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의 비전 2030 프로젝트

2006. 10. 31. 11:38

우리나라에서 지난 8월 정부가 “한국이 2010년대에 선진국에 진입하고 2020년대에 세계 일류국가로 도약해 2030년에는 ‘삶의 질’ 세계 10위에 오른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정치적으로도 논란을 일으켰는데 케냐도 최근 비전 2030(Vision 2030)을 발표하면서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있다. 물론 이 발표가 현 집권당이나 무와이 키바키(Mwai Kibaki) 대통령이 자신들의 장밋빛 청사진을 단순히 제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는 그 결과가 말해주겠지만 그래도 이와 같은 청사진을 통해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러 넣고 또한 이 플랜을 통해 일관된 정책을 세울 수 있다면 그 목표달성은 크게 중요치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는 케냐의 개관과 비전 2030의 주요 내용이다.

케냐는 동부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로 영국의 식민지를 받아오다 1963년 독립하였다. 케냐는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과 동시에 반시장주의 사회주의를 채택한 것과는 달리 일찍부터 시장경제를 선택하여 동부아프리카에서 가장 선진화된 경제시스템을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이후 정치적 부패 등으로 IMF나 세계은행 등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지 못해 경제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2002년 수평적인 정권교체이후 부정부패 감소와 안정적인 정책으로 다시 경제가 호전되고 있다.


케냐는 동아시아의 싱가포르, 태국 그리고 말레이시아와 같은 잘사는 국가를 만들기 위한 국가적 플랜을 지난 10월 12일 발표하였다.

케냐 정부가 발표한 전략적 목표는 다음 25년간 연평균 10%의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것으로 1인당 소득은 현재의 33,120케냐실링에서 25년이 지난 시점에는 6배가 향상된 220,680케냐실링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또한 부의 지표인 국내총생산(GDP)는 현재 1조1천2백3억 케냐실링에서 25년 후에는 12조1천6백80억 케냐실링으로 증가시킨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케냐의 국가 경제사회운영위가 이끄는 국가발전변화인 케냐 비전 2030으로 불리는 이번 플랜은 10월 26일 대통령 키바키에 의해 선포되었다.

이번 계획은 아시아 호랑이라 불리는 싱가포르, 태국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경제개발의 전철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들 국가들은 30년전 케냐와 같은 발전의 단계를 걷고 있었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은 한세대가 지나자 산업화되고 현대화된 경제구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대통령이 의장으로서 국가 운영위원회를 이끌 것이며 또한 국가 경제 사회운영위원회의 구성원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이다. 이들은 비전 2030 프로젝트의 주요 의사결정 팀으로 구성되며 6주까지 매주 4차례 미팅을 할 예정이다.



비전 2030(Vision 2030)

이것의 수행은 행정부의 수장이 의장이 되는 위원회에 의해 움직이며 주요 장관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구성된다. 또한 매주 3내지 4회씩 회의를 개최한다. 필요시에는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공공분야의 주요 운영자들로 구성된 핵심 전문가 팀의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들도 계속적으로 회의를 개최할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위한 지원은 5-7개 각료장관들의 부서장 비전 2030에 의해 제공될 것이며 프로젝트 담당장에 의애 매일 관리될 것이다. 이미 운영위위원회는 여러 후보자들에 대한 인터뷰를 하였으며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운영한 프로그램에 경험을 지닌 일부 국제적인 컨설팅 팀들에게 평가를 의뢰하기도 하였다.

이 계획은 나이로비 그랜드 레젠시(Nairobi's Grand Regency) 호텔에서 언론 미디어 사장들과 편집담당자들에게 발표되었다.

케냐는 과거에도 경제발전과 투자유치를 위해 두 번의 장기 정책들을 기획한 적이 있으며 여러 차례 5개년 경제개발 계획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첫 번째는 아프리카 사회주의와 케냐에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적용을 위한 1965년의 Sessional Paper No 10이 있으며 두 번째는 새로운 성장을 위한 경제계획 관리(Economic Planning Management for Renewed Growth)를 위한 1986년의 Sessional Paper No 1 등이 있다.

이와 같은 계획들은 대부분 케냐의 가장 큰 문제인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의 의제들에서부터 발목을 잡혔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획들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케냐의 경제는 1964-1980 사이에 평균 6%가 넘게 성장하였으며 그리고 1980-1990년 사이에는 연평균 4.1%의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1990-2002년 사이 1인당 소득은 단지 1.9%의 성장을 보인 반면 같은 시기 인구 증가율은 2.9%에 달해 실질적 성장을 이루지 못했지만 2003년부터 케냐는 높은 경제성장을 다시 보이기 시작했는데 2005년에는 5.8의 GDP성장을 보였다.


케냐가 최근 비전 2030 계획을 발표한 것은 이와 같이 최근의 경제성장세를 공고화하기 위함이며 장기적으로는 게냐를 삶의 질에 있어 중위권 소득을 보이는 국가들과 같은 수준으로 높이기 위함이다.

케냐가 다른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서는 경제상황이 다소 나은 것은 분명하지만 35년전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을 보이든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그리고 태국 등과 비교해서는 비천한 경제결과물을 보이고 있다.

케냐는 이들 국가들이 성공한 것은 수많은 전략적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성실히 수행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 국가들의 전략적 비전에는 장기적, 단기적 아젠다들이 있었으며 이것들은 대부분 성실히 수행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케냐는 야심찬 비전 2030을 제시하였지만 많은 문제점들로 인해 제대로 수행될지도 의문이다. 우선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문제이다. 이번에 발표한 계획이 단순히 집권당이나 대통령이 차기 정권을 노리고 설정한 선거용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미 이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데 만약 비전 2030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걸림돌을 먼저 제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크리스 키루비(Chris Kirubi)와 같은 학자는 “이 계획이 정당들을 위한 비전이 아닌 케냐 국민들을 위한 비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언론들의 역할도 아주 중요한데 언론들이 정부의 시책에 대해 비판할 것은 적절히 비판함으로써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나이로비 주식시장의 의장인 짐나 음바루(Jimnah Mbaru)는 비전 2030을 바라보는 미디어들은 정부의 개입에 전혀 개의치 않는 보르스(Bourse)와 같은 기관이 되어야 하며 세계의 많은 국가들 중에 청렴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 국가는 성공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결국 케냐도 비전 2030의 성공이 정치적 논리로 해결한다면 결국 성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을 많은 분석가들은 제시하고 있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정치일반

아시아·아프리카정상회담과 아프리카의 현실

2005. 5. 30. 11:41
아시아·아프리카정상회담과 아프리카의 현실

아시아·아프리카의 연대를 표명한「반둥 회의」(1955년)가 올해로 50년을 맞이하였다. 반둥회의는 1955년 4월 18일 구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독립을 실현하고 있던 아시아·아프리카의 정상들이 인도네시아의 반둥에 모여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회의」를 개최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아시아·아프리카국가들이 연대하여 자립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근 아시아와 아프리카 정상들이 제3세계의 단결과 비동맹운동을 촉구했던 인도네시아 반둥회의 이후 50년 만에 다시 모여 반세기 전의 정신을 확인했다. 양 대륙 89개국 대표들은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4월 22, 23일 이틀 동안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를 열고 상호 정치, 경제 및 문화적 협력을 늘린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아시아·아프리카의 전략적 협력’ 선언문을 채택했다. 또한 2년마다 외무장관 회의를, 4년마다 정상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이 처럼 양 대륙이 50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미래를 위한 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50년 이전에 공유한 정신을 다시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 아프리카는 고뇌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빈곤, 분쟁,HIV/AIDS 등 이대로는 아프리카가 2015년까지, 아프리카 국가들이 제시한 UN 밀레니엄 개발 목표(MDGs, Millennium Development Goals)를 달성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UN 밀레니엄 개발 목표는 2015년까지 세계의 빈곤 인구를 반감하고, 보건·교육에의 접근 확대를 제시하였지만 현재의 상황으로는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들은 밀레니엄 개발 목표가 달성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 개발을 막는 부정적 요인들
아프리카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인들이 산재하여 국가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그 부정적인 요인들을 살펴보면 먼저 에이즈 문제로, 에이즈에 의한 사망의 70% 이상이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 집중하며 남부아프리카 국가들의 평균 수명은 에이즈에 의하여 10세 이상이나 하락하고 있다.
UNAIDS의 추계에 의하면 2004년말 현재 세계의 HIV 감염자는 3,940만명(3,590 ∼ 4,430만명)으로 증가하였고 같은 해 신규 감염자는 490만명(430 ∼ 640만명), 그리고 에이즈에 의한 사망자수는 310만명(280 ∼ 350만명) 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에이즈 문제의 최근 특징으로는 경제 성장과 소득 격차가 현저한 중국이나 인도에서 에이즈 감염자의 급증하고 있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상황에 있는 것은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이다.
2004년 말 현재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 있어서 HIV 감염자수는 2,54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세계 인구의 13%를 차지하는데 지나지 않는 이 지역에 에이즈 감염자 수는 세계 감염자의 약 2/3가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여성의 경우 3/4). 특히 아프리카지역의 성인 에이즈 감염률(7.4%)은 보합을 보이고 있지만 이것은 사태의 개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신규 감염자와 에이즈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비슷한 결과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중에서도 심각한 지역은 남부아프리카이며, 세계 인구의 약 2%가 생활하고 있는 아프리카 남부 9개국의 HIV 감염자 수는 전 세계 에이즈 환자 수의 약 30%가 집중하고 있다. 이들 국가 중 보츠와나는 2003년 성인이 감염률이 37.3%에 이르고 있고, 30 년전에 56.1세이던 평균수명이 현재는 39.7세 까지 하락하였다.
다른 남부아프리카 국가들의 상황을 보면, 스와질랜드의 에이즈 성인 감염률이 38.3%, 평균수명은 34.4세이며 레소토에서는 각각 28.9%와 35.1세, 나미비아는 24.6%, 33.1 세 등이다. 이밖에 말라위, 모잠비크, 잠비아와 위의 3개국을 포함한 아프리카 남부 6개국에서는 성인 2,600만명 중 500만명 이상이 HIV 감염자로 추측되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한 노동력의 상실은 새로운 경제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은행은 2003 년9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아프리카 에이즈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말라위의 경우 2005 년까지 숙련 노동 인구의 약 절반이 에이즈로 사망할 우려가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2002년 전 세계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약2,000 억 달러가 소비되었던 반면 아프리카의 에이즈 대책 예산은 불과 10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얼마나 아프리카 에이즈 대책이 무관심한 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지역분쟁으로 이 역시 아프리카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에 걸쳐 콩고 민주공화국에서 일어났던 내전으로 인해 약3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아프리카 경제의 후진상황과 빈부 격차의 확대에 의해 많은 빈곤층이 충분한 음식이나 물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다음은 현재 아프리카의 곤경을 알려주는 주요 지표들이다.
․ 아프리카 평균 수명은 58세이며 18개국은 평균 수명이 50세 이하 그리고 시에라리온의 경우 평균수명이 37세이다.
․ 아프리카 전체 인구 중 절반이 하루 1달러 이하로 생활을 하고 있다.
․ 전세계 34개 최빈국 중 아프리카 29개국이 최빈곤 국으로 지정되어 있다.
․ 18개국의 여성 중 절반이상이 문맹이다.
․ 아프리카 28개국에서 5세이하 어린이들 중 1천명당 140명이 사망하고 있다.
․ 아프리카 전체인구의 58%는 깨끗한 식수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왜 아프리카는 세계의 불행한 대륙으로 남아 있는 것인가. 가장 우선시되는 문제는 지난 50년간 아프리카의 대부분 국가에서는 선정(good Governance)결여 등 정치적 불안정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특히 냉전시기를 중심으로 구미 선진국은 아프리카의 광물·농산 자원이나 이권의 확보, 지정학적인 전략적 관점에만 우선시하고, 부패나 인권 침해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독재자 등에 대한 군사 원조를 포함한 정치적 원조를 계속했다. 그 결과 아프리카에는 막대한 금액의 원조가 투하됐음에도 불구하고 민생의 향상이나 경제 성장에는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프리카의 위기 극복 노력들
현재 아프리카 사람들은 「생존」자체가 과제로 안고 살아 나가고 있다. 그러나 생존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의지가 점점 강화되고 있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에이즈에 관해서도 21세기 들어 아프리카인들 스스로 예방이나 교육 그리고 각국 정부들의 보건시설 강화 등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경제면에서도 아프리카인들은 생존을 위해 중소·영세 기업 등의 경제 활동이 현저하게 성장하고 있다. 한편,21 세기에 들어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에 있어 분쟁이 점차 감소하여 정치적 불안정도 개선되고 있다. 아프리카 연합(AU)의 결성이나 아프리카 자신의 상호감시 체계의 실시 등 아프리카 스스로의 이니셔티브에 의한 분쟁해결이나 관리 강화의 프로세스가 진전되고 있다.AU는 2002년 7월 출범하였다. AU는 아프리카의 숙원인 '분쟁 종식'과 '빈곤 추방'이라는 두 마리 토끼 사냥을 목표로 하고 있다. AU의 조직으로는 각국 수반으로 구성되는 아프리카 의회를 비롯해 15개 회원국으로 구성되는 평화안보위원회, 사법재판소 등이 있고 재정 관련조직으로 아프리카 은행(The African Bank), 아프리카 통화기금(The African Monetary Fund)과 아프리카 투자은행(African Investment Bank) 등이 있다. 특히 유엔 안보리를 본떠 15개국으로 만든 평화 안보리는 대륙의 분쟁을 해결하고 조정하는 임무를 맡게 된 AU의 핵심부분이다.
또한 21세기에 들어 아프리카는 분쟁, 교육, 보건 등에 관하여 새로운 시도를 시작하고, 의욕적인 출발을 하려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아프리카의 노력은 단순히 아프리카만의 노력에 의해서 만으로는 이룩할 수 없으며 지금 이야 말로, G8 등 선진국들이 본격적인 아프리카 지원에 나서야 할 때 이다.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선진국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개발원조자금(ODA)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으로 아프리카의 주요 ODA 공여국인 일본의 경우에도 전체 총 ODA의 삭감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는 원조가 국가에 너무 의존하고 있어 원조의 방법에 대해서도 정부만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나 기업 등 민간 부문에서 주체적으로 참가여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 당연하다. 일본의 경우 ‘반둥 회의’ 50주년에 즈음하여, 일본 정부의 아프리카 원조에 관하여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였다. 일본의 아프리카 원조는 일본 ODA 전체의 불과 8.8%에 지나지 않으며 G7 국가들 중에서 6위를 차지하고 있다.
첫째, 국제 공약을 지키고,ODA를 GNI(국민총소득)의 0.7%로 증액하는 것.
둘째,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 ODA 배분을 전체 35%까지 끌어올리는 것.
셋째, 대아프리카 원조의 목적을 밀레니엄 개발 목표의 달성과 빈곤 삭감과 격차 시정에 두고,「아프리카 일본 연대 기금」을 설립하여 대 아프리카 원조를 동 기금으로 일원화되는 것.
넷째, 동 기금의 운영에는 시민사회가 참가하며 또한 기금의 40%는 시민사회의 집행에 맡기는 것으로 한다.
다섯째, 위의 내용들을 2010년까지 실현한 것 등이다.
이 처럼 일본을 비롯하여 선진국들은 GNI의 0.7% ODA 제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은 일부 국가들에 한정되어 있어 선진국들의 자발적인 원조확대가 필수적이다.
또한 원조와 더불어 아프리카의 빈곤을 감소시키기 위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아프리카 경제의 회생을 막고 있는 외채의 경감이다. 세계은행과 IMF 정책결정자들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빈곤과의 전쟁을 위해서는 보다 나은 정부의 구성과 무역을 보다 용이하게 접근하기 위해서 외채를 줄이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외채 유지는 만약 외채문제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이 제기된다면 단지 그것을 유지만 시킬 뿐이며 개선은 할 수 없다"라고 이 두 국제기구의 한 관계자가 말했다.
2년 전 IMF와 세계은행에 의해 발표된 부채과도 빈곤국가(HIPC) 22개국들은 현재 총 340억달러의 외채경감의 혜택을 보았다. 다른 쌍무협정을 통한 외채 경감까지를 포함하면 그 액수는 530억달러에 달한다.
13개 국가들은 현재 외채 경감에 대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 그 부채과도 빈곤 국가들에 대한 부채경감 프로그램은 비정부기구들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받고 있는데 이는 그 경감규모가 너무나 적고 또한 너무나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외채경감 비정부기구는 4월 초 IMF와 세계은행이 세계의 가장 빈곤한 국가들의 모든 부채를 경감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IMF와 세계은행 정책결정자들은 지난 4월 말 외채경감은 신중한 차입과 개인기업 부문, 교육 그리고 보건을 지원하는 정책들 펼치는 경제 관리에 개선을 보이고 있는 국가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아프리카 장래는 밝다
최근 아프리카의 차드, 적도기니, 나이지리아, 가봉 등 일부 산유국들의 경우 고유가로 인해 고성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최근 들어 「잊혀진 세계」, 아프리카의 석유가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001년 9 월11일 미국 동시 다발 테러와 이에 맞춰 미국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은 세계 최대의 석유 수급지인 중동 불안을 초래하였고,EU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에너지 전략의 재평가를 강요한 에너지 안전보장이 매우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확인 석유 매장량 800억 배럴로 아프리카는 향후 5년내에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할 예정이다.
미국의 경우 파월 전 국무장관이 이라크전쟁 시작 전 2002년 9월에 앙골라, 가봉을 방문하였고,2003 년 7월에는 부시 대통령이 아프리카5개국(세네갈, 남아프리카공화국, 보츠와나, 우간다, 나이지리아)을 방문하여 석유와 관련하여 아프리카 국가들의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현재 세계에서 차지하는 아프리카의 원유 생산의 비율은 10% 이상에 이르고 있다.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인 나이지리아의 원유 생산은 약 240 만 배럴/ 일(2004 년)을 기록하고 있으며 확인 매장량도 343억 배럴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유 메이저 회사들은 나이지리아의 개발되지 않은 지하 천연 자원의 이권 획득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중에서 세계 최대 석유 회사인 엑슨 모빌(ExxonMobil)은 아프리카 원유 증산 계획을 내세우고 있고,2004년 발표된 연차 보고에서는 아프리카에서의 생산량이 1위를(23.5%) 차지하였다. 또한 엑슨 모빌 그룹은 2005년 1월 18일 나이지리아 국영 석유 회사(NNPC : Nigeria National Petroleum Company)와 제휴하여 LNG 플랜트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2010년부터 조업 시작을 기대하고 있다. 다음으로 주목받고 있는 메이저 석유 회사로는 엑슨 모빌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셰브론 텍사코(Chevron Texaco)를 들 수 있다. 이 회사는 향후 5년간 총액 200억 달러의 아프리카 투자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지난 1월 13일에는 영국 가스 회사(BG)와 제휴하여 나이지리아 LNG 플랜트 건설(2009년 조업 시작 예정)을 발표하였다. 이 밖에 영국의 BP 등이 나이지리아에서의 탄화수소 부문의 개발에 참가하고 있다.
이 처럼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우 일부 산유국들을 포함하여 대륙전체의 경제성장률이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 보다 훨씬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04에 이어 2005년에도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제적 성장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으며 특히 2005년의 경제성장 전망을 보다 좋게 보고 있다.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에 배포된 전망에서 IMF는 아프리카의 국내총생산이 2003년 3.7%의 성장에서 2004년에는 4.6%의 성장을 그리고 2005년에는 5.8%의 성장을 예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망은 그 어느 때보다 좋은 것으로 거시 경제적인 안정면에서도 현재 가장 좋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고가 상품에 대한 강한 수요와 외채 부담에 대한 완화 그리고 산업시장에 대한 접근의 개선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원유수출 국가들은 지금까지 가장 큰 순 이익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반면 국제 원유가격의 고가로 인해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IMF는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아프리카 정책입안자들은 상품가격들에 대해 유연성을 두어 원유가격이 고가일 때 ‘예방적 저축’을 권고하고 있다.
또한 IMF는 아프리카 정부들의 경제에 대한 간여를 줄이고 기간산업과 민간투자를 활성화해야 하며 뿌리 깊게 남아있는 제도적 개선도 이루어져 향후 보다 나은 성장을 이룰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반둥회의 50주년을 맞아 아시아․아프리카 정상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다시 만나 초기의 협력관계를 모색하고 있지만 50년이 지난 현재 두 대륙의 경제적, 정치적 위상면에서는 많은 격차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일본, 중국 같은 국가들은 매년 아프리카국가들과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있으며 동등한 위치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수혜를 베푸는 입장에서 대하고 있다. 이것은 원조 공여를 받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며 두 대륙이 동등한 위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이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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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준표

