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red>[ 아프리카 역사 II ] - 탈식민지화</font>

2003. 9. 25. 19:38
4. 탈식민지화

식민지 해방의 과정을 잘 살펴보면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벨기에가 독립을 내주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민 열강들이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해방시킨 과정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각각의 경우는 서로 달랐다. 어떤 경우, 특정한 식민지의 특수한 특징으로 인해 그 지배자가 영국이건, 프랑스이건, 벨기에이건, 포르투갈이건, 비슷한 모형을 따라야 했다.

예를 들어, 알제리,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케냐, 나미비아, 자이레, 짐바브웨 등 특정 지역의 독립운동은 코트디부아르, 어퍼볼타(부르키나 파소), 탄자니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의 지역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고 커다란 충격을 동반했다. 전자의 경우 유럽 이주민의 이익이 민족투쟁의 성질에 큰 영향을 미쳤고, 후자의 경우에는 이주민의 이익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성격과 조직 능력 역시 중요한 변수로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식민 열강에 의해 지배를 받았냐는 사실보다는 그 식민지에 유럽인 이주민이 살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식민 해방의 유형과 방법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주민이 없는 곳에서는 식민 열강도 아프리카인에 대한 자치를 허용하는 데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이주민이 있는 경우에는 식민 해방의 과정에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간의 폭력적 갈등의 기간이 거의 특징적으로 포함되었다.

2차 세계대전은 아프리카의 식민사에 있어 중대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아프리카의 식민지와 유럽의 본국 사이의 기존 관계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들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시기이다.

첫째, 전쟁 기간 동안 식민지들은, 이중 일부 경우는 실질적으로 본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는데, 전쟁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천연자원의 추출이 아닌 현지의 생산 능력을 발전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는 일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이렇게 현지의 경제적 생산을 강조하게 된 것 이외에도, 식민 행정부에서는 아프리카 피지배인들을 동원하여 군수용품과 전략적 비군수용품을 생산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둘째,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식민 열강의 군대에 차출되었다. 그들은 군대에서 전투원, 짐꾼, 하인, 요리사, 운전사와 같은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 많은 경우, 전투에 참가한 아프리카인 군인들은 유럽인들의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인 군인들은 신중하고 자신감 넘치며 감정 없는 신과 같은 인물이라기보다 일반 아프리카인과 다름없는 인간이었을 뿐이었다.

부유한 유럽인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유럽인도 있었다. 전쟁의 열기 속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걱정이라는 감정을 드러냈다. 유럽인 군인들과 전쟁터에서 하루하루 싸운 경험은 많은 아프리카인 군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세계관을 넓혔으며, 자신들의 종속적 위치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유럽인 군주들이 말했던 자비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셋째, 1945년 이후, 상당수의 아프리카인들이 공교육과 보다 확장된 경제적 역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 지역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도시 거주자들은 전쟁 기간 동안 초기 산업과 제조 부문의 임금노동자로서 능동적이고 기술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자신들의 생활이 더 향상되어야 한다는 높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아프리카인 학교는 여전히 전통적인 코란학교나 기독교의 미션스쿨이었다.

식민 시대 동안 공교육은 거의 초급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다. 아프리카인들은 일반적으로 글을 읽고 숫자를 이해할 수 있으며 식민주의자의 언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으면 된다고 여겨졌다. 그들에게 고등 교육을 시키면 기대가 높아지는 결과가 생겨나서 결국 초기의 저항이 생겨날 것이고, 바로 이것은 식민 정부가 절대로 원하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전쟁 전에는 아주 적은 수의 아프리카인들만이 유럽과 미국으로 건너가 더 나은 공부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민족주의 지도자가 생겨난 것도 바로 이 소수 집단 내에서였다. 어떤 식민 열강도 아프리카인들을 교육시켜 관료나 기술직, 정치직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겠다는 의식적 정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유럽인 식민주의자들의 통치 방식을 익힐 기회를 얻어 자신들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아프리카인 개인이나 공동체의 결심에 의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식민 상황을 변화시켜보겠다는 꿈까지 꾸기도 했다.

전쟁 기간 동안 식민지의 경제적 확장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인들은 기술직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시장으로 유입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관료직과 기술직에 종사하기 위한 훈련을 받게 되었다. 임금노동자로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 도시에 거주하는 아프리카인들은 신생 사회계층을 대표하게 되었고, 경제적 기회와 전후 사회에서의 평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식민 열강들은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수밖에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식민지 대부분의 전후 개발계획은 고등교육과 대학교육을 강조하고 또 약속했다. 영국은 새로운 아프리카 지식인 계층을 주로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프랑스는 아프리카인 행정가와 기술자들을 프랑스에서 훈련시켰다. 그리고 아프리카인 교사들은 대부분 세네갈에 있는 윌리엄 폰티 학교(William Ponty School)에서 교육받았다. 경제적 정치적 개혁에 대한 요구로 인해 공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전후에 발생한 민족주의 운동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font color=red>[ 아프리카 역사 II ] - 식민지배</font>

2003. 9. 25. 19:37
3. 식민지배

3.1 식민주의 시대의 개막 베를린 회의

식민주의를 진보적이고 근대화를 위한 힘이었다고 종 종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식민주의는 사실 독재적이고 또한 거의 폭압적이었던 외국의 통치였다. 모순적이게도 아프리카 대륙의 점령과 분할이 일어난 시기는 영국이나 프랑스같은 유럽의 주요 국가들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원리들이 더욱 발전하던 시기였다.
1870년 무렵에는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점령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1884년에서 1885년 사이에 열린 베를린회의(Berlin Conference)가 역사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1885년을 식민주의 시대가 개막된 해라고 할 수 있다.

베를린회의에서는 아프리카 쟁탈을 합법화했고, 유럽의 열강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분할하자고 공식적으로 비준했다. 이 조약에서는 유럽의 열강들이 식민지의 주권을 주장하기 전에 그 영토를 효과적으로 점령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을 해방자라고 칭했지만, 점령의 과정은 거의 폭력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점령은 주로 용병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들과 고용주들이 부유해지는 것 뿐이었다.

유럽과 아프리카간의 본질적인 관계는 노예무역의 폐지와 공산품 수출의 확산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은 비서구 세계와 교역을 강화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아프리카와 후진국으로 알려져 있던 다른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한 것은 주요 산업 국가들이 주도하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팽창 욕구 때문이었다.

유럽인들은 우세한 기술적 군사적 힘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점령할 수 있었는데, 식민화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정치적 경제적 원인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민족주의적 경쟁과 힘의 균형, 그리고 국가의 영광을 위한 행보와 같은 정치적 요인들로 인해 식민지를 더욱 더 원하게 되었다. 또한 제국주의 역시 주요 산업 열강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장과 천연자원의 산지를 차지하여 지배하고 싶게 만들었다. 이런 지역들은 유럽인들이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다고 생각하는 곳이었다. 많은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아프리카는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국인들은 아프리카 제국을 차지하는 것보다는 아시아를 소유하여 유지하고 개발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3.2 아프리카의 분할

유럽의 주도적인 군사적 산업적 국가였던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가치있는 대부분의 식민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독일의 자극을 받은 프랑스도 1870~1871년에 벌어진 보불전쟁(Franco-Prussian War: 프로이센의 지도 하에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정책이 충돌해 일어난 전쟁-역자주)에서 독일에게 잃은 알사스-로렌 지방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 대륙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했다.

독일은 독일 동부 아프리카(German East Africa: 현재의 탄자니아-역자주), 남서 아프리카(South-West Africa: 현재의 나미비아-역자주), 토고(Togo), 카메룬(Cameroon) 등에 식민지를 세워 제국주의 열강이 되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함으로써 이 지역들을 모두 잃게 되었다. 영국의 가까운 우방이자 아프리카와 가장 긴 역사적 관계를 맺고 있었던 포르투갈은 앙골라, 모잠비크, 포르투갈령 기니아(Guinea)에서 더 많은 영토를 차지했다. 벨기에는 레오폴드 2세의 노력으로 식민 열강이 되었는데, 1908년에 벨기에령 콩고(현재의 자이레)가 된 콩고 자유국(Congo Free State)을 세웠다.

이탈리아는 리비아와 소말리아에 식민지를 세웠고, 스페인은 스페인령 사하라와 적도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차지했다. 식민지 시대에 주권을 유지한 아프리카 국가는 오직 두 나라 뿐이었는데, 바로 에티오피아와 라이베이라이다. 라이베이라는 1821년에 해방된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세운 국가이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마저도 193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지배 하에서 상당 기간 독립을 빼앗겼다.

알제리, 세네갈, 앙골라의 포르투갈인 거주지, 모잠비크, 기니아와 영국인들이 지배하는 케이프 식민지에 밀려 내륙으로 간 아프리카너(Afrikaner)들이 자신들의 독립 공화국을 세운 남아프리카공화국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아프리카 대륙은 1880년대까지는 독립을 유지했었다.

식민지배시기는 많은 사람들의 정신과 육체를 산산히 부서뜨렸다. 비록 식민 지배가 궁극적으로는 노예제 폐지를 가져오고 평화를 정착시키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프리카인들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자치가 끝났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지배계층이나 일반 대중이나 똑같이 정치적 시민적 권리가 거의 없는 지배 대상으로 전락했으며, 외국인들이 경제를 주도함으로써 그들의 문화적 권위와 가치는 하락하고 손상되었다.


3.3 아프리카인의 대응

식민주의와 이에 수반된 사회적 경제적 변화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반응은 주로 새로운 민족적, 성적, 계급적 관계를 이끌었다.

민족성은 사회적 단결을 표현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한 힘이 되었다. 예를 들어, 도시 지역에서는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이 생겨났다. 예전에는 흩어져 있던 자치 공동체들이 언어적 유사성을 매개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채택한 다른 예를 아프리카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는 나이지리아의 이보(Igbo)족과 세네갈의 디올라(Diola)족이 이와 동일한 과정을 겪었다. 이보족의 정체성은 그들이 도시 지역이나 나이지리아의 다른 지역, 혹은 해외로 유학을 떠날 때 더욱 강화되었다. 그들은 민족적 정체성에 기반하여 라고스(Lagos)를 비롯한 다른 나이지리아 도시에 다양한 자발적 협력 조직과 민족동맹을 만들었고, 신분 상승을 위해 교육을 강조하였다.

식민 정책이 가부장적 권위를 강화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에서 여성의 지위는 식민 시기 동안 계속 낮아졌다. 식민 시기 이전에는, 예를 들어, 시에라리온의 멘데(Mende)족의 경우와 같이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서 여성들이 추장이 된 적도 있었다. 또한 북부 로데지아(Northern Rhodesia: 현재의 잠비아-역자주)의 통가(Tonga)족에서는 부락의 지도자가 여성이기도 했다. 그리고 요루바랜드(Yorubaland)의 이야로드(Iyalode)족에서는 여성 관리가 있어서 남성 주도의 정치회의에서 여성의 관심사를 대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식민 지배 하에서 유럽인들의 경험에만 기초하여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던 백인 관리들은 항상 전적으로 남성의 전통적 권위를 통해 일을 하려 했다.
식민 지배는 식민지 이전 시대의 다른 사회 관계도 붕괴시켰다. 세네갈에서는 월로프(Wolof)국의 패배로 전사 계급이 폐지되었고, 전사들은 자신들의 생계 수단이었던 토지를 빼앗기게 되었다.


3.4 식민지배의 논리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지배 방법이 다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체제, 즉 기술적으로 진보한 소수의 외국인이 다수의 원주민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강제로 지배한 체제였다. 식민주의는 제도를 통해, 식민 지배를 하는 자신들은 우등한 쪽이고 식민 지배를 받는 아프리카인들은 열등하다는 이론을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아프리카의 점령과 식민화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배경의 대부분은 다윈(Darwin), 스펜서(Spencer), 모건(Morgan),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역사발전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론들은 국가(또는 주)의 구조와 산업적 자본주의 체제를 가진 사회가 인간이 만든 가장 진보적인 형태의 조직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인들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더 높은 수준의 문명이 낮은 수준의 문명을 점령하여 세계의 곳곳에 번영과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 옳은 일이고 심지어 자신들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백인의 십자가"라는 문구로 표현되거나 프랑스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명의 의무"라고 표현되는 이러한 주장들은 백인종의 생물학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인종차별적 이론을 더 강화하였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지상의 저주받은 사람들(The Wretched of the Earth)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식민주의에 대해 강력한 반론을 제기하며 식민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원주민에 대한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묘사했다. 마치 식민지 착취의 전체주의적 특징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 듯, 이주민들은 원주민들을 악의 전형으로 색칠해놓는다. (...) 원주민들은 윤리에 둔감하다고 여겨진다. 원주민들은 가치관의 부재를 넘어 가치관을 부정한다고 알려져 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문화는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전통을 만들어 냈다. 일부 경우에 있어, 이러한 전통은 아프리카인들의 후진성과 근대화되기 힘든 성질을 비판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분수를 알고 자신의 전통을 지키며 유럽인들처럼 되기를 열망하지 않는 전통적인 아프리카인들을 칭찬하기도 했다. 한편, 유럽인들과 동등한 지위를 원하고 정치적 경제적 개혁을 위해 선동된 아프리카인들은 자신의 부족적 전통을 잃어버린 뿌리도 없는 문제아들로 취급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font color=red>[ 아프리카 역사 II ] - 노예무역</font>

2003. 9. 25. 19:35
2. 노예무역

일부 역사학자들은 노예무역으로 인해 아프리카 사회가 후진성을 띠게 되었고 세계 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약점과 의존성은 식민 시대에도 계속되었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분명히 지속되고 있다. 다른 역사학자들은 노예무역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환경이나 기술, 사회 조직, 종교적 신념, 개인적 시도와 같은 식민지 이전 시대의 아프리카 사회를 형성한 요인들을 강조한다.

아프리카와 유럽의 상호작용의 역사는 1400년대 초반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 헨리(Henry)의 후원을 받은 항해부터 시작되었다. 헨리 왕자는 북부 아프리카를 지배하던 아랍인 지역을 우회하여 서부 아프리카의 주요 문명 지역들과 황금을 직접 교역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이 사업은 기술이 발달하여 포르투갈인들이 기니아만 남쪽을 탐험할 수 있게 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1460년, 무역선이 케이프 베르데(Cape Verde)에 당도하였고, 곧 이어 1471년에는 황금해안(Gold Coast), 1483년에는 콩고, 1488년에는 희망봉(Cape of Good Hope)에 도착했다. 1497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양과 동부 아프리카에 있는 스와힐리 해안도시에 도착했고, 그 이후에는 곧장 인도 남부로 항해했다. 이러한 발전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와 함께 유럽 확장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매우 이익이 컸던 인도양 무역으로 인해 원래의 목적이었던 아프리카의 황금은 뒷전이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황금해안의 엘미나(Elmina: 1482년 포르투갈인들이 축조한 서부 아프리카 최고(最高)의 성채를 중심으로 개발된 무역항-역자주), 콩고, 앙골라, 모잠비크, 몸바사에 거주지를 만들고 제한된 무역을 했지만, 선박들은 대부분 아프리카를 우회하여 동방으로 향했다. 1500년 중반 네덜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인들이 포르투갈 무역상을 대신하기 시작했지만, 아프리카는 유럽의 최종목적지인 극동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우회해야 하는 장애물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더 우세했다.

