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식민지 경영
1884-85년 유럽열강들은 베를린에 모여 식민지 분할을 본격화 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이디오피아와 리비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유럽의 식민지하에 놓였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은 아프리카에서 그들의 식민지 지배를 보다 강화하였다. 이들 제국주의 정책은 라이벌 국가들의 힘의 우위를 두려워 했기 때문에 식민지 경쟁은 더욱 가열되었고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은 아프리카 분할을 재편하게 만들었다. 즉 1차대전의 결과 아프리카 4개국의 식민지를 운영하였던 독일 영토는 영국, 프랑스, 남아공의 식민지 경영관리로 이관되었다.
영국
북아프리카에서 영국은 이집트인들이 그들 국내업무를 경영하는 것은 허용하였으며 수에즈운하의 통제권과 군사권 그리고 외교문제의 통제권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집트인들의 실질적인 개혁들은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정치불안을 야기시킬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영국 사이의 수단지배에 대한 의견차이에 대한 긴장감도 나타났다. 이집트는 오래전부터 수단을 통치했었다. 영국은 자국 식민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침입을 막기위해 19세기부터 수단으로의 확장을 시도했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남부지역에서 영국은 네들란드 후손인 보어(Boer)인들과의 전쟁을 수행했는데 1902년까지 지속되었다. 보어전쟁이라 불리는 앵글로-보어전쟁의 승리로 아프리카 남부는 영국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남부아프리카의 남아공은 아프리카너(영국계를 제외한 남아공 백인들)들로 주축이된 국민당(NP)이 1948년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국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20세기가 시작된지 10여년 동안 케냐에서는 영국이 그들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였다. 케냐의 부족들은 영국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함으로써 평화를 확보하였다. 이후 영국인들의 정착이 뒤따랐다. 그러나 영국으 우간다로의 이동은 영국민들의 실망을 샀고 그곳의 토지는 흑인들에게 주어졌다.
서부아프리카에서는 대서양 연안을 따라 영국이 감비아(Gambia), 황금해안(현 가나 Ghana), 나이지리아(Nigeria), 시에라리온(Sierra Leone)을 지배하였다. 여기서도 동부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인들은 영국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하였고 영국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아프리카인들의 식민통치에 있어 영국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질서, 순종 그리고 자유를 주는 사람으로 인식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경제적으로 영국이 해결해 주지 못했다. 20세기가 시작한지 10년이 흐르는 동안 식민지역으로부터의 이익들은 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세력을 유지하는 것을 커버하지 못했다.
프랑스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을 따라 식민지를 확보했다 : 가봉, 기니, 코트디부아르 그리고 세네갈 등이 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인들에게 대하는데 있어 영국보다 덜 인종주의적이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인들을 프랑스 시민으로 인정했으며 그들을 프랑스 문화권으로 동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들의 아프리카 식민 백성들에게 인류애적인 접근으로 다른 것은 아니었다.
아프리카인들은 프랑스에 과다한 세금을 바쳐야 했으며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아프리카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그리고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또한 식민지로부터 벌어들인 수입을 식민지의 경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본국의 프랑스인들을 위해 소비하였다.
독일
이 시기에 독일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독일은 아프리카에 식민지 건설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는 토고, 카메룬, 남서아프리카(현 나미비아) 그리고 탄자니아 등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1차대전 이후 그들의 식민지 모두를 잃었다.
포르투갈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의 식민지 제국 건설은 서구 열강 중 가장 일찍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의 식민지는 적도기니, 앙골라, 모잠비크와 대서양 도서 국가인 상톰메 프린시페와 케이프 베르데 등이 있다.
비록 19세기 노예제도가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없어지지만 노예의 형태는 계약노동 형태로 계속 존재하였다. 포르투갈 자체가 빈곤하고 주로 농업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포르투갈 아프리카식민지들도 아프리카대륙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들에 속한다. 그리고 포르투갈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도 가장 늦게 달성하였다.
벨기에
벨기에는 벨기에 콩고라 불라는 현 콩고민주공화국을 지배하였다. '유니온 마니에레'(Union Miniere)라는 벨기에 회사는 벨기에 콩고에서 광산업을 주로 하였으며 다른 회사들은 이곳에서 고무와 상아 무역을 하였다. 프랑스 식민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벨기에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벨기에의 통치는 영국이 1903년 벨기에의 레오폴드(Leopold) 왕에게 불만을 했을 만큼 아프리카인들을 가장 심하게 착취한 국가였다. 레오폴트 왕은 영국의 불만에 대해 식민지 경영에 대한 간섭이라고 무시하였다.
비록 아프리카대륙의 토착민들이 유럽의 식민지 점령을 거부하였지만 서구 열강들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하기 시작한 1960년대까지 거의 60년간을 점령하였다.
