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분할

2001. 12. 5. 15:07
  아프리카대륙의 북부지역은 일찍이 고대 지중해세계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었고 근세에 들어와서는 지리상의 발견 과정에서 동서 해안지대에 약간의 식민지와 무역 거점이 건설되었으나 광대한 내륙지방은 19세기 중엽까지도 미지의 대륙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탐험가 Livingston과 미국의 Stanley 등에 의해 내륙지방의 사정이 알려지게 되자 제국주의로 접어든 유럽열강은 앞은 다투어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20세기초까지지는 완전히 이를 분할하였다. 1875년까지 아프리카에 비교적 확고하게 건설된 식민지는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 프랑스의 Algeria, 그리고 네덜란드인의 후손인 Boer인이 건설한 Orange자유국과 Transval공화국 정도였다.

18세기에 최대의 식민지제국을 건설한 영국은 1875년 이집트의 재정난을 이용하여 1869년에 개통한 수에즈운하의 주식을 매입하여 인도로의 길을 확보하였다. 이집트에 대한 최대 채권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반항하는 아라비파샤의 반란이 일어나자 영국 은 재빨리 출병하여 이집트를 실질적인 보호국으로 만들었다(1882). 한편 남쪽에서는 보어인의 트란스발에서 금이, 그리고 오렌지자유국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케이프식민지로부터 침투하여 마침내 보어전쟁(1899-1902)을 일으켜 두 나라를 합병하고 南阿聯邦을 조직하였다(1910). 이와 같이 남북에 확고한 거점을 확보한 영국은 이를 연결하는 아프리카 종단정잭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그 정책은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과 충돌하여 파쇼다사건을 야기시켰다(1898).

이집트에서 영국에 밀려난 프랑스는 1830년에 획득한 알제리아를 거점으로 남으로는 광대한 사하라(Sahara)사막과 적도아프리카를 얻고 1881년에는 동진하여 튀니지(Tunis)를 얻고 서쪽의 모로코(Morocco)에 세력을 부식하는 한편 동해안의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를 획득하였다(1896).

그리하여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세우고 나일강 상류의 파쇼다로 진출하였으나 영국과 충돌하여 이를 포기하였다. 뒤늦게 국가통일을 달성한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유럽의 평화유지라는 신중한 정책으로 처음에는 국가적인 진출을 삼가고 상인들 의 진출을 후원하는 정도로 그쳤으나 그러한 개별적인 진출을 기초로 삼아 독일령의 서남아프리카 식민지 카메룬(Kameroon), 토고(Togoland), 그리고 동부아프리카 식민지를 획득하게 되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뒤늦게 등장한 이탈리아는 홍해연안의 에리트리아(Eritrea)와 인도양의 프랑스령의 소말리아(Somaliland)를 획득하고 내륙방면으로의 진출은 좌절되었으나 1911년 전쟁으로 트리폴리(Tripoli)를 얻어 리비아(Lybia)를 식민지로 삼았다. 이밖에 스탠리를 후원한 벨기에는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고무생산지인 Congo를 영유하게 되었다(1885). 이리하여 1914년에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의 해방노예가 건설한 리비아(Liberia)와 에디오피아(Ethiopia)뿐이었다. 유럽열강의 아프리카로의 진출은 경쟁과 대립을 불러 일으켰으며 국제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영국의 식민지 경영가인 Cecil Rhodes는 케이프식민지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아프리카 종단철도를 계획하였다가 실패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은 프랑스의 횡단계획과 충돌하여 파쇼다 사건을 발생시켰으며, 프랑스의 튀니스 획득은 이 방면에 진출하고자 한 이탈리아로 하여금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접근시키게 되고, 모로코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독일은 날카로운 대립을 보이기도 하였다.