이러한 상황은 16세기 말 남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 설탕 플랜데이션이 시작되자 극적으로 바뀌었다. 설탕, 담배, 커피, 면화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노동력은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의 질병에 노출되자 사망률이 높아졌고, 식민지 노동력으로 편입되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저항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노동자들 역시 열대병 때문에 높은 사망률을 보였고, 플랜테이션에 필요한 노동력을 채우기에 유럽 노동자들의 숫자는 태부족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은 열대병에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고, 고대부터 사하라 사막과 인도양을 통해 유럽인들과 접촉을 해왔기 때문에 유럽의 질병에도 저항력을 갖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유럽인 무역상들과 내륙 지역에서 포획한 노예를 수송하는 아프리카인 중개인들 사이에는 사업적 협력 관계가 구축되었다.

17세기, 18세기, 19세기의 노예무역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붕괴시켰다. 신세계로 이송된 사람들의 숫자를 추정하는 데에는 기록이 부정확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최근의 계산에 의하면, 15세기와 16세기에 잡혀간 사람들까지 합쳐 모두 1000만 명에서 1300만 명의 사람들이 노예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 절반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나머지 절반은 중앙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사람들이다. 이들 중 거의 50만명 정도가 미국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일단 미국으로 건너간 노예는 길어야 10년 정도 밖에 살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적인 노예 공급이 필요하기도 했다.

노예제가 유럽인들에게 이득이 되었다면, 유럽인들은 왜 노예제를 그만 두었을까? 18세기 계몽주의에 의해 유럽인들은 세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1776년과 1789년 미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이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으로 뭉쳤던 것과 같이 주로 영국인이었던 소수의 유럽인들이 도덕적 배경에서 노예제에 반대하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이유를 들어보면, 산업혁명으로 인해 아프리카에 새로운 경제적 임무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싸고 풍부한 천연자원, 즉 야자유, 땅콩유, 고무, 밀랍, 상아, 껌, 커피도 필요했지만, 제조업으로 인한 이익이 커짐으로 인해 아프리카의 넓은 시장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예무역의 폭력성은 무역과 노예가 아닌 상품의 생산을 방해했다. 따라서 강력한 산업가들이 성장함에 따라 그들은 노예무역의 종식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에 종지부를 찍는 데에는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1772년 최초로 통과된 영국의 노예폐지법은 영국 내에서의 노예제만 금지했다. 1807년, 영국인들은 자국민이 노예무역을 하지 못하게 했고, 1833년에는 인도를 제외한 모든 영국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법으로 금지했다. 영국의 압력으로 다른 주요 노예 국가에서도 차례로 노예무역을 금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가 해군력을 행사하여 노예폐지 정책을 강화하고 미국이 노예를 해방함으로써 더 이상 노예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비로소 노예무역은 중지되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전지역을 거의 점령한 결과 아랍의 노예무역도 1880년과 1890년대에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노예무역의 쇠락은 유럽과 아프리카의 놀라운 합법적인 교역 상승으로 이어졌다(10장 참조). 아프리카 물품 가격의 수직 상승으로 인해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상품을 수출하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또한, 노예무역이 쇠락하고 상품무역이 성장하자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적도 아프리카 지역에서 행하던 사업 방법을 바꾸었다. 가장 주목할만한 변화는 유럽인들이 연안을 따라 작지만 영속적인 많은 식민지를 세웠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역이 이루어지게 하고, 불법적인 노예거래로 잡혀온 노예를 풀어주고 때로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세우기도 했다. 세네갈강 하류, 시에라리온, 황금해안, 라고스, 가봉 같은 이러한 식민지들은 결국 전체 대륙의 식민지화를 위한 전초 기지가 되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font color=red>[ 아프리카 역사 II ] - 이슬람과 아프리카 사회</font>

2003. 9. 25. 19:33
1. 이슬람과 아프리카 사회

1.1 모하메드와 이슬람

이슬람교는 7세기경 아라비아의 오아시스 지역에서 발생한 종교이다. 당시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그들의 조상신을 섬기는 다신교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지역에는 유대교와 기독교 같은 유일신 신앙이 퍼져 있었다. 이슬람교의 선지자인 모하메드(Muhammad)가 태어난 메카(Mecca)에서는 성지를 지배하는 몇몇 가문이 상업 교역으로 이익을 취했다. 그런 행운을 갖지 못한 주민들은 영적(靈的) 추구와 함께 구습(舊習)에 의문을 제기한 모하메드의 지도력 아래 모여들었다.

모하메드는 신이 자신에게 아랍어로 신성한 계시를 내렸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신의 메시지는 마침내 문자화되어 코란(Qur'an)으로 보존되었다. 이슬람 교도들은 코란은 신의 언어를 문자로 적어놓은 것이고, 고전 아랍어는 성스러운 언어라 믿는다. 그 주요한 내용은 이 세상의 유일한 신은 하늘과 대지의 창조자이며, 모든 인류는 이 세상에서 신의 뜻을 추구하여 낙원을 이루라는 것이었다. 계시는 또한 사회정의를 강조했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대접, 남편과 아내의 관계, 사업하는 방식 등이 특히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원 후 632년 모하메드가 사망하자, 그의 측근들은 대리인이라는 뜻의 칼리파(khalifa)가 이슬람 사회의 정치적 지도자 자리를 계승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후계자 칼리파들은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무력 투쟁인 지하드(jihad)로 이슬람 교도를 인도했다. 이런 식으로 아랍의 이슬람 교도들은 서쪽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동쪽 끝으로는 중국의 국경에 닿아 있는 하나의 제국 혹은 칼리프 영토의 지배권력이 되었다. 칼리프 영토 내의 이슬람 지배는 경제적 확장에 박차를 가했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의 문화를 종합한 세계 문명을 창조해 내었다.

이슬람 교도들은 다섯 개의 기본 교리(pillars)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이슬람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대중 앞에서 신께 복종하겠다고 서약하는 것,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 하루의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올리는 것, 아라비아의 성지로 순례를 다녀오는 것, 그리고 모하메드의 성스러운 계시 여행을 재현하기 위해 이슬람력 라마단(Ramadan) 기간에 금식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모하메드와 초기 제자들이 제창한 수나(sunna) 혹은 길의 일부분이었다.

모스크(mosque: 이슬람교의 사원-역자주)의 꼭대기에서 누군가가 아랍어로 외치는 소리에 맞춰 그들은 하루에 다섯 번 기도를 올린다. 사원 안에서 이슬람 교도들은 아랍어로 된 기도문을 반복하여 암송하며 신 앞에 엎드린다. 코란에 대한 강조는 다른 영역에서도 볼 수 있다. 아이들은 흔히 코란을 암송하는 종교 학교에 보내진다. 코란의 문구를 서예 형식을 빌어 표현한 예술적 표현은 귀중하게 여겨진다.

고전 아랍어에 능통하고 이슬람교의 교리를 새로운 세대에게 가르칠 수 있는 학식 있는 자인 울라마(ulama)에게는 종교적 지도자의 지위가 부여된다. 울라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코란에 나와 있지 않거나 나와 있다 해도 불확실한 특정한 사안에 대한 올바른 처신을 정의하는 법적 과정을 제정하게 된다. 그 결과 샤리아(sharia) 혹은 이슬람 교도의 방법, 즉 흔히 회교법이라고 불리는 것이 만들어진다.


1.2 이슬람 전파방법

아프리카에 이슬람교가 소개된 방법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이다. 첫째,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아랍인들이 지배 권력으로 등장하여 전 지역에 주둔군을 두었다. 둘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이슬람 교도인 무역업자가 이슬람교를 소개하고 상업구역 안에 거주하였다. 이 두 지역에서 전개된 개종의 속도와 정도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아랍의 정책은 이슬람 교도들에게 유리했고, 이슬람교로 개종을 하면 이점이 있었다.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4세기 동안 다수의 사람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사하라 이남 지역에서 최초로 개종한 사람들은 장거리 무역에 종사하는 지역 상인들이었다. 적은 경우이긴 하지만, 동부 아프리카의 도시국가에서는 이슬람 교도들이 사회적 권력을 일부분을 장악하기도 했다. 다른 지역의 이슬람 교도 상인들은 해당 지역 통치자의 선의에 의존해야 했다. 아프리카인 지배자가 이슬람교로 개종을 한 경우라 해도, 그들은 전통적인 형태의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 이러한 공존을 통해 이슬람 교도들은 다양한 계급의 아프리카인들과 어울리는 방법으로 이슬람교를 전파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이슬람 교도들은 또한 현지 적응을 잘 하여 현지 주민들에게 치료사와 성인으로 좋은 평판을 얻게 되었다. 이슬람 학자들은 때로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아라비아 문자를 사용하면 초자연적 현상을 다룰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예를 들어, 이슬람 지도자들은 코란의 문구를 가지고 부적을 만들거나, 코란이 적혀진 판자를 갈아 약초와 혼합하여 약을 만들었다. 현지 주민들은 질병이나 미래의 불행을 막기 위해 그러한 부적과 약을 찾았다.


1.3 스와힐리어 문명

이러한 패턴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곳은 아프리카의 동부 해안이었다. 이슬람 상인들이 이 지역으로 진출한 결과, 뿌리는 아프리카 대륙에 두었지만 서남아시아에서 영향을 받은 크레올(Creole)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 문화에서 나온 언어인 키스와힐리(Kiswahili)어는 이러한 상호작용을 상징한다. 이 언어는 아랍어와 다른 언어에서 많은 단어들이 차용되어 만들어진 반투(Bantu)어 이다.

이 이름은 해안을 뜻하는 아랍어 사헬(sahel)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문화의 혼합 장소였던 해안가의 작은 섬들과 대륙의 내륙지역을 가리킨다. 최근의 언어학자,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지금의 케냐(Kenya) 지역에 이주해온, 반투어를 쓰고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는 부족이 기원 후 1000년 정도에 이 해안에 살았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토양이 비옥하고 대부분 건조한 지역인데도 강수량이 적당한 독특한 해안 환경으로 인해 이주자들은 생태적으로 적합한 장소를 모두 차지하여 살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이주 지역이 해안가에서 수마일 이상 떨어진 곳까지 확산되지는 않았다.

이주하는 과정에서 스와힐리 부족이 넓은 지역으로 퍼져갔지만 해안 주민들은 해안의 부락들과 계속 무역을 하며 접촉을 했다. 스와힐리족은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에서 온 이슬람 선원들과 교류하였고, 다우(dhow: 아라비아해에서 쓰이는 대형 삼각돛을 단 연안항해용 범선-역자주)선으로 알려진 배를 타고서 인도양을 건너 다녔다. 결국 스와힐리족은 그들의 상업 정신과 종교적 신념을 받아들이고, 이슬람교를 해안 주거지에 전파했다.

13세기 무렵, 스와힐리 상인들은 해안을 따라 내려가서 남부 중앙아프리카에 있는 짐바브웨 고원의 금광 국제무역을 독점했다. 킬와(Kilwa)라는 도시는 스와힐리 황금 무역의 중계항이었다. 많은 이슬람 도시를 여행한 이븐 바투타(Ibn Battuta)는 킬와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이고, 건물들이 매우 고상하다며, 그 곳에 사는 주민들 역시 고결하고 덕망 있는 이슬람 교도라고 서술한 바 있다.


1.4 이슬람교의 정교화: 수피즘과 아프리카 사회

수피즘(Sufism; 이슬람교 신비주의-역자주)은 신비적 의미에 대한 개인적 추구를 강조하는 이슬람교에서 발생된 것이다. 수피(sufi)들은 궁극적 진리의 통합 상태를 경험하기 위해 정교한 의식을 수행한다. 어떤 이들은 수피의 추구를 영적 운동주의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수피의 의식이 수행자의 육체적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수피 관계의 핵심은 제자와 스승인 샤이흐(shaykh)의 개인적 유대에 있다. 스승은 제자가 자신의 지도에 전적으로 복종하기를 기대한다.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샤이흐는 제자들에게 중요한 기도를 들려준다. 열정적인 제자들은 그러한 종교적 비밀을 모두 습득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도 좋다는 샤이흐의 허가를 얻는다. 샤이흐와 제자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면서 개종자들은 친밀한 환경에서 신앙의 의식을 배우게 되었다. 권위적인 샤이흐에 대한 수피의 강조는 또한 많은 농업지역, 특히 유목민 집단의 사회관계를 정하는 혈족집단의 후원자-고객(patron-client) 관계에 반영되었다.

18세기 초, 수피즘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역동적인 세력이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슬람 세계에 수피즘이 나타난 초기 3백여년과 구별짓기 위해 이를 신 수피즘(neo-Sufism)이라고 부른다. 무엇이 새로웠냐 하면, 수피 샤이흐들이 물론 신학적 문제에 대해 많은 글을 쓰기는 했지만, 이들이 신학적 문제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추종자를 얻은 수피 운동은 영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조직과도 연관된 샤이흐에 의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샤이흐에게 선물을 바치는 제자들의 관습은 운동의 지도자에 의해 부의 축적과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제도로 변형되었다. 또한 더 나아가 수피 샤이흐는 추종자들을 정치적 운동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었다. 또한 수피 지도자들은 19세기 말 유럽의 확장에 대한 저항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그 전에도 서부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 있던 샤이흐들은 아프리카의 통치자에 맞서 종교 전쟁의 세기를 시작하는 군사적 지하드를 선언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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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 아프리카 역사 I ] - 결론</font>

2003. 9. 25. 19:29
4. 결론

전통적인 정치 조직은 기본적으로 두 종류가 있다. 그것은 세속 통치자의 손에 정치 권력을 부여한 중앙집권적 국가와 씨족이나 혈통과 같은 친족 집단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정치 권력을 통제하거나 연령 계급 체계에서의 "계급"으로 지위가 결정된 연장자의 모임(장로회)에 의해 정치 권력이 유지되는 보다 평등하고 중앙집권에서 탈피한 공통체이다.

정치적 중앙집권화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아프리카의 전통이다. 고고학적 증거를 보면, 중앙집권화는 아프리카 외부로부터 들어온 상업적, 종교적, 문화적 영향에 의해 발달하였으며, 동시에 근본적으로 아프리카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나온 자연스런 결과임을 잘 알 수 있다.

