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타벨레전쟁,1893

2001. 11. 21. 15:30
마타벨레전쟁,1893

1893년 8월 은데벨레족 침략부대가 포트 빅토리아(Fort Victoria)주위의 쇼나(Shona)족 중도 이탈자들을 징벌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들은 백인들을 공격하지 말것을 지시받았고, 백인들은 피격받지 않았다.  
그러나 백인들 아래서 일하는 쇼나족 출신의 하인들이 피살되었고 이로 인하여 채광작업이 중단되었다.  
정착민들, 선교사들과 제임슨은 이제 은데벨레족을 공격하기위한 절호의 기회를 만나게 되었다.  
로벵굴라가 백인들을 공격했고 추후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선전이 확산되었다. 

그 회사의 지원자들로 구성된 군대가 토지와 가축을 준다는 약속으로 모집되었다.  
1893년 10월 마타벨레랜드에 대한 침략이 시작되었다.  은데벨레족 저항군은 샹가니(Shangani)와 벰베시(Bembesi)에서 무참히 패배했다.  
불라와요(Bulawayo)도 함락되었다.  
절망에 빠진 로벵굴라는 북쪽으로 달아나서 피눈물나는 통렬한 공격을 하다가 1894년 1월 말에 잠베지강 부근에서 사망했다.  
그리하여 마타벨레왕국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893년 전쟁의 결과

1893년의 전쟁이 끝나고 나자 은데벨레 부족사회의 모든 구조를 변형시키려는 계획적인 시도가 있었다.  
군주정은 폐지되었고 편입된 도시들은 해체되었으며 은데벨레족 인두나들중 더 이상 한사람도 통치목적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은데벨레족 특권상류계급들은 무력으로 '홀리 계급(Holi Caste)'에 대해 권력을 계속 휘두를 수가 없었다.  은데벨레 귀족사회의 가축과 토지는 몰수되었다.
이러한 은데벨레 부족사회의 체계적 해체는 대부분의 백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신념을 갖게 했다.
    a)홀리계급은 새로운 독립을 환영하며,
    b)젊은이들은 징집, 군사훈련과 임의적 처벌의 면제를 환영하며,
    c)은데벨레족 귀족사회의 옛구성원들은 재산을 획득하고 근대 경제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백인들은 봉기에 대항하기 위해 어떠한 예방책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안심했고 젊은 은데벨레족 귀족들을 모집해서 회사의 경찰로서 무장시켰다.  
그들은 치안에 대해 너무나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1895년말 제임슨(Jameson)은 대부분의 백인경찰들을 유명한 제임슨 습격(Jameson Raid)에 참여하도록 트란스발(Transvaal)로 파견했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은데벨레족 주민들은 아직도 구체제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비록 부족의 조직체계가 와해되긴 했으나 부족구성원들의 충성심은 아직도 변치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마타벨레왕국이 몰락한 후 3년만에 새로운 질서가 은데벨레와 쇼나 양 부족에 의한 대규모 봉기를 유발하게 되자 분명하게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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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이권안,1888년 10월

2001. 11. 21. 15:29
루드이권안,1888년 10월
    모파트조약이 단지 남부로데지아에서의 B.S.A.사의 33년간의 지배를 원인제공한 일개 상업회사에 부여한 이권이었기 때문에 양 주권국가간의 조약은 없었다.  문서에는 그 회사가 단지 우호선언만을 모색한 것이 아니라 금광채굴에 대한 이권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이권안의 글자 그대로에 의하면 로벵굴라가 그의 왕국내에 있고 매장되어 있는 모든 금속과 광물에 대한 완전하고 독점적인 관리를 그 회사에 부여했으며 '그들이 그 금속과 광물을 채굴하여 획득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들'을 이라는 아주 모호한 말로 이권을 양보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댓가로 로벵굴라는 100파운드의 월급여, 1,000정의 소총과 잠베지강의 군함 또는 500파운드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 이권안에 대한 로벵굴라의 해석은 백인들이 와서는 금을 채굴한 다음에 가버릴것이라는 것이었다.  타티(Tati)금광에서는 이전에 이런식의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회사 사람들과 왕과의 대화시에 회사사람들이 조장한 해석이었다.  그러나 상세한 세부사항들이 무엇이 됐든간에 로벵굴라의 그 이권안에 대한 인식과 로즈가 그 이권안을 이용하려고 의도한 것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모순이 있었다.  로벵굴라에게 있어서 그 이권안과 그가 말로한 약속들은 그의 왕국내에서 백인들의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었다.  로드에게는 그 문서에 의한 이권안만이 유효했고 그 이권안은 마타벨레랜드와 마쇼나랜드를 회사의 지배에 개방하는 열쇄였다.
    로벵굴라는 곧 남아프리카의 신문들이 그 루드 이권안이 대규모의 광산경영과 백인들의 정착에 길을 열어주었다고 추측하며 그 이권안을 단호하게 확정하려는 백인이권소유자들의 압력과 그것의 수용을 거부하는 강력한 마타벨레족 파벌사이에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로즈가 칙허장을 얻기 위해 교섭하고 있는 사이 로벵굴라와의 직접적 대결이 지연되었다.  한편 그 문서에 의한 이권안은 처음에는 보류되었다가 왕에 의해 거부되었는데 왕은 그 후에 빅토리아 여왕에게 서한과 인두나(indunas)들을 보내어 영국정부의 말단에서 그 사건들을 관리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소용이 없었다.  그 회사는 1889년 10월말에 칙허장을 획득했다.  그 칙허장은 루드이권안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 칙허장은 로벵굴라가 부여한 권리들 이외에 마타벨레랜드와 마쇼나랜드에서의 어떠한 권리들도 그 회사에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영국으로부터의 독점권과 행정기관을 설치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B.S.A.사는 이젠 적어도 로벵굴라의 영토일부를 점령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만약 로벵굴라가 완고하게 나가는 것이 입증되면 회사의 인력충원만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광산시굴과 광산경영을 위한 길을 닦아 놓기위해서 500명의 백인군대를 이끌고 불라와요(Bulawayo)에 쳐들어가 마타벨레랜드를 공격해서 왕권을 완전히 분쇄해 버리자는 비밀협정에 로즈와 두명의 재력있는 군인인 프랭크 존슨(Frank Johnson)과 모리스 히니(Mourice Heany)사이에 이루어졌다.  로벵굴라는 당면한 대결상태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정면대결을 피하기 위해서 양보했다.  왕은 제임슨에게 왕국의 남부에서 광산을 시굴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는 남부지방에서 금이 발견되지 않을 경우에는 마쇼나랜드에서 광산을 시굴하라는 대체허용도 제임슨에게 부여하였다.
    로벵굴라의 태도변화로 인하여 원래의 계획이 중지되고 오늘날의 솔즈 베리(하라레) 부근 햄프덴(Hampden)산까지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 무장도로건설대를 파견한다는 계획으로 대체되었다.  그 명칭이 무엇이건간에 그 도로건설대는 마타벨레랜드 본토를 지나서 로벵굴라의 세력이 계절적 공격을 할때만 확장시키는 마쇼나랜드를 통과하게 된다.  이리하여 선봉대가 1890년 7월 마쇼나랜드에 입성하여 9월에는 솔즈베리 요새에 당도했다.  비록 로벵굴라는 정면대결을 피하기 위한 시도에서 거의 모든 외교적 수단을 다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마타벨레전쟁이 이제는 임박해 있었다.  영국인들의 마쇼나랜드점령은 운명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실체의 행로를 대단히 극명하게 밝혀주었고 그는 그것에 대해 더이상 아무것도 어찌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유명한 비유를 써서 그의 곤경스러운 입장을 헬름(Helm)이라는 선교사에게 요약해서 보냈다.:
    '귀하께서는 카멜레온이 파리를 나꿔채는 것을 보았소?  카멜레온은 파리의 속을 환히 들여다 보고는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처음에는 한발 그 다음에는 다음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매우 천천히 그리고 매우 점잖게 앞으로 나아가곤 하죠.  마침내 파리가 가장 잘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을때 카멜레온이 그의 혀를 휙 쏘면 파리는 사라집니다.  영국은 카멜레온이고 나는 그 파리입니다.'
    그리고 1893년의 사건들은 그의 두려움을 정당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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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로데지아에서의 반발

2001. 11. 21. 15:28
남부로데지아에서의 반발
     (i)로벵굴라(Lobengula)와 마타벨레(Matabele)족
    외세의 점령이전의 시기에 마타벨레국은 잠베지(Zambezi)강 이남의 주요아프리카 열강들중의 하나로서 존중되었고 남아프리카 식민정부가 마타벨레국에 대해 두드러진 경의로움을 갖고 대접했는데, 마타베랜드를 방문하는 백인 사냥꾼들과 상인들은 마타벨레왕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주권하에 복종해야만 된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1880년대까지 족장들이 유럽열강과 힘이나 위신에 있어서 똑같은 국가원수라는 정중한 가정하에 족장들과 교류함으로써 유럽열강들이 내정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것이 더 이상 여의치 않게 되었다.  유럽 열강들은 이제 비공식지배에서 공식적 지배로 이행하고 있었다.
    영국과 보어인들이 중부아프리카에 대한 가장 커다란 압력을 넣었는데 그러한 압력들은 다이아몬드와 금의 발견이 엄청난 자본주의적 발달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남아프리카경제의 연속선상이었다.  그러한 압력은 영국인과 보어인 사이의 적대관계에 의해 더욱 뚜렷해지게 되었다.  남아프리카의 영국인들은 중부아프리카가 광물도 풍부하고 양질의 목초지를 제공하고 보어인들의 허를 찌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중부아프리카로 밀고 들어갈것을 원했다.  은데벨레(Ndebele)족 사람들은 보어인과 영국인들의 압력의 핵심을 스스로 간파했다.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체제에서는 백인침략군과의 협력을 위한 강한 동기들이 존재했었다.  때때로 새로운 통치자는 외부의 적들로부터의 보호를 원했고 왕은 내부의 반대파들에 맞설 만한 지원을 원했으며 교역증대나 농업개발에 대한 예상들이 기꺼히 받아들여졌고 교육과 기술발전에 대한 기대는 강한 동기부여를 제공했다.  로벵굴라의 적수였던 레와니카(Lewanika)가 영국의 보호를 모색했던 바로체랜드(Barotseland)에서는 이러한 제요인들이 효력을 나타냈다.
    로벵굴라의 위치는 세가지 면에서 달랐다.  첫째, 은데벨레부족국가는 백인들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으나 은데벨레의 주변 아프리카 부족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는 강력했었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에 의한 보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내부의 적수들에 관해서는 로벵굴라가 1870년 그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제압할 수 있었고 그후에도 계속하여 최고의 수완으로 그의 왕국내에서의 투쟁의 정치를 처리해나갔다.  따라서 그는 내부의 적들에 맞서기위해서 백인들의 도움을 요청하길 원치 않았다.  그리고 세째로는 로벵굴라가 교역기회를 향상시키는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벵굴라와 은데벨레 부족민들은 외국인들과의 어떠한 형태의 협력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외국인들로 하여금 시도해 보려는 것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남아공화국의 보어인들은 역내에서의 패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 있어서 최초의 조처를 취했다.  크루거대통령(Kruger)을 대표하여 피터 그로블러(Pieter Grobler)는 1887년 7월 로벵굴라에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설득했다.  그 조약은 은데벨레부족과 남아공화국간의 원대한 불가침 조약이었다.  그러나 구두로 말해진것과 그 결과로서 문서화된 것 사이의 차이점이 불안하게도 컸다.  나중에 로벵굴라는 이 조약은 1852년 그의 부친이자 전임자인 음질리카지(Mzilikazi)와 보어인들 사이에 체결된 애매한 舊우호조약의 단순한 재판이라고 주장했다.
    1887년의 조약은 영국인들이 행동을 취하도록 움직여 놓았다.  만약 로벵굴라가 보어인들과 동맹을 맺을 경우 소문난 광물자원과 함께 북쪽으로 도로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영국인들은 로벵굴라가 영국인들의 사전승낙없이는 영토의 양도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로벵굴라의 보증을 신속히 확실하게 해야만 했다. 1887년 모파트(Moffat)조약에서 그러한 보증이 되었다.  이렇게하여 로벵굴라는 1887년 피터 그로블러와 맺은 그로블러조약을 부인하고 마타베랜드를 영국의 영향권내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로벵굴라는 주권을 내어놓지 않는다는 조항을 조약에 특별히 명문화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문서는 마타벨레랜드의 쟁탈전에 있어서 핵심적 사건인 논쟁의 여지가 많은 루드이권안(Rudd Concession)이 모파트조약 이후에 뒤따라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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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치와 반발 - 마지마지운동이전의 제저항운동과의 차이점

