일 관세제도 도입 등 추진 추진하고 있다.

특히  '96.1.15 제 2차 UEMOA 각료회의  개최하여 역내국 교역상품에 대한 특혜관세 실시 협의, 특혜관세율은 각종 관세의 50% 수준 등 역내국 경제통합 행동기준마련 등을 협의하였다.그리고 96.5.10-5.13일간 UEMOA 7개국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98년 1월까지 1차산품 및 수공예품 상호 면세제도  도입, 96년 7월부터 회원국간  공산품 관세 30 %인하,  98년 1월부터 UEMOA CUSTOMS UNION  운영 등에 합의하고 98.3월 UEMOA는 위원수를 40명(각 회원국별 5명)으로 하고 말리 수도  바마코에 본부를 두는 연합의회 위원회(CONITE  INTERPARLEMENT DE L'UEMOA)와 회원국내 분쟁 조정 화해 등 재판관련 업무수행을 위한 8명의 재판관(회원국  각  1명)으로 구성하는 UEMOA 재판소(LA COUR DE JUSTICE DE L'UEMOA) 등을 설치하였다.(아프리카 공업화연맹)96.10.21-10.24일간 아프리카 5개국 정상 및 33명의 공업장관 참가 아비쟌에서 "아프리카 공업화연맹"을 발족하였다.  동연맹은 아프리카 상호국간   공업화 추진협조를 목적으로 하고 사무국은 아비쟌 UNIDO  사무소에 설치하고 97년도 각료회의는 가나 수도 아크라에서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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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가나

2003. 2. 3. 12:55


(1) 인구와 언어


적도의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가나는 한반도 전체 크기와 비슷하며 인구는 약2천만 가량됩니다. 한국의 도처럼 10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행정구역에100만에서 200만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한국보다 산지가 적은편이고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인 볼타호가 넓은 면적에 걸쳐있습니다.  


북부지방-이슬람문화권

중서부는 열대우림지역으로 가나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아칸족의 중심지이고 농업이 주산업입니다.


가나의 공용어 - 영어, 현지언어는 100여가지로 그중 아칸어인 Twi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2) 정 치


영국으로부터 1957년에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독립을 한 나라로서 자부심이 많이 있습니다. 초대 대통령인 응크르마박사는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는데 판아프리카론을 주창하여 다른 나라의 독립에 많은 영향을 키친 바 있고 현재 가나에 있는 대규모 사업인 수력발전소, Tema항 건설, 알루미늄제련소, 도로등은 다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현대통령은 1970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며 한번 민정이양후 물러났다가 다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래 군사정권으로 있다 1992년에 다당제 선거를 통해 민선으로 당선되었으며 지난 96년 12월에 있은 두번째 선거에서 승리하여 재임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는 상황이며 과거 군사정권당시 사회주의 체제였다가 90년대 동구권의 몰락후 자본주의로 전환하여 세계은행의 도움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3) 국 민 성


가나인들은 비교적 착하고 친절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가볍게 눈이나 손짓으로인사를 건낼 수 있습니다. 가나인 스스로도 다른 아프리카 지역보다 친절하고 치안이 나아서 살기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도나 테마같은 항구도시는 여러 곳의 사람들이 모여 시골보다는 순수하지 않으며 범죄도 많아서 외국인들은 밤에는 다니지 않습니다.

가나는 한국보다 가난하지만 주5일 근무하며  한국처럼 열심히 할 것도 없고 기후상 그렇게 일할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일을 해도 무리하게 일하는 것을 별로 볼 수 없으며 한편은 삶이 여유있어 보이고 한편은 가난합니다.



(4) 경 제


연간 일인당 국민소득이 450불로 서부아프리카에서는 모범적으로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인플레가 심하며 아직은 극소수는 부유한 반면 직장이 없어 쉬고 있어 일자리를 얻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도시에서는 중산층이 거의 없고 빈부차이가 극과극이라 부자는 땅과 집과 여러 대의 자동차를 가지고 있고 가난한 사람은 그 밑에 고용되어 아주 싼 노동댓가를 받으며 일하는 형편입니다.  국민의 대부분이 농부와 어부인데 90%가 농업 및 목축업, 4%가 어업, 3%가 광업등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이차산업은 잘 발달되어 있지 않고 대부분외국기업의 현지공장입니다. 최근들어 공장에 투자가 되고 있지만 아직 외국자본에 의존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공산품은 수입품입니다. 주요 수출품은 코코아, 금, 다이아몬드, 목재이고 이중 금은 옛날부터 황금해안으로 불리울 정도로 유명하며 지금도 주요 산업중의 하나입니다.




(5) 종교


개신교가 28%, 카톨릭이 19%, 회교가 16%이며 아프리카 정령숭배가 20%입니다. 기독교는 남쪽 지역에서, 그리고 도시에서 더 강합니다. 수도에서 가까운 지역은 아주 작은 마을에도 무엇으로든 만든 작은 교회가 있습니다.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교회는 좀더 드문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역자가 부족한 것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이들은 몹시 가난하여 평소에 누렇고 시커멓고 헤어진 옷을 입다가도 주일이 되면 가장 화려하고 좋은 옷을 차려입고 교회를 갑니다. 예배시간에도 모두들 찬양하며 천천히 줄지어 나오며 춤을 춥니다.  모슬렘은 북쪽지방에 강하며 대개 부족 전체가 모슬렘이며 개종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최근에 정부에서 모슬렘에 대해 유화정책을 펴고 있으므로 올해 그들의 하지 축제가 공휴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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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넹

2003. 2. 3. 12:53
수도 : 포르토노보

인구 : 약 590만명

면적 : 112,620㎢(한반도의 1/2)

주요도시 : Abomey(6만명), Parakou(12천명)

주요민족 : Fon, Yoruba, Adja 등 40여 종족

주요언어 : 불어(공용어) 및 토착어

종교 : 원시종교(65%), 회교(15%), 카톨릭(15%)


   위치
베냉은 아프리카 서부의 국가이다. 베냉만에서 북쪽 내륙 지대로 약 675㎞ 파고 들어간 길고 좁은 형상을 하고 있으며 남쪽끝 대서양으로부터 북쪽 끝 나이저 강까지 뻗어 있다. 서쪽은 토고, 북서쪽은 부르키나파소, 북동쪽은 나이저강, 동쪽은 나이지리아와 접하고 있다.



지세
동서 최대 길이가 320㎞ 정도이고 남쪽 해안선 길이는 121㎞에 지나지 않는다. 면적은 112,620㎢ (한반도의 1/2)이며 인구는 1994년 현재 5,314,710 명이다. 지형적으로 남에서 북으로 크게 5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① 해안 지대는 모래가 많고 평평한 저지대로 조석(潮汐)에 따른 습지와 석호(潟湖)가 발달해 있다.

② 해안 지대 바로 북쪽에 펼쳐진 바르 지대는 홍토(紅土)로 이루어진 비옥한 고지대다. 라마 늪지대로 알려진 광대한 함몰지를 포함하고 있다.

③ 베냉 중남부에 위치한 베냉 고지대는 수정 지반 위에 점토가 쌓여 형성된 지대로, 높이가 해발 90∼230m에 이른다.

④ 북서부의 아타코라 산맥은 남쪽 토고산맥의 연장으로 최정상의 높이가 641m 이다.

⑤ 북동부에 있는 나이저 평원은 나이저강 유역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점토질 사암지대이다. 베냉에서 가장 긴 우에매강은 남쪽으로 흘러 포르트노보(Porto- Novo) 석호로 흘러드는데 총길이 450㎞ 중 서 200㎞정도는 항해 가 가능하다.



기후
해안 지대는 적도기후 지역으로 기온이 22∼34℃로 거의 일정하다. 남부지역은 두번의 우기가 있고(3∼7월, 9월하순∼11월), 그 사이에 두번의 건기가 있다. 북부지역에서는 5∼9월까지 우기가 지속되며 그 나머지는 건기이다. 북부는 최고 기온이 46℃에 달한다. 연평균 강우량은 남부지방이 760∼1,270㎜이며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적어진다.

종교
베냉의 종교는 원시 토착신앙(68%), 가톨릭(14%), 신교(3%), 회교(15%)로 다양한 편이다. 가톨릭교가 맨 처음 베냉에 들어온 것은 17세기이며 본격적으로 포교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그리고 프랑스가 지 하면서 가톨릭교는 남부의 주민 사이에 보급되었으며 미션스쿨 등을 통해서 이 나라 교육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현재 가톨릭 미션스쿨은 전국에 약 200여개가 있고 신자는 약 20만 정도로 특히 지식 계급 사이에 큰 세력을 가지고 있다.



언어
언어는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으며 그 밖의 토속어가 있다. 그러나 현재의 추세로 보아 가장 널리 쓰이는 폰어가 국어의 기능을 한다. 문맹률 은 약 80% 정도이다.



인구
인구는 1994년 기준으로 5,341,710명 정도이다. 폰(Fon)족 계통의 부족이 전체 인구의 3/5 이상을 차지하며 그 대부분은 남부지역에 거주한다. 베냉 동부에 사는 요루바족은 전체 인구의 1/10을 차지한다.

볼타어를 쓰는 솜바족과 바리바족 등은 전체 인구의 1/5 정도로 주로 베냉 북부에 살고 있다. 유목 또는 반유목 생활을 하는 풀라니족은 반사막지역에 거주한다. 공용어는 프랑스어이지만 현재의 추세로 보아 가장 널리 쓰이는 폰어가 국어의 기능을 한다.

전체 인구의 2/3가 아직 아프리카 토착 신앙을 믿고 있으며 이슬람교는 북부와 남동부 지역에 많은 교인을 확보하고 있는데 이들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 교도가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한다. 전체 인구의 절반 가량이 15세 이하이다. 구 분포 또한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어 전국토의 1/3을 차지하는 남부지역에 전체 인구의 약 2/3가 살고 있다. 반면 북부의 일부 지역에는 풀라니 유목민들만이 살고 있다. 도시 거주 인구는 총인구의 1/5에 지나지 않는다.

연간 인구증가율은 94년을 기준으로 3.3%로 아프리카 서부 국가의 평균 인구증가율을 웃돌 정도로 상당히 높아 정부는 인구증가율의 둔화 와 인구의 균형분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코토누는 베냉의 상업 및 정치활동 중심지로 유럽인이 건설한 현대화된 도시이며 수도인 포르토노보는 아프리카인이 세운 도시로 아프리카풍의 요소 와 유럽풍의 요소가 뒤섞여 있다.



민족
베냉은 전체 인구중 폰족 66%, 바리바족 10%, 요루바족 9%, 솜바족 5%, 플라니족 4%, 그 외의 토착부족이 6%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인구의 3/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폰족은 12∼13세기 무렵에 베냉 역사상 최초의 왕국을 남부에 세웠던 부족이다. 모노(Mono)강과 쿠포(Couffo)강 유역에 살고 있다. 요루바족은 베냉 동부지역에 살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1/10을 차지한다. 볼타어 쓰는 솜바족과 바리바족 등은 전체 인구의 1/5 정도로 주로 베냉 북부에 살고 있으며, 유목 또는 반유목 생활을 하는 풀라니족은 반사막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역사
베냉 북부에 사는 부족들의 역사는 아직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남부의 다호메족, 그리고 폰족은 1625년에 아보메 왕국을 세웠다. 아보메 왕국 최초의 강력한 지배자인 웨그바자(1645∼1685 경)는 이웃에 있는 약소국의 왕 당(Dan)을 공격하여 정복했다. 당 왕의 시체는 당시 웨그바자가 건설 중이던 궁전 주춧돌 위에 버려졌고, 그 이후 이곳은 다호메(Dahomey : '당의 배 위'라는 뜻)라고 불리게 되었다. 웨그바자의 아들인 아가자 왕(1708∼1732)은 마침내 알라다와 우이다를 정복했는데, 그곳에는 17세기에 인도 회사(Compagine des Indes)가 세운 프랑스 요새들이 있었다.

다호메 왕국은 개조왕 재임 기간(1818∼1858)에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노예를 획득하기 위하여 나이지리아의 요루바족과 수차례 전쟁을 치렀다. 1857년 프랑스는 그랑포포에 진주했다. 1878년 다호메의 베한진은 코토누(Cotonou)를 프랑스에 할양하는 것을 거부 1892∼94년까지 계속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베한진은 1894년 1월 프랑스에 항복했고, 다호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1904년 다호메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연방에 통합되 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다호메 주둔 프랑스군은 독일령인 토골란드 정복에 참여하였고 1914년에 마침내 토골란드를 정복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다호메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일부로서 연합국의 대의를 따랐다. 1959년 다호메는 프랑스 공동체의 한 자치국이 되었다. 1960년 8월 1일 프랑스에서 독립하였고 같은 해에 새 헌법을 채택했다. 5차례의 군사 정권 수립 및 2차례의 헌정변화를 포함하여 총 11번의 정권 교체를 거친 끝에 1972년 마티외 케레쿠(Mathieu Kerekou) 소령이 정권을 잡고 74년 11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선언하였다. 1975년 12월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서 막스주의를 표방하는 베냉인민혁명당(PRPB)을 결성하고 국가명을 다호메에서 베냉 인민공화국(Peoplee's Republic of Benin)으로 변경 였다. 1980년 2월 의회는 케레크 의장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민정에 이양하였다. 이후 1989년 6월 의회선거에서도 PRPB 추천 후보 전원이 당선되었고 의회는 8월 케레크 대통령을 3선으로 선출하였다.

베냉은 1974∼1989년까지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고수하였으나 경제적인 문제가 극심하고 또, 1989년 동유럽 민주화 추세에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1990년 2월 각계 대표가 참가하는 국민대표자회의가 개최되어 헌법 개정을 결정하였으며 소글로를 수상으로 선출하였다. 12월 국민투표에서 국명을 베냉공화국(Republic of Benin)으로 개칭하고 복수정당제, 3권 분립을 포함한 신헌법안이 승인되었다. 1991년 2월 복수정당제 도입후 처음으로 총선거를 실시하였으며, 3월 대통령 선거에서 소글로가 결선 투표에서 케레크 대통령에게 승리하여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소글로 대통령은 7월 신내각을 발족시킴과 동시에 수상제를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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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니제르

2003. 2. 3. 12:52

국가상징

1. 국기(國旗)
니제르의 국기는 수평으로 3등분화 되어진 등(橙),  백, 녹의 3색기(중앙부에 환인<丸印>)로 등은 사하라 사막, 백은  사헬지역, 녹은 니제르천유역을 상징하며 국기의 중앙부에 있는 등색의 환인은 태양을 의미한다.

2. 국장(國章)
국장은 방패와 방패의 양측에 있는 국기로부터  구성되어져 있어 방패의 가운데에는 금색의 광선을 발하는 태양이 그려져  태양의 왼쪽 상단에는 2개의 검과 창이, 또 오른쪽 상단에는 속(粟)의 수선(穗先) 3개가 각각 그려져 있다. 또 태양 하단에는 물소의 머리가 그려져 있다. 방패의 양측에는 니제르의 국가가 2기(旗)씩 장식되어 있다.  또한 검과 창은 역사와 문화를, 속의 수선은 농업을, 물소의  머리는 목축을 의미한다.

3. 국명
니제르 공화국(Republic of Niger)

4. 수도
니아메(Niamey )로 인구는 약 40만 명이다


인구/인종/민족

1. 인구
1994년 총인구는 약 890만 명이며 1㎢ 당  평균 인구밀도는 6.8명이다. 인구증가율은 유아사망률이 높음에도 불과하고 약 2.8%(80∼84)로 매우 높은 편이다. 인구구성은 연령별로 피라미드형으로 20세 이하가 국민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니제르 북부는 기복(起伏)이 많은 사막지대(사하라 사막)에 있어서 전인구의 90% 가까이가 남부  일대에 집중해서 살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면 북부지방에는 유목민이  살고, 또 남부지역에는 정착 농민과 풀족 등의 반농반목민이 많이 살고 있다.

2. 인종 및 종족
인구의 50.4%를  하우사족, 제르마  및  송가이족 23.0%,  투아레그족 10.6%, 풀라니 족 2.6%을 차지하고 있다. 하우사족, 제르마족 등은 주로 남부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풀라니 족, 투아  레족은  유목 또는 목축민족으로 북부에 주로 거주한다.

Haoussa족은 전인구의 반수 가까이를 포함하는, 이  나라에서 최고 유력한 종족이며 니제르의 중앙부에서  남부에 걸쳐 많이 살고  있다. 이 종족에 부속하는 부족은 대부분 7개  정도 있지만 많으나 적으나 흑인과 베르베르, 풀, 또는  아랍 족과의 혼혈이다. 또 이  나라의 상인에는 이 종족 출신자가 많다. Songhai-Djerma족은 그 수가  약 100만 명으로 추정 되고 니제르의 서부에 많이 산다. 그들의 선조는 그 옛날 2회에 걸쳐 번영을 자랑한 선가이 왕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하우사족도 같은 정주(定住) 농경민이다.

Peul족은 서아프리카에서 상당히 광범위 한 지역에  걸쳐서 살고 있는 종족으로 니제르에는 약 60만인이 살고 있다고  추정된다. 정착해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자도 있지만 그들 다수는 남부 사헬지방에 살고 유목민으로 소를 재산의 상징으로 여겨 소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Touareg족은 그 수 약 50만인으로 북부지방에 많이 살며 옛날에는 용맹한 전사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Kanury족은 남동부에서  차드호에 걸쳐 많이 살고 있는  농경민이며, 그 수는  약 33만인이라  추정되고 있다. Toubou족은 차드국경을 따라, 또한 북부에 살고 있는 유목민이다.


니제르의 하우자(Hausa)족

인구 : 3,781,870명 (1991년) -니제르의 가장 큰 종족집단 이다.
언어 : 하우자 어를 주로 사용한다. 하우자 어는 사하라 남부지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이다. 이 하우자아에는 소코노와 카노의 두 가지 방언이 있다.  
위치 :  하우자족은 니제르의  남부지방에 두루 분포한다.  이곳은 나이제리아와의 접경 지대이다. 단, 극서(極西)지방에는 분포하지 않는다.
경제 : 이들의  전통적인 직업은 농업이고  현재도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최근에는 상업, 노동, 가축 도살 등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의 농업생산물은 땅콩, 면, 쌀, 기장, 동부  등이다. 이들은 주변의 모든 종족뿐만  아니라 북부와 서부 아프리카의 많은 종족들을 주요 교역 대상으로 삼고 있다.
종교: 하우자족의 대부분은 무슬림이다. 이슬람은 16세기에 이 종족에 들어왔는데 19세기 초에  이미 대부분의 하우자인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였다. 무슬림 외에는 전통적인 애니미즘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소수 있다.

니제르의 마오리(Maouri)족
인구 : 350,000명 (1992년 ; 니제르의 다수종족으로서 전체 인구의 약50%을 차지한다.
언어 : 하우자어를 사용한다.
위치 : 이들은 니제르의 남서부 지방에 주로 거주한다.
경제 : 농업이 이들의 주업으로 기장을 주로 재배하고 동부도 많이 경작한다. 여성들은 밤바라 땅콩을 재배한다. 건기 동안에는 소규모의 상업활동으로 부수적인 수입을 얻는다. 다른 지방으로 이주한 사람이나 도시 노동자가 된 사람들은 푸주간의 도살자로 일한다.
종교 : 무슬림이 95% 이상을 차지한다. 그 외 혼합주의 적인 보리(Bori)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기독교인구는 0.2% 정도이다. 이들은 일반적인 이슬람의 절기들을 지키고 있다. 때로 이들은 보리(Bori)축제를 열기도 한다.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은 이 종족을 더 폭 넓게 이슬람화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 하고 있다.

니제르의 송하이(Songhay)족
인구 : 1,506,580명 (1990년)
언어 : 동부 송하이어(자르마 어)를 사용한다.
위치 : 이들은 서부 니제르에 거주하는데 주로 니제르강을 따라 살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소규모의 도시나 마을들에 살고 있다.
경제 : 전통적으로 송하이 인들은 농업과 어업에 종사해 왔고 현재는 상인과 정치인으로서도 많이 일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 농업 생산품은 기장이며 주요 교역대상은 주변 종족인 하우자, 풀라니, 투아레그족이다.
종교 : 이슬람과 애니미즘이 이들의 주요 종교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무슬림 절기를 지키며 애니미즘의 영향을 받은 축제들도 행한다.

니제르의 제르마(Zerma)족
인구 : 2,000,000명
언어 : 제르마어를 사용한다.
위치 : 이들은 니제르 남서부의 건조한 지역에 살고 있다. 이곳은 니제르강과 그 지류에 의한 퇴적층을 따라 형성된 곳으로 니제르의 수도인 니아미를 중심으로 티라 베리, 도소 등의 소도시와 여러 마을이 속하여 있다. 이들은 북쪽으로 송하이족과 접해있고 남쪽으로는 덴디족과 접해있다.
경제 : 이들은 9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니제르강의 수자원을 끌어다 농사에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소, 염소, 양을 기르기도 한다. 그중의 일부는 뛰어난 장인들로서 주변 도시와 마을에 알려져 있다.
종교 : 이들의 75%가 수니  파 무슬림으로서 종족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애니미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25%에 이른다. 제르마족은아프리카 서부의 다른 종족들에 비해 이슬람의 영향을 덜 받는 편이다. 명목상의 무슬림들은 여러 가지의 전통적인 무슬림 전통을 따르지만 전통적 애니미즘의 영향을 받은 마술이나 심령술 등의 일들도 곧잘 행하고 있다.


역사

2-1. 이슬람 왕국과 니제르
녹색 숲이 우거지고, 그 녹색을 비취는 물이  있었다고 하는 사하라가 사막화를 시작한 것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리스인의 역사가 헤로토토스의 기록에는 이미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사막화로 생활의 장을 잃어버린 농업과 어업을 경영하던  주민은 그 때부 터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것에 따라  목축업자들도 남쪽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인기가 없어진 사하라는 유목민의 세계가 되었다. 서 사하라에서는 몰인이, 중앙의 대지에는 파랑 포(布)로  얼굴을 감싼 투아렉족이 남겨졌다.
건조의 기후에 강한 투아렉족이 낙타를 교통기관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그리스 기원후의   이지만 그들은 낙타를 이집트에서  옮겨 받아 들였다. 낙타에 의한 교통기관은 4세기에 성대해져 돈과 소금과의 교역이 지중해 세계와의 관계를 강하게 하고, 그 교류에서  7세기 이슬람의 발생에 따라 사하라 주변 민족의 이슬람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손가이왕국과 말리 제국이라는 대국가가 형성되어졌다.
이슬람 왕국의 최성기(最盛期)는 16세기의 손가이왕국에서  그 전설적인 왕 에스키아 무하맷드의 시대에는  차드 호반(湖畔)의 볼느왕국과의 사이에서 현재의 니제르는 이등분 되었다. 18세기가 되면서 현재의 나이지리 아에 포함되는 소유트를 수도로 하는 풀 왕국이  영화를 누렸다. 그 때부터 유럽을 확대하는 세력은  문고 파크와 크랏파트  등의 탐험가를 첨병(尖兵)으로 해서 영토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멀지 않아 평정작전이 전개되어 소유트의 함락을 최후로  아프리카인의 왕국은 자취를 감췄다. 식민지화 시대의 개막이었다. 니제르도  프랑스세력의 진입으로 식민지화 되었다.

2-2. 프랑스의 식민지
1911년 프랑스는 니제르를 프랑스 영서아프리카 총독의 통치하에 두었다. 프랑스는 단기간의 군정 후 민정에 옮겨 21년에  새로운 니제르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22년 프랑스령 식민지가 되었으며 26년에 진델이 최초의 수도가 되고, 다음으로 니아메로 옮겨졌다.  이 사이에 니제르에서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의해  프랑스군의 약체화를 틈타 아일지구의 투아렉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17년 진압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1946년 니제르에  최초의 지역의회가 설립되었다. 프랑스의 해외영토로서의   위가 확정된 니제르에서는 프랑스 국회에 2명의 대의사를 선출했다. 또 프랑스 연합의회  및 프랑스 영서아프리카 대평의회에도 니제르는 각각 2명의 대표를 보냈다. 56년에는 프랑스 해외 영토에 대한 기본법이 제정되어 프랑스의 해외영토는 광범위자치권을 얻었다. 니제르에도 다른 해외영토와 같이  12명의 각료로부터 이루어진 자치정부가  조직되어 직접선거에  의한 지역의회가  성립했다.  58년 12월 18일, 프랑스 공동체의 틀 속에 있어서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여 하마니 디오리가 임시 정부수석에 선임되었다.

2-3. 프랑스에서의 독립
1960년 프랑스 공동체 구성국의 지위에 관한  법률의 개정으로 공동체 구성국은 완전히 독립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니제르는 프랑스 공동체에서 떨어져 60년 8월 3일 완전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디오리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디오리  대통령은 65년 재선,  70년에 3선 되어 장기정권을 유지했으나 74년 4월 15일 참모총장  쿤채 중좌의 쿠데타에 의해 쓰러져 14년간의 치정(治政)에 종지부를 찍었다.

2-4. 쿤체 의장의 정치
쿤체는 쿠데타 후 전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최고군사평의회를 설립하여 스스로 의장으로 취임했다. 동시에 헌법의 정지, 의회  및 정당의 해산을 강행하여 잠정군사정부를 발족시켰다. 농업국가인  니제르는 한발에 의한 피해를 받기 쉬우며 식량문제, 그리고  부수(付隨)한 민족적 감정이 정치적 문제로 발전하기  쉬우므로 국가원수가 된  쿤체는 군사력을 키우는 한편, 국민경제를 다시  세우기 위해 ① 식량을  중심으로 하는 기초적 생활물자의 가격통제, ② 최저임금 베이스  개정의 조치를 하는 것과 동시에 군을 이용한 한발지역 구조활동을 강화했다. 그 후로 쿠데타 미수 등이 계속되었지만 우란 개발의 진전에  따른 경제성장의 지원을 받아 쿤체 정권은 기반을 강화했다.

1980년 3월에는 발전사회확립위원회를 설치하여 전 사회계층의 효과적 참가를 재촉하기 위해 최고군사평의회를 정점으로 한 촌락 레벨에 이르기까지 조직화를 계획했다. 니제르는 군사정권이기는  하나, 다른 아프리카제국의 군사정권과는 성격이 다르며 쿤체  정권에 있어서 입법의회의 부활이 최대의 지향점이었다. 1983년에는 개발국민 평의회(CND)가 발족하여 국가헌장 책정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84년의 한발에 의해 식량 농업대책이 최우선시되어 입헌의회 부활 움직임은 일시 중단되었다.

2-5. 민정이관(民政移管)
이러한 상황에서 1987년 11월 쿤체 의장은 병사하고 국군 참모장 알리 세이브가 최고군사위원회에 의해 동의장, 국가원수에 임명되었다. 세이브는 니제르 최초의 여성 각료등용(登用) 등  대폭적인 내각개편, 조직편성을 실시하는 한편 정치범을 사면했다. 또  촌(村), 구(區), 현(縣)에서의 의회선거실시, 헌법제정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하는  한편, 헌법 복귀후도 문 군에 의한 조각(組閣)을 표명했다. 89년 9월 신헌법 국민투표 결과 신헌법이 제정되어 입헌군주제가   고 같은  해 12월에 최초의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99.6%의 지지율로 세이브가 대통령에 취임, 민정이관이 완료되었다.

2-6. 최근의 정세
세이브는 90년 복수정당제를 도입하고 10여개의 정당을 합법화하였다. 92년 12월 헌법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됨으로써  독립이래 최초의 복수정당제 선거실시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1993년  2월 총선에서는 6개 정당연합체인 변화세력동맹(AFC)이 집권세력으로 부상하고 집권당이던 사회개발국민 운동(MNSD)은 야당으로 천락하였으며 3월 대통령선거에서는 야당인 사회민주당의 우스마네가 당선되었다.

1994년 12월 실시된 총선에서 야당연합이 우스마네 대통령이 주도하는 집권연합세력에 승리하여 여소야대의 정국 속에서 대통령과 의회의 대립이 계속  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6년 1월 군부의 쿠데타로 대통령을 축출하고 집권한 이브라 힘 바레  마이나사라 중령은 과도민간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마이나사라는 같은 해 7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으며 1996년 총선에서도  마이나사라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혁신민족독립동맹(UNIRD)과 친 여정당의 승리로 의회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국토와 지리

1. 위치
니제르 북쪽은 알제리 및 리비아, 동쪽은 차드, 남쪽은 나이지리아 및 베냉과 각각 국경을 접하는 내륙국이다. 동경 0도에서 16도, 북위 11.5도에서 23.5도 사이에 위치하여 서단(西端)은  북회귀선이 둘러쌓고 있다.

2. 면적
면적은 126만 7,000㎢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 또는 반사막지대이다. 거의 중심부에 아일 산지(山地)가 있어(최고봉 Greboun산은 2,000m 이상) 이것에 대치하여 북동부에는 자드 대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 아일 산지에서 자드 대지에 걸쳐진 북동부 지역일대와  아일 산지의 서부지역은 사하라 사막의 일부를 제외하고 기복(起伏)이 많은 황량한 사구지대(砂丘地帶)가 계속된다. 또 동부지대는 스텝지대로  유목민과 가축의 무리가 산재(散在)한다. 남부지역   사바나 지대로 남동부의 차드호에서 니아메에 걸쳐 비옥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나라의 곡창 지대라 불리어 주민의 다수는 이 지역에 살고 있다. 이 나라의 남서부를 흐르고 있는 니제르강은  아프리카 중에서도 나일강, 사일 강에 이어 세 번째로 긴 강을 있어 말리에서  남쪽의 베냉 국경을 따라 나이지리아로 흘러 들어간다. 덧붙여서 말하면 이 나라의 국명은 남쪽의 인접 국 나이지리아와 같이, 이  니제르강에 의해 붙여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3. 기후
기후는 지역적으로 두개로 구별할 수 있다. 즉,  차드 국경의 Nguighi에서 Tanout, Tahoua를 통해  말리 국경에 달하는 선을  국경으로 하여 그 이북(以北)과 이남(以南)의 사헬기후로 구분할 수가 있다. 북부지역은 연간 강우량이 상당히 적으며 100㎜에도 달하지 않는 건조한 기후이다.

연평균 온도는 장소에 따라서도 약간 틀리지만 최저  18℃, 최고 36℃ 정도이다. 이것을 월별로 보면 1월∼2월 최고기온이 낮으며 7∼8℃까지 내려가는 일도 있지만 5월∼6월경이 되면 기온도 높아져 45℃까지 달한다. 또 일반적으로 이  나라 기후의 특색으로서 낮과  밤과의 기온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들 수가 있다. 남부의 사헬기후가 되면 우량(雨量)도 많아지며(연간 강우량 300㎜∼800㎜) 습도도 비교적 높다. 계절적으로 보면 10월에   6월까지가  건기에 들어가고 7월에서  9월은 우기로, 특히 8월은 우량이 최고 많다. 또 11월에서 2월, 3월에  걸쳐서 1년 중 최고로 지내기 편한 계절로 일중 온도가 30℃ 전후,  밤은 15℃ 가까이까지 내려간다. 이 시기는 또 사하라 사막 방면에서 몰려오는 하마탄이라는 사진(砂塵)을 포함한 계절풍이  부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4월∼5월은 기온도 올라가고 일음(日陰)에서도 가끔  40℃ 이상이 된다.



경제

1. 개요
니제르는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로 1인당 국민소득이 매우 낮다. 또한 국민총생산의 절반  이상이 농업생산으로 충당되며 목축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1994년 국내총생산은 46억 달러이고 1인당 국내총생산은 550  달러였다. 1995년 강우량부족과  메뚜기떼, 기타 육식동물의 습격으로 곡물이 부족해져 인구의 1/4인 최소 200만 명이 기아에 직면해 있다. 농업은 쌀,  솔감 등의 생산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형태이며 목축은 유목형태로 역시 기상조건에 좌우되기 쉬운 상황이다. UN 및 식량농업기구(FAO)는 1990년 12월 식량위기에  있다고 해서 각국에 원조를 호소했다. 우라늄은 매장량은  20만 톤, 관련산업 종사자까지 포함한 노동력의 20%가  종사하고 있는 니제르의  경제성장 견인차적인 역할을 해왔다. 1965년에 발견돼 71년부터 생산에  들어갔으나 최근 국제적인 우라늄가격 하락으로 고전하고 있다. 세계은행, IMF의 지원을 받아 섹터조정을 포함한 구조조정계획(1989∼ 91년)을 실시하여 공무원 급여동결, 공기업의 정리,  보조금 삭감 등의 노력을 계속하는 것과 동시에 이에 이어 1990∼92년 제 2차 구조조정 계획정책을 입안하여 공기업의 재건, 관세제도의  개혁, 무역수속의 합리화, 수입의 자유화, 은행제도의 강화, 징세기능의  강화 등을 추진하였다.

2. 재정
정부의 재정은 중앙정부의 재정, 사회보장기금(CNSS),  석유가격 안정기금(CSPPN), 지방재정, 공기업 등에서 성립하고  있다. 1988년의 중앙정부의 재정규모는 세입이  677억 4,900만 CFA프랑,  증여(贈與) 284억 CFA프랑, 세출 1,351억 CFA 프랑으로 차감 389억 5,100만 CFA프랑의 적자로 되어 있다. 세입은 세수(세입의 77.8%), 세외수입(세입의 18.5%), 그 밖의 수입(세입   3.7%)에서 성립하고 있다.  증여의 구성은 무상자금(증여의 96.5%)으로 그 밖의 증여(증여 3.5%)이다. 증여는 주로 투자예산의 재원으로 사용된다. 반면 세출은 경상지출(세출의 59.1%), 투자지출(세출의 39.8%), 그 밖의 지출(세출의 1.1%)에서 성립하고 있다.

3. 통화 및 환율
통화단위는 CFA프랑(1 CFA 파랑 = 100 Centimes)이며, 환율로는 CFA프랑은 프랑스 프랑과는 1 CFA프랑 = 0.02 F 프랑으로  고정되어 있다. 1달러당 515 CFA프랑 (96년 6월)이다.

산업

1. 농업
우라늄개발를 중심으로 한 광업부문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농업은 니제르 경제에 있어서 또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국민의 90%가 농축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만성적인  식량부족국가로 근래 95년에는 강우량이 부족하고  메뚜기 육식동물 등의  습격으로 곡물이 부족해져 인구의 1/4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쌀은 약 90%가 관개경지에 의해 생산되고 있으며 남부 사바나 지역에서  자급용 잡곡과 수출용 땅콩, 목화 등이 재배되고 있다.

2. 목축업
니제르는 국토의 약 60%가 휴경지, 목장이며  낙농은 옛날부터 우라늄에 이은 외화확보원으로 니제르 중요 산업의  하나이다. 목축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데 북부 사막지대에서 유목을 통해 사육된다.

3. 광업
니제르의 광업은 우라늄이 주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외에 철광석, 텅스텐 등이 생산되고 있다. 광업부문은 1988년에서  GDP의 6.7%, 수출의 74%를 차지하고 있다. 우라늄은  70년대부터 생산 및  수출에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세계 5위의 매장량을 자랑한다. 우라늄 생산은 니제르 정부와 프랑스의 합작회사에 의해 개발되고 있으며 관련산업을 합하면 노동력의 20%을 차지하지만 최근 국제적인 우라늄가격의 하락으로 주춤하고 있다.

4. 제조업
대부분의 서부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제조업은  GDP의 5%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미미한  실정에 있다. 땅콩가공을  비롯하여 국내수요에 충당하기 위한 음료, 야채, 농기구 제조업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수송비 절감을 위한 수입대체 산업육성에 치중하고 있다.

5. 에너지
니제르는 전력을 화력발전에  의존하고 있지만 발전량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80년대 초반까지 국내수요 전력의  약 50%를 나이지리아에서 수입하였으나 1983년 12월 나이지리아에서 일어난  쿠데타 이후 안정적 전기공급에 위협을 받자 니제르는 Goudel에 약 86억 규모의 화력발전소 건설에 착수했다. 한편 IDA는 니제르의 에너지 개발을 위해 790만 달러를 원조한 바 있으나 생산성이 낮아 중단된  상태이며 니제르의 원유생산은 현재 전무한 상태이다. 또한 유류(油類)  소비량의 대부분도 나이지리아에서 수입하고 있다.

정치

1. 국가원수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임기 5년의 대통령이 국가원수 이다. 현재의 대통령은  이브라 힘  바레 마이나사라(Ibrahim   Bare Mainasara)로 1996년 7월에 당선되었다. 마이나사라는 96년 1월  쿠데타를 일으켜 우스마네 대통령을 축출하고 과도민간내각을 구성하였는데, 7월 대통령선거에서 석방된 우스마네와의 대결에서 당선되었다.

2. 입법부
의회는 83석의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의회의원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한다.

3. 정당
1996년 11월 총선에서 마이나사라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혁신민족동맹(UNIRD)과 친여 정당들이 다수당으로 의회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다. 이밖에 사회발전국민운동(MNSD)와 반혁세력동맹(AFC)  등이 주요정당이다.

4. 최근의 정세
세이브는 90년 복수정당제를 도입하고 10여 개의  정당을 합법화하였다. 92년 12월 헌법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됨으로써  독립이래 최초의 복수정당제 선거실시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1993년  2월 총선에서는 6 정당연합체인 변화세력동맹(AFC)이 집권세력으로 부상하고 집권당이던 사회개발국민 운동(MNSD)은 야당으로 천락하였으며 3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인 사회민주당의 우스마네가 당선되었다.  1994년 12월 실시된 총선에서 야당연합이 우스마   대통령이 주도하는 집권연합세력에 승리하여 여소야대의 정국 속에서  대통령과 의회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996년 1월 군부의 쿠데타로 대통령을 축출하고 집권한 이브라힘 바레  마이나사라 중령은 과도민간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마이나사라는 같은 해 7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으며 1996년  총선에서도 마이나사라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혁신민족독립동맹(UNIRD)과  친여정당의 승리로  의회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외교

1. 외교정책
비동맹 중립외교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구 종주국(舊宗主國)인 프랑스와는 경제, 군사 등 전분야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북쪽의 리비아, 차드 침공에  항의하여 1981년에 단교했으나  1983년 복교, 1990년 12월에는 치안사법협정에 조인(調印)했다. 남쪽의 나이지리아와는 1991년 2월에 최초의 합동각료회의를 열어 국경관리문제와 경제협력을 이야기했으며 이슬람제국회의기구(OIC)에 참가하고 있다.  1996년 1월 군사쿠데타로 프랑스와 캐나다 및 독일은 니제르에 대한 원조중단을 선언하였다. 92년 6월에는 대만고립화를 위해  접근한 중국과 수교하자 대만이 그 보복으로 단교하였다. 니제르는 또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서방제국과의 관계긴밀화에도 노력하고, 또  아프리카  일기구(OAU),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CEAO), 서아프리카제국 경제공동체(ECOWAS), 서아프리카 통화동맹(UMOA), 니제르강 개발기구(CFN), 사헬 제국 한발대책위원회(CILSS)  등의 지역기구에 참가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2. 한국과의 관계
남북한 문제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등거리외교노선을  표방하면서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으며 1986년 9월  쿤체 대통령의 방북 이후 한때 친북입장으로 전환했으나  1988년 외상방한과 서울올림픽 참가 이후   거리외교로 복귀했다. 1989년 공관철수조치 이후 일시적으로 소원한 태도를 표시한 바 있으나 한국의  노력으로 태도를 완화하였다. 1993년 4월에 집권한 Ousmane 대통령은 산적한 경제난 해소를 위한 실용주의노선 추구로 서방의 원조를 모색중이며  한국에도 무상원조 등 경제협력을 희망하고 친한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3. 북한과의 관계
북한은 1974년 9월에 니제르와 수교한 이래  1983년 2월   상주공관을 설치하고 1986년에는 쿤체 대통령의 방북 등을 통해 친북노선을 추구했다. 1990년 이래의 민주화 및 북한의  공관철수(91.3)로 관계가 급격히 소원해졌으며 양국간의 협력관계가 전무한 실정에 있다.

4. 국별 외교관계
4-1. 미국 및 서방측과의 관계
구 종주국인 프랑스와는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니제르는 지나친 대불의 의존도에서 탈피하기 위해 다변화 정책을 추구하고 있으며 미국, 서독, 벨기에, 일본, 캐나다 등의 원조를 통한 경제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미국과는 1984년 3월에 COOK 미 국방차관보 및 1985년 3월의 Bush 부통령의 니제르 방문 이후  군사협력이 강화되고 있다. 1996년 1월 군사쿠데타로 프랑스와 캐나다, 독일은 니제르에 대한 원조중단을 선언했으나 정권안정화 이후 해제되었다.

4-2. 대공산권 관계
니제르는 비동맹 중립 등거리외교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 쿠바, 중국 등과도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92년 6월에 대만과의 수교로 중국은 7월 단교했으나 1996년  6월 대만고립화를 위해  접근한 중국과 수교하자 대만이 그 보복으로 8월에  단교하였다. 실질적인 협력관계가 쟁쟁한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과는 친선관계를 유지하는 것에만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4-3. 대아프리카 관계
니제르는 나미비아의 독립과 남아 공화국의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하고 OAU를 비롯 아프리카의 역내기구, 특히 Conseilde l'Entente CEAO 등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OAU의 단결노력   적극적으로 외교를 전개하고 있다. 또한 이티오피아∼소말리아 분쟁과 챠드내전 등에서  중립정책을 고수(固守)하였으며 선린관계(善隣關係)의 유지를 기본정책으로 삼고 있다. 북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리비아에 대해서는 사하라 이남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으며 서부 사하라 문제와 관련하여 1986년 제 41차  유엔 총회에서도 계속해서  알제리측의 입장을 지지해 오고 있다. 세이브 대통령은 집권 후 1988년 초 코트디부아르, 토고, 베냉, 부르  나파소, 나이지리아 등 인접한  우방국을 순방하고 기존의 우호협력관계를 증진시켰다.

5. 국제기구 가맹
UN, 아프리카통일기구, OCAM 협상회의 가맹국이고  유럽공동체의 로메 협정국이다.

생활
  
1. 의료
니제르의 의료수준은 매우 낮다. 의사와 간호사도 매우 부족하고 병원도 도시에 한정되어 있다. UN의 원조로 전염병과   토병  등에 대한 대책이 이루어지고 있다. 니아메에는 다음 두 곳의 병원밖에 없다.□ H pital National de Niamey (국립종합병원) :  침대 수 700대(단 대부분이 만원) 정도이며 의사 수는 30명이다.(니제르인,  한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등)

□ Clinique de Gamkale : 민간의원이기는 하지만  프랑스 정부의 협력으로 운영하고 있다. 의사 수는 2명, 조산부 1명이며 침대 수는 22개, 내과, 외과, 산부인과가 있다. 이들 병원은 어느쪽이든 설비가 불완전하며 간단한  수술도 하지 못하므로 중병, 중상의 환자는 파리 등의 병원에 수송하게 되어 있다. 니아메 체류 외국인은 위 두 곳의 병원 중에서  청결한 점으로는 Clinique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또 현지에서 출산하는 외국인은 적다.

2. 니제르에 있어서 교통수단으로는 도로교통이 대부분이다. 나이저강의 국내 수로를 이용하기도 하나 10∼3월 사이에만 운행이 가능하다. 항공교통은 비교적 잘 발달된 편이어서 니아메∼아가데스∼아리트 사이의 로(空路)가 개설되어 있고 국제공항 및 지방공항이 많은 편이다. 니제르에서 철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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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이집트

2003. 2. 3. 11:30
1] 이집트 개요 - 일반적 현황

  면 적 : 1,102,000 ㎢
  지 형 :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 북위 22  와 32  사이에 위치하며, 총 국토면적은 한반도의 5배 정도인 1,002천㎢로 남북간 최장거리는 1,024 ㎞이고, 동서간 최장 거리는 1,240㎞이다. 북쪽은 지중해, 동쪽은 홍해에 면하고, 북동부는 이스라엘과 접경을 이룬다.
  자연환경 : 나일강이 남북으로 관류, 하구에 넓은 삼각주를 이루고 지중해로 흘러든다. 건조기후로 국토의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이다. 주민은 나일강유역 및 삼각주지대, 수에즈운하 연안지대에 집중해 있으며, 대부분이 고대 이집트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콥트인이다.
  인 구 : 64,824,466 명 (1997.7월 기준)
  연령구조 :  0~14세 - 36% (남자 12,080,281. 여자 11,556,970명)
              15~64세 - 60% (남자 19,616,790. 여자 19,228,163명)
              65세 이상 - 4%  (남자  1,050,540.  여자  1,291,722명)
  주요도시 : 카이로 (수도), 알렉산드리아, 룩소
  종 교 : 이슬람(94% - 수니파), 콥트교, 기독교 (6%)
          실제로는 기독교 숫자가 10% 이상이다.- 콥틱, 카톨릭, 복음주의등. 다른 이슬람제국과  다르게 종교상의 계율 수호 방법은 관대하고 유럽 생활양식의 영향이 강하고, 종교상의 완고성은 특별히 느낄수 없다. 라마단 시기를 포함해 외국인의 알코올, 돼지고기 등의음식은 자유이다.
  언  어 : 아랍어, 영어, 불어
  기 후 : 카이로를 비롯한 내륙이 아열대 기후. 지중해 연안이 지중해서 기후이다. 사막성 기후로 연중 강수량이 가장 많은 지역인 알렉산드리아 지역도 연중 강수량이 800㎜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지역은 80           ㎜ 이하이다. 하절기에는 내륙지방의 기온이 38。C~43。C로 매우 더운편이고, 지중해연안 지방은 최고 기온이 32。이다. 이집트 상형문자에는 '비' 를 뜻하는 말이 아예 없을 정도로 대체로 건조한 편이다.
  시 차 : 우리나라보다 7시간 늦다. 근처의 이스라엘, 그리스, 터키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체제 = 공화제
  의회형태 = 단원제
  국가원수 = 대통령 (무제한 연임이 가능하다.)
  자원 = 석유, 천연가스
  공식 이름 = 이집트 아랍공화국
  산업 = 산업은 농업 중심이었으나 공업, 수송, 통신의 투자액이 증대하고 있고, 석유 산출국으로서 석유화학공업 등의 신장과 풍부한 천연자원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목화, 옥수수, 사탕수수, 곡물 등이 있고, 이들을 산출하는 관개농업이 경제의 기본을 이룬다. 교통은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에즈운하를 비롯하여, 나일강 연안과 삼각주지대에 운하, 철도, 도로가 발달되어 있다. 카이로 주변의 가자와 시카라의 피라미드군, 록소르의 테베유적과 각종 신전 등이 나일강 주변에 산재해 있어 관광 수입이 국외 근로자의 송금과 석유수출 다음으로 중요한 외화 수입원이다.
  우리와의 관계 = 우리나라와는 61년 12월 영사관계를 수립하였고, 북한과는 63년 수교하였다.


