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보조로 청년실업 해결?

2012. 10. 28. 15:08

 

임금보조로 청년실업 해결?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 이하 남아공)에서 청년 임금지원정책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임금지원정책의 구체적 사항과 시행방안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 정책은 제이콥 주마(Jacob Zuma) 남아공 대통령에 의해 연두교서에서 처음 언급되었고 재정부 장관 프라빈 고단(Pravin Gordhan)이 예산에 반영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이 정책은 2007년에도 제기되었었으나 노동단체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쳐 철회되었었다. 2007년 당시 15,000 란드(Rand, 남아공의 화폐단위) 이하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의 3분의 1을 보조하는 것으로 임금이 15,000 란드인 노동자에게는 5,000 란드가, 15,000∼45,000 란드를 받는 노동자에게는 7,500 란드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45,000 란드 이상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지원을 받을 수 없도록 하였다.

 

 

이 정책이 과연 실효성이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현재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남아공금속 노동자조합(National Union of Metalworkers of South Africa, 이하 금속노조)은 약 50억 란드의 임금지원만으로는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현재 청년실업문제가 현재 제시하고 있는 지원금액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관계인 남아프리카공화국 노동조합회의(Congress of South African Trade Unions: COSATU) 또한 이 정책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했다.

 

COSATU는 임금지원정책이 애국심이 없는 고용주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데에 악용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임금지원정책이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고 회사 측의 지출만 줄여준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한편, 이 정책의 근본적인 문제점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청년실업은 청년실업자들이 직업을 위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금전적인 지원만으로는 청년실업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작 필요한 것은 외국으로부터 수입되고 있는 전문기술과 지식을 젊은이들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자료출처

 

1.http://www.iol.co.za/business/business-news/wage-subsidy-no-solution-to-unemployment-1.1305434 

2.http://www.iol.co.za/business/business-news/wage-subsidy-may-cost-r30bn-a-year-1.727490

3.http://www.iol.co.za/business/business-news/constitution-creates-hurdles-for-mooted-wage-subsidy-plan-1.697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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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교육정책, 바뀌어야 한다!

2012. 10. 28. 15:03

 

 

남아공의 교육정책, 바뀌어야 한다!

 

 

남아공 내부에서 국가 교육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02년 교육부 장관 카더 아스말(Kader Asmal)은 고등교육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고등교육 체제는 현재와 미래의 요구에 부응함과 동시에, 도시의 재구성과 지역발전을 도모하는 데 기여해야 하며, 새로운 지식의 창출과 활용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러나 현재의 고등교육체제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으나 여전히 남아공의 교육이 혁신적인 변화를 도모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남아공의 교육체제가 허술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부족한 예산이다. 지난 2006년 성공회 대주교 은존곤쿨루 은둔가니(Njongonkulu Ndungane)는 정부가 군비를 삭감해서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방예산을 교육예산으로 돌리는 청원서에 서명했다. 또한 그는 교사들의 봉급을 높임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교육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은둔가니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지만 교사들의 봉급 인상만으로는 교육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히려 교사들이 이전보다 체계적인 전문교육과정을 이수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로 현재 남아공 정부는 교사들의 진로상담 교육과정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전문적인 진로관련 정보를 얻지 못한 남아공 대학생들이 높은 수치의 낙제율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남아공 학교의 높은 교육비 또한 논란이 되고 있다. 케이프타운의 학교운영위원들은  교육비를 인상하기 위한 논의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교육비 인상에 대한 상한선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학교운영진은 케이프타운 교육부와의 협의 없이 교육비를 자유롭게 인상할 수 있으며 이러한 교육비 인상은 학부모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학교 측은 현재 수준의 교육비 인상만으로는 교육의 발전을 꾀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월드컵 개최이후 남아공의 물가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교육비에 대한 획기적인 조치가 없는 한 남아공의 교육비는 계속해서 상승할 것이 분명하다.

 

 

<자료출처>

 

1.http://www.iol.co.za/news/south-africa/higher-education-stands-at-a-threshold-1.96759

2.http://www.iol.co.za/news/south-africa/spend-on-education-not-guns-1.307539

3.http://www.iol.co.za/business/business-news/education-call-for-better-career-guidance-1.700309

4.http://www.iol.co.za/news/south-africa/focus-on-salaries-is-inadequate-pandor-1.419061

5.http://www.iol.co.za/business/personal-finance/financial-planning/financial/39-unit-trusts-for-private-education-39-1.993071

6.http://www.iol.co.za/news/south-africa/cape-schools-huge-fee-hikes-1.3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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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코뿔소

2012. 10. 28. 14:59

<사라져가는 코뿔소>

  

유니콘(Unicorn)은 현재 실존하지 않으며 상상 속의 동물로 여겨진다. 이처럼 언젠가는 코뿔소 또한 상상 속의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다. 현존하는 코뿔소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남아공의 코뿔소가 밀렵으로 인해 멸종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코뿔소 밀렵은 올해 들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2010년 남아공에서는 333 마리의 코뿔소가 밀렵됐고 2011년 남아공에서는 448 마리의 코뿔소가 밀렵됐다. 올 2012년 1월부터 4월 30일까지 벌써 199 마리의 코뿔소가 밀렵됐다. 이처럼 코뿔소 밀렵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어 대중들이 이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마취총으로 코뿔소를 잠재운 채 뿔만을 잘라감에 따라 코뿔소가 끔찍한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어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코뿔소의 밀렵이 이처럼 기승을 부리고 있는 원인은 코뿔소의 뿔이 매우 비싼 가격에 암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코뿔소의 뿔은 가루로 빻아져 전통의약품으로 사용된다. 코뿔소의 뿔이 열병에서 암에 이르기까지 만병에 효험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보석과 함께 사용되거나 단도의 손잡이를 만들 때, 수집용, 장식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코뿔소의 뿔은 킬로그램 당 약 65,000 달러(한화로 약 7,400만 원)에 거래된다.


   물론 중국의 부자들이 아프리카에 몰려오면서 코뿔소의 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으로써 코끼리의 밀렵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출처

1.http://www.iol.co.za/ios/opinion/chip-s-cartoons-1.1224746

2.http://blog.naver.com/junjuly1?Redirect=Log&logNo=40152395238

3.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5560536

4.http://www.iol.co.za/business/business-news/can-rhino-horn-trade-be-legalised-1.1287787

5.http://www.iol.co.za/dailynews/news/rhino-poaching-escalates-1.1286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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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붓아버지를 죽인 소녀 살인범에 관련된 논란

2012. 10. 28. 14:54

 

<의붓아버지를 죽인 소녀 살인범에 관련된 논란>

 

 

  2012년 5월 4일, 남아공의 항구도시 더반(Durban)의 치안 판사 아난 마하라지(Anand Maharaj)가 살인범인 18세 소녀 샨델 안네 키슨(Shandel-Anne Kisten)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그녀의 변호인이 항소했기 때문에 그녀는 감옥에 곧바로 수감되지는 않았고 사건은 더반의 고등법원으로 이관될 것으로 보인다.

  

  샨델은 그녀의 의붓아버지가 마시는 차에 수면제를 넣고 드레스가운 벨트로 의붓아버지의 목을 졸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사건 발생 당시 그녀는 15세에 불과했다. 경찰은 처음에 샨델의 의붓아버지가 자살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당시 샨델이 의붓아버지를 교살한 자신의 혐의를 자백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범죄의 주동자인 어머니를 위해 한 거짓말이었다고 진술을 바꾸었다. 즉, 그녀는 실제 살인을 행했을 뿐 범죄를 주도하고 계획한 것은 그녀의 어머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4월 12일, 샨델은 의붓아버지의 차에 수면제를 넣은 것은 그녀의 어머니라고 진술했다. 그녀의 진술에 따르면 사건 당시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의붓아버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으나 힘이 모자라서 샨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샨델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어머니 대신 고소된 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감옥에 가게 되면 그녀의 어린 형제 자매들을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샨델이 어리기 때문에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고 한다. 변호인 시븐 사무엘(Siven Samuel)은 샨델이 체구가 작은 소녀임을 근거로 그녀의 주장이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녀의 진술에 대한 의심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녀의 진술이 바뀐 시점이 그녀가 어려도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그녀의 6개월 된 아이가 보호소에 가야된다는 말을 보호감독관 아드리안 무들리(Adrian Moodley)로부터 들은 직후였다는 사실은 대중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아난 마하라지의 판결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샨델의 의붓아버지네 가족 측은 아난의 판결이 지나치게 가볍다고 생각하며 분노를 표했다. 샨델은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도 의붓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범행과 관련된 후회를 드러내지 않았다. 한편, 샨델의 가족은 처벌이 지나치다는 주장을 했다. 그녀는 아직 어릴 뿐만 아니라 6개월 된 자식을 키워야 하는 형편이라는 사실도 이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출처

1.http://www.iol.co.za/pretoria-news/killer-teen-now-fingers-mom-in-crime-1.1275351

2.http://www.iol.co.za/news/crime-courts/you-re-a-cold-calculating-killer-1.1289804

3.http://www.iol.co.za/mercury/mom-was-behind-it-says-killer-teen-1.1274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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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크리켓위원회의 보너스 스캔들

2012. 10. 28. 14:53

 

<남아공 크리켓위원회의 보너스 스캔들>

 

 

남아공크리켓위원회(Cricket South Africa : CSA)의 보너스 스캔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을 뒤덮었다. 지난 2009년 남아공은 세계 최대 프로 크리켓 리그인 인도프리미어리그(Indian Premier League : IPL)를 개최했다.

 

당시 인도가 국내 테러 우려를 이유로 세계 최고의 수익성이 보장되는 인도프리미어리그를 남아공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남아공은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서도 상당한 수입을 창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적 대회의 유치라는 장밋빛 성과 뒤에는 어두운 비리가 감추어져 있었다.

 

 

지난해 남아공크리켓위원회의 전직 회장 음투투젤리 뇨카(Mtutuzeli Nyoka)는 최고 경영자(CEO) 제럴드 마졸라(Gerald Majola)를 포함한 일부 직원들이 급여위원회에 밝히지 않은 채 총 470만 랜드(한화 약 65천만원) 상당의 ‘불규칙적인’ 보너스를 지급받았다며 형사소송을 제기했다. 세계 4대 회계법인인 KPMG에 의하면 마졸라는 홀로 180만 랜드(한화 약 25천만원)의 수익을 챙긴 것으로 전해진다.

 

 

위의 만평은 이번 사건을 맡은 전직 콰줄루-나탈(KwaZulu-Natal) 대법원 판사 크리스 니콜슨(Chris Nicholson)이 마졸라를 심문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니콜슨은 CEO인 마졸라에게 그의 경영 방식을 묘사해달라고 말하고 있고, 이에 마졸라는 “수백만 랜드의 보너스를 주면(for multi-million rand bonus)” 말해주겠다고 대답을 하고 있어 웃음을 자아낸다.

 

만평 출처: http://mg.co.za/zapiro/fullcartoon/3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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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신 남아공의 대통령을 위해 비상용 비행기는 필수!

2012. 10. 28. 14:51

귀하신 남아공의 대통령을 위해 비상용 비행기는 필수!

Mail & Guardian Online(2012. 1. 23)

Mail & Guardian Online(2012. 1. 26)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의 제이콥 주마(Jacob Gedleyihlekisa Zuma) 대통령이 최근 미국을 방문하면서 두 대의 비상용 비행기를 동원한 것이 연일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뉴욕(New York)에서 열린 유엔안전보장이사회(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주마 대통령을 태운 전용 제트비행기의 뒤를 두 대의 비상용 비행기가 따랐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사회와 야당은 불필요한 비행기 동원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남아공의 공군참모총장 카를로 가지아노(Carlo Gagiano)는 봄바르디어 글로벌 익스프레스(Bombardier Global Express) 기종의 초대형 제트비행기가 동원된 사실을 인정하면서 “중요한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 비상용 비행기가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지만, 국방부의 대변인 은디부오 마바야(Ndivhuwo Mabaya)는 비행기 동원 사실에 대해 부인했다.

 

야당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사회에서는 국방재원의 낭비에 대한 불만 또한 표출하고 있다. 남아공의 최대 야당인 민주연합(Democratic Alliance : DA)의 국방 관련 대변인 데이비드 메이니어(David Maynier)는 “비행기 동원으로 1000만 랜드(한화 약 138천만원) 이상이 소요됐을 것”이라며 “이는 깜짝 놀랄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2012123일과 26Mail & Guardian Online에 개재된 위의 두 만평은 이러한 불필요한 비상용 비행기 동원에 대한 풍자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첫 번째 만평은 주마 대통령이 상공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장면을 통해 비상용 비행기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나타냈다.

 

두 번째 만평은 카타르(Qatar)의 사람들이를 여러 대의 비행기를 보고 주마 대통령을 알아보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주마 대통령은 국가 간 정치적·경제적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지난 23일 카타르를 방문했는데, 또 비상용 비행기를 동원했는지의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만평 출처: http://mg.co.za/zapiro/fullcartoon/3602,

http://mg.co.za/zapiro/fullcartoon/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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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에서 열린 COP17, 새로운 기후체제의 출범을 약속하다

2012. 10. 28. 14:49

 

〈남아공에서 열린 COP17, 새로운 기후체제의 출범을 약속하다〉

 

 

 

1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17)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의 더반(Durban)에서 지난 20111128일 개막하여 1210일 폐막했다. 이번 총회에서는 194개국의 대표들이 2012년 말 만료되기로 예정돼있던 교토의정서의 시한을 2020년까지 연장하되 2020년 이후에는 모든 나라가 참여하는 새로운 기후체제를 출범시키고 이에 대한 협상을 2015년까지 타결한다는 방안에 합의했다. 따라서 20131월부터 교토의정서 2기 공약기간이 시작되며, 올해부터 이른바 '더반 플랫폼(Durban Platform)'이라고 불리는 로드맵에 따라 모든 당사국이 참여하도록 법적 구속력을 발휘하는 온실가스 감축체제에 대한 협상이 개시된다.

