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에서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던, 역사적 총선이 실시되었던 지난 12월 27일(금요일)은 무아이 키바키(Mwai Kibaki)는 대통령 궁으로 향하는 그의 역사적 첫 걸음을 걷는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에게 있어서 대통령으로 향한 공식적인 출발은 1991년 크리스마스 날 그가 몸담았던 케냐 아프리카 민족연합(KANU)당을 뛰쳐나와 몸바사의 항구도시에서 민주당을 만듦으로써 시작되었다.
키바키는 KANU와 모이 대통령에 대한 전통적 충성으로 뭉쳐있는 일당제를 깨는 것이 주요 첫 번째 일이었다. 점잖고 도회적인 풍채를 지닌 키바키로서는 굳건한 야당의 면모를 보이는 것이 우선시 되었다. 그러나 키바키를 위한 어려운 시작은 이미 KANU당과 반대의 길을 걷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키바키와 함께 한 민주당에는 강직한 정치인인 은젠가 카루메(Njenga Karume), 엘리우드 무와문가(Eliud Mwamunga), 아그네스 은데테이(Agnes Ndetei), 차리티 은길루(Charity Ngilu), 마르타 카루아(Martha Karua) 그리고 키바키의 정치 지역구인 니에리(Nyeri) 구역 출신들의 정치인들이 함께 하였다.
야당으로서의 민주당은 여당의 온갖 야당 분열 획책과 야당들의 분열은 순항을 이룰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키바키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1992년 11월 3일 나이로비에서 개최한 그의 첫 번째 민주당 집회가 대규모 군중을 모음으로써 그가 자신감을 얻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주로 중산층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서민들과 도시 상인들 그리고 니에리 구역 외부의 키쿠유족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키바키는 1992년 열정적인 대통령 선거를 벌였다.
그러나 1992년 선거에서 키바키는 1백30만표를 얻어 대선에서 3위를 차지하는 만족해야 했다. 모이 대통령이 1백90만표를 얻어 대통령에 다시 취임하였다. 2위는 1백30만표를 얻은 케네쓰 마티바(Kenneth Matiba)였고 4위는 90만표를 얻은 자라모기(Jaramogi) 였다.
1997년 대선이 시작되자 키바키는 사회 민주당의 은길루가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주었기 때문에 모이 대통령의 강력한 도전자로 떠올랐다.
1997년 선거는 키바키에게는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열렸다. 1992년에는 중부 주와 나이로비에서 야당인 마티바와 싸워야 했던 반면에 1997년에는 전통 야당지역에서 단독 후보로 나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키바키의 장애물은 야당인 라일라 오딘가(Raila Odinga)와 니안자(Nyanza) 주에서 승리를 위해 겨루어야 하고, 서부 주에서는 와말와 키자나(Wamalwa Kijana)와 그리고 동부 주에서는 은길루(Ngilu)와 겨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여당의 모이는 야당들이 분열되어 있는 틈 속에 순조롭게 항진할 수 있었는데 특히 전통적으로 여당의 강세인 리프트 밸리(Rift Valley) 주와 전국에 고루 걸친 지지세력을 얻을 수 있었다.
선거가 끝마쳤을 때 모이는 2백4만표를 얻어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키바키는 1백80만표를 얻었지만 고배를 마셨다. 이번에도 야당의 분열이 모이의 대통령 연임을 허용한 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키바키 진영은 이번 선거에서 수많은 부정 수단으로 선거를 조작하였다고 항의하였다. 키바키는 법정에 부정선거에 대한 청원도 하지 못했다. 이미 법정은 모이대통령의 법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키바키는 다시 사업가로 다시 돌아왔고 2002년 선거를 와신상담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선거에서는 그가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야당 단일화를 이루어 냈다. 무의 부식간에 역사는 KANU 당이 야당 연합의 힘에 무너지는 것을 기록하게 되었다.
한때 라일라 오딘가는 그의 당을 KANU와 합당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으며 정치분석가들과 합당에 대한 비평들이 회의적으로 나왔다. 사실 KANU도 라일라 오딘가의 당과 합병하는 것을 원했으나 결국 그와 같은 움직임은 물거품이 되고 야당연합이 결실을 맺었다.
방송매체와 분석가들은 2002년 2월 야당 단일화를 위해 나이로비 세레나(Serena)에서 키바키, 키자나 와말와 그리고 차리티 은길루 세 사람이 처음으로 조찬 모임을 가진 것에 대해 그대지 중요스럽게 취급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3월 18일 KANU와 오딘가의 NDP가 전격적으로 합당한다는 뉴스가 터져 나왔다. 정치적 성향으로 봐서 그와 같은 일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며 카사라니(Kasarani) 체육관에서 열린 합병식을 정점으로 KANU 당내에서 이 합병에 대한 대규모 반발의 싹이 트기 시작했고 야당들은 단결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KANU가 합당으로 보다 규모가 크지자 키바키, 은길루 그리고 와말와는 진지한 모임을 가졌고 그들과 연합하고자 하는 다른 소규모 정당들과도 접촉하였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변화를 위한 민족 동맹'(National Alliance for Change : NAC)을 결성하였다.