2001. 11. 21. 15:27
마지마지운동이전의 제저항운동과의 차이점
    마지마지운동은 세가지 면에서 이전의 능동적 저항과는 상이했다.  첫째로 이전의 19세기에 있었던 거의 모든 무장저항운동들은 조직이나 방법면에서 부족적이고 지역적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지마지운동은 많은 부족들에 의한 일치단결된 노력이었다.  그 운동은 근본적으로 전통적 전투방식에 기초를 두고 있었으나 부족의 전통적 규범에 의거하여 선발된 지휘계통은 응가람베에서 주물에 의해 강화되었다.  다른 여러지역으로부터 온 지방의 지도자들이 함께 소집되어 모든 백인들의 추방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하여 함께 싸웠다.  사람들이 투쟁하러 갔을때에는 킨지키틸레의 주물로 전지전능한 힘을 부여받은 것으로 믿어졌던 자신들의 지방지휘관들 휘하에서 싸웠다.  마지의 효과는 상당히 심리적이었다.
    둘째로 이전의 운동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독일의 즉각 개입이 뒤따랐다.  그 운동들은 통상 독일의 선제공격의 결과로 일어났다.  마지마지운동은 독일의 개입후 오랜만에 일어났고, 아프리카인들의 선제공격으로 일어났다.
    셋째, 모든 무장저항운동 중 마지마지운동은 전통적 신앙과 신세계에의 약속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전사들의 죽은 조상들은 부활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킨지키틸레는 독일의 폭압으로부터 민중을 구원해 내기위해 보내졌다.  이러한 초자연적 사물에의 기원과 주문은 투사들 사이에서 강력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마지운동은 선지자의 종교적 메세지에 응하여 시작되었다.  백인들의 무기에 대한 마지의 마력은 종교적 신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마지운동이 8-9월기간동안  루피지계곡으로 확산됨에 따라서 여러선지자들이 그 운동을 다시금 이끌었다.  이 사람들은 자칭 홍고의 사자들이라고 칭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의식을 집행해 주기 위한 물을 가지고 다녔다.  그들은 단결과 백인들의 무기에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했다.  그들은 모든 흑인들이 백인들의 통치에 대항해서 봉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메세지는 천년왕국의 메세지, 즉 마법의 악령세계와 백인통치를 없애겠다는 약속이었다.

      마지마지운동의 결과
    독일인들은 또다른 마지마지 저항을 피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인들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일부 개선안을 모색했기 때문에 좀더 과단성있는 정책이 뒤이어 나왔다.  투사들은 비록 자신들의 대지로부터 백인들을 몰아낸다는 직접적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 봉기는 독일 식민행정당국으로서는 고도의 식민정책 실행을 불러일으켰고 식민지의 미래에 관한 전면적 재고를 강요했다.
    독일 식민통치의 초창기에는 제부족의 반목, 자금부족과 식민통치에 있어서의 착오등으로 인하여 진척이 더디었다.  그러나 1907년에서 191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은 개혁과 경제개발의 평화적 시기였다. 신임총독 레헨베르크(Rechenberg:1906-12)는 아프리카인들의 이해관계가 백인들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지 말아야 된다고 믿었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의 교육과 의료수준을 향상시키겠다는 결의가 단호했고 아프리카인 농업재배자들에게 이로움을 주기위한 목적으로 열대농업에 있어서의 과학발달을 육성했다.
    1914년까지 이루어진 경제적 발달은 정부의 직접적 원조와 장려에 많이 기인했다.  교통분야에서 정부가 비록 개인회사에 의해 운영되기는 했지만 두개의 철도중 하나를 건설했고 소유했다.  게다가 독일과 독일령 동부아프리카 식민지국가들간의 정기기선운항도 독일동아프리카 해운사에 대한 67,000파운드의 정부보조금을 지불함으로써 확고히 유지하게 되었다.  농업분야에서는 식민정부가 매년 10,000파운드를 지출했던 세계적 명성을 가지고 있는 우삼바라(Usambara) 소재 아마니(Amani) 생물학 농업연구소가 재배자들을 지원해 주었다.  다레살람의 성장도 또한 개인기업들보다는 식민행정당국의 노력에 더 기인했다.  대형공공건물들과 신항구가 정부의 주도로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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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치와 반발 - 마지마지전쟁의 시발

2001. 11. 21. 15:26
마지마지전쟁의 시발
    독일인들은 19세기동안 자신들의 침략에 저항했던 모든 종족들을 쳐부수었다.  그 부족들은 소수 종족이었고 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독일군의 소총에 대항할 무기도 없었다.  20세기에는 민중들이 자신들이 하고자했던 것을 알고 있었으나 자신들의 불일치와 통치자들의 군사력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다리며 인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04년 예언자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킨지키틸레(Kinjikitile)였다.  응가람베(Ngarambe)에 있는 그의 집 가까이에 있는 루피지(Rufiji)강 지류에는 연못이 있었다.  킨지키틸레는 연못속에 살고있던 홍고(Hongo)귀신이 씌었다.
    킨지키틸레는 아프리카인들은 하나이며 떠오르는 이름의 물인 그의 축물은 백인들의 무기보다 더 강력하다고 설파했다.  그의 가르침은 루피지강 부근에 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그의 가르침은 자신들이 은즈위윌라(Njwiywila 혹은 주릴라)라고 칭했던 살그머니 속삭이듯 퍼뜨리는 캠페인을 통하여 마툼비부족민들에게도 전해졌다.  은즈위윌라는 응가람베라는곳에 백인들을 좀더 나약하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축술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한사람 한사람에게 알리기 위한 비밀 연락수단이었다.  또한 조상들은 돌아가신것이 아니라 신의 보호를 받고 계시다는 소문도 추가되었다.  조상들은 응가람베에 간 사람들에게 보여질지도 모른다.
    응가람베로의 순례여행이 1905년초 은즈위윌라의 단계에 따라서 신속히 계속되었다.  응가람베에서는 보케로(Bokero;인간과 귀신의 중간에서 매개해주는 존재)의 직함을 떠맡고 있는 킨지키틸레가 순례자들에게 독일인들의 무기에 대항할 주물을 주고서는 그들을 전쟁터로 보냈다.  그 주물은 기장가루를 물에 섞어 만든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곧 전사가 될 사람들의 이마에 바르거나 뿌려졌다.  때때로 전사는 물만을 마셨다.  독일인들은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식을 조사하기 위해서 사자를 파견하였다.
   그는 보고하기를;
'방문자는 물마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원했다.  그들은 방문자에게 말했다.  우리들이 이 마지(물)주물을 마시면 백인들과 현지인들간의 전쟁이 우리에게 해로움을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운 나쁘게도 전쟁이 일어나면 총탄과 검이 우리에게 손상을 입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들의 흥미로운 사진을 좋아했고 그 주물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가  주물을 들이마시자 그들은 작은 갈대조각들을 그의 머리둘레에 묶고는 그가 1센트를 몸에 지니게 하고는 그가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동지애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치장하지 않는자는 죽음을 면치못할 것입니다.'

     실질적 봉기
    처음부터 킨지키틸레 응탈레의 메시지는 유럽인의 지배에 대항한  원조를 약속했다.  사람들이 응가람베로 몰려가자 그 운동의 호전성도 강해졌다.  마침내 1905년  킨지키틸레는 전쟁에 대비하여 사람들을 동원하여 훈련시키기 위하여 주변국가를 통하여 대표자들을 파견했다.  그는 백인들의 무기에 대한 보호를 그들에게 약속했다.  그는 그들에게 지도력, 조직과 단결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순례객들에게 주물을 얻고 돌아가서 독일인들을 위해 일을 게속하고 자신이 투쟁을 개시하라는 적절한 명령을 내릴때까지 기다릴 것을 요구했다.  1905년 9월까지 아무런 명령도 하달되지 않았기에 마툼비족 사람들은 조급하게 되어가지고는 독일인들을 자극할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줌베(Jumbe)의 플랜테이션에서 몇개의 새싹들을 뿌리뽑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결정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줌베는 키바타(Kibata)의 아키다(Akida)에게 그 사건을 보고했다.  아키다가 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심부름꾼들은 무례하게 되돌려 보내지고 추격받았다.  그들이 되돌아 도착하기도 전에 마툼비족 사람들은 1905년 8월 31일 무툼비구릉에서 제1차 교전으로 그들을 몰아넣었다.  마지마지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소식은 킨지키틸레의 메세지를 이미 전해들은 바 있던 루피지계곡 주민들사이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8월초 키치(Kichi)족, 남부 자라모족영토, 서부 울루구루(Uluguru)족영토와 응긴도영토에 사는 사람들이 그 전쟁에 가담했다.  루피지강 근처에 살고 있던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마툼비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고 자신들의 수많은 불평불만과 종교적 신념들을 공유했었기 때문에 합류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데 자라모족 사람들은 신의 사자인 콜렐로(Kolelo)라는 이름의 귀신에게 복종해야만 된다고 믿었다.  많은 이들이 성령 콜렐로를 킨지키틸레를 씌운 귀신 홍고와 동일시했다.  첫째로 콜렐로와 그를 보낸 신이 자라모족에게 승리를 약속했다.  8월말까지 그 운동은 남쪽으로는 루쿨레디(Lukuledi)계곡으로, 서쪽으로는 마헹게(Mahenge)고원과 킬롬베로(Kilombero)계곡으로 확산되었다.  킬로사(Kilosa)와 다레살람간 철로 남쪽의 전지역이 교전중이었다.  응고니(Ngoni)족도 9월에 전쟁에 합류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군대증강을 명령했고 1905년 11월까지 그 운동에 대한 조직적 진압을 시작했다.  마지마지의 지도자들은 살해되거나 모잠비크로 피신했다.  1906년 말경 무렵과 1907년초까지 그 운동은 잠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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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치와 반발 - 마지마지(Majimaji) 전쟁,1905-7

