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탈식민지화
식민지 해방의 과정을 잘 살펴보면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벨기에가 독립을 내주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민 열강들이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해방시킨 과정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각각의 경우는 서로 달랐다. 어떤 경우, 특정한 식민지의 특수한 특징으로 인해 그 지배자가 영국이건, 프랑스이건, 벨기에이건, 포르투갈이건, 비슷한 모형을 따라야 했다.
예를 들어, 알제리,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케냐, 나미비아, 자이레, 짐바브웨 등 특정 지역의 독립운동은 코트디부아르, 어퍼볼타(부르키나 파소), 탄자니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의 지역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고 커다란 충격을 동반했다. 전자의 경우 유럽 이주민의 이익이 민족투쟁의 성질에 큰 영향을 미쳤고, 후자의 경우에는 이주민의 이익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성격과 조직 능력 역시 중요한 변수로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식민 열강에 의해 지배를 받았냐는 사실보다는 그 식민지에 유럽인 이주민이 살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식민 해방의 유형과 방법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주민이 없는 곳에서는 식민 열강도 아프리카인에 대한 자치를 허용하는 데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이주민이 있는 경우에는 식민 해방의 과정에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간의 폭력적 갈등의 기간이 거의 특징적으로 포함되었다.
2차 세계대전은 아프리카의 식민사에 있어 중대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아프리카의 식민지와 유럽의 본국 사이의 기존 관계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들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시기이다.
첫째, 전쟁 기간 동안 식민지들은, 이중 일부 경우는 실질적으로 본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는데, 전쟁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천연자원의 추출이 아닌 현지의 생산 능력을 발전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는 일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이렇게 현지의 경제적 생산을 강조하게 된 것 이외에도, 식민 행정부에서는 아프리카 피지배인들을 동원하여 군수용품과 전략적 비군수용품을 생산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둘째,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식민 열강의 군대에 차출되었다. 그들은 군대에서 전투원, 짐꾼, 하인, 요리사, 운전사와 같은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 많은 경우, 전투에 참가한 아프리카인 군인들은 유럽인들의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인 군인들은 신중하고 자신감 넘치며 감정 없는 신과 같은 인물이라기보다 일반 아프리카인과 다름없는 인간이었을 뿐이었다.
부유한 유럽인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유럽인도 있었다. 전쟁의 열기 속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걱정이라는 감정을 드러냈다. 유럽인 군인들과 전쟁터에서 하루하루 싸운 경험은 많은 아프리카인 군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세계관을 넓혔으며, 자신들의 종속적 위치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유럽인 군주들이 말했던 자비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셋째, 1945년 이후, 상당수의 아프리카인들이 공교육과 보다 확장된 경제적 역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 지역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도시 거주자들은 전쟁 기간 동안 초기 산업과 제조 부문의 임금노동자로서 능동적이고 기술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자신들의 생활이 더 향상되어야 한다는 높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아프리카인 학교는 여전히 전통적인 코란학교나 기독교의 미션스쿨이었다.
식민 시대 동안 공교육은 거의 초급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다. 아프리카인들은 일반적으로 글을 읽고 숫자를 이해할 수 있으며 식민주의자의 언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으면 된다고 여겨졌다. 그들에게 고등 교육을 시키면 기대가 높아지는 결과가 생겨나서 결국 초기의 저항이 생겨날 것이고, 바로 이것은 식민 정부가 절대로 원하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전쟁 전에는 아주 적은 수의 아프리카인들만이 유럽과 미국으로 건너가 더 나은 공부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민족주의 지도자가 생겨난 것도 바로 이 소수 집단 내에서였다. 어떤 식민 열강도 아프리카인들을 교육시켜 관료나 기술직, 정치직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겠다는 의식적 정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유럽인 식민주의자들의 통치 방식을 익힐 기회를 얻어 자신들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아프리카인 개인이나 공동체의 결심에 의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식민 상황을 변화시켜보겠다는 꿈까지 꾸기도 했다.
전쟁 기간 동안 식민지의 경제적 확장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인들은 기술직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시장으로 유입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관료직과 기술직에 종사하기 위한 훈련을 받게 되었다. 임금노동자로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 도시에 거주하는 아프리카인들은 신생 사회계층을 대표하게 되었고, 경제적 기회와 전후 사회에서의 평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식민 열강들은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수밖에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식민지 대부분의 전후 개발계획은 고등교육과 대학교육을 강조하고 또 약속했다. 영국은 새로운 아프리카 지식인 계층을 주로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프랑스는 아프리카인 행정가와 기술자들을 프랑스에서 훈련시켰다. 그리고 아프리카인 교사들은 대부분 세네갈에 있는 윌리엄 폰티 학교(William Ponty School)에서 교육받았다. 경제적 정치적 개혁에 대한 요구로 인해 공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전후에 발생한 민족주의 운동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식민지 해방의 과정을 잘 살펴보면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벨기에가 독립을 내주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민 열강들이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해방시킨 과정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각각의 경우는 서로 달랐다. 어떤 경우, 특정한 식민지의 특수한 특징으로 인해 그 지배자가 영국이건, 프랑스이건, 벨기에이건, 포르투갈이건, 비슷한 모형을 따라야 했다.