    정말 짠한 이야기네요.

짐바브웨의 국가존립은 가능한가?

2003. 11. 18. 13:02
짐바브웨의 국가존립은 가능한가?

<남부아프리카의 가장 선진화된 국가 중의 하나였던 짐바브웨가 최하류의 국가로 추락하고 있다.  현대통령인 무가베의 퇴진만이 국가를 살릴 수 있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내전과 종족간의 알력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아프리카의 정치적 안정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서부아프리카의 정치적 불안정과는 달리 남부아프리카에서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전의 권위주의 정권이 물러나고 다당제하의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정권들이 들어서고 있다.  남아공에서 흑인들이 백인정권을 평화적인 방식으로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으며 잠비아에서는 노동조합 위원장이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방식을 도입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예외적인 한 국가로는 짐바브웨를 들 수 있다.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 대통령은 지난해 불법적인 대통령 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를 다시 움켜짐으로써 1980년 짐바브웨가 독립한 이래 계속 집권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민주적인 장기집권은 남아공과 함께 남부아프리카의 대표적인 경제모범국이었던 짐바브웨를 하루 아침에 혼란과 경제적 붕괴 등으로 인해 가장 후진국으로 몰아가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현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무가베의 대통령직 사임이 최 우선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무가베가 현재 사임을 가장 꺼리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임이후 그의 정적들에 의해 신변안보를 보장 받을 수 없다는 두려움에 있다.  따라서 야당인 ‘민주적 변화를 위한 운동’과 야당대표인 츠방기라이(Morgan Tsvangirai)도 무가베 대통령에게 믿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성숙되고 멀리 내다보는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

현재 지난해 선거를 구실로 삼아 그의 권력을 연장하려는 무가베의 행태는 어리석고도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대통령 선거의 후보였던 야당 대표 츠방기라이를 내란 선동죄로 기로하였다. 츠방기라이는 2주 후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지만 무가베의 이러한 행태는 현재 짐바브웨의 제1당인 야당 ‘민주적 변화를 위한 운동’을 탄압하려는 것이다. 또한 무가베 정권에 반대하는 논지를 표방한 신문사들을 폐간 시킴으로써 언론에 대한 탄압도 시도하고 있다. 지난 10월 25일 짐바브웨 경찰은 짐바브웨정권과 유일하게 맞서싸우는 일간지인 데일리 뉴스(Daily News)의 사무실을 점령하고 신문사를 폐간시켰다. 데일리 뉴스의 근로자들은 무장 경찰이 수도 하라레 중심에 있는 신문사를 급습하여 그날 발행될 신문의 첫 번째 편집이 끝난 직후 남아있던 18명의 언론인들과 사무요원들을 구금하였다고 전했다. 이 신문사는 폐간된지 한달이 지났었다. 4시간 후 근로자들은 풀려났으나 그들은 신문사에서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작성해야만 했다.

그러나 만약 무가베가 계속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야당과 언론을 탄압한다면 국가적인 파산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짐바브웨는 극심한 기아에 직면하고 있는데 전체인구 1천1백60만명 중 약 8백만명이 기아에 직면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아는 HIV바이러스에 허약한 면역체계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에이즈로 인한 사망자수는 더욱 증가하고 있다. 짐바브웨 정부의 통계수치에 따르면 현재 하라레(Harare) 병원에 입원한 환자 중 약 70%가 에이즈와 관련된 환자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최근 짐바브웨의 경제는 파탄 직전까지 도달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승하고 있다. 8월말까지 426.6%에 달하던 인플레이션이 10월 말까지는 500% 가까이 상승한 가운데 인플레이션을 주도하는 것은 연료가격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리비아에서 원유를 제공하였지만 리비아에서 원유공급을 중단한 이후 심각할 정도로 연료가 부족한 상황이다.

그러나 더욱 비참한 것은 짐바브웨 환율의 급격한 하락으로 인해 구매력의 상실 또한 크게 떨어지고 있어 인플레이션은 사실상 12월까지는 1000%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월까지의 인플레이션은 399.5%로 8월에만 27.1%의 증가를 보였다.
소비가격지수에 나타난 대부분의 상품 가격들 상승은 짐바브웨 화폐의 평가절하로 인해 발생하였다. 짐바브웨 제조업자들과 공급자들은 원료가격의 상승으로 제품가격을 급격히 상승시켰다. 최근의 인플레이션율을 살펴보면 식료품 가격이 164.5%의 상승을 보였고 비 식료품 가격의 인플레이션이 262.1%의 상승을 보였다.

최근의 인플레이션은 짐바브웨의 외화부족이 주요인이다.  외화부족은 외국으로부터 물품수입을 중단시켰고 특히 석유수입의 부족은 국가 경제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경제성장도 계속 하락하여 2002년에는 -12.8%의 성장에서 2003년에는 -13.1%로 예상되고 있다. 짐바브웨의 현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이 가장 중요하며 또한 외화확보가 가장 우선시 되고 있다.

이처럼 짐바브웨는 정권연장의 야욕으로 인한 지도자 한 사람 때문에 국가의 파멸 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최우선적으로 무가베의 퇴진이 선행되어야 한다.  만약 무가베 대통령이 계속 그의 권력에 집착한다면 라이베리아, 콩고민주공화국 그리고 소말리아와 같은 국면에 진입할 것이다.  라이베리아는 최근까지 내전으로 인해 인권유린과 국가경제가 파탄이 났으며 콩고민주공화국 역시 내전과 종족간의 싸움으로 국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소말리아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여 국가가 군벌들로 나뉘어져 있으며 누가 소말리아의 공식적인 대표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사실 최근 일련의 정치적 불안을 제기한 원인은 짐바브웨 토지의 비정상적인 분배로 인해 발생하였다. 짐바브웨가 198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해 토지문제는 정치적 안정을 해치는 요소로 계속 등장하였다. 무가베는 2002년 그가 다음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대표에게 패배할 것이라는 불안 때문에 토지문제를 들고나와 흑인들을 자극하였다. 무가베 대통령은 2002년 9월초부터 백인지주들의 농지를 강제 환수해 흑인농민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무가베 대통령은 “흑인농민 100여만명이 경작하는 1600㏊의 농토는 작물재배가 불가능할 정도로 나쁜 데 백인지주 5000여명이 소유한 1100만㏊는 비옥한 농토”라며 “8월 말까지 백인지주들의 농지를 환수해 흑인 농민 35만명에게 나눠주겠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정책은 주로 짐바브웨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퇴역군인들을 선동하여 강제적으로 백인들을 토지를 강탈하였다.

이와 같은 백인토지 강제 몰수와 부정적인 방법으로 무가베가 대통령 당선되었지만 국제사회는 본격적인 무가베 정권퇴진을 추진하였다. 짐바브웨 주재 유럽 국가들의 대사들이 대통령 취임식에 참여하지 않았고 영연방 국가들은 짐바브웨에 제공하던 무상원조 및 경제협력을 철회하였다. 미국도 무가베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미국내 짐바브웨 자산을 동결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는 국내에서 백인농장의 폐허로 인한 농산물 산출 감소 등과 함께 짐바브웨의 경제를 더욱 악화시켜 오늘날 8백만명의 짐바브웨 국민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현재 짐바브웨는 케냐에서 그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케냐도 1978년부터 장기집권한 모이대통령으로 인해 정치적 불안정과 함께 1990년 중반이후 경제적 침체를 겪고 있다. 특히 IMF나 세계은행은 케냐에서 정치적 안정과 부패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1990년말부터 자원지원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케냐는 지난해 모이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를 포기하고 민주적인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야당이 정권을 잡는 독립이후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무가베도 국가와 국민들의 생존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그가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할 지를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정치일반

아프리카 정치

2003. 9. 25. 17:53
아프리카 정치

30년 이상의 부패와 독재 정치를 겪고 난 후였던 1990년대 초에는 실제로 아프리카 전 대륙에서 강력한 정치적 개혁과 민주화를 보여주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아프리카인들은 1989년 베닌에서 시작하여 1990년대 초 여세를 몰아 독재적 지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숨막힐 듯 답답하고 악화된 경제와 구 소련 및 동구 유럽의 몰락으로부터 자극 받은 아프리카인들은 다당제 정치체제와 시민의 자유 확대, 자유 선거를 요구했다.

이러한 자유화의 물결은 남아공과 나이지리아의 민주화 과정으로 인해 최고조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남아공은 1990년 2월 1일 드 클레르크(F.W. de Klerk)가 300여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초유의 인종차별정책 폐지를 선언하였고 1994년 4월 최초의 다인종 선거로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또한 1999년 6월에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을 불식시키고 타보 음베키(Thabo Mbeki)의 주도아래 인종적·문화적 다양성(multi-cultural diversity)을 추구하며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사회-경제적, 문화적 민주화 과정을 시도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남아공의 민주화는 아프리카 역내 민주화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남부 아프리카의 중심국가로서 남아공은 이 지역 분쟁해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1998-2001년 비동맹 의장국으로서 제3세계의 중심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남아공의 "기적"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식민주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협과 화해를 통한 위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60-66, 1979-83 그리고 1985-99년에 걸쳐 군사정권이 들어섰던 나이지리아는 1999년 5월 오바산죠(Olusegun Obasanjo) 대통령이 이끄는 민선정부가 출범함으로써 더 이상 아프리카가 정치적으로 후진적이라는 비판을 근절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폭력적인 정권 획득의 대부분은 구데타나 군사 개입을 통한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1960년 이후 25명의 대통령과 수상들이 정치적 폭력의 결과로 정권에서 쫓겨났다. 1952년 이집트 혁명이후 아프리카에서 85번의 폭력에 의해 정권 교체가 있었으며 모두가 폭력적인 수단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90여개의 정부가 전복되었다.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31개국이 정권교체를 당했고 이들 중 22개국은 유사한 종류의 정권교체를 1번 이상 경험했다. 베닌, 부룬디, 가나, 나이지리아, 수단, 시에라 레온과  우간다는 최소한 5번의 군사적 정권 교체가 있었다. 군사정권은 일당제와 다당제 국가 모두에서 발생했다.

보츠와나와 모리셔스만이 독립 이후 다당제를 유지해 왔으며 1994년 7월 군부의 권력 탈취가 있기 전까지는 감비아도 다당제를 유지하였다. 짐바브웨와 나미비아는 독립 이후 다당제 국가가 되었고 지금까지 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기니아, 말리, 니제르같은 나라들은 독립과 함께 일당제를 채택하였는데 일당제는 지난 30년 동안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에게 일반적인 정당 체제로 받아들였다.

구데타로 집권한 군부 정권의 일반적인 모습은 점진적으로 군사정부를 민간정부형태로 이양해가고, 또한 군부 정치 체제를 일당 독재 체제로 변형시켜나가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가나와 나이지리아는 예외적으로 독립 후에 민주주의와 군정이 번갈아 가면서 나타났다. 1977년까지 이집트, 모로코, 세네갈에서는 다당제를 부활시켰으며 1980년대에는 튀니지아, 수단, 알제리, 라이베리아, 코모로스 등지에서도 다당제가 뒤따라 부활되었다. 그 후에 라이베리아와 수단에서 독재주의가 부활하고 라이베리아가 내전에 휘말리게 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는 1990년대 초 다당제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소용돌이의 초석이 되었다.

1980년대의 마지막 해에 아프리카 전역에서는 권위주의적 권력 질서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한 저항은 폭 넓은 대중의 지지속에 일어났으며, 경제적인 빈곤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또한 냉전의 종식으로 인해 힘을 얻게 된 아프리카 지원국들은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정부에게 경제와 정치 체제에 대한 개방 압력을 가했다. 1989년 11월, UN의 감독 하에 치러진 독립전 나미비아의 총선은 아프리카 제 2의 해방 이라 일컬어진다. 이것은 1990년 전반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일당제 권력 독점이 다당제 선거 제도로 상당히 빠르게 이행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90년 3월 나미비아가 독립을 맞았을 때, 코모로스는 최초의 경선을 치루었고, 가봉과 코트 디부아르도 같은 해에 코모로스의 전철을 밟았다.