☆주요도시 카이로
  - 도시 개요 : 이집트 북부, 나일 델타의 남단부터 10 수㎞ 남쪽에 위치한 이집트 아랍 공화국의 수도이다. 카이로는 주변에 고대도시 멤피스, 헬리오 폴리스를 포함한다고 해도 이집트에서는 비교적 신도시이다. 마을의 발생은 7세기에 아랍의 장군이 모스크(회교사원)를 세워 마을을 만든 이래, 차츰 큰 마을로 발전해 갔다. 몇 차례의 이슬람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면서, 도시는 북쪽으로 확대해 갔다. 10세기에 파티마조가 신도시를 건립, 카이로(아라비아어로 멜카헤라: 승리의 도시라는 의미) 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 12~13세기에 아이유브조 시대에는 상공업 도시로 번영, 13~16세기의 마믈루크조 시대에는 최고 성수기를 맞았다. 현재 시내에 남은 역사적 건조물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것이다. 18세기말부터 프.영 점령시대에 따라 확장, 정비되었다. 카이로 시가는 구시가, 19세기 중엽 이후의 신시가, 제 2차대전 이후의 교외 주택지로 나뉘어져 있다. 구시가에는 후스타트의 서쪽에 수많은 모스크가 서있고, 신시가는 타아리루 광장으로부터 방사상으로 도로가 되어있고, 루쿠문의 근처에는 정부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2] 역사와 문화, 종교 그리고 경제..

@역사와 문화

♧ 그리스 & 로마 치하의 이집트

# 마케도니아의 이집트 점령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기원전 332~30년경)
  기원전 332년 가을 알렉산더 대제의 마케도니아 - 그리스 군이 이집트로 진군하자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그는 그리스까지 이름이 나있던 리비아 사막에 있는 시와 오아시스 아문 신전을 방문하여 그가 아문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아냈는데, 이를 계기로 이집트인들은 그를 새로운 파라오로 인정했다. 알렉산더는 나일 삼각주 서편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고, 지중해에 면한 이 항구도시는 이집트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이집트 통치를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집트인 행정관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떠난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이집트는 우여곡절을 거쳐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집트 왕실의 전통을 따라 친누이와 결혼을 했으며, 이러한 관행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전통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초기 160년 동안이었다.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 권력 투쟁이 빈발하였고, 전성기 때 영토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되어, 마지막 100년은 로마의 보호 없이는 독립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연대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려 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하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 당하여 자살할 때까지 300년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이었고, 학문과 예술의 수준이 세계 최고인 도시였다.

# 로마(기원전30년 - 기원후 395년경)와  비잔틴 제국의 지배(395~641년)
  야심차고 보기 드물게 유능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살로 고대 이집트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제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이집트의 전통을 존중하였고, 이스스 숭배를 비롯한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로마까지 파급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이집트로 전파된다. 기독교는 발생 초기 박해를 받았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보호 속에서 급격히 발전한다. 특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집트의 모든 우상 신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바 있다. 이집트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비잔틴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자 이집트에서의 토착종교는 거점을 점점 잃어갔다. 기독교 수도자와 은둔자들이 급격히 늘어나 세게 최초로 이집트에 수도원이 등장하였다.

  성서, 성자들과 순교자들의 삶에 대한 번역물들이 주를 이루는 풍부한 콥트 문학이 이집트에서 발전한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는 616년 페르시아에 합병된다. 1517년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정복된 후, 1805년 모하메드 알리가 새 왕조를 세운다. 1869년 수에즈운하가 개통되고, 영국에 무력 점령당하였으며, 191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922년 형식적인 독립을 얻었으며, 1836년 영구-이집트 동맹의 체결로 영국군은 수에즈운하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철수하였다. 1952년 나세르 중령을 중심으로 한 군부 쿠데타가 성공, 1953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나세르는 아랍 사회주의 및 아랍 통일을 두 기둥으로 삼아 농지개혁에 따라 소유지를 제한하고, 1956년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였으며,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과 2차 중동전쟁을 벌이는 등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967년 이스라엘과 3차 중동전쟁에서 패배, 시나이 반도의 가자지구를 상실하였다. 1970년 나세르의 사망 직후, 부통령 사다트가 대통령을 승계하였고, 1973년 4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하였다. 1979년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으나, 1981년 이슬람교 과격파와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국민투표에 의해 무바라크 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사다트의 평화노선을 계승한 무바라크 정권은 1982년 이스라엘로부터 시나이반도를 돌려받았고, 1987년 무바라크는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에 재선되어 독자적인 외교를 전개, 1989년 아랍석유수출기구에 복귀하고, 레바논과의 재수교와 리비아와의 국경봉쇄 해제를 실시하였다. 1989년 시리아와도 국교를 재개하고, 이라크. 북예멘. 요르단 등과 새로운 경제공동체인 아랍 협력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페르시아만 전쟁 때는 반(反)이라크 아랍군을 주도하였으며,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 및 시리아와 집단 안보체제 형성을 추진하였다. 1991년 GCC 이집트 경제부흥을 위해 100~150억 달러 규모의 원조기금 창설을 결정하였다.


♤ 피라미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건축물인 피라미드는 고왕국의 전성기인 기원전 2700년경에 만들어졌다. 기자의 3대 피라미드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은 기원전 2690년 제 4왕조의 2대왕인 키오프스(cheops)의 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일명 쿠푸(Khufu)왕의 피라미드라고 불리운다. 높이 147m, 밑변 230m, 경사각 51도50분으로 정확하게 쌓아져 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각 모서리가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있고, 거의 완전한 직각을 이르고 있다. 이 피라미드는 입구와 조그만 내실을 제외하면 모두 석회석으로 이루어졌는데, 돌의 크기는 높이 1m, 폭 2m, 길이는 각각 다르다. 평균 2.5톤의 이 돌을 밑변에서 꼭대기까지는 210단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230만개(또는 250만개)의 돌이 필요하였다. 가령 이런 돌로 돌집을 쌓으면 12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전문가는 이런 돌을 30센티미터로 잘라 연결하면 지구의 2/3을 에워 쌀 수 있다고 하며, 높이 3m, 두께 30㎝로 자른다면 프랑스 전체를 둘러쌀 수 있다고 한다. 이 돌들의 무게를 합치면 684만 8,000 톤으로 만약 적재량 7톤 짜리 화물로 운반하면 97만 8,286대 가량의 화물차가 필요한데, 이 화물차들을 연결해보면 그 길이는 6,200㎞에 이른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건설사업은 돌을 케내어 뗏목으로 운반하고 공사를 하기 위한 도로를 만들고 피라미드의 지하공사를 하는데만 적어도 10만명의 노예가 석달씩 교대로 해서 10년이 걸렸고, 돌을 높이 쌓아 올리는데도 20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이 돌은 채석장에서 현장까지 나일강을 이용해 운반하였다. 그런데 나일강은 수량이 풍부한 봄 한 철 석달 밖에 이용할 수 없다. 그러면 필요한 석재 전부를 운반하는데는 20년에 걸쳐 무려 50만번을 왕복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쌓을 때는 물론 사람의 힘으로 거대한 돌을 위로 위로 밀어올렸다. 이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 겉부분의 돌은 아주 매끄럽게 다듬었으나, 내부의 돌은 거친 그대로 사용했다.
지구 표면에 있어서의 위치는 놀라운 점을 시사한다. 조셉 시즈와 그의 동료의 연구에 의하면 피라미드의 위치는 대륙의 질량 중심에 위치해 있고 지구 전체의 면적을 거의 정확히 4등분하는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즉, 북남방향으로는 그리니치 동방 31도선인 가장 긴 경선과 동서방향으로는 북위 30도선으로 대륙의 가장 긴축을 이루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토록 오래 전에 세워졌는데도 동서남북방향으로 정확히 곧게 서 있으며, 단지 진북방향으로 3분 빗나가 있는데, 현대에 잘 지어졌다고 하는 파리 천문대도 진북방향에서 6분정도 빗나가 있는걸 보면, 그 정확성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피라미드의 건축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된 바 있었다. 그 이론 중의 하나는 고용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농업, 광업, 상업의 자원들이 더 이상 전체 이민의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다. 이 이론은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피라미드 건설자에게 피라미드가 일차적으로 종교, 정치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피라미드는 의심의 여지없이 신성한 파라오들의 무덤을 의미했다. 파라오의 권력이 강할수록 그의 무덤 또한 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파라오가 국가를 대표하는 존재였으므로, 피라미드에는 분명히 정치적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피라미드는 지배자들의 영광을 드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이집트 국가의 힘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이념을 고양시켜 주기도 했던 것이다.
피라미드에는 그 지명도와는 반대로 많은 수수께끼가 남아있다. 히에로글리프가 해독되어 만자 자료가 고대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지만, 피라미드에 대해서는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건조되었는가에 관한 기록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 수에즈운하
최초의 운하는 기원전 2100년에 계획되어 네코가 지중해와 연결 공사를 시작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중단하였고, 그 후 기원전 500년경 다리우스 1세가 홍해와 대염 호수(Great Bitter Lake)를 거쳐 부바스티스(Bubatsis)의 나일강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이 수로는 7세기 아랍의 상인들이 이집트의 농산물을 실어 가는데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100여년 동안 사용되다가 회교 내분으로 수로를 이용한 곡물 운반이 중단 되자 운하는 폐기 되었다.
1798년 나폴레옹이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수석 기사의 계산 착오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주 카이로 불란서 영사였던 페르디난드에 의해  1859년 공사가 재개되었으며, 그로부터 10년 후인 1869년 11월에 프랑스인 레셉스의 이해 다시 건설, 총 연장 161㎞의 운하가 개통되었다.
프랑스에 이서 영국이 경영하고 있었으나, 1952년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대통령 압델 나세르에 의해 1956년 7월 수에즈운하 회사를 국유화하였고, 기득권을 상실한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강점하는 등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 후 1967년 3차 중동전쟁으로 운하가 폐쇄되었다가, 1973년 사다트 대통령의 시나이 반도 탈환과 더불어, 이 운하는 이집트 정부의 관리하여 폐쇄 8년 만인 1975년 재개통 되었다.
운하는 얕은 대형의 단면형태로 되어 있으며, 1869년 개통 당시 깊이 약 8m, 흘수 약 5m 이었으나, 1956년 깊이 13~15m, 흘수 11m 가 되었다. 80년 평균 수면나비 약 200m , 깊이 15m 가 되어 만적시에는 6만 t, 공선시에는 15만 t급 유조선의 통행이 가능하다. 하루 평균 100여 척의 선박이 이용하고 있으며, 전세계 물동량의 14%가 이 운하를 통과하고 있으며, 통과 소요간은 약 15시간이 걸린다. 현재 운하의 폭은 200미터, 평균 수심은 20미터인데, 교통량이 늘어남에 따라 꾸준한 주설 확장을 계속하고 있고, 현재 운하의 길이는 173㎞에 달한다.
수에즈운하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최단의 해로이다. 그러나 선박 통과율은 수용능력의 53%에 머무르고 전세계 해상무역량의 6%밖에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한해동안 하루 평균 통과 선박수는 40.2척을 기록, 전년의 41.2척보다 감소했다. 한해에 1만5천척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같은 수치는 수에즈운하가 한창 호경기였던 80년대와 비교하면 감소세가 더욱 두드러진다. 82년에는 하루 평균 61.8척, 연간 2만3천척이 통과했다. 또 최근 통계를 보면 금년 6월 한달동안 운하를 통과한 선박수는 1188척으로 작년 같은 기간의 1226척보다 감소했다. 통과료수입도 95/96 회계년도의 18억 9200만달러에서 96/97 회계연도에는 18억2400만달러로 줄어들었다.
수에즈운하의 매력이 줄어든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속속 건설된 송유관과 가스파이프라인이 유조선을 대체하고, 초대형 유조선들은 희망봉을 돌아가는 먼 길을 선택하고, 운하를 대체할 육상수송루트가 개척되었다. 수에즈운하청장 하르카드 파딜은 수에즈운하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높아지는 가운데 유조선의 유치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유조선은 현재 운하청 수입의 1/3정도이나, 67년 전쟁으로 폐쇄되기 직전에는 65%까지 도달한 바 있다. 석유를 만재한 듀조선은 제대로 운항하려면 68~70피트의 수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에즈운하는 현재 수심이 58피트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91년부터 95년 사이에 홍해에서 지중해 쪽으로 가는 만재 유조선은 한해 3500척에서 2400척으로 30%가량이나 감소했다.
수에즈 운하청은 초대형 유조선을 유치하기 위해 운하의 수심을 72피트로 늘이기로 했다. 오는 2010년까지 계속될 이 공사를 위해 3만마력에 가격이 1억달러가 넘는 세계 최대 최신의 준설선을 투입했다. 그러나 운하수심을 깊게 하더라도 유조선들이 수에즈로 돌아오리라는 전망은 불투명하다.


  ♨ 나일강(The Nile)
나일강은 근원이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빅토리아 호수에서 시작하여 열대 초원을 흐르는 백나일과 에티오피아의 산악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들이 모여 이루는 청나일이 수단의 카루틈 남방에서 합류하여 이집트의 젖줄이 된다. 여기부터는 전혀 유입되는 물 없이 곧장 지중해까지 북으로 흘러간다.
아프리카 중부 고원의 봄비는 몇 달 후 이집트를 범람하는 큰 송수로 변하는데 대개의 홍수는 수해를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나일강 홍수는 7월에서 10월에 걸쳐 이집트의 완만한 사막을 서서히 흘러가면서 온갖 수목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뭇 짐승들이 서식 할 수 있도록 한다.
수백 ㎞를 흘러온 나일강은 카이로 북방에서 둘로 나누어져 나일 델타란 넓은 대평원을 만든다. 이렇게 형성된 땅이 한때는 세계의 곡창이라고 알려진 비옥한 땅인데, 이것은 홍수가 싣고 오는 아프리카 내륙 지방의 부엽토가 서서히 침전 되면서 자연의 퇴비를 깔아주는 결과이다. 이와같이 해마다 부엽토를 더해 가면서 이 비옥한 땅은 검은 색을 띠게 되었고, 그래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검은 땅이란 뜻에서 케미(Kemi)라고 불렀다. 이처럼 나일강은 자연의 선물을 남겨 주면서 서서히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것으로 약 6500㎞의 장구한 여행을 마친다.
연중 행사처럼 매년 어김없이 범람하여 수해가 아닌 수해를 안겨주는 나일강을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모든 것의 근원으로 보았고 또한 숭배하였다. 고대 이집트의 계절은 3계절로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나일강의 범람과 연관된 것으로 홍수가 나서 델타 지역이 물에 잠겨 있는 7~10월은 농한기, 물이 빠져나간 11~2월은 농번기, 그리고 3~7월은 추수기이다.
이렇게 수 천년을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강을 사람의 힘으로 조종해보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계속 되어서 19세기 초 케네디 모하멧 알리((Khedive Mohammed Ali)는 이집트 현대화 작업을 시작하여 나일강을 알렉산드리아의 식수원이 되게 하였고, 카이로 북쪽에 갑문장치를 설치하여 많은 농토를 확보하기도 하였으며, 1972년에는 아스완 하이 댐을 만들어 매년 범람하던 나일강은 인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강변의 많은 땅들은 전천후의 농토가 되었다. 그러나 나일강의 선물인 천연퇴비는 영영 잃어버리게 되었다.


■ 이집트, 출애굽기, 그리고 이집트 왕자 (Egypt, exodus and Prince of Egypt)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출발한 연대에 관한 견해로는 두 가지의 학설이 유력하다. 보다 빠른 견해는 이 사건을 기원전 1445~1440년 무렵 아멘호텝 2세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또 다른 견해는 람세스2세 치하에서 기원전 1290년경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성경의 기록은 초기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열왕기상 6:1에는 성전 건축이 출애굽(애굽 - 이집트) 사건 후 480년이 지난 솔로몬 재위 4년에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솔로몬 재위 4년이면 기원전 960년경이다. 따라서 출애굽의 시기는 1440년이 되는 셈이다. 또 1100년경에 활동했던 선지자 입다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을 정복한 지 300년이 흘렀다(사사기11:26)고 말한 것으로 보아 출애굽의 연대는 기원전 1440년경이 되는 셈이다.
고고학적 자료를 종합해 볼 때, 더욱 성경이 초기설을 주장하고 있으므로 실제적으론 출애굽의 연대를 기원전 1445~140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 이집트 상형문자 (Egyptian Hieroglypshs)
최초의 이집트 상형문자 :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서기전 300년을 전후하여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기록되었는데, 최근의 발견으로 이집트에서 먼저 상형문자가 발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98년 12월15일 AP통신은 독일 고고학 연구소의 군터 드라이어(Gunter Dreyer) 박사가 중부 이집트에 위치한 아비도스(Abydos)의 "전갈(scorpion)" 왕의 무덤에서 발견한 조그만 진흙판에 갈대 펜으로 새겨진 초기 단계의 상형문자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내용은 다름 아닌 세금에 관계된 것이어서 최초의 문자는 역시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전갈 왕은 서기전 3300년경 통치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인들보다 200~300년 가량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옥스포드 대학의 베인스 교수의 말처럼 단순히 이 증거만으로 이집트가 수메르보다 앞섰다고 볼 수는 없으며 두 지역 모두 비슷한 시기에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우표 크기의 매우 작은 이 진흙판들에는 동물, 식물, 산 등이 새겨져 있으며 삼베와 올리브 기름 등의 세금 목록으로 밝혀졌다. 또한 같은 시대에 관리들의 이름은 각각 생쥐, 송골매, 쌍 송골매 등의 동물 이름이 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드라이어 박사는 1985년부터 아비도스 지역의 묘지를 발굴했으며, 지금까지 모두 300여점에 달하는 토판문서와 토기에 잉크로 그려진 상형문자들을 발견했다.
카이로 남쪽 약 500㎞ 지점 나일강 서안에 위치한 아비도스는 이집트 최초의 수도로서, 초기 파라오들의 묘지와 특히 오시리스 종교의 중심지로 유명한 곳이다. 서기 1세기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크에 의해 최종적으로 편집된 오시리스 신화에 의하면 동생 셋트에 의해 살해되어 산산조각이 난 오시리스의 신체 중 머리가 묻힌 곳이 바로 아비도스미여 이곳에는 서기전 1300년경 세티 1세가 건설한 대규모의 신전과 오시레이온(Osireion), 그리고 람세스 2세 신전 등의 유적이 있다. 특히 세티 1세 신전 내부의 벽화는 33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마치 방금 칠한 것처럼 아주 선명하게 잘 보존되어있다.


◎ 최근 정치˙사회 동향
- 1981년 10월 사다트 암살로 당시 副統領이던 무바라크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1987년 10월 大選에서의 재선, 1990년 11월 總選에서 여당인 國民民義黨(NDP)의 압도적 승리 등을 거치면서 정치적 안정기반을 바탕으로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하였으며, 1993년 10월에 대통령에 재차 당선되어 집권 3기를 맞고 있다. 또한 1995년 11월 29일에 실시한 총선에서 집권당인 國民民主黨은 전체 454석 중에서 417석을 차지하여 정치적 안정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 1990년 걸프事態 이후 IMF 등 서방측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국가정책의 최우선 목표를 經濟改革에 두고 경제전반에 걸쳐 經濟民主化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나, 국내 이슬람 보수세력의 반발을 감안,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중이다.
그러나, 경제개혁 수행상 耐乏生活 강요에 따른 국민의 불만이 표출되고 있으며, 최근 북부지역에서의 回敎原理主義 세력의 빈번한 테러사건 발생, 최대 在野勢力인 무슬림 血盟(Muslim Brotherhood)에 대한 대중적지지 확산과 주로 고학력 노동의 높은 실업률(20%) 등 각종 不安要素가 산재해 있다.
- 外交的으로는 非同盟中立主義 및 均衡外交路線에 입각, 아랍권내 온건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특히 걸프전쟁시 미국 주도의 多國籍軍에 참여함으로써 아랍권내 최대의 리더쉽을 인정받는 한편, 이후 國內經濟 안정과 中東平和 유지를 위해 미국과의 경제, 군사적 밀월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왔다.
- 한편, 최근 核擴散禁止協定 문제와 대이란 제재 동참문제로 미국과 다소 불편한 관계가 표출되고 있으나, 매년 군사원조를 포함한 20억 달러의 미국원조 자금 지원 등을 감안할 때 양국의 밀월관계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 인접국인 이스라엘과는 1979년 평화조약체결 이후 1992년 양국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관계강화에 주력하고 있으나, 수단과는 수단정부가 자국내 회교과격단체를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관계개선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 고대 신화
▩ 오시리스와 이시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시에 로제타석을 입수함으로 프랑스의 학자 상포리옹에 의해 이집트 문자가 해석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신화나 정신 문화 등을 잘 알게 되었다. 그들의 신앙 중에 중요한 것은 사후의 세계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지상에서 죽어도 혼은 죽지 않는다고 믿었고, 미이라를 만들어 불멸의 신앙을 신봉했다. 그들의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은 '사자의 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신화는 창세 신화로 시작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창세 신화보다는 체계적이지 않다. 기록의 손실 때문일까? 태초의 Nun이라는 바다가 있어 거기서 아툼이 태어났다. 이 아툼은 태양신 라와 동일시 되기도 한다. 라는 스스로 게브, 슈, 테프누트, 누트를 낳아 이들 4명은 다툰 후에 게브는 대지가 되고, 테프누트는 공기가 되고, 슈는 증기가 되고, 누트는 하늘이 되었다. 게브와 누트는 오시리스와 이시스를 낳았다. 오시리스에 관한 신화는 이집트인들이 좋아하는 신화였다. 오시리스는 전 세계의 미개 문화에 문명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이복동생인 세트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어느날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는 오시리스를 시기한 세트가 음모를 꾸민 파티에 오시리스를 초대한다. 거기서 세트는 상자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들어가 몸이 맞는 사람에게 금화를 준다고 말했다. 여러명이 상자에 들어가 보았으나 오시리스 몸에 맞춰 만든 상자가 그들에게 맞을리가 없었다. 마침내 오시리스가 그 상자에 들어가자 세트의 부하 72명은 달려들어 상자를 닫아 나일강에 버렸다. 그것을 안 오시리스의 부인이자 혈육동생인 이시스가 그의 시체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것을 안 세트가 오시리스의 시체를 산산조각 내어 이집트 각지에 버렸다. 스는 다시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시체를 모아 원래의 모습으로 만들어 생을 살리는 의식을 행했지만, 오시리스는 이 세상에 살수가 없어 사자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는 세트를 무찌르고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 종교
Ψ 이집트 종교의 변천
5000년에 걸친 이집트 역사에는 시대에 따라 종교의 주류가 바뀐다. 고대 이집트 시댕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가 꽃을 피우고, 그레코 로만 시대 말기에는 원시 기독교인 콥트교가 번영한다. 다음으로는 이슬람교가 아랍군과 함께 전파되면서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가 된다. 그리고 이슬람교는 결국 이집트의 국교로 정해져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고대 이집트 종교는 다신교로 수많은 신을 섬기고 있었다. 신왕국 시대의 이크나톤 왕(기원전 1379~1362년) 시기에는 종교 개혁에 의해 일시적으로 일신교가 된 적도 있으나, 그 후 다시 다신교로 되돌아가 시대의 기본적인 경향은 변하지 않았다. 국가의 최고신은 고왕국 시대부터 변함없이 태양신 라신이었다. 신왕국 시대에는 테베의 수호신이었던 아몬라신이라 하여 국가의 최고신으로 군림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 후 그레코 로만 시대에도 한동안은 세라피스 신과 이시스 신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 이집트 종교와 그리스도 로마의 종교가 혼합이 된 듯한 종교가 퍼져 있었다. 그러다가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교화에 따라 콥트교가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


@ 경제
- 석유수출 收入, 海外勞動者 送金, 수에즈 운하 通行料, 그리고 外國援助 등을 재원으로 경제개발에 주력한 걸과, 1970년대~ 80년대 중반까지 연 7~9%의 비교적 높은 성장을 기록.
-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世界經濟 침체, 油價下落 등 대외여건이 악화된데다가 과거 統制經濟體制下에서의 누적된 非效率性 등 경제의 內在的 문제가 연쇄적으로 표출되면서 1987~92년 (2차 5개년 계획기간) 중에는 연 4.7%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 1991년 들어 걸프전쟁시 다국적군 참여에 따른 IMF, IBRD 및 서방측의 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市場經濟 도입 확대 같은 광범위한 經濟改革을 추진하여 왔다.
- 1993년도 실질 GDP 성장률은 긴축정책에 따른 국내수요 감소와 관광수입의 급감으로 2.9%에 그쳤으나, 1994년도에는 건설, 제조업분야 등 경제전반에 걸친 회복세에 힘입어 4.0%의 성장률을 실현하였으며, 1995년도에는 4.6%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3] 기독교에서 본 이집트

- 근처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스라엘의 북동쪽에서, 나일강을 중심으로 한 이집트 문명은 이스라엘의 남서쪽에서 시작된 문명이다. 이스라엘은 양대 문명 사이에서 두 문명을 연결해 주는 교두보의 역할을 해 왔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을 연결해 주는 이스라엘의 지리적 조건은 때로는 무역의 통로로, 때로는 전쟁의 길목으로 사용되면서 강대국들의 침략대상이 되었다.
고대의 앗시리아(지금의 이라크), 바벨론 제국이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거쳐야만 했으며, 마찬가지로 이집트가 북진정책으로 진군을 하면 무장한 군대는 이스라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스라엘은 역사상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으며, 전쟁이 지나간 지역은 폐허로 남겨졌다.
바벨론 제국 이후에도 페르시아 제국, 헬라, 로마가 차례로 이스라엘을 정복했다. 주후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함락함으로써 유대인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이스라엘 땅에 소수의 유대인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유대인은 전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주후 7세기에 등장한 이슬람 제국은 로마에 이어 이스라엘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그후 이스라엘의 통치권은 십자군, 이집트 맘룩, 오스만 터키가 차례로 이어받았다.
그럼 이렇게 침략을 받기만 한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집트(고대 명칭 애굽)와 이스라엘의 관계..- 과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400여년이 넘는 시간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집트에서 도망 나올 수 있었다. 출애굽 후에 그들은 40여년간의 광야생활을 거친 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지금의 이스라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위에 말한대로 여러나라의 침략으로 그들은 땅을 잃어버렸고, 그들은 전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다. 잃어버린 그 땅에는 팔레스타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고, 후에 이스라엘 인들이 돌아와 팔레스타인들을 쫓아내고 다시 차지를 한 것이다.(중동전쟁) 그러나 이로 인하여 중동 평화문제가 제기되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평화공존 등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게 되었고, 이에 따라 79년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조약 등이 성립, 이집트는 아랍세계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세계의 추세는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으나, 이스라엘은 본래부터 팔레스타인국가 설립에 반대하였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의 교섭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수교는 하였으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야에 걸친 본격적인 교류와 협력은 중동평화협상이 장착될 때까지 활성화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여기까지는 정치적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바라보면 달라진다. 성경을 중심으로 살펴보자면...
"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 임이니라" (이사야 19장 24~25절)
지금 여기에는 세 나라가 나온다. 다시 읽어보면 애굽은 내 백성이라 했고, 앗수르는 내가 지었다고 했으며, 또 이스라엘은 나의 산업이라 하시며 세계 중에 복이 된다 하셨다. 지금 현재의 지명을 보면, 애굽은 이집트임을 알 수 있고, 앗수르는 이라크임도 알 수 있다. 분명히 나라를 달리하고 종교도 달리 하는데도 이 세나라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애굽에서 430여년간을 식민지 생활을 했고, 앗수르 즉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정복했으며,  유대땅은 예수님께서 박해 받으신 후 1900여년간을 나라를 잃어버렸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세나라를 나의 백성, 나의 지음, 나의 산업이라 하셨음은  무엇일까..?
여기서 앗수르(이라크)는 살펴보지 않겠다. 이집트를 살펴보자.

이집트는 저주받은 함의 자손 미스라임이 시조로 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애굽을 내 백성이라 했으니 어떻게 된 것일까?
" 너의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뜻을 알 것이요 곧 네게 고할 것이니라'" (이사야 19장 12절)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말하였다.
"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일시라 하리라" (호세아 2장 23절)
이것은 애굽을 이방인의 대표적 나라로 택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내 백성이라 한 것은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을 예표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나라는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에베소서 2장 11~12절)
언젠가 이집트는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다.
"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날에 애굽인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 주시리라" (이사야 19장 21~22절)
하나님이 택하신 나라인 이집트를 먼저 믿은 백성인 이스라엘이 품어야 할 것이고, 또한 기독교 국가들도 이집트를 품고,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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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리비아

2003. 2. 3. 11:29
  
리비아에 대한 정보

Ⅰ. 일반
1. 위치 : 북아프리카 중앙부, 지중해 연안
2. 기후 : 북부:지중해성 기후, 남부:사막성 기후
3. 면적 : 1,759,540㎢(한반도의 8배)
4. 인구 : 550만명(1997)
5. 수도 : 트리폴리(Tripoli 170만명)
6. 주요도시 : 벵가지(Benghazi 80만), 미수라타(Misurata 40만)
7. 주요민족 : 아랍(Arab)인, 베르베르(Berber)인
8. 주요언어 : 아랍어(영어, 이태리어도 통용)
9. 종교 : 회교(Islam, 97%)
10. 교육 : 의무교육 - 대학까지 무료교육, 문맹율 - 60%
11. 언론:
- 신문 : 알 파즈르 알 자디드(약 5만부);
- TV : 국영 테레비젼(1 및 2방송);
- 라디오 : 국영(1 및 2방송, 이슬람방송)

Ⅱ. 정치
1. 국가성립 : 2차대전중 영, 불에 의하여 분할점령, 51년 유엔결의로 왕국 탄생
2. 독립일 : 1951.12.24 국경일 : 9.1(혁명기념일)
3. 정체 : 사회주의 인민공화제
4. 원수 :  무아마르 알   가다피(Muammar Al-Qadhafi)  Leader of  the  Great First  of September Revolution
5. 의회 : 총인민회의
6. 수상 : Abdul Majeed Al Gaud
7. 외상 : Omar Mustafa Al Muntasser
8. 주요정당 : 없음
9. 국제기구가입   : UN(1955.12),   ILO,  FAO,   UNESCO, WHO,  IFC,   IDA,  IMF,  ICAO, UPU,OPEC, 비동맹
10. 영해 : 12해리
11. 국방 : 85,000(육군 55,000, 해군 8,000, 공군 22,000)

Ⅲ. 경제
1. 국민총생산량 : $332억(1995) (1인당 $5,650)
2. 계획및중점정책 : 6차 5개년개발계획, 농공업개발계획 추진
3. 화폐단위 : Dinar($1=0.36D, 1995.1)
4. 주요자원 : 석유(매장량:450억배럴,일산:139만배럴), 천연가스
5. 무역(1996) : 수출 $97억, 수입 $78억
6. 외채 : 약 49억불


리비아의 아랍(Arab)족

인구 : 5,200,000명 (리비아 인구의 97%이며 도시화율은 70%이다.)
언어 : 모든사람이 아랍어를 사용한다. 또한 20%정도의 사람들은 영어를 사용할 수 있다.
위치 : 아랍족은 리비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수 종족으로서 리비아 전역에  두루 거주한다. 다만 리비아는 해안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토가  사막(전 국토의 90% 이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로 해안지역인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몰려 살고 있다.
경제 : 이들의 전통적인 산업은 농업이었으나  1959년 석유가 개발되자 대규모의 이농현상이 빚어졌다. 1961년 석유수출이 개시됨에 따라 석유산업을  기반으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나 석유 일변도의 취약한 산업구조를 이루고 있다. 리비아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하지만 89년부터는 부분적인 자유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종교 : 수니 이슬람이 국교지만 세속화 경향이 강하다. 다른 종교의 포교는  불법이고 '이슬람 선교'를 위해 매년  상당한 액수의 예산을 세운다.  이슬람의 행사와 예배가 엄격히 지켜진다.
기독교 현황 : 기독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무지하다. 선교에 대해서도 완전히  닫혀있고 매우 적대적이다. 알려진 그리스도인이나 사역단체 혹은 선교사는 없고, 해외 이주자를 위한 작은 교회와 로마 카톨릭 성당이 5개정도 있을 뿐이다.

리비아의 근대사

1912년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으나2차대전 후  영국,프랑스가 분할통치.  1951년 독립을 선언하며 왕국을 수립(아이르 이드리스 국왕). 1969년 9월 아랍민족주의를 내세운 자유장교단이 무혈쿠데타에 성공, 리비아아랍공화국(LAR)을 탄생시키고 혁명평의회가 실권을  행사. 1975년 우라늄 매장지인 차드 북부 사하라를 합병했고 1977년 국명을 사회주의 인민 아랍공화국 (SPLAJ :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 으로 고치고 혁명평의회를 전인민회의로   개편.  혁명이후   국가  지도자인   무아마르   가다피는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을 혁명 공약으로 삼아 교육혁명과 농업혁명 등을 추진해 왔다.

정치상황
1977년 3월 통치기구를 개혁해 전인민회의 서기국(5인으로 구성)이 실권기관이 되어 가다피가 서기장으로 취임. 77년 3월 인민주권확립(신헌법)채택, 인민의 직접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인민위원회(내각) 창설,  카다피는 3월 전인민회의  서기직을사임했으나 `9월혁명 지도자'라는 호칭으로 국가원수직 보유. 아랍사회주의연합이 유일 합법정당.

대외관계
아랍사회주의를 제창하며 `아랍통합의 기수'로 자처하는  가다피는 아랍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반시오니즘을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음. 86년 1월 미국은 가다피의 국제테러행위지원에 대한 보복조치로 미국인과 미국기업의 여행금지  및 거래중단 등 경제제재를 발표한데 이어, 4월 트리폴리 등지에  공습을 감행, 100여명의 사상자를 냄.  한편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또 88년 270명의 사상자를  낸 미국 팬암기 폭파사건의 용의자로 리비아인 2명을 지목, 인도를 요청했고 리비아  정부는 이들의 인도를 거부함에따라 미국과  영국 등은 리비아에 경제제재를 가함으로써 사태는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음. 92년 3월 31일 유엔 안보리가 항공기 운항금지, 무기금수 등 제재결의. 95년 4월 19일 이를 무시하고 리비아기의 사우디 운항을 강행.

리비아 경제
세계 4위의 석유생산국으로 OPEC에서 강경입장. 석유  무기화를 제창하며 생산제한, 금수,  가격인하 등의  문제에 선봉에 섬. 매장량 211억 배럴(세계 8위).

리비아의 사회문화
문맹률은 61%, 초등교육은 의무제, 대학까지 무상교육.  문화혁명을 추진, 각종 표시에서 외국어 일소. 아랍어 사용 철저. 신문 3개는 모두 정보, 문화성에서 발행하며 라디오와 텔레비젼 방송국 2개 모두 국영. 국영 자마히리야(JANA)통신이 있음.

대한(對韓)관계
남,북 동시수교. 한국과는 80년 12월, 북한과는 74년  1월 각각 외교관계 수립. 대한수입 1억 3973만달러, 대한수출 739만달러 (92년  11월). 동아건설이 리비아대수로 1,2단계공사를 수주하여 완료중이며 3,4단계 수주예상.


동아건설의 대수로 공사 개요

▲ 총 5단계로 나누어 단계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리비아 대수로공사는 리비아 동남부 및 서남부 내륙지역 지하에.매장되어 있는  풍부한 수자원(추정 매장량  35조톤 : 나일  강의 200년 유수량)을 취수, 리비아 북부지역  지중해 연안과 수로 인근의 농업용수와  생활용수, 그리고 공업지역의 공업용수를 공급하여 사하라 사막 북부를 옥토로 바꾼다는 계획으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 대수로 공사는 녹색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사업으로 리비아 정부는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대수로공사를 국가 최우선 사업으로 지정하고, 이 공사를 방해하는 경우  중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이 만들어져 있기도 합니다.

▲ 현 리비아정부는 혁명집권 후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이라는 기치 아래  산업 및 사회복지 향상을 위한 종합계획을.수립하고 각 분야에 걸쳐 정책적으로  혁명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국기도 그린(Green) 단일색으로 변경(녹색혁명은 전국토의 옥토화 내지는 초원화를 의미함) 했습니다.

▲ 방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대수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추진 하기  위해 공사 발주 당시 이미 기금을 확보하였으며. 특별법상 GMR Tax를 신설, 자금을 충당하고 있습니다.

▲ `리비아 대수로공사'는 국가지도자인 가다피의 혁명공약사업으로 545만 리비아인들은 한정된 원유고갈 시대를.대비하고 강대국들로부터 식량을 미끼로 한 간섭을 배제하며, 식량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아랍인(1억8천만)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식량생산국이 됨으로서 아랍통일 꿈을 실현시키는데 주도권을 잡고, 다시는 외세에 짓밟히지 말자는 국민감정에 기반을 둔 사업입니다.


대수로 공사 효과

▲ 1단계 통수식에 이어, 2단계공사의 통수식이  성공적으로 끝나게 됨으로써 `녹색혁명'을 꿈꾸는 리비아 국민의 열망이 더욱 가시화 됐습니다.

▲ 한편, 지중해 연안의 주요 거점도시인 벵가지와 서트, 트리폴리 지역의 사막지대의 옥토화가 가속화 됨으로써 리비아의 경제는 더욱 안정적인 발전을 기약할 수 있게 돼 리비아 국민의 삶의 질을 한층 높일 수 있게 됐습니다. 특히, 그동안 불모의 땅으로만 생각하던 리비아 사막이 한국의 동아건설에 의해 곡창지대로  탈바꿈 함에 따라 자급자족을 향한 리비아 정부의 원대한 목표가 하나, 둘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리비아 양국간의 경제적인 협력관계가 . 이를 계기로 더욱 공고해  질 것으로 보이며 양국간의 사회, 문화적인 면에서의 교류도 , 또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 이 공사를 통해 우리 한국이 얻은 경제적 이점은 외화가득,  고용창출, 기술축적 효과, 그리고 그에 따른 자신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 향후 공사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가 약  300억달러에 이르는, 문자 그대로의 초대형공사인 만큼 외화가득 효과는 막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2천 6백만명에 이르는 연인원 (한국인 1,250만, 3국인 1,346만)에서 보듯이 여기서 얻는 고용창출 효과 또한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 아울러 이 공사는 한국의 동아건설이 유수의 외국건설업체를 하청업체로 거느리고 참여해,신기술을 개발하고, 노하우를 축적함에  따라 우리 건설업체가  세계 어느 곳에서든 원청건설사로서 완벽하게 공사를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을 효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 특히 이 공사를  계기로 한국의 건설산업은 종래의  노동집약적 건설수출에서 벗어나 기술집약형 건설수출을 하게 됐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소득 중 하나입니다.


공사현황

▲ 리비아대수로 1단계 공사 내용
리비아 동부의 아즈다비아(Ajdabiya) 남방  약 400Km 지점인 사리르(Sarir)  우물지역과 약 670Km 지점인 타저보(Tazerbo) 우물지역의 지하수를  개발해 북부 지중해 연안의  아즈다비아를 경유, 서트(Sirt)와 벵가지(Benghazi) 지역까지 1일 200만톤의 지하수를 송수하기 위한 공사로 총 연장 1874Km의 길이에 관을 생산, 운송, 매설 공사

▲ 리비아대수로 2단계 공사 내용
리비아 서부의 트리폴리(Tripoli) 남방  약 620Km 지점인 Jabal  Hasouna 지역의 지하수를 개발, 수도인  트리폴리지역까지 1일  200만톤의 지하수를   송수하기 위한 공사로  총연장 1755km의 길이에 관을 생산, 운송, 매설하는공사

▲ 리비아대수로 2단계 추가공사 내용
2단계 공사의  북쪽 끝인  타루나/제파라(Tarhunah/Jeffara)지역에서  서방쪽 아부지안(Abu Ziyyan)에 1일 80만톤을 송수하는 관로 공사(83Km)와, 트리폴리 부근에서 서쪽 비어알가남(Beer Al-Ghanam) 지역에 1일 100만톤을  송수하기 위한 관로 공사(68Km),  그리고 2단계 우물지역의 1일 200만톤 취수 능력을 250만톤으로 확장하기  위한 취수관로(185Km)와 신규 우물 개발(116개) 공사

▲ 리비아대수로 3단계 공사 내용
3단계 공사는 1단계 공사의 송수량을 증대하기 위한 공사로  다음의 3개 지역 송수관 건설공사로 총연장 1300여km

1) 1단계 송수시설의 서쪽 끝인 서트지역에서 2단계 공사구간까지 연결하는 알 가르다비아/아스다다(Al-Gardabiya/Assdada)구간의 송수관 건설공사로 총 연장 190km (3단계 1차분 공사)

2) 리비아 동남쪽 쿠프라(Kufra) 지역의 취수장  개발과 사리르 남부지점(1단계 공사구간)까지의 송수관 건설공사

3) 1단계 지역인 아즈다비아에서 리비아 북동쪽  토브룩(Tobruk)까지 연결되는 송수관 건설 공사


화폐단위

리비아의 화폐 단위는 '디나(D/L)'인데, 정부 공시환율로 100달러  정도를 환전하면 33디나 정도로 바꿀 수가 있으나 암시장에서는 그 열배인 330디나 정도를 받을 수 있다.  물론 그런일은 드무나 거래를 하다가 적발되면 구속되는  수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식적으로 리비아내에서는 달러를 소지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인삿말 및 생활언어

리비아는 아랍 베르베르족의 혈통에 유럽 민족(특히 이태리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인지 기존의 아랍어에 베르베르어와 이태리 방언등이 섞여 있다.  이태리어의  영향을 들자면 음식의 경우 '만자리야'이며 아기가 '밤비노'인 경우등을 들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표준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며 부수적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언어 습관을 들여다 본다면 할 말은 다 하고 살 수 있는곳이 리비아라고 생각한다.

케이파 할락?(어떻게 지내?)
쉰 아크바락?(근황이 어때?)
쉬누 할(어때?)
보통 만나면 오른 손을 가슴에 얹었다 떼고 일분정도 같은뜻의 말을 계속 반복한다.
응답 - 꾸와이스 알 함두릴라!(남자일 때)
       꾸와이사 알 함두릴라(여자일 때)

Welcome - 아흘란 와 싸흘란
응답 - 아흘란 비크(남), 비키(여), 비쿠(복수)

Bye - 마앗 쌀라마, 일랄 리까.

And you? - 와 엔따(남자에게), 와 엔띠(여자에게)

How much does it cost? - 비 캄 , 캄 따만, 캄 풀루쓰?  깎을 때는 '낚쓰(부족하다)'
'캄'은 How many or How much의 뜻이다.
모두 얼마 입니까? - 마주무아 캄?  꿀루 캄?
비싸다 - 가알리,  싸다 - 라키쓰

Thank you - 슈크란

What is this? - 쉬누 하다(하디히) 쉬누'는 '무엇'이냐는 뜻이고 '하다(하디히)'는 '이것'이라는 뜻이다.

What's your name? - 쉬스막? 쉬누 아스막?

Where are you from? - 엔따(엔띠) 민웬?  민 씨르트 (씨르트에서 )'웬'은 Where의 뜻이고 '민'은 from 이다.

I'm from Korea - 아나 민 꾸리야(물론 쟈말리야이다. 샤말리야는 북한) 천천히,조금 - 슈웨이 슈웨이, 슈웨이야.   반 반 - 누쓰 누쓰

I'm sorry - 마알래쉬        뭐가 문제니? - 쉰 무쉬킬라?

No problem - 무쉬 무쉬킬라.  마피쉬 무위킬라.

Yes - 아이와 , 나암. No - 라(단호하고 강하게)

O.K - 마쉬, 하디르, 바-히

Sit down, Here you are - 타파딸
내일 - 부크라, 고두아 . 오늘 - 알욤.   어제 - 암쓰, 알바리하
가능합니까 - 뭄킨.   불가능합니다 - 무쉬 뭄킨

Finish, done.. - 칼라스
직진 - 알라 뚤
오른쪽 - 야민, 왼쪽 - 야사르, U턴 - 리프
버스 - 우뚜비스 , 하필라

Go away. Leave - 엠쉬(다소 명령조의 분위기), 마 쌀라마

Again, another - 마르라 따니(아띠니 푸르싸 마르라 따니 - 한번 더 기회를 줘)

Do you have ---? 안닼(남) 안딬(여)....?

Let's go(do) - 얄라 비나!  헤야 비나!

I want - 아나 누삐,        I hope, By(If) God's will - 인슈알라

I understand - 아나 페헴, I don't understand - 아나 무쉬 페헴

I know - 아나 아아리프 , 아나 아드리

I remember - 아나 페케르

Do you know...? - 엔따 타레프....?  할 타레프?

I want to see... - 누삐 아슈프

Please(부탁할 때) - 민파들랔(남) 민파들맄(여), 라우 사마흐트(남)  라우 사마흐티(여).

What do you want? - 엔따(띠) 쉰 투삐?

How old are you? 안닼 캄 싸나?

Just a moment - 캄싸 다끼끄. 바으다 슈웨이야 라우 사마하트(티)

Not yet - 마자알
축하할 때 - 마브루크

Happy new year - 꿀루 사나 와 엔뚬 꾸와이쓰!

Like this - 히끼

There is no... - 마피쉬



역사
리비아의 역사는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다. 지중해계 인종 리비아인과  아프리카계 인종 에티오 피아인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듯하다.  그후 BC 10세기에 이르러 트리리폴리타니아로 그리 스인이 와서 지중해 무역의 기지로 정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후 트리폴리타니아는 카르타고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번창했다.  BC 2세기에 카르타고가 몰락한 후에는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로마 지배 아래에서의 리비아는  무역활동의 기지로서 올리브, 포도, 보리, 밀 따위를 로 마에  공급하여, '로마 제국의 곡창'으로 불 리는 등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쇠퇴와 함께 반달족의 침공을  받아, 5세기에는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6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회복돠 함께 일시적으로 번영을 되찾았으나,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아라비아인이 침입한 것은 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인데, 670년 우마이야 왕조가 튀니지의 카이루안에  마그레브 지방을 통치할 총독을 배치한 뒤로 이슬람화되기 시작하였고, 아라비아어가 보급되었다. 11세기 중엽 아라비아인들이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에게 추방당하여 리비아에 이주했다. 그 결과로  부족 간의 항쟁이 벌어져 국토가  황폐해지고 동시에 아라비아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6세기에 한때 스페인과 몰타의 기사단의 지배아래 놓이기도 했으나 1561년 오스 만투르크 제국의 지배권에 들어갔다. 그후  1911년 이탈리아에 지배당하기까지 오스만투르크 제 국이 세운  괴뢰정권의 통치아래 있었다.  1911년 오스만투르크가 발칸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 이탈리아가 트리폴리에 침공하고, 그 이듬해에는  발칸전쟁에서 패한 오스만투르크와 조 약을 맺어 리비아를 식만지로 삼았다. 그러나 세누시 파 교단을 중심으로 한 리비아인의 저항 때문에,  해안지대 이외의 식민지화는 좀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대두와 함께 1940년에는 완전히 식민지가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후 패전국 이탈리아의 식민지 처리를 유엔  총회의에서 논의한 결과 1951년 리비아는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페잔 3개 주의 연방제에 의한 독립국으로 인정, 세누시 파 교단의 수장 모하메드 이드리사가  국왕이 되었 다. 1963년에는 헌법 개정에  의해 연방제가 폐지되고, 단일국가로서의 리비아 왕국이 탄  생했으나, 1969년 카다피에 의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군주제는 폐지되었다.