크든 작든, 중앙집권화되었든 탈중앙집권화되었든 어떤 아프리카 사회도 그 자체로 고립되어 있지는 않았다. 교역, 전쟁, 외교 관계, 이주 및 결혼 등이 집단간 관계의 일부 기본 요소를 구성한다. 인류를 영원히 분리하는 고정된 경계가 없는 대신, 문화적 국경이 존재하여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상호 이익이 있는 교제를 허용한다.

상호작용의 세 가지 기본 패턴을 확인해보자. 첫째, 동일한 인종이나 언어 집단이나 하나의 집단과 인접 이웃의 구성원을 포함하여 지역적 수준에서 대단한 상호작용이 있었다. 둘째, 지역간 관계가 있었다. 사하라 횡단 무역(Trans-Saharan Trade)은 서부와 북부 아프리카를 잇는 하나의 유명한 실례이다. 셋째, 국가간 관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의 확산을 촉진시켰던 아라비아인들과의 관계가 있었으며, 15세기 이후에는 유럽인들과 관계가 있었다. 언어, 종교, 기술, 사상, 상품은 이러한 접촉의 결과로써 확산될 수 있었다. 이러한 세 가지 패턴의 상호작용으로 아프리카인들이 통일되었고, 아프리카 대륙과 세계의 다른 대륙이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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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 아프리카 역사 I ] - 고대왕국의 형성</font>

2003. 9. 25. 19:28
3. 고대왕국의 형성

3.1 북부 아프리카

이 지역에서는 역사적 발전, 고대 문명, 그리고 아프리카와 세계의 다른 지역 사이의 상호작용과 관련된 풍부한 증거가 발견되었다. 이집트, 쿠시(Cush), 악숨의 역사는 매우 길어서 세계 문명의 가장 영속적인 유산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지역에서 성취한 것에 대한 해석이 얼마간은 다른 인종의 기여, 보편적인 철학 사상의 토대, 서구에 대한 아프리카의 영향과 같은 문제에 대한 커다란 역사적 논쟁의 일부분이 되었다. 최근 일부 논쟁에서는 아프리카 중심의 신흥 정치사상을 정의하고 있는데, 현대 문명의 뿌리가 고대 흑인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흑인으로부터 파생된 많은 사상들이 이집트와 그리스와 같은 고대 문명의 형성과 발달에서 인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 이집트 왕국 : 5500여년전 나일강 유역의 농업국가. 신이 왕으로 현신하였다고 믿는 절대권력을 가진 파라오(Pharaoh)가 지배, 남쪽의 누비아족과 교역 및 접촉을 하였다. 이집트는 곡물과 금을 수출했고, 흑단, 상아, 목재, 마차용 말, 타조깃털, 보석, 금속, 향료를 포함하여 많은 상품을 수출했다. 통치 형태와 경제 이외에도 고대 이집트는 상형문자, 수학, 천문학의 발달과 같은 성취로 주목 받았고, 건축, 예술, 의약, 종교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지금도 관광객들은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 기념비, 보석, 토기, 그리고 다른 건축물에 압도당한다.

☞ 노크(Nok) 문화 : 기원전 8세기에 페니키아 식민자와 교역가들에 의해 철기 기술이 북부 아프리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원전 4세기에 서부 아프리카의 민족들 사이에 철기 기술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만들었던 커다란 테라코타 머리로 유명한 나이지리아의 초기 철기시대 노크(Nok) 문화가 이와 관련된다.

☞ 쿠쉬(Kush) 왕국 : 누비아인이 세운 쿠쉬는 2,700~2,800년 전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국가로, 이 나라의 역사는 이집트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 쿠쉬의 왕은 사실상 기원전 700~500년 경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다. 2,500여년 전 이집트에서 쫓겨난 쿠쉬의 지도자들은 점점 더 남하하여 거대한 철기 산업이 번성했던 메로에(Meroe) 지역에 이르렀다. 누비아인들은 메로에 언어와 문자, 새로운 신들과 사당, 새로운 예술형태와 피라미드와 같이 지역문화 특성들을 변화시키면서 이집트의 여러 가지 관습을 퍼뜨릴 수 있었다. 또한 메로에는 목재와 철이 풍부한 지역으로 훌륭한 건축과 방어물을 축조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멀리 떨어진 지역과의 원거리 무역에 참여하였다.

아직까지도 쿠시가 번성하게된 이유, 이 나라의 정치적 지배의 범위, 야금술의 보급에 대해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메로에를 계승한 국가들은 기독교 시대의 처음 수백년간 왕실의 신앙으로서 악숨에서 기원한 콥트 기독신앙(Coptic Christianity, 그리스도 단성설을 신봉하는 교회로 이집트 그리스도교의 일파-역자주)을 믿었다.

☞ 악숨(Axum) 왕국 : 에티오피아의 고대도시로 시바의 여왕이 살았으며 모세의 십계명 원판이 보존되어 있다는 전설이 있다. 약 2천년 전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남쪽으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악숨(Axum)이 세워져 쿠시왕국과 맞섰다. 악숨을 세운 사람들은 2,100년 전 쯤 남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와서 나중에 지금의 에티오피아와 동부 수단 지역까지 지배력을 확장해 나갔다. 2,000년 전 그들은 홍해(紅海)에 접한 항구를 지배하고 지중해의 동쪽 끝에서 아프리카 내륙의 코끼리 상아, 금, 향신료를 사러 온 상인들과 교역을 계속했다.

그로부터 400년 후 악숨의 지배자는 기독교도가 되었고, 에티오피아 고원의 중부와 남부에 세워진 잘 알려지지 않은 국가들을 지배하고자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암하릭(Amharic)어를 말하는 사람들인 이 국가의 지도자들은 700여년 전 에티오피아 고원의 중북부 지방에서 오래 전에 패망한 악숨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이 국가는 계속 증가하는 토지소유자 계층을 지지 기반으로 삼았고, 500~600년 전에 번영을 구가한 후 사라졌으며, 18세기에 다시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3.2 서부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의 왕국

기원전 5,000-2,000년, 사하라 지역이 지속적으로 건조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경작자나 목축 집단들은 어쩔 수 없이 혹독한 조건으로부터 도피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는 사막의 남쪽 가장자리 아래 서부 아프리카의 수단 초원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새로운 문화 중심지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서부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의 국가들은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도시국가 카르타고(현재 튀니지)가 로마인들에게 침공당한 이후에 형성되었다. 이 도시국가는 2,500년에서 2,800년 전 사이 베르베르(Berber)족과 손잡고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과 사하라 사막 통과 무역을 활발히 수행했다.

수단의 이주자들에 의해 도입된 식량 생산 혁명이 빠른 인구 증가, 비농업 전문화의 발달과 도시화의 시작을 촉발시키면서 이러한 과정이 수단 지역에서 발생했음을 알려준다. 아마도 농업 주기를 전체적으로 통제해야 했기 때문에 정치의 중앙집권화가 출현했을 것이다. 식량 생산 혁명이 남쪽으로 확산되면서 수단 서부 중앙의 두 집단, 즉 나이저강 상류의 만데(Mande)어 사용자들과 차드호(Lake Chad) 남부와 서부의 건조로 남쪽으로 이동해온 카누리(Kanuric)어 사용자들이 지배적인 경작자가 되었다. 이러한 집단들과 다른 집단의 식량 생산자들이 사상과 기술, 기본적인 도시화, 그리고 넓은 지역에 걸친 중앙집권적 정부의 시작을 전달한 것처럼 보인다.

수단의 인구는 초목이 자라고 물이 있는 새로운 땅을 찾아 들어온 사하라 목축인들에 의해 더욱 많아졌음에 틀림없다. 수단 공동체의 발달에서 중요한 또 다른 요소는 철기 기술의 도입이었다. 기원전 3세기경 나이지리아 중부에서 번창한 노크(Nok) 문명의 대장장이들은 금속을 녹여 도구를 만들었으며, 이러한 기술은 몇 세기도 지나지 않아 서부 아프리카의 대부분 지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수단 서부 지역 국가들의 성장을 자극한 또 다른 요인은 여전히 강력한 경제, 즉 부분적으로 사하라 횡단 무역에 기반한 경제였다. 서기 1세기말에는 대규모 낙타 대상들이 사하라를 건너 남쪽의 서부 아프리카 적도 숲에서 채굴한 금과 교환하기 위해 북부에서 수집한 소금을 운반하였다. 서기 1,000년 이전에 노크 및 다른 사회들은 철기 기술을 이용하여 사냥과 농업의 효율성을 높였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커다란 정치적 단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수단의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크건 작건 매우 유사한 정치제도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통치자들은 경외의 대상이었고, 중요한 종교적 기능을 맡았다. 그리고 그들의 개인 활력은 국가의 복지 그 자체와 밀접하게 일치했다. 그들은 화려한 왕궁을 유지하고 각료로 활동했던 국가의 고위 공직자들을 임명했다. 많은 경우에 왕족 이외에 세습 관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럽이나 세계의 다른 지역의 봉건 구조에서 매우 일반적인 기능주의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가들이 봉신 왕국에 대한 통치를 행사하는 정도까지는 "제국"이라 부를 수 있지만, 그러한 국가들의 대부분은 느슨한 제국적 구조를 유지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봉신 국가들은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 가나(Ghana) 왕국 : 5세기경에 세워진 수단의 첫 번째 국가로 11세기에 쇠락. 1,100년 전, 북아프리카에서 온 무슬림 무역상들은 테크루르의 북동쪽에 자리잡은 가나(Ghana)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수도(首都)였던 쿰비 살레(Kumbi Saleh)와 왈라타(Walata)의 위치는 경작지의 북쪽 가장자리와 맞닿아 있는 남부 모리타니아(Mauritania)였는데, 이곳은 이 도시들을 지배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가나의 소닌케(Soninke)족 거주자들은 모든 방향으로 봉신 국가(封臣國家, vassal state)들을 지배하는 강력하고 복잡한 왕국을 형성하였다.

가나는 사막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치자들은 전략적 이점을 누리며 중간 상인으로서 사하라를 사이에 두고 행해진 금, 소금, 상아, 구리, 노예 같은 사하라 횡단무역 대상행렬이 구성되고 준비를 하는 활동무대였기 때문에 북부아프리카와 남부아프리카의 자원 교역이 부흥함에 따라 번성하였다. 가나의 왕들은 그들의 통치 아래에 있는 영토 전체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잘 무장된 기병대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군대를 거느렸다.

☞ 말리(Mali) 왕국 : 11세기에 발흥하여 15세기 초에 멸망. 처음에는 나이저강 상류에 살면서 만데(Mande)어를 말하는 집단인 말리(Mali) 왕국이 무역과 권력을 독점했다. 구비(口碑)로 전승된 바에 따르면, 말리 왕국은 1230~1235년 사이 순디아타 케이타(Sundiata Keita)가 세운 나라로, 정규군을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을 농부들로부터 거둬들였을 뿐만 아니라 금과 다른 물품들을 이용하여 사막에서 생산되는 생필품인 소금과 다른 무슬림 세계의 일용품들을 교환하였다. 말리의 지배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만사 무사(Mansa Musa)는 많은 부를 축적해 1324년 메카로 아주 화려한 성지순례를 다녀왔다고 칭송받기도 했다. 1468년까지 지속된 말리의 세력은 나이저강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손니(Sonni)왕 휘하의 송가이(Songhai) 왕국으로 넘어갔다.

☞ 송가이(Songhai) 왕국 : 송가이 왕국의 지도자들은 커누 군대를 이용하여 강을 지배했는데, 1591년 4월 톤디비(Tondibi) 전투에서 모로코 침략자들에 의해 이미 쇠락하던 왕조가 완전히 망할 때까지 팀북투(Timbuktu), 제네(Djenne), 가오(Gao)와 같은 지역의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 베닌(Benin) 왕국 : 12세기경 나이지리아에서 베닌 왕국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이 왕국의 중심지는 15세기 후반 포르투갈인들이 처음으로 방문하기 전까지 매우 크고 부유하고 강력한 도시를 발달시켰다. 베닌 왕국은 주로 무역을 통제하며 수세기 동안 번성하였고, 또한 왕실에서 황동과 청동 주물의 왁스 제거 주조법(Lost-wax casting)과 상아 조각이라는 잘 알려진 전통을 발달시켰다.

☞ 카넴(Kanem)과 보르누(Bornu) 왕국 : 현재 차드(Chad)공화국 주변의 사막 인근에 세워진 카넴왕국은 가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래 전에 세워졌으며 수세기 동안 중계무역의 집산지 역할을 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서부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들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카넴 왕국의 지도자들은 북부아프리카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또한 1,500년 전 쯤에는 서남아시아와도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 500년도 더 지난 아랍의 자료들을 보면 오늘날 나이지리아 북부 차드(Chad) 호수의 서남쪽에 자리잡은 보르누(Bornu)라고 불린 강력한 계승국가가 언급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남쪽으로 이동한 것을 보면 아마도 숫자가 고정된 경작자들에 대한 지배가 확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록 보르누의 지배층은 거대한 무역중심의 국가를 유지할만한 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주석과 구리 자원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 하우사(Hausa)족의 도시국가들 : 400여년 전까지 서부아프리카의 사바나 전체를 통틀어 가장 역동적인 정치체제를 갖춘 국가들은 보르누 서쪽의 하우사족이 세운 도시국가들이었다. 이러한 국가들이 발흥한 지역은 높은 지하수면과 많은 강과 계곡이 있어서 1년 단위의 관계농업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식량공급이 넉넉해서 예외적으로 조밀한 인구가 모여 살게 되어 1천여년 전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주거지와 광범위하고 전문적인 일용품을 생산할 수 있는 경제구조를 갖게 되었다.