1991년에는 케이프 베르데, 상토메 프린시페, 베닌, 잠비아에서 선거에 의한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1997년 10월까지 45개 국가에서 121번의 다당제 선거(53번의 대통령 선거, 68번의 입법 선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는 41개국이 존재함과 동시에 나이지리아, 부룬디, 시에라리온, 그리고 콩고 브라자빌 등 4개국은 군사정권으로 돌아갔다. 이 같은 나라 대부분은 자국의 불안정한 상태로 인해 위기의 상황 아래서 다당제를 도입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알제리, 앙골라, 니제르, 그리고 오랜 다당제 전통을 가진 감비아를 포함해서 다당제가 새로이 도입된 곳에서는 불안정한 모습으로 군정권의 개입에 의해 다당제가 파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7년 중반, 이 네 나라들은 다당제를 부활시키고, 문민 정부로 회귀하였다.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많은 국가에서, 기존의 정치체제들은 야당의 형성과 공개된 선거제도의 실시를 허용했다. 사하라 이남 지역의 48개국 중 1997년 말까지 경쟁적인 다당제 선거를 치루지 않은 국가는 4개국뿐이었다. 실제로 1990년대 초의 아프리카는 세계를 휩쓸고 있는 민주화의 분명한 '물결'에 완전히 동참하고 있었다. 그 정치적 변동의 폭은 1994년까지 아프리카 대륙에서 합법적으로 일당 체제의 국가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정치적 개혁과 민주화를 향한 아프리카의 다양한 추이는 21세기 초에 여러 가지 요인들이 아프리카 국가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의 정치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내부에서 정치가 이루어진 전반적인 배경에는 빈곤과 의존적인 경제라는 식민주의의 산물과, 후원자-고객(Patron-Client Network)중심의 정치 체제, 그리고 냉전체제의 붕괴와 이에 따른 국제사회의 무관심 그리고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같은 외부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의 영향력 증가가 포함된다.

아프리카는 중동 근처에 위치하여 남대서양과 인도양에 가까운 지리적 위치와 풍부한 광물 자원을 가진 덕택에, 냉전 기간 동안에는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전략적 지역'으로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아프리카에 상당한 지원을 한 것은 미국이었고, 그보다 양은 적었지만 소련 연방도 거들었다. 소련 연방이 와해되고 소련이 동구 유럽에 대한 통제권을 잃으면서, 아프리카의 중요성은 크게 떨어졌다.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과 케냐 등 미국의 고객국 뿐 아니라 나머지 모든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원조가 삭감되었다. 냉전의 종식으로 러시아와 동구 유럽에서 대체 자원을 공급할 수 있게 됨으로써 아프리카의 전략적인 광물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었고, 아프리카 전체의 경제적 침체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불리한 경제적 상황은 1990년대 후반 국제 정치 무대에서 변화가 일어난 배경이 되었다.

다시 말해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은 일당체제존립 정통성의 이론적 기반을 붕괴시켰고 이들의 원조가 단절되고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민주주의라는 이념은 이제 아프리카 국가들의 생존에 절대적인 선택을 강요하고 있으며 새로운 국제질서의 변화에 적응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지난 40년간 아프리카의 정치적 궤적을 형성한 사회적, 경제적 정황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들은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민족, 지역, 종교, 하부민족적 차이로 인해 사회구조가 나뉘어졌다고 주장한다.

2002년 9월 23일 인종갈등으로 인한 구테타가 일어난 서아프리카의 코트 디브아르는 아프리카의 정치적 발전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또 머나먼 길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의 이러한 민주화를 향한 운동이 가지는 가능성이 커 보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경쟁 다당 체제의 민주정치가 쉽게 구축될 수 있다거나 아프리카가 지닌 무수한 문제들 사이에서도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여기에 한가지 더 우려할 만한 것은 1990년대 초 일부 아프리카 국가에서 비교적 민주적 정부로의 성공적인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후반에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민주화에 대한 국제적인 압력은 감소되었다. 이러한 이유는 서구선진국가들이 상업적 이익이 있는 지역에서는 민주적 개혁이나 정권교체를 그다지 강요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행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1989년이래 아프리카에서는 많은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프리카의 정치상황은 발전하고 있다고 정의할 수 있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장애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모든 부문에 걸쳐 정치 구조에 근본적인 개혁이 있었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들은 정치적 자유화를 실행했고, 일당 정부는 거의 모두 사라졌다.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케냐의 정권교체라고 할 수 있다. 78년에 다니엘 아랍 모이(Danial arap Moi) 대통령이 실질적인 집권당인 케냐 아프리카 민족동맹(KANU : Kenya African National Union)의 지원을 받아 5선을 연임하였다. 이번 선거는 헌법상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이 대통령의 지지를 받았던 KANU당의 우후루 케냐타(Uhuru Kenyata)후보가 10개의 야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무와이 키바키(Mwai Kibaki)에게 큰 격차를 벌이며 패배하였다. 이는 24년만에 대통령이 바뀌었다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실로 64년 독립이후 39년만에 처음으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지역기구의 역내 분쟁해결을 위한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아프리카 단결기구(OAU : 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서부 아프리카제국 경제공동체(Economic Committee Of West African States : ECOWAS), 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Southern African Development Community : SADC)의 지역안보협의체 등을 통한 역내 분쟁해결 노력이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OAU는 분쟁방지 및 해결기구를 통해 각종 역내 분쟁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고 이러한 역사적 유산을 새롭게 출범한  아프리카 연합(AU : African Union)에게 이양하였다. ECOWAS는 시에라리온 사태, 라이베리아-기네 국경분쟁에, SADC의 안보협력체는 콩고사태, 앙골라 사태에 적극 개입, 평화정착에 기여하고 있으며 특히, 이디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에서는 OAU가 UN안보리와 협조, 평화안을 제안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아프리카에서 정치적 자유화가 시작된 지 이제 10년 밖에 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최근 급변하는 국제사회의 흐름속에서 아프리카는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정치적 민주화, 경제개혁 및 지역통합을 추진하면서 서방 제국들로부터 새로운 인식과 함께 수출시장으로서 잠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2002년 새로 출범한 AU를 통해 아프리카 제국들은 정치·경제적 지역통합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으로 예측되는 가운데 미국은 2000년 10월 "아프리카 성장 및 기회에 관한 법안(AGOA : African Growth and Opportunity Act)"을 입법화하였고, 2002년 6월 캐나다 G-8 서방선진국 정상회담에서 아프리카 개발을 위해 2015년까지 약 640억불의 재원을 마련한다는 야심찬 아프리카 개발을 위한 새로운 협력관계(NEPAD : New Partnership for Africa's Development)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면서, 아프리카는 발전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함께 새로운 성장 유망지대로 떠오르고 있다. 현실적으로 아프리카의 민주화는 경제적 발전이라는 축과 함께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정치일반

아프리카의 민주주의 발전

2003. 9. 25. 13:34
아프리카의 민주주의 발전

"검은 대륙 아프리카"가 발전하고 있다. 독재와 부정부패, 구데타와 내전, 그리고 가난과 에이즈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오르게 하는 비극과 절망의 대륙 아프리카가 변화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발전,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개방경제로의 전환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들어 동서냉전 종식에 따른 전세계적인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역내 국가들간에도 이념적 대결 가능성은 사라지고, 다당제 도입, 자유선거실시 등 개혁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의 절반 이상이 다당제에 기초한 선거가 실시되었고 절차적인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

시에라리온 사태의 확산 가능성, 코트디브와르의 민주화 이행 지체, 짐바브웨 사태의 확산 가능성, 코모로의 군부 쿠데타, 이디오피아-에리트리아간 대립, 앙골라와 콩고내전의 지속화 등 불안요소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으며 아직도 종족 이기주의, 독재성향의 국가와 부정부패 등 비민주적인 정치행태의 극복과 인권개선 등 민주발전에 많은 난관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21세기 들어 정치적 민주화가 활성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추세라고 단언 할 수 있다.

1991년부터 1997년 10월까지 다당제가 이루어졌던 나이지리아, 부룬디, 시에라리온, 콩고(부라자빌)등 4개국이 다시 군부통치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45개국에서 121차레의 다당제에 기초한 선거(53차레의 대통령 선거, 68차레의 의회선거)가 이루어 졌다. 이런 추세와 더불어 아프리카 지역 통합을 위한 활발한 움직임도 주목된다. 2001.3.1-2 리비아에서 개최된 제5차 아프리카 단결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 OAU)특별정상회의에서는 OAU 53개 회원국 전체 의사로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 : AU)의 창설선언이 있었는데  기존 OAU를 발전적으로 대체하는 새로운 아프리카 통합기구의 탄생을 맞게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기존의 지역기구의 역내 분쟁해결을 위한 활동도 활발하였다. OAU, 서부 아프리카제국 경제공동체(Economic Committee Of West African States : ECOWAS), 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Southern African Development Community : SADC)의 지역안보협의체 등을 통한 역내 분쟁해결 노력이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OAU는 분쟁방지 및 해결기구를 통해 각종 역내 분쟁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고, ECOWAS는 시에라리온 사태, 라이베리아-기네 국경분쟁에, SADC의 안보협력체는 콩고사태, 앙골라 사태에 적극 개입, 평화정착에 기여하고 있으며 특히, 이디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에서는 OAU가 UN안보리와 협조, 평화안을 제안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아프리카에서 상징적인 민주화 국가는 남아공과 나이지리아라고 할 수 있다. 남아공은 1990년 2월 1일 드 클레르크(F.W. de Klerk)가 300여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초유의 인종차별정책 폐지를 선언하였고 1994년 4월 최초의 다인종 선거로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또한 1999년 6월에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을 불식시키고 타보 음베키(Thabo Mbeki)대통령 정부가 무사히 출발하여 순항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남아공은 민주화는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적으로 역내화합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남부 아프리카의 중심국가로서 남아공은 이 지역 분쟁해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1998-2001년 비동맹 의장국으로서 제3세계의 중심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남아공의 "기적"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식민주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협과 화해를 통한 위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60-66, 1979-83 그리고 1985-99년에 걸쳐 군사정권이 들어섰던 나이지리아는 1999년 5월 오바산죠(Olusegun Obasanjo) 대통령이 이끄는 민선정부가 출범함으로써 더 이상 아프리카가 정치적으로 후진적이라는 비판을 근절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는 90년대 들어 동서냉전 시대가 붕괴되면서 양 진영의 대결구도속에서 비동맹 세력의 주축으로서 아프리카가 누려온 국제정치적 지위가 소멸되었고 아프리카의 각 국가들은 생존을 위한 전략적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은 일당체제존립 정통성의 이론적 기반을 붕괴시켰고 이들의 원조가 단절되고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민주주의라는 이념은 이제 아프리카 국가들의 생존에 절대적인 선택을 강요하고 있으며 새로운 국제질서의 변화에 적응을 요구하고 있다.

당분간은 자본주의의 급격한 물결속에서 세계체제로의 진입을 위해 노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변화들은 아프리카의 미래에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권위적이며 독재적인 정권의 몰락과 민주주의적 경험은 분명 정치적 안정과 민주화를 가속화시킬 것이며 경제적, 사회문화적 민주화를 이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정치일반

라이베리아 내전 전개와 발생원인

2003. 8. 21. 20:25
라이베리아 내전 전개와 발생원인

라이베리아 약사와 내전전개과정
한반도 정도의 크기(97,754㎢)에 인구 약 3백30만명의 서부아프리카에 위치한 라이베리아가 최근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물론 긍정적인 요인으로 이목을 끄는 것은 아니다. 1990년부터 시작된 내전이 평화적으로 종식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최근 몇 일전부터 유혈 사태로 바뀌어 미국의 개입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으로 원래 미국식민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1816 설립)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해방노예들을 위한 근거지로 세워진 곳이다. 이 단체는 1821-22년 곡물해안에 작은 식민지를 세웠다. 1824년 이 식민지를 라이베리아라고 이름 지었으며 중심 거주지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먼로의 이름을 따 몬로비아라 이름 붙였다.  라이베리아 최초의 흑인 총독 조지프 젱킨스 로버츠(Joseph Jenkins Roberts)는 1847년 라이베리아의 독립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국경을 확장했다.
미국의 노예 후손들이 건설한 국가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과의 관계는 밀접하지 못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중 라이베리아 고무가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미국은 라이베리아와 방위조약을 맺어 몬로비아에 도로, 국제공항, 심해항구를 건설해주었다.
1944-71년까지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은 윌리엄 V.S. 터브먼(Tubman)이었으며 1980년 쿠데타로 그의 후계자가 축출되면서 1세기 이상 계속되었던 트루휘그당 통치가 막을 내렸고, 동시에 내륙에 사는 토착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들의 오랜 정치적 지배도 끝났다. 그리고 80년 이후 라이베리아는 계속되는 정정불안을 겪게 되었고 끝없는 내전의 상황으로 정세는 변해갔다.
내전전개 양상을 살펴보면, 1980년 도우(Doe)가 이끄는 구국평의회(PRC)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후, 1989년 테일러(Taylor)가 라이베리아국민애국전선(NPEL)을 결성하고 도우 정권을 공격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 내란의 종식을 위해 나이지리아, 가나, 기니, 감비아, 시에라리온이 참여하는 서아프리카제국경제공동체(ECOWAS)가 중재를 추진하여 1990년 분쟁 당사자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1992년 10월부터 다시 내전이 발발하였다. 1996년 4월 반정부의 라이베리아민주통일전선(ULIMO)이 정부 경찰부대 및 서아프리카 평화유지군(ECOMOG)과 전투를 개시하였다. 1996년 7월 31일 나이지리아에서 무장 각파와 평화협의가 열려 9월까지는 무장을 해제하고, 6-9개월 이내에 대통령과 의회선거를 실시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1997년 7월 19일 7년에 걸친 내전을 종식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선거가 1985년 이후 12년 만에 실시되어 상원 26명 하원 64명 등 90명이 선출되었으며, 대통령에는 75%의 득표율을 얻은 최대 군벌 지도자인 테일러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97년 국민들의 공포심에 편승해 새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그 후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탄압으로 그에 대항하는 반군이 99년 봉기, 라이베리아는 다시내전에 휩싸였고 반군은 라이베리아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며 테일러를 압박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S)가 중재에 나서 지난 7월 6일 오후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Monrovia) 국제 공황에서 나이지리아 대통령 오바산조와 라이베리아 대통령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두 사람의 90분간 회담을 가졌다.  회담 이후 테일러가 라이베리아로부터 떠날 것이라는데 합의했다고 발표하였으나 테일러가 미국의 군대 파견을 계속 요구하자 내전이 다시 발발하였다. 정부군은 모든 지역을 포기하고 수도 몬로비아를 방위에 나섰고 반군들은 수도를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을 시작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20여만명이 숨졌고 130만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내전 발생의 원인
그러면 이와 같은 내전이 발생하게 된 원인들은 무엇일까? 크게 경제실패로 인한 정국혼란과 원주민과 미국에서 건너온 흑인들과의 갈등 그리고 인근 국가들과의 관계로 나눌 수 있다.
처음으로 쿠데타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라이베리아의 경제 문제였다.  라이베리아의 경제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계속 악화상태에 놓였다. 아프리카에서 남아공, 이디오피아와 함께 독립국을 이루고 있었지만 경제상황은 좋지 않았다.  라이베리아 경제는 농업 및 철광석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3을 차지하지만 전체 노동인구의 2/3 이상이 이에 종사하며, 주요환금작물로는 고무·커피·카카오 등이 있다. 그러나 1차산업의 경우 가격변동율이 워낙 커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는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메울 수 없었으며 이는 외국으로부터 외채를 도입해야만 했다. 그러나 차관을 상환할 능력이 없는 라이베리아는 주 수입원인 고무 농장과 플랜테이션 농업이 외국기업들에게 넘어가게 되고 정작 라이베리아 국민들은 만성적인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1인당 소득도 200달러도 채 되지 못하는 아프리카 최빈국으로 전락하였다. 외국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고무 산업의 경우 정부 다음으로 많은 고용을 창출해내며, 고무 수출이 라이베리아 GNP의 10%를 차지한다.
1980년의 쿠데타의 경우 경제악화가 큰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를 승리로 이끈 인민구제평의회(People's Redemption Council)도 경제해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 채 1985년에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1980년 쿠데타를 이끌었던 라이베리아 전군 사령관 새뮤얼 K. 도우(Doe)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6년 취임함으로써 정국불안의 요소를 그대로 안고 갔다.
내전 발생의 두 번째 요인은 원주민과 미국에서 건너온 흑인들과의 갈등이다. 19세기 초 미국에서 돌아온 해방 노예의 후손인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들은 그 지역의 원주민을 노예처럼 다스리며 이 땅을 지배하였다. 즉 미국에서 건너온 약 5%의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들이 나머지 95%인 선주민들을 지배하는 정치적 구조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현재 라이베리아는 크게 16개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 가장 큰 종족은 크펠레 족과 해안에 살고 있는 바사 족이다.  그밖에 기오 족, 크란 족, 바이 족, 그리고 이슬람교도인 말랑케 족이 있다.
1980년 쿠데타에 성공한 도(Samuel Doe)는 원주민인 크란(Krahn) 족으로 정권을 쥐었으나, 9년 후에는 다시 해방노예의 후예인 테일러가 혁명을 이끌고 도우를 권좌에서 밀어냈다. 그리고 곧 종족으로 구성된 여러 파벌 간에 내란이 계속되었다.
내전 발생의 세 번째 요인으로서는 인근 국가들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테일러가 도우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한 국가는 리비아와 시에라리온 반군이었다.  테일러는 리비아 카다피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이용해 반군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았으며 또한 시에라리온에서 불법적으로 다이아몬드를 채굴하여 이를 국제 암시장에 팔아 반군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이 다이아몬드의 불법 유통은 시에라리온에서도 내전이 계속적으로 벌어지게 만든 주요인이 되었다. 특히 테일러는 시에라리온 반군들에 대해 무기를 제공함으로써 인근 국가들의 정정을 불안하게 만드는데 앞장섰다. 시에라리온에서는 다이아몬드 때문에 그의 반군은 민간인 살해를 자행했음으로 시에라리온의 재판정은 그를 전쟁 범죄자로 기소하였다.

