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히르다르, 고잠

2013. 9. 14. 22:24


바히르다르, 고잠 - 한미진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은?’

 

여느 상식 퀴즈에서 흔히 나오는 이 질문은 흥미롭게도 2008년을 기점으로 다른 답을 갖는다.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라고 알려져 온 아프리카의 나일강보다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강이 더 길다는 사실이 2008년 5월 리마 지리학회에서 확인된 것이다. 여기서 아마존 강에 대한 새로운 지리적 사실보다는, 역으로 왜 나일강이 그 동안 가장 긴 강이라고 간주되었는지를 생각해보자. 이는 구불구불하고 지류가 많은 아마존 강에 비해 굵직한 물줄기로 아프리카의 북동부를 관통하는 나일강이 측량도 수월하고 더 길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나일강이 이집트를 고대 문명의 시원으로 발전시켰고 이 문명을 아프리카 각지로 전파하는 교통로로 작용했으며,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에게 많은 자연·문화적 정보를 제공한 원천이 되고, 이후 이집트의 근대화 작업의 대상이 되어 미국·소련과의 외교 관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역사적 배경, 즉 이러한 나일강에 대한 인간의 ‘인지적 작용’의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나일강이 수천 년 동안 인류 역사의 자연적 배경으로서 ‘거대한 강’이라는 인식이 자리매김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강의 원류는 어디일까? 수 천년동안 어디서 이 많은 양의 물이 공급되는 것일까? 일찍이 유럽의 탐험가들은 나일강을 따라 그 원류를 추적하고자 했다. 사실 ‘나일강’ 하면 이집트만 떠올리기 쉽지만 나일강은 이집트 외에도 에티오피아, 수단, 우간다를 거쳐 흐르기 때문에 그 원류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서 나일강의 두 지류 중 하나인 청나일강과 그 직접적 원류인 타나 호수가 위치하는 에티오피아의 바히르다르(Bahir Dar)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에티오피아 북서부의 중심, 바히르다르

 

바히르다르는 에티오피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암하라 주의 주도이다. 에티오피아의 행정 구역은 아디스아바바와 디레나와의 2개 특별시, 그리고 인종 구성에 따라 나뉜 9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다. 암하라족은 전체 인구의 26%를 차지하며 에티오피아의 정치적, 경제적 삶에서 전통적으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들의 언어인 암하릭은 에티오피아에서 아랍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로, 토착어 중에서는 가장 우세하다. 언어와 권력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암하라족이 에티오피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쉽게 가늠해볼 수 있다. 이에 암하라족의 중심지인 바히르다르 역시 예부터 에티오피아의 주요도시 중 하나였다. 바히르다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 군의 표적이 된 바 있으며 1988년 에티오피아 내전 당시에는 혁명군의 거점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바히르다르의 자연유산에도 어렴풋이 녹아 있다. 바히르다르는 가장 아름다운 폭포 중 하나로 손꼽히는 청나일폭포와 제주도의 두 배 크기인 타나호수가 인접해 있고 도시 구획이 아름다워 관광명소로 유명하다. 청나일강과 타나호수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멋을 느낄 수 있는 장소 같지만, 사실 나일강 탐험 이야기와 그 주위의 수도원 이야기에는 인류의 숨결이 그대로 남아 있다. 대자연의 숭고함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해보고자 하는 노력, 즉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을 횡단하는 나일강을 탐험함으로써 문화적 지배력을 높이려는 서양인들의 욕망, 자연의 기를 통해 종교적 신앙심을 견고히 하려는 수도승들의 움직임에서 우리는 자연과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 다다르게 된다.

 


 

나일강 탐험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다

 

큰 하천이 문명의 발전 조건이 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강은 농경생활을 가능하게 해 인간의 미래에 대한 예측과 대비를 통한 생존 능력을 증진시킨다. 나아가 인류의 관심을 생존보다 고차원적인 방면으로 확장시켜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다. 여기서 나일강은 추가적으로 지속적인 범람을 통해 풍요로운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고 측량과 기하학이 발전하는 계기를 만드는 한편, 범람이 신의 행위라는 종교적 관념을 파라오 1인 체제와 결부 지어 이집트를 강력한 정주문명 국가로 만들어내었다. 이에 나일강이 범람하는 이유와 그 원천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궁극적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기원전 3세기 경 이집트의 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군원정단은 청나일강을 탐험하고 범람의 이유를 에티오피아 고원의 폭우 때문이라고 결론짓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나일강 탐사가 이루어진 것은 15~16세기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진출 이후이다. 여기에는 대항해시대 특유의 개척정신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지만, 사회진화론1)적 시각에서 세계의 주인인 유럽인들이 자신보다 열등한 유색인종을 지배하기 위한 기반을 닦고자 하는 의도도 배제할 수 없다. 의도치 않은 결과라 할지라도, 지식과 권력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아프리카 문명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나일 강을 유럽인들이 탐사하고 그 온상을 밝혀냈다는 것은 이미 오리엔탈리즘2)이 반영된 결과이다. 나일강 탐험의 역사를 세계관과 인류를 변화시킨 위대한 도전정신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에 의해 미개한 지역을 개척하고 지배의 기반을 증축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움직임으로 볼 것인지는 분명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쨌든, 나일강이 유럽인들의 탐사로 인해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게 된 것은 사실이다.  1613년 프란시스코 알바레스와 페드로 파에스가 더 짧고 단순한 청나일강을 탐험했고, 1770년 제임스 브루스가 타나호수까지 탐험하여 그것이 나일 강의 원류임을 확인하였다. 청나일강은 청나일은 고대부터 이집트에서는 촐로에 팔루스, 그리스에서는 프세보에라고 불렸고, 현재는 아랍어로 바르알아즈라크, 혹은 아바이강이라고 한다.

 

청나일강은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에서 많은 양의 유기물을 실어 와 이집트 하류에 비옥한 점토층을 만들어 주어 농업발달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이집트 고대문명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청나일강을 창세기(2:10-14)에 나오는 네 개의 낙원 강 가운데 하나인 ‘기혼 강’과 동일시하고 있다. 청나일강은 에티오피아의 타나호수에서 흘러나와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백나일강과 합류하게 된다. 백나일강의 물이 회백색인 데 비하여 이 강물은 맑은 청색이기 때문에 청나일강이라고 한다. 청나일강은 타나호 근처에서 수력발전에 이용되고 있다. 사실 습지와 사막지대를 지나 대부분 증발되는 백나일강과 달리 유량이 풍부한 청나일강은 나일강을 둘러싼 아프리카 수자원 분쟁의 핵심이다.

 

 

 

 

그림 1 나일강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타나 호에서 동남쪽으로 30여km를 흐르던 청나일강이 마을 근처 높은 낭떠러지에서 계곡으로 엄청난 수량의 강물을 쏟아 내리는 지점이 바로 청나일폭포이다. 청나일폭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포 10위 중 하나로 손꼽히며, 에티오피아 최고의 관광명소이다. 현지에서는 ‘연기나는 물’을 뜻하는 티스 아바이(Tis Abay)라고 불린다. 우기인 7월부터 8월 동안에는 타나 호에서 유입되는 막대한 수량이 4백 미터의 폭을 가진 이 청나일폭포에서 45미터 아래로 수직 낙하하는데, 1km의 거리에서도 폭포가 일으키는 물보라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청나일강의 수원을 이루는 타나호수는 평방 3,600km의 넓이를 가진 에티오피아 최고 호수로 그 저수량이 엄청나다. 2006년 여름 에티오피아에서 626명이 사망했던 대홍수 시기 타나호수 근처에서 이재민이 급속도로 증가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었다. 타나호수가 해발 2000미터 첩첩산중의 고산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저수량을 가늠해보기 쉽지 않다.

 

호상에는 37개의 섬이 위치하는데 파피루스 배를 타고 이 섬과 주변의 아름다운 마을, 교회와 수도원을 투어한다. 현지인들이 탕크와(tankwa)라 부르는 이 배는 갈대 줄기를 엮어 만든 것으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애용해 왔고 여전히 공예품과 땔감, 심지어 황소까지 실어 나르는 중요한 해상 교통수단이라고 한다. 맑고 검푸른 타나 호수 위 약 20개의 섬에는 중세 시대에 지어진 주요한 교회와 수도원들이 있다. 엔토스 이야수 수도원은 화려한 벽화와 성화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파티샤’라는 기도하는 동굴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곳 중 하나로 유명한 케브란 가브리엘 수도원은 여성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데, 옛 에티오피아 왕들의 왕관과 의복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금은보화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에티오피아만의 종교적 해석을 담고 있는 오래된 성경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는 수도원도 있다.

 

 

사실 고립된 섬의 숲속에 수도원이 생긴 이유는 슬픈 순교의 역사에 있다. 17세기 에티오피아 왕조는 남쪽 오로모족의 정치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민들에게 가톨릭 개종을 요구하며 예수회 수도자들(the Jesuits)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예수회 수도자들은 강력한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에티오피아 정교회 수도자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 수도원으로 와 3만 2000명의 순교자가 발생했었다고 한다. 바히르다르에 오는 길에 있던 데브레 리바노스 수도원 역시 식민지 시대의 아픈 역사를 가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점령했던 1930년대 후반, 반(反) 이탈리아 저항운동의 본거지였던 이 수도원은 무솔리니의 측근이었던 그라치아니 총독의 암살미수 사건 이후 유례없는 학살을 당했다. 지금은 에티오피아의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이 수도원들은 세계사의 변두리로 더욱 내몰리게 된 약소국 에티오피아의 설움을 보여주는 심리적 유산이 되었다.

 


다시 나일 강 탐험 이야기로 돌아와, 청나일강에 비해 훨씬 알려진 바가 없었던 백나일강의 탐사 기록을 살펴보자. 사실 19세기 유럽인들의 나일강 탐사의 핵심은 ‘검은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백나일강에 있었기 때문에, 백나일강 탐험은 유럽인의 미지의 세계 개척에 가장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럽인에 의한 본격적인 탐사는 1830년 이집트 탐험대가 그 때까지 백나일강의 상류라고 여겨져 왔던 나이저 강이 별개의 큰 강임을 확인한 이후 이루어졌다.

 

빅토리아 호수가 유럽인들에 의해 처음 발견된 것은 1858년 영국인 스피크와 버튼이 이를 나일 강의 수원이라고 추정, 탐사에 성공했을 때이다. 스피크는 이 광활한 호수에 영국 여왕의 이름을 붙여주었으나, 버튼과의 협의 없이 성급히 발표하는 바람에 당장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1870년대 영국의 군인 C.G.고든과 그 부하들이 나일강의 지도를 작성하고, 이어서 M.스탠리가 빅토리아 호수를 주항한 이후 스피크의 발견은 인정받게 되었다. 스탠리가 백나일강의 원류지대를 상세히 밝힌 것이 계기가 되어 런던의 왕립지리학협회가 아프리카 내륙 탐험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나일 강은 이집트, 에티오피아, 수단, 우간다 등을 모두 관통하는 세계 제 2의 강이다. 특히 나일 강의 탐사 기록에 있어서 유럽인들과 에티오피아인, 수단인들과의 접촉은 하나의 세계사를 간직하고 있는 부분이다. 쉽게 가치판단을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유럽인들의 나일강 탐사의 역사는 근대 이후 현대까지 아프리카의 세계 속 위치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단서가 되기도 한다. ‘탐험’의 사전적 의미는 위험을 무릎쓰고 어떤 곳을 찾아가서 살펴보고 조사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발달된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당대 유럽이 베일에 가려져있던 나일강의 수원, 온상을 밝혀낸 것은 분명 탐험의 역사이다. 하지만 나일강 탐험이 다른 아프리카 내륙 지역으로 유럽인을 끌어들이고 결국 그 지역 사람들을 지배하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이는 ‘탐험’이라기보다는 유럽 중심주의적 시각에서 모르는 세계를 ‘발견’했다는 의미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큰 호수의 이름이 왜 아프리카 지역의 토착 고유명사가 아니라 ‘빅토리아 호수’이고 지금까지 이렇게 불리어오고 있는지, 나일강 탐험의 역사를 보면 씁쓸한 기분이 든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대자연의 풍경 속에서 인류의 무수한 역사적 흔적을 느끼고 간다.

 

 

* 참고자료

 

 1. 인터넷 자료 및 블로그

  네이버 백과사전(http://100.naver.com/100.nhn?docid=34258)

  위키피디아(http://en.wikipedia.org/wiki/Nile)

  길에대한애정, 「에티오피아 북부 여행의 시작 Bahir Dar」(http://caminodesol.blog.me/ 150101738343)

  예담,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 탐험의 역사」(http://yedamco.blog.me/87936315)

  환상다반사, 「타나호수 수도원 탐사」(http://blog.naver.com/softgore?Redirect=Log& logNo=10114896884)

 

 2. 뉴스

  강덕치, 「데브레 리바노스 수도원의 학살 사건」, 크리스천투데이, 2009. 11. 11.

  강덕치, 「청나일 강의 수원 타나 호를 찾아」, 크리스천투데이,  2009. 11. 18.

  김성호, 「“여성 출입 금지”, 도대체 어떤 수도원이기에?」, 오마이뉴스, 2007.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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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펜서(H. Spencer)가 사회발전을 설명하는 데 있어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른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대입시켜 만들어낸 개념이다. 사회도 생물계와 마찬가지로 단순하고 동질적인 것에서 복잡하고 이질적인 것으로 발전해 간다며, 단선적이고 낙관적인 사회의 발전을 상정하였다. 이는 인간의 능력을 긍정하고 역사의 발전을 인정하는 한편, ‘문명사회’인 서양이 ‘야만사회’인 동양을 지배해야 마땅하다며 제국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2) 일반적으로는 낭만주의의 한 경향인 ‘이국적인 정서(동방세계에 대한 동경)’을 의미한다. 하지만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라고 정의하고, ‘동양이 서양보다 열등하다’는 사고방식의 유럽 중심적 편견과 제국주의적 음모를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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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푸(Edfu, Idfu) ∙ 코옴보(Kom Ombo), 이집트

2013. 9. 14. 22:18


에드푸(Edfu, Idfu) ∙ 코옴보(Kom Ombo), 이집트 

 

이세정

 

 

이집트 사람들의 삶과 죽음 그 자체였던……

나일 강의 범람에서부터 키우던 고양이의 죽음까지 고대 이집트 인들에게 인간생활과 자연의 일체는 신의 태도 여하에 달려있다고 생각되었다. 이집트 인들에게 있어서 종교와 신이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도 생활 전반에 녹아 내린 것으로 그들에게는 삶이요, 그리고 곧 죽음이었다. 이집트 종교에는 여러 가지 성격이 겹친 복합 신들이 많이 등장하고 이집트인의 종교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로 많은 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 나라가 기본적으로 조그만 농업사회의 집합체였기 때문이다.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신들이 오랜 세월 속에서 통합되며 여러 신화가 만들어졌고 강한 세력이 주변을 통합하면서 신들도 정리되었다. 크게 보아 헤르모폴리스, 멤피스, 그리고 헬리오폴리스를 중심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그 중에서 현재 카이로 동남쪽 교외 지역인 헬리오폴리스의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 아툼(혹은 라)이 슈(공기의 남신)와 테프누트(이슬의 여신)를 창조했고, 이 둘이 결합하여 게브(대지의 남신)와 누트(하늘의 여신)를 낳는다. 그 후 게브와 누트 사이에서 남신 오시리스와 세트, 여신 이시스와 네프티스가 나오는데 이들 남매가 각각 짝을 지어 오시리스와 이시스, 세트와 네프티스가 부부가 된다. 이 아홉 신이 9주신으로 사람들에게 숭배되었다. 이 가운데 오시리스신은 이집트를 통치하며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존경을 받았지만, 이를 시기한 동생 세트의 모함에 빠져 죽게 된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관을 찾아내어 남편을 살려냈지만, 이를 안 세트가 오시리스를 14토막으로 잘라 이집트 방방곡곡에 버렸다. 이시스는 다시 조각들을 찾아서 결합시켰지만, 물고기에 먹혀 버린 남근만은 찾지 못했다. 이시스는 나일강의 진흙으로 그 부분을 보충한 후 생명을 불어넣어 오시리스를 살려내었고, 그와 결합해 아들 호루스를 낳게 된다. 호루스는 성장하여 작은아버지이자 아버지의 원수인 세트를 물리치고 왕위에 복귀한다. 그렇게 해서 호루스는 현세의 왕으로, 오시리스는 내세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호루스의 부인인 하토르는 사랑의 여신으로서 그리스인들은 하토르 여신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동일시했다.

 

 

오 나의 태양이시여 – 호루스와 에드푸의 신전

 

이른 아침 우리는 에드푸에 정박했다. 크루즈에서 내려 처음 바라 본 에드푸의 풍경은 마치 우리나라의 지방 소도시를 보듯 평범하고 고요하다. 거대한 건축물들과 길거리에 널려있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유적들 때문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다른 대도시에 비해 작고 조용하지만 작은 언덕 위에 나일 강을 바라보는 에드푸에서 여유와 평안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드푸라고도 하는 이 도시는 룩소르 남쪽 110km 지점 나일 강의 서쪽지역 강 가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도시이다. 지금은 작은 지방도시이지만 과거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아폴로노스폴리스메갈레 (Apollonospolis megale)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방의 행정수도가 위치했던 대도시 중 하나였다. 지금은 설탕과 도자기의 도시이며 사람들의 인심이 좋고 굉장히 친절하다. 크루즈 선에서 내려 선착장에 줄지어 서있는 마차를 타고 달리는데 뜨거운 햇살 속이지만 바람은 청량해 기분이 상쾌하다. 앞에 마차 위에 매달려 가는 아이는 위험천만해 보이지만 얼굴은 천진난만이다. 번잡하지만 알록달록한 색들로 가득 찬 시내를 지나니 드디어 호루스 신전의 입구이다.

