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역사일반

<font color=red>[ 아프리카 역사 II ] - 노예무역</font>

africa club 2003. 9. 25. 19:35
2. 노예무역

일부 역사학자들은 노예무역으로 인해 아프리카 사회가 후진성을 띠게 되었고 세계 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약점과 의존성은 식민 시대에도 계속되었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분명히 지속되고 있다. 다른 역사학자들은 노예무역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환경이나 기술, 사회 조직, 종교적 신념, 개인적 시도와 같은 식민지 이전 시대의 아프리카 사회를 형성한 요인들을 강조한다.

아프리카와 유럽의 상호작용의 역사는 1400년대 초반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 헨리(Henry)의 후원을 받은 항해부터 시작되었다. 헨리 왕자는 북부 아프리카를 지배하던 아랍인 지역을 우회하여 서부 아프리카의 주요 문명 지역들과 황금을 직접 교역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이 사업은 기술이 발달하여 포르투갈인들이 기니아만 남쪽을 탐험할 수 있게 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1460년, 무역선이 케이프 베르데(Cape Verde)에 당도하였고, 곧 이어 1471년에는 황금해안(Gold Coast), 1483년에는 콩고, 1488년에는 희망봉(Cape of Good Hope)에 도착했다. 1497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양과 동부 아프리카에 있는 스와힐리 해안도시에 도착했고, 그 이후에는 곧장 인도 남부로 항해했다. 이러한 발전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와 함께 유럽 확장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매우 이익이 컸던 인도양 무역으로 인해 원래의 목적이었던 아프리카의 황금은 뒷전이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황금해안의 엘미나(Elmina: 1482년 포르투갈인들이 축조한 서부 아프리카 최고(最高)의 성채를 중심으로 개발된 무역항-역자주), 콩고, 앙골라, 모잠비크, 몸바사에 거주지를 만들고 제한된 무역을 했지만, 선박들은 대부분 아프리카를 우회하여 동방으로 향했다. 1500년 중반 네덜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인들이 포르투갈 무역상을 대신하기 시작했지만, 아프리카는 유럽의 최종목적지인 극동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우회해야 하는 장애물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더 우세했다.

이러한 상황은 16세기 말 남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 설탕 플랜데이션이 시작되자 극적으로 바뀌었다. 설탕, 담배, 커피, 면화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노동력은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의 질병에 노출되자 사망률이 높아졌고, 식민지 노동력으로 편입되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저항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노동자들 역시 열대병 때문에 높은 사망률을 보였고, 플랜테이션에 필요한 노동력을 채우기에 유럽 노동자들의 숫자는 태부족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은 열대병에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고, 고대부터 사하라 사막과 인도양을 통해 유럽인들과 접촉을 해왔기 때문에 유럽의 질병에도 저항력을 갖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유럽인 무역상들과 내륙 지역에서 포획한 노예를 수송하는 아프리카인 중개인들 사이에는 사업적 협력 관계가 구축되었다.

17세기, 18세기, 19세기의 노예무역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붕괴시켰다. 신세계로 이송된 사람들의 숫자를 추정하는 데에는 기록이 부정확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최근의 계산에 의하면, 15세기와 16세기에 잡혀간 사람들까지 합쳐 모두 1000만 명에서 1300만 명의 사람들이 노예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 절반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나머지 절반은 중앙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사람들이다. 이들 중 거의 50만명 정도가 미국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일단 미국으로 건너간 노예는 길어야 10년 정도 밖에 살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적인 노예 공급이 필요하기도 했다.

노예제가 유럽인들에게 이득이 되었다면, 유럽인들은 왜 노예제를 그만 두었을까? 18세기 계몽주의에 의해 유럽인들은 세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1776년과 1789년 미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이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으로 뭉쳤던 것과 같이 주로 영국인이었던 소수의 유럽인들이 도덕적 배경에서 노예제에 반대하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이유를 들어보면, 산업혁명으로 인해 아프리카에 새로운 경제적 임무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싸고 풍부한 천연자원, 즉 야자유, 땅콩유, 고무, 밀랍, 상아, 껌, 커피도 필요했지만, 제조업으로 인한 이익이 커짐으로 인해 아프리카의 넓은 시장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예무역의 폭력성은 무역과 노예가 아닌 상품의 생산을 방해했다. 따라서 강력한 산업가들이 성장함에 따라 그들은 노예무역의 종식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에 종지부를 찍는 데에는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1772년 최초로 통과된 영국의 노예폐지법은 영국 내에서의 노예제만 금지했다. 1807년, 영국인들은 자국민이 노예무역을 하지 못하게 했고, 1833년에는 인도를 제외한 모든 영국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법으로 금지했다. 영국의 압력으로 다른 주요 노예 국가에서도 차례로 노예무역을 금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가 해군력을 행사하여 노예폐지 정책을 강화하고 미국이 노예를 해방함으로써 더 이상 노예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비로소 노예무역은 중지되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전지역을 거의 점령한 결과 아랍의 노예무역도 1880년과 1890년대에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노예무역의 쇠락은 유럽과 아프리카의 놀라운 합법적인 교역 상승으로 이어졌다(10장 참조). 아프리카 물품 가격의 수직 상승으로 인해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상품을 수출하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또한, 노예무역이 쇠락하고 상품무역이 성장하자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적도 아프리카 지역에서 행하던 사업 방법을 바꾸었다. 가장 주목할만한 변화는 유럽인들이 연안을 따라 작지만 영속적인 많은 식민지를 세웠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역이 이루어지게 하고, 불법적인 노예거래로 잡혀온 노예를 풀어주고 때로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세우기도 했다. 세네갈강 하류, 시에라리온, 황금해안, 라고스, 가봉 같은 이러한 식민지들은 결국 전체 대륙의 식민지화를 위한 전초 기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