미국의 독립, 프랑스혁명에 의해서 노예해방의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한편 그것은 노예의 공급원에 불과한 아프리카 대륙에 구미 자본주의 제국이 영토적 야심을 가지기 시작한 과정이기도 하였다. 노예해방과 함께 영국 ·프랑스 ·미국은 이 대륙 내부를 침략하기 위한 교두보(橋頭堡)를 만드는 데 부심하였으며 1787년 M.파크에 의한 나이저강 유역의 탐험을 시초로 내륙 탐방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1787년 시에라리온에 해방노예를 이주시키고 아프리카인에 의한 자유의 나라를 건설하기로 하고 그 이듬해 런던에 ‘아프리카 협회(Africa Association)’를 설립하여 아프리카 내륙의 지리적 ·인문적인 조사연구를 준비하였다. 해방 노예의 이주지에 ‘프리타운(자유의 도시)’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1807년 노예무역이 금지된 이후에는 노예선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정착지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오래지 않아 포기되고 감비아 ·골드코스트(黃金海岸:지금의 가나) 등은 식민지를 만드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세네갈의 생루이를 전진기지로 삼고 있던 프랑스는 적도아프리카로 진출하기 위한 기지를 리브르빌(자유의 도시:1849)이라고 하였으나, 당시 프랑스는 노예무역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영토적 야심도 더 컸다. 미국의 이민 회사가 만든 라이베리아(자유의 나라:1821)만은 1847년 공화국으로서 독립하여 미국의 대(對)아프리카 정책의 기지가 되었다. 한편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원정하고, 이집트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한 영국이 1801년 카이로를 점령하는 사태를 빚었다. 그것은 영국이 북부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북부 아프리카에 대한 영국 ·미국 ·프랑스의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1830년 프랑스는 알제리를 침략하였다.

  한편,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나폴레옹 전쟁(1795∼1803) 때 영국이 네덜란드의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하였다가 네덜란드에 되돌려 주었으나 1806년 영국은 아시아 항로(航路)의 보급기지로서 의의(意義)를 가진 케이프타운을 또다시 점령하였다. 이 결과 네덜란드계(系) 백인들은 노예를 해방(1834)한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 내륙으로 이주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 내륙의 탐험은 망고 파크에 뒤이어 1821∼22년 영국인 탐험대가 지중해를 거쳐 차드호(湖)에 도달하였고 이보다 앞서 1818년 프랑스인들은 세네갈강 유역을 탐험하였다. 또한 1850년 독일인 H.바르트는 지중해로부터 차드호, 나이저강 유역을 탐험하였다.

  동부 아프리카에서는 1848년 독일인 요하네스 레브만이 킬리만자로를 발견하였고, 1850년대에는 영국인 리빙스턴, 1860∼70년대에는 미국인 H.M.스탠리, 1870∼80년대에는 프랑스인 P.S.de 브라자 등이 동부에서 콩고강 유역을 거쳐 남부 아프리카 등의 내륙을 탐험했다. 이와 같은 탐험과 병행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영국 ·독일은 동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850년 무렵부터 산업자본이 발전하여 자유무역론이 굳어졌기 때문에 식민지를 획득, 통치를 한다는 데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때문에 서부 아프리카에서 영토를 획득하는 데는 프랑스가 우세하였으며, 리빙스턴이나 스탠리의 탐험 성과는 벨기에의 식민지 획득을 돕는 결과가 되었다.

  영국 ·프랑스에 이어 뒤늦게 아프리카 분할 경쟁에 참가한 독일은 벨기에와 손을 잡고 식민지 점령의 실적을 올리면서 1884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당시의 구미열강 대표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여 콩고 분지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분할문제를 협의하고 ‘콩고분지조약’을 조인하였다. 이 조약은 대서양 연안에서 인도양 연안에 걸친 광대한 지역에 대해 식민지 보유의 원칙을 약속 결정하였다.

  콩고분지조약의 발효에 따라서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서구 제국은 대(對) 아프리카 정책에서 두 가지 경향을 명백히 하기 시작하였다. 첫째는 특허회사에 의한 경제적 이익의 추구였고, 둘째는 실질적인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기 위하여 무력에 의한 분할의 촉진이었다.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주의국(植民地主義國)에 대해 경제적 이익의 독점을 금하고 기회균등과 문호개방의 원칙을 강요하였다. 이 제약을 벗어나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서 1885∼1900년에 걸쳐 식민지주의 제국은 똑같이 특허회사를 설립하였다.

  특허회사는 식민지 내에서 자원이 풍부한 지역에 대한 토지소유권 ·광업권 ·무역의 권리 등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징세권(徵稅權)을 비롯하여 행정 ·사법 ·입법 및 경찰의 권리까지 보유하면서 이 권리를 배타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영국의 특허회사는 산업자본가의 발언권이 강하고 자본주의적인 자원개발을 추진한 데 비해, 프랑스나 벨기에의 특허회사는 상업자본가나 봉건적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 경영됨으로써 확대재생산을 꾀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강제 노동이나 강제재배에 의한 약탈적인 착취를 일삼았다. 따라서 아프리카는 종래의 노예무역을 대신하여 원자재 등의 국제 상품과 서구 공업제품의 부등가교환(不等價交換)을 강요당하였다.