 


(꼭지)

호루스 (Horus, Hr, Hru, Ώρος, Hōros)는 고대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신으로서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아들이다. 고분 벽화에서는 호루스가 매의 머리를 쓰고 있는 그림을 자주 볼 수 있다. 호루스는 이집트의 신들 중에서 다양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보통 매의 머리를 한 남성으로 표현되나, 호루미오스라고 불릴때에는 사자의 외관을 취하며, 하르마키스라고 불릴때에는 스핑크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또한 후대에는 유아신(幼児神)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시스는 오시리스를 살해한 세트의 위협을 피하며, 토트의 도움을 빌려 호루스를 몰래 출산한다. 그리하여 어머니인 이시스의 무릎 위에 놓인 아기(하포크라테스)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한 로마 시대에는 병사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성 게오르기우스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호루스는 대기와 불을 상징하며, 그 색은 일반적으로 흑, 적, 백을 의미한다. 부친 오시리스의 복수를 완료한 호루스는 현세의 통치자가 된다. 따라서 파라오는 호루스의 화신으로 여겨지며 역대의 왕들도 그의 이름을 따는 경우가 많다. 호루스는 태양신 라와 결합하여 라-호라크티를 시작으로, 여러 신들과 융합하여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집트를 상징하는 모양으로서 유명한 우제트의 눈이란 바로 호루스의 눈을 뜻하기도 한다. 이집트 항공의 항공기의 수직꼬리에는, 비행의 안전을 바라는 의미로 호루스의 심볼이 그려져 있다.

 

 

 

 


 

이 신전은 BC 237년 프톨레미 3세때에 공사가 시작된 이후 180여년 동안 여러명의 파라오들에 의하여 공사가 계속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집트 관광청이 펴낸 관광안내 팸플릿에는 이 신전은 2004년초에 보수공사와 관광객 편의시설을 갖추고 2.300년만에 다시 오픈한 것이라고 써있다.  에드푸 신전은 이집트에 남아있는 신전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드푸 사원에도 탑문이 있고 열주(列柱)가 있고 그 중심축에 본실을 두었으며 많은 조상(彫像)과 부조로 장식한 점은 신왕국시대의 다른 신전들과 마찬가지이지만 이 시대 특유의 주두(柱頭)를 가진 둥근기둥들이 채용된 것이 이채롭다.

 

그리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에드푸 신전은 전적으로 호루스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그래서 신전 곳곳에 호루스 신의 조각상이 서 있다. 입구 양쪽에도 있고 제1열주실의 전면에도 두 개의 호루스 신의 석상이 서 있다. 매는 호루스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이집트인들은 하토르 여신이 새해 첫날에 남편이 있는 에드푸의 호루스 신전으로 외출한다고 믿었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호루스 신은 태생이 두 가지였다. 헬리오폴리스 사람들은 호루스신을 오시리스와 이시스 사이에서 난 아들로 여겼지만, 멤피스 신화에서는 오시리스와 형제였다.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서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인 호루스신을 ‘연하의 호루스’, 오시리스와 형제인 호루스신을 ‘연상의 호루스’라고 불렀다. 에드푸에 있는 호루스 신전은 연상의 호루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연하의 호루스를 나타내는 상징들도 보인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신전 앞에 세워진 독수리 모습의 신인데, 이것은 숙부인 세트에게 복수한 연하의 호루스 신을 의미한다.

 

 

호루스 신전은 전형적인 이집트 신전의 형태를 갖춘 곳이라 할 수 있으면서도 단일 신전으로서 신전이 갖추어야 할 것들을 갖추고 있는 종교적인 의미의 신전에 가까운 신전이다. 신전 입구에서는 멀리 거대한 탑문이 보이며 그 옆 언덕에는 마을이 보인다. 발굴되기 전 호루스 신전은 흙으로 덮여 있었고 그 위로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신전으로 들어가는 길 옆으로는 아직 흙으로 덮여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데 신전 부속 건물들로 발굴 후에는 이 호루스 신전이 더욱 거대한 위엄을 갖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신전의 탑문은 이집트의 많은 신전들 중에서 탑문의 원형이 가장 깨끗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탑문의 벽화는 후대의 신전의 특징인 신화적인 내용이 담겨있으며, 이 신전의 주인인 호루스 신과 파라오를 묘사한 벽화로 한 많은 곳에서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신전 입구에는 매의 형상을 한 호루스 신의 석상이 감시자처럼 입구를 지키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있는 모습이 수 천년의 역사를 무색하게 할 정도이다. 탑문을 들어서면 삼면이 원기둥 회랑으로 된 큰 안뜰을 만나게 되는데 원기둥들은 그리스 신전의 원기둥을 연상시키는 세련된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많은 건물들이 기둥들로 둘러싸인 회랑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프로레마이오스 왕조시대 신전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된다. 큰 안뜰을 지나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위압적인 모습의 호루스신의 석상이 서있고 양쪽으로 ‘아침의 집’과 ‘책들의 집’이 있다. 탄생의 빛을 향한 첫 경배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침이고 책들의 집에서 깨달음을 얻게 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파피루스로 만든 책은 없지만 이곳에서 저술들의 제목을 알리는 상형문자가 원기둥에 적혀 있다고 한다. 신전에 들어가게 되면 정면으로 하늘로 가는 나룻배가 보관된 방인 ‘성자 중의 성자’ 를 볼 수 있고 그 주위로 여러 방들과 신비의 복도를 볼 수 있다. ‘성자 중의 성자’에는 성스러운 배가 중앙에 있는데, 이집트는 나일강의 혜택을 사는 나라답게 나일강을 오가는 배를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벽화 또한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호루스 신의 탄생에서부터 그가 어둠의 힘들을 물리치고 거둔 승리에 이르기 까지 호루스 신화의 일화들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저마다 고유의 기능을 가진 여러방들이 이 ‘성자중의 성자’를 둘러싸고 있다.

 

 

수 천년의 세월 동안 나일 강을 바라보며 – 코옴보 신전

 

점심 식사 후 나일 강의 정취를 만끽하다 보니 어느 새 배는 나일 강의 서쪽 강안에 이르렀다. 코 옴보에 도착한 것이다. 꽤 큰 도시로 알려져있지만 그 풍경은 시골 마을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 지역은 나일강 주변에서 농경지가 아주 많은 지역 중의 하나이다. 코옴보 신전은 나일 강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코옴보 신전에 올라 나일 강가를 바라보니 햇살에 비치는 강물의 반짝임과 마을의 풍경이 어우러져 신전의 모습과도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이 신전은 원래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투트모트3세 때 건설되었는데 천년이 지난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때인 BC332~395년에 완전히 새롭게 개축된 것이다.

 

코옴보 신전은 지진과 나일 강의 홍수에 의한 피해로 많이 망가졌었는데 로마제국이 기독교화 된 이후 특히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우상숭배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로는 기독교도(콥트 교도)들에 의한 파괴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우상숭배 금지령 이후 이 신전은 폐쇄되어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가 모래 속에 파묻혀 버렸다. 1893년에 발굴이 시작되어 신전의 지붕을 덮고 있던 모래를 걷어내면서 신전의 복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오늘 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세베크(Sebek), 또는 소베크(Sobek)는 악어가 신격화된 이집트 신으로, 나일 강에 의존하던 이집트에서 악어를 매우 두려워하던 것에서 기인하였다. 나일 강에서 일을 하거나 여행을 하는 이집트인들은 악어의 신 세베크에게 기도하여, 악어에게 공격 받지 않도록 그가 자신을 보호해주기를 소망하였다. 세베크는 악어, 또는 악어의 머리를 한 남자로 묘사되었으며, 강력한 공포의 신이었다. 일부 이집트 창조 신화에서는 세베크가 세상을 창조하는 혼돈의 물에서 처음으로 나왔다고 묘사한다. 때때로 창조신의 모습으로 태양신 레와 연결되기도 한다

 

 

 

그리스 계통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콤 옴보 신전에 이 지역 토착신인 소베크 신과 함께 호루스의 변신인 하로에리스 신을 모시고 경배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장군에 의해 건국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계급은 이집트인들과 융화하는 정책을 펴서 자신들이 이집트에 완전히 동화하였음을 나타내려고 하였는데 세트를 처치하고 스스로 파라오가 된 호루스 신을 자신들의 신으로 경배함으로써 자신들이 파라오가 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코 옴보 신전에 하로에리스 신과 소베크 신을 함께 모시게 된 것은 틀림없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 신전을 크게 개축한 이후일 것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콤 옴보 신전은 소베크 신과 하로에리스 신의 두 신에게 바쳐진 이중적인 성격의 신전이다. 소베크 신은 이집트의 토착 신으로서의 의미가 강하고 하로에리스로 변신한 호루스 신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의미가 있는 신이라고 볼 때에 두 신간에 어느 신이 우월하거나 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코 옴보 신전은 철저하게 대칭구조를 유지하고 양쪽에 소베크 신과 하로에리스 신을 대등하게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둥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의 기둥모양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흔히 그레코로만 왕조라고 하는데 이 기둥들에서는 코 옴보사원을 증축하고 개축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그들의 건축에도 그리스 양식을 많이 도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전부터 악어가 많아 악어의 머리를 가진 신 소벡(Sobek)과 매의 머리를 가진 신 호루스(Horus)를 같이 모셨다는 이 신전은 BC 2세기경의 벽화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여러 번의 홍수로 많이 깎이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그 닳음이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해 난 이곳이 좀 더 살갑게 느껴졌다. 한산한 관광객들도 그러하고. 소박하다고 해야 하나. 나일 강가의 고지대 사탕수수밭 한가운데 위치한 장엄한 프톨레미 신전은 해질녘에 특히 경외심을 자아낸다. 훌륭한 의사였던 하로에리스 신과 악어의 신 소벡을 합배한 이 신전은 이중으로 된 입구, 홀, 지성소 등으로 유명하다. 부조가 새겨진 벽에는 고대의 수술 기구, 골 절단기 및 치과용 도구 등이 묘사되어 있다. 근처에서 발견된 세 마리의 악어 미라는 현재 하토르 예배당에서 보관 중이다.

 

나일강의 멀리서부터 거대한 탑문과 원기둥들이 보이는데 마치 나일강 뱃길을 감시하는 망루를 보는 듯하다. 탑문은 세베크를 위한 입구 하나와 호루스를 위한 입구 하나가 있는 거대한 문을 구성하고 있다. 호루스 신전의 탑문과 벽화들은 오랜 시간 흙에 묻혀 있었으며 그 훼손 정도가 다른 신전들에 비해 심하다. 신전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큰 우물이다.

 

이 우물은 악어로 상징되는 세베크 신이 들어오는 통로로 성장의 물이 나타나 에너지의 바다에서 직접 유입되는 세례용 액체를 제공했다고 한다. 코옴보 신전의 본 건물에 들어오면 바로 원기둥이 늘어선 홀이 보인다. 이 홀에는 정면에 문이 두개있고 호루스 앞에서 파라오가 호루스와 토트로부터 이중세례를 받는 것이 특징이다. 원기둥의 상태나 양식을 보면 그리스 건축풍이 많이 가미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건물의 원형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열주실의 원기둥들은 원형을 유지하면서 남아 있는 편이다. 그리고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의 벽화가 곳곳에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인 그리고 이집트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했던 여걸. 그러나 그러한 고정된 몇몇 이미지들과 달리, 실제로 그녀는 대부분의 이집트 파라오들이 마케도니아 지방에 뿌리를 두고 그리스계로 그리스어만 했던 전통을 벗어나 직접 이집트어를 배우고 실생활에서 이집트인들을 이해하려고 했던 첫 번째 파라오로 기억되고 있다. 프 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했단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도 흐려지는 벽화처럼 조금씩 역사 속으로 침식되는 듯해 난 또 다른 이집트의 여걸 핫셉수트와 함께 세월의 무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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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르

2013. 9. 14. 22:09

 

하라르

 


지옥만큼 어둡고 죽을 만큼 강하며 사랑만큼 달콤하다. 이것은 터키의 속담으로 숨겨져 있는 주어는 바로 커피이다. 이런 속담을 만들어낼 정도의 커피라면 어떤 맛일까? 그 주인공은 바로 하라르 커피이다. 하라르는 아마 에티오피아의 도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이유는 해발 2000m에 달하는 하라르에서 생산되는 커피 때문이다. 하라르에서 나오는 커피들은 알갱이가 다른 지역 커피보다 매우 작은 편으로 오직 하라르에서만 재배된다고 한다. 하라르에서는 아직까지도 커피농사를 따로 짓는 것이 아니라 야생의 열매를 따서 전통적인 세가지 커피 생산 방법으로 만들고 있다. 이르가체프(수세건조)와 시다모(자연+수세), 그리고 모카하라(자연건조)가 바로 그 세가지이다.

 

이 세가지 방법 중 자연건조를 시키는 모카하라가 바로 우리가 커피 전문점에 가서 즐겨 마시는 모카커피인 것이다. 그래서 모카커피는 다른 말로 하라르커피라고 한다. 이 하라르커피는 직접 끓여마셔보면 와인 맛 혹은 블루베리 맛이 난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잘 느끼지 못했다. 비루한 내 입맛....또한 하라르지역 전통커피인 버터커피도 있다. 버터커피란 버터와 체리채 말린 커피를 같이 끓여내는 것으로 맛이 정말 독특해서 계속 마시게 되었다. 그리고 뗄레깜이라는 향초를 커피와 같이 마시는데 향초와 같이 마시는 커피 또한 처음이라 정말 신기했다. 귀한 손님이 오시면 이런 커피들을 직접 집에서 볶아 대접하는 커피세레모니라는 것을 한다. 이렇게 풍부한 양의 커피 덕분에 하라르를 돌아다니면서 양질의 커피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쉽게 마실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 가히 커피의 천국이라 부를 만 했다.

 

그러나 하라르에 머무는 공기에는 커피향 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하라르는 이슬람 4대 성지 중 한 장소로써 나라 전체가 기독교인 에티오피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이슬람 요새도시로써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또한 이 지역은 아프리카 대륙의 동부 뿔 지역(위에 뿔지역 사진 첨부)에 위치하면서 처음 건설된 7~11세기에서 10~16세기까지 에티오피아의 주요한 교역로이자 종교의 중심지 역할까지 겸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그 이후 1875년부터 10여 년간 이집트의 지배를 받다가 1887년 메넬리크 2세 황제에 의해 에티오피아 영토로 통합되었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아프리카 뿔 지역 전체와 아라비아 반도 사이를 잇는 교역의 중심지로써 상업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나 1902년 아디스아바바와 지부티를 연결하는 철도가 디레다와를 지나감으로써 쇠퇴하게 되었고 현재는 커피가 주 생산품목이 되었다. 1535년에는 악숨을 침략해 시온의 성 메리 교회를 파괴한 '왼손잡이'라는 별명의 이슬람 지도자 아흐마드 그란이 하라르에서 이슬람 성전을 외치며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이곳에서 에티오피아의 전(前)황제 하일레셀라시에 1세가 태어나고 성장하였다. 랭보하우스라는 주요 관광지가 있다. 이곳은 랭보라는 천재시인이 살다가 마지막 여생을 보낸 집이다.

 


처음 하라르로 들어가는 길! 첫눈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성벽과 하나의 성문이었다. 이 성문은 주골(Jugol)이라고 불린다. 이 주골은 하라의 통치자 누르 이븐 무자히드(Nur ibn Mujahid, ?~1567)에 의해 13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오로모 부족 등과 같은 그리스도교도의 추격을 막기 위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이는 4m 높이의 거대한 성벽과 오직 5개의 성문만으로 이루어져 있어 하라르라는 도시를 철통과 같은 성곽도시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 5개의 성문 중 정문인 메인게이트로 들어갔다.

 

이곳은 하라르의 관문으로 불린다. 알고 보니 이 성문은 1970년에 파괴되어 블록과 시멘트로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이 성벽이 만들어진 이후 성벽 안에서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화폐 등을 가지며 도시국가로써 자체적으로 발달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지역에는 상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는 하레르인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의 복장은 다른 곳과는 다르게 독특하면서 아름다웠다. 이 주골과 그 내부는 2006년 그 가치를 인정받아 역사방어지구로 지정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및 유네스코 주요 관리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2004년에는 좁은 공간에서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특별한 갈등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높이 평가하여 유네스코에서 평화의 도시로 지정하기도 했다.

 

 

우리는 성벽을 보며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들어갔다. 하라르 입구에 들어서자 우리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말을 타고 근엄하게 행진하고 있는 군인의 동상이었다. 이 동상은 하라르 초대 총독이자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의 아버지인 라스 마콘넨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상을 보느라 올라갔던 시선을 내려보니 성벽의 밖과 안은 정말 현저히 다른 모습이었다. 밖은 마치 우리나라의 시골 농촌의 모습 같아보였지만, 들어서는 순간 도시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마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빈부격차의 실사판을 보는 것만 같았다. 성벽 안의 길을 지나다닐 때 참 색이 단조롭게 느껴졌다.

 

이슬람 사원과 기독교 교회, 일반 집들도 대문과 지붕까지 흰색과 파란색으로 도배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나다니는 택시들까지도 차체는 다 파랑색에 지붕만 흰색이다. 또 사원과 자잘한 성벽들이 자주 보였다. 현재 성벽을 비롯한 82개의 모스크(mosque, 이슬람 예배지)와 102개의 사원 및 건물들이 남아있다. 성벽은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모스크들은 10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고 별다른 손상 없이 잘 보존되어있는 이 유적들에는 과거 아프리카와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주택들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내려온 하라 지역의 독창적인 문화가 잘 드러난다. 다른 인근 지역 거주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내부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또한 도시의 전체적인 설계와 도로망 등의 구조도 매우 깊은 인상을 줬다.