 

이번 총회는 교토의정서를 탈퇴한 미국, 중국, 인도와 같은 주요 온실가스 배출국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결실을 맺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단일한 기후체제가 출범하게 되면 교토의정서를 탈퇴했던 주요 배출국들도 어김없이 온난화 방지의무를 안게 되기 때문이다. 새 기후체제의 형식으로는 의정서, 법적 체제 또는 법적 결과물 등의 세 가지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18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의 개최국을 두고 한국과 카타르(Qatar)가 경쟁을 벌였으나 다음 총회는 카타르에서 열리고 한국은 각료급회의를 유치하게 된다.

 

위의 만평에서는 COP17이 적힌 가방을 든 지구가 송장의 모습으로 관 안에 누워있는 교토의정서에게 2015년까지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시한폭탄의 형상을 한 지구는 온난화로 인한 지구의 위태로운 상황을 표현하며, 새 기후체제에 대한 협상이 종결되는 2015년이 너무 늦은 시기일 수도 있음을 암시해주는 듯하다.

 

만평 출처: http://www.businessday.co.za/Life/Content.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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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되고 있는 남아공의 서민경제와 무능력한 집권여당

2012. 10. 28. 14:36

 

<악화되고 있는 남아공의 서민경제와 무능력한 집권여당>

 

 

 

    

 

   지난 2011년 10월 27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청년들이 무상 공교육, 일자리 확대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현재 남아공 국민들의 경제 체감 온도가 낮다는 반증이다. 현 정권이 일자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고용시장 활성화에 사실상 실패했다는 비판적인 의견이 지금 남아공의 주된 여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공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 예상치를 3.4%에서 3.1%로 하향조정하면서 정부와 공공기관의 임금인상을 자제하는 소극적 대처방안 등을 내놓는 한편 민간부문의 투자를 강조해서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 만평은 남아공의 현재 경제사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인 높은 실업률과 적은 수의 일자리를 풍자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집권여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 ANC)의 강력한 후원자 중 한 명인 케니 쿠네네(Kenny Kunene)가 지난 2010년 자신의 마흔번 째 생일을 맞아 네이키드 스시 파티(Naked Sushi Party : 여성의 나체에 스시를 올려놓고 눈으로 즐기면서 스시를 먹는 것으로 일본에서 유래하여 전 세계적로 퍼져나간 선정적인 식사방법)를 벌인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Will serve sushi on my naked body for cash!'라는 문구는 이를 빗대어 표현함으로써 집권여당에 대한 좀 더 강력한 비판을 담은 것이라 생각된다.

 

 

❚Sowetan 2011.11.9

http://www.sowetanlive.co.za/goodlife/funstuff/2011/11/09/today-s-cartoon-beggars-beli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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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신용카드의 덫

2012. 10. 28. 14:29

 

<남아공, 신용카드의 덫>

    

 

 

 

 남아공 사회는 카드사의 무분별한 카드발급과 국민들의 지나친 신용카드 사용으로 부채가 증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남아공 정부는 예의주시하며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갚을 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분별하게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그로 인해 가계부채가 증가하는 병적인 사회현상은 비단 남아공만의 문제는 아니며, 우리나라 역시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어 먼 나라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요즘 남아공의 가계부채는 심각한 수준이며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 IMF)은 남아공의 높은 가계부채가 소비를 제약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한 상황이다. IMF가 2012년 남아공의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 : GDP) 성장률을 4.2%로 예측하고 있지만 늘어나고 있는 가계부채로 남아공 국민들의 체감경제는 오히려 마이너스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아공 Soweto 신문은 2008년에 이미 한번 게재된 바 있는 만평을 ‘빚의 덫을 조심하라(Beware the debt trap)'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한 번 게재한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휴가와 축제 기간인 12월을 앞두고 상승하는 지출도 염두에 둔 듯하다.

 

 

❚Sowetan 2011.10.31

http://www.sowetanlive.co.za/goodlife/funstuff/2011/10/31/today-s-cartoo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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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부 장관의 섹스 스캔들과 일부다처제인 남아공사회의 반응

2012. 10. 28. 14:28

 

체육부 장관의 섹스 스캔들과 일부다처제인 남아공사회의 반응

 

 

 

  남아공의 체육부 장관 피킬레 음발룰라(Fikile Mbalula)가 27세의 젊은 여성 모델과의 성추문 사건에 대해 시티 프레스(City Press)가 2011년 10월 29일 토요일에 그의 섹스스캔들에 관해 보도하였다. 관계당국은 이 사건이 기사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고 밝혔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보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을 한 것은 아니며, 단지 우리의 의견을 시티 프레스 측에 전달하기 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을 뿐이다.”라고 대변인 파에나 갈라네(Paena Galane)는 전했다.

 

 

시티 프레스의 편집자인 페리알 하파제(Ferial Haffajee)는 음발룰라는 목요일 오후에 서면으로 보낸 질문서에 답변하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대변인은 장관이 그 질문들을 목요일 밤에서야 받았으며, 금요일에 협의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갈라네는 음발룰라가 토요일에 요하네스버그 고등법원에 시티프레스를 상대로 법원의 금지명령을 신청했으며 일요일 18시가 되어야 법의 적용여부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전했었으나 음발룰라 측은 결국 잘못을 시인하고 이를 철회했다. 

 

 

음발룰라는 토요일에 가족, 특히 아내에게 사과하고, 이 문제를 개인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그의 가족을 위해 “시간과 공간”을 허락해달라며 언론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미 3개월 전에 그 여성은 자신으로부터 돈을 갈취해 갔고 현재 이 문제는 깨끗하게 해결되었으며 이제는 더 이상의 협박에 관한 일체의 협상을 중지할 것이라고도 밝혔다. 음발룰라는 또한 국가와 정부, 그리고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 ANC)에 대해서도 사과를 전했다. ANC는 11월 1일에 최근 ANC의 차세대 정치인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음발룰라의 일을 “불행한 사고”라고 표현하며 음발룰라를 여전히 의심할 여지가 없는 ANC 최고의 지도자 중 한명이라고 인정하고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정치평론가인 아담 하비브(Adam Habib) 요하네스버그대학 교수는 남아공 국민의 경우 정치인의 성추문에 비교적 관대한 경향을 보인다고 프리토리아 뉴스에 밝혔다. 실제로 이보다 앞서 제이콥 주마(Jacob Zuma) 대통령은 2006년에 한 여성으로부터 성폭행 혐의로 고소당했으나 재판부가 "합의에 의해 성관계를 맺은 것으로 판단된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이후 주마는 2007년 ANC 전당대회에서 당 총재로 선출돼 2009년 대통령에까지 당선된 바 있다.

 

 

 남아공은 일부다처제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제이콥 주마 대통령은 결혼을 다섯 번을 했다. 퍼스트레이디만 3명이며 둘째부인과는 이혼 후 정치적 동료로 지내고 있고, 셋째부인은 자살했다. 또한 현재 신부대를 이미 지불했다고 밝힌 약혼녀만 해도 2명이 더 있다. 남아공에서는 '로볼라(Lobola)'라 불리는 결혼지참금 제도가 결혼의 최대 장애 요인으로 꼽히지만 여전히 흑인들은 4명 중 1명꼴로 1명 이상의 부인을 두는 것을 선호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부대를 지불할 능력이 충분한 상류층에서는 복수의 부인을 두는 것이 흠이 아니며, 이와 같은 사회적 인식 때문에 정치인의 성추문에도 비교적 관대한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 기사

 

 

1. SAPA 2011.10.30

"Mbalula too late to comment on sex scandal"

http://indepthafrica.com/news/southern-africa/s-africa-mbalula-too-late-to-comment-on-sex-scandal/

 

 

2. Times 2011.10.31

"Fikile Mbalula apologises for bedding model"

http://www.timeslive.co.za/politics/2011/10/31/fikile-mbalula-apologises-for-bedding-model

 

 

3. Times 2011.11.1

"ANCYL accepts Mbalula apology"

http://www.timeslive.co.za/politics/2011/11/01/ancyl-accepts-mbalula-apology

 

 

 

참고 : “남아공, 지참금제도가 결혼 최대 장애 요인” 2006.06.06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new_search/YIBW_showSearchArticle.aspx?searchpart=article&searchtext=%eb%82%a8%ec%95%84%ea%b3%b5+%ec%b0%a8%ec%84%b8%eb%8c%80&contents_id=AKR20111031217800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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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입국을 거부당하다.

2012. 10. 28. 14:23

 

달라이 라마,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입국을 거부당하다.

 

 

    

 

 

티베트(Tibet)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Dalai-Lama ⅩⅣ, Tenzin Gyatso)에게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2009년 국제평화회의에 참여하려는 달라이 라마를 저지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의 두 번째 달라이 라마 입국 거부이다. 달라이 라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그의 절친한 친구인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주교의 10월 7일 80회 생일에 즈음한 기념 강연을 위해 투투평화재단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달라이 라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입국을 위해 투투재단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와 접촉 하고 비자발급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끝내 거부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비자를 거부한 진짜 이유는 중국과의 관계 때문이라는 것이 주된 분석이다. 중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대교역국이며 투자국가이다. 중국은 티베트의 독립 및 자치와 관련해서 티베트와 끊임없이 마찰과 갈등을 빚고 있고, 티베트에 대한 중국 정부의 강력한 저지는 유혈사태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중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달라이 라마의 입국을 거부하고 비자를 발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원하지 않을 때 남아프리카공화국 비자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만 빼고 모두 물어보라는 도사와 답답해하는 달라이 라마가 그려진 이 만평은 현재 달라이 라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입국 거부 현상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남아프리카공화국 내에서는 공식적이고 정치적인 입국이 아닌 개인적인 일로 방문하는 달라이 라마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과 경제적인 이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물론 국가의 경제적인 이익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인 일로 방문한 달라이 라마의 입국을 국가가 나서서 저지하는 것은 지나치게 중국 정부를 의식하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의 눈치보기라고 여겨지며, 만약 정말 달라이 라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입국으로 인해 남아프리카공화국-중국 간 교역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의 외교력 문제라고 생각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타임즈(Times) 2011.9.22

http://www.timeslive.co.za/local/2011/06/13/zapiro-cartoons#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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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과 에이즈의 진실

2012. 10. 28. 14:15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에이즈의 진실>

 

 

  아프리카를 생각할 때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단어는 죽음, 기아, 가난, 전쟁, 그리고 에이즈(Human Immunodeficiency Virus : HIV)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땅에서 위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정적인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있는 서구 미디어의 영향으로 더욱 나쁜 이미지를 주고 있다. 세계 최대 에이즈 감염국으로 분류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에이즈 문제는 무엇일까?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훨씬 안정적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유아사망률이 20년째 거의 변화가 없으며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는 사실은 유니세프(UNICEF)와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 WHO)가 발행한 “유아사망의 수준과 경향(Levels and Trends in Child Mortality)”을 통해 밝혀졌다.

 

케이프타운 대학교 (University of Cape Town : UCT)의 소아과 및 아동 건강 학과의 총장이나 적십자 아동병원(Red Cross Children's Hospital)의 수장인 자르(Heather Zar)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높은 영아사망률의 주요원인은 모자감염으로 인한 에이즈라고 2011년 9월 20일자 남아프리카공화국 데일리뉴스(Daily news)의 기사를 통해 밝히고 있다. 실제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비롯한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에이즈 문제에서 모자 감염은 영아사망과 직결되는 심각하고도 중요한 이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에이즈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항레트로바이러스 에이즈 치료(Antiretroviral Treartment : ART)를 에이즈 신생아에게 보급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UN에이즈프로그램(UN Programme on HIV/AIDS : UNAIDS)에서도 새로 발생하는 에이즈 감염의 90%가 아동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음을 밝히고 UNAIDS 사무총장 시디베(Michel Sidibé)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보건부 장관 모트소알레디(Aaron Motsoaledi)를 만나 아동 에이즈 감소를 위한 노력과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다고 2011년 9월 28일 국제연합 유엔 뉴스는 전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비트바터르스란트 대학교(University of the Witwatersrand)의 페리퍼(Audrey E Perrifor) 교수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North Carolina)의 자스판(Heather Jaspan) 교수는 젊은층의 높은 에이즈 감염률이 개방적이고 위험한 성생활 때문이 아니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고 2011년 9월 18일자 남아프리카공화국 타임즈(Times)는 보도했다. 그동안 많은 서구의 기사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청년들의 성생활이 문란하고 이 때문에 에이즈 문제가 심각하다고 보도했었다. 페티포와 자스판의 연구는 오히려 남아프리카공화국보다 미국의 젊은층이 성적 파트너의 수가 더 많고, 콘돔의 사용은 더 적으며, 더 어린 나이에 성관계를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페티포 교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젊은층은 위험한 성생활로 인한 에이즈에 감염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에이즈 문제에는 생물학적, 유전적 이유, 남아프리카공화국 지역의 바이러스와 관련된 이유, 환경적인 이유 등이 복잡하게 얽혀 성관계를 더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세계 최대 에이즈 감염국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대부분의 에이즈 환자가 동성연애나 개방적인 성생활, 빈곤으로 인한 매매춘 때문에 감염되고 있는 아니다.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무엇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세계 최대 에이즈 감염국으로 만들었는지를 편향되지 않은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접근은 에이즈로 고통 받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보다는 모자감염 예방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지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본문 기사

 

1. 남아프리카공화국 데일리뉴스(Daily News) 2011.9.20

“Little change in SA’s child mortality rate”

http://www.iol.co.za/lifestyle/family/kids/little-change-in-sa-s-child-mortality-rate-1.1141463

 

 

2. 국제연합 유엔 뉴스(UN News Centre) 2011.9.28

“Commitment and funding key to eliminating HIV infections among children – UN”

http://www.un.org/apps/news/story.asp?NewsID=39868

 

 

3. 남아프리카공화국 타임즈(Times) 2011.9.18

“High youth Aids rate 'not result of risky sex'”

http://www.timeslive.co.za/local/2011/09/18/high-youth-aids-rate-not-result-of-risky-s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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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봉(Cape of Good Hope)1)반도

2012. 7. 17. 22:20

 

 

희망봉(Cape of Good Hope)1)반도

 

 

바다 쪽으로 약 75km의 암초가 뻗어있는 희망봉 반도(peninsula)는 마치 아프리카의 본토에 덧붙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지역은 지구상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고 울퉁불퉁한 바위들은 아열대 식물들과 꽃들 그리고 변화하는 빛과 색의 변화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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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는 한때 섬이었다. 약 600만 년 전에 물이 줄어들고 융기가 일어났다. 모래가 많은 낮은 지역은 아프리카 대륙에서부터 이어져있는데 케이프 평지(Cape Flats)로 알려져 있다.