2001. 11. 21. 15:25
마지마지(Majimaji) 전쟁,1905-7
    마지마지전쟁의 원인들은 3가지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폰조덴(von Soden)의 면화계획, 아랍 아키다의 도래, 특히 마툼비(Matumbi)지역, 웅긴도(Ungindo)에서의 독일인들의 일반적 성격과 행동이 그 원인이다.

     a)면화계획
    동아프리카식민지를 통치하는데 드는 막대한 비용때문에 독일통치자들은 아프리카 를 환금작물 플랜테이션의 형태로 경제개발할 것을 강조했다.  식민지는 환금작물수출로 계속 이익을 얻은 한편 독일 산업계는 동부아프리카의 독일식민지로부터 원료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1902년 폰 조덴총독은 식민지의 남부에 면화를 재배하기로 결정하였다.  총독은 모든 '아키다'들에게 그들 휘하의 백성들이 와서 일할 수 있는 면화지구를 만들것을 명령했다.  면화가 판매됐을때 노동자들, 아키도, 매매조합들이 이익금의 3분의 1을 얻게 된다.
    다른 모든 점에서 적당한 것이었음에 틀림이 없는 이 계획은 참여한 사람들이 시달려야만 했던 고난으로 인하여 손상되었다.  면화플랜테이션에서 무자비하게 관리되는 작업은 마툼비사람들의 삶을 악몽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이 선정한 토지는 부적합했으며 작물도 흉작이었고 실제적으로 아무 이익도 얻지 못했다.  연말 급료는 약속된 이익의 3분의 1에 훨씬 못미쳤다.  자라모(Zaramo)족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첫해에 일한 댓가로 각각 받은 35센트를 거부했다.  면화지대의 마툼비족, 자라모족과 여타의 농민들은 넌덜머리가나서 독일인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b)아랍아키도들의 마툼비족 영토내로의 도래
    무익한 환금작물의 강제재배는 남부탄자니아에서 광법위하게 확산된 불만점이었으나 그것만이 유일한 불만점이 아니었다.  각 지역이 지역 나름대로의 수난을 겪고 있었다.  예컨데 마툼비족은 독일인들이 자신들을 감시하기위해 배치해놓은 아스카리들과 아키도들을 증오했다.
    그때까지도 마툼비족은 아랍인들이 마툼비족 영토내로 진입하는 것을 가로막음으로써 아랍인의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거부하였다.  마툼비족 사람들은 아랍인들의 노예무역 유행이 자신들에게 이로움을 주는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고 노예무역을 오랜기간 동안 거부했다.  그러나 탄자니아에서의 독일통치하에서 아랍인들은 아키다로서 고용되었고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특히 해안지역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마툼비 영토내의 키바타(Kibata), 츄모(Chumo), 미테자(Miteja), 킨줌비(Kinjumbi)와 사망가(Samanga)에는 아랍인 아키다들이 주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력배치의 비극은 아랍인들이 자신들의 상업적, 정치적 노력들을 수년간 좌절시킨 종족들을 다스릴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점이다.  아랍 아키도들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그들을 노예로 격하시켰다.  복수심이 충천했다.  아스카리들의 후원을 받는 아랍인 아키도들의 마툼비족 영토내에서의 행위는 격력한 봉기를 위한 매우 강력한 동기를 유발하였다.
     (c)독일인들의 성격과 행동
    아프리카인들에게 있어서 독일인들은 비정하고 타인에 대한 동정, 도덕과 존경스러움을 결여했다.  아주 경미한 구실을 달아서 새로운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백성을 공개태형이나 심지어 처형에 처했다.  그들은 지나친 폭력적 방법으로 주택세를 부과하였다.  아프리카인들은 여타부족들과 함께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불평불만 말고도, 왕긴도(Wangindo)족의 주요한 불평은 독일인 용병들과 하우스보이들이 왕긴도족 남편들에게 차마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의 모욕감을 안겨주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부인들과 동침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의 행위는 왕긴도 부족사회에서는 범죄에 해당하는 최악의 간통유형에 해당하였다.  왕긴도 부족민들은 대안이 남아있지 않음을 느꼈고 독일인들에 맞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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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치와 반발 - 헤헤(Hehe)족의 음크와와(Mkwawa)의 반발,1891-8

2001. 11. 21. 15:24
헤헤(Hehe)족의 음크와와(Mkwawa)의 반발,1891-8
    19세기 동안 독일 당국에 대한 최대의 도전은 음크와와로부터 였다.  여러가지 조치들이 독일인들과의 최후통첩으로 귀결되었다.  해안쪽에서 타보라와 그 너머에 이르는 교역로는 음크와와의 부족령을 통과하게 된다.  그는 그의 영역을 통하여 혹은 영역내에서 교역을 하던 사람들에게 '홍고(통행관세)'를 부과하였다.  독일인들은 음크와와나 그의 부하들이 부과하는 과중한 홍고에 대한 보고들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 헤헤족장을 정복시키는데 있다고 보았다.
    음크와와는 침략자들이 자신을 좋아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와 독일인들과의 상이한 점들을 우호적으로 해결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그는 점차적으로 독일인들이 자신에 대해 품고 있던 경멸감을 자신과 같은 고매한 인품을 가진 통치자는 무한정으로 참고 견딜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폰 비스만이 그를 해안으로 불러들인데서 드러나는 태도는 독일인들이 자신을 주권을 가진 통치자로서 존중하지 않는다는 그의 점증하는 의심를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그는 바가모요와 타보라간의 교역로를 폐쇄함으로써 응수했다.   독일인과의 외교적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이제 그에게 확실한 것이 되었고, 군사적 대결을 대비하여 그는 응고니(Ngoni)족의 족장 체브루마(Chebruma)와 타보라의 이시케와의 동맹을 모색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그리고나서 독일인들과 대항할 준비를 했다.
    1891년 6월 제블레스키(Zewlesky)는 킬와 키빈제(Kilwa Kivinje)로부터 1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음크와와를 공격하러 갔다.  최후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던 그는 방문객을 맞이하기위해 융숭한 선물과 함께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냈다.  음크와와가 보낸사람들의 모습은 독일인들에게는 수세적, 공세적 본능을 자극하였다.  독일인들은 발포했고 여러명이 죽었다.  음크와와는 매복하여 공격할 것을 명령함으로써 보복했다.  제블레스키와 그의 토벌대원전원이 전멸당했다.
    이 사건 이후 음크와와는 킬로사(Kilosa)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점령군 전원을 살해했다.  1894년 폰 프린스가 격전을 치루고 나서 음크와와의 요새인 칼렝가(Kalenga)를 접수했다.  추장자신은 탈출하여 4년동안 게릴라전에 참여하였다.  마침내 사로잡히는 순간이 다가오자 기력이 다하고 희망을 잃은 음크와와는 1898년 총으로 자살하여 헤헤족 저항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 결과로 독일인들은 헤헤족 족장평의회를 해산하고, 저항지도자들의 추방을 요구하였으며, 저항한 죄로 헤헤족에 대하여 과중한 벌금을 부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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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치와 반발 - 냠웨지(Nyamwezi)족 이시케(Isike)의 반발,1892-3

2001. 11. 21. 15:23
냠웨지(Nyamwezi)족 이시케(Isike)의 반발,1892-3
    타보라(Tabora)는 음완자(Mwanza), 우지지와 그 이상의 지역에 대한 주요 교역의 중심지로서 전략적 위치에 놓여있었다.  냠웨지족의 추장인 이시케는 그의 부족 영역을 통과하는 사람들로부터 '홍고(hongo:통행관세)'를 거두어 들였다.  1886년 기젝(Gieseck)이라는 독일상인이 거래하다가 사기를 쳤다는 죄로 냠웨지족 영토내에서 살해됐다.  이시케는 그의 재산을 압류했고 키팔라팔라(Kipalapala)에서 쫓아냈던 화이트파더스 선교사들에게 반항했다.  그 이후로 그의 유럽인들에 대한 증오감이 커졌다.
    얼마후 노련한 독일인 용병 에민 파샤(Emin Pasha)가 1,000명 이상의 군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타보라로 진입했다.  그는 타보라 아랍인들의 지원을 간청함으로써 이시케의 지위를 뿌리를 흔들어 놓으려고 시도했다.  1892년 이전보다도 더 거세어지는 독일의 음모들에 진저리가 난 이시케가 독일인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냠웨지부족 영토를 통하는 모든 대상로들을 폐쇄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대한 독일의 반응은 신속했다.  1893년 폰 프린스(Von Prince)중위가 이끄는 독일군이 공격하여 요새들을 파괴했다.  이시케는 저항했으나 패배했다.  포로신세가 될것을 기다리기보다는 그는 자살했다.