지리
북아프리카의 지중해안에 위치하고, 국경은 이집트,  수단, 차드, 니제르, 알제니,  튀니지와 닿아 있다. 지중해의 해안선은 2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리비아'란 말은 일찍이 북아프리카 일대의 사막을 가리키던 그리스어인데,  그 이름대로 해안지대를 제외한  국토의 약 90%가 사막지대이다. 국토 면적은 약 177만㎢로 동부의 키레나이카 지방, 서부  해안지대의 트리폴리타니아 지방, 그리고 서남부의 사막지대 페잔 지방 등 세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을 향해서 돌출한 표고 약 700미터의 자발 알 아흐다르 고원을 포함한 키레나이카 지방의 중심지는 벵가지이다. 트리폴리타니아 지방은 해안선에서부터 차츰 높아지는 단구가 알주프라 오아시스에 이르기 까지의 지역으로서 트리폴리가 그  중심이다. 이상의 북부 해안지방에 전인구의 90%가 집중되어 있다. 국토의 0.5%밖에 안되는 농업지대도 이곳에 있고, 주로 곡물이 재배되고 있다. 페잔지방은 사하라 사막이 연장된 곳인데, 세부하 등이 오아시스들이 군데군데 있다.


기후
대기후는 해안지방의 경우에 지중해성 기후로서, 연간  평균기온 20도 전후이고, 12월에 강우량이 가장 많아 150밀리미터 전후에 이른다. 봄, 초여름, 가을에는 때때로 기브리라고 불리는 건조한 연풍과 모래폭풍이 사막에서 엄습한다. 고온인데다가 모래먼지로  가득 찬 공기에 싸이면 매우 불쾌해지지만 2, 3일 만에 괜찮아지는 수가 많다. 내륙부는 사막기후로서 평균기온이 훨씬더 높고, 강우량은 연간  10밀리미터 이하로 매우 적다. 하계  4월 - 10월 : 6∼8월은 극도로 더움. 동계 11월 - 3월 : 온난하고 가끔 비가 옴.


사회 문화
정식국명은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  이고, 총인구  약 374만명이다. 엄정한 이슬람주의에 입각해서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적인 국가 건설을 추진하고  있으나, 카다 피의 테러지원 행위 때문에 리비아는 시만 국제적 고립속에 있다.  국가 경제는 석유산업에 의존 하고 있다.  석유매장량은 세계 최대라는 쿠웨이트에  못지 않다고 한다. 때문에 정부는 석유 산업을 기간으로 하는 경제정팩을 중시한여 관광사업에는 별로 힘쓰지 않고, 특히 1987년 8월 이후로는 일반 외국인에게  좀체 입국 비자를 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문화유적, 아름 다운  해안선 등의 관광자원에 기초한  관광정책이 세워지면서 얼마 전에는 3500만 달러를 들여서  트리폴리의 붉은 요새에 자마히리 박물관을  세우는 등 몇몇 박물관을 새로이 세웠다. 또한 1989년 11월부터는 일반외국인 고나공객에의 비자 발급 제한도 완화되었다. 한국은 건설 수주 (대수로공사)를 주로 하여 연간 1억 500만 달러를 수출하고 2600만 달러 어치를 수입하여 약  1억 2400만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하였다.(1989) 그러나 대수로공사  제2차 공사까지  동아건설에서 수주함에따라 리비아와의 교역은 더욱 증대될 전망이다.


인종, 언어
인구는 약 500만명이다.  주로 아라비아인과 베르베르인으로  구성되어 있다.키레나이카 및 트리 폴리타니아에는 아라비 아인이  많고 남부의 페잔 지방에서는  아라비아, 베르베르, 흑인의 혼혈이 보인다. 남서부에는 투아레그 유목민이 있다. 이밖에 아랍 각국에서 온 노동자. 동유럽, 인도, 파키스탄, 미국, 영국,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한국등의 사업관계자 등이 약 30만 명 있다. 공용 어는 아라비아어  이다. 입국카드 등도 아라비아어만으로 쓰며, 시내의 표지등에도 외국어는 쓰지 않고 있다. 그나마 약간 통용되는 외국어는 영어이다.


종교
종교는 대부분이 수니 파 이슬람교이다. 그리고 카톨릭교와 유대교도 조금 있다. 보도기관은 모두 국영이다.



유럽에 유화 제스처

리비아는 유엔이 자국에 부과하고 있는 경제 제재조치의  해제를 위해 도움을 제공하는 일부 유럽국가들에게 보답하는 차원에서 유럽국가에 주재하고  있는 자국 대사들을 통해 현재 계획중인 주요 프로젝트 관련 정보를 조심스럽게 제공하고 있다. ‘아프리끄’지에 따르면 리비아는 현재 45억달러 규모의 원유, 가스산업 관련 프로젝트를 준비중이다. 사업전망 조사 및 연구, 유전  확장, 3개 정유소의 현대화, 쎄브하 지역의 제 4 정유소 건설이 프로젝트의 주요 내용이다.

또한 리비아는 튀니지의 경계선과 이집트의 경계선을 연결하는  선로(線路)와 북부의 지중해 해안과 남부의 페잔을 연결하는 선로(線路)를 건설하기 위해 4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는 3천km의 철도망,  96개의 역사(驛舍), 544개의 선교(線橋)를 건설하고 244개의 기관차를 구입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이와  함께 리비아는 재래식 항공기를 교체하기 위해 25기의  유럽산(産) 항공기를 구입하는데 25억달러의 경비를 지출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흘리고 있다.

한편 유럽 주재 리비아 대사들에게 보낸 기밀 서류에 따르면, 리비아는 봉쇄조치가 해제될 때를 대비해 트리폴리,  벵가지, 쎄브하 공항과 같은  주요 기간산업 프로젝트에 많은 투자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정보들이 사실인 경우  위에 언급된 프로젝트에 약 1백10억달러의 경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동시에 리비아가 과연 이러한 경비를 충당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랍 연맹은 경제 제재조치로 리비아는 2백35억달러의 손실을 입었으며 유가하락은 리비아의  수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전한다. 게다가 리비아는 지난 6월에 개최된 제2차 OPEC 정상회의 결정안에 따라 원유생산을 일일 13만배럴씩 감축해야 한다.  최근들어 세계 주요 원유생산회사들이 리비아에서 활동을  재개하기로 결정했으나 1998년의 원유생산은 봉쇄조치에 의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제재  조치로 인해 유전지대를 가동하는데 필요한 장비의 사용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리비아 전문가는 리비아정부가 재정감축을 실행하기 위한 1998년  초의 계획에 따라 1.3% 이상 소비를 줄여야한다고 말한다.  실질적으로  리비아가 역점을  두고  있는 대수로  공사(the  Great Man-Made River)를 포함한 모든 계획들에 대한 예산삭감이 실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가 지출예산을 줄임에 따라 이러한 프로젝트의 완성 시기도 지연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 예산이 삭감되고 GDP 성장률이 -1%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리비아가 과연 새로운 프로젝트에 소요될 1백10억달러에 달하는 경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시되고 있다.


●OPEC(석유수출국기구) : 주요 석유수출국의 모임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베네수엘라, 쿠웨이트, 이라크 등 5개국이  석유수입의 안정적인 확보를 목표로  1960년에 결성했다. OPEC는 가격카르텔뿐 아니라 생산카르텔의 색체도 띠고 있다. 현재 회원국은 알제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 리비아, 아랍에미레이트연방, 이란, 나이지리아, 베네수엘라, 이라크, 카타르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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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2003. 2. 3. 11:22
1.위치
나이지리아는 북서 아프리카 해안인 기니아만에 위치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국토는 남북쪽으로는 1,050km, 동서 쪽으로는 1,130km로 되어 있고 총면적은 923,770km이다, 북쪽은 사하라 사막 아래쪽부터 시작되고 남쪽은 기니아만까지  이르고 있는 나라이다. 나이지리아의 주변 국가로는 서쪽에 있는 나라가 베냉이고 동쪽에는 카메룬이 있으며 북에는 니제르가 있고 차드호를 끼고 차드와 접해 있다. 나이지리아는 지리적으로 크게 두 개의 지역으로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남서쪽으로 흐르는 베뉴강에 의해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나이지리아는 니제르 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의 국명도  니제르강에서 유래된 것이다. 니제르강은 북동부 산악 지대인 시에라리온 고원에서 시작하여서 수단을 거쳐서 흐르고 있으며 강줄기가 나이지리아 북동부로 이 지면서 니제르강과 베뉴강이  로코자에서 합류하게 되고 Y자의 형상을 이루게 된다. 니제르강과 베뉴강 하류에는 삼각주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은 기름진 저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2.지세
나이지리아를 기후적으로 나누게 되면 북부의 고원지대는 차드의 초원지대에 속하고 있어서 숲과 풀밭이 우거진 스텝 지역이다. 북부지역에는 연평균  강수량이 500mm정도이고 우기가 짧은 편이다. 또 기니 아만  연안지대는 연 강수량이 2,000mm가  넘는 열대 우림 지역으로 야자와 카카오가 우거진 열대 우림의 밀림지대가 펼쳐져 있다. 나이지리아의 중부지역과 남부의 하우사랜드와 북부의 오요-요루바  고원과 우디 고원은 연  강수량이 1,000mm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형은 대륙 고원으로 남쪽과 동쪽부터 북쪽과 서쪽 방향으로 원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나이지리아는 바로 그 거대한 대륙 고원의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형은 해발 600~1,200m의  높은 고원지대와 그  사이의 낮은 지대들이 침식되어진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기니아만에  면한 연안지대는 남북의 폭이  16~96km MANGROVE가 우거진 습 지대를 이루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니제르강 하류에 넓고 비옥한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다. 기니 아만 연안에는  야자수 숲이 있다. 북쪽에는  80~160km 폭으로 고도 300m 이하의 기복 심한 열대 우림 지대가 펼쳐져 잇고 500km에  걸쳐 드문드문한 수풀과 초원지대가 계속되고 있다.

3.기후
나이지리아의 기후는 기니아만과 사하라 사막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일년이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져 있으며 남부와 북부의 기후가 많이 다르다. 남부 기니아만에 가까운 지역은 고온 다습하며 북쪽 사하라 사막에 가까운  지역은 사하라로부터 남하하는 열기로  고온 건조하다. 나이지리아의 평균 기온이 제일 높은 때는 2월에서 4월까지이다. 평균 기온이 제일 낮을 때는 7월에서 9월까지이다. 나이지리아에서 평균적으로 강수량이 제일  높은 때는 6월이고 강수량이 제일 낮을 때는 8월과 12월, 1월이다. 나이지리아의 연 강수량은 동서쪽이 비슷하다. 연 강수량이 남부지역은 3,500mm이고 북부지역은 500mm가 되지않는다. 나이지리아의 중부지역과 남부의 하우사랜드,북부의 오요-요루바 고원과 우디 고원은 연  강수량이 1,000mm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나이지리아 북부의 기후는 고온이기는 하나 건조하고 약 8개월 정도 계속된다. 그리고 건기 동안에는 한 울의 물도 내리지 않는 곳도 많으며 일교차가 평균 17도를 넘을 때도 있다. 그리고 10~4월에 걸쳐서는 강한 바람과 천둥을 동반하는 사하라 사막의 뜨겁고 모래 섞인 하마 탄이라고 하는 회색의 미세한 먼지와 함께 열풍이 불어오게 된다. 이때에는 안 내부에까지도 수북이 모래와 먼지가 쌓이게 된다. 나이지리아 남부의 기후는 습기가 매우 높고 장마철이 일년 내내 계속되며 평균기온이 32도로 덥고 습한 기후이다. 남부지역은 11~3월간은 건기이고 남서쪽은  지역에 따라 5~8월간이 우기이며 남동쪽은 5~10월이 우기이다. 강수량은 1,788-4,318mm이고 기온은 2~4월이 최고이고 8월이 최저이다. 남부지역은 평균 기온은 28도~32도  이다. 콜레라,말라리아,활 열병,뇌막염 등 열대 풍토병이 많으므로 건강 관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이지리아의 내륙 지방은 4~10월이 우기이고 11~3월은 건기이다. 접경 지역은 6~9월이  우기이며 강우량은 북쪽으로 갈수록 감소하고 508~1,270mm정도이다. 기온은 3~6월간이 최고이고 12~1월이 최저를 기록하며 평균 13도~34도를 유지하나 계절에 따라 기온의  차가 크다. 나이지리아의 내륙지방 한 여름의 평균기온은 평균 38도이다.


4.역사
나이지리아는 서부 아프리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기니 아만이 있고 북쪽에는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이주한 원주민들이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예로부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는 국가이다. 유럽의 여행자들이나  지도 제작자들이 붙인 이름으로는  slave coast Niger empire 등이 있다. 나이지리아는  고대부터 아프리카의 교차로 역할을  하던 지역으로 많은 부족 국가들이 형성되어 great empires of the western Sudan의 일부를 이루고 살았다.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민족 구성이 다양하여 약 250개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이지리아의 여러 부족들 중에서 10대 부족으로는 하우사족,풀라니 족,이보족,요루바족,카누리 족,에도족,티브족,누페족,이비비오족,이조족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부족들은 나이지리아 전체 인구의 약 90%에 이르고 있다. 10대 부족 중에서도  가장 큰 3대 부족이 있는데 대표적인 부족으로는 하우사, 플라니족 , 요루바족 , 이 보족이라고 할 수 있다. 북부지역에는 주로 하우사족과 풀라니 족이 거주하고 있고 남서부 지역에는 요루바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남동부 지역은 이 보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3대 종족들의 비율은 전체의 약65%이고 기타 250여 부족이 35%을 차지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2,000년경 다. 조스 프라튜 지역에서 철을 사용하였고 흙으로 만든 물건들과 주거 흔적을 발견하였다. 북부 나이지리아에는 서기 7세기경부터 사하라 사막을 근거로 하여 아프리카인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현재의 하우사 풀라니 문화권이 형성되게 되었다.  남부 나이지리아에는 기원전 1만년 전부터 인류가 살았을 것이라는 주거 흔적이 남아  있다. 니제르강과 베뉴강이 만나는 조스 고원 북쪽에는 기원전 인류가 살았을 것이라는 주거 흔적이 남아 있다. 니제르강과 베뉴강이 만나는 조스 고원 북쪽에는 기원전 500년경에서 서기 200년경까지 원주민들이  생활하였고 그 후로는 카넴 보르누 왕조의 하우사족,풀라니 족,카누리 족이 북부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살기 시작 했다. 일명 노크 문명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나이지리아 역사상 최초로 독립 국가의 모습을  갗추게 되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게  된 왕국이 바로 카넴 보르누 왕국이다. 이 왕국의 경제적 기반은 농업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부족 국가들과의 교역이었다. 카넴 보르누 왕국은  상류층들이 1086년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후로부터 이슬람문화를 바탕으로 정치적  기반을 삼아서 다스리기  시작했다. 하우사족들의 영토와 차호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약  800년 동안 번성하였다. 14세기  말에 세파와 왕조에 의 다스려지던 카넴 보르누 왕국은 부라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보루 누 지역만 남게 되고 차지하고 있던 니제르강과 베뉴강 대부분을 잃어버린 체 왕국이 축 되었다. 11세기에는 나이지리아 북부지역에 하우사 자치 지구가 건설되었고 나이지리아 지역을 하우사족들이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하우사 왕국은 인근의 북부 아프리카 부족 국가들과 무역을 하기 시작하였고 하우사족 들은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에서 전파된 이슬람교로 인하여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되었다. 하우사 왕국은 이슬람교를  통치 방식을 채택하여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이 곳은 서부 수단 왕국에 속해 있었고 서부 수단 왕국 중에서도 송하 이와 멜라 왕국은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여서  생활하고 있었고 왕들은 무슬림이  되었다. 송하이 왕국의 모하메드 마스키나는 철저한 무슬림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왕이다. 200년 동안 북부지역의 하우사 지역은 송하이 왕국에 속해 있었으며 이 시기에 아라비아 문도 전래되었다.

15세기 말경에 이르러서는 북부 나이지리아  전 지역의 사람들이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보수적인 성격이 강하였고 나이지리아의 왕조들과 상류층의 대부분이 이슬람 교도들로서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는 데에 이슬람교를 이용하였다. 상류층들은 기득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반 국민들에게 이슬람교를 이용하여 복종하게 만들었으며 각  부족간의 유대를 강화 시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교의 마지막  율법인 메카를 순례하는 것은 상류층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는데 메카 순례로 인하여 발전된 문명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교는 북부지역 뿐만이 아니라 서부지역의 요루바족들에게도 전파되었다. 요루바 지역은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빨리 기독교가 전파된 곳이었므로 많은 기독교 신자를 갖고 있었으나 이슬람교가 전파된 후에 이슬람교도의 수도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요루바족의 문화 유적들은 이집트의 유적들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남부 해안 지역까지는 이슬람교가 전파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열대  우림으로 숲이 울창하여 인적 교류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이슬람교는 남동부지역에는 전파가 되지 못했다. 나이지리아 북부로 이주해서 살게 된 풀라니 족,카누리 족도 17세기 이후에 북부 아프리카와 이집트부터 전파된 이슬람교를 믿으며 왕들도 모두 이슬람 교도가 된다.카크시나와 카노는 이슬람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북부  나이지리아 지역은 이집트의 트리폴리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한편 카노는 상업의 중심지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카노에는 방직과 수직 그리고 가축이 유명했으며 특히 장신용 가죽이 유명하였는데 모로코의 가죽이라고 불리는 카노의 가죽 장식품은 사하라 사막 위에 있는 북부 아프리카 지역에 까지 알려지는 특산물이 되었다. 카노의 가죽 장식품은 북부 아프리카의 철제 수공품, 유 제품,유럽 산 옷감 등과 물물 교환되었다.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에 의하여 경제적으로 카노는 발달하게 되었고 나이지리아가 북부 아프리카와 연결될 수 있도록 교통의 발전도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보르누 서부지역에 남아서 살고 있었던 하우사족은 인접 국인 수단의 송하이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풀라니 족은 하우사족이 살고 있는 영토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고 대부분의 풀라니 족들은 농작이 아닌 유목생활을 하게 되었다.  풀라니 족은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풀라니 대제국을 세우게 되었고 이  제국은 획일적인 중앙 집권적 통치제도를  행하여서 통치를 강화하고 질서를 확립하며 학문을 발전시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풀라니 대제국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통치 질서와 체제를  정비하게 되었다. 풀라니 대제국은 학문을 발전시키고 고유의 문화를 탄생시켰다. 베뉴강을 경계로 하여 베뉴강 상부에는 풀라니 족들이 살고 있었으며 니제르강 서남부지역은 루바족이 살게 되는 자연스러운  자연 환경에 의한 경계로 인하여 각자의 왕국을 발전시켜 나갔다. 15세기에 이르러서는 포르투갈 항해사 헨 리가 최초로 나이지리아의 라고스 해안에 상륙하게 되었고 기니 아만 일대의 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때 기독교와 함께 기독교 문명,청동기  문화를 가지고 나이지리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를  계기로 기니 아만을 통해서 처음에는 약 1,500명의 베냉족을 포르투갈에 노예로 잡아가게 되었다.  베냉왕국나이지리아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을 가진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니제르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속수 무책으로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다. 베냉 왕조는 포르투갈에 외교사절을 보내어 관계를 개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5세기 말부터19세기  초까지 포르투갈의 무역업자와 선교사들은 베 냉을 장악한 이래로 왈리의 일세킬리 왕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5세기 이후에 약 300년 동안 포르투갈은 노예무역의 선두주자로 악명을 날렸으며 연간 약 10만 명이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다. 노예무역은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서인도제도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면서 노예의 수요가 늘어나게 되었고 제국주의라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나이지리아 수난의 역사는 계속되게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럽인들이 대거 진출해서 노예무역에 참여 하였다. 특히 영국은 16세기 중엽부터 노예무역회사를 설립하였고 17세기가  되어서는 영국 노예선 들이  나이지리아 해안으로 밀어닥치게 되었다. 노예무역업자들은 니제르강 하류의 삼각주와 기니 만 해안 주변에 살고 잇는 여러 종족들을 잡아갔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노예 상인들은 더 많은 노예를 차지하기 위해서 앞 다투어 기니 아만으로 밀려들었다.  17세기에 이르러서 영국은 서부 아프리카에서의 노예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한편 말라리아 예방약인 기니 네가 발견되기 전까지 탐험가 망 고 피크를 비롯하여 많은 유럽인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목숨을 잃게 되었고 기니 아만 일대는 노예 해안이라는 속칭 이외에도 백인들의 묘지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1807년 영국은 노예무역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노예무역금지선언을 하기에 이르렀으나  영국 정부의 선언이 곧 노예무역의 종말을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여러 나라 선박들은 대서양을 통해서 계속해서 노예를 실어 나르게 되었고 그 명맥을 이어 나갔다. 당시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는 영국  함대가 항상 진주하여 노예무역을  감시하였다. 1826년 영국 선박은 나이지리아의 보니 강을 이용해서 내륙 지방까지  속속 진출하게 되었다. 영국 선박들은 노예무역이 아닌 야자유,  상아를 거래하기 시작하였으며  영국과 나이지리아간의 무역량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노예무역은 지속되었고 노예 공급은 아프리카의 족장들과 흑인 노예상인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으나 오래 있지 않아서 노예무역은  완전히 폐지 되었다. 노예무역이 나이지리아인 들을 비롯한 아프리카인들 에게 끼친 나쁜 영향들은 무수히 많으며 종족간의 유대감을 파괴하고  불신을 높였으며 인간의 존엄성과  재능까지도 말살시켰고 과거에 노예였었다는 심한 열등감과 피해 의 식을  지금까지도 느끼고 있다. 아울러 오늘날의 유럽 사회와 아프리카 사회의 교류에도 보이지 않는 장애가 되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식인들은 노예제도란 인류가 만들어 낸 최악의 제도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잔인성과 야만성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  하고 있다. 다른 여러  나라의 민족들이 400여년동안 문화를 발전시키는 동안 나이지리아의 역사는 제자리에 머물게 되었다.한편 노예무역으로 인하여 나이지리아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접촉을 하게 되었고  노예로 팔려 가게 된 지역에 나이지리아의  문화를 전파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브라질이나 서인도제도에서 요루바족의 문화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것을  아프니카니즘이라고 한다. 시에라에온의 수도인 프리 타운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흑인 2세들은 요루바족의  후손이라고 한다.

1861년 영국은 야자유와 상아 등을  상업무역품목으로 적극적으로 개발하기 위해서  라고스 지역을 합병하였고 영토권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사실상 나이지리아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1885년 영국은 베를린 회의에서 서구 열강들로부터 니제르강 일대의 권리를 인정 받게 되었다. 1893년에는 니제르강 독점권을 선포하였고 1899년에 영국과 나이지리아의 무역업자들은 죠오지 골리 의 주도로 나이지리아에 설립된 개인 회사들을 모두 통합하여 영국 정부가 특허권을 인정하는 왕립 니제르 회사를 통해서 하게 되었고 나이지리아의 상인과 전통 족장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무역의 권리를 뺏게 되었고 니제르강 유역의 행정과 조약 체결 권,세금 징수관등의 권리를 행사하였고 니제르가 일대의 무역을 약 15년간 계속 독점하게 되었다. 1900년 영국 정부는 왕립 니제르 회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라가도 총독 아래에 있던 전통적인 왕족과 족장들이 왕립 니제르 회사의 역할을 담당하여 전통적인 권위를 유지하도록 교묘하게 통치하는 이른바 간접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영국은 남부 나이지리아 보호령과 북부 나이지리아 보호령을 가가  구분하여 선포하고 식민지로 삼았으며  보호령에 감시자를 파견하였다. 프레드릭루가드는 나이지리아의 니제르강 일대를 북부 나이지리아 보호령으로 선포하였다.

영국 정부는 나이지리아의 남부 해안지대인 비아푸라만 베냉만에서의 나이지리아  무역활동을 감시하였고 사법,행정,조세 권을 가진 영국 영사를 나이지리아에 파견하였으며 영사가 관할하는 지역을 보호령으로 선포하였고 점차 나이지리아의 내륙 지방으로 보호령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비아프라만과 베냉만에서의 보호령은 남부  나이지리아의 보호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영국은 나이지리아의 행정을  식민지 중앙정부구조와 원주민들  고유의 행정구조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식민지 중앙정부구조로는 총독과 부총독,참모,지방 관료, 군인  ,경찰들로 구성하였고 원주민들 고유의 행정구조는 부족장들로 구성하였다.1906년 영국은 수도인 라고스에 보호령을 선포하고 라고스 보호령과 남 나이지리아의  보호령을 합병하여 라고스 식민지를 통합하게 된다. 1914년에는 북부 나이지리아의 보호령과 남부 나이지리아의 식민 보호령을 통합하여서  영국의 식민 보호령인 나이지리아라고  이름을 붙인 다음 영국 총독이 나이지리아에서 모든 권리를 행사하는 공식적인 식민지이며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영국이 나이지리아의 전역을 빼앗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라고스에 총독으로 있던 올드 카라바 영사와 특허권을 가진 무역회사의 도 이었다.

1922년에 영국 식민 정부는 신 헌법을 제정하고 입법 회의가 창설되었으며 나이지리아인 10명을 포함한 46명의 의 원을 선출하였다. 이로써 영국의 총독인 프레드릭 루가드에 의해 새로운 통치 방법인 이중 위임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중  위임 통치는 나이지리아인들과 나이지리아에서 살고 있는 영국인들간의 문화와 지식의 교류를 통하여 같은 인간이라는  동질성과 평등성을 보장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사린다는 취지로 나이지리아인들의 전통적인 관습과 활양식을 그대로 살릴 수 있도록 하는 허울 좋은 제도 였다. 이중 위임 통치 방식은 나이지리아를 영국이 통치하면서 도덕적인 의무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의무 수행을 위한 방법은 두가  지가 있다. 첫째는 나이지리아 원주민의  발전을 위하여 서구 문물을 소개하는 것이고 둘째는 나이지리아 원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통치 방식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나이지리아에서 착취를 할 때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채택한 통치 방식으로 영국인들에 대한 반발심과 저항 의식을 피하고자 하는 저의가 깔려있으며 사기가 저하된  부족장들의 권위를 회복시켜서 이용하자는  목적이 있는 것으로 나이지리아 국민들에게 투자될 관리 운영비와 인건비로 충당할 세금을  걷어들이기 쉽게 하기 위해서 부족장들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영국 식민 정부는 세금 징수를 강화하기 위하여 야자유,코코아,면화,고무 등 환금 작물의 재배를 장려하고 적극적으로 수출하도록 하였다. 영국은 간접 통치 방식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족장의 권위를 강화하였고 효과적인 세무 방식을 도입하였다. 족장들의 권한은 모든 정책과  통치지역 내를 감시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 경제정책은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데 있다.  나이지리아인들 의 의식 속에 토지란 전통적으로 부족 전체의 소유로 되어 있는 것으로 영국 식민 정부가 토지를 소유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므로 유화정책을 통하여 부족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서  영국인들의 토지 소유와 거주지 확장이  억제되었고 영 정부 차원의 투자가 아니면 개인이나 단체의 투자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나이지리아의 경제,정치와 교육 등 전반적인 사화발전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급기야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영국의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이지리아의 지식인들과 국민들 사이에서 높아지게 되었고 나이지리아의 민족주의 의식이 팽배하게 되었으며 정치적,경제적으로 완전하게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 가자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1946년 리차드 헌법이 영국 식민 정부에 의해 공포되었고 리차드 헌법에 의해서 나이지리아에 대하여 입법권을 행사하는 입법 대표 의회를 설치하기로 하였으나 나이지리아인들은  리차드 헌법을 반대하였고 나이지리아의 자치를 요구하는 대표부를 영국에 파견하였으며 리차드 헌법 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1950년 맥퍼슨 헌법에 의해서 입법기관을 나이지리아인들로 구성한 입법 대표 의회를  만들고 중앙집행기관으로 내각을 만들게 되었다. 1951년  영국은 나이지리아를 북부 나이지리아와 남부 나이지리아를 합쳐서 식민지정책을 펴 나가게 되었다. 한편 맥퍼슨 헌법에 의해 새로 구성된 내각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였고,나이지리아 국민  평의회,급진파,북부 국민 회의 등 3개의 자치구를 확립하게 되었다.

1954년에 제정된 리텔톤 헌법에 의해 나이지리아는 연방제 형식을 취하고 지방 정부와 의회는 연방 정부의 승인 아래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나이지리아에 사법관도 설치하였다.1957년 런던  회의 결과에  따라서 나이지리아  동서부지역의 자치가  인정되었고 1957년 9월에는 벨레와가 나이지리아의 초대 수상으로  지명되었다. 나이지리아는 3개의 정당을 규합하여 내각을 새롭게 구성하였고 1958년 런던 제헌회의 의 결정에 의해 나이지리아는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1960년 10월 1일 나이지리아는 독일의 식민지였던 카메룬의 북부지방을 병합하여  영국에서 완전히 독립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영 연방에 속한 상태로  독립 국가가 되었고 구제연합에도 가입하여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1960년에 벨레와는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다. 1963년 NCNC의 아지키웨가 나이지리아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됨으로써  나이지리아 연방 공화국인 제1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 행정구제도는 4개 주에서 모두 12개 주로 재편성되었다. 나이지리아는 NCNC와 AG,NPG 등 3대 정당간의 다툼,긴장  무질서상태로 인해 혼란한 정국은 계속된다.

1966년에는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북부의  일부지방을 장악하고 연방 정부의  바레와 수상 및 서부, 북부지역의 수상을 암살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는 이론시 장군에 의해 진압된다. 한편 북부에서는 하우사족과 이 보족간에 무력 충돌이  생겨 옛 행정구인 북부지역에서만도 수천명의 이 보족이 하우사족에 의해 살해되게 되었고 수많은 이보족들이  북부지역에서 도망가게 되었다. 이론시 장군(동부 이보족 출신)은 정권을 이양 받아 군사  정권을 수립하고 헌법의 일부를 중단시키고 정당들의 활동도 금지시켰으며 이론시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 정권을 수립하게 되어 제1차 군사정부가 탄생되게  되었다. 문민 정부 이후에 13년 동안의 군사 통치가 시작되는 시발점이 되게 되었다.

1966년 7월 군부에서 제2차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북부지역의 소요 사태 책임을 이론시 장군에게 돌리고 쿠데타 세력들은 그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야쿤바 고원 중령(베뉴 프라트주 소속 부족 출신)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국민 의회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헌법을 개정하여 입법과 행정 전권을 최고 군사 평의회,연방 집행 평의회로 된 군사정부에 일임한다고 하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한편으로 고원정권은 특사령을 발표하여 제1차 구데타에 의해 구금되었던 주요 정치 인사들을 석방하였다.

1967년 고원 장군은 동부와 서부,북부의 각 지구간의 단결을  막을 목적으로 나이지리아 연방을 12개 주로 계속 유지하였으나 이조치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1967년 4월에 동부지역의 군정 장관인 오주크와 장군은 동부 나이지리아의 자문 회의의 결정에  따라 [비아프라 지역의 독립]을 선언하게 되고  나이지리아의 연방에서 분리하게  된다.비아프라 독립을 선언한 후 나이지리아는 최대의 시련을 맞게 되었다. 비아프라 독립 선언 후 연방 정부와 비아프라 자치구는 이로부터 2년 반간의 내란이  시작되게 되었다. 비아프라 전쟁은  미국과 소련 등 서구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나이지리아 내전에 개입하게 되었고 비아프라 내전은  국제 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비아프라 전쟁은 1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100만인에 이르는 아사자를 내게 하는 나이지리아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이 되었다.

1970년 1월 오주크와 장군은 비아프라 정권을 에피옹 소장에게 이양하였고 오주크와 장군은 아이보리코스트로 망명하였다. 연방 정부군에  의해 비아프라군은 비아프라  지역을 뺏기게 되었고 비아프라 정권은 연방 정부에  결국 항복하게 된다. 나이지리아의  내전은 2년 만에 종결되게 되었다. 고원 정부는 1970년 4월에 나이지리아 내전으로 인하여 사회 전반이 침체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제2차 국가개발 4개 년 계획을 계속해서 실시하였으며 국내 개발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1973년 이후 나이지리아는 적극적이고 집중적인 석유개발을 하게 되었고 수출 증가로  인해서 국가 수입이 증대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석유수입으로 인해서 경제 부흥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1975년부터 1981년 까지 계속적인 국가개발정책을 진행시키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경제력을 지닌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고  경제력으로 인해서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83년 12월 말에 제 5차 군부무혈쿠데타가 일어나고 샤가리 대통령의 민간정부는 붕괴하게 된다. 군사정권은 부하리 소장을 의장으로 하고 19명으로 구성된 최고 군사회의를 설치하고 최고 통치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부하리 군사정부는 샤가리 민간정부 말기에 만연했던 정치의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고 경제 부흥을 꾀하며 사회 모든 기관의 기반을 재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서 정책을 펴 나갔다. 부하리 정권은 노동 시장을 보호하고 화폐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생활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또 대외적으로는 중장기 계획으로 대외 채무의 반환을 행하는 등 노력을 하여 국제수지의 흑자를 이룩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으나 석유의 지나친 과잉 생산으로 인하여 오히려 경기가 악화되었고 국제적인 석유가격 폭락 율로 인하여 인플레,실업률,산업계 불황이 계속되었으며  경제상황을 개선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부하리 군사 정권은 언론의 통제 등 인권 억압적인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나이지리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높게 일게 되었다.

1985년 8월 제6차 쿠데타가 발생하여 부하리의 군사정권이 붕괴되고 신 군사 정권은 전 육군 참모총장인 바방가다를 대통령 겸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였고 28명의 군사 통치  위원회를 설치 통치기관으로 삼는다. 바방가다 정권은 자신의 정권을 민간 정부로 이관시키는 과도기적인 정권이라고 규정하였다. 바방가다 정권은 부하리 정권의 지도력  상실과 군 내부의 단결과 화합 부족,지도층의 권력남용,경제개혁정책 실패 등 부하리 정권을 실패한 정권으로 단정하였으며 정권 확립과 군 내부의 단결과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고 경제를 재건하여 경제적 낭비를 없애고 정과 부패척결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고 당초의 계획보다 앞당긴 1992년에 민정 이관을  목표로 해 1987년에 [민정  이관 프로그램]을 발표하게 되었다. 부하리 정권은 부패한 문민 정권의 정치적 전통과 결별하기 위하여 공의 경험이 있는 정치가와 정치 경험이 있는 군인의 정치활동의 참여와  과거에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한편 1991년에 정치활동의 규제조치를 해제하였다. 1990년 4월에 북부지역의 군부세력 들이 부 리 정권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계획하였으나 10시간 만에 진압되었고 쿠데타 기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으며 쿠데타 가담자 69명이 모두 총살당하게 됨으로써 무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1993년 8월에 하기로  한 민정이양계획을 바방가다 대통령은 3차례나 연기하였고 민정이관을  완료시킨 후에 퇴임하겠다고 하였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93년 6월 12일 양대 정당 대선을 실시하였으나 바방기다 대통령이 아비올라 후보에게 패배하자 선거 부정을 이유로 무효화 시킨다.  국내외의 강한 반발 여론과 압력에 의해 바방기다 대통령을 1993년 6월에 사임하게 된다.

나이지리아의 역사에 군사정부가 민간정부에 이양한 것은 1979년 오바산죠 군사정부가 선경 의해 대통령에 당선된 샤가리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한 것이 최초이다. 바방기다 대통령은 스스로 민간 정부로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여러 번 약속을 하였으나 결국 지키지 못하게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권력의 힘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1993년 1월부터 과도내각을 이어 온 쇼네 칸을 수반으로 바방기다 대통령이 물러난 후 임시국민정부가 출범하였다.1993년 11월에 아바차  국방장관이 쿠데타를 주도하여 쇼네 칸이 이끄는 임시국민정부를 몰아내고 집권하게 된다. 기존의 행정과 입법기능을 일시에 정지시키고 정당활동도 금지시킨다. 군부가 국정 운영을 전부 장악하게 되었다. 아바차 장군은 PRC(임시통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주지사 전원을   군부 인사로 대체   하였다. 1994년 NCCC(헌법 회의 위원회)를 발족시켜  제1단계 정치 일정을 발표하였다.  정치 일정은 제일 먼저 기초 단위인 선거인단을 선출할 예정이고 헌법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헌법 회의를 출범하며 헌법 초안을 작성하여 정부 심의를 받을 계획을 세웠다. 1993년 대선에서 승리한 아비올라는 자신이 정통성 있는  대령이라고 1994년 6월에 선언하였으나 아바차  정권에 의해 강제 구금된다. 1994년에 석유가스노조는 아비올라의  석방을 촉구하며 파업을 하였으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1995년에  나이지리아의 아비올라 군사정권은 정치활동의 금지를 해제하였고 제2단계 정치 일정을 발표할 예정이지만 나이지리아의 헌정복귀는 아직까지도 불투명한 상태이다.



5.인구
나이지리아의 총 인구는 12,628만 명이다.(92년 통계)나이지리아의 인구는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된다.  나이지리아는 세계에서 9번째로 인구가 많다.인적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아직 인력을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하여 실업률이  높다. 나이지리아의 인구 성장률은 3.3%이다. 나이지리아의 평균 수명은  50세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평균  수명인 53세보다 낮으며 세계적인 수준에서 보면 평균 수명이 매우 낮은 편이다. 아프리카에서 나이지리아의 지리상 위치는 대륙 횡단의 교차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나이지리아는 여러 민족과 문화를 접촉할 수 있었다.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이주하여서 살게 되었고 나이지리아는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25%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의 총 인구는 전 세계에서 9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는 인력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다. 나이지리아에는  약 250개의 부족이 살고 있으며 각 부족들은 고유의 관습과  전통 그리고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다. 10대 부족은 나이지리아의 약 250개의 부족  중에서 90%을 차지하고 있다.  즉 나이지리아 전체 인구의 9/10라고 보면 된다. 10대 부족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 비율을 가진 부족을 나이지리아의 3대 부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3대 부족들에는 하우사 플라니족,요루바족,이보족이 들어가게 된다. 3대 부족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65%이고 약 250개 부족은 35%를 차지한다.

나이지리아의 인구 분포를 보면 사람들의 대부분이 비교적 살기 편한 북부지역의 카노 남부지역의 라고스에 집중되어있으며 전체 인구의 약 35%가 도시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농촌에서는 65%가 거주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인구 조사를 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몇몇 부족들이 인구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출생률이 제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높고 인구 조사에 정확도와 신뢰도 등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정확한 인구 추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6.민족
나이지리아는 지리적 위치가 아프리카 대륙의 중심지에 있으므로 민족과 문화와 언어가  매우 다양하다.나이지리아에는 현재 약250개의 종족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각자 고유한 관습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에는  3대 부족이 있는데 하우사/플라니족,요루바족,이보족이 해당된다. 나이지리아는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60년에 독립하였는데 영국이 지배하고 있을 때 나이지리아를 연방 공화제로 통치하게 되었는데 영국 정부는 나이지리아의 3대 부 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으로 경계선을 삼아서  통치하였다. 북부지역은 하우사/풀라니족,남서부 지역은 요루바족, 남동부지역은 이보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3대 종족의 비율은 나이지리아 전체 부족의 약 65%이고 기타 250여 종족이 35%를 차지하고 있다.

3대 부족 외에 더 작게 세분하면 10대 부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렇게 나눌 수 있는 근거는 언어이다. 10대 부족들은 각각 고유의 언어를 쓰고 있다. 3대 어족에 해당되는 하우사/풀라니족,요루바족,이보족이 있고 그 밖에 카누리족,티브족,에도족,누페족,이비비오족,이조족 등이 있고 이들 부족은 나이지리아 전체 인구의  약 90%에 이른다. 부족간에는 서로 강한 라이벌 의식이 있어서 지역 안에서 잦은 충돌이 있다. 그러나 북부지역과 남서부지역, 남동부지역에는 각각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부족이 있으므로 소수 부족들은 그들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지리아의 부족들은 각 부족이  고유의 전통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부족에 대한 우월감이 높은 편이다. 나이지리아의 정, 사회에 안정을 찾지 못하는데 대하여 서로에게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정치권 대부분 사람들은 3대 부족 중에서도 최대의 부족인 하우사/풀라니족의 출신이다.하우사/풀라니족들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로서 북부지역에서 주로  거주하고 있다. 요루바족은 나이지리아의 남서부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요루바족은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의 비율이 반반이다. 나이지리아에 이슬람교가 울창한 삼림지대인  지역적 요인으로 인하여 빨리 전파되지 못하였다. 이보족은 나이지리아의 동부지역에서 주로 살고 있으며 1967년 비아프라 내전의 주무대가 되었다. 동부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북부지역의 하우사 풀라니족의 이보족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게 되자 마침내 비아프라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와 갈등을 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의 부족들은 예전부터 포루노  왕국과 풀라니 대제국, 하우사 왕국, 베냉 왕국, 오요 왕국등 각 부족마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기 때문에 각 부족의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그런 까닭에 나이지리아가 1960년 독립 이후에도 각 부족의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그런 까닭에 나이지리아가 1960년 독립 이후에도 각 부족의 단결과 화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 시절부터 나이지리아는  각 주가 부족들의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통치되고 있기 때문에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가 각 부족들을 잘  화합하는 것이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며 그로 인하여 정치와  경제,사회가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7.언어
나이지리아의 언어는 방언을 포함하여 250여 종의 언어가  있다. 나이지리아의 공용어는 영어이고 나이지리아는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로 교육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각 종족의 언어가 주로 사용되어지고 있지만 공식적인 자리와  상거래에서는 영어가 주로 사용되어진다. 나이지리아 상업어는 고유 언어에 종족의 색채를 가미한 언어로써 상거래가 활발한  남부에서 주로 사용되어 지고 있다. 나이지리아 상업어는 영어에서  언어를 많이 차용하여 만들어졌으며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쓰여지고 있다.

북부지역에서는 식민통치 때부터 계속해서 하우사어가  공식,비공식 언어로 사용되어 졌다. 북부지역에서는 하우사족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소수 부족들은 자신들의 고유 언어를 포기하고 강제적으로 하우사어를 써야 했다. 하우사어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다.남서부는 요루바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향으로 대부분 요루바인족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동부지역은 이보족이 거주하는 데 이 지역은 외국인들의 출입이 빈번한 지역으로 주로 이보족의 언어가  사용되어져 왔으나 현재는 정치와 경제  변화에 따라 영어가 주로 사용되어 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영어는 영국이나  미국에서 사용하는 정통 영어가  아니고 그들의 고유언어와 혼합되어져 나이지리아화된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그리고 나이지리아에서는 지역마다 영어의 악센트를 서로 다르게 하는 경우가 많으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나이지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영어를 실용적으로 간단하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도 상호간에 사용하는 영어를 독자적인 표현 방법으로  쓰기도 한다. 영어는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을 표현할 때 다른 언어보다 간단하게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지역마다 사용되어 지는 언어는 가가 다르다고 하였는데 크게 세 개의 언어군으로 나눌 수가 있다.먼저 아프로-아시아틱 언어군과 니제르-코르도 파니안 언어군,닐로-사하란 언어군으로 나누게 된다.아프로-아시아틱 언어는  차드어인대 드어는 북부지역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하우사어가 바로 여기에 속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인의 25%가 사용하는 제1의 언어군이고 나이지리아인의 10%는 아프로-아시아틱언어를 제2의 언어군으로 사용하고 있다. 둘째로 닐로-사하란어군에 포함되는  언어는 사하란어, 송하이어 자르마, 덴디어 등이 있다. 사하란어, 송하이어는 나이지리아의 다수 종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이다.주로 북동쪽의 카누리족이 사용하고 있다.마지막으로 니제르-코르도파니안 언어군은 150여 개의 언어가 베냉어 , 콩고어, 이비비오어, 아나앙어, 티브어에 속하고 있으며 이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1%이다.또 기타 어족으로 크와어가 있는데  나이지리아에서 50여 개의 종족이 사용하고 있다.크와어족에는 요루바족과 이보족도 포함이 되어 있고 그 밖에 구르어, 만데어, 서대서양어가 있다.


8.종교
나이지리아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기독교가 약 30%를 차지하며 부족 고유의 토속 신앙이 10%을 차지한다.나이지리아에는 국교가  없다. 북부지역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많은데 하우사족이 대부분이다.한편  요루바족은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각각 50%씩 이다. 북부지역에서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충돌을 일으키키도 한다. 북부지역에서는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여성의 지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낮은 편이다. 타 지역의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도층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로 약 95%가 이슬람교도로 이루어져 있고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이루어 보아서  나이지리아에 종교적인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슬람교는 11세기 하우사 왕조 EO에 이슬람 문화와 함께 전파되었고  이때 아라비아 문자도 전래되었다. 이슬람교의 다수를  이루는 종파는 수니파이고  남서부의 이슬람교도인들은 인도에서 발생된 수니파가 아니면 이단이라고생각하는  아흐마디야파를 믿는다. 나이지리아에서 이슬람교의 주종을 이루는 수니파는 집회가 특색이 있어서 집회에 의해 구별할 수 있도록 차림새와 의식을 갖추게 된다. 기독교는 예전에 비해  급속도로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 선교단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자수가 증가하게 되었으며 나이지리아 주민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도 신자수를 증가 시킨 요인이 되었다.나이지리아에는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융합 되어 있다.  19세기에 나이지리아에 전파된 기독교는  분파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있다. 기독교는 아프리카의 토속 신앙의 생활과  도시 생활을 반영하여 신앙의 발전을 도모하여 왔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교리, 의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토속 신앙과 융합하여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고 이러한 노력으로 토속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이슬람교와 기독교로 믿음을 바꿔 나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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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수단

2003. 2. 3. 11:15

1. 개관

o 공식국명 : 수단공화국 (The Republic of the Sudan)

o 수 도 : 카르툼(KHARTOUM)

o 위 치 : 아프리카 대륙 동북부 이집트, 이디오피아,  챠드, 콩고, 우간다, 리비아, 에리트리
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케냐 등과 접경. (인접국 9개국)

o 기 후 : 북부 - 사막지대 (섭씨 40도이상 건조)  

중부 - 사바나지대 (우기와 건기구분, 일교차 심함)

남부 - 열대우림지대 (우기 8개월, 강우량 2천미리)

* 카르툼 지역 기후 - 최고 : 6월 (섭씨 26도 - 45도)

최저 : 1월 (섭씨 16도 - 32도)

4월 - 10월 : 모랫바람(Habub) 계절
  
수도 카르툼의 기후는 일년 내내 높은 편이고  대개 11월∼3월, 4월∼6월, 7월∼8월, 9월∼10월의 4가지로 나눠진다. 11월∼3월 사이에는 비교적 서늘하고, 연중 가장 참고 견디기  쉬운 시기로 비는 내리지 않고 공기는 건조하며 오히려 밤에는 춥게 느껴질 정도이다. 3월 하순에서 4월에 걸쳐 기온이 급격히 상승하여 연중 가장 더운 계절이 되는데 이때 옥외의  기온은 섭씨 50℃ 이상에 달한다. 이  시기에 하부부(HABOOBS)라고 불리는 모래먼지폭풍이 시 하는데 5월∼6월이 가장 많고 7월∼8월까지  이어진다. 여러 종류의 하부부(HABOOBS)가 있는데 맹렬한 것은  그리 자주 오지는 않지만,  소규모의 하부부(HABOOBS)는 빈번한 편이다.