 

봄(8월-10월)에 반도는 아름다운 색들로 치장한다. 키르스텐보쉬 식물원(Kirstenbosch Botanic Garden)2)은 그 화려함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다. 희망봉 자연보호구역(The Cape of Good Hope Nature Reserve)은 더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뮈젠버르그(Muizenberg)와 칼 베이(Kalk Bay) 사이의 산을 통해 걷는 것은 이상한 나라의 꽃, 동굴, 이상한 암석층과 꿈같은 숲 속으로 안내한다.

 

 


여름(11월-3월)에는 깨끗하고 밝고 그리고 건조한 남동풍이 불어오고 아침나절에는 대부분 조용하다. 서쪽해안에서 밀려오는 파도는 강하고 높게 일며 클립튼(Clifton)과 볼더스(The Boulders) 해변은 일광욕하는 사람들과 소풍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낚시꾼들은 펄스 베이(False Bay)으로 몰려들고 다이버들은 수면 아래에서 암초들 사이로 난파선을 탐색하고 청록색으로 물든 깨끗한 바다를 감상 할 수 있다. 

 

3월부터 5월까지 케이프는 가장 매혹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남동쪽은 점점 겨울을 차비하느라고 잎들과 풀들이 말라간다. 바다는 여전히 따뜻하고 과일은 풍성하게 생산된다. 꽃이 비록 적지만 나뭇잎은 가을의 생생한 빛깔을 띠고 공기는 느긋하게 우리를 감싸 안는다.

 

겨울에 반도는 초록빛을 띄고 있으며 신선하다. 여러 종류의 프로티아(protea)3)꽃들은 무더기로 피어난다. 구름이 끼거나 비가 내리고 북서풍이 불지만 날씨가 개는 날은 공기가 스파클링 포도주(sparkling wine)의 향기와 맛처럼 청량하면서 화창하고 아름답다. 땅은 폭포와 빠른 속도로 흘러내리는 개울물들로 반짝인다. 또한 구름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장관을 연출한다. 비록 수영하기에는 너무 차갑지만 동쪽 해안에서는 서핑하기에 좋다. 따뜻한 옷은 특히 밤에 꼭 필요하다. 테이블 산(Table Mountain)에 내리는 눈은 오래 남아있지 않지만 폴스 베이의 반대쪽에 있는 더 높은 산은 종종 하얗게 덮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 경치가 펼쳐진다.

 

 


희망봉 자연보호구역(Cape of Good Hope Nature Reserve)

 

프란시스 드라커(Francis Drake)경이 케이프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칭찬했던 곳은 현재 희망봉 자연보호구역이 되었다. 이 지역은 반도의 최 남단의 처녀지로 개발되지 않은 7680 ha를 포함하여 왼쪽의 슈스터 만(Schuster's Bay)에서부터 동쪽의 펄스 만까지 이어져 있다. 해안선은 남아공의 가장 드라마틱한 경치가 이어지고 있으며 거의 40km에 달하며 희망봉을 포함하고 있다. 반도는 끝 부분에서 세 지점으로 나누어진다. 희망봉이 가장 남쪽지점이며, 동쪽은 19세기의 천문학자 토마스 맥클리어 경(Sir Thomas Maclear)경의 이름을 딴 케이프 맥클리어(Cape Maclear)이며 더 동쪽으로는 희망봉(Cape Point)가 있다. 이곳에는 또한 등대와 무선표지가 설치되어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아름다운 드라이브 길은 시몬스타운(Simonstown)에서 자연보호구역을 통과하여 희망봉까지 나있다. 많은 작은 시내들이 흐르고 있으며 그중에서 가장 큰 클라스자거스 강(Klassjagers River)이 자연보호구역을 흐른다. 버펠스 만(Buffels Bay)과 올리판스보스(Olifantsbos)같은 야외 휴식처는 야외 취사장을 가지고 있으며 나무와 물을 이용할 수 있다. 버펠스 만에는 조수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수영장이 있고 보트가 정박할 수 있는 이동경사로가 만들어져 있다. 버펠스 강(Buffels River) 근처에 있던 19세기의 농장 농가는 이제 식당으로 바뀌었고 농가의 벽의 일부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일년 내내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자연보호구역은 야생 꽃이 흩뿌려진 것처럼 만발하는 봄철에 특히 아름답다. 일년 중 희망봉에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거의 없지만 바람의 정도와 영향은 다양하다. 여름에는 강한 남동풍이 불고 겨울에는 더 온화한 북서풍이 우세하다. 가을에는 봄과 같이 비교적 잔잔하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수목과 가축이 잘 번성하지 못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약간의 열대식물이 자라기는 하지만 다 자라면 그들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는 듯이 보이며 그들이 성장하는 이상한 각도는 그들이 그 장소에서 벗어나기를 무엇보다도 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암석이 있는 토양을 만드는 사암은 풍부하게 펼쳐져 있다.

 

거북과 다른 작은 생명체들은 관목 사이에 산다. 그러나 더 큰 동물들은 이 지역에 결코 잘 적응할 수 없다. 영양이나 코끼리도 이곳으로 이동해오지만 결국 날씨가 나빠지면 떠나고 만다. 얼룩말과 본터복(bontebok)과 같은 영양을 재도입하려는 시도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비비 원숭이는 떼를 지어 이 지역을 항상 돌아다닌다. 그들은 해안가에서 껍질을 부숴 열어 그 안의 연체동물을 먹기 위해 해변을 무리지어 다닌다. 

 

관찰되는 150종의 새 중에는 타조, 흰머리 물떼새, 까만등 갈매기, 가마우지, 설탕새(sugarbird), 케이프 자고새, 왕관 댕기 물떼새, 노란부리를 가진 오리와 케이프 산까치가 있다.

 

낚시는 반도의 양쪽에 나와 있는 암석 지점이 특히 좋다. ‘붉은 낭떠러지(red cliff)’란 뜻을 가지고 있는 가파른 루이크란(Rooikrans)의 턱진 곳은 낚시꾼들이 깊은 물에 직접 낚시를 할 수 있는 장소로 인기 있다. 빙어류(yellowtail)와 다랑어가 잘 잡힌다. 

 

이 지역은 해안에 수많은 유흥지가 건설되던 1928년에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기로 계획되었다. 결국 1939년 4월 11일에 케이프 지방정부는 토지수용을 위해 약 127,000랜드의 비용을 책정한 후 보호지로 선언하였다.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flying Dutchman)4)의 영원한 항해

 

 

바람이 휘몰아치며 울부짖고 대서양의 파도가 무섭게 바위를 후려칠 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유령인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이 희망봉에 출몰한다고 여겨진다. 

 

돛대는 부러지고 돛은 찟겨 지고 파손된 배의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유령선5)이 영원히 희망봉 주위를 돌아다니도록 운명지어졌다는 이야기가 몇 세대에 걸쳐 전해내려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전설이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돌로메우 디아스(Barthelomev Dias)6)로 거슬러간다고 알고 있다. 그가 1488년 아프리카의 최 남단에 도착한 유일한 유럽인으로 기록된  2 년 후 그의 배가 희망봉에 침몰하여 익사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전설이 1641년 귀향 중에 폭풍을 만난 네덜란드인 판 더르 데칸(Van der Decken) 선장의 배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 전설은 그의 배가 침몰하는  운명의 날까지도 그가 희망봉을 돌아서 갈 것이라고 맹세했다는 일화에서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뱃사람들은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을 흘끗 본 사람들은 모두가 판 더르 데칸처럼 죽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전설은 단지 귀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던 옛날사람들의 미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희망봉의 등대지기들은 종종 폭풍을 맞은 배들로부터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U-보트가의 승무원들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고 1939년 클렌카인(clencairn)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이 파손된 오래된 배가 갑자기 형체를 드러낸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아마 가장 유명한 기록은 1881년 6월 11일 영국 해군(Royal Navy) 전함인 바칸데(Bacchante)의 젊은 해군 사관학교 생도의 일기에 기록 되어져 있다. ‘새벽 4시,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은 우리 뱃머리를 횡단하여 지나갔다. 뱃머리에서 망보는 사람은 배가 좌현 뱃머리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보고했고 당직 장교 또한 배를 확실히 보았다고 했다...유령선의 이상한 붉은 불빛이 200 야드나 먼 거리에서 매우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망보는 사람은 망루에서 떨어져 죽었지만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의 저주는 해군 사관학교 생도에게 죽음을 가져다주지 않고 온전히 살려두었다. 그는 후에 조지 5세(George V)7)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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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망봉(希望峰 ; Cape of Good Hope) :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 주 남서부의 케이프 반도 남단에 있는 암석 곶(串).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르툴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을 확인한 후 포르투갈로 귀항하는 길에 처음으로 이 곶을 발견했다. 한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디아스가 이 곶을 폭풍봉으로 이름붙였던 것을 포르투갈의 주앙 2세가 희망봉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곶의 발견으로 유럽과 인도를 잇는 항로 개척의 가능성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디아스 자신이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명명했다고 밝히는 사료들도 있다. 험한 날씨와 거친 앞바다로 유명한 이 곶은 인도양에서 흘러온 모잠비크-아굴라스 난류와 남극해에서 오는 벵겔라 한류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풀과 낮은 관목림이 특징적인 식생이며, 이 곶은 반도의 남단을 차지하는 희망봉 자연보호구역(1939)의 일부를 이룬다. 희망봉 동쪽 2㎞ 지점의 포인트 곶에는 등대가 있다.
희망봉 :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서쪽 끝을 이루는 곶(串).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아굴라스곶의 북서쪽 160km 지점에 있다. 케이프타운에 가까운 반도의 맨끝으로서 케이프 포인트라고 불린다.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발견하였으며, 당시에는 ‘폭풍의 곶’으로 불렸다. 그 후 1497년 V.d.가마가 이 곶을 통과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데서 연유하여, 포르투갈 왕 주앙 2세가 카부 다 보아 에스페란사(Cabo da Boa Esperana:희망의 곶)라고 개칭하였다. 현재 희망봉 일대는 관광지로서 곶의 첨단까지 관광용 자동차도로가 통한다. 반도의 남단부는 자연보호지구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비()를 비롯하여 많은 동식물이 보호되고 있

 


2) 남아프리카 국립식물원(National Botanic Gardens of South Africa) : 세계에서 가장 큰 식물원 중의 하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키르스텐보스흐에 있으며 그 면적은 552㏊에 달한다. 6,200종류의 식물이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아프리카 남부산 식물들이다. 프로테아과(―科 Proteaceae)와 칼루나속(―屬 Calluna) 식물들처럼 아름다운 식물들도 있으며, 비늘줄기를 가지는 수많은 식물들과 함께 많은 수의 소철류가 있다. 이 식물원에는 9개의 온실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희귀식물들을 번식시키고 있으나 일반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3곳의 표본실에는 약 22만 5,000점의 식물표본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국립식물원의 가장 주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그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 중 위기에 처해 있는 식물들을 보존하는 것이다. 몇 년에 걸쳐 그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업적을 세웠으며, 멸종의 위기에 있는 많은 식물들의 표본을 모아왔다. 연구 결과 남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6곳을 지방 식물원 또는 자연보존지역으로 지정하였는데, 남아프리카에서 자라는 다육식물(多肉植物)이 5,000종(種) 이상 심어져 있는 우스터의 카루식물원(Karro Garden), 붓꽃과와 백합과 식물 가운데 비늘줄기를 지닌 식물만을 모아둔 이디스 스티븐스 케이프 플랫 식물보호지역(Edith Stephens Cape Flats Flora Reserve) 등이 이에 속한다.