향후 전망
현재 라이베리아는 정부군과 반군들이 수도 몬로비아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군대를 평화유지군 일원으로 파견하기를 원하며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서부아프리카 국가지도자들은 평화유지군이 배치되기 전에 테일러 대통령이 반드시 라이베리아를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테일러 대통령은 이미 자신이 사퇴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나이지리아로 망명을 것으로 예상) 대신 자신이 사임하기 전 먼저 평화유지군이 도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테일러의 이와 같은 주장에 반군 단체들은 만약 테일러 대통령이 평화유지군을 기다린다면 외국 부대 주둔이 가져다 줄 안정감으로 인하여 결국 영원히 라이베리아에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현재 수도 몬로비아로 진군하여 정부군과 교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은 1천5백내지 2천명의 미군을 라이베리아에 파견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1991년 소말리아 사태에서 치욕적인 수모를 당한 이후 아프리카에서는 단독으로 군사행동을 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유엔 사무총장 코피안난이 밝혔듯이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개입만이 현 라이베리아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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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총선

2003. 4. 18. 11:12
상하원 469명을 뽑는 나이지리아 총선이 4월 12일 악천후와 투표 함과 투표용지 부족, 폭력사태 등 각종 악조건속에 실시됐다. 이번 총선은 지난 1983년 쿠데타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지 20년만에 실시되는 선거로 일주일 후인 19일의 대선에 앞선 나이지리아 민주주의의 시금석이 되는 선거이다.

또한 4월 19일 실시되는 대선에는 99년 민정이양시 대권을 거머쥔 올루세군 오바산조 현 대통령과 야당의 무함마두 부하리(Muhammadu Buhari) 등 19명의 후보가 난립하고 있다. 대선에서는 주지사 36명도 함께 선출된다. 총선을 주관하는 선거관리위원회(INEC) 관리들은 수백만의 유권자들이 폭풍우가 쏟아지는 악천후속에 투표소에 나왔다고 순조로운 투표를 예견하고 있으나 AFP통신과 외교관들은 현지시간으로 오후 3시 대부분의 도시에서 일부 줄을 선 유권자를 제외하고는 투표가 중단됐다고 전했다.

AFP통신은 와리, 아우카 등 일부 남동부 도시에서는 투표마감시간이 1시간 남은 3시 현재 투표가 시작도 안됐다고 보도했다. 일부 분석가들은 지역간 종교간 갈등으로 빈번히 발생해온 유혈 사태와 지난 선거 때에도 기승을 부린 혼탁한 선거 양상이 악천후와 투표용지 부족등에 따른 각종 문제점과 연계돼 이번에도 재연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를 하는 과정에 나이지리아 여당은 17일 이미 자신들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의회를 장악했다고 밝히고 19일 시작되는 대통형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반면 여당 연합은 이번 선거가 부정과 관권으로 인해 그리고 투표용지 부족 등 투표 장비로 인한 부정 등을 이유로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겠다며 대규모 반정부 운동을 펼칠 기세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오바산조 현 대통령의 승리는 그를 군정을 종식시키고 나이지리아의 이제 막 시작되는 민주주의의 기수로 떠받들고 있다.
그러나 지난 1983년 민간정부를 전복시키 경험이 있는 군인 출신인 야당 지도자 부하리는 이번 국회의원 선거가 부정선거였으며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우리는 대선을 보이콧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규모 반정부 운동을 펼칠 것이다.  우리는 나이지리아 국민들이 자신의 투표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라고 18일 나이지리아 수도 아부자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부하리는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36개 주의 선거 결과를 취소하거나 다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번 선거는 여당 지지자들의 ‘대규모 사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중앙선거 관리위원회는 이번 선거 결과를 취소시킬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당은 부하리가 4년동안의 나이지리아 민주주의의 토대를 깍아내리려 한다고 반반하였다.

현재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54%의 개표 상황에사 하원의 경우 현 여당인 ‘인민 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 : PDP)가 전체 360명의 의석 중 181석을 얻고 있다.
상원에서도 ‘인민 민주당’은 109개 의석 중 60석을 얻고 있다.  전체 29개 야당 중 가장 큰 정당인 부하리의 '전 나이지리아 인민당‘(All Nigeria People’s Party ANPP)은 하원에서 82석을 그리고 상원에서는 26석을 얻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혼탁한 투표는 아프리카의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에서 1999년 오바산조 현태통령이 군부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이후 최악의 정치적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독립한 이후 43년 동안 제대로된 민간 정부를 형성하지 못했다.  많은 지역에서 해마다 종교와 종족으로 인한 마찰이 벌어지고 있으며 독립이후 7차례의 쿠데타가 알려주듯이 끊임없는 정치적 불안을 겪어왔다.  이번 선거도 많은 지역에서 폭력이 난무하고 분노가 폭발하는 장면들이 드러났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에서 다시 군부가 정권을 잡는다는 가정을 펼치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오바산조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4년간에도 적어도 1만명 이상이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종교갈등으로 사망하고 있듯이 사회적 불안은 쉽게 가라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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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식민지 경영

2003. 3. 27. 14:04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식민지 경영
1884-85년 유럽열강들은 베를린에 모여 식민지 분할을 본격화 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이디오피아와 리비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유럽의 식민지하에 놓였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은 아프리카에서 그들의 식민지 지배를 보다 강화하였다.  이들 제국주의 정책은 라이벌 국가들의 힘의 우위를 두려워 했기 때문에 식민지 경쟁은 더욱 가열되었고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은 아프리카 분할을 재편하게 만들었다. 즉 1차대전의 결과 아프리카 4개국의 식민지를 운영하였던 독일 영토는 영국, 프랑스, 남아공의 식민지 경영관리로 이관되었다.

영국
북아프리카에서 영국은 이집트인들이 그들 국내업무를 경영하는 것은 허용하였으며 수에즈운하의 통제권과 군사권 그리고 외교문제의 통제권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집트인들의 실질적인 개혁들은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정치불안을 야기시킬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영국 사이의 수단지배에 대한 의견차이에 대한 긴장감도 나타났다.  이집트는 오래전부터 수단을 통치했었다.  영국은 자국 식민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침입을 막기위해 19세기부터 수단으로의 확장을 시도했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남부지역에서 영국은 네들란드 후손인 보어(Boer)인들과의 전쟁을 수행했는데 1902년까지 지속되었다.  보어전쟁이라 불리는 앵글로-보어전쟁의 승리로 아프리카 남부는 영국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남부아프리카의 남아공은 아프리카너(영국계를 제외한 남아공 백인들)들로 주축이된 국민당(NP)이 1948년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국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20세기가 시작된지 10여년 동안 케냐에서는 영국이 그들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였다.  케냐의 부족들은 영국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함으로써 평화를 확보하였다.  이후 영국인들의 정착이 뒤따랐다.  그러나 영국으 우간다로의 이동은 영국민들의 실망을 샀고 그곳의 토지는 흑인들에게 주어졌다.

서부아프리카에서는 대서양 연안을 따라 영국이 감비아(Gambia), 황금해안(현 가나 Ghana), 나이지리아(Nigeria), 시에라리온(Sierra Leone)을 지배하였다. 여기서도 동부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인들은 영국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하였고 영국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아프리카인들의 식민통치에 있어 영국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질서, 순종 그리고 자유를 주는 사람으로 인식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경제적으로 영국이 해결해 주지 못했다.  20세기가 시작한지 10년이 흐르는 동안 식민지역으로부터의 이익들은 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세력을 유지하는 것을 커버하지 못했다.

프랑스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을 따라 식민지를 확보했다 : 가봉, 기니, 코트디부아르 그리고 세네갈 등이 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인들에게 대하는데 있어 영국보다 덜 인종주의적이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인들을 프랑스 시민으로 인정했으며 그들을 프랑스 문화권으로 동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들의 아프리카 식민 백성들에게 인류애적인 접근으로 다른 것은 아니었다.
아프리카인들은 프랑스에 과다한 세금을 바쳐야 했으며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아프리카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그리고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또한 식민지로부터 벌어들인 수입을 식민지의 경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본국의 프랑스인들을 위해 소비하였다.

독일
이 시기에 독일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독일은 아프리카에 식민지 건설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는 토고, 카메룬, 남서아프리카(현 나미비아) 그리고 탄자니아 등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1차대전 이후 그들의 식민지 모두를 잃었다.

포르투갈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의 식민지 제국 건설은 서구 열강 중 가장 일찍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의 식민지는 적도기니, 앙골라, 모잠비크와 대서양 도서 국가인 상톰메 프린시페와 케이프 베르데 등이 있다.
비록 19세기 노예제도가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없어지지만 노예의 형태는 계약노동 형태로 계속 존재하였다.  포르투갈 자체가 빈곤하고 주로 농업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포르투갈 아프리카식민지들도 아프리카대륙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들에 속한다.  그리고 포르투갈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도 가장 늦게 달성하였다.

벨기에
벨기에는 벨기에 콩고라 불라는 현 콩고민주공화국을 지배하였다.  '유니온 마니에레'(Union Miniere)라는 벨기에 회사는 벨기에 콩고에서 광산업을 주로 하였으며 다른 회사들은 이곳에서 고무와 상아 무역을 하였다.  프랑스 식민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벨기에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벨기에의 통치는 영국이 1903년 벨기에의 레오폴드(Leopold) 왕에게 불만을 했을 만큼 아프리카인들을 가장 심하게 착취한 국가였다.  레오폴트 왕은 영국의 불만에 대해 식민지 경영에 대한 간섭이라고 무시하였다.

비록 아프리카대륙의 토착민들이 유럽의 식민지 점령을 거부하였지만 서구 열강들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하기 시작한 1960년대까지 거의 60년간을 점령하였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정치일반

아프리카 군사쿠테타와 내전

2003. 3. 11. 13:39
Ⅰ.서론
검은 대륙 아프리카는 아직도 암흑 속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듯 하다. 기아와 에이즈등의 질병으로 인해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적 불안이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군사쿠테타와 내전으로 경제적 불안은 더욱 가중되고 이에 따른 국민들의 희생도 커지고 있다. 라이베리아에서는 3년간의 내전으로 15만명이 희생되었으며 앙골아 또한 15년간에 걸친 내전으로 국가가 거의 마비 상태까지 이르렀었다. 최근에는 자이르와 르완다등에서의 종족분쟁이 국제전 양상으로 번지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군사쿠테타와 내전등은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 원인은 크게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 경제적 요인과 인종문제 등 사회적 요인으로 나눠볼 수 있다. 앞으로의 글에서 이 요인들을 알아보고 각 각 다른 원인으로 인해 내전과 쿠테타가 반복되고 있는 아프리카의 나라들을 살펴보겠다.
아프리카의 현황까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정치.경제적 요인
아프리카국가들의 불안한 상황은 정치적 갈등이 주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갈등은 쿠테타라는 형식으로 표출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국가에서 쿠테타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은 정치적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보여준다. 지난 30년간 사하라 이남의 국가에서는 매년 두 차례꼴로 쿠테타가 발생하였다.  그중 성공한 쿠테타만 77차례이고 이 기간 중에 약 25명의 대통령과 총리가 정치적 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1980년대까지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쟁들은 궁극적으로 독립과 탈식민지화를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독립후 이같은 투쟁양상은 국경성 문제,인종갈등,종교문제 등 다른요소들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다.
1980년대 많은 전문가들이 민주적 제도와 경제자유화의 확산을 전망하였느나 민주화 물결은 미비하였고 여전히 많은 아프리카 권위주의자 지도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상태이다.
1980년대 말부터 민주화를 위한 다당제선거가 실시되고 있으나 제대로 된 선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프리카의 정치개혁은  냉전 종식 이후 미.영등 서방 선진국들이 경제원조의 조건으로 각 정권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로 인해 기존의 독재정권들은 제한적으로나마 다당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니제르와 시에라리온에선 최근 쿠테타가 일어났고, 르완다,나이지리아,자이르,라이베리아,수단등에서는 내전이 계속 되고 있다.  선거를 무사히 치른 국가에서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가나는 제리 롤링스 정권이 선거과정에서 돈을 푸는 바람에 인플레이션 문제에 시달리고 있고 우간다 등 많은 나라에서는 형식적으로 다당제를 취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론 독재정권인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에서 민주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과거 열강의 식민지 정책으로  경계선이 임의로 만들어져 각국이 민족적, 정치적 정체성이  흔들렸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열강들의 일관성 없는 정책은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또다른 원인은 경제실패와 권력층의 부패이다. 자유시장 제도의 실패는 식량폭등을 야기시켰으며 구조조정프로그램들은  더 많은 문제점들만  남겼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자유국가들과 비자유국가들 사이, 시장경제와 중앙통제계획경제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지식층에 기반을 둔 민중기반도 없으며 세계 곳곳에서 건설되어 있는 자발적 안보협력체도 없다. 오히려 종교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며 있으며 빈부의 격차는 점차 커지고 있다.
강대국들의 정치적,군사적 개입도 정치적 불안을 가중시키는 원인이다. 난민들의 보호와 평화를 외치는 강대국들이 뒤에서는  무기를 공급해주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나라가 프랑스이다. 94년 이후로 유엔이 무기금수조처가 시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프랑스는 최대 무기공급원으로서의 역할을 여전히 저버리지 않고 있다. 이밖에도 미국,영국,남아공등이 무기거래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Ⅲ.인종 및 사회적 요인
아프리카 지역의 불안은 식민지 유산과 냉전 유산에서 비롯되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식민지에서 벗어나 50.60년대 독립하였지만 식민지배시대의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반목과 종족간의 갈등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갈등의 요인들은 구소련의 붕괴로  냉전이라는 세력균형의 보호막이 사라지게 되면서 급격히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지난 몇 년간 인종적 분쟁은 집단폭력의 가장 공통된 형태가 되어왔고 아프리카에서 끊임없이 증가하는 국가간 혹은 국가내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주 요인이 되어왔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1천여개가 넘는 인종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독립 이후 상이한 문화와 상호 정치적 대립 속에 살아온 인종들이 하나의 지역적 영역 안에서 집결되어 공동의 시민권을 갖고 국가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국민적 통합이 극히 어려울 수 밖 에 없다. 이 때문에 주도권을 잡은 종족이나 정치집단은 독재적인 통치를 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종중심정치는 국가권력을 행사하여 소수인종과 종교집단에 탄압을 가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인종집단에 교육 ,취업 등 다방면에 있어서 각종 특혜를 주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국가 간의 분쟁은 내부문제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인종중심정치에 의한 경우가 많다.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레온, 가나와 토고, 수단과 우간다 등의 분쟁은 같은 종족을 탄압한다든지 혹은 정치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일어난 대표적인 분쟁이다.

Ⅳ.원인에 따른 내전양상과 국가별 현황

1.종족간 갈등에 의한 내전
차드- 인구 4백50만의 차드는 프랑스가 임의로 그어놓은 국경선에 의해 언어와 관습이 다른 192개의 소수 종족들이 하나로 합해진 나라이다. 전체 인구 52%에 달하는 회교도인 아랍계 푸라니족은 북부지역으로, 독립 이후 지배 세력이었던 기독교도와 흑인 사라족 , 고란족은 남부로 나뉘어 대립해 오다가 66년 회교도가 첫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 후로도 내전은 계속되고 있다.
소말리아-소말리아는 민족 간의 알력싸움이 타종족 말살극으로 이어지고 있는 대표적 지역이다. 1992년 6개의 씨족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21년간 장기집권해 오던 독재자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를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지만,이후 이들이 권력을 둘러싼 암투를 벌이면서 내전이 격화되었다. 1994년 평화협상 이후 군벌들간의 휴전협정이 아슬아슬하게 지켜져 왔지만 2대 군벌인 소말리아민족동맹(SNA)과 '12세력연합'은 최근 10여차례나 전투를 재개하고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내전이 본격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소말리아에서는 금세기 최악의 가뭄까지 겹쳐 600만 인구중 200만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2.반정부 조직에 의한 무력투쟁
라이베리아-라이베리아는 흑인 노예 출신들이 세운 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이다. 하지만 라이베리아를 건국한 미국 흑인 노예의 후손들은 토착 흑인을 다시 그들의 노예로 삼았다.
사무엘도 대통령은 육군 상사 출신으로 80년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나 반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의 재임 기간 중에도 쿠테타는 30여차례나 발생하였다. 그후 크란족,만딩고족,지오 마노족등 22개 종족이 7개 파벌로 나뉘어 89년 이후로 내전이 지속되고 있다. 현재까지 15만명이 내전으로 인하여 숨졌고 인구 2백30만명 중 절반 이상이 난민으로 몰락하여 아프리카를 떠돌고 있다.
모잠비크-1975년 포르투갈 통치로부터 해방되었으나 포르투갈의 용병으로 조직된 우익게릴다(RENAMO)가 끈질기게 정부전복운동을 벌이면서 이 반군과 정부와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오랜 내전으로 대부분의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버려서 농토는 황무지로 변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민의 절반 가량은 기아에 빠져 허덕이고 있으며 타국으로 피신한 난민만 해도 약150만명에 달하며 난민촌도 500여개나 된다.

