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대륙의 북부지역은 일찍이 고대 지중해세계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었고 근세에 들어와서는 지리상의 발견 과정에서 동서 해안지대에 약간의 식민지와 무역 거점이 건설되었으나 광대한 내륙지방은 19세기 중엽까지도 미지의 대륙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탐험가 Livingston과 미국의 Stanley 등에 의해 내륙지방의 사정이 알려지게 되자 제국주의로 접어든 유럽열강은 앞은 다투어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20세기초까지지는 완전히 이를 분할하였다. 1875년까지 아프리카에 비교적 확고하게 건설된 식민지는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 프랑스의 Algeria, 그리고 네덜란드인의 후손인 Boer인이 건설한 Orange자유국과 Transval공화국 정도였다.
18세기에 최대의 식민지제국을 건설한 영국은 1875년 이집트의 재정난을 이용하여 1869년에 개통한 수에즈운하의 주식을 매입하여 인도로의 길을 확보하였다. 이집트에 대한 최대 채권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반항하는 아라비파샤의 반란이 일어나자 영국 은 재빨리 출병하여 이집트를 실질적인 보호국으로 만들었다(1882). 한편 남쪽에서는 보어인의 트란스발에서 금이, 그리고 오렌지자유국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케이프식민지로부터 침투하여 마침내 보어전쟁(1899-1902)을 일으켜 두 나라를 합병하고 南阿聯邦을 조직하였다(1910). 이와 같이 남북에 확고한 거점을 확보한 영국은 이를 연결하는 아프리카 종단정잭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그 정책은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과 충돌하여 파쇼다사건을 야기시켰다(1898).
이집트에서 영국에 밀려난 프랑스는 1830년에 획득한 알제리아를 거점으로 남으로는 광대한 사하라(Sahara)사막과 적도아프리카를 얻고 1881년에는 동진하여 튀니지(Tunis)를 얻고 서쪽의 모로코(Morocco)에 세력을 부식하는 한편 동해안의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를 획득하였다(1896).
그리하여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세우고 나일강 상류의 파쇼다로 진출하였으나 영국과 충돌하여 이를 포기하였다. 뒤늦게 국가통일을 달성한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유럽의 평화유지라는 신중한 정책으로 처음에는 국가적인 진출을 삼가고 상인들 의 진출을 후원하는 정도로 그쳤으나 그러한 개별적인 진출을 기초로 삼아 독일령의 서남아프리카 식민지 카메룬(Kameroon), 토고(Togoland), 그리고 동부아프리카 식민지를 획득하게 되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뒤늦게 등장한 이탈리아는 홍해연안의 에리트리아(Eritrea)와 인도양의 프랑스령의 소말리아(Somaliland)를 획득하고 내륙방면으로의 진출은 좌절되었으나 1911년 전쟁으로 트리폴리(Tripoli)를 얻어 리비아(Lybia)를 식민지로 삼았다. 이밖에 스탠리를 후원한 벨기에는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고무생산지인 Congo를 영유하게 되었다(1885). 이리하여 1914년에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의 해방노예가 건설한 리비아(Liberia)와 에디오피아(Ethiopia)뿐이었다. 유럽열강의 아프리카로의 진출은 경쟁과 대립을 불러 일으켰으며 국제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영국의 식민지 경영가인 Cecil Rhodes는 케이프식민지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아프리카 종단철도를 계획하였다가 실패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은 프랑스의 횡단계획과 충돌하여 파쇼다 사건을 발생시켰으며, 프랑스의 튀니스 획득은 이 방면에 진출하고자 한 이탈리아로 하여금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접근시키게 되고, 모로코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독일은 날카로운 대립을 보이기도 하였다.