 


3) 프로테아목(Proteales) : 쌍떡잎식물강(雙─植物綱)에 속하는 꽃피는식물의 한 목.
프로테아과(─科 Proteaceae), 62속(屬)의 관목과 교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750종(種), 남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350종 등 거의 대부분이 주로 남반구에서 발견된다. 또한 말레이시아, 아시아 남동부, 태평양 일부 섬, 아메리카의 중부와 남부에서도 자란다. 꽃 하나하나는 대개 작지만 빽빽하게 붙어 화려한 꽃차례를 형성하는 것이 이 식물들의 특징이다. 꽃은 4개의 수술을 가진 4개의 꽃덮이[花被]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술은 꽃덮이조각[花被片]의 끝부분에 달리며, 때때로 노출된 1개의 꽃밥만이 달리기도 한다. 홑잎이거나 여러 갈래로 갈라진 잎들은 규칙적인 나선 모양으로 달리며, 흔히 털로 빽빽하게 덮여 있거나 두꺼운 큐티쿨라층이 있어 수분 손실을 막기 위해 적응된 형태를 취한다. 이 식물들은 일반적으로 매년 건기가 긴 지역에서 자란다.
중요한 속으로는 그레빌레아속(Grevillea : 190종)· 프로테아속(Protea : 130종)·하케아속(Hakea : 100종)·헬리키아속(Helicia : 90종)· 류코덴드론속(Leucodendron : 70종)·페르소오니아속(Persoonia : 60종)이 있다. 온대지역에서는 여러 종들이 관상용으로 재배되고 있는데 미세하고 부드러운 털로 덮인 잎이 달리는 류코덴드론 아르겐튬(L. argenteum), 반크시아속(Banksia)의 오스트레일리아러니서클, 엠보트리움속(Embothrium)의 화이어부시, 하케아속의 하케아 등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자생하는 우의목(Grevillea robusta)은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마카다미아 인테그리폴리아(Macadamia integrifolia)는 식용의 씨를 얻기 위해 재배된다.

 


4) 플라잉 더치맨(Flying Dutchman) 유럽의 해상 전설에서 나타나는 유령선.
영원히 항해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저주받은 배이다. 유령선이 선원에게 보이면 재앙이 임박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가장 널리 알려진 유령선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반데르데켄 선장은 자신이 폭풍우치는 희망봉을 돌아서 항해해 올 수 있으며, 이것이 신이 자신을 구원해준다는 증거라는 자만에 찬 내기를 한다. 선장은 영원히 그 항로를 항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이 이야기는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1843)의 주제가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팔켄베르크 선장은 그의 영혼을 걸고 악마와 주사위 놀이를 하다가, 영원히 북해를 항해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는 것이다. 주사위 놀이 주제는 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노수부의 노래 Rime of the Ancient Mariner〉(1798)에서 다시 나타난다. 노수부는 항해 중에 유령선을 만나는데 그 배에서는 '죽음'과 '죽음속의 삶'이라는 대립되는 힘이 서로 노수부를 차지하려고 주사위 놀이를 한다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이다. 스코틀랜드의 작가 월터 스콧은 이 전설을 그의 이야기체 시 〈Rokeby〉(1813)에 원용해 선상에서 일어난 살인, 선원들에게 흑사병이 퍼져 모든 항구가 그 배의 입항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썼다.

 


5) 유령선(Phantom ship) : 어떤 원인으로 살해당한 사람의 혼백이 구제받지 못한 채 배 안에 남아서 바다 위를 표류한다고 하는 전설상의 배.
이런 전설로는 17세기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대표적이다. 불신앙(不信仰)의 죄로 영원히 저주받은 네덜란드 선장이 바다 위를 헤맨다는 이 전설은 원래 희망봉과 관련된 것으로 그 배를 만나면 위해(危害)를 입는다든가, 또는 여자의 애정으로 구제를 받는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그와 같은 전설에 첨가되었다.
유령선이 보통의 배와 다른 점은 바람에 거슬러 달린다든가, 배의 불빛이 바다 위에 비치지 않는다든가 하는 불가사의가 따르는 일이다. 독일의 동화 작가 W.하우프의 《유령선》에서는 배 안에 있는 피투성이의 시체가 한밤중이 되면 움직이기 시작하여 돛을 펴고 소동을 피우지만, 날이 새면 원래의 시체로 돌아간다. 그리고 유령선과 스친 배는 난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슬람교의 수도승을 죽인 벌로서 자기도 살해당한 알제리의 선장은 이렇게 50년간을 밤마다 유령선을 타고 달렸는데, 신앙이 두터운 이슬람교도의 덕분으로 저주에서 풀려나고 시체는 먼지가 된다. 이것은 전형적인 유령선 전설이다. 또한 항해하는 선박의 승무원을 아름다운 노랫 소리로 홀려서 죽이는 세이렌이나 로렐라이의 마녀 등도 유령선과 같은 해(害)를 끼치는 바다 유령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6) 디아스(Bartolomeu Dias) : Dias는 Diaz라고도 씀. 1450경~1500. 5. 29 희망봉 근처 해상.
포르투갈의 항해가·탐험가. 1488년 유럽의 탐험대를 이끌고 희망봉을 처음으로 발견, 대서양과 인도양을 지나 아시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15세기에 대서양을 탐험한 포르투갈의 모험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생애 초반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항해왕자 엔리케의 도선사(導船士)였던 사람의 자손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입증되지 않고 있다. 그의 신분은 왕실에 속한 종신(從臣)으로서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다. 디아스 데 노바이스라는 이름은 당대에 작성된 문서들에는 눈에 띄지 않고 1571년 그의 손자가 앙골라의 총독으로 임명된 것을 보여주는 증서에 유일하게 그 이름이 등장한다.


1474년 국왕 아폰수 5세는 아들 주앙(나중에 주앙 2세로 즉위)에게 기니와의 무역 감독과 아프리카 서부해안 탐사작업을 위임했다. 주앙은 아프리카 서부해안에 외국선박의 입출항을 봉쇄하고자 했으며 1481년 왕위에 오른 후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 지점 확인을 위한 항해를 명령했다. 항해에 나선 사람들에게는 포르투갈 국왕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한 석주(石柱) 여러 개가 주어졌다. 당시 항해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디오구 캉은 콩고에 도착한 후 앙골라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해 남위 13°26' 지점의 산타마리아 곶에다 주앙 2세로부터 받은 석주 하나를 세웠다. 디오구 캉은 자신이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귀족 작위와 함께 상을 받았다. 캉은 이후 재차 항해길에 올라 이번에는 남위 15°40'이 되는 지점에 석주를 세우고 크로스 곶에 또 하나의 석주를 세웠으며 남위 22°10'까지 항해를 계속했다. 주앙 2세는 캉이 인도양에 도달하기를 기대했으나 이같은 기대는 실현되지 못했으며 캉으로부터 더이상의 소식은 전해오지 않았다. 이에 따라 주앙 2세는 새로운 탐험의 임무를 디아스에게 맡겼다. 1486년 당시에는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오가네라는 곳에 한 위대한 통치자가 있으며 그가 바로 그리스도교 왕국을 건설했다는 전설의 인물인 프레스터 존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주앙 2세는 그때 육로로 인도와 아비시니아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페루 다 쿠비양과 아폰수 파이바를 파견해 놓고 있었으며 또한 디아스에게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을 찾아내도록 지시를 내렸다.


디아스의 선단은 디아스 자신이 승선한 '상크리스토방호'와 그의 동료 주앙 왕자가 지휘하는 '판탈레앙호' 그리고 페루 또는 디오구라는 디아스의 동생이 지휘한 보급선 등 모두 3척의 선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선단에는 당대의 뛰어난 도선사들이 승선하고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일찍이 캉 밑에서 항해에 참가했던 페루 데 알렌케르와 주앙 데 산티아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6세기 역사가 주앙 데 바로스는 디아스의 선단이 1486년 8월에 출항해 16개월 17일 동안 포르투갈을 떠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두아르테 파셰쿠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등 당대의 다른 인물들은 디아스의 귀환 시점을 1488년 12월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디아스의 출항시기는 1487년 8월로 추정된다.


디아스는 캉이 과거에 세웠던 석주를 지나 12월 4일 '세인트바르바라의 땅'에 도착했으며 8일에는 월비스베이에, 그리고 26일에는 세인트스티븐 만(엘리자베스 만)에 도달했다. 그는 1488년 1월 6일 폭풍을 만나 해안을 따라 항해를 계속할 수가 없어 며칠 동안 육지를 보지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뱃머리를 왼쪽으로 다시 돌렸으나 육지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다시 육지를 목격하게 된 것은 선로를 북으로 돌려 항해하고 난 뒤인 2월 3일이었다. 즉 디아스는 곶을 보지 못하고 돌아 항해했던 것이다. 그는 그곳을 안그라데상브라스(세인트블레이스 만, 그날이 블레이스 축일이었음), 또는 그곳의 주민을 보고 목자만(牧者灣)이라고 명명했다. 디아스 선단에 동승한 흑인들은 원주민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으며 이들 원주민들은 처음에는 포르투갈인들을 보고 달아났으나 나중에는 되돌아와서 공격를 가했다. 탐험대는 안그라다로카(지금의 알고아 만)를 향해 계속 나아갔으나 선원들은 항해를 계속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디아스는 간부 선원들의 견해를 수렴해 보았는데 이들 모두가 포르투갈로의 귀환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항해를 계속하기로 의견일치를 보고 난 후 디아스의 선단은 리우 두 인판테에 도착했다. 이 지명은 '상판탈레앙호'의 도선사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인데, 지금의 그레이트피시(흐로트-비스) 강 부근이 거의 확실하다.


곶을 돌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고 디아스는 귀환길에 올랐으며 그해 5월에는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곶을 눈으로 확인했다. 역사가 바로스는 디아스가 그 곶의 이름을 '폭풍의 곶'이라고 명명했으며 주앙 2세가 다시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두아르테 파셰쿠의 말에 따르면 희망봉이라는 이름은 디아스 자신이 붙였다고 하는데, 파셰쿠가 프린시페 섬에서 디아스와 합류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좀더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귀환 항해에 관해서는 디아스가 리우두레스가테(지금의 라이베리아에 있음)의 프린시페에 기항했으며 미나의 무역기지를 요새화했다는 사실 이외에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디아스가 파드랑데상그레고리우에 남긴 표식 가운데 하나가 그레이트피시 강에서 대략 56㎞ 정도 떨어진 폴스아일랜드에서 1938년 발견되었다. 또다른 표식 하나가 세인트크리스토퍼 만의 서쪽 끝에 세워졌었는데 그때문에 그곳의 지명이 디아스포인트로 명명되었다.


주앙 2세가 주최한 디아스 일행의 접견행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인도로의 항해계획이 마련되었다고 하지만 육로로 인도를 찾아나선 페루 다 쿠비양으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9년 동안 아무도 항해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주앙 2세의 계승자인 마누엘 1세가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유명한 항해를 허가했다. 디아스는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대와 함께 미나까지 동행했다.


다 가마가 인도 서부의 항구에 도달한 후 포르투갈로 귀환하자마자 재차 함대가 편성되었다. 12척으로 구성된 이 함대는 인도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그들과 대규모 통상을 개설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 함대의 지휘는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맡았으며 디아스에게도 소규모 선박 1척이 맡겨졌다. 이 함대는 희망봉으로 향하는 동안 대서양 서부해역까지 항해하면서 브라질의 에스피리투산투를 목격하기도 했다. 이 육지는 섬으로 생각되었으나 '진실한 십자군의 땅'이라 이름붙여졌다. 따라서 디아스는 브라질 발견에 참여한 셈이 되었다. 일행이 희망봉에 도달했을 때 디아스는 해상에서 실종되었는데 아마 처음으로 그가 항해했던 바로 그 해상에서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안토니우라는 아들을 두었다. 손자 파울루 디아스 데 노바이스는 앙골라 총독을 지냈으며 1576년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최초의 유럽인 도시 상파울루데루안다를 건설했다.

 


7)조지 5세(King George V) : 정식 이름은 George Frederick Ernest Albert.
1865. 6. 3 런던~1936. 1. 20 잉글랜드 노퍽 샌드링엄.
그레이트 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왕국의 왕(1910~36 재위). 후에 에드워드 7세가 된 앨버트 에드워드 공의 둘째 아들이다.해군에서 복무하다가 1892년 형 앨버트 빅터가 죽자 왕위를 잇기 위해 더욱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 했다. 1892년 5월 요크 공작이 되었으며 1893년 7월 형의 약혼녀였던 테크의 메리 공주와 결혼했다. 1901년 아버지가 즉위한 뒤 콘월 공작 겸 웨일스 공이 되었고 1910년 5월 6일 아버지를 계승해 1911년 6월 22일 대관식을 올렸다. 통치 초기에 그는 만만치 않은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혔다. 상원의 세력을 꺾으려는 헌법 투쟁이 아직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자유당 정부는 상원이 양보하지 않으려 하자 이 반대를 물리치기에 충분한 수만큼 상원 귀족직을 새로이 창설하겠다는 약속을 왕에게서 받아냈다. 1910년 12월의 선거에서 자유당이 승리하자 상원은 태도를 누그러뜨려 의회법(1911)을 통과시켰고 왕은 자신의 약속을 이행할 필요가 없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그의 위신은 크게 높아졌으며 그는 몇 차례에 걸쳐 프랑스의 전선을 방문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심각한 산업 위기에 직면했다. 한편 1923년에는 총리 앤드루 보너 로가 사임함에 따라 새로운 총리를 찾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커즌 경과 스탠리 볼드윈 두 사람 모두 연로한 정치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볼드윈이 보수당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믿은 그는 하원의원들 중 왕이 선택한 사람이 총리가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1928년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남은 통치 기간 동안 극도로 건강에 신경을 써야 했다. 1931년에 파운드화의 급락과 이에 따른 재정 위기로 노동당 행정부가 분열되었다. 그는 강한 정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램지 맥도널드와 내각의 일부 성원에게 맡은 직책에 남아서 보수당 및 자유당 소속 장관들과 연립내각을 구성해달라고 설득했다. 1935년 5월 즉위 25주년 기념행사 때 그에 대한 대중의 애정과 찬사가 쏟아졌다. 조지 5세는 5명의 아들을 두었다. 국왕이 된 에드워드 8세(윈저 공작), 국왕 조지 6세, 글로스터 공작 헨리, 켄트 공작 조지, 그리고 어려서 죽은 존 공 등이다. 딸 메리 공주는 하우드 백작 6세와 결혼했다. 해럴드 니콜슨이 쓴 국왕 조지의 전기가 1952년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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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와 타협을 통한 과거청산 -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 TRC)

2012. 7. 17. 22:17

 

 

화해와 타협을 통한 과거청산

 -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 TRC)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 TRC)야 말로 남아공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로부터 화해를 타협을 통한 국가건설과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변화의 상징으로서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남아공의 변화는 분명히 ‘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TRC는 이 기적의 전형적인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인식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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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은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한 사회(multi-racial, multi-cultural society)이다. 인종, 언어, 종교, 계급 등에 따른 분열과 차별은 20세기에 들어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시행으로 그 정점에 다다랐다. 특히 인종집단간의 깊은 분열은 올바른 역사의식, 국가의식, 또는 국민의식의 형성을 어렵게 하고 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1995년 국민적 통합과 화해 증진법(Promotion of National Unity and Reconciliation Act)에 의해 설치되었다. 주된 목적은 진실을 밝힘으로서 국민들의 화해와 단결을 증진시키는 것이며 조사기간은 1960년 3월 샤프빌(Sharpeville)사건이 발생한 시기부터 1994년 5월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로 한정하고 있다. 1995년 말에 만델라 대통령에 의해 17명의 위원이 임명되었고 1995년 12월 1일부터 활동이 개시되었다. 의장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대주교가 맡았으며 부의장은 보라이너(Alex Boraine)박사가 임명되었다. 모두 3개의 위원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권폭력 위원회(Committee on Human Rights Violations), 사면 위원회(Committee on Amnesty), 그리고 보상과 복권 위원회(Committee on Reparation and Rehabilitation)로 구성되어있다. 위원회의 기능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인권의 침해와 남용을 조사함은 물론 그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조사하게 하였다. 살인, 납치, 고문, 불법적인 감금 등 과거에 분쟁과 정치적 이유로 발생된 광범위한 인권남용에 대한 조사를 주 대상으로 하고 있다.