1884-85년 유럽열강들은 베를린에 모여 식민지 분할을 본격화 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이디오피아와 리비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유럽의 식민지하에 놓였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은 아프리카에서 그들의 식민지 지배를 보다 강화하였다. 이들 제국주의 정책은 라이벌 국가들의 힘의 우위를 두려워 했기 때문에 식민지 경쟁은 더욱 가열되었고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은 아프리카 분할을 재편하게 만들었다. 즉 1차대전의 결과 아프리카 4개국의 식민지를 운영하였던 독일 영토는 영국, 프랑스, 남아공의 식민지 경영관리로 이관되었다.
영국
북아프리카에서 영국은 이집트인들이 그들 국내업무를 경영하는 것은 허용하였으며 수에즈운하의 통제권과 군사권 그리고 외교문제의 통제권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집트인들의 실질적인 개혁들은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정치불안을 야기시킬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영국 사이의 수단지배에 대한 의견차이에 대한 긴장감도 나타났다. 이집트는 오래전부터 수단을 통치했었다. 영국은 자국 식민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침입을 막기위해 19세기부터 수단으로의 확장을 시도했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남부지역에서 영국은 네들란드 후손인 보어(Boer)인들과의 전쟁을 수행했는데 1902년까지 지속되었다. 보어전쟁이라 불리는 앵글로-보어전쟁의 승리로 아프리카 남부는 영국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남부아프리카의 남아공은 아프리카너(영국계를 제외한 남아공 백인들)들로 주축이된 국민당(NP)이 1948년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국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20세기가 시작된지 10여년 동안 케냐에서는 영국이 그들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였다. 케냐의 부족들은 영국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함으로써 평화를 확보하였다. 이후 영국인들의 정착이 뒤따랐다. 그러나 영국으 우간다로의 이동은 영국민들의 실망을 샀고 그곳의 토지는 흑인들에게 주어졌다.
서부아프리카에서는 대서양 연안을 따라 영국이 감비아(Gambia), 황금해안(현 가나 Ghana), 나이지리아(Nigeria), 시에라리온(Sierra Leone)을 지배하였다. 여기서도 동부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인들은 영국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하였고 영국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아프리카인들의 식민통치에 있어 영국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질서, 순종 그리고 자유를 주는 사람으로 인식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경제적으로 영국이 해결해 주지 못했다. 20세기가 시작한지 10년이 흐르는 동안 식민지역으로부터의 이익들은 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세력을 유지하는 것을 커버하지 못했다.
프랑스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을 따라 식민지를 확보했다 : 가봉, 기니, 코트디부아르 그리고 세네갈 등이 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인들에게 대하는데 있어 영국보다 덜 인종주의적이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인들을 프랑스 시민으로 인정했으며 그들을 프랑스 문화권으로 동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들의 아프리카 식민 백성들에게 인류애적인 접근으로 다른 것은 아니었다.
아프리카인들은 프랑스에 과다한 세금을 바쳐야 했으며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아프리카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그리고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또한 식민지로부터 벌어들인 수입을 식민지의 경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본국의 프랑스인들을 위해 소비하였다.
독일
이 시기에 독일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독일은 아프리카에 식민지 건설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는 토고, 카메룬, 남서아프리카(현 나미비아) 그리고 탄자니아 등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1차대전 이후 그들의 식민지 모두를 잃었다.
포르투갈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의 식민지 제국 건설은 서구 열강 중 가장 일찍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의 식민지는 적도기니, 앙골라, 모잠비크와 대서양 도서 국가인 상톰메 프린시페와 케이프 베르데 등이 있다.
비록 19세기 노예제도가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없어지지만 노예의 형태는 계약노동 형태로 계속 존재하였다. 포르투갈 자체가 빈곤하고 주로 농업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포르투갈 아프리카식민지들도 아프리카대륙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들에 속한다. 그리고 포르투갈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도 가장 늦게 달성하였다.
벨기에
벨기에는 벨기에 콩고라 불라는 현 콩고민주공화국을 지배하였다. '유니온 마니에레'(Union Miniere)라는 벨기에 회사는 벨기에 콩고에서 광산업을 주로 하였으며 다른 회사들은 이곳에서 고무와 상아 무역을 하였다. 프랑스 식민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벨기에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벨기에의 통치는 영국이 1903년 벨기에의 레오폴드(Leopold) 왕에게 불만을 했을 만큼 아프리카인들을 가장 심하게 착취한 국가였다. 레오폴트 왕은 영국의 불만에 대해 식민지 경영에 대한 간섭이라고 무시하였다.
비록 아프리카대륙의 토착민들이 유럽의 식민지 점령을 거부하였지만 서구 열강들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하기 시작한 1960년대까지 거의 60년간을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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