도시국가 중 하나로, 말리(Mali) 왕국에서 온 이슬람화된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카노(Kano) 왕국은 500~600여년 전 쯤 매우 강력한 왕권을 갖게 되었다. 고비스(Gobir)와 카치나(Katsina), 보르누(Bornu)와 같은 또 다른 하우사(Hausa)족 국가들은 카노(Kano)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또 철광(鐵鑛), 숯을 생산할 수 있는 숲, 콜라 넛(kola nut) 무역, 남쪽에서 잡혀온 노예들, 풍부한 염색직물과 가죽제품들이 있어 실질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지속적인 무역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아산테(Asante) 왕국 : 1,680년 오늘날 가나가 된 아산테 왕국이 세력을 키워 아산테 왕 오세이 투투(Osei Tutu)와 그의 신하이자 사제였던 오콘포 아노키에(Okonfo Anokye)는 세 개의 작은 국가를 강제로 병합하여 아칸(Akan)어를 말하는 부족이 지배하는 연방국가를 만들었다. 아산테가 부흥했던 요인은 가나 중부의 금광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노예 무역과 관련하여 군사력을 키웠고, 또 무역을 통해 총을 수입했기 때문이다. 아산테는 해안을 통한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 오요(Oyo)왕국과 다호메이(Dahomey) 왕국 :  오늘날 나이지리아의 주요종족인 요루바족의 오요 왕국은 광활한 지역을 경비하는 기마병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과 위다(Whydah), 포르토 노보(Porto Novo), 바다그리(Badagry) 같은 항구에 있는 다른 무역상들이 점점 더 많은 노예를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1730년, 오요(Oyo) 왕국의 속국인 다호메이(Dahomey)가 아가자(Agaja)왕 시절부터 노예매매권을 갖게 된 이래 19세기 말 노예무역이 쇠퇴할 때까지 바다로 향하는 주요 통로들을 장악했다. 그 후 오요 왕국은 북쪽에서 무슬림 왕국인 소코토(Sokoto)가 발호하고 남쪽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요루바(Yoruba)의 속국들이 힘을 갖춘 채 독립하자 멸망해 버렸다


3.3 동부 및 중부 아프리카의 왕국

흔히 남부 아(亞)대륙(subcontinent)이라 불리는 반투 아프리카(Bantu Africa)는 인간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문화의 개막을 촉진시키는지를 잘 보여주는 가장 성공적인 예이다. 여기서는 적도 남부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이 반투족 언어들과 밀접히 관련된 어떤 언어나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된 과정을 조사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는 풍요롭고 매우 다양한 "반투 아프리카" 문명의 발달을 이끈 중요한 문화적 상호작용이 함축되어 있다. "반투"는 하나의 언어나 민족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가계가 "원형 반투(proto-Bantu)"어로 거슬러 올라가는 종족의 450개 이상의 언어 집합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은투(ntu)'라는 단어는 "사람"을 의미한다. 반투 기원과 이주에 대한 지배적인 이론은 언어 재구성으로부터 파생되었고 때로는 고고학적 증거에 의지했다.

☞ 부간다(Buganda) 왕국 : 700여년 전 경, 동부아프리카의 거대한 호수 지역에서 국가 형성과정이 시작되었다. 이 국가들은 대부분 소금, 소, 철의 경제적 중요성과 기름진 농토와 바나나와 같은 식량이 있음으로써 거주가 가능하다는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함으로써 탄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거대한 호수들 주변 지역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조상들은 남쪽에서도 왔고, 서쪽, 동쪽, 북쪽에서도 왔음이 분명하다.

쿠시테(Kushite)어, 나일로틱(Nilotic)어 그리고 반투(Bantu)어를 사용하는 조상들의 후손인 지배자들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을 비롯해 다양한 요소를 동원해 힘을 기르고 중앙집권적 왕국을 세웠다. 빅토리아 냔자(Victoria Nyanza) 호수 북서쪽의 기름진 평원을 차지하고 있던 부간다(Buganda) 같은 국가가 전형적인 예이다. 18~19세기에는 부간다(Buganda)의 지배자였던 카바카(Kabaka)가 간다(Ganda) 혈족의 특권을 점차적으로 양도받아 현재의 우간다(Uganda) 지역에 이르는 대부분의 지역까지 지배력을 확장했다. 바나나의 충분한 공급 외에도 이 국가의 경제적 기반은 수공예 제품의 활발한 무역이었다.

☞ 콩고(Kongo) 왕국 : 콩고강 어귀에 15세기말 포르투갈인들이 최초로 도착했을 때, 은징가 은쿠우 (Nzinga Nkuwu)가 다스리고 있었던 이 왕국은 이미 수 세대에 걸쳐 존재하고 있었다. 1506년 은징가 은쿠우의 아들인 알폰소(Affonso)는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자신의 형을 축출한 후 이 왕국의 마니콩코(manicongo; '지배자'라는 뜻)가 되었다. 알폰소가 즉위한 후부터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지배자의 권력 대부분이 지역의 종교적 가치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의 개종으로 이러한 권력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주위에 있던 선교사들과 노예 무역상 같은 포르투갈인들의 커다란 영향력은 이러한 권력 기반을 더욱 훼손했다.

☞ 루바(Luba)와 로지(Lozi)왕국 : 소금 및 철광의 원거리무역으로 내륙분지에서 중앙집권 정치체제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현재 콩고(Congo)의 샤바(Shaba) 지역에서 1400년대 초반 사냥영웅인 이룽가 칼랄라(Ilunga Kalala)가 루바(Luba)족을 기반으로 왕조를 세웠다. 지금은 콩고 공화국과 잠비아와 앙골라가 위치한 지역에 세워진 사바나 남쪽의 다른 국가들은 루바(Luba)족과 자신들의 건국신화를 합쳐 지배혈족으로서의 우월함을 내세웠다. 잠비아(Zambia)의 서쪽, 잠베지(Zambezi)강의 범람원 위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19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통일을 이룬 로지(Lozi)라는 국가가 등장하게 된다.

☞ 스와힐리(Swahili) 왕국 :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국가들도 외부 세력으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았다. 이렇게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은 국가들 중 동부아프리카 연안에 자리잡은 무역국가들이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무역중계항은 예전부터 존재했던 연안어업도시에서 출발하여 내륙의 농경 부족들과 관계를 맺고 기원 후 100년 경 이미 그리스-로마 세계와 접촉을 하게 된다. 9세기 경부터 시작하여 이곳의 도시국가들은 인도양 연안의 이슬람 문화와 코끼리 상아, 금, 노예무역으로 유지되던 아프리카의 정치체제와 맞물려 성장하고 쇠퇴했다.

서기 1천년 무렵에는 이런 아프리카의 도시국가들은 모가디슈(Mogadishu; 현재의 소말리아)부터 소팔라(Sofala; 현재의 모잠비크)에 이르기까지 국제해상무역에 깊이 관여했다. 탄자니아 남부에 위치한 킬와(Kilwa) 같은 국가는 쇼나(Shona)가 지배한 짐바브웨의 금광을 기반으로 중국, 인도 그리고 다른 이슬람 세계와 광범위하게 무역을 했다. 이러한 도시국가를 기반으로 한 해상무역 사회는 아랍과 페르시아의 이민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의 문화를 모두 근본으로 삼은 독특한 스와힐리(Swahili) 문화를 발달시켰다.


3.4 남부 아프리카 왕국

남부 아프리카에서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거대한 국가들은 상당히 늦게, 그리고 약간 다른 방식으로 발달했다. 개척적인 농업전문가들과 목축업자들이 침투해 들어갔던 마지막 지역들 중 하나인 이 지역의 많은 부분에서는, 훨씬 비옥한 중앙아프리카 초원에서처럼 생태학적 조건이 인구 집단의 급격한 증가를 유도한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계절 이동 목축이 북쪽에서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19세기까지는 이러한 지역에서는 흩어져서 정착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주가 지역화된 인구 통계학적 압력을 완화해줄 여지는 항상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치적 과정이 제국적 융합보다는 분열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었고, 지배적인 정치구조는 작은 독립 추장국의 정치구조와 닮은 꼴이었다. 그러나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적어도 이 지역의 많은 부분에서 인구 압박이 커지기 시작했다. 남쪽으로부터 밀려오는 또 다른 이주로 인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이는 아프리카 남부 끝부분에 정착한 17세기 네덜란드 이주자의 후손으로 토지 소유욕이 강한 트랙보어(trekboer)인들의 이주였다.

☞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 :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는 다양하고 복잡한 고고학적 유물이 남아있는 국가로서 800여년 전에 세워진 왕국이다. 이곳에는 짐바브웨(Zimbabwe, 위대한 집)라 불리는 굉장한 석조 건축물 유적이 남아있는데, 이는 현재 쇼나(Shona)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조상들이 세운 것이다. 이곳은 아마도 잠베지(Zambezi)강에서 림포포(Limpopo)강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통치한 황제를 위한 수도가 아니었을까 추측되고 있다. 또한 이곳은 인도양 무역망과 연관을 갖고 있었으며 부유한 금세공 지역을 에워싸고 있었다.

황금교역의 활성화와 중국과 아시아에서 토기나 유리와 같은 상품을 수입함으로서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남부 아프리카의 많은 석조건물 중심지들 사이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 나라의 복잡한 석조 건축물은 이곳의 정교한 경제적 정치적 체제를 보여준다. 이러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 필요한 노동력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 경제, 정치적 체제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비(口碑)와 초기 포르투갈 방문객들이 직접 기술한 문헌에 따르면, 이 지역에 아주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비록 원래의 쇼나(Shona)국은 인도양 무역상들이 잠베지강 계곡에 살고 있던 새로운 아프리카 무역 중계상을 찾아간 후 두 집단간의 전쟁으로 인해 멸망했지만, 1,420년 경에 쇼나(Shona) 북부의 냐심베 무토타(Nyatsimbe Mutota)에 계승국가가 세워졌는데, 이 나라는 무웨네 무타파(Mwene Mutapa)/모노모타파(Monomotapa)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 줄루(Zulu) 왕국 : 남부아프리카에서 발호했던 줄루왕국의 영향력은 아주 멀리 말라위(Malawi)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정도였다. 줄루족의 남부아프리카에서의 건국 과정은 수천명의 이주와 정복을 강요하는 전쟁과 동요의 시기인 음페카네(Mfecane)와 함께 시작되었다. 음페카네(Mfecane)란 줄루족 언어로 '부서지고 깨지는 시기(the era of the crushing or breaking)'/'고난의 시기(Time of troubles)'라는 뜻인데, 남부아프리카에 백인 거주지가 계속 확장되었던 현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줄루 왕국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인구의 증가, 노예 및 상아 같은 물품의 원거리 무역, 수백년 전 포르투갈에서 건너온 옥수수의 유입 등과 같은 좀 더 깊은 변화의 결과였을 것이다.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지도자가 샤카(Shaka)였다. 그는 국지전을 수행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향상시켜 1819년에서 1828년 사이에 매우 효율적으로 권력을 강화하여 군사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주와 정복이 있었고, 남부아프리카 전역에도 많은 왕국이 세워졌다. 이 특별한 인물은 매우 효율적으로 군대를 훈련시켰고 신속하게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는 현존하는 체제를 변환시켜 자신이 지배할 수 있었던 각 혈족을 망라하여 나이별로 집단을 구성(Age-grade system)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처럼 혁명적인 사회 체제를 구성한 덕분에 그는 젊은이들의 집단을 모두 이끌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고, 여성들은 식량을 생산하여 그들을 지원했던 것이다.

줄루족이 국가를 형성함으로써 줄루족에게 영토를 빼앗긴 다른 부족들은 남부아프리카의 내륙초원이나 지금의 짐바브웨, 말라위, 모잠비크, 잠비아, 탄자니아가 세워진 더 먼 지역으로 가서 새로운 정치체제를 형성했다. 오늘날 레소토(Lesotho)가 된 소토(Sotho) 왕국과 오늘날의 짐바브웨가 된 은데벨레(Ndebele) 왕국은 모두 음페카네(Mfecane)의 결과로 생겨난 왕국이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font color=blue>[ 아프리카 역사 I ] - 아프리카인의 이주와 반투족의 이동</font>

2003. 9. 25. 19:24
2. 인류의 기원지로서 아프리카

인류가 속한 영장류의 진화는 7,000-8,000만년부터 시작되었다. 초기 유인원과 구세계 원숭이는 2,3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 나타났고, 그 후에 유라시아로 퍼졌다. 일부 유인원은 살아 남아 환경에 계속적응하면서 우연히 인류 조상의 고유한 특징인 직립 보행이나 두 발 보행을 보여주는 집단이 출현했다. 이 집단의 구성원들은 "호미니드(Hominid)"라 불리거나, 인류와 400만~800만 년 전에 다른 유인원으로부터 갈라진 이후 공통의 진화 경로를 공유하는 인류의 화석 조상을 포함하는 사람과(호미니드 ; Hominidae)의 생물학적 과(科)의 구성원이라 불렸다

호미니드 과(科)에서 살아 있는 유일한 종은 우리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뿐이다. 그러나 지난 400만 년 동안 화석 기록은 수많은 다른 호미니드 종류, 특히 호미니드 진화의 최초 300만 년 동안 호미니드와 이들과 공존했던 몇몇 종을 밝혀주었다. 그렇게 먼 과거에 발견된 가장 초기의 직립 보행 호미니드는 일반적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 "아파르(Afar)의 남부 원인(猿人)"을 의미) 종에 해당한다.

그들은 동아프리카지구대의 에티오피아 아파르 지역과 탄자니아 라에톨리(Laetoli)에서 약 300~400만 년 전에 발견되었다. 비록 두개골은 여러 면에서 원숭이를 닮았지만, 엉덩이, 다리, 발, 척추 등 뼈의 여러 특징은 직립 보행을 가리키는 깊은 변화를 보여준다. 게다가 라에톨리 발굴지에서 수백 개의 다른 동물의 흔적과 함께 발견된 화석화된 진기한 발자국들은, 분명 함께 걸었던 세 개체의 호모니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화석은 동부 아프리카에서만 발견되었다.

200~300만 년 전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 "아프리카의 남부 원인(猿人)"을 의미)라 불리는 작은 두뇌를 가진 새로운 종의 호모니드가 남부 아프리카의 석회암 동굴의 화석 기록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동부 아프리카에서도 작은 두뇌(400~550cm3로 현대인의 평균 1,350cm3와 비교할 때 작다)를 가진 매우 다른 호모니드 종이 나타나는데, 큰 턱과 이빨이 특징적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에티오피쿠스(Australopithecus aethiopicus)라 불리는 이 종은 매우 거칠고 품질이 낮은 식량을 먹는 데 적응한 것으로 간주되는 호모니드 종이다. 작은 두뇌와 큰 턱을 가진 이 호모니드는 100만~200만 년 전에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후기의 대표적인 종들과 함께 "튼튼한 오스트랄로피테신(Australopithecine)"으로 알려진 주요 호모니드 그룹 중에서 가장 초기의 것으로 알려진 종이다.

이 건강한 오스트랄로피테신은 적어도 100만 년 전에 우리 인류의 속(屬)인 호모(Homo)에 해당하는 큰 두뇌의 호모니드 혈통과 공존했다. 두뇌 크기가 600~750cm3(현생 인류의 절반 크기)인 새로운 종 호모 하빌리스(Hpmp habilis)에 대한 최초의 결정적인 증거는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에서 적어도 200만 년 전에 발견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진화 초기에 호모 혈통이 하나 이상의 종으로 갈렸다고 믿고 있다. 화석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170만 년 전에는 큰 신체와 호모 하빌리스보다 큰 두뇌를 가진 새로운 호모니드 종이 출현했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라 불리는 이 새로운 종은 850~1,100cm3(현생 인류의 2/3~3/4 크기)의 두뇌 크기를 가졌고, 큰 눈두덩이와 두꺼운 두개골, 경사진 이마 그리고 튀어나온 턱을 가졌다.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는 북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대륙으로 퍼져나갔다.