 

1996년 4월 본격적으로 조사에 착수한 TRC는 2년여에 걸쳐, 지난 30여 년간에 걸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인권유린에 대해, 1백 60회의 청문회와 희생자 2만 1천 여명으로부터 증언을 듣고 백인들이 저지른 암살, 고문, 실종들의 실상을 조사하였으며 백인들의 인권유린뿐만 아니라 흑인들의 인권유린상황에 대해서도 조사하였다. 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결과는 1998년 10월 29일 인권남용 사례를 담은 2천7백50쪽 짜리 5권의 보고서를 언론에 공개한 뒤 만델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인종간의 갈등, 정치적 분쟁, 말해지지 않은 고통과 불평등으로 대변되는 남아공의 경험은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위로부터의 민주화 이행과 국민화합을 실현함으로서 국가건설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주요한 정치집단들이 정치적 희생을 감수하면서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화에 대한 제도적 정착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둘째는 인권남용에 대한 전반적인 실태를 진실에 대한 조사와 사면 및 복권을 명시한 TRC라는 기구를 통해서 밝힘으로서 역사를 청산하고 국민적 화합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TRC의 근본적인 취지가 보복이나 복수가 아니라 화해와 이해, 그리고 보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TRC는 과거의 권위주의적인 인종주의자의 통치로부터 민주주의를 향한 남아공의 변화의 과정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남아공의 변화는 타협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과거 아파르트헤이트시기에 인권남용에 대해 사면을 하는 것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해 TRC는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남아공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로부터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변화의 상징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TRC는 국가건설과 화해에 기초한 ‘복구적인 모델(restorative model)'을 제시하고 있는데 세계의 다른 예와는 달리 진실을 말하게 하고 사면과 보상을 시행하는 유일한 제도이다.

 

 

과거에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졌던 인권남용의 가해자들에게 행했던 일방적인 사면과는 다르게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가해자들에게 사면을 부여함은 물론 피해자들에게 자신의 피해사실에 대해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나아가 보상과 명예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더구나 인권남용에 대한 사면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이것은 중요한 기준을 다양하게 두고 있는데 특히 관련된 사건의 완전한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전체적인 평가는 TRC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종족간의 화합을 가져옴으로서 짐바브웨나 유고슬라비아 같은 인종․종족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제공되었으며 화합을 이끌어낸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평가를 정리하여보면 첫째로 TRC는 정치적 실용주의 모델로서 가해자나 피해자나 국가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로 인식되고 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아파르트헤이트의 정권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가해자로서의 권력을 포기하고 민주적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전감을 갖게 해 주었다. 둘째로 준법(quasi-legal)적 조정자 역할을 하였다. 인권남용과 폭력에 대해 가해자를 밝히고 책임을 지게 하였으며 도덕적 강제기능까지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심각하게 분열된 국민들에게 과거사를 재정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TRC는 국가건설의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인종적 가해자와 피해자들 사이에 용서와 화해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뉘른베르그식의 보복적인 승리자의 정의와 역사적 망각사이에 또 다른 길 - 즉 용서와 화해, 그리고 협력을 통한 국가건설과 새역사의 창조 - 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넷째, 인권남용에 대한 예방적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효과로 인해 TRC는 인권남용이 다시는 발생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킴으로서 인권문화의 발전을 꽤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TRC가 남아공의 변화와 발전에 중요하면서 상징적인 촉매역할을 했다는 것일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도 지역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상태이며 일제잔재의 청산과 과거 민주화과정에서 저질러진 인권남용에 대해 조사하고 정리해야 할 때이다. 나아가 통일이후에도 남북간의 이념적 문화적 갈등을 풀어나가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만약 이런 문제를 일단락 짖지 못하고 간다면 우리는 이런 문제들로 인해 끊임없이 소모적인 논쟁에 빠져들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단시일 내에 어떤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문제들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도 국민적 공감대 위에 이런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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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를렘(Haerlem)의 난파

2012. 7. 17. 22:16

 

 

5. 하를렘(Haerlem)의 난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인도의 향신료를 가져오기 위한 노력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마침내 그가 즉석에서 희망봉(Cape of Good Hope)1)라 다시 이름 붙인 폭풍의 만(Cape of Storms) 주변을 돌아 인도의 서부 해안에 있는 캘리컷(Calicut) -현재 코지코테(Kozhikode)-에 다다른 때는 비로소 1497년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머나먼 인도에까지 이르는 항로는 개척되었지만 아프리카 주변 항해는 상존하는 위험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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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땅 남아공화국이 백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88년 바돌로뮤 디아즈(Bartholomew Diaz) 휘하의 포르투갈 탐험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나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디아즈는 1488년 희망봉을 크게 돌아 알 수 없는 바람에 이끌려 현재의 모슬베이(Mossel Bay)에 최초로 발을 디뎠으며 식수를 구하는 과정에서 코이코이족과 조우하였다. 1488년 한여름에 그레이트 피쉬(Great Fish)강에 도달했으며 돌아오는 과정에서 최초로 케이프를 보았다. 디아즈는 이 지역을 Tormentoso(The Cape of Storms)라고 이름 지었다. 후에 포루투칼 왕 주앙(João)은 카부 다 보아 에스페란사(Cabo da Boa Esperança ; 희망의 곶(Good Hope))로 이름지었다. 즉 디아즈는 아프리카의 끝을 확인한 것이었다.

 

9년 후인 1497년에 유명한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케이프를 바로 돌아 현재의 나탈(Natal, 그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성탄절이었고 다 가마가 라틴어로 성탄절을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름지었다)까지 이르렀고 동아프리카의 몹바사(Mombasa)와 (Malindi)를  거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 한 후 꼭 1년 만에 포루투칼로 돌아왔다. 1500년 카브렐(Pedro Cabral)은 브라질(Brazil)에 기착한 후 케이프를 돌아 동아프리카를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확고히 열고 포루투갈의 독점시대를 열었다.

 

 


이 지역에 백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The Dutch East India Company)가 인도 항로의 중간 정박 기지(기항지 ; revictualling station) 건설을 목적으로,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k)2)가 이끄는 3척의 배와, 130명의 남녀로 구성된 탐험대가 1652년 6월 4일 테이블만3)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모두 이 회사의 피고용인들이었으나 차츰 회사로부터 독립해 목축과 영농으로 경제력을 키워 나갔다. 이들은 지금의 케이프 타운(Cape Town)근처에 백인 사회를 건설했다.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의 해안 지대에는 주로 두 부족의 흑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코이코이(Khoikhoi) 또는 호텐토트(Hotentot)라 불린 부족4)은 주로 목축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부쉬맨(Bushman)으로 불리는 산(san)족5)은 수렵과 채집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쪽의 내륙지방에는 반투(Bantu)어를 사용하는 줄루(Zulu)족, 코사(Xhosa)족 등이 대규모 집단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초기에 백인들과 흑인들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에서 물물교환을 했으나 차츰 목축지를 놓고 대립하는 관계로 변해 갔다. 특히 보어(Boer)인들로 불린 네덜란드계 백인사회가 점점 더 내륙으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이주민과 원주민사이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 희망봉에 대하여

 

동인도 회사를 위해서 먼 동부로의 무역은 극도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또한 선박과 그것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극도로 위험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바타비아(Batavia)6)까지 가는 항해는 평균적으로 약 6달 정도 걸렸고 이 여행 중에 배에서 마시는 모든 물은 다 바닥났고 신선한 음식은 모두 떨어졌으며 소금에 절인 고기와 건빵, 비스킷 모두는 거의 먹을 수 없었다. 결국, 남부 대서양 연안에 도착한 선원들 대부분은 보충과 수리를 받아야 했고, 그 선원들은 종종 괴혈병7), 이질, 기생충을 포함한 질병에 의해서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중간 정거장이 남부 아프리카 해안 어느 곳에 세워졌고 그 곳에서 아픈 선원들은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며 신선한 음식을 먹고 배를 수리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에 세워졌는지 의문이다. 한 가지 가능한 장소는 테이블 베이(Table Bay)8)인데, 이 곳은 조리스 밴 스필베르겐(Joris Van Spilbergen)이 1601년에 그 곳에서 잠깐 쉬면서 붙여준 이름이다.

 

 


그 당시에 적어 놓은 기록은 위도 34도 4분에 놓여 있고 북부 희망봉의 약 15마일쯤 되는 ‘이 만’은 현 세대에 의해서 테이블 베이(Table Bay)라고 명명되었다. 높은 언덕 때문에 위쪽에는 마치 테이블(Table)처럼 편평한 사각형 모양이고9)바다쪽으로 9-10 마일 정도 거리이다. 또한 재정비하러 그 곳으로 오는 배는 보통 그것 아래쪽 길까지 온다. 이 만은 모든 배들이 정박하는데 매우 편리하였다. 왜냐하면 매우 안 좋은 날씨와 폭풍우 없이 4 패덤(fathom ; 1 패덤은 6피트 약1.83m)정도까지 육지에 가까이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에서 반 마일 정도 떨어진 희망봉의 동쪽으로는 강어귀나 강가가 있는데, 그곳에서 잉어 같은 모양의 아주 맛있는 물고기를 잡았다. 10월, 11월, 12월에 이러한 계절에는 이 해변을 따라서 네덜란드에 북동풍처럼 매섭고 차가운 남풍이 불어온다.

 

 

‘희망봉은 지중해성 기후로 매우 다양한 문화와 집단을 형성하고 농작물을 생산하는 방식에서 유리한 조건이었다. 비록 산지가 많고 언덕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또한 매우 아름다운 계곡이 매력적이다. 사슴과 노루가 풀을 먹고 있고 그 수는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언덕에서 흘러 내려오는 깨끗한 물을 아주 좋아한다. 소와 양 같은 동물들 또한 마찬가지로..... 희망봉의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은 뮬라토(mulattoes) 같은 누런빛의 색을 띄고 있고 얼굴은 매우 못 생겼으며 키는 중간쯤 되고, 몸은 여위었고 날씬했으며 달리기를 매우 잘 하였다. 칠면조와 같이 혀를 차면서 매우 이상한 말을 하였다. 그들은 사슴이나 다른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꽤 격려가 되는 보고서임에도 불구하고 50년 이상동안 희망봉에 그 어떤 이주자들이 재정비 장소를 설립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 장소가 우연이라도 선정되지도 못하였다.

 

 

2. 하를렘(Haerlem)이 좌초하다

 

동인도 선박인 하를렘(Haerlem)은 1646년 12월 22일에 쉬에담(Schiedam)회사가 있는 바타비아(Batavia)로 항해를 하였고 1647년 3월 22일 테이블 베이(Table Bay)에 처음 도착하였다. 그 배의 선원인 린데르트 잔스젠(Leendert janszen)의 일기에서, 3일 후에 재난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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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 타운(Cape Town)과 희망봉 이야기

2012. 7. 17. 22:14

 

 

케이프 타운(Cape Town)과 희망봉 이야기

 

 

 

희망봉(Cape Town)은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땅 남아공화국이 백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88년 바돌로뮤 디아즈(Bartholomew Diaz) 휘하의 포르투갈 탐험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디아즈는 1488년 희망봉을 크게 돌아 알 수 없는 바람에 이끌려 현재의 모슬 베이(Mossel Bay)에 최초로 발을 디뎠으며 식수를 구하는 과정에서 코이코이족과 조우하였다. 1488년 한여름에 그레이트 피쉬(Great Fish)강에 도달했으며 돌아오는 과정에서 최초로 케이프를 보았다. 디아즈는 이 지역을 Tormentoso(The Cape of Storms)라고 이름 지었다. 후에 포루투칼 왕 João는 Boa Esperança(Good Hope)로 이름지었다. 즉 디아즈는 이곳이 아프리카의 끝이라고 확신하고 이곳을 돌면 인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9년 후인 1497년에 유명한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케이프를 바로 돌아 현재의 나탈(Natal, 그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성탄절이었고 다 가마가 이름지었다)까지 이르렀고 동아프리카의 몸바사(Mombasa)와 말린디(Malindi)를  거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 한 후 꼭 1년만에 포루투칼로 돌아왔다. 1500년 Pedro Cabral은 부라질(Brazil)에 기착한 후 케이프를 돌아 동아프리카를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확고히 열고 포루투칼의 독점시대를 열었다.