하부부(HABOOBS)가 습격해오고 있는 사이에는 모래먼지가 강풍으로 난무하고, 낮에도 어둠침침해지며 시계(視界)도 극도로 좁아진다. 물론 집은 거의 꼭 문을 닫아두어야 하고 워터쿨러는 정지시키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실온은 더욱더 상승한다. 이렇게 문을 닫아두어도 모래먼지는 공기와 같이 실내로 들어오기 때문에 가장 불쾌한  시기가 된다. 그러나 하부부(HABOOBS) 후에는 비가 이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온도도 낮아지고 지내기 쉬워진다. 7월에서 8월은 우기이지만 내릴 때에는 스콜같이 내리는 편이라 우기라고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우 는 대개 9월 가량까지 이어지고 그후  9월부터 10월까지는 맑은 하늘이 이어지기 이전의 혹서시기이다. 현지인중에는 이 시기가 5월에서 7월 사이보다 더워서 불쾌하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북부에서는 하부부(HABOOBS)가 자주  발생하며, 남부의 大저습지대(사드)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우계가 8∼9개월간 이어진다.


o 면 적 : 2,505,813 평방 킬로미터 (한반도 면적의 11.3배,  아프리카 대륙의 8.3%로 아프리카 최대)  

작열하는 사막의 나라 수단은 아프리카 대륙의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집트,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 자이르, 중앙아프리카, 챠드 및 리비아의 근접한 8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총면적 2,505,813㎢의 아프리카  최대 나라로 한반도의 약  11.4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북위 4°에서 22°에 이르는 남북 약 2,250㎞, 동서 약  1,930㎞의 지역을 점유하며 그 지형은 대개 표고 50m 이하의 평탄한 지형이다. 1994년  1월 1일부로 전국을 25개의 주로 분할한 수단은 全국토의 약 12%가 농지이며 18%가 삼림이 차지하고 있다. 나라의 대부분은 대평원이고 서쪽은 나일강과 콩고강의 분수령까지, 동쪽은  홍해연안의 구릉지대까지 넓게 퍼져있다. 광대한 사막과 함께 지리상 가장 중요한 것은 수단을 남북으로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총길이 약 6,700㎞의 나일강이고, 우간다의 빅토리아호에서 출발한 백나일강과  에티오피아의 타나호에서 출발한 청나일강이 카르툼에서 합류하여  나일강의 본류가 되고, 이집트를 지나 먼 지중해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 지세  
수단은 우간다의 빅토리아호에서 출발하여 북상하는 백나일과 에티오피아의 타나호를 출발하여 서북상하는 청나일의 양대강이 수단 중앙부의  카르툼에서 합류하고, 이집트의 국경까지 북상하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모든 국가기능이 발달하고 있다. 수단은 기후상 이집트와의 국경에서부터 카르툼까지의 북부 즉, 북위  22°에서 16°, 북위 16°에서 10°까지의  중부 및 북위 10° 이남의 남부지방으로 나눠진다. 북부는 주로 사막지역으로 되어 있고,  나일강 및 그 지류에 닿아 겨우 발달한 녹지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다른 한편 카르툼 이남의 중앙부에서는 백·청 양나일강 사이의 삼각지대에 관개농업이 집중 발달하고 카르툼을 중심으로 수단에서 가장 진보한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이  관개지대는 게지라 (섬이라는 뜻) 지역으로서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센나르 댐으로 관개(灌漑)하여 수단의 외화소득의 반정도를 점유하는 면화를 다량으로 생산하며  그 외에도 주된 농산품을 생산하고  있다. 또한 남부는 광대한 늪지역과 아프리카 특 의 사반나 지대로 이뤄지며 동아프리카와 콩고에 보이는 것 같은 열대성 삼림이 있어 농경에는 적합하지만 아직 미개발단계이다.

나일강의 동측에서 부분적으로 강이 유입되는 굴곡부를 따라 둘러싼 사막을 누비아  사막이라 부르며  서 은   리비아 사막이고 중앙사하라로   이어지고 있다. 서부의  산악지대에는 3,000M를 넘는 고산도 있지만 대부분은 표고 350∼500M의 모래언덕이고, 특별히 현저한 지형상의 특징은 없다. 또 우간다 및 에티오피아의 국경 가까이에 동물보호지역이 있 , 불충분한 설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구미에서의 사파리 여행자가 차츰 늘어나고 있다. 수단에는 사자, 표범, 코끼리, 기린, 얼룩말, 하마, 침팬치 등의 야생동물과 수많은 종류의 영양이 살고 있으며 북위 12°이남지역에는 체체파리가 서식하고 있다. 백나일 직선화(直線化)때문에 죤글레이 운하의 사업은 1986년에 중지되었다. 오히려 이 운하의 완성에 따라 스토 평야 세계 최대의 늪지는 바싹 말라가고 야생동물은 절멸, 사막화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이며 북부의 사막은 점점 중앙의 목초지와 남부의 열대 관목으로 바뀌고 있으며, 나일강의 지류가 흐르고 있다. 1985이후 1,500,000명이상이 전쟁 계획적인 대량학살, 기근으로 사망,5,000,000명이상의 남부수단인이 국내에서 거주지를 상실하고  난민이 되었으며, 다른 200,000명도 주변국가에서 남민으로  거주하고 있다. 대도시권은 1,676,000이지만 여기에 대략 2,800,000의 주로 남부 난민이 추가되었고 도시화는 30%

o 인 구 : 3.071만명(96년 EIU 자료, 평균수명 57세)  년 증가율 2.9%
  
수단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1996년 추정인구는 3천만명이고 인구증가율은  2.9%, 인구밀도는 1㎢당 7.1명이다. 그러나 최근의 수단 주변의 국제정세의 악화 및 남부내전에 따른  다수의 난민이 유입하고, 또 시로의 인구집중이 현저해졌지만  인구의 실태 파악은 충분하지 않다. 1991년의 발표에 의하면 인구는  27,220,000명이며 인구증가율도 3.0%로 증가하였다. 북부와 중앙부에 사는 아랍화된 사람들이 약 40%이고, 소수파인  누비아민족(8%)은 북 의 나일강 유역에 집중하고 있다. 남부 수단에 사는 딩카, 훈지, 누에르, 실루크  등은 나일·사하라어를 말하고 대다수를 점유하는 북부의 아랍어족과는 관습도  꽤 틀리다. 10세 이하의 인구가 약 30%이상을 점유하고, 인구의 약 20%가 도시에  살고 다. 또 국민의 75%는 아랍계로 북부에 살고 있으며  그외 25%는 흑인계로 남부에  거주하고 있고 유목민 생활을  하는 국민이 200만명에 달하고 있다. 인구의 자연증가율이 높으며 전체인구의 2/5이상이 15세 이하일 정도로 평균연령이 낮다. 또 출생  , 사망률이 높은 반면 평균기대수명은 50세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o 주요도시 : Port Sudan(항구), Wad  Medani, Kassala, Juba,  Wau,  Malakal, El  Obeid,  El Fasher, Dongola

o 주요민족 : 아랍계(70%),  Dinka(12%), Bija(7%), 서부아프리카인(6%) 등  약 597개 부족 (주요종족 19)

인종은 아랍계가 약 75%를 차지하고 흑인계는 약 25%이다. 수단이라는 이름의 기원이기도 한 흑인계는 거의 남부에 집중하고 있지만 세분하면 약 500개의 부족으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다. 수단 중부의 코르도환주 누비아 산지에 사는 누비아족도 이러한 흑인 부족의 하나로서 아랍인의 노예사냥을 피해 사막에서 스스로 독립하여 누비아 산지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누비아족은 총 50만 정도이지만 이 부족자체에도 50 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도 이슬람 교도들이 서서히 침투하고 있지만 아직 전통적  종교의 힘이 강하다. 남성적인 이들의 부족특성이 이들의 생활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강한 남성이 존경받는다. 이 때문에 각종 투기가 이뤄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레슬링은 누비아족에게 있어서는 국기(國技)와 같다. 레슬링 시합의 승자는 부족 전원에게 상을 받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얻을 수 있다. 또 그 중에서 특히 유력한 것이 딩카족으로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인종중의  하나이다. 북 및 인구가 높은 달훌지역에서는 비아랍그룹이 몇개 있는데 이슬람식의 복장을 하지 않은 여성들은 혐오받기도 하고, 여러사람이 보는 앞에서 채찍질을 하는 형을 받기도 한다.인종은 아랍계가 약 75%를 차지하고 흑인계는 약  25%이다. 수단이라는 이름의 기원이기도 한 흑인계는 거의 남부에 집중하고 있지만 세분하면  약 500개의 부족으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다. 수단 중부의 코르도환주 누비아 산지에 사는 누비아족도  이러한 흑인 부족의 하나로서 아랍인의 노예사냥을 피해 사막에서 스스로  독립하여 누비아 산지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누비아족은 총 50만 정도이지만 이 부족자체에도 50 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도 이슬람 교도들이 서서히 침투하고 있지만 아직 전통적  종교의 힘이 강하다. 남성적인 이들의 부족특성이 이들의 생활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강한 남성이 존경받는다. 이 때문에 각종 투기가 이뤄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레슬링은 누비아족에게 있어서는 국기(國技)와 같다. 레슬링 시합의 승자는 부족 전원에게 상을 받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얻을 수 있다. 또 그 중에서 특히 유력한 것이 딩카족으로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인종중의  하나이다. 북 및 인구가 높은 달훌지역에서는 비아랍그룹이 몇개 있는데 이슬람식의 복장을 하지 않은 여성들은 혐오받기도 하고, 여러사람이 보는 앞에서 채찍질을 하는 형을 받기도 한다.


o 주요언어 : 아랍어(공용), 영어 등 115개 언어, 방언 사용중
수단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라비아어로서 공용어가 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북부와 중부에서만 주요 언어로 쓰이고 있다. 남부에서는 1956년까지 영국통치의 잔재 때문에 영어가 주요 언어로 인정되어 왔으며  현재에도 도시부에 있어서는 영어를 쓰는  사람도 많다. 나일·사하 어(딩카語와 누에르語)와 병행하고 있으며 135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주요한 언어만도 30종을 넘는다. 그러나 남부에서는  딩카어, 누에르어, 실루크어 등이 사용되고 있고, 최근 아라비아어 교육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아직 충분히 통용 지는 않고 있다. 북부의 나일강 유역에서는 소수부족이 지금도 누비아어를 사용하고 있다.

o 종 교  
종교에 대해서는 1973년 4월 발효한 항구헌법에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 북부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 순니파(약 70% 이상)이고, 도시부와 누비아산지에는 약간의 크리스트교 교도가 있다. 남부에서는 90%가 크리스트 교도이고, 나머지는 전통적인  각 부족의 정령을 숭배하는 원시종교를 믿고 있다. 수단의 이슬람 교도는 안사르, 카도리아, 정통 카도리아, 베다위아, 사마니아, 샤도리아 또는 마크도비아, 이도리시아, 티가니아 등의 각파로 나눠지고 있지만 영웅 마하디를 중심으로 한  안사르파는 수단의 이슬람 사회에 있어서  막대한 세력을 자기고 있으며 특히 서부에 많고 일찍이 1969년 5월 군사혁명정권성립전까지는 운마당(黨)으로서 유력한 정치세력이었다. 현재에도 사딕·알·마하디 수상을 지도자로서 유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1972년 평화조약과 주로 기독교인과 전통주의자로 구성된 남부인 들의 극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1983년 회교 공화국임을 선포함.  회교도와 비 회교도에게 공히  적용하는 위압적인 회교법적용이 전쟁을 재발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임. 비 회교도들에 대한 경솔하고 강압적인 회교화 시도가 정치적 반란진압이라는 명목으로 은폐되었다.  온건주의 회교도 집단에 대한 압제 또한 심함.

회교70% 전통종교9.9% 무종교1.1% 기독교19%(개신교7% 카톨릭교12%)-수치는 추정치임

1) 수단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던 회교 혁명의 주도자들이었다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 아랍의 소수집단은 이 사실을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했다. 회교 혁명으로 100만이 죽고  경제는 황폐화되었으며 나라는 분열되었다. 생활의 고통과 파괴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예전에 수단 북부에는 강력한  기독교가 자리잡고 있었으나 8세기에서 15세기사이에 회교화 되었다. 현재 회교화는 비회교지역인 남부까지 확장되고 있다.

2) 남부지역 사람들과 온건한  회교도들의 고통은 외부세계에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는 엄청난 폭력사태가 벌어지는 지역으로부터 외국인들이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의 위기가 대중매체를 장악해 버렸다. 대부분은 국제 구제 기관들은 수천명을 죽음에서 구해내고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애썼지만 심한 방해를 받거나 추방을 당했다.

3) 교회에 대한 핍박이 지난 40년간 있었는데 1985년 이후에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적인 시도가 극에 달했다. 주일 예배시에  폭탄을 던지고 교회와 기독교인이 있는 마을을 파괴하고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대량학살이 자행됐다. 목사와 교회지도자를 죽이고 하르툼근처의 사막지역으로 추방당한 난민들이 개종하면 식량을 주겠다는 정책을 사용하기도 했다. 특별히  누바 산악지역에서 그 핍박은 심각했고 회교도들은 누바인들에 대해 지하드, 즉 성전을 선포했다. 전지역이 황폐화되었고 영토는 아랍인들에게 넘어갔다.

4) 교회가 고통가운데 성장해 왔다. 수단에  있는 카톨릭, 성공회 그리스도교회(누바지역)는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거대한 인국 이동이 관습과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사람들을 다양한 미전도 종족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회교에 대한 반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명목상의 기독교가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지만 누에르(장로교), 마바안, 우두크(수단내지교회), 딘카(감독교회), 토토샤, 아콜리(아프리카내지교회), 누바부족(수단그리스도교회)가운데 의미있는  회심집단이 있었다. 정치적 차이와 유혈사태는 부족의 노선을 따라 남부지역사람들을 심하게 분열시켰다.

5) 외국선교사들의 활동이 계속 줄어들고 있으며 외국인  사역자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64년 선교사들은 남부에서 추방당했으며, 하르툼지역과  누바지역 그리고 에티오피아난민거주지에서 제한된 사역만이 허락되었다. 1990년이후 추방되거나  비자 신청이 거절되는 일이 늘어났다.

o 정부형태 : 대통령제 연방 (26개 STATE, 66개 PROVINCE)

o 의 회 : 96. 3월 총선으로 연방의회 구성

o 독 립 일 : 1956. 1. 1.

o 유엔가입일 : 56. 11. 12

o 국 경 일 : 1. 1. 독립기념일 ,    6. 30. 혁명기념일

o 화폐단위 : 수단파운드 , 1$ = Ls. 2,572 (99.10.31현재, 단일변동 환율제임)

  수단디나르(Dinar), 1$   = SD.   257.2  (99.8.1부터  주재국  모든  은행의  화폐단위를 Dinar로 변경)
  * 현재는 일반 시중은 병용하고 있음.

o 회계 연도 : 1.1 부터 12.31까지

o 도량형 : 미터법 널리 사용

o 토지면적 : Feddan을 사용(1 Feddan = 1,270 평)

o 근무시간 : 정부기관( 카르툼) 토-목 08:00-14:00

   정부기관(기타기역) 토-목 07:30-14:00

  은행 토 -목 08:30 - 12:00

  상점 08:00-14:00,   18:00-20:00

o 국 기 : 수단국기는 1976년도에 새로 제정된 국기법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각 색깔의 의미는 아래와 같음.

적 : 투쟁, 혁명
흑 : 검은대륙의 국가
백 : 평화
녹 : 농업

o 국가 : 수단 국가는 독립년도인 1956년에 만들어짐.

   - 곡명 : 국가 찬양

   - 가사 내용 : 우리는  신의병사, 국가의 병사  국가을 위해  이목숨 바치리 고난속에서 죽음을 무릎쓰고 모든 것을 다바쳐 영광을 챙취하리  이땅은 우리의땅 영원히 번영하리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영토를 수호하리

   - 주재국 약사

BC2150 - AD350 : PHARAOH 전국시대(이집트화)

AD 350 - 1504 : NUBIA 기독교 왕조시대

1504 - 1821 : FUNJ  SULTAN국

1821 - 1885 : 이집트를 정복한 오토만 터키계의 MUHAMMAD  ALI의 정복으로 이집트의 1개주로 전락하여 OTTOMAN 제국의 이집트총독치하에 들어감.

1885 : MUHAMMAD AHMED ABDULLA 는 스스로를 MAHDI (회교 구세주)라 선언, 오토만터키에 반대하고 이슬람의 개혁투쟁세력을 규합 종교적 폭동을 일으킴.

1889 : 이집트를 정복한 영국의 이집트군과 함께 수단정벌 영-이집트간 수단 공동통치 협정을 맺고 실질적으로 영국식민치하에 들어감.

1924 : 영국 식민통치하에 반대하는 수단인과 수단에 대한  이집트 지배권을 주장하는 이집트 민족주의자의 반발로 수단총독 살해사건이 발생.  영국은 저항운동이 극심한 북부수단에 대해서는 NATIVE   ADMINISTRATION제를 도입.   남부수단에 대해서는  SOUTHERN POLICY를 채택하여 영어, 토착어 장려 및 기독교포교를  강화함으로써 남북부간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제반관계를 단절시켜 상호 괴리를 심화.

1956. 1. 1 : 영국과 이집트 승인하에 수단 독립성취, 그러나 영국 식민정책 결과로 남북부간 지역대립 및 다수 정당 난립으로 혼란계속.

1958.11.17 : IBRAHIM ABBOUD 장군 무혈 쿠테타로 군사 정권수립. 군부내 마찰 및 분열로 정국불안.

1969. 5.25 : GAAFAR MUHAMMED NIMEIRI 군사혁명 신정부는 수단 사회주의 선언, 국호를 수단 민주공화국으로 개칭, 구정치인 및 반대파에 대한 대숙청 단행, 외국인  자산은행을 국유화하고 경제원조 및 군사원조의 대공산권 의존도를 급속히 높임.

1972. 1 : 공산주의 세력을 타도하고 (좌익 장교단 쿠테타음모 분쇄) 총선에서 니메이리대통령 취임, 수단 사회주의연맹(SSU) 창립 및 단일정당제채택.

1985. 4. 6 : 니메이리 미국방문중 소수 군사령관에 의한 군사 쿠테타 성공,   니메이리 대통령 축출, 과도 군사위원회 설치

1986. 5. 6 : SADIG AL MAHDI 민간연립정부 수립

1989. 6. 30 : AL BASHIR 준장에 의한 군사 쿠테타 성공 (헌법정지, 국회 및 정당의 해산, 언론통제)

1991. 1. 1 : 회교율법 SHARIA LAW 실시 (남부 3개주는 제외)

1993. 8.18 : 미국정부, 수단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 양국관계 극도로 악화

1993.10.16 : 혁명위원회 해체, OMER HASSAN AL BASHIR 혁명위원장겸  수상을 수단공화국 대통령으로 임명

1994. 1.13 : 행정구역 9개주를 26개 주로 재분할

1994. 2.14 : 남부출신 기독교인 GEORGE KONGOR AROP을  제2부통령으로 임명.

1994.  3.17 ; 수단남부문제 관련 IGAD 주선 제1차 나이로비회담(남부지역 난민구조 소위원회설치 및 SAFE HAVEN 지역선포 합의)

1994. 5.14 : 남부문제해결을 위한 평화분위기 조성목적으로 JUBA 평화회의 개최

1994. 5.16 : 수단남부문제 관련 제2차 나이로비회담(합의실패)

1994. 7.19 : 수단남부문제 관련 제3차 나이로비회담(합의실패)

1994. 9.27 : 대화분위기 조성을 위한 전담기구인 HIGH COUNCIL FOR PEACE 창설

1994. 10. 8 : 국제민간친선평의회주최 국제종교회의 개최(30개국참가)

1995. 3.30-4.2 : 제3차 민간 아랍. 이스람 회의 개최 (85개국 참가)

1995. 6.26 : 무바락  에집트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아디스아바바) 발생으로 수단과 이집트 및 이디오피아간의 관계 악화

1996. 1.31 : UN안보리 수단 규탄 결의 (1044호) 채택 (UN과 OAU헌장에 따라  테러지원활동 중지 등)

1996. 3.6-17 : 대통령 , 국회의원 선거(3.20. 당선자 공포)

1996.  4.26 : UN안보리 결의 1054호 채택 (외교공관 및 영사관 인원축소 및 여행제한, 수단정부 고위관리 및 수단군 요원에 대한 입국 또는 통과 제한)

1996. 8.16 : UN안보리 결의 1070호 채택 (안보리 결의 1044호 및 1054호 이행치 않을 경우
수단항공의 국제선 운항 금지)

1996. 12.10 : Sadiq Al Mahdi 전수상, 에리트리아로 피신

1997. 4.21 : Khartoum 평화협정 서명 (수단헌법체제, 법적권리와 자유보장,  국민투표가 실시될 때까지 4년간 과도기간 설정)

1997.  6.10 : 전야당 DUP 사무총장이며 반정부 인사인 Al Hindi (전의장)귀국

1997. 7.8-9 : 케냐 IGAD 정상회담에서 94년 원칙선언을 토의, 기초를 채택

1997.  8.30 : 남아공  평화회담, Mandela 남아공  대통령 주선으로 Al  Bashir 수단대통령, Mugabe 짐바브웨 대통령, Museveni 우간다 대통령 등 4자회담 개최, 수단-우간다 관계 및 수단남부문제 토의 (Garang불참)  

1997.10.29-11.11 : 나이로비 평화회담 : SPLM/A는 연방국 (Confederation) 및 2년간 과도기간 설정을 제의한 반면 수단정부는 연방제 (Federation)을 제의하였으나, 98.4월 재회담키로하고 회담 종결

1999.1.1 : 헌법개정과 정치 결사법 실시로 복수정당 등록 개시 및 총선을 통한 새 민주국회 계획 발표.

1999. 5.22 : Gaafar Muhammed Nimeiri 전  대통령 귀국, 인민노동세력동맹이라는 정당 결성.

1999.7.19-24 : 나이로비 평화회담. 사무국 설치등에 합의함. 성과없이 종료.

1999. 8.5 수단 정부, 반군측에 대해 99. 10.15까지 일방적 휴전 선언.


- 아국과의 관계

1976.  4.21 : 영사관계 수립, 아국 총영사관 개설

1977.  4.13 :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대사관으로 승격

1990. 11 : 서울 상주 수단 대사관 개설

1998. 9 : 채수동 대사(8대) 부임


- 협정체결 현황

무역 및 경제기술협력 협정 : 78. 6.27 발효

문화 협정 : 79. 10.14 발효

항공 협정 : 81년 가서명, 91년 재차 가서명



2. 역사


고대와 중세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당시 수단에 구석기시대 사람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 역사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오늘날의 수단 북부는 누비아라고 불렸고 이 지방은 고 이집트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기원전 750년경 쿠슈인의 왕국이 누비아에서 번영하여 나바타, 메로에 등을 중심도시로서 한때는 이집트, 시리아를 정복하고 기원전  340년경까지 통치하였다. 그러나 쿠슈왕국도 세력이 쇠퇴함에 따라 그 판도는 남 함과 동시에 수도를 나바타에서 메로에로 옮기게 되었다. 쿠슈 왕조는  기원전 350년경 에티오피아 중부를 거점으로 한 크리스트 왕국인 아크삼의 침입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후 누비아에 3개의 왕국이 성립하게 되었고, 543년 테오도라  여왕의 보호 하에 이집트에서 크리스트교가 이 지역으로 도입되었다. 639년 이슬람교도가 이집트에 침입하였지만, 누비아왕국은 그들과 협정을 체결하여 그후 6세기간 이슬람  교도의 침입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1250년경, 이집트에 바하리, 아무르크 제왕이 일어나고 북방의 누비아 왕국은 이슬람 교도의 침입과 잡혼(雜婚)에 의해 쇠미하였다. 1504년까지 이어졌던 남방의 왕국도『훈지』라고 불리는 흑인세력에 의해 붕괴하였다. 이 훈지세력은  침입하였던 아랍세력을 구축하였으며 센나르 거점으로 중부 및 북부 수단으로 세력을 뻗었지만,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쇠망하고, 이 영역은 소왕국 난립의 상태가 되었다.



근세

1820년 이집트의 지배자 무하마드 알리가 수단에 군대를 파견하고, 1821년에는 센나르와 오베이도를 점령, 카르툼에 수도(首都)를 두었다. 이렇게 시작된 무하마드 알리의 침입으로 인해 수단은 1874년 이집트에 병합되었다. 이후 1885년까지 이집트의 지배하에서 수단의 무역은 이집트인이 장악하고 상아와 흑인노예의 무역이 성하게 이뤄졌다. 1881년 무하마드 아하마드가 자신을 마하디(이슬람교의 구세주)라고 자칭하고 이집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오베이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증대한 이들은 1883년말 히쿠스 파샤 지배하의 이집트 군을 전멸시키고 수단 전국토 지배권을 얻었다.  그러나 이집트를 그 세력 하에  넣은 영국은 1885년 마하디군 진압을 위하여 영국의 고든 장군이 파견하였으나, 장군은 카르툼에서 10개월 남짓 포위된 후 전사하였다. 수단의 독립은 마하디의 후계자 압둘라에  의해 영국과 이집트 지배에 저항하여 1898년까지 이어졌지만, 영국의 원조를 받은 이집트가  이 지역의 지배권을 만회하였으며 1899년 영국·이집트 협정성립에 따라 수단은 양국의 공동지배하에 놓여졌다.


현대

1911년 달훌에 반란이 어나 1917년에 진압된 이외에는 1899년부터 1924년까지 비교적  평온한 시기로 이어졌고, 근대국가로의 기초확립을 위해 각 방면에서 점진적 진보가 보였다.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수단인과 수단에 대한 이집트 지배권을 주장하는 이집트 민 주의자의 반발로 1924년 수단총독 리·스톡이 카이로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이후 1952년까지는 수단에 대한  주권을 둘러싼 영국, 이집트  양국간의 항쟁이 이어졌으며 행정기관에 대한 수단인의 진출이 보였다. 또 이 시기에는 1929년의 나일강 협정에 따라 이집트의 나일 수리(水利)권이 확인되고, 1936년의 영국·이집트 공동조약에 따라 이집트의 공동통치의 존속과 그 주목적이 수단인의 복지증진에 있다는 것이 재확인되었다. 그렇지만, 그후 이집트 측의 수단에 대한 영유권의 주장은 점차 강해져서 1945년부터  동맹조약개정교섭을 행하여 온 이집트는 51년 10월 공동통치협정 및 영국·이집트 공동조약의 파기를 선언하였다.

한편 영국은 이같은 일방적인 파기에 반대하고, 이들 조약은 유효하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1952년 이집트에 혁명이 일어나고,  나기브 정권은 前정권의 주장을  받아들여 재차 영국과 교섭하여 1953년 2월『수단의 자치 및 민족자결에 관한 영국·이집트협정』이 체결되고, 이것에 의해 수단은 구체적으로 독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 협정에 의해 수단은 3년 이내에 스스로 수단의 장래를 결정하게 되었고 인도인위원을 의장으로 하고 수단, 이집트,  영국, 미국의 위원으로 이뤄진 국제위원회의 감독 하에 1953년  11월 제 1회 의원선거가 이뤄졌고, 이 선거에서 이집트와의 통합을 목표로 한 아즈하리가 이끄는 국민통일당이 승리하였다. 1954년 1월 1일에 소집된 의회에서 아즈하리가 수상으로 선출되었고, 1월 9일 조각이 완료하여 3월 10일 의회가 개원되었다. 영국, 이집트 양국 군은 1955년 11월 15일까지  철수하고, 이윽고 아즈하리는 이집트와의 통합주장을 버리고 1955년 12월 19일 수단의회는 수단을 공화국으로서의 독립을 선언하고 1956년 1월 1일 수단공화국이 탄생하였다.


독립이후의 역사

독립후의 정당정치는 대이집트관계를 둘러싼 정당간의 항쟁이  격화하고, 이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어 결국 1958년 11월 아부드 군사정권의 성립을 야기시켰으며 의회 및 정당은 해산되었다. 아부드 정권은 친이집트정책에 의해 경제 개발에도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나 독립이래 남부 3주(洲) 약 3,000만의 비이슬람교도의 자치 또는 분리독립을 구하는 운동은 점차 증가하였다. 이들은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정부의 이슬람교화정책에  강하게 반발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인근제국에 약 100만명에 달하는 다수의 이민이  이뤄지기에 이르렀다. 이 남부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1964년 10월 카르툼에서의 대학생을 선두로 하는 광범위한 반군사독재운동이 발발하여 아부드의 군사정권은 붕괴하였다. 이  군사정권 타도의 쿠데타는 아프리카에서는 예외적인 민간인에 의한 쿠데타였다.

1965년 4월 제헌의회의 총선거가 행해지고, 운마당 및 국민통일당이 대세를 차지하고, 제  1차 마하쥬브독립내각이 성립하였다. 1967년 6월의 중동전쟁에 즈음해서는 수단의 제 2차 마하쥬브 내각이 전후의 아랍수뇌회의를 주하는 등 외교 면에서는 적극적으로 움직였지만, 내정적으로는 정당간의 이합집산과 지도권  다툼, 남부문제, 항구헌법제정을 둘러싼  여야당의 대립으로 정당정치는 재차 위기에 봉착하였다.


니메이리 정치

1969년 5월 25일 니메이리 중좌를 중심으로 하는 육군 중견장교에 의한 무혈쿠데타가 일어나 다시 군사정권이 등장하였다. 니메이리를 의장으로 하는 혁명평의회는 전권을  장악하고, 잠정헌법을 정지, 의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국명을 수단공화국에서 수단민주공화국으로 개칭하였다. 新정권 최대의 과제는 역대정권이 완수하지 못했던 국민통일 달성과 헌법의 제정이었다. 국민통일에 대해서 니메이리 정권은 1969년 6월 남부자치의 원칙을 선언하고,  1972년 3월 에티오피아 황제 하이레·세라셰의 중개에 따라 남부 방세력대표와의 사이에  아지스아베베협정을 체결함으로써 17년간에 걸친 내전에 종지부를 찍고 남부 3개 주의 지방자치권을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남부와 북부의 문화, 사회의 차이에 따라 야기될 긴장감은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헌법 제정에 있어서 니메이리 의장은 1971년 9월의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의 표를 차지하여 대통령에 선출되고 10월 12일 수단 초대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정치기구의 정비에  착수하였고 1971년 10월 혁명평의회를 해산하고 유일한 정치조직으로서  SSU(수단사회주의연합)을 창설하였다. 1972년 1월 SSU입헌국민의회를 소집하고  국민행동헌장, SSU강령, 헌법기본원칙을 채택하고, 또 8월 인민의회설치법 공포, 9월 인민의회가 발족되었으며 1973년  4월 헌법 제정에 성공하였다. 당초에는 용공적인 색채가 짙었던  니메이리 정권은 당면한 적대세력이었던 보수, 종교세력을 1970년 3월 이마무·마하디의  본거지인 아바섬을 공략하여 소토함과 동시에 대공산권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차차 니메이리 의장 등의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와의 반목이 높아졌으며 1970년 11월  공산당 신파로 보였던 누르중장 등 3명의 평의원이 추방되었다. 또 마하쥬브 공산당 서기장도 체포되었으며 1971년 2월에는 공산당의 정치활동은 금지되었다.

1971년 7월 19일 반격을 계획하였던 아타소좌 등 우익군인의 쿠데타로 인하여 니메이리 의장은 일시 정권에서 쫓겨났으나 리비아 등의 개입으로 인해 3일후 역(逆)쿠데타에 성공하여 즉시 공산주의자에 대한『피의 숙청』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니메이리 정권은 좌우의 적대세력을 극복 고 또 1972년 2월 아바스  국방장관, 3월 아우다라 부통령, 제이드 SSU서기장 등을 해임시킴으로써 정권내부의 권력투쟁을 이겨냈다. 또  니메이리 정권은 1967년 단교하였던 미국과의 수교를 1972년 7월 복교하였으며 여기에 동반하여 대이집트 관계가 악화되었고, 9월 우간다의 아민 정권 지원에 대한 리비아 공군기의 카르툼 공항 강제착륙사건,  1973년 3월의 팔레스티나·게릴라『검은 구월단』이 미국 대사들을 살해하였던『카르툼  사건』과 그 처리문제, 국내적으로도 국민경제의 핍박, 부부흥문제, 9월 카르툼대학소요사건 등 여러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그러나 내전체결과 헌법제정이라고 하는 2대 실적에 따라 대개 안전하게 추이하였다. 또 1980년 5월 에티오피아의 멩기스트 원수의 내방, 11월의 니메이리 대통령의 에티오피아 공식방문 등 수단·에티오피아 양국관계는 진전하였다.

1983년 4월 니메이리는 대통령에 3선되었으며 이해 6월 남부 3주를 분할하고, 9월에는 샤리아법(이슬람법)을 도입하는 등 이슬람색을 강화하였지만, 이에 반발하는 남부의 반정부 력인 유력흑인부족 딩카족(크리스트 교도)을 주체로 하는 인민해방군(SPLA)의 게릴라 활동은 확대되었다. 1984년 4월 29일 니메이리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데모·집회 등을  금지하고 오지 등의 사회부정 단속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남부에서는 수단인민해방전선(SPLA)이라고 자칭하고,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쟈에서 2번에 걸쳐 개최하였던 평화회담도 실패하게 되었다. 또 1984년에는 가뭄과 에티오피아 난민의 유입으로  인해 경제적인 문제로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85년 3월 니메이리 대통령은 민간 최대의 지지 모체인 무슬림 동포단의 세력대두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同 동포단과의 결별을 계획하고 약 200명의 동포단원의 체포를 단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지모체를 잃은 가운데 니메이리 대통령은 1985년 3월 23 재정 재건의 일환으로서 빵 가격의 대폭 인상을 발표하였다. 이때까지 경제적  피폐에 허덕이던 국민의 불만은 빵가격의 인상을 계기로 한층 높아지고, 27일 니메이리 대통령의 방미 직후 이들 불만이 단숨에 폭발하여 반정부 데모 등의 국민에 의 소요, 의사. 변호사 등 인텔리 층의 총동맹파업 등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런 사태 수습을 위해 1985년 4월 6일 다하프 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 니메이리 정권은 붕괴하였다.


마하디 정치

니메이리 정권 붕괴후 정권을 장악한 다하프 장군을 의장으로 하는 잠정군사평의회는  1985년 4월 남부분할법폐기선언,  1985년 5월 샤리아법정폐쇄선언  등의 新정책을 펼치고,  다음 1985년 12월 국명을 現국명인 수단공화국으로 개칭하였다.

그후 1986년 4월부터 5월에 거쳐 민정이관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고, 1986년 5월 15일 총선거의 결과 상위를  차지하였던 운마당(UP)과  민주통일당(DUP)연립의 사딕·알·마하디 운마당 당수를 수반으로 하는 정권이 발족하고, 여기에 군사정권에서 민정으로의 이관이 실현되었다. 이 정권은 남부문제의 평화적  해결, 경제 문제의 해결  및 新샤리아(이슬람법)의 제정 등을 국내정책의 중요과제로서 걸었지만, 정당간의 알력, 각내 불통일 등에 의한  1987년 5월 마하디 수상은 내각 개조를 행하고, 6월 제 2차 마하디 정권이 발족하였다.제 2차 정권도 성립직후, 교육용 교재부족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항의데모, 또 이 데모와 동시에  니메이리 복귀를 부르짖는 니메이리  잔당의 암약, 비상사태선언의 포고  등에서 정권으로 크게 흔들렸다. 이어 1987년 7월 주권평의회 의원의  인선문제를 계기로, 연립정권제일당(第一黨)인 운마당(UP)과 제 2당인 민주통일당(DUP)의 사이에서 서로 다른  주장이 일어나자, 1987년 8월 22일에 이르러 마하디 수상은 운마당과 민주통일당의 연립을 해소한다는 뜻을 언명하였다. 계속해서 운마당을 중심으로 민주통일당(DUP), 이슬람국민전선(NIF)등  주요정당의 사이에서 이후의 정국운영에 대한 의논이 행해졌으며, 1988년 4월 이들 주요 정당간에 국민화해헌장을 작성, 서명하였다. 이 결과 동년 5월 15일  제 3차 마하디 정권이 탄생하였는데, 이 정권의 최대 특색은 이때까지  제일야당이었던 이슬람국민전선(NIF)이 여당으로 입각하였으며 역으로 이때까지 여당이었던 남부출신정당은 정당 내에 분열이 생겼기 때문에  일부정당 야당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바시르 정권

1989년 6월 30일  바시르 준장이 민족이슬람전선(NIF)과  제휴하여 무혈쿠데타를 일으키고 혁명위원회를 설치하여 비상사태를 선언, 자신들이 국가원수, 혁명위원회 의장, 수상,  국 장관, 군최고사령관에 취임하였다. 바시르 의장은 헌법정지, 정당, 의회, 노동조합의 해산을 실시하였으며 군기관지를 제외한 全紙의 발행을 일시 정지하고, 前  수상들 약 50인의 정치가를 체포하였다. 바시르 정권은 NIF의 주장에 따라 이슬람화를  진, 원리주의의 이란과 관계를 심화하였다. 1991년 3월에는 크리스트교 교도가 다수파의 남부 3주를 제외하고 이슬람법에 기초한 新형법을 시행하였고 1992년 2월 잠정국민의회를 소집하였다.

1989년 쿠데타이래, 최고기관이었던 혁명위원회는  1993년 10월 민정이관에 의해  해산하고, 이 권한은 내각에 이양함으로써 바시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89년 후반부터 남부에서 이슬람 교도가 주도하는 바시르 정권과 SPLA과의 출동이 격화되었다.  나이지리아의 중개에 따라 평화교섭으로 1992년 6월 정부와 SPLA는 내전종결을 강조하였던 초기의 공동성명에는 조인하였지만, SPLA의 분열이 일어나고 남부의 전투가 확대되자 평화교섭은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바시르 정권의 내정 기조는 남부문제의 평화적 해결, 경제재건(특히 대외누적채무문제 해결), 신샤리아법 제정, 니메이리 前정권의  잔재 배제 등에 두고 있다. 독립이후 북부의 아랍계 주민과 남부의 흑인계 주민 사이의 대립은 중대한 국내문제였지만 이후 정부와 반정부세력과의 사이에서 화해가 성립하고 있다.


3. 정치 /군사

정치 : 1899-1956년까지 이집트와 영국의 지배를 받음.  1956년 독립이후 겨우 7년 간 문민 통치가 있었다. 1955-1972년에 걸쳐 북부 아랍인과 남부 분리주의자 간에 혹독한 전쟁이 벌어짐. 12년 간의 불안한 평화이후 남부에 다소의 자율권이  주어졌으나 1983년에 전쟁이 재발함. 회교 극단주의 집단이 부상하면서 1991년에 모든 국민에  대한 회교법의 적용을 강요함. 이란은 수단을 기지로 삼아 남부는 군사력으로 그리고  이집트를 비롯한 모든 북아프리카국가는 전복으로 근본주의 혁명을 확산하려 하고 있다.

군사력 : 육군 119,500명, 해군 1,500명, 공군 3,000명 (별도 민병대 70,000명 추정)수단  남부와의 민족, 종교 전쟁으로 매년 징집.


4. 경제

경제: 풍부한 농업과 광물자원. 소수회교집단이 경제의 통제권을 쥐고 회교 개혁을 강요했으며 나라전체를 경제적인 파산으로 몰고 가는 남부의 비 회교 지역에도 이러한 개혁을 강요하고자 했다. 리비아와 이란의 대량 원조로 정부가 유지되고 있다. 1992년에는 가뭄과  전쟁으로 인한 기근으로 전 인구의 약 60%가 영양실조와 기아로 고통받았으며, 정부가 그 사태의 심각성을 무시하여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원조를 하지 않아  상황은 더 악화됨.

1인당 외채 $328 1인당소득 $420

* 물질적인 필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르툼, 주바(남부의 수도) 그리고 주변지역과 숲속에 피난해 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너무 많지만 전해지는 구호품은 거의 없다.  풍토병으로 진료가 필요하지만 이용할 수 있는 약이 거의 없다.


5. 사회/문화

가. 주재국 언론 매체


- T.V. : 국영 수단 T.V. (아랍어 및 컬러방송)

- Radio : 국영 수단 Radio (중파 및 아랍어 방송)


- 주요신문 (아랍어)

Sudan News : 관영통신, 6,250부, 일간

Al Anbaa News : 정부통제하 발간, 800부,  일간 (Al Sudan Hadith 는 97.5.19  폐간, 상기 신문으로 발간)

AL WAN(일간), AKHBAR AL youm(일간), AL RAI ALAKHAR (일간),  AL SHARI AL SIYASSI(일간)

- 주요신문 (영어)

Sudan News Agency(SUNA) : 관영통신, 일간

A1 Anbaa(주간)

Sudan Now : 정부통제하 발간, 격월간

- 위성방송 청취가능 : 주재국 방송국에 위성방송(유선) 신청즉시 설치해 줌 (CNN, BBC와 다수 아랍어 방송 청취 가능)


나. 종교활동


○ 주재국은 회교국이나, 타종교 신앙 제약 없음.

- 신도수 30여명의 한인교회가 한군데 있음.

- 미국목사가 담임인 외국인 교회 한군데와 이태리 신부들이 사역하는 카톨릭 교회가 몇군데 있음.


다. TIP 제도 : 짐 운반등에 0.5불 정도임

라. 미용 및 이발

- 자가 이발이 바람직하나, 부득이 한 경우 호텔 이발소 이용

- 외국인이 사용 가능한 미용원은 1개소 있음.

마. 기타 추가 사항

- 모랫바람으로 인해 청소가 수시로 필요함으로 현지인 고용 필요, 인건비 저렴

- 가정부, 운전수, 경비원 등 2-3명 고용 (인건비는 월 각50불 정도)

6. 교민현황

체류자 : 약 130명 정도

수도 카르툼 지역 거주 : 120명

포트수단 거주  : 2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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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리아

2003. 2. 3. 11:08
이제 겨우 7살이 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의 하나인  에리트리아. 아프리카의 홍해 연안에 위치한 이 가난하고 작은 나라가 젊고 의욕에 찬 지 도자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지금 경제개발의 열정에 불타고 있다. 지난 2일부터 5일까지  우리나라를 비공식 방문한 이사이아스 아프워르키 대통령(51세)은 지난 67년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한 에리트리아의 독립영웅이 며, 현재는 국가경제 건설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우리나라 방문기간 동안에 도  주로 국내기업인을 면담하면서 한국기업의 대에리트리아 투자유치를 위해 뛰어다녔다.

이러한 지도자를 갖고 있는 에리트리아는 어떤 나라이며 경제적 여건은 어떠한가를 살펴보았다.  ( 외국원조 비중이 높은 신생독립국 )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에 편입돼 있다가 93년 분리 독립한 신생국으로서 동쪽으로는 홍해와 접해 있고 내륙쪽으로는 지부티, 에티오피아 및 수단과 접경하고 있는 국토면적 12만5천km2, 인구 350만의 작은 나라이다. 농업이 주산업으로서 전체 인구의 약 80%가 종사하고 있으며, GDP의 50%, 전체 수출액의 약 70%가 농 . 축산업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특히 농 . 축산 인구  중 35∼40%는 유목민으로서 양, 염소, 소, 낙타 등의 목축업을 주로 하 고  있다. 공업부문은 곡물가공과 가죽제조 부문, 시멘트  등이 소규모로 자리잡고 있 을 뿐인데 최근들어 금, 동 등의 생산이 외국기업들의 참여로 활발히 이뤄지 고 있다. 또한 홍해안을 중심으로 원유탐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 몇 개의 광구에서 유징이 발견돼 경제성 유무에 관한 평가 작업을 하고 있는 상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50달러(95년)에 불과하고 1년간 총 수출액이 3,300만달 러에 그치고 있는 반면 해외교민 송금액이 연간 7천만달러, 해외  선진국 및 주요 경제기구의 원조액이 약 1억6천만달러에 이르고 있어  국가경제개발에 필요한 주요 자금원이  되고 있다. ( IMF, 성장잠재력 보유국으로 평가 )

IMF는 전반적으로 에리트리아를 성장잠재력을  보유한 국가로 평가하고 있 다. 홍해연안의 유일한 비이슬람 국가로서의 전략적인 위치, 강력한  리더십 및 국민들의 높은 지지에 따른 정치안정, 정부의 과감한 경제개발 정책, 국 민의  근면성 및 높은 자립의지, 풍부한 부존자원 등은 이 나라의 큰 자산이 다. 경제성장률은  94년의 9.8%를 비롯해 최근 몇 년간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나 지속적인 고도 성장을 위해서는 향후 해외투자 유치와 해외원 조의 원활한 조달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이번 방한시 이사이아스 대통령은 외국기업의 투자를 장려하고  있 으며 특히 개발경험을 많이  갖고 있는 한국기업의 투자진출은 매우 유용하며, 수익성 높은 사업추진이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에리트리아 정부는 경제개발 추진시 필요한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투 자법을 개정하고 투자유치 정책을 발표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에리트리아는 91년 투자법을 제정하고  이 투자법에  의거해  92년부터 투자센  터를 설립  운영중에  있다(Eritrea Investment Center, Tel : 291-1-11-81-24).