     (iv)야오(Yao)족 마쳄바(Machemba)의 저항,1890-9
    이 저항이 일어난 지역은 남부탄자니아 마콘데(Makonde)고원이었다. 마쳄바는 주택세 납부를 거부함으로써 독일인들에게 반항했고 일부의 독일 토벌대들을 쳐부수었다.  식민정부에 복종한다는 표시로써 해안지방으로 가라는 최후통첩을 받았을때, 마쳄바는 대담하게도 비스만에게 다음과 같이 답신했다.:
    '본인은 그대의 언질을 들었소만 본인이 그대에게 복종해야만 될 이유를 알수가 없소이다.  본인은 먼저 죽는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바요... 본인은 이곳 내땅의 술탄이요. 당신 역시 당신땅의 술탄이요.  본인은 그대에게 가지 않겠소만 그대가 족할만큼 강하시다면 와서 날 데려가시오.'
이 서신을 받고 독일인들은 그에 대한 토벌군을 파병했다. 토벌대는 1899년 그의 요새를 점령했고, 그의 추종자들을 투옥했으며, 마쳄바 자신은 모잠비크로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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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치와 반발 - 북부고원지대에서의 반발

2001. 11. 21. 15:22
북부고원지대에서의 반발
    팡가니강 유역은 두가지 이유로 유럽인들의 활동거점이었다.  첫째, 우삼바라(Usambara)는 해안으로부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하고 광대한 고지지역이었고, 유럽식 농업은 고지대에서만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믿음이 풍미하고 있었다.  둘째, 독일침략군은 팡가니계곡을 내려다보고있는 위치에 있는 비옥한 고지대에 조밀하게 모여살고 있는 주민들 사이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이용하였다.
    독일인들이 1880년대에 팡가니유역에 들어갔을 당시, 적대관계는 독일인들이 동맹자와 협력자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장했다.  마사이(Masai)족은 질병과 내전으로 너무 약화되어 중대한 반대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다.  지금은 상류계곡에 지배적인 아루샤(Arusha)족은 저항했으나 패배했다.  하류지역은 우삼바라의 통치자인 킴웨리 자 늄바(Kimweri za Nyumba)가 통치하고 있었다.  1869년 그가 사망하자 기나긴 계승권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전쟁은 이 지역에 있어서의 독일의 점령을 한층 용이하게 만들었다.
    킬리만자로지역에서는 최초의 외교관이었던 린디((Rindi)가 독일인들을 기만하여 자신의 적수였던 시나(sina)를 죽일것을 부추겼다.  독일인들에 대한 린디의 우호적 행위로 인하여 독일인 앞잡이들이 모쉬(Moshi)에 배치되었다.  린드의 친구였던 독일인들은 키보쇼(Kibosho)의 시나와 잠재적으로 마찰관계에 있었다.  1891년초 린디는 시나가 독일지배에 대한 반항으로 독일기를 끌어내렸다는 풍문을 퍼뜨렸다.  비스만(Wissmann)은 즉시 시나의 태도에 대한 징벌과 진압을 결정했다.  린디는 독일 토벌대를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독일토벌대의 전투진지를 지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병과 무기들을 제공하였다.
    시나의 본거지는 비록 요새화되어 있었으나 함락당했고 시나는 독일인들과의 조약을 맺는데 동의했다.  침략자들은 시나가 린디에게 두 지역을 내어주고 그가 감금하고 있던 우루(Uru)족 족장을 석방한다는 조건하에 시나에게 화친강화를 보증했다.  그리하여 린디의 부추김을 받아서 독일인들은 시나를 파멸로 끝나게 했다.
    1892년 린디가 죽고나자 전에는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 않던 마랑구(Marangu)족의 마레알레(Marealle)추장이 음모를 꾸며 킬리만자로지역에서 독일인들의 가장 절친한 친구로 부상했다.  1900년까지 그는 독일인들에게 모쉬(Moshi), 키보쇼와 여타 지역출신 추장들의 불충을 납득시켰다.  이러한 기회주의적 배반행위는 결국 19명의 추장들을 처형하는 결과를 낳게 만들었다.
    탄자니아에서 린디와 마레알레는 아마도 가장 전형적인 민족배반자들일 것이다.  두사람 모두 독일행정기관에 비교하여  하위직책을 맡길 원하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위협받고 있던 자신들의 정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기만을 원했음에 틀림이 없었고, 기술적으로 좀 더 우수한 세력과의 외교게임에서 일부의 이점들을 간파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배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직접적 성과물들은 일견 자신들의 협력을 정당화시켜 주는듯 했으나 그들이 사실상의 정치권력을 상실했다는 점은 정권을 빼앗기기전에 능동적으로 저항했던 사람들의 정치권력상실과 별다를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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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치와 반발 - 아부쉬리(Abushiri)의 저항,1888-9

2001. 11. 21. 15:22
아부쉬리(Abushiri)의 저항,1888-9
    아부쉬리의 저항은 탄자니아인 최초의 저항이었다.  독일 동아프리카회사는 잔지바르의 세이드 칼리파(Seyyid Khalifa)와 동회사에 광물채굴권, 통상조례와 본토수입관세의 징수에 관한 권리를 부여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독일 동아프리카회사의 관리들은 그때부터 대부분의 해안도시들에 걸쳐서 회사의 깃발을 서둘러 게양하였다.  독일의 저의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독일인들은 동일한 깃대위에 술탄의 깃발 옆에 나란히 독일기를 게양할 권리를 주장했다.  팡가니(Pangani)에서 분별없이 잔지바르의 깃발을 제지한 사건은 곧 독일이 조차하고 있던 전 해안지방을 휘말려 들어가게 한 폭력소요를 불러일으켰다.  리왈리스(Liwalis)와 아키다스의 해산, 회교사원에 개를 데리고 들어가는 신성모독행위와 새로운 통상과 토지조례의 부과는 해안지방사람들에게 독일인들이 나라를 접수하러 왔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했다.  아부쉬리가 이끄는 해안지방의 사람들은 이것에 단호하게 저항하였다.
    아부쉬리 빈 살림 알-하쓰(Abushiri bin Salim al-Harth)는 팡가니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독일인들이 자리잡으려고 도착한 1888년 8월 8일 팡가니에서 사건이 터졌다.  해안주민들은 독일기 게양을 거부했고 심지어 술탄의 강력한 평화노력까지 거부하면서 새로이 도착한 사람들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얼마후 바가모요(Bagamoyo), 탕가(Tanga), 미킨다니(Mikindani)와 킬와(Kilwa)주민들이 독일인들에 맞선 폭동에 팡가니주민들과 합류했다.  10월까지 잔류한 독일 동아프리카 회사의 관리들이 다레살람(Dar es Salaam)과 바가모요에서 포위되었다.
    이 중대한 시점에 폰 비스만(Von Vissmann)소령이 그 저항을 진압하고 더 이상의 굴욕으로부터 독일을 구해내기 위해서 독일로부터 파견되었다.  줄루(Zulu), 소말리(Somali), 누비아(Nubia), 터키군이 동반하고, 잔지바르인들이 아랍인들을 도울 가능성에 대한 사전경고의 의미로서 영국해군 해안봉쇄대의 도움을 받아 폰 비스만은 우선 팡가니를 점령하고나서 다레살람북방의 도시들을 진압하였다.  아부쉬리 자신은 탈출했으나 결국 우사가라(Usagara)의 줌베 마가야(Jumbe Magaya)의 배신으로 붙잡혀서 1889년 12월15일 바가모요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비스만은 1889년 해안지방의 거물인 브와니 헤리(Bwana Heri)의 거점이던 사다니(Sadani)를 폭격하였다.  브와나 헤리는 그의 거점이 피폭당하는 사이에 달아났다.  이 폭격으로 해안지방에서의 저항은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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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에서의 독일통치와 아프리카인의 반발

2001. 11. 21. 15:21
탄자니아에서의 독일통치와 아프리카인의 반발
    독일인들은 인원부족에 직면한 이후로 해안지방에 존재하고 있던 정치구조, 즉 아랍식의 아키다스(Akidas)와 줌베(Jumbes)체제를 모방하게 되었다. 그와싸(G.C.K.Gwassa)는 독일인들이 행정중심지들을 설치할 입지를 선정하는 요소들을 개괄적으로 요약해 놓았다.  이 요소들은 주로 다섯항목으로 집약된다.
    첫째, 교역과 교통을 통제하기를 기대하며 교역로를 따라 형성된 구도시들이 독일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탕가(Tanga)노선의 건설이 1891년에 시작되었다.  음프와 프와(Mpwapwa), 타보라(Tabora), 우지지(Ujiji)와 같은 중앙교역로를 따라서 형성된 지역들이 독일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둘째, 생산적 노동력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많은 인구가 존재하는 지역들도 역시 독일행정기관을 끌어들였다.  이런 지역들은 우삼바라(Usambara)와 킬리만자로(Kilimanjaro)지역에 있었다.  동시에 공동의 경제적 잠재력과 이주하기에 적합한 지역들도 독일인의 주둔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었다.  대개의 경우에, 많은 인구를 가진 지역들은 고도의 잠재력을 가진 지역들이었고, 그러한 경우에 독일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척박한 땅으로 몰아냈다.
    세째, 실제적 혹은 잠재적 저항을 통제하려는 희망이 독일인들의 입지선정에 또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데 키사키(Kisaki)와 특히 마헹게(Mahenge) 군주둔지들은 음크와와(Mkwawa)족과 헤헤(Hehe)족에 맞서 싸우던 독일 식민주의자들에게 공급선을 마련해주기위해 설치되었다.  이링가(Iringa)는 점령 당한 이후로 요새화되어져야만 했고 음완자(Mwanza)와 부코바(Bukoba)는 어쩌면 북부지방에 등장한 영국인들을 염두에 두고 설치되어졌을런지 모른다.
    네째, 일부의 경우에 독일인들은 이미 설치되어있던 선교센타부근에 주둔지를 건설하려고 노력하였다.  예컨데, 평화적으로 경제영역을 확장하길 염원했던 폰 조덴(Von Soden)총독은 선교사들을 독일식민지화의 앞잡이들로서 이용하길 원했다.  폰 조덴총독은 베를린 루터파선교사들과 독일 모라비아교파선교사들을 음베야(Mbeya)지역에 독일 영향력을 세우는데 이용하고자 노력하였다.  후에 독일인 주둔지들이 음베야지역에 설치되었다.
    다섯째, 자신들의 통치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독일인들은 맨 처음부터 경제적 이용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러한 정책은 탄자니아에서 일련의 좌절을 맛보았다.  우선 독일동아프리카회사와 회사의 이익을 독점코자했던 칼 피터스(Carl Peters)가 주주수를 소수로 유지했기때문에 탄자니아로 유입되는 충분한 자본투자가 부족했다.  게다가 동부아프리카는 유력한 독일 자본가들에 관한 한 미지의 땅이었다.  그 정책은 현지의 수익성있는 장사를 찾아내어 지배하는데 독일인들이 실패함으로써 또한 늦어지게 되었다.  어쨌든 불충분하긴 했으나 존재하고 있던 교역체계는 잔지바르인, 인도인과 아랍인 상인들의 수중에 확실히 들어가 있었다.
    경제적 이용에 대한 좌절로 인하여 독일인들은 3가지 방식으로 농업개발을 장려하였다.  첫째, 독일인들은 열대플랜테이션을 개발하기위하여 아프리카인 노동력을 이용하고자 시도했으나 아프리카인들이 이런식으로 이용당하길 꺼려했기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둘째로, 식민정부는 고지지역에서 유럽인들의 직접적 농장경영을 장려했고 그 결과로써 파생되는 고도의 잠재력을 지닌 지역에서의 정착민들에 의한 토지수탈은 초창기의 예측과는 맞지 않았다.  셋째, 식민정부는 아프리카인들을 종종 최악의 노동조건하에서 현금작물을 재배하게 했다.  이는 독일인들에게 아프리카의 원료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저항이 분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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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점령과 반발 - 케냐의 반발 3

2001. 11. 21. 14:47
(iv)카비론도(Kavirondo)의 반발
    카비론도는 해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루오(Luo), 아발루야(Abaluhya) 그리고 아바구시(Abagusii)부족들이 무단정주하는 습관때문에 알려진 이름이다.  카비론도는 저항하였고, 협력도 하였다.