  한편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 영유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요건(要件)으로서 실질적인 점령과 지배상태를 명시할 것을 식민주의 국가에 요구하였다. 때문에 차드호(湖)를 목표로 한 영국 ·프랑스 ·독일의 군대 파견 전쟁이나, 수단을 점령하려는 영국 ·프랑스군의 충돌(파쇼다사건) 등의 분할경쟁이 진행되었다.

  남부 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系) 보어인(지금의 아프리카너) 공화국 내에서 다이아몬드나 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영국의 침략이 시작되고 1899∼1902년 사이에는 보어전쟁이 계속되었다. 또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통합 지배하려 한 포르투갈, 남서 아프리카와 동부 아프리카(지금의 탄자니아)를 연결하려는 독일, 게다가 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까지 식민지를 연속시키려고 하는 영국 등이 대립하여 콩고 분지 이남의 내륙에서 분할경쟁을 벌였다.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를 둘러싼 분할경쟁이 1912년에 끝났으며, 리비아는 1911년 이탈리아령으로, 이집트는 1914년 영국보호령이 됨으로써 북아프리카를 지배해온 터키의 세력은 일소(一掃)되었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아프리카 대륙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라는 두 개의 형식적인 독립국을 남겼을 뿐 식민지 분할경쟁은 완전히 끝나고 식민지 대륙으로 바뀌었다.

'역사 > 아프리카 분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프리카의 분할  (0) 2001.12.05
레오폴드의 외교  (0) 2001.11.21
레오폴드 2세와 콩고 획득  (0) 2001.11.21
앵글로-게르만 협정, 1890.  (0) 2001.11.21
앵글로-게르만 조약, 1886  (0) 2001.11.21
레오폴드의 개혁운동(Leopold'S Crusade)  (0) 2001.11.07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분할사

레오폴드의 외교

2001. 11. 21. 13:52
레오폴드는 콩고 획득이 다른 세력들 특히 프랑스, 독일, 미국에 의해 방해 받는다는 것을 느꼈고 이에 선수를 쳐 그는 훌륭한 외교적 수완을 표방했다.
다행히 프랑스의 방해는 콩고에 진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프랑스가 콩고를 차지한다는 프랑스와의 약속한 비밀조약으로 프랑스의 반대는 제거시켰다:그는 그의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Congo를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프랑스를 주도 해왔다.
독일의 지지는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주장에 관한 호의적인 관점을 보임으로서 얻어졌다.  미국의 지지는 콩고에 대한 레오폴드의 주된 목적은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의 미국인 비서 스탠드포드(Stanford)가 미국정부에 주장함으로써 획득되었다.
콩고에 관한 레오폴드의 조치에 대한 마지막 방해는 영국으로부터 왔다. 영국은 콩고에서의 그들의 사업적 위치에 관해 심각한 우려를 갖고 있었고 그곳에서 침례교(Baptist)의 선교활동들(missionaries)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갖고 있었다.
1884년 2월 영국은 포르투갈과 콩고강 어귀의 통제권을 포르투갈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것은 레오폴드를 그 해안에 드나드는 것을 차단했다.  레오폴드는 영국상인들에게 경제적 이익이 있는 계약을 제공함으로써 또 프랑스나 포르투갈보다 콩고에서 더많은 이해관계가 있음을 영국에 맹세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이러한 설득에 직면한 영국은 포르투갈과의 조약을 파기하였으나 콩고에 관한 레오폴드의 주장에 대해 완전한 지지를 하지는 않았다.
1884년 11월 베를린 회의가 개최 되었을 때 스탠리는 레오폴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논의했다. 그 회담에서 그는 Virs Chiefs에게 절대적으로 법적 유효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는 그 chiefs들과 그 땅에 대한 권리를 의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레오폴드는 그가 그 지역에서 노예무역을 종결 짓겠다는 약속을 했던 콩고를 통치하기 위한 오직 한 사람이라는 것을 유럽세력에게 확신시키기 위한 노력추구에 전념하고 있었다. 모든 세력에 의한 합법적인 무역 개방을 콩고강에 유지하기 위해 전념해왔다.