그들의 첫 번째 진지한 모임은 28명의 국회의원들과 함께 나쿠루(Nakuru) 호수의 라이온 힐 롯찌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야당 연합의 대통령 후보를 정하기로 하고 키바키와 와말와 두 사람으로 의견이 갈렸다.
반면, 여당인 KANU는 대통령 후보로 초대 케냐 대통령인 조모 케냐타의 아들인 우후루 케냐타(Uhuru Kenytta)를 지명하였다.
'변화를 위한 민족동맹'은 당 이름을 '케냐 민족동맹'(National Alliance Party of Kenya : NAK)로 변경하였다. 9월 18일 선거를 위한 준비를 하고 대통령 후보로 키바키를, 부통령 후보로 와말와 그리고 수상 후보로 은길루를 확정하였다.
그것으로 KANU당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KANU 당의 핵심 당원들인 사무총장 라일라 오딘가(Raila Odinga), 부총재 칼론조 무시오카(Kalonzo Musyoka), 카타나 은알라(Katana Ngala) 그리고 무살리아 무다바디(Musalia Mudavadi)가 NAK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모이의 측근이었던 일부 인사들도 합류하였다.
또한 KANU와 연합하려던 '무지개 동맹'(Rainbow Alliance)이 KANU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대통령 후보를 요구하며 연정을 거부하였고 10월 14일 '무지개 동맹'은 우후루 공원에서 NAK와 연합하였다. 그와 동시에 '무지개 동맹'의 일원으로 그동안 내각에 참여했던 장관들도 사임하였다.
우후루 공원에서의 집회는 나이로비 집회 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중들이 운집했으며 거대 연합을 이루는 가장 큰 조치였다. 카사라니(Kasarani)에서 열린 여당 KANU의 대통령 후보지명에서 우후루 케냐타가 임명되었다.
우후루 공원의 집회에서 무지개 동맹의 라일라는 연설을 통해 "카비카 만이 이끌 수 있다"(Hata Kibaki anatosha)라고 소리쳤다.
일주일 후 그 연합은 '민족동맹무지개 연합'(National Alliance Rainbow Coalition : Narc)을 만들었고 힐튼호텔에서 대통령 후보로 키바키를 지명하였다.
11월 18일 키바키는 선관위에 공식적인 대통령 후보로 등록하였고 전투는 시작되었다. 그 전투는 12월 27일 선거를 통해 키바키의 승리로 끝을 냈고 드디어 케냐에서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에게 있어서 대통령으로 향한 공식적인 출발은 1991년 크리스마스 날 그가 몸담았던 케냐 아프리카 민족연합(KANU)당을 뛰쳐나와 몸바사의 항구도시에서 민주당을 만듦으로써 시작되었다.
키바키는 KANU와 모이 대통령에 대한 전통적 충성으로 뭉쳐있는 일당제를 깨는 것이 주요 첫 번째 일이었다. 점잖고 도회적인 풍채를 지닌 키바키로서는 굳건한 야당의 면모를 보이는 것이 우선시 되었다. 그러나 키바키를 위한 어려운 시작은 이미 KANU당과 반대의 길을 걷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키바키와 함께 한 민주당에는 강직한 정치인인 은젠가 카루메(Njenga Karume), 엘리우드 무와문가(Eliud Mwamunga), 아그네스 은데테이(Agnes Ndetei), 차리티 은길루(Charity Ngilu), 마르타 카루아(Martha Karua) 그리고 키바키의 정치 지역구인 니에리(Nyeri) 구역 출신들의 정치인들이 함께 하였다.
야당으로서의 민주당은 여당의 온갖 야당 분열 획책과 야당들의 분열은 순항을 이룰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키바키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1992년 11월 3일 나이로비에서 개최한 그의 첫 번째 민주당 집회가 대규모 군중을 모음으로써 그가 자신감을 얻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주로 중산층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서민들과 도시 상인들 그리고 니에리 구역 외부의 키쿠유족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키바키는 1992년 열정적인 대통령 선거를 벌였다.
그러나 1992년 선거에서 키바키는 1백30만표를 얻어 대선에서 3위를 차지하는 만족해야 했다. 모이 대통령이 1백90만표를 얻어 대통령에 다시 취임하였다. 2위는 1백30만표를 얻은 케네쓰 마티바(Kenneth Matiba)였고 4위는 90만표를 얻은 자라모기(Jaramogi) 였다.
1997년 대선이 시작되자 키바키는 사회 민주당의 은길루가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주었기 때문에 모이 대통령의 강력한 도전자로 떠올랐다.