    (a) 왕가(Wanga)족의 무미야(Mumia)
    왕가족 족장인 무미야는 초기부터 외부인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상아와 노예를 찾아다니던 아랍과 스와힐리인 대상들은 무미야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영토는 해안에서 우간다로 향하는 통로 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회사의 사람들이 무미아의 호의를 알아차리자, 그들은 무미아의 영토에 중간기지를 설치하였다.  영국정부의 점령이 시작되자, 이 중간기지는 서부케냐의 사령부가 되었고, 1920년 사령부가 카카메가(Kakamega)로 이동할때까지 사용되었다.
    무미아는 두가지 이유때문에 협력하였다.  그는 심각한 국내,외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현대무기의 효능을 알고 있었다.  영국에 우호적이 됨으로써 그는 전통적인 적대신에 국가와 그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키고 공고화시키기를 희망하였다.  둘째, 영국과의 접촉으로부터 물질적 이익이 있었다.  1909년 그는 봉사와 충성의 댓가로 최고군주(Paramount Chief)가 되었다.

     (b)부쿠수(Bukusu)의 저항,1895
    카비론도 (Kavirondo;서케냐)의 통제장교인 스파이어(Spire)는 라비네(Ravine)기지로 대상을 파견하였다.  그들 중 여섯명이 총을 가지고 부쿠수족으로 탈출하였다.  후에 부쿠수족은 여섯명을 풀어주었지만 그들은 총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 후에 총을 찾아오기위한 원정대가 전멸하였다.  상황을 역전시키기위해 그랜트 소령(W.Grant)은 부쿠수에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부쿠수족은 강력하게 저항하였지만 결국에는 패배하고 말았다.

     (c) 루오족의 저항과 협력,1899
    루오족의 일부는 저항하였고 일부는 협력하였다.  사크와(Sakwa),우요마(Uyoma),세메(Seme)의 루오족은 우간다를 향해가는 대상과 정부관리들을 계속 공격하였다.  게다가 사크와족 주민들은 짐꾼으로 종사하라는 지시도 거부하였다.  더우기, 그들의 계속되는 공격은 동맹자중 하나인 무미아의 안전에 위협이 되었다. 이에따라 1899년 호블리(Hobley)가 루오족에 대한 대규모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호블리의 작전에서, 겜(Gem)과 아셈보(Asembo)족 주민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겜족의 족장인 오데라 아캉고(Odera Akang'o)가 동맹자였으며, 한편 아셈보족의 주민들은 아캉고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었고 동료로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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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점령과 반발 - 케냐의 반발 2

2001. 11. 21. 14:47
(iii)난디(Nandi)의 반발,1895-1905
    우간다에 이르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영국은 난디지방을 통과하여야만 했다.  난디는 네가지 주요 이유를 들어 저항하였는데, 사뮤엘 아랍 은게니(Samuel Arab Ng'eny)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a)난디족의 자부심
    당시 난디족은 원정전쟁에서 승리를 경험하였으며, 주변 부족에 대한 군사적,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백인이 그들의 생활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우월하다고 믿고 있었다.  1944년 헌팅포드(Huntingford)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 '난디족은 스스로를 백인보다 우월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문명의 영향력에 의해 야기되는 어떠한 변화도 이러한 사실의 관점에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우월의식을 갖고 있는 난디지방으로 진출하면서 영국은 난디주변부족들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한 일들을 행하였다.  이것은 외부인들에 의한 그들의 완전성의 심각한 파괴행위였고 반드시 격퇴되어야할 것들이었다.

     (b)유럽인의 외모
    유럽인들은 그들의 의복과 피부색때문에 사악한 사람들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그들이 총을 발사할때 내는 소리에 의해 더욱 굳어졌다.  그 소리는 난디 여인들이 부족춤을 출때 그들의 가죽치마를 두드리는 소리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결론은 이 유럽의 악마들이 여성의 유형이고 따라서 즉시 추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c)킴뇰레(Kimnyole)의 예언
    킴뇰레는 전 오르코이욧(Orkoiyot)이었다.  그는 언젠가 난디족이 외부인의 통치를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그는 동쪽의 호수 (인도양)에서 커다란 뱀이 나와서 연기와 불을 내뿜으며 서쪽호수(빅토리아호수)로 갈증을 풀기위해 갈것이라고 말했었다.  그 뱀은 철도로 판명되었고, 철도건설은 난디족에게는 큰 두려움을 주었다.  이 언젠가는 이제 예언에 나온 뱀, 즉 외부의 '여성악마'의 출현과 더불어 현실로 다가왔다.  난디족은 이러한 현실에 저항하고 그들의 땅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였다.

     (d)토지문제
    1905년에는 습격과 살인이 발생하였고 난디족에 대한 토벌대가 메이너츠하겐(Meinertzhagen)지휘하에 파견되었다.  메이너츠하겐의 원정 결과, 난디족은 두가지 이유에서 철도 부근에서 추방시켜야 한다고 결정되었다.  첫째, 만약 Kepchepkendi와 Kamelilo를 북부의 카비욧(Kabiyot)으로 추방하지 않으면, 그들은 킵시기스(Kipsigis)와 힘을 결합할 것이며, 영국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은 작업중인 철도공사를 중지시키게 될 것이다.  둘째 더 중요한 것으로, 정부가 이 지역을 탐내고 케냐 일부지역이 백인 정착민에 의해 점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난디족을 이동시키려는 제안은 많은 분노와 반대를 야기시켰고, 임박한 행위에 적법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정부는 난디족에 '평화협정'을 재촉하였고, 킵쳐(Kipture)에서 조인되었다.

     킵쳐평화협정
    이 협정은 마닝(Manning) 장군과 난디족 족장들 사이에 체결되었다.  예상했었듯이, 이 조항은 난디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사인하는 부분은 떨어져 있었다.  이 협정은 사실상 최후통첩으로 끝나고 있었다.  첫째, 1906년 1월까지 메이너츠하겐이 정하고 있는 거주지로 모여야 하며, 만약 그 기간까지 난디족이 새로운 거주지로 이동하지 않으면 군대가 동원될 것이고, 모든 '살인자들'은 새로운 당국에 넘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상했던대로 정해진 시간까지 난디족은 이주하지 않았으며 무력의 사용이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난디족은 다시 한번 저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부족의 일부만이 참가하였다.  나머지는 오랫동안 계속된 전투로 지쳐있었고, 무관심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저항은 실패로 끝났다.  그후 난디족은 저항은 거의 10년간 계속되었다.

     난디족의 저항이 오래 계속된 이유
    다른 부족의 저항과 비교해 볼때, 난디족의 저항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난디족은 전통적으로 호전적인 부족이었고 평화시에도 점은이들은 무기를 가지고 힘든 훈련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전사들에게는 유럽인들의 존재는 그들에게 좋은 훈련기회를 제공하였다.
    일부 전사들은 새로운 이방인들이 너무도 이상해서 그들의 완전한 제거는 의무가 되었다.  이 임무는 난디지방의 성격에 의해 훨씬 흥미롭게 전개되었는데, 난디지방은 그들이 익숙해져 있는 게릴라전을 벌일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게다가 전사들의 젊은 혈기는 저항이 계속되도록 만들었다.  동년배인 킴니게(Kimnyige)는 그들의 부족사회를 방어하기 위해 의존해야하는 미래의 지도자로서 그들 자신을 내세우기를 원했다.  그들의 명예는 위태로워졌고 그들에게 있어서 항복은 이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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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점령과 반발 - 케냐의 반발 1

2001. 11. 21. 14:46
보호령과 케냐의 반발
    1894년 우간다에 대한 보호령의 선포는 케동계곡(Kedong)과 해안지역 사이에 위치한 회사의 영토에 무슨 변화가 생기느냐하는 논쟁이 뒤따랐다.  1895년 7월 1일, 영국정부는 우간다와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통신망을 보호하기 위하여 해안으로 향하는 모든 통로의 통제권을 장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한 점령은 또한 우간다와 나일계곡의 전략적 통제를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이 지역은 이제 영국의 동아프리카 보호령이 되었다.
    그러나 점령은 우간다에서와 같은 어떠한 합의도 없이, 협상할 족장들이 없었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구실로 실행되었다.
    영국의 점령에 대한 잔지바리(Zanzibari) 아랍인들의 반발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잔지바리섬의 술탄 하메드 빈 트와인(Hamed bin Thwain)은 회사통치의 종식은 본토의 군주로서 그의 부상을 입증하는 것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더우기, 회사의 통치가 해안의 아랍인들사이에서 전혀 인기가 없었고, 아랍인의 우위가 언젠가는 확보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영국정부의 점령은 따라서 잔지바리와 해안의 아랍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분노는 잔지바르섬에서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지는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 영국의 통치는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i)음바락 빈 라쉬드(Mbarak bin Rashid)의 반발,1895-6
    이 지역은 타카웅구(Takaungu),마즈루이(Mazrui) 왕조시대의 북부지역이다.  살림 빈 하미스엘 마즈루이(Salim bin Hamis-el Mazrui)가 사망하자, I.B.E.A. 회사의 말린디(Malindi) 대표인 맥도걸(K.Macdougal)은 그 후계자로 좀 더 다루기 쉬운 라쉬드 빈 살림(Rashid bin Salim)을 임명하였다.  이것은 이슬람법률에 따르면 중대한 실책이었고, 오히려 음바락 빈 라쉬드(Mbarak bin Rashid)가 총독으로 더 적임자였다.  그는 영국의 간섭에 대해 무력으로 저항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회사의 통치가 1895년에 종결된 것은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기간 동안이었다.  잔지바르의 술탄이나 회사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마즈루이는 잔지바르에 토대를 둔 하딩게(Hadinge)가 영국정부의 이름으로 그 지역의 행정을 장악했다는 소식에 기뻐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새로운 통치자에 대한 폭동을 결정하였다.
    북쪽의 카피니(Kapini)에서부터 남쪽의 방가(Vanga)에 이르는 전 해안지역이 마즈루이편에 가담하였다.  심지어 은고뇨(Ngonyo)의 기리아마(Giriama)족같은 해안의 종족들도 영국에 대한 폭동에 가담하였다.  동아프리카에서 약세였던 영국은 인도로부터 하딩게의 지방군을 돕기위해 군대를 파견하였고, 음바락과 그 추종자들은 패배하였다.
    이 봉기는 충분한 군사력의 부족과 아랍-스와힐리(Arab-Swahili)인들의 지원부족으로 실패하였다.  영국의 우위성은 피할 수 없고, 이에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1896년에는 방가에서 키스마유(Kismayu)까지의 아랍-스와힐리인들은 영국의 보호아래에 들어가야만 했다.  해안에서의 저항이 진압됨에 따라, 영국은 이제 내륙을 좀더 효과적으로 점령할 수 있는 강력한 토대를 갖게 되었다.