< 에리트리아 >

* 위 치 : 동아프리카의 아프리카 뿔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홍 해와 접해 있고, 남동쪽의 지부티, 남쪽의 에티오피아, 북쪽의 수단과 각각 접경 * 해안선의 길이  : 1,200km

* 면 적 : 12만5천km2(한반도의 2/1) * 기 후 : 건조, 열대, 고산기후 -연평균 기온 : 내륙고지대 20'C, 해안저지대 30'C -건 기 : 10∼3월, 우 기 : 6∼9월

* 인 구 : 350만명(95년) -해외난민 약 100만명,  인구증가율 연 2.7∼3%,  인구밀도 28명/km2

*  종 족 :  Tigre, Afar, Bilen, Hadarab 등 9개 종족

* 공용어 : 티그리냐어, 아랍어, 영어

* 종 교  : 에리트리아 정교(50%), 회교(48%), 기타(2%)

* 정치형태 : 대통령제(Isaias Afwerki 대통령)

* 천연자원 : 채유, 원예, 가축 등의 농업자원 금 . 은 등의 귀금속, 기타 광물자원

* 주수출 품목 :  섬유, 신발, 피혁, 소금, 음료, 동물

* 주수입 품목 : 기계 장비, 석유제품  

* 1인당 국민소득 : 150달러(95년)

* 통 화 : US $=6.23 Birr


( 외국인 투자자의 재산권 보장 )

에리트리아 정부는 94년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해 투자법을 개정했다. 개정 된 투자법은 투자절차 간소화,  외국인 투자자의 내국민대우, 외국기업의 현 지인 고용의무  폐지, 이윤과 투자자본의 자유송금, 국유화 및 몰수조치로부 터 외국인 투자자본의 안전보장을 골자로  하고 있다. 투자 인센티브로는 5년 간 소득세 면제 등 조세 우대정책과  외국인 투자자 보호제도가 있다. 투자자금의 안전성은 대아프리카 국가 투자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으로 에리트리아에서는 법으로 외국인 투자자본을 국유화 및 몰수 대상에서 제외시켰으며 정부의 긴급 가격통제 대상에서 외국인 투자기업 생산품을 제외시켰다. (  농업, 해양, 광물, 공업 및  건설자재 풍부 ) 에리트리아에는 농업, 해양,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인구의 80%가 종사하는 농업부문의 투자유망 분야로는 식물성 기름의 원료가 되는 깨, 땅콩과 오렌지, 바나나 등의 과일, 면화 재배 등과 가축 사육이나 토마토 등의 야채류 재배를 들 수 있다. 참치, 정어리 등 1천여종의  어류와 각종 해조류가 풍부한 해양부문은 어류 가공설비, 어류  운송, 얼음 생산, 포장용 박스 생산, 냉장 설비, 조선 및 선박보수, 새우어장 등이 투자 유망하다. 현재 금, 은, 철, 니켈 등 다양한 광물이 매장돼 있으나 생산은 물론  탐사에서 조차 낙후돼 있는 실정이어서  구체적 매장량 및 매장지역에 대한 체계 적 탐사가 미비한 광물자원 개발을 위해 에리트리아 정부는 95년 광물 개발 법을 제정해 체계적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현재 호주 정부의 지원으로 광물 조사가 진행중인데 주요 광물로 동, 납, 은, 아연 등이 있다. 금은  연간 1∼ 3t 생산이 가능하며 동은 Ethio-Japan Mining사가 70년대부터 생산중에 있다. 석유는 홍해해안 부근의 매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돼 현재 미국의 Anadarko, 영국의 BP사 등의 국제석유회사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밖에 석고, 중정석, 규사, 석면, 대리석, 화강암 등 공업 및 건설자재도 풍부하다. 이들 광물은 비교적 채굴이 활성화 돼 있는데, 이는 독립 후 경제 재건을 위한 건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개발을  서둘렀기 때문이다. 규사의 경우  국내의 유리생산을 자체 충당할 수 있을 정도이며, 대리석과 모래의 경  우에는 중동지역으로 수출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에리트리아는 낙후된 경제로 인해 자체 소비잠재력은 크지 않다. 그러나  에리트리아의 지리적 위치와 풍부한 부존 자원을 고려해 볼 때 제조업 부문 의 투자 역시  다양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에리트리아의 관광자원은  아름다운 해변과 다양한  지형이다. 1,200km에 달 하는 해안선에는 해수욕장이나 스킨 스쿠버에 적합한 지역이  많으며, 지형과 기후가 다채롭기 때문에 한 번의 여행으로  사막기후와 고산기후 그리고 열대 밀림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지명도가 낮아 인근지역의 관광수요가 적은 상태이다. ( 한 . 에리트리아간 경제협력 가능성  커 ) 96년말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에리트리아에 대한 수출은 1,520만달러이며 수입은 없다. 수출품목은 건설현장에서 사용되는 자동차, 중장비 및 구조물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또한  통신, 도로 등 열악한 사회간접자본과 숙련기술 인력 부족으로 직접 투자시 어려움이 있어 현재 우리나라의  대에리트리아 투자실적은 없다. 그러 나 우리나라는 에리트리아의 경제성장에 필요한 인프라 건설 부문에 많은 경 험과 기술을 갖추고 있어 향후 양국간 협력확대 가능성이 크다.

현재 우리나 라의 경남기업, 한국중공업, (주)대우 등이 참여하는 발전소 건설사업 등 각 종 건설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경남기업은 아파트 건설을 위 한 Sembel Housing 등 5개 프로젝트를 이미 수주받아 건설중이며 Hirgigo Power  Plant Lot의 발전소 및 부대시설 등 2개의 프로젝트가 신규로 낙찰됐 다. ( 제3국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 가능 ) 에리트리아는 홍해안 유일의 비이슬람권 국가로서 전략적 위치 뿐만 아니 라 평화정착 및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으며 성실한 국민성을 지녔다는 점 에서 성장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과도정부의 적극적인 경제개발 및 개 방정책도 에리트리아의 미래를  밝게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홍해에 접하고 있어 화물운송이 편리해 제3국 진출의 교두보 등의 역할이 중시 될 수 있는 국가이다. ( 구상무역, 공급자 신용, 전대차관 활용해야 ) 그러나  에리트리아는 주로 서방선진국이나 국제기구의 해외원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이 상당히  부족한 상태이므로 우리기업의 수출증대는 쉽지  않다. 따라서 외환사정이 어려운  점을 감안해 에리트리아의 풍부한 천연 자원을 활용한  구상무역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 수출입은행이 지원하는 자금으로 수출을  하는 공급자 신용, 전대차관  등의 금융지원을 활 용하고 수출기업의 금융위험을 덜기 위해  수출보험공사의 활용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국제기구나 선진국 원조자금으로 시행되는 각종  프로젝트 발주와 우리나라 EDCF(대외경제협력기금) 지원과 연계된 프로젝트 참여도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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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오피아

2003. 2. 3. 11:04

Ⅰ. 국가상징

1. 국기

에티오피아의 국기는 가로로 세부분이 나뉘어져 있다. 맨 윗줄은 초록색,
  가운데는 노랑색, 맨 밑부분은 빨강색이다.

2. 국명

  에티오피아의 정식 국명은 The 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
  (에티오피아 연방 민주공화국)이다.

3. 수도

  에티오피아의 수도는 Addis Ababa(아디스 아바바)이다.


Ⅱ. 국토와 지리

1. 위치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북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북서-남동으로 길이가 1,130km이다. 동쪽은 지부티와 소말리아, 남쪽은 케냐, 서쪽은 수단과 접해  있다.  동쪽으로 홍해를 끼고 있는 해안선의 길이는 1,010km이며, 홍해에 있는 150여 개 섬들도 에티오피아에 속한다. 면적은 1,223,500km이다.

2. 지형(地形)  

    에티오피아의 지형은 3개의 대표적인 지역으로 뚜렷하게 나뉜다. 이 들은 서부 고원지대, 동부 고원지대, 그리고 비교적 낮은 동아프리카 지구대와 서부 저지대 이다. 서부 고원지대는 높이가 2,400∼3.600m이며, 이 지역의 북쪽 끝은 에리트리아 북부에 있는데 침식작용으로 기반암까지 드러나 있다. 남쪽의 세미엔 산맥에는 에티오피아의 최고봉인 다센산이 4,550m 높이로 솟아있으며, 이 지역의 고원도 깊은 골짜기와 협곡으로 둘러싸여 있다. 에티오피아 중서부의 셰완 고원은 서부 고원지대에서 가장 넓은 곳이며, 높이가 보통 2,100m 이상이다. 동부 고원지대는 동아프리카 지구대를 경계로 서부 고원지대와 분리되는데 현무암으로 넓게 덮혀 있다. 가장 높은 지역은 지구대의 단층애를 따라 뻗어있는 산맥으로 그 동쪽 경사면은 매우 급하다. 높은 봉우리로는 높이가 대부분 4,270m  이상인 엔쿠올로산 등이 있다. 남동쪽에 건조한 하레르 평원과 오가덴 지방이 있으며, 시다모-보라나 평원은 동부 고원지대의 남쪽 끝부분에 있다.

    동아프리카 지구대는 1,525m 높이의 일련의 호수들이 산재해 있으며, 에티오피아 중부지역의 길이를 남북으로 크게 확장시켰다. 북쪽으로  가면서 넓어져서 아와시 강 유역과 만나며, 좀 더 북쪽에는 활화산이 있는 다나킬 평원이 있다. 다나킬 평원의 북쪽에 있는 움푹한 사막지대는 홍해와 나란히 펼쳐져 있고, 염호와 해수면보다 낮은 코바르 저지대를 포함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서쪽 경계인 수단 국경을 따라 얇은 초생달 모양의 지역에 위치한 서부 저지대는 북쪽으로는 에리트리아에서, 남동쪽으로는 루돌프호 북부까지 뻗어있다.

3. 기후
    
에티오피아는 고원지대에선 대체로 온화하고 저지대에선 무덥다. 1일 평균기온은 16-29 C이다. 1월이 가장 춥고, 5월이 가장 덥다. 에티오피아의 대부분 지역에 내리는 비는 남서풍의 영향을 받는 7-9월 사이에 많이 오며, 건조한 북동풍은 3-4월에 약간의 비를 내리게 한다. 연 강우량은 남서부에선 2,500mm, 북동부 홍해 연안에선 50mm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고원지대이기 때문에 적도에 가까운 열대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기후는 25。C이상을 넘는 날은 적다. 또한 기온의 고도차도 커서 연평균 기온은 2,400m이상의 고지대에선 13。C, 1,600m이하에선 24。C, 그 가운데는 18。C로 비교적 쾌적하다.

계절은 6월 중순에서 9월까지의 우기(雨期)와 10월에서 3월까지의 건기(乾期)로 나뉘어진다. 우기가 시작되는 9-10월에는 신록이 아름답고 국화(國花)인 '마스칼 데이지'의 꽃이 한창 피는 가장 좋은 계절이다. 에티오피아의 정월과 마스칼 축제도 이 시기에 있다. 우기의 풍부한 강수량은 북동 아프리카의 수원(水原)이 되고 타나호에서 흘러가는 나일, 인도양으로 흘러가는 가장 긴 셰벨강, 케냐의 투루카나호에 닿는 오모강등이 국토를 적시고  있다.

  4. 자연환경

에티오피아의 다습하고 서늘한 고원지대는 대부분 목초지나 농토이며, 때때로 숲이 나타나기도 한다.  더 높이 올라가면 아열대삼림이  나타나는데, 이삼림은 과육질 열매를 맺는 상록교목인 나한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저지대에는 아카시아나무가 자라고  동아프리카 지구대 남부는  관목이 많은 사바나 초지이다.

에티오피아에 있는 희귀동물로는 아비시니아생염소, 마운틴니알라, 젤라다 원숭이등이 있다. 재칼, 들개, 박쥐귀여우, 사자, 코끼리, 표범,  물소, 얼룩말, 기린, 검은코뿔소 등도 이 지역에 분포한다. 전국토의  25%가 산림이며, 12%이상이 가경지이고 41%가 목초지로 이용되고 있다.

  5. 주요 도시

인구가 10만명 이상의 도시는 디레다와(Dire Dawa)이고,  지마(Jima)와 메켈레(Mekele)는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이다.


Ⅲ. 역사

  1. 약사(略史)

   B.C. 1000년경고대 에티오피아왕국 건설

   B.C. 6세기-16세기 중세형 국가 시대

   1871-1889년  YOHANNES 왕조시대

   1889년  이탈리아의 보호령이 됨

   1896년  이탈리아로부터 독립

   1930년  Haile Sellassie 황제 즉위

   1935∼1941년  이탈리아 Mssolini가 재정복

   1943년  Ogaden 지역 영국 군정 실시

   1954년  영국군 철수
  
   1974년  Sellassie 황제  축출, 군사 정부 수립

   1977년  Mengistu 군사위원장 취임

   1991년  Mengistu 군사정권이 반군세력에 의해 붕괴
Meles Zenawi 대통령이 이끄는 과도 정부 수립

   1994년  집권세력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 민주전선'(
EPRDF) 내각책임제 및 연방제 채택

   1995년  총선실시


  2. 약사(約史)

'에티오피아'란 말은 '태양에 그을린 얼굴'이란 의미로  기원전 3,000년전의 그리스인의 저술에 그 이름이 나온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1,000년전 경의 에티오피아의 시바 여왕이 예루살렘의 솔로몬 왕에게 조공을 바칠 때,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메넬리크  1세가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제라고  한다. 서기 100년경에 이르러  향료무역으로 번영한 세력이 아슘에  정착하여 악슘왕조를 세웠다. 4세기에 걸쳐 악슘왕조의 전성기인 에자나 왕이 유대교에서 크리스트교로 개종하고 그것을 국교화시켰다.

그러나 7세기경에 성한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에티오피아를 침입하여 전쟁이 계속되니 다른 크리스트교 국가에서 고립되어 갔다. 12세기에 라리베라왕은 라리베라의 암석 지하에  교회를 건설하였는데, 이것은 이슬람교와의 투쟁가운데 쌓아올린 신앙의 산물로 알려져있다.

16세기에는 일시적으로 이슬람교도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17세기에 화실다스왕이 크리스트교   다시 부흥시키고 수도를 곤달로 옮겼다. 그 후 군웅할거의 시대를 거친 다음 테워드로스 2세가 1855년에  전국을 통일시켰는데 이것이 근대 에티오피아국가의  시초였다. 1877년에 메넬리크2세가  수도를 아디스 아바바로 옮기고, 이전부터 진출하려  이탈리아를 격파하였다.

1916년 메넬리크 2세의 아들인 지 이야스는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투르크와 동맹관계를 제안한 책임을 지고  퇴위했다. 1930년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즉위하고 1936년 무솔리니의 침략에 의해 영국으로 망명했으나 1941년 귀환하여 에티오피아의 근대화를 촉진시켰다. 황제는 항공로를  개설하고,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제 1회 총회를 열고 화려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전근대적인 국내의 개혁은 뒤떨어져 국민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974년  혁명이 일어나 제  은 무너지고 임시군사 정권이 탄생하였다. 1987년  공화국이 발족되고 1991년 8월 내각이 성립되었다.


  3. 역사

에티오피아는 BC 2000-1000년에  햄셈어족 계통인 쿠시족이  에티오피아의 북부와 중부를 점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쿠시족은 에티오피아 고원의 남부와 서부에 살고 있던 나일어군과 수단어군의 많은 종족을 몰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의 원주민은 나일강 유역의 저지대에서 이동해온 종족이라기보다는 쿠시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 상형문자로 된 자료에 따르면, 이 지역의 초기 문명화는 BC 2000∼1000년에 시작되었다. '파라오'들은 이 지역에 함대를 보내  향미료와 향신료, 몰약과 같은 진귀한 물건들을  사왔다. 이 부문에 관해  언급된 이집트 자료를 보면 이집트인들은 에티오피아인을 '하바샤트'(Habashat)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말에서 후에 아비시니아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BC 6-AD 1세기에 아라비아 남부에 살던 시바인들은 에티오피아의 사회, 겅제, 종교, 예술에 영향을 주었으며 BC 1세기에는 그리스  이 가미되기도 했다.

2세기에 악숨 왕국이 등장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 왕국은 유대왕 솔로몬과 사바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전설적인  아들 메넬리크 1세의 계통을  이은 것이라고 한다. 악숨왕국은 4세기까지 유대인  통치하에서 경제적.문화적으로 번성했으며, 에자나가 통치하던 때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9세기까지 계속 번창했다. 4세기 초에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을 따르게  되어 675년에 이슬람교도가 이집트와 누비아를 점령하자 나머지 그리스도 왕국과 단절되었다.

11세기에 자구에 왕조가 권력을 잡았으나 13세기말 고대 악숨 전통을 지닌 솔로몬 후손들이 다시 일어났다.  15세기 중엽에는 수도사들이  피렌체에서 열린 범(汎) 교회회의에 참석하면서 다른 그리스도 왕국과 접촉을 재개하였다.

16세기에 에티오피아는 포르투갈의 도움을 받아 소말리아족의 이슬람교 술탄을 몰아냈으며, 1633년 추방될 때까지 예수회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인도,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은 곤데르  시대는 1855년 까지 계속되  다. 이 시기에 에티오피아는 문예 부흥을 맞았지만 봉건적 정치제도는 그대로 유지했다.

테워드로스 1세(1855-68)가 시작한 근대 에티오피아의 통일은  요한네스 4세(1872-89)가 이어받아 메넬리크 2세(1889-1913)가 완성하였다. 1930년 초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왕위를  계승하자 곧  근대화 사업을  시작했는데, 1935년에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하여 1941년까지 국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독립후에 셀라시에 황제는 근대화를 다시 시작했으나  1974년 군사혁명으로 왕위에서   출되었다.

1975년 왕정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공화국이 출범했다.  Mengistu 대통령이 절대권력을 장악하여 친소, 친북한정책을 추구하고  일인독재정치를 강화하였다. 그 후 군사정부는 에리트리아  및 티그라이의 내란과 남동부  오가덴 지방을 둘러싼 분쟁을  겪게 되는데  이 상황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1980년대 초에 오가덴 남부에서 소말리아 군대의 지원을 받는  반정부 집단의 활동이 있었고, 이 곳에서  소말리아 군대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 지역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가뭄과 기근을 더욱 악화시키며 계속되었던 무력 충돌은 1980년 초에  다시 발생하여 수십만명의 에티오피아인들이  지부티, 소말리아, 수단 등으로 피난했다.

1991년 반정부군에 의해 군사정권이 붕괴되고 과도정부가 1994년까지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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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1. 1번 국기란에 국기의가운데에 별이 들어간것이 최근 국기 입니다. 일명 솔로몬의 별이라 부르며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새로 제작되었습니다. 참조 : www.frazar.co.kr

소말리아

2003. 2. 3. 11:00
소말리아 Somali Democratic Republic

소말리아의 정식 명칭은  AlJumhouriya As-Somaliya  Al-Domocradia 라고 한다. 아프리카의 대륙 동쪽 끝의  공화국으로 ,<혼(突角)>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동쪽과 남동쪽은  인도양에 면하고, 북쪽은  아든만을 사이에  두고 남(南)예멘과 마주하며, 북서쪽 끝은 지부티,  서쪽은 에티오피아·케냐와 각각 국경을 접하고  이다.  면적은 637,657㎢   로 한반도의  3배이다. 인구는  약 8,505,000명(95년)이고, 그 중 약 1,500,000명이 수도  모가디슈 살고 이다. 인구밀도는 13명/㎢라고 한다.<최근에는  내전으로 인한  인접국가로의 난민유출, 약 30만  명의 기아(飢餓)로 인한  사망 등을 원인으로  인구가 감소했을 것이라고 추정되어진다.> 중요시되는 하르게이사,베르베라,메르카,키세마이유등이 있다.적도지대에 있으나 연 강우량이 100∼610㎜로  강수량이 적으며, 해안지방은 사막기후이고 내륙은 스텝기후이다. 국교는 이슬람교로서 수니파 이다.  종족은 소말리족이 98.5%이고, 이태리, 아랍계, 인디안 이 1.5%이다. 공용어는 아라비아어이고, 통화는 소말리아 실링이다. ( 1$=2,629.13 SS)  


역 사

고대사에서 쿠슈 와 이디오피아의 역 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10세기경부터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교도가 들어와 토후국(土侯國)을 해안 각지에 건설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아든 만 연안은 오스만 투르크 에게 지배되고, 인도양 연안은 마스카트 오만의 영토가  되었다가 그 뒤에는 잔지바르 왕국의 북단부가 되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는 아든 만  연안에 기지를 확보하였고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뒤에는  이탈리아도 식민지를 얻기  위해 내항하였다. 1886년에 영국은  아든 만 연안을  영국령 소말릴란드로 만들고 내륙은 이디오피아에 편입시켰다. 이탈리아는 89년에 이디오피아 정복계획의 기지로 인도양연안에 보호령을 구축하였다. 1900년경부터 21년까지 영국령·이탈리아령의 두 소말릴란드와 이디오피아에  걸쳐 소말리족의 이슬람적  반민지 저항투쟁이 벌어져다. 23년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소말릴란드 통일과 확대를 꾀하여 영국으로부터 케냐의 북동쪽 끝 일부를 할양(割讓)받았다.

36년에 이탈리아가 이티오피아를 침략한 뒤 소말리아도 광대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편입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영국령 소말리란드도 한때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았으나, 영국군의 반격으로 두 소말릴란드 가 영국군 군정 하에 놓이게 되어다. 전쟁 후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민정에 복귀되고(1948), 50년에 구(舊)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UN의 신탁통치(이탈리아가  통치)하에 놓여다. 60년 6월26일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독립되고, 이어서 같은 해 7월  1일에 10년간의 UN 통치기간이  끝난 구(舊)이탈리아령과 합병, 소말리아  공화국이라는 통일국가가 수립되었다. 독립 후 프랑스령 소말릴란드(현재의 지부티), 이디오피아 동부, 케냐 북동부에 산재한  소말리족의 거주지까지 합병시키려고 하는  <대(大)소말리아주의>가  정부의 외교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이디오피아 동부에 대해서는 특히 국경의  새로운 확정과 그에 따른  영토의 반환을 강경하게 요구하고, 64년 초부터 양국간에 교전이 있었다. 67년말  모하메드 하지 이브라힘 에가르  내각이 성립되면서 이디오피아·케냐  등과의 관계가 한때 개선되어 69년 3월의 총선거에서 에가르 수상의 <소말리청년동맹>이 다수의 국민의회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그해 10월 셰르마르케  대통령이 암살되고 이어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 장군의  군사정권이 수립되어 최고혁명평의회(最高革命評議會)가  실권을 장악,  국명을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으로 개정하였다.        


정치 및 외교

군사정권이 수립된 후 바레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976년 7월 최고혁명평의회를 해산시킨 다음, 새로이 최고회의와 소말리 사회주의 혁명당을 창립하였다. 바레 정권은 소련에 대한 의존도를 강화하는 외교정책을 채택,  74년 7월에는 소련과 우호협력조약을  맺고 경제·기술·군사 분야 등에  원조를 받기로 하였다. 그러나 77년 7월 바레  대통령의 지부티 방문을 전후하여 이디오피아 동부 오가덴 지방의 서 소말리아 해방전선에 소말리아인이  참가하게 되었다. 한편, 74년 9월  하이레 셀라시에 황제를 폐위시킨  이디오피아는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고 소련의 원조에  의존하기에 이르렀다. 77년 10월 이디오피아로부터  국교단절을 통고받았으며  서 소말리아  해방전선과 이디오피아 군의 전쟁이 격화되었다.

그해 11월 소련의 무기원조가 중단되면서  우호협력조약도 폐기되어 이디오피아 령내에 주둔해 있던 소말리아군은 78년 3월을 기하여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대에 들어와  친미(親美)·친중공으로 선회하였으며, 67년  북한과 수교하였고, 87년에는  우리나라와도 수교하였다.



현재의 상황

1984년부터 1990년까지 독재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바레 '를  1991년에 축출하면서 독재정권이 무너지게 되었다. 하지만, 독재정권 시절에  축적되어있던 부정부패나 경제적 침체등으로 각  지역에서 반란군이 일어나면서  내전상태에 빠지게 되어다. 세계 각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내전이 극으로 치닫자 민간인 들의 비참(悲慘)한 생활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따라서 UN은 파벌간의 무장해제, 휴전이행감시, 인도적 구호활동  및 난민송환협조, 파벌간의 정치화합과 국가재건활동 지원 등을 목적으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였다. 우리 나라도 소말리아에 '상록수'부대라는 군사를 지원한 적이 있다.



경제·산업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의  하나이며, 목축과 농경을 주산업으로 하는  자급경제(自給經濟)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1973∼75년에는 한발에 의한 큰 피해를 받았다.  84년의 수출 총액은 12억  7,380만 소말리아 실링인데, 그중 가축이 59%, 바나나가 8%,  피혁 8%의 비율이다. 수출 대상 국으로는 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수입국으로는 이탈리아가 그 수위를 차지한다. 광물자원은 UN의  협력으로 탐사되어 68년에 우라늄 광(鑛)이  발견되었다. 국토의  남북을 연결하는 새로운  간선도로 건설은 중공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밖의 주요한 원조는 소련을  대신 하여 아랍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89년도의 대한국(對韓國) 수입액은 157만 달러이다.



사회·문화

이탈리아령과 영국령이 통합된 나라이므로 사회적·문화적인 통합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으나, 소말리족의 전통적인 사회구조와 이슬람 문화가 통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탈리아·미국·이집트 등의 나라에서  각종 교육원조를 받고 있으나 아직 국민 대다수가  문맹자이고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보급도  늦어지고 있다. 그러나 몇 년 전 문맹률이  60% 였지만 최근에는 24%로 문맹률이 줄고 있다. 도시의 발달도 잘  되지 않고, 특히 소말리아 령  내에는 철도가 없으며 수도 에서 남북으로 통하는 600여㎞의 도로가 있을 뿐이다.



자연

아든만 안의 해안선과 병행하여 산맥 이 뻗어 있으며(최고점  2,407m) 그 북쪽은 사막에 가까운  건조지대이고, 남쪽은  이디오피아의 고원지대(평균  약 1,000m)에서 완만한 경사로 인도양 연안의 평야까지 사바나성 의 사면이  연속된다. 하천은 웨베시벨리강·주바강 등이 인  이디오피아의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흐르면서  인도양으로 흘러들어 농경에  적합한 지역은 인도양 연안의 하천유역뿐이다.

---소말리아 공화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중요한 강인 웨베시벨리강은 길이가 약 1,900㎞이다. Webi Shibeli 라고도 하는데, 유역에서는 곡물류·참깨·면화·바나나·사탕수수·대추야자 등이 재배된다. 모가디슈부근에서 남서쪽 해안선과 나란히 흐르다가 모래땅에서 사라지며,  인도양까지는 흘러들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북동쪽을 거쳐 인도양으로  흘러드는 주바강은 길이가  1,660㎞이다. 웨비주바라고도 한다. 이디오피아 남부의 고원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흐르며, 소말리아의 남서부를 종단(縱斷)한 다음 키스마유 부근에서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하구에서 바르데라까지  약 300㎞는  항행이 가능하며, 소말리아 영내의 유역은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농경지대로  바나나·쌀·사탕수수·면화·옥수수 등이 재배된다. 이탈리아인이  플랜테이션을 경영하여 바나나를 수출농산물로 만든것도 이 강 유역에서이다.   주바강은 1925년 까지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와 케냐의 국경이었으나, 그 해에 영국은 이탈리아와의 협정에 따라 이를 소말릴란드에 할양하였다. 새 국경과 이 강 사이에 있는 재대는 주발란드 라고 불린다.
---기후는 열대 및 아열대 지대로서 하루  최고 기온이 30∼42도 이고 최저기온은 18∼29도 이다.소말리아에서 살고 이는 동물은 사자, 코끼리, 하이에나, 여우, 표범, 기린, 영양, 얼룩말 등이 있다고 한다.


  
주민  

전국적으로 거주하는 소말리족은  디르·하비야·다로드·이샤크 등의  종족으로 나뉘며 열광적인 이슬람교도인  동시에 인종적으로는 이디오피아  인종형이다. 남부의 농경지대에는 반투계와 갈라계  사이의 혼혈인 디길족·라한빈족과 함께 반투족도 살고 있다. 언어는  소말리아어가 국어로 되어 있으나 아랍어·영어·이탈리아어가 공통어로서 비교적 많이 사용 되고 이다.소말리족은 아프리카의 동쪽 끝의 소말리아 공화국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민족이다. 이들은 디르, 다로드, 하비야, 라한빈, 디길의 5군으로 구분되며 처음의 3족이 순수한  소말리인이다. 언어적으로는  동(東)햄어족, 즉 그린버그의 용어로는 쿠슈어에 속하며 코카소이드에 속하는  이디오피아 인종형이다. 형질적으로는 키가 크고 홀쭉하며 골반(骨盤)이 적고 얼굴은 가늘면서 길며 코는 높다. 두발은 짧고 곱슬거리며 피부는 밝은 갈색에서 흑갈색까지 이고 입술은 일반적으로 엷다. 따라서 아프리카 본래의  네그로 와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그들은 원래 소·낙타 등의 목축민으로서 동북 아프리카에서 침입하여 이 인종형이 선주민인  네그로 와  혼교되면서 동아프리카를 경유하여  멀리 남로데시아에 나아가 나미비아에 까지 도달하여 헤레로족이나  호텐토트족에 영향을 끼쳐다는 설도 있다.

소말리족이 사는  지역은 사하라 사막이나 칼라하리 사막등과 마찬가지로 열사막형의 기후이지만 나미비아 등과 같이  연안성 사막의 풍토로 내륙성 사막에 비하여  최고·최저의 기온차가 적다. 북부 소말리아에서는 유목을, 남부에서는  목축과 수수  따위의 곡물재배를  한다. 사회적으로는 부권적 가장이나 족장의 권위가 크지만 여성의 지위도  낮지는 않다. 부계 장자상속이며 족장도 같다. 엄격한 연령계단제가 있어 한  계단이 8년으로 되어있다. 종족의 정치적 지도는  일정한 연령단계의 사람들이 행하며 8년을 1기로 하여 교체되고 추장도 8년마다 바뀐다. 소말리족의 이슬람교화는 동햄족 중에서는 가장 빨랐으나 동 햄족 고유의 천신신앙도 있다.



수도 - 모가디슈  

동아프리카에 있는 소말리아의  수도이다. 인도양 연안의  적도 바로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정치·문화·상공업의 중심지이며, 시가는 이슬람 교도 답게 아라비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이탈리아에 의하여 서구화해 있다. 바나나· 가죽을 수출하며 농산물가공업이 성하다.  10세기에 아랍인들이 건설하여 항구로서 번성하였으나, 1871년  잔지바르의 술탄이 통치하였는데, 이곳을 보호령으로 만든 영국의 압력으로 92년 이탈리아의 조차지(租借地) 가되었다가,  1905년 이탈리아가  잔지바르의 추장으로부터  이를 사들여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의 수도로 만들었다. 그  뒤 소말리아 신탁통치령의 수도였다가(제 2차 세계대전 중인 41년 2월부터 50년까지  영국 군에의하여 점령됨.), 60년 독립국 소말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철도는 없지만 도로망으로서도 중요하며, 오래된 건물과 사원이 현대식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슬람율법학교를 비롯한 각종 대학과 국립박물관이 있다.


☆인터넷에서 빌려온(?) 자료들...

여행
소말리아 국내를 여행하는 경우는 정부기관의 허가증이 필요하다. 특히 난민 캠프에 가는 경우에는 NRC(National Refugee Commission)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현재 북부지역에서는 내분이 계속되어  그곳은 여행할 수 없다고 한다. 남부에 있는 메칼, 브라바는 소말리아에서는 역사가 깊은 마을로, 한번 여행 할 만한 가치가 있다.  교통수단으로는 4륜 구동차가 필수이다.  지방을 여행할 때는 반드시 현지인(소속기관직원, 친구 등)과 동반하는 것이 좋다.    

베르베라(Berbera)
베르베라는 사람들이 친절하고 호의적인  것 말고는 흥미를 가질만한  것이 없다. 여기서 사진을 찍는 것은  허가를 받았더라도 매우 신중해야  한다. 가장 값이  싼 호텔  중  호텔 와베라(Hotel  Wabera)는 깨끗하고,  호텔  사씰(Hotel Saaxil)은 선풍기와 에어콘 중 선택할 수  있다. 조금 더 비싼곳은 호텔 사헬(Hotel Sahel)로 이곳은 모든 방이 에어콘이다. 베르베라에는 작은 식당이 많이 있어서 생선, 밥, 샐러드 등의 좋은  음식을 선택할 수 있다. 반면에 해변에 있는 조금 더 싼 식당에서는 아주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을 수 있다. 물을 마시는 것은 피하고, 콜라나 환타를 마시도록 한다.

브라바(Brava)
이곳은 키시마이오 도로에서 5㎞ 떨어진 오래된 아랍 마을로 매우  아름답다. 가죽 전문점에 면 가죽 샌들을  아주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다. 값이 싸고 좋은 호텔로는  콜롬보   호텔(Kolombo Hotel)로  마을의 입구에 위치해 있고 적당한 값에 크고 통풍이 잘되는 방을 구할 수 있다.

하르게이사(Hargeisa)
하르게이사는 영국령 소말리랜드의 옛 수도이다. 그러나 지금은 매우 퇴색했고, 공군이  정기적으로 많은 양의 폭탄을 투척해서 고통 받고 있다. 택시는 빨간색과 흰색으로 프린트 되어 있고 모가디슈보다 훨씬 비싸다. 지부티까지의 항공은 정기적으로 운행되고 있다. 호텔로는 깨끗한 호텔 달리(Hotel Daali)가 있다. 호텔 마윌(Hotel Maaweel)과 비슷하다. 하르게이스  클럽에서도 방을  구할 수  있다. 호텔오리엔탈(Hotel Oriental)은 싸지만 방이 나쁘고 침대가 불편하고 화장실도 사용할수가 없다. 그러나 음식은 놀라울 정도로  싸고 훌륭하다. 또마을에서  2㎞ 떨어진 곳에 위치한 스테이트 하우스도 추천할 만하다. 그 식당의 직원들은 친절하고  그 공원에서 야영을  할  수 있다.  레이크 빅토리아(Lake Victoria)식당은 쉬시 커밥(Shish Kebab:양고기·쇠고기 등을 포도주·기름·조미료로 양념하고 이를 꼬챙이에  끼워 구운 것)이 맛있으며 싸고 시원한 음료수를 마실 수 있다. 마을 외각에는  글레드(Gouled's)라는 아름다운 문의 식당이 있다. 이곳의 주인은 미국에서 일류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음식은 질이 좋고 맛있으나 값이 비싸다.

키시마이오(Kisimayo)
도착할 때 국제 안전보장이사회에 보고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만일 케냐로 가려면 출발하기 전에 여권에 도장을  받아야 한다. 소말리아에서의 첫번째 밤을 기대한다면 이곳을 꼭 가봐야 한다. 키시마이오의 강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가장 좋은 호텔로는 깨끗하고 친절한 호텔 퀼마와이(Hotel Quilmawaaye)를 꼽을 수  있다. 이곳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으며 지방 유지들은 곳을 이용한다. 중심부는 아니지만 호텔 아프리카(Hotel Africa)에 좋은 방이 있고 단점이라면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것이다. 조금더 비싼 호텔로는 와모 호텔(Wamo  Hotel)이 있다. 이곳은  특별히 모가디슈나 다른 곳으로 가길 원한다면 그것을  내할 이민자들이나 지방 사람들을  만나기에 좋다. 금요일  밤에는 디스코 파티가  있다. 약간의  양담배와 위스키를 갖고가면 친절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호텔 퀼마와이에  있는 식당 에서는 스파게티, 생선, 치킨을 싼값에 먹을 수 있다. 쇼어라인(Shoreline)식당에서는 적당한 가격에 좋은 음식을 맛볼수 있다.

리보이(Liboi)
이 변두리 마을은  작지만 매혹적이다. 지방  사람들은 그들의  낙타, 염소와 소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 배수구를 찾아  데려온다. 숙박시설은 진흙 벽돌로 지은 작은 원주민  숙소를 이용할 수 있다.  음식으로는 챠이(Chal), 챠파티(Chpati), 끓인 염소젖, 약간의 토마토 등이 있다.

메르카(Merca)
이곳은 모가디슈 남쪽으로 100㎞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 아름답고 오래된 아랍마을이다. 메르카에서 5㎞ 떨어진 곳에는  깨끗하고 조용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신부시 비치(Sinbusi Beach)의 오두막 집에서 머무를 수 있다. 오두막 집은 기본적인 화장실을 갖고 있다.  이곳의 바다는 조용하고 깨끗하며 따뜻하고 고래 때문에 상어가 살지 않는다. 이곳에는 구운 생선을 파는 식당이 있다.

                            
치안
시내에서는 강력 범죄사건은  없다. 그러나  정정(政情)불안, 경제악화,  물가 급등으로 일반 시민의 생활도 불안정해서 치안의 악화요소는 충분하다.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야간외출을 삼가는 등  기본적 방범대책이 필요하다. 한집 전체를 빌린 경우는 24시간 근무하는 수위가 필요하다. 물이나 식료품 등 생활 필수품은  긴급 시에 대비해서 어느 정도  비축해 두는 것이 좋다. 풍수해나 지진 가능성은 없다.



아프리카에 관한 다섯 가지 오해

내리쬐는 적도의 태양과 푹푹 찌는 밀림의 무더위.
며칠동안 비행기를 갈아타고 가야 겨우 닿을 것 같은 아득한 대륙.
빈곤과 질병의 땅 아프리카.

천만의 말씀이다. 실제 아프리카의 현실과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프리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알려지지 않은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관한 몇 가지 잘못된  고정관념들을 바로 잡아본다.


△ 아프리카는 무척 덥다 ?

흑인들이 사는 아프리카 기후는 흔히 후덥지근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나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의 기후는 평균 20도 안팎의 선선한 날씨. 대낮의 더위만 생각하고 얇은 옷만 걸치면 밤에 감기 들기가 십상이다. 특히 나이로비는 1천7백미 터의 고원지대에 있어 「한여름의 피서지」로 안성맞춤일 만큼 날씨가 좋다. 따라서 주로 아침, 저녁때를 이용하는 사파리 투어에는 담요가 필수적이다.


△ 며칠동안 비행기를 타야 갈 수 있다?

아프리카에 가려면 비행시간이 며칠은 족히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여행사들이 제공하는 서울-홍콩-요하네스버그 코스를 이용하면 17시간정도 소요될 뿐이다. 브라질이나 남미 국가들이  24시간 남짓 걸리는데 비하면 훨씬 짧은 편이다. 직항로로 서울-카이로 노선이 있으나 카이로에서 타 아프리카 지역으로의 연결 항공편이 원활하지 않아 홍콩서  외국비행기를 경유하는 편이 애용되고 있다. 인도의 봄베이나 방콕, 유럽 주요도시를 통하는 방법도 있다. SA항공은 홍콩에서 요하네스버그까지 주 4회 운항한다.


△ 아프리카에 가면 별미가 없다 ?

아프리카의 주식은 옥수수와 소맥  등의 가루를 뜨거운 물로  반죽해 찐 「우갈리」라는 음식으로 우리 나라의 밥에 해당한다. 가장  특징적인 음식은 아프리카식 불고기. 각종 야생고기를 불판 위에서 구워먹는데 악어, 기린, 물소,  영양 등 다양한  메뉴가 준비돼있다. 보통 고기보다 조금 질기다는 것 빼고는 맛이 일품이다.


△ 제대로 된 문화시설이 없다?

아프리카 관광을 하다보면 사자와 기린, 코뿔소 등의 야생동물에서 번화한 시내의 호화로운 호텔 빌딩 등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현대 문명이 공존하는 풍경을 종종 볼  수 있다. 과거 유럽 제국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관광객들을  위한 시설이  잘 발달돼있다. 특히 케냐나 남아공에는 스위스나 프랑스 못지 않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톱 클래스의 호텔들이 등급별로  모두 터를 잡고 있어 여유만 있으면 얼마든지 호화판 관광을 할 수 있다.


△ 식인종이 있어 위험하다?

아프리카에 식인종이 살고 있어 위험하다는  것은 기우이다. 또 풍토병에 대해서도 안전수칙만 지키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각광받는  관광지는 대개 고지대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세균 감염 가능성이 적다. 아프리카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출발하기 일주일 전쯤 말라리아와 황열병 예방주사만 맞으면 된다. 물론 호수나 수돗물을 그냥 먹어선 안 된다.



관습

레스토랑 등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남성뿐이다. 이것도 습관의 하나인 듯 하다. 그러므로 파티 등의  초대도 부인을 반할  필요성은 없다. 소말리아인을 포함한 파티는 점심 시간에 열리는 경우가 많다. 이슬람교도와 파티를 해도 알콜류를 마시는 사람이 꽤 많다.
그러므로 파티석상(席上)에 주류를 내어도 문제되지 않으나 될 수 있는 한 삼가는 편이 좋다. 손님이 오거나 방문시의 유의점은 특별히 없다. 그러나 예배시의 방문은 되돌려 보내는 편이 좋다. 예배시간은 일 출몰  시간에 따라 변화하나 대개 다음과 같다. 예배는 하루에 5회이다.                                                                      

시차
그리니치 기준시보다 약 3시간 정도 빠르다.

전압
220V, 50HZ

전화
1986년 일본의 유상원조에 따라 시내의 일부 지역의  전화망이 정비, 확충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보급률은 아직 매우 낮다. 외국인이 살고 있는 곳이라도 아직 전화가 설치되지 않은 곳이 많다. 공중전화는 전혀 없다. 국내 28개소의 시내 곳곳에 전화망이 있다. 그러나 전력공급이  불안정해서  발전기를 준비하고  있으나 이것으로 가동되지 않는 곳이 많다. 실제로는 시내에서의 전화도 좀처럼 하기 힘든 상황이다.

소말리아와 한국과의 국제전화는  로마를 통해서 한다. 교신방법은 우체국에서 신청서에 한국의 전화번호와 희망통화소용시간(3,  5, 7,  10분) 을 기입하고 요금을 지불하여 신청한다. 우체국 안에는 전화신청자로 항상 혼잡하고 많이  기다려야 한다. 길게는 2∼3시간, 짧게는 30분은 기다려야 한다. 일단  연결되어도 3분이 되면 자동적으로 끊겨 버린다. 교환수의 '그대로 기다리십시오'라는 지시에 따라 수화기를 들고 있으면 다시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
집을 임대한 경우  국제전화사용으로 등록되어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제한된 숫자만큼만 허용되지는 않는 듯 하다. 한국에서 소말리아에 전화하는 것은 그이상으로 어려운 듯하다.

                      
우편

텔렉스
최근 텔렉스회선이 보급되어서 일부 정부기관,  호텔, 우편국 등에 설치되어 있다. 일반인은 우편국에서 발신하고 있다. 또 우편국에서 수신된 것은 개인 우편함에 넣어둔다. 우편국은 텔렉스 이용자가 많아서  항상 혼잡하다.  또 요금의 지불도 시간이 걸려서 다소 불편하다. 호텔의 텔렉스는 수수료  등으로 3할 정도  비싸지만 편리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숙박객 이외의 경우는 수신할 수 없다.

전보(電報)
우편국에서 취급하고 있지만 신뢰도가  떨어진다. 텔렉스를 이용하는 편이 좋다. 모가디슈 시내에는  4개소의  우편국이 있고  여기에 개인 우편함이 준비되어 있다. 소말리아에서는 우편물 배달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편사정은 그다지 좋지 않다. 우편물이 찾아가지 않아서 쌓이는 일이 빈번하다. 또 편물이 개봉되어 검사를 하는 것도 있다. 우편물은 전부  엽서라도 일단  세관을 통해서 우편국에 접수되는 제도가 자리잡아가고   .식료품, 책 등은 과세가 없다. 소포의 경우에만 취급수수료로 1상자에 160실링이 징수될 뿐이다.


공휴일
5월 1일  6월 1일 10월 21일, 22일



☆나의 생각들

---소말리아의 위기 극복 방안들.
현재 소말리아는 기아와 질병, 내전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중에서  기아는 세계각국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해결이 안되고  있다. 또한  내전도 UN에서 도움을 주고 있지만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처지이다.
내 생각으론 소말리아에 대한 세계  각국의 도움과 관심도 필요하지만  그들 스스로 힘든 상황을 극복해 내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평화적인 방법이 동원된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세부적인 사항으로는 농업이 어려운 지역이  많으므로, 농업보단 컴퓨터등을 이용한 고부가가치 산업의  개발을 통한  경제발전을 꾀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선 우선 그들의  교육수준을 높이는 기초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그들을 교육시킬 때 언어,수학,역사,등뿐만 아니라 보건과  위생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해서 질병을 예방할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아프리카의 이해를 듣고 나서...
아프리카의 이해란 과목을 듣게 된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조금더 솔직해 진다면 수업시간엔 그저 동물의 왕국(?)이나 원시부족의 다큐멘터리 같은 비디오 몇 편을  보면 되지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게  왠걸?... 그저 시간때우기로 들어본 강의는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 이름은 조금 알려져 있지만 세부적인 자료가  없는 아프리카를 우리들이 직접  조사하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예상하지 못했던  수업방식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겁업이 첫 발표를 하기도 했지만...
우리들은 아프리카에 대해 많은  편견과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무조건 아프리카하면, 사막, 식인종, 말라리아(물론 얼마 전에는 한 탤런트가 풍토병에 걸려서 죽기도  했지만...), 열대기후...이런 것들만  떠올린다. 게다가 조금 관심을 가져본 사람들은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역사가 없는 곳이라고도  여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아프리카가 관광지로 훌륭한 곳이다'라는 얘기를 하셨을땐  의아해 했었으니까. 이건  우리들이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과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아프리카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매력적인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마도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미개하거나  위험한 곳이 아니라,   희망이 가득찬 곳이다.  왜냐구? 넓은 땅, 적지않은 인구, 아름다운 자연,  채 개발되지 않은 자원이 가득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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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2003. 2. 3. 10:48
수도는 방기이다. 북쪽은 차드, 동쪽은 수단, 남쪽은 콩고와 콩고 민주공화국, 서쪽은 카메룬과 접해 있다. 동서길이 약 1,350km, 남북길이 약 750km이다. 면적 622,436㎢, 인구 3,342,000(1997).