 

 

하라르는 150년 전 영국의 탐험가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이 방문하기까지는 이슬람교도가 아닌 외국인에게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금단의 도시였다는 것을 들었다. 리처드 버튼은 1855년 하라르의 성곽 안으로 들어갔다 살아 돌아온 최초의 외부인인 셈이다. 하라르에는 "기독교인이 성곽 안으로 들어오면 도시가 멸망할 것"이라는 미신 같은 계시가 있었기 때문에 이교도의 출입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으며, 몰래 들어오는 경우에는 처형을 했다고 한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순례자로 변장해 아라비아반도 메카에 잠입하기도 했던 영국의 동인도군 장교였던 리처드 버튼은 이번에는 아랍상인으로 위장해 영국령 소말릴 랜드의 제일라 항구에서 출발해 하라르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나니 비록 나는 비기독교인이지만 우리가가 하라르에 들어왔다는 것이 왠지 대단하게 느껴졌다. 물론 아직까지도 이슬람교도가 아니라면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는 몇몇 장소가 있었다. 예를 들면 자미 모스크(Jami mosque)는 성자 Gragn을 추도하기 위한 모스크로써 13세기 만들어졌고 여전히 이슬람교도 아니면 접근을 불허한다. 기독교 교회와 가톨릭 성당에는 지붕 위에 십자가가 달린 것과는 다르게, 이슬람 사원은 지붕 위에 초승달 모양의 상징만이 달려있었다. 이슬람 성인의 무덤과 신사라는 곳에는 초승달 모양 위에 추가적으로 별모양의 상징이 함께 달려있었다. 이슬람의 사원과 무덤은 보기에 매우 비슷하게 생겼는데, 이를 구분하는 방법은 별모양의 상징의 유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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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이집트

2013. 9. 14. 22:06

 

카이로, 이집트

 

- 기자의 세 피라미드와 잃어버린 역사 – 제데프레 왕의 재조명

 

 

카이로 하면 고대 이집트 문명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로는 고대 이집트 문명과 거의 연관이 없으며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사실 카이로 지역은 로마 제국 시대까지도 나일강 삼각주에 속하는 습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약 15세기 전인 642년에 이집트를 점령한 아무르 이븐 알 아스가 군대의 주둔지 푸스탓(Fustat)을 건설한 것이 카이로의 출발점이다. 카이로는 카타이 시대와 파티마 왕조, 살라딘의 아이윱 왕조 등을 거쳐 마믈룩 왕조시대에는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지만, 1517년 오스만 제국 셀림 1세의 정복으로 속주가 되면서 영광의 빛이 바래게 된다. 잠시 역사의 뒤편에 머물렀던 카이로는 18세기 후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다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대 카이로는 19세기 무하마드 알리 왕조 아래에서 근대 도시 카이로가 정비되면서 오늘날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1) 

 

 

기자의 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비록 카이로는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카이로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정도 떨어진 기자 평원은 고대 이집트의 중심이였고 이집트의 수많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기자의 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피라미드들이 바로 이 피라미드들이다. 기자의 피라미드들은 모두 기원전 25세기에 150여 년 간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이집트 제 4왕조의 유물이며, 가장 웅장하고 거대한 규모로 인해 대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와 그의 아들 카프레 왕, 손자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들이 이에 속한다.

 

대피라미드는 높이가 148m, 밑변 길이가 233m에 달하며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는 이보다 조금 작다.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라미드들보다 규모가 훨씬 작으며 이집트 학자들에 의해 다소 급하게 건설된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이집트인들은 왜 피라미드를 만들었을까? 가장 지배적인 주장은 피라미드가 파라오들의 무덤이며 파라오들이 자신의 권력과 힘을 보여주기 위해 이 건축물들을 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피라미드 안에서 파라오의 미라가 발견된 바가 없고, 조세르 왕의 경우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기의 피라미드를 지었다는 점 때문에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피라미드가 파라오의 무덤이라면 굳이 하나 이상을 지을 이유가 없다).

 

 

피라미드 건설의 또 하나의 유력한 원인은 바로 나일강의 범람이다. 에티오피아 고원의 폭우로부터 비롯된 나일강의 범람은 농토를 비옥하게 만들어 이집트의 번영을 가능케 했지만, 범람했던 계절에는 농토의 대부분이 물에 잠겨 농업이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수많은 농민들의 일터와 생계수단을 앗아갔다. 따라서 실용적인 목적으로 엄청난 노동력과 자원이 필요한 피라미드의 건설을 통해 실직 상태인 농민들에게 일터와 임금을 제공하여 경제를 안정시켰다는 주장이다.

 

이외에도 피라미드의 건설에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 일단 이 엄청난 건축물들이 4500년 전에 건설되었다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특히 쿠푸 왕의 대 피라미드에는 2톤 이상의 돌들이 무려 230만 개 이상 사용되었는데 이 당시 이집트인은 수레나 말을 이용한 운반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레나 굴림대를 제외하면 오로지 인력에만 의지하여 작업이 이루어 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현재까지도 어떻게 당대의 기술로 이러한 건축물을 만들었는지를 명확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피라미드의 각 꼭짓점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으며 돌들이 아주 정교하게 쌓여져 있어 작은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각 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면의 모든 돌들이 약간 중앙을 향해 기울어져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만약에 피라미드가 붕괴되더라도 안으로 붕괴되도록 설계하여 견고함을 높이기 위한 건축기술이었다.

 

피라미드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로, 영화나 책에서 보여지는 피라미드의 건설 현장에서는 노예들이 착취를 당하며 노동을 하는 장면들이 묘사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피라미드가 건설되었던 기원전 25세기의 고대 이집트에는 노예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꾼들은 매일 무거운 돌을 운반하고 쌓아야 했기 때문에 좋은 건강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해 좋은 보살핌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석공과 건축가, 기술자들 밑에서 일을 했고, 피라미드 주변에는 일꾼들의 마을이 존재했다. 일꾼들의 마을이 있던 터에서 발견된 상형문자로 기록된 석판에서 일꾼들의 업무일지가 발견되었는데 일을 나오지 못한 이유 중에 과음과 숙취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일꾼들이 일방적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잃어버린 역사 - 네 번째 피라미드와 제데프레 왕

 

기자의 3대 피라미드는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네 번째 피라미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앞서 언급했듯이, 기자의 피라미드는 모두 제 4왕조의 파라오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당시는 피라미드 건설의 전성기였고, 모든 파라오들은 왕위에 오른 시점부터 자신의 피라미드 건설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제 4왕조에서 왕위에 올랐던 파라오는 쿠푸 왕과 그의 아들 제데프레 왕, 카프레 왕, 그리고 쿠푸 왕의 손자 멘카우레 왕으로 총 4명인데, 이 중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만이 기자 평원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데프레 왕은 왜 유일하게 기자에 피라미드를 남기지 않았을까? (이집트 제 4왕조 계보 자료)

 

제데프레 왕에 대한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전통적으로 그는 악질적인 파라오로 묘사되어왔다. 에밀 샤시냐 등 초기 이집트 학자들에 따르면, 제데프레 왕은 왕위 계승자이자 형인 카와브 왕을 죽이고 그 직후 자신의 누이이기도 한 형수와 결혼하는 등 8년 동안 파렴치한 통치를 하다가 이복동생인 카프레에게 암살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한 근거는 아부라와슈에서 발견된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의 흔적에서 나왔다.

 

아부라와슈의 폐허에서 제데프레 왕의 조각상들은 모두 부서진 채로 발견되었는데, 조각상에 영혼이 깃들어 산다고 믿었던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조각상을 부순다는 것은 내세에서의 영원한 죽음을 뜻하며, 이는 극악한 범죄에 대한 복수였기 때문에 초기 이집트 학자들은 제데프레 왕이 그가 저지른 극악한 범죄들로 인해 살해되고 그의 조각상들마저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의 흔적이 기자 평원이 아닌 아부라와슈에서 발견된 것 또한 가족에 대한 배신으로 해석했다. 위와 같은 근거들을 토대로 제데프레 왕은 역사에서 악독한 왕으로 기록되어왔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와 새로운 증거들은 이 주장의 정당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붕괴되어 흔적만이 남아있지만,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는 기자 평원으로부터 약 8km정도 떨어져 있는 아부라와슈에 있었다. 아부라와슈는 군사지역 내에 위치하고 있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은 허가되지 않지만 소수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잃어버린 4번째 피라미드의 비밀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초기 이집트 학자들이 제데프레 왕이 자신의 피라미드의 위치를 아부라와슈로 정한 것을 가족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현대 이집트학자들은 이를 지극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보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통해 자신의 권력과 힘을 과시했는데 재임 기간 내에 완성을 해야 했기 때문에 크기로 승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제데프레 왕은 짧은 시간 내에 높은 피라피드를 짓기 위해 이미 120m 높이의 아부라와슈 언덕의 꼭대기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현재까지 가상으로 복원된 자료에 따르면,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는 68m 높이에 120m의 언덕 높이를 더해 아버지 쿠푸 왕의 피라미드보다 조금 더 높았으며, 12m의 아스완 화강암을 토대로 매끈한 석회암과 호박금을 씌운 정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쿠푸 왕이 석회암보다 훨씬 단단한 화강암을 피라미드 내의 내실 보호를 위해서만 사용했던 것과 달리 제데프레 왕은 최초로 화강암으로 피라미드의 외벽을 건설했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회암과 달리 화강암은 나일강 하류 아스완으로부터 960km 뱃길을 따라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화강암의 사용은 막강한 힘을 상징했다. 이러한 화강암을 건물 외벽에 사용했다는 것은 제데프레 왕의 강력한 힘과 통치력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최근 기자 평원에서 발견된 새로운 증거들 또한 제데프레 왕의 삶을 재조명한다.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앞에 서있는 스핑크스는 원래 카프레 왕의 조각이라고 믿어져 왔다. 하지만 카프레 왕의 모든 조각상에는 턱수염이 달려있고 머리 장식에 주름이 없는데 반해 스핑크스에는 턱수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머리 장식에 주름이 존재한다. 즉,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앞에 있는 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의 조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와 신전을 잇는 선이 스핑크스를 우회하는 것을 보면, 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이전에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스핑크스는 누구의 조각상일까? 수년 간의 연구 끝에 스핑크스의 얼굴은 쿠푸 왕의 작은 조각상과 가장 닮아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지만, 쿠푸 왕이 스핑크스를 건설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증거에 의하면 쿠푸 왕은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자원을 쏟아 부어서 대피라미드의 건설에만 집착한 폭군으로서, 다른 공사에 자원을 배분할 여유가 없었고, 스핑크스와 같은 대규모 공사를 벌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리하면, 스핑크스는 쿠푸 왕이 건설한 것은 아니지만 카프레 왕 이전에 이미 완공되어있었다. 그렇다면 스핑크스를 건설했을 가능성이 있는 왕은 단 한 명, 바로 제데프레 왕이다. 아부라와슈에서 출토된 스핑크스의 얼굴과 사자의 몸통부분 조각상이 제데프레 왕이 아버지 쿠푸 왕의 스핑크스를 건설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 옆 구덩이에서 발견된 신성한 배에서도 제데프레 왕에 대한 새로운 진실이 밝혀졌다. 신성한 배의 용도는 사카라의 상형문자에 설명되어있는데, 이 배의 용도는 파라오의 내세로의 편안한 여행을 위함이다. 쿠푸 왕에게 이 신성한 배를 선물한 사람의 이름은 아직도 구덩이에 쓰여있다. 바로 제데프레 왕이다. 추가적으로, 제데프레 왕이 형인 카와브 왕을 암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에 큰 힘을 실어주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왕위 계승자였지만 계승을 하지 않은 카와브 왕의 딸인 메레산크의 무덤에서 제데프레 왕의 이름이 발견된 것이다. 만약 제데프레 왕이 카와브 왕을 죽였다면, 카와브 왕의 딸이자, 다음 계승자였던 메레산크가 아버지를 죽인 자의 이름을 자신의 무덤에 기념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2)              

                             

제데프레 왕이 아버지인 쿠푸 왕을 조각한 스핑크스를 건설하고 아버지의 평안한 사후세계를 위해 신성한 배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메레산크의 무덤에서 발견된 증거를 고려한다면, 제데프레 왕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는 불효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기념한 효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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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ko.wikipedia.org/wiki/%EC%B9%B4%EC%9D%B4%EB%A1%9C

2) History Channel, “The Lost Pyram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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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심벨

2013. 9. 14. 22:03

 

아부심벨

 


이집트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나일 강을 따라 이집트 최남단 수단과의 국경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아스완 댐으로 인해 형성된 거대한 나세르 호가 있는 도시, 아스완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서쪽 강변을 향에 나아가다 보면, 사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에 지어져 있는 대 암굴신전을 만나게 된다. 이곳이 바로 이집트 왕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가 자신과 신을 기리기 위해 지은 아부심벨 신전이다.

 

이집트의 세 명의 신 레 하라크티와 아몬, 프타하와 함께 자신을 기린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해 하트호르 여신에게 바친 소신전으로 이루어진 아부심벨 신전의 규모는 상상이상으로 컸다. 높이 21미터에 달하는 람세스의 좌상 4개가 입구에서부터 세워져 있었으며,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8개의 기둥이 들어선 객실을 시작으로 두 번째 객실과 여러 개의 문(혹은 세 번째 객실), 신을 기린 지성소 까지 일직선으로 절벽 내부를 향해 들어서 있었다.

 

이정도 규모의 신전을 피라미드나 여타 다른 왕이 세운 신전들과 달리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 조성하기 위해선 반드시 엄청난 인력과 비용이 필요했을 것이다. 땅속 신전이 다른 신전들보다 인력이 많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집트야 뭐 거대 석조 건물과 석상이 넘쳐나는 나라니 별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신전이 대단한 이유는 신전의 가장 안쪽, 지성소에 있다. 세 명의 신을 기린 신전이지만, 지성소에는 나란히 4개의 신상이 있다. 왼쪽부터 프타하의 신상, 아몬의 신상이 있고 가장 오른쪽에 레 하라크티의 신상이 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신상은? 바로 당대의 파라오, 람세스 자신의 신상이다. 그는 아부심벨을 통해 자신을 신의 반열에 올렸던 것이다.

 

 

스스로 신의 반열에 오른 파라오

 

파라오는 죽고 난 이후에 신이 된다고 생각했던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을 고려해보면 이는 대단히 파격적인 처사였다. 파라오가 거대 건축물들을 지을 수 있었던 바탕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의 권력도 있었지만, 신전이 갖는 종교적 의미와 이집트 국민들이 가졌던 내세관이 주요했기 때문에, 국민의 납득 없이 스스로를 신격화할 신전을 짓는 것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즉 람세스가 이룬 업적은 국민들에게 신으로 인정받을 만큼 대단했다는 것이 되겠다.

 

뭘 저질렀기에?

 

신왕국 시대 제 19대 왕조에 속하는 람세스 2세는 24살부터 통치하기 시작해서 66년간 이집트를 지배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이집트인의 평균 수명인 30세의 세 배에 해당하는 90살까지 살았으며, 200명이 넘는 첩과 부인을 두고 100명이 넘는 자녀를 낳기도 했다고 한다. 이집트 전역에 걸쳐서 권력의 상징인 신전들을 아아주 많이 건설하여서 가는 유적마다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람세스 2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수많은 건축물들이다.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는 것은 당시가 매우 풍요로웠음을 보여준다. 경제적으로 볼 때 그가 통치하던 시기는 나일 강이 크게 범람해서 풍년인 해가 많았다. 이집트 경제는 나일 강에 크게 의존하였는데, 이게 넓게 범람할수록 더 많은 땅에 영양분이 공급되어서 농경지가 넓게 조성되어 풍년을 이뤘기 때문이다. 람세스 2세는 엘레판티네 섬에 있는 나일로미터와 같은 수위계를 이용해 범람 규모를 예측하여 농사가 얼마나 잘될지 내다볼 수 있었고, 풍년인 정도에 따라 세금을 올리거나 낮추는 수학적인 조세제도를 마련했다. 여기에 당시 개발되었던 방아두레박이라는 기구로 범람이 끝난 후에 농경지로 물을 쉽게 끌어올 수 있게 되어 더욱 효율적인 농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이것들을 이용하여 세금을 더욱 많이 거둘 수 있었다. 강이 범람해서 농사를 못 지을 때엔 농부들을 신전을 짓기 위한 인력으로 썼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람세스 2세는 짓기도 많이 지었지만, 역대 파라오들이 세운 수많은 건축물들에 새겨진 그들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대신 새겨 넣는 일에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 역대 파라오들의 업적을 자기 것으로 돌려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한 작업인데, 사실 이건 파라오가 바뀔 때마다 반복되어왔던 관습이었다. 다만 양각으로 이름을 새겼던 전통과는 달리 후대 파라오들이 절대로 건드릴 수 없도록 깊게 음각으로 파서 영원히 자신의 이름이 남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었다. 기둥에 새긴 이름을 지웠다간 건물이 무너질 정도? 농담이지만.

 

 

건축 덕후가 된 이유?

 

그가 이렇게까지 건축에 집착한 이유는 자신의 가문, 19대 왕가의 정체성에 있다. 19대 왕가는 정통 왕의 혈통이 아닌 군인의 가문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렇기에 평민출신이라는 굴레에 엮여 왕위의 정당성이 부족했다. 당연히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어 왕좌를 굳건히 다져야 하는데 람세스 2세의 조부인 람세스 1세는 뭔가 시도 해보기도 전인 재위 1년 반 만에 통치를 끝냈고, 부친인 세티 1세 또한 11년의 재위기간에 그쳐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진가를 국민들에게 보여주기엔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람세스 2세는 이에 위기를 느껴 재위기간 내내 건축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람세스 2세는 자신이 지은 수많은 건축물들 위에 벽화와 글을 새김으로써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고 때로는 왜곡하기도 하면서 국민들에게 자신의 강력한 파라오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켜나갔다. 아부심벨 내부에도 그런 흔적이 남아있다. 정면의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기둥이 많은 방, 즉 다주식 홀이 나오는데, 이 방의 벽에는 전사로서 부각된 람세스 2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아부심벨 내부의 카데시 전투 벽화 묘사 ---  이 전투는 지금의 시리아가 위치한 지역에서 일어났던 전투인데, 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융성하던 히타이트 왕국과 벌어진 전쟁이었다. 벽화에서는 이집트 병사가 모두 달아난 와중에도 람세스 2세가 아문신의 도움을 얻어 홀로 적을 제압했다고 나오지만, 현대의 전해지는 여러 정황들과 기록을 살펴볼 때 그는 목숨을 건졌을지는 몰라도 이기진 못했고 시리아지방도 이집트에 속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사실을 왜곡한 것인데, 자기과시욕이 강했기 때문이건 평민이었던 신분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이건 그가 이런 왜곡된 사실을 카르나크 신전과 같은 다른 유적에도 기록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에 바빴고, 이를 통해 왕위에 대한 정당성을 얻고자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미지 통제와 선전 전략의 대가였던 것이다.

