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민주공화국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며 'Yes'맨?

2018. 3. 9. 17:17

 

오늘은 콩고민주공화국의 어두운 면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러나 이러니 이야기는 일반화시켜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분히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콩고민주공화국 현지인들과 친한 관계를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 7년 이상 메이드로 일했던 사람이 집에 있는 모든 것을 훔쳐서 도망하는 경우도 있다. 17년 동안 일하던 경리직원이 작은 사건으로 인해 해고 통지를 받고 그날 들어온 달러를 모두 들고 훔쳐간 사건도 있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감시가 소홀해 지면 물건을 주머니에 넣고 훔치는 행위도 비일비재하고 관리자는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이익을 취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이익을 챙긴다. 물건을 정상 무게보다 낮게 장부에 적고 차익을 챙기는 경우도 있고, 오래 되거나 상태가 좋지 못한 물건을 싼 값에 빨리 팔라고 하면 비싸게 팔고 차익을 챙기는 경우도 있다. 가격을 정해준 대로 팔지 않고 비싸게 팔아 차익을 넘기는 경우도 있으며 회사의 돈을 횡령하여 자신의 집을 건축하는 비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사람은 ‘yes’인이다! 일단 무슨 일을 시켜도 대부분은 ‘yes’라고 답한다. 심지어 하늘이 할 수 없는 일도.. ‘조금만 기다려,,, 내일이면 될 거야!’ 이런 말은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지만 내일은 빠르면 일주일 혹은 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일처리를 위해 선금을 내고 추가금을 내고, 또 나중에 추가금을 내야하는 경우가 다반사며 그나마 일이 해결되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도둑은 일상적인 손님이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도둑을 잡을 때도 모든 비용을 피해자가 내야 한다. 말로는 나중에 도둑을 잡으면 다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검찰은 우리가 준 돈을 먹고 도둑을 잡았을 것이고 도둑을 다시 협박해 돈을 또 챙겼을 것이다. 우리가 검찰에 항의하면 또 돈을 요구하고 그 돈의 가치에 따라 다시 도둑을 불러들일 것이냐가 판단된다. 도둑을 잡아도 돈은 받기 힘들다. 감옥에 도둑을 집어넣어도 도둑은 한 달 이내에 돈을 주고 감옥에서 나온다. 아프리카에 오는 모든 투자자들이나 사업가들은 많은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 습관 등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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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민주공화국 남자들은 면도날을 이용해 이발을 한다.

2018. 3. 9. 17:13

 

콩고민주공화국 현지인들은 면도날을 빗에 대고 빗질을 해가면서 이발을 한다. 흑인은 머리카락이 길게 자랄 수 없어서 빗질을 하면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이 잘린다고 한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태어날 때부터 곱슬머리여서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동부아프리카의 남자들은 레게머리를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서부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같은 나라에서는 남자들이 레게머리를 많이 한다. 남자들의 경우 이발소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시내의 이발소도 있지만 시내버스 정류장이나 한적한 마을에 간이 이발소가 들어서는 경우도 있다. 조잡한 그림으로 널빤지에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헤어스타일 형태를 그려놓지만 실제로는 머리를 완전히 밀거나 약간 남겨놓는 빡빡 형태의 머리가 일반적이다. 만약 우리와 같은 머리 형태를 원하면 분명코 쥐어뜯어 놓은 것처럼 만들어 놓아 나중에는 완전히 바리캉으로 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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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민주공화국 사람들은 왜 여러 대의 핸드폰을 들고 다닐까?

2018. 3. 9. 17:09


아프리카인들에게도 핸드폰은 신분과 부의 척도를 나타내는 상징이며 모든 생활의 중심에 있다. 우리는 지금 스마트폰 앱을 깔아 결재를 하는 데도 이용되고 있지만 아프리카인들은 아날로그든 스마트폰이든 관계없이 핸드폰을 통해 돈을 보내고 받는 은행기능까지 사용하고 있다. 아프리카인들이 우리보다 더 다양한 기능을 사용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아프리카인들에게 핸드폰은 중요한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얼마나 핸드폰이 중요하게 되었는가는 길거리의 광고를 보면 알 수 있다. 1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광고는 코카콜라에서 지원한 광고가 주를 이루어 온통 붉은 색이었으나 요즘은 통신회사에서 지원한 광고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사진 1>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 거리에서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는 모습. 핸드폰은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다. 2014127일 필자 촬영



아프리카에서는 일반적으로 핸드폰이 부의 상징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 수 있어 그 사람의 정체성까지 결정할 수도 있다. 한 가지 에피소드가 지금도 생각난다. 아프리카인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여자 친구를 만날 때도 좋은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하였다. 소개나 미팅을 할 때는 물론이고 처음 만날 때 어떤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노키아와 삼성이 가장 인기가 많은데 비용이 약 50만원에서 60만원 정도 하니까 결국 이런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친구는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약 1000만원 정도하는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당시 중국제 가짜 전화기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콩고민주공화국 와서 놀란 점 중 하나가 사람들이 핸드폰이 기본적으로 2-3개 가지고 다닌다는 점이다. 이유를 물어보니 통신이 불안정해서 한 통시사의 번호만 가지고 있으면 통신사가 문제가 있을 경우 다른 통신사의 번호로 전화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또 한가지 이유는 같은 통신사끼리 전화를 하면 비용이 아주 저렴하고 다른 통신사의 번호로 하면 아주 비싼 요금체계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유엔이나 NGO, 정부 고위관료들은 명함을 받을 때마다 전화번호가 4개에서 5개까지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한 대의 핸드폰도 운영하기가 어려운데 콩고민주공화국인들은 보통 2-3대가 기본이고 4대 이상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전화번호를 여러 개 운용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핸드폰에 심카드를 2개씩 넣을 수 있는 중국산 핸드폰을 이용하기도 한다. <사진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통화' 버튼이 두개가 있는 핸드폰으로 통화버튼 1은 첫 번째 심카드를, 통화버튼 2는 두 번째 심카드를 사용하는 통화버튼이다.


콩고민주공화국 마타디(Matadi)에서 35세의 회사원이 쥘(Jule)과 핸드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했다.

 


<사진 2> 예언자 시몬 킴방구의 여정 2014126일 필자 촬영



한 번은 기업노조연합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어요. 거기엔 다수의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다들 핸드폰을 책상에 올려놓았죠. 아니나 다를까 다들 스마트폰이었어요. 저는 전화가 오면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계속 끊어버렸죠. 창피했어요. 저도 나름 회사대표로 참석 했는데 말이죠. 저도 전화가 오면 액정을 밀어서 전화를 받고 싶어요. 하지만 스마트폰은 너무 비싸요. 제 한 달 급여를 다 투자해도 살 수가 없는 금액이에요. 몇 달 모아서 사고 싶지만 당장 월급은 마누라한테 다 들어가니마누라 몰래 급여를 가불 받아서 일단 사고 싶은데 그랬다간 아마 이혼당할지도 몰라요.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인들이 갖고 싶어하는 물건 1순위는 누가뭐래도 스마트폰이에요. 뭐랄까 좀 다른 느낌이니까 제 핸드폰이 제가 조금 잘나가는 위치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그러기까지는 콩고민주공화국에 들어와있는 외국인들의 역할이 컸어요. 너도 나도 스마트폰이니. 우리가 최고로 보는 핸드폰은 삼성이나 아이폰이에요. 하지만 비싸죠. 보통 중고시장도 형성되어 있지만 중고도 비싸요. 하지만 중고 삼성 스마트폰은 저희가 아예 접근도 못할 가격은 아니에요. 중국인들이 중고 스마트폰을 많이 가져오는 것 같더라고요. 핸드폰을 여러 가지 가지고 있는 이유는 통신사별로 통신상태가 안 좋을 때가 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보다콤이 안 터질 때 에어텔은 터지고, 에어텔이 안 터질 때, 보다콤은 터지는 식이죠. 그래서 통신사별로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어요.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은 3G가 서서히 자리잡고 있는 형국이에요. 아직 가격이 비싸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진 않지만 글쎄요. 조금씩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게 되겠죠? 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꼭 필요한 아이템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으니까. 페이스북 같은 거 해야 하잖아요.


저도 너무 스마트폰이 가지고 싶어서 중국산 짝퉁을 산 적이 있었어요. 기능은 잘 모르겠고, 어쨌든 밀어서 전화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 다만 한 달도 안 되어서 고장 나더라고요. 중국산 짝퉁은 정말 비추천이에요. 저희는 보통 몇 백 프랑에서부터 오천 프랑까지 선불카드를 사서 핸드폰 요금을 충전해요. 통신비가 싸지 않으니 자주 통화를 하지도 못 하죠. 급한 일이 있는데 제가 요금이 없을 때는 상대방에게 전화를 하고 끊어요. 그렇게 여러 번 하면 그쪽이 전화를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고 뭐 급한 사람이 우물 파는 거죠

 

1998년 초만 해도 킨샤사에서 핸드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매우 극소수로 일부였다. 2015년 현재 핸드폰은 통신수단으로, 편지와 문자, 음악감상, 동영상, 카메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돈을 보내는 은행역할을 함으로서 현대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00년대에는 모토롤라(Motorola)와 노키아(Nokia) 전화기가 주로 사용되었는데 아주 부유한 사람들만 가질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무선전신을 주로 이용하였다. 5년 뒤에 삼성, 엘지(LG), 애플 등 다른 회사 전화기들이 시장에 나왔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모토롤라와 노키아를 선호했다. 최근에는 아이부터 어른할 것 없이 좋은 품질의 핸드폰을 선호하고 있다.


2005년 초에 중국의 이중 심카드 전화기가 출시되어 킨샤사에 보급되었는데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비록 중국제품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메모리카드, 라디오, 카메라 기능을 갖춘 핸드폰을 선호하게 되었다.


킨샤사에서 요즘 핸드폰을 빼앗는 기막힌 사기행각도 벌어지고 있다. 킨샤사국립대학교(Université de Kinshasa: UNIKIN)에 다니는 클라우델(Claudel)이라는 학생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클라우델은 저녁 6시에 교회를 가는 길이었는데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서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클라우델을 보고 까이 와서 그는 반둔두(Bandundu) 주에서 살고 있는데 엄마가 아파 킨샤사에 왔고 엄마가 지금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다고 설명했다. 그는 엄마에게 드릴 약을 살 돈이 필요해서 고향에서 가지고 온 금을 팔려고 한다고 하며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그런데 그는 시골에서 와서 금값을 잘 모르니 클라우델이 좀 팔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는 클라우델을 믿으니 금을 가지고 약국에서 팔아 약을 좀 사다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약을 사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만약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대신 핸드폰을 두고 가도 좋다고 말했다. 클라우델은 핸드폰을 놓고 금이 든 가방을 열어보고 확인하지 않고 약국을 향했다. 몇 발자국을 떼어놓지도 않았는데 그는 도망했다고 한다. 소리를 지르면서 그를 쫒았지만 그를 발견하지 못했고 결국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사진 3> 마타디 시내의 핸드폰 판매대 진열장. 2014725일 필자 촬영



스마트폰을 통한 페이스북, 홧츠앱(Whatsapp), 이모(imo)같은 소셜 네크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SNS)의 발전으로 통신은 더욱 다양하게 발전했다.


보다콤, 오렌지(Orange), 아프리셀(Africell), 에어텔(Airtel) 같은 통신회사들은 다른 회사의 네트워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회사 네트워크를 사용하도록 강요한다. 따라서 만약 위의 회사들의 심카드를 사면 같은 회사끼리 전화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주 저렴하지만 다른 회사 심카드를 가지고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면 비용을 비싸게 청구한다. 그래서 콩고민주공화국 사람들은 핸드폰을 2-3개씩 가지고 다니거나 이중 심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중국 및 노키아 핸드폰을 사용한다.




<사진 4> 콩고민주공화국 마타디(Matadi) 시내의 핸드폰 판매대에 있는 가짜 핸드폰 2014725일 필자 촬영



콩고민주공화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통신회사는 오렌지다 어떤 사람들은 아프리셀을 이용하는데 같은 회사 통신망을 이용하면 가장 저렴하기 때문이다. 에어텔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주로 시골지역에 연고지가 있는 사람들이다. 에어텔은 시골 지역까지 촘촘하게 통신망을 깔아 통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킨샤사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시골에서 올라와 사는 사람들로 아직도 가족들이 시골에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메시지를 보낼 때 사람들은 정확하게 문법에 맞게 문장을 만들어서 보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집에 있어(je suis à la maison)’라는 문장을 ‘g s8 a la mzon’라고 쓰기 때문에 일종의 은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물론 발음도 다르다.


최근에는 안드로이드 또는 윈도우 스마트폰을 좋아한다. 삼성, 노키아, 모토롤라 등의 제품이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이다. 오렌지 통신회사가 가장 잘 나가는 회사로 기지국의 네트워크가 잘 만들어져 통화품질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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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민주공화국 사람은 생선이 없으면 밥을 안 먹는다!

2018. 3. 9. 16:28

 

콩고민주공화국인 사람들은 바다 생선을 아주 좋아한다. 콩고 강을 접하고 있어 민물 생선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작지만 대서양을 접하고 있어 바다 생선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콩고민주공화국인들이 식사 때마다 생선을 먹을 만큼 생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콩고민주공화국인들의 바다 생선 사랑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절대적이다




콩고민주공화국인들은 닭고기나, 소고기보다는 생선을 훨씬 더 좋아하며 끼니때마나 생선을 먹지 못하면 식사를 잘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는 대체로 생선을 튀겨 먹지만 콩고민주공화국인들은 튀기고, 삶고, 졸이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리하여 즐기고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생선을 냉동상태로 수입하여 팔고 있는 회사는 레바논, 벨기에, 한국 등 대부분 외국인 회사들이다


콩고민주공화국인들이 자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바다 생선을 주식으로 삼게 된 것은 콩고민주공화국의 자원과 외국 회사의 마케팅 전략이 중요한 이유였다. 콩고민주공화국인의 생선 사랑을 살펴보면 콩고민주공화국의 식문화뿐만 아니라 외국의 영향력에 의해 어떻게 식량주권이 영향을 받았는지 조망할 수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피오디(mpiodi), 음봉고(mbongo), 하케(hake) 등의 제품을 판매를 하고 있는데, 피오디와 음봉고는 우리나라에선 전갱이 같은 생선종류이고, 하케는 동태 같은 종류의 생선이다. 뿔레는 닭고기이다. 보통 생선 한 박스는 30kg으로 10kg3개의 묶음이 들어가 있는데 위에 사진 속에 카톤(carton)은 박스가격이고 라메(rame)3개씩 나누어진 것 중 하나의 가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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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민주공화국에서도 졸업식 뒤풀이에 하얀 가루를 뿌리고 축하한다!

2018. 3. 9. 14:43



콩고민주공화국에는 대학교는 졸업식 세리머니가 있으나 중등학교에서는 없다. 그러나 콩고민주공화국 전역의 중등학교에서 학생은 물론 부모들도 머리에 하얀 가루를 뿌리면서 축하를 한다. 특이한 점은 부모도 하얀 가루를 뿌리면서 축하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요즘 유행하는 교복 찢기, 옷 벗기기, 속옷 차림으로 바닷물 뛰어들기, 팬티만 입고 질주하기, 머리에 케첩 뿌리기…. 등등은 없다. 콩고민주공화국인들이 과거에는 밀가루를 많이 뿌렸는데 요즘엔 분말 가루가 가격이 싸져서 분말 가루를 많이 뿌린다.


학기는 9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6월이나 7월에 끝난다. 학생들은 청색과 하얀색으로 된 교복을 입어야 하면 finalists, pre-frinalists, 그리고 일반적인 과정으로 나누어진다. Finalis는 졸업반 학생으로 6학년 생이며, pre-frinalists은 5학년 생이고 나머지는 일반적인 과정으로 특별한 이름은 없다. 링갈라어로 학생들을 ‘Bana class’라고 부르는데 ‘Children of the Class’라는 뜻을 갖고 있다.


간호학교는 고등학교 3학년생이나 5학년 생을 학생으로 받는다.

어떤 때는 수험생들이 합격했을 경우에 가루를 공중에 뿌리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은 성공을 축하하고 친구, 부모님들과 기쁨을 함께 하는 의미가 있다. 가루를 몸에 뿌린 사람은 성공했다는 표시로 자긍심을 갖게 된다. 흰 가루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6학년 졸업학년 학생은 2개의 시험인 구두시험과 필기시험 중 1개과 국가시험에 합격해야 졸업할 수 있다. 국가시험과 필기시험은 정부가 주관하는 중요한 시험 중 하나다. 국가 시험은 모든 시험의 마지막 단계에서 치러진다.


마지막 시험 다음에 약 3주에서 5주간 교육부의 결정을 기다린다. 그리고 통신회사를 통해, 주로 보다콤(Vodacom)을 통해 그해 시험결과를 발표한다.


시험결과에서 합격을 받으면 기뻐하며 노래를 부르고 길거리로 걸어가서 흰 가루를 뒤집어 쓰고 함께 뛰어다닌다.


콩고민주공화국 마타디(Matadi)에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및 분석 대학(Institut Supérieur d'Informatique, Programmation et Analyse: ISIPA)의 렐로(Lelo) 교수는 현재 53세인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음.. 글쎄요 우선 제가 어렸을 때는 그런 의식이 없었어요.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이 천 년도 초반 정도부터 그러한 문화가 생긴 것 같아요. 이유라… 뭐라고 설명 드릴 수가 없는데 그냥 하나의 통과의례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한국에도 그런 것이 있지 않나요?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하는 의식들.


보통 중학교나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가장 많이들 그렇게 해요. 대학교 졸업식에는 물론 있긴 하지만 많이들 하진 않아요. 보통 밀가루나 파우더를 사용하는데 밀가루 같은 경우엔 한 봉지에 오백 프랑 정도 한다고 생각하면 되고 그 정도면 충분히 뿌리고 졸업식을 즐길 수 있죠. 많이들 밀가루를 사용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의식은 졸업식이 끝난 후 집까지 이어지는데 제 첫 째 녀석이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집에 와서 제 얼굴에 밀가루를 뿌리더군요. 저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그 녀석을 교복을 찢어버렸어요. 이제 대학에 가야 하니까 더 이상 교복은 필요 없잖아요?