미국의 독립, 프랑스혁명에 의해서 노예해방의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한편 그것은 노예의 공급원에 불과한 아프리카 대륙에 구미 자본주의 제국이 영토적 야심을 가지기 시작한 과정이기도 하였다. 노예해방과 함께 영국 ·프랑스 ·미국은 이 대륙 내부를 침략하기 위한 교두보(橋頭堡)를 만드는 데 부심하였으며 1787년 M.파크에 의한 나이저강 유역의 탐험을 시초로 내륙 탐방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1787년 시에라리온에 해방노예를 이주시키고 아프리카인에 의한 자유의 나라를 건설하기로 하고 그 이듬해 런던에 ‘아프리카 협회(Africa Association)’를 설립하여 아프리카 내륙의 지리적 ·인문적인 조사연구를 준비하였다. 해방 노예의 이주지에 ‘프리타운(자유의 도시)’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1807년 노예무역이 금지된 이후에는 노예선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정착지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오래지 않아 포기되고 감비아 ·골드코스트(黃金海岸:지금의 가나) 등은 식민지를 만드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세네갈의 생루이를 전진기지로 삼고 있던 프랑스는 적도아프리카로 진출하기 위한 기지를 리브르빌(자유의 도시:1849)이라고 하였으나, 당시 프랑스는 노예무역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영토적 야심도 더 컸다. 미국의 이민 회사가 만든 라이베리아(자유의 나라:1821)만은 1847년 공화국으로서 독립하여 미국의 대(對)아프리카 정책의 기지가 되었다. 한편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원정하고, 이집트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한 영국이 1801년 카이로를 점령하는 사태를 빚었다. 그것은 영국이 북부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북부 아프리카에 대한 영국 ·미국 ·프랑스의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1830년 프랑스는 알제리를 침략하였다.
한편,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나폴레옹 전쟁(1795∼1803) 때 영국이 네덜란드의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하였다가 네덜란드에 되돌려 주었으나 1806년 영국은 아시아 항로(航路)의 보급기지로서 의의(意義)를 가진 케이프타운을 또다시 점령하였다. 이 결과 네덜란드계(系) 백인들은 노예를 해방(1834)한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 내륙으로 이주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 내륙의 탐험은 망고 파크에 뒤이어 1821∼22년 영국인 탐험대가 지중해를 거쳐 차드호(湖)에 도달하였고 이보다 앞서 1818년 프랑스인들은 세네갈강 유역을 탐험하였다. 또한 1850년 독일인 H.바르트는 지중해로부터 차드호, 나이저강 유역을 탐험하였다.
동부 아프리카에서는 1848년 독일인 요하네스 레브만이 킬리만자로를 발견하였고, 1850년대에는 영국인 리빙스턴, 1860∼70년대에는 미국인 H.M.스탠리, 1870∼80년대에는 프랑스인 P.S.de 브라자 등이 동부에서 콩고강 유역을 거쳐 남부 아프리카 등의 내륙을 탐험했다. 이와 같은 탐험과 병행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영국 ·독일은 동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850년 무렵부터 산업자본이 발전하여 자유무역론이 굳어졌기 때문에 식민지를 획득, 통치를 한다는 데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때문에 서부 아프리카에서 영토를 획득하는 데는 프랑스가 우세하였으며, 리빙스턴이나 스탠리의 탐험 성과는 벨기에의 식민지 획득을 돕는 결과가 되었다.
영국 ·프랑스에 이어 뒤늦게 아프리카 분할 경쟁에 참가한 독일은 벨기에와 손을 잡고 식민지 점령의 실적을 올리면서 1884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당시의 구미열강 대표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여 콩고 분지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분할문제를 협의하고 ‘콩고분지조약’을 조인하였다. 이 조약은 대서양 연안에서 인도양 연안에 걸친 광대한 지역에 대해 식민지 보유의 원칙을 약속 결정하였다.
콩고분지조약의 발효에 따라서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서구 제국은 대(對) 아프리카 정책에서 두 가지 경향을 명백히 하기 시작하였다. 첫째는 특허회사에 의한 경제적 이익의 추구였고, 둘째는 실질적인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기 위하여 무력에 의한 분할의 촉진이었다.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주의국(植民地主義國)에 대해 경제적 이익의 독점을 금하고 기회균등과 문호개방의 원칙을 강요하였다. 이 제약을 벗어나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서 1885∼1900년에 걸쳐 식민지주의 제국은 똑같이 특허회사를 설립하였다.