 

 

1647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The Dutch East India Company)소속의 범선 하를렘(Haarlem)호가 테이블 만에서 난파되어 선원들이 약 6개월 동안 원주민들과 교류하며 생존하다가 1649년 본국에 귀환한 후 이곳이 기항소의 설치 및 유럽인들의 정착에 최적지라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러한 보고에 따라 이 지역에 백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1652년 동인도회사가 인도 항로의 중간 정박 기지(기항지 ; revictualling station) 건설을 목적으로,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k)가 이끄는 3척의 배와, 130명의 남녀로 구성된 탐험대가 1652년 6월 4일 테이블만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모두 이 회사의 피고용인들이었으나 차츰 회사로부터 독립해 목축과 영농으로 경제력을 키워 나갔다. 이들은 지금의 케이프 타운(Cape Town)근처에 백인 사회를 건설했다.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의 해안 지대에는 주로 두 부족의 흑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코이코이(Khoikhoi) 또는 호텐토트(Hotentot)라 불린 부족은 주로 목축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부쉬맨(Bushman)으로 불리는 산(san)족은 수렵과 채집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초기에 백인들과 흑인들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에서 물물교환을 했으나 차츰 목축지를 놓고 대립하는 관계로 변해 갔다. 특히 보어(Boer)인들로 불린 네덜란드계 백인사회가 점점 더 내륙으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이주민과 원주민사이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희망봉이 위치한 케이프 타운은 지중해성 기후로 아주 쾌적한 기후를 가지고 있으나 겨울에는 강우량이 많고 특히 폭풍우가 심하다. 케이프 타운을 끼고 있는 케이프 반도의 해안가의 나무들은 항상 겨울 폭풍우로 아름드리 나무들도 항상 비스듬히 누워있다. 겨울에 폭풍우가 칠 때는 사람도 실려나갈 정도이다. 항상 두얼굴의 모습이고나 할까.

 

 

 


타이타닉호 : 영국 화이트스타사(社)가 건조한 대형 호화여객선.

 

톤수 46,328t. 길이 259.08m. 너비 28.19m. 깊이 19.66m. 1911년에 제작되었다. 주기(主機)는 터빈의 삼연성기기(三連成汽機)의 조립으로 된 기관이다. 삼축선(三軸船)으로 속력은 22kn이며, 당시에는 4만t급 이상의 객선의 개척선이었다. 영국 사우샘프턴항(港)에서 뉴욕항으로 향하는 처녀항해 중,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부류빙산(浮流氷山)과 충돌하여 2시간 40분 만에 침몰하였다. 이 사고로 승선자 2,208명 중 1,513명의 희생자를 내어 세계를 놀라게 한 사상 최대의 해난사고였다. 이 사고를 계기로 배의 구조 ․구명설비 ․무선설비 ․유빙감시(流氷監視)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해상의 인명안전에 관한 국제회의가 소집되어, 해난사고방지를 위한 국제적인 결정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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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 타운(Cape Town)

2012. 7. 17. 22:13

 


케이프 타운(Cape Town)

 

 

 

인도양의 감미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2월 어느날 케이프 타운은 제일먼저 신비로운 자태를 보여주며 나에게 다가왔다. 푸른 하늘과 바다를 사이로 테이블 마운틴(Table Mountain)에 하얀 구름이 신비롭다 못해 성스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이 구름을 케이프 타운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악마(Devil)와 성 피터(St Peter)가 카드를 하면서 피우는 파이프 연기에서 온 것이라는 전설을 전해주었다. 정말 그냥 산에 구름이 덮이는 것이 아니라 테이블 마운틴을 타고 올라와서 평평한 정상을 바닥을 기어가 덮더니 그 끝에서는 다시 타고 뚝 떨어져서 마치 테이블 보를 얹어놓은 것은 모습을 연출한다. 분명히 신이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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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름을 가져오는 바람은 ‘케이프 닥터(Cape Doctor)’로 이곳 사람들에게 불리어진다. 이 바람은 해충은 물론 먼지나 공중에 날려 다니는 오염물질들을 날려버리기 때문에 건강을 가져다 주는 바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1월부터 3월까지 부는 바람은 대체로 아침에는 잔잔하다가 오후에 격렬하게 불어오는데 어떤 날은 시속 120km정도가 될 때도 있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테이블 마운틴에 오르는 길에 서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비스듬이 누워있었던 것이다.

 

봄에 해당하는 8월부터 10월 사이에는 케이프 반도는 온갖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난다. 유명한 크리스텐보쉬(Kirstenbosch) 식물원과 희망봉 자연보호구는 그야말로 꽃속에 파 묻힌다. 이 시기는 청명하고 밝고 건조한 날씨가 이어진다. 3월부터 5월에 속하는 가을은 가장 유혹적인 계절이다. 남동풍은 잠잠하고 바다는 여전히 따뜻하며 과일은 달고 맛있게 익어간다. 꽃은 져서 아쉽지만 낙엽들은 온갖 색으로 단풍이 든다. 겨울은 녹색과 신선함으로 대비된다. 프르티아(Protea) 꽃들은 꽃을 피우고 비와 북서풍이 분다. 마치 스파클링 와인처럼 청명하고 쌀쌀한 날씨는 케이프 타운의 또 다른 모습이다. 테이블 마운틴을 비롯한 드라켄스버그 산맥에 하얗게 쌓인 눈은 녹색의 땅과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밤에 사자의 엉덩이라 불리는 시그널 힐(Signal Hill)에서 달콤한 와인 한잔을 음미하며 바라보는 케이프 타운의 모습은 그 아름다움과 편안함으로 숨이 막히고 모든 것이 망각되는 도시였다. 하늘의 별빛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불빛이 청정한 공기덕분에 별처럼 반짝였다. 왜 백인들이 그토록 인종차별정책을 가혹하게 펼치면서까지 흑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였는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라도 절대로 내주고싶지 않은 곳이었다!

 

 


케이프 타운은 1652년 4월 6일 얀 판 리비어크(Jan van Riebeeck)에 의해 세워졌다. 이곳은 폭퐁우를 피해 인도로 가는 항로에 필수적인 전략적 거점으로 물을 비롯한 고기, 신선한 야채, 과일 그리고 포도주를 보급 받을 수 있었으며 파손된 배를 수리하고 병든 선원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 그는 남아프리카역사에서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역사책을 펼치면 판 리비어크와 그의 부인 마리아(Maria)의 사진을 책이 시작하는 처음 쪽에서 만나 볼 수 있으며 남아공의 거의 모든 도시에 교회거리(Church street)와 함께 판 리비어크 거리를 만날 수 있다.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땅 남아공화국이 백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88년 바돌로뮤 디아즈(Bartholomew Diaz) 휘하의 포르투갈 탐험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케이프 타운이 쉽게 포루투칼인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은 유명한 유령선 전설(Flying Dutchman)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바람이 세고 폭풍이 심했기 때문이다. 이 전설은 바람이 심하게 몰아쳐서 대서양의 파도가 높게 해안의 바위를 들이칠 때 희망봉의 유령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배는 마스트가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서 바람에 휘날리며 케이프 주위를 영원히 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포루투칼 왕 주앙(João)이 그 이름이 나쁘다 하여 희망봉(Boa Esperança ; Good Hope)으로 이름지었다. 즉 디아즈는 이곳이 아프리카의 끝이라고 확신하고 이곳을 돌면 인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이름에서부터 케이프 타운은 아이러니 하다. 고통과 절망대신 희망이라니.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지역의 해안 지대에는 주로 코이산어족에 속하는 산(San)족과 코이코이(Khoikhoi)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노란색 피부와 작은 키 그리고 단음절의 흡기음(吸氣音, staccato click sound)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산족은 수렵채집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코이코이족은 주로 양과 소를 기르는 유목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친구로 친하게 지냈던 산족의 후예인 올리버(Oliver)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하에서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해야 했으며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나 정체성은 사라졌다고 그리고 그 누구도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단지 내 어깨를 조금 넘는 작은 키와 노란색 피부, 그리고 ‘딸깍딸깍’하는 흡기음의 소리와 항상 웃는 모습이 그나마 특징적일 뿐. 흑인정부로 바뀐 이후 이들이 사는 지역을 보호구로 지정하고 관광자원화 시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백인들이 명명해준 ‘흡기음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호텐토트’라는 이름대신 ‘사람중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코이코이’라는 그들 고유의 이름을 찾는데 무려 몇 백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말이다.

 

케이프 타운 대학교 교정에서 우연히 만나 남아공의 정치, 역사, 문화등 열띤 격론을 벌였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안드리스(Andries)와 존(John)은 굳이 따지자면 각각 아프리카너와 영국계에 가깝지만 비교적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모든 상황은 백인 이주자들의 욕심과 영국계와 아프리카너계의 분열속에서 ‘인종차별’이라는 악마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795년 나폴레옹이 해군을 강화함에 따라 케이프 타운은 무역루트로서 아주 중요하다는 전략적 인식하에 영국은 케이프 타운을 잠시동안 지배하였으나 1806년 다시 악화된 프랑스의 세력을 막고 케이프 식민지를 통한 인도와의 귀중한 해상 무역 루트의 장애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케이프 타운을 침략하여 이주사회를 건설해나가면서 이미 이주하여 정착하고 있던 네덜란드 후예들과 경쟁하기 시작한다. 

 

이후 케이프 영국총독은 케이프 아프리카너(Cape Afrikaner)로 불리는 이들을 영국의 통치하에 두고 싶어하였다. 이때까지 부유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던 이들은 영국의 통치를 받아들이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가난한 많은 아프리카너들은 영국의 통치와 압제를 벗어나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우마차를 타고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내륙으로 대이주(Great Treck)을 시작하게 되었고 영국은 자동적으로 반투계 선주민들과 일련의 전쟁에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반면 케이프 타운 항구는 이 시기부터 유럽과 인도로부터 들어오는 화물과 병력과 전쟁물자가 많아지게 됨에 따라 '바다의 선술집(Tavern of the Seas)'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다.

 

영국의 침략과정은 먼저 이주하였던 아프리카너 백인들의 분노를 살 수 밖에 없었고 대이주의 과정속에서 민족주의에 근거한 인종차별이라는 방어정신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기는 내가 유학하면서 만난 판 스칼베이크(Van Schalkwyk) 할머니는 지금도 영국의 파이프 잭 소리를 들으면 얼굴을 붉히시면서 앙골로-보어전쟁동안 영국이 어떻게 집단수용소에서 비인간적으로 아프리카너 백인들을 다루었는지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조부와 가족들도 그곳에서 돌아가셨다며 영원히 잊지 못한다고 설명하셨다. 영국인들은 케이프 타운을 침략했고 아프리카너 백인들을 미지의 내륙지방으로 내몰았으며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종국에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가져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남아공의 국가건설과정에서도 영국계 백인들은 기회주의적으로 ‘더러운 일’에는 관여하려하지 않으면서 편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결국 백인들의 적대적 감정이 지금의 남아공을 만든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백인 아프리카너들의 고통 못지 않게 선주민이었던 흑인들은 박탈감과 상실감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아왔다. 케이프 타운 외곽에 있는 흑인 슬럼가에 가서 본 그들의 세상은 ‘흑인들의 신’은 없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흑인정권이 들어온 이후 전기와 공동수도가 들어왔고 일부에서는 공동주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집들은 집이라기 보다는 세상에 구할 수 있는 모든 재료로 만들어진 오두막이었다. 심지어 어떤 집은 도로에 세워져 있던 도로표지판을 잘라다 지붕의 한쪽 끝을 막고 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케이프 타운에 천국과 지옥이 같이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다른 지역보다는 상황이 나은 편이지만 케이프 타운도 치안문제가 항상 이슈다. 내가 묵었던 크루거(Kruger)할아버지 내외의 집 앞뒤 정문의 초인종들이 도난 당했는데 흑인들이 떼어갔다고 추정하셨다. 할말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매일의 일과란다. 집집마다 이중문과 쇠창살로 막혀서 마치 집이 알 카트라즈의 감옥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가구는 물론이고 전화기, 냉동고, 냉장고에도 열쇠가 달려있고 자동차는 핸들, 기어, 전자잠금장치등 2중 3중으로 열쇠를 잠근다. 내가 그곳 크루거 할아버지에게 한마디로 남아공은 ‘열쇠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씁씁히 웃기만 하셨다.

 

도둑을 방지하기 위해 백인가정들은 개를 키우고 있는데 물론 흑인들을 절대 접근하지 못하도록 개에게 교육을 시키기도 하겠지만 습성이지 흑인들만 지나가면 사납게 짖는다. 신기한 것은 길거리 지나가는 흑인과 백인에 대한 구분을 정확하게 하기 때문에 백인이 지나가면 절대 짖지 않다가도 흑인이 지나가면 문에 달려들면서 까지 짖는다는 것이다. 개도 인종차별을 하는 것인가?