2. 아프리카인의 이주와 반투족의 이동

대략 18,000년 전 쯤부터 나일 계곡(Nile Valley)에 살던 인류의 무리들은 많은 양의 덩이줄기 식물(tuber)을 채집하였으며 15,000년 경부터는 야생하는 곡식을 다량 채집하였다. 1만년 전 쯤에는 지중해 남부 연안과 아프리카 동부와 남부의 사바나 지역에서 아주 약간 다른 적응형태이지만 독특한 두 개의 채집수렵 문화가 발생했다. 그리고 열대우림 환경에 적응하려는 세 번째 문화가 중앙아프리카 열대우림 지역의 동부와 남부 가장자리 지역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아프리카의 주요한 세 개의 언어집단이 위의 12,000년 전 쯤 발현한 세 개의 문화와 연관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지중해 문화는 아프리카-아시아 어족(Afro-Asiatic language family)과 연관되어 있고, 동부와 남부의 사바나 문화는 코이산('찰칵'[click]이라는 의미) 어족(Khoisan language family)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열대우림 문화는 니제르-콩고 어족(Niger-Congo family)과 연결되어 있다. 네 번째 주요 언어집단인 나일-사하라 어족(Nilo-Saharan)은 아마도 사하라 사막에 지금보다 강우량이 훨씬 많았을 무렵인 4,000년에서 7,500년 전, 사하라 사막의 중부, 중남부, 그리고 남동부에서 번성했던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은 또 다른 문화와 연관될 수 있다.

20세기 초, 학자들은 현재 카메룬에서 케냐까지 광활하고 넓은 동부 지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남쪽까지 걸쳐 살고있던 부족들의 언어와 문화에 주목할만한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부족들의 언어에는 모두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은투(ntu)라는 접미어, 또는 이와 비슷한 단어가 들어 있었다. 이곳의 대부분의 언어에서 바(ba)라는 접두어는 복수를 지칭했으므로 '반투(ba-ntu)'라는 단어는 '사람들'을 뜻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농사법, 그리고 가축재배법의 근원과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아프리카의 넓은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는지가 20세기 중반의 중요한 의문이었다.

언어학과 인류학, 그리고 식물의 기원 연구에 근거한 한 가지 그럴듯한 이론이 추론적이긴 하지만 답이 되었다. 이 설명에 의하면, 3천여년 전 서부아프리카 사바나의 베누에(Benue)강 연안에 같은 혈통의 연장자들에 의해 지배를 받던 상당히 대규모 집단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통나무 커누와 그물, 낚시바늘, 덫, 작살 등의 도구를 갖고 어업을 발전시켰다. 얌(yam)과 기름야자를 재배하고 염소를 기르며 반투어를 사용한 이 부족은 당시 중앙아프리카의 열대우림 지역 남쪽에 살던 소규모의 경작민들보다 가뭄이나 다른 재해가 발생했을 때 월등히 생존이 유리한 사람들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습득한 토기 굽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이 반투어 사용자들은 철을 녹여 창, 화살, 괭이, 삽, 도끼 등을 2,500여년 전에 만들었다. 점진적인 사막화로 인해 사하라 사막의 농부들이 남하하여 기원전 2세기경부터 초기 반투어 공동체들은 현재는 나이지리아와 카메룬이 된 베누에-크로스(Benue-Cross)강의 발상지로부터 중앙아프리카 서부의 거대한 적도 산림 지대로 서서히 밀고 들어갔다. 다음세기가 되자  반투 개척자들은 숲 가장자리까지 도달했고 그 너머에 있는 광활한 사바나 초원으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베누에(Benue)강 유역의 인구가 팽창하게 되자 이 반투어족 어민들은 남동쪽으로 이주해갔다. 콩고(Congo)강 연안에 도착한 후 이들은 잠베지(Zambezi)강을 따라 중앙아프리카로 퍼졌고, 서기 5세기경에는 초기 철기 시대의 반투어 사용 촌락들이 아프리카의 숨은 땅이었던 남쪽으로 퍼졌다. 기원전 6세기에는 "우레웨(Urewe) 도기"로 불리는 도기 유형과 관련 있는 철기 제작자들이 동부 아프리카의 대호수지역(동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호수 주변 지역으로 들어왔다.  

반투어 사용자들은 그들이 만난 코이산 언어 사용자들과 결혼하거나 정복하거나 쫓아내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점차 이주했고, 그러면서 아시아 얌과 바나나 재배법을 배웠다. 이러한 식물의 재배법은 약 1,800년 전 마다가스카르 섬을 지배한 말레이-폴리네시아(Malayo-Polynesian)족 선원들로부터 동아프리카로 전파된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반투어 사용자들은 이주하여 대규모로 소를 기르기도 했다. 1,000년 전 쯤에는 대부분의 중앙아프리카와 남부아프리카의 주민은 철기를 사용했고, 반투어를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수렵과 채집으로만 삶을 영위하던 가난한 원주민들을 실제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반투 확장은 일반적으로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언어는 물론 다양한 사회 경제적 제도의 보급과 동화를 포함하여 보다 미묘한 문화적 침입과 통합이었다. 이러한 반투 "이민"의 주요한 두 가지 특징을 여기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첫째,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이동은 매우 느리고 매우 짧은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확실히 큰 무리의 유목민들이 하나의 이동 흐름 속에서 함께 이동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소규모 친족 집단이나 동료 무리가 특정한 이동을 하곤 한다.

강조해야 할 두 번째 특징은 반투어 사용자와 아대륙에 거주하는 다른 아프리카 민족들 사이에 상당한 상호작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대부분은 아마 평화로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몰살보다는 동화가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은 양 방향으로 흘렀다. 반투어 사용자들이 일반적으로 우세했지만, 산(San)어 사용 사냥꾼의 독특한 클릭 소리가 반투어에 여럿 포함된 남부 아프리카에서도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반투어 사용자들이 새로운 정치 경제 및 기술 관념을 어느 정도 비 반투어 사용자들에게 소개하였지만, 그 반대 현상도 발생했다.

같은 방식으로 많은 반투어 사용 사회들은 다양한 이웃의 부계 혈족제도를 받아들였고, 동부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서는 쿠시트(Cushitic)어와 나일제어 사용자들의 연령 계급 제도에 기반을 둔 정치 조직을 받아들였다. 이주하는 동안 반투어 사용자들은 새로운 지역, 새로운 관념, 새로운 상황에 부드럽게 적응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뛰어난 적응성은 현재 발견되는 반투 아프리카의 여러 사회에서 삼림 경작자로부터 곡물 생산 제국 창립자까지, 그리고 정치적으로 탈중심화한 목축업자까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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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 아프리카 역사 I ] - 서론</font>

2003. 9. 25. 19:22
1. 서론

오늘날 벌어지는 아프리카의 많은 갈등과 문제들은 유럽의 식민통치체제와 맞물린 경제, 환경, 정치, 사회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식민주의가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과 마찬가지로, 식민통치 이전 수천년에 걸쳐 쌓인 아프리카 역사의 일정한 양식과 정체성이 아프리카의 식민지 경험에도 영향을 미쳤고 식민지 이후의 아프리카를 형성하는 데에도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이 대륙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는 동시에 아프리카인들이 역사적 도전에 처했을 때마다 반응했던 고도의 적응성과 역동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프리카인들은 자기 고유의 역사를 창조했고 또 지금도 창조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들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이 문자를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오랫동안 식민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프리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아프리카인들이 그들 나름의 역사·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아프리카인들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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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힐리 문명 : 해안 무역

2002. 4. 2. 21:03
스와힐리 문명 : 해안 무역

무역풍
인도양의 기후는 아프리카와 근동(Near East) 사이의 무역 패턴을 결정지었다. 근동으로부터 온 무역업자들은 11월과 2월 사이 서부로 부는 바람이 불 때 아프리카 동부 해안으로 항해할 수 있었다.  3월과 4월 사이에는 바람의세기는 약하지만 상업을 할 기회로는 이용되었다.  4월까지 그 바람은 동부해안에 불었고 무역업자들은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수입품들과 수출품
이슬람의 도래 이전 아프리카 동부 해안 교역의 패턴에 대한 정보를 거의 없다.  가장 초기에 쓰여진 자료들 중에는 여행가들을 위한 안내서인 페리플러스(Periplus)였다.  페리플러스에는 상아, 코뿔소 뿔, 거북이 껍질 그리고 코코아 기름 등이 주요 거래 상품으로 기술되어 있다.
상아는 아주 선호된 상품이었다.  상아는 강하고 쉽게 조각이 되며 기능적으로나 장식용으로도 훌륭하였다. BC 322년에 알렉산드 대왕이 사망하고 그의 제국이 세 개로 분할된 후 아프리카로부터 상아의 수입은 증가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인도와의 무역 때문이었으며 이로 인해 높은 관세가 부과되기도 했다.
홍해의 아프리카 해안(북동부)은 상아의 배달과 탁송을 위한 구역이었다.  남부아프리카로부터 온 금은 근동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주로 선호하였다.  AD 3세기로 거슬로 올라가 북아프리카와 페르시아에서 온 화폐들은 잔지바르와 탄자니아 북부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중동과 아프리카 사이에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동아프리카의 무역 루트는 북부로 이어졌는데 예를 들면 악슘(Aksum) 제국 사람들은 금을 위해 동부 해안 사람들과 무역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6세기경 그리스 상인 코스마스(Cosmas)에 의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소와 소금 덩어리 그리고 철 등을 가지고 갔으며 그들이 인근에 도착하면 한 지점에 머물며 캠프를 설치하고 주위에는 가시로 된 큰 울타리를 주위에 쳐서 울타리를 만든다.
그들이 이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소를 도살하여 그것을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 가시 울타리 위에 올려놓는다.
수를 놓은 실크와 푸른 면직과 같은 값비싼 수입 면직물들 중에는 아주 비싼 값이 매겨지기도 한다.  푸른색으로 염색한 직물들은 동아프리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 색깔은 특별한 힘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동아프리카에서는 푸른색이 선호되지 않았으며 주로 흰 색 옷감이 선호되었다.

노예
19세기에 동부 해안의 술탄들은 그들 스스로 노예들을 사고 팔고 하여 대단한 부를 축적하였다.  여기에는 포르투갈에 대항한 프랑스와 함께 사업을 했다.
1834년부터 포르투갈인들은 대서양 노예무역이 영국에 의해 중단하게 된 후 노예 매매에 아주 예민해 졌다.
포르투갈인들이 사업을 하는 주요 거래자들 중의 하나는 스와힐리 여행가들과 티푸 팁(Tippu Tip) 무역상들이었다.  그들은 동부 해안 지역에서 노예무역을 통해 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노예를 포획하기 위해 내륙으로 들어가 장기적이고 위험스럽지만 노예들을 잡아 해안에서 노예들을 팔았다.  이들은 노예 사업에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다.  잔지바르 노예 시장은 1873년에 폐쇄되었다.
(BBC on line)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아프리카 역사 : 스와힐리

2002. 4. 2. 21:01
아프리카 역사 : 스와힐리
스와힐리는 역사적으로 동부 해안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으로 북으로는 소말리아의 모가디슈(Mogadishu)에서 남으로는 모잠비크의 루부마(Rovuma) 강에 이르기 까지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그들은 스와힐리인들이 아닌 사람들도 널리 사용하고 있는 '스와힐리어'(Kiswahili)를 구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아프리카 원주민과 아랍문화가 혼합된 도시에 기반을 두고 거주하고 있다.

동아프리카 해안과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그리고 심지어는 중국과의 접촉은 8세기 이슬람이 전파되기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이 지역을 아자니아(Azania)라 불렀다.  아랍인들은 잔즈(Zanj)라 불렀다.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해안가의 아프리카인들은 중앙 내륙에 있는 아프리카 사회보다는 아랍인들과 페르시아만인들과 보다 밀접하게 관계했다.
이 해안 국가들은 오랜 동안 어떠한 외세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쟁을 할 때 코끼리의 상아, 뼈 그리고 야생 소의 뿔을 창으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갑옷과 활 그리고 화살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수많은 보병들을 가지고 있었다.  아랍인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침입하였다.

동부아프리카 해안은 2천년이 넘는 동안 여러 가지 상품들을 교환하는 오랜 동안 무역을 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아프리카 여성과 아랍 남자들과의 결혼은 풍부한 스와힐리 문명을 만들었으며 도시와 농경 사회의 혼합이 이루어졌고 풍부한 건축물, 직물 그리고 음식 뿐만 아니라 상품에 대한 구매력도 증가하였다.

스와힐리 초기 거주자들

아랍인 지배의 신화
아주 최근까지 동아프리카 해안의 역사는 무슬림-아랍 점령의 한 부분으로 기술되었는데 이는 주로 유럽인들과 아랍인들에 의해 쓰여졌다.  아랍인들의 동아프리카 해안 통치에는 아프리카인들도 포함되는데 그들은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영국 작가들은 그들의 문화에 대해 '반 카스트' 혹은 '잡종'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경멸하였다.
그러나 구전과 고고학적 증거들은 스와힐리 사회가 역동적이고 논리적이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아프리카 내륙인들과 아랍과 페르시아인들과의 관계는 상호 의존적이고 호혜적이었다.  그러므로 동아프리카 해안에 아랍인 '출현'과 아프리카 사회 '접수' 라는 말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초기 선원 이야기 : 페리플러스(Periplus)
동아프리카 해안에 대한 가장 초기의 서술은 AD 2세기에 쓰여졌다.  그것은 선원들의 가이드를 위해 쓰여진 것으로 그리스 상인들에 의해 AD 100년 경에 알렉산드리아(현재의 이집트)에서 아마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에리트리안 해(Erythraean Sea)의 페리플러스라 불렀는데 그 당시의 동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형성된 루터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의 성격은 해안 종족들에 대해 존경함을 불러일으키게 해 준다.
섬에서 육지로 행하는 이틀 동안의 항해는 그 종족들이 사용하는 작은 보트를 이용하는데 그들은 라프타(Rhapta)라 불리는 시장으로 행한다.  그곳에는 많은 상아와 거북이 껍질 등이 있다.  
페리플러스에서 언급된 해안의 주요 도시는 라프타로 잔지바르와 다레살렘 근체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 라무 섬 근처에 존재했을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북아프리카와 페르시아에서 온 화폐들은 AD 3세기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잔지바르와 탄지니아 북부에서 발견되었다.  이 화폐는 중동 세계와 아프리카와 무역이 이미 시작했다는 것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다.