 


평균 수명의 세 배를 산만큼 진실을 왜곡하는 것도 수월하지 않았을까. 그에 의해 세워진 수많은 건축물들과 이름이 고쳐진 유적들,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람세스 2세에 대한 찬양을 담은 벽화에 둘러싸인 채로 새로이 태어난 이집트 국민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오래 삶을 영위하는 파라오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이제는 그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신의 존재가 되었음을 의심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미지 통제에 성공하여 국민들의 자발적인 승인을 받아 내었든, 강력한 왕권으로 억눌러 강제로 복종을 이끌어 내었든 그의 선전 전략의 최종 목표였던 아부심벨 신전은 완성되었다. 이 신전의 건립으로 그는 살아생전에 신으로 추앙받았던 유일무이한 파라오가 되었다.

 

 

+TIP !

 

햇살의 과학

아부심벨 대신전 제일 안쪽의 지성소에는 오른쪽에서부터 떠오르는 태양의 신인 라 하라크티신, 신격화한 람세스 2세, 테베의 주신이며 땅의 생식 본능을 지배하는 아몬신, 어둠을 솟아나게 하는 프타 신의 좌상이 나란히 서 있다. 동굴 안의 신상들은 매우 정교하게 배치되어 2월 20일쯤에는 동굴 깊숙이 들어온 햇살이 약 20분 동안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아몬신, 람세스 2세, 라 하라크티신을 차례로 비췄다. 10월 20일쯤에는 반대로 햇살이 가장 오른쪽의 라 하라크티신을 비춘 후 차차 왼쪽으로 옮겨졌는데, 어둠의 신인 프타신 상은 왼쪽 어깨에만 살짝 햇살이 머물다 간다고 한다.

 

소신전

대신전 옆에는 아부심벨 소신전이 있다. 사랑과 음악과 춤의 여신인 하토르 여신(호루스신의 아내)과 람세스 2세의 부인 네페르타리 왕비를 기리는 작은 신전인데, 이 신전들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 이집트의 지도자 나세르가 나일강을 막아 아스완에 댐을 건설하려 하자,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될 것을 염려한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1963년부터 약 10년 동안 해체해 원래 위치보다 약 210m 뒤쪽, 650m 더 높은 지역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67년간 지배, 신전 다수 건설, 일자리,수도 건설, 신을 자처한 유일한 왕

  

이 부조들은 람세스 2세가 주도한 카데쉬 전투의 승리를 묘사한 것이다. 카데시 전투는 현재 시리아 영토에서 벌어진 이집트와 히타이트 왕국 간의 대규모 전투다. 이집트는 기원전 13세기쯤 아나톨리아 반도의 하투샤(현재 터키 중부의 보아즈칼레)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던 히타이트 왕국과 근동 지방을 중간에 두고 다투고 있었는데,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74년 4월 카데쉬를 향해 약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을 떠난다.

 

람세스 2세는 한 달 뒤 적군의 속임수에 걸려 위기에 처한다. 히타이트군의 공격에 이집트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홀로 싸운 람세스 2세는 아문신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고 이집트의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후일 밝혀진 히타이트 측의 기록과 객관적인 정세로 볼 때 람세스 2세는 필사적으로 탈출했을지언정 승리하지는 못했고, 카데시도 여전히 히타이트 왕국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람세스 2세는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아부심벨 신전 등에 자신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부조들을 새겨 놓았다. 후대 학자들은 이런 람세스 2세를 자기현시욕이 매우 강하고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기록을 이용해 현실을 지배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보아 람세스 2세 치하에서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대탈출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약 66년간 고대 이집트를 연구해 온 크리스티안 데로슈 노블쿠르에 의하면,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서 그 같은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시절 많은 유대인들이 왕릉이나 신전을 건설하는 데 동원되었는데, 아마도 이집트인들에게는 사소한 사건을 나중에 유대인들이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탈바꿈시켰다고 그는 추측하기도 한다.

 

 

아부심벨 대신전 제일 안쪽의 지성소에는 오른쪽에서부터 떠오르는 태양의 신인 라 하라크티신, 신격화한 람세스 2세, 테베의 주신이며 땅의 생식 본능을 지배하는 아몬신, 어둠을 솟아나게 하는 프타 신의 좌상이 나란히 서 있다. 동굴 안의 신상들은 매우 정교하게 배치되어 2월 20일쯤에는 동굴 깊숙이 들어온 햇살이 약 20분 동안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아몬신, 람세스 2세, 라 하라크티신을 차례로 비췄다. 10월 20일쯤에는 반대로 햇살이 가장 오른쪽의 라 하라크티신을 비춘 후 차차 왼쪽으로 옮겨졌는데, 어둠의 신인 프타신 상은 왼쪽 어깨에만 살짝 햇살이 머물다 간다고 한다.

 

대신전 옆에는 아부심벨 소신전이 있다. 사랑과 음악과 춤의 여신인 하토르 여신(호루스신의 아내)과 람세스 2세의 부인 네페르타리 왕비를 기리는 작은 신전인데, 이 신전들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 이집트의 지도자 나세르가 나일강을 막아 아스완에 댐을 건설하려 하자,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될 것을 염려한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1963년부터 약 10년 동안 해체해 원래 위치보다 약 210m 뒤쪽, 650m 더 높은 지역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누비아는 고대 아프리카 북동부에 있었던 지명으로, 이집트인이 이 지방의 흑인을 놉(Nob) 즉 노예라고 부른 것이 ‘누비아인’으로 되어 누비아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남서쪽 코르도판 고원에 사는 부족이 누바(Nuba)라고 불리는 것도 같은 어원에서 온 것이다. 누비아인은 누비아 사막지대의 나일강 유역에 살던 농민인데, 이집트의 아스완하이댐 건설로 생긴 나세르호(湖) 때문에 이 지역이 수몰되어 1961년부터 수단 정부의 도움으로 누비아사막 남쪽 끝 아토바라강(江)의 에티오피아 국경에 가까운 곳에 건설된 하슴 엘 길바 댐 부근의 농경지로 집단이주하였다.

 

누비아의 유적은 나일강 상류의 제1폭포에서 제4폭포에 이르는 하안지역(누비아)에 산재한다. 즉, 이 지방은 황금 •석재의 산지이며, 또 상아 •흑단 •진귀동물 등을 생산하는 아프리카 오지(奧地)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집트 국왕들은 때때로 원정하여 이곳을 영유하였다. 따라서 구석기시대부터 이슬람 침입까지의 각 시대의 신전 •성채 •비문 •분묘 등의 유적이 많다. 특히, 아부심벨신전(神殿), 제벨 바르칼에 있는 신전군(群), 쿠르르와 누리에 있는 나파타 왕국의 피라미드군(群)은 중요하다. 그러나 아스완하이댐 건설로 물 밑에 가라앉는 유적의 구제조치로서 1960년부터 국제적인 규모의 조사와 아부심벨 •칼라브샤 •케르타시 •덴두르 •겔프후세인 등 주요 신전의 이축(移築)이 이루어졌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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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프롤로그

2013. 9. 14. 21:58

 

이집트 프롤로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함께 찬란한 인류 문명의 발생지로 알려진 이집트는 그 화려한 문명과 수많은 유적만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방대한 이집트의 역사를 몇 페이지 안에서 전부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이집트를 풀어내기에 앞서 간략히 이집트의 역사 흐름을 살펴보자.

 

이집트의 역사는 크게 고왕국시대와 신왕국시대로 나눌 수 있다. 파라오와 피라미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고왕국시대는 기원전 3000년경 나르메르(혹은 메네스)가 상·하 이집트로 나누어져 있던 이집트를 통일하고 수도를 멤피스로 정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이집트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피라미드가 최초로 건설된 것은 고왕국시대 제 3왕조 2대1)군주인 조세르가 사카라에 계단식 피라미드를 건설한 때이다. 이후 제 4왕조 때에는 본격적으로 피라미드 건설이 이루어졌는데 가장 유명한 피라미드인 기자의 세 피라미드가 이 시대에 건설되었다. 하지만 영원히 강한 나라는 없다2)는 말이 있듯이 6왕조 시대로 넘어가면서 이집트 고왕국시대도 기울기 시작했다. 그 자체로 인간이자 신인 파라오의 절대 권력이 약화되고 중앙집권 체제가 흔들리면서 이후 7~10왕조는 혼돈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 혼란은 11왕조의 멘투호텝 2세가 분열된 이집트를 재통일하면서 종식되었다. 이집트가 재통일된 시기를 고왕국시대와 신왕국시대 사이의 중왕국시대라고도 한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힉소스족의 침략으로 인해 16왕조와 17왕조의 이집트에는 다시 혼란의 시대가 찾아왔다.

 

 

신왕국시대는 아모시스 파라오가 힉소스족을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18왕조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신왕국 시대의 수도는 테베(지금의 룩소)로 거대한 신전들과 많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아메노피스 1세(기원전1526~1505)때 중앙권력이 회복되었고 이집트의 영향력이 유프라테스강까지 확대되었다. 도굴꾼들이 활개를 치자 피라미드로부터 멀리 떨어진 왕가의 계곡에 무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여자 파라오로 유명한 하셉수트 여왕도 신왕국시대의 파라오였는데 하셉수트 여왕의 그늘에 가려졌던 아들 투트모스 3세가 하셉수트 여왕에 대한 복수로 그녀와 관련된 유적들을 처참하게 파괴한 것은 현대의 사람들에게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투탕카멘이 젊은 나이로 죽고 나서 궁중 감독관에 이어 왕위를 이어받은 장군 호렘헵이 장교 출신의 대신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이 사람이 람세스 1세가 되었고 19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에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자 건축가로 일컬어지는 람세스 2세가 등장했다. 람세스 3세, 람세스 4세…람세스 9세로 이어지는 신왕조의 역사는 민란으로 인해 다시 혼란에 빠지면서 끝났다. 이후 이집트는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고 마침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이 시대를 후기왕국시대라고도 한다. 이렇게 흥망성쇠를 반복하며 수많은 왕조와 파라오로 이어지던 이집트의 역사는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자살하고 이집트가 로마에 병합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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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프롤로그

2013. 9. 14. 21:56

 

에티오피아 프롤로그

 

 

‘에티오피아’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커피? 기아? 에티오피아 커피가 그렇게나 유명하지만 에티오피아가 3천년에 이르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가장 오래된 인류의 뼈가 발견된 곳이며 <아프리카의 스위스>라고 불릴만큼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에티오피아의 역사는 시바여왕과 솔로몬왕의 아들인 메넬리크 1세가 건설한 악숨 왕국으로부터 시작된다. 에티오피아의 고대 왕국인 악숨 제국은 홍해를 건너 남아라비아를 영토로 삼아 메카로 따라갈 정도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아프리카 유일의 문자를 만들어낼 정도로 부흥했다. 또한 악숨은 기독교 왕국으로 유명한데 기원전 330년에 성 프루멘티우스(St Frumentius)에 의해 악숨 왕조에 기독교가 전래된 후 기독교 왕국으로 부흥했다. 실제로 우리는 여행을 하며 에티오피아 북부 지역에서 많은 기독교 유적을 볼 수 있었다.

 

곤다르의 파실다라스 궁전과 베르한 셀리시에 교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랄리벨라 암굴성당을 보며 에티피오피아의 과거가 얼마나 화려했는지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러나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힘을 얻은 이슬람 왕국의 위협을 받게 된 악숨 제국은 결국 쇠퇴하고 이슬람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됐다. 에티오피아의‘하라르’는 커피로 유명한 지역이기도 하지만 이슬람 성지이기도하다.

 

에티오피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바히르다르에는 이집트 문명을 발생시킨 나일강의 원류(原流)인 타나 호수가 있다. 이곳에서 본 청나일 강의 폭포는 가히 아프리카 최고의 폭포라 불릴만한 장관이었다. 바히르다르에서 남동쪽으로 내려오면 현재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가 있는데 아디스아바바는 1889년 메넬리크2세가 수도를 이전하면서 수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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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익숙한, 고대 왕국의 도시 악숨.

2013. 9. 14. 21:53

 

알고 보면 익숙한, 고대 왕국의 도시 악숨.

 

 

오랜 시간 버스를 달려 악숨(Aksum)에 도착했다. 악숨이라.. 우리나라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악숨이라는 도시에 대해 들어볼 기회가 있을까? 나도 이번 여행을 준비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악숨은 에티오피아 북부 지역에 터를 잡고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번성했던 “악숨 왕국”의 수도였고, 그 악숨의 고고유적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이라고 한다. 또한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악숨 왕국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들어봐도 내겐 익숙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 악숨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보니, 사실 우리는 이미 악숨의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모세의 십계명, 오벨리스크, 솔로몬 왕, 헨델의 오라토리오 <솔로몬> 중 <시바 여왕의 도착>, 그리고 인디아나 존스. 살면서 이들 중 적어도 두 개쯤은 다들 들어본 기억이 있지 않을까? 설령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는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 정도면 악숨이라는 도시에 대해, 또 악숨 왕국이라는 역사 속 왕국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악숨 왕국은 기원 전 10세기 경에 세워져 기원 후 7세기 경에 쇠퇴하였다.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이 위세를 떨치던 시기에는 아프리카 동북부에서 중요한 무역 국가로 큰 정치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악숨 왕국은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수출품이었던 상아, 노예 등을 수출하고, 이집트로부터 의복, 유리 제품 등을, 인도에서는 철과 면포를 수입하면서 교류와 무역이 왕성했다. 7세기 경 이슬람 세력에 의해 쇠퇴하긴 했지만, 번성하던 시기의 악숨 왕국은 그 위세가 대단해 지금의 수단이나 예멘,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에 까지 이르는 영토를 가졌다 하니, 지금은 항구도 없는 내륙국가인 에티오피아에 비하면 꽤 잘 나가는 왕국이었음이 틀림 없다. 또, 그렇다 보니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이 악숨 왕국의 역사를 자랑스러워 한다. 우리 나라만 해도, 만주 지역을 넘어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역사를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렇게 융성한 왕국이다 보니,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기 위해 거대한 돌기둥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오벨리스크 이다. 그렇다. 유럽의 광장이나, 이집트에서나 있는 줄 알았던 오벨리스크가 악숨이라는 도시에는 수 백 개나 존재하고, 그 규모는 이집트의 것보다 웅장하다. 대부분은 화강암으로 조각되었고 그 지하에는 무덤이 존재한다. 가장 큰 오벨리스크는 길이 33m에 무게는 100톤에 이를 정도이지만, 이탈리아의 침략 당시 붕괴되어 쓰러져 있다. 다음으로 큰 오벨리스크는 침략 전리품으로 이탈리아에서 약탈해 갔었는데, 2005년에 반환되었다. 우리 나라도 얼마 전 ‘외규장각 의궤’가 반환되는 경사가 있었는데, 의외로 공통점이 많아 보이기도 한다.

앞서 말한 솔로몬 왕이나 헨델은 대체 어떻게 악숨 왕국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아직은 감도 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이 악숨 왕국이 건국 되던 당시의 아주 흥미로운 역사와 관련이 되어있다.

 

솔로몬 왕은 다들 알다시피 무척이나 현명했다. 두 여인이 서로가 아이의 어머니임을 주장하자 “저 아이를 반으로 갈라 나눠주어라.”라는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판결을 내린 솔로몬 왕 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솔로몬’이 ‘지혜로운’이라는 형용사처럼 여기저기에 쓰이고 있으니 더욱 익숙하다. 이 솔로몬 왕이 “지혜의 왕”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시절, 이웃 나라였던 시바 왕국에는 매혹적이기로 유명했던 시바 여왕이 있었다. 시바 여왕은 솔로몬 왕의 유명세를 듣고서는, 그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보물을 잔뜩 챙겨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시바 여왕의 화려한 방문은 후에 “음악의 어머니”인 헨델에 의해 음악으로 화려하게 표현되었는데 헨델의 오라토리오 <솔로몬> 중 <시바 여왕의 도착>이 그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 여왕은 솔로몬 왕을 시험하기 시작했고, 성경에 나오는대로1)  솔로몬 왕은 시바 여왕의 시험을 무난하게 통과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둘은 서로의 매력에 이끌려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로맨스의 결과, 시바 여왕은 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악숨 왕국을 건설한 메넬리크 1세이다.

 


악숨에서는 시바 왕국의 궁터와 왕국의 주인이었던 시바 여왕의 목욕탕을 찾아볼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지만 그 배수시설이나 설계 구조가 아주 뛰어나다고 한다. 일행들과 시바 여왕의 솔로몬 왕과의 러브스토리를 재구성하면서 돌아보았더니 더욱 흥미로웠다.

흥미로운 출생의 비밀을 가진 메넬리크 1세는 우리가 악숨에서 반드시 찾는 또 하나의 유적지를 만들어내는데, 바로 성모 마리아 시온 성당(Saint Maria of Zion)이다.

 

메넬리크 1세는 에티오피아 중북부의 타나 호수에서 엄청난 물건을 찾아 악숨으로 돌아오니, 그것이 바로 모세의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 원본과 석판을 보관하는 성궤였다.2)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으로 유명한 바로 그 십계명! 그리고 영화 속에서 인디아나 존스가 죽을 힘을 다해 찾아 헤맸던 바로 그 성궤! 메넬리크 1세가 찾아온 이런 엄청난 물건들이 바로 성모 마리아 시온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두 개의 성모 마리아 시온 성당들 사이에 있는 성궤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전설 속 이야기라, 또 성스러운 물건이 보관된 성스러운 장소에 일반인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니.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에티오피아 인들은 이 이야기를 사실로 여겨, 악숨은 그들에게 성스러운 도시라고 하니, 에티오피아를 찾는 사람에게 악숨은 고생스럽지만 반드시 들러야 할 장소임에 틀림이 없다.