예를 들어, 알제리,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케냐, 나미비아, 자이레, 짐바브웨 등 특정 지역의 독립운동은 코트디부아르, 어퍼볼타(부르키나 파소), 탄자니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의 지역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고 커다란 충격을 동반했다. 전자의 경우 유럽 이주민의 이익이 민족투쟁의 성질에 큰 영향을 미쳤고, 후자의 경우에는 이주민의 이익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성격과 조직 능력 역시 중요한 변수로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식민 열강에 의해 지배를 받았냐는 사실보다는 그 식민지에 유럽인 이주민이 살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식민 해방의 유형과 방법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주민이 없는 곳에서는 식민 열강도 아프리카인에 대한 자치를 허용하는 데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이주민이 있는 경우에는 식민 해방의 과정에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간의 폭력적 갈등의 기간이 거의 특징적으로 포함되었다.
2차 세계대전은 아프리카의 식민사에 있어 중대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아프리카의 식민지와 유럽의 본국 사이의 기존 관계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들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시기이다.
첫째, 전쟁 기간 동안 식민지들은, 이중 일부 경우는 실질적으로 본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는데, 전쟁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천연자원의 추출이 아닌 현지의 생산 능력을 발전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는 일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이렇게 현지의 경제적 생산을 강조하게 된 것 이외에도, 식민 행정부에서는 아프리카 피지배인들을 동원하여 군수용품과 전략적 비군수용품을 생산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둘째,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식민 열강의 군대에 차출되었다. 그들은 군대에서 전투원, 짐꾼, 하인, 요리사, 운전사와 같은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 많은 경우, 전투에 참가한 아프리카인 군인들은 유럽인들의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인 군인들은 신중하고 자신감 넘치며 감정 없는 신과 같은 인물이라기보다 일반 아프리카인과 다름없는 인간이었을 뿐이었다.
부유한 유럽인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유럽인도 있었다. 전쟁의 열기 속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걱정이라는 감정을 드러냈다. 유럽인 군인들과 전쟁터에서 하루하루 싸운 경험은 많은 아프리카인 군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세계관을 넓혔으며, 자신들의 종속적 위치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유럽인 군주들이 말했던 자비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셋째, 1945년 이후, 상당수의 아프리카인들이 공교육과 보다 확장된 경제적 역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 지역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도시 거주자들은 전쟁 기간 동안 초기 산업과 제조 부문의 임금노동자로서 능동적이고 기술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자신들의 생활이 더 향상되어야 한다는 높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아프리카인 학교는 여전히 전통적인 코란학교나 기독교의 미션스쿨이었다.
식민 시대 동안 공교육은 거의 초급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다. 아프리카인들은 일반적으로 글을 읽고 숫자를 이해할 수 있으며 식민주의자의 언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으면 된다고 여겨졌다. 그들에게 고등 교육을 시키면 기대가 높아지는 결과가 생겨나서 결국 초기의 저항이 생겨날 것이고, 바로 이것은 식민 정부가 절대로 원하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전쟁 전에는 아주 적은 수의 아프리카인들만이 유럽과 미국으로 건너가 더 나은 공부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민족주의 지도자가 생겨난 것도 바로 이 소수 집단 내에서였다. 어떤 식민 열강도 아프리카인들을 교육시켜 관료나 기술직, 정치직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겠다는 의식적 정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유럽인 식민주의자들의 통치 방식을 익힐 기회를 얻어 자신들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아프리카인 개인이나 공동체의 결심에 의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식민 상황을 변화시켜보겠다는 꿈까지 꾸기도 했다.
전쟁 기간 동안 식민지의 경제적 확장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인들은 기술직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시장으로 유입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관료직과 기술직에 종사하기 위한 훈련을 받게 되었다. 임금노동자로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 도시에 거주하는 아프리카인들은 신생 사회계층을 대표하게 되었고, 경제적 기회와 전후 사회에서의 평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식민 열강들은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수밖에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식민지 대부분의 전후 개발계획은 고등교육과 대학교육을 강조하고 또 약속했다. 영국은 새로운 아프리카 지식인 계층을 주로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프랑스는 아프리카인 행정가와 기술자들을 프랑스에서 훈련시켰다. 그리고 아프리카인 교사들은 대부분 세네갈에 있는 윌리엄 폰티 학교(William Ponty School)에서 교육받았다. 경제적 정치적 개혁에 대한 요구로 인해 공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전후에 발생한 민족주의 운동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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