어쨌든 흰 가루를 뿌리는 것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이 의식을 싫어하는 애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 애들에게는 뿌리지 않는다고 해요. 기분 좋은 졸업식에 굳이 감정 상할 필요 없으니까. 그냥 축하의 의미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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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i oa tunya by 모륜

2015. 4. 25. 16:54

Mosi oa tunya

by 모륜


아프리카.



모시 오아 투냐(Mosi oa tunya)는 현재의 빅토리아 폭포를 말한다. ‘천둥의 안개’라는 뜻의 이 단어는, 과거 빅토리아 폭포의 거대함을 나타낸다. 하지만 1855년 폭포를 발견한 리빙스턴은 이곳에 영국여왕의 이름을 붙이게 된다. 그 후 모시 오아 투냐는 빅토리아 폭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빅토리아 폭포의 거대함을 잊을 수 없던 리빙스턴은 첫 방문 이후, 예술가이며 탐험가인 토마스 바이네스(Thomas baines)와 함께 이곳을 찾아 그림으로 나타내, 세상에 거대한 폭포의 모습을 알리게 된다. 그림 속에 등장한 세 그루의 나무는 아직까지 현존함으로써 빅토리아 폭포의 오랜 시간을 보여준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만 년 전, 갑작스런 지각 변동으로 인해 잠베지 강의 상류가 솟아오른다. 이는 잠베지 강의 물줄기를 바꿔놓았고, 거대한 폭포를 이루며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게 된다. 이는 현재의 빅토리아 폭포를 만들어냈다.  


빅토리아 폭포는 아프리카 4대강 중 하나인 잠베지 강의 중류에 위치하고 있다. 잠베지 강은 길이가 2,470km에 이르며, 잠비아와 앙골라 고원에서 시작하여 모잠비크 해협의 인도양으로 흘러들어간다. 이곳은 크기에 알맞게 ‘위대한 강’이라는 뜻을 지니며, 잠비아와 짐바브웨를 흐르고 있다. 폭이 최대 1,700미터나 되는 강이 깍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서 최대 108m의 낙차를 이루며 반경 20미터에 불과한 웅덩이로 쏟아져 내린다. 이는 깊이가 나이아가라 폭포의 2배 이상임을 깨닫게 해주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웅덩이로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물은 낙차에 의해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킨다. 폭포소리는 천둥소리와 같으며 물보라가 공중으로 305m이상 튀어 올라 500m이상의 기둥이 형성되어 사방에 흩뿌려진 물방울들 덕분에 폭포주변으로 울창한 열대우림이 펼쳐진다. 또한 폭포의 수량이 60%이상 흐를 땐, 곳곳에서 많은 수의 무지개를 감상할 수 있다.

빅토리아 폭포는 항상 거대한 한 장의 폭포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5개의 폭포가 모여 만들어 졌기 때문에 Victoria falls라는 복수의 이름을 지닌다. 폭포의 동쪽 끝에는 이스턴 캐터랙트(Eastern Cataract)가 존재한다. 이곳은 암체어라 불리는 저지대와 경계를 이루며, 이는 주로 물이 부족한 건기에 나타난다. 암체어의 서쪽엔  레인보우폭포(Rainbow)가 뻗어있고, 그 옆에는



또 다른 절벽인 말편자모양의 호스슈폭포(Horseshoe)를 이루고 있다. 과거 리빙스턴이라 명칭 된 섬과 보아루카 섬 사이가 균열되어 형성된 메인폭포(main)가 있으며, 데빌스 캐터랙트(Debil's Cataract)라는 좁은 절벽, 이렇게 5개의 폭포가 존재한다.

11월말에서 4월 우기 기간에 이곳을 방문하면 1분마다 5억 리터의 물이 떨어져 한 장의 커튼과 같은 폭포를 감상할 수 있다. 반면 9월 건기 시, 1분에 천만 리터의 물이 흘러 여러 개의 폭포로 나뉘어 떨어지는 작은 폭포들을 각각 관찰할 수 있다. 이곳을 찾을 땐, 항상 단단한 대비를 해야 한다. 폭포에 가까워질수록 물이 튀어 오르기 때문에 우비와 우산준비는 필수이다.

빅토리아 폭포를 즐기는 방법은 여럿이다. 먼저 짐바브웨에서 출발하게 되는 방법은 폭포를 따라 산책로가 이어져 있다. 울창한 산책로를 따라가면 각각 뷰포인트들이 존재한다. 폭포입구에서는 우비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대여소가 마련되어 있다. 잠비아도 마찬가지이다. 산책로를 따라 가다 보면 짐바브웨와 또 다른 빅토리아 폭포를 좀 더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다.

빅토리아 폭포를 눈으로 감상하는 것도 훌륭하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고 폭포를 제대로 즐기기를 원한다면 번지와


래프팅 그리고 크루즈를 추천하고 싶다. 빅토리아 폭포 하류에는 짐바브웨와 잠비아를 잇는 빅토리아 폭포다리 (잠베지다리)가 놓여있다. 이는 카이로에서 케이프타운까지 영국의 종단정책을 위해 1905년 완성되었지만, 지금 현재 이곳에선 번지점프가 주를 이룬다. 111미터 높이의 다리위에서 검은 물살이 흐르는 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은 레포츠 마니아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하다. 또한 잠베지 강의 거친 물살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래프팅이 존재하는데, 1번부터 18번까지 다양한 코스가 있어 급격한 물살에 몸을 맡기는 아찔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모든 활동을 마치고 해가 질 때 쯤, 선셋크루즈를 즐길 수 있다. 부드러운 물살과 함께 하루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따뜻한 햇살은 강을 비추고, 강 주위의 동물들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된다.



폭포의 상류엔 아주 오래되고 거대한 바오밥 나무가 존재한다. 둘레 16미터, 높이 20미터, 그리고 수령은 1500년이 된 이 나무는 현재 정부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1800년대에는 이 나무를 모든 이의 약속장소로 이용할 정도로 유명했다. 아프리카 전설에 따르면 신이 노해서 나무를 거꾸로 박았다는 속설을 가지고 있다. 낙엽이 없는 건기가 되면 뿌리가 지상에 나와 있는 것 같아 정말 그 속설이 사실처럼 느껴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거대한 물줄기와 그 물줄기를 느끼고 싶다면 빅토리아 폭포는 분명 엄청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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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 by 소진

2015. 4. 25. 16:51

킬리만자로


by 소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국립공원


킬리만자로, 스와힐리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그 어원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killima(작은 언덕)와 njaro(은자로 신)가 합쳐져서 ‘은자로 신이 사는 작은 언덕’, 워낙 돌출 되어 지표로서 사용했기 때문에 ‘여행자들의 산’, 그리고 마사이어로 물을 뜻하는 ngare가 합쳐져 ‘물의 산’ 이라는 여러 가지 어원을 갖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단일산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위치는 적도의 남쪽으로 약 330km 떨어진 탄자니아와 케냐의 경계부근으로, 적도에서 단지 3도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 정상은 빙하와 눈으로 뒤덮여 있다. 최정상은 직경 2.5km의 분화구인 키보(5895m)로, 맑은 날 100마일(약 160km)이상 떨어진 곳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휴화산과(키보 5895m, 마웬지 5149m) 하나의 사화산(쉬라 3962m)으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 화산 폭발로 생성된 킬리만자로는 지구의 지각을 통해 폭발한 것 중 가장 큰 화산이다.

킬리만자로 국립공원은 1973년에 확정 되었고, 1977년, 공식적으로 관광을 위해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1989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유산 등록지로 선언 되었다. 공원 본부는 마랑구에 있으며, 모시로부터 41km, 킬리만자로 국제공항으로부터 8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등반 역사

1887년 독일인 지리학자인 한스 마이어(H. Mayer)가 처음 등정했다. 당시 그의 포터 라우오(Lauwo)와 함께.


천혜의 자연환경

킬리만자로는 몬타네 숲, 문 랜드, 사막에 눈과 얼음까지 지구의 거의 모든 환경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라 할 수 있다. 산 정상에서는 박테리아부터 동물에 이르기까지 최초의 진화 과정을 담고 있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킬리만자로의 자연환경>



<킬리만자로의 열대 우림>



킬리만자로에서 가장 신비로운 빙하

킬리만자로의 빙하 역사는 약 만 2천년이나 되는데 이런 만년설이 서서히 녹고 있다. 15년 전에는 1/4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단지 두 곳만 남아 있다. 가뭄과 지구 온난화로 산이 사막화 되고 있으며 먼지바람이 불고 풀이 사라졌다. 약 2020년 정도면 빙하가 사라질 것이라 한다.



<킬리만자로의 만년설 키보(5985m)>



킬리만자로의 매력들


◦ 세개의 봉우리

  키보: 가장 높은 봉우리

  마웬지: 매우 도전적이고 클라이밍 기술이 필요한 바위투성이 산.

  쉬라: 약 750년 전에 주저앉은 가장 오래된 봉우리.

◦ 쉬라 고원 - 아름다운 풍경의 독립적인 고원

◦ 몬타네 숲 - 1800~2800m의 킬리만자로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특히 아름다운 야생지대.

◦ 새 - 얼룩 까마귀, 산 지빠귀 등 다양한 새들이 고지에 산다.

◦ 문화유적 - 역사적으로 차가 부족의 문화적인 의식행사가 있고, 서쪽 일부는 마사이족의 의식 행사가 있다.

◦ 찰라 호수 - 공원 밖에 있음에도 킬리만자로에서 시작된 지하의 증기를 이용하여 물을 끌어 올리기 때문에 지질학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 동물 - 일반적으로 동물을 관찰하기가 어렵지만, 얼룩 콜럼버스 원숭이, 파란 원숭이, 듀이커(영양종류), 쥐 같은 작은 포유동물 등 다양한 영장류들을 볼 수 있다.

등반 Tip

◦ 시즌 - 1~2월, 6월말~10월 중순까지의 건조기에 트레킹하기 좋다.

◦ 트레킹 준비물 - 배낭, 스틱, 윈드자켓, 보온자켓, 판쵸, 티셔츠, 긴 바지, 짧은 바지, 모자, 헤드랜턴(예비전지), 등산화, 썬글라스, 침낭(동계용), 물병



보너스


<킬리만자로 등반 루트>



<마랑구 루트 입구>



<포터들과 등산객들의 모습>



연락처

P.O.BOX 96, Maran gu MOSHI, Tanzania

Tel: +255-27-2756602

Fax: +255-27-2756606

E-mail: kinapa@habari.co.tz   Web: www.tanzaniaparks.com

입장료

16세 이상: 60$,

5~16세: 10$

5세 미만: 무료

숙박요금

마랑구 루트: 산장 50$

론가이, 마차메, 론드로시, 움베, 음웨카 산장: 캠핑 40$

5~16세 캠핑 요금: 10$

가이드 요금

워킹하는 시간동안 10$

외부에서 워킹하는 시간동안 15$



킬리만자로에 얽힌 이야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킬리만자로를 그녀의 독일 손자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다는 이야기는 전해져 오고 있다. 왜냐하면 독일 황제가 갖고 있는 동 아프리카 지역에는 눈이 있는 봉우리가 없다며 불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처음부분.

‘킬리만자로 정상 부근에는 얼어 죽은 한 마리의 표범의 시체가 있다.

이처럼 높은 곳에서 표범이 무엇을 찾아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고 작사했다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 때

그것을 위안해줄 아무것도 없는 보잘것없는 세상을

그런 세상을 새삼스레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건

사랑 때문이라 구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고독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사랑만큼 고독해진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지

너는 귀뚜라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귀뚜라미를 사랑 한다

너는 라일락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라일락을 사랑 한다

너는 밤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밤을 사랑 한다 그리고 또 나는 사랑 한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비어있는 내 청춘에 건배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거야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

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

아무리 깊은 밤일지라도 한 가닥 불빛으로 나는 남으리

메마르고 타버린 땅일지라도

한줄기 맑은 물소리로 나는 남으리

거센 폭풍우 초목을 휩쓸어도

꺽이지 않는 한그루 나무 되리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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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by 희영

2015. 4. 25. 16:44

 탄자니아


by 희영


아프리카.

 

 


세렝게티 국립공원
세렌게티는 동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이다. 동물원에 익숙한 도시인들, 야생동물이라고는 비둘기, 쥐, 들고양이가 전부인 환경에서 살아온 우리들이 지프차에 발이 묶인 채 동물들의 영역을 방문하게 된다. 세렌게티에서는 오히려 인간이 구경거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유자적하게 풀을 뜯고 있는 동물들을 지나치며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과 아프리카 특유의 파란 하늘 아래를 달렸던 기억. ‘자유’에 한 발짝 더 다가간 그 느낌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세렌게티 국립공원은 탄자니아에 위치한 거대한 생태보호구역이다. 서울특별시 면적의 20배에 달하는 거대한 곳으로 면적이 무려 12,950 제곱킬로미터이다. 아프리카 사바나 생태계를 대표하는 구역으로, 남쪽의 응고로응고로, 북쪽 켄야에 위치한 마사이마라와 함께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를 형성한다. 200만 마리가 넘는 물소, 50만 마리가 넘는 톰슨가젤의 서식처인 세렌게티는, 서쪽으로는 빅토리아 호수, 남쪽으로는 이바시 호수, 동쪽으로는 Great Rift Valley가 위치하여 외부로부터 차단된 지형이다. 매년 이루어지는 동물들의 대이동은 전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장관이다. 강수량에 따라 변화하는 초목, 초목의 성장을 쫓아 이동하는 초식동물들, 그리고 이들을 쫓는 육식동물의 이동은 생명의 거대한 순환을 보여준다.
 


동물

 

 

동물원에서만 보아온 사자를 야생에서 직접 볼 수 있다.

세렌게티의 바람으로 자연 스타일링 된 사자의 모습에 카리스마가 넘친다.

   


 
사파리를 하면서 수천마리의 물소를 지나친다.

처음에는 무척 신기해하다가도, 하루의 사파리 후에는 물소 때의 모습이 어느 세 눈에 익는다.

 

 

 

무리지어 이동하는 얼룩말들. 의외로 포악한 성격을 갖고 있어 사육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섹시한 엉덩이는 매력 만점이다.

   

세렌게티에는 30 종이 넘는 초식동물과 500 종이 넘는 새가 서식하고 있다. 우기인 11월에서 5월 사이에는 수천마리의 물소와 얼룩말이 이동한다. 세렌게티의 초원이 야생 동물들의 대이동의 출발지가 되는 셈이다. 5월에 초원의 잔디가 건조해 먹이가 부족해지면 물소들의 이동이 시작된다. 이 시기는 물소들의 발정기간이기도 하기 때문에 물소들은 서로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혈전을 벌인다. 얼마 후 물소는 물을 찾아 북쪽으로 이동하는데, 이어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두 방향으로 나누어진다. 한 쪽은 북동쪽으로, 한 쪽은 북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일단 시작된 동물들의 이동은 멈출 수 없다. 마라 강을 건너면서 수많은 물소가 물에 빠져 죽고, 이동 과정에서 약자는 사냥되어 오직 건강한 물소만이 살아남는, 자연 선택의 법칙이 적용된다.


얼룩말도 자연히 대이동의 일부이다. 숫자는 물소의 1/8에 불과하지만, 대략 12 마리 정도 되는 무리를 유지하면서 이동한다. 사자, 치타, 하이에나, 사냥개들이 물소와 얼룩말의 뒤를 쫓는다. 11월 달에 다시 북쪽의 식량이 동이 나면 초식 동물들은 다시 그동안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 남쪽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새끼를 낳고 번식을 한 물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5월에는 북쪽으로 이동이 반복된다.

 

 

 

소심한 성격의 노루 때에서도 우아함이 느껴진다.


세렌게티 북쪽으로 가면 그란트 가젤(Grant's gazelle)과 톰슨가젤을 볼 수 있고, 간혹가다 토피(topi)와 콩고니(kongoni)도 보인다. 타조와 다양한 종류의 새들, 그리고 워트 혹도도 곳곳에 숨어있다. 하이레이즈(hyraze)와 도마뱀들, 그리고 다양한 새들이 공원 내부에 서식하고 있다. 아카시아의 가시를 피해 연한 잎사귀를 뜯어먹는 기린이나, 천천히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버팔로 무리 틈을 누비다보면 생명이 있는 그대로 살아 숨쉬는 세렌게티를 느낄 수 있다. 밤에는 표범과 하이에나의 울음소리가 들려옥, 사자들은 위험 있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역사

세렌게티는 1920년대에 알려지기 시작한 후 1951년 공식적으로 국립공원이 되었다. 1913년 스튜워드 에드워드 화이트(Stewart Edward White)가 백인으로서 처음으로 세렌게티에 발을 들였는데, 마사이족은 이보다 200여년 앞서 세렌게티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북쪽에서 내려와 소를 방목하며 부족단위로 생활하였다. 세렌게티라는 명칭은 마사이어로 ‘끝없는 평원’이라는 뜻이다.

 

 

화려한 의상을 두르고 있는 마사이족.

그들의 전통 의상도 모두 made in China 라고 한다. 비록 옷감의 원산지는 세계화되었지만,

색감과 장신구에서 마사이족의 미학을 접할 수 있다.

 


원색의 장신구, 옷감을 즐겨 사용하는 마사이족. 귀에 아주 큰 구멍을 뚫기도 한다.

 

 


20세기 초반 시작된 유럽 국가들의 아프리카 식민 정치의 일환으로 세렌게티는 독일의 치하에 놓였다. 독일 식민 정부는 1921년 세렌게티를 보호구역으로 설정했다. 하지만 지프차와 함께 몰려온 밀렵꾼과 사냥꾼들에 의하여 동물들이 속수무책으로 도살당하고,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에 Bernhard Grizmek과 그의 아들 Michael Grizmek의 노력으로 세렌게티는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들이 찍은 다큐멘터리와 동일 제목의 책 ‘Serengeti Shall Not Die'는 자연보호 운동의 시초로써 자연환경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Grizmek 부자의 노력으로 세렌게티에 서식하는 동물들의 운명이 국제적인 관심사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고, 아름다운 세렌게티의 본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서든 세렌게티에서 행해졌던 무차별적 사냥이 금지되었다.

 

또한 기존에 세렌게티에 정착한 마사이족이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이유로 이들 역시 세렌게티로의 출입이 금지되고 응고로응고로 분화구로 강제 이전되었는데, 이것이 과연 합당한 처사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마사이족은 백인들이 주도권을 잡기 이전부터 주변 환경과 균형을 이루며 살아왔었고, 식민 정부 입장에서는 그런 마사이족을 내쫓을 자연 보호라는 훌륭한 구실을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야생동물의 숫자는 서서히 회복되었고, 과거 상아 밀렵꾼들에 의해 세렌게티에서 전멸되다시피 한 코끼리도 건강한 숫자가 유지되고 있다.