해안 정착
스와힐리에 대한 구전 역사들은 아라비아반도나 페르시안 만으로부터 이슬람의 전파와 함께 시작되는 경향이 있다.  현재의 남부 소말리아에 있는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이슬람 사원이 라무(Lamu) 근처에 세워졌다.  아랍인들의 아프리카 해안 사회로의 동화는 대개 마찰 없이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인과 접촉
첫 번째 동아프리카 해안에 온 이슬람인들은 페르시아의 시라지스(Shirazis)로 알려진 시라즈(Shiraz)로부터 왔다.  그 당시 페르시아 시라지의 알리 빈 셀리마니(Ali bin Selimani) 술탄이 왔다.  그는 그의 배로 상품들과 그의 아이들을 데리고 동아프리카 해안에 왔다.  그 아이들 중 파티마(Fatima)라는 술탄의 딸이 있었다.  그 이외의 아이들 이름은 전해져오지 않고 있다.
그들은 킬와(Kilwa)에 상륙하였고 그들은 이 나라의 추장인 엘드 음림바(Elder Mrimba)로 가서는 키시와니(Kisiwani)에 거주할 장소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가지 상품들과 유리구슬 등을 음림바에게 주었다.  술탄 알리는 음림바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그곳 주민들과 즐겁게 살았다.
(BBC on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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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 역사 : 스와힐리 문명

2002. 4. 1. 09:42

스와힐리는 역사적으로 동부 해안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으로 북으로는 소말리아의 모가디슈(Mogadishu)에서 남으로는 모잠비크의 루부마(Rovuma) 강에 이르기 까지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그들은 스와힐리인들이 아닌 사람들도 널리 사용하고 있는 '스와힐리어'(Kiswahili)를 구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아프리카 원주민과 아랍문화가 혼합된 도시에 기반을 두고 거주하고 있다.

동아프리카 해안과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그리고 심지어는 중국과의 접촉은 8세기 이슬람이 전파되기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이 지역을 아자니아(Azania)라 불렀다.  아랍인들은 잔즈(Zanj)라 불렀다.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해안가의 아프리카인들은 중앙 내륙에 있는 아프리카 사회보다는 아랍인들과 페르시아만인들과 보다 밀접하게 관계했다.
이 해안 국가들은 오랜 동안 어떠한 외세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쟁을 할 때 코끼리의 상아, 뼈 그리고 야생 소의 뿔을 창으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갑옷과 활 그리고 화살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수많은 보병들을 가지고 있었다.  아랍인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침입하였다.

동부아프리카 해안은 2천년이 넘는 동안 여러 가지 상품들을 교환하는 오랜 동안 무역을 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아프리카 여성과 아랍 남자들과의 결혼은 풍부한 스와힐리 문명을 만들었으며 도시와 농경 사회의 혼합이 이루어졌고 풍부한 건축물, 직물 그리고 음식 뿐만 아니라 상품에 대한 구매력도 증가하였다.

스와힐리 초기 거주자들

아랍인 지배의 신화
아주 최근까지 동아프리카 해안의 역사는 무슬림-아랍 점령의 한 부분으로 기술되었는데 이는 주로 유럽인들과 아랍인들에 의해 쓰여졌다.  아랍인들의 동아프리카 해안 통치에는 아프리카인들도 포함되는데 그들은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영국 작가들은 그들의 문화에 대해 '반 카스트' 혹은 '잡종'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경멸하였다.
그러나 구전과 고고학적 증거들은 스와힐리 사회가 역동적이고 논리적이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아프리카 내륙인들과 아랍과 페르시아인들과의 관계는 상호 의존적이고 호혜적이었다.  그러므로 동아프리카 해안에 아랍인 '출현'과 아프리카 사회 '접수' 라는 말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초기 선원 이야기 : 페리플러스(Periplus)
동아프리카 해안에 대한 가장 초기의 서술은 AD 2세기에 쓰여졌다.  그것은 선원들의 가이드를 위해 쓰여진 것으로 그리스 상인들에 의해 AD 100년 경에 알렉산드리아(현재의 이집트)에서 아마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에리트리안 해(Erythraean Sea)의 페리플러스라 불렀는데 그 당시의 동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형성된 루터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의 성격은 해안 종족들에 대해 존경함을 불러일으키게 해 준다.
섬에서 육지로 행하는 이틀 동안의 항해는 그 종족들이 사용하는 작은 보트를 이용하는데 그들은 라프타(Rhapta)라 불리는 시장으로 행한다.  그곳에는 많은 상아와 거북이 껍질 등이 있다.  
페리플러스에서 언급된 해안의 주요 도시는 라프타로 잔지바르와 다레살렘 근체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 라무 섬 근처에 존재했을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북아프리카와 페르시아에서 온 화폐들은 AD 3세기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잔지바르와 탄지니아 북부에서 발견되었다.  이 화폐는 중동 세계와 아프리카와 무역이 이미 시작했다는 것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다.

해안 정착
스와힐리에 대한 구전 역사들은 아라비아반도나 페르시안 만으로부터 이슬람의 전파와 함께 시작되는 경향이 있다.  현재의 남부 소말리아에 있는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이슬람 사원이 라무(Lamu) 근처에 세워졌다.  아랍인들의 아프리카 해안 사회로의 동화는 대개 마찰 없이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인과 접촉
첫 번째 동아프리카 해안에 온 이슬람인들은 페르시아의 시라지스(Shirazis)로 알려진 시라즈(Shiraz)로부터 왔다.  그 당시 페르시아 시라지의 알리 빈 셀리마니(Ali bin Selimani) 술탄이 왔다.  그는 그의 배로 상품들과 그의 아이들을 데리고 동아프리카 해안에 왔다.  그 아이들 중 파티마(Fatima)라는 술탄의 딸이 있었다.  그 이외의 아이들 이름은 전해져오지 않고 있다.
그들은 킬와(Kilwa)에 상륙하였고 그들은 이 나라의 추장인 엘드 음림바(Elder Mrimba)로 가서는 키시와니(Kisiwani)에 거주할 장소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가지 상품들과 유리구슬 등을 음림바에게 주었다.  술탄 알리는 음림바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그곳 주민들과 즐겁게 살았다.
(BBC on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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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인류 연대기

2002. 3. 29. 15:13

초기 인류 연대기

BC 5-3 천만년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혹은 유인원이라고 알려진 최초 직립보행 인간 동부와 남부아프카에 거주.

BC 3-1.5 천만년  - 초기석기시대
                     돌을 깨뜨려 ‘연장을 사용한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이 출현.

BC 1.75-1천만년  - 손도끼와 돌을 갈아 이용한 호모 에릭투스(Homo erectus)의 진화.

BC 1백만년 -     - 중기 석기시대
  40,000년         현대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초기 형태 진화.  이들은 돌을 갈아 화살촉으로 이용하였다.

BC 40,000 -     - 후기 석기시대
  10,000년          호모사피엔스의 등장.
                        활과 화살의 개발.
                        암벽화의 증거
                       사냥과 채집생활

BC 9,000-3,000  - 이 당시 사하라 사막은 사바나 기후로 초지와 강들이 있었다.
                         아프리카 석기시대 사회에서 점토를 구워 항아리를 만들었다.
                        농업과 가축을 사육하기 시작.

BC 500        - 나이지리아와 니제르 중부지역에서 쇠를 녹이는 기술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이 기술은 AD 1,000년까지 나머지 서부아프리카 전 지역으로 퍼짐.

AD 200 - 500  - 반투족들이 동부와 남부로 이주.  이를 ‘반투족의 대이주’라고 함.

1925           - 남아공의 타웅(Taung) 근처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유골 발견.

1960년대     - 탄지나와의 오두바이 조지(Olduvai Gorge)와 케냐의 투르카나(Turkana) 호수에서 호모하빌리스 유골 발견.

1974          - 이디오피아의 오모(Omo)계곡에서 절반의 ‘루시'(Lucy)의 유골 발견.

1975         - 이디오피아의 하다르(Hadar)에서 13개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유물을 발견.
                  또한 투르카나 호수에서 호모에릭투스 유골 발견.

1976          - 탄자니아 라에톨리(Laetoli)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발자국 발견.

1997         - 남아공의 스트럭폰테인(Sterkfontein)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유골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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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 이주하는 인간들

2002. 3. 27. 22:01

쇠를 녹이는 기술을 지니고 무기를 만든 서부와 중부아프리카 반투인들은 아프리카 전 대륙으로 퍼져 나감으로써 아프리카 대륙에서 언어와 문화 영역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이론들이 이 이주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이주의 필요성
인간들이 이주를 한 것은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인구가 증가하여 팽창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착민들의 증가하는 인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자원들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후의 변화에 의해 또한 이주하였으며 살기에 보다 좋은 지역을 찾기 위해 이주를 하였다.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이주의 물결을 발생시킨 이론 중의 하나는 아프리카 동부를 통한 이주와 아프리카대륙 중앙을 가로지르는 이주가 있었다.  잠비아에서는 이주의 세 가지 루터의 증거가 있는데 대호수(great lake)로부터, 콩고 삼림지역으로부터 그리고 앙골라로부터의 이주가 그것이다.
현대 스와힐리(swahili) 종족들의 반투 조상들은 항해를 하는 기술을 갖추고 카누와 보트를 소유함으로써 그들은 잠베지 강(Zambezi river)을 따라 그들의 이주를 할 수 있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 이주를 위한 이유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적 압박과 인구 증가였다.  이들 종족들은 농사를 짓기에 그리고 가축을 기르기에 적당한 지역으로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그들의 거주지를 이주하였다.

정복, 식민지화 혹은 모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와 같은 이주들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움직이는 산발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우연히 기존의 공동체와 마주쳤을 때 반투족들이 어떻게 반응을 보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주 기간동안 다른 종족들과의 동화, 적응 그리고 또 다른 곳으로의 이동의 반응을 보였을 것으로 보인다.  반투족들은 우월한 무기로 무장하였고 그들의 철기 도구는 땅을 경작할 수 있었고 효율적으로 숲을 개간하기도 하였다.
역사가들은 사회적 상호작용과 부족간의 결혼 그리고 무역 등이 이루어 졌을 것으로 믿고 있다.

이주의 증거
이주에 대한 증거는 다음의 주요 세 가지 연구 영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언어(Linguistic)
쓰여진 언어에 대한 비교연구의 결과 동부, 중부 그리고 남부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서는 서부아프리카에서 원래 쓰여진 모국어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북부의 기쿠유(Gikuyu)에서 남부의 세츠와나(Setswana)에 이르는 반투군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약 450여개로 알려지고 있다.

도기(Pottery)
동부, 남부 그리고 서부아프리카에서는 유사한 도기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유산한 도기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철기시대 농부들은 항아리를 만드는 솜씨 있는 기술자들이 있었고 또한 그 항아리에 홈을 파고 무늬를 장식하는 기술도 있었다.  반투족들 그룹은 유사한 장식 스타일들을 사용하였다.

철(Iron)
반투족들이 도래하기 이전에 동부와 남부아프리카에 철제기구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거나 전혀 없으며 이주민들에 의해 새로운 철기기술이 전파된 것으로 보여진다.  반투족들은 그들의 새로운 환경에 아주 성공적인 적응을 보인 것으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생존 방법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발견하고 있는 독립국가 시스템의 발견도 가져왔다.
일부 지역에서 그들은 정부의 개념, 백성들을 통치하고 지도력을 발전시키는 지도자도 있었으며 전쟁을 위한 조직들도 있었다. 또한 일종의 진보된 종교형태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기 아프리카 역사와 마찬가지로 반투 이주를 논할때 주의해야 해야할 것도 있다.  
(BBC on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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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 철기 기술과 도구들 - 반투족들의 확산

2002. 3. 25. 11:34

고고학자들의 자료들에 따르면 15세기 이전까지 아프리카에서 철기 산업에 요구된 인간들의 기술들은 중앙아프리카 동부 그리고 서부아프리카로 퍼져갔다.

이와 같은 기술들에 대한 습득과 전파 그리고 어떻게 기술들이 발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반투족 이주' 라고 알려진 아프리카 대륙을 가로지르는 대규모 이동과 연관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아프리카 과거의 이야기들은 종종 무시되어지기도 하나 아프리카 대륙의 미래 발전을 위한 그것의 의미들은 매우 중요하다.

'반투'라는 말은 서부 혹은 중앙아프리카에 기반을 둔 아프리카 토착 종족들을 가르키는 일종의 묘사로써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이들은 3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지역에 이주하여 인구를 분포시켰다.

어떻게 반투족들이 철기 기구들의 제작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기원전 500년경까지 이집트 메로에(Meroe)의 쿠쉬트 왕국(Kushite Kingdom)의 쇠를 녹이는 기술은 서부나 남부 아프리카에 전파되지 못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 철기 제작의 지식은 아마도 기원전 800년경 북아프리카에 카르타고(Carthage) 식민지를 건설한 포에니(Phoenicians)들로부터 전수 받았을 것이다.  즉 그 기술들은 북아프리카 평원지대에 거주하였던 베르베르(Berber) 종족들로부터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는 교역에 의해 전파되었다.

또한 쇠를 녹이는 기술은 외부의 영향 없이 아프리카 대륙 자체 내에서 발전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하는 정확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쇠를 녹이는 기술은 나이지리아, 중부 니제르 그리고 서부의 말리에서 기원전 500-400년경에 시작되어 AD 1천경에는 나머지 서부 아프리카 전역에 전파되었다.

철을 녹이는 것은 바위로부터 철을 추출하는 것이 화학반응과 연관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과정이다.  철광석과 무연탄을 용광로에 넣고 여기 석회석을 첨가한다.  여러 시간을 가열한 후 쇠를 용광로로부터 분리하여 이것으로 무기를 만든다.

쇠는 적도 아프리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쇠가 쉽게 녹이 슬기 때문에 오늘날 선사시대에 사용한 남아있는 도구들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반투족들은 쇠로 만든 무기들로 무장하여 아프리카 전역에 퍼져나갈 수 있었다.
(BBC on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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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아프리카인들의 생활

2002. 3. 23. 11:06

사냥에서 농경으로
현생인류의 직접 조상중의 하나인 호모 에릭투스(Homo erectus)는 50만년에서 1백50만년전 사이에 살았으며 이들은 공동체 사회를 형성하여 사냥활동을 한 최초의 인간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물을 얻을 수 있는 강가나 호숫가에 거주하였다.
아프리카의 가장 중요한 지형적 유적지 중 한 곳은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조오지(Olduvai Gorge)로 거주지 형태로는 나무 가지 등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초기 생활
그 거주지의 크기는 소규모 가족들이 살아갈 수 있는 만큼이었으며 각 가족들은 그 자신의 거주 단위를 형성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사냥을 위해 밖으로 나갔으며 여자들은 나무뿌리, 과일 땅콩류 그리고 곤충 등 야채나 식량들을 채집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특히 여성들의 채집은 식량의 주요 구성 요소들이었다.  소년들은 사냥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여자들은 채집하는 방법들을 배웠다.
이들 초기 정착민들의 생활 방식들을 볼 수 있는 많은 증거들은 여전히 남아 있는 사냥의 요소들과 채집의 생활방식을 볼 수 있는 보츠와나의 코이산(Khoisan 일명 부쉬맨)과 같은 공동체사회에서 배울 수 있다.
사냥을 할 때 초기 인간들은 설치류와 같은 작은 동물들을 찾아 사냥을 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들은 사냥을 위해 집단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기린, 얼룩말 혹은 코끼리 등과 같은 큰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피했다.  대신 이들 큰 동물은 다른 동물이 사냥을 하거나 혹은 자연사했을 경우 식량으로 이용하였다.
석기 시대 중반과 말기(약 15만에서 4만년전) 인간들은 돌을 갈아 화살촉을 만들어 활과 화살을 발전시키는 등 보다 정교한 도구들을 개발하였다.  창들은 식물성 독을 묻혀 사용하였다.  그들은 또한 바늘이나 낚시 바늘로써 동물의 뼈들을 이용하는 등 광범위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농경의 도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약 1만년 전부터 인간들은 혁명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단계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가축을 사육하고 농경을 하여 곡식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들은 점진적이고 오랜 시일이 걸렸다.