자연환경

해발 600∼800m의 낮은 고원에 자리잡고 있으며, 아프리카의 주요하천분지 가운데 콩고(자이르) 강 분지, 차드 호(주요지류는 샤리 강) 분지, 나일 강 분지 등 3개의 분지가 갈라지는 분수령이다. 동쪽 수단과의 국경은 우방기(콩고) 강과 나일 강의 분수령과 잇닿아 있는데, 이 분수령은 북동쪽에서 1,350m 이상의 높이로 급격히 솟아 있는 몽고스 산맥과 동쪽과 남동쪽에 걸친 통두 대산괴로 형성되어 있다. 이 나라의 경관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중앙 능선이다. 이 낮은 융기부는 몽고스 산맥에서 서쪽으로 뻗어 카르 산맥으로 이어지면서 차드 호와 자이르 강(샤리 강과 우방기 강)의 분수령을 이루는데, 서쪽에서는 1,200m 높이까지 솟아 있다. 샤리 강의 지류들이 이 나라 북쪽 영토의 1/3을 차지하며, 나머지 2/3 지역은 남쪽의 우방기 강 유역으로 물이 빠진다. 기후상으로는 북쪽의 아(亞)사하라 기후와 남쪽의 적도기후 사이의 천이(遷移)기후대에 속한다. 비는 남부의 우방기 강 유역의 울창한 우림지역을 제외하고는 계절적으로 내리는데, 북동부 사바나 지대의 비라오에 내리는 강우량 860㎜ 가운데 90% 이상이 4∼9월에 집중된다. 강우량은 남쪽과 남서쪽으로 갈수록 많아지고 연중 분포도 갈수록 고르다. 기온은 계절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비교적 균일하며, 전국적으로 대부분 24∼27℃의 분포를 보인다. 이 나라는 아프리카의 초원지대인 사바나 지대에 대부분 속해 있어 사슴·영양·물소·코끼리·하이에나와 같은 종류의 동물이 서식한다. 강들을 따라 사바나 지대까지 깊숙이 뻗어 있는 우림에는 고릴라·침팬지, 각종 원숭이가 서식한다. 전체 국토의 약 3/5이 숲으로 덮여 있어 마호가니와 같은 경재(硬材), 오베크(흰색에서 연노랑색까지의 연한 목재), 림바(키가 크고 희뿌연 줄기 나무에서 나오는 세로 결의 목재)가 풍부하게 산출된다.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에는 상당량의 광물이 매장되어 있지만, 1980년대초까지만 해도 다이아몬드와 우라늄만 채굴되었다.

국민

주민의 대부분이 19세기에 부락을 개척한 주민들의 후손이다. 우방기족(강변 거주민들의 일반 명칭)은 우방기 강 연안과 음보무 주(州)에서 산다. 반다족은 중앙부에 위치한 브리아·방바리·포르시부 사이의 고지대에 거주한다. 만자족은 주로 포르시부 주변에 살며 바야족과 함께 지낸다. 사라족은 북쪽 국경을 따라 분단되어 있고, 그들의 부락들은 차드의 사르 지방까지 이어져 있다. 페르티족은 북동부에 살며, 음붐족은 멀리 차드와 카메룬에까지 살고 있다. 원주민의 잔여 종족인 피그미족은 남서부의 우림지역에서 거주한다. 주로 프랑스인인 유럽계의 소수민은 방기에서 산다. 국어는 링구아 프랑카(아프리카 중동 지방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터키어·아랍어 등의 국제혼성어)의 하나인 상고어(語)이며, 공용어인 프랑스어는 학교에서 가르친다. 그밖에 장드어와 같은 부족어들도 쓰인다. 약 170만 명이 그리스도교도임을 자처하고 그중 대부분이 개신교도이지만 아직도 주민의 다수가 정령숭배의식을 행하고 있다. 북부에 이슬람교의 작은 공동체가 있다. 1970년대말 출생률이 1,000명당 44명으로 매우 높았다. 사망률은 1,000명당 23명이었으며, 1970∼80년의 인구증가율은 연간 2.3%였다. 정부는 인구분포가 지역적으로 불균등하여 행정 서비스의 제공이 어려운 것을 우려,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추세를 역전시킴으로써 사태를 완화시키고자 힘쓰고 있다.

경제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은 국영기업과 사기업이 혼재하는 개발도상국의 자유기업 경제체제로 되어 있다. 1981년의 국민총생산(GNP)은 7억 7,000만 달러였으며, 1인당 GNP는 320달러로 저개발국 중에서도 최빈국에 속한다. 순수 GNP의 연간 성장률(1970∼ 80)은 -0.2%였고, 1980년대초까지도 마이너스 성장이 계속되었는데, 이는 사헬 지방의 한발과 개발을 위한 에너지 자원의 수입비용 때문이었다. 농업·임업·무역이 GNP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농업은 GNP의 약 2/5를 차지하지만, 경작지는 전체토지의 약 3%에 지나지 않으며 그 가운데 많은 땅이 영세적으로 경작된다. 가장 중요한 가내 소비작물은 과일·근대류·곡물이다. 환금작물로는 땅콩·면화·커피가 있다. 열매와 기름을 얻기 위한 야자재배가 1980년대초에 상업적 기반이 되었으며, 장 베델 보카사 정권(1965∼79)의 방치정책으로 떨어졌던 농작물 생산고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보카사의 뒤를 이은 정부는 경제개발에 초점을 맞추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농업협동조합을 만들었고, 농업생산을 촉진시키기 위해 1982년 생산자 가격을 올렸다. 목초지는 국토의 약 5%를 차지하며 가축사육에 이용되는데, 소의 방목과 낙농은 체체파리로 인해 지장을 받는다. 임업은 GN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몫 가운데 약 2/5에 해당되며, 목재는 주요수출품이다. 그런데도 제재업이 미개발 상태여서 임산물 가운데 약 4/5가 땔나무로 쓰이며, 1/6이 공업용으로 쓰이고 1/10이 수출된다.

광업생산은 GNP의 약 3%밖에 되지 않지만, 금강석은 약 절반이 국외로 밀반출됨에도 불구하고 수출총액의 약 40%를 점한다. 우라늄 광산개발계획이 바쿠마 부근에서 시작되었으나 수송수단이 빈약하여 이 광산과 그밖에 광물자원의 개발이 지지부진하다. 제조업은 GNP의 약 12%를 차지하나 미개발 상태이며, 전통적인 경공업 분야에 주로 한정되어 있다. 중요한 공산품은 면직물과 의류·가죽제품·오토바이·자동차·가공식물유·벽돌·담배·맥주 등이다. 1980년대초의 전력생산은 6,400만kWh였는데, 94%가 수력발전이었고, 6%가 화력발전이었다. 건축은 GNP의 약 6%를 차지한다. 1980년대초에는 도로건설 및 살로·방기 두 하항(河港)의 개량이 최우선적인 공사였다.

인구의 약 절반이 노동인구에 속하며, 그 가운데 4/5가 농업에 종사한다.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은 프랑화(貨) 지역에 속하기 때문에 아프리카 공동재정(Communauté financiére africaine/CFA) 프랑(franc)을 사용하며, CFA 프랑은 100상팀으로 다시 나뉜다.

도로는 대부분 비포장이며, 수송수단이 취약하여 경제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총길이 7,040km에 달하는 사통팔달의 수로망이 흘수가 얕은 배들이 운항하는 전통적인 교통로였다. 우방기 강을 통해 이 나라 최대의 항구인 방기 아래까지 외양선들이 드나들 수 있다. 방기에는 국제공항이 있으며, 국영항공사와 민간인이 주식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항공사가 다른 지역의 작은 공항들과 연결되어 국내선 항공여객들을 수송한다. 무역수지는 1982년에 8,100만 달러의 적자를 보였다. 주요수출품은 다이아몬드·목재·면화·커피이고, 주로 프랑스·벨기에·룩셈부르크로 수출된다. 수입품은 주로 기계류와 수송장비, 비금속과 제조품, 화학제품인데 대부분 프랑스와 독일로부터 수입해온다.

정치·사회

일당 군사정부가 다스리는 나라로 입법권과 행정권은 군참모총장이 이끄는 국가재건군사위원회(Comité Militaire pour le Redressement National)가 장악하고 있다. 이 군사정부는 1981년에 제정된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불법화했다. 사회복지제도에 따라 고용인들에게 근로상해·해산·불구·노령에 대한 연금을 지급한다. 특정분야의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저임금제도도 있다. 보건상황은 극도로 열악하여 말라리아·나병과 같은 병이 풍토병으로 만연하고 있으며, 의사와 병원시설의 극심한 부족으로 인해 의료행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유아사망률은 출산아 1,000명당 154명에 달한다. 출생시의 예상 평균수명은 남자 38세, 여자 45세에 불과하며, 세계 최저 평균치에 속한다. 교육은 무상이지만 전체 어린이의 약 절반만이 초등교육을 받는 것으로 추산된다. 중등교육을 받는 비율은 훨씬 더 적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1969년에 설립된 방기대학교가 있다. 신문은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으며, 방송매체는 정부가 소유·운영한다.

문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각 부족에 관한 역사기록은 없다. 부족들의 조상(彫像)과 탈, 1,500개의 부족민요 음반이 방기의 바르텔레미 보강다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방기에 있는 아프리카 미술 장색(匠色) 센터에는 상아 세공품과 나비의 날개로 만든 그림과 같은 전통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역사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구석기시대 말엽에 사람이 거주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19세기 전까지의 문서상 기록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19세기 이후의 것도 드물다. 지금의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영토가 가오가라고 알려진 16세기 제국의 일부였음을 알려주는 약간의 증거는 남아 있다. 16∼18세기에 노예사냥이 계속되어 원주민의 수가 대폭 줄었다. 프랑스인들이 중앙 아프리카를 탐험하여 영토권을 주장하고 1889년 방기에 군영을 설치했다. 그들은 1911년까지 완전지배를 확보했지만 반란은 계속되었다. 1898년 프랑스는 이 식민지를 분할하여 특허권을 소유한 몇 명의 거상(巨商)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의 노동력 징발은 지역 전체의 궁핍과 강을 제외한 적절한 교통로의 부재로 인해 수월하게 이루어졌지만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노동자 혹사는 1920년대말까지 계속되었다.

1946년 당시 우방기샤리로 불린 이 식민지는 프랑스의 해외준주가 되어 바르텔레미 보강다를 프랑스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했다. 보강다는 독립운동을 지휘했고, 그결과 1958년 프랑스 공동체 내의 자치공화국인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이 창설되었다. 보강다는 1959년에 죽었고, 그의 후계자인 다비드 다코가 1년 후에 독립을 선포했다. 1965년에는 장 베델 보카사가 군사혁명을 지휘하여 성공한 후 아프리카에서 가장 악명 높고 방탕한 독재자가 되었다. 그는 1976년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국명을 중앙 아프리카 제국(帝國)으로 고쳤다. 그는 1979년 약 100명의 어린이를 학살한 사건에 관여하여 프랑스의 개입으로 권좌에서 쫓겨났고 다코가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그러나 1981년 무혈 혁명이 일어나 앙드레 콜링바 장군과 그의 국가재건군사위원회가 정권을 장악했다.

한국과의 관계

1963년 9월 국교를 수립한 데 이어 1973년 5월 무역협정, 1974년 2월 경제기술협력협정, 1984년 12월 의료협력협정을 체결했다. 통상 면에서 1991년 대한 수입 77만 달러, 대한 수출 67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현재 한국에서 파견한 의료진이 활동하고 있다. 한편 북한과는 1969년 9월 국교를 수립, 1971년 3월 한때 단교했다가 1977년 2월 재수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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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카메룬

2003. 2. 3. 10:46
국가 개요

수도: 야운데(Yaounde, 64만명)
인구: 약 1.350만명
면적: 475.422㎢, 우리나라의 약 2∼3배
주요도시: 두알라, 은콩삼바, 마루아, 가루아  
주요민족: Bantu,Semi­Bantu, kirdis족 등 200여 민족
주요 언어: 프랑스어= 67% 영어=33%
종교: 카톨릭 및 기독교가 55%,원시토착신앙이 25%, 회교가 20%


카메룬 개요

1960년 프랑스 통치령으로부터 독립, 외교 정책은 일단 비동맹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친 유럽적 경향이 강하며 유엔·아프리카통일기구·EC의 연합국이기도 하다. 땅은 매우 기름져 농업 발전의 잠재력이 있으며 목재·상아가 주요 산물이다.  주민은 약 반수가 반투계외 준 반투계 족이다.

위치

아프리카대륙 남동 끝, 서해안의 기니만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의 접경지역에 기네만을 끼고 세모꼴로 자리잡고 있다.  북서쪽으로는 나이지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북동쪽으로 차드, 동쪽으로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이  위치하구 있으며 남쪽으로는 콩고, 가봉, 적도 기니와 인접해 있다.


기후


지세
카메룬의 지리는 다음 4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진다.

남부지역
사나가강애서 남쪽 국경까지의 범위를 말하며 해안평야와 숲이 무성하고 평균 고도 600m를 약간 넘는 하나의 고원지대이다.

중부지역
사나가강에서 북쪽으로 베누에강 지의 범위를 말하며, 북쪽으로  가면서 점차 높아져 해발 고도가 어디에서나 900m이상이고 평균고도가 1.37m인 아다마와고원을 포함한다.

북부지역
사바나평원이 차드호 분지를 향해 분지를 향해 내리막 경사를 이루고 있다.

서부지역
서에서 북으로 나이지리아와 국경을 이루는 지역으로 기복이 심하며 화산봉우리인  카메룬산이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해발 4.085m까지 솟아있다. 카메룬에는 두 개의 큰 강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나가강으로  약 13만 5.000㎢면적의 땅을 배수하고  남서 방향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가 며 다른하나는  베누에강으로 서쪽에 있는 나이지리아의  나이저강 유역으로 흐르는제 연중 몇 개월은 배가 다닐 수 없다.

남부는 고온다습한 전형적인 적도기후이며 북부는 고온다습한 사막기후를 보인다.  전형적인 열대 우림 지대인 남부에서 북은 차드 호반의 사막에 가까운 사바나지대에 이르고 있다. 우계는 남동부에서는 연 2회(4∼5월,  8∼10월 전 후)이나  서부에서는 연 1회(7∼9월)이다. 기온은 기니 만 해안에서는 2∼3월경이 가장 높아서 26∼27℃,  7∼8월이 가장 낮아서 23∼24℃이다. 북부의 마루아에서는 5월에 33∼34℃로 가장  높고 8월에는 26℃ 정도가 된다.  12∼1월에는 다시 26.5℃정도의 평균 기온으로 내려간다.


기온
국토 전체가 열대기후에 속해 있어 연중 고온이 계속되며 전국의 연평균 기온은 21∼28℃정도이다.

강우량
전체적인 강우량분포는 남에서 북으로 갈수록  줄어들며 해안지방의 경우 연평균  강우량이 약 3.800㎜에 달하고 중부고원 지방은  약 1.500㎜정도로 감소한다. 북부는 10∼5월,  남부는 12∼3월, 7∼9월 2회에 걸쳐 건기가 있다.

인구
공식적인 정부 지표에 의하면 1991년도 총인구는 13만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매년 2.9%의 인구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총인구중 56%가  20세 이하이며 평균수면은 남자가  54세, 여자가 57세로 조사되었다. 최근 10년간 도시인구는 매년 6%이상 증가하여  22만명에서 460만명으로 급증하였으며 전체인구의 약 36%가 도시오 집중되었다. 정부는 1989년 최초로 농촌지역으로부터 인구의 이탈을 막기위하여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1994년 회폐의 가치 하락으로  농부들의 구매력이 개선되어 농촌지역으로 인구를 끌이게 되었다.

민족
카메룬의 민족 구성은 매우 다양하여 100개 이상의 종족집단이 모여있으며 그 풍습 또한 서로 상이하다. 인구 150만으로 카메룬 전테의 약 1/5을 차지하는  바밀레케족과 티케족, 바우만적등이 서부지방에서 생활하며 북쪽에는 무슬립, 사다니, 폴베,  하샤, 쵸, 아랍족 등이 있다. 반투 라인 아래쪽으로 사네가강을 따라 에톤, 에완다, 보로우, 팡,  바싸족이 모여있는데, 그 중 팡족이 지배적이다. (반투 라인: 아프리카 남부에서 중부지방을 가로질러 사는 흑인종을 일컬어 반쿠인이라 하며 이들 지역을 일종의 구분선으로 설정한  것)두알라 주변 해안을 따라 두알라족과 바코코족 등이 살고있으며  남부 산림지대에는 소수의 피그미족들이  살고 있다.

언어
프랑스어와 영어가 공유어이나 원주민들의 방언이 여전히 쓰이고 있으며 국민의  80%가 프랑스어를 나며지 20%가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종교
전체 국민의 약 60%정도가 종족 마다의 고유한 토속신앙을 믿으며 35%는 크리스챤으로 이중 20%는 로마 카톨릭 신자이다. 그외 약 5%정도가 회교를  믿고 있다.

카메룬의 역사

아프리카는 기원전부터 일류가 살아온  땅으로 알려저 있다. 기원전  6세기경에 북아프리카 상인들이 이곳에서 교역을 화였으며 카르타고의 향해사 하논이 카메룬산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다 8세기경 사오족이 카넴보노우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그 크기가 남북으로는 챠드호수에서 카매룬 중부 아다마우고원까지,  동서로는 바우치고원에서 나이지리아에 걸친 광범위한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11세기 호우메  황제때는 활발한 교역과 이슬람교가 전파되었으며 아드리스왕때 회교사원이 건설되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아드리스  왕 이후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1472년 포루투칼 상인 페르난도 퓨가 보우리 가 보우리강 하구에 도착하여 두알라족과 노예 무역을 개시하였다. 1732년경 부터는 영국, 프랑스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노예뿐만 아니라 내륙의 야자유, 상아 등을 두알라와 보나베리일대를 중심으로 거래하였다. 하지만 1840년  6월 10일 두알라족과 영국은 "노예매매금지조약"을 체결하였으나 여전히  노예매매는 성행하였다.

1884년 7월 12일 노예매매를 둘러싼 각 부족의 추장들 간의 상호 대립이 있자 독일과 보호조약을 체결하게되고 이 조약으로 카메룬은 주권을 포함한 행정,사법권을 잃게 되었다. 카메룬에 진출하게된 독일은 1891년에는 야운데, 베노우에 등 내륙 깊숙히 진출하여 야자,  카카오, 천연고무농장을 만들었다. 이것을 만들기위해 그 곳 흑인들은 강제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1902년 독일은 총독부를 두알라에서  부애아로 옮기고 에세카―니콩삼바간 철도와 크리비항구를 건설하여 야자, 카카오, 고무 등을 독일로 옮겨갔다. 한편, 선교사들에 의한 기독교 전파와 서구식 교육 전수는 카메룬의 인재배출에  기여하였다. 1914년 2차 세계대전의 마감과 함께 독일이 물러나고,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앞다투어 카메룬에 진출하였다. 1916년 독일의 모라 요새의 함락으로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카메룬의 통치권을  완전히 넘겨주게 되어 영국과 프랑스가 카메룬을 분활 점령하였다.  1918년 6월 베르사유 평화조약에서 양국간의 카메룬 분활이 확정되었으며 영국은 서부를 프랑스가 동부를 각각  통치하기 시작되었다.

카메룬의 독립...

- 동 카메룬의 독립 -
1948년 바사족의 렌벤 움 뇨베가 이른바 카메룬 국제연합(UPC)를  결성하고 카메룬의 완전독립을 주장하여며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이단체는 카메룬의 노동자, 시민층에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1955년 5월 두알라, 바사 등지에서 반불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가 카메룬 국제연합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하자 케메룬국제연합은  지하단체화라여 반익 반불좌익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6sis 카메룬은 프랑스의 허가 아래'입법회의(ALCAM)이 구성되었고 초대수사으로는 안드래 마리 미다가 선출되었다.  이후 미다의 뒤를 이어 아마도우 아히조가 수상으로 선출되었으며 아히조는 카메룬연합을  조직국가통합을 부르짖으며 프랑스와 함께 UPC의  게릴라 소탕을 전개하였다. 1958년 후반  UPC지도자 움베뇨가 피살되자 게릴라 활동은 와해되었다. 하지만 그 잔여  세력은 여전히 남아 1970년 말까지 좌익공산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1960년 1월 1일을 기해 카메룬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 서 카메룬의 독립 -
영국은 서부 카메룬을 3개 지역으로  나누어 동부 나이지리아에 소속된 행정구역의  일부로 편입시켜 통치하였는대 동부 카메룬과는 달리 영국에 대항한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일어나지는 않았다. 1954년 나이지리아의 자치지역으로 인정받았으며, 카메룬 통일을 기본을  기본목표로 존 규 폰차가 KNDP:( KAMERUN  NATIONAL DOMOCRATIC PARY)을 설립하여 자치정부 초대수상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1월 1일 동부 카메룬이 독립하자 1961년 서부 카메룬은 독립문제오 인해 그 해  10월 1일 동서연합공화국이 탄생하였다.

독립 이후

연합국의 성립
1961년 10월 1일ㄹ 동서카메룬 통합이루 헌법에 따라 동서는 독자젃인 의회를 고성하고 국가의 중대사의 결정은 연합의회애서 처리하게  되었는데 연합정부 추대 대통령과  부통령은 아히조와 폰차가 각각선출되었다.



­카메룬의 통일­

1966년 6월 아히조가 창설한 카메룬국민연합당은  동서연방에 당세가 확장되었고 아히조를 반대한 UPC지도자 Ndongmo 주교와 Ernest  Ouandie가 1970년 체포되어 사실상 지하활동은 종식되었다. 이러한 정치상황으로 전국은 아히조의  실질적인 영향력하에 들게 되었으며 1972년 5월 20일 동서통일을 내용으로 하는 신헌법을 기처하여 국민투표에 붙인 결과 압도적인 지지로 통일 헌법을 제정하였다.


­아히조 대통령의 절대권력 장악­

통일후 아히조는 UNC를 지반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반대세력 구축을 저지하기위해 정적의 탄압, 각료급 인사의 계속적 이동  등으로 절대권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아히조는  이러한 정치수와을 활용, 정치적 안정과 농업개발을 위주로  경제개발을 위주로 착실한 경제개발을 이루었다.

­뽈 비아대통령의 집권­

1982년 11월 아히조 대통령은 건강상의  이유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헌법조항에 의거 뽈 비아 수상이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국권을 이양받은 뽈 비아 대통령은 국민의 도덕화, 사회의 자유화, 정치의 민주화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워 22년간의 장기적에 염증을  느낀 카메룬 국민들에게 새로운 정치활기를 불어 넣었다.  

지금(98)의 카메룬 GNP 1,190불 국민 총생산=175억불
무역액(97)수출 125.2 억불  수입26.6 억불
대외부채 92.2억불

카메룬의 산림
사막화의 주요 한원으로 경작지의 이동과 농업조림을 바뀌었다. 매년 벌채비율이 크게 증가된 것으로 평가됬다. 반면 산림의 손실은 적으며, 주요 산림의 경작이 고려된다. 카메룬전부의 목적은 공원, 자연자원에서 카메룬 토지의 20%보존이나 현재는  4%에 머문다. 남아있는 요구의 효과로써 침식이 빠르다. 1988년도에 수확량 확보에 대한 산림경영 시스템에서 넓은 산림 지역의 조절은 없었다.  

산림지역
7번째로 큰 열대재 수출국이며,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목재수출국이며, 카메룬  목재산업 수출분야에서 네 번째로 큰 수출분야 이다. 연료 목재, 목탄은 사바나 지역에서 오며, 산업용 목재고산림에서 온다. 오랜 기간  정부의 계획은 통나무이고 기본 토대로  만들어졌다. 원목의 12.mil.cum는 1987-89년 사이에 생산되었다. 목재  수출은 생재 통나무가 약 62%이고 가공재가 38%이다. 카메룬 목재의 주요한 수입국은  벨기에,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그리스이다. 카메룬 목재의 수출품은 대부분 마호가니, 티크, 에보니아다.


카메룬의 정치

Biya대통령의 평화적 정권승계 및 장기집권
- 82.11. 전임 Ahidjo대통령의 사임에 따라 Biya 수상,  대통령직 승계 이후84, 87 및 92년 대선에서 당선

95,12, 헌법 개정
-대통령 임기를 기존의 5년에서 7년으로 연장하되 1회만 재선(총 14년)가능
-양원재 도입(상원: 총 100명)
-지방분권화(10개의 지방자치 지역 신설)

96.1 지방의회 선거실시(336개 지역중 집권당(RDPC)219지역 차지)

97.5 국회의원 선거 실시(주요 야당  SDF:43석, UNDP: 13석,UDC: 5석,군소정당(MDR,UPC등): 10석

97.10 대통령 성거 실시 (주요 야당 SDF, UNDP, UDC선거 불참)
-Paul Biya대통령 당선(92.6%)

97.11 폴비야 대통령 취임(임기 종료:2004년)


정세평가
-82년 처음 대통령직에 오른 폴 비야대통령은 97.11.7년 임기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22년간 장기 집권의 길에 들어섬.
-대통령 선거 후 최대 야당인 SDF등 정파에 의한 정치, 사회 불안 조성이 예상되나 경재 사정의 점진적인 호전으로 정국이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음
-집권당 RDPC는 야당과의 정치적  갈등 해소를 위해 98.2  주요 야당 SDF 및 UNDP와 국정 운영 협상 진행중인 바, 지역간 반목, 차별금지, 빈곤 타파 및 지속적 경제 성장, 미주화 추진 성공등이 자이집권에 따른 국민의 염증을 해소, 현 정권의 안정을 위한 관건이 될 것으로 정망됨

경제정세
94.1. 단행됨 cfa프랑 평가절하 imf의 권고에 따른 정부의 긴축  정책에 힘입어 수출이 증대되고 95/96년간 5%경제성장 달성
국가 주요산업인 바나나, 전기, 고무 국영회사의 만영화와 차드(도바)-카메룬(크리비)파이프 라인 프로잭트( 총공사 금액 30억불, 2000년 착공)에 힘입어 국내 경기가 활성화 되고 있음. 그러나 대외 부채(약 87억불) 상환불능으로 인한 외자 유치난, 정부의 비능률적 경제운용등으로 80년대 중반부터 누적되어온 경제난 극복에 상당 기간 소요 예상.


대외관계

1. 경제·실리외교 정책
㉠ 구종주국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와의 전통적인 정치·경재 유대관개 강화 정책 추진
㉡ 90년대에 들어 지나친 대불 의종도 탈피를 위해 외교 다변화를 모색.  미국,영국, 독일등과의 관계 증진
㉢ 95.11. Commonwealth 가입등을 통한 영어권 국가들 과의 정치·경제 교류강화
㉣ 경재적 실리 측면에서 주요 원조 국가인 일본, 중국와의 관개 강화

2.아프리카 역내관계
㉠ 중서부 아프리카 지역의 중심에 위치하여 중부아 관세경제동맹 및 중부아 경재공동체등에 주도적으로 참여
㉡ 나이지리아와는 국경 분쟁등으로 불편한 관계
      - 94.2. 국경지역인 BAKASSI반도에서 무력 충돌
      - UN, OAU, ICJ등을 통해 수차례 협상시도를 하였으나 현재 ICJ에 계류 중.


의료상황

의사 수급 상황
의과대학 수: 1개, 1년 졸업생수: 8명
전문의 수련병원의 수와 수련 현황: 2곳. 실제적으로 오해부터는 1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임상실습이 전혀 채계적으로 되어 지고있지 않다.

의료기관의 수준

⑴ 일반병원

①대학병원: 병상규모는 500석정도로 크고 기자재를 많이 받아 일부과는 시설이 양호한 곳이 더러 있느나 전반적인 활동의 저하로(모든 의사가  공무이므로) 수련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기존의 전문의들이 교육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전문의를 잘 배출시키지 못하고 있다.

②국립병원: 대학병워 2곳과 지방소재 몇군데 있음

③지방병원

1. 보건소: 의과대 졸업후 의무적으로 2년이상 근무하게 되어 있음. 지역 소재 보건소가 설치되어 있으나 물자 부족으로 운영이 잘 되어지지 못하고 있다.
2. 사립병원: 대도시에 사립병운들이 주로 백인 의사 병원이 몇 곳이 있는데, 신뢰를 현지인 병워보다 더 얻고 있는 실정이다.


의료의 문제점과 전망

기존 의사들의 독점과 여느 나라와 같이 대도시의 인구 집중화로 인한 인구 과밀이 문제이다. 그리고 국외의 NGO의 지원을 매우 우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그 물자의 분배과정에서의 비리가 매우 많은 것 같다.


기독교 현황

1. 현지교회: 대형교회들도 몇군데 존재하고 있다.
2. 한인교회: 야운데(25명 정도), 두알라(20명 정도)
3. 선교역사와 가능성: 300년 정도의 개신교 역사를 잡고 있다. 파푸아 뉴기니 다음으로 언어종족이 많은 곳으로 SIL 본부가 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하고 있다.
4. 한국교회의 선교현황: 선교사 5분이 사역하고 계시며 가장 오래되신 분이 11년째를 맞으시고 성공적으로 선교를 하고 계신다. 현재 담임하는 야운데 교회 현지인 출석이 주일 대예배 참석인원이 300명이 넘을 정도이고, 신학교 사역을 1997년 10월부터 시작하셨다.
5. 현지 선교의 문제점: 현지인의 가난, 언어 소통의 문제점, 재정지원, 선교사간의 자리매김, 개신교회의 토속화 현상. 재자 훈련의 부족등의 어려움을 들 수 있겠다.



카메룬의 발전을 위한 것들

카메룬은 다른 국가에 비해 어느정도 좋은 여건에 있다.  하지만 국가의 주요 산업이 농·임업에 치중되어 있어 발전 속도나 국가 경쟁력이 월등히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카메룬이 속해 있는 경제협력기구인 ECOWAS가 제 기능을  하지못하고 있어 발전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모든 공통된 문제로써 국가의 단합이다. 각 부족과 국가의 언어가 프랑스 어와 영어, 두가지로 나누어저 있다. 우리 나라가 지금과 같은 단시일  내의 빠른 국가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국민들의 의식과 공통된 언어가 크나 큰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카메룬을 포함한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이러한 국민들을 하나로 단결 시킬 수 있는 소재가 없다. 그래서 독재와 부정 부패가 만연하는 것 같다. 이러한 나라에 필요한 것은 우수한 리더의 양육과 탄생이 필요하다. 그 예로 우리나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리더가 80년대를 우리나라 최고의 부흥기로 일구어  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아픔과 손실이 있었고 부정과 부패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연구에서 개발도상국의 비리(부정)도와 발전은 양의 관개를 띈다는  연구 결과와 같이 어느정도의 희생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희생이 따라야함은 사회가  더욱더 발전해 나가는 통로이며 지금의 상태에서는 예전과 같은 피와 살육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직국들의 NGO중심의 지원이 주(主)가 되어야 한다. 지난 선진국들의 경제 지원이나, 지원은 경제적인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상술에 불과했다. 그래서 지금의  아프리카를 비롯한 과거의 쿠바, 지금의 동유럽의 분쟁과 사람들의  죽음이 생겨났으며 점차 더욱 더 그 강도가 더해만 가고 있다.

국가간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우리나라만의 생존만을 고집할 수 없다. 이것은 다른 서방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며, 앞으로의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카메룬이 이것만을 바라 보다가는 종속이론의 정통적인 모델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리더의 양육에 필요한 국민의 교육을 넓게 확대하고 각 지방을 특성을 파악하고 각 지역의 특성을 발판으로 하는 특정 종목을 주력 발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선적으로 대도시의 인구를 분산시켜, 인구 밀집을 막을 수 있으며 국토의 효용적인 활용으로 인한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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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우간다

2003. 2. 3. 10:39
우간다에 대해

아프리카 중앙부에 있는 내륙국. 동부는 케냐, 서부는 자이르, 남부는 루안다와 탄자니아, 북부는 수단과 국경을 접한다. 면적 23만 6,036㎢(그 중 水面면적이 3만5,431㎢). 인국 1,322만(1979). 인구밀도는 56인/㎢. 수도는 캄팔라이다.

면적 : 23만6,036㎢ 인구 : 1,322만(1979) 인구밀도 :  56인/㎢ 수도 : 캄팔라 통화 : 우간뉴실링(USh) 환률 : 1달러 1,135USh(1997)
국민소득 :  국민총생산 37억 1,200만 달러   수출 3억 7,610만 달러 수입 3억 800만 달러

자연
동아프리카 대지구대의 중앙에 위치하며, 케냐와의 국경에 있는 엘곤산, 자이르와의 국경에 있는 루웬조리산, 루안다와의 국경에 있는 무하보라산이 동서로 치솟아 있다. 이 나라의 남동부에 긴 호안선을 이루는 빅토리아호, 남서 국경지역의 에드워드호, 그 북방에 빅토리아 나일강으로 빅토리아호와 연결되는 앨버트호 등이 있어 영토의 북서부가 점차 고도가 낮아지는 고원이 되며 그 중 가장 낮은 지역을 앨버트 나일강이 흘러 수단에 들어가서 백(百)나일이 된다. 영토의 중앙부는 쿄가호를 중심으로 광대한 소택(沼澤)지대를 이루고 있다. 영토의 대부분은 표고 1,000m이상으로 적도 직하(赤道直下)이나 기온은 연교차가 거의 없으며 수도 캄팔라의 연평균 기온은 21.9℃이다. 우기는 3∼5월, 9∼1월 등 2회로 나타나며 빅토리아 호반의 연 평균 강수량은 1,800mm에 이른다. 우간다는 사바나 기후로, 소림지역이 많으며 머치슨폴즈, 르웬조리 등의 2대 국립공원이 있으며 몇 개의 광대한 동물보호지구가 있다.

주민
아프리카인이 99.1%, 인도인을 주로 하는 아시아인이 0.8%, 백인이 0.1%이다. 지방자치제는 부족을 단위로 하고 있다.

역사
예로부터 여러 민족의 왕래가 잦았으나 이디오피아 방면에서 남하한 인종이 분뇨로, 부간다 등의 왕국을 세운 것이 16세기 중엽이었고, 처음에는 분뇨로 왕국이 가장 강력하였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부간다왕국이 득세하였다. 1844년경부터 인도양 연안에서 진출해온 아랍 노예상인이 빅토리아 호수 근처에도 넘나들었고 또한 수단 방면에서 온 노예 사냥군을 선도하여 이집트의 세력도 침투해와서 1870년대에는 이 지역의 지배권을 주장하였다. 영국의 탐험가 J. H. 스피크와 J. A.그란트가 부간다 왕국을 방문한 것이 1862년, 영국이 이 지역에 세력을 확립한 것이 89년인데 영국 동아프리카회사가 그 통치, 개발을 담당하였다. 90년에 독일령(領) 동 아프리카와의 경계가 획정되었고, 러가드 대위가 통치를 맡았다. 94년 부간다 왕국이, 96년에는 다른 우간다 지역들이 영국과 보호령협정을 맺었다. 1901년 동(東)케냐 빅토리아 호안에 있는 키수무 항(港)과 인도양 연안의 몸바사 항을 잇는 철도가 개통되었고, 아프리카 농민들에게 재배방법을 지도하여 생산된 목화를 수송하기 위한 철도도 부설되었다. 한편 10년경부터 백인 농장에서 시작한 코피 재배가 아프리카인들 사이에도 널리 번져나갔다. 케냐와는 같은 영령 동아프리카로서 밀접한 경제관계를 지니고 있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그 때부터 영국 위임통치령이 된 탕가니카(탄자니아)를 더하여 세 나라가 공통의 통화, 관세, 교통, 통신 등을 통하여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독립운동은 52년에 결성된 우간다 민족회의(UNC)의 활동이 최초였고, 이는 다른 아프리카 여러 나라보다 상당히 뒤늦게 시작된 셈이다. 영국의 '동아프리카 연방'구상에 반대했던 부간다 국왕은 53년 11월 이후 한때 퇴위를 당하였으나 62년 10월에 독립되면서 헌법개정에 의해 특이하고 복잡한 연방체의 대통령이 되었다.

정치, 외교
1967년 10월 9일 독립 5주년 기념일에 신헌법이 실시되면서 우간다는 종래의 정치체제에서 탈피하여 공화국으로 변모하였다. 대통령은 원수, 정부수반, 군최고사령관의 지위를 겸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다. 의회는 단원제로 82의석인데 그 중 27의석은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다. 초대 대통령은 우간다 왕국의 무테사 2세였으나 66년 오보테 수상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 좌경화(左傾化)하였다. 71년 1월 오보테가 영국연방수뇌회의 참석차 외유중(外遊中), 이번에는 이디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 의회를 해산하고 정당활동을 금지하였다. 아민은 72년 8월 우간다의 경제를 주름잡던 재주(在住) 인도인에게 강제 퇴거령을 내렸으며, 그 후 반대파로 인정되는 국민의 대량 학살을 감행하는 등 국제적인 비난의 표적이 되었고, 그의 폭정하에서 정치가, 실업가, 지식인의 대부분은 숙청되거나 망명하거나 하였다. 72년 이스라엘과 단교, 리비아와 동맹관계를 맺는 한편 인접국가인 탄자니아, 케냐와의 관계를 악화시켰기 때문에 우간다는 아프리카에서도 완전히 고립하게 되었다. 78년 10월 탄자니아와 군사충돌을 일으킨 아민은 79년 4월 탄자니아의 지원을 받은 반(反)아민파에 의하여 국외로 추방(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여러번 대통령이 바뀌면서 80년 말 총선거의 결과 오보테가 대통령에 복귀하였다. 아민이 축출되자 미국은 79년 5월 우간다에 대한 금수(禁輸) 조치를 해제한 바있다.

경제, 산업
우간다는 농업국으로 수출품의 90%가 농산물인데 1976년의 경우, 수출총액 3억5,150만 달러 가운데 코피가 82.7%를 차지하며 목화가 6.1%, 차가 2.9%, 구리가 2.2%를 차지한다. 우간다의 경제는 1920년대부터 케냐, 탄자니아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으며, 3개국이 각각 독립한 이후 66년 8월에 공통통화는 폐지된 대신 67년 7월에 3개국간에 동아프리카 공동체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아민 정권의 출현 이후 서서히 마찰이 증대하여 마침내 77년 9월에 동아프리카 공동체는 소멸되기에 이르렀다. 우간다의 산업 경제는 오랫동안 아시아인(인도인, 파키스탄인)에 의하여 지배되어 왔고 72년에 아민이 이들 아시아인의 강제 퇴거를 명령하였을 때 옛 종주국인 영국은 강경하게 그것에 반대하였으나 우간다의 일반 민중은 당시 이 조치를 환경하였다. 그러나 아시아인의 대부분이 떠나게 되자 산업경제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일부 아시아인을 재입국 시키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혼란은 물자의 부족을 야기시켜 소비자 물가지수(75년에 100)가 72년의 40%서 73년 49.3%, 74년 83.1%, 76년에는 154.8%로 급상승하였으며 극도의 인플레이션에 빠져들게 되었다. 우간다에는 케냐 국경에서부터 자이르국경 근처까지 동서로 달리는 간선철도와 목화재배지대를 거치 앨버트 나일강연안으로 뻗은 간선 및 지선철도가 있고, 빅토리아호, 쿄가호, 빅토리아 나일강 등의 내륙수운과 약 1,800km의 도로가 있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빅토리아호반의 엔테베에 국제공항이 있고, 빅토리아호의 빅토리아 나일강 유출부에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어(1954) 15만 kW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사회, 문화
우간다는 아프리카에서는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의 하나이며, 또 계절적인 농업 노동자가 대량으로 인접국가들로부터 드나들고 있다. 종교는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각기 널리 보급되어 있지만 전통적인 부족종교도 무시할 수 없다. 언어는 전통적인 부족왕국이 최근까지 존속하였고 또 반투계 이외의 다양한 주민이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동아프리카 여러나라처럼 스와힐리어를 국어로 하고 있지않으며 영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분간 존속될 것 같다. 성인문맹율은 75%에 달하나 교육은 인접국가들보다 보급되어 있는 편이고 공립 또는 정부의 원조를 받는 국민학교의 학생수가 약 80만, 그밖에 중학교, 직업학교 등이 있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계통의 사립학교도 많다.

우리 나라와의 관계
우간다는 비동맹 중립주의를 표방, 남북한 동시 수교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는 1962년 10월 우간다를 정식 승인하고 63년 4월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80년의 경우, 우리나라의 대(對) 우간다 수출실적은 111만 달러, 수입은 640만 달러인데, 현저한 입초(立超)을 나타내는 수입 품목의 대종은 코피이다.

우간다 소개

면적: 241,139평방미터 (남북한 합친 것과 비슷)
인구: 약 2천만. 아디아민 독재와 그 후유증으로 통계에 따라 80만 내지 2백만명까지의 사람이 죽었다. 55개 종족에 43개의 언어 사용. 내전으로 80만의 고아가 생겼고 인구의 3분의 1이 HIV양성 내지 AIDS환자라는 통계가 있다 (실제로는 그보다 조금 낮을 것 같다).
전략적 위치: 수단 남부, 자이레 동부, 루안다 등의 나라는 우간다를 통과해서 물자를 공급받는다. (실제로 모든민족신학교에는 이들 나라 출신의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고 있다.) 우간다는 케냐, 수단, 탄자니아, 자이레, 루안다에 둘려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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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2003. 2. 3. 10:24

I 국가상징                                                                  

1. 국명: 정식 국명은  콩고공화국(Republic of the Congo)이고,  콩고라는 국명은 콩고강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산'을 의미한다고 한다. 1969년  말에 노동당이 정권을 쥐고 있을 때나라 이름을 콩고공화국에서 콩고인민공화국으로 바꾸고 국기도 바꾸었으나 1990년대 개혁, 개방을 앞세운 콩고 재건 정책에 의해 1991년 다시 원래 명칭인 콩고공화국으로 바뀌었다.

2. 국기: 아래쪽에서부터 대각선 사선으로 붉은색, 황색, 적색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국기는 대중적인 에디오피아의  범아프리카색을 사용하고 있고,  공산주의 시절 한차례 바뀌었다가 1991년 현재의 국기로 바뀌었다.

3. 수도: 브라자빌(Brazzaville)


II 국토지리 / 역사                                                          

1. 위치: 아프리카 대륙의 중서부, 북위 4˚~남위 5˚, 동경 11˚~18˚에 위치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중서부 아프리카의 적도에 걸쳐있고, 서쪽으로는 가봉, 북서쪽으로 카메룬, 북쪽으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동쪽과 남쪽으로  자이르, 남쪽으로 앙골라의 고립영토인 카빈다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2. 면적: 342,000㎢, 한반도의 1.5배

3. 기후: 고온 다습한 대성 적도 기후이며 연평균  기온은 21~30℃ 이다. 10월부터 5월까지가 우기철이며 이때의 평균 기온은 24℃ 이고  6월에서 9월까지는 건기철로 평균 기온은 23℃ 이하이다. 연 평균 강수량은 1,100㎜ 이다.

4. 주요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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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인구                       도시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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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엥뜨누아르(Pointe-Noire)       297,000명                  행정.상업도시,
수출입항
루보모(Loubomo)                  50,000명                   상업도시
은카이(N'Kayi)                   35,000명                   상업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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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연환경: 바테케 고원과 방브  고원이 동서로 펼쳐져 있으며,  이 나라 북부의 3/4를 배수하는 콩고강과 남부와 남동부의 대부분을 유역으로 하는 니아리강이 2대강을 이룬다. 160㎞에 달하는 남서부 해안지역은 대서양으로  열려있다. 이 해안지역에는 북쪽으로 모래지대가 있고,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는 홍수림 늪이 이어진다. 연평균 기온은 20~27℃ 이며 남서해안을 따라 흐르는 벵겔라 해류가 더위를 식혀주기도 한다. 야생동물의 종류가 다양하여 삼림지에서는 침팬지, 괼라와 여러 종류의 원숭이가 살고 사바나 지역에는 영양류와 재칼, 치타가 서식하며, 고원의 동물로는 코뿔소와 기린이 있다.

6. 역사

(1) 약사
1484.         포르투갈인 디에고 캠이 콩고강 탐험
18세기부터    프랑스의 상업 진출
1875~1878     프랑스인 피에르 사보르냥 드 브라자가 콩고 내륙지방 탐험
1880. 10      프랑스 영토권 확보(콩고왕 Makoko와 우호조약 체결)
1885.2.28     베를린 의회에서 프랑스의 권리 인정(불령 적도 아프리카 AFF에 편입)
1886~1960     프랑스 식민지화
1958.11       프랑스 공동체내에서 자치권 획득
1960.8.15     독립. 풀베르 율르 대통령 취임
1963.8        노동자 혁명.   Youlou 대통령 사임(8월 15일).   알퐁스 마상바데 바 대통령 취임(아프리카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
1964.         국민혁명운동당  발족(MNR).  반자본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 선언. 국민혁명운동당 청년연맹이 준군사적 행동대원으로 극좌노선 주도
1966.         급진파 Massamba-Debat 대통령과 JMNR 지원을 받는 극좌파 대립 격화
1968.7        마리앙 응구아비의 쿠테타
1968.9        Massamba-Debat 대통령 사임.   Marien Ngouabi 정권
1969.12       콩고 노동당(PCT)이 MNR로 대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민주통합주의 노선 채택.   '콩고인민공화국'으로 개칭
1969.12       콩고인민공화국 헌법 채택.  PCT당 총재가 당연직 대통령이 되고 PCT 가 당 정치국 및 중앙위원회를 통하여 실권 행사
1970.         콩고 사회주의 청소년연맹 발족, JMNR 활동 계승
1977.3        Marien Ngouabi 대통령 피살, 전대통령이던 Massamba-Debat는 군사재판에서 암살관련 혐의로 사형
1977.3        PCT군사위원회 계엄령 선포. Joachim Yhombi-Opango 대령을 국가원수로 추대
1978.8        Yhombi-Opango 대통령, 쿠테타음모 분쇄발표(동국 독립기념식도 취소)
1979.2.5      당 추진층 분열로 Yhombi-Opango   대통령 사임. Denis Sassou-Nguesso 대령 정권, 과도위원회 의장 취임
1979.3        Nguesso 대령, 대통령 및 당 중앙위 의장 취임
1979.3.26~31  콩고 노동당 특별전당대회 개최, 정치관련구조의 개편완결
               - 개편내용: 최고권력기관으로 종전의 군사  위원회를 폐지. 정치국(10명)과  당 중앙위원회(60명)를 신설
               - 민간인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권력층에 부상한 것이 특수
               - 쿠테타 배후에 소련, 쿠바 등 개입(2월 5일)
               - Opango 전대통령은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힘
1979.7.8      국민투표로 마르크스-레닌주의 헌법 채택.   인민의회 구성(총선거에서 153명 인민의원 선출)
1979.11       제 2차 콩고 노동당 전당대회 개최(60명의 중앙위원참서, 당조직 재 정비 관련사항)
1984.6        콩고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Sassou-Nguesso 대통령이 재추대되고  콩고 노동당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향후 5년 더  재임 결정 및 헌법수정위 채택
1984.12       신임 각료 명단 발표.  수상에 Ange-Edouard Poungui, 외상에 Antoine ndinga-oba 임명
1987.         Piere Anga 대령 주도로 북부지방에서 반란 시도, 실패
1990.         가톨릭 및 학생 주도로  민주화 요구 및 다당제 요구 시위.   급여인상 요구, 공무원 파업사태
1991.         헌법개정 및 민주화 요구  관련, 각계 대표로 구성된 국민회의 개최, 다당제 인정. 정치 및 사회 자유화 추진
1992.6        최초로 다당제 인정
1992.8        최초의 민선정부 출범(대통령 : 파스칼 리수바)


(2) 역사
콩고 최초의 거주민은 피그미족이다. 그 후 해변가를 중심으로 콩고, 바테케, 빌리족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거주자들과 같이 콩고의 거주자들은 사바나에서 사냥, 농업 등으로 살아나갔다. 그러다가  자이레, 앙골라 등의 동.남쪽의 나라들과 무역을 하며  그 생활 범위를 넓혀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콩고 거주자들은 차츰 오늘날의 가봉이라고 불리는 나라와 분리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화하기 전에 번성했던 콩고왕국은 콩고강 북쪽의 대서양 연안의 로앙고 왕국과 로앙고 동쪽으로 테케  왕국이 있었다. 로앙고 왕국의  창시자는 빌리로 알려져 있고 17세기말 노예무역으로 최고의 번성기를 누리었다. 테케왕국도 노예무역에 가담하여 번성기를 누리었으나 그 규모면에서는 로앙고 왕국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1875년 프랑스 탐험가 피에르 사보르냥 드 브라자가 중앙아프리카를 탐험하기 시작하였고, 1880년 테케족과 그의 왕국을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삼는다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피에르는 1883년 로앙고 왕국과 비슷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1905년에는 행정개편으로 콩고는 프랑스령 콩고 식민지가 되었고 그  영토는 특허 회사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대부분 식민지에서 그렇듯이 이 회사들은 심한 착취를 하여 콩고 주민들로부터 많은 저항을 받아야 했고 프랑스 정부는  이 회사들을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930년까지 그 폐해가 계속되었다. 한편 콩고의 수도 브라자빌은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령  식민지들의 수도였으므로 프랑스의 많은  관심 속에 철도와 항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콩고는 1958년의 프랑스령 내 자치공화국을 거쳐 1960년  완전독립을 하게 되었다. 콩고의 초대 대통령 풀베율르가 1963년 축출되고 마상바데다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까지 마르크스에 입각한 정당이 세력을 길러 1968년 마리앙 응구아비소령이 지휘한 쿠테타가 성공을 이루어 콩고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1992년 최초의 민선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정국불안은 계속되었고 현재는 리수바 대통령이 이끄는 UPADA당이 정권을 장악하여 평화와 정국안전을 주도하고 있다.