세렌게티는 탄자니아의 첫 국립공원으로, 198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매 년 전 세계에서 사진가, 과학자, 관광객 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을 갖고 세렌게티를 찾는다. 기후, 강수량에 따른 대지의 변화와 동물들의 대이동, 번식 시기에 따라 세렌게티의 모습은 매달, 매주, 매일 바뀐다. 언제 어느 지역을 찾아도 세렌게티의 다채로운 매력은 모든 이를 매료시킨다.

 

 

 

응고로응고로 보호구역

응고로응고로는 1959년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세렌게티 국립공원으로부터 분리되었다. 197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응고로응고로는 탄자니아 유일한 보호구역으로써, 이는 생태계를 보호함과 동시에 인간의 주거를 허용한다는 의미로, 마사이족의 생활터전이기도하다. 따라서 최소한의 경작이나 방목 활동만이 허용된다. 세렌게티 생태계의 일부로 12월에는 남쪽에서 물소와 얼룩말 때게 내려오고, 6월달에는 다시 북쪽으로 이동한다. 강수량에 따라 변동하는 식량을 따라 동물들은 응고로응고로 전 지역을 누비게 된다. 25,000마리가 넘는 큰 동물들의 서식지로써, 은두투 Ndutu 호수 주변에는 치타와 사자가 많이 살고 있다. 또한 응고로응고로 크레이터는 아프리카 전역 중 가장 높은 밀도의 야생 동물 서식지로 유명하다. 검은 코뿔소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지만, 하마는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소, 얼룩말, 가젤 등 다양한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세렌게티 평원의 동물들의 대이동에 따라 6월에서 12월 사이에는 수많은 동물들을 볼 수 있다.


응고로응고로 분화구는 깊이가 610 미터, 바닥이 260 제곱킬로미터로, 지구상 가장 큰 칼데라이다. 칼데라는 분화구의 일종으로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다. 용암이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면서 화산 내부에 빈 공간이 생기고, 외벽이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원형의 균열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내부로 무너져 내려 칼데라가 생긴다. 250만 년 전 현재 킬리만자로 크기의 활화산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것이 폭파하면서 생긴 칼데라가 지금 현재의 응고로응고로이다.

 

 

 

응고로응고로에서 코끼리 가족을 볼 수 있었다.

 

 


 
만나기 힘들다는 치타를 볼 수 있었다.

지구상 가장 빠른 포유류의 프라이드와 고양이 특유의 우아함과 도도함이 느껴지는 워킹을 선보였다.

 

  

      
아프리카에서는 타조 고기, 타조 깃털, 타조 알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야생의 타조는 농장의 타조보다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응고로응고로의 플라밍코들은 발레리나의 군무를 연상시켰다.


응고로응고로 새벽 사파리는 흡사 시간여행 같다. 자욱한 안개는 분화구 가득 가라앉아 사방을 둘러싼다. 아프리카 어디서도 응고로응고로만큼 다양한 동물들이 한 곳에 밀집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기 힘들다. 사방이 분화구 벽으로 둘러싸인 초원에서 코끼리 가족, 치타, 플라밍고 무리, 물소, 가젤 때를 가까이서 보는 것을 잊지 못할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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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크와 유적 by 지연

2015. 4. 25. 16:30

 타크와 유적


by 지연


 아프리카.

 

 

 

타크와 유적지의 모스크

 

한 때 무역이 번성했다는 타크와의 유적을 찾아 나섰다. 500년 전 항해사들이 지나다녔을 그 수로를 그대로 따라 망그로브 나무로 뒤덮인 섬들 사이사이를 해쳐 나가는 시간 자체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의식 같았다. 바람이 밀어주는 다우선을 타고 유적지의 입구까지 낭만적인 기분에 푹 젖은 우리는, 섬 육지까지 배가 들어서지 못한다는 사실에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가방을 머리 위에 얹고, 허리까지 올라오는 늪지대를 걸어 지나간 후에야 타크와 유적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타크와 유적은 만다섬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고, 라무 타운에서부터 배로 30분 거리이다. 타크와 유적은 15세기에서 16세기 동안 번성했다가 17세기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져 지금은 폐허가 된 스와힐리 무역 도시의 잔재이다. 이 유적이 중요한 것은 시기적인 이유도 있지만 다량의 유적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 온전히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키블라 벽(메카 방향을 향한 벽) 위에 기둥이 세워진 모스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이 기둥은 벽 아래에 있는 셰이크(통치자)의 무덤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웃한 섬에서 종교적인 행사를 치르기 위해 이곳 타크와로 일년에 두 번 방문을 하기 때문이다.


타크와의 유적은 해수면 높이에 위치하고 있어 밖에서는 이 섬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인도양을 면한 해변에서 섬을 바라보면 언덕 뒤편에 있는 타크와 유적은 시야에서 가려지기 때문에 외부의 적은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섬 주변이 얕은 바다여서 많은 배들이 접근하기 힘들고, 따라서 바닥이 얕은 배들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자연적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린 이들의 지혜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타크와는 결국 17세기에 멸망하고 만다. 안타깝게도 그 정확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지만, 해수면이 올라가면서 담수의 소금화로 식수 조달이 불가능해지고, 동시에 파테인들과의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이 유적은 지금은 대중들에게 완전 공개되어 있으며 피크닉이나 캠핑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외딴 섬에 이런 유적지가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300년 동안 베일에 감추어져 있었던 이 타크와 유적을 방문한 첫 백인 탐험가는 무엇을 느꼈을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려진 벽화마저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는 모습은 마치 타임캡슐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였다. 한 때 스와힐리 문명과 아랍 문명이 뒤섞이며 번영을 이루었을 그들은 이 유적만을 남긴 채 어디로 사라져간 것일까?
왠지 쓸쓸함을 풍기는, 과거의 잔상이 가득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라무 해안의 다우선


 

 다우선


수세기동안 아랍인들은 인도양에서 동아프리카로 항해를 하였다. 이 때 쓰였던 배가 다우(Dhow)라 불리는 외돛 범선이다. 엔진이나 노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바람에 의한 동력만으로 항해를 하는 배인데, 다양한 화물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의 다우가 있다. 돛이 하나 밖에 없어서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돛의 각도를 이용하여 바람을 받는 방향을 조종할 수 있고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심지어는 맞바람을 맞을 때에도 지그재그로 움직이면서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물론, 시간은 오래 걸린다. 다우선은 적게는 4명에서 많게는 30명까지 탈 수 있다. 아랍인들은 계절풍의 도움을 받아 매년 12월부터 5월 사이에 동아프리카로 건너와서 6월부터 10월 사이에 아라비아와 북인도양 인근으로 돌아갔다. 동아프리카로 올 때는 이국적인 대추야자, 카펫, 향료 등을 아라비아와 인도에서 싣고 와서 돌아갈 때에는 망그로브 나무, 곡식, 금, 상아 그리고 아랍이 노예무역을 할 당시에는 노예도 싣고 돌아갔다.


최근에 현대적인 선박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라무섬이나 잔지바르 같은 곳에서는 비록 관광용일지라도 항구에 정박한 다우선들을 볼 수 있다. 부두 위에는 열심히 돛을 손질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항해는 바람과 물살, 뱃사람의 노련한 힘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다우선의 역사


혹자는 다우를 모든 배들 중에서 가장 우아하다고 했다. 이러한 다우를 통해서 인도양의 무역이 이루어졌고, 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이어주는 주된 교통수단이었다.


다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에리트리아해 항해지』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다우는 인도양 서부와 홍해에서 일반적인 무역수단이었다. 일례로 포르투갈의 탐험가인 바스코 다 가마가 마톤도니섬에 도착했을 때 그 곳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카누와 다우를 만드는 전문가들이었다. 다 가마는 이 사람들의 다우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다우 무역의 시대가 지남에 따라 다우 문화가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지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대를 이어 내려오던 다우에 대한 지식과 전설들도 서서히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단지 가끔씩 지나가버린 아름답고 로맨틱한 시절에 대한 회상을 하기 위해서 다우를 찾는다. 지금은 몇 대의 다우만이 케냐 해안에 남아 있을 뿐이고, 이마저도 대부분이 관광용이다.

 

 

 

 

라무시의 해안 모습.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우를 만드는 것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수 세기에 걸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 전통이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15세기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다우는 단 한 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코코넛 끈과 나무 핀으로만 엮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제는 다우제작의 맥이 끊겨가고 있지만 다 가마가 600년 전에 만났던 마톤도니 섬에는 아직도 그 기술을 증명할 수 있는 장인이 살고 있다. 이 섬에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가는 다우 만들기를 관람하고 간다. 장인들은 전통적인 도구들을 사용하여 나무를 자르거나 조각을 한다. 음감보나무라는 매우 단단한 나무를 주로 사용하여 제작하는데, 최근에는 이 나무를 베어가려면 산림청에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


현대의 최신 항법과 디젤 엔진이 장착된 선박들 때문에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오가던 다우 무역은 이제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 그래서 천년 가까이 지속되어오던 모습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사실상 다우 위에서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었던 만큼, 현대 항해술의 발달을 안타까워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선원들은 갑판 위에서 날씨에 상관없이 자야했고 규율은 매우 엄격했다. 무슬림 기도 시간은 철저하게 지켜졌고 여성들은 갑판 아래에만 갇혀서 모든 여행 기간을 보내야 했다니,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안전하고 오고갈 수 있는 지금의 모습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스톤 타운


라무 올드 타운은 전통적인 기능을 간직하면서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되고 보존이 잘 되어있는 스와힐리 주거지역이다. 산호석과 망그로브 나무로 단순한 모양새로 지어진 시가지는 안뜰, 베란다, 정교하게 조각된 문 등의 독특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라무는 19세기부터 주요한 무슬림 종교 축제를 주관해오고 있으며, 학술적으로 이슬람과 스와힐리 문명 연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라무 박물관 위에서 바라본 시내 전경

 


이곳은 또한 여행을 하기에도 매우 적합한 곳이다. 대다수의 건물들이 라무 섬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18세기에 지어졌고, 정교하게 조각된 목재문과 좁은 골목길, 높은 건물들은 마음 편히 유유자적하면서 걸을 수 있는 산책코스이기도 하다.

 

 

 

응고로응고로의 플라밍코들은 발레리나의 군무를 연상시켰다.

 


응고로응고로 새벽 사파리는 흡사 시간여행 같다. 자욱한 안개는 분화구 가득 가라앉아 사방을 둘러싼다. 아프리카 어디서도 응고로응고로만큼 다양한 동물들이 한 곳에 밀집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기 힘들다. 사방이 분화구 벽으로 둘러싸인 초원에서 코끼리 가족, 치타, 플라밍고 무리, 물소, 가젤 때를 가까이서 보는 것을 잊지 못할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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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케냐, 그리고 나이로비 by 기웅

2015. 4. 25. 15:40

 

 

아프리카, 케냐, 그리고 나이로비

 

 

by 기웅

 

아프리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덥다, 검다, 못산다, 야생, 열악하다, 불쌍하다. 이런 단어들은 아닌지. 그러면 케냐에 대한 느낌은 어떤가. 사파리? 마라톤? 혹시, 덥다, 검다...?

 

 

 

 

 

나이로비는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한 케냐의 수도이다. 엥카레 나이로비(Enkare Nairobi)라는 마사이어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그 뜻은 차가운 물이다. 나이로비의 기후도 그 이름처럼 그다지 덥지 않다. 적도에서 남으로 150정도 떨어진 열대 지역이지만, 1,676m 정도의 고원에 위치하기 때문에 연평균 기온이 약 18도 정도로 선선하다. 오히려 아침저녁으로는 긴팔이 꼭 필요할 정도로 쌀쌀하다. 나이로비에 처음 들어서면, 낮게 깔린 구름과 멀리까지 보이는 지평선, 시원한 바람이 어우러져 깨끗한 느낌을 받게 된다. 시내에는 충분한 녹지와 공원들이 배치되어 있어 아프리카에 대한 선입견을 단번에 깨주는 도시이다.

 

 

 

<하늘에서 본 나이로비>

 

 

나이로비는 원래 그 주변지역과 마찬가지로 마사이, 키쿠유 족 등과 야생동물들이 노니는 초원이었다. 지금도 유목민족인 마사이족이 때때로 소떼를 몰고 나이로비 근처에 주둔하거나 도시를 통과하기도 한다. 하지만, 1895년 영국이 몸바사에서 빅토리아 호수 연안의 키수무까지 철도를 놓는 공사를 시작하며 전진기지인 나이로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907, 나이로비는 영국령 동아프리카의 수도가 되었고, 1950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이후로도 발전은 거듭하며 동아프리카의 중심 도시로서 기능하고 있다. 또한 나이로비는 다른 대륙에서 아프리카로 들어오는 관문도시이자 사파리를 시작하는 사파리 수도로의 역할도 수행한다. 도시가 생긴지 10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인구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곳이 어느새 케냐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대도시로 자리 잡았다. 19191만 명 정도였던 나이로비의 인구는, 194812, 독립 후인 1969년에 51, 1979년에는 83만으로 급증했고, 현재는 250만 명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당신은 이러한 나이로비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아프리카에 대해 품고 있는 선입견으로 나이로비를 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로비는 세계의 다른 수많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현대적인 대도시이다. 출퇴근 시간이면 심한 교통체증이 발생하는, 어쩌면 상당히 일반적인 대도시이다. 물론 나이로비에 흑인들이 많이 살지만, 식민시대 건너온 백인들의 후손들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나이로비에 거주하는 백인, 인도인, 중국인 등 다양한 생김세의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빼꼭히 들어선 나이로비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야생 동물들의 고향인 와일드아프리카가 버젓이 살아있다. 하지만 나이로비도 세계 어느 도시처럼 빈민촌이 있고, 그들의 생활환경은 열악하며 때로는 불쌍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는 도시의 일부일 뿐이다. 양복을 갖춰 입고 시내의 금융회사에서 일하며, 저녁에는 친구들과 냐마초마(nyama choma : 스와힐리어로 구운 고기라는 뜻이다. 쇠고기나 염소고기를 숯불에 구워 소금에 찍어 먹는 전통 요리이다.)에 맥주 한 잔을 즐기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잠시 아프리카라는 생각을 버리고, 일단 대도시 나이로비에 어떤 삶이 있는지 알아보자.

 

 

나쿠마트 (Nakumatt)

 

나쿠마트는 우추미(Uchumi, 스와힐리어로 경제라는 뜻이다) 등과 더불어 케냐의 대표적인 마켓 체인이다. 케냐 전역에 17개의 매장이 있으며, 나이로비에서도 시내를 다니다 보면 나쿠마트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각 매장은 약 5만 가지 정도의 상품을 구비하고 있다. 이는 식료품에서부터 화장품, 가구, 음반, 문구류, 전자기기, 오토바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를 모두 포함한 숫자이다. 나이로비 시내의 한 매장의 경우, 나쿠마트는 세 개의 층을 사용하고 있다.

 

 

<나쿠마트 외관> 마트의 상징인 코끼리가 그려져 있다.

 

 

1층에서는 고기 과일, 과자 등 각종 식품을 판매하고, 2층은 문구류, 음반, 식기 등 생활용품을, 3층에서는 컴퓨터 용품, 가구, 자전거 등 고가품을 진열해놓고 있었다. 이름만 다를 뿐 상품의 종류나 가짓수, 진열방식 등에 있어서 한국의 대형할인마트와 같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나쿠마트 내부>

 

다양한 상품이 구비되어 있다. 와인과 베이커리 코너의 모습.

 

 

이처럼 다양한 상품이 준비되어 있고, 가격 또한 합리적이기 때문에 케냐인과 외국인 모두 나쿠마트를 즐겨 찾는다.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근무하는 외교관들의 경우 나이로비에 올 기회가 있으면 이러한 대형 마트에 들러, 근무지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들을 구입해가는 경우도 있다. 간혹 마사이들이 고유의 붉은 의상을 입고 정말 현대적인 공간인 나쿠마트로 쇼핑을 오는 모습을 볼 수도 있는, 재미있는 공간이다.

 

 

나이로비 대학 (University of Nairobi)

시내 중심에 메인 캠퍼스를 두고 있는 나이로비 대학은 케냐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대학으로 1954년에 개교하였다. 처음에는 독자적으로 학위를 수여할 수도 없는 단과대학에 불과했다. 하지만 1963, 나이로비 대학은 우간다의 마케레레, 탄자니아의 다르에르살람 단과대와 통합하여 동아프리카 대학을 이루게 된다. 이어서 1970년 동아프리카 대학이 분리되며 종합대학으로 거듭났다. 의학, 수의학, 농학, 공학, 법학, 교육학, 경제학 등 거의 모든 분야의 학부가 있으며 케냐타칼리지를 산하에 두고 있다.

 

 

<나이로비 대학> 녹지와 건물이 잘 어우러진 캠퍼스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공부한다.

 

 

나이로비 대학의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표정이 상당히 밝고 자신만만하다. 사회의 엘리트다운 자부심과 당당함이 행동과 목소리에 묻어난다. 실제로도 이들은 케냐 전역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대학에 진학한 사람들이다. 자기 부족의 말과 스와힐리 그리고 영어까지 세 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동아프리카 최고의 대학에서 공부하는 엘리트들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저학년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잔디밭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기도 하고, 놀러 나가기도 한다.

메인 캠퍼스를 방문하면 익숙한 인물의 동상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인도의 영웅인 마하트마 간디이다. 정문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도서관이 그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간디 기념 도서관이고 그 안에 간디의 동상이 있는 것이다. 케냐와 간디가 바로 연결은 되지 않겠지만, 인도계 사람들이 간디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란 배경을 알면 납득이 될 것이다. 나쿠마트의 경영자도 인도계인데, 영국 지배시절 케냐로 많이 건너온 인도인들은 케냐 경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도서관 1층의 서점에서는 스와힐리 문학작품에서 각 학과의 전공 서적들까지 다양한 책을 판매, 대여한다. 이 중 몇몇 교재는 우리나라 대학생들도 많이 보는 교재여서 세계화를 새삼 느낄 수 있다.