조직사회와 식량자원
오랜 사냥과 채집생활 이후 이들 인간들은 일부의 동물들과 약간의 식물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다.  그들은 오늘날의 소의 조상인 일부 동물들을 발견하였는데 이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 보다 인간에게 친근감이 있었고 가정에서 그것들을 기를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식물들을 가지고도 실험하였는데 일부는 성공을 하였고 일부는 실패로 끝나기도 했다.
동물과 가축들을 기르게 되자 그들은 충분한 식량을 가지게 되었고 사회들은 보다 안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가졌다.  남자와 여자,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많은 시간을 함께 가질 수 있었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형성되자 보다 체계적인 사회계층과 전문화가 형성되었다.  사람들은 다른 분야에서 기술자나 공예가 등 전문 기술을 가지고 각 자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거래를 증가시키고 시장이 출현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보다 발달된 주요 곡식들은 밀, 보리, 수수 그리고 옥수수 등과 같은 알곡 식량들이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그들 자신들만의 독특한 곡물들을 생산하였는데, 예를 들면 이디오피아 고원지대에서는 '테프'(tef)라는 주요 산물을 생산하였는데 오늘날에도 스펀지 모양의 전통 빵인 '인제라'(injera)을 만드는데 사용되고 있다.
양과 염소와 같은 가축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곡식의 씨를 뿌리고 수확을 가능하게 해주는 식물의 재배는 초기 인간들이 오랜 기간동안 한 지역에서 정착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정착자들이 진흙이나 벽돌을 이용하여 영구적인 정착지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밖에 그와 같은 공동체는 곡식들을 갈기 위한 돌들과 저장을 위한 항아리 등과 같은 도구들을 필요로 함을 의미했다.
잉여 식량은 사냥이나 채집생활을 하는 공동체 사회와 거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옥수수는 야생 꿀의 공급을 위해 거래되었다.

예술
정착사회는 인간들이 예술과 공예 등을 통해 그들 자신들의 표현을 진착시키게 만들었다.  모든 대륙들 중 아프리카는 바위 예술에 가장 풍부한 대륙 중 하나 이다.  사하라 사막과 탄자니아 그리고 남아공에는 식물성 염료로 장식한 동굴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와 같은 예술은 그 당시 인간들의 사냥과 낚시 등의 작업상들 뿐만 아니라 놀이, 춤 그리고 사회생활 등 그들의 삶 속에 독특하게 녹아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바위 예술 속에 숨어 있는 다양한 경관 묘사는 선사시대의 그 당시 생활상의 기록 영화 필름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아프리카 예술은 아프리카 남자들이 자연을 지배하기 위한 가혹한 투쟁 뿐만 아니라 창조의 즐거움을 통해 그 자신의 본성을 덧붙이는 작업으로서 동굴의 바위 등에 그림을 그려 자신의 표현을 반영하는 것이다.
(BBC, Africa)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호모사피언스 : 아웃 오브 아프리카

2002. 3. 21. 08:18

현생인류 중 가 가장 진보했던 호모 사피언스(Homo sapiens: 지혜로운 인간)는 약 12만년 전에 나타나 전 지구에 급속한 속도로 확산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호모 사피언스가 전 대륙으로 퍼져나갔는가?
일반적으로 호모 사피언스의 조상이었던 호모 에릭투스(Homo erectus: 직립했던 인간)는 1백50만년전에 아프리카를 떠나 다른 대륙에 인구를 퍼뜨렸다. 여기에는 호모 사피엔스의 전파에 관한 두 가지 주요 이론들이 있다.

그 첫 번째 이론은 ‘아프리카로부터의 인류 전파’ 모델로 알려지고 있는데 호모 사피엔스는 처음에 아프리카에서 발전하였고 그런 후 10만년에서 20만년 전 사이에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의미는 모든 현대 인류들이 궁극적으로 아프리카인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이론은 ‘다 지역(Multi-regional)' 모델로 이 이론은 호모 사피엔스들이 세계 각 지역에 있던 호모 에릭투스들로부터 진화하여 전 세계에 동시에 퍼져 나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의 조상은 그곳에 있던 호모 에릭투스들이며 호주의 조상들은 동남아시아에 있던 호모 에릭투스들이라는 것이다.

양 이론들은 인류화석에 대한 DNA 조사를 통해 조상들을 거슬러 올라가 찾아내는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들면 ‘아프리카 기원설’의 경우 대부분의 지금까지 발견된 화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인류의 태생은 아프리카라는 주장이다.

비록 이 논쟁이 아직 결론이 나지는 않았지만 아마 인류의 기원이 아프리카에 두고 있다는 가설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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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역사의 10대 위인

2001. 11. 20. 14:45
쿠푸 - 이집트의 파라오(재위 BC 2589?~ BC 2566)
세계 최대의 불가사의인 대(大) 피라미드(the Great Pyramid)를 BC 2560년에 건축한 것을 알려진 이집트의 왕이다. 그 피라미드는 자신의 무덤으로 기제에 밑변 230 m, 높이 146.5 m 정도로 그 규모면에서 세게 최대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10만 명의 노동자가 3개월간 교대로 일을 하는 작업의 반복을 20년간 걸려서 함으로써 피라미드를 건조하였다고 했고, F. 페트리는 2.5 톤의 거대한 돌이 이 피라미드에 총 230만 개 정도가 쌓여있다는 발표를 하였다. 그 속에 있던 고대 이집트의 유뮬둘운 현재 모두 독ㄹ 당했고, 1954년 피라미드 근처에서 '태양의 배'가 2척 발견되어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일화에 댛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시바 - 에티오피아의 여왕
BC 1000년에 솔로몬 왕을 방문했던 에티오피아의 부유한 왕국의 여왕. 아라비아ㅘ 남서부 예멘과 말라위에 살고 있던 시바족의 여왕으로, 그녀는 금옥과 향로등 예술살렘의 특산물을 선물로 준비하여 솔로몬을 방문하였다고 하고, 이 방문은 통상상의 교섭의 성격을 띠고 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슬람 성전인 '코란'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빌키스(Bilzus)라고 기록하고 있고, 소로몬의 지혜와 영화를 확인한 후 많은 선물을 남기고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솔로모의 아들 메넬리크(Menelik)를 낳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아들이 성장한 후에 유대인을 이끌고 에티오피아를 건설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물론 역사적인 근거는 없다.

클레오파트라 7세 - 이집트의 여왕
BC 47년경 줄리어스 시저와 마크 안토니와의 관계로 유명한 이집트의 여왕이다.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이 이집트에서 애용하는 여성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둘째 딸로 태어나서, BC 51년 이후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공동통치하였다. 왕위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으나, BC 48년경 이집트에 온 G. J. 카이사르를 이용하여 복위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사후에는 막내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하여 공동통치를 하였고, 카이사르와 사이에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를 얻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를 따라서 잠시 로마에 간적도 있었지만, 그가 암살된 후에는 이집트로 돌아왔다. 그녀는 뛰어난 자태와 용모, 그리고 수 개 국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등 뛰어난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등의 영웅을 자유자재로 조종하여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왕국을 굳건히 지킨 여왕이었다. 그리고,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등 등의 문학 작품에서 등장하는 등 현대에도 매우 유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모노모타파 - 베나메타파의 왕
중세 아프리카 제국 최고의 왕이자 AD 1200년 대(大) 짐바브웨의 통치자

만사 칸칸 무사 - 말리의 황제
수단 군주 중 가장 유명한 인물. 그는 자신의 재임 기간을 "약 1년"이라고 선언하였다. 말리는 당대 세계 최대의 국가 중 하나였다.

하일레 셀라시 - 에티오피아의 황제
아프리카 최초의 독립 민주국을 영도했던 황제(1930-1974). 아프리카단결기구(OAU)의 초대 회장이다. 그의 본명은 라스타파리 마콘넨으로 솔로몬과 시바여왕의 마콘넨가의 자손이다. 24세 때, 당시의 왕이 이슬람교도로 개종하자 반대파 그리스도교도드을 규합하여 정권을 잡았다.그리고, 후에 메넬리크 2세의 딸 자우디츠 여왕이 죽은 뒤에 황제에 올랐다.

알버트 루툴리 - 아프리카민족회의 총재
1960년에 아프리카 대륙출신으로는 최초로 노벨상(평화상)을 수상한 인물. 그는 남아공의 더반 근교에서 태어났다 1952년부터 60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프리카 민족회의 의장을 지낸 그는. 젊은 시절에는 교사를 했었다. 하지만, 남아공의 현실과 흑인 인권 문제에 관해서 심각한 인식을 한 후에 아프리카 민족회의에 참여하는 등의 활발한 운동을 통해서 아프리카 흑인들의 인권을 되찾는데, 생애를 바쳤다. 1961년 12월에는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잠시 부인과 함께 그루트빌을 떠날 수 있었다. 그는 수상연설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인종주의를 거부하고 비폭력 노선을 지켜온 남아프리카 민중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한편, 오랜 투쟁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유는 너무도 멀리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 1주일 후 '민족의 창(槍)'이라는 사보타지 집단이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산업시설 파괴에 돌입했고 드디어 비폭력주의는 포기되기에 이르렀다. 루툴리는 노벨상 수상 이후 다시 연금상태로 돌아왔고 존경받는 원로 정치인으로서 자서전을 구술하고 경찰당국이 허가하는 방문객만을 맞으며 한가로운 나날을 보냈다. 1967년 7월 21일 습관대로 농장 근처 철교를 지나다가 기차에 치어 사망했다.


크리스챤 바나드 박사 - 최초의 심장 이식수술
1967년에 최초의 인간 심장 이식수술을 집도한 외과 의사이다. 남아공의 케이프 타운에 소재한 흐루트 슈르 병원에서 실시된 이 수술은 의학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사건이었다.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 국제연합 사무총장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1992년 국제연합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이집트 태생으로 이집트의 부총리를 지냈다. 평화를 추구하는 인물로 유엔 사무총장으로서는 사상 두번째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이집트 출신의 거물 외교관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가 자신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간 '악연'을 적나라하게 공개하며 미국 외교정책의 문제점을 신랄히 비판한 회고록을 펴내기도 하였다. 제3세계 국가들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92년 1월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했던 갈리는 냉전종식후 '세계 유일의 슈퍼파워'에 등극한 미국에 밉보여 5년 임기 내내 갈등을 빚다가 결국 미국의 거부로 연임에 실패, 97년 1월 앙앙불락하며 물러난 인물. 당연히 미국에 대해 이빨을 가는 철저한 반미주의자이다.

넬슨 만델라 - 남아공 대통령
아프리카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인물 중 가장 유명하고 존경 받는 인물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다.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태어났고 템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포트헤어 대학교에 들어갔고,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격리정책) 반대 운동에 나서는 등 흑인 인권 신장을 위해 험난한 인생 여정을 겪어왔다. 때문에 그는 1990년 2월에 석방 되기 까지 27년간 감옥에서 보내기도 하는 등의 어려운 행로를 통해서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투쟁은 나의 인생 (The struggle is my life) 등등 자선전과 '자유에의 먼 도정(Long walk to freedom)'등 의 저서를 냈고, 남아공 최초의 민주선거(1994)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자 199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우리나라에는 1995년 7월에 방문하여 우의를 다지는 한편 경제협력을 약속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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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아프리카역사 7