'역사 > 아프리카 분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프리카의 분할  (0) 2001.12.05
레오폴드의 외교  (0) 2001.11.21
레오폴드 2세와 콩고 획득  (0) 2001.11.21
앵글로-게르만 협정, 1890.  (0) 2001.11.21
앵글로-게르만 조약, 1886  (0) 2001.11.21
레오폴드의 개혁운동(Leopold'S Crusade)  (0) 2001.11.07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분할사

레오폴드 2세와 콩고 획득

2001. 11. 21. 13:45
이전의 벨기에 콩고는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이다.  콩고가 분할에 연루된 것은 야심가인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에 의해 분할에 선두에 섰다.  이전 젊은 왕자였던 그는 벨기에인의 왕좌에 올랐고 식민지에 대한 그의 욕망은 동양식민지, 특히 자바로부터 네덜란드에 의해 막대한 이익이 투자되었고 네들란드에서 일어나고 있던 것을 그가 관망했던 것에서 이미 커다란  test를 점령했다.  초창기를 제외하고 식민지에 대해 관망을 현실화 했던 레오폴드는 동양에서는 실현가능성이 희박했다.
불행히도 레오폴드의 식민지에 대한 욕망들은 그의 동포의 자원을 낭비하는 것으로써 해외영토를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해외영토로 인해 자원이 낭비된다고 여긴 자국민에 위해 분배되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식민지 원정 시작이 개인적인 일에서 출발되었던 것이었지 국가적 차원은 아니었던 것이 명백했다.
1865년 레오폴드가 왕에 즉위했던 그 무렵, 그는 광범한 지역을 탐색했으며 아프리카 탐험에 관해 연구했다.  1876년 그는 아프리카 국제협회를 설립하였고, 그 협회의 목표는 중앙아프리카에서 산업연구소와 과학연구소를 설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소 들에서는 종교연구소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군사수비대에 의해 보호되었다.  이처럼 레오폴드의 의도는 노예무역폐지에 대한 노력을 강화하기 위해 1878년과 1879년 토보라와 탕가니이카 호수에 the White Fathers Missions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레오폴드의 목적을 고상화 시켰다.  그러나 레오폴드의 짧은 허니문과 더불어 박애행위는 이익생성을 위한 투자로 재빨리 선회했다.

'역사 > 아프리카 분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프리카의 분할  (0) 2001.12.05
레오폴드의 외교  (0) 2001.11.21
레오폴드 2세와 콩고 획득  (0) 2001.11.21
앵글로-게르만 협정, 1890.  (0) 2001.11.21
앵글로-게르만 조약, 1886  (0) 2001.11.21
레오폴드의 개혁운동(Leopold'S Crusade)  (0) 2001.11.07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분할사

앵글로-게르만 협정, 1890.

2001. 11. 21. 13:35
1890년 앵글로-게르만 조약의 배경은 동아프리카와 영국에서 유래했다.  부간다에서 칼 피터스의 조치는 영국에 경고하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1886년 그 조약은 이 지역을 확실하게 지정했으나, 초기에 그에 대한 영국의 연루 때문에 그 지역은 영국령에 속한다고 보통 여겨졌다.  따라서 피터스의 계획은 위협뿐만 아니라 도발의 원인이 되었다.
1890년 독일은 영국과 우호관계를 간절히 원했고, 그것을 위해 많은 자금을 지불할 준비가 되었다.  프랑스-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은 1890년 3월 비스마르크의 몰락으로 , 이것은 러시아와의 Reinsurance조약의 부활을 위해 독일 수상의 요구를 수락하는 것을 황제 윌리엄 2세에 의해 거절되면서 더욱 팽배되었다.  그 새 황제는 러시아의 독재정권과의 동맹을 거절함으로써 그 자신을 진보적인 지도자임을 증명하길 원했고 독일에게는 현대 국가로 보여진 진보세력인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했다.  독일은 하이랜드의 해군기지를 획득하려는 강한 욕망도 갖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식민쟁탈에 참여하여 자국의 식민지 확보에 주력했고 외국 세력들의 분노에 의한 위험에 직면해 있는 식민회사의 파산을 막기 위해 열을 올렸고 조약체결을 위한 협상을 단행했다.
하이랜드 조약으로 알려졌던 1890년의 앵글로-게르만 조약은 우간다를 영국의 수중에 독일에 동부 아프리카와 로데지아, 니아사랜드 간의 인정된 국경을 확고히 했다.  독일은 북방해에 있는 하이랜드의 전략적 섬을 영국으로부터 획득했다.  그의 자긍심을 손상시킨 패배에 낙담해 있던 피터스는 이런 계획에 대해 혹독한 경멸을 나타냈다;  "위투와 우간다" 두 왕국은 북해의 욕조통으로 만족했어야 했다" 고 유감스러워 했다.
그러나 영국과 독일의 영향력의 범위는 동아프리카 분할을 완전히 종결지었던 1890년 협정에 의해 분명하게 정의되었고 그 당시에 매키논은 우간다에서 더욱 신속한 영국의 동아프리카 회사의 활동을 확대하자는 영국 정부의 요청에 대해 더욱 열성적으로 응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분할사