특허회사는 식민지 내에서 자원이 풍부한 지역에 대한 토지소유권 ·광업권 ·무역의 권리 등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징세권(徵稅權)을 비롯하여 행정 ·사법 ·입법 및 경찰의 권리까지 보유하면서 이 권리를 배타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영국의 특허회사는 산업자본가의 발언권이 강하고 자본주의적인 자원개발을 추진한 데 비해, 프랑스나 벨기에의 특허회사는 상업자본가나 봉건적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 경영됨으로써 확대재생산을 꾀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강제 노동이나 강제재배에 의한 약탈적인 착취를 일삼았다. 따라서 아프리카는 종래의 노예무역을 대신하여 원자재 등의 국제 상품과 서구 공업제품의 부등가교환(不等價交換)을 강요당하였다.
한편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 영유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요건(要件)으로서 실질적인 점령과 지배상태를 명시할 것을 식민주의 국가에 요구하였다. 때문에 차드호(湖)를 목표로 한 영국 ·프랑스 ·독일의 군대 파견 전쟁이나, 수단을 점령하려는 영국 ·프랑스군의 충돌(파쇼다사건) 등의 분할경쟁이 진행되었다.
남부 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系) 보어인(지금의 아프리카너) 공화국 내에서 다이아몬드나 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영국의 침략이 시작되고 1899∼1902년 사이에는 보어전쟁이 계속되었다. 또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통합 지배하려 한 포르투갈, 남서 아프리카와 동부 아프리카(지금의 탄자니아)를 연결하려는 독일, 게다가 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까지 식민지를 연속시키려고 하는 영국 등이 대립하여 콩고 분지 이남의 내륙에서 분할경쟁을 벌였다.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를 둘러싼 분할경쟁이 1912년에 끝났으며, 리비아는 1911년 이탈리아령으로, 이집트는 1914년 영국보호령이 됨으로써 북아프리카를 지배해온 터키의 세력은 일소(一掃)되었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아프리카 대륙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라는 두 개의 형식적인 독립국을 남겼을 뿐 식민지 분할경쟁은 완전히 끝나고 식민지 대륙으로 바뀌었다.
18세기에 최대의 식민지제국을 건설한 영국은 1875년 이집트의 재정난을 이용하여 1869년에 개통한 수에즈운하의 주식을 매입하여 인도로의 길을 확보하였다. 이집트에 대한 최대 채권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반항하는 아라비파샤의 반란이 일어나자 영국 은 재빨리 출병하여 이집트를 실질적인 보호국으로 만들었다(1882). 한편 남쪽에서는 보어인의 트란스발에서 금이, 그리고 오렌지자유국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케이프식민지로부터 침투하여 마침내 보어전쟁(1899-1902)을 일으켜 두 나라를 합병하고 南阿聯邦을 조직하였다(1910). 이와 같이 남북에 확고한 거점을 확보한 영국은 이를 연결하는 아프리카 종단정잭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그 정책은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과 충돌하여 파쇼다사건을 야기시켰다(1898).
이집트에서 영국에 밀려난 프랑스는 1830년에 획득한 알제리아를 거점으로 남으로는 광대한 사하라(Sahara)사막과 적도아프리카를 얻고 1881년에는 동진하여 튀니지(Tunis)를 얻고 서쪽의 모로코(Morocco)에 세력을 부식하는 한편 동해안의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를 획득하였다(1896).