2001. 10. 19. 13:59
7.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

이상에서 보아 왔듯이 식민지의 통치방식 차이에 따라 독립과정도 상당히 달랐으나, 어느 경우에도 독립운동은 결코 평탄한 것은 아니어서 요구·폭동·투옥·대립·항쟁 등의 과정을 겪었다.
먼저 1956년에는 수단, 튀니지, 모로코가 독립을 했으며, 57년에는 검은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골드코스트가 독립하여 가나가 되었다. 계속해서 58년 기니가 독립했고, 60년에는 1월에 카메룬, 4월에 토고, 6월에 콩고(레오폴드빌, 현 자이르), 세네갈, 말리, 마다가스카르, 7월에 소말리아, 8월에 코트디부아르, 다호메(현 베냉), 어퍼볼타(현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중앙아프리카, 콩고(브라자빌), 가봉, 챠드, 10월에 나이지리아, 11월에 모리타니 등 모두 17개국이 차례로 독립하여 이른바 '아프리카 독립의 해'가 되었다. 이어서 61년에는 시에라리온, 탕가니카(현 탄자니아), 62년에는 르완다, 부룬디, 알제리, 우간다, 63년에는 케냐, 64년에는 니아살랜드(현 말라위), 북로데지아(현 잠비아)가 속속 독립을 이룩하고, 1970년 중반 이후는 전 포르쿠갈 식민지 대부분이 독립하였다. 그리고 1980년 짐바브웨가, 1990년에는 나미비아가 남아공으로부터 독립을, 1993년 에리트리아가 이디오피아로부터 독립을 달성하고 1994년 남아공이 백인지배하에서 독립하는 등 약간의 나라를 남기고 아프리카 대륙의 거의 모든 나라가 독립했다.
이상을 살펴보면, 다음의 몇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영국 식민지의 경우, 비교적 초기부터 아프리카인을 정치에 참여시킴으로써, 독립후의 정치운영이 벨기에령에 비해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프랑스 식민지의 경우는 '동화정책'으로 프랑스와의 일체화가 이루어졌으며, 독립 후에도 영국 식민지에 비해 본국과의 유대가 보다 강했다(다만 기니는 분명히 그것을 거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광물자원이 풍부한 나라(자이르)나, 유럽인의 입식지(케냐) 같은 곳에서는 유럽인의 이권이 개입되어 있어서 다른 데에 비해 독립이 난항이었다.
특히 가장 비참했던 것은 아프리카인의 근대정치참가를 허용하지 않고 그들의 독립욕구에 대해 책임을 포기하는 형태로 사태를 내던진 벨기에령 콩고였다. 즉, 세계 유수의 구리·코발트 등의 광산자원을 가진 콩고에서 외국기업이 끝까지 이권을 유지하려고 획책한 사실이 독립후의 이 나라를 정치적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1960년 6월 독립 5일 후에 벨기에 사령관에 대해 군대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다시 7월에 구리산출지인 카탕가주(현샤바주)의 촘베가 이 주의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루뭄바 총리가 국제연합군의 출동을 요청하면서 콩고문제는 국제화되기까지 하였다.
영령 식민지가 일반적으로 경제적, 정치적인 면에서 더 발달되었는데도 불령식민지의 독립이 더 빨리 이루어진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는, 프랑스가 그들의 서아프리카 식민지를 완전히 분리된 정치단위로 보지 않고 단순한 그들의 해외영토로서 간주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 민족주의가 고조되어 갈 때도 불령식민지는 독자적인 아프리카 국가로의 독립 보다는 1958년 드골에 의해 제창된 프랑스 연방의 구성원으로 잔류를 택했다. 그러나 바로 그해 기니가 독립했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독립의 요구가 높아져 그후 2년 동안 다른 식민지들도 모두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의 독립국가들은 프랑스와 공동체를 그대로 유지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둘째, 영국은 권력을 이양할 때까지 독립을 위한 사전 준비 단계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반면에 프랑스는 그들의 아프리카 영토가 식민지라는 지위에서 완전한 정치적 주권체로 변화하는 것을 간단한 문제로 생각했기 때문에 준비기간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립후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직면한 과제는, 정치면으로는 국가건설의 방향을 잡는 것과 경제면으로는 모노컬처 경제구조를 불식하는 일이었다.
먼저 정치면에서 대부분의 나라들이 채택한 방향은 사회주의노선이었다. 첫째는 아프리카사회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골자는 식민지화 이전의 아프리카사회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원리를 살려 농민과 노동자만으로 이루어진 칙취없는 평등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이 원리에 따라 종래 백인이 장악하고 있었던 은행, 보험회사, 외국무역기업 등의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거나 정부가 과반수의 주식을 취득함으로서 경영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편, 국민의 90% 이상이 종사하는 농사에 대해서는 종래의 소농형태에서 공동농장, 공동작업, 노동에 따른 생산물의 배분이라는 집단화가 실시되었다. 둘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른 과학적 사회주의 채택이다. 모잠비크나 앙골라에서는 모든 기간산업이 국유화되어 인민의 소유가 되었다. 또 전위당으로서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경제를 계획했으며, 노동조합을 통한 인민의 경영 참가를 추진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구소련·동구·중국 등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경제면에서는 식민지적 경제구조를 타파함으로써, 경제의 자립화를 성취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 수단으로서 첫째로 취해진 것이 백인 입식지에서는 입식지의 아프리카인에 대한 반환이며, 1962년의 케냐의 '100에이커 입식계획'이 그 예이다. 입식지를 세분화하여, 아프리카인에 재입식시켜, 아프리카인 중농을 육성함과 동시에 도시에 체류하고 있는 실업자에게 토지를 재분배했다. 또 입식지 이외에 관개시설 건설과 비료의 도입 등, 제도·기술면의 개혁이 이루어져 이를 금융면에서 원조하기 위한 토지은행이나 공사 등이 설립되었다. 둘째로 식민지시기에 백인·인도인이 차지하고 있던 부문의 아프리카인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숙련자나 기술자가 적어 지금까지 운영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이상을 포함하여, 경제 전체를 다각화하고 균형이 잡힌 경제구조를 창출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나라는 경제개발계획을 작성하고, 그 목표에 따라 경제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각국이 공통적으로 부딪히는 난관은 계획 실현을 위한 자금의 부족으로 그 재원을 외국으로부터의 원조(차관과 공여)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압도적으로 1차산물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는 국제경제 변동의 영향을 받기 쉬우며, 1973년의 석유위기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대폭적으로 수정되지 않으며 안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교역저건의 악화와 채무의 누적에 의한 경제적 위기는 국민의 불만을 증대시켰으며 그 불만을 미리 발산한 군부에 의해 정권전복을 기도하는 쿠데타가 독립 후의 아프리카 제국에서 빈발하였다.
1965년의 알제리, 66년의 가나(은크루마의 실각)·나이지리아·부룬디·오트볼타·중앙아프리카, 67년의 다호메, 토고·시에라리온, 68년의 말리·콩고, 69년이 리비아·니제르·소말리아·수단, 71년의 우간다, 72년의 다호메·가나 마다가스카르, 73년이 르완다, 74년의 니제르·에티오피아, 75년의 나이지리아·차드 등에서의 쿠데타가 그 예이다. 군사저우건 가운데에는 과도저 r사명을 마치고 문민정권으로 이행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반대로 군사정건이 장기화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편 짐바브웨의 독립과정을 보면, 76년의 제네바회담이 실패한 뒤 영국이 미국과 협력하며 새로운 제안을 준비하고 있는 사이에 입식자정부는 국내 온건파 아프리카인과 국내해결을 꾀하여 79년의 제네바회담이 실패한 뒤 영국이 미국과 협력함 새로운 제안을 준비하고 있는 사잉에 입식자정부는 국내 온건파 아프리카인과 국내해결을 꾀하여 79년 6월 짐바브웨·로디지아 괴뢰정권이 성립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프리카인 해방세력과 영국·미국이 반대하고 주변 각국의 영국을 움직여 같은 해 가을부터 제헌회의가 열렸고, 모든 당사자가 참석하여 토의한 결과, 화해가 성립되어 80년 4월에 독립이 실현되었다.
아프리카 최후의 식민지라고 불린 나미비아는 오랫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불법통치하에 시달려 왔는데 88년 12월에 앙골라·쿠바·남아프리카공화국 간에 브라자빌합의가 이루어졌고, 앙골라주둔 쿠바군의 철수문제 등이 해결되었으므로 89년 4월부터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435호에 바탕을 둔 독립절차가 개시되었고, 90년 3월 마침내 독립함으로써 아프리카 제국은 모두 독립을 달성하였다.
최근의 아프리카 전반의 동향을 보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탈 아파르트헤이트화와 더불어 민주화·자유화의 조류가 강해지고 있다. 격변하였던 소련·동유럽정세의 영향도 있지만, 이제까지 쌓인 강원체제의 모순이 분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제의 안정이 긴급한 과재이며, 아프리카경제공동체의 단계적 창설도 일정에 올랐는데, 일국경제와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가 관건이다. 남아프리카의 변동은 더욱 급격하여 91년 6월에는 마침내 아파르트헤어트의 철폐가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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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아프리카역사 6

2001. 10. 19. 13:58
6. 아프리카의 민족운동

분할과 그 뒤의 지배에 대해, 아프리카인이 결코 잠자코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분할기로부터 2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각지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집트 아라비 파샤의 발란(1881∼82), 수단의 마흐디 발란(1881∼98), 아비시니아 아드와의 싸움 (1896), 소말리아 사이이드 무하마드 반한(1891∼1920), 우간다 부뇨로의 반란(1891∼1920), 팀가니카 헤헤족의 반란(1891∼98) 과 마지마지의 반란 (1905∼1907), 니아살랜드 칠렘브웨이 반란(1915), 로디지아 마타벨레족과 뫄쇼나족의 반란(1986), 나탈 줄루족의 반란(1906), 남서아프리카 헤레로와 나마의 반란(1904∼1906), 골드코스트 아샨티의 반란(1900), 리비아 사누시의 반란(1912∼31) 등이다. 이들 초기저항의 특징은 첫째 종교가 투쟁을 조직하는데 있어 중요 원리가 되었다는 사실, 둘째로 부족단위의 투쟁이 많았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결국 근대적 장비를 갖춘 식민지군의 힘 앞에 무릎을 끓어갔다.
남아프리카연방에서는 1918년 도시의 아프리카인 민족회의가 결성되어 정부의 인종주의 정책에 반대하였다. 케냐에서는 백인 입식자로 말미안아 토지에서 쫓겨난 키쿠유족의 헤리 추쿠가, 21년 키쿠유청년동맥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운동은 아프리카인 처우개선을 위한 청원·진정 등의 합법적 수단을 취한 온건한 것이었으며, 독립은 아직 목표로서 내세워지고 있지 않았다. 아프리카 민족운동은 크게 2차대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제 1·2차 세계대전 기간으로, 이시기는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민족운동의 <맹아기>라 불린다. 즉 분할 직후의 초기 저항은 거의 모두 탄압되었으나, 아프리카인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저항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아프리카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초기의 저항조직, 전술면의 약점을 비판했지만, 그 정신면은 높이 평가하여, 이를 계승해갔다.
둘째, 2 차세계대전 이후시기로, 앞의 <맹아기>에 대해 이 시기의 운동은 <개화기(開化期)>라 할 수 있다. 20세기초에 서인도제도에서 일어났던 범아프리카주의운동은 식민지로부터 해방·독립을 희구하는 일대조류가 되었다. 이 운동은 또 제 2차세계대전 후의 아시아 제국의 독립과, 그 결과 열린 반둥회의 (1955)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사실과, 제 2차대전에 연합군 측에서 참전하여 아프리카 이외의 세계를 경험했던 수많은 아프리카인이 귀국한 사실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즉, 영국 식민지 골드코스트에서는 1948년 코코아의 독점적 매상에 대해 아프리카인의 폭동이 일어났으며 영국정보는 그 원인조사를 위한 위원회의권고에 따라, 아프리카인에 대폭적인 자치를 허용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에 협조적이었던 골드코스트회의당(당수 당카)을 비판하면서 K.은크루마는 탈당하여 회의인민당(會議人民黨)을 결성하고, 즉시 독립을 요구하는 국민에게 총파업을 호소했기 때문에, 체포·투옥되었다. 그 동안, 51년의 시넌법에 따라 입법심의회선거를 실시한 결과, 회의인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은크루마는 석방되었다. 그리고 56년 선거에서 다시 다수파를 차지한 회의인민당이 내각을 조직하여 57년 3월 검은 아프리카 최초이 독립국으로 가나가 탄생했다.
프랑스 식민지에서는 다른 길을 걸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 열린 프랑스국민의회에서, 모든 아프리카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신헌법 제안이 있었으나, 당시 프랑스정부는 조국 부흥과 인도차이나 문제에 몰두하여 아프리카에는 관심을 돌리 수 없었다. 1946년 아프리카인은 바마코회의를 열어, 세네갈을 제외한 7개 식민지가 참가하고, 우에 부아니를 중심으로 아프리카민주연합을 결성하고 프랑스 공산당과 연합했다. 프랑스정부는 RDA를 위험시하여 50년에 RDA집회를 금지했다. 56년 '기본법'이 제정되어 아프리카인에게 대폭적 자치가 부여되었으나, 독립에 간해서는 독립 후 프랑스와의 관계가 중요 의제가 되었다. 58년 드골이 제 5공화국 수립과 함께 본국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프랑스공동체 구상이 나와, 기니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는 공동체에 가입했다. 기니의 세쿠 투레는 '예속속의 부유 보다는 자유 속의 빈곤을 택하겠다' 하여 가입을 거부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원조는 즉시 중단되었다. 이리하여 기니를 제외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는 60년에 프랑스 공공체 틀 안에서 독립을 달성했다.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민족운동이 억제되어 왔으나, 영국·프랑스 식민지의 독립을 향한 움직이멩 자극되어 급속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959년 바콩고족 아바코당(당수 G,카사부부)에 대한 집회금지가 발단이 된 수도 레오폴드빌에서 폭동·학살이 일어나, 이를 계기로 독립의 요구가 높아졌다. 50년 대 초 브뤼셀원탁회의가 열려 독립시기에 관한 협의가 있었으나, 즉시 독립을 주장했던 아프리카인 대표의 목소리에 벨기에 정부는 사태를 포기하는 형태로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그해 6월 카사부부대통령, 루뭄바총리 아래 독립이 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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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역사 5-2

2001. 10. 19. 13:58
5.2 각국의 식민지정책

흑아프리카의 식민기간은 약 7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기간 중 초반의 약 30년 동안은 설립의 시대로, 그 다음 30여년 동안은 적극적인 발전기로, 그리고 나머지 10여년 간은 후퇴기로 규정하고 있다. 이 식민 기간을 통해 유럽 식민제국들은 식민화를 시작한 다음 부터는 정치적 지배를 위한 여러 다양한 전략을 택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 볼 때 영국의 식민정책은 간접통치(indirect rule) 방식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반면 프랑스 식민정책은 동화정책(assimilation rule)에 의해 이루어 졌다.
일반적으로 영국방식은 간접통치라 하여, 통치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백인 행정관의 수를 줄이고, 대신 아프리카인(人) 수장 측을 행정 말단에 편입시켰다. 또 초기에는 백인만으로 구성되었던 총독 밑의 행정심의회, 입법심의회에 아프리카인 수장 측을 배치시켜 아프리카인의 근대정치에 대한 적응 훈련을 베풀었다. 간접통치의 창안자인 루가드(L. Lugard)는 간접통치의 원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간접통치는 토속 족장들을 위한 통치이며, 이들 족장들은 식민정부에 의해 그리고 법에 의해 인정된 기능과 권위를 가진 정부 기구의 통합된 부분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들은 식민 총독관리자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는 않는다...... ".
이러한 원칙은 단순히 족장들을 이용한다는 의미 이상의 보다 더 넓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 원칙은 영국인의 정치 문화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영국은 실용주의적 국가이기 때문에 국민들간의 문화적 차이를 용인하고 있었기때문이다.
이에 비해 프랑스방식은 동화정책(同化政策)이라 하여 프랑스문화를 식민지에 보급하고, 아프리카인을 개화시켜 동화, 흡수하려는 것이다. 동화장책에 대한 정의는 매우 다양성을 띄고 있다. 루이스(M.D.Lewis)는 이것을 크게 7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 프랑스의 주요한 식민정책으로서의 동화. 둘째, 협동정책으로 대체된 정책으로서의 동화. 셋째, 자치를 반대하는 동화, 즉 위임정책이 아니라 동합정책으로서의 동화. 넷째, 법적 정의로서의 동화, 즉 식민 모국의 의회로서의 대표성. 다섯째, 문면화로의 동화. 여섯째, 인종적 평등성을 대표하는 동화. 일곱째, 직접식민통치의 고도화된 중앙집권식 형태로서의 동화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아프리카인 중에는 프랑스 문화를 몸에 익힌 일부 엘리트 (동화인) 와 대다수의 비동화인이 있었으며 프랑스는 동화인에 대해서는 본국인과 대등하게 취급했다. 또, 벨기에방식은 온정주의(溫情主義)라 하여, 아프리카인을 어린애로 다루었고 본국 식민성의 힘이 컸으며, 식민지 행정은 안정될 때까지 벨기인이 전담했다. 그 대상으로 복리후생시설 등의 보호조치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아프리카인의 정치적 권리는 전혀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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