 

 

노포크 호텔 (Norfolk Hotel)

나이로비 대학과 케냐 국립극장 맞은편에는 유서 깊은 호텔이 있다. 나이로비가 생긴지 몇 해 지나지 않은 1904년 문을 연 노포크 호텔이 바로 그곳이다. 노포크 호텔은 식민시대 지배자였던 영국인들을 위한 호텔답게 영국식으로 꾸며진 고풍스러운 외관을 지니고 있으며, 98/99년의 개선 공사를 통해 시설도 깨끗하게 재정비되었다. 호텔의 설립 초기에는 사파리나 연구, 사냥 등의 목적으로 케냐를 찾는 손님들이 많이 묵었으며, 케냐에 정착한 백인들 간의 사교의 장으로도 활용되었다. 미국의 26대 대통령 루즈벨트도 1909년 사냥의 목적으로 케냐를 방문했을 때 노포크에 머물렀고, 영화 촬영을 위해 케냐에 온 배우들도 노포크를 즐겨 찾았다. 현재에도 여전히 많은 인사들이 노포크를 찾는데, 최근의 예를 들자면, 미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아메리칸 아이돌’의 출연진과 스텝들이 묵어갔다. 하루 숙박에 200달러 내외로 비싼 편에 속하지만 인기가 높은 것은 역사와 시설, 그리고 그에 걸맞는 서비스 때문일 것이다.

 

 

<노포크 호텔>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외관.

 

 

사파리 파크 호텔 (Safari Park Hotel)

파라다이스 그룹의 창업자인 고 전락원 씨가 운영했기에 우리에게 익숙한 사파리 파크 호텔은, 도심 속의 휴양 호텔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지만,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 주변 환경이 도시와는 다른 모습으로 확 바뀐다. 아프리칸 방갈로 스타일의 낮은 집들이 10만 평의 녹지 사이에 띄엄띄엄 들어서 있고, 건물의 외관에서 작은 인테리어까지 자연의 냄새가 나는 재료들을 택하여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온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로비가 있는 건물도 쥬라기 공원에서 본 듯한 자연 친화적인 모습이다.

호텔에는 쇼핑 빌리지와 각국의 음식을 다루는 6개의 레스토랑, 카지노 등 흥미를 끄는 많은 시설들이 있다. 몸바사, 잔지바르 등 동아프리카지역의 엔틱 조각에서 현대 조각까지 다양한 아프리카 토산품을 파는 상점, 대형 화덕에 구운 악어, 타조, 멧돼지 등 각종 고기들을 맛볼 수 있는 냐마쵸마 식당 등은 어느 곳에도 뒤쳐지지 않는 만족을 제공한다.

 

 

<사파리 캐츠 쇼>

 

힘이 느껴지면서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동작들이 인상적이다.

 

 

특히 냐마쵸마 식당에서는 식사를 하면서 사파리 캐츠 쇼(Safari cat's show)를 볼 수 있다. 동아프리카 최초의 본격 전문 민속 무용단이 공연하는 사파리 캐츠 쇼는 아프리카의 힘과 생명력, 역동성을 잘 표현한 공연이다. 프랑스에서 초빙된 감독이 아프리카 전통의 무용에 현대 무용을 가미하여 만든 작품으로, 감독이 떠난 현재에도 재창조와 꾸준한 연습을 통해 인기를 얻고 있다. 남여 배우들의 균형 잡힌 몸매와 놀라운 움직임도 감상에 즐거움을 더한다. 공연은 5분 정도마다 내용이 바뀌며 1시간가량 계속된다. 아프리카의 부족들이 예로부터 춰온 춤으로 시작되어, 바구니 등의 소품을 이용한 춤으로 이어진다. 20명가량의 배우들이 무대 앞에 쭉 앉아서 박수치는 공연도 있고, 무용이라기보다 곡예에 가까운 장면들도 연출된다. 남여배우 한 명 씩 나와 서로의 사랑을 표현하는 부분도 화려한 개인기를 볼 수 있어 인상적이다.

 

나이로비는 동아프리카의 정치, 경제와 문화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이다. 아프리카에 있는, 우리의 도시와 영 다른 그 어떤 미개한 곳이 아니라, 세계 어느 도시와도 견줄 수 있는 현대적 도시이다. 나이로비의 경제력, 젊은이들의 생각, 역사와 문화 그 어느 것도 뒤쳐지지 않는다. 케냐 사람들과 아프리카 대륙의 특징이 그 안에 녹아 들어가서 나이로비만의 색을 내는 것이다.

 

아프리카는 53개국이 있는, 지구 육지의 20%를 차지하는, 다양한 문화권이 공존하는 큰 대륙이다. 물론 불행한 착취의 역사를 지워버릴 수는 없겠지만, 아프리카의 아름다움 또한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첫 여행지였던 나이로비의 변해가는 도시 풍경은 아프리카에 대한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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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히르다르, 고잠

2013. 9. 14. 22:24


바히르다르, 고잠 - 한미진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은?’

 

여느 상식 퀴즈에서 흔히 나오는 이 질문은 흥미롭게도 2008년을 기점으로 다른 답을 갖는다.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라고 알려져 온 아프리카의 나일강보다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강이 더 길다는 사실이 2008년 5월 리마 지리학회에서 확인된 것이다. 여기서 아마존 강에 대한 새로운 지리적 사실보다는, 역으로 왜 나일강이 그 동안 가장 긴 강이라고 간주되었는지를 생각해보자. 이는 구불구불하고 지류가 많은 아마존 강에 비해 굵직한 물줄기로 아프리카의 북동부를 관통하는 나일강이 측량도 수월하고 더 길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나일강이 이집트를 고대 문명의 시원으로 발전시켰고 이 문명을 아프리카 각지로 전파하는 교통로로 작용했으며,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에게 많은 자연·문화적 정보를 제공한 원천이 되고, 이후 이집트의 근대화 작업의 대상이 되어 미국·소련과의 외교 관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역사적 배경, 즉 이러한 나일강에 대한 인간의 ‘인지적 작용’의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나일강이 수천 년 동안 인류 역사의 자연적 배경으로서 ‘거대한 강’이라는 인식이 자리매김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강의 원류는 어디일까? 수 천년동안 어디서 이 많은 양의 물이 공급되는 것일까? 일찍이 유럽의 탐험가들은 나일강을 따라 그 원류를 추적하고자 했다. 사실 ‘나일강’ 하면 이집트만 떠올리기 쉽지만 나일강은 이집트 외에도 에티오피아, 수단, 우간다를 거쳐 흐르기 때문에 그 원류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서 나일강의 두 지류 중 하나인 청나일강과 그 직접적 원류인 타나 호수가 위치하는 에티오피아의 바히르다르(Bahir Dar)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에티오피아 북서부의 중심, 바히르다르

 

바히르다르는 에티오피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암하라 주의 주도이다. 에티오피아의 행정 구역은 아디스아바바와 디레나와의 2개 특별시, 그리고 인종 구성에 따라 나뉜 9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다. 암하라족은 전체 인구의 26%를 차지하며 에티오피아의 정치적, 경제적 삶에서 전통적으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들의 언어인 암하릭은 에티오피아에서 아랍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로, 토착어 중에서는 가장 우세하다. 언어와 권력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암하라족이 에티오피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쉽게 가늠해볼 수 있다. 이에 암하라족의 중심지인 바히르다르 역시 예부터 에티오피아의 주요도시 중 하나였다. 바히르다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 군의 표적이 된 바 있으며 1988년 에티오피아 내전 당시에는 혁명군의 거점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바히르다르의 자연유산에도 어렴풋이 녹아 있다. 바히르다르는 가장 아름다운 폭포 중 하나로 손꼽히는 청나일폭포와 제주도의 두 배 크기인 타나호수가 인접해 있고 도시 구획이 아름다워 관광명소로 유명하다. 청나일강과 타나호수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멋을 느낄 수 있는 장소 같지만, 사실 나일강 탐험 이야기와 그 주위의 수도원 이야기에는 인류의 숨결이 그대로 남아 있다. 대자연의 숭고함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해보고자 하는 노력, 즉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을 횡단하는 나일강을 탐험함으로써 문화적 지배력을 높이려는 서양인들의 욕망, 자연의 기를 통해 종교적 신앙심을 견고히 하려는 수도승들의 움직임에서 우리는 자연과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 다다르게 된다.

 


 

나일강 탐험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다

 

큰 하천이 문명의 발전 조건이 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강은 농경생활을 가능하게 해 인간의 미래에 대한 예측과 대비를 통한 생존 능력을 증진시킨다. 나아가 인류의 관심을 생존보다 고차원적인 방면으로 확장시켜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다. 여기서 나일강은 추가적으로 지속적인 범람을 통해 풍요로운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고 측량과 기하학이 발전하는 계기를 만드는 한편, 범람이 신의 행위라는 종교적 관념을 파라오 1인 체제와 결부 지어 이집트를 강력한 정주문명 국가로 만들어내었다. 이에 나일강이 범람하는 이유와 그 원천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궁극적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기원전 3세기 경 이집트의 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군원정단은 청나일강을 탐험하고 범람의 이유를 에티오피아 고원의 폭우 때문이라고 결론짓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나일강 탐사가 이루어진 것은 15~16세기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진출 이후이다. 여기에는 대항해시대 특유의 개척정신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지만, 사회진화론1)적 시각에서 세계의 주인인 유럽인들이 자신보다 열등한 유색인종을 지배하기 위한 기반을 닦고자 하는 의도도 배제할 수 없다. 의도치 않은 결과라 할지라도, 지식과 권력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아프리카 문명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나일 강을 유럽인들이 탐사하고 그 온상을 밝혀냈다는 것은 이미 오리엔탈리즘2)이 반영된 결과이다. 나일강 탐험의 역사를 세계관과 인류를 변화시킨 위대한 도전정신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에 의해 미개한 지역을 개척하고 지배의 기반을 증축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움직임으로 볼 것인지는 분명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쨌든, 나일강이 유럽인들의 탐사로 인해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게 된 것은 사실이다.  1613년 프란시스코 알바레스와 페드로 파에스가 더 짧고 단순한 청나일강을 탐험했고, 1770년 제임스 브루스가 타나호수까지 탐험하여 그것이 나일 강의 원류임을 확인하였다. 청나일강은 청나일은 고대부터 이집트에서는 촐로에 팔루스, 그리스에서는 프세보에라고 불렸고, 현재는 아랍어로 바르알아즈라크, 혹은 아바이강이라고 한다.

 

청나일강은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에서 많은 양의 유기물을 실어 와 이집트 하류에 비옥한 점토층을 만들어 주어 농업발달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이집트 고대문명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청나일강을 창세기(2:10-14)에 나오는 네 개의 낙원 강 가운데 하나인 ‘기혼 강’과 동일시하고 있다. 청나일강은 에티오피아의 타나호수에서 흘러나와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백나일강과 합류하게 된다. 백나일강의 물이 회백색인 데 비하여 이 강물은 맑은 청색이기 때문에 청나일강이라고 한다. 청나일강은 타나호 근처에서 수력발전에 이용되고 있다. 사실 습지와 사막지대를 지나 대부분 증발되는 백나일강과 달리 유량이 풍부한 청나일강은 나일강을 둘러싼 아프리카 수자원 분쟁의 핵심이다.

 

 

 

 

그림 1 나일강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타나 호에서 동남쪽으로 30여km를 흐르던 청나일강이 마을 근처 높은 낭떠러지에서 계곡으로 엄청난 수량의 강물을 쏟아 내리는 지점이 바로 청나일폭포이다. 청나일폭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포 10위 중 하나로 손꼽히며, 에티오피아 최고의 관광명소이다. 현지에서는 ‘연기나는 물’을 뜻하는 티스 아바이(Tis Abay)라고 불린다. 우기인 7월부터 8월 동안에는 타나 호에서 유입되는 막대한 수량이 4백 미터의 폭을 가진 이 청나일폭포에서 45미터 아래로 수직 낙하하는데, 1km의 거리에서도 폭포가 일으키는 물보라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청나일강의 수원을 이루는 타나호수는 평방 3,600km의 넓이를 가진 에티오피아 최고 호수로 그 저수량이 엄청나다. 2006년 여름 에티오피아에서 626명이 사망했던 대홍수 시기 타나호수 근처에서 이재민이 급속도로 증가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었다. 타나호수가 해발 2000미터 첩첩산중의 고산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저수량을 가늠해보기 쉽지 않다.

 

호상에는 37개의 섬이 위치하는데 파피루스 배를 타고 이 섬과 주변의 아름다운 마을, 교회와 수도원을 투어한다. 현지인들이 탕크와(tankwa)라 부르는 이 배는 갈대 줄기를 엮어 만든 것으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애용해 왔고 여전히 공예품과 땔감, 심지어 황소까지 실어 나르는 중요한 해상 교통수단이라고 한다. 맑고 검푸른 타나 호수 위 약 20개의 섬에는 중세 시대에 지어진 주요한 교회와 수도원들이 있다. 엔토스 이야수 수도원은 화려한 벽화와 성화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파티샤’라는 기도하는 동굴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곳 중 하나로 유명한 케브란 가브리엘 수도원은 여성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데, 옛 에티오피아 왕들의 왕관과 의복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금은보화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에티오피아만의 종교적 해석을 담고 있는 오래된 성경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는 수도원도 있다.

 

 

사실 고립된 섬의 숲속에 수도원이 생긴 이유는 슬픈 순교의 역사에 있다. 17세기 에티오피아 왕조는 남쪽 오로모족의 정치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민들에게 가톨릭 개종을 요구하며 예수회 수도자들(the Jesuits)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예수회 수도자들은 강력한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에티오피아 정교회 수도자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 수도원으로 와 3만 2000명의 순교자가 발생했었다고 한다. 바히르다르에 오는 길에 있던 데브레 리바노스 수도원 역시 식민지 시대의 아픈 역사를 가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점령했던 1930년대 후반, 반(反) 이탈리아 저항운동의 본거지였던 이 수도원은 무솔리니의 측근이었던 그라치아니 총독의 암살미수 사건 이후 유례없는 학살을 당했다. 지금은 에티오피아의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이 수도원들은 세계사의 변두리로 더욱 내몰리게 된 약소국 에티오피아의 설움을 보여주는 심리적 유산이 되었다.

 


다시 나일 강 탐험 이야기로 돌아와, 청나일강에 비해 훨씬 알려진 바가 없었던 백나일강의 탐사 기록을 살펴보자. 사실 19세기 유럽인들의 나일강 탐사의 핵심은 ‘검은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백나일강에 있었기 때문에, 백나일강 탐험은 유럽인의 미지의 세계 개척에 가장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럽인에 의한 본격적인 탐사는 1830년 이집트 탐험대가 그 때까지 백나일강의 상류라고 여겨져 왔던 나이저 강이 별개의 큰 강임을 확인한 이후 이루어졌다.

 

빅토리아 호수가 유럽인들에 의해 처음 발견된 것은 1858년 영국인 스피크와 버튼이 이를 나일 강의 수원이라고 추정, 탐사에 성공했을 때이다. 스피크는 이 광활한 호수에 영국 여왕의 이름을 붙여주었으나, 버튼과의 협의 없이 성급히 발표하는 바람에 당장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1870년대 영국의 군인 C.G.고든과 그 부하들이 나일강의 지도를 작성하고, 이어서 M.스탠리가 빅토리아 호수를 주항한 이후 스피크의 발견은 인정받게 되었다. 스탠리가 백나일강의 원류지대를 상세히 밝힌 것이 계기가 되어 런던의 왕립지리학협회가 아프리카 내륙 탐험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나일 강은 이집트, 에티오피아, 수단, 우간다 등을 모두 관통하는 세계 제 2의 강이다. 특히 나일 강의 탐사 기록에 있어서 유럽인들과 에티오피아인, 수단인들과의 접촉은 하나의 세계사를 간직하고 있는 부분이다. 쉽게 가치판단을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유럽인들의 나일강 탐사의 역사는 근대 이후 현대까지 아프리카의 세계 속 위치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단서가 되기도 한다. ‘탐험’의 사전적 의미는 위험을 무릎쓰고 어떤 곳을 찾아가서 살펴보고 조사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발달된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당대 유럽이 베일에 가려져있던 나일강의 수원, 온상을 밝혀낸 것은 분명 탐험의 역사이다. 하지만 나일강 탐험이 다른 아프리카 내륙 지역으로 유럽인을 끌어들이고 결국 그 지역 사람들을 지배하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이는 ‘탐험’이라기보다는 유럽 중심주의적 시각에서 모르는 세계를 ‘발견’했다는 의미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큰 호수의 이름이 왜 아프리카 지역의 토착 고유명사가 아니라 ‘빅토리아 호수’이고 지금까지 이렇게 불리어오고 있는지, 나일강 탐험의 역사를 보면 씁쓸한 기분이 든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대자연의 풍경 속에서 인류의 무수한 역사적 흔적을 느끼고 간다.

 

 

* 참고자료

 

 1. 인터넷 자료 및 블로그

  네이버 백과사전(http://100.naver.com/100.nhn?docid=34258)

  위키피디아(http://en.wikipedia.org/wiki/Nile)

  길에대한애정, 「에티오피아 북부 여행의 시작 Bahir Dar」(http://caminodesol.blog.me/ 150101738343)

  예담,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 탐험의 역사」(http://yedamco.blog.me/87936315)

  환상다반사, 「타나호수 수도원 탐사」(http://blog.naver.com/softgore?Redirect=Log& logNo=10114896884)

 

 2. 뉴스

  강덕치, 「데브레 리바노스 수도원의 학살 사건」, 크리스천투데이, 2009. 11. 11.

  강덕치, 「청나일 강의 수원 타나 호를 찾아」, 크리스천투데이,  2009. 11. 18.