 

참고문헌

1. Wikipedia

2. 성경

3. Stuart Munro-Hay. Aksum: A Civilization of Late Antiquity.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91.

4. Yuri M. Kobishchanov. Axum (Joseph W. Michels, editor; Lorraine T. Kapitanoff, translator). University Park, Pennsylvania: Penn State University Press,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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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바의 여왕이 주의 이름에 관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들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많은 수행원과 향료와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실은 낙차와 함께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라. 그녀가 솔로몬에게 나아가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솔로몬이 그녀의 묻는 말에 다 대답하였으니 왕에게 드러나지 아니하여 왕이 그녀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더라..’

열왕기 상 10장 1~3절

 

2) 메넬리크 1세가 십계명과 언약의 궤를 아버지인 솔로몬 왕에게서 받아왔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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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카멜롯’ 곤다르

2013. 9. 14. 21:50


‘아프리카의 카멜롯’ 곤다르

 

 

2012년 2월 1일, 우리가 인천공항에서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이집트 행 비행기를 탄 날이다. 미국은 우리보다 하루가 느리니까 2012년 1월 31일이겠지? 그런데 에티오피아 기준에서는 2005년이다. 무슨 말이냐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여 1월 1일을 새해로 맞이하는 데 반해, 에티오피아는 아직도 율리우스력을 사용해서 그레고리력에 비해 약 7년이 늦다. 즉, 우리는 2000년 1월 1일에 밀레니엄을 기념했지만, 에티오피아에서 밀레니엄은 2007년 9월 12일이었던 셈이다.

 

에티오피아의 새해는 “보석 선물”을 의미하는 Enkutatash라고 불린다. 시바 여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왕을 방문한 뒤 돌아왔을 때, 신하들이 보석을 잔뜩 선물해준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봄에 열리는 이 축제의 막바지에 비가 내리면, 모든 마을에서 춤과 노래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서양에서 굉장히 크게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는 어떨까? 에티오피아의 크리스마스는 1월 7일로, 리뎃(Lidet)이라고 불린다. 서양과 달리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이 날에는 교회에서 신도들이 여러 교회를 옮겨다니며 기도를 드리는 행사를 거행한다.

 

 

크리스마스 2주 뒤인 1월 19일, 그리스도의 세례의식을 기념하는 성대한 팀켓(Timket) 축제가 시행된다. 이 축제는 3일간 진행되는데, 팀캣 전날 에티오피아의 각 교회에서는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모여 흥겨운 음악에 춤을 추면서 시가 행진을 하고, 당일 아침에는 요르단 강에서의 예수의 세례를 기념한다. 팀켓은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데, 특히 곤다르에 있는 파실라다스 왕의 풀장에서 성대하게 거행된다.

 

곤다르(Gondar), 어린 시절 ‘반지의 제왕’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아라곤의 도시이자 왕의 도시라 불린 곤도르를 기억하시는지? 바로 이 곤도르의 모델이 되는 도시가 에티오피아에 있는 곤다르이다. 곤다르는 에티오피아 북서쪽에 위치한 암하라 주에 있는 도시로, 아디스 아바바에서 북쪽으로 약 500km 거리에 있다.

 

곤다르 왕궁은 영국의 전설적인 왕인 아서왕의 카멜롯 성에 비유되어 ‘아프리카의 카멜롯’이라고 불린다. 성채도시인 곤다르는 파실라다스 황제와 그 후계자들이 수도를 이전한 1855년까지 약 2세기 간 살았던 곳으로, 파실라다스 왕의 궁전 외에도 법원, 도서관, 수도원, 목욕탕 등이 들어서 있다.

 

 
1543년에 벌어진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전쟁에서, 기독교 진영을 돕기 위해 파견된 포르투갈 군대는 타나 호수 근처의 지역에 머물렀다. 당시 그 곳을 다스리고 있던 황제는 Susneyos였는데, 포르투갈 군대는 그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이후 Susneyos 황제는 에티오피아의 그리스 정교 신도들을 탄압했고, 수 천명의 신도들을 살해했다. 그 결과 국민들의 신임을 잃은 Susneyos 황제는 결국 1632년에 아들인 Fasilades 에게 왕위를 넘겨주어야 했다. Fasilades 황제는 1635년에 에티오피아의 첫 수도로 곤다르를 세우고, 성과 7개의 교회를 지었다.

 

곤다르 왕궁은 돔 형식 탑 4개가 있는 아치형 성문을 한 3층짜리 궁전인데, 1층은 연회장과 공식 접견실로 이용되었으며 2층에는 파실라다스 황제의 기도실이 있고, 3층에는 왕의 침실이 있다. 지붕 위는 황제가 연설하는 장소 및 종교적인 행사장이었다고 하는데, 탑에서 바라보면 아름다운 타나 호수가 보인다고 한다.

 

파실라다스 궁전 옆에는 파실라다스 황제의 손자인 이야수 1세 황제가 세운 이야수 궁전이 있다. 이야수 궁전은 3층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 모양이 말안장과 비슷한데, 내부 장식이 화려하여 과거에는 솔로몬의 성보다 아름답다는 찬사를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1864년 화재 이후 수단의 무슬림 등에 의한 여러 번의 침략으로 곤다르는 몰락하게 되었다. 게다가 1936년 이탈리아의 정복 이후, 곤다르는 이탈리아의 지배하에 놓였고, 1943년 2차 세계대전에서 아디스 아바바를 점령한 영국 군대에 대항하기 위한 이탈리아 게릴라의 활동 중심지가 되면서 유적 대부분이 소실된 상태이다.

 

 

성에서 나와 천장벽화로 유명한 데브레 베르한 셀리시에(Debra Berhan Selassie) 교회에 갔다. 이 교회는 17세기에 이야수 1세가 건립한 교회로, 곤다르에 있는 44개 교회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교회다. 교회 안은 온통 다양한 색의 벽화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천장에는 머리에 날개가 달린 천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80개의 천사들의 표정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정면의 벽에는 십자가에 못 밖힌 예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른 벽에는 에티오피아 성인과 순교자들이 그려져 있으며, 이야수 1세 황제의 초상화도 그려져 있다.

 

 

200년 간 수단과 이집트, 아랍세계를 연결하는 거점으로서 번성했던 곤다르, 과거 화려했던 왕국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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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완

2013. 9. 14. 21:47

 

아스완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부터 나일강의 상류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집트의 남쪽 끝 도시, 아스완이 보인다. 이집트의 큰 도시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아스완도 나일강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나일강의 동쪽 강가에 큰 도시가 들어서 있고, 서쪽해안으로는 사막이 보인다. 나일강이 얼마나 넓은지 그 위에 몇 개의 큼지막한 섬들이 있다. 섬들에는 문화유적은 물론이고, 수목원, 박물관, 독특한 누비아인 마을까지 볼거리도 각양각색이다. 나일강 위에는 낮잠을 즐기는 듯 물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전통배 펠루카들이 둥둥 떠다닌다. 수도와 먼 이집트의 끝부분이어서인지, 아스완은 북적북적대던 관광객들이 많이 줄어들어 한가한 느낌을 주는 도시이다.

 

수도와 멀고 한적해 보이는 이 도시는 얼핏 변두리 같다는 느낌을 주지만 사실 그렇게 밋밋한 도시는 아니다. 아스완은 그 역사가 이집트 고왕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도시이다. 이집트의 국경지역에 있기 때문에 고왕국 시절부터 군사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아스완은 남쪽의 이웃나라 누비아1)와 바로 인접하여 때로는 지배하고, 때로는 지배당하기도 하며 서로 문화적인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남쪽 나라에서 온 상인들에게 아스완은 이집트로 들어가는 입구도시였다. 그래서 아스완에는 예로부터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온 상인들이 모여들었고, 각종 물품이 거래되는 큰 시장이 발달했다. 아스완에서 상업이 얼마나 발달했었는지는 그 이름에 확실히 나타난다. 과거에 이집트에서는 아스완을 고대 이집트어로 ‘무역’이라는 의미의 스웨넷이라고 불렀고, 나중에 아랍어로 ‘시장’을 뜻하는 아수안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은 아스완이라고 불린다. 또한 아스완은 좋은 돌이 많이 났기 때문에 이집트의 거대 피라미드와 다양한 조각품들에 쓰이는 화강암을 공급하는 주요 도시이기도 했다.

 

아스완의 도심은 지금 대부분 나일강 동쪽 변에 위치하지만, 옛날 아스완에서 가장 발달했던 곳은 강변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옛날 아스완의 중심지는 나일강 위 가장 큰 섬인 엘레판티네섬이었다고 한다. 이 섬은 고대도시 ‘아부‘가 있었던 곳인데, 아부는 고대 이집트어로 코끼리와 상아 모두를 가리킨다고 한다. 섬 이름이 상아라니! 섬에서 상아시장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까. 마치 제주도를 ’감귤‘이나 ’한라봉‘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집트의 끝이면서 입구이기도 했던 아스완에 있던 섬 도시 아부. 그 역사는 이집트 최초의 파라오 나르메르가 지중해에서부터 아스완까지 아우르는 통일 이집트를 건설했던 기원전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로마가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던 기원후 300년까지 약 3300년의 긴 세월동안 아부는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그리고 아부에서는 나일강이 범람할 때 밀려오는 물의 소리를 가장 먼저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아부는 나일강의 근원이 되는 신인 크눔을 숭배하는 종교의 중심지였다.

 

크눔신은 초기 이집트 신들 중에 하나로, 양의 머리를 하고 있는 신이다. 처음에는 나일강의 근원이 되는 신이었으나 나중에는 생명을 창조하는 신으로 섬겨졌는데, 그 이유는 나일강의 물이 매년 범람하여 주위의 땅에 비옥한 흙을 실어다 주고, 건조한 땅을 적셔 생명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신화에 따르면 크눔은 물레에서 진흙으로 아이들의 몸을 빚어 어머니의 자궁에 넣어놓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로 치자면 아이들을 점지해주시는 삼신할머니와 비슷한 일을 한다. 옛날 우리나라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부의 여인들도 크눔신에게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빌었을까. 크눔신을 믿는 종교의 세력은 아부의 역사와 함께하며 성장했고, 아직도 엘레판티네 섬에는 크눔신의 신전과 크눔신으로 여겨졌던 신성한 양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집트가 로마에게 정복당하고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이집트에도 전파되면서, 고대 이집트 신들은 점점 버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크눔신을 섬기던 도시 아부도 쇠퇴하여 아스완의 중심은 동쪽 강변으로 옮겨가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엘레판티네 섬은 크고, 역사가 오래된 만큼 볼거리도 많다. 옛날 아부의 원형을 간직한 유적들과 멋진 아스완 박물관, 다채로운 누비안 마을은 아스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들이다. 먼저, 아스완 박물관은 엘레판티네 섬의 남쪽 끝에 위치해있다. 박물관의 입구로 들어가니 방 하나에 따로 전시되어 있는 양의 미라와 돌로 만든 관이 보인다. 이 양은 앞서 말한 크눔신과 관련된 신성한 양이라고 한다. 박물관의 중심부로 가면 아스완과 누비아 지역에서 발굴된 골동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옛날에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소품, 무기, 그릇, 수저 같은 물건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유물들은 유리진열장 안에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으며 설명까지 친절하게 되어있다.(비록 영어이지만.) 이제 박물관을 어느 정도 둘러보고 슬쩍 빠져나와 뒤에 있는 정원으로 향하기로 한다. 신기하게도 정원은 고대 아부 유적들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20세기 초에 tm위스와 독일에서 아부 유적들을 발굴하기위해 팀을 파견했고, 발굴팀은 기원전 3000년에서부터 기원후 14세기에 이르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건물들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아스완의 도시 중심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아스완 댐이 있다. 이 댐은 외관이 썩 멋지지 않아 댐 애호가들에게서도 별로 사랑받지는 못하지만, 나일강을 통제하고 싶다는 이집트인들의 강한 바람이 담긴 의미심장한 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이집트인들은 나일강 주변의 농경지에 농사를 지어 살아왔는데,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댐이 지어지기 전에 이집트인들은 매년 나일강의 범람에 의지하여 농사를 지어왔다. 그러나 나일강의 범람은 일정치 않아서 범람이 잘 된 해는 풍작이었지만 반대로 범람이 적었던 해는 손 쓸 도리없이 흉작이었다. 그리고 나일강이 범람하는 지역은 한정되어 있어 세월이 지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농경지의 부족현상이 심해졌다. 건축기술이 발전하여 댐을 지을 수 있게 되자 이집트는 대규모의 댐건설에 착수했다. 1898년에 영국의 건축가 윌콕스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어 1902년에 완성된 것이 아스완 로우 댐이다. 그 후 한 차례의 증설 공사에도 불구하고 아스완 로우댐이 꽉 차자, 이집트에서는 7km 상류에 댐을 하나 더 짓기로 한다.

 

이리하여 지어진 것이 아스완 하이 댐이다. 기존의 로우댐과는 비교도 안되는 대규모의 공사였기 때문에 이집트는 자금조달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처음에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아스완 댐 건설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기로 했지만, 소련에게 무기를 조달받은 것을 계기로 지원이 끊긴다. 결국 이집트는 소련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아 하이댐 공사에 착수했고, 10여년의 공사 끝에 1970년 아스완 하이댐이 완공된다.  아스완 댐이 지어진 후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호수가 생겼는데, 이 호수의 이름은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나세르’호가 되었다.

 


아스완 댐의 건설 후 나일강을 상당부분 통제할 수 있게 되어 농업용수 공급과 농경지 확장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수력발전도 가능케 하여 주변 도시의 전기공급에도 큰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댐 건설 후에는 나일강에서 자연적으로 공급되던 풍부한 미네랄이 댐안에 쌓여있을 뿐 밖으로 나가지 않아 비옥하던 농경지가 점점 불모지로 변해가는 중이라고 한다. 또 바다에서는 어획량이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그뿐인가. 나세르호에 의해 원래 그 지역에 있던 문화 유적들은 이제 영영 가라앉아 버렸다.

 

아스완 댐의 건설로 가장 피해를 본 것은 침수지역에 살고 있던 누비안인이었다. 그들의 마을이 호수 속에 잠겨버리자 그들은 북쪽으로 이주하여 아스완, 콤옴보 등지에 새로 마을을 지었다. 앞서 말한 엘레파티네 섬에 있는 누비안 마을도 그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침수지역에 있던 문화유적들 중 아부심벨 같은 중요한 유적들은 유네스코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구해낼 수 있었던 다른 유물들은 아스완의 누비아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우리 같은 관광객들이 아스완에서 누비안 마을을 구경하고, 누비안 인들이 만든 기념품을 살 수 있게 된 것도 아스완 댐 건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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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비아(Nubia)는 이집트 남부의 나일강 유역과 수단 북부에 있는 지역이다. 누비아 지역 대부분은 수단 영토에 있으며, 1/4 정도만 이집트에 속한다. 고대에 누비아는 독립 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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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IS ABABA - 에티오피아의 새로운 꽃, 아디스아바바

2013. 9. 14. 21:43


ADDIS ABABA - 에티오피아의 새로운 꽃, 아디스아바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 이름이다. 암하라 어로 ‘새로운 꽃’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크게 이름값을 한다고 보긴 힘들다. 1980년대 에티오피아를 휩쓴 세계적인 가뭄으로 굶어 죽어가던 아이들이 텔레비전과 신문을 도배했다. 에티오피아는 역사적인 의미는 있을 것 같지만 엄청 더울 것 같고, 더러울 것 같고, 사람이 살기 힘든 삭막한 곳이라는 선입견이 우리 머리 속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아디스아바바에 가서 직접 확인한 결과 이 중에서 기대(?)에 부응한 사실은 위생 수준 정도이다. 공항에 도착한 후부터 이동하는 동안 아디스아바바를 눈에 담아 볼까 하는 찰나에 코로 먼저 느끼게 되었다. 쾌쾌한 냄새와 탁한 공기. 실제로 온도가 더 올라가면 아이들이 메탄가스에 중독되어 자주 쓰러진다고도 한다.

 

아디스아바바의 별명 중 하나가 ‘회색도시’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원인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인 것이다. 아디스아바바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자동차는 외국에서 싼값에 들여온 중고차이다. 이미 너무 낡고 오래되어서 외국에서는 폐차 상태까지 간 것이 대부분인데, 이 차들을 들여와서 이 곳 사람들이 쓰고 있다. 오래된 차인 만큼 그 차의 매연은 새 차의 것보다 심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고산 지대에 위치해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공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중고차들이 내뿜는 시커먼 연기들이 도시 상공 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렇게 생성된 먼지나 가스들이 수증기와 쉽게 응결해 곧잘 푸른 안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다음 눈에 담은 풍경은 쓰레기 가득한 길가, 끝없이 이어진 거적과 누더기와 판자로 이어진 집들이다. 사실 이런 느낌이 처음에는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사실은 5분 정도. 여기도 사람 사는 곳 아닌가. 특유의 적응력으로 적응 하고나니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특히 시내에서 마주치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는 뭔가가 신비로움이 있다. 백인도 아니면서, 또 전형적인 흑인도 아니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묘한 결합이다. 실제로도 현재의 에티오피아인은 백인계 함족과 아랍계 셈족의 후예들이 원주민인 흑인과 혼혈을 이루면서 아프리카에서도 독특한 생김새와 문화를 형성했다.1)

 

그리고 생각만큼 덥지는 않았다. 아디스아바바 아침의 거리는 시원하고 상쾌하고 낮에도 습도가 높지 않아 땀을 흘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거기에다 햇살은 마치 지중해 연안처럼 따사로워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스위스’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여기가 적도 근처이지만 무덥지 않은 이유는 수도가 해발 2,300m 고원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디스아바바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곳에 들어선 수도이다.