 

 

롱 스트리트(Long street)에서 만난 피나르(Pienaar)라는 백인거지는 정말 묘한 감정을 일으켰다. 어떻게 백인이 거지노릇을 한단 말인가! 인종차별이 법으로 존재하던 시대에는 ‘거지 백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케이프 타운 시내 곳곳에서 백인거지들을 만날 수 있다. 그래도 아직은 과거의 품위를 지키면서 부부 동반으로 개를 데리고 ‘오손도손’ 구걸을 하기도 한다. 흑인정부에서는 공직에서 인종비율에 따른 채용을 법으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백인들이 점차 직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해 백인들은 동병상련으로 비교적 호의적으로 도와준다. 그러나 흑인 어린아이들이 구걸을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돈을 주지 말라고 하고 자신들도 인색하다. 흑인들은 마약이나 술을 먹는다고. 그런데 왜 그런지 구걸하는 흑인들은 별로 불쌍해보이지 않는데 백인들은 불쌍해 보이는 것을 숨길 수 없다. 아프리카에서 백인 거지를 만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백인은 우월하다는 의식이 머릿속에 잠재되어 그러는 것인지. 이것은 정말 아이러니다. 이제 백인들도 과거의 인종차별을 통해서 얻었던 특권과 혜택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으며 변화의 물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과거보다 더 열심히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며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데 되었다.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메릴 영(Meril Young)은 케이프 타운은 불쾌하고 암울했던 역사의 짐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설명하며 그 중심에 칼라드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99년 총선에서도 보여준 것처럼 더 이상 케이프 타운에 살고 있는 칼러드들은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지만 인종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최근에 생겨난 하나의 ‘새로운 인종’으로서 칼라드들은 그들의 민족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인종적 특징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개방적이며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케이프 타운에 피는 다양한 프르티아 꽃 색처럼 이제 케이프 타운의 사람들은 다양한 인종의 색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들의 모습을 칼러드들속에서 만나고 있다.

 

케이프 타운의 아름다움과 어우러진 다양한 인종들의 문화적 모습, 그리고 지리적인 특수성은 케이프 타운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케이프타운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경제적 수준을 떠나서 그들이 살고 있는 케이프 타운을 사랑하며 남아프리카공화국과는 다른 곳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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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아노스(Oceanos) :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2012. 7. 17. 22:10

 

 

오세아노스(Oceanos) :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많은 사람들은 과실, 악천후, 무능력 또는 이 모든 요인의 결합으로 인해 바다에서 목숨을 잃곤 한다. 하지만 역사책은 배가 가라앉는 동안 선장과 선원들이 행동한 영웅적 행위와 용감성을 기록하고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런 대부분의 경우에 침몰선의 선원은 위험한 순간에 위대한 용기와 희생을 보여준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1991년 8월에 남아공의 이스트 런던(East London)근처에서 침몰한 그리스의 여객선 오세아노스(Oceanos)는 이런 훌륭한 전통에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침목의 순간에서, 죽음 앞에서 용기를 보여준 것은 선장과 선원이 아니라 승객들 자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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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오세아노스는 1952년에 건조되었고 진 라보르도(Jean Laborde), 마이키나이(Mykinai), 아스코나(Ascona) 그리고 이스턴 프린세스(Eastern Princess)라는 이름으로 항해를 하였다. 오세아노스라는 이름을 1978년에 명명되어졌고 그리스의 Epirotiki Steamship & Navigation Company of Piraeus라는 회사에 소속되었다.

 

1991년에 남아공의 여행사인 TFC가 이 배를 전세 내어 사용하게 됨에 따라 이 배는 남아공 근해를 항해하고 있었다. 1991년 8월 3일 토요일 저녁 7시쯤 오세아노스는 선장 야니스 아바란스(Yannis Avranas)의 지휘아래 374명의 승객과 180명의 선원 그리고 26명의 TFC 승무원 등 총 580명을 싣고 이스트 런던을 떠나 더반(Durban)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오세아노스는 밤을 새워 항해하여 다음날 아침 7시에 더반에 도착할 예정이었고 배안에서는 “독한 술 항해(booze cruise)"라고 불리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아주 좋지 않아 바다는 거친 폭풍우가 치고 강한 바람이 시속 140킬로미터로 불고 있었으며 파도는 8미터 높이나 되었다.

 

항구를 떠난지 4시간 30분 만에, 오세아노스는 첫 SOS 요청을 보냈다. 배는 근해에 좌초되어 우현이 기울어져 있었고 엔진실은 물에 잠기고 있었다. 육지에서 조난 요청을 받은 후에 즉시, 그 지역을 지나고 있던 세척의 상선에 조난신호를 보내서 오세아노스를 구조하러 가도록 하였고 더반에서는 예인선을 포함한 세 척의 배를 출항시켰다. 또한 남아공 공군에게 경계경보가 발령되었고 헬리콥터 부대가 구조임무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라운지에서 카바레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cabaret  플로어 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저녁 9시 3분경에 처음으로 문제가 발생했다. 갑자기 불이 꺼지고 엔진의 시동이 꺼졌다. 오래지 않아, 배는 천천히 우현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승객들은 선체에 큰 구멍이 난 것이 알려졌고 곧 비상조치를 하여 구멍을 막았다. 그렇지만 곧 구명조끼가 건네졌다. 여객선의 매니저이며 행사 책임자인 로빈 보틀만(Robin Boltman)이 막 무대로 나가려 할 때 전원이 나갔다고 말했다.

 

“그 배는 비상등이 작동하기 전까지 완벽한 어둠 속에 있었다. 우리는 휴게실에 모든 승객들을 모았고 연예인들이 그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우리는 노래를 불렀고 농담을 했으며 악기를 연주했다. 우리는 승객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했다. 바닷물은 아래 갑판에 발목까지 차 올랐다. 우리는 휴게실에 승객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했고 TFC 여행사 대표 로라이네 벳츠(Lorraine Betts)와 나는 승객들을 위한 약품과 같은 필요한 물품을 가지러 아래로 내려갔다.

 

“배는 우현으로 더 가파르게 기울어졌고 새벽 2시에 우리는 구명보트를 내리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배가 심하게 기울어서 단지 2 척의 구명보트만 내릴 수 있었다.”고 그가 말했다.

 

이 보트는 어린이들과 노약자들이 타고 있었고, 한 승객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어떤 선원은 “구명보트로 인한 소란 속에 여자와 어린이들을 옆으로 밀쳤다” 보트가 출발하고 오래지 않아, 로빈 보틀만은 선교에 올라갔지만 선교는 텅 빈채로 버려져 있었고 이미 시작된 해군과 공군의 구조작업팀에 겨우 연락을 취했다.

 

 

배가 점점 바다 속으로 깊이 가라앉으면서 이것은 끔찍한 밤이었다. “그날 밤 내내 우리는 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잡고 매달려 있었다.” 승객 중 한 사람인  코체(Kotze)씨가 말했다. “배가 갑자기 기울기 시작하자, 우리는 서로 넘어졌고 물건들은 서로 부딫히며 충돌했다. 완전한 공포로 가득한 오랜 밤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놀랍게도 침착했다. 아무도 울거나 소리치거나 이성을 잃지 않았다.”고 그가 말했다.

 

코체씨는 “끔찍했다. 완전히 지옥이었다. 영화 포세이돈의 한 장면처럼. 갑판은 그런 무서운 장면으로 가득했고 나는 목숨을 구하고자 난간에 매달렸다.

 

처음으로 도착한 비행기는 새벽 5시에 워터클루어프(Waterkloof) 공군기지에서 나온 C160 수송기였으며 배를 선회하였다. 여전히 어둠뿐이었고, 배가 놀랍게도 전복되어 있었지만 오세아노스의 갑판의 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좌초된 배 주위를 순회하는 것은 수많은 상선들이었고 그 배들이 비춘 탐조등이 거친 파도 위의 좌초된 배를 비추고 있었다.

 

 


아침 7시 30분, C160은 여전히 침몰한 배 주위를 순회하였고 11대의 퓨마(puma) 헬리콥터와 두 대의 알호우터(Alhouette) 헬리콥터 그리고 두 대의 다코타스(Dakotas)는 더반의 아이스터플랏(Ysterplaat)과 스와르트콥스(Swartkops) 공군기지에서 도착하였다. 이때까지 오세아노스는 뱃머리가 침수되고 있었고 여전히 배에 승선한 남은 사람들은 갑판 뒤쪽에 기어 올라가 있었다. 또 다른 승객들은 구명보트에 간신히 올라탔고, 배 전복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어떤 사람은 물에 뛰어 들기도 했다. 헬리콥터가 도착하기 전 배를 단념했던 사람들은 그 지역을 항해하는 다섯 척의 상선에 의해 구조되었고, 풍속 35노트의 강풍이 부는 어려운 상황에서 헬리콥터는 침몰선에서 좀 떨어져 승객들을 한 사람씩 구조하기 시작했다. 선장 아바라나스는 첫 번째 구조 헬리콥터에 앉기를 요청했다. 그는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육지에서 좀 더 효과적인 구조작업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말할 필요도 없어, 그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승객 중 한 명인 존 힉클린은 나중에 선장이 대다수의 선원들보다 더 오래 배에 머물렀지만 그는 아주 재빨리 사라졌다고 회상했다. 승객들이 선교로 가도록 요청했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구명보트가 떠나려 할때 선장은 그 배에 타서 감독하겠다고 했었는데 나중에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며 선원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라고 말했다.

 

실질적으로 선장과 선원에 의해 버려진 것은 오세아노스호 승객들은 지금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들에게는 승선한 TFC 직원들이 있었다.

 

 

“헬리콥터가 처음 도착했을 때, 벳츠(Betts)양이 수영장이 있는 갑판에서 승객들을 돌보는 동안 나는 선교에 머물러 있었다.” 보틀만은 설명했다. “크로스토크(Crosstalk)밴드 출신인 크리스토퍼 모스 힐스(Christopher Moss Hills)는 헬리콥터에 오르는 사람들을 도왔다. 반면에 배의 마술사인 쥴리안(Julian)과 몇몇 친구들은 배의 고무보트를 내렸고 오세아노스호를 순회하면서 구명보트에 다가가기 위해 바다 속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을 구조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하였다.

 

배에 더 이상 승객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 보틀만은 그 날 아침 11시 30분쯤에 배를 마지막으로 떠났다. 이때까지, 배는 바다 속에 더 깊이 가라앉았고, 파도로 인해 가구들은 물 속으로 쓸려갔다. 해군은 실종되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찾기 위해 다이버들을 보냈다. 배는 2시간 후에 완전히 가라앉았다.

 

 

오세아노스호로부터 구조된  219명은 이스턴 케이프의 트란스케이 해안으로 알려진 커피만(Coffe Bay)의 헤븐 호텔(Heven Hotel)에 처음 머물렀다. 그곳에서 이스트 런던으로 옮겨진 그들은 걱정하는 친구들과 가족들을 만났다. TFC 관계자들은 또한 숙박시설과 옷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비행기를 준비하려고 요하네스버그에서 이스트 런던으로 급파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비판하든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선장 아바라나스는 후에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나는 다른 배에 의해 구조되었던 내 가족과 헤어졌고 내 배를 잃어버렸다. 나에게 더 이상 무엇을 원하는가?”

 

오세아노스호 침몰에 관한 조사가 1년 후에 아테네에서 열렸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한 않은 선장을 비롯한 4명의 고위직 선원들에 대해 책임을 물었다. 특히 그들은 전력실에 물이 차는 것을 막는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 문책하였다.

 

이미 삼백만 랜드를 지불했고 여전히 백만 랜드 정도의 부채가 남아 있는 TFC 여행사는 조사 위원회가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부채청산작업하에 들어가 있었다. TFC는 담당 변호사를 통해 조사된 보고서에 따라 그리스의 선박회사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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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위대한 지도자,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2012. 7. 17. 22:08

 

 

아프리카의 위대한 지도자,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트란스케이(Transkei) 인근 템부(Thembu)지역에서 마디바(Madiba)족으로 태어났다. 지금의 이름은 학교 선생님이 그에게 영어식 이름을 지어 주어 갖게 된 것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는 고문회의 의장이었으며 만델라가 아홉살이 나던 해에 사망했다.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된 일종의 로열티가 나중에는 만델라가 정치적 행동을 하는 데에 중요한 후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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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 이후 만델라는 국회의장 혹은 군주의 후견아래 만델라는 현직으로 출마하기도 했던 만델라는 그 이후 조국의 안위를 위해 투쟁하며 그의 종족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하기 시작했다.

 

기본교육을 마친 만델라는 힐타운(Healdtown)에 있는 감리교 대학에 입학하고 그 다음에는 포트하레(Fort Hare) 대학에 입학하여 문학사 과정을 밟았다. 학생대표 등을 맡고 있던 만델라는 결국 학교로부터 저항모임 등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의심을 받게 되었고, 요하네스버그로 교환학생으로 보내졌다. 결국 남아프리카 대학에서 첫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결국 그의 이러한 경험은 1943년에 이르러 아프리카회의 청년연맹(Youth League of the african National Congress)에 창립자로 활동하면서, 비트바터르스란트(Witwatersrand)대학에서 법률공부를 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즈음에 나중에는 정치적 동지이자 최고의 친구가 되는 올리버 탐보(Oliver Tambo)와 월터 시술루(Walter Sisulu)를 만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시기에 만델라는 의지가 굳은 동지들과 힘을 모아 Anton Lembede의 지휘아래 뭉치게 되었다. 물론 그 속에는 그의 소중한 친구들이었던 William Nkomo나 시술루, 탐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60명으로 시작한 이들 모임은 아프리카 회의를 전 지역적인 운동으로 전환하는 임무와 그 운동의 힘을 추출해 내고 대규모의 사람들을 선동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했었다.

 

이 활동을 기반으로 만델라는 1943년에 아프리카회의 청년연맹을 창립하고 이듬해 1944년 Evelyn Mase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1957년이 되어서는 이혼하게 된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두었다.