  김성호, 「“여성 출입 금지”, 도대체 어떤 수도원이기에?」, 오마이뉴스, 2007.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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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펜서(H. Spencer)가 사회발전을 설명하는 데 있어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른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대입시켜 만들어낸 개념이다. 사회도 생물계와 마찬가지로 단순하고 동질적인 것에서 복잡하고 이질적인 것으로 발전해 간다며, 단선적이고 낙관적인 사회의 발전을 상정하였다. 이는 인간의 능력을 긍정하고 역사의 발전을 인정하는 한편, ‘문명사회’인 서양이 ‘야만사회’인 동양을 지배해야 마땅하다며 제국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2) 일반적으로는 낭만주의의 한 경향인 ‘이국적인 정서(동방세계에 대한 동경)’을 의미한다. 하지만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라고 정의하고, ‘동양이 서양보다 열등하다’는 사고방식의 유럽 중심적 편견과 제국주의적 음모를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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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푸(Edfu, Idfu) ∙ 코옴보(Kom Ombo), 이집트

2013. 9. 14. 22:18


에드푸(Edfu, Idfu) ∙ 코옴보(Kom Ombo), 이집트 

 

이세정

 

 

이집트 사람들의 삶과 죽음 그 자체였던……

나일 강의 범람에서부터 키우던 고양이의 죽음까지 고대 이집트 인들에게 인간생활과 자연의 일체는 신의 태도 여하에 달려있다고 생각되었다. 이집트 인들에게 있어서 종교와 신이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도 생활 전반에 녹아 내린 것으로 그들에게는 삶이요, 그리고 곧 죽음이었다. 이집트 종교에는 여러 가지 성격이 겹친 복합 신들이 많이 등장하고 이집트인의 종교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로 많은 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 나라가 기본적으로 조그만 농업사회의 집합체였기 때문이다.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신들이 오랜 세월 속에서 통합되며 여러 신화가 만들어졌고 강한 세력이 주변을 통합하면서 신들도 정리되었다. 크게 보아 헤르모폴리스, 멤피스, 그리고 헬리오폴리스를 중심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그 중에서 현재 카이로 동남쪽 교외 지역인 헬리오폴리스의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 아툼(혹은 라)이 슈(공기의 남신)와 테프누트(이슬의 여신)를 창조했고, 이 둘이 결합하여 게브(대지의 남신)와 누트(하늘의 여신)를 낳는다. 그 후 게브와 누트 사이에서 남신 오시리스와 세트, 여신 이시스와 네프티스가 나오는데 이들 남매가 각각 짝을 지어 오시리스와 이시스, 세트와 네프티스가 부부가 된다. 이 아홉 신이 9주신으로 사람들에게 숭배되었다. 이 가운데 오시리스신은 이집트를 통치하며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존경을 받았지만, 이를 시기한 동생 세트의 모함에 빠져 죽게 된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관을 찾아내어 남편을 살려냈지만, 이를 안 세트가 오시리스를 14토막으로 잘라 이집트 방방곡곡에 버렸다. 이시스는 다시 조각들을 찾아서 결합시켰지만, 물고기에 먹혀 버린 남근만은 찾지 못했다. 이시스는 나일강의 진흙으로 그 부분을 보충한 후 생명을 불어넣어 오시리스를 살려내었고, 그와 결합해 아들 호루스를 낳게 된다. 호루스는 성장하여 작은아버지이자 아버지의 원수인 세트를 물리치고 왕위에 복귀한다. 그렇게 해서 호루스는 현세의 왕으로, 오시리스는 내세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호루스의 부인인 하토르는 사랑의 여신으로서 그리스인들은 하토르 여신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동일시했다.

 

 

오 나의 태양이시여 – 호루스와 에드푸의 신전

 

이른 아침 우리는 에드푸에 정박했다. 크루즈에서 내려 처음 바라 본 에드푸의 풍경은 마치 우리나라의 지방 소도시를 보듯 평범하고 고요하다. 거대한 건축물들과 길거리에 널려있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유적들 때문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다른 대도시에 비해 작고 조용하지만 작은 언덕 위에 나일 강을 바라보는 에드푸에서 여유와 평안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드푸라고도 하는 이 도시는 룩소르 남쪽 110km 지점 나일 강의 서쪽지역 강 가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도시이다. 지금은 작은 지방도시이지만 과거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아폴로노스폴리스메갈레 (Apollonospolis megale)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방의 행정수도가 위치했던 대도시 중 하나였다. 지금은 설탕과 도자기의 도시이며 사람들의 인심이 좋고 굉장히 친절하다. 크루즈 선에서 내려 선착장에 줄지어 서있는 마차를 타고 달리는데 뜨거운 햇살 속이지만 바람은 청량해 기분이 상쾌하다. 앞에 마차 위에 매달려 가는 아이는 위험천만해 보이지만 얼굴은 천진난만이다. 번잡하지만 알록달록한 색들로 가득 찬 시내를 지나니 드디어 호루스 신전의 입구이다.

 


(꼭지)

호루스 (Horus, Hr, Hru, Ώρος, Hōros)는 고대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신으로서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아들이다. 고분 벽화에서는 호루스가 매의 머리를 쓰고 있는 그림을 자주 볼 수 있다. 호루스는 이집트의 신들 중에서 다양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보통 매의 머리를 한 남성으로 표현되나, 호루미오스라고 불릴때에는 사자의 외관을 취하며, 하르마키스라고 불릴때에는 스핑크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또한 후대에는 유아신(幼児神)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시스는 오시리스를 살해한 세트의 위협을 피하며, 토트의 도움을 빌려 호루스를 몰래 출산한다. 그리하여 어머니인 이시스의 무릎 위에 놓인 아기(하포크라테스)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한 로마 시대에는 병사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성 게오르기우스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호루스는 대기와 불을 상징하며, 그 색은 일반적으로 흑, 적, 백을 의미한다. 부친 오시리스의 복수를 완료한 호루스는 현세의 통치자가 된다. 따라서 파라오는 호루스의 화신으로 여겨지며 역대의 왕들도 그의 이름을 따는 경우가 많다. 호루스는 태양신 라와 결합하여 라-호라크티를 시작으로, 여러 신들과 융합하여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집트를 상징하는 모양으로서 유명한 우제트의 눈이란 바로 호루스의 눈을 뜻하기도 한다. 이집트 항공의 항공기의 수직꼬리에는, 비행의 안전을 바라는 의미로 호루스의 심볼이 그려져 있다.

 

 

 

 


 

이 신전은 BC 237년 프톨레미 3세때에 공사가 시작된 이후 180여년 동안 여러명의 파라오들에 의하여 공사가 계속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집트 관광청이 펴낸 관광안내 팸플릿에는 이 신전은 2004년초에 보수공사와 관광객 편의시설을 갖추고 2.300년만에 다시 오픈한 것이라고 써있다.  에드푸 신전은 이집트에 남아있는 신전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드푸 사원에도 탑문이 있고 열주(列柱)가 있고 그 중심축에 본실을 두었으며 많은 조상(彫像)과 부조로 장식한 점은 신왕국시대의 다른 신전들과 마찬가지이지만 이 시대 특유의 주두(柱頭)를 가진 둥근기둥들이 채용된 것이 이채롭다.

 

그리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에드푸 신전은 전적으로 호루스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그래서 신전 곳곳에 호루스 신의 조각상이 서 있다. 입구 양쪽에도 있고 제1열주실의 전면에도 두 개의 호루스 신의 석상이 서 있다. 매는 호루스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이집트인들은 하토르 여신이 새해 첫날에 남편이 있는 에드푸의 호루스 신전으로 외출한다고 믿었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호루스 신은 태생이 두 가지였다. 헬리오폴리스 사람들은 호루스신을 오시리스와 이시스 사이에서 난 아들로 여겼지만, 멤피스 신화에서는 오시리스와 형제였다.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서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인 호루스신을 ‘연하의 호루스’, 오시리스와 형제인 호루스신을 ‘연상의 호루스’라고 불렀다. 에드푸에 있는 호루스 신전은 연상의 호루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연하의 호루스를 나타내는 상징들도 보인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신전 앞에 세워진 독수리 모습의 신인데, 이것은 숙부인 세트에게 복수한 연하의 호루스 신을 의미한다.

 

 

호루스 신전은 전형적인 이집트 신전의 형태를 갖춘 곳이라 할 수 있으면서도 단일 신전으로서 신전이 갖추어야 할 것들을 갖추고 있는 종교적인 의미의 신전에 가까운 신전이다. 신전 입구에서는 멀리 거대한 탑문이 보이며 그 옆 언덕에는 마을이 보인다. 발굴되기 전 호루스 신전은 흙으로 덮여 있었고 그 위로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신전으로 들어가는 길 옆으로는 아직 흙으로 덮여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데 신전 부속 건물들로 발굴 후에는 이 호루스 신전이 더욱 거대한 위엄을 갖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신전의 탑문은 이집트의 많은 신전들 중에서 탑문의 원형이 가장 깨끗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탑문의 벽화는 후대의 신전의 특징인 신화적인 내용이 담겨있으며, 이 신전의 주인인 호루스 신과 파라오를 묘사한 벽화로 한 많은 곳에서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신전 입구에는 매의 형상을 한 호루스 신의 석상이 감시자처럼 입구를 지키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있는 모습이 수 천년의 역사를 무색하게 할 정도이다. 탑문을 들어서면 삼면이 원기둥 회랑으로 된 큰 안뜰을 만나게 되는데 원기둥들은 그리스 신전의 원기둥을 연상시키는 세련된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많은 건물들이 기둥들로 둘러싸인 회랑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프로레마이오스 왕조시대 신전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된다. 큰 안뜰을 지나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위압적인 모습의 호루스신의 석상이 서있고 양쪽으로 ‘아침의 집’과 ‘책들의 집’이 있다. 탄생의 빛을 향한 첫 경배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침이고 책들의 집에서 깨달음을 얻게 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파피루스로 만든 책은 없지만 이곳에서 저술들의 제목을 알리는 상형문자가 원기둥에 적혀 있다고 한다. 신전에 들어가게 되면 정면으로 하늘로 가는 나룻배가 보관된 방인 ‘성자 중의 성자’ 를 볼 수 있고 그 주위로 여러 방들과 신비의 복도를 볼 수 있다. ‘성자 중의 성자’에는 성스러운 배가 중앙에 있는데, 이집트는 나일강의 혜택을 사는 나라답게 나일강을 오가는 배를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벽화 또한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호루스 신의 탄생에서부터 그가 어둠의 힘들을 물리치고 거둔 승리에 이르기 까지 호루스 신화의 일화들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저마다 고유의 기능을 가진 여러방들이 이 ‘성자중의 성자’를 둘러싸고 있다.

 

 

수 천년의 세월 동안 나일 강을 바라보며 – 코옴보 신전

 

점심 식사 후 나일 강의 정취를 만끽하다 보니 어느 새 배는 나일 강의 서쪽 강안에 이르렀다. 코 옴보에 도착한 것이다. 꽤 큰 도시로 알려져있지만 그 풍경은 시골 마을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 지역은 나일강 주변에서 농경지가 아주 많은 지역 중의 하나이다. 코옴보 신전은 나일 강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코옴보 신전에 올라 나일 강가를 바라보니 햇살에 비치는 강물의 반짝임과 마을의 풍경이 어우러져 신전의 모습과도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이 신전은 원래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투트모트3세 때 건설되었는데 천년이 지난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때인 BC332~395년에 완전히 새롭게 개축된 것이다.

 

코옴보 신전은 지진과 나일 강의 홍수에 의한 피해로 많이 망가졌었는데 로마제국이 기독교화 된 이후 특히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우상숭배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로는 기독교도(콥트 교도)들에 의한 파괴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우상숭배 금지령 이후 이 신전은 폐쇄되어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가 모래 속에 파묻혀 버렸다. 1893년에 발굴이 시작되어 신전의 지붕을 덮고 있던 모래를 걷어내면서 신전의 복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오늘 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세베크(Sebek), 또는 소베크(Sobek)는 악어가 신격화된 이집트 신으로, 나일 강에 의존하던 이집트에서 악어를 매우 두려워하던 것에서 기인하였다. 나일 강에서 일을 하거나 여행을 하는 이집트인들은 악어의 신 세베크에게 기도하여, 악어에게 공격 받지 않도록 그가 자신을 보호해주기를 소망하였다. 세베크는 악어, 또는 악어의 머리를 한 남자로 묘사되었으며, 강력한 공포의 신이었다. 일부 이집트 창조 신화에서는 세베크가 세상을 창조하는 혼돈의 물에서 처음으로 나왔다고 묘사한다. 때때로 창조신의 모습으로 태양신 레와 연결되기도 한다

 

 

 

그리스 계통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콤 옴보 신전에 이 지역 토착신인 소베크 신과 함께 호루스의 변신인 하로에리스 신을 모시고 경배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장군에 의해 건국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계급은 이집트인들과 융화하는 정책을 펴서 자신들이 이집트에 완전히 동화하였음을 나타내려고 하였는데 세트를 처치하고 스스로 파라오가 된 호루스 신을 자신들의 신으로 경배함으로써 자신들이 파라오가 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코 옴보 신전에 하로에리스 신과 소베크 신을 함께 모시게 된 것은 틀림없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 신전을 크게 개축한 이후일 것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콤 옴보 신전은 소베크 신과 하로에리스 신의 두 신에게 바쳐진 이중적인 성격의 신전이다. 소베크 신은 이집트의 토착 신으로서의 의미가 강하고 하로에리스로 변신한 호루스 신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의미가 있는 신이라고 볼 때에 두 신간에 어느 신이 우월하거나 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코 옴보 신전은 철저하게 대칭구조를 유지하고 양쪽에 소베크 신과 하로에리스 신을 대등하게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둥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의 기둥모양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흔히 그레코로만 왕조라고 하는데 이 기둥들에서는 코 옴보사원을 증축하고 개축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그들의 건축에도 그리스 양식을 많이 도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전부터 악어가 많아 악어의 머리를 가진 신 소벡(Sobek)과 매의 머리를 가진 신 호루스(Horus)를 같이 모셨다는 이 신전은 BC 2세기경의 벽화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여러 번의 홍수로 많이 깎이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그 닳음이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해 난 이곳이 좀 더 살갑게 느껴졌다. 한산한 관광객들도 그러하고. 소박하다고 해야 하나. 나일 강가의 고지대 사탕수수밭 한가운데 위치한 장엄한 프톨레미 신전은 해질녘에 특히 경외심을 자아낸다. 훌륭한 의사였던 하로에리스 신과 악어의 신 소벡을 합배한 이 신전은 이중으로 된 입구, 홀, 지성소 등으로 유명하다. 부조가 새겨진 벽에는 고대의 수술 기구, 골 절단기 및 치과용 도구 등이 묘사되어 있다. 근처에서 발견된 세 마리의 악어 미라는 현재 하토르 예배당에서 보관 중이다.

 

나일강의 멀리서부터 거대한 탑문과 원기둥들이 보이는데 마치 나일강 뱃길을 감시하는 망루를 보는 듯하다. 탑문은 세베크를 위한 입구 하나와 호루스를 위한 입구 하나가 있는 거대한 문을 구성하고 있다. 호루스 신전의 탑문과 벽화들은 오랜 시간 흙에 묻혀 있었으며 그 훼손 정도가 다른 신전들에 비해 심하다. 신전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큰 우물이다.

 

이 우물은 악어로 상징되는 세베크 신이 들어오는 통로로 성장의 물이 나타나 에너지의 바다에서 직접 유입되는 세례용 액체를 제공했다고 한다. 코옴보 신전의 본 건물에 들어오면 바로 원기둥이 늘어선 홀이 보인다. 이 홀에는 정면에 문이 두개있고 호루스 앞에서 파라오가 호루스와 토트로부터 이중세례를 받는 것이 특징이다. 원기둥의 상태나 양식을 보면 그리스 건축풍이 많이 가미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건물의 원형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열주실의 원기둥들은 원형을 유지하면서 남아 있는 편이다. 그리고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의 벽화가 곳곳에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인 그리고 이집트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했던 여걸. 그러나 그러한 고정된 몇몇 이미지들과 달리, 실제로 그녀는 대부분의 이집트 파라오들이 마케도니아 지방에 뿌리를 두고 그리스계로 그리스어만 했던 전통을 벗어나 직접 이집트어를 배우고 실생활에서 이집트인들을 이해하려고 했던 첫 번째 파라오로 기억되고 있다. 프 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했단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도 흐려지는 벽화처럼 조금씩 역사 속으로 침식되는 듯해 난 또 다른 이집트의 여걸 핫셉수트와 함께 세월의 무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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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르

2013. 9. 14. 22:09

 

하라르

 


지옥만큼 어둡고 죽을 만큼 강하며 사랑만큼 달콤하다. 이것은 터키의 속담으로 숨겨져 있는 주어는 바로 커피이다. 이런 속담을 만들어낼 정도의 커피라면 어떤 맛일까? 그 주인공은 바로 하라르 커피이다. 하라르는 아마 에티오피아의 도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이유는 해발 2000m에 달하는 하라르에서 생산되는 커피 때문이다. 하라르에서 나오는 커피들은 알갱이가 다른 지역 커피보다 매우 작은 편으로 오직 하라르에서만 재배된다고 한다. 하라르에서는 아직까지도 커피농사를 따로 짓는 것이 아니라 야생의 열매를 따서 전통적인 세가지 커피 생산 방법으로 만들고 있다. 이르가체프(수세건조)와 시다모(자연+수세), 그리고 모카하라(자연건조)가 바로 그 세가지이다.

 

이 세가지 방법 중 자연건조를 시키는 모카하라가 바로 우리가 커피 전문점에 가서 즐겨 마시는 모카커피인 것이다. 그래서 모카커피는 다른 말로 하라르커피라고 한다. 이 하라르커피는 직접 끓여마셔보면 와인 맛 혹은 블루베리 맛이 난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잘 느끼지 못했다. 비루한 내 입맛....또한 하라르지역 전통커피인 버터커피도 있다. 버터커피란 버터와 체리채 말린 커피를 같이 끓여내는 것으로 맛이 정말 독특해서 계속 마시게 되었다. 그리고 뗄레깜이라는 향초를 커피와 같이 마시는데 향초와 같이 마시는 커피 또한 처음이라 정말 신기했다. 귀한 손님이 오시면 이런 커피들을 직접 집에서 볶아 대접하는 커피세레모니라는 것을 한다. 이렇게 풍부한 양의 커피 덕분에 하라르를 돌아다니면서 양질의 커피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쉽게 마실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 가히 커피의 천국이라 부를 만 했다.