     (ii)오가덴 소말리의 반발,1895-1901
    이 지역 반발의 원인은 외부인들이 오가덴의 쥬바랜드(Jubaland), 소말리(Somali)의 초원과 수자원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는데 있었다.  1897년 오가덴 소말리의 족장이 사망하자, 이 지역에서 아직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지 못했던 영국은 오가덴에서의 그들의 권리가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가덴은 새로운 질서에 반항하며 더 많은 수자원과 초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주변지역을 계속 공격하였다.  이러한 공격 가운데에는 욘테(Yonte)에 있는 영국의 전초기지에 대한 공격도 있었다.  영국은 오가덴을 응징하기 위하여 원정대를 파견하였고, 벌금으로 500마리의 소를 지불하여야 했다.
    1900년에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는 소말리는 쥬바랜드의 부판무관인 제너(Jenner)를 살해하였다.  이에 두번째 원정대가 트레버 터넌(Trevor Ternan)대령의 지휘로 파견되었다.  소말리는 이 전투에서 150명의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오가덴은 완전히 패배하지는 않았고, 얼마간 평정을 찾았으며, 정부통제는 쥬바랜드가 이태리에 양도된 1925년까지 설립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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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점령과 반발 - 우간다의 반발

2001. 11. 21. 14:43
     보호령과 우간다의 반발
    우간다에서 루가드(Lugard)가 떠나자마자, 영국정부는 동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특별행정관을 임명하였다.  우간다를 보호령으로 삼으려는 영국의 의도를 알리기위해 제랄드 포탈(Gerald Portal)이 1893년 4월 1일 도착하였다.  5월에 그는 무왕가(Mwanga)와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의 내용은 카바카(Kabaka)가 회사 대신에 영국정부의 보호를 받아들이고 영국의 허락없이는 어떤 국가와도 관계를 맺지않으며 재정에 관한 거의 절대적인 통제권을 영국에 이양하는 것이었다.  이후 포탈은 부간다를 영국의 지배하에 억류하기 위한 건의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11월에 콜빌(Colville) 대령이 과도 정부 행정가로서 파견되었다. 그는 즉시 분요로(Bunyoro)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i) 콜빌대령과 분요로 반대운동, 1893
    콜빌 대령은 도착 직후 분요로에 대한 반대운동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분요로는 정복되지 않았고 영국의 동맹자 토로(Toro)의 평화를 계속 위협하고 있었다.  또한 벨기에가 나일강쪽에서 영국의 영토로 침입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분요로에 대한 공격은 콜빌로 하여금 이 두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반대운동은 1893년 12월에 시작되었다.  한달만에 호이마(Hoima)에 근접해 있는 카벨레가(Kabalega)의 수도가 점령되었다.  소규모의 병력만이 카발레가의 영향력이 되살아 나는 것을 막기 위해 분요로에 잔존하였지만 왕국의 공식적인 합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카발레가 정복에 있어서 그들 역할에 대한 보상으로써 바간다(the Baganda)는 분요로의 동부와 남동부, 특히 중요한 지역인 키타라(Kitara) 왕국의 전 수도인 무벤데(Mubende)의 넓은 지역을 합병하려 하였다.
    콩고자유국가(the Congo Free State)의 레오폴드2세가 그 영토를 나일강에서 확장하려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은 1894년이었다.  그는 이런 운동임이 그와 I.B.E.A. 회사의 맥키논(Mackinnon)간의 협정의 도움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얼마동안, 자유당 수상인 로즈베리(Rosebery)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 지역을 점령하려는 영국의 희망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프랑스도 같은 방향에서의 야망을 갖게되었다는 사실에 직면하자 로즈베리는 콩고 자유국가를  프랑스와 영국 영토의 완충국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그는 레오폴드2세와 협정을 체결하였다.
    1894년 5월 12일의 협정에서 레오폴드는 영국의 영토가 1886년과 1890년의 영-독 협정에 의해 자신에게 할당되었다고 생각했다.  영국 영토와 콩고자유국가간의 경계는 동위 30번째 자오선에 고정되었고 독일 영토의 북부에서 부터 콩고-나일강 유역까지 연결되었다.  그 대신에 영국은 레오폴드에게 나일 서쪽에 있는 긴땅을 레오폴드 생전에 임대하였는데 그 땅은 알베트 호수에서 수단의 파쇼다(Fashoda) 까지 뻗어있었다.
    영국은 이제 이전 보다 더 많이 우간다에 관여하게 되었다. 1894년 8월 27일 영국은 부간다를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다음해인 1895년 초대 총독으로 어니스트 버클리(Ernest Berkely)가 임명되었다.  1896년 그는 분요로,토로,안콜레(Ankole) 그리고 부소가(Busoga)를 보호령으로 삼았고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영향력은 초기에 토로에 대한 분요로의 위협에 대한 도전을 받았었다.  1897-9년의 무왕가의 폭동과 수단군의 반란이라는 두 폭동에 의해 거의 제거되었다.

     ii) 무왕가의 폭동, 1897
    이전 3년간은 무왕가가 영국의 통치에 복종하려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이 기간에 영국의 새로운 체계에서 참을 수 없는 정치적 좌절을 겪었다고 느꼈으며 이것은 그에게 단지 진정한 권위는 두 기독교 카티키로스(Katikiros)가 쥐고있고 재판장, 회계국장이라는 명칭을 갖게했다.  그는 이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1897년 7월 6일 그는 새로운 영국의 행정에 저항한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수도를 탈출하였다.  그는 부간다 남서부에 있는, 영국의 영향력이 아직 미치지 못한 부두(Buddu)지방으로 피신하였고 즉각적인 지지를 받았다.  놀랍게도 캄팔라(Kampala)와 다른 지역에서 만약 누군가 무왕가를 지지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열광적으로 표시하지 않았다.  두명의 기독교 카티키로스는 상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영국의 통치가 시작하면서 카바카와 그 부하들이 권력을 잃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과는 달리 기회주의적인 움직임으로 영국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정했다.  부두에서 무왕가는 패배하였고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탈출하였다.
    총독대리 트레버 터난(Trevor Ternan) 대령은 공식적으로 카바카를 폐위시키고 전통에 따라 무왕가의 어린 아들 다우디 츠와(Daudi chwa)의 계승을 선포하기 위해 주요 족장들을 캄팔라로 소집하였다.  새로운 카바카를 돕기위해 세명의 섭정관이 임명되었다 : Apolo Kaggwa(원로 Katikiro), Stamislaus Mugwanya(원로 카톨릭 족장), Zachary Kisingiri(원로 개신교 족장)
    무왕가가 그의 새로운 피신처인 안칼레(Ankale)에서 지지를 얻게되자 영국은 경쟁자 중 한명을 지원하였고 이에 따라 그 지역에서 영국의 통제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1899년 분요로의 망명자인 무왕가와 외부인에 대한 반대가 가장 지속적이었던 카발레가는 체포되어 키스마유로 추방되었다.  그곳에서 카발레가는 기독교인이 되어 존(John)이라는 세례를 받았고 1923년 분요로로 돌아오는 길에 진자(Jinja)에서 사망하였다.  무앙가는 망명중 세이셜(인도양 서부에 위치하는 공화국)에서 사망하였다.
       iii) 수단군에 의한 폭동, 1897
    이것은 카발레가와 무왕가가 했던 것 처럼 영국 통치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만은 아니라 그들이 영국으로부터 받은 대우에 대한 군인들의 반발이었다.  관계된 군인들은 무왕가에 대한 반대운동에 참가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 군대는 프랑스군이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던 지역의 방어를 위해 맥도날드(Macdonald) 소령의 지휘로 엘다마 라빈(Eldama Ravine)으로 진격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그 명령에 불복종하고 반란 중이던 부소가(Busoga)의 루바요새로 철수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다른 수단 군대와 함께 포위되었지만 1898년 분요로와 나일 북부쪽으로 탈출하였다.
          군대의 불만
    수단 군대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이유로 폭동을 일으켰다.
    (i) 그들의 봉급이 연체되었다.  이것은 충분한 의복의 공급을 받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에 의해 야기되었는데 의복은 동아프리카에서 일상작인 화폐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ii) 그들은 장거리 작전에서 일상적인 관행이 되었던 부인 동반이 허용되지 않았다.
    (iii) 그들은 맥도날드 소령의 지휘를 따르지 않았는데 맥도날드 소령은 그들을 경멸하였고 그들의 지도자인 세림 베이(Selim Bey)를 학대하였다.
    (iv) 그들은 불필요하게 과도한 업무를 담당한다고 느꼈다.  그들은 분요로에서 전투를 했다.  그리고 다시 난디와 협곡(Rift Valley)의 터겐(Turgen)에 대항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후 또다시 무왕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철수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들이 싫어하는 맥도날드 소령을 어떤 장소까지 호위하기 위해 엘다마 라빈(Eldama Ravine)으로 가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무왕가와 수단군인들의 폭동은 우간다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두번의 폭동이 모두 실패하였지만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폭동의 결과와 의의
    영국은 막대한 액수의 자금을 폭동 진압에 지출해야 했고 이것은 영국 정부로 하여금 보호령에서 좀 더 명확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이에따라 1899년 해리 존스톤(Harry Johnston)경은 특별총독을 임명하여 우간다에 파견함으로써 영국에 재정적 부담을 주는 보호령을 어떻게하면 발전시킬 수 있는가를 검토케 하였다.  바간다(Baganda)족장들과의 치밀한 협의끝에 1900년 부간다협정이 체결되었다.

     부간다 협정,1900
    부간다협정은 외부인이 아프리카인들과 제휴하여 작성한 문서가운데 가장 포괄적이고 복잡한 것이다.  그것은 네가지 주요 문제를 다루고 있다.

    (a) 재정
    바간다는 영국정부에 대해 3루피(인도,파키스탄, 스리랑카의 화폐단위)의 가구세를 지불토록 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사자saza'추장들과 장관들에 의해 징수되며, 그들은 이에 대한 보수를 받는다.  카바카(Kabaka)와 루키코(Lukiko)의 동의없이 바간다에 대한 더 이상의 과세는 없었다.

    (b)국경
    부간다 영토의 두배확장과 예전의 10개에서 20개로의 saza숫자의 증가가 승인되었다. 새로운 경계는 최근에 분요로(Bunyoro)로부터 합병된 지역도 포함되었다.