3.복합적 성격의 내전

자이르-자이르의 내전은 투치족과 후투족의 종족분쟁, 반독재 투쟁, 외세의 개입이라는 다각적 원인에 의하여 발생한 복합적 성격의 내전이다.
냉전의 원칙에 따라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그동안 자이르의 모부투 정권을 거의 무제한적으로 지원해 왔다. 66년 집권한 이후 '검은 군주'로 군림해온 모부투는 국고약탈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워왔었다. 국내 반정부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으나 서방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정권을 쉽사리 무너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냉전의 종식으로 아프리카의 독재정권은 미국 등 서방국가에게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지나친 독재와 부패로 서방의 골치를 썩이던 모부투 정권은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쏟아부어 그를 지탱해줬던 미국이 94년 원조를 중단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자이르 내전의 요인은 인종간의 갈등이다. 자이르에서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종족분쟁이 치열해진 것은 브룬디의 투치족들이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뒤부터이다.부룬디 한의 후투족들은 곧장 피난길에 나섰으며 이후 후투족 난민중 일부가 게릴라로 변신해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정부를 공격했던 것이다. 이에 르완다와 부룬디 정부는 자이르내의 투치족 반군들과 합세해 자이르에 거주하고 있는 후투족 난미촌들을 습격하면서 종족분쟁은 살육전으로 비화했던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경제적 요인으로서 모부투 정권의 부패와 경제실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이르 경제는 73년 광산과 산업에 대한 국유조치로  침몰하기 시작했다. 명목은 국유화였지만 이것은 국부의 원천을  모부투와 그 일족의 뒷주머니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제도적인 장치에 불과 했다. 인플레도 엄청나서 자이르의 화폐가치는 형편없이 떨어졌다. 국가가 가난해질수록 모부투의 부정축재는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검은 돈을  그는 야당 인사들을 매수하는 등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쏟아 부었다. 이같은 부패로 민심은  모부투 대토령을 떠났고 반군이 일어나자 시민들이 반군을 반기는 상황까지 다다른 것이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정치일반

20세기 아프리카 주요 정치 일지

2003. 2. 13. 10:42
20세기 아프리카 주요 정치 일지

1900 : 앵글로 보어 전쟁(남아프리카 전쟁이라고도 불림)
1902 : 앵글로 보어 전쟁에서 보어(아프리카너들이라고도 불림)인들 패배
       세실 로데스 사망(Cecil John Rhodes)
1910 : 남아프리카 연방 형성(Union of South Africa)
       마르크스 가르비(Marcus Garvey) 흑인 권리들을 위해 투쟁
1912 :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원조인 남아프리카 원주민 회의(SSANNC) 창설
1914 : 세계 제 1차대전 발발 : 아프리카인들도 참가 그러나 혜택은 거의 없었다.
1917 : 볼세비키 혁명과 반식민지 투쟁
1921 : 남아프리카 공산당(SACP) 형성
1922 : 남아공 얀스머츠 정부에 의한 광산 파업 분쇄
1936 : 이탈리아 이디오피아 점령
1938 : 남아공에서 실라칸스(중생대의 강극어의 일종) 발견
1939 : 세계 제 2차대전 발발 - 수천명의 아프리카인들 참여
1948 : 흑백인종차별을 법제화한 국민당(NP)이 남아공 선거에서 승리
1950 : 기니아와 가나에서 성공적인 독립운동 착수
1952 : 케냐에서 영국식민지에 대항하는 마우마우(Mau Mau) 운동이 발발
       이집트의 파룩(Farouk) 왕 퇴위
1954 : 알제리 독립전쟁 시작
1956 : 수에즈(Suez) 운하 위기
       수단의 독립 :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는 영향 미미
1957 :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서 가나가 최초로 독립
1959 : 소부크웨(Sobukwe)가 범아프리카회의(PAC)의 최초 의장의 취임
1960 : 유엔총회 '식민지 국가들과 국민들의 독립보장 선언'
       이디오피아 아데베 비킬라(Adebe Bikila) 올림픽 마라톤 우승
       촘베(Tshombe) 콩고 카탕가 주 분리독립선언
       이집트 소련의 원조하에 아스완 댐 프로젝트 시작
       남아공에서 샤프빌(Sharpeville) 학살로 69명의 흑인들이 사망
       루툴리 ANC 의장 노벨평화상 수상
1961 : ANC의 군사조직인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창설
       남아공 영연방으로부터 탈퇴
       루뭄바(Lumumba) 콩고(현 콩고민주공화국) 최초의 수상으로 취임
1962 : 남아공에 대한 첫 번째 유엔제재
1963 : 아프리카 단결기구(OAU) 형성
       아지키웨(Azikiwe) 나이지리아 첫 번빼 대통령으로 취임
       리보니아 재판(Rivonia Trial) - 만델라와 다른 9명이 사보타지 혐의로 재판
1965 : 로데지아 독립선언
1966 : 보카사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권력 장악
      나이지리아 첫 번째 수상 아부바카르 발레와(Abubakar Tafawa Balewa) 살해
      세레츠 카마(Seretse Khama) 보츠와나 대통령 당선
      남아공 수상 베르워드(Verwoerd) 암살
1967 : 탄자니아 니에레레 대통령 집단농장을 통한 사회주의를 위한 아루샤(Arusha) 선언
      나이지리아에서 비아프라(Biafra) 내전 발발
      남아공의 크리스 버나드 세계 최초 심장이식수술 수행
1969 : 리비아의 가다피(Gadaffi) 이드리스(Idris) 국왕 하야시키고 권력장악
1971 : 이디아민 쿠데타로 우간다 대통령 오보테(Milton Obote) 축출
1974 : 리스본에서의 쿠데타로 포르투갈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독립시작
1975 : 앙골라 내전 시작
       첫 번째 로메협정 조인
1976 : 이디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황제 살해
       6월 16일 소웨토 학생들 시위발발
       에볼라(Ebola) 바이러스 최초 확인
1977 : 남아공 흑인의식 운동을 주도한 스티브 비토(Steve Biko) 감옥에서 고문으로 인해 사망
1978 : 케냐의 초대대통령 조모 케냐타(Kenyatta) 사망
1979 : 적도기니 대통령 프란시스코 은구에마(Francisco Marcias Nguema) 처형
       나이지리아 올루세군 오바산조 민간정부 이양
1980 : 세네갈의 레오폴드 셍고르(Leopold Senghor) 대통령 퇴임
1981 : 이집트 대통향 사다트(Anwar Sadat) 이슬람 근본주의 군인에 의햐 암살
1984 : 에이즈가 인간 면역결핍증 바이르러(HIV)에 의해 야기됨을 확인
1986 : 카메룬의 니오스 호수에서 가스로 인해 1천7백명의 사람들이 사망
       모잠비크 대통령 마셜(Samora Machel)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
1989 : 구 소련의 붕괴로 냉전종식
     : 남아공 드 클레르크가 보타에 이어 대통령으로 취임 - 인종차별 종식을 위한 협상시작
1990 : 넬슨 만델라 감옥에서 석방
       나미비아 남아공으로부터 독립
       케냐 외무부장관 오우코(Robert Ouko) 살해
1991 : 잠비아 카운다(Kenneth Kaunda)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 칠루바(Frederick Chiluba) 새대통령 위임
       시아드 바레(Siad Barre) 소말리아 대통령 축출  
1992 : 부투루스 갈리(Boutros Boutros Ghali) 유엔 사무총장 취임
       알제리 내전 발발
1993 : 남아공 공산당 당수 크리스 하니(Chris Hani) 암살
       ANC 의장 올리브 탐보(Oliver Tambo) 사망
       잠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비행기 폭발로 전원 사망
       에리트리아 이디오피아로부터 독립
       33년간 집권한 코트디부아르의 부아니(Houphouet-Boigny) 대통령 사망 o
1994 : 르완다와 부룬디 대통령이 비행기 격추로 사망 - 인종간의 대학살 촉발
       남아공 최초의 다인종선거와 만델라 흑인 대통령 취임
1995 : 나이지리아의 작가·환경보호주의자인 사로위아(Ken Saro Wiwa) 처형
1996 : 소말리아 군부지도자 파라 아이디드(Mohamed Farah Aideed) 살해
1997 :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 취임
       자이레전대통령 모부투(Mobutu Sese Seko) 모로코에서 사망
       이집트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관광객 64명 살해
1998 : 나이지리아 군부 아비올라(Moshood Abiola) 심장병으로 사망 - 나이지리아 민간정부 탄생
       케냐 나이로비와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의 미 대사관에서 폭탄공격
1999 : 가다피 리비아 지도자 로크비에Lockerbie) 사건 주범 네들란드 국제사법소에서 재판하는데 동의
       남아공 두 번째 민주선거 - 타보 음베키 대통령 선출
       넬슨 만델라 정계은퇴
       탄자니아 전대통령 니에레레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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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새대통령 키바키의 대통령 도전사

2002. 12. 31. 14:51
케냐에서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던, 역사적 총선이 실시되었던 지난 12월 27일(금요일)은 무아이 키바키(Mwai Kibaki)는 대통령 궁으로 향하는 그의 역사적 첫 걸음을 걷는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에게 있어서 대통령으로 향한 공식적인 출발은 1991년 크리스마스 날 그가 몸담았던 케냐 아프리카 민족연합(KANU)당을 뛰쳐나와 몸바사의 항구도시에서 민주당을 만듦으로써 시작되었다.

키바키는 KANU와 모이 대통령에 대한 전통적 충성으로 뭉쳐있는 일당제를 깨는 것이 주요 첫 번째 일이었다.  점잖고 도회적인 풍채를 지닌 키바키로서는 굳건한 야당의 면모를 보이는 것이 우선시 되었다. 그러나 키바키를 위한 어려운 시작은 이미 KANU당과 반대의 길을 걷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키바키와 함께 한 민주당에는 강직한 정치인인 은젠가 카루메(Njenga Karume), 엘리우드 무와문가(Eliud Mwamunga), 아그네스 은데테이(Agnes Ndetei), 차리티 은길루(Charity Ngilu), 마르타 카루아(Martha Karua) 그리고 키바키의 정치 지역구인 니에리(Nyeri) 구역 출신들의 정치인들이 함께 하였다.
야당으로서의 민주당은 여당의 온갖 야당 분열 획책과 야당들의 분열은 순항을 이룰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키바키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1992년 11월 3일 나이로비에서 개최한 그의 첫 번째 민주당 집회가 대규모 군중을 모음으로써 그가 자신감을 얻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주로 중산층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서민들과 도시 상인들 그리고 니에리 구역 외부의 키쿠유족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키바키는 1992년 열정적인 대통령 선거를 벌였다.

그러나 1992년 선거에서 키바키는 1백30만표를 얻어 대선에서 3위를 차지하는 만족해야 했다.  모이 대통령이 1백90만표를 얻어 대통령에 다시 취임하였다.  2위는 1백30만표를 얻은 케네쓰 마티바(Kenneth Matiba)였고 4위는 90만표를 얻은 자라모기(Jaramogi) 였다.

1997년 대선이 시작되자 키바키는 사회 민주당의 은길루가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주었기 때문에 모이 대통령의 강력한 도전자로 떠올랐다.
1997년 선거는 키바키에게는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열렸다.  1992년에는 중부 주와 나이로비에서 야당인 마티바와 싸워야 했던 반면에 1997년에는 전통 야당지역에서 단독 후보로 나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키바키의 장애물은 야당인 라일라 오딘가(Raila Odinga)와 니안자(Nyanza) 주에서 승리를 위해 겨루어야 하고, 서부 주에서는 와말와 키자나(Wamalwa Kijana)와 그리고 동부 주에서는 은길루(Ngilu)와 겨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여당의 모이는 야당들이 분열되어 있는 틈 속에 순조롭게 항진할 수 있었는데 특히 전통적으로 여당의 강세인 리프트 밸리(Rift Valley) 주와 전국에 고루 걸친 지지세력을 얻을 수 있었다.
선거가 끝마쳤을 때 모이는 2백4만표를 얻어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키바키는 1백80만표를 얻었지만 고배를 마셨다.  이번에도 야당의 분열이 모이의 대통령 연임을 허용한 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키바키 진영은 이번 선거에서 수많은 부정 수단으로 선거를 조작하였다고 항의하였다.  키바키는 법정에 부정선거에 대한 청원도 하지 못했다.  이미 법정은 모이대통령의 법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키바키는 다시 사업가로 다시 돌아왔고 2002년 선거를 와신상담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선거에서는 그가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야당 단일화를 이루어 냈다.  무의 부식간에 역사는 KANU 당이 야당 연합의 힘에 무너지는 것을 기록하게 되었다.

한때 라일라 오딘가는 그의 당을 KANU와 합당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으며 정치분석가들과 합당에 대한 비평들이 회의적으로 나왔다.  사실 KANU도 라일라 오딘가의 당과 합병하는 것을 원했으나 결국 그와 같은 움직임은 물거품이 되고 야당연합이 결실을 맺었다.
방송매체와 분석가들은 2002년 2월 야당 단일화를 위해 나이로비 세레나(Serena)에서 키바키, 키자나 와말와 그리고 차리티 은길루 세 사람이 처음으로 조찬 모임을 가진 것에 대해 그대지 중요스럽게 취급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3월 18일 KANU와 오딘가의 NDP가 전격적으로 합당한다는 뉴스가 터져 나왔다.  정치적 성향으로 봐서 그와 같은 일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며 카사라니(Kasarani) 체육관에서 열린 합병식을 정점으로 KANU 당내에서 이 합병에 대한 대규모 반발의 싹이 트기 시작했고 야당들은 단결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KANU가 합당으로 보다 규모가 크지자 키바키, 은길루 그리고 와말와는 진지한 모임을 가졌고 그들과 연합하고자 하는 다른 소규모 정당들과도 접촉하였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변화를 위한 민족 동맹'(National Alliance for Change : NAC)을 결성하였다.

그들의 첫 번째 진지한 모임은 28명의 국회의원들과 함께 나쿠루(Nakuru) 호수의 라이온 힐 롯찌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야당 연합의 대통령 후보를 정하기로 하고 키바키와 와말와 두 사람으로 의견이 갈렸다.
반면, 여당인 KANU는 대통령 후보로 초대 케냐 대통령인 조모 케냐타의 아들인 우후루 케냐타(Uhuru Kenytta)를 지명하였다.

'변화를 위한 민족동맹'은 당 이름을 '케냐 민족동맹'(National Alliance Party of Kenya : NAK)로 변경하였다.  9월 18일 선거를 위한 준비를 하고 대통령 후보로 키바키를, 부통령 후보로 와말와 그리고 수상 후보로 은길루를 확정하였다.
그것으로 KANU당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KANU 당의 핵심 당원들인 사무총장 라일라 오딘가(Raila Odinga), 부총재 칼론조 무시오카(Kalonzo Musyoka), 카타나 은알라(Katana Ngala) 그리고 무살리아 무다바디(Musalia Mudavadi)가 NAK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모이의 측근이었던 일부 인사들도 합류하였다.

또한 KANU와 연합하려던 '무지개 동맹'(Rainbow Alliance)이 KANU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대통령 후보를 요구하며 연정을 거부하였고 10월 14일 '무지개 동맹'은 우후루 공원에서 NAK와 연합하였다.  그와 동시에 '무지개 동맹'의 일원으로 그동안 내각에 참여했던 장관들도 사임하였다.

우후루 공원에서의 집회는 나이로비 집회 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중들이 운집했으며 거대 연합을 이루는 가장 큰 조치였다.  카사라니(Kasarani)에서 열린 여당 KANU의 대통령 후보지명에서 우후루 케냐타가 임명되었다.
우후루 공원의 집회에서 무지개 동맹의 라일라는 연설을 통해 "카비카 만이 이끌 수 있다"(Hata Kibaki anatosha)라고 소리쳤다.