 

그러나 하라르에 머무는 공기에는 커피향 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하라르는 이슬람 4대 성지 중 한 장소로써 나라 전체가 기독교인 에티오피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이슬람 요새도시로써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또한 이 지역은 아프리카 대륙의 동부 뿔 지역(위에 뿔지역 사진 첨부)에 위치하면서 처음 건설된 7~11세기에서 10~16세기까지 에티오피아의 주요한 교역로이자 종교의 중심지 역할까지 겸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그 이후 1875년부터 10여 년간 이집트의 지배를 받다가 1887년 메넬리크 2세 황제에 의해 에티오피아 영토로 통합되었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아프리카 뿔 지역 전체와 아라비아 반도 사이를 잇는 교역의 중심지로써 상업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나 1902년 아디스아바바와 지부티를 연결하는 철도가 디레다와를 지나감으로써 쇠퇴하게 되었고 현재는 커피가 주 생산품목이 되었다. 1535년에는 악숨을 침략해 시온의 성 메리 교회를 파괴한 '왼손잡이'라는 별명의 이슬람 지도자 아흐마드 그란이 하라르에서 이슬람 성전을 외치며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이곳에서 에티오피아의 전(前)황제 하일레셀라시에 1세가 태어나고 성장하였다. 랭보하우스라는 주요 관광지가 있다. 이곳은 랭보라는 천재시인이 살다가 마지막 여생을 보낸 집이다.

 


처음 하라르로 들어가는 길! 첫눈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성벽과 하나의 성문이었다. 이 성문은 주골(Jugol)이라고 불린다. 이 주골은 하라의 통치자 누르 이븐 무자히드(Nur ibn Mujahid, ?~1567)에 의해 13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오로모 부족 등과 같은 그리스도교도의 추격을 막기 위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이는 4m 높이의 거대한 성벽과 오직 5개의 성문만으로 이루어져 있어 하라르라는 도시를 철통과 같은 성곽도시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 5개의 성문 중 정문인 메인게이트로 들어갔다.

 

이곳은 하라르의 관문으로 불린다. 알고 보니 이 성문은 1970년에 파괴되어 블록과 시멘트로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이 성벽이 만들어진 이후 성벽 안에서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화폐 등을 가지며 도시국가로써 자체적으로 발달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지역에는 상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는 하레르인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의 복장은 다른 곳과는 다르게 독특하면서 아름다웠다. 이 주골과 그 내부는 2006년 그 가치를 인정받아 역사방어지구로 지정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및 유네스코 주요 관리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2004년에는 좁은 공간에서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특별한 갈등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높이 평가하여 유네스코에서 평화의 도시로 지정하기도 했다.

 

 

우리는 성벽을 보며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들어갔다. 하라르 입구에 들어서자 우리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말을 타고 근엄하게 행진하고 있는 군인의 동상이었다. 이 동상은 하라르 초대 총독이자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의 아버지인 라스 마콘넨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상을 보느라 올라갔던 시선을 내려보니 성벽의 밖과 안은 정말 현저히 다른 모습이었다. 밖은 마치 우리나라의 시골 농촌의 모습 같아보였지만, 들어서는 순간 도시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마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빈부격차의 실사판을 보는 것만 같았다. 성벽 안의 길을 지나다닐 때 참 색이 단조롭게 느껴졌다.

 

이슬람 사원과 기독교 교회, 일반 집들도 대문과 지붕까지 흰색과 파란색으로 도배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나다니는 택시들까지도 차체는 다 파랑색에 지붕만 흰색이다. 또 사원과 자잘한 성벽들이 자주 보였다. 현재 성벽을 비롯한 82개의 모스크(mosque, 이슬람 예배지)와 102개의 사원 및 건물들이 남아있다. 성벽은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모스크들은 10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고 별다른 손상 없이 잘 보존되어있는 이 유적들에는 과거 아프리카와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주택들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내려온 하라 지역의 독창적인 문화가 잘 드러난다. 다른 인근 지역 거주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내부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또한 도시의 전체적인 설계와 도로망 등의 구조도 매우 깊은 인상을 줬다.

 

 

하라르는 150년 전 영국의 탐험가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이 방문하기까지는 이슬람교도가 아닌 외국인에게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금단의 도시였다는 것을 들었다. 리처드 버튼은 1855년 하라르의 성곽 안으로 들어갔다 살아 돌아온 최초의 외부인인 셈이다. 하라르에는 "기독교인이 성곽 안으로 들어오면 도시가 멸망할 것"이라는 미신 같은 계시가 있었기 때문에 이교도의 출입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으며, 몰래 들어오는 경우에는 처형을 했다고 한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순례자로 변장해 아라비아반도 메카에 잠입하기도 했던 영국의 동인도군 장교였던 리처드 버튼은 이번에는 아랍상인으로 위장해 영국령 소말릴 랜드의 제일라 항구에서 출발해 하라르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나니 비록 나는 비기독교인이지만 우리가가 하라르에 들어왔다는 것이 왠지 대단하게 느껴졌다. 물론 아직까지도 이슬람교도가 아니라면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는 몇몇 장소가 있었다. 예를 들면 자미 모스크(Jami mosque)는 성자 Gragn을 추도하기 위한 모스크로써 13세기 만들어졌고 여전히 이슬람교도 아니면 접근을 불허한다. 기독교 교회와 가톨릭 성당에는 지붕 위에 십자가가 달린 것과는 다르게, 이슬람 사원은 지붕 위에 초승달 모양의 상징만이 달려있었다. 이슬람 성인의 무덤과 신사라는 곳에는 초승달 모양 위에 추가적으로 별모양의 상징이 함께 달려있었다. 이슬람의 사원과 무덤은 보기에 매우 비슷하게 생겼는데, 이를 구분하는 방법은 별모양의 상징의 유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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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이집트

2013. 9. 14. 22:06

 

카이로, 이집트

 

- 기자의 세 피라미드와 잃어버린 역사 – 제데프레 왕의 재조명

 

 

카이로 하면 고대 이집트 문명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로는 고대 이집트 문명과 거의 연관이 없으며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사실 카이로 지역은 로마 제국 시대까지도 나일강 삼각주에 속하는 습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약 15세기 전인 642년에 이집트를 점령한 아무르 이븐 알 아스가 군대의 주둔지 푸스탓(Fustat)을 건설한 것이 카이로의 출발점이다. 카이로는 카타이 시대와 파티마 왕조, 살라딘의 아이윱 왕조 등을 거쳐 마믈룩 왕조시대에는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지만, 1517년 오스만 제국 셀림 1세의 정복으로 속주가 되면서 영광의 빛이 바래게 된다. 잠시 역사의 뒤편에 머물렀던 카이로는 18세기 후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다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대 카이로는 19세기 무하마드 알리 왕조 아래에서 근대 도시 카이로가 정비되면서 오늘날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1) 

 

 

기자의 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비록 카이로는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카이로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정도 떨어진 기자 평원은 고대 이집트의 중심이였고 이집트의 수많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기자의 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피라미드들이 바로 이 피라미드들이다. 기자의 피라미드들은 모두 기원전 25세기에 150여 년 간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이집트 제 4왕조의 유물이며, 가장 웅장하고 거대한 규모로 인해 대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와 그의 아들 카프레 왕, 손자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들이 이에 속한다.

 

대피라미드는 높이가 148m, 밑변 길이가 233m에 달하며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는 이보다 조금 작다.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라미드들보다 규모가 훨씬 작으며 이집트 학자들에 의해 다소 급하게 건설된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이집트인들은 왜 피라미드를 만들었을까? 가장 지배적인 주장은 피라미드가 파라오들의 무덤이며 파라오들이 자신의 권력과 힘을 보여주기 위해 이 건축물들을 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피라미드 안에서 파라오의 미라가 발견된 바가 없고, 조세르 왕의 경우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기의 피라미드를 지었다는 점 때문에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피라미드가 파라오의 무덤이라면 굳이 하나 이상을 지을 이유가 없다).

 

 

피라미드 건설의 또 하나의 유력한 원인은 바로 나일강의 범람이다. 에티오피아 고원의 폭우로부터 비롯된 나일강의 범람은 농토를 비옥하게 만들어 이집트의 번영을 가능케 했지만, 범람했던 계절에는 농토의 대부분이 물에 잠겨 농업이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수많은 농민들의 일터와 생계수단을 앗아갔다. 따라서 실용적인 목적으로 엄청난 노동력과 자원이 필요한 피라미드의 건설을 통해 실직 상태인 농민들에게 일터와 임금을 제공하여 경제를 안정시켰다는 주장이다.

 

이외에도 피라미드의 건설에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 일단 이 엄청난 건축물들이 4500년 전에 건설되었다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특히 쿠푸 왕의 대 피라미드에는 2톤 이상의 돌들이 무려 230만 개 이상 사용되었는데 이 당시 이집트인은 수레나 말을 이용한 운반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레나 굴림대를 제외하면 오로지 인력에만 의지하여 작업이 이루어 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현재까지도 어떻게 당대의 기술로 이러한 건축물을 만들었는지를 명확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피라미드의 각 꼭짓점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으며 돌들이 아주 정교하게 쌓여져 있어 작은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각 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면의 모든 돌들이 약간 중앙을 향해 기울어져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만약에 피라미드가 붕괴되더라도 안으로 붕괴되도록 설계하여 견고함을 높이기 위한 건축기술이었다.

 

피라미드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로, 영화나 책에서 보여지는 피라미드의 건설 현장에서는 노예들이 착취를 당하며 노동을 하는 장면들이 묘사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피라미드가 건설되었던 기원전 25세기의 고대 이집트에는 노예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꾼들은 매일 무거운 돌을 운반하고 쌓아야 했기 때문에 좋은 건강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해 좋은 보살핌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석공과 건축가, 기술자들 밑에서 일을 했고, 피라미드 주변에는 일꾼들의 마을이 존재했다. 일꾼들의 마을이 있던 터에서 발견된 상형문자로 기록된 석판에서 일꾼들의 업무일지가 발견되었는데 일을 나오지 못한 이유 중에 과음과 숙취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일꾼들이 일방적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잃어버린 역사 - 네 번째 피라미드와 제데프레 왕

 

기자의 3대 피라미드는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네 번째 피라미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앞서 언급했듯이, 기자의 피라미드는 모두 제 4왕조의 파라오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당시는 피라미드 건설의 전성기였고, 모든 파라오들은 왕위에 오른 시점부터 자신의 피라미드 건설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제 4왕조에서 왕위에 올랐던 파라오는 쿠푸 왕과 그의 아들 제데프레 왕, 카프레 왕, 그리고 쿠푸 왕의 손자 멘카우레 왕으로 총 4명인데, 이 중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만이 기자 평원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데프레 왕은 왜 유일하게 기자에 피라미드를 남기지 않았을까? (이집트 제 4왕조 계보 자료)

 

제데프레 왕에 대한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전통적으로 그는 악질적인 파라오로 묘사되어왔다. 에밀 샤시냐 등 초기 이집트 학자들에 따르면, 제데프레 왕은 왕위 계승자이자 형인 카와브 왕을 죽이고 그 직후 자신의 누이이기도 한 형수와 결혼하는 등 8년 동안 파렴치한 통치를 하다가 이복동생인 카프레에게 암살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한 근거는 아부라와슈에서 발견된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의 흔적에서 나왔다.

 

아부라와슈의 폐허에서 제데프레 왕의 조각상들은 모두 부서진 채로 발견되었는데, 조각상에 영혼이 깃들어 산다고 믿었던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조각상을 부순다는 것은 내세에서의 영원한 죽음을 뜻하며, 이는 극악한 범죄에 대한 복수였기 때문에 초기 이집트 학자들은 제데프레 왕이 그가 저지른 극악한 범죄들로 인해 살해되고 그의 조각상들마저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의 흔적이 기자 평원이 아닌 아부라와슈에서 발견된 것 또한 가족에 대한 배신으로 해석했다. 위와 같은 근거들을 토대로 제데프레 왕은 역사에서 악독한 왕으로 기록되어왔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와 새로운 증거들은 이 주장의 정당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붕괴되어 흔적만이 남아있지만,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는 기자 평원으로부터 약 8km정도 떨어져 있는 아부라와슈에 있었다. 아부라와슈는 군사지역 내에 위치하고 있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은 허가되지 않지만 소수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잃어버린 4번째 피라미드의 비밀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초기 이집트 학자들이 제데프레 왕이 자신의 피라미드의 위치를 아부라와슈로 정한 것을 가족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현대 이집트학자들은 이를 지극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보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통해 자신의 권력과 힘을 과시했는데 재임 기간 내에 완성을 해야 했기 때문에 크기로 승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제데프레 왕은 짧은 시간 내에 높은 피라피드를 짓기 위해 이미 120m 높이의 아부라와슈 언덕의 꼭대기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현재까지 가상으로 복원된 자료에 따르면, 제데프레 왕의 피라미드는 68m 높이에 120m의 언덕 높이를 더해 아버지 쿠푸 왕의 피라미드보다 조금 더 높았으며, 12m의 아스완 화강암을 토대로 매끈한 석회암과 호박금을 씌운 정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쿠푸 왕이 석회암보다 훨씬 단단한 화강암을 피라미드 내의 내실 보호를 위해서만 사용했던 것과 달리 제데프레 왕은 최초로 화강암으로 피라미드의 외벽을 건설했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회암과 달리 화강암은 나일강 하류 아스완으로부터 960km 뱃길을 따라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화강암의 사용은 막강한 힘을 상징했다. 이러한 화강암을 건물 외벽에 사용했다는 것은 제데프레 왕의 강력한 힘과 통치력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최근 기자 평원에서 발견된 새로운 증거들 또한 제데프레 왕의 삶을 재조명한다.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앞에 서있는 스핑크스는 원래 카프레 왕의 조각이라고 믿어져 왔다. 하지만 카프레 왕의 모든 조각상에는 턱수염이 달려있고 머리 장식에 주름이 없는데 반해 스핑크스에는 턱수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머리 장식에 주름이 존재한다. 즉,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앞에 있는 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의 조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와 신전을 잇는 선이 스핑크스를 우회하는 것을 보면, 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이전에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스핑크스는 누구의 조각상일까? 수년 간의 연구 끝에 스핑크스의 얼굴은 쿠푸 왕의 작은 조각상과 가장 닮아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지만, 쿠푸 왕이 스핑크스를 건설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증거에 의하면 쿠푸 왕은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자원을 쏟아 부어서 대피라미드의 건설에만 집착한 폭군으로서, 다른 공사에 자원을 배분할 여유가 없었고, 스핑크스와 같은 대규모 공사를 벌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리하면, 스핑크스는 쿠푸 왕이 건설한 것은 아니지만 카프레 왕 이전에 이미 완공되어있었다. 그렇다면 스핑크스를 건설했을 가능성이 있는 왕은 단 한 명, 바로 제데프레 왕이다. 아부라와슈에서 출토된 스핑크스의 얼굴과 사자의 몸통부분 조각상이 제데프레 왕이 아버지 쿠푸 왕의 스핑크스를 건설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 옆 구덩이에서 발견된 신성한 배에서도 제데프레 왕에 대한 새로운 진실이 밝혀졌다. 신성한 배의 용도는 사카라의 상형문자에 설명되어있는데, 이 배의 용도는 파라오의 내세로의 편안한 여행을 위함이다. 쿠푸 왕에게 이 신성한 배를 선물한 사람의 이름은 아직도 구덩이에 쓰여있다. 바로 제데프레 왕이다. 추가적으로, 제데프레 왕이 형인 카와브 왕을 암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에 큰 힘을 실어주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왕위 계승자였지만 계승을 하지 않은 카와브 왕의 딸인 메레산크의 무덤에서 제데프레 왕의 이름이 발견된 것이다. 만약 제데프레 왕이 카와브 왕을 죽였다면, 카와브 왕의 딸이자, 다음 계승자였던 메레산크가 아버지를 죽인 자의 이름을 자신의 무덤에 기념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2)              

                             

제데프레 왕이 아버지인 쿠푸 왕을 조각한 스핑크스를 건설하고 아버지의 평안한 사후세계를 위해 신성한 배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메레산크의 무덤에서 발견된 증거를 고려한다면, 제데프레 왕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는 불효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기념한 효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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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ko.wikipedia.org/wiki/%EC%B9%B4%EC%9D%B4%EB%A1%9C

2) History Channel, “The Lost Pyram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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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심벨

2013. 9. 14. 22:03

 

아부심벨

 


이집트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나일 강을 따라 이집트 최남단 수단과의 국경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아스완 댐으로 인해 형성된 거대한 나세르 호가 있는 도시, 아스완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서쪽 강변을 향에 나아가다 보면, 사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에 지어져 있는 대 암굴신전을 만나게 된다. 이곳이 바로 이집트 왕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가 자신과 신을 기리기 위해 지은 아부심벨 신전이다.

 

이집트의 세 명의 신 레 하라크티와 아몬, 프타하와 함께 자신을 기린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해 하트호르 여신에게 바친 소신전으로 이루어진 아부심벨 신전의 규모는 상상이상으로 컸다. 높이 21미터에 달하는 람세스의 좌상 4개가 입구에서부터 세워져 있었으며,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8개의 기둥이 들어선 객실을 시작으로 두 번째 객실과 여러 개의 문(혹은 세 번째 객실), 신을 기린 지성소 까지 일직선으로 절벽 내부를 향해 들어서 있었다.

 

이정도 규모의 신전을 피라미드나 여타 다른 왕이 세운 신전들과 달리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 조성하기 위해선 반드시 엄청난 인력과 비용이 필요했을 것이다. 땅속 신전이 다른 신전들보다 인력이 많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집트야 뭐 거대 석조 건물과 석상이 넘쳐나는 나라니 별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신전이 대단한 이유는 신전의 가장 안쪽, 지성소에 있다. 세 명의 신을 기린 신전이지만, 지성소에는 나란히 4개의 신상이 있다. 왼쪽부터 프타하의 신상, 아몬의 신상이 있고 가장 오른쪽에 레 하라크티의 신상이 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신상은? 바로 당대의 파라오, 람세스 자신의 신상이다. 그는 아부심벨을 통해 자신을 신의 반열에 올렸던 것이다.

 

 

스스로 신의 반열에 오른 파라오

 

파라오는 죽고 난 이후에 신이 된다고 생각했던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을 고려해보면 이는 대단히 파격적인 처사였다. 파라오가 거대 건축물들을 지을 수 있었던 바탕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의 권력도 있었지만, 신전이 갖는 종교적 의미와 이집트 국민들이 가졌던 내세관이 주요했기 때문에, 국민의 납득 없이 스스로를 신격화할 신전을 짓는 것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즉 람세스가 이룬 업적은 국민들에게 신으로 인정받을 만큼 대단했다는 것이 되겠다.

 

뭘 저질렀기에?