Ⅲ. 인종 / 인구                                                              

1. 인종: 인구의 절반이 콩고 부족에 속한다. 콩고 부족들로는 순디족, 콩고족, 랄리족, 쿠그니족, 벰베족, 캄바족, 돈도족, 빌리족, 윰베족이  있다. 테케족과 우방기족은 수가 적은데 우방기족에는 마쿠아, 쿠유, 음보시, 리쿠알, 응갈라, 봉가 등의 부족이 있다. 상가족도 여러  무리로 나누어 살고 있고 피그미  족은 적은 수의 무리를 지어 산다.콩고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대부분이 프랑스인이며 소수의  아프리카, 포르투갈, 중국인이 있을 뿐이다.

2. 인구
UN 산하 UNFPA가 평가한 콩고의 인구는 1995년 약 2백 50만이고 1990년부터 1995년의 평균증가율은 3%이다. 이러한 추세로 추정해 볼 때 콩고의 인구는 2025년 6백만에 도달할 것을 보이며 1992년과  2000년 사이게 인구 평균  증가율은 3.2%일 것이다. 그러나 자이레와의 분쟁으로  생겨난 이민자와 에이즈(AIDS)의  확산으로 미래 통고 인구는 예상보다 훨씬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인구 밀도는 낮고, 1㎢당 7명 꼴이다. 삼림이 우거진  북쪽 지역의 인구밀도는 1㎢당 0.7~0.8명으로 아주 낮은  편이다. 그러나 콩고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도시화된 나라 중의 하나이며 1992년 도시지역의 거주자는 인구의 42%에 달하였다.

수도 브라자빌의 인구는 1984년 595,102명에서 1991년  800,000명으로 증가하고 뿌엥뜨 누아르는 1984년에 297,392명에서 1991년 380,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최근 정부는 주민들이게 농촌으로 돌아 것을 권유하였지만 농촌에는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요즘 비록 도시의 성장률이 둔화되기는 하였지만 콩고는 계속해서 남쪽에서 사는 대부분의 주민들과 함께 도시화되고 있다.

3. 주요 인구 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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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비율                       기준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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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증가율                2.32%                       1995
출생률           39.86birth / 1,000population         1995
사망률            16.7death / 1,000population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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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령별 인구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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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비      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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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 14세                44% (여성 543,324 : 남성 548,840)
15 ~ 64세                53% (여성 682,927 : 남성 645,045)
65세 이상                 3% (여성 49,879 : 남성 34,981)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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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외교 / 정치                                                              

1. 외교정책: 기본노선은 과거에는 비동맹이었으며 아프리카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로 친소정책을 추구하였고, 최근 자국의 실리를 위해  개방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다.  대 프랑스 정책은  식민지 시대 이래로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는 콩고수입의 48%를 차지하고 있다. 대 아프리카 정책은 아프리카 내 외국군 주둔을  반대하고 아프리카 역내 문제에서 적극적인 역할 수행(브라자빌 협정 중재 - 앙골라, 쿠바, 남아공, 미국)하며, 인접국과 신중한 협력관계를 추진하고 있다.

2. 주변국과의 관계
Sassou-Nguesso 대통령때 콩고는 자구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목적으로 활동적인 외교정책을 펼쳤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는  1988년 나미비아에 평화정착의 중재자로 협상을 이끌어낸 것이다.

콩고의 주변국과의 관계 중  급진적인 과격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서방 우방국들은 프랑스와 미국이다. 프랑스는 서방의 경제적, 정치적  동맹국이고 콩고의 보수정부와 프랑스 사이의 관계는 현재에도 아주 가깝게 보인다.

중앙아프리카에서의 콩고는 가봉과 앙골라와 가깝다.  리수바 대통령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관계강화에 노력하였다. 자이레와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하다. 자이레 대통령 모부투의 강경한 정치는 계속해서 자이레인들이 콩고로 망명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에 대한 추방은 계속해서 두 나라  사이에 상호비방만을 자극하고 있다. 그러나 리수바 대통령은 결국 민주적인 힘이 승리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이미 정상화되었고, 콩고의 대외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관계는 강화되고 있다. 무역과  외교적인 관계는 1992년부터 발전하였고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서는 콩고의 석유산업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

3. 한국과의 관계
- 관계 수립일 : 61. 8. 4 (65년 단교, 90년 재수교)
- 주요 인사 교류(방한)
  ------------------------------------------------------
   날    짜                          방한인사{{{{
  ------------------------------------------------------
   85. 10                    Justine 재무장관
   88. 9                     Ganga 체육청년장관
   90. 10                    Boudo 무역중소기업장관
   92. 1                     Moudila 대통령실 의전장
   93. 10                    Bounkoulou 외무장관
  ------------------------------------------------------

4. 북한과의 관계: 콩고와 북한은 사회주의라는 이념적인 연대의식과 콩고의 친소.친쿠바 지향에 힘입어 콩고.북한과의 관계는 긴밀하다. 북한은 1969년 이래 기술학교 및 성냥공장등 상당량의 원조를 제공하여 콩고와 관계를 밀착시켜 왔다. 1961년 6월 21일 북한은 콩고의 기젱가 정권과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였고, 1964년 12월 24일 마침내 수교하였다. 그러다가 1979년 주북한 콩고대사관이 북경상주로 변경되었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5.정치
공화국이며, 대통령 중심제이다. 내각의 수상과 대통령의 권한이 분리되어 있어 서로 견제할 수 있는 견제할 수가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1958년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1960년에 독립하였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ABBE Fulbert   Youlou가   선출되었다.   그때까지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제였으나 Massamba-debat가 집권하게 된 1963년 말부터 서서히  사회주의 노선으로 들어가다 1964년 집권한  PCT당에 의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대통령은 Messemba-Debat였고, 정당은 1당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Massemba-Debat 대통령은 Marien   Ngouabi의 쿠테타로  인하여 실각하고   3대 대통령으로   Marien Ngouabl가 집권하게  되었다. 4대   대통령은 Joachim Yhombi-Opango였고   5대째는 Denis Sassou-Nguesso 였다. 그러다가 1986년의 오일 파동으로 경제가 심한 타격을 받게되자   Denis Sassou-Nguesso는 자유시장경제를  추진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공산권의 붕괴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고 학생들은 종교계 지도자들과 함께 집권노동당에 저항하게 되었고 마침내 1992년 3월 복수정당제 헌법이 수용되었다.최초로 민주적인 지방 의회 선거가 1992년 6월 치뤄졌다. 결과를 보면 전에 수상이었고  유네스코  관리였던  파스칼   리수바가 이끄는   UPADS당과  반막스주의자인 Bernard Kolelas가 이끄는 MCDDi당이 성공적인 선거를 거두었다.  결국 6대 대통령으로는 61%의 찬성으로 파스칼 리수바가 선출되었다.



Ⅴ.사회 / 경제                                                              

1.복지: 모든 고용자를 대상으로 산업재해, 출산무능력, 노령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하며, 16세 미만의 자녀를 가진 고용자들에게는 특별 수당을 지급한다.

2.보건: 영양부족, 비위생적인 식품가공, 오염된 물, 벌레와 기생충 번식, 의료 시설 및 인원부족 등으로 극히 불량하며 유아 사망률은  1994년 기준 1000명당 111명이고 평균수명은 남자 45.76세, 여자 49.41세, 평균 47.56세이다.

콩고에서 의료시설은 아주 제한적으로 보급되어 있고 의사와 의료 전문가는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보건 기준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된 나라 중 하나이지만 에이즈와 같은 전염병이 늘어나고 있다. 도시 인구는 감소되었고 도시  인구 중 6%정도가 에이즈에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 뿌앙뜨 누아르 시는 다른  남쪽 도시 감염률 9%보다 많은 12%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이 말하길 콩고의 국민들은 아직까지 에이즈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성적 관습을 바꾸지 않는다고  말한다. 최근 범 국민적으로 에이즈 켐페인이 벌어지고 있고 프랑스와 UNDP는 조직적으로 에이즈 캠페인 운동을 지원해 주고 있다.  현재 정부는 국가적 차원의 보건 계획을 수립하여 이를 실행하고 있다.

3. 언어: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며, 토속어로는 콩고어, 테케어, 링가라어 등 다수언어가 있다.

4. 풍습: 콩고 농촌 주민들의 주식은 주로 마니오크라는  전분질이 있는 나무의 뿌리이다. 이것을 정제한 것이 타피오카이고, 반투족은 이것을 가루로 만들어서 반죽을 하여 먹는다. 바나나도 주식의 하나이며, 이 밖에도 쌀, 옥수수, 감자등을 심어 먹는다. 어민들은 말린 물고기, 훈제 물고기등을 만들어 저장하여 먹고 야자, 바나나, 곡식 등으로 술을 빚어 먹는다.  콩고 농촌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하는 일이 뚜렷이 나누어져 있다. 여자들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돌보며 남자들은 사냥, 집짓기, 연장 만들기, 생활연모 만들기 등을 하는데 고기잡이는 남녀공통으로 한다. 시장은 상설시장이 없어 한국의 5일장과 같은 5일이나 7일만에 서는 장에서 물물교환을 하는데 지금은 화폐도 많이 쓰인다.

콩고의 결혼풍습은 일부다처제가 허용된다. 마치 결혼식은 물건을  사고 파는 것과 같아서 결혼식때 신부측은 신랑측으로부터 많은 돈을 받아낸다.  그렇게 해서 시집을 가는 것이어서 그런지 신부는 신랑으로부터 큰  사랑을 기대하기 어렵고 남편은 일생동안 신부를 부려먹는다. 남편이 딴 여자와 결혼을  하여도  한마디 항변도 하지 못한다고 하니 돈만 있으면 남자는 많은 부인을 거느릴 수가 있는 것이다. 신부의 결혼나이는 대부분 10살때 가소 12살 때는 어머니가  된다. 신부는 으레 남편의 몇분의 일밖에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관념때문에 부부싸움이나 아내들끼리 싸우는 일이 드물다.

5. 경제
콩고의 경제는 농업, 수공업, 석유산업, 서비스업 등이  주요 산업이다. 1980년 이후 석유 수출 증가(아프리카에서 5번째의 원유 생산국) 로 인하여 국제 무역수지는 흑자이지만 대외수출이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불균형한 경제  구조를 보이고 있다. 87년 이후 IMF, IBRD와 장기 경제 구조  조정에 합의하여 점진적인 자유경제와 민영화를 추진 중이고 90~94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서방과 국제기구의 지원 아래 경제 개발 추진 중이다. 90년과  91년 사이의 민주정치제도 수용과정에서의 많은 혼란과 높은 외채 비율로 인하여 경제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1980년 이후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아프리카에서의 가장 높은  연5%였지만 정치 격변기 이루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인구 증가율의 1/2밖에 되지  않는 1.5%의 성장에 그치고 있다.

그 후 리수바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까지 콩고의 경제는  크게 악화되었다. 그러나 리수바 대통령이 당선된 후  콩고의 기초적 경제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선거에서 경제 및 정치의 구조적 조정을 구호로 내걸고 당선되었던 리수바 대통령과 욤비 오팡고 수상은 1994년초 반대당과 평화에 합의하여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이 오자 경제적으로 IMF의 정책을 수용할 힘과 동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로 국가 소유의 경제구조와 재정이 개인 소유로 바뀌게 되었고  자유 시장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것은 국영기업의 사유와 공공인력의 대량 실직 상태를 암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콩고는 그 대가로 프랑스와 IMF, The World Bank로부터 원조를  받을 것이고 외채 감면등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또다른 콩고의 경제정책 방향은 프랑스령 중앙아프리카의  나라들과 활발한 무역과 투자를 위해 단일시장 구축을 꾀하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경제 정책은 궁극적으로 경영의 다각화를 가져오고 석유에 대한 경제 의존도를 낮추며 농업, 임업, 제조업, 서비스업 등 산업 전반에 걸쳐 경제가 다시 살아나는 역할을 할 것이다.

6. 주요 경제 지표
  - 국민총생산(GNP)  : 26.2억 달러(1991)
  - 1인당 GNP : 2,900 달러(1993)
  - 화폐단위 : 프랑CFA($1=283CFA,  93.1)
  - 물가상승률 : 0.6%(1991)
  - 주 무역 상대국 :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EU국가, 미국, 일본, 브라  
    질 등
  - 콩고의 주요 무역 대상국과의 수출, 수입 비교(%)
    대콩고 주요 공급국으로는 프랑스로 1985년도의 경우 콩고  총수입의 50%를 차  
    지하고 있으며, 콩고 원유의 대부분은 미국으로 수출되고 있음.
    < 주요 수출 대상국 >
                                 (단위 :  %)
-------------------------------------------------------
국 명                 83          84          85
-------------------------------------------------------
미   국              6.2        77.6         55.2
스페인              16.1         1.8         17.2
프랑스              38.2         8.9          9.3
벨기에                -          2.4          3.4
이탈리아            15.4          -           3.4
독일                 2.7          -           3.0
-------------------------------------------------------
   < 주요 수입 대상국 >
-------------------------------------------------------
국 명               83           84           85
-------------------------------------------------------
프랑스            56.0           52.2        50.1
이탈리아           5.0             -          7.8
미  국             2.3            5.7         5.6
독  일             3.5            5.9         4.9
스페인              -             3.3         4.7
-------------------------------------------------------
7.한국과의 무역
< 양국 교역 비교 >
-----------------------------------------------------------------
연도         수출         수입                   비고
-----------------------------------------------------------------
  91         2,472         25        수출 : 섬유, 가죽, 전기기기
  92         3,444         76        수입 : 금속광, 목제품
  93         3,214       1,006    
----------------------------------------------------------------

8. 무역: 무역정책은 원유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일반소비재의 수입을 억제하는 편이다, 최근 한국을 비롯한 대 동남아 경제협력을 적극 모색중이며 아프리카에서는 카메룬, 자이레와의 교역비중이 높아가고 있다. 인구는 적지만 석유 산유국이라는 이점으로 1979년 이후 무역 규모가 점점 커져서 1991년 콩고의 무역 수지는 CFAf r  134.2bn의 흑자를  보였고, 1992년  무역 수지의  흑자 규모는  CFAf r 154.3bn으로 늘어났다.1992년 주요 수출품목으로는  석유이고, 그 외  목재, 설탕, 커피, 코코아 등이 있다. 주요 수입품으로는 기계설비와 식량이 있다.

9. 고용: 노동력의 일부분만이 실업을 하고 있지만 고용률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정부의 고용력으로만 보면 1980년 31,700명에서  1980년말 70,000~ 75,000명으로, 1991년 80,000명으로 증가하였다. 도시 인구의 증가로 실업은 중요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정부는 도시의 실업자들이 농업에 종사하도록  권유하였지만 오랜 도시생활의 전통 때문에 농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기술이라고는 전혀 없이 학생들이 그들의 부모가 했던  것처럼 그들도 중앙 관리직을 희망하면서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매년  약 60,000명이 직업시장에 뛰어든다.

10. 물가: 프랑스령 중아프리카의 모든 나라와 같이 콩고도 일반적으로 물가상승률이 낮다. 이것은 비록 고용을 촉진시킬지는 몰라도 외환의 평가절하를 가져오게 된다. 외환의 평가절하는 일반적으로  수출에 치명타를 입힐 수도  있는 것이다. CFA 프랑과 프랑스 프랑과의 긴밀한 연관성으로 인하여 콩고가 프랑스의 통화 긴축정책에 종속하게 되었고 그 결과 외환의 평가 절하가 빠른  속도로 진행될 위험을 안고 있다.



Ⅵ. 교육 / 문화                                                              

1.교육
인구의 대부분은 어느 정도의 학교 교육은 이수하였고, 초등교육은 넓게 퍼진 편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중등 교육기관으로 진학하지 않는다. 교사가 부족하여 초등학교 학생 66명당 1명 꼴이다. 청소년들 중  6%만이 고등교육기관이나 기술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 학생 중 10,000명에서 16,000명만이  브라자빌에 있는 마리앙응구아비대학교에 진학한다.

성인의 문자 해독률은 1990년 인구의  57%, 여성의 문자해독률은 44%로  눈에 띄게 향상되었고 이것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그러나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정치적 변화는 최근 몇 년동안의 콩고의 교육 시스템 및 기준에 큰 위험을 주었다. 정치 세력들의 압력과 그들 세력간의 무장충돌로 콩고의 학교와 대학은 정상적인 교육에 방해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학교가 문을 닫게 되는 사태로까지 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브라자빌이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축소되었다.

콩고의 의무교육은 6세에서 16세까지로 초등학교 6년, 중학교 4년, 기술학교 3년이고 고등교육기관은 1961년에 설립되고 1971년에 종합대학교  자격을 획득한 브라자빌의 마리앙응구아비 학교이다. 콩고의 문맹률은 남성이 31%, 여성이 56%이다.

2.문화
1) 종교
  ■토착종교: 전 국민의 50%
  ■기독교: 200,000명
  ■천주교: 789,000명
  ■회교도: 25,000명
2) 언론
  ■일간지: L'Eveil   de Pointe-Noire,   Le Journal   de Brazzavill,   Journal        
    Officiel de la  Republique du Congo, Mweti  
  ■정기간행물: Bulletin Mensuel de Statistique, Effort
  ■언론기관: Agence Congoiaie  d'information, AFP지사,  APN(소련통신사)지사,  
    TASS지사, 신화사(중국통신사)지사
  ■TV: 1963년 방영, 1983년 칼라 TV 방영, 주당 46시간  프랑스어로 방영, TV 보  
    유 대수는 6,000대(86년 기준), 방송국은 4개
  ■라디오: 라디오 보유 대수는 116,000대(86년 기준), 방송국은 AM 4개, FM 1개



Ⅶ. 교통 / 여행                                                              

1. 교통
1) 철도
총 797㎞(사기업 소유의 철도 285㎞포함). 철도 교통은  콩고 운송망의 핵이며 철도회사로는 CFCO가 있다. 이 철도는 대서양의 뿌엥뜨 누아를 항구에서 브라자빌까지   총 515㎞에   이르며 콩고강과  자이레강의  내륙수운과  연결되어  있다. 또 Mont-Belo에서 가봉과의 국경에 있는 M'bind까지 잇는 286㎞의  선도 있다. 이 철도는 콩고강 북쪽과 중앙 아프리카에서 생산되는 목재가 운반되기도 한다. 그러나 CFCO는 비효율적이고 빈약한 재정 때문에 경영에 많은 부담을 안고 있기도 하다.

2) 도로
총 11,960㎞(560㎞ㅍ장). 콩고의 도로는 총연장도로 11,960여㎞이고  그 중 560㎞가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콩고의 도로는 많은  부분이 낙후되어 있다. 콩고 북쪽의 많은 지역이 아직 도로가 없어서 그 지방의 교통은 전적으로 해운과 항공에 의존하고 있다. 또 많은 도시의 도로상태가 좋지 않아 정상적인 차는 운행하기 힘들정도이다.

3) 내륙수운 : 콩고강 2,300㎞, 우방기강 2,085㎞
콩고의 내륙수운은 약 5,000여㎞에 달하며 콩고와 자이레  사이의 우방기강, 상아강, 콩고강에 발달해 있다. 이 내륙수운은 콩고 교통  수단 중 가장 중요한 것 중하나이며, 주로 상품의 수출.수입을 담당하고 있다.  또 이 내륙수운이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돈없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대중교통의 수단으로 이용되고있는 것이다. ATC에  의해서 경영되고 있는 잘  발달된 운송기지들은 콩고 북쪽과중앙 아프리카공화국, 카메룬으로 상품을 운반하고 있다.  가장 잘 발달된 운소이지는 브라자빌에 있고 이 기지는 콩고의  철도(CFCO)와 연결되어 있다. 이 수운은아프리카 내륙으로부터 하류로 운반되는 물동량의 80%가 넘는 1년에 약 500,000톤의 운송을 담당하고 있다.

4) 해운
콩고의 해운업은 항구 도시인 뿌엥뜨-누아르를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 이 뿌엥뜨-누아르는 콩고의 모든 내륙수운과 철도의 집결지이며 콩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카메룬의 수출. 수입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도시이다. 이 항구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깊은 수심(2,135m)을 가진 항구  중 하나이며, 항만의 길이만 15㎞에이른다.

    < 뿌엥뜨-누아르의 연도별 물동량 비교 >
                                (단위 : 천톤)
  ---------------------------------------------------
   구분        1988           1989           1990
  ---------------------------------------------------
   수입         554            491            536
   수출        3,469          2,447          2,057
  ---------------------------------------------------
   Total       4,023          2,938          2,593
  ---------------------------------------------------

5) 항공

  < 41개 공항(주요 국제 공항 : Brazzaville, Point-Noire) >
    ---------------------------------------------
     내용                   길이            수량
    ---------------------------------------------
     지상포장활주로         3,047m           1
     포장활주로        1,524~2,437m          3
     지하포장활주로           914m          11
     비포장활주로      1,524~2,438m          8
     비포장활주로       914~1,523m          18
    ---------------------------------------------
  - 항공사 :  국립 민간 항공사(Agence  Nationnale de I'Aviation  Civile), Air    
    Afrique, Lina Congo, Afri-congo 등


2. 여행

1) 비자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 적용된다. 그러나  프랑스인일지라도 국경에 도달하기 전에 많은 검문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규정이란 시간과 장소가 변함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콩고대사관에 있는 곳은 Conakry(기니아), Kinshasa(자이레),   Libreville(가봉),    Luanda(앙골라),   Maputo(모잠비크), Yaounde(카메룬)등이다.

입국 허용일은 그 사람의 국적과 비자를 허락한 곳에 따라 비록 최대 15일간의 입국이 허락되어질지라도 단 5일간만 입국이 허용될 수  있다.그 시간은 단지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고, 만약 그 기간을 어겨 비자 만기일이 지나도록 콩고에 머무른다면 추방될 것이다. 비자 비용은 1장 당 CFA 25,000정도이고, 보통 길면 48시간  안에 나오고 빠르면 24시간  안에 나온다. 그리고 비자는 연장되지 않는다.

콩고를 떠나는 경우 중 항공편이나 자이레로 갈 때는 출국 비자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가봉으로 육로를 통해서 나갈 때에는 출국비자가 없이도  나갈 수 있다. 출국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계산을  완전히 끝낸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호텔로부터 받은 영수증과 입국할 때의 여권을 맡기면 오후 3시쯤 받을 수 있다.

2) 출입국 관리
콩고의 나라 외곽 역에 25~35㎞마다 경찰의 검문이  있다. 경찰들은 검문때 여행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증과 여권을 본다. 시간은  30분 정도 소요가 되고 콩고를 다 지나갈 때 쯤이면 여권의 각 페이지에 많은 수의 도장이 찍혀 있게 된다. 경찰이 심문할 때 만약 어떤  실수라도 있다면 여행자들은 하루  중 절반을 경찰에게 설명하고 검문소에서 한숨만 쉬면서 보낼 것이다.

3) 유의사항
콩고에서는 낯선 사람과의 정치적 논쟁을 피해야 한다. 거리에는 경찰서가 많이 있으므로 만일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4) 환전
US I$는 CFA 270이고 브라자빌시 또는 자이레에서 환전할 수 있다.

5) 숙박시설(브라자빌시)
6) 교통시설
6-1) 국내 관광 때
주로 기차이다. 수도 브라자빌에서 Loubomo plus를  경유하여 쁘엥뜨 누아르까지가 중심이고 그 선에서 북쪽으로  Loubomo에서 mbinda까지의 간선이 있다.  철도는 양방향으로 매일 다니고 브라자빌에서 출발하는 철도는 오전 6시 30분에 있다.1등석과 2등석을 가지고 있는 기차는 종점까지 12-24시간이 걸리며 제일 빠르고, 3등석을 가지고 있는 기차는 그보다 긴 20-24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쯤 탈선사고가 생기니 그것에 너무 의존하면 안된다.  요금은 브라자빌에서 쁘앙뜨 누아르까지 일등석이 CFA12,000이고  2등석이 CFA6,325, 3등석이  CFA3,160 정도이다. 또 Loubomo에서 쁘엥뜨 누아르까지 2등석이 CFA3,200이다. 학생은 이 요금에서 50%할인이 된다.

Mbinda로 가는 간선도 매일 기차편이  있다. 브라자빌에서 Mont Belo으로  가는 첫 기차는 오전에 출발하여 오후 2시 30분이면 도착한다. 물론 이 기차는 Mbinda로 가는 간선에 속해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Mbinda로 가려면  Mont Belo에서 갈아타면 되고 종종 연착되는 경우는 있지만 Mbinda에는 오후 11시  25분에 도착한다. 그 반대 방향으로 가는 기차는 Mbinda에서 매일 오전 5시에 출발하는 기차편이 있고, 종종 연착이 되어서 Mont Belo에서  브라자빌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지  못 했을 때는 Loubomo로 가서  다음날  브라자빌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면  된다. 브라자빌에서 Mbinda까지의 요금은 CFA15,665(1등석 기준)이고 2등석은 CFA8,000이다. 물론 학생은 50% 할인 받을 수 있다.

6-2)외국에서 콩고입국 때
첫 번째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입국할 때의 방법이다.매주 한  번 콩고의 브라자빌에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Bangui사이에 내륙 수운을 이용한 배편이 있다. 비용은 1인당 CFA85,000이다.

두 번째로는 가봉에서 입국하는 방법이 있다. 가봉의 철도  노선 중 Moanda에서 콩고의 Moyoko까지 가는 기차편이 있으므로 철도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한 방법이고 기차역마다 택시들이 있으니 다음 목적지나 철도역까지는 택시를 이용하면 가장 빠르고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다. 가봉에서 입국하는 방법 중 또다른 방법이 있는데 도로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가봉의 Lambarene에서 Mouila와  N'Dende를 거쳐 콩고의 Loubomo까지 가는  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택시 요금은 N'Dende까지  약 CFA 16,000정도 있으면 되고, 거기서부터 Loubomo까지는 버스를  이용하면 되는데 비용은 약 CFA 9,000정도이다.
세 번째로는 자이레로부터 콩고에 입국하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에는 항공편도 있지만 이것을 제외한 방법으로는 브라자빌에서 자이레의  Kinshasa까지의 내륙 수운을 이용하는 배편이 있다. 이 배편은 양 방향으로 아침 8시 발 정오 도착 오후 2시발 5시 도착하는 배가 매일 있다. 요금은  CFA2,500정도이고 시간은 정상적으로 운행했을 때 20분이면 충분하다. 이 배편에서 주의할 사항은 절대로 사진을 찍어서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사진을 한 장이라도 찍는다면 그  즉시 체포되어 사진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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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가봉

2003. 2. 3. 10:16
Ⅰ. 가봉의 국가개관


※가봉의 일반현황
·국    명 - 가봉 공화국
·수    도 - 리브르빌
·정    체 - 공화국
·정부형태 - 대통령 중심제
·면    적 - 267,000㎢
·인    구 - 1,219,000명(1988)
·언    어 - 불어(공용어)  토착어(Fang, Echira, Bapunu)
·종   교 - 카톨릭(65.2%) 신교(18.18%) 아프리카 토착신앙(12.1%) 전통신앙(2.9%) 회교(0.8%)
·주요도시 - 포트장틸(Port Gentil, 최대항), 프랑스빌(Franceville)
·주요민족 - Fang족(41만명으로 최대족), Echira족, Adouma족, Okande족,Bakota족, Teke족등 40여 종족


1) 약사  


*15C말경: Tohogo족, Mpongou족과 그후 수세기에 걸쳐 Teke, Douele, Kota족과 Phouin의 한 씨족인 Fang족이 16c 중엽 Ogoue계곡에 정착하면서 오늘날 제종족이 되었다.
*1572년 : 포르투칼인이 가봉에 처음 상륙했다가 16C에 화란인들에게 쫓겨났다. 그 후 19C초에 불란서 해군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1839, 2 : 불란서인인 Bouet-Willau-mez가 가봉의 Estuaire 남부지방으로 세력을 넓혔고,  가봉 북부지방을 통치하던 Louis Dowe왕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1843년 : 불란서인 Fortd Aumale가 요새를 구축하였다.  
*1849년 : 불란서인들이 노예 매매업자에게서 뺏은 46명으로 노예촌 구성(가봉 수도 Libreville의 전신)  
*1860년 이후 : 불란서인이 Ogooue 계곡에 진출하여 1877년 중앙아프리카 지역 진출의 통로를 마련하였다.  
*1885년 : 베를린 회의에서 불란서는 Brazza(불란서인) 일행이 발견한 모든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획득하였다.  
*1886, 4 : Brazza가 불령 콩고(가봉 포함)의 통치권을 맡았다.
*1910년 : 불란서는 중앙아프리카 지역의 가봉, 콩고, 차드, 우방기샤리를 포함하여 불령 적도아프리카를 구성하였다.
*1958년 : 가봉, 불란서 공동체(Union Francaise)내 자치국이 되었다.
*1960, 8. 17 : 가봉이 2차 대전후 드골(De Gaulle)장군의 식민지 독립부여 정책에 따라  독립하게 되었다.
*1961, 2 : Leon M' Ba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64, 2. 18 : Aubame주동 군사혁명이 불란서군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1967, 11. 28 : M' Ba 대통령 사망으로 Bongo부통령이 대통령직을 계승하게 되었다.
*1968, 3. 12 : Bongo 대통령은 단일 정당인 가봉 민주당(PDG)을 창당하였다.  
*1973, 3. 25 : Bongo 대통령이 재선되었다.
*1975  : EEC와 "로메"협정을 체결하고 OPEC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1979, 12 : Bongo 대통령이 3선되었다.(1980.2.26 취임)  *1987 : Bongo 대통령이 4선

2) 정치제도


정체는 민주공화국으로 3권 분리법이다. 대통령은 7년 임기로 중임 무제한이 가능하다. 직접 보통선거제도를 취하며 1964년 불발 군사 쿠데타를 계기로 반정부 세력, 공산 과격분자를 일체 제거함으로 단일정당, 단원제 국회, 대통령 중임제를 채택하여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려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문호 개방정책을 펴면서 온건 비동맹 중립을 기본방향으로 하고 있다.


3) 경제


농업인구가 전인구의 80%를 점하나 농업소득은 GNP의 4%에 불과하다. 농업과 도시의 소득격차로 농촌 청장년의 도시 유입을 초래하고 있다. 주요작물로는 코코아, 커피, 종려유, 마니옥 등이다. 축산은 가금, 양, 돼지 정도로 전국토의 85%가 열대성 밀림지역으로 목축도 활발치 못하여 정부는 최근 목축의 적극 장려 및 지원책을 쓰고 있다. 전국토의 85%가 삼림지역으로 수종은 300여종에 이르는 풍부한 삼림자원을 가졌으나 노동력 부족과 수송에로 등 저해요인으로 개발이 미진하다.
  석유가 약 1억톤 매장되어 있어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4위 생산국이다. 석유는 GNP의 40-50%, 전체 수출의 70-80% 점유하고 있다. 그 외 망간(세계 3위), 우라늄 철광석, 기타 금, 천연가스 등이 있다. 협소한 국외시장과 미진한 기술 수준,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회소한 고급인력 등 결정적 취약조건으로 가봉의 공업화는 부진하다.


4) 교육


가봉 대통령의 교육 중시정책에 힘입어 거의 모든 아이들이 초등교육을 받고 있다. 그러나 중등교육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15세기까지 전체 문맹조사에서 800,000명(77%)이 글을 읽고 쓴다. 전 인구의 문맹율은 10-15%이다. 대학은 1개 종합 대학과 수 개의 사범대학과 기타 연구소가 있다. 가봉은 직업 인력 부족으로 해외인력 의존도가 높다. 간부의 가봉화정책에 따라 직업교육에 특히 역점을 두어 각종 직업학교를 설립했다.


5) 위치와 면적


적도를 사이에 두고 북위 2도 30분, 남위 4도 사이의 아프리카 중부 서해안에 있으며 북쪽은 적도기니와 카메룬, 남쪽과 동쪽은 콩고, 서쪽은 대서양과 접해 있다. 기후는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로 4계절의 변화가 전혀 없고 벵골 한류의 영향으로 해안지대는 약간 기온이 낮다. 수도 리브르빌은 북위 0도 27분으로 적도 바로 아래에 있어 연간 강수량은 3,000㎜나 된다. 우기(대체로 10월쯤부터 이듬해 5월쯤까지)는 고온다습한 날이 계속되어 건강을 해치기 쉽다. 건기는 구름낀 날이 많고 비가 오지 않아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함을 느낄 수 있으나 일조 때의 기온은 27℃까지 올라간다. 습도는 연간 75∼98%이며 리브르빌은 바다를 연하고 있기 때문에 일조시간은 비교적 길지만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짧아져 이것이 가봉의 농업발달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90% 이상에 달하는 습도 때문에 모든 유기물에 곰팡이가 발생하며 1년중 대부분의 날이 불쾌지수 100이라고 할 수 있다.
면적은 약27만㎢로 프랑스의 약 절반, 한반도의 1.2배에 해당된다. 국토의 85%는 열대우림으로 높이 40∼50m나 되는 큰 나무들이 밀집되어 있는 정글이며 나머지 15%는 남부의 사바나 지대로 콩고와 이어져 있다. 지형은 저지대로 가장 높은 르본지 산은 1,575m이다. 콩고와의 국경을 수원으로 하는 여러 강이 오고우에 강과 합류해 국토를 양분하는 형태로 흐르고 있다.
오고우에 강 유역의 90%가 이 나라에 속하며 가봉의 동쪽 2/3를 차지한다. 북쪽에 있는 올뢰은템 강 유역과 서쪽 또 남서쪽에 활모양의 고지가 경계를 이루는 해안평야가 있으며 오고우에 강은 람바레네 아래쪽에 있는 많은 호수의 물을 모아 해안평야 북쪽과 남쪽으로 가르는 삼각주를 지나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해안평야 남쪽은 모래해변·해안사주·해안석호 등이 있는 콩고 남쪽과 이어져 있다. 해안평야 북쪽 지역은 일반적으로 남쪽보다 더 넓고 해안선이 불규칙하며 해발 305∼610m에 이르는 고원지대이므로 오고우에 강 유역과 떨어져 있다.


2. 사회와 생활

1) 역사


15세기 이전 역사상 공백지역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오고우에 강유역에서 석기가 발견됨에 따라 인간이 거주한 적이 있음을 입증하였다.
1471년 포르투갈인이 산토메 섬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아직 내륙에는 진출하지 않고 연안에만 무역관을 설치하였다. 16C 예수교 선교사들이 정착한 데 이어 무역 상인들이 진출하였고 17세기∼18세기에는 프랑스, 영국의 선박회사들이 노예무역과 물물교환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1839년 2월 휴양지를 찾아 Estuarie에 도착한 프랑스 해군 Bouet-Willau-mez 대위는 가봉강 하구의 左岸을 통치하던 Roi Denis와 조약 체결하였고, 1842년 3월 가봉강 右岸을 통치하던 Roi Louis와 두번째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프랑스는 가봉에 대한 보호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1843년 Louis왕이 프랑스군의 주둔을 인정하여 Guillemain대위가 지휘하는 부대가 Fort d'Aumale 요새를 구축하였다. 1849년 9월 Willau-mez 대위가 포르투갈 노예선에서 해방시킨 46명을 상륙시켜 정착하도록 하고 이곳을 Libreville(자유의 마을)이라고 명명하였다.(현 수도의 기원).
1883년∼1886년 프랑스의 탐험가 Savorgnan de Brazza는 정부의 양해를 얻어 내륙 깊숙이 들어가 Franceville을 만들었고, 1886년에 그는 가봉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1910년 현재의 가봉, 콩고, 중앙아프리카, 카메룬, 챠드로 구성되는 지역을 통합해 연방형식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를 창설하였다.
1959년 3월 가봉은 프랑스 공동체(Union Francaise)내 자치국이 되었다가 1960년 8월 17일 2차 대전후 드골장군의 식민지 독립부여 정책에 따라 독립하였다. 1961년 2월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우파인 BDG(Bloc Democratique Gabonais)의 서기장 Leon M'ba가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4년 2월 18일 Aubame가 주동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1967년 Leon M'ba 대통령의 사망으로 남부의 소수민족 출신의 Bongo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고, 1968년 3월 Bongo 대통령을 당수로 하는 합법정당 가봉민주당(PDG)을 창당하였다.
1973년 2월 25일 임기 7년을 채우지 않고 실시된 국민의 신임투표에서 Bongo 대통령이 재신임을 얻었다. 1975년 11월 EEC와 로메협정을 체결하였고 OPEC의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1979년 12월에 Bongo 대통령이 3선되었고(1980년 2월 26일 취임), 1986년 11월 4선되었다.(1987년 1월 취임)
1990년 1 ∼ 3월 다당제 도입과 민주화 요구로 사회적 혼란 발생하였다. 1990년 3 ∼ 4월 국정의 민주화를 목표로 한 국민회의를 개최한 후 헌법 초안이 채택되고 당결성과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잠정헌법이 가결되었다. 1990년 5월 Bongo 대통령은, 22년간에 걸친 PDG 단일 지배에 종지부를 찍는 잠정헌법을 공포하였다.
1990년 9 ∼11월 다당제 아래 선거를 실시하여 여당인 가봉민주당(PDG)이 120의석 중 66의석을 얻고 야당과의 연립내각이 성립되었다. 수상에는 Casimir Oye Mbe가 임명되었다. 1991년 3월 14일 새 헌법을 채택하였는데, 요지는 대통령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며 중임 1회가 가능하다. 단 Bongo 대통령의 임기(1993년12월 31일)를 보장하고 다당제를 도입하며, 정당설립의 자유, 정당 자금의 국고보조를 규정하는 정당법을 통과시켰다.
1993년 12월 5일 22년만에 복수후보가 겨루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Bongo 대통령이 당선에 필요한 과반수를 가까스로 넘기는 51%를 확보하며 당선(5선)되었다. 1994년 2월, 93년말 대통령 선거의 부정을 주장하는 야당과 정부의 대립이 심화되어 수도에서 치안부대와 야당지지자가 충돌, 최소 9명 사망하였다.
1994년 9월 정부와 야당대표는 아프리카통일기구(OAU) 등의 중개로 파리에서 3주간의 교섭을 갖고 1년 이내에 지방자치제선거와 1년 반 이내에 의회선거를 실시하는 데 합의하였다. 1994년 10월 Bongo 대통령 96년 4월 총선거 실시까지 연립 잠정정부의 수상으로 포린 오파멘게마를 임명하였다.


2) 민족구성과 인구


가봉인은 반투(Bantu)족에 속하며 민족은 크게 Fang, Eshira, M'bede, Myene, Seke, Okande, Bakele의 7개 부족으로 나뉜다. 최대 종족은 Fang(41만명)으로 국경지대와 수도 주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며 총 인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부족을 분하면 다시 60여개의 종족으로 나눠진다. 각 부족들간에는 특유의 부족의식이 있으며 언어도 달라 서로 다른 부족들끼리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이들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며 교육도 프랑스어로 진행된다. 토착어로 북부는 Fang어, 남부는 반투어 등을 혼용하며 90년 현재 문맹률은 35%이다. 원시 토착신앙 49.6%, 카톨릭 40%, 기독교 10%, 이슬람교 0.5%.이다.
가봉의 인구는 1,225,853명(July 1999 기준)이고 인구밀도는 4.3명/㎢이다. 인구 증가율(99년)은 1.48%, 출생률(99년) 28.89/1,000명, 사망률은 13.07/1000명이다. 인구밀도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현저히 적다. 그 이유로는 기후와 풍토의 영향도 있겠지만 특히 19세기 이후 노예매매가 금지되자, 노예수출의 감시가 세네갈에서 시작되어 서아프리카 연안으로 점차 내려오며 엄격해졌는데 가봉은 마지막까지 노예 수출이 계속되어 인구밀도가 적어진 것이라고 한다. 수도 리브르빌의 인구는 겨우 35만명으로 이중 1만 3,000명은 프랑스인이다. 옛 종주국인 프랑스인과의 유대는 여전히 강하여 가봉의 정부기관에는 프랑스인 기술고문이 배속되어 있는 것이 종종 눈에 띈다.


3) 언어와 종교


각 부족이 독자적인 언어를 갖고 있으나 구두언어이며 표기문자는 없다. 현지어는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고 각 부족간이나 동족끼리 결혼한 가정 내에서만 사용된다. 각 부족이 독자적인 언어를 갖고 있으나 구두언어이며 표기문자는 없다. 헌법에 따라 프랑스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이것이 각 부족간의 공통어가 되었다. 실제로 프랑스어는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거의 통하며 다른 부족간에 결혼할 경우에는 프랑스어가 공통어로 된다. 따라서 현지어를 특별히 배울 필요는 없다. 프랑스어의 어학학교는 없으나 신문광고 또는 소개로 개인교수를 찾을 수 있다. 영어는 아메리카 문화센터가 문화활동의 일환으로 분기마다 영어회화 교실을 열고 있다. 종교는 기독교 50%, 토착신앙 49.6%, 이슬람교 0.5%의 분포를 나타낸다.


4) 풍속과 예절
    
  가봉인의 생활·업무 등의 리듬은 상당히 느슨하기 때문에 바쁜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로서는 조바심을 낼 수 있으니 마음에 충분한 여유를 갖고 그들을 대하는 것이 좋다. 종교상의 습관으로는 근친자의 장례 후 1년간은 상복을 입고 지낸다. 또한 수도 리브르빌에는 이슬람교도가 많기 때문에 일상적인 기도, 라마단(금식기간) 때는 이를 배려할 필요가 있다.  정부고관중에는 자존심이 센 사람이 많고 몸가짐들도 단정하므로 이들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는 예절바른 행동이 요구된다. 공항, 군사시설, 대통령 관저 등 기밀성이 높은 장소에서의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또한 현지사람을 찍을 경우에도 주술적인 이유에서 사진을 꺼리는 사람이 있으니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고 찍는 것이 좋다. 관광 때는 여유 있는 계획을 세우고 지방도시·농촌을 방문할 경우에는 현지의 습관 등을 충분히 이해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
  
5) 치안
    
가봉의 치안상황은 인근 아프리카 국가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좋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반범죄는 늘어나는 추세이며 최근에는 살인, 무장강도, 택시강도 등의 흉악 범죄도 가끔 눈에  띈다. 밤중에 혼자 다니는 것(특히 외국인 노동자 거주지역)은 피하는 것이 좋다. 또한 현관문의 자물쇠 등 방범체제를 갖추고 다른 사람의 반감을 사는 언동을 삼가는 등 자기방어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


6) 화폐 및 환율
    
통화단위는 CFA franc(1CFA franc = 100 centimes)이다. CFA프랑권으로 US달러당 평균 환율은 90년 272.26, 91년 282.11, 92년은 264.69, 98년은 589.95 CFA프랑이었다. 1999년 1월 현재 1US$ = 577.61 CFA프랑이며, French  franc과 고정환율(1F 프랑 = 50 CFA프랑)을 유지하고 있다.
  
7) 보건/의료


폭서, 높은 습도 때문에 심신이 피로해지기 쉽고 계절변화가 없어서 권태를 느끼기 쉽다. 수면을 충분히 취하고 취미나 스포츠로 기분전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봉에는 여전히 결핵, 나병, 트리파노조마병이 있으며 말라리아 감염 지역이므로 예방약을 복용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말라리아 예방약으로는 NIVAQIENE, 병에 걸렸을 때는 HALFAN이 처방된다. 병이 날 가능성이 있을 때는 신속하게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혈액검사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방충 스프레이를 지참하는 등 풍토병의 예방에 유의한다. 에이즈 환자나 감염자도 많기 때문에 감염되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리브르빌 시내는 상하수도가 완비되어 있기는 하지만 수도물이 탁하거나 냄새가 나는 수가 있으므로 식수에는 여과기를 설치하거나 미네랄워터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시내에서는 청소차가 쓰레기를 회수하고 있으나 젖은 쓰레기를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경우가 많아 늘 비위  적이다. 또한 지폐 중에는 상당히 더러운 것도 더러 있으므로 손씻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가봉에는 프랑스인이 경영하는 사립병원이 많고 가봉의 외국인은 대부분 이곳을 이용하고 있다. 종합병원도 있으나 설비, 검사기구는 아직 선진국 수준이 못되고 숙련자도 적기 때문에 중환자나 사고 등으로 긴급수술이 필요한 경우에는 유럽 등으로 이송해야 한다. 검사는 X선 촬영, 혈액, 요변검사, 파이버스코프 검사 등을 할 수 있으나 내용에 따라서는 검사체를 프랑스에 보내기 때문에 결과가 나오기까지 1개월 가량이나 걸리는 것도 있고 또한 갑상선 기능 등의 치료나 검사를 할 수 없는 곳도 있으므로 정밀검사는 가능한 한 선진국에서 실시하는 것이 좋다. 진찰을 받을 경우에는 보통 예약이 필요하며 매번 진찰료 10,000∼15,000 CFA프랑을 선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치료비, 검사료는 별도로 가산되고 개인병원일 경우에는 왕진도 가능하다. 가봉의 의료시설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이나 국공립 병원은 민간병원에 비해 시설이 열악하다.
    