    (c)정부체계
    정부의 간다(Ganda)체계는 조지 윌슨(George Wilson)에 의해 제안된 방향에 따라 수정된 것을 제외하고는 유지된다.  카바카는 '전하 HisHighness'라는 칭호가 붙여지며, 나이가 들면 국민을 직접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카바카는 세명의 장관, 즉 전통적인 카티키로(Katikiro), 새로만들어진 대법원장, 그리고 새로 신설된 재무장관의 도움을 받는다.  루키코는 이제 최고법정일뿐만 아니라 부족의 입법부로 법률화된다.  처음으로 그 인원이 고정되었다.  20명의 saza족장, 3명의 장관, 60명의 명사 그리고 카바카가 임명한 6명의 사람들이다.  이것은 카바카가 이전에 행사했던 권력을 상당히 축소시킨 것이다.

     (d)토지분쟁의 해결
    토지는 중요한 문제였고, 협정은 토지소유를 안정시켜 토지사용의 개선을 유도하려고 노력하였다.  전체토지의 절반은 왕실소유가 되었다.  따라서 나머지는 카바카, 그의 가족, 장관, saza 족장 그리고 1,000명의 소부족 족장에게 분배되었다.  이것은 세가지 면에서 혁명적인 것이었다.  카바카와 족장들은 자유보유의 명칭이 허용되었고, 반면 전통적으로 부간다의 임명된 족장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했고 다만 카바카를 대신하여 토지를 돌봐야 했다.  둘째로 토지를 분배받은 사람들은 과거처럼 집단적이 아니라 개인적인 토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세째로 'mailo'소유자들은 그들 토지에 있는 가구마다 2루피의 임대료를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따라서 새로운 형태의 무단점유체계의 배경이 되었다.

     부간다 협정의 중요성
    1900년의 협정은 몇가지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은 보호령내에서 부간다에 수혜적인 지위를 보장해 주었지만 카바카는 부간다내에서 더 이상 군주로 군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단지 보호령정부와 바간다간의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더욱이 이 협정은 루키코에게 거의 의회와 같은 권한을 부여하였다.  루키코는 부간다의 법률을 제정하였고 최고법원이었다.  이것은 후에 보호령을 대표하는 입법부의 설치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부간다협정은 또한 초기의 기독교정당들과 그들의 회교도 동맹들의 지도력을 승인하였다.  비록 소수이지만 그들이 부간다의 정치무대를 지배하였다.  예를 들면, 복원된 루키코의 모든 구성원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 신자들이었다.  협정에따라 토지는 기독교나 회교도들에게만 분배되었다.  토지정리는 후에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교환경제가 생존경제를 대체하게되자, 토지분배로부터 제외된 사람들은 질투심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일부사람들에게 유포되었는데, 왜냐하면 자기의 토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루키코 구성원에 부여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양쪽은 협정을 수용할 만 했고, 존스톤은 유사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토로(Toro) 와 앙콜레(Ankole)로 갔다.

     토로협정,1900
    이것은 부간다협정보다 짧고 단순한 것이었다.  모든 미경작토지는 왕실소유가 되었지만 무카마(Mukama)와 일부 족장들에게 토지소유권이 허용되었다.  무카마는 그가 영국에 충성하는 한 루웬조리(Ruwenzori)밑에서 많은 공국의 통치자로서 인정받았다.  주택세와 gun taxes 가 또한 제정되었다.
    토로협정은 군주국의 장래에 매우 중요하였고,무카마 카사가마(Mukama Kasagama)의 지위도 확실해졌다.  음왕가와 카발레가(Kabalega)와는 달리 카사가마는 결코 영국을 떨쳐버리려 하지 않았고, 그의 연방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얻었다.  따라서 이 협정은 분요로(Bunyoro)로부터 토로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부간다로부터는 가능케하였다.

     안콜레(Ankole)협정,1901
    1900년에 영국은 안콜레의 통치자인 무가베(Mugabe)가 주변국가들을 자신의 통치하에 두는 것을 지원하였다.  1901년의 안콜레협정에 의해 주변국은 무가베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왕국의 규모는 두배가 되었다.

     분요로(Bunyoro)
    1933년까지 분요로협정은 없었다.  이 지방의 정복은 기정사실로 간주되었고, 존스톤은 그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1900년, 죠지윌슨(George Wilson)이 그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새인물, 그러나 전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통치자를 취임시켰는데, 왜냐하면 카발레가(Kabaldega)가 망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카발레가의 아들인 두하가(Duhaga)였다.  곧 그에 대한 족장들의 충성심의 증거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1901년 영국과 우간다영토의 왕국간에 실질적인 해결책이 만들어졌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침략과 저항사

외국의 점령과 서아프리카에서의 저항 형태

2001. 11. 21. 14:41
비교 요약
    식민지 획득에 대한 프랑스의 태도는 영국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러한 태도는 일련의 굴욕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들은 200년전 영국에 의해 카나다와 인도에서 강제로 축출되었다.  그들은 이후 1871년의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에서 또다른 심리적 좌절을 경험하였다.  영국은 1882년 이집트문제에 관한 그들의 행동에서도 전혀 상황을 개선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는 어디에서건 이에 보상하려는 열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같은 사실들이 서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이 불모지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의 정복은 그 지역의 유용성과는 관계없이 행해진 것이었다.  정복은 종종 파리로부터 지시나 허가없이 즉석에서 군대나 프랑스인에 의해 행해졌다.
    한편 영국은 상업적인 이유때문에 서아프리카에 이미 진출해 있었다.  만약 그들이 영토획득에 관심이 있었다면, 영국정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단지 도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얼마간의 지원을 하였다.  종종 정부 자체도 정복에 있어서 효과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정복은 단지 정부자체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지역내의 경제적 잠재성의 평가의 결과였다.  영국은 나이지리아를 제외하고는 사막이나 오지보다는 상업성이 있는 해안을 점령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서아프리카 정복에 있어 영국과 프랑스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원주민들과의 협상을 통한 해결방안에 대한 프랑스의 혐오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국내에서도 평화로운 항복이 없었던 것처럼, 정복하는데 있어서도 잔인함과 무례함을 보였다.  군대에서도 진급은 그들의 업적의 결과였고, 그 업적은 사용한 방법이 아니라 전리품의 규모에 의해 평가되었다.  프랑스의 이러한 태도는 아프리카국가들의 생존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낳게하는 데에도 나타났다.  잔인한 정복방법은 잔인한 저항방법을 야기시켰다.
    한편, 영국은 협정체결이라는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우선 족장들의 신임을 얻고 그리고 나서 아랍인들에게 낙타를 주는 것과 같은 대우를 줌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점차 빼앗으며, 만약 그가 완전히 비협력적이 되면 그때 폭력에 의존한다.
    게다가 영국의 정복은 그들이 관심을 가진 국가대부분의 불완전한 속성에 의해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이들 국가들은 대부분 비회교도국가들이며, 그들의 지도자는 이데올로기적 또는 종교적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  반면 프랑스는 비신도들에 의한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코란(Quran)에 의해 움직이는 거의 광신도적인 회교지도자들을 상대했다.  사모리(Samory), 알하즈 우마르(Alhajj Umar) 그리고 아마도우 세코우(Ahmadou Sekou)와 같은 회교지도자들에게 있어 프랑스에 대한 저항은 외부의 이교도에 대한 성전'jihad'일뿐만 아니라 그들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정치적 전쟁이었다.  따라서 외부인에 대한 저항은 강력했으며 아이보리코스트같은 작은 국가들도 프랑스에 27년간이나 저항하였다.
    영국에 의해 점령된 왕국은 대부분 규모면에서 작았을뿐만 아니라 아주 견고한 국경을 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영국이 각 국가들을 잇달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중앙집중화되고 광신도적인 이슬람왕국뿐만 아니라 사모리와 알하즈 우마르의 왕국처럼 고도로 기동성있고 팽창주의적인 제국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불운을 겪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그들의 목표조차 계획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목표물들이 영구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서아프리카국가들은 정치적으로 약한 상태에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불만에 가득찬 종족적 집단때문이었다.  예를들어 거대한 수단제국의 대부분은 주로 최근에 나타난 소코토(Sokoto), 라베(Rabeh), 토콜로(Tokolor) 그리고 만딘카(Mandinka)로 구성되었다.  그런 국가들은 불가피하게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신민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이슬람 정복자들, 소코토 칼리페이트(Sokoto Caliphate)의 그와시(Gwasi), 라베의 카누리(Kanuri), 아마도우 세코우(Ahmadou Sekou)의 티자니(Tijani) 그리고 토콜로의 밤바라(Bambara)에게 충성을 나타내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러한 불만을 이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정치적 약세는 또한 많은 국가에 있어 후계자 승계의 부재에 의해서도 야기되었다.  대부분의 왕실가족들은 가장 높은 지위에 누가 오르든지 간에 잠재적인 반대자가 되었다.  게다가 민족주의, 인종적 단결 또는 공통의 대의명분과 같은 정서가 발전되지 못했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이교도를 몰아내기위해 사모리와 연합군을 형성하는것을 아마도우가 거절한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또한 생계농업에 토대를 둔 국가와 유럽의 산업화된 국가간의 경쟁에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이것이 처음부터 싸움을 불공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군사적 약세는 아프리카인이 패배하게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아프리카국가들은 현대식 무기가 없었고, 무기도 부족하였으며, 전통적인 전투방법은 잘 훈련된 유럽군과 현대식 무기를 상대할 수 없었다.  사모리와 아이보리코스트의 해안국가들과 같이 이러한 약세를 적절히 재검토한 사람들은 게릴라전법의 사용으로 오랫동안 저항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나머지 국가들은 정면대결하지 않고 적에게서 도망하는 것을 비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용감한 원칙에 따라 매우 값비싼 댓가를 치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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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점령과 반발 - 감비아의 점령과 반발

2001. 11. 21. 14:40
감비아의 점령과 반발
    감비아와의 오랜 친교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별다른 이익도 없이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1891년까지는 영국인의 점령은 없었는데, 그 해에 소닌케(Soninke)의 족장체제가 마라보츠(Marabouts)와의 40년간의 내전으로 파괴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영국의 간섭이 시작될때까지 이 지역에는 정치적 진공상태가 야기되었다.  단지 두명의 마라보츠족 사람만이 저항과 유사한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포데 시라(Fode Silla:1891-94)와 포데 카바(Fode Kabba:1894-1900)였다.
    실라는 영국에 맞서 장기전을 폈으나 1894년 패배하였다.  카바는 마 바(Ma Ba)를 를 계승하여 그 자신을 모디(Mohdi)라고 선포하고 강 주변과 콤보(Kombo)왕국 주변에서 가장 강한 세력자가 되었다.  그는 소닌케의 족장들처럼 바투스트(Bathurst)에서 영국에 위협을 가했으며 게릴라전을 통해 영국에 저항하였다.  그는 1900년에 마침내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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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점령과 반발 - 시에라레온의 점령과 반발

2001. 11. 21. 14:40
시에라레온의 점령과 반발
    시에라레온은 해방된 노예들을 위한 식민지로서 1787년에 세워진 나라였다.  박애주의자들을 기독교와 합법적인 무역이 언젠가는 템네(Temne)와 멘데(Mende)족들이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남아있는 내부에까지 이르기를 희망하였다.  1896년, 시에라레온 오지에 보호령이 선포되었고, 이러한 부족들은 그들의 권력이 무너지는 비애를 당하였다.  그들의 불만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들은 1898년 폭동을 일으켰다.