그리하여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세우고 나일강 상류의 파쇼다로 진출하였으나 영국과 충돌하여 이를 포기하였다. 뒤늦게 국가통일을 달성한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유럽의 평화유지라는 신중한 정책으로 처음에는 국가적인 진출을 삼가고 상인들 의 진출을 후원하는 정도로 그쳤으나 그러한 개별적인 진출을 기초로 삼아 독일령의 서남아프리카 식민지 카메룬(Kameroon), 토고(Togoland), 그리고 동부아프리카 식민지를 획득하게 되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뒤늦게 등장한 이탈리아는 홍해연안의 에리트리아(Eritrea)와 인도양의 프랑스령의 소말리아(Somaliland)를 획득하고 내륙방면으로의 진출은 좌절되었으나 1911년 전쟁으로 트리폴리(Tripoli)를 얻어 리비아(Lybia)를 식민지로 삼았다. 이밖에 스탠리를 후원한 벨기에는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고무생산지인 Congo를 영유하게 되었다(1885). 이리하여 1914년에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의 해방노예가 건설한 리비아(Liberia)와 에디오피아(Ethiopia)뿐이었다. 유럽열강의 아프리카로의 진출은 경쟁과 대립을 불러 일으켰으며 국제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영국의 식민지 경영가인 Cecil Rhodes는 케이프식민지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아프리카 종단철도를 계획하였다가 실패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은 프랑스의 횡단계획과 충돌하여 파쇼다 사건을 발생시켰으며, 프랑스의 튀니스 획득은 이 방면에 진출하고자 한 이탈리아로 하여금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접근시키게 되고, 모로코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독일은 날카로운 대립을 보이기도 하였다.
미국의 독립, 프랑스혁명에 의해서 노예해방의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한편 그것은 노예의 공급원에 불과한 아프리카 대륙에 구미 자본주의 제국이 영토적 야심을 가지기 시작한 과정이기도 하였다. 노예해방과 함께 영국 ·프랑스 ·미국은 이 대륙 내부를 침략하기 위한 교두보(橋頭堡)를 만드는 데 부심하였으며 1787년 M.파크에 의한 나이저강 유역의 탐험을 시초로 내륙 탐방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1787년 시에라리온에 해방노예를 이주시키고 아프리카인에 의한 자유의 나라를 건설하기로 하고 그 이듬해 런던에 ‘아프리카 협회(Africa Association)’를 설립하여 아프리카 내륙의 지리적 ·인문적인 조사연구를 준비하였다. 해방 노예의 이주지에 ‘프리타운(자유의 도시)’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1807년 노예무역이 금지된 이후에는 노예선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정착지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오래지 않아 포기되고 감비아 ·골드코스트(黃金海岸:지금의 가나) 등은 식민지를 만드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세네갈의 생루이를 전진기지로 삼고 있던 프랑스는 적도아프리카로 진출하기 위한 기지를 리브르빌(자유의 도시:1849)이라고 하였으나, 당시 프랑스는 노예무역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영토적 야심도 더 컸다. 미국의 이민 회사가 만든 라이베리아(자유의 나라:1821)만은 1847년 공화국으로서 독립하여 미국의 대(對)아프리카 정책의 기지가 되었다. 한편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원정하고, 이집트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한 영국이 1801년 카이로를 점령하는 사태를 빚었다. 그것은 영국이 북부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북부 아프리카에 대한 영국 ·미국 ·프랑스의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1830년 프랑스는 알제리를 침략하였다.
한편,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나폴레옹 전쟁(1795∼1803) 때 영국이 네덜란드의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하였다가 네덜란드에 되돌려 주었으나 1806년 영국은 아시아 항로(航路)의 보급기지로서 의의(意義)를 가진 케이프타운을 또다시 점령하였다. 이 결과 네덜란드계(系) 백인들은 노예를 해방(1834)한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 내륙으로 이주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부 아프리카에서 내륙의 탐험은 망고 파크에 뒤이어 1821∼22년 영국인 탐험대가 지중해를 거쳐 차드호(湖)에 도달하였고 이보다 앞서 1818년 프랑스인들은 세네갈강 유역을 탐험하였다. 또한 1850년 독일인 H.바르트는 지중해로부터 차드호, 나이저강 유역을 탐험하였다.