앵글로-게르만 조약, 1886

2001. 11. 21. 13:30
앵글로-게르만 조약, 1886
1886년 11월 1일 체결된 앵글로-게르만 조약은 처음으로 동아프리카를 분할했다.  그 분할에는 세가지 조치가 있었다.  술탄의 지위는 키스마이유, 브라바, 마르카와 모가디슈, 게다가 잔지바르 섬, 펨바, 마피아와 라무를 합병하면서 해안 지방까지 포함하였다.  그러나 킬리만자로에 인접한 대상의 교역로와 술탄의 요구는 무시되었다.  독일의 행동은 로부마(Rovuma) 강과 움바(오늘날 케냐와 국경을 이루는 영역), 빅토리아 호수에 이르는 모든 영토를 소유했다.  위투의 해안선은 게르만에 의해 정해졌다.
사실상 그들 스스로가 우방임을 증명하기 위한 갈망으로 영국은 데레살람(Dar es Salaam)과 판가니(Pangani)에서 관례적 허용기간을 위한 협약에 관하여 독일 회사를 지원하기 위한 위임을 맡았다; 독일인과 킬리만자로 지역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던 술탄 사이에 우호적인 단정을 도모하기 위해; 베를린 조약을 존중하기 위해 술탄을 자극했다.  영국의 국경은 움바 강을 따라 빅토리아 호수에 이르기까지 이어졌고, 타나 강까지 연결되었다.  북쪽의 그 두 강 사이에서의 분할의 몫은 영국의 것이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분할사

레오폴드의 개혁운동(Leopold'S Crusade)

2001. 11. 7. 21:15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분할사

유럽인의 내왕(15 - 18세기)