일주일 후 그 연합은 '민족동맹무지개 연합'(National Alliance Rainbow Coalition : Narc)을 만들었고 힐튼호텔에서 대통령 후보로 키바키를 지명하였다.
11월 18일 키바키는 선관위에 공식적인 대통령 후보로 등록하였고 전투는 시작되었다.  그 전투는 12월 27일 선거를 통해 키바키의 승리로 끝을 냈고 드디어 케냐에서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올아프리카 africa club 정치/정치일반

영국, 짐바브웨 인접국에 군대 배치

2002. 9. 1. 13:25

영국은 짐바브웨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군사 훈련을 개시할 예정이다.
영국 국방부는 짐바브웨의 백인 농장주들의 안전에 대해 위험이 커져 가고 있다는 이유로 3백명의 정예 공수 부대를 배치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들 백인 농장주 대부분은 영국인으로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이 최근 명령한 토지 몰수 명령으로 안전을 위협받고 있다.
국방부 참모장은 남아공에서의 장기간에 걸쳐 펼쳐질 작전은 국경 지대에서 일어나는 폭력과는 연관이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런던의 국방부 대변인은 백인 농장주의 소개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공수 대대인 1대대의 정예 병력을 사용하는 것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 대변인은 PA통신과의 회견에서 "모든 국가는 자국민이 거주하고 있는 외국에서 급박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이들을 피난시키기 위한 신속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은 현재 훈련에 동원된 병사들이 소개(疏開)를 위한 작전에 투입될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두 문제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국방부 대변인의 발언은 영국의 공수특전단(SAS)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영국민 소개에 대비해 짐바브웨와 남아공의 국경 지역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발표됐다.
데일리 텔레그라프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수특전단의 대원들이 국경을 넘는 대량 호송 작전을 위해 영국인 거주민들을 집할 시킬 수 있는 전략적 지점을 짐바브웨 내에서 선택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익명을 요구한 국방부 관계자의 발언을 빌어 군 전략가들이 대부분 백인 농장주인 약 2만명의 영국 시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지상과 공중에 걸친 작전 수립을 완료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데일리 텔레그라프지는 국방부 참모장이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로부터 공군을 동원해 영국인들을 소개하려는 계획도 완료했다고 보도했다.
영국인들을 포함해 백인 농장주들은 흑인 짐바브웨 퇴역군인들에 의해 위협과 공격을 받고 있다. 이들 짐바브웨 병사들은 백인 농장주를 강제로 퇴거시키는 무가베 대통령의 정책을 앞정서 실천하고 있다.
영국은 그간 토지 몰수 프로그램을 비난하는데 가장 앞장서 왔으며 올 초 재선된 무가베 대통령에 대한 국제적 우려에서도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이번 주 초 유럽연합은 무가베와 그 지지자들을 겨냥한 수출 중단 정책을 연장시켰다.
영국의 잭 스트로 외무장관은 이번 결정은 국제 사회가 무가베 정권의 경직된 정책에 대해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잭 스토로 장관은 지난 1년간 짐바브웨 주변 국가들로부터 무가베 정권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고 있다. 이는 일년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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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백인 토지 몰수 명령 짐바브웨 대통령, 전시 내각 구성

2002. 9. 1. 13:24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은 국가의 경제 문제뿐 아니라 영국과 그 동맹국들의 반대와 싸우기 위해 새 각료진을 출범시키고, '전시 내각'으로 칭했다.
새 내각은 무가베 대통령이 국제적 명망을 얻고 있는 심바 마코니 재무 장관을 경질한 지 3일 후인 월요일(이하 현지시간)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올해 78살인 무가베 대통령은 50명의 장관과 부장관들로부터 취임선서와 충성 선서를 받았다.
내각에서 노련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허버트 무레와 전 산업무역부 장관이 마코니 장관을 대신해 재무 장관직에 임명됐다.
유임된 강경파 인사는 때때로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 백인 소유 농장 몰수 사업을 지휘했던 조셉 메이드 농무 장관, 금년도에 적어도 12명의 언론인을 체포하고 기소하는데 활용된 새 미디어 관련법을 기초한 조나단 모요 정보부 장관 등으로 알려졌다.
사법부의 개혁을 이끈 공격적 성향의 패트릭 치나마사 법무부 장관도 유임됐다.
짐바브웨의 국영 방송 ZBC는 새 내각이 국가의 경제 문제뿐 아니라 영국과 그 동맹국들의 반대와 싸우게 될 것이라는 무가베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 보도했다.
ZBC 방송은 "취임식 후 연설을 통해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은 새로운 내각이 국가의 경제적 문제와 싸우기 위해 완벽히 준비된 자립적 전쟁 내각이라고 설명했다"고 보도했다.
이 방송은 "대통령이 새내각을 짐바브웨에 대해 취해질 영국과 그 동맹국들의 조처를 고려해 넣은 정치적 전쟁 내각이라고도 규정했다"고 전했다.
무가베 대통령은 "새 내각은 가능한한 문제에 최대한 접근하게 될 것이다. 짐바브웨가 필요로 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내각 관료들"이라고 방송에서 밝혔다.
지난 금요일 내각을 해산한 무가베 대통령은 백인 농장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땅을 소유하지 못한 흑인들에게 분배하라는 명령으로 국제 사회의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23만명을 고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는 약 2천9백명의 백인 농장주들에게 농장을 떠나라는 명령이 통고됐고, 이들 가운데 60%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있다.
짐바브웨에서는 지금까지 거의 2백명의 백인 농장주가 체포됐다.
1980년 독립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 속에서 기근이 예상되는 가운데, 짐바브웨는 점증하는 국제적 고립에 직면하고 있다.
일요일에는 사전에 협의된 진상조사 임무를 위해 짐바브웨에 도착한 4명의 노르웨이 정치인들과 노르웨이 적십자 대표들이 쫒겨났다.
호주 정부는 논란이 되고 있는 토지 몰수가 결국에는 인종 청소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알렉산더 다우너 호주 외무 장관은 호주의 채널 10 TV에 일요일 출연, 호주 정부는 짐바브웨에 대해 새로운 제재 조치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우너 장관은 "무가베 대통령이 국제 사회의 시각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다. 그는 농장에 대해 실제적으로 인종 청소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지난 주 짐바브웨는 미국과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백인의 경제적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무가베 대통령에 대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명을 제기하고 있다며 양국을 고발했다.
짐바브웨의 이같은 반응은 미국이 무가베 대통령을 합법적인 지도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한 이후 나온 것이다.
짐바브웨의 한 고위급 외교 당국자는 "짐바브웨의 정치 시스템이나 대통령에 대한 합법성은 미국, 영국 또는 그 밖의 나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짐바브웨 국민들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로이터에 말했다.
그는 "미국과 영국이 짐바브웨를 상대로 사용하고 있는 협박 전술은 사회, 정치적 정의 실현을 위한 우리의 열망을 좌절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백인들 소유의 몇몇 광대한 농장을 토착 주민인 흑인들에게 재분배하려는 우리 정부의 계획을 막으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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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농장주들, 토지 몰수에 강력 반발 - 법원은 백인 농장주들 손 들어줘

2002. 9. 1. 13:23

농장에서 퇴거하라는 짐바브웨 정부의 최종 기한을 넘긴 약 2천명의 백인 농장주들이 정부의 후속 조처를 우려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아직까지 이들 백인 농장주에 대한 정부의 즉각적인 대응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농업 정의를 위한 농장주 모임의 제니 윌리엄스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적어도 1천9백명의 농장주들이 가족, 일꾼들과 함께 농장에 머물고 있다고 밝혔다.
윌리엄스는 농장주들이 정부가 곧 조치를 취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는 일부 농장주들이 목표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우리는 목표가 된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위협받고 있으며 체포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어제(목요일:이하 현지시간) 받았다"고 CNN에 말했다.
현지 경찰은 국가 토지 개혁 프로그램에 따라 목요일 자정까지 농장을 포기하고 떠나라는 통보를 받은 전체 농가 4천5백가구 가운데 2천9백여명의 농장주들을 퇴거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 촘보 주지사는 경찰이 정부의 명령을 어긴 사람들을 체포할 것이라고 말했다. 농장주들은 기소될 경우 벌금을 부과받고 2년형에 처해진다.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의 농장 압류 명령은 백인 농장주 가운데 약 95%에 이르는 농장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 무가베 대통령의 압류 명령은 대부분이 흑인인 35만명의 농장 노동자들과 2백만명에 이르는 그들의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목요일 오전 짐바브웨 고등 법원이 퇴거 명령은 불법이라고 판결함에 따라 농부들은 법률적인 면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법원 판결

획기적인 판례로 기록될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는 등록된 재산의 저당권을 가지고 있는 국가상업은행에 국가가 고지한 바 없으므로 앤드류 코켓이 소유한 농장을 국가는 몰수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판결을 지켜 본 사람들은 법원의 이번 결정이 강제 퇴거에 처한 많은 농장주들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코켓은 "대다수라고 생각되는 나와 같은 환경에 처한 농장주들은 이번 판결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고 사우스 아프리칸 라디오에 밝혔다.
그는 "하지만 자동적으로 다른 농장주들에게도 판결이 적용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농장 업무 관계자들은 이번 판결에 대해 무가베 정부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많은 농장주들이 기다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몇몇 농장주들은 이미 그들의 농장에서 철수해 읍이나 도시로 철수했다. 이번 주는 집권 여당이 그들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끌어 올리기 위해 이용하고 있는 축제 기간이다.
가재 도구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농장 지구에서 수도 하라레로 목요일 모여 들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는 로이터 통신에 다음 주에는 자신들의 농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1980년 독립을 쟁취한 로디지아가 짐바브웨로 국명을 바꾼 이후 절대적 권력을 행사해온 무가베 대통령은 그의 몰수 명령은 상질의 농장 가운데 70%가 백인의 손에 넘어간 영국 식민지 시대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난 5월 무가베 대통령은 2천9백명의 백인 농장주들에게 농장과 관련된 신변 정리를 위해 45일의 시한과 추가로 45일을 더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르면 8월 8일 자정은 백인 농장주들이 농장을 포기하고 흑인 주민들에게 양도해야 하는 최종 기한이다.
유엔 산하 세계 식량 프로그램에 따르면 짐바브웨 인구의 절반인 1천2백50만명이 심각한 기아에 처해 있다.
(CNN and Joins.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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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라는 &#039;시한폭탄&#039;과 지속가능 발전을 위한 세계정상회의

2002. 8. 27. 09:21

1970년 이래 세계의 가장 잘 사는 20개 국가들은 세계의 가장 가난한 20개국 보다 30배 이상 부유해졌다.  만약 인류가 가난이라는 '시한폭탄'을 피하려면 정부정책, 제도 그리고 법률들이 철저히 점거되어야만 한다라고 세계은행은 경고하였다.
'세계개발보고서 2003'에서 세계은행은 발전을 유지하는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해, 세계지도자들과 국제개발당국들이 국제무역 관계들을 개선하기 위해 압력을 가해야 하며 그리고 정부들은 민주적 원칙들을 공고히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포괄적인 보고서는 8월 26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시작되는 '지속가능 발전을 위한 세계정상회의(WSSD)'에 앞서 세계은행 고위 경제학자에 의해 배포되었다.  세계은행의 개발 정책 국장인 이안 골딘(Ian Goldin)은 "우리는 정책의 변화 없이는 세계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 지도자들이 참가한 이번 지구촌 최대 환경회의인 ‘지속가능 발전을 위한 세계정상회의’는 26일 오전 10시 개막돼 열흘 간의 회의를 시작했다.

26일 개막식에선 남아공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하여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넬슨 만델라(Mandela) 전 대통령이 기조 연설을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개막 축하 메시지에서 “신(神)은 땅 위에 있는 인류에게 땅을 관리할 소임을 주었다”며 “인류는 상호의존하며 공동의 선(善)을 위해 함께 노력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106개국 국가원수·총리 등 지도자들과 189개 유엔 회원국 정부 및 비정부기구(NGO) 대표 6만여명이 참석하는 이번 지구정상회의는 첫날 오전 보건 문제를 논의한 후 생물다양성과 생태계에 관한 분야별 토론을 진행했다. 27일엔 농업, 금융·무역, 기술이전, 정보·교육·과학, 소비패턴에 대한 회의가 열릴 예정이며, 28일엔 수자원, 위생, 에너지 분야에 관한 전체회의가 이어진다.

그러나 26일 개막 선언 직전까지도, 이 회의에서 결론으로 채택될 예정인 ‘지속가능 발전을 위한 행동계획’의 초안 마련을 위한 예비 협상에선 큰 진전이 이뤄지지 않았다. 25일 이틀째 계속된 예비 협상에서 참가국 대표들은 개발도상국 및 빈곤국가들의 ▲빈곤 퇴치 ▲깨끗한 식수 공급 ▲보건 문제 ▲인구 증가에 대비한 에너지원 창출 등을 위한 국제적 원조 문제를 논의했으나, ‘행동계획’에 포함할 내용의 약 30%는 여전히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앞서 77개 개발도상국 대표들은 25일 비공개 회의를 갖고, 선진국 시장 접근 허용과 농업생산물 보조금 삭감, 개도국 지원확대 등에 대해 공동 입장을 취해나가기로 결의했다.

남아공의 타보 음베키(Mbeki) 대통령은 25일 전야제 연설을 통해 각국 대표들에게 “이제 풍요를 만끽하는 소수 부유층과 가난에 허덕이는 다수 빈곤층 간의 ‘지구촌 차별(global apartheid)’에 종지부를 찍자”고 호소했다.

이와 같은 회의에 맞춰 세계은행의 보고서는 이번 정상회의의 성공은 부강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사이의 차이를 얼마나 좁힐 것인가라는 프로그램의 채택에 달려있다고 적고있다.

이번 보고서는 대부분의 선진국가들에 의해 추구되는 국제무역정책, 특히 미국과 유럽연합국가들이 그들 국가들의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지급하는 농업보조금 등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농업 보조금은 부강한 국가들이 가난한 국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라고 골딘은 주장하였다.  "보호무역주의의 이슈는 극단적으로 중요하다".  세계은행은 지속가능 발전의 사회적 그리고 환경적 관점 모두를 착수하기 위해서는 개선된 지구적 전략이 요구된다고 지적하였다.

부자 국가와 가난한 국가들 사이의 불균형은 이번 회담의제의 주요 논쟁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일부 국가들은 세계화의 충격에 대한 주제를 논의하길 바라고 있다.  이번 세계은행의 보고서는 리오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의 '유엔 환경과 개발회의'가 열린지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세계경제의 밑그림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번 보고서는 또한 대기오염의 증가, 신선한 물 부족의 증대, 토양의 오염 그리고 삼림의 파괴 등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빈곤이 점차 줄어든다고 정의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요 이슈는 가난을 극복하는 것으로 유엔은 2015년까지 현재의 빈곤을 절반으로 감축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세계은행은 개발도상국들을 위한 세계 시장의 접근을 보다 용이하게 허용하고 빈곤 국가들의 농촌개발에 보다 많은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세계은행의 보고서는 개발도상국 인구 30억명 중 농촌에 살고있는 약 1/4 사람들이 하루 150원 이하의 생활을 하는 극빈층으로 살고 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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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새 아프리카 정책

2002. 8. 11. 14:09

그 동안 점진적으로 변화를 보여오던 프랑스의 대(對) 아프리카 정책이 1997년에 그 변화의 절정기를 맞이했다. 즉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나라들에 대한 온정주의, 자국의 뒷마당으로 여기는 아프리카 나라들에 대해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배제하려는 경향, 옛 식민지 국가에 대한 봉건군주 같은 자세나 특정지역 독재자들에 대한 지원 같은 해묵은 관행 등이 완전히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다. 예전과 달리 민주주의와 인권은 번영에 장애가 아니라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고 나섰고, 아프리카의 경제발전과 분쟁해결을 위한 국제기구의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했으며, 영어·포르투갈어권 나라들에도 프랑스의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시야를 넓혔다.