 

 

 

 

황제 메넬리크 2세

 

 

악숨이나 곤다르, 하라르와 같이 오래된 도시를 두고 아디스아바바는 언제부터 왜 수도가 되었을까. 아디스아바바 직전의 수도는 엔토토라는 곳이었다. 엔토토는 군사적 요지로는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었지만, 높은 탁상지 위에 있어 몹시 춥고 땔감용 나무가 부족했기 때문에 수도로는 부적합했다. 황제 메넬리크 2세 (1889~1913 재위)2)의 부인 타이투 황후가 황제를 설득하여 탁상지의 기슭에 있는 온천 부근에 집을 한 채 짓고 그 지역의 땅을 귀족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했다. 그 귀족들이 자신의 집을 지어가면서 아디스아바바가 시작된 것이다. 아디스아바바의 탄생은 이후 에티오피아의 근대화의 발판이 되었다.

 

이 역사를 말하려면 황제 ‘메넬리크 2세’와 ‘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우선, 과거 악숨 왕국이 막을 내리던 때로 돌아가보자. 악숨 왕국이 힘을 잃게 되자 에티오피아의 다른 도시들도 발전을 일제히 멈추게 되었다. 사실 악숨 제국의 몰락 후 하라르와 곤다르가 짧은 시기 동안 번영하긴 했다. 이 같은 그들의 짧은 번영 시기는 그들이 발전적인 변화를 이룩해 내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에티오피아의 경제는 몰락해갔다. 사람들이 금,은,청동 화폐가 아닌 소금막대로 거래를 하기에 이르는 정도였다. 사회 전반이 혼란스러웠고 시민전쟁도 발발하였다. 또한 기근과 전염병의 재앙에 시달리며 퇴보의 시기를 겪었다. 하지만 19세기 말 메넬리크 2세가 아디스아바바가 세우면서 근대화를 위한 새로운 기반이 마련되면서 상황은 나아지게 되었다.

 

사실 아디스아바바 건립 초기에는 메넬리크 2세가 1896년 이탈리아의 침략을 무찌르는 아두와 전쟁3)에서 군사적 요지로 이용하였다. 메넬리크 2세는 부족 간의 대립으로 분열되었던 에티오피아를 통일하고 이 아두와 전쟁에서 이탈리아의 침략을 물리쳐 독립을 확보하였다.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이 전쟁의 승리 이후 에티오피아는 지금의 규모로 팽창했으며4), 아디스아바바와 지부티 사이에 철도가 생기고 수도는 신식 학교와 병원으로 근대화 되었다. 막 생겨난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부흥으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이로써 아디스아바바는 아랍, 인도,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정말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용광로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다양한 국제기구들의 본부가 총집합 되어 있는 도시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 통일기구5)가 아디스아바바의 아프리카 회관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 중요한 기구를 세운 황제가 ‘하일레 셀라시에 1세’6)이다. 그는 메넬리크 황제 이후 40여년동안 에티오피아를 지배했던 마지막 황제이자, 하일레 셀라시에는 메넬리크의 근대화 개혁을 착실히 이어받아 에티오피아가 또 한 번의 발전을 이룩하게 한 장본인이다. 특히 아프리카 통일기구를 세우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에티오피아를 아프리카 정치의 본류로 끌어들이며 에티오피아를 국제연맹과 국제연합(UN)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이후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따라 에티오피아의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도 확장되었다. 에티오피아는 아디스아바바의 건립을 발판으로 삼아 세계의 과학적 혁명들의 수혜를 받기 시작했다. 비록 악숨이나 곤다르, 하라르와 같은 도시에 비해 역사가 짧지만 에티오피아 전역에 기술을 전파하는 역할을 해냄으로써 중요한 도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디스아바바 시내에는 아디스아바바대학교와 여러 개의 사범학교 및 기술학교도 있다. 또한 대학 부속의 에티오피아 연구소박물관, 국립음악학교, 국립도서관 겸 공문서보관소, 역대 황제들의 궁전, 그리고 정부청사 등이 있다.

 

이렇게 아디스아바바는 에티오피아의 문화적, 정치적, 사법적 그리고 상업적 중심인 도시가 되었다. 위생, 환경적인 문제들이 하루빨리 극복되어 이름에 걸맞게 ‘새로운 꽃’으로 피어났으면 한다.

 

 

 


참고문헌

에티오피아 13월의 태양이 뜨는 나라, 이해용

‘ADDIS ABABA IN THE PAST AND ITS PROSPECTS IN THE NEW MILLENNIUM’ Published by: the Addis Ababa Millennium Secretariat

 

 

사이트

http://blog.daum.net/sirius2375/215

http://cafe.naver.com/yogigajo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12&

http://blog.yahoo.com/_SUDAEJ6TL4I6MRQOWVW2EHG2S4/articles/706303 : 악숨 제국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0hyundai&logNo=100137283712&categoryNo=45&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ge=5&postListTopCurrentPage=1&userTopListOpen=true&userTopListCount=10&userTopListManageOpen=false&userTopListCurrentPage=5  : 회색도시

www.addisababacity.gov.et/ : 아디스아바바 시청 홈페이지

 

 


철도 시찰을 나온 메넬리크를 묘사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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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노아의 후손이라고 알려진 햄족으로 피부만 검을 뿐 혈통 상으로는 백인에 속한다. 흔히 에티오피아 하면 보통 아프리카 흑인들의 나라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잘못된 상식. 거리를 걷다 현지인들을 관찰하면 이들의 얼굴과 행동이 어딘가 백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도!


2) 본명이 살레 마르얌(Sahle Maryam)인 메넬리크 2세(ምኒልክ,1844.8.17~1913.12.12)는 에티오피아의 황제. 에티오피아의 영토를 거의 오늘날의 수준까지 넓히고 이탈리아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근대화 개혁을 추진해 에티오피아를 강국으로 발전시켰다.

메넬리크 2세가 있다면 메넬리크 1세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메넬리크 1세는 솔로몬과 시바 여왕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의 인물이자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제다.

 

 


아두와의 위치

 


3) 이탈리아군이 2만 명인데 비해 에티오피아군은 8만 명에 달했고,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를 얕잡아본 탓인지 장비를 충분히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대패하고 말았고, 같은 해에 에티오피아와 아디스아바바 조약을 체결해 에티오피아를 독립국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두와 전투는 남아프리카의 줄루 왕국이 영국군을 격파한 이산들와나 전투와 함께 아프리카인이 유럽인에게 거둔 대표적인 승리로 기억되고 있다.

 

 

메넬리크의 영토확장. 아두와 전투에서 승리한 메넬리크는 위의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에티오피아의 영토를 꾸준히 늘려, 거의 오늘날의 것과 같은 영토를 만들었다.
 
4)


5) OAU (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6)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1930년에 즉위. 하일레 셀라시에 시대의 에티오피아는 잠시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착실한 근대화 사업으로 1960년대까지 1인당 국민 소득 3,000$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와 비교하자면 우리나라는 최빈국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100$를 넘지 못했을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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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엔국립공원 – 아프리카의 별을 찾아서

2013. 9. 14. 21:36

 

시미엔국립공원 – 아프리카의 별을 찾아서

 

아직은 어색하기만 한 시미엔 트래킹

여행의 출발을 세렝게티 사파리로 시작한 우리는, 3주에 걸친 아프리카 여행의 마지막을 아프리카의 지붕이라고 불리우는 시미엔산 트래킹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미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출발 전부터 기대가 컸던 세렝게티에 비해, 시미엔 산 트래킹은 정보도 부족하고, 알려진 바가 없어서 자세한 계획을 세울 수도 없고, 기대를 할 수도 기대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EBS에서 2008년도에 방영된 세계문화기행의 아프리카 4부작에서 사진작가 신미식 씨가 시미엔산 트래킹을 했던 내용과, 인터넷 블로그의 몇몇 사람들의 단편적인 정보만 보고서도, 그 4000미터가 넘는 거대한 아프리카의 산에 숨어있는 절경과 신기한 동물들, 그리고 그곳의 진짜 보물인 시미엔 산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꼭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매력적인 곳임에는 분명했다.

 

시미엔산 트래킹은 짧게는 당일부터 길게는 10일까지 다양한 코스로 짜여져 있어, 개개인의 여행계획이나 시간, 금전적 여유에 맞게 코스를 정할 수가 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제일 무난하면서도 시미엔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하는 3박 4일 코스를 선택하였다. 곤다르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여, 드바라크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3박 4일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서울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라면 경악할지도 모를 만큼 숙박시설이나 편의시설은 부족하지만, 그만큼 아프리카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 2500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시미엔산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친구들 중에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한 친구가 있어서 트래킹 시에 포터나 가이드를 고용한다는 얘기를 들으며 언젠가 한번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시미엔 산 트래킹은 포터, 가이드, 요리사 뿐만 아니라 총으로 무장한 스카우트까지 함께 해야 한다. 야생 동물의 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흥미진진한 산이 아닐 수 없다.

 

 

 

시미엔의 어린 목동

 

‘ 내가 뤼브롱 산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

알퐁스도데의 별은 이렇게 시작한다. 뤼브롱 산에서 양을 치는 목동의 주인집 아가씨 스테파네트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너무도 예쁘게 그려낸 동화 <별>. 내가 살면서 목동을 만날 일이 있을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별>에서 방금 튀어나왔을 법한 목동 아이를 이 곳 아프리카 해발 3000m의 시미엔 산에서 만날 수 있었다. 어린 목동은 외롭게 나무 위에 앉아서 양과 소를 살피고 있었다. 넓은 시야를 확보해야 하고, 관리를 편하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아침이 되면 양과 소를 벼랑쪽으로 몰아넣고 높은 곳에서 그들을 관찰한다.  

 

목동의 친구들

 

2004년, 시미엔 국립공원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왈리아 아이벡스(walia ibex) 약 62마리.

소과의 포유류, 야생 염소의 한 종류이며 1m길이의 긴 뿔을 가진 아이벡스 중에서도 에티오피아에 사는 것으로 알려진 왈리아 아이벡스는 1980년대 초반 500여마리였으나, 24년뒤에는 62마리 정도로 개체 수가 급속히 감소하였다.

 

이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에티오피아 정부는 1969년 시미엔 산을 시미엔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1996년에는 유네스코에서 이 국립공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까지 하였다.

 

뒤쪽으로 휜 최대 110cm의 큰 뿔은, 수컷들 사이의 계급을 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한다. 번식기에는 수컷들이 이 거대하고 놀라운 뿔로 들이받으며 암컷을 위해 경쟁한다. 뿔이 계급을 정한다면, 이 동물의 수염은 그들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나이 든 아이벡스 일수록 길고, 두꺼운 수염을 가지며, 암컷은 더 작고 얇은 수염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혹시라도 시미엔 산에서 62마리밖에 없는 아이벡스 중의 한마리라도 보게 된다면 그 뿔과 수염을 제일 먼저 봐야겠다고 생각해보았다.

 

 

다섯 마리에서 스무 마리 정도로 무리를 지어 사는 아이벡스 떼는 하루에 2키로미터 정도 까지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이 시미엔 산에만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해발 4000미터 정도의 고원지대인 시미엔 산, 그리고 2500미터~4500미터의 높고 가파른 바위 절벽 지역에서 관목, 이끼, 허브, 잔디를 먹고 사는 왈리아 아이벡스. 시미엔 산을 방문하는 여행객의 제일 큰 목적이 그들을 보기 위해서라는 말이 이해된다. 시미엔 산이 아니고는 이 동물들이 살 곳이 없으니 말이다.

 

시미엔 산의 또 다른 유명인사라 하면 겔라다캐코원숭이(Gelada Baboon)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자와 비슷하게 길고 덥수룩한 갈기를 가진 수컷의 특징 때문이 종종 사자비비 (Lion Baboon)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원숭이는 풀을 뜯어 먹고 사는 매력적인 원숭이이다. 다큐멘터리 화면으로 본 쪼그리고 앉아서 풀을 뜯어 먹는 장면은 나에게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을 생각나게 했다. 이 원숭이의 제일 큰 특징이라면 뭐니뭐니해도 가슴 중앙에 하트 모양의 핑크색 무늬이다. 이 무늬는 번식기에 붉은빛을 띤다고 한다. 밤에는 동물이나 바위 틈 등에서 자고, 새벽부터 활동을 하는 이 원숭이 무리는 심심한 목동들에게 더없이 좋은 친구가 아닐까.

 

이 외에도 에티오피아 늑대, 시미엔 여우, 자칼 등을 비롯한 포유류와 수염독수리, 수리부엉이 등 137종 이상의 조류, 자이언트 로벨리아 등의 희귀 동식물들 때문에 목동은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심심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jsin999&logNo=30127249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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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렝게티 응고롱고로

2013. 9. 14. 21:33

 

2월 2일 반 두려움 반 설레는 마음을 안고 나이로비에 도착하였다. 2011년 2학기 수강신청 때 서윤이와 수민 언니의 권유로 듣게 된 스와힐리어 수업이 인생에 있어 한 획을 그을 여행으로 날 이끌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다. 우선 우리 일행은 버스에 탑승하여 아루샤로 이동을 하였고 도착한 뒤 중식을 먹고 사파리 차량에 탑승하여 응고롱고로로 이동하였다. 응고롱고로 캠핑장에 도착하여 석식후 응고롱고로 캠핑장에서 취침하였다.1)캠핑장에서 조식 후 응고롱고로 분화구 안으로 이동하여 사파리를 하였다.

 

세렝게티라면 흔히들 Big Five라고 불리우는 사자, 표범, 코끼리, 코뿔소, 아프리카물소를 관찰하는 것이 관건인데, 이 Big Five를 하루 여행에 다 보는 여행자는 5%도 안된다고 하니 걱정되기도 하고 혹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설레는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이 Big Five라는 호칭은 이름만 들었을 때는 가장 큰 동물 5마리를 뽑은 줄 알았는데 백인 사냥꾼들이 직접 잡기에 가장 어려운 동물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니 그리 유쾌한 호칭은 아니었다.2)

 

그 Big Five를 살펴보자면 우선, 아프리카물소는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눈에 비교적 쉽게 띠는 동물이었다. 첫인상은 시커멓고 커다란 덩치와 큰 뿔 때문에 그 기에 눌려 무섭다가도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매우 온순한 동물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알고 보면 하마나 악어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사람을 많이 죽인 동물이라는 주장이 제기 될 정도로 매우 사나운 동물이다.3)

 

 

아프리카물소는 매년 건기가 시작될 때 즈음인 5월에 새로운 물과 풀을 찾아 세렝게티 초원의 북쪽 케냐의 마사이마라까지 1,6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여 우기가 시작할 무렵인 10월말 다시 세렝게티 남쪽으로 돌아온다. 이는 오직 아프리카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4)코끼리 또한 무리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파리를 하는 도중에 눈에 쉽게 띄는 동물이었다.

 

코끼리는 초식동물로 우리가 세렝게티에서 볼 수 있었던 코끼리는 아프리카 코끼리였다. 평소에 쉽게 볼 수 있었던 아시아 코끼리가 아치형 등을 가진 것에 비해 아프리카 코끼리는 등 한가운데가 오목한 것이 외관상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가장 큰 차이였다. 또 자세히 보면 이마도 훨씬 튀어나와 있었다. 코끼리는 유독 그 상아가 매우 매력적으로 보았는데 1800년대 미국에서는 당구공을 코끼리의 상아로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다. 왜냐하면 당구공은 스포츠 특성상 모든 지점의 밀도가 균일해야 어느 면으로 정지해도 관성의 가감이 없기 때문에 소재가 매우 중요한데 무거우면서 밀도가 높은 재질을 가진 상아는 당시로선 최고의 소재였다.

 

불행히도 코끼리의 상아를 얻기 위해서는 한 마리의 코끼리를 희생시켜야 했기 때문에 코끼리 사냥에 제한이 없었던 그 당시 코끼리의 개체수가 어마어마하게 줄었다고 한다. 코뿔소는 코끼리나 아프리카물소에 비해 쉽게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니였다. 코뿔소의 뿔은 피부가 변화하여 생긴 것인데 일생동안 자라난다고 한다. 심지어 밑동에서부터 잘려난 경우에도 다시 자라난다고 한다. 5)사자는 무리생활을 하는데 그 무리를 프라이드라고 한다. 성숙하기 전에는 몸에 갈색 반점들이 있는데 크면 거의 사라지지만 암컷의 경우 그 흔적이 남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Big Five의 마지막인 표범은 나무를 타는데 능숙하다.

 

 

1학년 때 과사진동아리에서 주최한 사진전을 보러 갔었는데 그 때 표범이 나무를 올라가는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표범은 홀로 생활하며 눈에 띠는 것을 피한다. 그 이동속도도 매우 빠르기 때문에 눈에 띄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화려했던 동물들을 실제로 본 뒤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 한 뒤 세렝게티로 이동을 하였다. 응고롱고로 분화구에서 세렝게티 나비힐 게이트로 가는 중간에 올두바이 계곡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남쪽의 원숭이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화석이 발견된 곳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고 보는 이유는 골반과 대퇴골의 모양이 인간의 것과 유사하여 직립보행을 했을 것이라고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한다.6)이는 찰스 다윈이 제창한 진화론의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에 사회·과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은 화제이다.

 

순수한 과학적 탐구심만을 가지고 진화론에 관해 살펴보자면, 우선,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기 이전에 라마르크가 용불용설을 제창하였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다윈에 진화론에 비하면 용불용설은 매우 초보적인 단계지만 진화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사람으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용불용설(use and disuse theory)은 말 그대로 동물이 주변 환경에 적응한 형질이 유전이 되어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설인데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기 때문에 요즘은 인정되지 않고 있다.