2001. 10. 22. 10:53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 내항한 최초의 유럽인은 1364∼65년의 프랑스인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기니라는 지명이 유럽지도에 최초로 기재된 것은 1350년 무렵이었다. 사료(史料)에 의해서 확인된 최초의 항해자는 1434년에 북위 26" 의 바하도르곶(率)을 남하한 포르투갈인(人) 질에아네스라고 한다. 교황(敎皇)이 포르투갈에 아프리카 서안의 영토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함으로써 포르투갈인은 항해를 계속하여 디오고캄이 71년 적도(赤道)에 도달했고, 82년에는 콩고강 하구를 발견했으며 88년 바르돌로뮤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했고 97년에는 바스코다가마가 회망봉을 우회해서 나탈에 도달하여 인도양 항로를 발견하였다. 1494년의 스페인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각각 독점적인 세력범위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16세기의 30년대 이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 덴마크 등 여러 나라의 항해가가 잇달아 아프리카 서해안에 내항하여 무역기지를 개설하였다. 이 항해 가들은 처음에는 모두 금을 찾아서 내항하였으나 선적(船積)할 가치가 있는 아프리카의 <산물>은 상아(象牙)와 노예밖에 없었다. 네덜란드는 아프리카 무역에는 힘을 기울이지 않고, 아시아 항로의 보급기지를 확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 밖의 여러 나라 특히 영국은 남북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유리한 식민지를 확보했기 때문에 남북아메리카의 부족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노예무역을 세계적인 통상(通商)의 일환으로서 중요시하였다. 포르투갈은 기니 ·앙골라 ·모잠비크에서 노예무역과 그리스도교 포교를 하는 한편 해안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밖의 여러 나라는 1652년에 네덜란드가 케이프 식민지를 설치하였을 뿐 전혀 영토적인 야심을 갖지는 않았다. 17세기 후반부터 극도로 성황을 이룬 노예무역을 위한 성새(城塞)가 많이 구축되었으나 군인이나 무역업자가 성내(城內)에 체재하였을 뿐이고 유럽인은 성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아프리카인에게 노예사냥을 시켰다. 유럽인에게 노예를 매매하면 생활할 수 있게 되자 아프리카인들은 노동을 해서 생산을 한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부족 대 부족, 부락 대 부락이 서로 습격하면서 포로로 잡힌 사람을 유럽인에게 팔아 넘기는 생활을 되풀이하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문화를 지탱할 수 있는 생산은 할 수 없게 되고, 남아 있던 문화적 유산마저 불태우거나 파괴되어 버렸다. 아프리카인이 호전적(好戰的)이고 미개 ·야만적인 열등인종이라는 이미지는 19세기까지 계속되었던 노예무역의 효과로서 얻어진 것이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대서양안의 전체뿐만 아니라 인도양까지 파급되었다. 인도양 연안이나 중앙아프리카 및 서부 아프리카의 내륙에서는 아랍 노예상인에 의한 대규모 노예사냥이 자행되었다. 유럽인의 내항은 다시 유럽상품을 기니만 연안으로 가져오는 대신, 금이나 상아 등을 유럽으로 반출했기 때문에 서부 아프리카 내륙의 대상(隊商) 루트를 통한 거래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상업에 의존해 왔던 내륙의 부족은 새로운 생활을 찾아 기니만 연안에 그 영토를 확보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그 곳에서도 부족전쟁에 따른 파괴가 잇달았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분할사

식민지 분할의 완료(1885∼1914)

2001. 10. 22. 10:51

콩고분지조약의 발표에 따라서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서구 제국은 대(對)아프리카 정책에서 두 가지 경향을 명백히 하기 시작하였다. 첫째는 특허회사에 의한 경제적 이익의 추구였고, 둘째는 실질적인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기 위하여 무력에 의한 분할의 촉진이 었다.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주의국(液民地主義鬪)에 대해 경제적 이의의 독점을 금하고 기회균등과 문호개방의 원칙을 강요하였다. 이 제약을 벗어나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서 1885∼1900년에 걸쳐 식민지주의 제국은 똑같이 <특허회사>를 설립하였다. <특허회사>는 식민지 내에서 자원이 풍부한 지역에 대한 토지소유권 · 광업권 ·무역의 권리 등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징세권(徵歌權)을 비롯하여 행정 · 사법 · 입법 및 경찰의 권리까지 보유하면서 이 권리를 배타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영국의 특허회사는 산업자본가의 발언권이 강하고 자본주의적인 자원개발을 추진한데 비해, 프랑스나 벨기에의 특허회사는 상업자본가나 봉건적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 경영됨으로써 확대재생산을 꾀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강제노동이나 강제재배에 의한 약탈적인 착취를 일삼았다.
따라서 아프리카는 종래의 노예무역에 대신하여 원자재 등의 국제 상품과 서구 공업 제품의 부등가교환(不等價交換)을 강요당하였다. 한편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 영유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요건(要件)으로서 실질적인 점령과 지배상태를 명시할 것을 식민주의국가에 요구하였다. 그 때문에 차드호플 목표로 한 영국 ·프랑스 ·독일의 군대파견 전쟁이나, 수단을 점령하려는 영국 · 프랑스군의 충돌(파쇼다 사건) 등의 분할경쟁이 진행되었다. 남부 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系) 전어 인(지금의 아프리카너)공화국 내에서 다이아몬드나 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영국의 침략이 시작되고 1888∼1902년 사이에는 보어전쟁(남아전쟁)이 계속되었다. 또 앙골라의 모잠비크를 통합 지배하려 했던 포르투갈, 남서 아프리카와 동부아프리카(지금의 탄자니아)를 연결하려는 독일, 게다가 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까지 식민지를 연속시키려고 하는 영국 등이 대립하여 콩고분지 이남의 내륙에서 분할경쟁을 벌였다.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를 둘러싼 분할경쟁이 1912년에야 끝나므로, 리비아는 1911년 이탈리아령으로, 이집트는1914년 영국보호령이 정으로써 북아프리카를 지배해왔던 터키의 세력은 일소(一掃)되었다. 그리하여 제 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아프리카 대륙은 이디오피아와 라이베리아라는 두 개의 형식적인 독립국을 남겼을 뿐 식민지 분할경쟁은 완전히 끝나고 식민지 대륙으로 바뀌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분할사