1997년 선거는 키바키에게는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열렸다. 1992년에는 중부 주와 나이로비에서 야당인 마티바와 싸워야 했던 반면에 1997년에는 전통 야당지역에서 단독 후보로 나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키바키의 장애물은 야당인 라일라 오딘가(Raila Odinga)와 니안자(Nyanza) 주에서 승리를 위해 겨루어야 하고, 서부 주에서는 와말와 키자나(Wamalwa Kijana)와 그리고 동부 주에서는 은길루(Ngilu)와 겨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여당의 모이는 야당들이 분열되어 있는 틈 속에 순조롭게 항진할 수 있었는데 특히 전통적으로 여당의 강세인 리프트 밸리(Rift Valley) 주와 전국에 고루 걸친 지지세력을 얻을 수 있었다.
선거가 끝마쳤을 때 모이는 2백4만표를 얻어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키바키는 1백80만표를 얻었지만 고배를 마셨다. 이번에도 야당의 분열이 모이의 대통령 연임을 허용한 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키바키 진영은 이번 선거에서 수많은 부정 수단으로 선거를 조작하였다고 항의하였다. 키바키는 법정에 부정선거에 대한 청원도 하지 못했다. 이미 법정은 모이대통령의 법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키바키는 다시 사업가로 다시 돌아왔고 2002년 선거를 와신상담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선거에서는 그가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야당 단일화를 이루어 냈다. 무의 부식간에 역사는 KANU 당이 야당 연합의 힘에 무너지는 것을 기록하게 되었다.
한때 라일라 오딘가는 그의 당을 KANU와 합당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으며 정치분석가들과 합당에 대한 비평들이 회의적으로 나왔다. 사실 KANU도 라일라 오딘가의 당과 합병하는 것을 원했으나 결국 그와 같은 움직임은 물거품이 되고 야당연합이 결실을 맺었다.
방송매체와 분석가들은 2002년 2월 야당 단일화를 위해 나이로비 세레나(Serena)에서 키바키, 키자나 와말와 그리고 차리티 은길루 세 사람이 처음으로 조찬 모임을 가진 것에 대해 그대지 중요스럽게 취급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3월 18일 KANU와 오딘가의 NDP가 전격적으로 합당한다는 뉴스가 터져 나왔다. 정치적 성향으로 봐서 그와 같은 일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며 카사라니(Kasarani) 체육관에서 열린 합병식을 정점으로 KANU 당내에서 이 합병에 대한 대규모 반발의 싹이 트기 시작했고 야당들은 단결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KANU가 합당으로 보다 규모가 크지자 키바키, 은길루 그리고 와말와는 진지한 모임을 가졌고 그들과 연합하고자 하는 다른 소규모 정당들과도 접촉하였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변화를 위한 민족 동맹'(National Alliance for Change : NAC)을 결성하였다.
그들의 첫 번째 진지한 모임은 28명의 국회의원들과 함께 나쿠루(Nakuru) 호수의 라이온 힐 롯찌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야당 연합의 대통령 후보를 정하기로 하고 키바키와 와말와 두 사람으로 의견이 갈렸다.
반면, 여당인 KANU는 대통령 후보로 초대 케냐 대통령인 조모 케냐타의 아들인 우후루 케냐타(Uhuru Kenytta)를 지명하였다.
'변화를 위한 민족동맹'은 당 이름을 '케냐 민족동맹'(National Alliance Party of Kenya : NAK)로 변경하였다. 9월 18일 선거를 위한 준비를 하고 대통령 후보로 키바키를, 부통령 후보로 와말와 그리고 수상 후보로 은길루를 확정하였다.
그것으로 KANU당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KANU 당의 핵심 당원들인 사무총장 라일라 오딘가(Raila Odinga), 부총재 칼론조 무시오카(Kalonzo Musyoka), 카타나 은알라(Katana Ngala) 그리고 무살리아 무다바디(Musalia Mudavadi)가 NAK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모이의 측근이었던 일부 인사들도 합류하였다.
또한 KANU와 연합하려던 '무지개 동맹'(Rainbow Alliance)이 KANU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대통령 후보를 요구하며 연정을 거부하였고 10월 14일 '무지개 동맹'은 우후루 공원에서 NAK와 연합하였다. 그와 동시에 '무지개 동맹'의 일원으로 그동안 내각에 참여했던 장관들도 사임하였다.
우후루 공원에서의 집회는 나이로비 집회 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중들이 운집했으며 거대 연합을 이루는 가장 큰 조치였다. 카사라니(Kasarani)에서 열린 여당 KANU의 대통령 후보지명에서 우후루 케냐타가 임명되었다.
우후루 공원의 집회에서 무지개 동맹의 라일라는 연설을 통해 "카비카 만이 이끌 수 있다"(Hata Kibaki anatosha)라고 소리쳤다.
일주일 후 그 연합은 '민족동맹무지개 연합'(National Alliance Rainbow Coalition : Narc)을 만들었고 힐튼호텔에서 대통령 후보로 키바키를 지명하였다.
11월 18일 키바키는 선관위에 공식적인 대통령 후보로 등록하였고 전투는 시작되었다. 그 전투는 12월 27일 선거를 통해 키바키의 승리로 끝을 냈고 드디어 케냐에서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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