 

신왕국 시대 제 19대 왕조에 속하는 람세스 2세는 24살부터 통치하기 시작해서 66년간 이집트를 지배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이집트인의 평균 수명인 30세의 세 배에 해당하는 90살까지 살았으며, 200명이 넘는 첩과 부인을 두고 100명이 넘는 자녀를 낳기도 했다고 한다. 이집트 전역에 걸쳐서 권력의 상징인 신전들을 아아주 많이 건설하여서 가는 유적마다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람세스 2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수많은 건축물들이다.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는 것은 당시가 매우 풍요로웠음을 보여준다. 경제적으로 볼 때 그가 통치하던 시기는 나일 강이 크게 범람해서 풍년인 해가 많았다. 이집트 경제는 나일 강에 크게 의존하였는데, 이게 넓게 범람할수록 더 많은 땅에 영양분이 공급되어서 농경지가 넓게 조성되어 풍년을 이뤘기 때문이다. 람세스 2세는 엘레판티네 섬에 있는 나일로미터와 같은 수위계를 이용해 범람 규모를 예측하여 농사가 얼마나 잘될지 내다볼 수 있었고, 풍년인 정도에 따라 세금을 올리거나 낮추는 수학적인 조세제도를 마련했다. 여기에 당시 개발되었던 방아두레박이라는 기구로 범람이 끝난 후에 농경지로 물을 쉽게 끌어올 수 있게 되어 더욱 효율적인 농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이것들을 이용하여 세금을 더욱 많이 거둘 수 있었다. 강이 범람해서 농사를 못 지을 때엔 농부들을 신전을 짓기 위한 인력으로 썼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람세스 2세는 짓기도 많이 지었지만, 역대 파라오들이 세운 수많은 건축물들에 새겨진 그들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대신 새겨 넣는 일에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 역대 파라오들의 업적을 자기 것으로 돌려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한 작업인데, 사실 이건 파라오가 바뀔 때마다 반복되어왔던 관습이었다. 다만 양각으로 이름을 새겼던 전통과는 달리 후대 파라오들이 절대로 건드릴 수 없도록 깊게 음각으로 파서 영원히 자신의 이름이 남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었다. 기둥에 새긴 이름을 지웠다간 건물이 무너질 정도? 농담이지만.

 

 

건축 덕후가 된 이유?

 

그가 이렇게까지 건축에 집착한 이유는 자신의 가문, 19대 왕가의 정체성에 있다. 19대 왕가는 정통 왕의 혈통이 아닌 군인의 가문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렇기에 평민출신이라는 굴레에 엮여 왕위의 정당성이 부족했다. 당연히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어 왕좌를 굳건히 다져야 하는데 람세스 2세의 조부인 람세스 1세는 뭔가 시도 해보기도 전인 재위 1년 반 만에 통치를 끝냈고, 부친인 세티 1세 또한 11년의 재위기간에 그쳐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진가를 국민들에게 보여주기엔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람세스 2세는 이에 위기를 느껴 재위기간 내내 건축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람세스 2세는 자신이 지은 수많은 건축물들 위에 벽화와 글을 새김으로써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고 때로는 왜곡하기도 하면서 국민들에게 자신의 강력한 파라오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켜나갔다. 아부심벨 내부에도 그런 흔적이 남아있다. 정면의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기둥이 많은 방, 즉 다주식 홀이 나오는데, 이 방의 벽에는 전사로서 부각된 람세스 2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아부심벨 내부의 카데시 전투 벽화 묘사 ---  이 전투는 지금의 시리아가 위치한 지역에서 일어났던 전투인데, 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융성하던 히타이트 왕국과 벌어진 전쟁이었다. 벽화에서는 이집트 병사가 모두 달아난 와중에도 람세스 2세가 아문신의 도움을 얻어 홀로 적을 제압했다고 나오지만, 현대의 전해지는 여러 정황들과 기록을 살펴볼 때 그는 목숨을 건졌을지는 몰라도 이기진 못했고 시리아지방도 이집트에 속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사실을 왜곡한 것인데, 자기과시욕이 강했기 때문이건 평민이었던 신분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이건 그가 이런 왜곡된 사실을 카르나크 신전과 같은 다른 유적에도 기록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에 바빴고, 이를 통해 왕위에 대한 정당성을 얻고자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미지 통제와 선전 전략의 대가였던 것이다.

 


평균 수명의 세 배를 산만큼 진실을 왜곡하는 것도 수월하지 않았을까. 그에 의해 세워진 수많은 건축물들과 이름이 고쳐진 유적들,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람세스 2세에 대한 찬양을 담은 벽화에 둘러싸인 채로 새로이 태어난 이집트 국민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오래 삶을 영위하는 파라오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이제는 그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신의 존재가 되었음을 의심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미지 통제에 성공하여 국민들의 자발적인 승인을 받아 내었든, 강력한 왕권으로 억눌러 강제로 복종을 이끌어 내었든 그의 선전 전략의 최종 목표였던 아부심벨 신전은 완성되었다. 이 신전의 건립으로 그는 살아생전에 신으로 추앙받았던 유일무이한 파라오가 되었다.

 

 

+TIP !

 

햇살의 과학

아부심벨 대신전 제일 안쪽의 지성소에는 오른쪽에서부터 떠오르는 태양의 신인 라 하라크티신, 신격화한 람세스 2세, 테베의 주신이며 땅의 생식 본능을 지배하는 아몬신, 어둠을 솟아나게 하는 프타 신의 좌상이 나란히 서 있다. 동굴 안의 신상들은 매우 정교하게 배치되어 2월 20일쯤에는 동굴 깊숙이 들어온 햇살이 약 20분 동안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아몬신, 람세스 2세, 라 하라크티신을 차례로 비췄다. 10월 20일쯤에는 반대로 햇살이 가장 오른쪽의 라 하라크티신을 비춘 후 차차 왼쪽으로 옮겨졌는데, 어둠의 신인 프타신 상은 왼쪽 어깨에만 살짝 햇살이 머물다 간다고 한다.

 

소신전

대신전 옆에는 아부심벨 소신전이 있다. 사랑과 음악과 춤의 여신인 하토르 여신(호루스신의 아내)과 람세스 2세의 부인 네페르타리 왕비를 기리는 작은 신전인데, 이 신전들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 이집트의 지도자 나세르가 나일강을 막아 아스완에 댐을 건설하려 하자,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될 것을 염려한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1963년부터 약 10년 동안 해체해 원래 위치보다 약 210m 뒤쪽, 650m 더 높은 지역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67년간 지배, 신전 다수 건설, 일자리,수도 건설, 신을 자처한 유일한 왕

  

이 부조들은 람세스 2세가 주도한 카데쉬 전투의 승리를 묘사한 것이다. 카데시 전투는 현재 시리아 영토에서 벌어진 이집트와 히타이트 왕국 간의 대규모 전투다. 이집트는 기원전 13세기쯤 아나톨리아 반도의 하투샤(현재 터키 중부의 보아즈칼레)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던 히타이트 왕국과 근동 지방을 중간에 두고 다투고 있었는데,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74년 4월 카데쉬를 향해 약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을 떠난다.

 

람세스 2세는 한 달 뒤 적군의 속임수에 걸려 위기에 처한다. 히타이트군의 공격에 이집트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홀로 싸운 람세스 2세는 아문신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고 이집트의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후일 밝혀진 히타이트 측의 기록과 객관적인 정세로 볼 때 람세스 2세는 필사적으로 탈출했을지언정 승리하지는 못했고, 카데시도 여전히 히타이트 왕국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람세스 2세는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아부심벨 신전 등에 자신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부조들을 새겨 놓았다. 후대 학자들은 이런 람세스 2세를 자기현시욕이 매우 강하고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기록을 이용해 현실을 지배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보아 람세스 2세 치하에서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대탈출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약 66년간 고대 이집트를 연구해 온 크리스티안 데로슈 노블쿠르에 의하면,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서 그 같은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시절 많은 유대인들이 왕릉이나 신전을 건설하는 데 동원되었는데, 아마도 이집트인들에게는 사소한 사건을 나중에 유대인들이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탈바꿈시켰다고 그는 추측하기도 한다.

 

 

아부심벨 대신전 제일 안쪽의 지성소에는 오른쪽에서부터 떠오르는 태양의 신인 라 하라크티신, 신격화한 람세스 2세, 테베의 주신이며 땅의 생식 본능을 지배하는 아몬신, 어둠을 솟아나게 하는 프타 신의 좌상이 나란히 서 있다. 동굴 안의 신상들은 매우 정교하게 배치되어 2월 20일쯤에는 동굴 깊숙이 들어온 햇살이 약 20분 동안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아몬신, 람세스 2세, 라 하라크티신을 차례로 비췄다. 10월 20일쯤에는 반대로 햇살이 가장 오른쪽의 라 하라크티신을 비춘 후 차차 왼쪽으로 옮겨졌는데, 어둠의 신인 프타신 상은 왼쪽 어깨에만 살짝 햇살이 머물다 간다고 한다.

 

대신전 옆에는 아부심벨 소신전이 있다. 사랑과 음악과 춤의 여신인 하토르 여신(호루스신의 아내)과 람세스 2세의 부인 네페르타리 왕비를 기리는 작은 신전인데, 이 신전들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 이집트의 지도자 나세르가 나일강을 막아 아스완에 댐을 건설하려 하자,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될 것을 염려한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1963년부터 약 10년 동안 해체해 원래 위치보다 약 210m 뒤쪽, 650m 더 높은 지역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누비아는 고대 아프리카 북동부에 있었던 지명으로, 이집트인이 이 지방의 흑인을 놉(Nob) 즉 노예라고 부른 것이 ‘누비아인’으로 되어 누비아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남서쪽 코르도판 고원에 사는 부족이 누바(Nuba)라고 불리는 것도 같은 어원에서 온 것이다. 누비아인은 누비아 사막지대의 나일강 유역에 살던 농민인데, 이집트의 아스완하이댐 건설로 생긴 나세르호(湖) 때문에 이 지역이 수몰되어 1961년부터 수단 정부의 도움으로 누비아사막 남쪽 끝 아토바라강(江)의 에티오피아 국경에 가까운 곳에 건설된 하슴 엘 길바 댐 부근의 농경지로 집단이주하였다.

 

누비아의 유적은 나일강 상류의 제1폭포에서 제4폭포에 이르는 하안지역(누비아)에 산재한다. 즉, 이 지방은 황금 •석재의 산지이며, 또 상아 •흑단 •진귀동물 등을 생산하는 아프리카 오지(奧地)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집트 국왕들은 때때로 원정하여 이곳을 영유하였다. 따라서 구석기시대부터 이슬람 침입까지의 각 시대의 신전 •성채 •비문 •분묘 등의 유적이 많다. 특히, 아부심벨신전(神殿), 제벨 바르칼에 있는 신전군(群), 쿠르르와 누리에 있는 나파타 왕국의 피라미드군(群)은 중요하다. 그러나 아스완하이댐 건설로 물 밑에 가라앉는 유적의 구제조치로서 1960년부터 국제적인 규모의 조사와 아부심벨 •칼라브샤 •케르타시 •덴두르 •겔프후세인 등 주요 신전의 이축(移築)이 이루어졌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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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프롤로그

2013. 9. 14. 21:58

 

이집트 프롤로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함께 찬란한 인류 문명의 발생지로 알려진 이집트는 그 화려한 문명과 수많은 유적만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방대한 이집트의 역사를 몇 페이지 안에서 전부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이집트를 풀어내기에 앞서 간략히 이집트의 역사 흐름을 살펴보자.

 

이집트의 역사는 크게 고왕국시대와 신왕국시대로 나눌 수 있다. 파라오와 피라미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고왕국시대는 기원전 3000년경 나르메르(혹은 메네스)가 상·하 이집트로 나누어져 있던 이집트를 통일하고 수도를 멤피스로 정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이집트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피라미드가 최초로 건설된 것은 고왕국시대 제 3왕조 2대1)군주인 조세르가 사카라에 계단식 피라미드를 건설한 때이다. 이후 제 4왕조 때에는 본격적으로 피라미드 건설이 이루어졌는데 가장 유명한 피라미드인 기자의 세 피라미드가 이 시대에 건설되었다. 하지만 영원히 강한 나라는 없다2)는 말이 있듯이 6왕조 시대로 넘어가면서 이집트 고왕국시대도 기울기 시작했다. 그 자체로 인간이자 신인 파라오의 절대 권력이 약화되고 중앙집권 체제가 흔들리면서 이후 7~10왕조는 혼돈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 혼란은 11왕조의 멘투호텝 2세가 분열된 이집트를 재통일하면서 종식되었다. 이집트가 재통일된 시기를 고왕국시대와 신왕국시대 사이의 중왕국시대라고도 한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힉소스족의 침략으로 인해 16왕조와 17왕조의 이집트에는 다시 혼란의 시대가 찾아왔다.

 

 

신왕국시대는 아모시스 파라오가 힉소스족을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18왕조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신왕국 시대의 수도는 테베(지금의 룩소)로 거대한 신전들과 많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아메노피스 1세(기원전1526~1505)때 중앙권력이 회복되었고 이집트의 영향력이 유프라테스강까지 확대되었다. 도굴꾼들이 활개를 치자 피라미드로부터 멀리 떨어진 왕가의 계곡에 무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여자 파라오로 유명한 하셉수트 여왕도 신왕국시대의 파라오였는데 하셉수트 여왕의 그늘에 가려졌던 아들 투트모스 3세가 하셉수트 여왕에 대한 복수로 그녀와 관련된 유적들을 처참하게 파괴한 것은 현대의 사람들에게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투탕카멘이 젊은 나이로 죽고 나서 궁중 감독관에 이어 왕위를 이어받은 장군 호렘헵이 장교 출신의 대신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이 사람이 람세스 1세가 되었고 19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에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자 건축가로 일컬어지는 람세스 2세가 등장했다. 람세스 3세, 람세스 4세…람세스 9세로 이어지는 신왕조의 역사는 민란으로 인해 다시 혼란에 빠지면서 끝났다. 이후 이집트는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고 마침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이 시대를 후기왕국시대라고도 한다. 이렇게 흥망성쇠를 반복하며 수많은 왕조와 파라오로 이어지던 이집트의 역사는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자살하고 이집트가 로마에 병합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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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프롤로그

2013. 9. 14. 21:56

 

에티오피아 프롤로그

 

 

‘에티오피아’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커피? 기아? 에티오피아 커피가 그렇게나 유명하지만 에티오피아가 3천년에 이르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가장 오래된 인류의 뼈가 발견된 곳이며 <아프리카의 스위스>라고 불릴만큼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에티오피아의 역사는 시바여왕과 솔로몬왕의 아들인 메넬리크 1세가 건설한 악숨 왕국으로부터 시작된다. 에티오피아의 고대 왕국인 악숨 제국은 홍해를 건너 남아라비아를 영토로 삼아 메카로 따라갈 정도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아프리카 유일의 문자를 만들어낼 정도로 부흥했다. 또한 악숨은 기독교 왕국으로 유명한데 기원전 330년에 성 프루멘티우스(St Frumentius)에 의해 악숨 왕조에 기독교가 전래된 후 기독교 왕국으로 부흥했다. 실제로 우리는 여행을 하며 에티오피아 북부 지역에서 많은 기독교 유적을 볼 수 있었다.

 

곤다르의 파실다라스 궁전과 베르한 셀리시에 교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랄리벨라 암굴성당을 보며 에티피오피아의 과거가 얼마나 화려했는지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러나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힘을 얻은 이슬람 왕국의 위협을 받게 된 악숨 제국은 결국 쇠퇴하고 이슬람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됐다. 에티오피아의‘하라르’는 커피로 유명한 지역이기도 하지만 이슬람 성지이기도하다.

 

에티오피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바히르다르에는 이집트 문명을 발생시킨 나일강의 원류(原流)인 타나 호수가 있다. 이곳에서 본 청나일 강의 폭포는 가히 아프리카 최고의 폭포라 불릴만한 장관이었다. 바히르다르에서 남동쪽으로 내려오면 현재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가 있는데 아디스아바바는 1889년 메넬리크2세가 수도를 이전하면서 수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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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익숙한, 고대 왕국의 도시 악숨.

2013. 9. 14. 21:53

 

알고 보면 익숙한, 고대 왕국의 도시 악숨.

 

 

오랜 시간 버스를 달려 악숨(Aksum)에 도착했다. 악숨이라.. 우리나라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악숨이라는 도시에 대해 들어볼 기회가 있을까? 나도 이번 여행을 준비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악숨은 에티오피아 북부 지역에 터를 잡고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번성했던 “악숨 왕국”의 수도였고, 그 악숨의 고고유적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이라고 한다. 또한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악숨 왕국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들어봐도 내겐 익숙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 악숨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보니, 사실 우리는 이미 악숨의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모세의 십계명, 오벨리스크, 솔로몬 왕, 헨델의 오라토리오 <솔로몬> 중 <시바 여왕의 도착>, 그리고 인디아나 존스. 살면서 이들 중 적어도 두 개쯤은 다들 들어본 기억이 있지 않을까? 설령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는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 정도면 악숨이라는 도시에 대해, 또 악숨 왕국이라는 역사 속 왕국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악숨 왕국은 기원 전 10세기 경에 세워져 기원 후 7세기 경에 쇠퇴하였다.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이 위세를 떨치던 시기에는 아프리카 동북부에서 중요한 무역 국가로 큰 정치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악숨 왕국은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수출품이었던 상아, 노예 등을 수출하고, 이집트로부터 의복, 유리 제품 등을, 인도에서는 철과 면포를 수입하면서 교류와 무역이 왕성했다. 7세기 경 이슬람 세력에 의해 쇠퇴하긴 했지만, 번성하던 시기의 악숨 왕국은 그 위세가 대단해 지금의 수단이나 예멘,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에 까지 이르는 영토를 가졌다 하니, 지금은 항구도 없는 내륙국가인 에티오피아에 비하면 꽤 잘 나가는 왕국이었음이 틀림 없다. 또, 그렇다 보니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이 악숨 왕국의 역사를 자랑스러워 한다. 우리 나라만 해도, 만주 지역을 넘어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역사를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렇게 융성한 왕국이다 보니,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기 위해 거대한 돌기둥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오벨리스크 이다. 그렇다. 유럽의 광장이나, 이집트에서나 있는 줄 알았던 오벨리스크가 악숨이라는 도시에는 수 백 개나 존재하고, 그 규모는 이집트의 것보다 웅장하다. 대부분은 화강암으로 조각되었고 그 지하에는 무덤이 존재한다. 가장 큰 오벨리스크는 길이 33m에 무게는 100톤에 이를 정도이지만, 이탈리아의 침략 당시 붕괴되어 쓰러져 있다. 다음으로 큰 오벨리스크는 침략 전리품으로 이탈리아에서 약탈해 갔었는데, 2005년에 반환되었다. 우리 나라도 얼마 전 ‘외규장각 의궤’가 반환되는 경사가 있었는데, 의외로 공통점이 많아 보이기도 한다.