1997년 8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연례 프랑스 대사모임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새로운 '행동지침' 2가지를 제시했다. 첫번째 지침은, 프랑스는 "정치적이건 군사적이건 혹은 그밖의 어떤 형태로든 간섭행위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는 그러한 내정간섭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나라에 대해 그러한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2번째는,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우방들이 스스로 선택한 방식과 속도로 법치와 훌륭한 통치를 강화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외국 투자가들이 안심하고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행동지침이 전통적 드골주의자인 시라크 대통령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은 한층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의 통치자들이 지금껏 프랑스에 묶여 있도록 인간적·경제적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데 깊숙이 관여해온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97년 6월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총선에서 승리해 리오넬 조스팽을 새 총리로 하는 정부가 들어섰다. 조스팽 정부는 바로 전 총리인 드골주의자 알랭 쥐페의 우파 정부뿐만 아니라, 시라크 대통령의 전임자인 사회주의자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1981~95)이 취했던 것과도 다른 아프리카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미테랑 대통령은 입으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했지만, 구태의연한 대(對) 아프리카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장 크리스토프 미테랑으로 하여금 대통령 관저 엘리제 궁에서 감독하게 했다. 미테랑 통치기간중 프랑스 군대는 프랑스 국민을 소개(疏開)하거나 우호적인 지도자들을 반란에서 보호해주기 위해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 10차례나 투입되었다. 1995년에 대통령직을 맡은 시라크도 대체로 같은 정책을 밀고나갔다. 다만 정책 집행자들이 바뀌었는데, 샤를 드골 전 대통령과 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 밑에서 아프리카 정책을 집행했던 자크 포카르가 자문위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미테랑 통치기간의 마지막 몇 년과 시라크 대통령 취임 후 처음 2년 동안 프랑스의 영향력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 정점은 1997년 프랑스가 지원하는 자이르(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 수도 킨샤사)의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이 축출되는 사건이었다 (→ 색인 : 모부투 세세 세코).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랑스의 영향력이 후퇴할 조짐은 과거에 프랑스가 아닌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자이르·르완다·부룬디에서 나타났다.

1994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던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르완다 대통령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면서 일련의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다.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죽은 이 사건은 폭발 직전의 정국에 불을 질렀고, 후투족의 투치족 대량학살사태로 이어졌다. 그러자 우간다에서 투치족 반군이 르완다를 공격해왔다.

1994년에 프랑스는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개입했으나, 투치족이 장악한 새 르완다 정부는 프랑스의 개입이 후투족 살인자들이 자이르로 피신하는 것을 돕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비난했다. 이 사건은 자이르를 불안정하게 만든 요인도 되었다. 자이르에서는, 오랜 반군 지도자 로랑 카빌라가 르완다를 비롯한 인접 국가들의 지원을 이끌어내어 반(反)모부투 공세를 성공적으로 개시했으며, 반모부투 감정은 점차 반프랑스 감정으로 이어졌다. 카빌라는 정권을 탈취한 후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프랑스어권 국가들의 정상회담에 불참했다.

이미 오래 전에 미국이 모부투를 지원한 냉전시대의 정책을 뒤집어 그에게 권좌에서 물러나라고 종용한 반면, 카빌라의 반군 세력이 우세하다는 것이 명백해진 지 한참 후까지도 쥐페의 프랑스 우파 정부는 모부투를 조건부로 지원하며 협상을 통한 내전 해결을 호소했다. 프랑스가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게 된 것은 결코 자국의 경제적 이익 때문이 아니었다.

모부투 통치하의 자이르에 대한 프랑스의 무역과 투자는 1997년 이미 바닥으로 뚝 떨어져 벨기에나 미국의 대(對) 자이르 무역 및 투자 규모보다 더 적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모부투의 철권통치 없이는 자이르가 프랑스의 영향권 내에 온전하게 남아 있을 수 없다고 잘못 판단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프랑스 우파정부가 특히 우려한 것은 자이르가 붕괴할 경우 이미 흔들리고 있는 프랑스어권 국가 콩고(수도 브라자빌)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이었다.

결국 킨샤사는 붕괴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카빌라가 전임자 모부투와 마찬가지로 독재정치를 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97년 5월 킨샤사를 점령하고 권력을 장악한 카빌라는 자신의 군대가 저지른 학살 혐의에 대한 국제연합(UN) 조사단의 현지사찰을 계속 거부했다. 그러나 카빌라 역시 모부투만큼 나쁜 독재자로 증명된다 하더라도, 킨샤사의 정권교체가 프랑스의 영향력에 심각한 타격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파리와 킨샤사에서 거의 동시에 권력자가 교체되기 이전에도 프랑스는 이미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군사적·경제적 관계에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1997년말 프랑스는 1960년에 발효된 협정에 따라 지부티·중앙아프리카공화국·차드·가봉·코트디부아르·세네갈에 7,9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드골주의자인 전임자들이 이미 승인한 계획에 따라, 조스팽 정부는 프랑스에 소규모 직업군대를 창설해 아프리카 주둔군의 수를 점진적으로 40% 감축하기로 했다.

1960년대에는 이용할 수 없던 수송수단과 통신을 이용하면, 필요할 때 이 직업군대를 아프리카에 파견할 수 있었다. 한편 프랑스군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완전히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외부의 침략이 있을 경우에만 프랑스가 개입한다는 1960년 협정과 달리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 프랑스군이 현지 반란에 휘말려드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군인을 비롯한 공무원의 급여총액을 동결 또는 삭감하려는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계획이 반란을 더욱 부채질해, 반란은 사실상 아프리카 전체의 공통 위험이 되었다. 프랑스는 이들 국제기구에 신중하고도 유연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음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프랑스는 특히 육군 병력이 2개 군단이 넘는 차드에 대해서는 IBRD와 공동으로 군사 2만 7,000여 명을 해산하고 재교육하기 위한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프랑스는 아프리카 군대를 훈련시켜 아프리카의 평화유지활동에서 더 많은 역할을 맡도록 하기 위해 영국·미국과 함께 노력했다.

프랑스는 1997년까지 아프리카 문제를 놓고 한때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IMF·IBRD와 보조를 맞추어 일을 추진했다. 이러한 공동협력이 거둔 초기의 성공사례는 1994년 1월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의 14개국에서 사용하는 아프리카공동재정프랑(Communaute Financiere Africaine Franc/CFAF)의 평가절하였다.

당시 여러 아프리카 국가 지도자들과 대통령이 되기 전의 시라크를 포함한 프랑스의 일부 정치가들은 이 조처에 반대했다. 그러나 1948년 1CFAF당 2프랑스상팀으로 정한 이래 오랫동안 고정되어온 환율을 1CFAF당 1프랑스상팀으로 조정하자, 장기간의 인플레이션 소용돌이를 유발하기는 커녕 아프리카의 수출과 경제가 호전되었다.

1997년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CFA 가입국들이 IMF와 IBRD의 계획안을 따르고 있었는데, 이러한 안의 가장 일반적인 사항은 경쟁입찰 방식을 통한 국유기업의 민영화 요구였다. 프랑스는 전기통신 분야와 석유탐사 분야에서는 미국 회사들과, 그리고 임업 분야에서는 아시아 국가들과 치열하게 경쟁해가며 많은 입찰을 따냈다.

이는 프랑스 회사들이 위험요소들을 비롯해 현지 시장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마저 더 이상 자신의 안전지대가 아님을 인식한 프랑스 회사들은 다른 시장, 특히 남아프리카에 진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콩고민주공화국(킨샤사)을 비롯한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 많은 프랑스인들은 그 배후에 미국의 손이 있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이 카빌라를 무장시켰다고, 그리고 보다 넓게는 미국이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을 영어권에 편입시키려는 총대를 메고 나섰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아프리카를 둘러싼 프랑스와 미국의 원조 경쟁은 결국 아프리카에 이익이 될 것이다. 프랑스의 아프리카 정책 담당자인 샤를 조슬랭 대외협력장관은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프랑스를 몰아내지 못할 것이다. 미국이 들어와도 프랑스의 영향력은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언했다.

아프리카에서 프랑스 영향력의 약화는 사실 환영할 일이 아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에 일본 다음으로 많은 공식 개발원조를 제공하고 있고, 유럽의 아프리카 지원 프로그램에서 여느 나라들보다 월등히 많은 원조를 제공하고 있으며, 세계기구에서 아프리카의 이익을 줄기차게 대변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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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남아공 역사의 20대 정치 사건

2002. 8. 10. 11:02

20세기 남아공 역사의 20대 정치 사건 (Top Twenty Political Events in Twentieth Century South African History)


1. 남아공 민주화를 위한 협상(CODESA)/국민통합정부(GNU)/헌법제정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백인 인종차별 우월론자들로부터 다인종 참여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20세기 남아공 역사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큰 이변으로 간주되고 있다.  1993년에 제정된 새로운 헌법에서는 선거후 향후 5년간 득표에 따라(5% 이상 득표한 정당) 국민통합정부를 구성하기로 하였고 선거이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국민당(NP) 그리고 인카타자유당(IFP)가 국민통합정부를 형성하였다.

2. 1948년 국민당 승리
1948년 남아공에서 국민당의 승리는 나치의 독일에서의 승리와 마찬가지로 상징적이었는데 국민당 집권이후 본격적인 인종차별을 법제하 하였다.  이후 국민당은 국내외의 압박으로 1994년 다인종선거로 패배하게 된다.

3. 1960년 3월 21일 샤프빌 대학살(Sharpeville Massacre)
백인정권이 아파르트헤이트 통치 시스템을 보호하는데 전세계에 그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범아프리카회의(PAC)가 불법으로 간주되었고 이들 단체들은 30년 가까이 지하활동을 통해 백인정권에 대항하였다.

4. 1976-1977년 소웨토 폭동(Soweto Uprising)
남아공에서 대중항의의 지표가 된 시점으로 흑인들의 대중 운동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젊고 급진적인 흑인 지도자들이 등장하였다.

5. 1984년 바알 폭동(Vaal Uprising)
남아공 백인정권이 인도인, 칼라드인 등을 포함하는 3원제의회를 출범시키자 바알 폭동이 발생하였고 이 폭동은 곧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와 백인정부의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를 마비시키기 위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6. 1985-1990 국가 비상계엄
1985년 7월 국가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다시 1986년에 실시된 비상계엄은 백인정권의 마지막 정권유지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7. 1990년 2월 11일 넬슨 만델라의 석방
남아공 흑인 저항의 상징이었던 넬슨 만델라가 28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다. 석방전 같은 해 2월2일 드 클레르크 대통령은 흑인정치단체들의 해금과 만델라의 석방을 국회연설에서 천명했었다. 만델라는 1994년 다인종 선거에서 ANC가 승리함으로써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8. 1913년 원주민 토지법, 1923년 원주민법 그리고 1950년의 집단 지역법
아파르트헤이트의 이들 3개의 법은 흑인들을 공식적으로 아주 좁은 지역으로 분리하려는 의도로 실시되었다.  이 법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는 인종별로 경제 사회적 불평등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고 특히 흑인들을 위한 반투스탄 마을을 설립하여 남아공의 토지와 노동력의 분배에 있어서 불평등을 가져왔다.

9. 1995-1999년 진실과 화해위원회(TRC)
데스몬드 투투 주교를 위원장으로 하는 이 위원회는 남아공에서 백인정권하에서 저질러졌던 인류범죄에 대한 사면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사면위원회에서는 과거 인권에 대한 침해의 죄를 지었더라도 위원회에서 그 죄를 참회하면 법으로 처벌하지 않는다.  이 위원회에는 보타 전대통령과 위니 만델라가 출석하였다.

10. 1912년 ANC 탄생
20세기 가장 오래되고 큰 아프리카 흑인 정치조직이다.  ANC는 그 조직에서 아주 효율적이고 잘 정비되었으며 1994년 다인종 선거로 남아공 최초의 흑인 집권당이 되었다.

11. 1985년 8월 15일 보타(P.W. Botha)대통령의 루비콘(Rubicon) 연설
1985년 보타는 국민당 나탈 전당대회에서 '루비콘을 가로질러'라는 연설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주요 개선 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아파르트헤이트 골격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또한 역설했다.  이 연설로 서구 각국들의 남아공에 대한 투자 철회가 이어졌다. 체이스 맨하턴(Chase Manhattan)과 같은 은행들이 남아공에서 철수하였고 미국 의회는 남아공에 대한 경제제재 안을 통과시켰지만 레이건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였다.

12. 1963-1964 리보니아(Rivonia) 재판
1963년 투옥중인 만델라와 동료들이 사보타주·반역죄·공모죄로 재차 소추된 이른바 '리보니아 재판'이 열렸다. 경찰은 요하네스버그 교외의 풍광 좋은 리보니아에 있는 움콘토 웨 시즈웨('민족의 창'이라는 이름의 ANC 전투조직)의 본부를 급습해 막대한 물량의 무기와 장비들을 발견했다. '국민의 창' 설립의 산파역을 맡았던 만델라는 기소내용의 일부를 시인했고, 1964년 6월 11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에서 만델라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의 이상"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 최후진술을 했다.

13.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 청년동맹(ANCYL) 형성
ANC내에서 젊은 청년들이 ANC내 연장자들이 투쟁을 하는데 있어 온건한 노선을 가는데 불만을 품고 청년동맹을 형성하였다.  이 청년동맹은 초대 대표로 안톤 렘베데(Anton Lembede)와 후에 ANC의 지도자 된 올리브 탐보(Oliver Tambo), 월트 시슬루(Walter Sisulu), 그리고 넬슨 만델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단체는 ANC를 1940년대와 1950년대 보다 급진적인 저항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ANC 지도자들이 이들 청년동맹을 지도했던 회원들로 바뀌게 되었다.

14. 1946년 노동자 파업
6만명 이상의 아프리카 광부 노동조합(AMU)이 1946년 임금과 근로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19개 광산에서 파업을 한 사건이다. 비록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지만 ANC와 노조들은 대규모 군중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노동조합과 ANC간의 유대도 강화되었다.

15. 2차 세계대전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은 남아공에도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남아공 내 백인들 중 영국을 지원해야 한다는 영국계 백인들과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아프리카너들과의 분열이 공공히 되어갔다.  결국 영국의 지원을 선언했던 얀 스머츠(Smuts) 정권은 1948년 선거에서 패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6. 1980년대의 '제3세력'(Third Force)의 출현
진실과 화해위원회(TRC)에서 드러나듯이 '제3세력'의 주체는 주로 백인정권하의 보안군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198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들은 준 자치적인 보안군을 운영하면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펼치고 있는 흑인단체들의 조직을 파괴하였는데 반체제의 인사들을 구금, 고문 그리고 살해하였고 대도시에 근무하고 있던 흑인들의 사이를 교묘히 분열시켜 흑인들간의 싸움을 뒤에서 조종하기도 하였다. 특히 줄루족과 코사족간의 싸움을 뒤에서 조종하고 1994년 다인종 선거를 앞두고 극렬한 테러를 저질렀다.

17. 흑인의식
흑인의식의 출현은 다양한 흑인들의 의견분출의 증가로 발생한 것으로 1960년대 말 스티브 비코(Steve Biko)에 의해 이 운동은 강화되었다.  흑인의식은 이후 흑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확대되었고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대중운동을 이끌어 왔다.

18. 1985년 3월 21일 랑가(Langa) 학살
랑가 우히텐하게(Uitenhage) 마을에서 샤프빌대학살 사건의 20주년 기념식을 하는 도중 경찰이 무장하지 않은 군중들에게 발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20명에서 43명의 흑인들이 사망하였으며 12명이 부상당했다.

19. 1966년 베르워드(Verwoerd) 암살사건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의 주요 완성자로 널리 아려진 베르워드는 의회에서 일하던 짜펜다스마르크스(Dmitri Tsafendasmarks)에 의해 암살 당했다.  베르워드의 암살은 남아공에서 수상이나 대통령이 암살 당한 최초이자 유일한 사건이었다.