 

용불용설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하자면 훈련으로 인해 한 쪽이 발달된 손을 가지고 있는 박찬호의 아들, 딸들이 한 쪽 손이 날 때부터 발달되어 크기가 크지 않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이어 등장한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선택을 원리로 하고 있다. 진화론을 단계적으로 살펴보자. 많은 수의 개체들이 한정되어 있는 자원을 두고 경쟁을 한다고 가정하자.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생존에 유리한 형질을 가진 개체들만이 경쟁에서 이겨 살아남게 된다. 이는 유전자적 입장에서 보면 유리한 형질을 가진 유전자의 비율이 점점 높아져 결국 그러한 형질을 지닌 후손들을 배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쟁에서 유리한 형질은 비슷할 것이고 결국 비슷한 형질을 지닌 유전자가 우세해져서 그것이 시간을 거치면서 진화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처음 다윈이 진화론을 제시했을 때 창조론이 우세했던 당시이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윈의 <종의 기원>을 발표한지 정확히 100년 뒤인 1959년 메리 리키 부인이 골짜기 맨 밑층에서 진화설을 입증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두개골 화석을 찾아낸 것이다. 다윈의 굳은 믿음이 백 년만에 빛을 본 것이다. 진화론의 증거로서 두개골 외에도 올두바이 계곡 근처의 라에톨리에서 직립보행을 하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많이 발견 되었는데 이는 이 지역의 화산재가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만디 화산의 화산재는 물에 닿으면 굳는 특이한 성질을 갖고 있어서 우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찍힌 발자국들이 굳어 오늘날 화석의 형태로 남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다.7)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대해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이자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약 800만 년 전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며 비록 뇌는 인류의 조상이라고 하기에는 그 크기가 작았지만 이의 모양이 인간과 비슷하였다.8)역사의 헌장인 올두바이 계곡을 지나 세렝게티에 도착하였다. 현지 음식으로 아침을 해결한 다음 사파리를 또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마냐라로 이동하여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 휴식을 취한 뒤 마냐라 캠핑장에서 잠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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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행 갔다 온 뒤 수정해야 할 부분은 밑줄 표시를 하였음.


2) http://berghausway.tistory.com/457


3) http://en.wikipedia.org/wiki/Big_Five_game#Cape_buffalo


4) p. 26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 현암사, 최삼규, 서울 2004


5) http://ko.wikipedia.org/wiki/%EC%BD%94%EB%BF%94%EC%86%8C


6) http://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9D%B8%EB%A5%98_%EB%AC%B8%ED%99%94%EC%9D%98_%EC%8B%9C%EC%9E%91/%EC%9D%B8%EB%A5%98%EC%9D%98_%ED%83%84%EC%83%9D/%EA%B5%AC%EC%9D%B8%EB%A5%98%EC%9D%98_%EC%B6%9C%ED%98%84#.EC.98.A4.EC.8A.A4.ED.8A.B8.EB.9E.84.EB.A1.9C.ED.94.BC.ED.85.8C.EC.BF.A0.EC.8A.A4


7) 아프리카에서 문명과 잠시 작별하다. 김귀욱, 랜덤하우스중앙 서울 2005 pp.111-120


8)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6a099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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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렝게티 응고롱고로 + 시미엔 프롤로그

2013. 9. 14. 21:29

 

세렝게티 응고롱고로 + 시미엔 프롤로그

 

이번 여행을 하면서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찬란한 문명과 함께 인상 깊었던 것이 바로 아프리카의 수려한 자연경관이었다. 초원이가 가고 싶어한 세렝게티 초원과 지구에서 가장 큰 분화구인 응고롱고로에서의 사파리 체험은 왜 전세계 여행자들이 그토록 탄자니아를 여행하기를 꿈꾸는지를 알려주었다. 대자연의 광활한 초원에서 오랫동안 그들의 질서를 유지하며 삶을 이어온 동물들을 보며 느낀 경외감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간섭이 없는, 아니 인간이 간섭할 수 없는 그곳에서 우리가 대자연 앞에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서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에티오피아의 시미엔산은 탄자니아의 국립공원과는 전혀 다른 자연환경으로 우리의 눈길을 붙잡았다. 해발 2000미터의 고원에 세워진,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독자적인 문화와 전통을 가졌다고 일컬어지는 사미엔. 트래킹 내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 장엄한 골짜기와 기기묘묘한 봉우리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독특한 희귀동물들은 아프리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야생 그대로의 자연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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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라 – 죽은 자들을 위한 도시

2013. 9. 14. 21:28


사카라 – 죽은 자들을 위한 도시

 

 

세계 4대문명 중 하나인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이자 피라미드의 나라 이집트는 그 이름만으로도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나에게는 또한 이집트 장군과 속국 누비아 공주의 사랑을 다룬 오페라 ‘아이다’의 배경이었던 아련한 로맨스의 나라이다. 그렇지만 역시 이집트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나일강변 너머 사막에 펼쳐진 피라미드 유적이다.

 

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로 불리며 고도의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수많은 미스테리에 쌓여있는 구조물이다. 이러한 피라미드가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과연 언제일까? 그 해답은 ‘죽은자들을 위한 도시’인 사카라에서 찾을 수 있다. 나일강변에 위치한 사카라는 드넓은 피라미드 단지가 있는 곳이다. Saqqara라는 지명이 죽음의 신 Sokar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오랫동안 죽은 자들을 위한 도시였다. 파라오 제1 왕조 시대부터 그리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기까지 약 3000년 동안 왕과 귀족들의 무덤을 건설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는 피라미드 단지와 세라피움 신전등 으로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이끄는 곳이니 그 이름에 걸맞는다고 할 수 있다.

 

 

사카라에 있는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전통적인 무덤양식이었던 한 층의 마스타바를 6층으로 쌓아올려 처음으로 피라미드의 형태를 보였다. 우리들이 알고있는 사각뿔형태의 피라미드는 이것이 발전한 형태이다. 계단식 피라미드는 최초의 피라미드일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석조 건축물이다. 기원전 27세기에 세워진 건축물이 4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며 오늘날 까지 같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파라오의 절대권력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요즘의 이집트는 민주화 혁명의 물결이 거세지만 이집트 고대문명의 정수이자 파라오 권력의 표상인 피라미드는 꿋꿋이 남아 현대인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인간사의 무상함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엄청난 건축물을 만든 당시 사람들의 노고가 떠오른다.

 

반만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은 파라오 조세르와 그의 재상 임호테프였다. 조세르는 고왕국 제 3왕조의 두 번째 왕으로, ‘조세르의 세기’라고도 불리는 고대 이집트의 빛나던 시기를 이끌었던 파라오이다. 재상 임호테프는 파라오의 옥새를 담당하며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고위관료이자 천재적인 건축가였으며 의술과 문학 등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건축가이자 주술가·예언자이면서 의술과 천문학에도 뛰어났던 그를 이집트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평가하는 것은, 수천 년을 앞선 임호테프에게 오히려 실례가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임호테프라는 이름을 어디에선가 들어보았다면 아마 그것은 바로 영화 미라에서였을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후대에 길이 존경받는 명재상이었던 임호테프를 영화에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추악한 괴물 ‘이모텝’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마치 헐리우드/일본이 한국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에서 이순신장군을 탐욕스러운 망령으로 묘사한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모텝이라는 인물의 설정이 서구인들의 무지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오만에서 나온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파라오 조제르 하의 고대 이집트는 통일이 굳건해지고 사회의 진보가 이루어 졌으며, 종교와 예술분야에서도 전환점이라 할 만한 시기였다. 피라미드와 같이 거대한 건축물은 당시 강력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집중된 권력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왕조의 흥망이 결정되는데, 이집트의 고왕국들과 중국의 진나라와 같은 거대한 왕조는 권력과 자원의 많은 부분을 왕의 무덤을 건설하는데 사용하곤 했다.

 

조세르왕의 계단식피라미드만 하더라도 한 층의 높이가 10여 미터로 총 높이가 65미터에 달한다. 이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의 정도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진시황릉 사례-피라미드를 거대한 건축물로 정의한다면 진시황릉도 이에 해당하는 고대의 건축물이다.) 현대인의 눈에는 비합리적이고 전제적인 정치의 표상으로 보이는 이러한 대규모의 무덤 건설이 고대왕조에서는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고대인들의 가치관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고에서 파라오는 곧 태양신이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태양이 사라져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는데,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은 파라오의 영혼이 머물 장소를 만들어 태양신 파라오의 영원불멸을 돕는 것이었다.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불멸로 가는 위대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무덤을 건설하는 것은 왕의 궁전을 세우는 일만큼이나 혹은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피라미드는 죽은 자가 영원히 안식을 취하는 공간인 동시에 부활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피라미드는 별과 일직선상에 세워졌으며 밑변의 방향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고도의 건축학적, 천문학적 지식에 기반하여 건설된 또다른 세계였다.

 

 

피라미드는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을 이집트로 불러오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관광자원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시계바늘을 앞으로 돌려보면 바로 이렇게 찬란한 문화유산이 오히려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을 불러일으키는 기제가 되기도 했다. (이집트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날 정도로 이집트에 대한 세계 여러사람의 관심이 컸지만 이는 한편 이집트로의 침략을 가속화하기도 했다)피라미드의 도굴과 유물의 해외반출은 힘을 잃은 국가권력이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국주의의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때 이집트 유물의 해외반출을 제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이집트 인이 아닌 프랑스 인 오귀스트 마리에트였다. 프랑스에서 이집트학을 공부한 그는 사카라의 세라피움 신전을 발굴하였는데   발굴한 유적들을 체계적으로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유물의 해외반출을 금지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문화재의 해외반출은 식민지의 경험이 있는 나라들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일제 식민지시기는 물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는 수만점에 이른다.

 

 

문화재의 유출은 정부 관리나 군인들 뿐만 아니라 학자들에 의해서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이들은 문화재를 보존해주겠다는 명목으로 타국의 문화재를 자신의 나라로 가져간 사례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집트의 문화재를 현지에서 보호하려했던 오귀스트 마리에트의 노력은 선구적인 것이었다. 이 이름이 어디에선가 들어보았다고 생각하던 중, 오페라 ‘아이다’가 그가 쓴 소설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깊은 감명을 받았던 오페라는 바로 이 오귀스트가 이집트에서 남녀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쓴 소설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우연이 운명처럼 느껴졌던 저녁, 이집트의 석양은 피라미드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하늘로 상승하는 수직의 피라미드는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수평선과 대비되며 우리의 발걸음을 쉽사리 떼지 못하게 하였다. 사카라는 망자를 위한 도시였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의 관념 속에서 죽음은 곧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기에 피라미드는 무덤인 동시에 영혼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피라미드와 그 이야기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설레임을 때로는 슬픔을 심어준다. 사카라에서는 죽은자들과 살아있는 사람들이 함께 숨쉬고 있었다.

 

 


참고문헌

 

정규영, <<문명의 안식처, 이집트로 가는 길>>, 르네상스, 2004.

크리스티앙 자크 지음, 임헌 옮김,<<위대한 파라오의 이집트>>, 예술시대,

 

인터넷 사이트

http://www.cyworld.com/theegypt/3661890

http://travfotos.tistory.com/124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145

 

다큐멘터리

-윤기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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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피스

2013. 9. 14. 21:25

 

멤피스


전날 밤, 룩소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다시 카이로로 돌아온 우리는 아침 일찍 카이로의 남쪽에 위치한 멤피스로 향하였다. 멤피스로 가는 길에는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당나귀는 성격이 온순하고, 소나 말보다 물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 곳 사람들은 당나귀를 주로 타고 다닌다고 한다. 길을 가는 사람들 뒤로 약간은 허름한 건물들과 도로가 보였다. 드디어 멤피스에 도착했다.

 

 

 

 

그림 1 프타 신의 모습

 

 

고대 이집트의 정치․경제․문화․종교의 중심지이고, 한 때는 파라오의 대관식을 거행할 정도로 번성했던 멤피스지만, 길가에 드문드문 있는 옛 신전이나 왕궁의 흔적만이 그런 과거의 일들을 말해주고 있었다. 멤피스는 하 이집트의 제 1왕국 때부터 상․하로 통일된 이집트 고왕국의 기원전 2200년까지의 수도였다. 멤피스라는 이름은 옛 이름은 고대 이집트어로 ‘피라미드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다’라는 뜻으로, 사카라의 남부에 있는 고왕국 제6왕조의 페피 1세의 피라미드의 이름인 멘네페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흰 성벽’이라는 뜻의 이네브 헤즈, 상,하 두 이집트의 지배를 상징한 ‘두 땅을 묶는 곳’이는 뜻의 앙크 타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또한 멤피스는 창조신 프타 신앙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멤피스에는 왕궁 이외에도 프타 신전이 곳곳에 있었는데, 4세기 초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공인(밀라노 칙령)하고, 데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 이외의 신앙을 금지시켰고, 이 때 멤피스의 프타 신전도 파괴되었다. 고대 이집트어로 프타는 ‘우주의 건설자’라는 뜻으로, 다른 곳에서와 달리 멤피스에는 프타를 중심으로 한 천지창조 신화가 있었다.

 

이 신화에 따르면 프타가 그의 심장과 혀로 아툼을 비롯하여 헬리오폴리스의 아홉 신을 만들어 천지를 창조했으며, 태양신 라의 눈물로 인간을 창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집트 신화에서 프타의 부인은 파괴의 여신인 세크메트이며, 아들은 연꽃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를 가진 네페르툼인데, 이들은 ‘멤피스의 삼신’이라고 불린다. 프타의 모습은 등에 육체적인 안녕을 상징하는 메나트를 메고 손에는 생명을 나타내는 앙크(☥)와 부활을 상징하는 제드 장식의 지팡이를 들고 머리를 깎은 미라로 표현된다. 

 

 

지금의 멤피스에는 프타 신전 유적의 입구에 있는 조각 박물관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곳에는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와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거상은 원래 누워있는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3천 4백여 년 전에 람세스 2세가 프타 신전을 확장하면서 만든 것으로 그 당시 신전 앞에는 2개의 거상이 있었다. 하나는 지금 멤피스의 조각 박물관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얼마 전까지 카이로의 람세스 중앙역 광장에 서 있었다.

 

이 거상은 대기오염과 자동차, 열차의 진동으로 훼손될 염려가 있어 2008년에 대이집트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현재 조각 박물관 안에 누워있는 람세스 2세의 거상은 왕관의 일부와 무릎 이하의 한쪽 다리와 한쪽 팔꿈치가 떨어져나가고 늪에 박혀 있던 것을 1820년에 발굴하여 이곳에 옮겨다 놓았다고 한다. 한 개의 큰 석회암을 깎아서 만든 이 석상은 원래 그 길이가 15m였다. 지금은 파손되어 12m만 남아 있으며 그 무게가 80t이나 된다.

 

박물관 앞뜰로 나오면, 람세스 2세의 입상과 여러 가지 조각들, 그리고 멤피스의 스핑크스와 멤피스의 신수인 황소 아피스의 해부대가 있다. 멤피스의 스핑크스는 기자의 스핑크스 다음으로 큰데, 기자의 것보다 얼굴부분이 훼손되어있지 않아서 스핑크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림 2 성스러운 소 아피스

 

 

설화 석고로 만들어진 아피스의 해부대는 프타 신전에서 길러졌던 황소 아피스의 미라를 만들 때 사용된 것이다. 아피스는 죽은 왕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들의 신인 오시리스가 되었다고 믿어졌으며, 미라는 오시리스의 자격으로 사카라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멤피스의 신수로서 아피스는 '프타의 대리자'로 숭배되었고, 또한 풍요와 힘을 나타내는 왕권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아피스는 프타 신전 내의 ‘아피스의 집’에서 길러졌으며, 화려한 치장을 하고 굉장히 성대한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하지만 이러한 아피스의 칭호는 아무 황소에게나 내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피스를 찾기 위해 사제들이 각지로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죽은 아피스가 환생되었음을 입증하는 특별한 신체적 특징을 가진 송아지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 신체적 특징은 29개의 모양의 표식으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이마에 하얀 역삼각형 무늬가 있고, 어깨에는 독수리 모양의 하얀 무늬가 있으며, 엉덩이 근처에는 매와 비슷한 무늬가 있으며, 혀에는 풍덩이를 닮은 무늬가 있는 등의 특징들이다. 멤피스의 사제들은 신체적 특징을 가진 송아지를 찾으면 '아피스의 집'까지 개선행진을 벌였다. 이러한 아피스 숭배는 헬레니즘 시대까지 계속되다가 세라피스 숭배로 바뀌었다.

 

이처럼 이집트 신화에서는 다양한 동물들이 숭배의 대상이 된다. 선사시대의 이집트인들은 송아지를 보살피는 어미 소의 자애로움, 악어의 강건함, 사자의 사나움 등과 같은 동물들이 각기 가진 성격에 대해 찬탄이나 공포의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인간과 결합시켜 신격화 하였다. 동물을 숭배하는 것은 신앙의 하나가 되어가며, 고대 이집트에서는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 신들과 관련된 동물을 신전에서 사육했으며, 이들 동물은 자유로이 호화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태양, 대지, 물의 신 세베크를 상징한 악어는 크로코딜로폴리스에 있는 신전 연못에서 아무 걱정 없이 지냈고, 지혜의 신인 토트를 나타내는 따오기는 헤르모폴리스에서 사육되었다. 환희와 사랑의 여신을 나타내는 고양이는 바스트(Bast) 신전 내에서 돌아다니게 하고, 신성한 황소 아피스(Apis)는 멤피스에서 길러졌다. 아피스 황소처럼 이 신성한 동물들은 죽은 후에도 신의 대접을 받으며 사후에는 미이라로 만들어졌다.

 

세베크 악어와 같은 경우는 사제들이 그 악어의 앞다리와 귀를 금과 보석으로 장식하였으며, 성역에 모인 순례자들이 악어에게 최고급 먹이를 먹였다고 한다. 그 악어가 음식을 받으면 순례자에게 자신의 자비를 베푼다는 표시였으며, 사람에게는 나일강에 뛰어들어 악어의 먹이가 되는 것이 최고의 영예로 생각되었다고 한다는 것에서 그 당시 동물숭배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동물이나 자연에 대한 숭배는 자연환경에 지배되어 그 뜻대로 생활활 수밖에 없었던 원시사회에서는 흔히 있었던 일이다. 멤피스에서 아피스 황소에 대한 숭배가 그러했듯이, 문명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동물숭배 또한 점차 사그라졌다.

