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침략과 저항사 43

마타벨레전쟁,1893

마타벨레전쟁,1893 1893년 8월 은데벨레족 침략부대가 포트 빅토리아(Fort Victoria)주위의 쇼나(Shona)족 중도 이탈자들을 징벌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들은 백인들을 공격하지 말것을 지시받았고, 백인들은 피격받지 않았다. 그러나 백인들 아래서 일하는 쇼나족 출신의 하인들이 피살되었고 이로 인하여 채광작업이 중단되었다. 정착민들, 선교사들과 제임슨은 이제 은데벨레족을 공격하기위한 절호의 기회를 만나게 되었다. 로벵굴라가 백인들을 공격했고 추후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선전이 확산되었다. 그 회사의 지원자들로 구성된 군대가 토지와 가축을 준다는 약속으로 모집되었다. 1893년 10월 마타벨레랜드에 대한 침략이 시작되었다. 은데벨레족 저항군은 샹가니(Shangani)와 벰베시(Bembesi)..

루드이권안,1888년 10월

루드이권안,1888년 10월 모파트조약이 단지 남부로데지아에서의 B.S.A.사의 33년간의 지배를 원인제공한 일개 상업회사에 부여한 이권이었기 때문에 양 주권국가간의 조약은 없었다. 문서에는 그 회사가 단지 우호선언만을 모색한 것이 아니라 금광채굴에 대한 이권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이권안의 글자 그대로에 의하면 로벵굴라가 그의 왕국내에 있고 매장되어 있는 모든 금속과 광물에 대한 완전하고 독점적인 관리를 그 회사에 부여했으며 '그들이 그 금속과 광물을 채굴하여 획득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들'을 이라는 아주 모호한 말로 이권을 양보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댓가로 로벵굴라는 100파운드의 월급여, 1,000정의 소총과 잠베지강의 군함 또는 500파운드를 받기로 ..

남부로데지아에서의 반발

남부로데지아에서의 반발 (i)로벵굴라(Lobengula)와 마타벨레(Matabele)족 외세의 점령이전의 시기에 마타벨레국은 잠베지(Zambezi)강 이남의 주요아프리카 열강들중의 하나로서 존중되었고 남아프리카 식민정부가 마타벨레국에 대해 두드러진 경의로움을 갖고 대접했는데, 마타베랜드를 방문하는 백인 사냥꾼들과 상인들은 마타벨레왕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주권하에 복종해야만 된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1880년대까지 족장들이 유럽열강과 힘이나 위신에 있어서 똑같은 국가원수라는 정중한 가정하에 족장들과 교류함으로써 유럽열강들이 내정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것이 더 이상 여의치 않게 되었다. 유럽 열강들은 이제 비공식지배에서 공식적 지배로 이행하고 있었다. 영국과 보어인들이 중부아프리카에 대한 가장 커다란 압력을 ..

독일통치와 반발 - 마지마지운동이전의 제저항운동과의 차이점

마지마지운동이전의 제저항운동과의 차이점 마지마지운동은 세가지 면에서 이전의 능동적 저항과는 상이했다. 첫째로 이전의 19세기에 있었던 거의 모든 무장저항운동들은 조직이나 방법면에서 부족적이고 지역적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지마지운동은 많은 부족들에 의한 일치단결된 노력이었다. 그 운동은 근본적으로 전통적 전투방식에 기초를 두고 있었으나 부족의 전통적 규범에 의거하여 선발된 지휘계통은 응가람베에서 주물에 의해 강화되었다. 다른 여러지역으로부터 온 지방의 지도자들이 함께 소집되어 모든 백인들의 추방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하여 함께 싸웠다. 사람들이 투쟁하러 갔을때에는 킨지키틸레의 주물로 전지전능한 힘을 부여받은 것으로 믿어졌던 자신들의 지방지휘관들 휘하에서 싸웠다. 마지의 효과는 상당히 심리적이었다..

독일통치와 반발 - 마지마지전쟁의 시발

마지마지전쟁의 시발 독일인들은 19세기동안 자신들의 침략에 저항했던 모든 종족들을 쳐부수었다. 그 부족들은 소수 종족이었고 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독일군의 소총에 대항할 무기도 없었다. 20세기에는 민중들이 자신들이 하고자했던 것을 알고 있었으나 자신들의 불일치와 통치자들의 군사력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다리며 인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04년 예언자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킨지키틸레(Kinjikitile)였다. 응가람베(Ngarambe)에 있는 그의 집 가까이에 있는 루피지(Rufiji)강 지류에는 연못이 있었다. 킨지키틸레는 연못속에 살고있던 홍고(Hongo)귀신이 씌었다. 킨지키틸레는 아프리카인들은 하나이며 떠오르는 이름의 물인 그의 축물은 백인들의 무기보다 더 강력하다고 설파했다..