동부 아프리카에서는 1848년 독일인 요하네스 레브만이 킬리만자로를 발견하였고, 1850년대에는 영국인 리빙스턴, 1860∼70년대에는 미국인 H.M.스탠리, 1870∼80년대에는 프랑스인 P.S.de 브라자 등이 동부에서 콩고강 유역을 거쳐 남부 아프리카 등의 내륙을 탐험했다. 이와 같은 탐험과 병행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영국 ·독일은 동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850년 무렵부터 산업자본이 발전하여 자유무역론이 굳어졌기 때문에 식민지를 획득, 통치를 한다는 데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때문에 서부 아프리카에서 영토를 획득하는 데는 프랑스가 우세하였으며, 리빙스턴이나 스탠리의 탐험 성과는 벨기에의 식민지 획득을 돕는 결과가 되었다.
영국 ·프랑스에 이어 뒤늦게 아프리카 분할 경쟁에 참가한 독일은 벨기에와 손을 잡고 식민지 점령의 실적을 올리면서 1884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당시의 구미열강 대표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여 콩고 분지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분할문제를 협의하고 ‘콩고분지조약’을 조인하였다. 이 조약은 대서양 연안에서 인도양 연안에 걸친 광대한 지역에 대해 식민지 보유의 원칙을 약속 결정하였다.
콩고분지조약의 발효에 따라서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서구 제국은 대(對) 아프리카 정책에서 두 가지 경향을 명백히 하기 시작하였다. 첫째는 특허회사에 의한 경제적 이익의 추구였고, 둘째는 실질적인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기 위하여 무력에 의한 분할의 촉진이었다.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주의국(植民地主義國)에 대해 경제적 이익의 독점을 금하고 기회균등과 문호개방의 원칙을 강요하였다. 이 제약을 벗어나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서 1885∼1900년에 걸쳐 식민지주의 제국은 똑같이 특허회사를 설립하였다.
특허회사는 식민지 내에서 자원이 풍부한 지역에 대한 토지소유권 ·광업권 ·무역의 권리 등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징세권(徵稅權)을 비롯하여 행정 ·사법 ·입법 및 경찰의 권리까지 보유하면서 이 권리를 배타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영국의 특허회사는 산업자본가의 발언권이 강하고 자본주의적인 자원개발을 추진한 데 비해, 프랑스나 벨기에의 특허회사는 상업자본가나 봉건적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 경영됨으로써 확대재생산을 꾀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강제 노동이나 강제재배에 의한 약탈적인 착취를 일삼았다. 따라서 아프리카는 종래의 노예무역을 대신하여 원자재 등의 국제 상품과 서구 공업제품의 부등가교환(不等價交換)을 강요당하였다.
한편 콩고분지조약은 식민지 영유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요건(要件)으로서 실질적인 점령과 지배상태를 명시할 것을 식민주의 국가에 요구하였다. 때문에 차드호(湖)를 목표로 한 영국 ·프랑스 ·독일의 군대 파견 전쟁이나, 수단을 점령하려는 영국 ·프랑스군의 충돌(파쇼다사건) 등의 분할경쟁이 진행되었다.
남부 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系) 보어인(지금의 아프리카너) 공화국 내에서 다이아몬드나 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영국의 침략이 시작되고 1899∼1902년 사이에는 보어전쟁이 계속되었다. 또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통합 지배하려 한 포르투갈, 남서 아프리카와 동부 아프리카(지금의 탄자니아)를 연결하려는 독일, 게다가 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까지 식민지를 연속시키려고 하는 영국 등이 대립하여 콩고 분지 이남의 내륙에서 분할경쟁을 벌였다.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를 둘러싼 분할경쟁이 1912년에 끝났으며, 리비아는 1911년 이탈리아령으로, 이집트는 1914년 영국보호령이 됨으로써 북아프리카를 지배해온 터키의 세력은 일소(一掃)되었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아프리카 대륙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라는 두 개의 형식적인 독립국을 남겼을 뿐 식민지 분할경쟁은 완전히 끝나고 식민지 대륙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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