탐험과 분할 경쟁시대(1787∼1885)

2001. 10. 22. 10:51

미국의 독립, 프랑스 혁명에 의해서 노예해방의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한편 그것은 노예의 공급원에 불과하였던 아프리카 대륙에, 구미 자본주의 제국이 영토적 야심을 가지기 시작한 과정이기도 하였다. 노예해방과 함께 영국, 프랑스, 미국은 이 대륙 내부를 침략하기 위한 교두보(橋頭垈)를 만드는 데 부심하였으며 1787년 망고파크에 의한 니제르강 유역의 탐험을 시초로 내륙 탐험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1787년에 지금의 시에라리온에 해방노예를 이주시키고 아프리카인에 의한 자유의 나라를 건설하기로 하고 그 이듬해 런던에 <아프리카 협회(Africa Association)>를 설립하여 아프리카 내륙의 지리적 · 인문적인 조사연구를 준비하였나 해방 노예의 이주지에 <프리타운(자유의 도시)>라는 이름을 붙이고 1807년 노예무역이 금지된 이 후에는 노예선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정착지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오래지 않아 포기되고 감비아 · 골드코스트(黃金海岸 지금의 가나) 통은 식민지론 만드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세네갈의 생루이를 전진기지로 살고 있던 프랑스는 적도아프리카로 진출하기 위한 기지를 리브레빌(자유의 도시, 1849)이라고 하였으나, 당시 프랑스는 노예무역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으며, 영토적 야심도 컸다. 미국의 이린 회사가 반들 라이베리아(자유의 나라, 1821년)만은 1847년에 공화국으로서 독립하여 미국의 대(對)아프리카 정책의 기지가 되었다.
한편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원정하고, 이집트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한 영국이 1801년 카이로를 점령하는 사태를 빚었다. 그것은 영국이 북부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북부 아프리카에 대한 영국 · 미국 ·프랑스의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1830년 프랑스는 알제를 침략하였다. 한편,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나폴레옹 전쟁(1795∼1803)때 영국이 네덜란드의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하였다가 네덜란드에 되돌려 주었으나 1806년 영국은 아시아항로補A路)의 보급기지로서 의의를 가진 케이프타운을 또다시 점령하였다. 이 결과 네덜란드계(系) 백인들은 노예를 해방(834)한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 내륙으로 이주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의 내륙의 탐험은 몽고파크에 뒤이어 1821∼22년 영국인 탐험대파 지중해를 거쳐 차드호(機)에 도달하였고 이보다 앞서 18년 프랑스인들은 세네갈강 유역을 탐험하였다. 또한 50년 독일인 하이리히 바르트는 지중해로부터 차드호, 니제르강 유역을 탐험하였다. 동부 아프리카에서는 48년 독일인 요하네스 레브만이 킬리만자로를 발견하였고, 50년대에는 영국인 리빙스턴, 60∼70년대에는 미국인 스탠리, 70∼80년대에는 프랑스인 사보르난데 브라자 등이 동부에서 콩고강 유역을 거치 남부 아프리카내륙을 탐험했다. 이와 같은 탐험과 병행하여 영국 ·프랑스 · 독일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영국 ·독일은 동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850년 무렵부터 산업자본이 발전하여 자유무역론이 굳어졌기 때문에 식민지를 획득, 통치를 한다는 데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때문에 서부 아프리카에서 영토를 획득하는 데에는 프랑스가 우세하였으며, 리빙스턴이나 스탠리의 탐험성과는 벨기에의 식민지 획득을 돕는 결과가 되었다. 영국 · 프랑스에 이어 뒤늦게 아프리카 분할 경쟁에 참가한 독일은 벨기에와 손을 잡고 식민지 점령의 실적을 올리면서 1884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당시의 구미열강 대표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여 콩고분지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분할문제를 협의하고 <콩고분지 조약>을 조인하기에 이르렀다. 이 조약은 대서양연안에서 인도양 연안에 걸친 광대한 지역에 대해 식민지 보유의 원칙을 약속 결정하였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분할사