앞서 말한 솔로몬 왕이나 헨델은 대체 어떻게 악숨 왕국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아직은 감도 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이 악숨 왕국이 건국 되던 당시의 아주 흥미로운 역사와 관련이 되어있다.

 

솔로몬 왕은 다들 알다시피 무척이나 현명했다. 두 여인이 서로가 아이의 어머니임을 주장하자 “저 아이를 반으로 갈라 나눠주어라.”라는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판결을 내린 솔로몬 왕 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솔로몬’이 ‘지혜로운’이라는 형용사처럼 여기저기에 쓰이고 있으니 더욱 익숙하다. 이 솔로몬 왕이 “지혜의 왕”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시절, 이웃 나라였던 시바 왕국에는 매혹적이기로 유명했던 시바 여왕이 있었다. 시바 여왕은 솔로몬 왕의 유명세를 듣고서는, 그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보물을 잔뜩 챙겨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시바 여왕의 화려한 방문은 후에 “음악의 어머니”인 헨델에 의해 음악으로 화려하게 표현되었는데 헨델의 오라토리오 <솔로몬> 중 <시바 여왕의 도착>이 그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 여왕은 솔로몬 왕을 시험하기 시작했고, 성경에 나오는대로1)  솔로몬 왕은 시바 여왕의 시험을 무난하게 통과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둘은 서로의 매력에 이끌려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로맨스의 결과, 시바 여왕은 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악숨 왕국을 건설한 메넬리크 1세이다.

 


악숨에서는 시바 왕국의 궁터와 왕국의 주인이었던 시바 여왕의 목욕탕을 찾아볼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지만 그 배수시설이나 설계 구조가 아주 뛰어나다고 한다. 일행들과 시바 여왕의 솔로몬 왕과의 러브스토리를 재구성하면서 돌아보았더니 더욱 흥미로웠다.

흥미로운 출생의 비밀을 가진 메넬리크 1세는 우리가 악숨에서 반드시 찾는 또 하나의 유적지를 만들어내는데, 바로 성모 마리아 시온 성당(Saint Maria of Zion)이다.

 

메넬리크 1세는 에티오피아 중북부의 타나 호수에서 엄청난 물건을 찾아 악숨으로 돌아오니, 그것이 바로 모세의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 원본과 석판을 보관하는 성궤였다.2)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으로 유명한 바로 그 십계명! 그리고 영화 속에서 인디아나 존스가 죽을 힘을 다해 찾아 헤맸던 바로 그 성궤! 메넬리크 1세가 찾아온 이런 엄청난 물건들이 바로 성모 마리아 시온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두 개의 성모 마리아 시온 성당들 사이에 있는 성궤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전설 속 이야기라, 또 성스러운 물건이 보관된 성스러운 장소에 일반인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니.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에티오피아 인들은 이 이야기를 사실로 여겨, 악숨은 그들에게 성스러운 도시라고 하니, 에티오피아를 찾는 사람에게 악숨은 고생스럽지만 반드시 들러야 할 장소임에 틀림이 없다.

 

참고문헌

1. Wikipedia

2. 성경

3. Stuart Munro-Hay. Aksum: A Civilization of Late Antiquity.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91.

4. Yuri M. Kobishchanov. Axum (Joseph W. Michels, editor; Lorraine T. Kapitanoff, translator). University Park, Pennsylvania: Penn State University Press,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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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바의 여왕이 주의 이름에 관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들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많은 수행원과 향료와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실은 낙차와 함께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라. 그녀가 솔로몬에게 나아가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솔로몬이 그녀의 묻는 말에 다 대답하였으니 왕에게 드러나지 아니하여 왕이 그녀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더라..’

열왕기 상 10장 1~3절

 

2) 메넬리크 1세가 십계명과 언약의 궤를 아버지인 솔로몬 왕에게서 받아왔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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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카멜롯’ 곤다르

2013. 9. 14. 21:50


‘아프리카의 카멜롯’ 곤다르

 

 

2012년 2월 1일, 우리가 인천공항에서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이집트 행 비행기를 탄 날이다. 미국은 우리보다 하루가 느리니까 2012년 1월 31일이겠지? 그런데 에티오피아 기준에서는 2005년이다. 무슨 말이냐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여 1월 1일을 새해로 맞이하는 데 반해, 에티오피아는 아직도 율리우스력을 사용해서 그레고리력에 비해 약 7년이 늦다. 즉, 우리는 2000년 1월 1일에 밀레니엄을 기념했지만, 에티오피아에서 밀레니엄은 2007년 9월 12일이었던 셈이다.

 

에티오피아의 새해는 “보석 선물”을 의미하는 Enkutatash라고 불린다. 시바 여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왕을 방문한 뒤 돌아왔을 때, 신하들이 보석을 잔뜩 선물해준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봄에 열리는 이 축제의 막바지에 비가 내리면, 모든 마을에서 춤과 노래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서양에서 굉장히 크게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는 어떨까? 에티오피아의 크리스마스는 1월 7일로, 리뎃(Lidet)이라고 불린다. 서양과 달리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이 날에는 교회에서 신도들이 여러 교회를 옮겨다니며 기도를 드리는 행사를 거행한다.

 

 

크리스마스 2주 뒤인 1월 19일, 그리스도의 세례의식을 기념하는 성대한 팀켓(Timket) 축제가 시행된다. 이 축제는 3일간 진행되는데, 팀캣 전날 에티오피아의 각 교회에서는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모여 흥겨운 음악에 춤을 추면서 시가 행진을 하고, 당일 아침에는 요르단 강에서의 예수의 세례를 기념한다. 팀켓은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데, 특히 곤다르에 있는 파실라다스 왕의 풀장에서 성대하게 거행된다.

 

곤다르(Gondar), 어린 시절 ‘반지의 제왕’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아라곤의 도시이자 왕의 도시라 불린 곤도르를 기억하시는지? 바로 이 곤도르의 모델이 되는 도시가 에티오피아에 있는 곤다르이다. 곤다르는 에티오피아 북서쪽에 위치한 암하라 주에 있는 도시로, 아디스 아바바에서 북쪽으로 약 500km 거리에 있다.

 

곤다르 왕궁은 영국의 전설적인 왕인 아서왕의 카멜롯 성에 비유되어 ‘아프리카의 카멜롯’이라고 불린다. 성채도시인 곤다르는 파실라다스 황제와 그 후계자들이 수도를 이전한 1855년까지 약 2세기 간 살았던 곳으로, 파실라다스 왕의 궁전 외에도 법원, 도서관, 수도원, 목욕탕 등이 들어서 있다.

 

 
1543년에 벌어진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전쟁에서, 기독교 진영을 돕기 위해 파견된 포르투갈 군대는 타나 호수 근처의 지역에 머물렀다. 당시 그 곳을 다스리고 있던 황제는 Susneyos였는데, 포르투갈 군대는 그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이후 Susneyos 황제는 에티오피아의 그리스 정교 신도들을 탄압했고, 수 천명의 신도들을 살해했다. 그 결과 국민들의 신임을 잃은 Susneyos 황제는 결국 1632년에 아들인 Fasilades 에게 왕위를 넘겨주어야 했다. Fasilades 황제는 1635년에 에티오피아의 첫 수도로 곤다르를 세우고, 성과 7개의 교회를 지었다.

 

곤다르 왕궁은 돔 형식 탑 4개가 있는 아치형 성문을 한 3층짜리 궁전인데, 1층은 연회장과 공식 접견실로 이용되었으며 2층에는 파실라다스 황제의 기도실이 있고, 3층에는 왕의 침실이 있다. 지붕 위는 황제가 연설하는 장소 및 종교적인 행사장이었다고 하는데, 탑에서 바라보면 아름다운 타나 호수가 보인다고 한다.

 

파실라다스 궁전 옆에는 파실라다스 황제의 손자인 이야수 1세 황제가 세운 이야수 궁전이 있다. 이야수 궁전은 3층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 모양이 말안장과 비슷한데, 내부 장식이 화려하여 과거에는 솔로몬의 성보다 아름답다는 찬사를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1864년 화재 이후 수단의 무슬림 등에 의한 여러 번의 침략으로 곤다르는 몰락하게 되었다. 게다가 1936년 이탈리아의 정복 이후, 곤다르는 이탈리아의 지배하에 놓였고, 1943년 2차 세계대전에서 아디스 아바바를 점령한 영국 군대에 대항하기 위한 이탈리아 게릴라의 활동 중심지가 되면서 유적 대부분이 소실된 상태이다.

 

 

성에서 나와 천장벽화로 유명한 데브레 베르한 셀리시에(Debra Berhan Selassie) 교회에 갔다. 이 교회는 17세기에 이야수 1세가 건립한 교회로, 곤다르에 있는 44개 교회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교회다. 교회 안은 온통 다양한 색의 벽화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천장에는 머리에 날개가 달린 천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80개의 천사들의 표정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정면의 벽에는 십자가에 못 밖힌 예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른 벽에는 에티오피아 성인과 순교자들이 그려져 있으며, 이야수 1세 황제의 초상화도 그려져 있다.

 

 

200년 간 수단과 이집트, 아랍세계를 연결하는 거점으로서 번성했던 곤다르, 과거 화려했던 왕국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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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완

2013. 9. 14. 21:47

 

아스완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부터 나일강의 상류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집트의 남쪽 끝 도시, 아스완이 보인다. 이집트의 큰 도시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아스완도 나일강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나일강의 동쪽 강가에 큰 도시가 들어서 있고, 서쪽해안으로는 사막이 보인다. 나일강이 얼마나 넓은지 그 위에 몇 개의 큼지막한 섬들이 있다. 섬들에는 문화유적은 물론이고, 수목원, 박물관, 독특한 누비아인 마을까지 볼거리도 각양각색이다. 나일강 위에는 낮잠을 즐기는 듯 물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전통배 펠루카들이 둥둥 떠다닌다. 수도와 먼 이집트의 끝부분이어서인지, 아스완은 북적북적대던 관광객들이 많이 줄어들어 한가한 느낌을 주는 도시이다.

 

수도와 멀고 한적해 보이는 이 도시는 얼핏 변두리 같다는 느낌을 주지만 사실 그렇게 밋밋한 도시는 아니다. 아스완은 그 역사가 이집트 고왕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도시이다. 이집트의 국경지역에 있기 때문에 고왕국 시절부터 군사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아스완은 남쪽의 이웃나라 누비아1)와 바로 인접하여 때로는 지배하고, 때로는 지배당하기도 하며 서로 문화적인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남쪽 나라에서 온 상인들에게 아스완은 이집트로 들어가는 입구도시였다. 그래서 아스완에는 예로부터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온 상인들이 모여들었고, 각종 물품이 거래되는 큰 시장이 발달했다. 아스완에서 상업이 얼마나 발달했었는지는 그 이름에 확실히 나타난다. 과거에 이집트에서는 아스완을 고대 이집트어로 ‘무역’이라는 의미의 스웨넷이라고 불렀고, 나중에 아랍어로 ‘시장’을 뜻하는 아수안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은 아스완이라고 불린다. 또한 아스완은 좋은 돌이 많이 났기 때문에 이집트의 거대 피라미드와 다양한 조각품들에 쓰이는 화강암을 공급하는 주요 도시이기도 했다.

 

아스완의 도심은 지금 대부분 나일강 동쪽 변에 위치하지만, 옛날 아스완에서 가장 발달했던 곳은 강변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옛날 아스완의 중심지는 나일강 위 가장 큰 섬인 엘레판티네섬이었다고 한다. 이 섬은 고대도시 ‘아부‘가 있었던 곳인데, 아부는 고대 이집트어로 코끼리와 상아 모두를 가리킨다고 한다. 섬 이름이 상아라니! 섬에서 상아시장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까. 마치 제주도를 ’감귤‘이나 ’한라봉‘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집트의 끝이면서 입구이기도 했던 아스완에 있던 섬 도시 아부. 그 역사는 이집트 최초의 파라오 나르메르가 지중해에서부터 아스완까지 아우르는 통일 이집트를 건설했던 기원전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로마가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던 기원후 300년까지 약 3300년의 긴 세월동안 아부는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그리고 아부에서는 나일강이 범람할 때 밀려오는 물의 소리를 가장 먼저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아부는 나일강의 근원이 되는 신인 크눔을 숭배하는 종교의 중심지였다.

 

크눔신은 초기 이집트 신들 중에 하나로, 양의 머리를 하고 있는 신이다. 처음에는 나일강의 근원이 되는 신이었으나 나중에는 생명을 창조하는 신으로 섬겨졌는데, 그 이유는 나일강의 물이 매년 범람하여 주위의 땅에 비옥한 흙을 실어다 주고, 건조한 땅을 적셔 생명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신화에 따르면 크눔은 물레에서 진흙으로 아이들의 몸을 빚어 어머니의 자궁에 넣어놓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로 치자면 아이들을 점지해주시는 삼신할머니와 비슷한 일을 한다. 옛날 우리나라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부의 여인들도 크눔신에게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빌었을까. 크눔신을 믿는 종교의 세력은 아부의 역사와 함께하며 성장했고, 아직도 엘레판티네 섬에는 크눔신의 신전과 크눔신으로 여겨졌던 신성한 양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집트가 로마에게 정복당하고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이집트에도 전파되면서, 고대 이집트 신들은 점점 버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크눔신을 섬기던 도시 아부도 쇠퇴하여 아스완의 중심은 동쪽 강변으로 옮겨가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엘레판티네 섬은 크고, 역사가 오래된 만큼 볼거리도 많다. 옛날 아부의 원형을 간직한 유적들과 멋진 아스완 박물관, 다채로운 누비안 마을은 아스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들이다. 먼저, 아스완 박물관은 엘레판티네 섬의 남쪽 끝에 위치해있다. 박물관의 입구로 들어가니 방 하나에 따로 전시되어 있는 양의 미라와 돌로 만든 관이 보인다. 이 양은 앞서 말한 크눔신과 관련된 신성한 양이라고 한다. 박물관의 중심부로 가면 아스완과 누비아 지역에서 발굴된 골동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옛날에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소품, 무기, 그릇, 수저 같은 물건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유물들은 유리진열장 안에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으며 설명까지 친절하게 되어있다.(비록 영어이지만.) 이제 박물관을 어느 정도 둘러보고 슬쩍 빠져나와 뒤에 있는 정원으로 향하기로 한다. 신기하게도 정원은 고대 아부 유적들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20세기 초에 tm위스와 독일에서 아부 유적들을 발굴하기위해 팀을 파견했고, 발굴팀은 기원전 3000년에서부터 기원후 14세기에 이르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건물들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아스완의 도시 중심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아스완 댐이 있다. 이 댐은 외관이 썩 멋지지 않아 댐 애호가들에게서도 별로 사랑받지는 못하지만, 나일강을 통제하고 싶다는 이집트인들의 강한 바람이 담긴 의미심장한 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이집트인들은 나일강 주변의 농경지에 농사를 지어 살아왔는데,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댐이 지어지기 전에 이집트인들은 매년 나일강의 범람에 의지하여 농사를 지어왔다. 그러나 나일강의 범람은 일정치 않아서 범람이 잘 된 해는 풍작이었지만 반대로 범람이 적었던 해는 손 쓸 도리없이 흉작이었다. 그리고 나일강이 범람하는 지역은 한정되어 있어 세월이 지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농경지의 부족현상이 심해졌다. 건축기술이 발전하여 댐을 지을 수 있게 되자 이집트는 대규모의 댐건설에 착수했다. 1898년에 영국의 건축가 윌콕스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어 1902년에 완성된 것이 아스완 로우 댐이다. 그 후 한 차례의 증설 공사에도 불구하고 아스완 로우댐이 꽉 차자, 이집트에서는 7km 상류에 댐을 하나 더 짓기로 한다.

 

이리하여 지어진 것이 아스완 하이 댐이다. 기존의 로우댐과는 비교도 안되는 대규모의 공사였기 때문에 이집트는 자금조달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처음에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아스완 댐 건설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기로 했지만, 소련에게 무기를 조달받은 것을 계기로 지원이 끊긴다. 결국 이집트는 소련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아 하이댐 공사에 착수했고, 10여년의 공사 끝에 1970년 아스완 하이댐이 완공된다.  아스완 댐이 지어진 후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호수가 생겼는데, 이 호수의 이름은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나세르’호가 되었다.

 


아스완 댐의 건설 후 나일강을 상당부분 통제할 수 있게 되어 농업용수 공급과 농경지 확장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수력발전도 가능케 하여 주변 도시의 전기공급에도 큰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댐 건설 후에는 나일강에서 자연적으로 공급되던 풍부한 미네랄이 댐안에 쌓여있을 뿐 밖으로 나가지 않아 비옥하던 농경지가 점점 불모지로 변해가는 중이라고 한다. 또 바다에서는 어획량이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그뿐인가. 나세르호에 의해 원래 그 지역에 있던 문화 유적들은 이제 영영 가라앉아 버렸다.

 

아스완 댐의 건설로 가장 피해를 본 것은 침수지역에 살고 있던 누비안인이었다. 그들의 마을이 호수 속에 잠겨버리자 그들은 북쪽으로 이주하여 아스완, 콤옴보 등지에 새로 마을을 지었다. 앞서 말한 엘레파티네 섬에 있는 누비안 마을도 그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침수지역에 있던 문화유적들 중 아부심벨 같은 중요한 유적들은 유네스코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구해낼 수 있었던 다른 유물들은 아스완의 누비아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우리 같은 관광객들이 아스완에서 누비안 마을을 구경하고, 누비안 인들이 만든 기념품을 살 수 있게 된 것도 아스완 댐 건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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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비아(Nubia)는 이집트 남부의 나일강 유역과 수단 북부에 있는 지역이다. 누비아 지역 대부분은 수단 영토에 있으며, 1/4 정도만 이집트에 속한다. 고대에 누비아는 독립 왕국이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아프리카 테마 기행/아프리카 탐사단 AFRICA, allafrica, Nubia, 나일강, 누비아, 누비안인, , 아스완, 아스완 하이 댐, 아프리카, 엘레판티네, 올아프리카, 이집트, 크눔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