 

아프리카회의 청년연맹으로 통해 본격적으로 정치적 행보를 시작한 만델라는 아프리카회의 청년연맹의 서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고, 그 덕분에 아프리카회의로부터 전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에는 탐보와 함께 흑백차별의 논리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대항하며 본격적인 항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아파르트하이트의 초기였던 1948년 선거에서 국가당(National party)이 압승을 하게 되자 만델라는 이듬해 청년회의에서 행동노선을 채택하여 보이콧, 파업 불복종과 비협력을 무기로 채택하여 적극적으로 대항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아프리카회의에 의해서도 이 노선이 전격적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1950년의 청년회의 노선으로 전시민권의 부여와 직접선거로 이루어지는 국회 대표제를 정한 만델라는 토지의 재부분배와 노동쟁의의 권리, 교육, 문화 부문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교육에 있어서 만델라는 모든 아이들의 교육뿐만 아니라 성인교육에 이르기까지 보장되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1952년 아프리카 연맹이 정당하지 못한 법률을 무시하자는 캠페인이 준비되었고, 이는 전시민적인 불복종 캠페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만델라는 이 과정에서 자원하여 앞장서 이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그는 일반인을 이끌어야 할 자원자로서 책임 다해야 함을 각성하고, 차별법안에 대한 저항운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 전 국토를 누볐다. 만델라는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감옥행을 선고받았고, 집회에 참가가 금지됨은 물론 요하네스버그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거주제한까지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만델라는 탐보와 함께 법률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가 법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파르트하이트, 차별적인 법률에 대한 저항을 위한 중요한 밑거름을 쌓는 기회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였다. 탐보와 함께 성공적으로 1952년 법률가로서의 인증을 받은 만델라의 정치적 행보는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법률가로서의 그들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법률가 자격증은 아파르트하이트로부터의 면죄부는 되지 못했다. 차별법의 부당함에 대해 뼈저리게 느낀 이들에게 당국은 그들의 변호사 사무소를 사람들이 일과 시간에 찾아 올 수 있는 거리보다 훨씬 먼 곳에 열 것을 명령한 것이다. 마치 변호사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라는 말과도 다름없는 이 말을 이 두 사람은 무시해 버렸다. 결국 만델라는 변호사직을 박탈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물러날 만델라는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꾸준히 흑인 인종격리 정책에 대한 저항운동을 꾸준히 진행하였고, 공식적인 집회 없이도 저항운동의 리더쉽을 긴밀하여 유지할 수 있는 조직적 계획을 맡아 진행해 나가기도 했다. 지방과 지역적인 힘까지 모아 저항운동을 하나의 큰 물결로 이끌어 내고자 했던 이 계획은 만델라 이후에는 M-plan이라 명명되었다.

 

 

1956년에 국가 중요 반역죄로 기소되고 4년 뒤에 다시 이 소송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있었고, 그러는 와중에도 1958년에 통과된 흑인들이 일하고 거주하는 지역을 구체적으로 명령으로 정하는 Pass Law에 대항하여 꾸준히 저항운동을 계속하는 등 그의 자유에 대한 열망에서 우러러 나오는 행동은 중년에 접어든 나이에도 식을 줄을 몰랐다. 그가 만 40세가 되던 그해 만델라는 또 한 명의 반려자를 만나게 되는데, 후에 영부인이 되었다가 이제는 이혼한 Winnie Madikizela이다. 나중에 위니는 만델라 석방운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가장 절정이었던 만델라의 50년대 투쟁활동의 전반은 서구인 거주지연 이전과 반투 교육의 도입에 대한 저항을 이끌고, 1955년에 민중의회에 의해서 채택된 자유헌장의 보급하는 등의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50년대 후반에는 노동착취, 거주지분리 법안, 초기 흑인자치구역 정책에 대항한 저항운동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 중 흑인자치구역 정책에 관해서 만델라는 후일 이 법안에 의해 치밀한 계획에 의한 대규모 축출은 물론 정치적 박해와 공포정치가 실현될 것이라고 정확히 예견하기도 하였고 이에 대한 투쟁과 저항에 힘을 쏟았다.

 

 


결국 그는 50년대를 통찰해 볼 때, 억압적 정치제도와 법안에 의한 처저한 희생물이었다. 결국 그는 수배가 내려지고 체포되었고 수감되었다. 1952년과 1956년 두 차례에 걸쳐 체포된 바 있었던 그는 1960년 3월 샤프빌흑인학살사건을 계기로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지도하기에 이르고, 1962년 다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63~1964년 범죄혐의 추가로 다시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는 길고 긴 수감생활에 들어가야만 했다.

 

체포되기 전 그는 강제적으로 가족들로부터 격리된 생활을 하거나, 수사를 피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면서 까지도 끝까지 자유를 향한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범위를 좁혀 오는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가장복과 변장을 시도했고, 일반 노동자의 옷이나 운전기사로 변장하는 것은 다반사에 가까웠다.

 

그 때 즈음은 남아프리카 자유운동이 새로운 전환을 꾀하던 시기였고, 아프리카회의(ANC)는 좀더 차별화된 자유운동 기구를 구성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전환과 새로운 기구가 바로 평화시위운동에서 무장투쟁으로 가는 단계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즈음이 다른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이 더 이상 평화적인 방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깨달을 언저리였고, 만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결국 그는 체포된 것이다.

 

 

리보니아에서 열린 공판에서 만델라는 서슴없이 이를 밝히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Umkhonto we Siewe라 불리는 폭력 투쟁은 바로 평화적 저항 수단에 철저한 박해로써 대응했던 정부에 대한 최후의, 그리고 정당한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백인에 의해 조직된 사법부에 의해 전적으로 주관되는 재판에서 만델라는 스스로 자신의 변호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재판의 진행이 공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몇 번의 재판을 거듭한 뒤에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만델라는 경계가 삼엄하기로 악명높은 로벤섬 감옥으로 보내졌고, 그 곳에서 긴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감옥에서 도덕적 권위와 지도력을 바탕으로 수감자들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 노력하는 등의 살아 움직이는 실천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수감생활이 길어지고 감옥 밖의 탐보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의 석방운동으로 인해 만델라는 점점 인권운동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979년 옥중에서 자와할랄네루상(賞),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 국제상을 받기도 하여, 세계인권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1980년 망명해 있던 만델라의 친구 탐보가 만델라를 석방시키기 위한 국제적인 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하여, 국제사회는 결국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인종격리 정책에 대하여 혹독한 비판과 제재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국제적 압력은 결국 1990년에 이르러 드 클레르크 대통령으로 하여금 아프리카 회의에 대한 해금조치와 함께 만델라를 석방하게 만들고 만다. 마침내 아프리카회의는 그들이 그렇게 꿈꾸던 새로운 다인종 민주주의를 형성해 나가기 위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고, 만델라는 세상에 다시 자신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아프리카회의는 곧 만델라를 부의장으로 선출하고, 병든 탐보 대신 국회의장으로 다시 추대하게 된다. 만델라는 새로운 다인종 국가의 민주헌법의 제정을 위해 데 클레르크 총리와 긴밀한 협조와 관계를 유지해 가면서 평온한 사회로의 이행을 부단히 추구하였고, 그 결과  1993년에는 이 두 사람의 평화를 위한 노력이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1994년 4월에 실시되었던 대통령선거에서는 국민의 65%에 달하는 지지율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는 경이로운 득표율일 뿐만 아니라, 최초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역사적인 결과였다. 반세기에 이르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시대가 종식되고 남아프리카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총선에 의해 구성된 정부 역이 5년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통치하였고, 총선에서 5%이상의 지지율을 얻은 정당은 내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일궈낸 업적은 일일이 다 헤아리기는 어려울 듯 하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 공포에 질린 백인 세력에 대하여 포용정책을 먼저 실시했다. 화해와 용서, 민주화를 향한 ‘큰 정치’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다름 아닌 그의 포용정책에 그 근거를 둔다.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설치하고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저지른 범죄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으면 사면을 통해 용서하는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흑백간의 화합을 통한 국가적 통합을 이루려 노력했고, 심지어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입안자와도 만나 손을 잡는 등 화해와 용서의 맨 앞에 서서 뜻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면모는 한 나라의 경영인이 아니라, 아프리카 전체를 대변하는 정치가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하였다는 점이다. 「21세기 아프리카의 르네상스」를 부르짖고 나선 만델라의 정치적 위상은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어 갔다. 만델라는 국제무대에서 아프리카의 이익을 대변함은 물론 아프리카 내전을 중재하고 국가들간 경제협력을 주도하는 데에서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했다.

 

먼저 아프리카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도자로서 만델라는 97년 로커비 비행기 폭파사건과 관련하여 유엔의 봉쇄조치 하에 있던 리비아를 방문하여 서방세계에 향하여 봉쇄조치를 해제할 것을 촉구하고, 서방과 국제사회의 이익이 아프리카의 이익에 선행될 수 없음을 천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을 시발점으로 하여 로커비 비행기 폭파사건의 재판을 재 3국에서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공정한 재판을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희생자 가족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비행기 폭파사건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고 제 3국인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라도 재판이 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서방에 의한 기준 없는 국경분할과 종족간의 갈등으로 인한 아프리카내 국가들의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지역분쟁 문제를 서방에 의존하지 않고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해결함으로써 좀더 실질적인 해결책을 얻어 낼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종전의 해결방식과는 다른 평화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나이지리아 군사정부의 독재에 대한 국제적 비판여론을 조성하는가 하면 자이르 내전을 적극적으로 중재하여 모부투와 카빌라 두 명의 분쟁 지도자들을 30년만에 만날 수 있게 하였다. 비록 그의 이러한 노력은 표면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모부투가 군사적 충돌을 포기하고 망명을 택하는 등 평화적으로 결론이 지어져 기존의 목표는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프리카의 경제적 발전을 위한 노력은 기존 백인 세력이 이루어 놓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제력이 크게 힘이 되었다. 전 아프리카의 30%에 달하는 국민 총생산력을 지닌 남아아프리카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만델라는 각종 지역경제공동체 기구 창설에 앞장서게 된다. 특히 1979년에 창설된 남부아프리카 개발 공동체(SADC)에 의장에 부임하여 실질적인 활동을 주도하면서 유럽연합과 같은 자유무역지대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노력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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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꿈틀거림 - 아프리카 발전의 견인차 남아공 -

2012. 7. 17. 22:06

 

 

아프리카의 꿈틀거림 - 아프리카 발전의 견인차 남아공 -

 

 

 

필자는 지난 겨울방학 때 2 개월간 연구차 동남부 아프리카지역인 케냐, 탄자니아, 남아공, 짐바브웨, 그리고 나미비아를 돌아보았다. 개인적으로도 오지에 들어가서 연구를 수행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말라리아도 걸리는 등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만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방학 때마다 아프리카를 방문하지만 이번처럼 놀라움과 흥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제 더 이상 많은 사람들에게 아프리카는 여전히 반쯤 벌거벗은 이상한 복장을 하고 알 수 없는 주술을 행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아프리카(Primitive Africa)로 인식되거나 열대우림의 정글과 야생의 동물들이 살고 있는 야생의 아프리카(Wild Africa), 또는 발전되지 못하고 변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기아, 가난, 질병, 내전, 구데타, 부정부패 등 아프리카는 희망이 없는 비관주의(Afro-Pessimism)를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분명히 들었다.

 

동남부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지역이 정말로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케냐에서는 심야에도 버스가 밤을 새워 달리며 많은 사람들을 나이로비와 지방도시는 물론이고 국경을 넘어 이웃 탄자니와와 우간다까지 사람들과 물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탄자니아의 도시들은 하루가 다르게 정돈되고 질서가 잡혀가고 있으며 달라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짐바브웨는 지금 무가베 정권의 불안정으로 일시적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예외지만 남아공은 아프리카의 선진국으로 안정된 정치체제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나미비아의 카프리비(Caprivi) 지역은 과거에는 앙골라와의 국경지역으로 테러로 인해 접근도 불가능하였으나 이제는 누구나 다닐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보츠와나와 짐바브웨를 연결하는 루트가 열려있었다.

 

물론 이러한 이유를 21세기에 들어와 국제정세의 변화로 인해 아프리카도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발전,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개방경제로의 전환을 채택하고 있어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편입이 가속화됨으로서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만 제가 몸으로 느끼는 아프리카의 역동적 모습은 21세기에는 또 다른 위상을 갖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올해 4월 27일은 남아공이 민주화를 겪은 지 10년이 되는 해다. 이제 더 이상 남아공이 흑-흑-또는 흑-백간 인종갈등, 또는 경제적 격차를 해결하지 못하고 내전으로 발전되어 기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소리는 틀린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한 남아공 정부는 1999년 6월 2일 두 번째로 출범한 타보 음베키(Thabo Mbeki)의 지도아래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사회-경제적, 문화적 민주화 과정을 시도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이미 안정을 찾아 아프리카국가들 중 모범적인 발전국으로 비쳐지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남부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역에서 아프리카 경제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아주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cultural identity)을 가지고 있는 다인종․다문화사회의 특징을 살려 서로 화합하여 발전을 가속화 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의 10년간의 노력의 결과를 들어 10년 뒤의 미래를 보아달라고 하고 있다. 2010년 월드컵을 개최하는 남아공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남아공은 비즈니스 환경이 아주 좋은 나라다. 남아공에 대한  ‘아프리카의 성장과 기회를 위한 행동지침(AGOA)’을 활용해 무관세 수출을 할 수 있고, 이중과세를 금지해 기업 이윤의 회수가 자유로워 자본이동이 용이하다. 시장 개방에 적극적인데다 경제정책이 안정돼 있어 내국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사업을 할 수 있다.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가 100% 허용된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남아공에 대한 자원개발 산업진출 보다는 남아공을 기반으로 하여 주변 아프리카국가들 나아가 미국으로의 우회침투를 하는 것도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제는 남아공은 단지 하나의 시장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남부아프리카 나아가 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중요한 진출거점으로 인식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주변국들에 대한 자원개발산업 및 유통 제조업등을 컨소시엄형식으로 남아공과 함께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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