     - 국공립병원(89년) : 종합병원 15, 풍토병치료 전문병원 9, 진료소 275
     - 민간병원(89년) : 병원 9, 진료소 45, 치과 8, 약국 10
     - 의료요원(89년) : 주민 2,854명당 의사 1명(의사 465, 치과의사 25, 약사  
                         40)
     - 병상수(89년) : 4,028개(주민 329명당 병상 1개)

     - 슈바이처(Schweitzer)병원 : 1913년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Lamberene에 설립했다.    


8) 의생활
    
시내에는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유럽에서 수입된 기성복을 팔고 있는 상점도 있으나 상당히 고가이다. 사업상 체류하는 경우에는 여름정장 3∼4벌과, 프랑스 등으로 출장갈 경우에  대비해 겨울정장과 춘추복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일상생활은 노타이셔츠로 충분하므로 여러 벌을 가져가는 것이 좋고 예복은 필요없다.
여성은 한복을 입을 기회는 거의 없지만 가져가는 경우에는 물세탁이 가능한 것이 좋다. 아동용 여자 옷은 슈퍼마킷 등에서 구입할 수 있으나 고가이다. 속옷, 양말 등도 충분히 준비하여 출발하는 것이 현명하다. 가봉에서는 풍토병 예방을 위해 양말, 속옷에 이르기까지 다림질을 해야 하며 유럽제 세탁기는 섬유를 손상시키기 쉬우므로 속옷류의 마모가 심하다.
신발은 리브르빌에도 판매점이 있으나 사이즈가 충분하지 않고 가격도 비싸므로 준비하여 가는 것이 좋다. 아울러 반바지, 수영복, 모자, 선글라스, 해변용 샌들 등을 지참하면 편리하다. 참고로 리브르빌에는 세탁소가 2곳 있다.


9) 식료품
    
가봉의 슈퍼마킷 및 식료품점에서 대부분의 물품을 구입할 수 있지만 된장, 간장, 미원, 깨 등의 조미료나 김치류, 인스턴트카레, 캘리포니아쌀 등은 없다. 프랑스산 쌀을 슈퍼마킷에서 가끔 발견할 수 있지만 일단 품절되면 다음에 물건이 들어올 때까지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수가 있다. 한국계 슈퍼마킷(RENOVATION)에서는 인스턴트 라면, 인스턴트 우동, 인스턴트 두부, 곤약 등이 있으나 역시 항상 구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육류, 생선, 야채, 과일 등은 수입품은 고가이지만 현지산으로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생선은 근해에서 잡히는 도미, 정어리, 광어, 고등어, 가자미, 오징어, 연어 등의 냉동생선이 있으며 생선은 육류에 비해 비교적 싸다. 가봉에서 수확되는 과일로는 파파야, 망고, 바나나, 파인애플 등이 있다.


10) 주거·가구
    
1992년 현재 리브르빌시의 주택사정은 공급과다인 데다 오랜만에 아파트가 다섯동 신축되었다. 이는 경기침체와 민주화 요구 운동을 계기로 일어난 폭동 때 프랑스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국외로 빠져나갔기 때문인데 덕분에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마음에 드는 주거를 찾을 수 있다. 가봉에는 붙박이 가구가 딸린 주거는 거의 없다. 통근·통학·쇼핑시의 편의와, 폭동이 발생할 경우를 염두에 둔 방범대책을 고려하여 주거를 결정해야 한다. 입주시에 필요한 경비는 3개월 분의 집세 선납, 보증금으로 1개월 분의 집세, 부동산 수수료로 집세 1개월분 등 총 5개월 분의 집세를 필요로 한다. 가봉에서는 예산에 따라 현지의 저렴하고 조잡한 가구 또는 상당히 고가의 수입가구를 구입하거나 시중의 게시판에서 중고가구를 마련할 수 있지만 가능하면 가구는 준비해 가는 것이 좋으며 임대가구는 없다. 가전제품, 생활 필수품 등은 대부분 구할 수 있으나 모두 수입품이며 고가이므로 가능한 한 구비하고 가는 것이 좋다. 특히 시트, 타월, 모포(건기의  아침저녁은 쌀쌀하다) 등은 반드시 지참하는 것이 좋다. 가봉의 전자제품의 전압은 220볼트이며 TV 방송은 SECAM-K 방식, 비디오밴드는 PAL 방식이다.
    
11) 경축일
    
     -----------------------------------------------------
        날 짜                 기  념  일
     -----------------------------------------------------
      1월 1일          설날
      5월 1일          노동절
      부활절           해마다 다름(3월 22일부터 4월 25일 사이)
      성령강림제       해마다 다름(부활제의 7주일 후)
      8월 17일         독립기념일
      11월 1일         萬聖祭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라마단 축제      해마다 다름
      희생제           해마다 다름
     ------------------------------------------------------
  
12) 근무시간
    
관공서, 회사, 은행 모두 원칙적으로는 오전 7:30∼12:00, 오후 2:30∼6:00(단 은행창구는 오후 4:30까지)가 근무시간이지만 시간엄수의 관념이 부족하고 특히 근무시작 시간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토·일요일, 경축일은 휴일이다. 상점의 영업시간은 오전 9:00∼12:00, 오후 3:00∼6:00가 일반적이다. 일요일·경축일은 쉬는 곳이 대부분이나 식료품점의 경우에는 일요일 오전에만 영업하는 곳도 있다. 레스토랑의 영업시간은 낮 12:00∼3:00, 저녁 7:00∼11:00가 일반적이며 월요일에 휴업하는 곳이 많다.
    
13) 쇼핑
    
주요 슈퍼마킷으로는 M'BOLO, SCORE, LIBREMARSHE, RENOVATI-ON 등이 있으며 식료품, 일용잡화는 대부분 이곳에서 마련할 수 있다. 일용잡화, 전기제품은 CK2가 최대규모의 상점이다. 이밖에 거의 모든 물건을 전문점, 디자이너샵, 소매점에서 구입할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 고가이다.
  
14) 생활수준
    
석유수입에 따라 두터운 부르조아 계층이 형성되어 밑바닥 일은 이민 노동자들이 맡고 있다. 가구 노동자의 한달 봉급은 8만 6,000  CFA 프랑, 전력회사 회사원의 한달 봉급은 20만 4,000CFA프랑이다. 소비재 보급률을 보면 인구 1천명당 보유수는 TV 36명, 자동차 14명, 전화 13명이며 VCR과 PC는 소수의 엘리트층에 한하여 보급되어 있다. 세계 191개국 중 가봉의 생활수준은 : 평균수명 159위, 유아사망률 151위, 국민 1인당 GDP 82위, 1일 영양섭취량 120위, 식자율 136위, 취학률 133위, 교육수준 138위, 인간개발지수 122위이다.
                           <참 고 문 헌>


박원탁, "아프리카 지역 정치론" 서울 : 명지출판사, 1989.
Europa, Africa the South of The Sahara, 1999.
산업연구원, "아프리카 주요국의 상품유입 구조분석: 가봉", 서울 : 산업연구원, 1984


인터넷 사이트
http://www.odci.gov/cia/publications/factbook/gb.html
http://www.centerworld.com/univ/country/africa/index.htm
http://info.hanatour.co.kr/tour/africa/index.html
http://www.hufs.ac.kr/~tsjang/
http://www.altavista.digit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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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자이르

2003. 2. 3. 10:15
1. 국가 개요
Geography
수도 :  킨샤사(kinshasa). -4,241,000명
위치 : 중앙아프리카. 적도선상. 0.00N, 25
면적 : 2,345,410km   (해안의 길이: 37km)
지형 : 거대한 중앙분지가 낮은 대지. 동쪽에 산악지대 (스탠리산의 봉우리 5,110m)
환경문제 : 밀렵, 수질오염, 삼림벌채, 토양침식
기후 :열대성기후. 적도 강 유역은 덥고 습함. 남부고원지대는 보다 시원하고 건조한 기후.  동부고원지대는 보다 시원하고 물기가 있다. 남부에 잦은 가뭄이 있다.

People
Population  세계에서도  가장 인구밀도가  낮은  나라의 하나이다.  연평균 증가율은  약 2.99 %이며 인구의 약 반수가  15세 이하이다. 수도 킨샤사의  인구는 약 400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최근 도시 집중화  현상이 현저해져 10년 정도  사이에 킨샤사와 루붐바시 등의 도심부에 사는 인구가 25%에서 40%로 증가하였다.
인구는 매우 드물게 분포하고 있지만 광물자원이 풍부한 자바주와 그 외의 주요도시에는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산림지대의 인구밀도는 1km당 3인에도 미치지 못하기도 한다.  보통 자녀가 많을수록 다복하다고 생각하여 한 가정에 5~10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조로 현상과 의료시설의 낙후, 질병과 영양실조로 인해 대체로 단명하고 있다.

총인구 : 49,000,500
연간 인구성장률 : 2.99%
시골과 도시인구비율 : 71/29
언어 : 프랑스어(공용어), 링가라어, 킹과나어(키스와힐리와 스와힐리의 방언) 등 700여 종류의 언어와 방언.
인종 : 바투족이 주종족. 그 외 200여 종족이 넘는 다양한 인종
종교 : 70%가 크리스트교, 토속신앙 20%, 이슬람교 10%...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종교의 자유가 있으나 실제로는 1974년 이후 종교집회 결사의 자유가 교회에서의 주간예배의식  외에는 금지되고 있어서 정치적  영향력은 없지만 교육부문의 공헌은 매우 크다.
Health  수명 : 남 47세, 여 51세       유아 사망률 : 101.6/1,000
         의료(의사) 이용 가능 : 1/15,584
Education  성인교육율 : 77.3%      의무교육 : 6∼12세

Communication
전화 : 1,219명중 1명    신문(일간지)구독 : 1,000명중 3명    텔레비전 : 667명중 1명

Transportation
고속도로 : 90,830mile (146,500km)       기차(열도) : 3,206mile (5,138km)
이용 가능한 비행장 : 234여 곳         이용중인 오토바이 :480,000대
  
Government
정부형태 : 독재정치 (현재, 대의정치로의 과도기중...)
독립일 : 1960. 6. 30 (벨기에로부터)
대통령 : Laurent Kabila
정당 : 콩고자이레자유민주연합, 민주사회기독당 등 여러 정당이 있으나
        정당활동은 정부에 의해 압박(구속)당함.
        투표권(참정권)은 18세 이상 일반적으로 의무화.
국기 : 독립이후 국기를 세 번 바꾸었다. 현재의 국기는 녹색, 황색, 적색의 아프리카 색을  
        사용해 자이레가  아프리카 협조를 지지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중앙의 황색의 둥근    
        원 속에는 횃불을 든 팔이 그려져 있어 인민혁명운동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

Economy
통화(화폐) : $1 = 3,275 new Zaires
1인당수입/GDP : $125/$18.8billion
노동력(노동인구) : 14,510,000
자원 : 코발트, 구리, 카드늄, 석유, 다이아몬드...수력발전잠재력, 목재 등의 자원
농업생산 : 커피, 팜유, 고무, 차, 카사바, 바나나, 구근류, 옥수수, 과일, 사탕수수 등등
산업 : 광업, 소비재산업, 시멘트, 다이아몬드산업
수출 : $ 1.9 billion (주로 벨기에, 미국, 프랑스)
수입 : $ 1.1 billion (주로 벨기에, 남아공, 미국)


2.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Congo-Kinshasa)(Zaire)

1998년 8월   CAD(Congolese Assembly  for Democracy:   콩고민주연합)의 반란세력은 Ernest Wamba dia Wamba의 지휘아래 르완다, 우간다의 조력으로, 동쪽에서부터 콩고민주공화국을 향해 급소도로 진격하여  수도 킨샤사의 변두리까지 도달하였다.  그러나 Laurent Kabila의 6달된 정권을 무너뜨리고 재빨리 승리를 얻으려던 그들의 희망은 SADC(Southern African Development Community: 남부아프리카공동체)의 가입국인 앙골라, 남미비아, 짐바브웨군 세력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이미 수단의 정부와 반란세력이 개입한 가운데, 콩고킨샤사에서의 새로운 시민전쟁은 12개 국가 이상이 참가해 범 지역적인(범국가적인) 투쟁으로 발전하여 30여년 동안 독재와 부패로  물들었던 Mobutu정권이 1997년 막을 내림과  동시에 생겨났던 낙관주의도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르완다, 우간다,  짐바브웨 등의   전폭적인 원조에 크게   의존하는 반란운동인 ADFLC (Alliance of Democratic Forces for the Liberation  of Congo-Zaire)의 지도자 Kabila의 세력은 더욱 커져갔다. 1996년 후반부에 Kabila는 자이레 동부에 대한 통제력을 거머쥐었으며, 1997년 5월에 그의 세력은 수도 킨샤사에까지 이르렀다. Kabila는 1971년 Mobutu가 지었던 자이레(Zaire)라는 국명을 콩고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으로 바꿨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됬던 부패와 잘못된 정치의 시대가 끝나고, 민권이 보장된 민주주의를 실천할 것이라는 새 정부에 대한 희망은 곧 잘못된 바램이 되었다.

이미 부패한 사회나 경제기반은 계속 붕괴되어 갔다. 1인당 국내총생산량(GDP)이 1990년 $220에서 1995년에는 $125로  감소하였다. 또한,  자원이 풍부한 Katanga(현재의  shaba)와 Kasai지방에서 분리론자들이 다시 대두되었고, 자이레의 서부와  동부에는 르완다와 부룬디의 학살로부터 도망쳐온 2백여만명의  피난자들이 몰려들었다. 결국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자이레의 운명은 자국민들뿐만 아니라 이웃 국가들의 미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리적으로 자이레는 아프리카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중앙의 자이레강은 세계 수력 발전의 13%에 해당하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이레는 9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이들 인접국에 대한 우회 진출기지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이기도 하다. 미국의 1/4의 크기에 해당하는 자이레는 다양한 지형들로 둘러 싸여 있다. 좋은 농업력을 가진 곳도 있으며 막대한 천연자원이 널리 분포된 지역도 있다. 그리하여 몇몇  지역은 몇십년동안 집중적으로 개발되기도 했다.

자이레는 아프리카의 동과 서를 잇는다. 자이레의 좁은  해안선은 대서양과 맞닿아 있어서 자이레 동부는 오랫동안 아프리카연안에 진출한 여러 세력들의 영향을 받아왔다. 19세기 중반에 탄자니아 등지에서 온 Swahili, Arab, Nyamwazi의 무역인들은 자이레의  남동부 대부분지역의 노예와 상아를 약탈하며 그들의 패권을 확립했다. 이들 노예무역이 씁쓸한 기억을 남긴 반면, 스와힐리어가 자이레 동부의 공통어가 되어 퍼지기도 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49백만 인구는 200여 종족에 이르며, 거의 700여 종류의 언어와 방언을 사용하고, 다양한  생활  방식을 가진다.  19세기  후반에 확립된  국경선  부근은 Azanda, Konga, chokwe, Songye 국민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이들은 다른 나라에 있는  친족들과의 접촉(관계)을 유지하고 있다.

콩고강 어귀에 위치한 콩고제국은 포르투갈과 중요한 외교통상관계를 확립하면서,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크게 번성하였다. 이 콩고제국의  정교한 정치체제는 콩고민주공화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Leopold's Genocide

자이레가 스와힐리나 아랍같은 동방 세력으로 받은 영향처럼 유럽의 진출 역시  자이레에 몹시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콩고분지는 벨기에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전에 개인기업에 의해 탐사되고 개척되었다. 벨기에의 레오폴드왕은 개인  자격으로 콩고분지를 탐사하려는 스탠리(H.M.Stanley)의 탐험을 후원하였다.  1879년 레오폴드는 스탠리와의  조약을 이용하여 전지역에 걸쳐 자신의 콩고자유국을 세우는 것이 정당하다고 규정하고, 실제적으로 개인 소유의 식민지를 세웠다. 스탠리는 많은 아프리카의 수장과 조약을  맺고 그 주권은 콩고지역을 착취하기 위한 국제 무역 회사인 '콩고국제협회(AIC)'가 장악하였다.  1885년 2월에 성립된 베를린 조약에서는 열강들이 동시에 콩고에 관한 자유무역을 체결하였고 이어  레오폴드는 자신을 신국가의 주권자로 하는 대책을 강구하였다. 1885년 4월에 벨기에 의회는 새로운 나라와 벨기에와의 관계는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라는 조건을 붙이고, 국왕이 신국가의 원수로서 행동할 것을 인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이레의 국민들과 자원들을 그의 사적재산으로 인수하였다. 그는 대리상들과 그에게 양여권을 부여받은 기업들을 통해 상아나 천연고무 등을 착취하기 위해 아프리카 인들을 강제 노동시켰다. 또한 할당된 고무를 모으도록 보내진 무장한 의용군들은 마을전체를 파괴함은 물런이거니와 주민들에게 수많은  잔학행위를 하였다.

레오폴드의 콩고자유국에서 레오폴드 대리상의 잔인무도한 행위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사살되었는지 아무도 정확히 모르지만, 몇몇  비평가들은 20여년동안 이 지역의 인구가 약 천만명 정도가 줄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강제 노동 등으로 굶어 죽었으며 더 고무를 생산하기 위한 생존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대량학살되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그들의 남편들이 지배자의 명령대로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인질창고 같은 곳에서 질식사되었다.  

콩고정권은 우행은 몇년동안 해외로 새지 않게 조심하였지만, 결국 선교사나 다른 이들의 진술로 전세계에  드러나게 되었다.  E.D.Morel의  'red rubber'나  Mark Twain의   신랄한 'King Leopold의 독백'같은 소설이  대표적이며, 자신의 경험을  소설화한 Joseph Conrad의 'The Heart of Darkness'는 인기작품이 되었다. 결국 유럽제국주의자들 조차 그들의 인종적 오만이 절정이었던 시기에 더 이상 '영혼만으로도 천만명을 죽인 왕'이라고 까지 불리던  레오폴드 왕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콩고에 있어서 벨기에의 가혹한 수탈과 폭정에 따라 국제적 비난이 높아지자 1908년 국왕이 콩고를 정부에 양도하여 벨기에 국령으로 이관됨으로써 직할  식민지인 "벨기에령 콩고"라고 불리고 벨기에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벨기에의 식민지 통치방식의 특징은 고도의 중앙집권화와 온정적 간섭정치(Parternalism: 경제적으로는 온정정책, 정치적으로는 탄압정책)으로 1960년 콩고가 독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콩고에  대한 가혹한 수탈은 계속 되었고, 무력에 저항하는 주민들에게 가톨릭  교회의 선교사를 통한 침투를 꾀했다.  교육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의료기관도 발전하였다. 강력한 초등학교 교육은 식민지 프로그램의 일부였지만 주요 중등학교를 결코 만들지 않아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실시할 수 없었다. 독립할 때까지 16명의 콩고인들만이  대학학력을 얻었는데,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벨기에가 아닌 다른 기관을 통해서였다.

1950년대에, 콩고인들-특히 도시인들-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1956년에는 카사부부가 콩고족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요구하는 콩고 최초의 정당인 ABACO당을 창립하였다. 또  1958년에는 루뭄바(Lumumba)가 콩고국민운동(MNC)을 결성하였는데 이들 정당은 독립을 요구하는 강령을 발표하였다. 1959년에는 ABAKO 시위의 심각한 충돌로 약  50여명이 죽었다. 불안에 직면해있던 이들은 콩고공화국의 급작스런 독립에 더욱 용기를 얻었다. 결국 벨기에는 독립을 향한 아프리카인들에게 패배를 인정하였고, 1960년 1∼2월 브뤼셀에서 벨기에 정부와 아프리카인 지도자들의 원탁회의가 개최되고 독립일을 1960년 6월 30일로 하는  결의를 성립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안들에게는 광범위한 정치적 변화에 대비한 진정한 준비가 마련되지 않았다.  


4. The Congo Crisis

6월 24일 루뭄바를  수상으로 최초 중앙정부가  조직되고 루뭄바가 이끄는  콩고민족운동(MNC)이 1당이 되었고, 국가원수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6월 30일에  콩고민주공화국은 독립하였다. 그러나 일주일동안 넓게 퍼진 혼란(무질서)으로  인해 군사폭동이 일어났다. 이는 콩고의 지독한 식민지 상처가 보여주는 일이었다. 아프리카의 다른 식민국가들과는 다르게 백인에 대한 증오가 콩고에서는 폭력으로 나타났고 거대 유럽 공동체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다급하게 도망갔다. 인종적, 지역적 유혈사태는 아프리카 국민들 사이에 대단히 많은  사상자를 냈다.  자원이 풍부한 Katanga(현재의 shaba)에서 분리독립선언이 발표되고 공업용 타이어의 생산지인 Kasai주에서는 South Kasai 지방이 들고일어나 콩고동란이 발발하였다.   결국 루뭄바는 UN에 도움을 요청했고, UN의  많은 국가에서 군대가 지원되었다. 그러나 UN의 개입은 상당히 제한되어 성과가 없자, 다시 소련에 원조를  요구하여 원조를 받게 되어 콩고는 냉전 전쟁장소가 되었다. 모부투(Mobutu)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고, 결국 1961년 모부투군에게 붙잡힌 루뭄바는 카탕가로  보내져 살해되었다. 서방의 관심,  특히 CIA는 이상주의자인 루뭄바의 실각과 그의 냉소적인 후계자  모부투의 부상을 방관했다. 루뭄바의 살해 소식이 국외에 전해지자, 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콩고의 비극에 외면했던 UN과 루뭄바의 살해에 손을 쓴 벨기에와  미국에 대한 항의 데모가 일어나 1967년까지 계속되었다. 민족주의자였던 루뭄바는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에서는 민족의 영웅으로 존중받고 있다.


5. Mobutuism

모부투는 군사쿠데타로 카사부부를 몰아내고 1965년 11월에  정권을 잡았다. 그는 그에게 상대되는 정치적 요소들을 제거했으며, 지역적 반란들을 진압했다. 결국 1971년에  모부투는 하나의 정당(Mobutu's Popular Revolutionary Movement: MPR: 혁명인민운동)만이 존재하는 국가를 설립했다. 모든 권력이 대통령인 모부투와 MPR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몇몇의 종교기관을 제외하고는 실제적으로 모든 사회기관들이 MPR의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했다. MPR 공화국의  공공사상은 점점 모부투화 되어갔다.  모든 시민들은 사회집회(모임)나, 학교, 일터 등지에서 매일 그를  칭송하는 노래를 불러야 했다. 찬송가와 기도문에서도, 모부투의 이름은  종종 Jesus  대신 불리워지기도  했다. Mobutuism의  중요 슬로건은 "Authenticity"(확실성/신빙성/진정)로 이는 유럽적 가치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가치를 위한 의미라는 모부투만의 정의에 입각하여 해석된 것이었다.

그는 “All powerful”이란 뜻의 Sese Seko를 자신의 이름에 덧붙였다. 그는 또한 민족의상을 규격화 했다.  넥타이는 불법이고, 남자들은  소매없는 긴옷을 입도록  했고, 여자들은 paigne나 실내복(몸에 두르는)을 입도록 의무화했다. (전세계에서 넥타이  매는 것을 정치적 반항의 상징이라고 간주하는 나라는 자이레밖에 없을 것이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인이 강의 이름을 잘못 발음한 자이레를 국가명으로 개칭하였으며, 국기도 변경하였다. 또 국민의식 고양 캠페인의 일부로서, 개인의 이름과 각  도시의 이름을 크리스트교에 관련된 이름(예를들면 세례명), 혹은 외국의 이름으로부터 아프리카적인 이름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Authenticity는 국유화프로그림에 수반되어 일어났다. Miniere연합과 다른  법인들은 정부의 통제하에 있었다. 1973년과 1974년에, 농장·상업기관·기업들 역시 정부의 통제를  받았다. 모든 일은 자이레인들의 변혁의  근본적 개혁이라는 이름아래 전개되었다. 그러나  몇몇 개인들(모부투와 그의 측근들, 소수엘리트들)만이 엄청난 부를 얻고 반면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은 매년 더욱더 빈곤해져 갔다.

그의 임기(집권)의 마지막 해가 될 때까지 모부투에 반대하는 세력은 허락되지 않았다.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은 투옥, 고문, 사형에 처하였다. 로마카톨릭교회와 Kimbanguist교회만이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파업이나 쟁의 등도 허락되지 않았다. 1977년과 1978년에 Shaba지방에 새로운 반란이 일었으나 U.S. backed Moroccan, 프랑스벨기에의 군개입으로 진압되었다. 결국 1997년 Laurent Kabila 지휘하의 반란세력은 모부투를 추방하고 국가명을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다시 바꾸었다.


6. Economic Disaster

자이레의 경제적 잠재력은 벨기에의 이익을 위해  벨기에에 의해 계발되었지만, 1960년에는 다른 아프리카 식민지 영토들에 비해 가장 발전이 많이  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초기의 혼란은 발전을 정지시켰고  모부투 정권의 집권  동안에는 오히려 퇴보하였다. 그리고 구리와 코발트가격이 저하되던 세계경제상황은 자이레의 어려운 상황을 한층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경제 진보에 있어서의 가장 주된 장애물은 모부투  정권에 의해 만연한 부패였다. 자이레의 정부조직은 '도둑정치'와 같았다. 부패에 물든 조직체계는 평민들의 재산을 공무원이나 소수 엘리트들에게 옮겨주었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금체제가 사회에 확립되어있었다. (예를들면, 시민들이 의학치료를 받기위해서는 간호사에게, 교도소밖에서 살기 위해서는 경찰들에게,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교장에게... 뇌물을 줘야했다.)  경제문제 갈수록 심각해졌다. 1990년 자이레의 도시 노동자들의 실제 임금은 1960년 임금의 2%밖에 되지 않았다. 시골민들의 수입 또한  줄어들었다. 예를 들면, 1990년 커피농부에게 돌아가는 수입은 벨기에의 개발하에 있던 1954년에 얻었던 수입의 1/15밖에 되지않았다.나빠지는 상황으로 결국은 초인플레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자국내에서 생산되고 있는 커피나 다른 농작물들을 계속 밀수입을 하고, 정부에서도 이를 묵인하였다. 그래서 자이레의 농작물들이 상당한 경제적 가능성(잠재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계속 침체되는 것이었다. 광활한 토지와 풍부한 강우량에도 불구하고 식품필요량의 약 60%를 수입했다. 시골민들은 도시로 이동하였지만 일자리가 부족하여 다시 시골로 돌아가고, 생존을 위해서 환금작물보다는 자급자족의 농작물을 경작하였다. 노후된  길이나 다리도 모든 무역을 감소시키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1983년 정부는 결국 IMF를 도입했다. 그렇지만 IMF는 공적지출에만  관여되었고, 풍토병처럼 퍼져있던 부패경제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는 일도 없었다). 모부투  정권 당시,  자이레  예산의 30%이상이  부채해결에 쓰였다.  1997년  6월 Kabila는 우선적으로 일자리 창출, 길·병원 재건축, 연료공급관로 설치 등등의 해결이 시급하다고 발표했지만, 이러한 계획들을 이행하기 위한 예산이 여전히 불투명해 해결에는 많은 시일이 걸릴 것이다.  


7. U.S. Support for Mobutu

모부투 정권은 재정적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벨기에, 프랑스,  독일, 미국 같은 외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U.S. 정보보고서는 벨기에가 벨기에령 콩고에서 멀어지던 1950년 중반에 준비되었었고 다시금 미국의 전략적  관심이 살아나게 되었다. U.S.  정책을 진행시키기 위해 미국은 모부투를 영속케 하기 위해 모부투를 지원했고 모부투 역시 그 임무(?)에 충실했다.  모부투는 앙골라 내전에서 미국을 도와  MPLA(Marxist-oriented Popular Movement for the Liberation  of  Angola: 앙골라해방민중운동)을  저지하는  데에 뛰어들어  FNLA(The National Front for the Liberation  of Angola: 앙골라 해방국민전선)등을 지원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냉전동맹에서의 중요한 입지를 세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역적 목표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MPLA의 반대세력인 CIA에  의해 FNLA는 모부투와 Holden Robert의 법적 지휘하에 있게 되었다. 모부투는 또한 석유가 풍부한 앙골라의 Cabinda지역을 탐냈으며 그곳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CIA와 남아공군을 보내도록 했다. 최근 몇년동안 몇백만 달러가 shaba주의 Kamina지방의 활주로-MPLA정권에 반대하며, 앙골라의  전체 독립을 위한 UNITA(The National Union for the Total Indipendence of Angola)의 게릴라전에 지원하기 위해 CIA가 사용- 를 개선시키기 위해 쓰여졌다. 1989년에 모부투는 자신을 정부와 UNITA반란군 사이의 중재자로 세우려 했지만 그에 대한 신뢰는 떨어져만 갔다.

연합국측은 모부투의  인권침해와 그의  정권시에 집중된  억압과 부패를  알고 있었다. 1987년부터 모부투는 미국의 입법자들에게 로비활동을 목적으로 막대한 재정활동을 하였다. 모부투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계속되었지만 실제적으로 무너진 그의 권력은 워싱턴에  있었다.

모부투는 또한 아프리카나 중동의 다른 유지세력과 동맹을 맺었다. 모로코 군대는 1977년과 1978년에 샤바 지방에서 일어난   폭동에 그를 지원했다. 그는 또한  남아공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오늘날 자이레가 수입하는 식량의 1/2이 남아공으로부터..). 1982년에  그는 1973년 아랍-이스라엘전쟁 이후 깨졌던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부활하였다. 이스라엘은 그후 계속해서 프랑스, 벨기에와 함께 자이레군에  지원을 했다. 1990년 수도 킨샤사에서  있었던 폭동에 다시 프랑스와 벨기에의 군대가 개입하여 진압하였다.    모부투의 독재를 지지해줄 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모부투에 대한  반대세력은 증가해갔다. 1990년 그는 국내와 제3의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려고 약속된 해외 둘 모두에서의 그에 대한 비판을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그에 대한 억압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1996년 10월, 모부투가 유럽에서  암수술의 회복을 위해 머무르는  동안 Kabila 지휘하의 반란군은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고지인 Uvira를 점령하였다. 1997년  4월 모부투가 다시 돌아왔을 때 Kabila의 지원군들은 모부투를 박탈하기 위한 선동의 수단으로  킨샤사 가까이에  진격하였다. 결국 남아공의 만델라(Mandela)와의 협상에 따라 모부투는 킨샤사를 떠났고 망명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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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서상현) 아프리카 이야기

르완다

2003. 2. 3. 10:10
르완다

  □ 위치
   ·적도 바로 이남 아프리카 대륙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륙국가(중동부 아프리카)
   ·동쪽으로 탄자니아, 서쪽으로 콩고민주공화국,  남쪽으로 부룬디, 북쪽으로  우
     간다와 인접(지도 참조)

  □ 면적 : 2만 6,338㎢(한반도의 1/10 정도)

  □ 수도 : 키갈리(kigali: 인구 30만명)

  □ 지형
   ·해발 1,000m 안팎의 고지대(나일-콩고 분수계의 일부)
   ·활화산, 강, 계곡, 호수, 평야 등으로 구성

  □ 기후
   ·적도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고도(高度)에  위치해 있어  
     서늘하고 온화한 기후(연평균 기온 23℃) 유지
   ·강우량에 따라 소건기(1월∼ 2월), 대우기(3월∼5월), 대건기(6월∼9월), 소우기
     (10월∼12월)로 구분

  □ 식생
   ·국토의 2/5가 경작지, 1/5은 목초지, 1/10은 삼림·초원지역
   ·사자, 고릴라, 침팬지, 물소, 영양, 사마귀,  멧돼지, 얼룩말 등 야생동물의 천국
   ·무분별한 삼림채벌로 인한 서식지 감소로 마운틴고릴라를 비롯한 희귀 야생동
     물 멸종위기
   ·카게라 국립공원과 무투라 금렵지에서 여러 종의 야생동물 보호

  □ 인구
   ·약 8,582,000명
   ·높은 인구성장률(약 3.1%)
   ·인구밀도 326명/㎢

  □ 종족
   ·반투계의 후투족(87.3%), 나일계의 투치족(10%), 피그미(1%)

  □ 주요언어
   ·공용어로 영어, 프랑스어, 키냐르완다(Kinyarwanda)어 사용
   ·의회가1996년 1월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

  □ 주요자원
   ·주석, 텅스텐, 코탄, 콜롬보-탄탈석, 녹주석, 금

  
  □ 산업
   ·소규모의 공업, 대부분이 농업에 의존하나 자급자족도 힘든 상태
   ·커피, 차등이 주요 수출품.

  □ 1인당 GNP
   ·310$(전쟁 전)
   ·1인당 외채는 122$

  □ 종교
   ·카톨릭(50%) 개신교(30%) 이슬람(10%) 전통종교(10%)

  □ 교육
   ·카톨릭과 개신교 교회들이 거의 대부분의 초·중·고등학교 운영
   ·유일한 국립대학이 부타레(Butare)에 위치
   ·7세부터 15세까지의 의무교육, 공립학교는 모두 무상
   ·성인 문맹률 : 52.7%(남성 51.6%, 여성 44.8%)
   ·교사, 교실 및 기타 교육여건 낙후  

  □ 기타 특징  
   ·도시화 수준이 매우 낮음
   ·전체 인구의 9%만이 도시에 거주한다.
   ·성비의 심각한 불균형(학살과 내전으로 인해 남성 인구 급감)


르완다의 역사

·원시상황

원주민은 피르미계 트와족이며 현재  약 9000명이 수렵,  채집생활을 하고 있다. 1000년경부터 반투계 농경민인 후투족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15세기에 나일로트계 투치족이  북방에서 소를  몰고 침입하였다.  장신인 목축민  투치족(인구의 9%)이 다수파 후투족(약 90%)을 봉건적 주종관계로 지배하며 왕국을 형성하였다.

·근대상황

1890년대 독일세력이 미쳐 부룬디와 함께 독일령으로 1899부터 1916년까지 17년간 부룬디와 함께 식민지배를 받았다.  식민지 지배는 계속되어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 위임통치령,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제연합 신탁통치령으로 콩고(지금의 자이르 포함)와 함께 벨기에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벨기에의  간접 통치정책하에서 투치족의 전통적 왕국은 도리어 견고하게 이어지고 왕과 여러 추장의 권력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투치족은 식민지하에서  권력을 누리고, 카톨릭  교회가 경영하는 교육도 독점하였다. 후투족은 이에 반발하였으며 불만도 가중되었다.

·최근상황

1957년 후투족은 투치족에게 전제정치의  종결과 식민지 체제 타파를  선언하고, 1957년 궐기하여 공화제를 도입하여 후투족 출신의  카이반다가 북부지방의 아비야리마나를 압도하여 1961년 국제연합 감시하에 르완다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1962년 르완다 공화국이 되었다. 1963∼1964년 투치족 게릴라가 침입을 기도, 수천 명이 희생되었고, 1만 명은 우간다와 부룬디로 추방되었다. 투치족과 후투족의 반목과 긴장은 계속되었으며 결국 1994년 르완다 내전을 촉발시켜 수십만의 사상자와 난민이 발생하였다.

1) 정체
   공화제(대통령 중심제)

2) 국가원수
   르완다는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한다. 대통령은 헌법상 직접선거로 35세 이상 피선거권을 가진 국민 중에서 선출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임기는 5년이며 중임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독재정치가   가능한 체제이다. 현재는   파스퇴르 비지뭉구(Rasteur Bizimungu)가 대통령으로 1994년 7월 취임하였고 임기는 5년이다.

3) 정당제도
   르완다는   원래   일당제  국가였다.   지금은   NRMDD(National   Republican Movement   for  Democracy   and  Development)라고   불리는  NRMD(National Revolutionary Movement for Development)당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1991년에 최초로 헌법으로 다당제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중소정당의 난립으로 효과적인 견제활동을 수행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4) 행정부
   17부(대령 겸직의 국방부 포함)의 장관으로  구성된 국무회의와 10개 道로 구분되며 州는 143 郡으로 구성된 지방조직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94년 투치족 반군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이 모든 직분을 자신들이 지명하였다.

5) 입법부
   국가발전심의회(Conseil National de Developement)가 의회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단원제로 70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5년이다. 선출방법은  각 주(州)별로 중선거구제를 실시하며 국회의원 후보자는  당중앙위원회의 추천으로 당총재가  확정한다. 의회는 대통령이 그 직을 상실하면 자동적으로 해산되며 대통령이 해산할 경우에는 90일 이내에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
  
6) 사법부
   사법권은 독립되며 대통령이 이를 보장하도록 헌법에 규정하고 있다. 법관은 대통령이 법무장관 및 대법관회의 추천에 따라 임명한다. 재판은 3심제 이다.

7) 정치흐름과 정세
   1961년 9월 국민투표를 통해 공화국으로 전환한 후 총선거를  실시해 후투족 주도의 자치정부를 수립함에 따라 역사상 다수족인 후투족이 소수지배 계급인 투치족을 몰아냈다. 이후 후투족과 투치족의 분쟁은 지속되다가  1983년, 1988년 대선에서 거듭 당선된 Habyarimana 대통령이 80년대 이후 북부지역 출신 인사들을 편파적으로 중용함에 따라 지역간  갈등이 더욱 고조되었으며 국제수지와  재정적자에 따른 경제난이  가중되어 정국은 불안이 지속되었다.
   1994년 4월 6일 Habyarimana 대통령 비행기 추락 사건으로 정부군과 투치족 반군단체(르완다 애국전선 : RPF) 반군간의 전투가 재개되어  RPF 반군은 후투 정부군을 르완다에서 쫓아내고 르완다의 새 정부수립을 발표했다(94년  7월 18일). 1994년 11월 RPF를 포함한 잠정의회가 발족,  임기가  만료되는 5년 후에 대통령과 의회선거를 실시키로 결정하였고 비지뭉구 대통령은 정부의 학살행위를  비판한 트와기 라뭉구 총리를 경질하고 후임에  후투족 온건파인 뤼기에마를 기용하였다.  1996년 10월 자이르 동부지역 수용소에 있던 후투족난민  과격파들이 자이르 군과 함께 이곳에 거주하는 투치족들을 공격하자 이에 투치족이  정부군의 지원아래 난민수용소를 공격하고 100만 후투족 난민이 탈출을 개시하였다.
   1994년 11월 르완다 학살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한 국제전범재판소를 95년에 설치하여 12월 8명을 기소하고 정부는 94년 내전 당시의 학살사건과 관련, 후투족 다수  포함해 9만 명을 검거했고 1996년  말부터 중범 2,000명에 대한 사법처리를  개시하였다.

8) 정치적 과제
   1994년 르완다 사태의 발발은 전세계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지금도 유엔의 주도로 난민관리, 전범처벌 등의 전후처리가  진행 중이다. 르완다와 부룬디의 정치적 과제는 궁극적으로 후투족과 투치족의 내분으로 귀결될 수 있다. 양국(兩國)에서의 민주주의는 바로 이들 부족간의 분쟁해결로부터  시작되어야만 가능할 것으로 본다.


르완다와 부룬디의 경제

1) 주요산업
   르완다와 부룬디의 거의 대부분의 인구는  농업에 종사한다. 그러나 가공 및  보관시설의 낙후 및 미비로 대부분의 농업 인구들은 겨우 자급자족할 수 있는 정도의 식량만을 생산해 낸다. 주요 농산물은 바나나, 콩, 카사바(Cassava), 사탕수수, 고구마 등이다. 일부에서는 소를 키우기도 한다.

2) 주요 수출품목
   주요 수출품목은 커피,  차, 제충국(pyrethrum:살충제의  원료로 쓰이는  국화)이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주석과 텅스텐의 원석이 있으며 수출의 25%를 차지한다.

3) 국제무역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루안다(현재의 르완다)와 우룬디(현재의 부룬디) 지역은 오랫동안 서로 긴밀한 협조 하에 있었다. 르완다의  모든 수출품들은 부룬디를 통해 선적되어 탄자니아의 다레살렘이나 앙골라의 로비토 혹은 모잠비크의 베이라 등으로 수출되었다. 그러나  후투와 투치족의 내전이후에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현재는 르완다의  수출품들은 우간다의 캄팔라를 경유  케냐 몸바사를 거쳐 선적되고 있다. 이 경로는 보다 비용이 많이 들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마찬가지로, 르완다의 모든 수입품도 이 경로를 통해 들어온다.

4) 경제지표
   1994년 학살이후 GDP(국내총생산)은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여러 가지 노력으로 GDP는 회복추세이지만 아직도 실질 GDP는  90년대 초반의 80%정도 수준이다. 농업 생산은 이전의 86%, 공업 생산은 78%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1998년 GDP 성장률은 약 7%로 예측된다. 농업은 GDP의 37%를 차지하고 전체 노동인구의 91%가 이에 종사하고 있다.  공업은 GDP의 25%를  차지하고 노동인구의 2%정도가  공업 인구이다. 서비스, 교통, 통신 산업은 GDP의 38%, 노동인구의 7%를 차지한다.
  
5) 경제적 빈곤
   르완다와 부룬디는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한 국가중의 하나이다. 월드뱅크의  자료에 의하면   르완다의 빈곤인구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1985:40%,   1993:53%, 1997:70%) 게다가 빈곤의 정도도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 지고 있으며 고아나 과부들의 경우는  더욱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르완다의 빈곤인구 비율 70%는 아프리카의 평균 비율 40∼50%보다 훨씬 높다.

6) 경제적 과제
   오늘날 르완다 경제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의 하나가 부채이다. 르완다의 국가부채는 1985년4억 달러에서 1997년 현재 GDP의 65%에 이르는 11억 달러까지 빠르게 늘어났다. 부채 증가의 원인은 르완다의 주요  수출 품목인 커피 값의 하락과  국내 경기 침체이다.
   한편, 부룬디의 경우에는 외화수입의 90%가 커피와 외국원조에 의존하는 상황인 데다 최근 커피 값의 하락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인구과인과 천연자원 부족이 경제발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5. 르완다 내전

1) 르완다 내전의 배경
   르완다 내전의 원인은 소수인 투치족이 정치요직을 독점하고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다수민족인 후투족을 다스리려 한 데서 출발한다.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로 인한 양 부족간의 오랜 분쟁은 결국 1994년 4월 후투족의 쥐브날 하비아라마나(Juvenal Habyarimana)  르완다 대통령과 시프리엥은  타리아미라 부룬디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가 반군인 투치족의  포격을 받아 양국 대통령이 사망함으로써 촉발되었다.

2) 르완다 내전의 경과
   르완다 내전의 경과를 시간의 흐름을 기준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 1959 : 정치적 불안의 잉태
  ·1959년 루완다의 왕 Mwami Mutara III가 사망하면서 시작


□ 1959 : 최초의 내전 발발
  ·약 15만 명의 사상자 발생
  ·약 15만 명의 투치족이 인근국가로 탈출하는 등 투치족들의 대규모 희생

□ 1961 : 르완다 공화정 성립
  ·선거를 통하여 후투족들이 정권 장악, 1961년 루완다 공화국 수립

□ 1962 : 르완다와 부룬디의 분할
  ·루완다와 우룬디는 각각 두개의 나라  즉, 르완다와 부룬디로 벨기에의  신탁통치를 벗어나 분리독립(1962년 7월 1일)

□ 1963∼1964 : 투치족 반란
  ·1963년 투치족 게릴라가 침입을 기도
  ·수천 명이 희생되고 1만 명은 우간다와 부룬디로 추방

□ 1963 : 대통령 선출
  ·르완다 국민들은 후투 지도자인 Gregoire Kayibanda를 첫 대통령으로 선출

□ 1973 : Habyarimana의 쿠데타
  ·1973년 Juvenal Habyarimana 장군이 이끄는 후투족 군부 쿠데타 발생
  ·군부지도자들이 정권을 전복하고 의회 해산, 정부 장악
  ·Habyarimana는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군부 실세들을 내각에 임명

□ 1978 : 일당독재국가 성립
  ·Habyarimana는 지방주의와 부족대립주의를 해소하고 국구통일을 도모
  ·국제적으로 이전의 고립정책을 버리고 다원화 개방정책 추진
  ·국가 주도의 강력한 경제정책으로 1980년대 경제성장 경험
  ·Habyarimana는 1978, 1983, 1988년 각각 재선 성공

□ 1990 : 우간다로부터의 투치족 침공
  ·수많은 사상자, 피난민 발생

□ 1991 : 다당제 성립
  ·후투족이 중심의 군사정부가  헌법에 다당제의 보장을  명시함으로써 다당제가 합법적으로 인정
  ·민주주의의 기틀 마련

□ 1993 : 르완다 정부와 RTF간  평화협정 체결

□ 1994 : Habyarimana 암살
  ·1994년 4월 Habyarimana가 항공기 사고로 살해

□ 1994 : 내전의 발발
  ·후투족 과격파가 평화협정을 깨기 시작
  ·약 100만 명의 투치족 학살

□ 1994 : 후투족 새 정부 구성
  ·내전의 결과 새로운 후투족 정부의 구성
  ·RPF의 새 정부 불인정

□ 1994 : RPF의 무력 쿠데타
  ·RPF의 쿠데타 성공
  ·RPF정권은 후투족 관리를 포함한 연립정권 수립
  ·약 200만 명의 후투족 난민 발생


3) 르완다 內戰의 結果

    1994년 4월 대통령의 암살로 후투와 투치의 휴전은 깨어지고 결국, 투치족의 반군(RTF)이 후투족이 중심인 정부군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게 되었다. 추정컨대, 이 전쟁에서 약 100만이 사망하고 200만 명이 피난길에 오른 것으로 나타난다.    정권을 장악한 투치족의 르완다 정부는 유엔의 감독과 국제 여론에 밀려 후투족과의 평화적 연대를 주장하고 있으나, 약 200만 명에 이르는 후투족 난민들은 보복을 우려하여 귀국을 주저하고 있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콩고(당시의 자이르)의 고마 인근으로 피신하였고, 수만 명이  콜레라 등의 질병과 기아로 사망하였다.  현재 대부분의 난민들은 르완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유엔은 아직도 정부 수용소에  있는 민간인이 60만 명을 넘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르완다의 서북부 지역과 콩고 지역에는 이를 거점으로 한 후투족 반군 게릴라들이 아직도 남아 있어 내전의 불씨를 내포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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