유럽인의 아프리카 탐험과 쟁탈

2001. 10. 22. 10:19

유럽인의 아프리카에 대한 탐험은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인해 개인별로 아프리카 내부로 진출하였다. 16세기 중반 몇몇 포르투칼인의 아프리카 내부의 탐험을 제외하고는 시민단체나 회사단체를 앞세운 유럽정부들은 19세기까지 내륙으로 거의 진출하지 못했으며 단지 해안을 따라 무역을 하였다. 탐험가들은 나일강, 콩고강 그리고 니제르강 등의 진원지를 알기 위한 탐험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내부에 존재하는 인종과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1795년에 뭉고 파크(Mungo Park)는 프랑스 동료인 르네 까이에(Rene Caillie)와 함께 니제르강 중류와 상류를 탐험했다. 그러나 곧 1830년 클라프톤(H.Clapperton)과 랜드(R.Lander)는 니제르 강을 카누를 타고 탐험하였으며 니제르강에 있는 거대한 삼각주를 통과하여 대서양으로 가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1850년대 바쓰(H.Barth) 박사는 사하라를 종단하였고 하우자랜드(Hauseland)와 니제르강을 탐험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 1850년대와 1860년대 버턴(R.Burton), 스피크(Spek) 그리고 그랜트(J.Grant)는 나일강의 진원지를 찾는 과정에서 그레이트 호수를 탐험하였다. 같은 시기 리빙스톤(Livingston)은 루알라바강과 잠베지강 사이의 지역을 탐험하였다.
1870년대에 스탠리(H.M.Stanley)는 콩고강과 루알라바강이 같은 강임을 발견하였다. 1900년까지의 그같은 탐험들은 거대한 아프리카 내부에 관한 보다 정확한 과학적, 지리학적 정보를 유럽인들에게 제공하였다.
노예무역의 종언과 함께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은 무역의 다른 항목들에서 대단히 많은 이익을 보여주었다. 탐험의 시기 유럽인들은 내부의 문화와 무역기회, 내륙 육상루터와 강을 통한 항해 등에 관해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또한 일차적인 탐험의 목적을 넘어선 식민지 시대로의 예견이었다.
아프리카의 쟁탈은 아프리카 영토들을 획득하려 하거나 흑은 획득하여 통치하고 있는 영토들을 라이벌 세력으로부터 지키려고 하는 유럽 강대국들간의 경쟁을 말한다. 그같은 쟁탈전은 1880년 부터 1914년까지 지속되었다. 쟁탈이 시작되기 전까지 아프리카는 이미 세네갈에서 부터 탄자니아에 이르는 해안지역이 여러 유럽세력들의 침입에 직면해 있었다. 내륙에는 이미 선교사와 탐험가들이 많은 아프리카 문화들과 접촉하였다. 초기와는 반대로 쟁탈은 빠르고 폭발적이었다. 유럽 강대국들은 서로를 의심하여 행동하였다. 각국은 라이벌 국가가 그 대륙에서 너무 많은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강대국의 세력균형(power of balance)이 무너질까 두려워하였다.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텍사스 땅의 3배규모(현 자이레) 지역을 개인이 확고히 통치한 이후 경쟁적으로 강화되었으며 베를린 회의(1884-85)을 가져왔다. 그 회의에서 경쟁의 원칙들이 동의되었고 영토 쟁탈은 주로 효과적인 영토점령의 문제점들과 연관되었다. 이디오파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모든 아프리카는 1914년까지 유럽세력 하에 놓였다.
아프리카에 대한 쟁탈은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연장되었다. 아프리카에서 1차대전은 많은 이질적인 민족들을 외국 통치하로 가져왔으며 아프리카인들이 국가건설의 과정을 진척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제국주의에 의해 설립된 국경선들은 오늘날 독립국가의 국경선이 되었으며 영토쟁탈의 결과로써 각 민족들이 싸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 국경선은 많은 인종들이 그들 인종들과 갈라져 다른 국가를 이루게 됨으로써 민족을 중심으로한 국가건설은 많은 국경정쟁을 야기시켰다. 소말리아의 대소말리아운동이 그 대표적 예이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역사/아프리카 분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