     (a)템네-멘데족의 폭동.1898
    1898년의 폭동은 세가지-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호 연계된 원인을 갖고 있었다.

     사회적 원인
    처음부터 크레올(Creole)로 알려진 해안의 반카스트사회는 외국문화의 독점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선교활동의 지대한 영향력을 경험하였고, 교육부문을 통제하였으며, 이런 혜택으로부터 토착주민들을 배제시켰다.  그들은 토착주민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인 '크리오(Krio)'를 구사하였으며, 전통적인 것은 모두 야만적이라는 오명을 씌웠으며, 오지에서는 전에 전혀 볼 수 없었던 병적우월감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문화적 침략은 템네와 멘데족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크레올인들은 또한 다른 종류의 강박관념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1890년 국경경찰부대가 창설되었고 크레올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계급사회적 배경은 오지에서 그들이 쉽게 적응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들은 모욕을 받고 상심하였다.  그들의 거부감때문에 그들은 복수와 위협을 하고, 내륙에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경제적 원인
    1896년 토지 분할에 대한 포고령과 주택세는 주민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이 포고령에 의하면 모든 광물에 대한 권리는 황실에게 주어지고 쓸모없거나 거주할 수 없는 땅은 주민들에게 분배되었다.  토지정책은 아프리카인들이 이주 경작을 한다는 사실과 외부인에 의한 배정은 그들의 땅을 쓸모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그들 토지로 부터의 소외는 주민들에게 많은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가장 큰 고통은 주택세에 의한 것이었다.  카듀(Cardew)행정부는 방 세개이상의 주택에는 10실링, 그 이하의 주택에는 5실링의 세금을 부과하였다.  주민들은 이것을 앞으로 그들이 더이상 자신들이 건축한 주택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는데, 왜냐하면 주택을 소유하지 않으면 세금을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세금은 그들 주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898년에 발생한 폭동은 그들의 독립을 수호하려는 전쟁이었다.
    크레올인들의 활동은 상황을 전혀 개선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중간상인의 무역을 독점하였고, 착취자로서 내륙의 족장들에게서 중간상인의 지위를 빼앗아 갔다.

    정치적 원인
   카듀총독이 인정했듯이, 템네와 멘데족이 폭동을 일으킨 것은,
    ['독립과 옛 질서로의 복귀에 대한 욕망때문이었다.  그들은 지방관리들과 국경경찰들이 주장한 것처럼 백인의 패권에 싫증이 난 것이다.']
    영국이 임명한 지방관리들은 족장들의 전통적인 권위를 침해하였다.  족장들은 점차 족장지위에 대한 전통적인 주장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임명되었으며 사실상 그들의 지위도 점차 저하되었다.  영국인 또는 크레올인 상급자에 불경하다는 의심이 가는 족장은 약식재판을 받고 공개적으로 매질을 당하였으며 투옥되었다.  국경경찰은 법률을 자의적으로 집행하였다.
    게다가 족장들은 재판이나 시민행정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지방행정가들이 관습법을 몰랐기 때문에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영국인들의 사법적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행정은 사실상 비능률과 부패로 가득차게 되었다.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국경경찰이 행정을 장악했으며, 국경경찰은 대부분 미움을 받고 있던 크레올인들이었다.

     전쟁의 경과
   시에라레온 오지 아프리카인들의 불만은 1898년에 최고조에 달했다.  북부에서는, 템네족 족장인 바이 부레(Bai Bure)가 체포되어 투옥되기 전까지 9개월간 영국에 항전하였다.  그러나 유럽인으로서는 포래 베이 칼리지(Fourah Bay College)의 교장이었던 험프리(W.J.Humphrey)라는 사람만이 살해되었다.
    남부에서의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되었다.  멘데족은 전면전을 벌여, 크레올인과 백인 또는 유럽의 문화를 모방하려는 멘데족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사망한 크레올인들이 1,000명에 이르렀다.  폭동은 결국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보호령 정부에게 두가지 교훈을 남겨주었다.  첫째, 아프리카인과 유럽인사이의 중재인으로서의 크레올인들의 역할이 당시 상황에서는 현실적이지 못했다는 점이며, 둘째, 아프리카인들은 외부인의 통치를 묵인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전쟁의 결과, 내륙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었던 '크레올인화(Creolisation)'의 속도가 그들의 통합을 지키려는 아프리카인들의 의지에 의해 속도가 느려졌다.  크레올인들이 그들에게 할당된 오지에서 무참하게 실패하게 되자, 영국은 영국인 관리들을 통해 오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따라서, 1914년에 이르러서는 서아프리카 어느곳에서도 크레올인들의 영향력은 발휘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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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점령과 반발 - 영국에 대한 판테인의 반발

2001. 11. 21. 14:39
영국에 대한 판테인의 반발
    아산테의 남쪽에 위치한 판테왕국은 만케심(Mankessim)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18세기에 판테왕국은 프라강 어귀에서부터 가(Ga)왕국까지에 이르는 가나 해안지방까지 팽창했었다.  1840년대 이래 판테왕국은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영국은 아산테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킨 사람들로서 환영받았다.  그러니 그 이후 그들은 비폭력적인 저항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이 저항은 교육받은 엘리트와 족장들로서 판테연합(1868-73)을 형성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판테연합(Fante Confederacy)
    맥클린(Macclean) 행정부 시기 이후로 판테인들이 아산테로부터 획득한 독립을 어느 누구로부터도 침해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당시 유럽인의 간섭은 늘어가고 있었고, 판테인들은 그것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판테연합 결성의 직접적인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첫째, 1863년의 영-아산테전쟁은 영국이 판테를 보호하는데 있어 불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만약 아산테가 영국에게 그러한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면 어떻게 영국에게 장래의 안보를 의존할 수 있을 것인가?  판테왕국이 아산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자존의식(self-reliance)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지기 시작했는데, 왜냐하면 영국의 보호에 의존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안한 일이 될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1865년 영국의회 특별위원회는 골드코스트와 판테에서의 영국의 철수를 결의하였다.  판테는 영국의 철수를 신속히 처리하고 곧 있게 될 자치정부를 준비하기 위하여 동맹을 결성하였다.  결국, 판테는 그들의 동맹국인 영국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기 시작한 셈이었다.  예를 들면, 1866년 케이프 코스트의 아그레이(Aggrey)왕이 판테인들에게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해서 영국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판테인들에게는 영국의 배신적인 모습을 강조한 것이었고, 그들의 움직임은 집단적으로 감시되었다.
    동맹을 형성함으로써 해안의 주민들은 헌법과 자치적인 조세체제와 같은 근대적인 방식으로 그들 자신을 결집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1868년 맨케심을 만났고, 헌법이 선포되었다.  계획은 두개의 주요 실체 - 족장과 지식인들로 구성된 회의와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장관을 이들이 선출하는 것 - 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영국이 결국 골드코스트를 포기하지 않으므로해서 성공하지 못했다.
    연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873년 연합은 에두(Edu)와 오투(Otu)왕간의 권력경쟁과 연합에 대한 영국의 적의때문에 해체되고 말았다.  행정가인 우셔(Ussher)와 살리먼(Salimon)은 족장들과 지식인들의 이러한 동맹을 위협적인 도전이라고 간주하였고 연합으로부터 족장들을 탈퇴시키기위해 공격과 위협을 가하였다.  살리먼은 새 대표위원회의 집행위원들을 1871년 더치(Dutch)요새의 구매를 인가하는데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역혐의로 체포하였다.
    그러나 판테의 저항은 시작되지 않았거나 연합의 결성과 함께 끝났다. 그들의 반대는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1852년 식민주의자들이 족장들에게 학교, 도로, 병원을 건설함으로써 식민지를 발전시키겠다고 말했으며, 세금부과의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1854년 사람들은 그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납세를 거부하였다.  1860년에서 1862년까지 정부가 돈을 거두어들이지만 그 돈을 가지고 실질적인 발전계획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족장들과 지식인들의 동맹에 의해 조세저항이 발생하였다.
    연합의 붕괴 이후 거의 30년간 판테는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그들의 결심을 보이고 있었다.  1897년 그들의 토지를 매각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그들은 이에 대항하기위해 원주민권리보호협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무력은 사용되지 않았다.  사용된 방법은 1852년 세금위기시에 족장들이 사용하였던 가나인의 권리에 대한 호소였다.  1898년 협회는 런던에 대표를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식민장관에게 토지법을 철회하도록 설득시켰다.  이것은 협회의 위상을 대단히 강화시키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판테는 협력적인 사회라 하더라도 외국의 침입에 한계를 설정할 수 있다는 좋은 예를 만들었다.  그들은 외국인에 대한 호의 때문에 협력한 것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이유때문에 협력한 것이었고, 이러한 이유들이 충족되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독자적인 진로를 모색하였다.  그들은 아산테에 대한 두려움과 영국이 가져오는 물질적인 이익때문에 영국에 협력한 것이었지 그들이 식민지화되는 것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영국의 안보의 벽이 1863년 아산테의 승리로 심각한 정도로 흔들리게 되고, 영국이 판테의 주권을 계속해서 간섭하게 되자, 판테는 비록 평화적인 방법이었지만 독립국으로 남으려는 그들의 욕망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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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점령과 반발 - 1900년의 영-아산테전쟁

2001. 11. 21. 14:38
1900년의 영-아산테전쟁
    영국은 점령초부터 현지 행정부의 재원뿐만 아니라 1896년 원정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아산테내에서 수입을 증가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행정가들은 소위 '부채에 대한 이자'로서 수입을 증가시킬 계획을 분명히 하였다.  이 수입은 오만헤네(Omanhene)에 의해 징수되었는데, 이들은 거둔 액수의 10%를 차지하였다.
    허즈슨총독은 새로운 계획을 추장들에게 제시하는데 있어서 매우 무례하였다.  그는 아산테의 상징인 황금의자를 요구하였다.  외국인의 그들 주권에 대한 이러한 무례한 도전은 아산테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고, 이 두가지 사건은 1900년의 아산테봉기를 촉발시켰다.  쿠마시가 아산테인의 공격으로 포위되었으나 결국 아산테인들은 패배하고 말았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셀레스(Seychelles)와 엘미나로 망명하였고, 영국은 아산테를 공식적으로 영국황실의 부속지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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