 

 

참고문헌

 

손주영•송경근, 이집트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09, pp 31-34

http://ko.mythology.wikia.com/wiki/%EB%A9%A4%ED%94%BC%EC%8A%A4_%EC%8B%A0%ED%99%94

 


이태원, 이집트의 유혹, 기파랑, 2009, pp 163-169

http://thaiscampos.suite101.com/animal-worship-in-ancient-religions-a198171

http://en.wikipedia.org/wiki/Animal_worship

http://bipedsandbrutes.wordpress.com/2011/11/03/the-origins-of-animal-worship/

http://cafe418.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yMaB&fldid=I0Zm&contentval=0000czzzzzzzzzzzzzzzzzzzzzzzzz&nenc=y8McCQFicrvxGHM_CDtQew00&fenc=&q=&nil_profile=cafetop&nil_menu=sch_updw

http://www.tournile.com/focus/myth/why.php

http://blog.ohmynews.com/greenyds/248851

http://blog.daum.net/holysitesearch/357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uxhana&logNo=130037299903&widgetTypeCall=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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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소르

2013. 9. 14. 21:14

 

룩소르


찬란한 역사를 간직한 이집트를 가로지르는 나일 강을 따라가면 아주 먼 옛날을 더듬어 볼 수 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훑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긴 나일 강처럼 긴 이집트의 역사를 가진 그 곳, 룩소르. 룩소르가 바로 이집트의 오래된 사진첩이다. 룩소르는 이집트 역사 중에서도 신왕국시대의 중심무대였다. 룩소르는 이 시기에 ‘테베’라고 불리었고 고대 이집트 문명의 많은 자취를 남겼다.

 

이집트의 왕을 뜻하는 ‘파라오’라는 명칭도 테베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조가 시작될 때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파라오를 태양신 ‘라’의 후손이라 믿었고 신처럼 존중되었다. 신과 같다고 여겨지는 파라오야말로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이었고 종교상의 주체였다. 파라오는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을 눈으로 드러나는 어떤 실체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 결과 파라오는 건축물들을 어마어마한 크기로 지었다. 자신의 권력이 강할수록 피라미드 같은 건축물이 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의미로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들은 파라오의 명성을 드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이집트인들의 자부심을 북돋아 주었다.

 

이집트 사람들에게 이집트라는 국가는 아주 강하고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심어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집트 건축물들의 도드라지는 특징으로 제일 먼저 손에 꼽히는 점이 엄청난 규모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해버리는 그 거대한 규모를 실제로 맞닥뜨린다면 ‘억’소리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룩소르 동쪽 지역에 있는 카르나크 신전인데, 이 신전은 역사상 가장 넓은 종교건축물이다. 유럽의 어떤 종교건축물이라도 카르나크 신전의 중앙홀에 쏙 들어갈 정도라고 하니 그 규모가 감히 상상이 되는가?

 


입이 떡 벌어지게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이집트 건축물들은 대부분 종교 건축물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옛날부터 자연현상이나 여러 동물을 신으로 숭배했고, 사람이 죽고 난 뒤에도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은 이의 장례를 매우 중요시했다. 이러한 그들의 종교관은 건축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영원한 삶을 원했던 이집트인들은 그러한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기 위해 돌처럼 단단한 재료를 이용해서 건축물을 지었다. 특히 이 특징은 파라오의 장제전에서 알 수 있다.

 

룩소르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주변 경관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호평 받고 있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깎아 내지른듯한 돌산의 절벽에 둘러싸여 있는데, 뒤쪽 돌산과 비슷한 돌을 재료로 사용해서 배경과 건축물이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돌을 쌓아 만든 건축물이 아니라 커다란 돌을 깎아서 만든 하나의 거석건축물이라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기계 없이도 돌을 조각할 수 있는 기묘한 방법을 알고 있었고 거기에 능통했기에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을 건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장제전이란 파라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영혼을 제사하던 곳이다. 하트셉수트 여왕 역시 돌로 장제전을 건축함으로써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한 단단한 믿음을 상징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크기도 엄청나다. 왕도 아닌 여왕의 장제전을 왜 이렇게 크게 지었나 생각할 수 있지만 하트셉수트 여왕은 엄연히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였다. 우리가 잘 아는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마지막 여성 파라오라면 하트셉수트는 이집트의 최초 여성 파라오이다.

 

아버지 투트모세 1세가 죽고 그녀는 이복 오빠인 투트모세 2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1)남편인 투트모세 2세가 죽은 후 아이가 없었던 하트셉수트는 왕위를 잇지 못했고 후궁이 낳은 아들 투트모세 3세에게 왕위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는 자신이 왕위를 계승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22년간 투트모스 3세 대신 나라를 다스렸다. 하트셉수트 여왕은 강한 남성처럼 보이기 위해 가짜 수염을 붙이고 파라오 옷을 입는 등 남성 파라오처럼 보이게 했다.

 

남성 파라오의 모습을 한 채 파라오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녀의 장제전에 있는 많은 동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그녀 자신이 신의 자식이라는 내용의 벽화들이 주로 새겨져 있는 것을 통해서도 하트셉수트가 그녀의 위엄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비록 공동정치라고는 했지만 실제로 모든 권력을 빼앗긴 투트모세 3세는 하트셉수트가 파라오로서 나라를 통치했던 20여년을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나중에 하트셉수트 여왕이 죽고나서야 왕위를 되찾은 투트모세 3세는 하트셉수트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그녀의 장제전에 있는 벽화와 조각을 훼손시켰다. 벽화나 조각상에서 얼굴을 없애고 하트셉수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그 때문인지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에는 얼굴을 잃은(?) 스핑크스와 인물들이 줄을 잇는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이 있는 룩소르의 서쪽은 ‘죽은 자들의 도시’라고 불린다. 반면 동쪽은 ‘산 자들의 도시’라고 불리고 있다. 동쪽과 서쪽의 기준은 나일 강을 중심으로 나뉘어진다. 우리 옛말에 죽은 사람을 일컬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강을 건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강 한줄기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불리다니 신기한 사실이다. 룩소르의 동쪽과 서쪽이 다른 별명을 갖고 있는 이유는 해가 뜨고 지는 방향 때문이다.

 

해가 뜨는 방향인 동쪽에는 주로 카르나크 신전이나 룩소르 신전과 같이 업적이나 신을 기리는 신전이 있지만, 해가 지는 방향인 서쪽에는 역대 왕들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왕가의 계곡이나 영혼을 제사하는 장제전이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왕가의 계곡은 신왕국시대 왕들의 묘가 자리해 있는 곳이다. 일종의 파라오들의 공동묘지라고나 할까. 그런데 왕가의 계곡에 있는 왕들의 묘는 이전의 왕들과는 조금 다르다.

 

신왕국시대 이전의 왕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해서 그 곳을 묘지로 삼았지만 신왕국시대에는 피라미드의 건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의 무덤이 너무나 쉽게 드러나는 이전의 피라미드형 무덤이 도굴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한 신왕국시대의 왕들은 자신의 묘가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반 피라미드 양식과 다른 암굴을 파서 분묘로 만들었다. 자신의 무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골짜기에 동굴을 파서 그 속에 미라와 부장품을 함께 매장한 것이다. 땅 속에 길게 이어진 동굴을 팠기 때문에 왕가의 계곡에 가보면 얼핏 보기에는 그냥 허허벌판 돌산처럼 보인다. 하지만 구석구석 어딘가에는 왕의 무덤이 있다.

 


암굴 형태의 묘는 제 18왕조의 투트모세 1세를 시작으로 제 20왕조의 람세스 11세까지 계속해서 건설되었다. 왕들은 도굴꾼의 눈을 피해 암굴묘라는 다른 형식의 무덤을 선택했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다고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많은 묘소들이 대부분 매장 직후에 도굴 당했다. 금은보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미라까지 훔쳐갔기 때문에 무덤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하워드 카터가 1922년에 발굴한 투탕카멘의 무덤만이 원상태로 남아있다.

 

발견된 총 62기의 무덤 중 유일하게 투탕카멘의 무덤만이 도굴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도굴하는 과정에 파헤친 다른 무덤의 돌 더미에 투탕카멘 왕 무덤의 입구가 막혔기 때문이다. 투탕카멘의 묘 위에 람세스 6세의 묘가 만들어졌는데, 람세스 6세의 무덤은 파헤쳐 도굴 당했지만 투탕카멘의 무덤은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투탕카멘은 왕위에 10년도 채 있지 못하고 19살의 어린 나이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요절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업적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왕이었지만 하워드 카터가 찾아낸 온전한 그의 무덤만으로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황금 마스크를 비롯한 엄청난 양의 부장품들은 이집트 왕의 화려했던 과거를 보여준다. 재위 기간이 채 10년이 되지 못하지만 3000여 점의 부장품이 나온 것으로 추정했을 때 번성했던 시기를 통치하던 왕의 묘에 얼마나 많은 부장품이 잠들어 있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고대 이집트 왕들은 왕으로서 직무의 대부분을 자신의 무덤을 만드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왕릉에서 도굴해갔을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볼 수조차 없다니…. 휑한 왕릉만큼이나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짐은 어쩔 수 없다.

 

왕가의 계곡은 지금까지 총 62기의 묘가 발굴되었지만 투탕카멘의 묘 이후로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남은 왕의 미라는 13구에 이른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고 있을 13구의 미라도 왕가의 계곡 근처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땅 속에 묻혀있는 묘들도 세상의 빛을 볼 시기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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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당시 이집트는 왕족간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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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리벨라-그들의 성지, 우리의 유산

2013. 9. 14. 21:11

 

랄리벨라-그들의 성지, 우리의 유산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시간을 살면서 동시에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달력 체계인 에티오피아력1) 은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오력보다 약 7년 9개월 정도가 느린데, 이는 예수가 태어난 시기를 그만큼 느리게 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에티오피아에서는 예수와 그가 창시한 종교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종교는 조금은 독특한 기독교인 에티오피아 정교(Ethiopian Orthodiox)이다.

 

에티오피아 정교는 기독교의 일종으로 동방교회(Oriental church)에 속한다. 기독교는 로만카톨릭(천주교)과 개신교, 그리고 동방교회로 나누어지며 동방교회에는 그리스 정교, 우크라이나 정교, 러시아 정교 등이 속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신교나 천주교의 경우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부분이 많은 반면, 동방교회는 천주교나 개신교와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점2) 을 보이고 동방교회에 속하는 정교들 간에도 일치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이것은 동방교회가 주로 그 지역의 특성에 맞춰 토착화된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 정교의 교회 중 가장 크고 위대한 것이 바로 지금부터 살펴볼 지역인 랄리벨라의 11개의 암벽 교회이다. 천사가 와서 지어주었다는 전설을 믿고 싶을 만큼 거대한 암벽 교회군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에티오피아 지역은 악숨제국3)  이전부터 유대교를 믿긴하였으나 그보다는 Astar라는 신을 섬기는 토착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기독교가 정식으로 인정받고 지금처럼 큰 영향력을 미치게된 것은 4세기경 에자나왕 때부터이다. 삼촌, 형과 함께 에티오피아로 항해하던 어린 프루멘티우스를 싣은 배가 홍해 근처에 멈춰 악숨제국의 노예가 된 프루멘티우스와 그의 형은, 운좋게도 죽임을 당하는 대신 과부인 왕비에 의해 어린 왕위계승자인 에자나의 교육을 맡게 된다.

 

어릴적부터 프루멘티우스에게 교육을 받았던 에자나는 왕이 된 후 서기 324년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것을 국교로 선포하였다.4)  그 결과 에티오피아는 이집트가 주변 국가로 (역시 기독교의 일종인) 곱트교 선교단을 보내던 시기보다 더 이른 시기에 이집트를 거치지 않은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후에 이 지역의 기독교는 이집트에서 들어온 곱트교의 영향과 지역적 특색을 더한 에티오피아 정교로 재탄생하였다. 형은 떠났지만 프루멘티우스는 이 지역에 남아 에티오피아에 파견된 초대 주교이자, 에티오피아 정교의 초대 수장으로써의 역할을 하였다.

 

에티오피아 정교의 자부심은 그들에게 전해져오는 여러 전설을 통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악숨제국을 설립자인 메닐리크 1세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시바여왕과 솔로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한다. 그가 솔로몬의 아들이라는 증거는 악숨에 있는 언약의 궤5) 로 오늘날 왕들의 유물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6)  이 전설은 오랫동안 이들의 종교적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했고 20세기에 나타난 아주 먼 후대인 하일레 셀라시에 1세7) 까지 영향을 미쳐 그가 스스로를 위대한 솔로몬 왕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도록 하는 근원이 되었다.

 

 

960년 경 요디트(Gudit)?? 여왕8) 에 의해 악숨이 완전히 무너지고 그 자리에 자그웨왕조가 생겨났다. 자그웨(Ze-Agaw)는 게즈어로 ‘아그웨족(Agaw)의 왕조’라는 뜻이다. 거대한 암벽 교회군이 있는 도시인 랄리벨라는 자그웨 왕조의 7대 왕인 랄리벨라 왕의 이름을 본 딴 지역이다. 왕이 된 랄리벨라는 수도를 당시 로하(Loha)라고 불리우던 지금의 랄리벨라 지역으로 이전했다. 이 것은 600년경 말 신흥종교로 나타나 점점 성장하고 있던 주위의 이슬람 세력을 피해 좀 더 내륙의 지방으로 피신한 것이기도 하다. 이슬람 국가들이 에티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성지순례는 점점 어려워졌고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랄리벨라에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랄리벨라의 거대한 암벽 교회를 지은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 랄리벨라 왕 또한 비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반적인 왕위계승서열인 전대왕의 아들이 아닌 이복동생이었다. 랄리벨라가 어릴 적 벌들이 떼지어 모여 그의 요람 주위를 돌고 그가 행복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모습을 본 랄리벨라의 어머니는 동물들이 그가 왕이 될 인물임을 알았다9) 고 생각해 ‘벌들이 이 아이가 왕이 될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의 랄리벨라로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소실을 들은 형이자 자그웨왕조의 6대 왕이었던 하르바이는 더욱더 애가 탔고 그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동생을 암살하려고 여러번 시도했다. 하지만 암살시도는 번번히 실패했고, 어린 랄리벨라에게 독약을 먹였을 때에도 그는 죽지 않고 뇌사상태에 빠졌다. 그는 사흘간의 혼수상태에 빠진 후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 동안 천사들의 도움으로 하늘로 옮겨져 지냈으며 신이 그에게 돌아가 로하에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교회를 지으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 이후 하르바이는 랄리벨라 암살을 더 이상 시도하지 않고 그가 그 다음 왕이 될 것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랄리벨라의 거대한 암벽 교회는 총 11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교회들은 서양의 여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성인들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그 중 마지막으로 지어진 성 그레기오스 교회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져 온다. 랄리벨라는 암벽 교회 10개를 완성하고 더 이상 지을 계획이 없었는데 어느날 밤 그의 꿈에 성 그레기오스가 나타나 ‘왜 나를 위한 교회는 지어주지 않느냐!’고 말해 그를 위한 교회를 지은 것이 위에서 보았을 때 십자가10)  형태를 한, 매우 독특하며 아름답기로 유명한 성 그레기오스 교회라고 한다.

 

이 위대한 11개의 교회들은 120년에 걸쳐 지어졌고 이것을 어떻게 건설하였는지는 오늘날의 건축기술로도 알수 없어 사람들은 천사의 도움으로 바위를 조각해 지은 것이라고도 한다. 랄리벨라의 중심을 흐르는 강은 예수가 세례받은 요르단 강이 되었고, 교회 옆의 언덕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무덤언덕인 골고타 언덕이 되었다. 새로운 성지 건설은 지쳐있던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재기를 위한 큰 힘이 되었다.

 

이 후 에티오피아는 유럽의 주변 국가 식민지화, 짧은 이탈리아 식민지 등을 거치면서도 종교적 특색을 계속 간직하여 지금도 에티오피아 정교의 유산과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에티오피아에는 절반 조금 안되는 정도가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이고, 이슬람 신도들이 40% 정도로 예전처럼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가 많지는 않다. 또한 종교간 갈등이 과격한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해 2011년에는 과격 무슬림 청년들이 50여개의 에티오피아 교회들을 불태우고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 한사람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과 기아 등 생활고 속에서도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굳건히 지키며 그들의 새로운 성지인 랄리벨라에서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참고자료

위키피디아 영판 (+재인용도)

종교별 신자의 비율은 주 에티오피아 한국 대사관 참고

13월의 태양이 뜨는 나라, 에티오피아

처음 읽는 아프리카 역사

John G. Hall, Ethiopia : in the modern world, chelshia House Publishers,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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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즈력(Ge’ze calendar)라고도 한다.

 

2) 심지어 크리스마스의 날짜도 다르다! 그레고리오력에서는 12월 25일이지만,  에티오피아력으로는 1월 7일(윤년의 경우 8일)이 크리스마스이다. 로만카톨릭에서는  동방교회의 교회력과 어느정도 통하는 부분을 만들기 위해 이날을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방문했다고 하는 날짜로 교회력에 넣었다.

 

3) 800여년간 지속된 북아프리카 지역의 매우 강성한 제국이다. 다른 아프리카의 국가와 달리 게즈(Ge`ez)어라는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4) 사실 프로멘티우스가 악숨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고 싶어했던 것은 이 곳에 들어오는 기독교 상인들의 거래를 위함이었다.

 

5) 모세가 받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을 보관해놓았던 상자라고 한다.

 

6) 언약의 궤는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에 보관되어 있어 존재유무조차 확실히 파악할 수 없어, 있다고 ‘전해진다’.

 

7) 거룩 삼위일체의 힘이라는 뜻. 재위 기간 : 1892-1975. 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 대위식을 보고 감명받은 사람들이 그의 왕자시절 이름을 딴 라스타파리교를 만들기도 하였다. 자메이카 출신 레게 가수 밥 말리가 신도인 것으로 유명하다.

 

8)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불명확한 반-전설적인 존재이다.

 

9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동물 세계가 위대한 인물의 출현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동물들이 미래의 중요한 일을 알려줄 수 있다는 민간신앙을 가지고 있다.

 

10) 우리가 생각하는 십자가와는 다른 모양으로 어느 쪽으로도 같은 길이를 가진 +형태이다. 동방교회에서는 많이 나타나는 모양으로 그리스 정교 또한 이러한 모양의 십자가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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