20. 1910 5월 31일 남아프리카 연방형성
1910년 5월 31일 네 개의 남아프리카 식민지(케이프, 나탈, 오렌지 자유주, 트랜스발)를 하나의 헌법하에 정부를 구성하였다. 베르니깅(Vereeniging) 조약을 체결한지 8년만에 영국 식민지 당국은 아프리카너들에게 광범위한 자유와 자치를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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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U에서 AU로: OAU와 아프리카 경제

2002. 7. 20. 10:45

아프리카 단결기구(OAU : Organization of African Unity)는 창설될 때부터 아프리카의 경제협력을 그 중요 목표 중에 하나로 잡고 출범이래 경제 분야에 있어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1980년에는 첫 OAU 경제 회담이 라고스(Lagos)에서 열렸고 여기서 라고스 행동 계획(the Lagos Plan of Action)과 최종법안(Final Act of April 1980)을 채택되었다.  
이는 자존(self-reliance)의 향상, 내부적이고 자치적인 성장 및 자본 분산(diversification)의 고양, 자립 발전의 성취, 실업의 점진적 근절, 소득과 발전 이익의 공정한 분배, 협력을 통한 경제통합의 가속화 등을 포함한다.
5년 후 1985년의 제 21차 OAU 정상회담에서는 아프리카의 경제 상황에 대한 선언을 하였는데 이 선언은 라고스 계획과 그 최종법안을 추진 시키기 위한 방안을 포함하였다. 즉 아프리카의 식량 개선과 농업발전 및 부흥을 위한 특별조치와 지역적, 대륙적, 국제적 수준의 조치를 위한 공통 강령을 위한 법안 등을 말한다. 이 선언에 경제 복구를 위한 '아프리카 경제회복을 위한 선결프로그램'(Africa's Priority Programme for Economic Recovery, APPER)이 덧붙여졌는데 이는 1986년부터 1990년까지의 5개년 계획이었다. APPER은 UN 총회의 아프리카 경제 및 사회 위기에 관한 특별 회의에 제출되어 그 골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다른 계획들이 아프리카의 기본적 필요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반영하고 있는 반면 비상사태에 대한 국가 준비태세, 농업 발전, 가뭄과 사막화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 개선된 공공 투자 정책등에 관한 제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APPER을 완전히 실행하는 데에는 천 이백 팔십 억불이 들 것으로 예측하였는데, 아프리카내에서는 그 중 820억 달러를 자체 운용할 수 있고 나머지 자금은 외부 지원에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경제지원을 하는 것 외에 국제사회는 무역 기회를 개선시키고 채무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아프리카를 지원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아프리카의 채무문제는 그 당시의 중요 과제였으며 현재 역시 그러하다. 한 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라고스 계획과 APPER이 아프리카 각국의 공통적 열망을 반영하고 있지만 개별국에 대하여 구속력 있는 의무사항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OAU는 아프리카 국가에 적용 가능한 어떠한 경제 조치에 대해서도 구속력 있고 구체적인 의견일치에 이르도록 하는 힘을 갖지는 못했다. 1958년에 창설된 아프리카 경제 위원회(Economic Commission for Africa, ECA)도 그러한 힘을 갖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ECA는 연구, 통계, 회의 등을 통하여 아프리카의 경제 협력에 많은 공헌을 해 왔으나 아프리카의 경제 협력 또는 일치된 경제 정책을 실행시킬 수 있는 조직은 아니었다.
어떤 방향으로 발전이 되어왔건 간에 서부아프리카제국경제공동체(ECOWAS)와 남부아프리카 개발공동체(SADC)와 같은 지역 기구는 아프리카의 경제협력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간 부수적으로 지역의 평화유지 역할을 해왔던 이 조직들은(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 문제에 ECOWAS가 개입했던 것과 같이) 아프리카국가간 무역 거래에 장벽을 줄여나가는 과정을 시작하였다.
1991년 6월 2-6일 나이지리아의 새로운 수도에서 열린 제 27차 OAU 정상회담에서 궁극적으로 아프리카 전대륙의 경제 연합을 추구하는 데 대한 큰 진전이 있었는데 이는 아프리카국들이 아프리카 경제 공동체(African Economic Community, AEC)창설을 위한 아부자(Abuja) 조약에 서명한 것이다.
이는 먼저 현재 존재하는 지역 수준의 경제통합을 위한 구체적인 단계를 규정하였고 이후에는 이를 대륙적 수준으로 확대시키고 결국에는 자유무역 뿐만 아니라 동일 화폐를 실행하는 것을 규정하였다. AEC를 효과적으로 창설하는 목표년도는 2025년이다.
이제 공식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 AU)은 아부자 조약에서 제정된 계획들을 추구할 뿐 아니라 이를 서두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알려진 바와는 달리 AU를 창설하도록 한 2000년의 제정법(the Constitutive Act)에서는 정치적 연합의 즉각적인 창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법안에서는 아부자 조약에서 이미 허용한 아프리카 의회(an African parliament)는 허용한다. 그러나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 의회를 경제 통합 최종 단계에서 대륙차원의 보편적 참정권으로 선출할 것인지(아부자 조약에서 규정된 것처럼) 보다 일찍 또는 다른 방식으로 할 것인지는 추후에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으로 AU의 목적은 가능하다면 지역 통합 및 협력 계획을 서두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새로운 데드라인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이는 분명히 명시된 목적이며 아마도 AU는 OAU가 한 것보다는 경제문제에 더욱 치중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OAU가 이에 대하여 11년 전에 기초를 닦아놓은 것은 분명하다.    
(황규득, 아프리카 해외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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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연합(AU) 출범과 의의

2002. 7. 19. 14:32

아프리카 단결 기구(OAU)의 수뇌 회의가 7월 8일부터 남아공의 더반에서 열렸다. 이번 회담에서는 1963년 5월 25일 아프리카대륙의 식민통치 해방과 국가간 내정 불간섭 원칙을 기치로 이디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창설된 아프리카 단결기구(OAU)를 대신할 새로운 기구인「아프리카 연합(AU)」이 정식 출범시키기 위함이다. 지난 7월 아프리카 주요 국가 수뇌 회의에서 아프리카 지원의 기초로 된 아프리카 부흥 계획인 '아프리카 개발을 위한 새로운 파트너 쉽'(NEPAD)과 아프리카 연합의 역할 등도 함께 협의하였다.
이에 앞서 지난 7월 4일 남아공 더반에서는 아프리카단결기구의 마지막 각료회의를 개최했다. 76차 아프리카단결기구 각료회의 개막을 선언한 제이콥 주마 남아공 부통령은 정치 파행을 겪고 있는 마다가스카르를 아프리카연합 출범 정상회의에서 배제시킨 것은 아프리카연합이 회원국의 정치위기에 더욱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결의의 반영이라고 지적했다.
인도양의 도서국가 마다가스카르는 지난해 12월 대선 이후 서로 승리를 주장하는 양대 후보 세력이 분쟁을 빚으면서 아프리카연합 참가를 제지당하고 있다.
주마 부통령은 "아프리카의 세기가 시작되는 첫새벽에 아프리카연합이 탄생한 것은 우리 모두가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의 탄생을 향한 범(汎)아프리카적 운동 의 계속성을 나타내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아프리카연합출범
7월 9일 아프리카연합의 출범식에는 아프리카 53개 회원국 중 43개국 대표가 참석했으며 이 연합체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리비아의 가다피 국가평의회 의장, 최근 백인농장 몰수로 영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 등 아프리카 주요국 인사가 대부분 참석했다. 출범 후 1년간 의장으로 활동할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은 출범 연설에서 아프리카 시대가 도래했다(Africa's time has come)고 역설했다. 사무국 성격의 아프리카연합 위원회는 아마라 에시 전 코트디부아르 외무장관이 이끌 예정이다. 온건한 성향의 직업외교관 출신인 에시 위원장은 90년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의장과 94, 95년 유엔총회 의장을 지내 국제사회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지난해 7월 아프리카단결기구(OAU) 사무총장을 맡아 아프리카연합 탄생을 위한 실무작업을 총지휘했다.
아프리카 연합은 유럽 연합(EU)을 모델로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정치, 경제, 사회의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각 국의 대표로 구성한 의회, 재판소, 중앙은행 등의 창설을 근간으로 한다. 기본 구상은 리비아의 최고 지도자 가다피가 1999년 아프리카 단결기구 특별 수뇌 회의에서 제창하고, 경제의 글로벌화에 뒤진 아프리카 대륙의 위기감을 배경으로 2000년 아프리카단결기구 수뇌 회의에서 아프리카연합 창설에 합의하였다.
아프리카 연합은 출범 후 회원국간 협력분위기 조성의 일환으로 양국간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콩고민주공화국(DRC) 죠셉 카빌라 대통령과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의 회담이 이루어졌다. 이 회담에는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참석하였다.
그러나(1)콩고 민주 공화국(구 자이레)등의 지역 분쟁(2)구미에서 대통령 선거에서 반 민주적이라고 지적받았던 짐바브웨 등의 국가 통치의 감시(3)심각화 된 에이즈 문제(4)1인당 GNP가 3000 달러 이상인 남아공과 100달러대의 빈곤국과의 경제 격차나 재원 확보의 문제 등 통합에의 장해도 있고, 구상 자체를 「이상 선행형」이라는 지적도 있다.

아프리카연합의 역할
아프리카 역내 정치적 단합과 사회, 경제적 협력을 목적으로 출범한 아프리카연합은 유럽연합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조직으로는 각국 수반으로 구성되는 아프리카 의회를 비롯해 15개 회원국으로 구성되는 평화안보위원회, 사법재판소 등이 있다. 또한 재정 관련조직으로 아프리카 은행(The African Bank), 아프리카 통화기금(The African Monetary Fund), 그리고 아프리카 투자은행(African Investment Bank) 등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이전 아프리카단결기구가 정치적인 면을 중시하는 반면 이번 아프리카 연합은 향후 정치적인 통합 뿐만 아니라 경제통합을 우선 달성하여 아프리카대륙을 빈곤으로부터 해결하려는 의지가 더욱 큼을 보여주고 있다.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아프리카 여러 나라는 다른 나라들의 민주화, 인권 상황 등을 상호 감시하는 '평화안보위원회'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아프리카의 자조 노력의 이념을 나타내는 포인트로 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단결기구는 1963년 아프리카 국가들의 통일과 단결, 주권의 확립, 식민지주의의 일소 등을 목적으로 발족하였으며 독립하지 못한 국가들에 대해서는 독립을 목표로 한 대륙내의 해방 투쟁을 지원해 왔다. 그러나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취했기 때문에, 냉전 종결 후 민족, 종교 등 잠재적인 대립 요인으로 80, 90년대에 빈발한 국내 분쟁에는 유효하게 대응할 수 없어 아프리카 국가들의 도미노적인 내전을 방지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의견을 결집하는데 한계점을 드러냄으로써 발전적인 해체와 아프리카 연합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아프리카연합에 대한 국제적 시각과 문제점
아프리카연합에 대한 국제적인 시각은 아직은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회원국간의 이해가 서로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며 회원국간의 빈부 격차도 심하여 한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역 연합 블럭으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며 경제적 동맹체로서의 역할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에 대한 부채탕감 압력, 원조 요청 등 공통의 이익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교섭 수단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짐바브웨, 리비아 등 국제사회에서 문제아로 인식되고 있는 회원국에 대해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지도 아직은 미지수로 남아 있다.
유럽연합과 같은 역내 정치 경제적 통합을 지향하며 7월 9일 의욕적으로 출범한 아프리카연합, 그러나 앞날은 험난하기만 하다. 분쟁 종식과 민주화, 빈곤 추방을 기치로 내걸고 있으나 그 어떤 것도 쉽게 해법이 잡히지 않는 난제들이기 때문이다. 취약한 사회기반시설과 막대한 외채부담은 최대의 걸림돌이다.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은 아프리카연합의 순탄한 전진을 위해서는 “강철과 같은 의지와 정력, 그리고 고도의 정치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프리카연합의 성공을 위해서는 아프리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 해소가 가장 큰 과제이다. 르완다, 우간다, 짐바브웨가 콩고 민주공화국 내전에 참여해 다툼을 벌이고 있으며 기니는 라이베리아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 수단과 부룬디, 콩고-브라자빌의 내전도 계속되고 있다.
회원국 간 많게는 10배에 가까운 경제력 격차를 보이고 있는 아프리카연합의 경제 통합도 쉽지 않다. 회원국간 관세장벽과 부실한 교통망, 복잡한 세관 절차 등이 큰 장애다. 대부분 국가에서 통관을 위한 서류작업에만 며칠이 걸리고 세관 관리들에 대한 뇌물도 일반화돼 있다.
회원국 사이에 분규가 발생하거나 아프리카연합의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 있을 경우 이를 중재하거나 제재할 장치도 마련돼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내정 불간섭’ 원칙에 따라 일부 회원국의 독재를 눈감아 준 꼴이 됐던 아프리카단결기구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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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심각한 지뢰문제

2002. 5. 29. 14:55

20년간의 내전이 끝났지만 모잠비크는 아직도 지뢰로 인해 위험에 빠져 있다.  캐나다의 지뢰제거 연구소의 발표 자료에 의하면 모잠비크 전역의 약 70%에서 대략 2백만개의 지뢰들이 매설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제적십자 등의 국제사회단체들은 이 보다 많은 3백만개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잠비크 정부는 과거 전쟁의 끔찍한 기억들을 제거하기 위해 지뢰제거 전문가들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모잠비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뢰제거 전문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지뢰제거자들이다"라고 인도주의 지뢰제거 프로그램의 미국무부 국장인 도널드 파티에르노(Donald F. Patierno)가 말했다.

지난 두 달 동안 모잠비크 지뢰제거 팀들은 스리랑카와 수단에 파견되어 이들 국가들에서 지뢰를 제거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미정부내에 '신속지뢰제거 팀'을 설립하려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나는 전화로 이들 팀 구성원들을 선발하고 조직하여 2개의 팀을 만들어 세계 어느 국가에나 파견할 것이며 이들은 2주간 그곳에서 지뢰를 제거하게 될 것이다.  모잠비크 지뢰제거 팀들이 이를 증명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모잠비크에 '신속지뢰제거 팀'을 두기로 했다"라고 파티에르노 국장은 말했다.

모잠비크 팀은 나이지리아에 파견되었는데 지난 1월 이후 매 반경 4-5킬로미터 구역들에 대해 산재되어 매설되어 있던 지뢰를 발견하여 제거하는 '놀랄 만큼 성과가 증명' 되었다.

파티에르노는 미국이 모잠비크 지뢰제거 전문가 팀을 1996년 초에 이미 보스니아에서 지뢰를 제거하는데 이용하였다고 말했다.  "보스니아에서의 지뢰제거 작업이 그들의 첫 번째 국제 지역에서 지뢰를 제거하는 경험을 하였고 그들은 그들의 실력을 증명하였고 이후 놀랄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아프리카의 많은 다른 국가들은 지뢰와 불발 포탄 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땅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으나 아마도 수천만개의 지뢰나 불발탄 등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유엔에서는 아프리카 23개국에 약 4천만개의 이러한 위험 폭탄물들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숫자는 미국무부가 추정하고 있는 세계 70개 국가들에 약 6천만 내지 7천만의 지뢰 중 절반 이상이 아프리카 국가들에 있다는 것이다.

앙골라는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지뢰문제가 잠재되어 있는 국가이다.  유엔은 앙골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8개 지방에 1천만개에서 1천5백만개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금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국 정부의 경우 약 20만개에서 6백만개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앙골라는 세계에서 가장 지뢰로 인한 피해를 많이 본 국가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파티에르노 국장은 밝히고 있다.  이는 지뢰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 때문이 아니라 이에 파생된 효과 때문이다.  즉 앙골라에서는 한 달에 기아나 영양실조로 인해 2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는데 이는 곡식을 심을 들판에 지뢰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모잠비크의 성공적인 지뢰제거 이야기는 다른 국가들에게는 메아리로 들리고 있다.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성공이 있었다.  르완다도 그 중의 한 곳이다. "르완다는 아마 내가 본 어떤 나라들 보다 가장 지뢰제거에 적극적이었고 비록 국제 사회의 원조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년에는 르완다에서 '지뢰 안전지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라고 파티에르노는 설명하였다.

지뢰로부터의 안전'은 아주 중요한 목표이다. 거의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지뢰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독일도 지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프랑스는 1948년에 125개의 지뢰제거 전문회사들이 설립되었으며 이들 전문회사들은 프랑스 전역을 누비며 1차, 2차 세계대전 때 폭발되지 않았던 지뢰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이 일들은 결코 끝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 구가들은 상당히 안전해지고 있다.  나미비아는 아직 완전히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지뢰로부터 안전지대'라고 선언하였다.  나미비아의 북서부지역 일부는 여전히 앙골라인들에 의해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만약 그 지역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지 않다면 나미비아는 지뢰로부터 안전한 국가로 분류될 것이다"라고 파티에르노가 말했다.

미국은 비록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지뢰제거 운용을 위한 지원을 제공하고 있지만 140개국이 가입하여 지뢰생산과 이용을 금지하는 오타와 협약(Ottawa Treaty)에는 아직 가입하지 않고 있다. 미 국방성은 클린턴 행정부시설 2006년까지 이 협약에 가입한다는 미국정책의 취소를 권하고 있다.

"미국은 아직 대인지뢰를 1991년 걸프전쟁이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1992년 이후에는 그것들을 한번도 폭발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1997년 이후에는 일체의 생산도 하지 않고 있다"라고 국제 지뢰금지 캠페인의 조디 윌스(Jody Wills)가 미국의 오타와 협약가입을 주장하며 말했다. 미국은 다른 국가들의 지뢰제거를 위해 많은 기금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오타와 협약에 가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인지뢰 금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조치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왜 미국은 그 협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을까라는 질문에 파티에르노 국장은 미국은 지뢰를 사용할 의도가 전혀 없으며 단지 보유만 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사용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1992년 이후 지뢰 판매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뢰를 사람을 대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닌 전차나 차량 폭발을 목적으로 이용할 것이다"라고 파티에르노 국장은 변명하고 있다.
(allafrica.com 5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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