독일통치와 반발 - 마지마지(Majimaji) 전쟁,1905-7

마지마지(Majimaji) 전쟁,1905-7 마지마지전쟁의 원인들은 3가지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폰조덴(von Soden)의 면화계획, 아랍 아키다의 도래, 특히 마툼비(Matumbi)지역, 웅긴도(Ungindo)에서의 독일인들의 일반적 성격과 행동이 그 원인이다. a)면화계획 동아프리카식민지를 통치하는데 드는 막대한 비용때문에 독일통치자들은 아프리카 를 환금작물 플랜테이션의 형태로 경제개발할 것을 강조했다. 식민지는 환금작물수출로 계속 이익을 얻은 한편 독일 산업계는 동부아프리카의 독일식민지로부터 원료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1902년 폰 조덴총독은 식민지의 남부에 면화를 재배하기로 결정하였다. 총독은 모든 '아키다'들에게 그들 휘하의 백성들이 와서 일할 수 있는 면화지구를 만..

독일통치와 반발 - 헤헤(Hehe)족의 음크와와(Mkwawa)의 반발,1891-8

헤헤(Hehe)족의 음크와와(Mkwawa)의 반발,1891-8 19세기 동안 독일 당국에 대한 최대의 도전은 음크와와로부터 였다. 여러가지 조치들이 독일인들과의 최후통첩으로 귀결되었다. 해안쪽에서 타보라와 그 너머에 이르는 교역로는 음크와와의 부족령을 통과하게 된다. 그는 그의 영역을 통하여 혹은 영역내에서 교역을 하던 사람들에게 '홍고(통행관세)'를 부과하였다. 독일인들은 음크와와나 그의 부하들이 부과하는 과중한 홍고에 대한 보고들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 헤헤족장을 정복시키는데 있다고 보았다. 음크와와는 침략자들이 자신을 좋아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와 독일인들과의 상이한 점들을 우호적으로 해결하길 희망했다. 그러..

독일통치와 반발 - 냠웨지(Nyamwezi)족 이시케(Isike)의 반발,1892-3

냠웨지(Nyamwezi)족 이시케(Isike)의 반발,1892-3 타보라(Tabora)는 음완자(Mwanza), 우지지와 그 이상의 지역에 대한 주요 교역의 중심지로서 전략적 위치에 놓여있었다. 냠웨지족의 추장인 이시케는 그의 부족 영역을 통과하는 사람들로부터 '홍고(hongo:통행관세)'를 거두어 들였다. 1886년 기젝(Gieseck)이라는 독일상인이 거래하다가 사기를 쳤다는 죄로 냠웨지족 영토내에서 살해됐다. 이시케는 그의 재산을 압류했고 키팔라팔라(Kipalapala)에서 쫓아냈던 화이트파더스 선교사들에게 반항했다. 그 이후로 그의 유럽인들에 대한 증오감이 커졌다. 얼마후 노련한 독일인 용병 에민 파샤(Emin Pasha)가 1,000명 이상의 군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타보..

독일통치와 반발 - 북부고원지대에서의 반발

북부고원지대에서의 반발 팡가니강 유역은 두가지 이유로 유럽인들의 활동거점이었다. 첫째, 우삼바라(Usambara)는 해안으로부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하고 광대한 고지지역이었고, 유럽식 농업은 고지대에서만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믿음이 풍미하고 있었다. 둘째, 독일침략군은 팡가니계곡을 내려다보고있는 위치에 있는 비옥한 고지대에 조밀하게 모여살고 있는 주민들 사이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이용하였다. 독일인들이 1880년대에 팡가니유역에 들어갔을 당시, 적대관계는 독일인들이 동맹자와 협력자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장했다. 마사이(Masai)족은 질병과 내전으로 너무 약화되어 중대한 반대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다. 지금은 상류계곡에 지배적인 아루샤(Arusha)족은 저항했으나 패배했다. 하류지역은 우삼바..

독일통치와 반발 - 아부쉬리(Abushiri)의 저항,1888-9

아부쉬리(Abushiri)의 저항,1888-9 아부쉬리의 저항은 탄자니아인 최초의 저항이었다. 독일 동아프리카회사는 잔지바르의 세이드 칼리파(Seyyid Khalifa)와 동회사에 광물채굴권, 통상조례와 본토수입관세의 징수에 관한 권리를 부여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독일 동아프리카회사의 관리들은 그때부터 대부분의 해안도시들에 걸쳐서 회사의 깃발을 서둘러 게양하였다. 독일의 저의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독일인들은 동일한 깃대위에 술탄의 깃발 옆에 나란히 독일기를 게양할 권리를 주장했다. 팡가니(Pangani)에서 분별없이 잔지바르의 깃발을 제지한 사건은 곧 독일이 조차하고 있던 전 해안지방을 휘말려 들어가게 한 폭력소요를 불러일으켰다. 리왈리스(Liwalis)와 아키다스의 해산, 회교사원에 개를 데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