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아프리카 분할사

앵글로-게르만 협정, 1890.

africa club 2001. 11. 21. 13:35
1890년 앵글로-게르만 조약의 배경은 동아프리카와 영국에서 유래했다.  부간다에서 칼 피터스의 조치는 영국에 경고하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1886년 그 조약은 이 지역을 확실하게 지정했으나, 초기에 그에 대한 영국의 연루 때문에 그 지역은 영국령에 속한다고 보통 여겨졌다.  따라서 피터스의 계획은 위협뿐만 아니라 도발의 원인이 되었다.
1890년 독일은 영국과 우호관계를 간절히 원했고, 그것을 위해 많은 자금을 지불할 준비가 되었다.  프랑스-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은 1890년 3월 비스마르크의 몰락으로 , 이것은 러시아와의 Reinsurance조약의 부활을 위해 독일 수상의 요구를 수락하는 것을 황제 윌리엄 2세에 의해 거절되면서 더욱 팽배되었다.  그 새 황제는 러시아의 독재정권과의 동맹을 거절함으로써 그 자신을 진보적인 지도자임을 증명하길 원했고 독일에게는 현대 국가로 보여진 진보세력인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했다.  독일은 하이랜드의 해군기지를 획득하려는 강한 욕망도 갖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식민쟁탈에 참여하여 자국의 식민지 확보에 주력했고 외국 세력들의 분노에 의한 위험에 직면해 있는 식민회사의 파산을 막기 위해 열을 올렸고 조약체결을 위한 협상을 단행했다.
하이랜드 조약으로 알려졌던 1890년의 앵글로-게르만 조약은 우간다를 영국의 수중에 독일에 동부 아프리카와 로데지아, 니아사랜드 간의 인정된 국경을 확고히 했다.  독일은 북방해에 있는 하이랜드의 전략적 섬을 영국으로부터 획득했다.  그의 자긍심을 손상시킨 패배에 낙담해 있던 피터스는 이런 계획에 대해 혹독한 경멸을 나타냈다;  "위투와 우간다" 두 왕국은 북해의 욕조통으로 만족했어야 했다" 고 유감스러워 했다.
그러나 영국과 독일의 영향력의 범위는 동아프리카 분할을 완전히 종결지었던 1890년 협정에 의해 분명하게 정의되었고 그 당시에 매키논은 우간다에서 더욱 신속한 영국의 동아프리카 회사의 활동을 확대하자는 영국 정부의 요청에 대해 더욱 열성적으로 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